[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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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1203 2014-11-03
639 하얀 욕망/고창근 file
편집자
1319 2018-04-01
하얀 욕망 그가 처음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막 잠을 청할 때였다. 김장을 담근다고 며칠 동안 부산을 떨던 아내는 이미 얕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을 때가 막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할 때였다. 직장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고 가정에서도 초등학생인 두 딸은 무탈하게 잘 크고 있었다. 아내 또한 자신과 아이들의 뒷바라지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에 하루를 바쁘게 보낸 후의 잠자리는 평온 그 자체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잠이 들지 않고 자꾸 뒤척였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머리속은 엉킨 실타래가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는 아마도 퇴근하다 본 성폭행현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좀 일찍 집을 나가 경찰서에 가서 퇴근 무렵 본 성폭행범에 대해 얘기할 작정이었다. 파란색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성폭행범의 뒷모습이 눈에 또렷했다. 그는 그 상황을 잊어버리고 잠을 청하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아내의 얼굴이 정면으로 향했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콧김이 얼굴을 간지렵혔다. 그는 이불속에서 손을 꺼내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아내가 깰까 싶어 도로 집어넣었다. 아내가 무척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니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이해했다. 며칠 동안 김장한다고 본가에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장은 본가에서 누나 집이랑 남동생 집까지 네 집의 김장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도 많았다. 끝나고 나면 아내는 꼭 몸살을 앓았고 그는 매번 아내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와인에 좋아하는 것을 사 주었다. 아내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몸살이 확 달아난다고 환하게 웃곤 했다. 또한 어머니가 고생했다고 준 돈으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그나 딸들의 옷을 샀다. 그러지 말고 당신 옷 사 입으라고 지청구를 넣으면 입고 싶은 옷이 없다며 해맑게 웃곤 했다. 이틀 후에 그는 아내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야겠다고 다시 눈을 감자 또다시 성폭행 상황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가 그 성폭행 현장을 본 것은 부장이 주재한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부서원들을 깊은 이해심으로 잘 이끌어 신뢰를 받는 부장이었다. 그 또한 차장으로서 부장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었다. 한우고기에 소맥을 마셨는데 부서원 모두 좋은 기분으로 양껏 먹었다. 누군가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걸 그는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는 노래방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오기 위해선 공원을 거쳐야 했는데 그는 아파트로 들어오기 전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느긋하게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가격이 올라간 후 언제 끊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 끊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났는데 또다시 강한 흡연 욕구가 끓어올랐고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 점은 회식 자리에서도 있었다. 한창 주위 부서원들과 한우고기에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들어올리는 느낌이랄까. 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들 옆 사람과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그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담배를 반 쯤 피웠을까. 갑자기 공원 구석에 자리한 소나무 숲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 싶으면서 그는 그냥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고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왔다. 순간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번쩍 들어올리는 느낌도 회식자리에서와 같았다. 그는 요즘 무리해서 몸이 허약한 탓이라며 아내에게 말해 보약이라도 한 질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뱃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또다시 소나무 숲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그머니 소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소나무 숲에 가까이 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여자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악다구니를 쓰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에 그는 머리카락이 곧추 서는 것 같았다. 성폭행.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었다. 순간 무서웠다. 그냥 되돌아가려다 다시 소리가 나는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파란색 파카를 입은 사내의 탱탱한 엉덩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릎쯤에 청바지가 걸려 있었다. 사내의 밑에는 치마가 올라가고 허연 허벅지가 드러난 여자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그는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몸이 눈에 보였다. 뒤돌아가서 사내를 후려치고 여자를 구해! 가슴속에서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이 사는 아파트 706동 앞에 있었다. 이런. 그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못난 놈이라니. 그는 스스로 자책하며 지금이라도 달려가 여자를 구하고 사내를 흠뻑 두들겨패고 경찰서로 데리고 가야 하나. 아님 경찰서부터 신고해야 하나. 그는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에 아파트 앞 화단에 주저 앉았다. 그는 평소에도 성매매하거나 바람 피우는 남자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어릴 때부터 장학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유난히 도덕과 윤리의식이 강했다. 초등학교 때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또한 문방구에서 슬쩍 물건을 훔치는 아이들도 용서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고 평생 그렇게 살리라 마음 먹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화단에 앉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거푸 두 대를 피운 후에야 그는 명확한 생각이 들었다. 가서 남자를 두들겨패고 여자를 구하자. 그는 굳게 결심을 하고 담배불을 꺼서 휴지통에 넣고 일어섰다. 한번 마음먹으니 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어? 그는 소나무 숲에 다다라 소리가 났던 곳으로 달려갔을 때 성폭행범 사내와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도망쳤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뭇잎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풀잎이 옆으로 쓰러져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피곤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지금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서까지 가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두세 시간은 걸린다. 12시가 넘었는데. 그는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을 넣고 아파트로 걷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 그는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아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아내 또한 겁에 질릴 것이고 신고하라고 할 것이었다. 내일 아침 좀 일찍 나가서 신고하고 회사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 아내에게 말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밤새 비몽사몽으로 지냈는데 꿈에서 어떤 사내와 싸웠다. 어딘지 왜 싸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모르는 사내였고 무슨 일인지 그는 사내에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엔 주먹질을 하며 서로 엉겨붙여 뒹굴었는데 나중엔 그가 일방적으로 사내를 때렸다. 왼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수없이 강타했다. 사내는 고스란히 맞고만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내였기에 그는 아침에 깨어나서는 어이가 없어했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와 싸운 적이 없었고 하물며 심하게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근데 주먹질까지. 그것도 일방적으로 때리다니. 그는 식은 땀을 흘러 축축한 몸으로 침대위에서 뒤척였다. 몸에서 진이 모두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일어날 힘조차 없어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밤새 누군가 싸우다니. 그것도 일방적으로 때리는 꿈이라니. 하지만 또 하나 게름칙한 게 있었다. 사내는 파란색 파카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에 익은 옷이라 생각했는데 그 옷은 퇴근하다 본 성폭행범의 옷과 비슷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평소에 산에 갈 때나 산책할 때 잘 입는 옷과 비슷했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머. 아직 안 일어나고 뭐해요?” 아내는 몇 번이나 밖에서 불렀다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마, 땀 좀 봐. 당신 몸이 안 좋아요?” 그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아내는 놀라서 그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아냐. 악몽을 꾸어서.” 그는 얼버무렸고 아내는 또다시 어디 몸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오늘 회사 가지 말고 쉬는 게 어떄요?” 아내의 말에 그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결근이나 병가를 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개근상을 놓치지 않았다. “가야지.” 그는 끙,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잠깐 현기증이 일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온 거에요?” 아내는 그가 씻으러 방을 나가자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글쎄. 좀 늦은 거 같은데.” 그는 만사가 귀찮아 대충 얼버무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혹 무슨 소식 못 들었어요? 어젯밤에 아파트 공원 소나무숲에서 누가 성폭행을 당했다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문이 닫히기 전에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그는 또다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런. 그는 바늘로 쿡쿡 쑤셔대는 듯한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옷과 흡사한 파란색 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사내의 엉덩이 깐 뒷모습이 휙, 눈 앞을 지나갔다. 그는 분노와 현기증이 일어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아침을 먹지 못하고 출근을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도 몸이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았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잠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그때 그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회사 정문에는 경찰 둘이 한 사내를 수갑 채워 양쪽에서 팔을 잡고 연행하고 있었는데 수갑 찬 사내를 보고는 주저앉을 뻔했다.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떠도 분명 수갑을 찬 사내는 자기 자신이었다. 감색 양복에 푸른색 와이셔츠. 불그스름한 넥타이. 모든 게 똑같았다. 이럴수가.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경찰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부장을 비롯한 부서원들과 시민들이 둘러싸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뛰어가려는데 수갑 찬 그가 차에 오르기 전 잠깐 그를 돌아보았고 그는 순간 얼른 외면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회사로 가지 못하고 경찰차가 떠난 뒤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겨우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어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혀 스마트폰을 겨우 집어들었다. 하지만 전화를 하려고 스마트폰을 보았을 때 액정화면은 마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가느다란 선들이 뻗어 있었다. 그는 액정화면이 깨진 것에는 개의치 않고 제발 전화를 할 수 있도록 고장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다행히 액정화면에 불은 들어왔으나 홈화면으로 있던 아내와 딸의 사진이 일그러지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개의치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선 통화목록을 누르고 부서원 이름을 찾았다. 한참 밑에 박대리의 이름이 보였다. 그는 얼른 오른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또다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몇 번이나 시도한 후에 겨우 박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차장님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은 박대리는 다짜고자 물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무, 무슨 이, 일이냐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경찰서 아닙니까?” “아, 아니 그, 그게. 그, 그러니까.”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더듬거렸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우차장이야? 바꿔봐, 하는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박대리 주위로 직원들이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우차장,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설마 자네가 그런 건 아니겠지?” 부장은 반신반의하는 말투로 물었다. “도, 도대체 무, 무슨 말인지 모, 모르겠…….” 그는 말하다 또다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뒹군 스마트폰에서 이봐, 우차장, 우차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힘겹게 허리를 굽혀 스마트폰을 들어 귀로 가져갔다. “그, 그러니까. 무,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하냐. 그러니까 자네가 어제 성폭행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확실하지?” 부장은 추궁하는 심문관처럼 물었다. “예? 성, 성폭행……이요?” 그는 어이가 없었다. 성폭행이라니. 내가? 그는 크게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그렇지? 맞지? 자네가 그럴리 있나? 분명 오해일 거야.” 부장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다. “절,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맞아. 자네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자네만큼 법을 잘 지키고 반듯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여튼 빨리 끝내고 회사로 와.” 부장의 말에 그러면 그렇지, 차장님이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직원들의 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아, 알았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다행히 부장과 부서원들이 자신을 믿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며 앞에 있는 상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좁은 골목안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다급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갔다. 연거푸 연기를 내뿜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곤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담배 또한 얼마가지 않아 금방 필터까지 타 들어갔다. 목이 칼칼했다. 솜이 목구멍에 꽉 찬 것 같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담배를 꺼내던 그는 순간 아내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어떤 불기둥이 머리 꼭대기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골목으로 들어서던 행인이 멈칫 하더니 도로 돌아갔다. “당신이야?” 아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연락이 갔구나.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아내가 다급히 말했다. “당신, 맞지? 어찌 된 일이야? 아까처럼 끊지 말고 자세히 말해봐. 당신이…… 설마 아니지? 응? 말 좀 해봐.” 아내는 애원했다. “여보. 내 말 잘 들어. 이거 뭔가 음모에 빠진 거 같아.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그는 아내에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모? 무슨 음모라는 거야? 아침에 당신이 출근하고 곧장 경찰이 닥쳤어. 당신 서재에 있던 컴퓨터랑 서랍에 든 노트 같은 것도 다 가져갔어. 어젯밤에 일어난 성폭행 용의자라나.”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뭐라고? 컴퓨터를?” 그는 기겁을 했다. 컴퓨터엔 여성의 누드 사진이 많았다. 취미로 사진을 찍기에 수시로 누드사진을 수집해 저장해 놓았는데 그걸 경찰이 가져갔다면 이상한 쪽으로 사태가 흘러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당신이 한 거 아니지? 응?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 얼마나 자상하고…… 나한테나 딸한테도. 근데 경찰이 당신이 그랬다고 물증이 나왔다고 그러는데 난 도저히 못 믿겠어. 참, 당신 자주 입던 옷 있지 파란색 점퍼랑 청바지도 가져갔어. 시시티비에 찍힌 거랑 같다면서.” “음.” 그는 할 말을 잊고 신음소리를 냈다. “당신 경찰서지? 내 곧 갈게.” 아내는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아냐. 오지 마. 경찰서 아냐.” “아니라고? 다 봤는데. 텔레비에도 나왔어. 경찰서에 있는 당신…….” “난 아니라고. 회사 앞이야. 왜 나를 못 믿어.”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믿어. 당신 믿지.” “그래. 하여튼 뭔가 잘못 됐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당신 아까 전화해서는 경찰서라고 했잖아. 그러더니 바로 끊었는데.” “내가 전화했었다고? 아냐. 잘못 걸려왔겠지. 난 당신에게 전화한 적 없어.”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누굴까, 아내에게 전화한 놈은. 순간 어젯밤 엉덩이를 까놓고 성폭행을 하던 놈이 떠올랐다. 맞아, 그 놈이야. 그 놈이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고 집으로 전화한 거야, 내 목소리로 변장해서. 그는 연거푸 담배를 빨았다. 또다시 금방 필터만 남아 다시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분명히 전화했었어. 경찰서라고. 놀라지 마라고.” “아니라니까. 참, 그리고 당신에게 미처 말 안 한 게 있는데……. 어젯밤 사실 성폭행하는 거 봤어, 퇴근하다. 그래서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오늘 아침에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봤다고?” 아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응.” “아침에 그런 말 안 했잖아. 내가 어젯밤 성폭행 사건 일어났다고 얘기해도. 당신 설마…… .” “뭐야. 당신 엉뚱한 거 상상하는 거 아냐?”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다 고함을 질러 사래가 걸려 켁켁거렸다. “당신 믿지. 하여튼 지금 경찰서로 갈게. 참, 변호사는 선임했어? 오빠한테 물으니까 변호사부터 선임하라는데.” “뭐라고? 형님한테도 전화했다고?” 그는 어이가 없었다. 아내마저 나를 성폭행범으로 믿다니. “아냐. 먼저 전화왔었어. 텔레비 보고.” 또다시 아내는 울먹였다. “알았어. 하여튼 난 범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경찰서도 오지마. 나 회사 앞인데 좀 알아볼게 있어.” 그는 전화를 끊었다. 자꾸 통화를 할수록 자신이 범인 된 기분이었다. 벌써 텔레비전에 나왔다니. 그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맙소사. 그는 스마트폰을 내팽겨치려다 간신히 참고 다시 뉴스를 보았다. 어젯밤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람의 증언이라며 착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그럴 줄 몰랐다는 기사까지 있었다. 환장할 일이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담벼락에 기대었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회사원들이 모두 출근을 했는지 거리는 한산했다. 길이 낯설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길을 걸었고 출근을 했는데 한산한 거리를 걸으니 다른 장소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회사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갈 수도 없다. 경찰서로 가기엔 두렵다. 그는 가방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무작정 걸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내가 성폭행을 했단 말인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하물며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준법정신이 강했다. 회사에서 회식 후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른다거나 2차로 성매매 알선을 해 주는 술집으로 가는 걸 극도로 경멸했다. 지금껏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추파를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환장할 일이었다. 그는 길을 걷다 원조 해장국이란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안 먹고 나온 터라 우선 뜨끈한 국물이라도 먹으면 정신이 돌아올 것 같았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은 혼자 떠들고 있었고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일단 사람들이 없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해장국을 주문했다. “해장국은 아침에만 팔아요.” 얼굴이 수더분하게 생긴 여자가 말했다. 그는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며 그럼 설렁탕이라도 달라고 했다. 여자는 주방에다 설렁탕 하나요, 외치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보리차를 그 앞에 놓았다. 그는 보리차를 조금씩 마셨다. 뜨거운 것을 마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설렁탕이 나왔다. 그는 공기밥을 전부 국에 넣고 말았다. 연거푸 떠먹으니 속에서 열이 나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드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여자의 말에 그는 아랑곳않고 계속 입에 떠넣었다. 씹는다기보다는 그냥 입에 퍼 넣고 삼키는 형상이었다. 어느새 국그릇의 바닥이 보였다. 이마의 땀방울 하나가 설렁탕 그릇에 툭, 떨어졌다. 그제야 그는 휴지를 꺼내 이마를 닦았다.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죽다가 살아난 느낌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깨끗이 비운 후에야 입 주위를 물수건으로 닦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간절했지만 조금 있다 나가서 피우기로 했다. 우선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타왔다. 휴식 시간에 부서원들과 담배를 피우며 마시던 커피믹스와 같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마치 몇 개월만에 마시는 것 같았다. 이제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처음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저런 놈은 단박에 쥑이야 한다카께.” 여자의 쇠된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는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여자가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다. “저 보소. 저게 인간인가. 인간이 어째 저런 일을.” 여자는 혀를 쯧쯧, 찼다. 그는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고개를 숙인 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 밑에는 성폭행범 태연히 출근하다 회사 앞에서 잡히다, 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프래쉬가 터지고 기자들의 여러 질문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란 말만 연거푸 했다. “시상이 어째 돌아가는지. 저런 놈은 살려주면 안 된다카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쥑이야 된다카이.” 여자는 그 앞에 있는 식탁을 치울 생각은 않고 아예 의자에 앉았다. 전 그럴 사람으로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동료들에게도 잘 대해줬고 여직원들에게도 전혀 집쩍거린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퍼떡 고개를 들었다. 박대리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구두로 바닥에 떨어진 물에 원을 빙글빙글 그렸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어젯밤 늦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지만 그러리라고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번엔 부장이 나와 카메라 프래쉬를 받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그렇소? 잉?” “예?” 여자의 말에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여자 쪽으로 돌리려다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다. “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렇게 착하게 했다면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을 했단 말이요. 다 쇼야 쇼여, 착하다는 건. 안 그렇소?” 여자 또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예. 그럼요.” 그는 혹시 여자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하며 말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께. 늑대여 늑대. 속에는 다 늑대가 들어있다카이.” 여자는 그의 말에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는 일어섰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더 급선무였다. “여기 얼마입니까?” 그가 여러 번 말했을 때에야 여자는 느릿하게 카운터로 왔다. 팔천 원이요. 여자는 그를 보며 갸웃거렸다. 그는 재빨리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카운터에 놓고 몸을 돌렸다. “여기 잔돈…….” 여자의 목소리가 그가 닫은 문에 걸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어디로 가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걸으며 중얼거렸다. 우선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푹 자고나면 모든 게 제대로 돌아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 분노가 일었다. 아니다. 그 놈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도대체 왜 내 행색을 하며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그것부터 밝혀야 한다. 그는 갑자기 뒤로 돌아 허겁지겁 경찰서로 향했다. 가서 내가 아니라고. 저 놈은 내가 아니라고 밝혀야 한다. 그는 숨을 헉헉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아.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쪼그리고 앉아 물을 끼얹는 여자의 모습.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니. 그는 수취감에 몸을 떨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해질 무렵 여느 때와 같이 동네 아이들과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길에 접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 집은 새로 이사온 젊은 부부가 사는데 길에 면한 건물은 대문과 화장실과 수도가 있는 건물이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이냐는 듯 건물과 아이를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득의양양하게 아이들 곁으로 왔다. “시방 저 안으로 여자가 들어갔는데…… 봤대이.” 아이의 목소리 낮춘 은밀한 말에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말뜻을 꿰지 못하고 아이의 표정만 살폈다. 모두들 여자가 화장실에 간 것으로 여겼다. “시방 목간한다니께, 목간.” 목간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숨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 일제히 건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직접봤다니께.” 아이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고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따라와. 아이는 턱짓을 했고 아이들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따라갔다. 흙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벽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고 아이는 눈짓을 했다. 머뭇거리던 아이들 중에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아이가 주삣거리다 벽으로 다가가 눈을 가까이 댔다. 아이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머리통이 큰 아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하, 하, 하며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뗐다. 처음 본 아이의 눈짓에 다른 아이가 눈을 가져갔고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눈을 뗐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고 그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처음 본 아이가 인상을 썼다. 공범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뒤탈이 없으니까. 그는 호기심반 주눅반으로 구멍에 눈을 가까이 댔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숨이 가빠왔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눈을 뗐다. 처음 본 아이가 다시 한 번 더 구멍에 대고 안을 보더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눈짓했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각자 저녁 먹으러 갔다. 가면서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여자들도 거기에 터러기가 있네. 겨드랑이에도 있고. 다른 아이들은 못 들은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심하게 몸살을 앓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죄책감이었다. 무언가 큰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 상황을 떠올리면 괜히 고추가 간지럽고 오줌이 마려웠다. 엄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한동안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서만 지냈다. 사춘기가 되어서도 여학생들에게 무덤덤했던 게 아마도 그때의 죄책감 떄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덕분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에 갔다. 아직도 그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또다시 놀랬다. 잊어버렸다고 여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일어난 것처럼 생생했고 가슴 역시 두근거렸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정문에 서 있던 의경이 막아섰다. 그는 움찔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의경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수사과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의경은 오른쪽으로 쭉 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라고 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휴, 한숨을 내쉬었다.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내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사과 팻말이 쓰인 사무실 앞에 섰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렬로 있는 형사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사과란 곳에 온 그는 긴장하며 성폭행범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잘 눈에 띄지 않아 한 발을 안 쪽으로 집어넣고 살피는데 순간 그는 몸을 움찔했다. 안 쪽, 창문이 있고 그 옆 시계가 달려 있는 벽 쪽에서 그는 수갑을 찬 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형사는 다그치는 모습이었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고개만 주욱거렸다. 도대체 어떤 놈인데……. 그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고함치는 형사들의 목소리에 그는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직원들과 술을 마시고 퇴근하다 그랬다고 했는데…….” 형사의 목소리가 겨우 들리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문 밖을 보는 척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연신 주욱거렸다. “그 아파트 공원에서 3년 전에도 비슷한 성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당신이 그랬죠? 순순히 부는 게 좋습니다. 피해자한테서 나온 디엔에이 받아놓은 게 있어 금방 탄로납니다.” 형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때도 회식 끝나고 집에 오다…….” 그는 말을 멈추었고 형사가 컴퓨터를 치다가 멈추곤 추궁했다. “집에 오다?” “집에 오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여자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그만…… 아이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밤 늦은 시간에 여자를 보니 갑자기 욕정이 생겨 그랬단 말이지요?” 형사는 컴퓨터 자판기에 손을 가져갔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치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조사를 받던 그가 그를 쳐다보았다. 아. 분명 자신이었다. 옷도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는 사람이요?” “아닙니다.” 지나가던 수사관이 묻자 그는 황망히 얼버무렸다. 얼른 사무실을 나왔다. 더 이상 그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욕하는 여자를 훔쳐본 후 심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며칠을 앓았는데 그 뒤로 가끔 꿈을 꾸었다. 꿈에 그가 아무도 몰래 그 건물로 가는 것이었다. 가서 목욕하는 여자를 볼 때도 있고 목욕을 하지 않아 못 볼 때도 있었다. 몇 살 때까지 꾸었는지 모르지만 가끔 어른이 된 그는 그게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수갑 찬 그가 자신의 목덜미라도 잡을까 그는 빠른 걸음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외 2권, 장편소설『갈대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외 3권, 장편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 서양화 개인전 3회  
638 솔기/박종희 file
편집자
1411 2018-04-01
솔기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 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 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 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정이 이해됐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밤에 옷 벗으면 큰일 난다며 어머니께 으름장을 놓았으니. 땀 흘린다고 맨살에 환자복을 입혔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성가셨을까. 종일 누워지내는 어머니한테 솔기가 배겨 자국이 남았다. 나약한 어머니한테 솔기는 어쩌면 주삿바늘 같은 무기였을 지도 모른다. 뭉쳐진 솔기를 보니 아버님한테 가려져 평생 덧니처럼 살아온 어머니의 삶과 닮아 보였다. 정신이 흐려도 생각은 있으신지 솔기를 뜯다 만 환자복에서 어머니의 지난한 세월이 웅성거렸다. 어머니는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공부를 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바깥사돈끼리 중매서는 바람에 어머니는 종갓집 둘째 아들인 시아버님과 얼굴도 안 보고 혼인했다.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님은 성품이 바르고 인물이 출중해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였다. 그때만 해도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는 집은 거의 없었다. 할아버님은 시아버지를 공부시킨 대가로 나이 어린 동생과 조카들을 공부시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신혼 때부터 시동생과 큰댁 조카의 도시락을 싸느라 허리를 졸라매었다. 박봉의 교사월급을 쪼개 시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늘 허기가 졌다. 아버님의 힘으로 대학까지 마친 작은아버님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간호사로 일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키도 작고 전라도 여자라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작은아버지의 결혼성사에 큰 역할을 한 아버님께 작은어머니는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따지고 보면 작은아버님이 큰 인물이 되기까지 밥해 먹이고 빨래해준 어머니의 공도 컸는데 작은어머니는 아버님한테만 인심을 베풀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서도 내로라했던 아버님과 배움이 없는 어머니와의 혼사는 애초부터 기울었다. 옷 속에 숨어 존재가 무색한 솔기처럼 잘나신 아버님에 묻힌 어머니의 자리는 늘 옹색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해 요령 많고 약삭빠른 작은어머니에 비하면 촌부인 어머니를 아버님도 은근히 무시했다. 아버님은 술만 드시면 어머니께 술주정했다. 미련한 곰 같다며 술 주전자를 방바닥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 아버님이 어머니를 무시하니 자식들도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다. 그런 아버님께 한마디 불평을 할만도 한데 잔사설이 없던 어머니는 가타부타 입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쓸쓸하던 마음 자락을 접어 솔기처럼 봉합했던 것 같다. 솔기는 옷감을 이어주는 재봉선이다. 옷감이 아버님이라면 솔기는 어머니였다. 부부가 일심동체이듯 솔기를 꿰매야 비로소 옷의 모양을 갖춘다. 솔기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바람을 막아주고 속살이 보이지 않게 내밀히 옷을 보호해준다. 그러고 보면 솔기는 단순히 옷감을 꿰맨 자국이 아니라 묵묵히 아내의 자리를 지키게 하는 마법의 바늘땀이었다. 숙명처럼 순종하고 살던 어머니한테 자유를 주고 싶으셨던 걸까. 아버님이 먼저 세상을 뜨셨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나서 어머니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아버님이 계실 때는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다. 어둠 속에서 혼자 감침질하던 세월이 길었던지 어머니는 꿰맸던 솔기를 풀어헤쳤다. 치매를 앓는 사람처럼 변덕스러워진 어머니의 마음이 날씨처럼 맑았다가 흐렸다가 갈마들었다. 봉합했던 마음 자락을 뜯어내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어머니는 물건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사시는 동안 천 원짜리 팬티 한 장도 당신 손으로 사 입은 적이 없는 어머니는 옷에 욕심을 부리고 화장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얼마나 부럽고 한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어머니는 매일 당신 것을 만들었다. 화장실에서 치약이 없어지고 찬장에서 접시가 없어졌다. 어떤 날은 프라이팬이 없어지고 쟁반도 없어졌다. 그렇게 없어진 물건은 어머니의 장롱 깊숙이 숨어있었다. 평생 당신의 의견 한 가지 못 내고 사시던 분이 매사에 간섭하는 일도 잦아졌다. 내가 퇴근해 돌아오면 놀다가 늦게 다닌다고 억지를 부렸다. 목욕을 자주 간다, 음식이 싱거워 간이 맞지 않는다며 며느리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셨다. 항상 뒷전에서 아버님 눈치만 보던 어머니가 어른 노릇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기분이 맑은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님 뒤에서 솔기처럼 사시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일 저일 아버님과의 일을 순서 없이 늘어놓으면 내가 알아서 대충 솔기를 꿰매야 했다. 어머니를 보면 가끔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다. 과거가 무엇이 길래.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놈이 길래 금방 왔다 간 사람도 잊어버리는 어머니가 과거에 있었던 일은 깨알같이 꿰고 계실까. 밤마다 알몸 소동으로 간병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어머니의 환자복을 바꾸었다. 솔기가 뭉쳐 상처를 내는 환자복 대신 시접 처리가 잘 된 우주복으로 샀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환자복을 뒤집어 보여드렸다.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나는 것일까. 솔기를 말아 쥔 어머니가 잇몸을 다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아버님이 어머니의 솔기가 되어 주시는 걸까. 순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 위에 아슴아슴, 낯익은 아버님의 모습이 보인다. 약력: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2014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소설‘가리개’ 당선. 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등대문학상 등 다수 수상 저서: 수필집『가리개』 한국작가회의,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강사로 활동 중 주소: 세종시 누리로 119, 405동 1703호 우 30130  
637 슬픔아 놀자 외1편/최기종 file
편집자
2430 2018-04-01
슬픔아 놀자 슬픔아 놀자 불 꺼진 외딴방에서 슬픔아 손잡고 놀자 슬픔아 놀자 별도 달도 들지 않는 연옥에서 슬픔아 얼싸안고 놀자 슬픔아 놀자 이토록 눈물주고 가슴 쓰리게 하는 슬픔아 동무하며 놀자 슬픔아 놀자 파랗게 점멸하는 묵시의 침실에서 슬픔아 신랑각시 되어 놀자 꽃불 눈 한 줌 난로에 놓으면 치르 치르 치르르 금방 녹아 없어지지 오징어도 난로에 구우면 지르 지르 지르르 금방 굽혀 구수해지지 아픔도 슬픔도 여기에 놓으면 피르 피르 피르르 금방 녹아 없어질까 도시락도 노릇노릇 익어가는 여기 꽃불에 쪼이면 너도나도 피어나서 붉어지는 것일까 최기종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 작품 발표, 『나무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목포작가회의 회원, 전남민예총 이사장 메일주소 jogi-choi@hanmail.net  
636 가난한 겨울 외 1편/강규 file
편집자
1549 2018-04-01
가난한 겨울 내 조상은 아마도 사냥꾼이었다고 생각해본다 호피 한 장이면 온 가족이 한해를 살 것이고 멧돼지라면 쌀 열 되는 될 것이다 아비의 이승이나 시어미의 이승도 그러했듯이 내다 팔 산삼은 없어도 손주먹일 산삼만은 구했을 것이고 시린 손발을 가진 부엌떼기 아낙은 왕겨에 피죽을 먹었을 것이었다 인제 땅에 없는 조상의 묫자리나 인제 땅에 없을 자식들을 생각하노라니, 나는 참으로 가난하다 나는 이미 가난하다 내 조상들은 백년 전후前後를 곱으며 살았는데, 축령산 순례기 정말로, 시인 한 번 되고 싶어 지훈 선생의 태胎를 묻은 곳, 지훈 선생의 뼈를 묻은 곳을 순례하였다 걷다보면, 당신이 네발로 기던 곳, 두발로 걷던 곳, 지팡이에 기대며 걷던 곳, 울던 곳, 웃던 곳, 취하던 곳들을 짐작한다. 읽다보면, 유불선이 하나 되고 대차고 각진 것도 하나 되고 님의 괘적도 흔들림 없는 하나였음을 깨친다 영양돌이나, 마석돌이나, 축령산의 돌들이 다, 한 권에서 나온 것도 읽었다 선생의 걸음을 가늠하는 내 눈동자는 여전히 둘 곳을 잃는다  
635 부지불식간에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1577 2018-04-01
부지불식간에 내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오랫동안 쓰지 않던 그 무언가가 이제 낡고 기다리다 지치거나 혹은 너무 닳아서 이제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 앉아있다. 녹슬지 않는 쇠란 얼마나 비정한가, 산소와 만나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부스러져가다가 닦고 기름치고 살펴주지 않으면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들과 같이 그저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세상과 나와 물건들은 그 사이에 세월과 산소와 무심을 벗 삼아서 어느새 툭, 하고 썩거나 부스러져 간다. 아, 저 녹슬지 않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들은 다 무엇인가 모든 것은 부지불식간에 부지불식으로 되어 가는데. 소리 나는 당신이 내게 사랑해 라고 말을 하려는 눈빛을 봅니다. 눈을 보고, 그 소리는 나중에 듣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더듬이를 세우고 있지 않을 때는 당신의 말이 내 귀를 때려도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먼 별에서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내 별을 향해 사, 랑, 해...라고 말을 합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 당신의 소리가 내 귀에 도착했을 때, 말한 당신도, 듣는 내게도 그 소리는 갈 곳을 잃습니다. 낡은 녹음테이프 속에서 풀려나오는 아이들 웃음처럼 오래 전에 보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랑의 말이 우리 사이에 떠돌아 다닙니다.  
634 오랄로피테쿠스 외 1편/김이숙 file
편집자
1404 2018-04-01
오랄로피테쿠스 불합격입니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마트에서는 2시쯤 리치마트에서는 7시쯤 50% 반값 할인코너에 서성댄다 라면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되도록 싼값에 쟁여둔 음식으로 버티는 일주일은 되돌이표 그렇게 몇 날 며칠 모은 돈으로 한 끼 같은 스타벅스 커피 마시는 게 숨 쉴 구멍 신문스터디 자료정리 점심밥터디 면접스터디 영어토익스터디 자습 저녁밥터디 인적성스터디 자소서스터디 개인공부 개인정비, 쪼개 쓰는 시간 편히 잠들지 못하는 하루가 줄창 꼬리 물어도 낙방의 연속, 면접 트라우마 토익 스피킹 HSK 기한 만료로 리셋, 모레 마감인데 원서 냈느냐 이번에도 잘 안 됐냐 묻는 말에 입만 진화한다 죄책감이 부풀어오른다 바닥에 들러붙고 싶은 날이 늘어간다 사냥본능도 도망칠 힘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소리는 벽을 뚫지 못한다, 오랄로피테쿠스 나는야 일평생 아가리 취준생 *오랄로피테쿠스(ORAL-opithecus): 취준생들이 원시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빗대 입만 진화했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 서울 나들이 27년 만에 만난 동창들과 언제 왔었나 까마득한 서울 야들아, 저 아파트 구경 좀 해 봐 래미안 아름답고 안전한 세상이 온다면야 e-편한 세상 마음껏 경험할 수 있다면야 푸르지오 생이 마냥 푸르를 수만 있다면야 왕족처럼 궁전에도 살아보고 술 좋아하니 참이슬에도 살아보고 꿈꾸는 현대연예인, 예술인에도 살아보고 5수 끝에 원하던 대학에 갔는데 대학 가면 제대하면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숨죽인 흐느낌 귓바퀴를 맴도는데 해밀마을 5단지 반도유보라메이프타운 가랑마을 10단지 동양엔파트월드메르디앙 대출금 늘어나듯 이름도 길어지고 좋은 것 다 갖다 붙이고 아파트도 앞다투어 개명하는 세상 그럴 수 있다면야 우리 아버지 의사야 우리 집은 이층집인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사달라는 건 다 사줘 입만 열만 거짓말이던 문디 가시나 아파트 구경하면서 나는 왜 그 가시나 자꾸만 생각나는지 김이숙 경북 상주 출생. 2014년 시집 『밥줄』로 등단. ‘느티나무시’ 동인.  
633 종이 책에 관한 단상/김불출 file
편집자
1340 2018-03-01
종이 책에 관한 단상 젊어서는 다른 일을 하다가 나이 들어 뒤늦게 서점을 하게 된 친구가 있다. 워낙 책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내가 교직에 있었으니 관련이 있긴 했지만 퇴직 후에 둘 사이가 더 가까워진 데는 까닭이 있다. 책을 사더라도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친구 서점을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인터넷 서점에 거래를 했었다. 그런데 퇴직 후에는 인터넷 서점에 자주 들어가지 않으니 비밀번호를 잊어서 로그인도 안 되고 해서 이 친구에게 주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친구도 나와 같이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이니 당연히 종이 책에 대한 향수가 있다. 다만 서점을 시작하기 전에 복사기 회사에 근무했던 경력이 있어서 나보다 전자책이나 디지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굳이 사연을 찾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쩌면 종이 책을 다루는 서점이 사양길을 걷게 되어 이 친구가 한가한 시간이 많은 것을 내가 아니까, 퇴직 후에 자주 들르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기억하고 있다. 두 살 아래 동생과 방에서 씨름을 하다가 내 다리 뼈에 금이 갔던 모양이다. 동네 병원에 가서 기브스를 했다. 1960년대 중반이었던 그 때는 의술과 의료장비가 요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서 치료기간이 오래 걸렸다. 두 달 동안 학교에 못 가고 집에 혼자 누워 있는 동안에 심심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동네 집집마다 책을 빌려오다가 학교 도서관, 만화 가게, 나중에는 아버지께서 헌책방에 다니면서 위인전기집이나 더 어려운 책도 사다 주신 것 같다. 물론 요즘처럼 제대로 독서지도를 받았다면 독후감도 쓰고 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개월 후에 기적이 일어났다. 어머니 등에 업혀가거나 아버지 자전거에 실려서 학교에 다시 갔을 때 경상북도 전체에서 같은 학년끼리 경쟁하는 일제고사가 있었다. 평균 점수 89점으로 전교 2등을 한 것이다. 한 학급에 60명 이상이니 남학생 다섯 반, 여힉생 다섯 반, 10 학급이면 600명이 넘는데 말이다. 사실 내가 다치기 전에는 성적이 우리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에 불과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때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께 “아이가 전교 2등을 했으니 막걸리 한 말 내셔야죠?”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내 아이 평소 성적을 내가 아는데 이건 소가 뒤로 걷다가 뒷발에 쥐 잡은 격이니 막걸리 못 내겠소.” 다시 담임 선생님께서 “아니, 컨닝한 것도 아닌데 윷으로 가나 모로 가나 서울만 가면 안 되능교?” 하셔서 아버지께서는 결국 막걸리 한 말 내고 한 턱 쏘신 걸로 기억된다. 나도 한때는 서점을 경영하고 싶었다. ‘서점을 하면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겠지?’ 물론 어림없는 소리라는 걸 이젠 알았다. 지금 서점을 하고 있는 친구가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난 걸 보면 장사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시간이 있을 때 자주 들르는 편인데 손님이 없다면서 주 5일제 근무하고 토요일은 문을 닫을까 생각 중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적어도 당분간은 멀리 가버린 사건이 생겼다. 내가 서점을 방문한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문상을 가기 위해 일찍 문 닫을 준비를 하다가 건물 벽 틈으로 물이 새는 것을 보았다. 3년 전에도 주말에 2층에서 수도가 얼어 터져 월요일 출근해보니 서점 전체가 물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옆집 수도 계량기가 얼어 터졌다고 한다. 이걸 못보고 그냥 갔더라면 그 날의 악몽이 재현될 상황이다. 상수도 사업국에 신고를 하니 올 겨울 극심한 한파로 이런 신고가 밀려 내일이라야 보수공사를 하러 올 수 있다고 했다. 사정을 자세히 말했더니 바로 출동해서 새지만 않도록 임시조처를 취해주고 갔단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보수공사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러 와야 한다. 신경이 쓰여 마음 놓고 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잠인들 제대로 잘 수 있겠는가?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책을 팔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서점을 경영한다면 이렇게 편히 책을 읽기는 어려운 법이다. 책읽기를 좋아한 것도 상당한 이유가 되겠지만 평생을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퇴직을 하니 집에 쌓인 책이 엄청나다. 물론 욕심 때문에 사 두었더라도 읽지 못하고 꽂아둔 채 먼지만 앉은 책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스스로는 제대로 글도 쓰지 않으면서 가입한 문인 단체에서 낸 기관지나 동인지, 그리고 소속된 시인과 작가들이 보내준 책들이 다 읽지도 못한 채 쌓여있다. 더욱이 오랫동안 이사를 다니지 않아서 포화상태인 책들을 이제는 어느 정도 처분해야 새로운 공간이 생긴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 한다. 필요할 때 새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버려야 한다. 책은 더욱 그렇다. 읽고 싶지만 책이 없는 사람에게 주거나 도서관에 기증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혹여 급히 찾아볼 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 때문에 책을 쉽게 버리지도 못한다. 사실은 그것도 인터넷 검색하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우리말 큰 사전이나 원색대백과사전 종류는 이미 다 버렸다. 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내게 딸이 권한 책은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었다. 이 책을 사서 읽은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버리지 않는 한 정리하기 어렵다. 그런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의 문제가 정말 어렵다. 책을 버리기 위해 다시 책을 한 권 사서 우리 집 책은 또 한 권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현실에 놓인 내게 딸은 이렇게 말했다. “책을 손에 들고 가슴에 울림이 오지 않는 책이나 한 달 이내에 꼭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은 다 버리세요.” 실제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다 잊어버리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면 안 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읽을 때는 공감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별로 효율성은 없는 셈이다. 더욱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처럼 너무 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 우유부단(優柔不斷)한 분들이 많다거나 지식인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오히려 책을 읽지 않아서 단순노동을 생업(生業)으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서 소신이 뚜렷하고 간단명료(簡單明瞭)한 행동철학을 가진 사람이 많다. 지식(知識)보다는 지혜(智惠)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제 눈도 침침하고 집중력도 떨어져 책읽기도 쉽지 않다. 어떤 분들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니 말하는 것보다 듣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한다. 더욱이 이가 상했다는 것은 젊을 때 이가 튼튼할 때보다 음식을 덜 먹으라는 것이고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덜 보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아서 이를 치료하고, 덜 움직이면서도 많이 먹으니 배만 나온다. 그 뿐인가, 읽어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필자는 아직도 부지런히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직업도 없이 연금으로 사는 사람이 무슨 책을 그렇게 사다 날라요? 꼭 봐야 할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면 되지 않아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집사람의 목소리다. 김불출 ; 본명 김우출. 1987년 ‘영주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1997년 ‘작지만 큰 이야기(고래출판사)’ 공저. 1999년 ‘월간 문학세계’ 수필 신인상 당선.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회원 계간 영주문화 편집위원 E메일: k82115@hanmail.net  
632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사랑/박래녀 file
편집자
1420 2018-03-01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사랑 1. “간다.” 언니의 책가방이 탱자나무 울타리 위를 휙 날아와 내 앞에 떨어졌다. 길바닥에 패대기쳐진 책가방을 챙겨 뒤를 돌아보자 하늘에서 휙 날아와 내 뒤에 사뿐히 서는 사람은 호랑나비였다. 두 갈래 땋은 머리는 어깨에 찰랑거렸고, 칼라에 청색 띠를 두른 세라복 윗도리에 180도 퍼진 청색 교복 치마를 입은 언니는 장골 키 두 배는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장대 하나만 있으면 가볍게 휙휙 뛰어 넘었다. 교복 밑에 하얀 체육복 바지를 입은 언니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체육복 바지를 벗어 책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소리 쳤다. “이 굼벵아, 빨리 뛰라니까 뭐해?” 언니는 내 손을 낚아채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탱자울타리를 뒤돌아봤다. 한껏 구부러졌던 장대가 탱자울타리를 치며 튕겨나가 마당에 떨어졌다.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고 맑았다. 대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커다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참새들이 일제히 조잘대기 시작하자 탱자 가시 사이에 핀 상아빛 탱자 꽃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2. 우리 집은 사방이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삼천 평이 넘는 산비탈은 벚나무, 소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사철나무, 장미, 소철 등 크고 작은, 흔하고, 귀한 관상수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다. 그 넓은 나무숲을 가꾸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늘 일군들과 밭 매고, 거름 내는 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았다. 아버지는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까짓 말단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은 번드레한 겉치레고, 정작 하는 일은 새 여자 바꾸어가며 새 살림 차리기였다. 지금도 언니와 동갑나기 딸이 있는 과수댁과 눈이 맞아 한 살림 차렸다는 소문이다. 아버지는 여자가 생기면 아예 집에 발걸음도 하지 않다가 돈이 궁하면 집으로 기어들었다. 나무를 판다거나, 땅 문서 한 장 손에 쥘 때까지 우리 집 가장 노릇을 했다. 어제 저녁에 집에 온 아버지는 밤새도록 어머니를 달달 볶았다. 그 삼천 평 중에 백 평이라도 팔자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삼천 평은 아버지 혼자 맘대로 처리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당신의 고명딸에게 넘겨 준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S시에서 집을 몇 채나 가졌던 재산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역시 C시에서 내 노라 하는 재산가의 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는 그 꿈을 접고 스무 살 꽃띠에 시집을 왔다. 어머니는 시집오면서 자신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를 싣고 왔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것은 어쩌면 그 피아노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도 ‘솔베이지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며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를 보면 슬픔이 울컥 치밀곤 한다. 어머니는 나이 오십이 넘어도 여전히 꿈을 꾸었다. 책과 피아노 밖에 몰랐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열등의식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책보다 노는 쪽으로 발달했으니 얌전하게 책 속에 빠져 있거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가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어려서 아버지가 없는 날은 어머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우리는 곧잘 노래를 부르며 행복했다. 우리 집 딸들은 다들 피아노를 잘 친다. 어머니의 개인지도 덕이다. 어쨌든, 고생이라곤 모르던 어머니가 시집 와서 고생길로 접어든 것은 아버지의 바람기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내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가 보다. 더구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대를 이을 고추를 원했지만 우리는 줄줄이 조개만 달고 태어났다. 그것도 연년 생으로 5공주가 된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했듯이 아버지의 바람기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자는데 있었다. 여자가 바뀔 때마다 재산은 줄어들었고, 살림에 대해선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 아버지 덕에 다섯 채가 넘던 기와집은 막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남의 것이 되어버렸고, 전세방으로 나 앉게 된 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외할아버지는 S시 외각에 있는 다랑이 삼천 평을 사서 아담한 가정집과 창고 한 채, 다랑이마다 관상수를 심어 우리 가족을 옮겨 살게 해 주셨다. 덕분에 어머니의 뽀얗고 길던 손가락은 대나무 뿌리처럼 굵고 튼실한 농부의 손이 되었다.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속울음을 삼키던 어머니를 본 적이 많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기는 갈수록 도가 지나쳤고, 우리가 어릴 때는 어머니께 손찌검도 예사로 했다. 아버지는 봉급을 받아도 생활비를 내 놓을 줄 몰랐다. 오입질하기에도 모자랐으니 어머니는 딸 다섯 먹이고 입히기 위해 외갓집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몰랐다. 어려서부터 쓸 줄만 알았지 벌 줄은 모르고 자랐으니 그 씀씀이가 헤플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도 공부보다 연애질 하는 것으로 농땡이 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대신 학교에 기부금을 왕창왕창 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돈으로 졸업장을 받은 셈이다. S시의 농림보통 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갔다 온 아버지는 잠시 동안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다. 집에 돈만 축내고 빈둥거리자니 돈도 궁했고, 연애 사업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괜찮은 직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공무원이 제일 나은 직업 같았다. 검사, 판사, 등 사자 붙은 직업이 최고였지만 공무원이란 직업도 여자들에겐 인기 만점이었다. 아버지는 머리 나쁜 부잣집 아들이란 딱지를 뗄 욕심으로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운이 좋았던지 5급, 지금 9급에 해당하는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 시절 공무원이라면 대학 감투가 부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과거에 급제 했다’고 돼지를 몇 마리나 잡아 동네잔치를 걸판지게 벌릴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에도 없는 장가를 들면서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멋진 연애를 하면서 인생을 만끽하는 거다.’ 하면서 총각시절을 보낼 작정으로 꿈에 부풀었던 스물 네 살의 아버지, 공무원 발령을 받자마자 할아버지는 사주단자를 신부 집에 보냈다. “오래 전부터 니한테는 정혼자가 있었다. 인자 평생 묵고 살 직장도 잡았으니 내가 안심하고 니 혼인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라고, 아무래도 내가 올해를 못 넘길상 싶다. 니 장개 드는 것 보고 죽을란다. 만약 니가 장개를 못 들겠다모 내가 가진 재산을 전부 사회에 기부하겠다.” 결국 아버지는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는 거짓말처럼 이듬해 돌아가시고 그 많은 재산이 고스란히 아버지 몫이 되었다. 아버지는 간덩이가 부어 버렸다. 집에 마누라가 있거나 말거나 신나게 총각 행세를 하면서 밖으로 나돌았다. 아버지의 그 헤픈 씀씀이에 할머니는 집 한 채가 남의 손에 넘어갈 때마다 속을 태우더니 “니가 아들을 못 낳아 준께 저 것이 밖으로만 도는 기라.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거늘. 쯧쯧 그래 가지고 남정네 건사 하긴 진작에 걸렀다. 나도 인자 아들 없는 셈 치고 살란다. 연락도 하지 말고, 찾지도 말거라. 내 몫 챙겨 갖고 절에 의탁해 살든가 할란다. 이런 저런 꼬라지 인자 안 보고 살고 싶다. 너거는 너거 알아서 살거라.” 하시면서 할머니는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떠나버렸다. 소문에는 영감 얻어 갔다지만 꼭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면 집에 들리곤 하는데 늘 염주를 주렁주렁 걸고, 회색 법복 차림이니 아무래도 절에 의탁하여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집을 떠나자 완전 자유방임이 되었다. 간섭할 사람이 아무도 없자 아예 두 살림 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젊은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여자가 떨어지거나 돈이 떨어지거나, 아버지 자신이 여자가 싫어질 때면 잠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다시 새로운 여자 꿰 차고 나갔다. 어머니는 그 때마다 딸 하나를 더 안아야 했다. 어쩌자고 한숨만 쉬면서 그런 아버지를 말릴 생각도 않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여자만 해도 열 손가락이 다 찰 지경인데도 이상한 것은 그렇게 여러 여자를 거느려도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든 아들만 낳았다 하면 어머니와 당장 이혼하고 새 장가 들겠다고 호언하는 아버지건만 어찌된 셈인지 아들을 낳았다고 찾아오는 여자는 없었다. 딸 때문에 울화병을 앓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앞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삼천 평 밭을 절대로 아버지가 손을 댈 수 없도록 했다. 외삼촌의 동의가 있기 전엔 팔 수 없는 물건으로 묶어 둔 것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애가 탔다. 그 삼천 평은 돈 덩어리였다. S도시가 커 가면서 도시 인근에 있는 산비탈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높아졌다. 우리 집 인근이 알짜배기 주택지로 부각되자 부동산업자들이 눈독을 들였다. 우리 집은 전원주택이나 전망 좋은 아파트를 지을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앞이 확 터인 전망뿐이 아니다. 멀리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하룻밤 자고나면 땅값이 눈뭉치처럼 불어났다. 아버지는 돈이 필요했다. 나이 오십 줄에 앉자 돈이 없으면 여자도 오래 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돈, 돈, 돈이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어머니를 구워삶아 그 노른자위 땅을 팔아 자기 잇속을 챙겨야 했다. 그러나 수십 년을 당해 온 어머니도 만만찮았다. 젊어서야 어떻게든 아버지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했지만 ‘저 화상 저 병은 다리에 힘이 빠져야 없어질 병이니 고칠 재간이 없는 기라.’ 하시면서 체념한 후로는 아버지가 어떤 사탕발림을 해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아니잖소. 구야한테 물어보소.’ 하면서 슬쩍 외삼촌 핑계를 댈 뿐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화를 내도 나사가 풀린 여자처럼,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화도 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온 날은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아래채 창고 방으로 내몰았다. 위채는 어머니와 아버지 차지가 되었다. 우리 역시 눈이 빛났다. 공부벌레인 막내만 빼고는 대환영이었다. 우리는 화투짝을 돌렸다. 막내는 언니들 틈에서 숙제도 못한다면서 부엌방에 떨어졌다가도 슬그머니 우리 사이에 끼어들곤 했다. 일단 우리끼리 모이면 신바람이 났다. 더 좋은 것은 옆방에서 밤새도록 끙끙대는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었다. 아래채 창고는 일꾼들을 위해 만든 방이었다. 방 하나에 농기계를 넣어 두는 창고가 딸린 집으로 밭 가운데 있었다. 일꾼들이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몸을 씻을 수 있는 방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우리들의 놀이방이기도 했다. “엄마가 몇 번째 까무러치디?” 둘째 언니는 짓궂게 물었다. 중학생인 막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눈을 흘겼다. “괜찮아, 너도 그 정도는 알만한 나이잖아. 그런데. 너희들 신기하지 않니? 저치가 젊은 년한테 진을 다 빼서 힘도 없을 텐데. 녹용이라도 마시고 왔나? 그런데 말이야. 신기한 건 우리 엄마야, 이젠 늙은 여우라니까. 전에는 저치 자고 가면 통장 째 내 줬잖아. 그런데. 며칠을 구슬려도 안 넘어가니 저치의 속이 탈 수밖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패나 돌려 엉가.” 불쌍한 아버지, 언니와 동생들이 냉대하는 아버지지만 나는 그 아버지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젊어서 고생 모르고 살던 사람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됐는지. 아내와 딸들에게 대우 받지 못하고 자신의 집보다 떠내기처럼 이 여자, 저 여자 집으로 전전하다가 돈이 궁해지면 어쩔 수 없이 돌아와 헛기침 하면서 눈치 보는 아버지. 아버지도 속이 탈 것이다. 아버지의 여자는 자꾸만 돈 가져오라 조를 테지, 직장에선 명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지. 퇴직금은 이미 대출 받아 바닥이 났지. 나 외에는 딸들이 아버지 취급도 하지 않는 집으로 돌아오기는 죽기보다 싫을 것이고, 어쨌든 늙은 아내보다 탱탱한 삼십 대 과부의 살맛이 더 좋을 테니. 그렇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본처라 아버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아내를 구워삶아 돈을 챙겨 가야 첩이 알랑방귀를 뀌며 콧소리를 낼 수 있고 밥상이 달라진다. 그러니 인두겁을 쓴 인간이라 해도 어쩌겠는가. 본처에게 돌아와 아내를 구워삶으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일단 엄마를 잠자리에서 잡았다. 그래도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폭력으로 나갔다. 폭력도 당사자가 피해버리면 딸들에게 풀었다. 이제 딸들조차 그가 오면 상대를 하지 않았다. 피해버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딸 자식들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난동을 부리지만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딸들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 집에 아버지 자리는 없었다. 특히 아버지 성질을 그대로 물러 받은 언니가 둘째였다. 언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절대로. 처치였다. 당신이었다. 왜 우리 집에 오느냐고 당신 집 아니니 발걸음 하면 도둑으로 신고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도 둘째 언니였다. 언니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여고생일 때 사범 자격증을 땄다. 이미 태권도로 단련된 주먹이니 아버지께 호락호락 당하지도 않았다. 단지 어머니 때문에 참았다. 아버지는 둘째 언니를 겁내면서 어머니께 하던 폭력을 멈추었다. “당신 한 번만 더 우리 엄마에게 손찌검 했다가는 병신 될 줄 알아.” 그랬다. 둘째 언니가 중학교 3학 년 때였지 싶다. 그날도 아버지는 오랜만에 찾아와 어머니께 저금통장 내 주지 않는다고 손찌검을 했다. 언니의 2단 발차기가 바로 들어가 아버지의 턱을 강타했던 것이다. 그 후로 언니가 있는 앞에서는 절대로 어머니께 손찌검을 하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께 폭언을 하는 것이었다. 말끝마다 ‘애비도 모르는 딸년들’이라며 아비를 아비로 대우해 주지 않는 것은 어머니 탓이라고 했다. 또한 둘 째 언니에게 태권도 가르쳤다고 야단치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더니 그 짝이라며 도장에 못 나가게 하라고 야단쳤지만 그럴수록 언니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더 강하고 집요했다. 아버지가 오신 날은 보란 듯이 태권 도복을 입고 마당가에서 으랏차차! 하면서 운동을 했다. 그런 언니를 보며 아버지는 ‘에미가 지 남편을 우습게 보니 가시나들도 저 모양이이라’고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오신 날은 도복 입고 마당에서 운동을 못하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보란 듯이 장대를 짚고 어른 키 보다 높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멋지게 뛰어넘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밤새도록 어머니를 녹이려고 애썼지만 어머니는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이 밝았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방에서 못 나가게 붙잡고 앉아 딸들을 걸고 넘어졌다. 딸들이 아비를 본척만척 하니 집에 들어오려다가 도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밖으로 도는 것은 모두 어머니와 딸들 때문이라 했다. 특히 둘째 언니 때문이라 했다. 아버지를 팬 불효막심한 년이라는 것이다. 부엌방에서 아침을 먹던 둘째언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언니는 당장 안방 문을 열어 젖혔다. “아저씨, 인자 고마 당신 집에나 가이소. 출근 해야지 예. 그래야 그 여자가 밥이라도 줄 거 아닙니까?” “아니 저것이. 또?” 아버지는 언니에게 옆에 있던 담배 재떨이를 날렸다. 날렵하게 피한 언니는 피식 웃으며 “눈에 멍 자국 또 만들어서 출근 하실라고 예?” “저 저것이 말하는 본새 보소. 이기 다 니 년 탓이다.” 아버지는 옆에 있는 어머니께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이봐요. 아저씨, 존 말 할 때 가시죠. 내 봉이 우는데.” 언니는 잽싸게 축담 옆에 챙겨 두었던 대나무 봉을 들고 왔다. 여차하면 한 대 갈기겠다는 뜻으로 대나무 봉을 만지작거리며 아버지의 거동을 살폈다. “이녀러 가시나가 애비한테 몽디를 디밀어? 내가 참자 참자했지만 갈수록 가관이네. 오데 애비한테 말끝마다 아저씨라니. 내가 너거 학교 교장 선생님 찾아가서 애비에미도 모르는 천하에 망나니 겉은 년이니께 퇴학시키라고 할 끼다.” “누구 맘대로? 지 얼굴에 똥 묻히는 짓도 인자 서슴지 않겠다 이 말이지?” “나도 동장 찾아가서 김 아무개가 이런 사람인데 모가지 안 자르냐고 하냐고. 학교 가서 그 년 머리끄덩이에 불을 확 싸질러버리던가 중대가리 만들어 놓고 너거 집에 있는 그 아저씨 때문이다. 함서 반쯤 죽도록 패 놓던가. 도장 머스마들 불러서 걸레 맹글어 놓던가 하모 우짤 긴교?” 빙글빙글 웃으면서 아버지의 속을 뒤집는 것에 선수인 언니는 그래도 장골인 아버지께 잡혔다 하면 힘을 못 쓴다는 것을 아니까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복장거리를 시켰다. “가시나를 조따우로 갈카 놓고. 당신은 집에서 뭐 하는 사람이야? 학교 당장 때려치우고 시집이나 보내. 옛날 같으면 시집가서 아 에미가 되고도 남을 년을.” 아버지의 화살은 다시 어머니에게 쏟아졌다. “아저씨, 우리 옴마한테 또 손댔다가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자 가시죠. 미칭개이 아저씨.” “뭐라꼬? 저것이 죽을라꼬 환장을 했나. 뭐? 지 애비보고 미칭게이? 이 년아, 가서 문 짱가라. 저 가시나 버릇을 좀 고쳐 봐야 것다.” 아버지는 옆에 앉은 어머니를 향해 손을 올렸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 부칠 참이었지만 “우리 옴마한테 손찌검만 해 봐라. 무슨 꼴 나는지.” 언니의 차가운 한 마디에 아버지는 얼이 빠진 얼굴로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옴마, 내 학교 갔다가 그년 집에 들어가 난리굿판을 맹글어 놓고 올게 예. 학교 가다가 경찰서에 들려 가정 폭력범으로 이 아저씨 고발하고 갈낑께네 혹 주먹질 하모 맞고 있을소. 감옥에다 확 차 넣어삐낑께네.” 언니가 눈짓을 했다. 나는 슬그머니 가방을 챙겼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오늘 내가 저 년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놔야겠다.” 아버지도 단단히 화가 나셨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소매를 걷어 올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당신도 퍼뜩 출근하소. 숙아, 니도 아부지한테 그라모 못 쓴다. 잘못 했다고 빌고 너거들 퍼뜩 가거라. 머 하노? 학교 늦을라.” 애가 탄 어머니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내 가방만 챙겨 현관문을 열고나오며 이런 저런 꼴 안 보고 혼자 지낼 수 있는 큰 언니가 한없이 부러웠다. 큰 언니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외삼촌이 경영하는 공장의 경리로 취직하여 C시로 떠나고 없었다. 동생들은 눈치껏 아침을 챙겨 먹고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나는 대문 앞에서 언니가 나오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에서 언니의 악 쓰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탱자울타리를 넘었다. 오금이 저렸다. 나는 원래 겁이 많았다. 둘째 언니처럼 당당하고 싶지만 모두 나를 보면 바람 불면 날아갈까 겁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고 2학년이면서 덩치는 초등학생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나에 비해 둘째 언니는 큰 편이었다. 여고 3학년인 언니는 몸매도 잘 빠진데다 얼굴도 이국적으로 생겼다. 곱상한 어머니와 선이 굵은 아버지의 잘 생긴 부분만 닮은 것 같았다. 성격도 똑 부러지고, 활달해서 언니를 보면 잘 익은 알밤 같았다. 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로 단련된 몸이라 날렵했고, 2단 발차기는 태권도 도장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아이고오!” 집안에서 갑자기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또 일 저질렀구나 싶어 뒷걸음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울타리를 넘어오고, 언니의 말대꾸도 골을 울렸다. “저것이 또 애비를 쳐? 이년 잡히기만 해 봐라.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끼다.” “옴마, 학교 댕겨 오겠습니다. 저 아저씨한테 맞았는지 난중에 확인할 끼다. 우리 옴마 한대라도 팼다간 당신, 감옥 갈 줄 알아라. 다시는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 말란 말이야.” 우탕탕! 언니의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간다.” 언니의 책가방이 탱자나무 울타리 위를 휙 날아와 내 앞에 떨어졌다. 길바닥에 패대기쳐진 책가방을 챙겨 뒤를 돌아보자 하늘에서 휙 날아와 내 뒤에 사뿐히 서는 사람은 호랑나비였다. 두 갈래 땋은 머리는 어깨에 찰랑거렸고, 칼라에 청색 띠를 두른 세라복 윗도리에 180도 퍼진 청색 교복 치마를 입은 언니는 장골 키 두 배는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장대 하나만 있으면 가볍게 휙휙 뛰어 넘었다. 교복 밑에 하얀 체육복 바지를 입은 언니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체육복 바지를 벗어 책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소리 쳤다. “이 굼벵아, 빨리 뛰라니까 뭐해?” 언니는 내 손을 낚아채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탱자울타리를 뒤돌아봤다. 한껏 구부러졌던 장대가 탱자울타리를 치며 튕겨나가 마당에 우탕탕 떨어지는 소리 경쾌하고 맑았다. 대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커다란 몽둥이를 손에 잡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참새들이 일제히 조잘대기 시작하자 탱자 가시 사이에 핀 상아빛 탱자 꽃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3. 한참을 달리다가 골목으로 꺾여 내려가는 아랫녘에 서서 우리 집을 돌아봤다. 아버지는 아직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문간에 서 계셨다. “바보야, 또 넋 빠졌어? 들고 뛰어. 지각이란 말이야. 저 영감탱이 약발 받았다니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딸에게 혼이 난 아버지가 풀 죽은 모습으로 대문간에 서 있었다. “엉가, 제발 아부지한테 너무 그라지 마라.” “내가 좀 심하긴 했지? 안 그래야지 하다가도 옴마한테 와서 하는 걸 보면 속이 확 뒤집힌다니까.” “엉가가 하는 걸 보모 아부지랑 똑 같애. 닮았단 말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 더 속상해. 곱게 좀 늙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젠 정신 좀 차리고 집으로 들어오면 좀 좋아. 또 돈 뜯어 나갈 궁리하니 더 밉지.” “아부지 소리도 안하면서, 집에 들어 오모 받아줄 끼가?” “당근이지. 하는 거 봐서 아부지, 아부지 함서 애교도 살살 부려 볼 텐데. 우리도 좀 아부지 사랑 받으며 살 날 있었으면 좋겠다. 니도 그렇제?” “아부지 보고 엉가가 그렇게 말해 보라모. 이번에 보이께 아부지도 많이 늙었더라. 남자들은 늙으모 집에 들어오고 싶어진다매. 엉가가 좀 살갑게 굴어봐라. 맘 고쳐 묵을지 모르잖아.” “몰라. 그나저나 굼벵이 니 땜에 또 지각이다.”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 푸른 강에서 물안개가 살살 피어올랐다. 오늘 하루가 참 따뜻할 것 같다.  
631 Y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1523 2018-03-01
Y 내가 사는 길목마다 니 몸내 나지 않는 곳 있을까 마음 속 체 눈을 더 성긴 것으로 바꾸어도 헛일 얼기미에조차 얼금 얼금 걸리니…… 상괭이*도 너끈히 삐져나갈 만큼 코가 큰 그물로 교체하여야겠다 물밑바닥 암초에 걸려 추 다 떨어지고 찢어진 그물이 풍력발전기 날개처럼 너풀거리는데 속살 속살 걸려 올라오는 목소리 목성 골짜기 깊숙하게 말을 숨겨도 저만치 안개 낀 성간星間에서 하늘 하늘 훌라후프 돌리는 허리 사랑의 흔적은 지울수록 푸른 바다에서 작살에 찔린 물고기 피같이 붉게 번져서 아직은 가본 적 없는 우주모퉁이 어디쯤 니 그림자 어룽이지 않는 곳 없을까 * 쇠돌고래 수평선 모텔 바로 코앞에서 바다가 남실거리는 방에 흰긴수염고래랑 함께 든 적 있지 둘이 팔베개하고 초근초근 겹주름위에 쟁여두었던 말씀들을 되새김질할 때 나이롱 화투장 팔 껍데기 같은 바다 위를 낮게 숨죽여 나는 낯선 건반 검은 해령을 가로질러 바다 몰래 바다 깊이 가라앉는 그 음계의 죽지를 겨냥하여 낚시채비는 내가 날리고 너는 손톱을 또각또각 젖몸살하는 동공 속 파도 어느 이랑에선가 솟구쳐 오를 악상 니 눈썹처럼 휜 수평선 저 너머 그랜드피아노 한 대 둥둥 화물선처럼 떠 있겠지 차영호 (車榮浩)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사)우리시회원.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630 1시간 40분이라고 안내자는 말했습니다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1441 2018-03-01
1시간 40분이라고 안내자는 말했습니다 유족대기실로 유족들이 옮아갑니다 화면에 글자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화면에도 글자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화면에만 글자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 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 아기의 방 창밖이 컴컴해지고 때 아닌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진다 행인들은 낯선 집 처마 밑에 서거나 고개 숙이고 달려가고 그 때 나무는 번쩍 더 높이 팔을 들었을 것이다 늙은 나무뿌리 같은 손이 잠든 아기를 가만가만 도닥인다 아기는 천둥소리도 못 듣고 빗소리도 못 듣고 꽃이 가득한 풀밭을 날아만 다니고 머리 밑에 송송 땀을 피우며 날아다니고 어디에서 낙타는 와서 아기는 낙타를 타고앉아 낙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흔들며 꺅 꺅 소리를 지르고 자는 아기가 번쩍 눈을 뜬다 으앙 울음이 터지려는데 늙은 나무뿌리 같은 손이 눈뜬 아기의 마음을 가만가만 도닥인다 아기는 스르륵 눈을 감고 노란 꽃 속으로 들어가고 꽃 속에서 노란 나비 떼가 날아오르고 나비 등에 탄 아기도 날아오르고 햇살을 만지며 노란 빛알을 만지며 하나님 얼굴을 만지며 하나님 목을 타고 앉아 하나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흔들며 꺅 꺅 소리를 지르고 자는 아기가 번쩍 눈을 뜬다 벌떡 일어나 기어나간다 늙은 나무뿌리 같은 손이 아기를 들어 안아서 꼭 안아서 도닥도닥하면 아기는 다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들어가고 어디서 무지개는 달려오고 무지개를 타고 앉고 무지개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흔들고 꺅 꺅 소리를 지르고 아기는  
629 스노우 볼 외1편/안민 file
편집자
1611 2018-03-01
스노우 볼 안민 국경도시 위로 궤도를 이탈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몸은 욕망과 순수만이 혼재되었을 뿐이었다. 구원 없이 작곡된 레퀴엠처럼. 내상을 입고 피 흘리는 눈동자 곁, 흰 꽃들이 수북하 게 피어 있었다. 계절을 지운 식물의 비밀 에 관해 염려하지 않았다. 이국의 음률로 채색된 불빛들, 좌표를 잃은 것도 그곳에 흘러든 것도 포즈에 불과했다. 허공의 방, 밀폐 내부의 또 다른 밀폐. 기억 하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처음이 적주赤酒 속에 담겨 일렁거렸다 한 번도 의지로 겨울을 설계한 적 없어요. 월경한 이들에 의해 엎질러진 풍경, 다친 꽃은 여전히 줄기 속을 흐르며 욕망했지만 태엽은 통증을 감고 있었고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고 음악이 다 풀리면 태엽이 멈춰야 했지만 그녀는 금세 녹아버릴 눈꽃 모양 위태했다. 흐린 날 눈빛처럼 아득하던 적주赤酒. 유리에 부딪히는 눈을 바라보다 고독도 모아 태우면 저렇게 흩날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갈빗대 사이에 박힌 고드름. 음률이 와류를 일으켰지만 침묵은 계속되었고 투시되지 못한 불빛만이 국경을 건너고 있었다. 엎질러진 사연은 증발하지 않는다는 지문이 심장 근처를 스쳐갔는데… 새벽녘, 나는 유체처럼 외부였다. 문득 돌아본 저편, 힘없이 흔들리는 손이 보였다. 인적 하나 없는 희뿌연 원형 속에서 알레그로–55b번 다 단조 91. 01. 어느 구간 눈 펑펑 내리는 흐린 허공에 짓눌려 나는 죽었 다 단조 02. 00. 어느 구간 차가운 스모그 알갱이에 뒤엉켜 나는 또 죽었 다 단조 16. 05. 어느 구간 아무도 없는 새벽 공터, 음률의 삼각 날을 맞고 흰 피를 뿌리며 나는 다시 죽어야만 했고 독하게 끊었던 담배를 독하게 다시 피웠 다 아- 쿵쿵쿵 함몰하는구나 나는, 그랬 다 난 세 번이나 죽었으므로 유령이 다 아- 이히히히 당신은 유령이 웃는 걸 본 적 있는가? 웃음을 생선회 썰듯 썰면 지난 시간이 보일 거다 이히히히 그래에, 펄럭대는구나 하양이다 검정이다 음통이 다 아- 내 웃음은 고음처럼 히득거리고 히히 헉헉 히히 헉헉거리 다 아- 나는 퇴고도 되지 못한 채 모든 음표를 죄다 잃었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사막 바깥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이듯 기억과 또 어떤 기억과 회상하기 싫은 기억과 온몸으로 떨쳐내려는 기억의 바깥이 나의 내부이다 나는 밀려오는 기억을 태우고 또 태워버리지만 나는 이히히히 유령이기에 기억에 매몰되어 기억에 감금되어 기억을 횡단해야 하고 모든 통각이 우수수 피는 곳에 던져져야 하고 내 발바닥 은 더 이상 그림자를 키우지 않아야 한다 이히히히 흐느적거리는 내 몸은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생도 뭐도 더는 나에게 어떤 수작도 부리지 않고 ****************** 프로필 . 본명 안병호 . 경남 김해 출생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부산 작가회의 회원 . e-메일: dominiko8@hanmail.net  
628 네 계절의 사내 2 외1편/이승호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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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2018-03-01
네 계절의 사내 2 나 기쁨을 원하거늘 언제든 잠시 울음이 그친 언덕 위에서 갖가지 음률로 뒤섞인 새들의 노랫소리 다시 들려오리니 내가 어떤 세대나 시대에 속하든 한 생명체로서 기쁨에 젖게 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지난 노동이 온전히 나를 한 인간으로 만들려 했다면 하루 종일 해안가의 작은 숲과 모래사장과 수수한 마을길을 걸으며 나는 또 다른 기쁨을 맛보려고 그러나 광인들의 맥박은 불덩이를 던지며 나를 향해 울려오느니 바다여, 내 기쁨과 두려움 가운데 우뚝한 자여 오늘은 너의 대지 위로 비가 쏟아지는구나! 네 광활함 뒤에 숨어있는 어떤 의지가 저 붉은 빗줄기들을 다 감싸 안으려는 것처럼. 도로아미타불 그날 밤도 큰스님 옆에서 잠을 자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찌할 수 없어 아뿔싸,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이 알대가리 중놈이 이리 마음이 넓은가 무량수전 한 채는 너끈히 짓겠구나 큰스님은 제자의 행각이 늘 미더웠지만 세상을 떠돌다 오너라고 내쫓았다 어린 스님은 돌투성이 산길을 내려오다 쏟아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큰스님, 세상에 이보다 더 재밌는 말이 어디 있어요 보름 전쯤 저잣거리로 탁발을 나갔다가 ‘털보지물’ 앞에 이르렀는데 거기서부터 시작한 웃음이 산중까지 따라와 문득 문득 그러나 질긴 웃음이 고약하게 도로아미타불! 이승호 춘천 출생. 2003년 『창작21』등단. 시집『어느 겨울을 지나며』『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외. 이메일 nacham1@hanmail.net  
627 걸신/이원준 file
편집자
1443 2018-01-31
걸 신 ‘아, 배고파서 안 되겠어.’ 과자를 챙겨오지 못한 불찰에 화가 치밀었다. 근무 중에는 물론 퇴근 후의 비상식량이었는데 서두르다 깜박했던 것이다. 노란 치즈크림을 품고 있는 그것이 자꾸만 아른거려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정우가 급히 차를 세운 곳은 집을 불과 이백여 미터 앞둔 중학교 정문 근처였다. 종종 그래왔듯이 단골 분식집에 들어가 대충 요기를 할 작정이었다. 도저히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식탁 앞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기에는 늘 고통이 뒤따랐다. 이번만은 사력을 다해 견뎌내고자 스스로를 다그쳤다. 신혼의 아내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오늘만큼은 덜어내고 싶었다. 기필코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오랜 만에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리라. 다짐과는 달리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극도의 배고픔이었다. 이내 쓰리고 쑤시는 통증으로 변해갔다. 조금만 참으면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밥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또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어질어질하고 팔다리가 후들거려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언제 괴성을 지르며 폭발할지 몰라 똥끝이 다 탔다. 퇴근길 분식집 출입은 꽤 오래 지속돼온 일과였다. 학창시절 하굣길 역시 그랬다는 고백에 아내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실은 어쩔 수 없는 남편의 성격 탓에 포기를 해버린 결과일지 모른다. 연애시절보다 더 비만해져 백 킬로그램을 훌쩍 넘긴 정우는 먹는 일에 간섭을 하면 흥분하기 일쑤였다. “아줌마, 참치김밥 두 줄 빨리요.” 가장 빠르게 나오는 김밥의 주문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잠시 후 김밥이 오자 손으로 두 개를 덥석 집었다. 그것을 우적우적 씹으며 한손으로 젓가락을 챙기고 다른 손으로는 어묵국물을 그릇째 들어 마셨다. 단 한 번 체하거나 소화불량에 걸린 적 없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게 여겨졌다. 정신없이 김밥을 해치운 정우의 입가에 시물시물 미소가 묻어났다. 반배부른, 그래서 약간 아쉬운 상태였지만 안도감이 나머지를 채워주었다. 그래서일까, 다급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은근히 경쟁의식 아래 서로 곁눈질을 하고 있는 입사동기의 이죽대던 입이 먼저 스쳤다. “배고픈 게 그렇게 참기 힘들어? 당장의 욕구충족이 불행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잖아. 거울에 비친 몸을 좀 봐. 이제 막 결혼도 한 사람이 그게 무슨 무책임한 자기관리야. 지난번 검진 때 당뇨에 고혈압에 고지혈증까지 삼관왕으로 장난 아니었다며. 그런데도 왜 근무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군것질을 하고 서랍에 숨겨놓고 야금거리느냐고. 화장실에 앉아서까지 핸드폰으로 인터넷 개인방송 먹방인가를 본다며. 허, 결국 정신력 문제 아니겠어?” 걱정으로 포장했지만 속에 든 비아냥거림이 선명히 보였다. 그런 상태로 저와 경쟁이나 되겠느냐는 조소가 숨겨져 있으리라. 그 은밀한 속내를 내비치듯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취기 앞세워 건네 온 말이 있었다. “넌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너 자신 때문에 패배할 거야. 가장 회복하기 힘든 패배. 만약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키는 대로 살라고. 근데 말이야, 방종이 지나치면 젊은 육체를 늙게 만든다는 말이 있거든. 여섯 살이나 어린 와이프는 어쩔 겨?” 그 대목에서 주먹을 날려주려다 겨우 주머니에 감췄다. 사실 정우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식습관으로 몸 관리가 엉망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거리가 앞에 놓여졌다. 그것들을 만끽하는 외아들에게서 부모의 흐뭇함은 커져갔다. 나중에는 부모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식탐을 부리다보니 일상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어김없이 두 시간 간격으로 찾아오는 심한 공복감에 지치고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일은 없지 않은가. 과자와 빵을 사달라고 손 벌린 적도 없다. 순전히 자력으로 조달하여 해결하고 있는데 왜 눈에 쌍심지를 켜는지 분통이 터졌다. 정말 위기가 닥친다면 그때 관리하면 되지 않겠는가. 정우는 어차피 먹자고 사는 인생, 승진과 출세도 식후경이라며 쩝 입맛을 다셨다. 입구 쪽에 마주앉아있는 두 사람도 비로소 눈에 띄었다. 허기를 부여잡고 들어올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일흔 살이 넘었을 할머니 앞에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추레한 차림의 사내가 속 빈 배낭처럼 앉아있었다. 차츰 그들이 조성해 놓은 어색한 풍경이 거슬렸다. 사내만 허겁지겁 먹어대고 있었다. 김밥은 물론 방금 앞에 놓인 라면마저 독식하는 모습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허, 나보다 더한 인간이네. 어머니뻘 되는 노인네를 앞에 두고 혼자 걸신 든 것처럼 굴다니!’ 정우는 식식거리며 그를 향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순간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면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얼큰한 국물에 적신 김밥의 별미가 뒷덜미를 잡았어도 과감히 뿌리치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휴대전화를 꺼내 식탁의 상황점검만은 빼놓지 않았다. “나 지금 집 앞인데 곧바로 밥 먹을 수 있지?” 그 소리에 사내가 흠칫하며 정우의 불룩한 배를 힐끔거렸다. 할머니가 말없이 단무지 접시를 밀어주자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도 떨떨한 표정을 쉽게 못 벗었다. 아내 대답에 반색한 정우가 눈으로 재빨리 사내의 라면그릇에서 한 젓가락 건져냈을 때였다. “국물도 마시면서 들어요. 그러다 체하면 어쩌려고.” 할머니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왔다. “네. 그나저나 또 저 혼자만···.”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갑을 꺼내려던 정우는 머춤한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주었다. “난 집에 가서 대충 한술 뜨면 되니 염려 말아요. 하루 한두 끼가 전부일 텐데 매번 이런 바깥음식이라 미안해요. 집에 식구가 없고 일을 다니느라 마땅한 반찬 하나 해놓지 못하는 통에.” “무슨 말씀이세요. 늘 제가 죄송하고 고맙죠. 덕분에 다음 주면 다시 일을 나갈 수 있게 됐어요. 월급 타면 그땐 제가 대접해 드릴 게요. 이웃에 산다는 인연으로 그동안 굶지 않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친 몸 추스르며 잘 버텨왔어요. 나쁜 길로 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덕분에 다시 일을 하게 됐으니 천만다행이에요.” 밖으로 나온 정우는 잠시 길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처음 경험하는 전율에 시달렸다. 가슴에서 출발한 떨림 하나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갑자기 들이마신 겨울 찬바람 탓만은 아닌 듯싶었다. 명치 쪽이 둔해지면서 무언가 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뒤따랐다.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 부위를 연신 쓸어내렸다. “꺼억, 꺼억···.” 예사롭지 않은 트림이 이어졌다. 참치의 비릿함이 다른 날과는 달리 역겹게 치밀었다. 김밥의 밥알들마저 일제히 날카로운 쇳조각이 되어 위벽을 온통 난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숨이 멎을 듯 답답함이 심해졌다. 차 문을 열려던 정우가 휘청거렸다. 차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제 모습을 보던 정우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너···.” * 이원준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시인, 소설가. 《흔들림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 《김오랑》 《김구》 《이상》 《권정생》 《노먼 베순》 《넬슨 만델라》 《정약용의 편지》 《조선왕들의 속마음》 《누가 조선의 영의정인가》 외  
626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美山정경해 file
편집자
1433 2018-01-31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쉿,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종종거리면서도 묵직한 걸 보니 그녀인가 봅니다. 기분 좋게 한 발 내딛던 나는 멈칫합니다. 저기 하얀 우산을 쓰고 그녀가 서 있네요. 토닥토닥 소리가 들립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비가 제법 내리는 새벽인데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나봅니다. 그녀는 나에게 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어쩌면 나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걸 느낍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나는 그녀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립니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봅니다. ‘오늘은 어떤 빛깔일까. 폭우가 내린 직후처럼 탁하지는 않겠지. 비가 내리고 있지만 흐리지는 않겠지. 그가 품는 모래알과 풀잎은 어떤 표정일까. 방긋 웃어줄까. 아님 몸을 살살 흔들며 싱그럽게 일렁일까.’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입니다. 그녀의 생각에 장단을 맞추듯 나는 말갛게 씻은 얼굴을 내보입니다. 아직은 약간의 큼큼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도 신이 납니다.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흥얼거리며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요.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다행스럽다는 표정입니다. 오늘은 그녀의 얼굴이 밝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매번 다릅니다. 어떤 날은 걱정스러웠고, 또 어떤 날은 신기했습니다. 흐뭇한 표정이 되기도 했고, 암울한 표정이 될 적도 있지요. 그런가하면 귀여워 못살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저 혼자 웃곤 하지요. 더러는 울상을 지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밝은 표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는 기분에 따라 표정이 변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주로 나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얼굴로 나에게 와서도 내가 칙칙하거나 어두운 빛깔을 띠면 그녀도 덩달아 칙칙하고 어두워지거든요. 그녀에게는 나를 바라보는 나름의 기준이 있나봅니다. 단순히 나의 빛깔만 바라보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올 때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세세히 훑어봅니다. 내가 품지만 나를 받쳐주는 모래와 자갈을 보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풀잎을 보고, 간간이 날아와 먹이를 쪼는 백로와 오리 떼도 바라봅니다. 그녀는 그들을 통해 나의 몸 상태를 짐작합니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의 표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나는 그녀를 십 수년째 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새벽이나 초저녁에 주로 나를 찾아왔지요. 날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틈틈이 나에게로 왔으니까요. 꼭 한가할 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바쁘게 보일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나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종종걸음으로 와서는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 볼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우산을 접어 손에 든 것을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나봅니다.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내 갈 길을 갑니다.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낭떠러지 같은 계단을 만나네요. 솟구치는 몸을 다잡자마자 나를 가로막는 돌을 만났어요. 급히 휘돌아 나오며 숨을 몰아쉽니다. 잠시 평온한가했는데 쓰레기장 같은 곳이 불쑥 나타나네요. 공기 중에 떠돌던 온갖 불순물이 부유물로 둥둥 떠 있습니다. 아찔합니다.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만나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발 내딛는 순간 요동을 칩니다. 흰 거품을 요란하게 일으키며 평정을 찾으려 애를 써 봅니다. 발을 딛자마자 거대한 바위를 만나 한차례 튀어 오르기도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물보라 한번 일으키고 말지만 그 충격은 대단하네요. 현기증이 일지만 눈을 질끈 감습니다. 새롭게 태어나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첫발은 나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듯 나와 끊임없이 만나고 합쳐지는 수많은 물줄기가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물줄기를 만나 손을 잡고 점점 넓게 퍼져나갑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넓은 바다에 가 닿게 되지요. 사실 내가 이렇게 새롭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무수히 흔들리고 깎였습니다. 부딪고, 깨어지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아요. 모질게 재활훈련을 하고 건강을 되찾기까지, 다시 세상을 품어 안기까지 갈등은 또 얼마나 많았게요.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큰 기쁨입니다. 나는 작은 먼지를, 모래를, 돌멩이를 쓰다듬었지요. 물고기와 헤엄을 치고, 물가의 풀숲을 어루만졌지요. 그렇게 점점 퍼져나가 들판을 아우르고 거대한 산을 품었습니다. 살짝 말하지만 나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그녀도 끌어안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어느 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꼈지요. 나의 몸은 짙으면서도 엷은 빛깔입니다. 이제 막 떠오른 태양도 그런 내 안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나는 태양을 안고서야 맑은 물로 거듭날 것처럼 그를 품어 봅니다. 태양도 나와 한 몸을 이루었다는 듯 깊숙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네요. 그런 다음 물빛을 받아 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나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생명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흐를 수밖에 없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앉았던 자신을 되찾고 싶어서 굳이, 빗물정수장을 막 통과하는 나를 찾는 것인지도. 약력) 수필가 美山정경해 *경기 안성 출생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 『까치발 딛고』2011 『내 마음의 덧신』2016 *이메일 주소 : jeang120@hanmail.net  
625 사투(死鬪)를 벌이는 이유 외 1편/임영석 file
편집자
1674 2018-01-31
사투(死鬪)를 벌이는 이유 보석 하나를 만들어 파는 데도 수많은 사람이 사투를 벌인다 어느 사람은 땅을 파서 원석을 캐야 하고 어느 사람은 그 원석을 가공해야 하고 어느 사람은 진열장에 놓고 손님을 기다려야 하고 어느 사람을 거금을 들여 보석을 구입해야 한다 이 과정이 없다면 보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 보석을 손에 넣은 사람보다도 사투를 벌여 보석을 만들어왔던 사람들은 이미 눈동자 속에 귀한 보석 하나를 숨기고 산다 그 귀한 보석이 눈 속에 없다면 사투를 벌여서 보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보석은 사투를 벌여 지켜내는 것이지 거금을 들여 사고파는 게 아니다 아이스크림은 왜 달콤한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기 위해서는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뜨거우면 녹고 너무 차가우면 딱딱해서 아이스크림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평화도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다 너무 뜨겁지 않고 너무 차갑지 않는 평화를 지켜내는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슈퍼마켓을 자유롭게 달려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국방비*가 43조원이 들어간다 아이스크림이 달콤한 이유는 평화롭기 때문이다 *2018년 우리나라 국방비 예산은 43조 1581억원이 편성되었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985년 『현대시조』등단, 시집 『받아쓰기』외 5권,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외 1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들』이 있고,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2016년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  
624 동백에게 외 1편/하재영 file
편집자
1524 2018-01-31
동백에게 시린 바람의 숫돌은 거칠었다. 뿌리 하나하나 날카롭게 다듬으며 무딘 허공을 베고 벨 삶이 그러하듯 날 것인 생생한 언어 허공 가지에 얹혀두고 다시 불을 피우겠다며 붉은 피를 삼켰다. 봄으로 낮은 봄으로 들어서는 입구 치열함 곁에 두겠다고 다짐하는 동백의 문안 편지 다시 열 때 겨울 시린 바람은 시들어 가고 이월의 하늘로 눈은 녹으며 동백꽃 그 끝없는 핏물을 닦고 있다. 안개 늪 영하 십도 이상의 한파에 수도는 동파하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앞을 가리는 안개를 헤치며 시골로 가는 길에 청주 공항에 착륙할 베트남 다낭발 비행기가 일기불순으로 인천공항에 내렸다는 문자를 받았다. 짙은 안개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난 청주에서 세상에서 처음으로 해외로 편지를 썼던 베트남으로 다낭에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방전된 것 같은 오래 된 문자를 씹고 씹을 때 삼촌들이 총을 들고 목숨을 담보로 갔던 베트남은 가까웠다. 비뚤비뚤 당시 썼던 위문편지 그 나라에 도착했을지 궁금했다. 귀신도 잡는다는 무용담에 써늘했던 안개는 늪처럼 겨울을 등에 업고 며칠 추위를 견딜 다낭으로 나는 나를 전송하고 있었다. 하재영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작품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등 7feeling@hanmail.net  
623 작은 배, 수평선을 건너다 외 1편/이민숙 file
편집자
1605 2018-01-31
작은 배, 수평선을 건너다 작은 바람이 분다 작은 키스가 실려온다 작은 샘이 출렁이고 작은 그리움을 낳는 시간이 작은 항아리를 이고 온다 작은 새댁은 작은 새벽에 깨어 작은 오줌을 싸고 작은 콩을 넣은 작은 밥을 짓는다 작은 사랑방에 차린 밥상을 작은 거지들이 둘러앉아 작은 슬픔으로 한 숟갈 떠서 먹는데 작은 새 한 마리 작은 햇빛을 모아 찍! 똥을 갈기고 날아간다 작은 소리는 감미롭다 작은 귀가 작은 음표로 받아적은 작은 하루 작은 거지의 작은 딸이 작은 배고픔을 찍어 작은 동화를 쓴다 작은 동화의 작은 주인공은 오늘! 지금! 너와 나! 작아서 금세 사라질 것들에게 첫사랑의 옷을 입혔다 첫사랑은 작고 갑자기 태어난다 첫사랑은 작고 갑자기 황홀하다 첫사랑의 배가 수평선을 건너간다 작은 등대가 깜박거린다 작은 불안이 작은 눈을 찡긋 윙크한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생, 화안하다! 입동, 은행나무 빗살무늬 토기를 살짝 건드리며 노래하던 은행나무가 말했어요 내 이파리는 오줌방울이야 메마른 대지를 가만히 적셔주고 싶어 부엉이 눈빛으로 레일 위를 빠르게 굴러오는 겨울이 어둠을 톡톡 두드리며 걸어올 때 철로 아래엔 레드 카펫이 펼쳐지네요 머리칼 붉은 여행객들은 배낭을 맨 채로 잠이 들었어요 언제나 캄캄 밤이었던 열세 살 소녀의 가슴 속 소설책이 오줌에 젖어 녹아내려요 끝없는 이야기, 밤마다! 어둠의 옷을 벗기네요 은행나무가 더 투명해진 눈빛으로 말했어요 내 오줌방울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쓴 노란 잉큿빛 시야 “뼛속의 만남만이 디엔에이를 바꿀 수 있단다” 골수이식을 마친 후 파르랗게 수염을 쓰다듬던 아버지가 말했어요 너는 나의 뼈, 나는 너의 이슬방울, 나머지는 뮤즈의 살(肉), 우연이나 순수 드디어 야생고양이가 된 은행나무 이파리가 갸릉 갈갈 으스대는 마을 골목길 오줌에 젖은 시가 은행이파리 연필 되어 춤추고 쓰러지고 하늘엔 열일곱 소녀의 가슴속 달이 흰 눈을 꿈꾸듯 창백하게 환한 이민숙 약력 1998년 《사람의 깊이》에 ‘가족’외 5편의 시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등이 있음.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에서 책읽기, 문학아카데미 프로그램 운영하고 있음.  
622 밤안개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1511 2018-01-31
밤안개 묽은 미음만 드시던 형은 이제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풀어진 미음처럼 누군가 또 짖는다 그와 새끼손가락 걸었던 무언의 약속은 밤에 더 뚜렷해지고 무더기로 모인 저 울창한 소리, 참 어이없는 방류다 잔뜩 웅크린 귀는 안다 소리 없는 생애가 더 슬프게 짖는다는 걸 그건 이름 없는 별들이 전해주는 말이다 묶어둘 수 없는 삽살개처럼 언뜻언뜻 아득해지는, 눈을 반쯤 뜨고 보아도 네 허물보다 내 허물이 더 캄캄하잖아 막막한 나는 언제 철이 들지 안아줄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저 지극한 컹컹컹 소리가 없다 물의 마을 구름의 지느러미도 강의 치마폭에서는 잠시 쉬어간다 등 뒤의 햇살처럼 뭔가 풀리기 좋은 날, 양팔 벌려 반겨주는 오어사 원효교에서 물푸레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한 바가지의 나를 놓아 준다 잉크처럼 풀어지며 달리는 미꾸라지, 젖은 가슴 속으로 더 적시는 나도 저렇게 풀릴 때 있을까? 물 속 마을이 출렁한다 관절 풀리는 저 마을에도 사계절이 자라는지, 동네 어귀 당나무 그늘이 있는 집에서는 닭이 알을 품고 종아리 드러낸 채 아장아장 걷는 햇살 순해진다 이리 와! 걱정 많은 엄마 같은 물이랑이 저 혼자 부푼다 먼데 종소리 달려온다 완창이다 강물이 젖은 허리 접었다 편다 산그림자도 욜랑욜랑 없는 꼬리를 흔든다 차르르 날 밝는 게 두려워 밤마다 가슴에 돌을 안고 잠 들었다는 당신 엉덩이 털며 일어서는 구름 이야기 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젖지도 않은 그림자는 처음처럼 새것이다 서 하(徐 河)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시안』신인상 수상 ♧2010년 시집 『아주 작은 아침』시안 출판 ♧2015년 시집 『저 환한 어둠』시와표현 ♧2015년 『대구문학상』수상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시협 이사, 대구문협 회원  
621 구름 외 1편 /손창기 file
편집자
1423 2018-01-31
구름 구름 한 뭉치를 어머니는 절구통에 넣고 있었다. 절구통에 있던 구름이 가끔 튀어 오르기도 했다. 자궁 속처럼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잘 빻아졌다. 구름은 자기끼리 뭉치고 헤어지곤 했다. 흙담을 드나드는 안개처럼 몸속에서 물기가 맴돌았으면 했다. 잘 빻아진 구름이 햇살과 함께 증발하기 시작하자, 구름이 어머니의 물기를 빨아 들였다. 구름이 허파를 점점 조여들게 하더니 어머니를 삼켰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작불을 지피자 굴뚝이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연기 품은 구름이 점점 비대해지자 어머니를 내놓았다. 프라이팬에 깨를 볶듯이 마당에서 물방울이 춤을 추었다. 몸속에 물방울이 맺혀 어머니가 식구들에게 슬픔의 구간區間을 줄였는지 모른다. 입을 따다 그대의 갈고리를 넣어 입을 따 보라. 짠물이 나가도록 간이 알맞도록 박달대게, 홍게의 입을 따 보라. 사각의 찜통 안에서도 사지육신四肢六身이 떨어지지 않고 바탕이 설 테니 쿠싱한 냄새를 끌어당기는 김살은 도드라진 모서리를 갉아 먹고 있다. 배 한척이 섬의 입을 따고 들어간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마블링이 끊어지지 않는다. 저 섬은 곧 삶기고 있는 중이다. 김살을 뿜어내 섬이 둥글어진다. 짠물이 몸에 가득하니 입을 따 보라. 섬 안에다 쟁기를 델 수 있을 테니 어떤 이유든지 입을 닫지 마라. 시퍼런 식칼로 객귀客鬼를 풀어낸 적 있어 사지 멀쩡하고 입에 밥알 들어간다. 약력> 손창기 - 경북 군위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달팽이 성자』가 있음. jangoyes@hanmail.net 주소> 경북 포항시 북구 우현동 우창서길 34번지 대동고등학교  
620 부활 외1편/심승혁 file
편집자
1743 2018-01-31
부활 노랗게 익어 가다가다 숲을 닮으려던 초록빛 젊음이 퍼런 서슬에 댕강 잘려왔다 바다에서 태어나 햇살로 키워진 저 짠내나는 투쟁의 것들이 쏟아지자 싱싱한 죽음이 하얀 숨을 몰아쉬는 몇 번의 자맥질로 풀이 죽어간다 이대로 부패일 리가 없다 돌아갈 수 없는 흙과 고난의 바다, 그 틈으로 발갛게 삭혀질 세월을 얹자 생생하게 발효될 아삭대는 숨을 불어 넣자 잊었던 새 맛의 삶을 기억해 낸 목울대가 침을 꼴깍이며 분주한 손길로 인공호흡 중이다 담금질 네 심장이 겨울 바다의 온도와 같아지면 내 그곳, 역동의 뜨거움을 두 손에 담아 열풍의 여름 바람처럼 던져주리라 얼어붙은 밤의 소리로 깨진 너의 파편은 내 붉도록 터져 나온 핏방울에 닿아 녹아든 하나의 심장으로 뛰게 될 테니 네 가슴마다에 태양의 바람이 불고 네 파편이 내 상처의 뜨거움과 같아지는 날, 더 이상은 차가울 리 없을 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을 우리로 만나게 되리라 문학광장 시부문 등단 문학광장 카페 부위원장 2017년 상주문학제 기념문집<우리는 하나> 참여 2017년 인천미술전람회 시화부문 특선, 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