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2호...
   2019년 10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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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9861 2014-11-03
578 하산下山을 하며 외1편/구재기 file
편집자
1431 2017-08-30
하산下山을 하며 흐린 물은 멈춰야 맑아진다 온 세상이 비춰온다 물낯에는 하늘이 내려앉고 절집 잠잠히 가라앉고 제멋대로 흐르다가 멈춘 깊은 가슴 속 물줄기 맑던 두 눈이 왜 이리도 갑자기 자꾸만 흐려지는 것일까 오는 걸음 가는 걸음도 아닌 나의 길에는 길이 없다 이른 아침 이른 아침, 대숲 참새떼 우짖는 소리에 단잠에서 깨어나도 짜증 부릴 수는 없다 그 시끄러움에 잠시 두 손을 올려 두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다가도 어느 사이 고개를 되돌리며 휩쓸리다 보면, 절로 게츠름한 가슴이 풀어지고 만다 대숲도 그렇다 맑은 날, 작은 바람결에 수없이 흔들리고 있는 걸 보면 천지간에 참새떼 소리 사방에 생기 철철 넘치고 무심히 듣다가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고마움이 새로워지면 잎잎에 내린 아침 햇살 줄기에 젖어 짐 지워진 일체의 무게에 헤살대는 잎에도 정情이 간다 댓잎 가득한 햇살 사이 제 몸짓 제 소리로 우짖는 참새떼 소리에 푸른 하늘빛이 와르르 번진다 • 1950년 충남 서천 출생 •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공존共存』과 시선집『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다수 •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등 수상. • 한국문협 충남지부장, 충남시인협회장 역임 • 현재 40여년의 교직에서 물러나 <산애재蒜艾齋>에서 야생화를 가꾸며 살고 있음  
577 북소리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1310 2017-08-30
북소리 간밤 하늘에 달무리 지더니 소나기, 북을 친다 무논마저 태우는 마른하늘 독장골* 나락 논에 물끄러미 서 있는 아버지,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에도 콸 콸콸 물꼬 하나 트면 들판 가득, 벼꽃 스스로 피워 올릴 테지만 살다보면 오늘처럼 물을 안고 누울 날 있어 어린모 먹이느라 빈 젖이 될 때 까지 닳은 소매 걷어 올리는 농부의 아내, 어머니 한 발자국 멈춰준 덤, 윤사월 소나기 떨어져나간 자리 탯줄 잇듯 수의 한 벌 마름질하며 세상 밖 또 하나의 길 준비하는 둥 둥 북채 들고 봇물 채우는 빗줄기 북치며 온다 * 경북 군위군 산성면 백학동에 있는 천수답 들 이름 붉은 자리 복병처럼 숨어있다 불쑥 나타나서 하필이면 평온을 찢는 사랑이란 말 가지게 되었는지 당신 딛고나간 핏물 고인 잇몸 들여다보면 사랑, 생의 또 다른 복병인 것 같아 자꾸만 쓰라리는 이 붉은 자리 약력: 경북 군위 백학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 등단,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별자리』  
576 천지에 장경 외1편/ 權 千 鶴 file
편집자
2572 2017-08-30
천지에 장경 착각하지 마라! 8만 4천 대장경이 합천 해인사에 있다고, 8만 4천 번민을 털어내는 8만4천 사람살이 8만 4천 사람 사이에 문제 있고 답도 있다 곳곳에 널려있는 장경각과 장경들 지금 발 디딘 세상이 대 장경각이다 합천해인사에 가기 전에 먼저 살펴라 내 몸이 장경이고 이웃이 선승(禪僧)이다 7월 장마 천지사방, 낯선 곳으로부터 밤낮없이 밀려오는 찬 기류들이 간간이 낮은 구름들을 만나 저기압을 형성하더니 곳에 따라 집중호우가 예상되면서 장마가 시작되었고 일교차 심한 젊음이 몸살과 불면으로 부대끼기 시작했다 내 젊음의, 고온다습한 피가 더욱 뜨거워지는 7월, 여름이 되면서 수온은 예년보다 높았고 흐린 날과 갠 날이 반복되는 조울증도 일찍 찾아왔다 곳에 따라 들이닥치는 집중호우로 상습침수지역인 가슴 밑바닥엔 펄이 쌓여갔고 습지식물로 자라던 나의 시는 뼈다귀만 남아 축대 부실한 갈비뼈 아래로 굴러 떨어져 무너져 내리는 살점들을 떠받쳐야 했다 불면의 밤마다, 볼모가 되어버린 희망은 배수로 막힌 세상의 막장까지 떠밀려가면서도 거기 하류로 떠내려 온 쓰레기들 속에서 눈 뜬 목숨들 거두어 기둥삼고 유실된 농경지에 뿌리 든든한 수종으로 골라 심으며 먼 바다를 향한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7월 장마, 천둥번개 동반한 일기불순으로 근육은 더욱 야물어지면서 흘러 흘러서 도달한 강의 하류, 눅진눅진 얼룩진 살점 아래 덧 난 상처들 제풀에 아물고 뼈마디 소리 없이 굵어지는 장마 때 마다 펄 밭에 내린 뿌리 단단해져서도 아직도 더 가야 도달하는 먼 바다의 길 태풍속의 배 한 척, 일교차 심한 내 청춘을 관통하여 먼 바다로 나가는 물의 길을 따라 긴 격정의 우기를 보내고 나서야 도달한 강의 하류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 가닥 잡고 기울어진 돛대 바로 세우며 강의 하류가 바다에 더 가까운 곳임을 알게 된, 오! 내 청춘 7월의 장마 ****************************** 약력 *현대문학 데뷔. *수상:하버드대학교주최 번역대회 우승/코리아타임즈 주최 한국현대문학번역대회 시 부문 우승/불교문학대상/해외동포문학상대상(단편)/흑구문학상특별상(수필)/WIN’s ‘Distinguished Poet Award’/영랑문학상 등. *저서: 한글시집12권, 영한시집 2권, 일어시집 1권, [속담명언사전](편저)외 다수.  
575 가을비 오던 날 외1편/신성철 file
편집자
1539 2017-08-30
가을비 오던 날 편지가 왔다 찬비에 젖어 후줄근하개 눅눅한 가을볕에 말리지도 못하고 그냥 넘겼다 잘 익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는데 떫은 입 다시고 그냥 웃어버렸다 눈 멀고 귀 멀어 답답했던지 찢겨진 넝마처럼 식어가는 목숨 하나 툭 연탄불 아침 저녁 모셔드려 예불을 올리다가 아차 놓친 사이 작은 실수도 죄가되어 눈 감으신 부처님 지워진 눈자위에 눈알을 박아 구들장 아래 절집 하나 세웠다 검정 향 사르며 무릎 꿇어 빌고서야 정성이 통했는지 빨갛게 웃으신다 언감생심 못난 불목하니 극락왕생 바라겠소 이불속 하룻밤 낙원에나 들게 하소서 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수상 2010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2011년 백교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0년 시집 3천원짜리봄 출간  
574 부레옥잠 외1편/박일아 file
편집자
1439 2017-08-30
부레옥잠 물위에 떠서 흙 한줌 갖지 못하고 태어나 바람 불어와 물이 출렁일 때 마다 연약한 실뿌리로 버티고 영양분 빨아먹고 잎의 둥근 주머니는 희망 싣고 동그란 초록 잎으로 푸른 하늘 우러러 햇살 가득 안아 삼복더위 견디며 승리의 꽃대를 높이 올려 연보라색 꽃을 피웠다 부레옥잠 빛바랜 열이틀 병원 침대에서 하얀 시트를 덮고 그림자도 없이 살았다 숨쉬기와 검사만하고 머리는 텅 비고 자꾸 표백되어 갔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병마를 하나 둘씩 떼어갔다 유턴 점에 이르자 사라졌던 내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자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밤에 병원복도를 산책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 아름답게 반짝였다 겨울나무들이 오색단장하고 보고 있다 다시 색을 찾았다 약력 ; 2009년『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하루치의 무게』 대구 경북 작가회의 회원  
573 쇄빙선 외1편 / 제리안 file
편집자
1720 2017-07-31
17.08월 86호 시 쇄빙선 가까운 일부터 지워야 한다 문득 등을 돌린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병명(病名)으로 서로를 부르기 전에 에돌기만 하는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위해 긴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갈 필요도 없이. 육천 톤의 신발을 신고 북극해를 건너는 동안 결정된 일들과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밀어낸다 안간힘이 들어 올리는 위로의 음절이, 응결고도에 오를 때까지 발자국은 극지의 항로를 개척한다 무언가를 지운다는 건, 지워버린 것들을 뺀 내가 잔설처럼 슬픈 입자가 되어가는 일 유빙처럼 내밀하게 시간 속을 떠도는 일 성급한 걸음이 3노트의 속도로 얼음을 덮칠 때마다 북극에 허락된 계절이 포말처럼 사라지고 있다 균열을 일으키는 문장의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면 먼 곳의 일들도 지워질 것이다 그 후의 우린 긴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가더라도 끝내는, 건널 수 없는 건너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금니를 나눠 먹기로 했다 어금니만 있는 짐승을 알고 있다 앞니도 송곳니도 없이 날카로운 본능을 통째로 씹어 먹은 이빨이다 오로지 식물성만 추구하며 숲 속을 드나드는 어금니는 일생에 세 번 자란다, 세 번째 어금니가 빠질 때까지 잘게 나누기만 하는 나른한 몸속이다 순한 것들은 어째서 어금니를 갈고만 있는지 어금니는 송곳니가 없는 짐승이 기도하는 사원 순한 성질을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결심하는 나도 가끔은 이곳에서 아파한다 산다는 게 한 번씩 들쑤시는 치통 같아서 혀만 닿아도 시리고 암담한 통증이어서 소주 한 병 비우고 나면 고개를 처박고 뿌리만 남은 어금니를 위해 울고 싶었다 뿌리가 젖은 어금니를 수생 식물처럼 키우고 싶었다 잘려나간 시간을 떠올린다 허물어진 어금니 속에서 순한 짐승이 굶주리고 있다 우리는 깊은 동굴을 파고 반만 남은 어금니를 나누어 갖기로 했다 어금니만 있는 짐승들이 최후에 먹는 것은 어금니다. 2006 문학바탕 신인문학상 2010 평론가가 뽑은 100대 작가 시집 <고래는 왜 강에서 죽었을까> (푸른사상)  
572 도통 외 1편/정동재 file
편집자
1592 2017-07-31
17.08월 86호 시 도통 ​ ​영원히 끝나지 않는 몽유도원도 속처럼 한 폭 그림이다 사람들이 그림을 둘러싼다 ​왜가리 떼가 똥 싼 것도 아닌데 괜히 닦지 말라고 구도에 대해 설법한다 힐긋힐긋 훔쳐보던 숲속 원숭이들이 먹었으면 입 닦고 쌌으면 밑 닦는 게 득도라고 제대로 깔깔댄다 꿈속이라도 좋아서 잠이 깨지 않길 바랐다 마른다, 바로 닦아라 그래야 제대로 된 수도지 산사 비구를 내려다보던 양떼구름이 떡이라도 만들 기세로 입방아 찧는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다 도통 모르겠냐고, 도통 모르겠다고 해도 달도 밤낮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폭설 ​ 아나운서의 폭설 경보라는 말마저 얼어붙어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길이 먼저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의 길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 덕분에 하루 이틀 쉬면 좋겠다는 말도 녹아들지 못하고 쌓여있다 그만 그치라는 말이 창밖 나무에 걸려 있다 뚝 떨어진다 쩍 쩍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흰 살결을 드러낸다 ​ ​대부분의 가난은 쌓인 눈보다 더 희다 독설 아닌 독설에 자꾸 미끄러지는 사람들 허한 고개를 넘고 있다 ​ 싸리비도 눈가래도 모두 손을 놓았다 눈밭에 발자국을 심는 드문드문 아이들과 멍멍이가 보인다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다​ 족히 삼 일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 2012년 <<애지>>로 등단 이메일: 별이소년@naver.com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3로 73,602동 1205호(곡촌마을) 우편번호: 10061 핸드폰: 010-7736-7230  
571 초복 외1편/김주애 file
편집자
1658 2017-07-31
17.08월 86호 시 초복 죽전리 이장님 때마침 마누라가 건네 준 16만원을 들고 개한마리를 사서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올여름도 목이 타는 날들을 견뎌내려면 흔해 빠진 개새끼가 딱이라 서둘러 목에 줄을 묶어 나무에 매달려는 순간 고만 개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그 눈빛이라 주춤하는 사이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찰나를 눈치 채고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갔다 화들짝 놀란 죽전리 이장님 부리나케 개를 쫓아 온산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땀은 등줄기 줄줄 흘러내리고 끓어오르는 부아에 더위는 다 잊고 산 속을 헤매고 다녔더니 어느새 해는 저물고 죽전리 이장님 배는 우르릉 우르릉 울었는데 이런 낭패가 어디있냐고 주인 없는 목줄만 가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초복에 신이 난 개가 산등성이에서 실컷 울고 있었다 송현이 길을 가다 나는 순장(殉葬)녀 송현이 봄 햇살이 자꾸만 가슴팍을 헤집고 들어서던 날이었지 아마 아버지가 맑은 물 한 사발을 건네던 날 비로소 새 세상이 열리던 그 날 내 나이 열여섯 대궐처럼 넓은 집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그늘 진 담장 밑 제비꽃이 피고 민들레가 피었어 쭈그려 앉아 꽃잎을 쥐어 뜯으며 피지 말아라 피지 말아라 주문을 외우고 돌아서면 나는 열여섯 살 몸종 주인의 놋숟가락은 열여섯 내 살점을 파먹고도 반짝반짝 윤이 났어 안채 쿨룩이는 기침소리 들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무릎은 도망가자고 자꾸 졸랐어 하지만 사방으로 난 길은 모두 주인에게 가는 길 온종일 축축하고 고단한 하루, 쏟아지는 꿈은 매번 담장을 넘지 못했어 꽃피는 열일곱을 넘지 못했지 다시 태어난 열일곱, 담을 넘어 길을 나섰지 눈물 찍어가며 가던 그 길에 천년 전 마중 나온 바람이 햇살 속으로 손짓하더라 주)송현이-1500년 전 16살 나이로 비사벌(현 경남 창녕)에 순장된 소녀. 2007년 12월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고 하여 이름이 ‘송현이’로 붙여졌다. 이들 죽음의 사인은 중독 또는 질식사라고 한다.  
570 누군가를 보고 있다 외1편/이창한 file
편집자
1540 2017-07-31
17.08월 86호 시 누군가를 보고 있다 나무 나무 사이로 봄빛이 구르며 꽃 색을 부르고 있다 하얀 면티셔츠에 달라붙는 봄기운 연두색, 살구꽃 색으로 묻어나고 나는 누군가를 보고 있다 가슴은 순한 하늘을 닮아서 잊혀진 듯 그대로인데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아 그가 추위 풀린 언덕에 앉아 기억 속에 남겨진 사연을 펼쳐 놓고 조심스레 연주한다 봄, 꽃, 나비…사랑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있을까. 그게 우리들의 봄인 것을 실없이 웃음이 나는 그런 것 말이다 이러다가 봄바람 나겄다…… 봄 몸살 앓다 봄이다! 있는 대로 생트집 잡으며 피어나는 꽃 자태 꽃이다! 아우성으로 터지는 헤픈 웃음 서두러지 않아도 한 뜸씩 바느질로 피워내고 순한 향으로 물들여 내놓은 솜씨 부끄러워 화사한 꽃 뒤에 숨어 낯가림하는 눈웃음 애송이 들킬까보아 돌아앉아 손톱만 물어뜯는 아린가슴 또 두어 달 봄 몸살을 앓아야 하나보다…….  
569 나도 엄마가 있으면/임재수
편집자
1572 2017-07-31
17.08월 86호 수필 나도 엄마가 있으면 임재수 전화가 왔다. 한 마을 사는 친구 명석이다. "순구가 와서 한잔 하고 있엉께 얼런 와" "지금 점심 먹고 있는데" "그냥 내려 와 순구네 집으로" 숟갈을 들다 말고 그냥 내려 갔다. 근처에 가자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마당에 들어서자 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덕(철망)위에서 삼겹살이 노릿노릿 익고 있었다. "얼렁 와!" 순구 어머니께서 반색을 하신다. 작년에 팔순을 지내신 분이다. "아이구 고생이 많습니다." "고생은 무슨~" "이게 얼마 만이야? 얼굴 잊어 먹겠다" 나는 친구를 향해 인사를 했다. "작년 봄에 밨자나?" "엄마 혼자 계시는데 더 자주 와야지?" "야! 그동안 몇 번 왔다 갔었지" "왔으면 이 놈아 형님 보고 인사를 하고 가야지" "그건 미안하다, 그런데 말이야 내 혼자 가면 노인네 밥하기 귀찮다고 마누라가 말리더라" 그러자 소주잔을 들이키던 명석이가 순구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너 참 나쁜 놈이다?" 옆에 계시던 순구 엄마가 갑자기 눈이 뚱그래 지신다. "왜 그래?" "어무이 팔십이 넘어서 아들 밥상 차려 줘요? 지손으로 해 묵으라카지" "난 또 머라고, 아직 내가 꿈적거릴 수 있고 가끔 아들 얼굴 보니 좋지 멀 더 바래" "나는 엄마만 있다면~" "그래서?" 순구가 채근을 한다. "매일 찾아 뵙고 밥상 차려 드리겠다." 나도 한 마디 보탰다. "나는 매일 밥상도 차려 드리고 설겆이 빨래 목욕까지 다해 드리는 걸" 그러자 순구가 "에라이 순~" 한마디 내 뱉았고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명석이 눈에는 방울이 맺혔다. 그날 저녁 고이 자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깨우셨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회초리를 들고 계셨다. 눈초리가 매섭다. "종아리 걷어라" "영감 왜 그러시우" "매일 밥상 설겆이 빨래 목욕까지? 아 글쎄 이놈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나는 종아리를 걷고 섰다. 어머니께서 혀를 차신다. "ㅉㅉ 영감도 망령이지 저 어린 게 뭘 안다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고 물으신다. "네 나이 올해 몇이냐?" "예순 하나입니다." "나보다 나가 더 많은데 철이 언제 들꼬?" 회초리를 휘두른다. 어이된 까닭인지 하나도 안 아픈데 눈물이 쏟아지고 서러웠다. 골목길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한참 후 누나가 다가 왔다. "칠성아" "누야 왜!" "지금부터라도 잘 해 드리면 대는 거야" "정말? " "그래, 다가오는 주말에 우리 육남매 함께 찾아 가자." 그래서 나는 동생들한테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고기도 사고 불판도 사고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주말이 왔다. 모두 함께 고향집을 찾았다. "빨리 안 오고 머하노" "오빠야 숨이 차서 못 띠겠다. 좀 싰다 가면 안 대나" "어이구 답답해라" "그러면 쓰나 어린 동생들 잘 데리고 가야지" 우여곡절 끝에 정든 고향집에 도착했다. "엄마 저들 왔어요!" 마당에 들어서며 모두들 합창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만면에 웃음을 띄고 문을 열고 나오실 텐데 현관문은 닫혀 있고 인기척이 없다. "엄마 어데 갔노?" 막내 동생이 금새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우씨 필리핀서 모처럼 엄마 보러 왔는데" 그 위의 동생이 투덜댄다. 마실 가셨나 찾아 나섰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잡고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단다. 그러다가 순구네 엄마를 만났다. "순구네 엄마요, 우리 엄마 어데 가셨는지 알아요?" "이사 갔자나?" "예?" "벌써 오래 댔는데?" "어대로 갔어요?" "저기 늦은목 뒷산으로" 순구 엄마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노란 잔디 그리고 할미꽃이 피어 있는 산소였다. 맥이 빠진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런데 옆에서 서서 계시던 순구 엄마 얼굴이 우리 엄마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마디 하신다. "일에는 다 때가 있는기라"  
568 샴/최형심 file
편집자
1343 2017-07-31
17.08월 86호소설 샴 - 최형심 나는 그와 한 몸이다. 문제는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다. * 연못이 있다. 그 아래 바다가 흐른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안다. 빗방울이 나무의 기억을 털어내고 있다. 저마다 서로의 기억을 버린 것들이 땅을 적신다. 나는 기억을 털고 연못 속으로 뛰어내린다. 연못은 깊다. 나는 끝없이 가라앉는다. 눈을 떴다. 나는 양수 속에 있다. 여기는 우리의 바다……. * 우리는 가슴 아래로 몸이 붙은 채 버려졌다. 그날을 전후로 나의 기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해졌다. 기억만이 아니다. 나의 감각 또한 더 없이 예민해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늘면 늘수록 그가 잊어가는 것도 그만큼 늘었다. 그는 그날의 불길 속에 시력마저 잃었다. 등이 붙어있었으므로 우리는 한 몸이나 결코 마주볼 수 없었다. 나는 자주 그립다고 말했다. 그는 자주 그 단어의 뜻을 잊었다. * 어머나! 어쩌면 좋아! 신문지를 들춰본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 좀 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낡은 박스 안, 피 묻은 거즈와 약솜들 속에서 하나의 살덩어리인 우리가 세상과 마주쳤다. 그들은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남녀가 한 몸이야, 여자가 남자를 보았다. 신고해,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십이월의 밤이었다. 곧 119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우중충한 계단으로 올라왔다. 깜빡거리는 형광등 아래 우리의 모습을 본 대원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쳤다. 웃어, 나는 그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나도 그도 웃어야 했다. 그러나 웃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울상이 되었다. 그래서 울었다. 웃으려고 했는데 울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한 가지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119대원은 우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우리를 앞뒤로 돌려보며 난처한 얼굴이 된 대원이 쓱 아랫도리를 살폈다. 이런! 119대원은 이렇게 말하고 코를 킁킁 들이마셨다. 이런! 이건 우리를 맞은 사람들의 인사법 같은 것이었다. 다시 이런! 이라고 외치고 그는 가지고 온 담요로 우리를 둘둘 말았다. 119대원의 품에 안겨 우리는 허름한 연립주택의 복도를 벗어났다. 우리가 담겨있던 더러운 박스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작은 별처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웃어, 내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그는 울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싸구려 장식등이 내 눈물 속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 우리는 부활했으나 라면박스에 버려졌다. 병원 응급실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글쎄요, 생후 한 열흘? 아니 한 달? 아니 일 년? 어쩌면 천 년 쯤, 의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뭐, 그런 대답이 다 있어요? 119대원이 한심한 듯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샴쌍둥이는 성별이 같아야 하는데 얘들은 남녀라니까요, 썀 쌍둥이는 일란성 쌍생아에게만 발생하는 거거든요, 의사가 말했다. 네? 119대원이 인상을 썼다. 남녀가 샴쌍둥이가 될 확률은 당신 고양이가 어느 날 햄릿을 읊을 확률과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죠, 의사가 말했다. 그럼 고양이도 햄릿을 읊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건가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야옹, 119대원이 눈을 껌뻑거렸다. 내 말은, 의사가 말을 더듬으며 두툼한 책을 꺼내 읽어주었다. 썀쌍둥이는 서로 다르게 발달하던 두 개의 개체가 달라붙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였던 수정란이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렇다고요. 아, 그래요? 얘들 어떻게 해야 하죠? 갈라서 둘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119대원이 물었다. 허? 샴쌍둥이 분리하는 게 생일케익 나누는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에요, 의사가 말했다. * 다음날 의사가 법학자와 그의 제자를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이들은 등이 서로 붙은 형태의 샴쌍둥이인데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우리를 본 법학자의 제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선생님, 샴쌍둥이의 권리능력은 어떻게 되는 거죠? 한 사람인가요, 두 사람인가요? 하나의 육체 안에 서로 다른 자아가 공존하는 다중인격장애와는 구별의 실익이 존재하나요? 샴쌍둥이 중 한 사람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는 항상 공동불법행위가 되나요? 다른 한쪽은 항상 방조자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 선생님? 또 만약에 한 사람이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면 다른 한 사람도 감옥에 가야하나요? 법학자가 갑자기 손을 들어 제자의 말을 가로 막았다. - 미친놈!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갑자기 텅 비었다. 그 다음날 의사와 법학자는 철학자를 데리고 왔다. 우리를 본 철학자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현신이라니!” 의사가 우리의 몸을 더듬는 동안 철학자는 우리를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날 한 시인과 함께 나타났다. 시인은 우리를 보더니 다시 다음날 연극배우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의사와 법학자와 철학자와 시인과 연극배우는 우리를 에워쌌다. 그리고 연극배우가 선포하듯 시를 낭송했다. -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기원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침을 삼켰다. - 옛날에는 자웅동성의 인간이 있었고 둥그런 등과 원형의 옆구리에 네 개의 팔과 다리가 있었네. 둥그런 목에 두 얼굴이 반대방향으로 보는 머리가 있었으며 성기도 둘이라네. 원 모양으로 굴러가기도 했던 이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들까지 공격했다네. 인간의 오만함을 참을 수 없어 제우스는 마가목 열매를 자르는 사람처럼 또는 달걀을 말총으로 나누는 사람처럼 인간을 둘로 나누고 두 다리로 걷도록 했네. 인간은 자신의 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팔로 상대방을 껴안고 얼싸안으며 한 몸이 되기를 원하며 굶주림 또는 무기력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네. 반쪽이 죽으면 살아남은 반쪽은 남녀를 불문한 다른 반쪽과 결합하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멸종할 지경에 이르렀다네. 자웅동체일 때는 성기가 바깥으로 향했기 때문에 인간은 매미처럼 땅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제우스는 인간의 성기를 앞으로 향하게 해서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결합하여 자식을 낳게 했다네. 인간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태초부터 인간의 본성 속에 있었는데 둘을 하나로 하는 결합이 인간의 상처받은 본성을 치료했다네. ‘에로스, 그 심연의 비밀’ 중에서, 김백겸,이라고 연극배우가 말하고 모두가 울었다. * 그리고 우리는 병원을 나왔다. 모두가 슬퍼해야 했지만 아무도 슬프지 않았다. 병원을 나온 후 우리는 임시로 한 개척교회에 맡겨졌다. 타일 몇 개가 떨어져나간 외벽에서 삐뚜름한 붉은 십자가가 깜빡거리는 상가건물 6층 66호, 꼬질꼬질한 방석 위에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했다. 주여, 죄인을 용서하소서, 우리를 보며 울부짖는 한 떼의 사람들을 보고 그는 까무러치듯 울었다. 얇은 칸막이에는 집나간 목사 아내의 사진이 아무도 모르게 흔들렸다. 그 아래서 표정 없는 딸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목사는 딸을 거칠게 밀어내고 샴쌍둥이를 검색했다. 샴쌍둥이는 지명에서 비롯됐다, 19세기 초 창 엥과 분커라는 중국계 형제가 태어난 곳이 태국의 옛 지명인 샴이다, 버넌이라는 사람은 이들을 '샴쌍둥이'라고 이름 짓고 광대를 시키며 돈을 벌게 했다, 이건 신의 뜻이야!, 인터넷을 뒤적이던 목사가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우리를 내세운 신의 사업은 대박을 쳤다. 헌금함에 차곡차곡 돈이 쌓이고 목사는 곡마단의 주인처럼 돈을 벌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근처여서 더 그랬다. 이 정도 벌이면 6개월만 모아도 교회 하나는 새로 짓겠어, 그가 뿌듯하게 장부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난 쟤들 싫어, 언제나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리던 목사의 딸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흥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에게 감명을 받은 누군가가 신문사에 전화를 했다. 기자들이 찾아왔다.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여전히 웃어야 했으나 내내 울었다. 다음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다. 구청복지과에서 사람이 나왔다. 난 쟤들 싫어, 언제나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리던 목사의 딸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목사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었다. 우리는 구립 복지원으로 옮겨졌다. 복지원에 맡겨진 다음날 그는 등 뒤에서 할렐루야를 외쳤다. 할아버지래, 보모가 말했다. 옹알이치곤 특이하군, 봉사 온 여학생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그의 발음이 나날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 이 품 저 품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무도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잘 자랐다. 복지원 원장은 우리에게 님과 남이라는 이름을 각각 붙여주었다. 그런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센스 있음에 스스로 탄복해서 자주 사람들에게 우리 이름을 자랑했다. - 님과 남은 한 몸이야? 어때?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그는 좌절했으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사실 그는 배가 좀 거대했다. 그는 때때로 지역신문에 전화를 했고 기자들에게 우리 한 달 식비보다 더 비싼 저녁을 샀다. 가끔씩 그는 지역신문의 소식란을 장식했다. 그럴 때면 사진에 찍히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안아야 했다. 기자들이 가고난 후 그는 살가죽이 쪼그라들도록 비누로 손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그런 날 우리는 구석에서 오랫동안 손가락을 빨았다. * 나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몸이 자라는 속도는 너무 더뎠다. 우리는 옆으로 누워 자주 뒤척였다.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본지 천년도 더 된 것 같았다. 그래 정말 어쩌면 천년도 더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날 그가 중얼거렸다. 기억하는거야? 내가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눕는 바람에 나도 돌아누워야 했다. 나는 때때로 엄마였던 여자를 기억했다. * 그는 자주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엄마에게 가면 엄마의 손님이던 아저씨가 많이 컸다고 나를 한 번 안아 보자고 했다. 그 남자는 내 몸을 만졌다. 엄마였던 여자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나를 낚아챘다. 자식은 다 부모 따라 가는 거야,라고 그 남자가 말하자 엄마는 우리에게 저녁으로 먹다 남긴 볶음밥을 주었다. 나는 날파리가 앉아있던 밥을 먹었다. 그는 날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잘 먹지 않았다. 내가 날파리를 쫒으며 입을 벌릴 때, 그의 하얀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작고 여리고 예민했다. 저 자식은 주제를 모른다,고 엄마였던 여자는 자주 분노했다. 하얀 뺨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갔다. 그럴 때면 엄마였던 여자의 새하얀 피부가 보랏빛으로 빛났다. 나는 엄마였던 여자의 길고 가느다란 팔이 그리는 포물선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여자의 보랏빛 팔은 느린 화면처럼 움직였다. 그는 울었다. 그는 언제나 울었다.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울고 엄마에게 맞아서 울었다. 아니, 어쩌면 웃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랬다. * 엄마는 자주 편지를 받았다. 엄마는 아빠가 중국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모들, 그러니까 엄마의 동료들이 우리에게 아빠는 교도소에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교도소가 중국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또 어느 날 엄마의 손님들은 엄마가 몸 파는 여자라고 했다. 엄마의 몸은 팔아도 줄어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머리를 파는 것 보다는 그래도 몸을 파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머리는 딱딱했지만 엄마의 몸은 부드러웠다. 어느 날은 아빠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 중국은 모든 것이 다르구나,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그 문장을 우리에게 읽어주며 엄마는 픽, 웃었다. 우리는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편지는 중국에서 아빠가,로 끝났다. 그날 엄마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새벽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엄마, 오줌이 마려워, 예민한 그가 뒤척이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야, 너는 지 애비 닮아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이제 날 그만 좀 들볶아, 여자가 그의 하얀 목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그는 잠이 덜 깬 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흔들렸다.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 지긋지긋한 비극에서 독백은 항상 너무 길었다. 엄마였던 여자는 귀를 막고 쓰러졌다.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여자가 우리를 향해서 울먹이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우리는 요의가 싹 가신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안은 항상 한 여름이었다. 때로 한 겨울이었다. * 어느 날 우리는 공사장에서 산처럼 쌓인 스티로폼 더미를 발견했다. 우리는 밤을 틈타 그것들을 집으로 날랐다. 연탄재가 버려진, 뱀처럼 요리조리 굽은 골목을 지나왔다. 텅 빈 살구색 연탄아궁이가 눈에 들어왔다. 베니어합판으로 조각보를 깁듯 붙여놓은 벽이 보였다. 이어 군데군데 함석판으로 때운 벽과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귀퉁이가 깨진 슬레이트 지붕에서 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집이다, 그의 말에 귀가 환해졌다. 한 층 한 층 높아져 가는 스티로폼 더미를 바라보며 우리는 감격했다. 침대가 생겼어,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단어를 말했다. 침대. 기압이 낮아진 날처럼 검고 긴 그의 속눈썹이 젖었다. 눈꺼풀이 살풋 내려앉았다, 단 한 방울의 눈물을 떨구기 위해. 나는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는 하얀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씹었다. 가늘고 순결하고 신경질적인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첫눈이 내렸다. 스티로폼처럼 하얀 밤이었다. 우리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눈 오는 풍경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스티로폼 침대 위에 올라가 꼭 껴안았다. 저 아래 냉골보다 그의 체온이 좋았다. 우리가 껴안은 곳에서 코딱지만 한 유리창이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더 세게 껴안았다.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토끼털처럼 부드러워졌다. * 다음날 우리는 새하얀 침대에서 일어나 새하얀 세상으로 나갔다. 새벽은 하얗고 발목이 시린 경험이었다. 그날 엄마는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했다. 우리는 눈 위를 굴렀다. 뛰었다. 다시 굴렀다. 그러다 눈을 뭉쳐 그를 향해 던졌다. 그는 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잇몸사이에 끼어 웃음소리가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가 웃음이라는 언어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커다란 눈덩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굴렀다. 하얀 바닥을 하얗게 굴렀다. 빙글빙글 빨리 돌아가는 건물과 거리와 가로등이 있었다. 그러다 나는 무언가에 탁, 부딪쳐 멈추었다. 아직 채 둥글어지지도 않았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 이게 누구야? 술에 취한 남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은 붉었다. 나는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 말린 몸을 풀었다. 저만치 그가 도르르 굴러가며 까르르 웃었다. 나는 행복한 그를 보다가 다시 술에 취한 남자를 보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빡였다. - 엄마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엄마의 손님이었다. 얼마나 컸나 나를 만져보던 그 손님이었다. - 그래? 집이 어디야? 나는 저만치 멀어져온 집을 가리켰다.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집들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 여기서 이러고 놀면 위험해. 아저씨가 데려다 줄게.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누런 이를 드러냈다. 내 손을 낚아챘다. 나는 손을 뺐다. 엄마의 손님은 인상을 쓰더니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엄마의 손님은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 우리 집 쪽으로 향했다. 나는 소리치려 했지만 입이 얼어붙어있었다.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나는 끝내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 우리들의 새하얀 세상은 끝장이 났다. 새빨간 피가 도르르 도르르 스티로폼 위를 굴러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을 흘러 하얀, 방금까지 하얗던 세상으로 흘러갔다. 남자의 눈은 붉고 나의 피는 따뜻했다. 세상은 하얗고 나의 피는 따뜻했다. 나는 깜빡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돌린 곳에 언제나처럼 그가 울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그의 하얀 얼굴이 납작해져 있었다. 유리창 밖, 그가 눈 온 풍경처럼 얼어붙어있었다. * 야, 이 개새끼야! 엄마였던 여자의 검은 사막 같은 눈동자가 곧 모래알처럼 바스라질 것 같았다. 남자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어차피 얘도 언젠가는 하게 될 텐데 뭘, 남자가 바지에 다리를 끼우려고 허둥대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였던 여자의 손톱이 남자의 등에서 부러졌다. 아이 왜 그래 씨팔, 남자가 엄마였던 여자의 손목을 꺾으며 소리쳤다. 엄마였던 여자가 짐승처럼 소리쳤다. 나는 무서웠다. 나는 구석으로 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속은 한겨울이었다. 토끼털처럼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몹시 그리웠다. * 기억나? 나는 등 뒤의 그에게 매일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자랐다. 너무 빨리 자라서 관절 마디마디가 자주 쑤셨다. 나는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그는 약은 먹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주 꿈을 꾸었다. 자주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키가 부쩍 자라고 있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이 자라는 몸 때문에 매일 아팠다. 이제 원장은 더 이상 카메라 앞에서 우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어느 날 원장은 카메라 앞에서 우리를 안다가 손목인대를 다쳤다. 원장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 온 후 우리는 골방에 갇혀 지냈다. 그러나 우리를 내쫒지는 않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상징이야, 인간의 죄악을 보여주러 신이 우리에게 보내신 거지, 원장은 목사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 했다.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러온 학생들이 열심히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서로의 몸을 지탱하기에 우리는 너무 지쳤다. 우리는 주로 누워서 지내기로 했다. * 그날 이후 엄마였던 여자는 열쇠를 채우고 일하러 나가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였던 여자가 일하는 동안 우리는 꼼짝없이 방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방안에 요강이 하나 더 생긴 것 빼고는 사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팠으며 여전히 방바닥은 세상처럼 차가웠다. 한때 우리는 나가서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럴 때면 그는 우리의 초라한 집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은 훨씬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닫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어, 그가 말했다. 둥근 이마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추웠다 정말 추웠다. 그 겨울 내내 추웠다. 그래서 우리는 침대 위에서 지냈다. 그 겨울, 냉골인 방바닥 위에는 버석거리는 우리들의 침대가 있었다. * 나의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으나 내가 흘린 피는 굳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엄마였던 여자는 돈을 요구했다. 나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벽처럼 꾸덕꾸덕 굳어가고 있었다. 엄마의 손님이었던 남자는 서운하지 않게 값을 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오고 있었다. 그는 하얀 손을 깨물며 누나 아파?, 아파?, 나도 아파,라고 중얼거렸다. 간호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구석으로 밀었다. 나를 실은 스테인레스 침대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곧 나는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환한 불빛 아래 누웠다. 안경을 낀 의사가 하얀 고무장갑을 낀 열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의사의 눈도 붉었다. 그것은 나의 피 때문이라고 생각하려는데 잠이 들었다. * 나는 실밥을 풀었고 엄마였던 여자는 두둑한 돈뭉치를 셌다. 침을 퉤퉤 뱉으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돈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네, 그리고 다시 돌아갔다. 아이 씨, 중간에 숫자를 까먹었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네, 숫자는 항상 거기에서 멈췄다. 뭐야? 그 다음이 뭐였지? 엄마였던 여자는 사실 열다섯 너머의 숫자를 셀 줄 몰랐다. 그녀의 오빠가 그녀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던 날, 그녀는 열다섯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자주 자해를 했는데 주로 머리를 찧었다고 했다. 그래서 덕분에 열다섯이 넘어가는 숫자는 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여자는 그 이후의 삶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이상한 계산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십오진법이었다. 세상에 없는 계산법으로 그녀는 세상을 쟀다. 그러니까 여자는 열넷에서 멈춘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열넷까지 셌다. 그런 식으로 계산을 했다. 나는 물었다. 열넷에서 멈추는데 왜 십오진법이냐고. 엄마였던 여자는 화를 버럭 냈다. 야 이년아, 이진법도 빵부터 세잖아, 십진법도 빵부터 세잖아, 빵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빼냐? 빵 그래 빵, 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 여자의 십오진법은 항상 울음으로 끝났다. * 우리는 그 겨울을 스티로폼 침대 위에서 보냈다. 단단히 잠긴 문 안은 더 없이 추웠다. 우리는 꼭 껴안았다. 그의 가늘고 포동포동한 팔이 내 목을 감았다. 목도리야? 내가 물었다. 그는 응, 대답했다. 분홍색 손바닥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목을 더듬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허리를 더듬었다. 우리는 서로의 팔을 감았다. 우리는 서로의 다리를 감았다. 우리는 배를 더듬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몸뿐이었다. 서로의 안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따뜻해졌다. 그럴수록 겨울은 더 혹독했다. * 우리의 몸은 어느새 부쩍 자라있었다. 원장은 우리가 거인이 될까 두려웠다. 우리는 먹고 잤다. 자고 나면 뼈마디가 훌쩍 자랐다. 우리가 자랄수록 원장의 걱정도 커져갔다. 우리는 덩치가 이미 열서너 살짜리 아이만큼 자라 있었다. 십 개월 좀 넘었다더니 열 살도 넘은 것 같아, 어느 날 봉사활동 나온 중년여자가 소리쳤다. 그 중년여자는 한참 진주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결심이 선 듯 우리를 벗겼다. 막 가슴이 생기려고 하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즈음 우리의 몸에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함께 화장실에 가고 함께 목욕을 할 때마다 스물 스물 등 뒤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가 밤마다 휴지를 잔뜩 말아 쥐고 무언가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그가 돌아서 오줌을 눌 때마다 부끄러움에 귀를 닫아야 했다. 목욕을 위해 옷을 벗어야 할 때는 등이 붙은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비누거품을 말아 쥐고 슥슥 아래를 닦을 때마다 나는 그가 묻힌 비누거품이 내 비밀스런 영역으로 넘어올까 침을 삼켰다. 우리가 목욕봉사에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은 너무 어려 몸을 가눌 수 없어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몸이 부쩍 커진 이후 목욕봉사는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원장은 목욕봉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포기할 줄 몰랐다. 그 중년여자는 남편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우리를 목욕시키기를 원했다. 물론 봉투를 받은 몇몇 사진기자들을 위해서 욕실문을 활짝 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서 터지는 플래시들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 우리는 서로의 체온에 기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더 이상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들 수 없을 만큼 파고들었는데도 겨울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였던 여자의 벌이는 그즈음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내 치료비로 받은 돈은 곧 바닥이 났다. 여자는 그 돈으로 코 수술을 했다.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다짐을 하던 손님한테 얼굴을 한 대 맞고는 그만 코가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였던 여자는 코의 보형물을 빼고는 며칠을 끙끙 앓았다. 그 바람에 일을 못하게 되자 안 그래도 밀린 방세는 더 밀렸다. 결국은 수도도 끊어지고 전기도 끊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 여자는 진통제를 탈탈 털어 먹고 일을 하러 나갔다. 일을 나가기 전에 우리를 위해 초를 한 자루 사왔다. 아껴 써, 그게 우리가 지상에서 그 여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밖에서 문을 잠갔다. 우리는 어두워오는 판잣집에 남겨졌다. * 중년여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매니큐어의 반짝이는 펄이 불빛에 흩어졌다. 우리는 부끄러워 최대한 몸을 말았다. 무슨 현대미술작품 같군, 중년여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차가운 물을 한바가지 확 끼얹었다. 우리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중년여자는 마치 물건을 닦듯 우리를 닦았다. 카메라의 불빛이 우리를 낱낱이 보고 있었다. 우리가 몸을 말면 말수록 잘 관리된 중년여자의 손은 더 신경질적으로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중년여자는 수건으로 우리의 사타구니를 벅벅 밀었다. 아 씨, 그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중년여자를 거세게 밀쳤다. 중년여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중년여자는 카메라들을 향해 열려있던 문을 쾅 닫았다. 중년여자가 다시 손을 들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만, 그만 우리를 놔줘요, 나는 중년여자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중년여자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 손을 뿌리쳤다. 추악한 게 어딜! 전생에 뭔 짓을 했기에 이런 해괴한 꼴이야! 중년여자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울컥할 수 없을 만큼 서러웠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 그는 울음을 그치는 대신 이렇게 중얼거렸다. 닥쳐! 이번에는 중년여자가 아니라 내가 소리쳤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숨죽여 흐느꼈다. 중년여자가 찬물을 확 끼얹더니 일어났다. * 밖은 청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희고 세상은 어두웠다. 빛이 들지 않는 방에서 우리는 밖을 보았다. 잔잔한 불빛들이 부동항을 찾은 겨울 배들처럼 다정했다. 그는 입으로 뿌우 소리를 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인천 연안부두에 갔던 때를 기억했다. 우리는 바다냄새와 연료가 타면서 나는 묘한 냄새가 어우러진 이별의 느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는 오지 않았다. 아빠는 중국에 있었다. 아빠는 오지 않았다. 아빠, 중국은 날씨 어때?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중국이라고 말하려는데 왈칵 울음이 나왔다. 바다는 우리를 알지 못했다. 바다는 우리 아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를 알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밤이 오도록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바다가 우리를 떠났다. 누군가 우리를 부랑자로 신고했던 것이다. 세상은 참 친절했다. * 어둠이 내리지 않아도 세상은 우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홑이불과 스티로폼 침대와 서로의 체온과 작은 창으로 난 세상의 풍경만을 소유했다. 밤의 무늬로 우리가 서로를 그릴 때 우리는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전기밥솥에는 언제 했는지 알 수 없는 누렇고 딱딱한 밥알들이 서로 엉켜있었다. 우리는 살얼음이 낀 페트병에 든 물을 밥통에 붓고 말아먹었다. 희멀건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나서 우리는 침대로 돌아갔다. 얇은 이불 밑으로 파르르 떠는 파르스름한 그의 손이 보였다. 나는 그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었다. 따뜻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우윳빛 국물이 입가에 다 마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몸을 밀착한 채 언제나처럼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 아래 동네에는 환하게 밤을 밝히는 전구들이 거리마다 깔려 있었다. 저 트리의 불빛들은 따뜻할까? 그는 작은 입술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돌아누워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교회에서 집 앞에 세워준 크리스마스트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넷, 나의 셈도 거기에서 끝났다. 이건 유전인지도 몰라, 나는 열넷에서 멈춘 나의 숫자를 생각했다. 열네 살이 되려면 두 배는 더 살아야 했다. * 어쩌면 내일 열네 살이 될지도 몰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며 그가 말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내가 말했다. 떠나자, 그가 말했다. 어디로?, 내가 물었다. 엄마에게 가자, 그가 전생에서처럼 말했다. 그건 이생의 단어가 아니야, 아마 내일이면 너는 그 단어를 잊을 거야, 내가 말했다. 이러다 정말 열네 살이 되면 그때는 어쩔 거야?, 그가 말했다. 그럼 열네 살이 되는 거지, 내가 말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나도 딸려 일어났다. 나는 가야겠어, 그가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 우리는 열넷까지 숫자를 셌다. 이제 양초에 불을 붙이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열넷까지 숫자를 셀까하다가 멈칫했다. 그의 눈가에 고인 물기가 정말 곧 얼어붙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불꽃이 생겨난 성냥개비를 조심스럽게 심지로 가져갔다. 그의 눈동자 속에 작은 불씨가 생겨났다. 이제 따뜻해질 거야, 나는 자랑스럽게 성냥개비의 불을 흔들어 끄며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뚝 떨어졌다. 생명체를 가둔 작은 호박처럼 그의 눈물 속에는 작은 불꽃이 갇혀있었다. 거봐, 얼어붙어있던 눈물이 벌써 녹았잖아, 내가 말했다. 그는 말없이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추워, 그가 말했다. 아직도 추워? 응 추워. 그는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추워? 응 추워. 그는 몸을 말았다, 추워? 추워. 나는 무릎으로 기어가서 그를 꼭 껴안았다.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 발목이 따뜻한 꿈을 꾸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눈 쌓인 대륙을 걷고 있었다. 하얀 언덕과 은빛 바다와 하얀 털로 뒤덮인 북극곰들로 우리의 눈동자에는 하얀 점들이 돋아났다. 따뜻해, 내 귀에 대고 그가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따뜻했다. 그러자 우리의 하얀 세계가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독한 냄새가 순식간에 반쯤 빈 위장까지 가득 찼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불타고 있었다. 발밑을 타고오던 온기가 어느새 우리의 존재를 녹이고 있었다. 나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떠야 했다. 발이 불타고 있었다. 다리가, 팔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떠야 했다. 그의 발이 불타고 있었다. 그의 하얀 손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달팽이처럼 웅크린 자세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얼핏 그가 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우리는 불타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꿈도 불타고 있었다. 살갗 위에서 끈적끈적한 옷가지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겨울 내내 껴입고 벗은 적이 없는 옷을 벗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직 봄은 멀었다. 꽃은 피었다. 불꽃, 불꽃이었다. * 곧 봄이 올 지도 몰라, 그가 밤을 틈타 문을 열었다. 그는 걸었다. 나는 걸었다. 그래서 우리는 걸었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때로 그가 앞에 서서 걸었다. 그럴 때면 나는 뒷걸음질을 치느라 허우적거렸다. 때로는 내가 앞서 걷느라 그가 스텝을 놓치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밤에 걸었다. 대낮에 우리를 보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낮 동안 우리는 후미진 건물의 안쪽이나 기차역 구석에서 담요로 몸을 말고 지냈다. 낡은 담요에 싸인 우리들을 향해서 누군가는 가끔씩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거북처럼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곱이 낀 얼굴로 햇빛 속에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는 자주 찌푸렸다.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이 그의 하얀 얼굴에 드리워져있었다. 그는 담요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자주 바닥에 알 수 없는 문자로 무언가를 썼다. 그럴 때면 나는 등 뒤가 몹시 궁급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편지, 그가 대답했다. 어디로 보낼 거야?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울이 없는 나라, 아니 거울이 있다가 없는 나라,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우리의 여행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때로 물었다. 그는 자주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자주 소리 없이 울었다. 가끔 진눈깨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오소소 어깨를 떨었다. 나는 덩달아 떨리는 내 어깨를 어쩌지 못했다. 엄마, 엄마에게 가고 싶어, 그가 중얼거렸다. 질척거리는 거리에서였다. 엄마? 엄마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했었나?,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그건 그에게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어느새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한때 우리는 거기에 살았었다. 그러니까 그날 이전에……, 그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그 도시를 2킬로미터 정도 남긴 곳에 서있었다. 그날?, 내가 메아리처럼 되물었다. 그래 그날, 우리가 불길에 휩싸인 날, 우리의 살가죽이 불타버리고 맨몸으로 뒤엉켜 그곳을 빠져나오던 날……,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가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 전등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긴 복도를 가진 여인숙 같은 건물이었다. 발밑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낡은 실내화를 질질 끌며 노파가 앞서가고 있었다. 복도를 따라 줄지어 있는 방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있었다. 침침한 실내에는 깊은 숲속 같은 냄새가 났다. 그 복도 끝에 우리의 과거가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끝까지 우리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발끝이 저렸다. 그는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뒤로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허둥대던 내 손이 잡은 것은 단단하게 굳어있는 그의 근육이었다. 나는 낯선 그 감촉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복지원을 떠나온 사이 그는 부쩍 자라 어른이 되어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는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뚜벅 뚜벅 뚜벅 뚜벅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그의 걸음은 복도 끝에서 멈췄다. * 여자는 늙고 추한 모습이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는 두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를 그렇게 불렀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돌아섰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여자와의 대면을 받아들였다. 아빠는 중국에서 왔어? 나는 기억나지 않는 존재를 더듬어 기억하려고 했다. 나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손톱으로 입술을 잡아 뜯었다. 내가 입술을 뜯기 시작하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자는 갑자기 손가락을 쫙 폈다. 손가락마다 첫마디가 모조리 잘려나가 있었다. 아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응? 그럼 중국은 다 뭐야? 아니지, 감옥은 다 뭐야? 나는 물었다. 오빠야, 여자의 눈이 허공을 보는지 나를 보는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멈췄다. 뿌리를 더듬는…… 흙 속의 잠…… 나무에는 싹이 트고…… 두 개의 가지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향해 여자가 띄엄띄엄 단어들을 쏟아냈다. * 우리를 안내한 노파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엄마였던 여자는 자해를 했다고 했다. 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고 노파 집의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잡고 아파, 너무 아파,를 외쳤다고 했다. 사람들은 달아났다고 했다. 여자는 날마다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잘랐다고 했다. 그의 촉감을 낱낱이 기억하는 손가락들이 쑥쑥 자라는 꿈을 매일 매일 꾸었다고 했다. 손가락들이 어느 날 나를 꿰뚫고 말거야,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했다.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의 마디들이 먼저 차례로 잘려나가고 오른손 손가락들이 서툴게 잘려나갔다고 했다. 여자는 피 흘리는 손가락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 했다. 겹겹이 나의 입술에 묻은 그 이름을, 그 입술을, 그의 체온을, 나를 위해 하얀 생일 케익을 훔치던 그 손을, 생일케익을 빼앗은 기름 낀 뱃가죽을 케익 대신 반으로 갈라버린 그의 피를, 그를 지우고 싶어, 여자는 입술마저 잡아 뜯었다고 했다. 여자가 서있는 주변이 노을처럼 붉게 번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여자는 점점 더 멀리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엄마였던 여자 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주로 입시를 앞둔 부모들이거나 결혼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여자의 공허한 눈이 가리키는 방향은 틀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노파는 엄마였던 여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고 했다. - 애들이 있었는데 불타서 죽었대. 그것 때문에 충격이 컸나 봐. 언젠가는 상상임신을 한 적도 있었지. 죽은 아이들이 뱃속에서 뒤엉켜있다나? 글쎄 상상만으로 배가 엄청나게 부풀었다니까. 그래서 배를 갈랐는데 거기에는…….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아무 것도 없었어. * 아물지 않는 겨울풍경 속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눈썹의 윤곽을 더듬고 있었다. 추워, 그는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하나의 빛깔과 하나의 숨결과 하나의 요람 그리고 하나의 죽음, 그는 웅얼웅얼 라마승처럼 중얼거렸다. 오래된 숲으로 향하는 것들은 모두 외눈박이들이야, 그가 엄마였던 여자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움직이는 미궁 아니, 자궁 같아, 나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 아마도 그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침묵했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와 한 몸인 채 혼자라는 사실에 오싹해졌다. 서로의 몸을 파고들었던 자리에는 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이따금 금속성 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내부에서 오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탯줄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그가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내부를 순환하고 있는 그의 피와 그의 목소리와 그를 향하는 나의 생각들을 생각했다. 내부에서 오는 신호음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가 완강한 감정으로 나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이 세계가 우리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어둠이 다가와 나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누가 한 줌의 별을 뿌려 우리를 기억해줄까, 나는 눈을 비볐다. * 끼이……………………………………………………이……………………………………이…………………………………이………………………끼……………이…………………………………이……………………………………이…………………………………………………………………………………………………………………이……………………………………이…………………………………이……………………………………이………………………………………………………………………………………………………………………………………………………………………………………………………………………………………………………………익……………………. * 기차가 섰다. 그의 몸이 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예리한 칼날에 손을 베일 때처럼 처음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는 통증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불에 타던 그때처럼 온몸으로 데굴데굴 구르며 파르르 떨었다. 머릿속은 아득해지고 이내 통증으로 점점 머릿속이 비어갔다. 나는 떨리는 눈꺼풀로 저 멀리 굴러가는 그의 몸을 순간, 보았던 것 같았다. 반 바퀴쯤 구르고 고통에 일그러진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나와 마주쳤다. 때마침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는 한때 한 몸이었던 나를 막막한 시선으로 넘겨다보았다. 어딘가 엄마였던 여자를 닮아있었다. 순식간에 눈발이 거세지고 굉음을 내며 기차가 섰다. 더 이상 그는 보이지 않았다. 새파란 기차는 어둠 속에 멈춰 선 채 이편과 저편으로 나뉜 피 흘리는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은 날리고 분계(分界)를 가지게 된 두 세계가 고통 받고 있었다. 꼭 잡고 있던 나의 손아귀가 저절로 열렸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몇 가닥 바람에 날렸다. 눈발에 쓸려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살아있는 신화였다면 지금의 우리는 죽어가는 현실인가. 그가 있던 자리가 흥건하다. 나대신 눈물 흘리는 등짝이라니, 멀리 때 늦은 크리스마스의 캐럴이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그리움으로 분열하고 있는 중이다. 무심히 눈이 내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약력 및 주소 성명 : 최형심 약력 : 2008년 『현대시』등단.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수상.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수상. 2014년 『시인광장』시작품상 수상. 전화번호 : 010-4314-5114 메일주소 : elqut@hotmail.com  
567 촉/노정희 file
편집자
1786 2017-06-01
17.06월 85호 수필 촉 여자는 예민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하다. 비가 올 것 같으면 뼈마디가 쑤시고 기온이 내려갈 것 같으면 발목이 시리다. 그뿐인가, 남편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촉’이라는 범상치 않은 감각기관은 늘 고주파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요즘 대주 大主 의 행동이 이상타. 이 추위에, 더구나 저녁때에 손수 세차를 하는가 하면, 일요일 저녁에 모임에 간다며 바지에 칼날을 세운다. 어떻게 할까, 정면 돌파로 직진하면 미리 대응하여 막아설 수 있으니 우회해야 하나. 이 격랑의 수압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는지 생각이 생각의 끈을 문다. 격랑의 바닷물에 빠져 마냥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무언가 부유물이라도 잡아야 한다. 신년 빨간 날짜에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바다 쪽이 좋겠지, 남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지에서 사용할 용품과 먹을거리를 장만하러 막 나서는데 남편 폰에 카톡이 뜬다. 순간 감전되듯 찌릿하게 ‘촉’이 작동한다. 폰을 감추려는 쪽과 확인하려는 쪽의 몸싸움이 발생했다. 모른 체 넘어갔으면 여행이라도 다녀올 것을 기어이 사단이 난 것이다. -땅거미 지는데 세차하는 사람도 이상하거니와 일요일 저녁에 모임 하는 얼간이족이라니, 분명 구린내가 진동한다 싶더니만. 그래, 누군가와 열심히 카톡 중이었어? -지는 남자들과 모임도 하고, 문자와 전화도 잘도 하더라만 내는 카톡하믄 왜 안 되는데? -내는 모임의 사람인께 그라지요, 당신은 부킹해서 만난 사람이잖우. -뭔 부킹? -저번 주에 부킹한다고 이마빡에 써 붙이고 나가 더 만. 거기서 만난 여자 아이가? -그래, 맞다. 근데 그게 그거제, 니캉 내캉 뭐가 다르노?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칼바람을 안고 동네를 두어 바퀴 돌았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혼자 소주잔 기울이기도 그렇거니와 이슥한 밤 시간에 친구를 부르기도 뭣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춥다. 얼굴이 꽝꽝 얼어붙는다. 내가 젊은이도 아니고 오십 넘은 나이에 쓰러지면 ‘지화자’ 할 사람은 따로 있겠지. 집으로 돌아와 안방 문을 잠갔다. 문 열어달란다. 대화 좀 하잔다. 이 풍진 세상에 어찌 일부종사를 강요할 수 있으랴, 낙락장송이 되어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린 것도 아니고. 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다면 ‘들키지’ 말았어야했다. 변명을 늘어놓는다. 마누라는 매일 바쁘고, 집에 오면 아프다고 하고, 혼자 외로웠단다. 부킹은 딱 한 번 했는데 카톡을 주고받다가 마누라한테 들킨 것이다. 남자의 ‘아내에 대한 지능지수’는 얼마일까. 내가 놀러 다닌 것도 아니고 푼돈 벌겠다며 허리에 복대하고 다니는 것을 누누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본인 생각만이 우선이다. 하기야 나도 잘 한 것은 없다. 남편을 외롭게 방치한 대가라면 달게 받을 수밖에. 며칠 후, 남편은 친구들과 등산을 가기로 했다며 눈치를 본다. 등산하려니 웃옷이 낡아서 하나 장만해야겠다며 웅얼거린다. 카톡 사건도 있거니와 이제 모든 일이 의심 쪽으로 ‘촉’이 선다. 두 발로 다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마누라 속이는 일이야 눈 감고 아웅 하면 알 게 뭐람. 그냥 내가 선 자리에서 내 역할에나 충실하자. 옛말에도 있잖은가, 안에서 잘하면 미안해서라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그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남편이니 그 고마움을 상기하련다. 차가운 바람보다는 따스한 햇살로 감싸줘야지, 등산갈 때 멋진 윗도리 사 입혀서 대범한 마누라라는 느낌이 들도록 해야겠다. 아,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을 눈치 챈 큰아이가 귀띔한다. -남자에게 비싼 옷을 사 입히면 고마워할 겁니다. 그러나 현명한 여자는요, 남자에게 헌신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몸을 가꾸어 건강하고 예뻐져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본인이 비싼 옷을 사 입어야 남자의 관심을 끕니다. 고마운 여자보다는 사랑 받는 여자가 되십시오. 이럴 수가, 생각의 세대 차이를 느낀다. 곱씹어보니 딸아이의 말이 명쾌하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누에는 뽕잎만 먹고, 배추벌레는 배추만 먹으니 자기 수준에서 몰입하느라 생각의 폭을 넓히지 못했다. 먹고 보는 데만 집착하느라 ‘벌레’로서만 머물렀다. 나방이 되고 나비가 되고 비단을 뽑는 성장의 길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촉 觸 ’을 운운하며 행동에 ‘촉 鏃 ’을 세웠다. 내 삶을 돌보고 가꾸기도 버거운데 나이 오십 넘어서까지 남편 바깥일을 일일이 간섭하랴, 너그럽게 보아 넘기자. 작금의 사회생활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건전한 만남이라면 슬며시 눈을 감을 수밖에. 남편인들 고운 추억 하나쯤 안주머니에 감추어 두고 싶지 않으랴. 모든 근원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볼 일이다. 결혼생활 30년이 흘렀는데 어찌 배우자가 한결같기를 바라랴. 어찌 몸을 묶고 마음을 묶으랴. 단지 지나온 걸음이 남루하지 않기를 바라자. 이 겨울 지나기 전에 내안에 파란 촉 하나 심어야겠다. 이 밤 지나기 전에 내 가정에 환한 촉 하나 밝혀야겠다. 계간《문장》편집장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수필교실 강사 수필낭독 강사 수필집『빨간수필』,『어글이』 -roh-@hanmail.net  
566 고구마 든다 외 1편/박찬선 file
편집자
1756 2017-06-01
17.06월 85호 시 고구마 든다 고구마는 흙 속에 든다. 설계 없이 자유롭게 집을 지어 든다. 크고 작은 집은 모습이 다르지만 향기롭다. 싹둑 잘려서도 살아나다니 상처에서 흰 뿌리가 나오다니 연막탄을 터트려 장막을 치듯 고구마 자란 섶이 푸른 물살을 이룬다. 우리가 더운 물가에서 거짓의 허물벗기를 할 때 가벼워지려고 안간힘을 쓸 때 고구마는 살 오르는 탐구학습을 한다. 통 속이 행복하다는 어느 철학자처럼 흙 속이 아늑한 보금자리라는 생긴 대로 그냥 있고 싶다는 고구마는 목이 말라 땅이 갈라진다. 철 들 듯 맛이 든다. 호박 앉다 잘 익은 호박만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 탯줄 같은 여린 줄기 혈연의 끈에 매달린 존재를 생각한다. 꼭지 떨어지지 않고 선택된 하나뿐인 생명 잎 속에서 푸른 유년을 보내다가 봉새기처럼 속을 넓혀야 편안하게 앉는 자전거 타듯 중심을 잘 잡아야 뒹굴지 앉는 살아가는 슬기를 배운다. 비탈 밭이나 담벼락, 바람 많은 공중에도 가리지 않는 터 잡기 호박 앉은 자리는 우리 엄마가 눈여겨 본 엄마 손길 닿는 자리 구슬땀 말린 시원한 자리 드러나지 않은 안분의 수더분한 자세가 편하다. 뜨거운 여름, 해가 긴 날 구릿빛 얼굴의 이 땅 사람들을 닮아가며 붉은 꽃 피는 향기로운 방을 만들어 밝은 내일의 식탁을 마련한다. 잘 익은 호박을 닮은 화가가 호박 속에 있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현대시학』으로 등단. 최근 동학을 주제로 한 시집『우리도 사람입니다』를 『시인동네』에서 내고「상주」「낙동강」「동학」에 대한 연작시를 쓰고 있다.  
565 어떤 장례식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1541 2017-06-01
17.06월 85호 시 어떤 장례식 안산 땟골마을 김로만 씨는 결국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이 실렸다 몸서리치는 추위를 연한 목숨으로 또 하루를 지탱하며 피로시키를 만들었다 평상에 펼쳐진 단돈 천원의 일용한 양식은 그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생계였다 육천 킬로미터를 달려가는 내내 밤마다 시신들이 밖으로 던져졌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은 유전자처럼 고려인 로만 씨의 몸속을 지배했다 연해주에서 출발해 흘러간 팔십여 년은 모국어를 잊기에 확실한 세월이었다 아내와 새로이 정착한 땅은 여전히 낯설었고 이방인 3세라는 수식어만이 붙어 다녔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 불과 사흘 전, 그렇게 춥지도 않던 그해 구급차는 한 주검을 던져냈다 말도 돈도 허락지 않는 조국의 밤, 응어리진 핏덩이는 몸속에서 녹지 않은 채 터져 나왔다 상주도 영정도 제대로 없는, 어제 그가 만들다 만 피로시키만이 빈소를 지켰다 *피로시키: 러시아식 만두 팻테일저빌 그날 장례식은 엄숙했다 약간의 비가 모래와 함께 대지를 적셨고 그보다 더 큰 추억들이 붉은 눈동자에 매달렸다 지난밤까지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향 사막을 향해 달리던 꿈을 꾸었던 그 소리가 요란해 외려 성가셨던 하지만 다음날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부고장은 꿈쩍하지 않았고 한 발의 총탄처럼 울리는 울음이 두루마리 휴지에 쌓여 종이상자에 담겼다 만 삼 년의 철 지난 기억들이 쳇바퀴 돌 듯 더욱 깊은 애도를 자아냈고 까만 눈망울과 까슬한 털들은 이내 숟가락으로 파낸 흙더미 속으로 영원한 시간을 뿌리내렸다 수천 년의 발효되지 못한 역사가 윤회를 거듭하듯 더 큰 증오로 퇴적되고 죄 없이 맑은 눈동자와 식은 온기는 마지막 손가락의 수소문 끝에 힘겹게 발굴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먼지 자욱한 대낮의 하늘엔 작은 별들이 총총히 돋아났고 심장을 도려내는 비수의 번득임은 하얗게 감싼 천보다 더 눈을 아렸다 어젯밤까지도 엄마와 함께 촛불을 켜며 신을 향해 두 손을 모았던 나지막하게 어서 이 무서움을 떨치려했던 조막손들이 모여 희망을 노래하던 놀이터 주변으로 붉은 생들이 널브러졌다 그날도 고향 사막엔 로켓탄이 날아들었다 *팻테일저빌: 황무지쥐아과에 속하는 애완용 설치류 동물. ................................................................................................................................................................... 김요아킴 2003년 계간《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문학청춘》신인상으로 등단. 시집『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청소년 문예지 《푸른글터》편집주간과 계간《작가와 사회》편집위원. 현재 부산 경원고 교사. 메일: kjhchds@hanmail.net  
564 오래된 우물 외1편/곽도경 file
편집자
1740 2017-06-01
17.06월 85호 시 오래된 우물 늙은 샘 하나 쉼 없이 물 퍼내고 있다. 논바닥 갈라 터지는 가뭄에도 한 번 마른 적 없었던 우물 오십여 년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자식 위해 물 길어 올리고 있다. 손가락 마디마디 구부러진 연탄집게처럼 굳었어도 신음마저 텅 빈 뼛속으로 밀어 넣으며 끝내 견디시는 아버지 바람 유난한 이월 초사흘 밤 먼 기억 속 우물이 되어 우, 우- 야윈 달 바라보며 속울음 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쉰을 넘긴 엄마와 열네 살 아들이 대화를 한다. “아들아, 지금은 젊은 사람도 일자리가 없어 힘든 세상이라 엄마는 늙어서 일하러 나가기가 좀 그러네" “헉, 엄마, 청년들은 자식이 없지만 엄마는 자식이 둘이나 되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엥, 뭘 잡아?” 지 푸 라 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심장에 날아 와 박히는 틀리지 않아서 더 기막히고 슬픈 그 말 붙잡고 엄마는 오늘도 지푸라기 잡으러 간다. 계간 [시선]등단 시집/ [풍금이 있는 풍경] 메일주소/ angelgmy@hanmail.net  
563 풀어내다 외1편/이미령 file
편집자
1739 2017-06-01
17.06월 85호 시 풀어내다 어느 바다에서 노닐던 멸치인가 대가리 큰 멸치 두 움큼 좋게 넣고 다시마, 무, 대파, 양파, 둥둥 조각배 띄운다 솥 안에서 태풍이 불고 큰 파도가 덮친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위기를 견디는 듯하다 스스로를 버리고 하나로 어우러진 육수에 된장을 풀고 두부 아저씨의 오래된 한숨과 노총각 황씨 호박꽃에 스민 그리움 몇 토막 넣는다 청양고추 같은 남편 잔소리도 똑똑 썰고 손전화에 뜬 딸내미 웃음소리 양념으로 듬뿍 넣으면 풋나물 맛나게 비벼먹는 얼큰한 된장찌개 장씨 아저씨 저 길길이 날뛰는 꼴 좀 봐, 지랄났네 지랄났어 등등한 기세 온 세상 다 삼켜버리고도 남겠어 조무래기들은 얼씬도 못하지 전생부터 이승까지 못다 한 욕지거리 마구마구 퍼붓는 저 시커먼 아가리 시큼한 막걸리 냄새 진동하는 것 좀 봐, 미쳤군 미쳤어 요양원에 누워있는 아흔아홉 노모도 못 말리고 아부지 따돌리고 혼례 치른 외아들도 못 말리고 십년 전 남의 아내 된 마누라도 못 말렸던 풍물거리 초입 장씨 아저씨의 술주정, 상산인력 사장 머리통을 몇 번씩이나 박살내고 선술집 딸어라 마셔라 다리 부실한 의자가 저만치서 나뒹구는데 삿대질하는 손가락 태양을 찔렀는지 함지박 엎은 듯 쏟아지는 땡볕, 한 서린 세상을 향한 또 한 번의 발악이 지나간 자리 훌러덩 벗겨진 때 절은 모자가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건너고 있는 장날 오후  
562 바비인형 컴백 외1편/박은숙 file
편집자
1524 2017-06-01
17.06월 85호 시 바비인형 컴백 자전거를 아주 잘 타는 김숙희 여사는 당년 75세 당년 53세나는 여사에 견주면 택도 안 되는 새벽부터 태양을 굴리는 바지런한 여사는 오늘도 새벽을 깨우며, 잡동사니 물건들을 창고에 베란다에 냉장고에 옥상위로 쌓고 쌓는데 어디서 그렇게 물건들 쏟아져 나오는지 1호점,2호점,3호점을 내고 사람이 잡동사니 속에 묻혀 산다네 고물상을 연상캐 하는 집에는 부글부글 속앓이 하는 아우성 높고 김숙희 여사는 안한다안한다 하면서도 버려지는 물건들의 유혹을 끝내 못 본 척 못하는데 여사의 방은 인형의 집 모두 잠든 컴컴한 저녁의 쇼킹한 축제, 바비인형들의 컴백컴백 물질 만능의 시대 버려지는 잡동사니 탓에 날로 굽어든 여사의 허리 자전거 신나게 구르며 바비인형 찾아 나선 김숙희 여사를 누가 나무랄 것인가 너도 나도 범법자 반성문을 쓰자 불후의 명곡 밭이랑 외따로 튕겨 나온 상추 한 포기 뽑으려다 그냥 두기로 한다 밭두둑 위로 나란히 소담스럽게 자란 상추 함께 영차영차 컸으면 쑥 자랐을 그러나, 저렇게 외따로 컸지만 때로는 튼실하게 잘 자라서 식탁을 풍성하게 하기도 하지 상추 한 잎 아침상에 올리려다 풀 한삼태기 뽑고, 한단 부추를 얻고자 3시간 풀을 뽑는다 아침 고요속, 흙을 간섭하는 호미 소리에 뒷산 뻐꾸기 운을 띄우니 불후의 명곡을 여기서 듣는데 왜 하필 맨발 내 어머니의 파란만장과 한 오십년 살아낸 나의 인생이 밭이랑 행간행간 춤추며 가는 그림이 보이는 것일까 그 장단에 바람도 끼어들고 어디서 지저귀는 참새도 끼어들고 줄줄이 끼어드는, 쇠비름, 참비름. 질경이 이름 모를 잡풀들까지 한 곡조 하는데 내 귀에는 세상의 그 어느 명곡보다 호미 소리에 끼어드는 저 곡들이 명곡 일세  
561 영덕 바다 외 1편/신순말 file
편집자
1860 2017-06-01
17.06월 85호 시 영덕 바다 - 약속 바위에서 신순말 지난 겨울에 왔었네, 이 바닷가 파도는 반갑다고 철썩철썩 손바닥 드러내며 인사를 하네 여린 꽃처럼 고개 기울이고 봄이 막 당도한 바닷가 파도를 보네 해풍에도 흔들리며 피어있는 풀꽃 갯바위가 수억 년 동안 파도를 안아주듯 시간이 부리는 연금술을 생각하네 함께 했던 그 사람을 생각하네 지난 겨울의 마른 풀에서 보아라, 연보랏빛 타래붓꽃 약속처럼 깨어났네 비 신순말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빗방울이 웃고 있다 깨어지는 순간에도 볼우물 하나씩을 꼭 물고 있다 신순말: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회,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 [단단한 슬픔] dolcong-i@hanmail.net  
560 조변석개(朝變夕改) / 이 양 섭 file
편집자
1781 2017-04-30
17.05월 84호 수필 조변석개(朝變夕改) “인간은 판단력 부족으로 결혼을 하고, 인내력 부족으로 이혼을 하고, 기억력 부족으로 재혼을 한다.” 오늘 아침 출근길, 어제의 놀랄 만큼 선명하던 파란 하늘과 점점이 떠다니던 솜구름과 달리, 연회색의 구름이 우중충하게 드리워져 있고 해는 없는듯하면서도 햇살은 두루뭉술하게 퍼지고 있었다. 봄의 하늘은 참 잘 변한다는 생각이 들다가, 다시 우라지게 변덕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다시 사람의 마음도 때에 따라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천변을 따라 전철역을 향해 걸으며 길가의 낮은 풀꽃들을 보고는 문득 장사익의 ‘찔레꽃’이 듣고 싶어졌다. 점점 간절해져서 생각나는 구절을 흥얼거리니 영 그 맛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불쑥 위의 글귀가 생각났다. 오래 전, 어느 잡지의 귀퉁이에 우스갯말로 올라 있는 위의 문구를 보고 무릎을 탁 쳤었다. 내 결혼생활의 비애와 세상사를 그 말로 곱씹으며 쓴웃음 지었고, 술좌석이나 사사로운 만남에서 여러 차례 써먹기도 했다. 그냥 유머로만 흘려들을 수 없는 풍자이고 해학이다. 생활 패턴이 다르기도 하지만 결혼한 지 30년이 넘어 ‘소 닭 보듯’하여 말 한 마디 나눌 일도 별로 없는 아내와 다툰 것도 아니고, 딱히 주변의 뉘가 생각난 것도 아니었다. 날씨가, 찔레꽃이, 어떤 연상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결 그 말에 대한 이해에 더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사람마다 경험과 사유가 다르고 그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도 다르겠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첫 번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재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세 번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란 그 문장이 갖는 다각도의 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오는 느낌으로 말없이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겠다. 아울러 유추되는 이해로 다음 문장에도 쓴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결혼을 하여 내내 행복해 하는 사람이나, 이혼을 하고 내내 홀가분해 신이 난 사람이나, 재혼을 하여 내내 처음보다 훨씬 행복하여 살맛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경이롭고 복잡 미묘한, 순환하고 변화하는 자연의 현상, 그 장면 장면과 다가서지 못할 섭리와 이치에서 우리는 우리 생활의 많은 것들을 빗대어 볼 수 있다. 변하기 싫어하면서도 실상은 변하고 있고, 나와 상대 또는 주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하고, 발전적 변화를 모색해야하는 하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많은 관계가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슬프고 아프게 이어져 간다. 그 가운데 상황에 따라 가장 쉽게 흔들리고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문구도 사람 마음의 변화를 과장되게 빗댄 농담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입장 변화의 단계로 표현한 말(결혼, 이혼, 재혼)의 본질에 더 다가서 파헤쳐 보면 욕심, 특히 자기 마음의 변화에 따른 이기심이 드러나지 않게 원인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이라는 허울로 치장을 하고 거기에 눈멀어 많은 것을 간과하거나 제쳐두고 굳게 약속한 결혼도 그 본질에는 자기를 위한 욕심이 내재되어 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위해 줄 것이며,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며, 위신과 모양을 갖게 해 줄 것이며, 편리하고 여유를 갖게 해 줄 것이며, 힘이 되어주고 희생해 줄 것이라는 이기심은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다 감춰져버린다. 나중에 그러한 기대가 조금씩 깨어지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기심은 나보다는 -나 혼자 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게 실망하고, 실망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굳건할 줄 알았던 사랑이라는 그릇에 금이 가게하고 멈추지 않는 이기심은 종내 그릇을 깨뜨리고 눈을 돌려 새로운 그릇을 찾는다. 정말이지 잘못 만난 인연임을 절감하고 어렵게 헤어진 후, 혼자의 시간은 아주 새롭고 다양하게 다가오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게 드러내거나 가지려는 마음의 이면에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도사리고 있을까? 몸과 마음의 외로움, 기대감, 의심, 절망, 자탄, 두려움, 막연함…… 이렇게 하면 이것은 해결되지만 또 다른 것이 엉키고, 어느 것을 얻기 위해 어느 것은 포기해야 한다. 지난 경험을 공부삼아 이제 정말 남은 생의 진짜 동반자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 번 희생하며 내 것을 포기하고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살자는 생각까지 가는 데는 사람에 따라 절실함과 걸리는 시간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연습이 없는 인생, 일회성의 삶에서 누구는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누구는 돈을 모으거나 명예를 추구하고, 누구는 즐기려면 지금 즐겨야 한다는 실천을 한다. 누가 옳고 그르고 따질 수 없다. 시간은 마구 흘러가고 목적이나 목표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다. 날씨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 어느 하나 그냥 되는 것이 없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다 원인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과 소유욕에 기인하여 자기 주변에 많은 분란이 일어난다고 원인을 파악했더라도, 또 다른 어떤 흐름의 영향을 핑계 삼아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되거나 개과천선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원인을 제대로 안다면 서서히 자기 문제를 자기 안에서부터 치유해 나가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자질과 성향은 스스로의 한계(선입견, 습관 따위)를 극복해 나감으로서 나아지거나 너그러워진다. 상대가 나의 초점에 맞춰 달라질 거라는 환상 혹은 착각보다는 내가 먼저 그러할지를 살필 일이다. 오늘 출근길, 이어지던 잡생각의 끝은 결국 나의 소설쓰기에 대한 욕구불만과 결부된 상념으로 치달아 더 씁쓸해졌다. 진작 시작한 소설이 마무리가 되지 않아 힘들게 고치는 중인데, 돌연 새로운 착상이 떠올라 머릿속에 들끓고 있으니 속이 갈라지는 듯하다. 금세 또 사그라질까봐 이 생각은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은데, 정리가 잘 안되지만 대충 이런 헛소리가 되겠다. ‘어떤 글쟁이는 자신의 욕구와 가능성에 대한 참을성 부족으로 글을 쓰고, 어떤 글쟁이는 어느 선에 도달하려는 완성도에 대한 타협성 부족으로 끝없이 고치고, 어떤 글쟁이는 자신의 자질과 가능성에 대한 신뢰성 부족으로 필을 꺾는다.’ 결핍이 없는 행복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필을 꺾는다고 한 번 시작한 글쓰기를 버티듯 참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자연의 흘러가는 이치에는 ‘참음’이란 없는 것 같은데, 우리 인간 세사에는 참지 못해 문제가 되고 사고가 되고 상대를 아프게 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러면 자연은 ‘참을 일’에 다다르기 전의 흐름에 따르라고 우리를 가르치는 바가 아닌가? 모처럼 홀로 횡설수설하고 나니 그새 하늘빛도 바람색도 바뀌어 있고, 내 책상 위의 할 일도 달라져 있다. 아침의 생각을 저녁에 잠시 떠올려 보았지만 내일 아침에는 또 어떤 생각이 들 것인지……. 도시의 불빛이 사무치는 이 밤에는 단골주점에 들러 양현경의 ‘비몽’을 들으며 고개나 주억거리면 좋겠다. 막걸리 한 잔에 마음이 통할 벗이 거기 있다면 더욱 좋겠다. 社團法人 강남웨딩업연합회 회장 이 양 섭 general-mgr@hanmail.net  
559 카스트로 평화 서울 촛불 외1편/남효선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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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2017-04-30
17.05월 84호 시 카스트로 평화 서울 촛불 피델 카스트로가 죽던 날 한반도 서울에 첫 눈이 나렸다. 첫 눈을 머리에 이고 사람들은 광화문에서 촛불을 피우고 횃불을 지피고 청와대로 향했다. 86명의 혁명시민을 이끌고 바스타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56년 전 쿠바 시민혁명을 세운 피델 카스트로가 죽던 날 한반도에서는 200만개의 촛불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향해 평화와 자유의 불길을 지폈다. 서울에 첫 눈이 나리던 날 헌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의 턱 밑에서 국민주권을 되찾는 200만개의 촛불이 축제의 시위를 펼쳤다.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을 버리던 날 서울 광화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섬마을 제주에서 아비는 아이를 무동태우고 어미는 딸애 손을 꼭 잡고 이웃끼리 동창끼리 친구들끼리 김밥 싸들고 따뜻한 유자차 끓여 새로운 공화국 새로운 나라 건설위해 ‘이게 나라냐’ 손팻말 흔들며 광장으로 청와대로 소풍잔치를 벌였다 촛불은 강물이 되고 파도처럼 출렁이며 마침내 혁명으로 내달았다 2017년 3월23일 팽목항 세월이 떠 올랐다. 3년 간 숨막히고 찢기고 갈래갈래 짓뭉긴 진실이 떠올랐다. 파면당한 대통령이 대검찰청에서 21시간의 조사를 받고 제 집으로 돌아간 다음날 국민을 오열과 분노로 수장시켰던 세월호가 떠올랐다. 파면당한 박근혜의 관저 7시간의 형형한 진실이 떠올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쪽같은 내 새끼 영문도 모르고 팽목항 천길 바다 밑으로 수장된 사백 여린 영혼들이 별처럼 떠올랐다. 기어코 광장으로 촛불로 되살아 나 침하나 안 바르고 국민을 적으로 몰고 친일에 빨갱이에 독재로 범벅이 된 지 애비의 복수를 갈며 국민을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편 가르던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에서 파면시키던 날 칠흑의 어둠을 살라먹고 파면당한 박근혜 정권의 모진 은폐와 금기를 뚫고 수 삼년 광장을 떠돌던 시린 가슴패기들이 투명한 진실과 용기와 정의로 반짝 별처럼 사백 여린 영혼들이 떠올랐다. 1073일 칠흑의 바다 속에서 앗긴 희망과 꿈이 솟아올랐다. 1073일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