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자

                                                           

놈이 끼어 있는 자리는 늘 거북스럽다. 아니, 놈이 있는 자리뿐만 아니라 놈의 행동거지, 말투, 옷차림 하나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놈만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며 얼굴을 반이나 덮은 지저분한 수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뱉는 음담패설.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멋대로의 행동. 그는 평생토록 놈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식당을 나오자마자 골목길을 벗어난다. 화실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술자리가 끝날 때쯤 식당으로 갈 작정이다. 어제 그가 '그림사랑'회원들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무엇을 먹겠냐고 물었다. 물론 물은 건 예의였다. 그의 머리속엔 조용하고 쾌적한 일식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회원들 저마다 회장님 맘대로 하세요, 라고 했지만 놈은 달랐다. 내가 잘 아는 과부집이 있는데, 했다. 손두부찌개를 아주 쥑이게 잘 하는 데 있거든요. 회원들은 모두 그러자, 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과부집으로 정했다. 예상대로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옆테이블엔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놈이 미리 얘기를 한 모양인지 다행히 방을 차지하긴 했지만 홀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회원들이 둘러앉아 제대로 얘기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큰길로 나와 인도를 따라 걷는다. 술집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술에 취해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9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가로수를 붙잡고 토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썩었어. 푹 썩었어, 세상이. 인상을 찡그린다. 그는 술집이 밀집해 있는 거리를 벗어나자마자 슈퍼 앞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건다. 중1인 큰딸이 받는다. 저녁은 먹었니? 다정스럽게 묻는다. 예. 엄마 바꿔드릴게요. 딸애는 중학교에 올라가고부터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다. 사춘기려니 생각해도 마음 한 쪽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키운 녀석인데. 그는 딸애의 얼굴을 떠올린다. 제 엄마를 닮아 얼굴이 전체적으로 둥글고 살이 통통하게 찐 편이다. 그가 보기엔 달덩이처럼 예쁘기만 한데 딸애는 제 엄마를 닮아 못 생겼다고 늘 불만이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어도 딸애만은 반듯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6학년에 올라갔을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염색을 해달라는 거였다. 녀석이 직접 말한 게 아니라 아내를 통해서였다. 중학교 올라가면 못하니까 연예인들처럼 머리를 꾸며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딸애가 그런 요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딸애는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극히 모범생이었다. 그는 화를 내며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 염색을 하는 애들은 뻔한 애들이니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내가 한 번만 요구를 들어주자고 은근히 얘기했을 때도 그는 아내에게 역정을 냈다. 그때부터였을까, 딸애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다정스럽게 말을 걸어도 녀석이 먼저 피했다. 딸애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썩은 세상에 딸애만은 곱게 키우고 싶었는데 전혀 자신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

말씀 안 하세요?

갑자기 휴대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어, 전화 바꿨나?

그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다.

몇 번이나 말을 해도 대답이 없어서요.

그랬는가?

그는 헛기침을 몇 번하고 나서 말한다.

저녁은 먹고? 애들은?

그럼 먹었지요. 애들은 공부하고 있어요. 당신도 식사하셨어요?

아내는 살갑게 말한다. 아내는 말 그대로 현모양처다. 그는 그런 아내가 마음에 든다. 아내에게 조금 있다 들어가겠노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는다. 그는 특별한 일 외에는 집에 늦게 들어간 적이 없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12시를 넘기지 않았다. 회원들이 그가 없을 때 '범생이'이라고 부르는 걸 안다. 그는 그런 말이 좋다.

슈퍼와 치킨집이 붙어 있는 상가를 지나 화실 건물이 있는 왼쪽 골목으로 걸어간다. 아무 문제없는 집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유쾌하다. 하지만 막상 화실 앞에 도착하니 어쩔 수 없이 놈이 떠오른다.

그림 그리는 후배와 함께 화실에 나타난 놈은 처음부터 불쾌했다. 꽁지머리며 돼지털 같은 수염이며 몇 년간 세탁을 하지 않은 듯싶은 옷차림이 그랬다. 하지만 후배한테 그림을 배운 터라 아는 형이라며 회원으로 받아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후배는 30여 평의 개인 화실을 만들어 낮에는 자신의 그림에 몰두하고 밤에는 일반인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그도 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림 배우러 화실에 나왔다. 그림을 배우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활에 활력이 붙었다. 나이 사십에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게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학창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기에 열심히 했고, 1년이 넘자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게 되었다.

그 무렵 후배는 갑자기 일이 생겨 화실 운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림을 배우던 이들은 이대로 그만 둘 수 없다며 모임을 조직하고 돈을 거둬 화실을 계속 꾸려나가기로 했다. 이름을 '그림사랑'이라 하고 나이가 제일 많은 그를 회장으로 뽑았다.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직장인들이었고 결혼한 이들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들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처럼 정식으로 미대를 졸업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놈은 화실 구석에 생활공간까지 마련해 달라고 했다. 화실 청소 및 관리를 책임진다고 했다. 그는 자기와 동갑인 것을 생각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놈은 어느 무엇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기 싫어 혼자 산다고 신입 환영회 술자리에서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다음날 각목과 합판을 구해와 화실 한 쪽에 칸막이를 쳤다. 앵글로 침대를 만들고 간단한 살림도구를 가져왔는데 그 또한 가관이었다. 밥 그릇 하나에 수저 한 짝. 휴대용 가스레인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전부였다. 설거지를 화장실에서 했으니 더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그런 놈을 경멸했다. 될 수 있으면 놈이 없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퇴근하고 가면 언제나 놈이 있었다. 그림 또한 놈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의 그림은 음탕했다. 방금 전 술자리에서 놈은 술을 마시다 대뜸 회장님 백마 타 봤슈? 하고 물었다. 그는 불쾌하여 놈의 얼굴을 외면하는데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껄였다. 어떤 젊은 놈이 미국엘 유학 갔는데 말이여, 백마를 타고 싶었는기라. 그래서 그런 곳엘 갔는데……. 놈의 음담패설에 회원들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백인 여자보다 흑인여자, 그러니까 흑마가 더 좋은데 말이야. 더 쫄깃쫄깃하다고나 할까? 여자 회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렸다.

그는 이쯤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화장실 가는 척하고 식당을 나온 것이다. 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 옆에 있는 분전함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다. 놈의 그림은 보지 않으리라.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간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으로 사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놈의 그림은 안쪽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놈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저질 포르노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놈은 남녀 나신을 추상적으로 그렸다. 그가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그림 몇 점들이 다 그랬다. 남자의 나신, 여자의 나신, 소녀의 나신, 남자의 나신에 여자의 음부가 그려진 그림, 반대로 여자의 나신에 남자의 성기가 달린 그림. 서로 몸을 둥글게 말아 상대방의 성기를 물고 있는 태극 모양의 그림. 그는 놈의 그림을 경멸했다. 그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놈의 그림이 있는 쪽을 애써 외면하는데 갑자기 뭉크의 그림 몇 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업무가 밤 10시쯤 끝나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화실에 들른 날이었다. 회원들은 일찍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고 놈 혼자서 소파에 앉아 화집을 보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화집을 바라보던 놈이 그를 발견하고는 팔을 강제로 끌고 소파에 앉혔다.

이 그림 좀 봐요. 이 그림.

놈은 흥분하였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그가 내민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풍만한 엉덩이가 육감적인 알몸의 여자가 누르스름한 무엇을 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불쾌감으로 고개를 돌리며 일어서려 했다. 놈이 그의 팔을 잡았다.

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뻘겋게 달아 오른 얼굴에 광채를 발하는 눈은 흡사 청도에서 보았던 싸움하는 수소의 그것이었다. 놈의 몸에서 수소의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는 놈에게서 엉덩이를 옆으로 비켰다. 놈은 그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그림에 대해 중얼거렸다.

이 벌거벗은 여자는 소녀요. 아직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처녀지요. 소녀가 안고 있는 누르스름한 것은 해골이요. 오른쪽에 있는 외계인처럼 생긴 게 바로 태아요. 태아란 말이요. 왼쪽에 올챙이처럼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자요. 정자. 아…….

그림을 쥔 놈의 손이 떨렸다. 순간 그는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피부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 그림도 보시오. 이 그림.

그는 몇 장을 넘겼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 죽어있고, 중앙엔 나신의 소녀가 죽은 남자를 뒤로하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아…….

놈은 어떠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떤 힘에 눌러 다리를 뗄 수가 없었다. 놈은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며 그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침대 위의 빨간 깔개에 앉은 벌거벗은 여인. 빨간색 회색 등의 색깔이 어지럽게 칠해져 있는 배경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신의 여인.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 두 손으로 치부를 가리고 앉아 있는 소녀. 놈은 그림을 넘기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하, 숨을 크게 내 뱉기도 했다. 그는 그만 도망가리라 하며 망설이는데 놈이 책을 탁, 소리나게 탁자 위에 놓았다. 표지엔 MUNCH 라고 쓰여져 있었다.

난 말이요. 이 뭉크의 그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오.

그는 놈의 강한 시선을 피했다.

난 도대체 이런 그림을 이해할 수 없소. 그림은 일단 아름다워야 하오.

그는 겨우 말을 마치고 문으로 걸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그의 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놈이 벌거벗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뒹굴다 물감을 손에 짜 얼굴에 바르고 가슴 팔 다리에 발랐다. 그는 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봉두난발이 되었고 수염에는 여러 물감이 묻었다. 놈은 여러 색깔을 한 짐승처럼 보였다. 아니, 분명 짐승이었다. 놈은 계속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다 순간, 가슴이 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익숙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집으로 왔지만 꼬박 밤을 새웠다. 섬뜩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물감을 온 몸에 바르고 바닥을 뒹굴기라도 한 듯 가슴이 떨렸다. 며칠동안 화실에 나가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다.

그림은 아름다워야 해.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만족한다. 완성된 그림은 집 거실이나 방에 걸어두거나 친구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가 주로 그리는 그림은 풍경화였다. 들이 있고 산이 있는 그림. 물이 흐르고 물에 비치는 커다란 나무나 다리가 있는 그림. 그는 놈의 그림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치켜올린다. 놈을 경멸하는 것처럼 놈의 그림도 경멸했다. 더럽고 추잡한 놈. 음탕한 놈. 놈을 다시는 상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자신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밝은 불빛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 회원들의 그림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어두운 면은 더 어둡고 밝은 부분은 어두운 부분과 대비되어 사실감이 든다.

그는 문 쪽에 있는 자신의 이젤 앞에 선다. 놈과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문 옆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캠퍼스가 창문을 등지고 있어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우선 캠퍼스의 크기가 다르다. 자신이 그리던 것은 60호인데 이것은 90호가 넘는 것 같다. 또한 가로로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세로로 세워져 있다. 그는 천천히 그림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그는 그림을 들어 창문 쪽으로 돌린다. 여자의 나신 그림이다. 어둠 속에서 보니 붓 자국이 없어 더 추상적이다. 그는 옆에 있는 그림을 들어본다.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그리던 풍경화다. 다른 그림을 봐도 회원들이 그리던 그림이 맞다. 근데 유독 그의 그림만이 바뀌어져 있다. 그는 놈을 떠올리다 그림을 바닥에 팽개치고 놈이 그리던 장소로 뛰어간다. 놈의 이젤엔 침대에 드러누워 성기를 움켜쥐고 자위하는 사내의 그림이 놓여져 있다. 옆을 둘러 봐도 자신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돌아서다 멈칫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놈의 그림을 들어 창 쪽으로 가져간다. 황토색의 자위하는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악, 비명을 지른다. 그림 속의 사내는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놓자마자 그림이 바닥에 뒹군다. 캠퍼스 위의 그가 성난 성기를 움켜쥐고 자위하고 있다. 캠퍼스 위의 그는 눈을 감은 채 황홀경에 빠져있다. 수치심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캠퍼스 위의 그의 얼굴을 짓이기기 시작한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황토빛 상체의 가슴 부위에 불에 댄 듯한 흉터가 남는다. 캠퍼스 위의 자신의 얼굴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 되었을 때에야 그는 짓이기던 발을 멈춘다. 입에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성기와 엉덩이를 보자 다시 캠퍼스 위에 올라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두 밑창으로 비빈다.

숨을 몰아쉬던 그는 자신이 그리던 장소로 흐느적거리며 걸어간다. 이젤에 놓여 있는 나신의 그림을 머리위로 들어 벽을 향해 내리친다. 캠퍼스의 나무가 퍽,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캠퍼스에서 나신의 여자가 얼굴이 뒤틀린 채 기묘하게 웃고 있다. 캠퍼스의 나무가 부러지자 천을 떼어내 바닥에 놓고 그림의 형체가 완전히 변할 때까지 짓이긴다.

그는 놈이 그린 그림 전부를 짓이기다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그림 위에 엎어진다. 잠시 후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어 아래에 깔린 그림을 바라본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광활한 풀밭에서 성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남자는 자신이고 여자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의 얼굴이다. 그는 몸을 돌려 천정을 바라본다. 천정에서 놈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똑같은 놈들이 마치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아간다. 원시인들이 사냥감을 앞에 놓고 집단으로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는 자신도 놈과 함께 춤추는 것 같은 느낌이 언뜻 든다. 놈의 몸뚱이가 낯설지 않다. 언젠가 밤늦게 보았던 놈의 모습이 머리 속에 나타난다.

놈이 웬일인지 20여 일 동안 화실을 비운 다음 날이었다. 놈은 원래 밖에서 자는 날이 많기 때문에 며칠동안 모습이 안 보인다고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0여 일이 지나자 회원들 사이에 걱정스런 얘기들이 나왔다. 15일 정도 지나자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직접 찾아보겠다는 회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놈은 어디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오고 싶을 때 오는 놈이라 마땅히 어디 물어 볼 때도 없었다. 20여 일쯤 지났을 때, 그는 직장 일을 늦게 끝내고 1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다 화실 창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았다. 그는 놈이 돌아 왔구나 하며 그냥 지나치려다 이상한 예감에 화실로 갔다. 화실 문을 소리나지 않게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수많은 촛불이 켜져 있었고 놈은 벌거벗은 채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앞엔 벌거벗은 몸에 여러 색의 물감을 칠한 여자가 천정을 보며 누워 있었다. 여자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었다. 아이가 둘 딸린 주부인데 무척이나 수줍음을 탔었다.

놈이 그리는 그림은 황토색 바탕으로 여자 회원을 그리는 중이었다. 원래 그런 그림을 그리는 놈이라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앞에 모델로 누워 있는 주부 회원은 의외였다. 그 회원도 놈이 자리를 비운 동안 화실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 회원은 태연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누가 들어올까 두려운 생각이 든다. 누가 들어와 이 그림들을 본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모두 벗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는 쌓여있는 그림들을 바라본다. 살의를 느낀다.

사랑은 사람을 구속 시켜요. 언젠가 놈에게 한 회원이 결혼 안 하냐고 물었을 때 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제가 왜 결혼해요?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싫답니다요. 놈은 부러운 눈치를 보내는 회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가고 싶은 데 가는 놈의 자유가 회원들의 동경을 산 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치부했다. 자신의 화목하고 아무 문제없는 가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인간은 인간스러울 때가 가장 아름답지요. 자유? 그거 좋지요. 하지만 지나치면 추합디다. 그의 말이 끝나자 놈은 크게 웃었다. 인간스러움요? 그게 뭔데요? 가정을 위해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러 다니는 게 인간스러운 행동입니까? 한 사람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을 느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게 가장 인간스러움일까요?

그는 그림을 서너 개씩 들고 화실 뒤에 있는 담벼락 옆으로 옮긴다. 누가 들어오기 전에,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불태워야 한다. 그림을 다 옮기고 나서 다시 한번 더 화실을 둘러보고 담벼락으로 온다. 위에 있는 그림을 든다. 그림 속 자신의 배꼽에 라이터를 켠다. 파란 불꽃이 일며 순식간에 자신이 사라지고 없다. 불에 그을린 캔버스 중앙이 휑하니 뚫려있다. 순간, 가슴이 아리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는 느낌이다.

그는 분노로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그림 하나하나에 불을 붙인다. 순식간에 천이 없어지고 불에 그을린 캔버스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마지막 한 점을 들고 불을 붙이려다 그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에 걸려있는 붉게 물든 구름을 배경으로 수많은 그가 수많은 여자들과, 또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 그림이다. 멀리서 찍은 사진처럼 인물이 희미했지만 그 남자들이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직감으로 안다. 바다 속에서, 모래사장에서 수많은 그가 성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그는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다 잊혀졌던 어떤 장면 하나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놈이 회원으로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단합대회란 명목으로 회원 전원이 경북 영덕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회원들은 탄성을 질렀고, 그를 비롯하여 회원들 저마다 준비해간 화구로 바위로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그렸다. 아마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 좀처럼 이런 풍경을 그림으로 그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흥분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놈은 그림 그릴 생각은 않고 바다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서 혼자 깡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전 날 밤에 과음한 탓으로 심한 갈증에 눈을 떴을 때 놈은 방에 없었다. 아예 이부자리도 없었다. 함께 밤늦도록 바닷가에서 술 마신 기억은 나는데 같이 민박집으로 온 기억은 없었다. 창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놈은 웬 여자와 함께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었다. 무척 다정스런 돌고래 한 쌍 같았다. 수영 실력도 상당했다. 제법 멀리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수영을 하던 두 사람이 바닷가로 나오더니 길고 긴 섹스를 했다.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긴 채. 그는 수치심을 잃고 그들의 행동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한껏 달아올랐다.

그는 그림을 다시 들어 자세히 본다. 남자들은 분명 자기자신이다. 여자들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 얼굴을 그림 가까이 가져간다. 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 소리를 토한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모두 화실 회원들이다. 섹스 파트너 중엔 남자 회원도 있다. 아내는 없다. 섹스를 하는 형태도 다양하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하는 형상도 있다. 마치 동물 무리들이 아침해가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집단 교미를 하는 것 같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림 중앙에 라이터 불을 붙인다. 순식간에 수많은 그와 여자들을 삼킨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 같다.

그림이 다 타고 각목만 남자 그는 화실로 올라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다. 구석구석 뒤진다. 침대 밑에서 조각용 삼각칼을 꺼낸다. 날 끝을 오른손 엄지로 만져본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듯하다. 그는 삼각칼을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화실문을 잠그는 것도 잊고 계단을 내려간다.

식당 앞에 도착한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갑자기 딸의 얼굴이 떠오른다. 앞으로 딸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볼 것 같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홀을 가로질러 회원들이 있는 방문을 거칠게 연다. 놈이 보이지 않는다. 회원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다.

그…… 놈 어디 갔어?

그는 말을 더듬는다. 회원들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얘기를 계속한다. 그는 화가 나 방으로 들어가 고함을 지른다.

그 새끼 말이야. 털보 새끼. 어디 갔어!

회장님은 어디 갔지?

화장실 갔나 봐요.

그럼 슬슬 나가지.

회원들은 그의 말에 아랑곳없이 자기들끼리 얘기하다 일어선다. 그는 시청에 다니는 남자 회원의 멱살을 잡으려다 참는다. 나가서 얘기하지. 홀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여 회원들을 따라 밖으로 나와 계산대로 걸어간다. 놈은 화장실에 갔으리라. 밖에 나가서 보자. 계산대 앞에 서서 지갑을 꺼낸다.

얼마요?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은 아무 반응이 없다.

얼마입니까?

음성을 높인다. 뒤에는 회원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간다. 주인은 옆에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여기 얼마요, 마담?

그의 오른쪽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나자 그제야 주인은 반색을 하며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그도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놈이다. 그는 주머니에 든 조각칼을 만지작거린다.

팔만 칠천 원이네요.

주인은 놈에게 말한다. 그는 구만 원을 꺼내 주인에게 내민다. 주인은 받을 생각은 않고 놈만 바라본다. 놈이 만원짜리 아홉 장을 꺼내 주인에게 건넨다. 주인은 받아 삼천 원을 되돌려준다. 그는 불쾌감으로 주인을 노려본다. 주인은 아랑곳 않고 놈에게 자주 오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회장님, 돈 많이 안 나왔어요?

농협에 다니는 주부 회원이 놈에게 말한다. 뭐? 회장님? 그는 의아하게 놈과 주부 회원을 바라본다.

조금요. 2차로 노래방 갈까요?

좋지요.

놈이 먼저 나가고 주부 회원이 뒤를 따른다. 그는 주인을 향해 뭐라 한마디 하려다 밖으로 나간다. 회원들이 놈 주위에 몰려있다.

회장님께서 2차는 노래방으로 우리를 모시겠답니다.

농협에 다니는 주부 회원이 마치 빅뉴스라도 알리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우리 회장님은 언제 봐도 멋져요.

여자 회원이 놈의 팔짱을 낀다.

회장님, 사모님한테 전화 안 하세요? 늦는다고?

여자 회원의 말에 놈은 너털웃음을 짓는다.

우린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 구속하지 않아요. 늦게 들어오든 다음날 들어오든 상관하지 않아요.

역시 우리 회장님은 자유주의자!

병원에 다니는 아가씨가 놈의 팔을 낀다.

그는 어이가 없어 놈을 노려보다가 가까이 다가간다.

너 나 좀 보자.

그는 분을 삭이며 말한다. 하지만 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옆에 있는 여자회원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큰소리로 웃는다.

자, 갑시다. 밤새도록 놉시다.

놈은 평소의 습관대로 오른팔을 머리위로 휘어지게 들어올리며 유흥가가 밀집되어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이 새끼가.

그는 놈의 뒤를 따라가 어깨를 잡는다.

어?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놈의 어깨가 잡히지 않고 그대로 통과한다. 다시 달려가 뒤통수를 후려친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놈의 머리를 통과한다. 그는 걸어가는 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농협에 다니는 주부 회원이 그의 몸을 통과하여 놈의 뒤를 따른다. 남자 회원과 다른 회원들도 그를 통과해 놈을 따라간다.

이럴 수가.

그는 유흥가로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각칼을 만지작거리다 뒤돌아걷는다. 허방을 짚은 느낌이다. 어디로 갈까. 지금 심정으론 집으로 갈 생각이 없다. 순식간에 길을 잃은 느낌이다. 갈 데가 없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망설이다 화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소란스런 느낌에 눈을 뜬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잠시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화실이다. 소파에 누워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는 황급히 일어나 앉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회장님 왜 먼저 나오셨어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묻는다. 언제 왔는지 회원들 대부분 화실로 와 있다.

“회장님이 가고 나니까 그만 흥이 깨져서 화실에서 차나 한잔 마시려고 왔어요.”

다른 회원이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농협에 다닌 회원에게 묻는다.

“지금 노래방 끝나고 오는 길이에요? 난 피곤해서 잠깐 졸았나 봅니다.”

그의 말에 다른 회원이 말한다.

“노래방에서는 그렇게 신나게 노시더니. 좀 쉬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회원은 물이 끓고 있는 커피포트 쪽으로 걸어간다.

“내가 노래방에 갔었다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회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난 식당에서 그냥 바로 이리로 왔어요. 놈하고 갔잖아요.”

“놈이요? 누구지?”

회원들은 의아한 듯 서로 바라보았다.

“놈 몰라요? 저기 칸막이에서 생활하던 놈 말이요?”

응큼한 그림만 그리는 놈 있잖소, 라고 말하려다 침을 삼킨다. 회원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불쾌한 생각이 든다.

“저기는 회장님이 사용하시는 공간이잖아요.”

회원들의 말에 마침내 그는 불컥, 화를 냈다.

“왜 자꾸 사람을 놀리고 그래요.”

그는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뒤로 제키고 눈을 감았다.

“이거 대추차인데 한 잔 드셔요. 마시면 술이 깰 거에요.”

회원의 말에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은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말하려다 급한 마음에 말머리를 돌린다.

“여기에 있던 놈이 그린 그림 봤어요?”

그의 의심스런 눈빛에 회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림요? 무슨 그림요?”

“놈이 그린 그림이요.”

그는 쿡쿡 찌르는 머리를 오른 손 엄지와 검지로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놈은 대체 누구에요? 아까부터 자꾸 놈이라 그러고. 그림은 또 뭐에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그 왜 있잖아요. 음탕한 그림이요. 놈은 맨날 그런 그림만 그리잖아요.”

그는 숨이 차서 씩씩거렸고 회원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탕한 그림은 또 뭐에요?”

그의 말을 종잡을 수 없다는 듯 회원이 물었다.

“아.”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뭔가 속임수에 빠진 느낌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와서 외계인과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했다. 우선 집에 가서 푹 쉬고 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되돌아올 것 같았다.

“잠깐만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칸막이에서 점퍼를 가져왔다.

“옷 놔두고 가셨어요. 밖에 추울 텐데.”

그는 회원이 건네주는 카키색 점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털보가 입던 옷이었다. 1년 내내 빨지도 않고 입어 속으로 욕하던 옷이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고 놈의 것이잖아요.”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왔다. 어둠이 와락 달려들었다.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 장편소설『누드모델』『존재의 이유』『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