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점(反芻點)

 

 다가오는 시간은 ‘지금’ 위에 얹어진다. 몇 번이었던가 세는 것조차 귀찮아지면 ‘지금’은 묵은 시간이 된다. 기억이 가물거리기 시작하면 묵은 시간에도 한 번쯤 점()을 찍어줘야 한다. 그렇게 찍은 점은 반추점이 된다. 반추점(反芻點)은 ‘다시’를 위한 점이다. 여여(如如)히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점. 그래서 다시 걸을 때 힘겹지 않게 하는 그런 점 말이다.

 

() 찍기가 업()인 사람에게 깨알만 한 점 하나가 바윗덩이보다 더 큰 고심덩어리일 수 있다. 나는 문장에 점을 찍는 사람이다. 이제껏 수없이 많은 점을 찍었다. 그랬어도 점 찍기는 쉽지 않다. 문장 끄트머리 점은 다음 문장을 만나기 위해 놓인 징검다리와 같다. 징검다리로 점 하나 던져 놓고 다음 문장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며 쉰다. 호흡은 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거칠어진다. 어떤 때는 긴 한 숨을 내뱉기도 한다. 가슴 깊이 들어 찬 고심(苦心)을 호흡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반점을 찍고 몇 단어를 이어 쓸 것인지, 온점으로 마무리할지 밤새 고심한다. 고심도 몇날 며칠 계속되다 보면 번민이 된다. 점 하나로 문장이, 문단이, 전체 작품이 번민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고심 끝에 점을 찍고 다음 문장을 만나게 되면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 내게 점()은 문장에서 그런 것이다.

 

마침표는 문장의 마침을 알리는 점이다. 점 찍기가 업()이 되어버린 나는 마침표를 아끼고 사랑한다. 느낌을 문장으로 뼈대를 세운 후, 못질을 하듯 점을 찍는다. 이때 못질을 잘못하면 집이 무너질 수 있듯이 글에서도 문장 끝에 점을 잘못 찍으면 글 전체 느낌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을 때는 문장을 쓸 때보다 더 집중한다. 차분히 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나서 신중히 점을 찍는다. 그런데 요즘 점 하나 찍는데 망설임이 많아지고 있다. 못질이 약해진 것이다. 몸이 늙어져서 일 것이다. 기억력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가령 약봉지를 들고 있는데도 어디 있는지 찾고 있을 때가 있다. 방금 불렀던 이름도 가물거리고 있다. 이럴 때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내게 단단해지도록 다시 한 번 못질이 필요한 때가 된 거 같다.

 

이쯤에서 나는 마침표를 반추점이라 하고 싶다. 문장에서는 글을 음미하고 되새기는 점을 못으로 여기고자 하는 뜻에서다. 그래서 내가 정의내린 반추점(反芻點)은 못질과 같다. 다음 문장을 더욱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잠시 쉬면서 기다리고 있는 점, 문장의 의미가 헛되지 않도록 매무새를 다시 고치면서 찍은 점이 더 단단해지도록 못을 박기 위함이다.

 

요즘은 반추점을 찍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밤하늘이다. 별은 내 스스로가 빈틈을 보일 때면 찍는 점이다. 이곳 진도는 유난히 별빛이 초롱초롱하다. 밤이면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까만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들이 반추점이 되어 흩어지려는 기억을 반짝이고 있다. 나는 별빛이 찍어 놓은 반추점 하나를 따서 가슴 속에 다시 묻는다. 나는 별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며 점을 찍었다.

 

지금 아버지는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내심 고집을 피운다. ‘사는 것이 다 그렇다’며 옅어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세월 탓으로 넘어가기에 아버지가 주신 것이 너무 크다. 아버지는 내게 몸을 낳아 주셨다. 그리고 매서운 회초리 자국을 주셨다. 아버지가 내리치는 회초리는 힘들 때마다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는데 어찌 없다 하겠는가! 그런 아버지 얼굴이 희미해지고 있어 슬프다. 아직도 내 가슴에는 하지 못했던 말이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내게서 진작 마침표를 찍게 했다. 죽음은 큰 마침표다. 아버지의 죽음 역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생의 마침표가 되었지만 그 점은 종지부가 아니다.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빛 하나가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쥐고 있는 펜대가 얼마나 누추한지 알고 있다. 그래도 그 펜대를 쥐고, 밤하늘 별빛을 보면서 묵은 기억들을 받아썼다. 아버지의 낡은 사진과 함께 지나 온 시간들을 들추어 보면서 행복했다. 코흘리개 시절 내 모습과 젊었던 아버지 목소리를 받아쓴 문장 끄트머리에 점을 찍을 때면 묵은 때가 벗겨지듯 개운했다. 기억의 반추는 가슴 속에 박힌 못을 빼내는 것과 같이 시원하다. 밤하늘을 서성이는 동안 욕심으로 번민하고, 어리석음으로 찌그러진 문장을 펴게 해 주었고,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을 씻게 한 반추의 시간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벌써 봄이 가려하고 있다. 보내는 것에도 익숙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얼마 전까지 달빛에 눈꽃처럼 피어난 벚꽃을 바라보았었다. 그 아름다움이 눈에서 미처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 아카시아 향이 바닷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날려 오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아카시아 향을 깊게 들이마셔 본다. 이 향기도 때를 놓치면 맡기 힘들 것이다. 무엇이든지 때를 놓쳐서는 제 맛이 나지 않는 법이니까.

 

봄날이 아까워서 연일 엉망으로 취했는데 / 惜春連日醉昏昏 
깨고 보니 옷자락에 술자국이 범벅일세 / 醒後衣裳見酒痕
가녀린 풀꽃 시냇물로 둥둥 떠 흘러가고 / 細草浮花歸別澗
비 머금은 조각구름 외로운 마을 들어오네 / 斷雲含雨入孤村

(신흠, 상촌선생집 제 58, 남강 , 춘진(春盡) 중에서)

 

봄을 아껴 날마다 취했더니, 깨고 보니 옷자락엔 술자락이 남았다고 음미한 옛 선비의 시처럼 아껴두고 싶은 하얀 아카시아 꽃이 떨어지면 길가는 떨어진 봄으로 범벅이 될 것이다. 아버지 기억이 밤하늘에 범벅인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 당신을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저는 이 말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아껴둔 말들이 밤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나는 이즈음에서 살아생전 아버지의 기억만을 헤아리고 싶지 않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삶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싶은 것이다. 이제껏 쓴 글들은 걸러낸 찌꺼기들의 마침표가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내리고 싶은 반추의 의미다. 먹빛으로 범벅이 된 밤. 하얀 별빛이 내 가슴 속에 파고 들어온다. 오늘 찍은 기억의 반추점은 참으로 하얗다.

 

 

 

             수필가 채선후 : 

                충북 음성에서 나서 여주 남한강변에서 자랐다. 동산불교대학원과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국립목포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저서: 『십오 년 막걸리』 『문답 대지도론』 『머뭄이 없는 가르침』 『마음 비행기』 『기억의 틀』

               영문판 Mind Glider』 『Waiting For The First Snow』 메일주소 : champ526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