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빙선

 

 

 

가까운 일부터 지워야 한다

문득 등을 돌린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병명(病名)으로 서로를 부르기 전에

에돌기만 하는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위해

긴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갈 필요도 없이.

육천 톤의 신발을 신고 북극해를 건너는 동안

결정된 일들과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밀어낸다

안간힘이 들어 올리는 위로의 음절이,

응결고도에 오를 때까지

발자국은 극지의 항로를 개척한다

무언가를 지운다는 건, 지워버린 것들을 뺀 

내가 잔설처럼 슬픈 입자가 되어가는 일

유빙처럼 내밀하게 시간 속을 떠도는 일

성급한 걸음이 3노트의 속도로 얼음을 덮칠 때마다

북극에 허락된 계절이 포말처럼 사라지고 있다

균열을 일으키는 문장의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면

먼 곳의 일들도 지워질 것이다 그 후의 우린

긴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가더라도 끝내는,

건널 수 없는 건너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금니를 나눠 먹기로 했다

 

 

 

어금니만 있는 짐승을 알고 있다

앞니도 송곳니도 없이 날카로운 본능을

통째로 씹어 먹은 이빨이다

오로지 식물성만 추구하며 숲 속을 드나드는 어금니는

일생에 세 번 자란다, 세 번째 어금니가 빠질 때까지

잘게 나누기만 하는 나른한 몸속이다

순한 것들은 어째서 어금니를 갈고만 있는지

어금니는 송곳니가 없는 짐승이 기도하는 사원

순한 성질을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결심하는 나도 가끔은 이곳에서 아파한다

산다는 게 한 번씩 들쑤시는 치통 같아서

혀만 닿아도 시리고 암담한 통증이어서

소주 한 병 비우고 나면 고개를 처박고

뿌리만 남은 어금니를 위해 울고 싶었다

뿌리가 젖은 어금니를 수생 식물처럼 키우고 싶었다

잘려나간 시간을 떠올린다 허물어진 어금니 속에서

순한 짐승이 굶주리고 있다 우리는 깊은 동굴을 파고

반만 남은 어금니를 나누어 갖기로 했다

어금니만 있는 짐승들이 최후에 먹는 것은 어금니다.

 

 

 

 

2006 문학바탕 신인문학상 

2010 평론가가 뽑은 100대 작가 

시집 <고래는 왜 강에서 죽었을까> (푸른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