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5호...
   2020년 0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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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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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93 2014-11-03
792 짚 1. 외 1편/박찬선 file
편집자
258 2019-11-30
짚 1 다 주고 떠나는 마지막 가는 길은 부드럽다. 빈들로 사라지는 종소리의 여운이듯 해질녘 집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듯 땡볕과 장마 속에서 초병처럼 서서 버틴 무서리 내린 찬 논바닥에 누워 덕장의 명태처럼 바람과 햇살에 몸 말리는 초분草墳 가벼운 육신 무더기로 꽁꽁 묶여서 수의 같은 흰 비닐에 싸여서 누룩 뜨듯 익혀 진한 맛을 들여 온 몸을 소처럼 고스란히 공양 올리는 우걱우걱 되새김질하는 저물녘의 우리 움직이는 붉은 꽃으로 불어나는 은밀한 시간 함께 머물렀던 빈자리 벼 그루터기 추워 보인다. 마른 눈물 자국 보인다. 짚 2. 아버지 짚이 되셨네. 햇살 밝은 가을날 벼 거둔 천수답에서 퇴비 깔고 보리씨앗 넣으시며 '참 좋다 참 좋다' 이르시고 짚이 되셨네. 마당 가득 처마보다 높게 차곡차곡 쌓인 낟가리 볏짚으로 쌓은 황금의 성 그때는 정말 넉넉한 부자였네. 은은한 달빛 넣어 꼬아낸 새끼줄보다 질긴 삼신 줄을 엮어 오신 우리 아버지 포성이 오갔던 그해 여름 문경 새재 보국대 다녀오신 뒤 목마를 해서 건넜던 낙동강 아버지의 높은 어께에서 솟아났던 쇠죽솥의 구수한 짚 냄새 한가한 날 약주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불그레한 얼굴이 근심을 태우셨던 아궁이의 불기운으로 상기된 그 모습으로 나도 홍시가 되면 멍석에 누워 별 헤며 들었던 가마니 치는 소리 솟아나고 이엉 엮어 새로 덮은 집의 따뜻한 겨울밤에 닿는데 짚 거둬간 빈 들 썰렁하다 못해 차가움으로 오는 대설 지난 지금에야 조금 알 듯도 하네. 짚이 되신, 흙이 되신 아버지의 길지 않은 생애를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돌담 쌓기』『상주』『우리도 사람입니다』외  
791 불턱 방담放談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209 2019-11-30
불턱 방담放談 서로의 심장에 총탄을 재던 그해 六月, 고향 갯가로 끌려나온 무수한 유령들이 광목천에 묶이어 역사 저 편으로 수장되었다는 어른들의 음계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남도의 외로운 섬 하나가 떠올랐다 그 총알이 왼쪽 눈에 깊은 슬픔으로 커져, 三月의 차가운 물 밖으로 떠올라 증인으로 서자 고향의 수많은 발자국들이 거리거리에 찍어놓은 분노를 활자로 읽으며 그 섬마을의 하도리가 생각났다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은 고향의 날선 목소리 속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사진 속의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자 낯선 국방색 표지들이 두더지처럼 十月의 마음을 도굴하는 장면을 눈으로 지켜보며 그 하도리의 불턱이 자꾸 스쳐갔다 골다공증을 앓는 아낙들의 숨비소리가 쌓아올린 부도, 매일같이 저승의 문턱을 닳아 없앤 물질을 제쳐두고 한지보다 더한 젖가슴을 아이에게 물리며 한라에서 불어오는 四月의 냉기어린 들숨마저 화톳불로 이겨내는 영원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부암역 빛 발한 네온사인을 위하여 흥청대는 값싼 말투와 본능이 자본으로 덧씌워지는 원심을 향하여 지독히도 땅 밑을 환승하며, 아래로 아래로 파묻혀가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한 끼의 밥과 교환할 노동은 여전히 살아 끊임없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재생되고 덜컹거리는 레일 위의 불규칙한 일상으로 낯설게 불거져오는 서로의 얼굴을 비춰보며 고대의 커다란 무덤을 생각해 본다 개찰구 쪽으로 맞닿은 저 벽 너머로 엷은 향내와 둔탁한 곡소리가 수런거리고 눈높이로 가로지르는 주검이 누워 매번 스칠 때마다 이곳은, 순장될 듯한 전생의 기억으로 떠오른다 여전히 햇빛은 광합성을 하는 무리들에 유효하고 낙하하는 빗줄기에 몸을 정화할 기회는 기득의 울타리에 한정되지만 오늘도 살아남아야 할 당위當爲 앞에 생과 사의 거리는 너무도 짧기만 하다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등단.『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외 다수.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서평집『푸른 책 푸른 꿈』.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현재 부산 경원고 교사.  
790 훈연 외1편/유준화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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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2019-11-30
훈연(燻煙) 외증조할머니는 연산 대추골에서 동학군에 가담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죽었다 사구라꽃이 극성으로 피던 대추골에서 징용으로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던 외종조할머니도 죽었다 ✽상강 지나서 얼음이 멍가나무 대궁에 빨갛게 얼던 날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던 외할머니는 컹컹컹 마른기침을 하며 윗방에서 곰방대에 성낭 불을 켰다 그런 밤이면 하얀 사기대접의 자리끼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오장육부가 타고 있는 외할머니의 입에서는 연기가 났다 기다리다 지친 눈두덩이를 훈연하던 그 연기가 매웠던지 어머니는 끌려가지 말라고 나를 삼대독자로 만들었다 제사복이 확 터진 아내가 구시렁거린다 간 사람도, 기다리던 사람도 신생대의 먼지가 된 지금 외할머니의 손자도 할아버지가 되어 훈연되고 있는 중이다 ✽ 서리가 오기 시작한다는 날 순대 순대 국밥을 먹는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점심때 시장에서 순대국밥을 먹는다 마음에 점 하나 툭 찍어놓는 점 심 때 순하지만 대차게 한 번 살아보라는 순대국밥을 먹는다 순대를 채우기 위해 평생 땅이나 후빈 돼지는 이승을 떠나고 나서 남의 살과 피로 순대를 채웠다 땅이나 바라보고 살은 늙은 아내를 데리고 오물오물 순대를 채우기 위해 순대 국밥을 먹는다 목숨 부지 한다는 것은 늘 허기가 심해서 남의 피와 살로 내 순대를 채우는 것이다 이승을 떠난 돼지가 보시한 순대로 늙은 아내와 나는 행복하지만, 잠시 윤회하는 시간 속에서 마주 보는 것이다 유준화 충남공주출생 2003년 불교문예 시집. 초저녁 빗소리 울안에 서성대는 밤 네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외 수상 : 충남시인협회. 충남문인협회 작품상  
789 화관 외1편/박경조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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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2019-11-30
화관 전생을 온전히 지워내야만 비로소 꽃이 된다는 상사화 봄에서 겨울로,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눈물로 꽉 찬 당신의 비밀과 빗물로 꽉 찬 나의 생각까지 다 닦아내지 못하고도 한 통속이라 기운차게, 이 습한 화단을 뚫고 내 필생 속에 핀 당신 참 명랑한 화관입니다 미완(未完)은 여기서 이렇게도 지극하나 봅니다 새벽 비 내리는 구간 모란 촉에 스며드는 수국 꽃방을 넓히는 놀이터에서 저 혼자 미끄럼틀 타는 발정 난 길고양이 울음, 마음 쓰이는 인력시장 박 씨 발목 잡는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단련시키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약력/경북 군위출생 2001년 계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현재 『사람의 문학』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별자리』 출간  
788 늙은 호박 외1편/채형복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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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2019-11-30
늙은 호박 친구 농장에서 얻어온 호박을 가득 싣고는 집으로 돌아와 차 트렁크를 여는데 늙은 호박 하나 떨어져 내리막길을 굴러 데굴데굴 마을 아래로 신나게 치달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지켜만 보는데 달달하고 맛있는 전을 부쳐 냠냠 짭짭 먹을까 몸에 좋은 진액을 우려내어 주욱 쭉 빨아 먹을까 행복한 상상이 저 멀리 도망가고 있다 자신을 죽인 뒤 시신을 토막 쳐서 세상의 구경거리로 삼지나 않을까 여러 대의 수레에 팔다리를 나누어 묶고는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게 겁이 났을까 사지를 탈출한 둥근 호박, 경사진 길을 가로질러 잘도 굴러간다 하늘이 사람에게 준 권리 중에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던 근엄한 인권법학자는 어디 갔나 풀숲에서 꼼짝 않고 숨어있는 늙은 호박을 기어이 찾아내 포박하고는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음습한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 호박손 팔다리가 없는 호박은 순 백수건달 심보로 와, 우짤낀데 죽일라카마 한 번 죽이봐라 일단 머리를 들이밀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고 넝쿨을 똥배 삼아 땅을 힘차게 딛고 일어선다 벽을 만나면 허리를 꺾어 수직으로 덤불을 만나면 가시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슬그머니 기어올라 넓고 거친 잎으로 덮어버리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호박이 호기를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늘고 긴 덩굴손이 있어 누구든 잡히는 대로 꼼짝 못하게 꽁꽁 얽어매고 마는 까닭이다 호박은 세상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늘 향해 뻗는 호박손의 희망은 헛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호박손아, 너의 갈라진 손가락을 활짝 펴 비겁한 세상의 목울대를 콱 조아버려 숨통을 끊어버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텃밭 작물은 모두 날개를 꺾고 고개 푹 숙인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데 덩굴손을 죽창으로 앞세운 호박만 삼삼오오 대열 지어 기세등등 힘차게 진군하고 있다 채형복/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 및 <칼을 갈아도 날이 서질 않고>(2018)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  
787 우리 집이 없다 /美山정경해 file
편집자
215 2019-11-01
우리 집이 없다 / 고향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로 고향의 경조사에 일일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직접 가서 조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 근자에게 함께 가자고 연락했다. 근자는 조의금만 전하기로 했다면서 참석하지 않을 뜻을 비쳤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고 동창생들의 경조사에 빠지지 않는 근자가 왜 그럴까. 의아했다. 하지만 조문하고 우리 엄마 집에서 같이 하룻밤 묵자는 말에 그러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면서 이번에 가면 고향 마을을 안뜸까지 샅샅이 훑어보자고 한 마디 덧붙였다. 고향땅에 있는 장례식장을 찾았다. 영정 속에서도 너그러운 인상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망자亡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상주에게 조문했다. 89세의 망자가 돌아가시기 전 크게 고생하지 않았고, 자손들에게 할 이야기도 하고 가셨다는 말에 ‘망자가 복 받으신 분’이라며 모친상 당한 친구를 위로했다. 동창생들이 모여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모인 동창생들은 망자가 내 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유쾌했다. 우리는 조문하러 왔다는 사실도 잊은 채 웃고 떠들었다. 술잔도 몇 순배 돌았다. “우린 우리 집이 없다!”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에 열을 올리던 근자가 갑자기 볼멘소리를 했다. 뜬금없는 그 말에 나는 무슨 그런 말을 있느냐며 웃었다. 근자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이 사시던 고향집은 마을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근자는 집안의 외아들인 오빠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고, 고향집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둘러앉은 동창생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자는, 우리 집이 남의 집으로 되었다는 말을 피붙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도 며칠 전에야 전해 들었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밤이 이슥해서 장례식장을 나왔다. 조문을 함께 했던 동창생의 차를 타고 고향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근자가 여기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근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을 입구 첫 번째 집인 자신의 고향집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기웃거리지도 않고, 새롭게 둘러쳐진 철망을 따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역시 철망으로 만든 대문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이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며 먹먹했다. 우리는 한밤중에 나타난 딸과 딸의 친구를 보며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엄마와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친정집을 나섰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을 안쪽 길로 향했다. 가족이 종종 함께 둘러보긴 했지만 친구와 나란히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을 안쪽은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삼사십 년 전 모습이 아니었다. 그 시절, ‘큰길’로 부르던 대로大路는 골목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조붓하다. 길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돌담을 사이에 두고 소곤거리던 기억속의 집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멋스런 집들이 우뚝 우뚝 서 있었다. 삼거리 미애네 집 옆 느티나무만이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새로 지은 번듯한 집 일색이다. 그에 반해 가뭄에 콩 나듯 두어 채 남아 있는 옛집은 장난감처럼 작고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에는 대궐 같던 집이 저렇게 초라할 수 있는지. 그나마 내가 어릴 적 아늑하게 느꼈던 우리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풀밭으로 변했다. 안마당은 화단을 만들 수 없을 만큼 비좁아도 집채는 제법 컸다고 기억하는데, 집터를 보니 ‘나 혼자 누우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삼거리를 지나 고샅길로 들어서니 발을 내딛기 어려울 정도로 풀이 무성했다. 풀숲을 헤치며 순예네 집, 병수네 집, 애란네 집, 범순네 집, 현순네 집을 더듬었다. 그 반대쪽에 있던 훈자네 집, 종수네 집도 훑었다. 그 집들도 어김없이 큰 건물이나 텃밭으로 변했다. 근자는 집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 풀밭으로 변한 집터만으로도 집의 형태와 집주인을 빠짐없이 기억해냈다. 겉모습이 이미 낯설게 변해서 집은커녕 그곳에 살던 사람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는데, 선훈네 집, 경선네 집, 성기네 집, 금숙이네 집, 종국이네 집, 옥순네 집을 읊었다. 나는 근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근자네가 여러 번 이사를 했다는 사실도 그렇게 기억해냈다. 막연하게 마을 입구에 있는 집이 근자네의 유일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달랐다. 위뜸에만 해도 두 집을 거쳤다. 근자는 성기네 집 옆에서도 살았고, 금숙이네 집 위쪽에서도 살았다. 아래뜸으로 내려온 것은 십여 채의 개량주택이 들어서던 1980년이었다. 최근 남의 손에 넘어갔다던 마을 입구 첫 번째 집은 근자네 소유의 밭에 새로 지은 집으로 근자가 결혼한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근자는 고향집에 대해 애틋했다. 그래서일까. 전에 없이 말이 많았다. 집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만으로도 한참이나 걸렸다. 눈빛은 허망하게 허공을 응시한 채 고향집 추억을 곱씹었다. 우리 집이 없다며 침통한 표정이던 근자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근자가 힘주어 말했던 ‘우리 집’이 부모님께서 살아계셨어도 남의 손으로 넘어갔을까.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서러운데 정들었던 집까지 남의 것이 되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떨까. 내가 걸어 온 지난날을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추억하게 해 주며, 부모님처럼 언제라도 두 팔 벌려 반겨줄 ‘집’이 고향땅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 ‘오빠가 고향집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말을 들었더라면 빚내서라도 그 집을 샀을 것’이라고 한탄하던 근자. 허공에 대고 소리치던 근자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부모님이 장만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던 집은 오빠의 집도 아니고, 오빠의 아들인 장손의 집도 아니야. 그것은 그 누구의 집도 아닌 우리 집이야. 우리집! 우린 이제 그 ‘우리 집’이 없어진 것이라고!” 정경해 약력)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 숲문학회 회원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 <까치발 딛고>, <내 마음의 덧신> 출간  
786 이별의 공식 외1편/남태식 file
편집자
2668 2019-11-01
이별의 공식 잎이 돋기 전에 꽃이 먼저 피듯 꽃이 진 뒤에 잎이 뒤늦게 돋듯 이별 전에 이별이 있었고 이별 후에 이별이 있었다. 바람이 오기 전에 눕는 풀처럼 바람이 지난 뒤에 굳는 뿌리처럼 머물 수가 없어서 서둘러 울고 오래 아팠지만 망각은 없었다. 상처 가장 먼저 떠오르거나 떠올렸어야 하는 말이었으나 그 날 늦어서야 떠올랐던 말은 상처였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도 어떤 강박이 있었을까. 강박이 있었다면 이 강박 역시 상처이겠지. 드러내어야 함에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상처. * 약력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망상가들의 마을』, 리토피아문학상(2012) 김구용시문학상(2016) 수상  
785 정칠성(鄭七星) 외 1편 / 권순자 file
편집자
250 2019-11-01
정칠성(鄭七星) 나의 님은 조선 강토(疆土)이어요 집안이 가난하여 식구들이 배고프니 일곱 살에 어린 기생이 되어 가무로 생계를 이어갔어요 달밤에 세찬 바람이 가슴을 치고 절망이 소리 높여 가야금을 켜니 나라 잃은 설움이 밤하늘을 찔렀지요 스물두 살 흥분에 넘쳐 삼일운동에 만세를 불렀어요 기름에 젖은 머리를 그날로 이별했어요 민족이 제 애인이 되었고 제가 섬겨야 하는 주인이 되었어요 침략자의 노략질이 심한데 더 이상 풍류로 고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나는 조선의 피와 살로 생겼으니 이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살아가겠어요 영어교습소에서 어학을 배우고 타자를 배웠어요 ‘무궁화 자매 모임’에서 재봉과 자수, 편물을 가르쳐 여성의 진정한 독립의 틀을 닦았지요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해야 했어요 유약한 내부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했어요 대구여자청년회를 결성하여 여자들도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지요 여성의 인권은 여성이 힘써 이룩해내야 하는 일이고 대구여자청년회, 조선여성동우회, 근우회는 민족독립을 위한 디딤돌이 되는 길이었죠 당당한 여성이 되는 길이 일제를 몰아내는 길이 된다는 것이었지요 진정한 독립은 노동자를 자본에서 해방시키는 일이고 여성이 남성에게서 해방되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독립의 틀을 다져갈수록 일본경찰의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어요 이유 없는 검거에 시달려도 더 단단해지고 운동에 더 집중했어요 배고픈 어린 기생이었던 제가 독립투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고 조선의 진정한 딸로 다시 태어나는 나날을 보냈어요 나의 님은 조선 강토(疆土)이니까요. 진정한 해방을 위해 조롱과 멸시도 님을 위한다면 달게 받았어요 양파의 다른 얼굴 양파껍질 벗기다 보면 파란만장과 마주친다 하얀 갈피마다 멍든 가슴 몇 개씩 숨어서 매운 눈물 삼키고 있다 짓눌린 어제들이 진물을 흘린다 양파를 벗기는 일이 고통과 마주하는 일이 되다니. 먼 길 돌아 시장에서 만난 매끈하고 고운 양파는 무시무시한 비밀을 켜켜이 숨기고 지독히 매운 냄새를 풍긴다 반짝이는 새하얀 피부 뒤에 끔찍한 사실들이 포진해 있다 노조결성을 방해하는 폭력의 시간들 회유와 협박, 거짓과 조작, 폭행과 해고의 무서운 그늘 양파가 거대한 폭력의 숨겨진 은신처라니. 권순자/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청춘 고래』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회원 이메일: lake479@hanmail.net  
784 낌새 외1편/진란 file
편집자
287 2019-11-01
낌새 나무들의 아미가 붉어졌다 무성하던 수다가 한 입씩 떨어졌다 지난한 폭염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던 수다였다 견딘다는 것은 그다지 웅숭깊은가 바람의 동공은 깊어져 가벼운 수다에도 몸을 날렸다 너에겐 너무 가벼운 잎사귀 점점 어두워지고 더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것 한밤중 고양이 울음처럼 무거운 것이다 길고양이 울음을 굴리며 팔랑귀처럼 떠나는 길 위에 서서 스러지고 있을 흐느낌들 우두망찰 그 배후로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떠나는 길 모롱이에서 돌아보면 차마 성글어진 나무들의 아미에 입 맞추지 못하리라 손을 잡고 잠시 온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훗날 좋은 봄볕에 만나면 알아챌 수는 있을까 가까스로 알아채더라도 처음인 척 해야 하는 것일까 가을 숲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밤이다 구절초 향기 수런거리는 시월은 지워지는 중이다 Photograph 먼데서 갸르릉 거리는 천둥소리 늑골을 흘러내리던 빗물이 울렁이며 예스퍼 랜엄*과 몸을 섞는다 창을 잡아채는 바람은 배곯은 승냥이처럼 덜컹거리며 울어 댄다 숨어 울기 좋은 방, 나는 뭐하고 있나 좀 얄미운 사람일까 는 쓸모없는 궁상 곰곰 곰삭다가 흩어지는 풍경이다 눈까풀 눅눅해지다가 늦여름과 초가을이 상견례 중이라고 공손을 다하여 말랑말랑해지는 귀 *Jesper Ranum - Photograph를 부르는 덴마크 가수 진 란 2002년 계간《주변인과 詩》편집동인으로 작품활동, 현재 계간《문학과 사람》편집인 시집 『혼자 노는 숲』  
783 구구 팔십일 외1편/김상출 file
편집자
245 2019-11-01
구구 팔십일 동짓날 여든한 송이 꽃 달린 매화를 그려 들창 가에 걸어두고 하루 한 송이씩 붉은 꽃심 그려나가다 마지막 송이 채운 다음날 창문 들어 올리면 그림과 꼭 닮은 풍경이 펼쳐진다는 워-매, 고것이 참말이었구만! 구구 팔십일 치운 날 고이 껴안고 꽃잎 하나하나 눈에 넣어 가슴에 새기면서 그렇게 기다리는 것 꽃은 노옥련 할매의 이야기 월사금 못 내서 아들이 학교 가서 기합 받고 그것이 지금도 피눈물 나 돈 없는 것이 죄도 아닌디 지금이나 옛날이나 돈 없는 사람은 살기가 힘들어 삼복염천 젤로 뜨거운 날 담뱃잎 따서 엮고 말리기를 두어 달 허고나면 죄다들 눈이 쑥 들어갔제 근디 해필 춘 겨울에 그것을 전매청에서 매상을 혀 눈길 폭폭한디 민사무소까정 구루마에 실어서 밀고끌고 가믄 그래도 목돈이 생기니께 그땐 그것을 고상인지도 모르고 혔제 지금은 어떠냐고? 글씨, 머시라고 대답을 허까 잉? 암만혀도 그때가 그래도 사람 사는 맛은 있었제 암은. * 월간 『전라도 닷컴』 2018년 6.7월호에 실린, 실제 인물의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음. ------------------- 김상출 1955년생 2011 영주작가 등단 2018 시집 ‘부끄러운 밑천’  
782 낙동강(洛東江) 외 1편/김재수 file
편집자
259 2019-11-01
낙동강(洛東江) 시작이 보잘 것 없어도 이어지면 커진다는 거 속 좁은 마음도 열어두면 넓어진다는 거 가로 막혀 답답할 때는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거 때로는 위로 또 위로 거슬러 오르고 싶다가도 이내 마음을 사려 내려 갈 줄도 아는 거 오늘도 넉넉히 흐르는 너를 보고 배운다. 신호등 앞에서 어머니 빨간 불이어요 멈춰 서서 아까운 시간을 보내야 하나요? 아들아 자세히 보렴 깜박깜박 시간이 파란불을 데리고 네게 점점 다가오고 있잖니? 김재수/창주아동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 해강아동문학상, 상주시문화상, 경북문학상 받음 동시집 『낙서가 있는 골목』외 4권, 동화집 『하느님의 나들이』 외 2권, 산문집 『트임과 트짐』, 편저 『상주의 아동문학』 이 있음.  
781 천.불.곡(川.佛.谷) 외1편/신순말 file
편집자
262 2019-11-01
천.불.곡(川.佛.谷) - 문경 보현정사에서 물소리 귀기울여 듣는 상사화나 이번 세상은 툭 떨어진 푸른 밤송이도 한 번은 마주치고 가는 거 무수한 만남 속에 또 한 번 마주친 거 쉼없이 흐르는 저 물길에 부처 있다면 끝없이 내려서는 이 골에 부처 있다면 어디에나 어느 때나 있는 부처 우리도 가만히 만났다 가는 거 가을 공양(供養) 누구에게라도 정성껏 지은 밥을 나누어 드립니다 가득한 이 床을 받으신다면 두 손바닥 공손히 맞대어 點頭하셔도 좋겠습니다 全身을 불타오르게 하던 나무 잎 하나 床에 앉습니다 床을 두고 서로 마주한 세상 어느새 햇살 방석을 깔고 도토리 한 알 곁에 앉았습니다 가장 작은 잎, 가장 여린 풀이라도 도르르르 말고 있던 손끝 열어 마지막 꽃 하나씩을 내미는 날 저마다의 꽃에 오늘은 이 마음 잎사귀 하나를 더해 봅니다  
780 칠산 앞바다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255 2019-11-01
칠산 앞바다 밤은 깊어가고 바람은 불어 어두운 칠산 앞바다 어찌할거나 자식걱정 어미는 언덕에 서서 두 손 비비고 비벼 밑 없는 어둠 시린 파도 앞에 몸을 태웁니다. 내 자식들아, 이 불빛을 보아라. 당신은 어찌 그렇게 하셨나요. 태풍 속 도깨비불에 홀려 헤매일 줄을 어찌 아셨나요. 아홉 산봉우리에 촛불은 켜지고 불빛은 칼날이 되고 칼은 피가 되어 등대로 타오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두운 맘 짙어가고 거기 불 밝힌 봉우리 백년이 갈수록 따사롭게 눈부셔집니다. 너희는 어둠에 길 잃지 말고 행복하거라. 너희는 어둠에 넘어지지 말고 평화롭거라. 가려움은 아픔을 이긴다 스멀스멀 여섯도 넘는 발들이 기어다니면 무슨 못잊을 기억들이 그리도 그리우냐며 잠을 뒤집어 손톱을 세운다. 밤새 벅벅 긁어 피가 흘러도 당신은 내 그리움의 기억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지 못하고 나는 피나고 아픈 것이 차라리 가려움보다는 낫다며 꿈에 웃는다. 손이 닿지 않는 등 뒤에 돌아선 당신의 기억이 일어나 밤새 기어 다니면 긁지도 잠들지도 못한다. 마침 당신이 기대던 옆구리나 같이 걷던 발이 간질거리면 땀 채이던 손으로 잠결을 긁어 검붉은 양귀비꽃으로 아침을 맞는다. 그게 다 몸속에 있던 기억들이 빠져나오는 증상이라는데 언제쯤 가면 그리운 가려움이 가셔질까. 위로가 되지 않는 진단은 피딱지 앉은 상처를 헤집는다. 가려움은 아픔보다 무섭고 가깝다. 기억은 가물거리고 가려움은 간질거린다. =============================================================== -칠산바다-전라남도 영광의 앞바다.(약간 종교적인 성향이라 맥락이 닿지 않는다면, 부적절하다면 다른 시로 바꾸겠습니다) 약력: 등단한 적 없음. 가끔 혼자, 시라고 생각되는 글을 쓰고 그러다 한번씩 문학마실에 글을 올림  
779 (특집)위안부 詩, 세월호 詩
편집자
349 2019-10-01
2019년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문집에 특집으로 실린 위안부시 세월호시입니다. 차 례 위안부 詩 꿈/공현혜 소녀상2/권순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김선희 어느 소녀의 꿈/김희근 콩레이를 기다리며/나병서 박꽃/신성철 소녀상이 상주에 세워지던 날/윤경숙 2019' 소녀를 위한 진술/해무 이선정 김복동/조영옥 세월호 詩 열여덟의 웃음/권순자 그들에게는 노을도 바다에 슨 녹이다/김길전 팽목항의 사진을 보며/정대호 아직도 물속이다/최기종 위안부 詩 꿈 공현혜 꿈꾸는 것도 차별 있어 넘볼 수 없는 가 고향의 기억에 기대어 하루는 살아남자고 또 하루는 죽어보자던 몸부림에 쇠파리처럼 달려들던 *왜이(倭夷)들에 꿈 먹히던 날 하늘도 부질없었다 돌아와 누울 자리 없어도 묘지 없이 버려진 백골의 동무와 이름 모를 병으로 썩어 간 동무 울다지쳐 눈인사 하던 얼굴 모아 산자들이 안간힘으로 꾸는 꿈 하나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세상 살아남은 자 모여 몇 십 만 명의 눈물 모아 키운 꿈 하나 ‘그래, 이제라도 용서를 바라니 됐다.’ 큰 소리로 대답한번 하는 꿈 아직도 우리는 꿈 꿀 수 없는 가 이루어진다던 그 꿈은 차별이 있는가. *왜이(倭夷) : 옛날에 일본 사람을 낮잡는 뜻으로 이르던 말 공현혜/1965 통영 출생. 2009현대시문학. 서정문학. 작가시선 등단 현)한국문협서정문학연구위원. <한국서정문학대상><경북작가상> 수상 시집『 세상읽어주기 』 동시집『 애벌레의 꿈 』 외 공저 다수. 소녀상2 -소녀와 꽃 권순자 소란스러운 꽃들이 도착했다 물관에는 두통이 살았다 죽을힘을 다해 가파른 꽃대에 매달렸다 큰바람은 맘대로 불었다 어둠이 허공을 거세게 몰아쳤다 시들지 않는 시간이 허공을 유영했다 진화하는 고통 유령처럼 밤마다 기억의 주름사이로 행진한다 흐린 날일수록 유령의 출몰이 왕성하다 불빛은 수상했으며 안개 사이로 시야가 흐릴수록 청춘이 멍들어 부패하는 장면이 확대되어 펼쳐진다 소녀들의 소식은 바람결에 흩날렸다가 사라지곤 했다 소문은 무참하게 어미들의 가슴을 도려냈고 어미들은 쓰러져도 힘겹게 일어나곤 했다 소녀는 소녀를 낳고 어제의 태양을 따라 머리카락이 치렁한 소녀들이 왔다 혼곤하고 무거운 기억이 소녀들의 주름마다 새겨져 으깨진 소녀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거리를 맴돌았다 숨소리는 하얗게 피어올랐다 헝클어진 청춘의 무늬가 어지럽게 바람에 휘날렸다 역류하는 바람이 드셌다 바람을 거스르고 바람을 비끼고 쓰라린 상처에 바람이 분다 두통을 동반하는 슬픔은 힘이 세다 어둠이 무덤처럼 소녀를 끌어안고 흐느낀다 해바라기들 바람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난타당한 어린 꽃들이 바람에 꽃잎을 수없이 떨구고 실종된 이름들이 남태평양 허공에 거미줄처럼 걸렸다 권순자/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청춘 고래』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회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김선희 길을 가다가 밭일을 돕다가 동생을 업고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우리의 글을 배우다가 끌려간 그곳에서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설움을 어여쁘고 어여쁜 우리의 딸들이 꽃봉오리로 지고 만 우리의 누이가 무궁화로 피고 또 피어 영원히 지지 않는 무궁화 꽃이 되었습니다. 김선희/문인협회 상주지부회원 시노리문학회원 어느 소녀의 꿈1) 김희근 엄마 어디 계세요? 아버지, 여기가 어디에요! 어머니 저 이다음에는요, 다른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한 마리 작은 나비가 될래요 꼬옥. 고향집 담장에 노오란 개나리 피어날 때 햇볕이 따스한 봉당 섬돌에 앉았다가 꽃신 사들고 환하게 웃어주실 어머니의 우리 엄마의 고운 머릿결에 머무르며 오래오래 예쁜 머리핀도 되어 드리고 아, 내 어머니의 분 냄새도 맡아볼 거예요. 오라버니와 함께 강둑을 내달려도 보고 뒷동산 묏등의 수줍은 할미꽃에도 인사하고 팔랑팔랑 아카시아 꽃향기 흩날리며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우리네 삼천리금수강산을 사뿐 사아뿐, 훠얼헐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아란 하늘에 흰 나비이고 싶어요, 어머님! 1) 2016년 10월 19일(토) 상주시 왕산역사공원의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김희근/함창중고등학교 교장 콩레이를 기다리며 나병서 태풍이 온다 그들이 온다 깨어진 머리 배갈리워 흐르는 창자 잘린 육신으로 차마 썩지못한 절대로 풀어지지않는 이승서 찢긴 삶처럼 너덜거리는 원한 주렁이며 온다 예쁜 순이였고 갓난아기 엄마 지아오였고 결혼을 앞둔 쑤원이였던 썩은 고깃덩이가 되어 욱일의 승냥이 고깃국 되었던 순이와 지아오와 쑤원이 퍼렇게 날선 칼을 물고 더런 욱일 그 깃발을 향해 조용히 온다 제주 어디메 그 곳에는 세종대왕도 최영도 광개토왕도 양만춘이도 위풍 당당히 도열해 있다던데 아악 아아악 눈물아 눈물아 순이와 지아오와 쑤원아 아아악 악악 어서오라 태풍아 오라 퍼렇게 날선 바람으로 오라 아악 아아악 아악 아아악 나병서/시집 『지렁이』 『똥』 『붉은 죽』 『별바라기』 박꽃 신성철 기다리다 지쳤나? 안으로 안으로 그리움을 달래며 누굴 위해 손 모으고 밤마다 소복단장한 누이야 모대기다 모대기다 살과 뼈는 뭉그러지고 마음만 남아 지붕 위에 무릎꿇은 열아홉 혼백이여 신성철/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2010년 열린시학 신인상 2011년 백교문학상 우수상 2013년 지필문학 신인상 2014년 문장21 신인상 수상 2010년 시집 『3천원짜리 봄』 출간 소녀상이 상주에 세워지던 날 윤경숙 2016년 10월29일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열다섯 살 소녀상이 상주 왕산 역사공원에 세워졌다. 주인공이신 이용순 어르신도 대구에서 오셨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식이 거행되고 베일에 가려진 소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 모두 박수로 환영했다. 이용순 어르신은 소녀상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이 서린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찬 표정이다 세워진 지 4년이나 되었건만 근심 어린 그 표정은 변함이 없네. 오늘 밤 쏟아지는 장맛비에 소녀상의 슬픔도 같이 씻어 내려가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어본다. 윤경숙/시낭송가 2019' 소녀를 위한 진술 해무 이선정 아픔에도 무게가 있다면 미투, 너는 잠시 참아주렴 14세 소녀 하루 40명 학창시절 친구 숫자가 아니야 세찬 와류에 돌이 깎이듯 움푹 움푹 팬 어린 자궁 새빨간 처녀가 터져 강을 이뤄도 비명 하나 밖으로 못 내어 평생 모래를 물고 자란 소녀들 2019년 3월 이제, 23개의 돌개구멍*만 남았다네 이 풍진 역사가 만들어낸 치욕 입 다문 가해자 천형이 두려운 자여 주름진 꽃잎, 오늘도 하나씩 가물가물 검은 강물로 몸을 던지는데 *물의 흐름이 돌을 깎은 곳 *****광복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 우리가 환호하고 있을 때 역사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해방되지 못해 아파하고 있을 그날의 소녀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이선정/강원도 동해 출생 황금찬 시맥회 문학광장 등단 김복동 조영옥 짓밟혀서 약한 것은 아니다 짓밟힌 채로 엎드리지 아니하고 짓밟혀서 부끄럽지 아니하고 짓밟혀서 스스로 무너지지 아니하고 굴복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내 힘으로 일어서 나는 짓밟혔다 말할 수 있을 때 누구의 시처럼 나는 자유이다 짓밟힌 나를 일으켜 또 다른 짓밟힌 이를 부축하고 일으켜 함께 나아갈 때 누구의 노래처럼 나는 평등이고 평화이다 그 마음으로 나를 넘어서고 고통 받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그곳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되던 이름 김복동 매주 주일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베트남 한국인 증오비 앞에서 재일 조선학교에서 고통을 투쟁으로 희생을 용서와 나눔으로 승화시켜 살아오셨던 세월 끝내 일본의 사과 받지 못하고 떠나셨다 굴욕의 역사는 사슬 칭칭 동여 숨이 막혀도 그러나 그는 이미 자유였다. 평등이고 평화였다 박제된 나비가 아니라 훨훨 날아 모두의 마음에 새겨드는 희망의 나비였다. 조영옥/한국작가회의 회원 세월호 詩 열여덟의 웃음 권순자 낮이 가방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바다는 네 방에 가득 몰려와 밤마다 파도친다 바다의 목소리들 내일을 미리 열고 들어간 너의 밤이 물결에 철썩인다 네 부푼 꿈이 오므라지고 늘어놓은 책들이 스르르 일어서서 네 방문을 연다 비상구가 떠올라 허공으로 올라간다 기웃거리는 밤 깜빡이며 바다를 뒤척이는 밤 어제의 노을이 돌돌 말려서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파도처럼 모래는 바람에 실려 창자 속으로 뒤틀리며 몰려온다 길 잃어버린 바람이 문 앞에서 울음처럼 펄럭거린다 분해된 꿈들이 조개들 따라 입을 다물었다 물살을 헤치고 이름들이 솟구친다 슬픔이 너무 오래 말라갔어 몸을 짜내는 기다림이 너무 길어졌어 널뛰는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어 아름다운 목덜미에 열여덟의 시간이 새겨지고 얼음처럼 차가운 실망 끙끙 앓는 혀 어미의 수심은 빈방에서 철썩거렸다 비가 오면 귀가 열린다 너를 듣는 밤이 길다 밤이 젖어 뱀처럼 느리게 기어간다 너는 움켜쥔 소라로 소리를 들으며 고둥으로 나팔을 불고 영원을 호출하며 세상 밖으로 가는 길로 헤엄을 치고 갔다 달이 뜨고 삶을 습격한 폭력과 혼돈의 문턱을 넘어갔다 벚꽃망울 터뜨리던 열여덟의 웃음이 그립다 권순자/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청춘 고래』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회원 그들에게는 노을도 바다에 슨 녹이다 김길전 그곳 목포 신항 철제부두에는 망각의 뜰채에 채집된 부레인 듯 그럼에도 아직 바로세우지 못한 시공에 세월이 동기화되어 벌겋게 녹슬고 있다 건저올린 그녀 그 유기遺棄의 경계에서 진저리를 치며 삼백네 걸음을 찬찬히 세어 물러서면 그러나 녹슬지 않은 아이들의 표정이 노을 속 나비의 무늬로 정연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여러 발의 총을 맞은 채 발소리 죽인 저녁바람에 떠는 노란 리본이 힘겨웠다 근접사격에 그 아름다운 이마와 눈길 꽃 봉우리 가슴과 귀가 찢기고 관통된 채로 이승의 노을에 걸려 있었다 보라, 신은 이미 함구하지 않았는가 이제 산 것들이 불쌍해야할 차례이다 끼어들지 못한 해류 속 관 안에 또 다른 관이 들어 있는 척색동물문 멍게의 유충은 끊임없이 야광충의 해류 속을 표류하는데 이윽고 살아남은 멍게가 자리를 잡아 정착하게 되면 우선 제 뇌를 먹어치운다 뇌는 동물에서 가장 에너지의 소모가 큰 기관으로 의식과 행동을 제어하는데 이미 멍게이므로 더 이상 기억과 행위를 삼켜 스스로 자아를 소거해버리는 것이다. 그 배설의 입과 가늘고도 긴 창자를 이은 소화시키지 못한 말의 항문뿐인 멍게의 아종처럼 제 방아쇠수지증후군을 치켜들고 킬킬거리던 호모하빌리스의 그 받침 없는 귀곡성과 무정란의 납색 깃발 그들에게는 저 노을도 끝내 바다에 슨 녹이어야할 것이다 *거기 세월호 아이들의 사진은 호모사피엔스의 비비탄에 뻥뻥 뚫려있었다. 김길전/2018년 시 동인지 『씨앗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발간 동인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팽목항의 사진을 보며 ―내일을 여는 작가 65호(2014년 여름호)를 보고 정대호 엄마들이 줄을 지어 바다를 보고 섰다. 눈 앞에 잠겨버린 배 눈 앞에 떠 있는 배 그 배 너머 흐릿하게 서 있는 섬, 섬, 섬……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떠난 아들들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떠난 딸들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떠난 아버지들, 어머니들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먼 섬처럼 멀어질 것만 같아서 소리 내어 불러보고 소리 죽여 불어보고 소리 없이 불어본다. 경찰들은 줄을 지어 땅을 보고 섰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땅을 보고 섰다. 바다는 출렁출렁 그리움으로 밀려오고 바다는 파랗게 물깊이로 막고 섰다. 그렇게 짧은 거리가 그렇게 먼 거리가 되어 아들아, 딸아, 아버지, 어머니, 바다를 바라보고 섰는 사람들은 땅을 향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렇게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 땅을 향해 섰는 사람들은 마음속을 향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렇게 가슴으로 보고만 있어서 미안하다. 정대호/1958년 경북 청송 출생. 1984년 『분단시대』동인으로 활동, 시집:『다시 봄을 위하여』, 『겨울산을 오르며』, 『지상의 아름다운 사랑』, 『어둠의 축복』, 『마네킹도 옷을 갈아입는다』 평론집:『작가의식과 현실』, 『세계화 시대의 지역문학』, 『현실의 눈, 작가의 눈』 아직도 물속이다 최기종 아직도 물속이다.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아직도 진실은 인양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고로 말도 안 되는 대응으로 말도 안 되는 기다림 속에서 천 개의 바람이 되고 나비가 되고 리본이 되고 팔찌가 되고 풍등이 되고 종이배가 되어 아직도 물속이다. 아직도 세월네월이다. 왜 침몰사고는 일어났는지 왜 선내에 대기하라고 방송했는지 해경은 왜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않았는지 도대체 왜 CCTV영상은 바꿔치기 했는지 사고발생 어언 5년이 흘러갔는데도 사고발생 무려 1,825일이 지났는데도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 원통하다, 미안하다. 누구는 아직도 세월호냐고 아직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냐고 그것, 다 끝난 것 아니냐고 지겹다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 원통하다, 미안하다. 아직도 물속인데 아직도 오리무중인데 아직도 진실은 인양 중인데 내일의 아이들을 위하여 내일의 세월호를 위하여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거짓거리들이 숨어 있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 원통하다, 미안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희망이다, 생명이다, 안전이다.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팽목항에서 색 바랜 리본은 멈추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우리 아이들은 이제 그만 떠나고자 하나 아직도 세상은 물속이라고 최기종/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 활동, 『나무 위의 여자』, 『슬픔아 놀자』외,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778 수필 촌평(隨筆寸評) /채선후 file
편집자
452 2019-09-02
수필 촌평(隨筆寸評) 얼마 전 모 문학창작지원금 수필부문 심사평(審査評)을 읽었다. 긴 심사평을 짧게 요약하자면 대부분 일상을 소재로 잡다하기 그지없고, 실험작을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은 수필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 유명 인사들의 수필, 에세이, 산문이라는 제목 하에 정치적, 철학적, 교훈적인 내용에 자기 목소리를 담은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저서들은 많지만 거의 비슷한 분위기다. 심사위원도 새로운 분위기의 글들을 만나고 싶어 촌평에 내비쳤을 것이다. 한 권의 수필집은 새로운 세계와 같다. 수필가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픈 세계를 펼쳐 낸다. 그런 수필집 첫 장을 넘기면서 마구 설렌다. 어떤 세계를 담고 있을지 첫 문장에 대한 궁금증으로 떨리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몇 장 넘기다 말고 덮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필집에 담긴 지식은 백화점 판매대 상품처럼 잘 포장된 듯 보이고, 살아온 경험은 훈계적이며, 훈계는 대차서 그만 기가 죽는다. 내 경우는 그렇다. 혹자는 수필은 이것저것 붓 가는 대로 쓰기만 하면 다 담을 수 있고, 담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잡다한 것으로 단정 지어 하찮게 여긴다. 어떤 이는 이런 면을 두고 잡문(雜文)이라고도 한다. 고문(古文)에서는 공적(公的)인 문서에 해당하는 글의 종류 외 개인적인 글은 따로 잡록(雜錄)으로 묶었었다. 잡록이나 잡문은 글의 종류가 여러 가지 섞여있다는 의미지 하찮은 글은 아니었다. 오히려 잡록(雜錄)에 심채(心彩)가 고와 지금에 봐도 아름다운 수필이라 할 수 있는 글들이 많다. 이쯤에서 수필의 시작을 잠깐 적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송나라 홍매의 『용재수필』을 수필(隨筆)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용재수필』은 수필이란 명칭이 문집 제목에 보이는 시작이지 수필이라 할 수 있는 문형(文型)의 시작은 아니다. 수필의 시작을 파헤치다 보면 고문(古文)의 문형 중에서 전부(詮賦)를 만날 수 있다. 유협은 『문심조룡』에서는 전부(詮賦)에 대해 말하기를 1) 전(詮)은 저울에 달다는 의미고, 부(賦)는 운문의 형식으로 사물에 대해 폭넓으면서도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 특징이 있으며, 『시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즉 시의 창작 방법 중 하나였던 부(賦)로 쓰인 산문이 점점 문체로 자리 잡은 것이 수필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산문 중에서 문(文)은 작가의 마음이 실린 글이며, 마음이 실리지 않은 것은 필(筆)이라 한다. 어찌 되었든 수필은 언어예술인 문학이다. 작가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작가 마음이 곧,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文)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로 문(文)은 ‘유지하다’라는 뜻이 있어 감정이나 품성을 올바르게 지켜 맑은 상태가 된 후에 붓을 잡는 것이며, 그때 붓 가는 대로 쓴 산문이 수필이 될 수 있다. 곧, 수필은 마음의 울림을 좇아 올곧게 유지하여 그 울림을 따라 쓰는 것이다. 그렇게 쓴 문장은 아름답다. 또 누군가에게 약(藥)이 되기도 한다. 약과 같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을 보여 줄 필요는 없다. 대차게 고집이 세지도, 걱정 넘치는 훈계가 아니어도, 세상을 향해 정치적이 아니어도 된다. 수필에 있어 실험은 무엇인가. 수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내면에 있다. 수필가는 현실과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뇌와 번민, 반성, 고찰 이런 것들이 문(文)에 촘촘히 베어 무늬를 만들고, 무늬는 시간이 지나면서 향기를 담아낸다. 곧 수필가는 무늬와 향기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을 해야 한다. 그런 작가의 상황을 나는, 선정(禪靜)이라 하고 싶다. 수필가는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참되고 바른 이치를 생각하고, 괴로움을 떠나서 고요한 경지에 이르게 하여 움직이지 않는 상태인 선정(禪靜)2) 을 유지해야 한다. 선정(禪靜)은 특정 종교인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수필가는 선정(禪靜)에 들듯이 글을 써야 하며, 선정에 들기 위한 실험을 해야 한다. 여기서 선정(禪靜)은 쉽게 말하면 설거지다. 작가 자신이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번민과 밖에서 솟구쳐 오르게 하는 세상의 온갖 것들을 설거지해야 한다. 설거지를 어떻게 해야 될지, 어떤 상태로 닦을 것인지, 무엇으로 할 것인지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 그래서 맑고, 깨끗한, 개운한 상태를 유지한 순간 붓을 들어야 한다. 그 순간을 따라 쓴 문장은 아름답다. 간혹 어느 시골농부의, 세상 끝에 서 있는 노동자의, 까막눈 할머니의 삐뚤거리는 글에서 묵직한 울림이 단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글을 만날 수 있다. 그런 글이 아름다운 수필이 된다. 수필은 굳이 수필가가 아니더라도, 문학이론을 모르더라도,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나 쓸 수 없다. 내게 수필은 그런 것이다. 자꾸만 ‘수필’이 뭔지 속에서 물어온다. ‘수필’, 그 짧은 단어에 답문이 길어지고 있다. 오전 내내 수필에 관해 끄적거려 보았는데 모르겠다. 몇 줄 써 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해는 겨울을 꼿꼿이 바라보고 있다. 언 땅 위를 초록 과자상자 같은 버스가 기어가고 있다. 이 추운 날에도 오늘을 유지하기 위해 저리 다니는가 싶어 대견스럽다. 밖은 풍경을 따라 겨울다웠다. 간밤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은 아직까지 자고 있다. 술국 타령이 슬슬 기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다. 심사(心思)가 복잡하다. 내게 오늘은 이렇게 수필되어지고 있다. 채선후: 약력 2013년 『에세이스트』 등단. 수필집 『십오 년 막걸리』, 『문답 대지도론』, 『사춘기자녀와 부모를 위한 대지도론 마음 비행기』, 『머뭄이 없는 가르침』, 『기억의 틀』, 『Waiting For The First Snow』, 『Mind Glider』 champ5263@hanmail.net 1) 유협, 성기옥 역, 『문심조룡』,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46쪽. 2) 원효, 조용길 외 1인 역, 『금강삼매경론 상』, 동국대출판부, 2002, 43쪽.  
777 J 수평선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1500 2019-09-02
J 수평선 니 가슴 속 여*에 얼마나 깊은 시추공을 뚫어야 마그마가 쏟아져 나오겠니? 포항 지열발전소 4.5km 구녁 깊이 정도로는 변죽만 울리지 한 열 배쯤 후벼야 풀떡 풀떡이는 시뻘건 짐승 입김으로 보일러를 달구면 수평선 너머로 되밀려가는 세월역주행열차를 전속력으로 운행할 수 있을 거야 내가 거기에 훌쩍 올라타면 앳된 얼굴로 J 별안개 자욱한 차창 밖을 내다보며 객실에 외따로 앉아 있겠지? *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 학꽁치 수평선 양포 방파제 테트라포드에 올라 곤쟁이 몇 주걱 흩뿌리니 굼질굼질 울트라마린 블루 캔버스 가득 빗금을 그으며 부상하는 학꽁치 떼 작은 미끼를 물고 파드닥 꼬리치는 학 날개 없는 것들이 날아오르려면 눈 질끈 감고 미끼를 물어야 하나? 패스워드를 누르면 펼쳐지는 둥근 물침대 바다는 브래지어 끈 끌러 던지고 너울 너울 자지러지고…… 살근살근 수평선 위로 잠망경처럼 떠오르는 살구색 부표 한 기 차영호 (車榮浩)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youngghc@hanmail.net  
776 노래를 불렀어 외1편/강미정 file
편집자
378 2019-09-02
노래를 불렀어 하얀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는 꽃밭이었지 처음엔 콧노래로 시작했어 중간쯤에서 콧날이 시큰거렸지 이 대목에선 같이 불러야 하는 거야 어깨에 손을 얹는 바람 꽃 진 그림자는 내 울음을 자꾸 덮어주었지 하염없이 밀려와서 하염없이 밀려가는 노래였어 여럿이 부른 노래였지만 혼자만의 노래였어 하얀색의 노래 큰 목소리로 부르다가 꽃이 피는 것을 지켜보았지 꽃이 피는 것은 왜 그리 아픈지 꽃이 지는 것은 왜 그리도 아픈지 부르던 노랫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점점 더 작아졌어 아무도 모르게 노래 부른다는 것이 왜 그리도 아픈지 마침내 울음으로 변하는 노래였어 그대가 내 이마를 깊게 짚었다가 슬며시 손을 떼는 노래였어 내일 지병이 도져서 당신에게 갈 수 없는 날을 내일이라 부르겠습니다 허공에 주소를 두고 내 마음에 기울기를 만든 당신 각이 사라지는 지점을, 번개로 살았으나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내일이라 부르겠습니다 여전히 새 것인 채로 모든 일어나지 않은 것들의 묘지, 낡고 오래되었으나 사라지 않는 욕망과 위기와 결여와 불행의 도피처 당신이라 부르겠습니다 <약력> 강미정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 』에 ‘어머님의 품’외 4편으로 우수작품상 등단 <빈터>동인, (사)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집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상처가 스민다는 것 』『타오르는 생 』 등  
775 호박넝쿨을 바라보며 외1편/구재기 file
편집자
346 2019-09-02
호박넝쿨을 바라보며 울타리를 부여잡고, 안아주며 쉼 없이 벋어나고 있는 호박넝쿨 집 뒤 언덕위에 무리로 선 대나무는 안아주는 데 서로에게 너무 인색해 있지 않나 싶다 밤과 낮으로, 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저 깊은 산골짜기 천인단애 위에서 손깍지 끼고서도 단 한 번도 두 손은 놓지 않다가 마침내 온 몸을 휘둘러 부둥켜 끌어안은 채 진한 향으로 온 산을 물들이고 있는 칡넝쿨이며 등넝쿨이며를 바라보며 우리는‘갈등葛藤’이라 역겹게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 갈등을 풀어 머언 하늘을 향하여 아침을 외쳐 노래하는 노란 호박꽃 한 송이 세상은 찬란한 아침으로 깊어진다 시詩란? 쓸 모 없는 구절들만 모아 그 구절들로만 이루어진 백 편 천 편의 시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곧 시詩다 꼭 쓸모만큼 잎 돋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가진 거 다 버리고는 깊은 동안거에 들어간 겨울나무가 곧 한 편의 시다 < 구재기 약력 > • 충남 서천 출생 •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휘어진 가지』와 시선집『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다수 •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한남문인상, 석초문학상 등 수상. • 충남문인협회장 및 충남시인협회장 역임 • 현재 40여년의 교직에서 물러나 <산애재蒜艾齋>에서 야생화를 가꾸며 살고 있음  
774 목숨을 부러트리다 외1편/ 권 천 학 file
편집자
818 2019-09-02
목숨을 부러트리다 나, 당분간 집을 떠나야겠다 몸 안의 묵은 똥 찌꺼기들을 비워내기 위하여 더러움에 주둥이 박고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떠나려는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 화분들 오래 가꾸어온 것들이 가로 막는다 손때 묻은 것들이 자행하는 배신행위에 아직도 익숙지 못해 흔들린다 찢어지고 터진 상처마다 쓰라림을 우려내는 핏물 나를 떠나게 만들었던 그 새빨간 핏빛이 내 안의 정신병인자를 발작시킨다 화분을 뒤엎는다 미안하다 목숨이여! 죽어 마땅하다 친구의 주머니 속에 칼이 들어있고 다정한 눈웃음에 독약이 묻어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체투지로 견뎌내야만 했던 세상 속에서 정 혹은 미움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끝내 집착을 부추기는 너, 떠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다시 돌아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서 뜨겁게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목숨도 부러트려야 한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빈 도시의 가슴에 전화를 건다 전화를 건다 빈 집, 빈 방, 도시의 빈 가슴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 … … … 정좌한 어둠이 진저리를 친다 화들짝 놀라 깬 침묵이 수화기를 노려본다 거미의 파리한 손가락이 뻗어 나와 벽과 벽 사이 공허의 모르스 부호를 타전해온다 뚜뚜뚜⦁⦁⦁⦁뚜뚜⦁⦁⦁⦁⦁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 ~ ~ 뼈마디를 일으켜 세운 싸늘한 어둠이 몰고 온 찬바람 구석진 한 귀퉁이에 겨우 발붙이고 있는 체온을 딸깍 꺼버린다 가느다란 신경 줄 하나 수화기 옆에 오똑 웅크리고 앉아 오로지 듣고 있다, 침묵의 제 발자국 소리를 공허의 빈 들판에서 우롱, 우롱, 우롱‥ ‥ ‥ 소용돌이 치는 죽음 같은 절망, 절망 같은 죽음을 쓸고 오는 금속성의 바람소리를,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는 정막의 물살 위에 부딪쳐 미끄러지는 벨소리 메아리 진다 빈 집, 빈 방, 빈 도시의 가슴에서 헛되이 ~ 헛되이 ~ 약력 *하버드대학교주최 번역대회 우승(시 [2H₂ +O₂ =2H₂O] 등 17편 번역:김하나).(2008) *코리아타임즈 주최 한국현대문학번역대회 시 부문 우승. 번역:김하나, 모크린스키(2010년)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단편 [오이소박이](2010년) *일한환경시선집 [地球は美しい]에 시『帰郷』이 선정 수록됨(2010) *WIN(Writers International Network)Distinguished Poet Award(2015)수상. *『Multicultural Creative Writing Collection 2015』에 시 『2H₂+O₂=2H₂O』 와 『Middle Age (중년)』가 선정수록됨.(2015) *미국 『Peace Poems』의 World Peace Poets 40인에 선정됨(2015) *캐나다 (BC주)포트무디시의 이달의 문화예술인 선정됨(2016년) *저서:한글시집 12권/ 한영시집 2권/ 일어시집 1권/ 편저[속담명언사전]/외 다수.♣  
773 미지의 세계 외1편/박일아 file
편집자
442 2019-09-02
미지의 세계 처음 본 바다는 파도만 밀려왔지 바다 속을 수시로 TV에 보여주니 바다를 떠올리면 물아래 살아 숨쉬는 물고기, 해초, 산호 등 아름다운 정경이 보이고 때로는 쓰레기 쌓이고 백화현상으로 죽어가는 깊은 바다 속도 보이지만 한 치 사람 속은 평생 함께한 내 마음도 알 수 없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류대표 이세돌과 바둑대전에서 4승1패를 했다고 세계의 이목이 주목되고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컴퓨터가 나올까 먼 미래에 인간이 로봇에게 지배당하는 날이 올까 목화밭 열매도 맛있고 꽃도 예쁘다고 시어머니께서 손에 쥐어준 목화 씨 화분에 심었더니 따사로운 햇살에 움이 터 분홍색 귀여운 꽃이 피고 지고 파란 열매 익어 탁, 벌어져 하얀 솜꽃이 환하게 웃자 새하얀 눈송이 덮인 들판 보이고 팝송 ‘목화밭’이 들리네 목화솜, 이불 한 장에 온가족 발 덮고 아랫목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던 시간들 흘렀다 편리하다고 인조 솜과 오리털, 양모, 인견에 밀리고 요즘은 목화송이 가지를 꽃꽂이 소재로도 이용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