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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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2741 2014-11-03
586 삶 외1편/채형복 file
편집자
1787 2017-10-01
삶 제 아무리 검붉은 눈물에 깊숙이 젖어든 삶이어도 사는 것은 잘박한 물로 지은 거칠고 된 고두밥이다 효모덩어리의 누룩을 섞고 부어도 발효되지 못한 삶은 부걱부걱 끓으며 괴지 않으니 얼큰한 술로 익지 못한 죽음은 늘 삶 이후의 삶이다 죽음에 술 취하지 않는 삶은 혼절하리라는 마법의 주문에 걸려 삶은 죽음의 공포에 술 취하여 비틀거리고 죽음은 영원히 죽지 못하고 까무러지며 산다 아무리 먹어도 현실이 배고픈 아이들은 술지게미를 먹으며 욕망에 허기진 위장을 채우고 죽음이 성급한 어른들은 채 익지도 않은 삶의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삶을 사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위로하면서, 때로는 불행일지도 모른다 불안해하면서 바람 바람의 집은 어디일까 나는 아직도 쿰쿰한 곰팡내 나는 의문에 답하지 못하였다 푸른 청춘의 시간을 연비燃臂로 불태우고도 텅 빈 가슴을 헤집고 지나는 허무를 잡지 못하고 투명유리로 가린 하늘의 신을 두드리고 패고 가시덤불에 온 몸 던져 뒹굴고 절규하며 기도했지만 바람의 출생 비밀은 풀지 못하고 바람의 고향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봄바람이 코끝을 스치며 유혹하지 않았다면 봄꽃에 쉬 다가서지 못하는 중력 잃은 나비의 날개 짓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헤매지 않았을 것이다 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행복했을 것이다 사시사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없고 나비의 행방도 찾지 못한 나는 오늘도 헤매고 아파하고 조금은 행복하고도 싶고 ****************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의.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  
585 마음을 비우라 하네 외1편/박규해 file
편집자
1648 2017-10-01
마음을 비우라 하네 마음을 비우면 편안한 마음인가 욕심 없는 마음이면 좋겠지만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다 작은 것에 만족해하면 큰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욕심을 부리고 싶을 때 있지만 자신이 인내하면서 후회하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되리라 마음 비우면 정말 편안한 마음일 것 같다 가을이 되니 그 여름의 무덥던 날 이글거리던 태양도 이제는 한 풀 꺾였는지 선선한 바람만 불고 서 있는 해바라기는 고개 숙이고 빙그레 웃고 서 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벼 이삭은 익어가고 미소 짓는 농부의 마음이 푸근해 지는 가 보다 스레트 지붕에는 하얀 박들이 열려 시골의 풍경을 보고 있다 ㅇ 아호 : 취송(翠松) ㅇ 고향 : 경북 상주 ㅇ 현 거주지 인천 ㅇ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 ㅇ 함창중고등학교 근무 정년퇴임(2002년) ㅇ 62년도 김용호 시인님의 추천 됨(4.19 3주년 기념 시) ㅇ 사랑․ 소설계사 기자 근무 ㅇ 현대시조 “바램”으로 천료(97) ㅇ 97 ~새 시대시조(계간) 출품 외 9곳 문예지 출품 ㅇ 시조집 : 희망의 횃불. 찔레꽃이 피면. 풋풋한 삶을 살자. 삶의 자락에서 ㅇ 녹조근정 훈장 외 각종 표창장 15 ㅇ 수상 : 시와 수상문학 특별상(2010) ㅇ 현대시조 이달의 작가상(97년도) ㅇ 한울문학 이달의 작가상(2000년 5월호) ㅇ 동인지: 시인파라다이스 외 55권 외 ㅇ 현재 : 한국 문인 협회 경북 지회 회원. 현대시조 인단 회원. 한울문학 회원. 파라문예회원. 시와 수상문학. 국보문학 회원. 한비문학 회원. 시와 늪 문학 회원. 시와 글 사랑 회원. 지필문학 회원. 문학광장 회원. 스토리문학 회원. 한국미소 문학 회원 ㅇ주소 : 인천광역시 남구 용정 공원로 33 인천 sk sky view 123동 704호  
584 전사의 눈물 외1편/고경하 file
편집자
1834 2017-10-01
전사의 눈물 우르르 쾅 쾅 쾅 천둥번개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을 휘몰아 북에서 남으로 북에서 남으로 굵은 소낙비는 임진강물처럼 흘러간다 전사의 눈물 해방 전사의 한 맺힌 사연일까? 보고픈 고향 땅 가고픈 북녘 땅 폭풍우속의 빗방울아 내 누이에게 남녘땅 민중의 삶을 전해 주렴 우리 하나 되는 마음으로 부디 잘 살아가야한다 우리 이제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 다시 만나야한다 한 맺힌 빗방울 소리는 내 마음 깊숙이 파고들지만 전사의 눈물 빗방울처럼 유리창에 흘러내리고 새벽을 기다리며 자주 평화 통일을 노래한다 능소화의 삶 - 고경하 - 어느 날 앞산 자락 길 따라 사계절 푸른 사철나무 알록달록 단풍나무 타고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능소화야 꽃은 피웠건만 혼자 일어 설 수 없어 사철나무나 단풍나무나 고목에 붙어 살 수밖에 없는 능소화야 너를 바라보는 우리 삶도 우리 스스로 일어 설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의 72년 세월 능소화로 피고 지며 살고 있구나 언제부터 미국이라는 대국 달콤한 사대주의에 빠져 50개주 연방국가 틈새시장 장돌뱅이로 문간 방 더부살이 삶이 되었나? 최근 북한이 함경북도 풍계리 6차 핵실험을 통해 미국과 전쟁도 불사한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국을 지키겠다는 협박성 폭탄선언으로 북미대결 주변국과 한반도는 전쟁분위기로 내몰렸다 한 민족민중으로 살아왔던 이 땅에 선전포고란 공포분위기에 따라 북한 도발을 대응한다는 이유로 공격용 전투성 사드를 배치하고 미 제국주의 무기를 팔아주며 미국의 마당쇠로 살아가는 능소화야 자기 삶의 주인주체가 아닌 몸종처럼 살아가는 그런 능소화만 그냥 내가 바라보고 살아가기에는 왠지 불쾌하고 불편한 세상살이 “사드를 가지고 미국은 떠나 가거라.” 평화집회하며 목청 터져라 외쳤지만 매판매국 친일친미처럼 버젓이 잘 살아가는 너희는 능소화 한반도평화협정체결을 위한 북 미 중 한 4자 평화합의 실행은 가을 하늘 뜬 구름이 되고 제국에 기생하는 능소화의 삶처럼 우리네 한반도 북남민중의 삶은 어디에 살 든 무엇이 다를 수 있으리오 ****************** 1965년 10월 3일 광주출생 이메일 : rhrudgk79@hanmail.net 주소 : 대구광역시 남구 안지시장1길 6-4(대명동) 직업 : 햇살재가요양센터 시설장 1984년~1988년 (주)기림(봉제공장노동) 1988년~1992년 무등기업(주) (자동차봉제노동) 1998년~2002년 열매어린이선교원 원장 2003년~2016년 덴마크어린이집 교사  
583 동촌 강물을 바라보며 외1편/김희자 file
편집자
1583 2017-10-01
동촌 강물을 바라보며 대구 동촌 강물은 흐르는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느 날에는 남으로 흐르고 어느 날에는 북으로 흘러간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는 강물 한 곳으로 물길을 열지 못하는 것은 우리네 남과 북 마음만 같은 것인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강물은 거꾸로 흘러가며 몸부림치는데 어디로 흘러가다 휘돌아 오면 잔잔하게 흘러가는 그날을 위해 강물에 삶의 마음만 담는 그리움에 사무치는 유구한 세월 통일을 갈망하던 사람은 오가며 강물 따라 바르게 흘러가라하고 찬바람만 강물을 휘돌아 감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다 대구 동촌 강물은 내일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오늘도 가을햇살로 강물을 거칠게 후려치고 있다 갓 바위 뒷길 갓 바위 뒷길에는 들국화가 피었을까? 아이들을 데리고 산 마실을 간다 남편도 바쁜 시간 틈내서 말없이 같이 와 준다 아이들은 신기한 도시의 저쪽 하늘가 빨간 흙들이 산 속에 묻혀 진달래 개나리 피어난 자리에 작은 벌레 신기 한 듯 잡아들고 그 옆자리에는 보랏빛 맑은 들국화가 주인을 기다리듯 피어 있다 그 곳에 내 이름 석자 있는가? 아들은 철이 없고 딸은 이유 없이 예쁘기만 하다 남편은 그 자리에 피어난 아직은 새하얀 철부지 사랑을 지키느라 진땀을 빼고있다 하늘가 햇살이 정오를 넘어가고 아들은 벌레 잡고 딸은 국화 꽃 한 송이 따들고 기뻐한다 아빠는 가자고 은근히 길을 재촉하고 그저께 산 아이들 새 하얀 운동화에 빨간 진흙이 묻어 있다 하늘가에 떠 있던 하늘도 웃고 있고 나도 따라 길을 떠난다 ***************** 김희자 /1961년생 4월 8일 김천출생 1979년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1982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9년~1992년 제일모직주식회사 사무경리로 근무  
582 전사의 보고 외1편/김대용 imagefile
편집자
1488 2017-10-01
ㅡ추모시ㅡ 전사의 보고 조국분단 18년째 되던 1963년 5월 어느 따스한 봄날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고 잘리워진 조국의 허리를 기여히 잇겠다고 갈구리 같은 두손 불도저 같은 두발로 사선을 넘었다가 결국 철조망에 찣기고만 붉은심장 펄덕이던 젊디 젊은 이준원 전사 날개꺽인 감옥, 황무지땅 남녁에서도 전사는 밭을 일구고 집을짓고 동지들을 묶어 내었습니다. 허리를 다쳐 지팡이에 의지한 노구를 이끌고도 2차 송환 기자 회견에, 미선효순 추모 촛불에, 광우병 촛불에, 탄핵에, 디뚱 디뚱 가장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장기수 선생들 모을려면 이준원선생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동네 아파트 하수구가 막혔으면 이씨에게 부탁하면됩니다" 처녀 총각 중매도, 홀로 사는 동지들 살림살이도, 한반도 정세분석도, 젊은 일꾼 교육도, 먼저간 동지들 추도사도 이준원선생에게 부탁하면 다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조선인민군 이준원 전사의 땡크같은 두발 두손이 지나가면 "괜찮아 괜찮아" 하며 "허허" 한번 웃으면 다 됩니다. 통일의 그날 전사 이준원 보고합니다. ☆<남한에선 군인을 병사라고 하지만 북한에선 전사라고 부른다고 이준원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종놈의 세상 친북을 종북으로 부르고 싶으면 친일도 종일로 불러야 하고 친미도 종미로 불러야 공정하다 왜냐하면 멀정한 국회의원도 “종북보다 종미가 문제다” 라고 했다가 9년이나 징역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친박은 종박으로 친이는 종이로 친노는 종노로 친문은 종문으로 친구는 종구로 이놈의 나라는 종놈의 나라다 **** 김대용 1965년 출생 대구거주 전) 상신브레이크노조위원장 전) 금속노조대구지부장 전) 민주노총대구본부 통일위원장 현) 상신브레이크 현장으로 복직 함  
581 반추점(反芻點)/채선후 imagefile
편집자
1595 2017-08-30
반추점(反芻點) 다가오는 시간은 ‘지금’ 위에 얹어진다. 몇 번이었던가 세는 것조차 귀찮아지면 ‘지금’은 묵은 시간이 된다. 기억이 가물거리기 시작하면 묵은 시간에도 한 번쯤 점(點)을 찍어줘야 한다. 그렇게 찍은 점은 반추점이 된다. 반추점(反芻點)은 ‘다시’를 위한 점이다. 여여(如如)히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점. 그래서 다시 걸을 때 힘겹지 않게 하는 그런 점 말이다. 점(點) 찍기가 업(業)인 사람에게 깨알만 한 점 하나가 바윗덩이보다 더 큰 고심덩어리일 수 있다. 나는 문장에 점을 찍는 사람이다. 이제껏 수없이 많은 점을 찍었다. 그랬어도 점 찍기는 쉽지 않다. 문장 끄트머리 점은 다음 문장을 만나기 위해 놓인 징검다리와 같다. 징검다리로 점 하나 던져 놓고 다음 문장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며 쉰다. 호흡은 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거칠어진다. 어떤 때는 긴 한 숨을 내뱉기도 한다. 가슴 깊이 들어 찬 고심(苦心)을 호흡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반점을 찍고 몇 단어를 이어 쓸 것인지, 온점으로 마무리할지 밤새 고심한다. 고심도 몇날 며칠 계속되다 보면 번민이 된다. 점 하나로 문장이, 문단이, 전체 작품이 번민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고심 끝에 점을 찍고 다음 문장을 만나게 되면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 내게 점(點)은 문장에서 그런 것이다. 마침표는 문장의 마침을 알리는 점이다. 점 찍기가 업(業)이 되어버린 나는 마침표를 아끼고 사랑한다. 느낌을 문장으로 뼈대를 세운 후, 못질을 하듯 점을 찍는다. 이때 못질을 잘못하면 집이 무너질 수 있듯이 글에서도 문장 끝에 점을 잘못 찍으면 글 전체 느낌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을 때는 문장을 쓸 때보다 더 집중한다. 차분히 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나서 신중히 점을 찍는다. 그런데 요즘 점 하나 찍는데 망설임이 많아지고 있다. 못질이 약해진 것이다. 몸이 늙어져서 일 것이다. 기억력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가령 약봉지를 들고 있는데도 어디 있는지 찾고 있을 때가 있다. 방금 불렀던 이름도 가물거리고 있다. 이럴 때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내게 단단해지도록 다시 한 번 못질이 필요한 때가 된 거 같다. 이쯤에서 나는 마침표를 반추점이라 하고 싶다. 문장에서는 글을 음미하고 되새기는 점을 못으로 여기고자 하는 뜻에서다. 그래서 내가 정의내린 반추점(反芻點)은 못질과 같다. 다음 문장을 더욱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잠시 쉬면서 기다리고 있는 점, 문장의 의미가 헛되지 않도록 매무새를 다시 고치면서 찍은 점이 더 단단해지도록 못을 박기 위함이다. 요즘은 반추점을 찍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밤하늘이다. 별은 내 스스로가 빈틈을 보일 때면 찍는 점이다. 이곳 진도는 유난히 별빛이 초롱초롱하다. 밤이면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까만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들이 반추점이 되어 흩어지려는 기억을 반짝이고 있다. 나는 별빛이 찍어 놓은 반추점 하나를 따서 가슴 속에 다시 묻는다. 나는 별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며 점을 찍었다. 지금 아버지는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내심 고집을 피운다. ‘사는 것이 다 그렇다’며 옅어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세월 탓으로 넘어가기에 아버지가 주신 것이 너무 크다. 아버지는 내게 몸을 낳아 주셨다. 그리고 매서운 회초리 자국을 주셨다. 아버지가 내리치는 회초리는 힘들 때마다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는데 어찌 없다 하겠는가! 그런 아버지 얼굴이 희미해지고 있어 슬프다. 아직도 내 가슴에는 하지 못했던 말이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내게서 진작 마침표를 찍게 했다. 죽음은 큰 마침표다. 아버지의 죽음 역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생의 마침표가 되었지만 그 점은 종지부가 아니다.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빛 하나가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쥐고 있는 펜대가 얼마나 누추한지 알고 있다. 그래도 그 펜대를 쥐고, 밤하늘 별빛을 보면서 묵은 기억들을 받아썼다. 아버지의 낡은 사진과 함께 지나 온 시간들을 들추어 보면서 행복했다. 코흘리개 시절 내 모습과 젊었던 아버지 목소리를 받아쓴 문장 끄트머리에 점을 찍을 때면 묵은 때가 벗겨지듯 개운했다. 기억의 반추는 가슴 속에 박힌 못을 빼내는 것과 같이 시원하다. 밤하늘을 서성이는 동안 욕심으로 번민하고, 어리석음으로 찌그러진 문장을 펴게 해 주었고,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을 씻게 한 반추의 시간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벌써 봄이 가려하고 있다. 보내는 것에도 익숙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얼마 전까지 달빛에 눈꽃처럼 피어난 벚꽃을 바라보았었다. 그 아름다움이 눈에서 미처 가시지 않았는데 벌써 아카시아 향이 바닷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날려 오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아카시아 향을 깊게 들이마셔 본다. 이 향기도 때를 놓치면 맡기 힘들 것이다. 무엇이든지 때를 놓쳐서는 제 맛이 나지 않는 법이니까. 봄날이 아까워서 연일 엉망으로 취했는데 / 惜春連日醉昏昏 깨고 보니 옷자락에 술자국이 범벅일세 / 醒後衣裳見酒痕 가녀린 풀꽃 시냇물로 둥둥 떠 흘러가고 / 細草浮花歸別澗 비 머금은 조각구름 외로운 마을 들어오네 / 斷雲含雨入孤村 (신흠, 상촌선생집 제 58권, 남강 作, 춘진(春盡) 중에서) 봄을 아껴 날마다 취했더니, 깨고 보니 옷자락엔 술자락이 남았다고 음미한 옛 선비의 시구처럼 아껴두고 싶은 하얀 아카시아 꽃이 떨어지면 길가는 떨어진 봄으로 범벅이 될 것이다. 아버지 기억이 밤하늘에 범벅인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 당신을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저는 이 말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아껴둔 말들이 밤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나는 이즈음에서 살아생전 아버지의 기억만을 헤아리고 싶지 않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삶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싶은 것이다. 이제껏 쓴 글들은 걸러낸 찌꺼기들의 마침표가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내리고 싶은 반추의 의미다. 먹빛으로 범벅이 된 밤. 하얀 별빛이 내 가슴 속에 파고 들어온다. 오늘 찍은 기억의 반추점은 참으로 하얗다. 수필가 채선후 : 충북 음성에서 나서 여주 남한강변에서 자랐다. 동산불교대학원과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국립목포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저서: 『십오 년 막걸리』 『문답 대지도론』 『머뭄이 없는 가르침』 『마음 비행기』 『기억의 틀』 영문판 Mind Glider』 『Waiting For The First Snow』 메일주소 : champ5263@hanmail.net  
580 서해식당 /임수랑 file
편집자
1817 2017-08-30
서해식당 *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폭이 좁은 뒷길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건영, 그가 한 걸음씩 앞으로 옮길 때마다 구질구질한 잡동사니들이 그의 발길에 차였다. 식당 바깥벽으로 잡다한 짐들이 높게 쌓여 있었다. 짐들 틈에서 무엇을 찾는지 지저분한 구석에다 새끼 고양이는 자꾸 코를 박았다. 새끼 고양이의 가느다란 털빛은 때가 탄 고양이의 얼굴을 더 슬퍼 보이게 했다.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새끼 고양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미 잃은 고양이의 얼굴을 보며 아들 동희가 생각나 마음이 절절해졌다. 식당 문 앞에서 잠시 기웃거리던 그는 어깨에 멘 가방을 내리며 비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대신 비닐로 감싼 문은 어딘가 어설펐다. 식당의 일부는 거리 쪽으로 확장한 가건물이었다. 식당 안은 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장을 받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백 년은 넘었을까. 거친 나무껍질 위로 숨구멍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생명이 사라진 굵은 나무 둥치는 원래 은행나무였다는 흔적만 엿볼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판자대기로 만든 지붕보다 키가 더 높았다. 나무가 지붕을 뚫고 지나간 게 아니라, 지붕이 나무기둥에 맞춰서 제작되었다. 식당 안의 모든 것은 나무를 중심으로 배열되었다. 싸구려 탁자와 의자 일색인데도 불구하고 식당 안은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쉰은 넘었을까. 햇볕에 그을린 듯, 피부가 까맣고, 얼굴의 주름이 깊은 여자가 물컵과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는 소주 한 병과 적당한 안주를 알아서 달라고 했다. 여자는 그의 말에 낙지와 아침에 캐온 조개가 싱싱하다고 말했다. 그는 낙지를 달라고 했다. 여자가 주문을 받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여자가 주방 쪽에서 포항댁, 포항댁, 하며 숨 가쁘게 여자를 연신 불러댔다. 서른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얼굴이 말라서, 실제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들어 보일 듯했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서른 중반 정도 될 것이다. 자기보다 한참 나이든 사람을 그렇게 앞뒤의 말을 다 빼고 만만하게 부르는 경우는 그들의 사이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면 보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는 포항댁으로 불리는 늙은 여자가 이 식당의 주인은 아닌 듯싶었다. 포항댁이 다시 와서 소주잔을 앞의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에서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그는 자신이 바다에 온 걸 잊고 있던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그것은 언젠가 아내에게서 맡은 적이 있던 체취였다. 섬뜩했다. 포항댁이 주방으로 돌아가고 건영은 빈소주잔을 서둘러 한 잔 채워 목으로 넘겼다. 가슴이 덜렁거릴 정도로 꺼림칙했던 기분이 약간 사라졌다. 알코올은 몸 안의 혈관을 따라 흐르며 체내 구석구석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필요악이라고 하던가. 그는 알코올 또한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당에서 성체성사를 드릴 때, 신부님께 받아먹던 빵이 생각났다. 그리스도의 몸인 누룩을 넣지 않은 밀떡과 그리스도의 피인 설탕을 넣지 않은 포도주를 먹으면 주님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다. 자신이 소주 한 잔을 입술에 묻혀 괴로움을 잠시 잊는 것도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 번씩 몸이 고꾸라질 때까지 술을 마시면, 온몸의 혈관뿐만 아니라 심지어 뇌 속까지 알코올이 스며들어 구석구석 정화시켜줄 거라고 그는 믿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고통이라곤 없지 않겠냐고, 남편의 말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아내는 술을 거부했다. 술을 먹는 남편도 거부했다. 하지만 아내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창밖의 해안을 바라봤다. 목선 하나가 반쯤 바닷물에 잠긴 채 떠 있었다. 무도란 섬이다. 하지만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바다를 건너온 느낌이 들지 않았다. 빼곡한 회색건물들 틈을 새벽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직행버스를 탔다. 버스가 영종 공항도로를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이 곳, 섬에 왔다. 섬과 육지가 연결되는 긴 다리가 있었다. 중간에 갈아탄 버스로 갈매기 떼가 내려앉아 있는 포구를 지나서 차가 활처럼 굽은 해변을 지나 올 때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기도 했다. 섬에 가까이 올수록 안개는 더 짙었고, 바람이 간간이 안개의 농도를 흐트러뜨렸다. 안개가 가실 때쯤 섬 끝자락에 도착했다. 발길 닿는 대로 섬 주변을 몇 시간 동안 빙빙 돌아다니다가 들어선 이 곳, 서해식당이라고 했던가.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입구에 내걸린 간판을 봤다. 그는 안주가 오기 전에 소주를 연신 따라 마셨다. 눈을 뱀눈처럼 한껏 찌푸려서 가늘게 뜨고는 햇빛이 안개처럼 넘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섬을 그저 마음속에 담고만 있었다. 그는 도시를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아내는 일 년 사이에 낯선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흔들어보았다. 바다, 바다가 여전히 창밖으로 멀리 부옇게 보였다. 햇빛이 바닷물 위에 스며들어 더 그렇게 보이게 했다. 그는 꿈인 듯싶었다. * 포항댁은 낙지 한 마리를 산 채로 도마 위에 올렸다. 낙지의 몸빛은 은회색이다. 나무도마 위에서 낙지는 몸을 크게 꿈틀거렸다. 칼로 낙지를 다리 끝부터 잘랐다. 빨판이 붙어있는 낙지의 발은 칼로 잘리고 나서 더 많이 꿈틀거렸다. 살려고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듯 했다. 그라지 말아라. 살라 하믄 더 죽는 것이다. 아니다. 네가 요처럼 꼼지락거려야 싱싱한 네 살이 소주와 어울리제.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다. 포항댁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잡고 있던 머리 끝부분도 칼로 몇 번 내리쳐서 잘랐다. 중년의 남자 혼자서 섬에 찾아든 것을 그녀는 기꺼워 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에게서 풍기는 쓸쓸한 기운이 그녀의 피부에 와 닿았다. 아들이 집을 나간 지 일 년이 넘었다. 지금쯤 아들도 저 남자처럼 어딘가 낯선 곳을 헤매고 다니지나 않을까. 포항댁은 아들 현이 잠깐 방황하다가 꼭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뱃사람이 되어 여기서 썩을까봐, 중학교 때부터 육지로 유학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신림동 고시원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난 남편의 49제를 지내자마자, 어머니 곁에서 공부하고 싶다면서, 아들이 짐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고시원에서 이 년 동안, 그냥 허송세월한 지난 시간을 이제 마지막 도전을 해서 어머니께 꼭 보상해드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시험도 보기 전에 아들이 집을 나간 것이다. 집을 나간 지, 한 달이 넘어가고, 두 달이 넘어가고, 일 년이 넘어갔다. 그녀는 아들이 실종된 거라고 확신했다. 경찰에 늦게야 실종 신고를 하고, 아들 소식을 혹여 들을까, 서울 친구네로, 시골 고향으로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 있을만한데 찾아보고, 전단지도 뿌리고 왔다. 경찰에서 혹 연락이 올까싶어 휴대전화를 꼭 목에 걸고 다니며 소식을 기다리지만 아직 감감소식이었다. 포항댁은 아들을 진작 찾아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서른이나 먹은, 다 큰 자식이 설마 집을 나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시험 때문일까. 이번에도 떨어질 것 같아, 이 어미에게 면목이 없어 피한 것일까. 미안한 마음에 잠시 집을 피해 자신이 졸업한 대학이 있는 서울에 가서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라도 부탁하러 간 건가. 아니면 제대를 앞두고 헤어졌다던 첫사랑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은 아닐까. 집으로 연락하지 못할 일은 무언가. 아들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없이 집을 나간 이유를 암만해도 찾을 수 없었다. 주인여자가 사기대접에 수제비를 담고 있었다. 일꾼들 준다고 주인여자가 펄펄 끓는 국물에 직접 수제비를 뜯어 넣은 것이다. 주인여자가 그렇게 기다리던 진씨와 달리 같이 온 남자는 행색이 초라했다. 진씨와 동갑이거나, 아니면 한두 살이나 더 먹었을까. 실제론 진씨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진씨에게 남자가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것을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씨는 해병대 출신이라지만 예전의 건장했던 군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워낙 하는 일이 햇볕 속에서 하는 일이라 그의 얼굴은 마른 낙엽 같았다. 더군다나 이마와 눈가의 굵은 주름이 그의 피부를 더 거칠게 보이게 했다. 주인여자가 건들거리며 걷는 폼이 무거운 쟁반을 떨어뜨릴 것 같아 포항댁은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수제비를 담아낸 사기대접이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일꾼들 줄 거라고 두 그릇이나 가득 담아냈다. 다른 때 같으면 힘쓰는 일은 포항댁 차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급히 서두르며 나가다가 여자의 슬리퍼가 주방 문지방에 채어 벗겨졌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포항댁에게 신발을 달라고 했다. “이그, 뭘 그렇게 급히 갈려고 하누.” 포항댁은 물일 하던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 뒤집어엎어진 슬리퍼를 집어 여자의 왼쪽 발 앞에 갖다놓았다. 주인여자를 평소에 식당에 드나드는 남자들이 여간 넘보는 게 아니었다. 활어나 백합, 조개류를 식당에 대 주는 거래처 남자도 가만히 보면 주인여자에게 흑심이 있어 보였다. 주인 여자는 쟁반을 받친 팔을 움직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슬리퍼에 발을 끼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얀 꽃무늬를 수놓은 여자의 검정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런 여자의 뒷모습이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꽃잎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포항댁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 김철은 이미 꽁초로 변한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더 태웠다. 꽁초를 끄지 않은 채로 모래밭에 내던졌다. 담배꽁초는 모래 위에 반쯤 박힌 채 간당간당 다시 피어오를 것처럼 한 줄기 연기를 쒜, 하고 태우며 요동을 쳤다. 젖은 모래는 담배꽁초를 금방 잠재웠다. 갈매기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와 하늘 꼭대기에서 하얗게 날고 있었다. ‘해가 긴 것 같아도 금방 사그라질 테지.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본 적이 있었던가.’ 여기 낙조는 한 폭의 수채화와 다름없을 것 같았다. 그는 목에 두른 때 탄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조금 있으면 썰물 때가 될 것이다. 주인여자가 새참으로 수제비를 뜬 조개탕을 내왔다. “막걸리는 없소?” 진씨가 지붕 위에서 주인여자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본격적인 피서 철이 한 달여 쯤 남아 있었다. 미리 전기선이니 간판이니, 창문틀이니 지붕 망가진 것을 전체적으로 손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김철은 진씨를 따라다니며 그의 일을 보조하는 막일을 했다. 요즘은 이런 일마저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오늘따라 서쪽 바다를 보며 일을 하니 고향생각이 절로 났다. 그러면서 다리가 자꾸 풀리는 것이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김철도 술 한 잔이 생각나던 터였다. 주인여자는 진씨를 흘겨보며 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술타령이냐면서 지청구를 주지만 진씨의 투정질이 그리 싫지 않은 눈치였다. 주인여자는 가운데 가르마를 탄 생머리를 쪽을 치듯이 하나로 묶었다. 입술에 바른 빨간색 립스틱은 반 쯤 지워져 있었다. 여자가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새참이 나왔는데도 진씨는 하던 일을 계속하며,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철은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물었다. 일을 시작하면 조금의 틈도 없이 몰아치는 진씨의 호흡을 어떤 땐 따라가기 힘들었다. 멀리 두 여자와 함께 덩치 큰 남자가 해변을 걷고 있었다.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는 애기처럼 마냥 웃고 있고, 조금 뒤쳐져서 걷고 있는, 금박이 박힌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차려입은 한 여자는 영 불만스런 태도로 그들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가고 있었다. 연변의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하늘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 그리 원했던 노총각 아들의 결혼을 어머니는 살아서 기어이 보지 못하고 가셨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어서 돈을 벌어 고향에서 집도 사고, 해변의 처자들처럼 젊고 예쁜 각시와 결혼해서 손자 낳고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을 몰랐다. 그는 오랫동안 고향에 갈 수 없었다. 산업연수기간이 끝나고, 돈을 더 벌 욕심에 불법체류신분으로 안산 공장에서 이 년을 더 고생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모은 돈을 같은 방을 쓰던 동료에게 사기 당했다. 귀향 준비를 하고 있던 와중에 동료의 사기행각을 알게 되어, 쌌던 짐을 다시 풀었다. 그 동안 고생한 것이 너무 허무했다. 김철은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고향의 가족을 위해서 이를 꽉 물고 견뎠다. 귀향을 미뤘다. 그 사이 지병이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젠 남은 동생들이 마음에 걸렸다. 울 수도 없었다. 더 버틸 방법밖엔 도리가 없었다. 김철은 종교라곤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입에 올렸다. 내가 내세를 믿는 걸까. 그는 흠칫 놀랐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신을 찾는 걸까. 아니, 인간의 신이었다. 기독교의 하나님도 아니고, 불교의 불타도 아니고, 마호메트의 알라신도 아닌 그냥 인간의 신. 그들은 무조건 어떤 존재를 믿으라고 한다. 그러면 축복과 구원이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는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연변엔 무신론자들도 많지만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로 종교 활동이 자유로워져 종교인들이 늘어났다. 그 중에서 기독교의 확장이 눈에 제일 많이 띄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불법체류자 처지가 되면서, 시시각각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지금처럼 무엇인가에 의지하려는 것을 보면 자신도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닌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순간 그의 가슴 속으로 어머니가 새처럼 날개짓을 하며 파고들어 오는 듯했다. 그는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 장건영은 빈속에 소주가 벌써 세 병째였다. 위 끝이 싸하니 아려왔다. 어제 오후에 그는 용산에 일터가 있는 아내를 불러냈다. 마지막으로 꼭 할 얘기가 있다고 전화했다. 여보세요. 무엇을 원해요. 난 이제 지쳤어요. 아내는 여전히 그와 만나기를 꺼려했다. 아내는 냄새를 풍겼다. 일 년 이상 떨어져 있어도 그의 골방으로 자주 아내에게서 나는 화냥의 냄새가 풍겨오곤 했다. 그럴 때 그는 보풀이 인 나일론 이불을 쥐어뜯으며 찬 방바닥에 등을 대고 몸부림을 쳤다. 어떤 때 아내의 냄새는 복사꽃향기가 되어 그에게 찾아들었다. 그럴 때 그의 눈가로 눈물이 질금 흘러나왔다. 자기감정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소리 내어 울어보기도 하였다. 그저께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내는 동희를 두고 외출 중이었다. 아빠의 목소리인 걸 알고, 비록 전화 너머지만 동희가 애타게 아빠를 불렀다. “아빠! 일요일 날 꼭 와요! 엄마 없어요! 여기 없어요!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있어요.” 혀 짧은 소리로 5살 난 아들 녀석은 말했다. 길을 떠날 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의 핏줄. 그는 피부 밑으로 뜨거운 혈류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으면 전화를 하지 말 것을 그랬지. 아들 얼굴은 못 봐도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던 그는 한동안 아들에게 전화를 할 수 없었다. 동희에게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전화는 아들을 감질나게만 만들 뿐 혼란을 오히려 줄 것이었다. 아들은 일 년 동안 키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참고 버틴 김에 더 참을 걸 그랬다. 그는 바로 후회했다. “건영씨, 더 이상은 안 되겠어. 각자 갈 길 갑시다.” 달콤했던 신혼 생활이 동희를 낳고 삼 년 육 개월 만에 깨지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했다. 그의 가족이 그나마 웅숭크리고 살던 작은 아파트마저 날리게 됐다. 헤어지자는 아내와 일단 별거 형식을 빌기로 했다. 그 또한 서로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내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고통을 잠시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사이, 내가 정신 차리고, 재취업을 위해 노력할게. 그 때 다시 합치자.”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합의를 미뤘다. “아빠!” 아내 미선이 동희를 데리고 떠난 날, 그는 그들보다 먼저 뒤돌아서야 했다. “아빠! 못 들었나봐. 엄마, 우리 아빠는 왜 저기로 가지?” 동희가 아내에게 칭얼거리며 묻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아들의 우는 얼굴을 등짝에다 아프게 찍으며 한 발짝씩 옮기는 발이 천근이었다. 그만의 공간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는 잠을 자려고 했다. 잠은 고통을 잊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잠이 들지 않았다. 이럴 바엔 일어나 알코올 기운이라도 빌어야 할까. 뒤척이던 몸을 한참 만에 일으켜 창문 쪽을 응시했다. 다세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창밖은 어두운 벽만이 보일 뿐이다. 불 꺼진 방안의 창문은 오히려 푸른빛이 돌았다. 바다 밑 검은 해초처럼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둠 사이로 비쳐졌다. 그날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오래도록 혼자서 헤매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그랬던 것일까. 안정성이 보장되고, 각종 과분한 복지 혜택까지 있는 S공사 같은 직장에 남편이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내였다. 아내가 바라던 신이 내린 직장은 아니지만 어렵게 작은 회사에 취직한 그는 아내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다시 합치자고 할 판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이혼서류나 어서 깨끗이 마무리하자.” 아내는 재차 이혼을 요구할 뿐이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인가, 그때 다시 합치자는 소리를 잊은 것인가. “그래 현실은 나를 너무 오래 방황하게 했어. 당신도 지쳤겠지. 하지만 이제 괜찮을 거야. 작지만 탄탄한 회사야.” 그는 아내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내가 그리 나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그는 자책하기 바빴다. 아내말대로 현실감각이 없는 걸까. 그는 충주 본가에 그들의 별거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명절 때도 혼자 가기 멋쩍어 핑계를 대어 가지 않았다. 이혼이라니. 남자가 되어가지고 가정 하나 제대로 꾸리지 못한 압박감이 언제부턴가 그를 지배했다. 그때 생각이 나니, 그의 손은 술잔 안의 술이 출렁거릴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포항댁이 다시 왔다. 삐져나온 굵은 반백의 머리카락이 그녀를 고집스럽게 보이게 했다. 포항댁은 젖은 손으로 산낙지 접시를 내려놓았다. 초고추장과 꽃소금을 넣은 기름장도 산낙지 접시 옆에 두었다. 어느새 상 위는 하얀 플라스틱 접시들로 가득 찼다. 오이, 당근 썬 것, 풀 죽은 상추, 삶은 메추리알과 소금, 볶은 미역줄기 따위가 하얀 접시 바닥에 딱 붙어있었다. 포항댁이 빈 쟁반을 들고 허리를 펴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단 몇 초간이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 투명했다. 나이 든 여자의 눈 치고는 맑았다. 꼭 바다색 같았다. 살면서 죄라곤 짓지 않고 살았음직한 눈이다. 순간 그는 포항댁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 낙지 접시를 남자에게 갖다 주고, 포항댁은 상추를 마저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섰다. 소쿠리에 상추를 건져놓고, 오이와 당근, 풋고추, 마늘을 모두 물속에 넣은 채 설렁설렁 흔들어 씻어 건졌다. 바다에서 끌어온 물을 받아 해물과 조개의 물도 갈아 주었다. 깨진 조개껍질에 손가락이 긁혔다. 포항댁은 남편이 갑자기 이 세상을 등졌을 때, 홀로 된 어머니 곁으로 와 준 아들이 고마웠다. 그런 아들이 실종된 것이다. 그녀는 모두 자신이 저지른 죄의 업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포항댁은 자신에게 닥친 것을 이제는 순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포항댁은 행주에다 손을 문질렀다. 행주에 묻은 소금기 때문에 상처가 따가웠다. 허연 행주에 핏자국이 벌겋게 번졌다. 그녀는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물일을 했다. 그래서 손이 멀쩡할 날이 없었다. 포항댁은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하면 답답증이 났다. 한겨울에도 맨손으로 일했다. 석화나 조개를 캐서 살면서 바닷바람에 시달려 포항댁은 얼굴의 피부도 푸석하게 변했다. 포구였던 이 근처 곳곳이 해수욕장으로 개발이 되면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따라 횟집이나 식당이 많이 생겼다. 예전보다 굴을 쪼는 사람들도 드물고, 굴도 적게 나왔다. 다행히 식당에 일할 거리가 새로 생겼다. 허 순경이 오늘쯤 주인여자를 보러 오지 않을까. 포항댁은 오늘은 꼭 허 순경이 아들 소식을 들고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방의 열린 창문으로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언제보아도 자신을 닮은 갯바위가 오늘따라 가까이 보였다. 한번 깊이 심호흡하고 코를 킁킁거리자 비릿한 갯냄새가 맡아졌다. 한겨울에도 갯벌 곳곳에서는 쉴 새 없이 뒤척이며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내뿜는 체취다. 아들은 비린내 나는 이곳의 체취를 싫어했다. 어느 날 보니까 아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생선까지 먹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어릴 때 아들은 고기를 잘 먹었다. 대학 다닐 때 아들은 어떤 종교 서클에 가입해서 활동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의 채식습관은 그때부터 생긴 거였다. 주인여자가 들어오더니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일꾼들이 술 한 잔 달라네요. 그런데 같이 온 남자 있죠? 아무래도 이상해요. 포항댁은 못 느꼈어요. 한국사람 같지 않아요. 말투가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 분명해요.” 주인여자는 쟁반에다 잔을 두 개 얹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뒤돌아 나가는 주인여자의 뒷모습은 마치 바다 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표처럼 몸이 중심을 잃고 허공에 떠있는 듯했다. * 김철은 주인여자가 막걸리를 대신해서 가져온 소주 한 병을 진씨와 나눠 마셨다. 가슴 속이 뜨끈해 오는 게 힘이 빠졌던 다리근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아까 오다가 보지 않았나? 요 옆 영무도에 새로 생긴 해수피아 말이야. 지금 사람들이 꽤 오는 모양이야. 아는 후배가 그거를 맡아 했지. 그 때 나에게 연락이 한 번 왔었다구. 내가 다른 일 맡은 게 있어서 못해줬지만.” 김철이 안주 삼아 수제비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울 동안, 진씨는 얘기하며 먹느라고 아직 반도 못했다. 그릇에서 숟가락만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진씨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무도는 아직 옛 섬마을 정취가 살아 있어. 하지만 이곳도 머지않을 거야. 지금은 개발예정지역으로 묶였지만 개발이 시작되면 무도도 다른 데처럼 변할 거라고. 옛날 같이 소박한 정취를 기대할 순 없겠지. 제일 먼저 호텔, 레스토랑 같은 상업지구가 생길 거야. 거기다 콘도, 놀이공원 등 대형리조트시설까지 들어설 수도 있고. 우리가 할 일이 많이 있을지도 몰라. 이 쪽 사람들을 내가 좀 알거든. 근데 서둘러야겠어. 오늘 군대 간 막내가 첫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바쁘게 생겼어.” 오늘 여기 일을 끝내고 내일은 용인 아파트 현장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김철은 진씨를 따라다니는 일이 그 전에 안산 공장에서 일할 때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원래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가죽냄새랑 섬유와 약품냄새로 가득 찬 공장에 틀어박혀 일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김철이 진씨를 처음 만나게 된 곳도 아파트 공사현장이었다. 강북의 재개발 아파트였는데 김철은 한참 마무리 공사가 진행될 때 투입되었다.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친구를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찾아 헤매다가, 병을 얻어서 열흘 동안 안산의 단칸방에서 몸을 꼼짝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병사(病死) 소식을 듣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노모의 죽음 앞에서 일어나야 되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동생들이 있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죽음 앞에는 생이 있다는 것을. 끝에 다다르면 다시 출발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김철은 몸을 겨우 추스르고 무작정 옆방 사람을 따라다니며 재개발 현장에서 막일을 했다. 일을 하러 간 첫 날, 저녁때가 되어 잔업을 한 두 시간 남겨 두고 라면집으로 새참을 먹으러 갔다. 김철은 진씨를 라면집에서 처음 대면했다. 라면을 한 그릇 씩 주문하더니 진씨가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스테인리스 물컵에다 한 잔 씩 따랐다. “자 한 잔 씩 마시자구. 이렇게 알코올이 한 잔 들어가야 일을 하지.” 라면집엔 소주를 팔지 않았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요기도 하면서 술을 한 잔 해야 힘이 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인 몰래 가져 온 술을 그들은 함께 나눠 마셨다. “형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슈?” “오십은 아직 넘지 않았어요. 뭘 다 알려고 그래요?” 김철은 처음 본 사람에게 나이를 밟히는 것이 꺼려져서 대충 얼버무렸다. 진씨는 처음 본 김철의 그간 행적을 궁금해 했다. 이 나라를, 진씨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단지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하면서 그의 정체성을 확인 하고 싶어 했다. 김철은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그것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국에 와 보니, 조선족들은 독하다느니, 다 믿으면 안 된다느니,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들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조선족에게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여기에 있으면서 그런 오해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두 달 전인가는 어떤 사람과 말다툼을 시작해서 육박전으로 갈 뻔했던 경험도 있었다. 그런 관계로 그는 단순히 호기심 차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평소에 말조심을 했다. “선배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슈?” 집요하게 캐묻는 것이 불만스러운지 옆방 남자가 진씨의 말을 막으며 반말 비슷하게 물어보았다. “나? ……환갑은 넘었수.” 진씨는 옆방 남자를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옆방 남자는 무슨 언감생심이냐며, 환갑이 넘었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진씨는 옆방 남자의 말을 아예 무시하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철은 처음에 껄끄러웠던 진씨가 왠지 남 같지 않았다. 나이도 고향 삼촌뻘쯤 되었다. 김철의 그간 사정을 알게 된 진씨는 그에게 자기만 쫓아다니라고 했다. 일거리가 있으면 그를 잘 챙겨주었다. 지난겨울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처럼 일이 계속 이어지질 않았고, 비 오는 날이나 너무 더운 날, 혹은 아주 추운 날은 일거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진씨가 술병이 나는 바람에 있는 일거리를 놓쳐, 공치는 날도 많았다. 한 때 진씨는 알콜중독으로 입원까지 한 적이 있었다는데 아직 술을 못 끊고 있었다. 김철은 진씨가 오늘처럼 아들 얘기 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가족 얘기는 원래 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진씨가 빈 그릇을 얹은 쟁반을 김철에게 건네주었다. 굳이 주방에 직접 갖다 주라는 것이다. 서둘러 일을 마쳐야겠다며 그를 재촉했다. 김철은 휘청거리며 쟁반을 받쳐 들었다. 주방문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앞쪽으로 정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식당 안으로 먼저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자세히 보니 경찰이 분명했다. 김철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쟁반을 든 채 식당 밖에서 주춤거렸다. 거처에서도 그런 심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집에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인종이 느닷없이 아무 때나 울릴 때가 있었다. 그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이 찾아왔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면 집 안의 벽시계가 갑자기 멈춰서는 듯했다. 긴장된 눈은 시계를 쳐다볼 수도 없었고, 근육 사이의 혈관이 빠른 속도로 수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석연치 않은 진동이 한 바퀴 머릿속을 지나가고 나서야 진정이 되면서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실체를 깨닫게 되었다. 불법체류자인 그는 안팎에서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안녕하십니까. 식당 안으로 누군가 씩씩하게 들어와 주방을 향해서 인사를 했다. 경찰복을 입은 남자였다. 경찰복장을 했다면 경찰이 맞을 것이다. 아직 양볼에 젖살이 있어 보일 정도로 풋풋한 느낌을 주는 젊은 사내였다. 젊은 사내는 식당 안을 빠르게 한 번 휘 둘러 보는 것이었다. 건영은 경찰을 얼른 외면하고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아직 손도 되지 않은 산낙지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산낙지는 이제 꿈틀거리지 않았다. 꿈틀거리다가 죽은 낙지 살들을 보니, 자신의 손을 쥐어뜯다가 축 늘어진 아내의 손이 떠올랐다. 그의 분노가 순간 살기충전 했던 건, 아내의 손가락에 끼어진 낯선 반지 때문이었다. 커플링처럼 다이아몬드가 가운데 납작하게 박힌 백금반지였다. 아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을 때, 반지하방의 창문으로 스며든 한낮의 햇빛이 다이아몬드에 반사되어 그의 눈을 잘 뜨지 못하게 했다. 그 눈부심이 무엇보다 강렬하게 지금 그의 머리를 차지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다고.” 법원으로 바로 가자는 아내를 끌고 그의 골방으로 데리고 왔다. 당신이 정 원한다면, 마지막인데…… 그래 어디 한 번 가보자, 하면서 아내는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래, 어서 얘기 해 봐.” 그는 아내의 재촉에도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난, 일 년 전에 다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남자가 치사하게 이럴 거야?” “남자? 당신! 그렇게 이혼에 목숨을 거는 거 보면 어디 좋은 남자가 벌써 생겼나 보지?” 그가 한 마디 내뱉은, 격앙된 말에 아내는 억울하다는 듯이 대들었다. 그는 물론 진심으로 한 소리가 아니었다. 기껏 아내와 화해를 할 요량으로 이런 시간을 만들어놓고,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가슴을 할퀴는 소리를 한 것 같아 순간 그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 맨 정신에 그게 할 말이야? 그래, 기껏 하는 말이 그거지? 우리는 이미 일 년 전에 끝난 관계야. 왜 이해를 못해? 우리가 그때 왜 헤어졌는지 잊었어?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 답답해. 당신의 몸이, 당신의 정신이…… 왜 끝난 걸 인정하지 못해? 정말 질렸어. 그래 맘대로 해, 원하는 게 이거야? 자, 해 봐.” 하지만 아내는 그 소리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옷을 훌렁, 훌렁 벗기 시작했다. 그에게 어떻게 맘대로,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자기의 몸을 들이대고 덤비는 것이었다. 그가 원한 건 진짜 이게 아니었다. 그는 예전처럼 아내와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내는 급했다. 서류정리가 왜 그렇게 급한 것일까. 왜 저리 몸서리를 치도록 원하는 걸까. 거기다 아내는 술을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도 어디서 이미 술을 먹고 왔다. 얼굴은 멀쩡했지만 말할 때 혀가 약간 돌아가는 걸 보니 취한 상태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골방으로 풍겨오던 아내의 냄새가 바로 눈앞에서 술 냄새와 함께 그의 코를 간지럽게 했다. 아내는 갑자기 아랫도리만 놔두고 다 벗었다. 아내의 가슴은 허옇게 다 드러났다. 아랫배에 살집이 좀 생겼고 젖무덤은 부풀어 오른 듯 팽팽했다. 그는 팽창되는 몸을 느꼈다.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닥에 흐트러진 옷을 입으라고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앉은 자세로 다가오더니 그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이혼을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그의 어깨를, 그의 팔을, 흔드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내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바닥에 똑바로 누웠다.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아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기도라도 하는 듯 했다. 갑자기 측은한 감정 같은 것이 슬쩍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뒤, 아내 옆에 따라 누웠다. 그가 옆에 눕는데도 아내는 그냥 꼿꼿하게 누운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나를 원하는 걸까. 아내도 내가 가끔은 그리웠던 것일까.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둘의 찬란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두 몸뚱어리에서 뿜어진 방안 가득 더운 공기가 그의 몸을 점점 달아오르게 했다. 인내의 시간이 얼마간 지나간 후, 그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그녀의 몸 위에서 움직이는 대로 아내는 내버려 두었다. 그는 팽창된 몸이 가라앉기 전에 서둘러 아내의 몸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곧 주저앉았다. 아내는 갑자기 우는 듯 웃기 시작했다. 이거였다. 아내는 그에게 모멸감을 주려했다. 가끔씩 찾아오곤 했던 임포텐스로 인해 비뇨기과도 다녀보고, 신경성이라고 진단한 의사의 권고로 정신과 상담도 두어 번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생각에 이르자 그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그는 웃는 아내의 얼굴을 자기도 모르게 한 대 때렸다. 아내가 발악을 했다. 그는 아내가 지르는 소리에 당황하여 아내의 얼굴을 한 대 더 때렸다. 그러나 아내는 더욱 더 발악을 했다. 그가 보고 싶어 했던 아내의 모습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자였다. 바로 악녀의 모습이었다. 그는 여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내의 몸은 여전히 복숭아 빛 살결이었다. 그 사이에 핏빛이 뿜어 나왔다. 아내의 붉은 입술선이 잠시 움직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함께 흔들렸다. 그러나 곧 잠잠해졌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세 병째인 소주병도 벌써 바닥이 다 드러났다. 칼로 썬 지 한참 된 산낙지에서 물이 생겨 접시 안이 질척거렸다. 야채도 그새 풀이 죽어 있었다. 경찰은 아직 주인여자와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술 때문인지, 흐른 시간 때문인지 긴장이 풀린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화장실 문 앞에 아까 본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두 마리 중의 한 마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가서는데도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한 발짝씩 옮겨놓으니 어떻게 하나 지켜보려는 모양 같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숙여 고양이를 마주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흐린 구슬 같은 눈동자를 뜨고 있었다. 그의 방에서 새어나온 시취가 앞집까지 진동해, 후각이 예민한 반지하방 사람 중의 누군가는 몸살로 곧 앓아누울지도 모른다. 임수랑/2006년《월간문학》에서 단편소설 「 꽃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단편소설「끝나지 않는, 녹슨」으로 5.18문학상을 수상했고, 교보 <퍼플>에서 장편소설《지하철 아이》, 소설집 《끝나지 않는, 녹슨》과 《재》, 《로라의 게시판》, 《배달구역》을 비롯하여, 장편 <흰꼬리 깃발1> <엄마의 달>, 제 1시집 <늪의 방식>과 함께 십여 권의 시집을 전자책으로 냈다.  
579 바다는 오지 않는다 외 1편/박승민 file
편집자
1409 2017-08-30
바다는 오지 않는다 땅의 환부가 심부에서부터 끓어오른다. 뭉개진 콜타르가 갱엿처럼 바퀴를 움켜쥐고 1시간째 요지부동이다. 먼 동쪽바다, 머나 먼 해양풍(海洋風). 휴가철 문막휴게소 부근은 열의 노천탕, 열의 발전소.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는 배기통들이 땀을 삘, 삘 흘리면서 일제히 뒷사람의 면상을 향해 부릉, 부르릉 떤다. 방울토마토처럼 매달려 벌겋게 달구어지는 얼굴들. 떼를 지어 늘어선 망초 사이에서 석유원단 타는 냄새가 났다. 가드레일을 친 열섬까지 쪽빛 동해는 들어오지 않고 자신이 보낸 열을 고스란히 뱃살로 되돌려 받으며 주행선에 퍼질러 앉은 일가족. 냉방병에 지친 엄마를 손가락으로 감으며 아이들이 물오징어처럼 검은 콧물을 훌쩍거린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뽀얀 수은구름이 불 끄러 온 소방헬기처럼 간간히 고속도로 상공을 배회하다 별일 아니라는 듯 사라진다. 10달러 스타벅스 커피 한 잔과 던힐 담배 한 값 양곤 외곽, 연립주택공사현장에서 바짝 말린 메기 등 같은 잡부가 흙바닥을 곡괭이로 내리치고 있다. 쇠가 돌에 부딪칠 때마다 손마디에서 불꽃이 튀고 수은주(水銀柱)는 40도를 치솟는다. 오후 들어 옴폭 들어간 눈이 쥐눈이콩보다 더 까매지면서 곡괭이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림자가 담벼락에 무성영화처럼 끝없이 반복된다. 마침내 타오르던 불덩어리가 양곤강 밑으로 푸쉬쉬 대가리 처박자, 덜덜 떨리는 손에 종이 한 장 쥐어진다. 박승민/ 경북 영주출생.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가 있음. 제2회 <박영근작품상> 제19회 <가톨릭문학상신인상> 수상  
578 하산下山을 하며 외1편/구재기 file
편집자
1478 2017-08-30
하산下山을 하며 흐린 물은 멈춰야 맑아진다 온 세상이 비춰온다 물낯에는 하늘이 내려앉고 절집 잠잠히 가라앉고 제멋대로 흐르다가 멈춘 깊은 가슴 속 물줄기 맑던 두 눈이 왜 이리도 갑자기 자꾸만 흐려지는 것일까 오는 걸음 가는 걸음도 아닌 나의 길에는 길이 없다 이른 아침 이른 아침, 대숲 참새떼 우짖는 소리에 단잠에서 깨어나도 짜증 부릴 수는 없다 그 시끄러움에 잠시 두 손을 올려 두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다가도 어느 사이 고개를 되돌리며 휩쓸리다 보면, 절로 게츠름한 가슴이 풀어지고 만다 대숲도 그렇다 맑은 날, 작은 바람결에 수없이 흔들리고 있는 걸 보면 천지간에 참새떼 소리 사방에 생기 철철 넘치고 무심히 듣다가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고마움이 새로워지면 잎잎에 내린 아침 햇살 줄기에 젖어 짐 지워진 일체의 무게에 헤살대는 잎에도 정情이 간다 댓잎 가득한 햇살 사이 제 몸짓 제 소리로 우짖는 참새떼 소리에 푸른 하늘빛이 와르르 번진다 • 1950년 충남 서천 출생 •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공존共存』과 시선집『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다수 •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등 수상. • 한국문협 충남지부장, 충남시인협회장 역임 • 현재 40여년의 교직에서 물러나 <산애재蒜艾齋>에서 야생화를 가꾸며 살고 있음  
577 북소리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1372 2017-08-30
북소리 간밤 하늘에 달무리 지더니 소나기, 북을 친다 무논마저 태우는 마른하늘 독장골* 나락 논에 물끄러미 서 있는 아버지,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에도 콸 콸콸 물꼬 하나 트면 들판 가득, 벼꽃 스스로 피워 올릴 테지만 살다보면 오늘처럼 물을 안고 누울 날 있어 어린모 먹이느라 빈 젖이 될 때 까지 닳은 소매 걷어 올리는 농부의 아내, 어머니 한 발자국 멈춰준 덤, 윤사월 소나기 떨어져나간 자리 탯줄 잇듯 수의 한 벌 마름질하며 세상 밖 또 하나의 길 준비하는 둥 둥 북채 들고 봇물 채우는 빗줄기 북치며 온다 * 경북 군위군 산성면 백학동에 있는 천수답 들 이름 붉은 자리 복병처럼 숨어있다 불쑥 나타나서 하필이면 평온을 찢는 사랑이란 말 가지게 되었는지 당신 딛고나간 핏물 고인 잇몸 들여다보면 사랑, 생의 또 다른 복병인 것 같아 자꾸만 쓰라리는 이 붉은 자리 약력: 경북 군위 백학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 등단,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별자리』  
576 천지에 장경 외1편/ 權 千 鶴 file
편집자
2856 2017-08-30
천지에 장경 착각하지 마라! 8만 4천 대장경이 합천 해인사에 있다고, 8만 4천 번민을 털어내는 8만4천 사람살이 8만 4천 사람 사이에 문제 있고 답도 있다 곳곳에 널려있는 장경각과 장경들 지금 발 디딘 세상이 대 장경각이다 합천해인사에 가기 전에 먼저 살펴라 내 몸이 장경이고 이웃이 선승(禪僧)이다 7월 장마 천지사방, 낯선 곳으로부터 밤낮없이 밀려오는 찬 기류들이 간간이 낮은 구름들을 만나 저기압을 형성하더니 곳에 따라 집중호우가 예상되면서 장마가 시작되었고 일교차 심한 젊음이 몸살과 불면으로 부대끼기 시작했다 내 젊음의, 고온다습한 피가 더욱 뜨거워지는 7월, 여름이 되면서 수온은 예년보다 높았고 흐린 날과 갠 날이 반복되는 조울증도 일찍 찾아왔다 곳에 따라 들이닥치는 집중호우로 상습침수지역인 가슴 밑바닥엔 펄이 쌓여갔고 습지식물로 자라던 나의 시는 뼈다귀만 남아 축대 부실한 갈비뼈 아래로 굴러 떨어져 무너져 내리는 살점들을 떠받쳐야 했다 불면의 밤마다, 볼모가 되어버린 희망은 배수로 막힌 세상의 막장까지 떠밀려가면서도 거기 하류로 떠내려 온 쓰레기들 속에서 눈 뜬 목숨들 거두어 기둥삼고 유실된 농경지에 뿌리 든든한 수종으로 골라 심으며 먼 바다를 향한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7월 장마, 천둥번개 동반한 일기불순으로 근육은 더욱 야물어지면서 흘러 흘러서 도달한 강의 하류, 눅진눅진 얼룩진 살점 아래 덧 난 상처들 제풀에 아물고 뼈마디 소리 없이 굵어지는 장마 때 마다 펄 밭에 내린 뿌리 단단해져서도 아직도 더 가야 도달하는 먼 바다의 길 태풍속의 배 한 척, 일교차 심한 내 청춘을 관통하여 먼 바다로 나가는 물의 길을 따라 긴 격정의 우기를 보내고 나서야 도달한 강의 하류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 가닥 잡고 기울어진 돛대 바로 세우며 강의 하류가 바다에 더 가까운 곳임을 알게 된, 오! 내 청춘 7월의 장마 ****************************** 약력 *현대문학 데뷔. *수상:하버드대학교주최 번역대회 우승/코리아타임즈 주최 한국현대문학번역대회 시 부문 우승/불교문학대상/해외동포문학상대상(단편)/흑구문학상특별상(수필)/WIN’s ‘Distinguished Poet Award’/영랑문학상 등. *저서: 한글시집12권, 영한시집 2권, 일어시집 1권, [속담명언사전](편저)외 다수.  
575 가을비 오던 날 외1편/신성철 file
편집자
1606 2017-08-30
가을비 오던 날 편지가 왔다 찬비에 젖어 후줄근하개 눅눅한 가을볕에 말리지도 못하고 그냥 넘겼다 잘 익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는데 떫은 입 다시고 그냥 웃어버렸다 눈 멀고 귀 멀어 답답했던지 찢겨진 넝마처럼 식어가는 목숨 하나 툭 연탄불 아침 저녁 모셔드려 예불을 올리다가 아차 놓친 사이 작은 실수도 죄가되어 눈 감으신 부처님 지워진 눈자위에 눈알을 박아 구들장 아래 절집 하나 세웠다 검정 향 사르며 무릎 꿇어 빌고서야 정성이 통했는지 빨갛게 웃으신다 언감생심 못난 불목하니 극락왕생 바라겠소 이불속 하룻밤 낙원에나 들게 하소서 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수상 2010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2011년 백교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0년 시집 3천원짜리봄 출간  
574 부레옥잠 외1편/박일아 file
편집자
1599 2017-08-30
부레옥잠 물위에 떠서 흙 한줌 갖지 못하고 태어나 바람 불어와 물이 출렁일 때 마다 연약한 실뿌리로 버티고 영양분 빨아먹고 잎의 둥근 주머니는 희망 싣고 동그란 초록 잎으로 푸른 하늘 우러러 햇살 가득 안아 삼복더위 견디며 승리의 꽃대를 높이 올려 연보라색 꽃을 피웠다 부레옥잠 빛바랜 열이틀 병원 침대에서 하얀 시트를 덮고 그림자도 없이 살았다 숨쉬기와 검사만하고 머리는 텅 비고 자꾸 표백되어 갔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병마를 하나 둘씩 떼어갔다 유턴 점에 이르자 사라졌던 내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자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밤에 병원복도를 산책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 아름답게 반짝였다 겨울나무들이 오색단장하고 보고 있다 다시 색을 찾았다 약력 ; 2009년『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하루치의 무게』 대구 경북 작가회의 회원  
573 쇄빙선 외1편 / 제리안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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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 2017-07-31
17.08월 86호 시 쇄빙선 가까운 일부터 지워야 한다 문득 등을 돌린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병명(病名)으로 서로를 부르기 전에 에돌기만 하는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위해 긴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갈 필요도 없이. 육천 톤의 신발을 신고 북극해를 건너는 동안 결정된 일들과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밀어낸다 안간힘이 들어 올리는 위로의 음절이, 응결고도에 오를 때까지 발자국은 극지의 항로를 개척한다 무언가를 지운다는 건, 지워버린 것들을 뺀 내가 잔설처럼 슬픈 입자가 되어가는 일 유빙처럼 내밀하게 시간 속을 떠도는 일 성급한 걸음이 3노트의 속도로 얼음을 덮칠 때마다 북극에 허락된 계절이 포말처럼 사라지고 있다 균열을 일으키는 문장의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면 먼 곳의 일들도 지워질 것이다 그 후의 우린 긴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가더라도 끝내는, 건널 수 없는 건너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금니를 나눠 먹기로 했다 어금니만 있는 짐승을 알고 있다 앞니도 송곳니도 없이 날카로운 본능을 통째로 씹어 먹은 이빨이다 오로지 식물성만 추구하며 숲 속을 드나드는 어금니는 일생에 세 번 자란다, 세 번째 어금니가 빠질 때까지 잘게 나누기만 하는 나른한 몸속이다 순한 것들은 어째서 어금니를 갈고만 있는지 어금니는 송곳니가 없는 짐승이 기도하는 사원 순한 성질을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결심하는 나도 가끔은 이곳에서 아파한다 산다는 게 한 번씩 들쑤시는 치통 같아서 혀만 닿아도 시리고 암담한 통증이어서 소주 한 병 비우고 나면 고개를 처박고 뿌리만 남은 어금니를 위해 울고 싶었다 뿌리가 젖은 어금니를 수생 식물처럼 키우고 싶었다 잘려나간 시간을 떠올린다 허물어진 어금니 속에서 순한 짐승이 굶주리고 있다 우리는 깊은 동굴을 파고 반만 남은 어금니를 나누어 갖기로 했다 어금니만 있는 짐승들이 최후에 먹는 것은 어금니다. 2006 문학바탕 신인문학상 2010 평론가가 뽑은 100대 작가 시집 <고래는 왜 강에서 죽었을까> (푸른사상)  
572 도통 외 1편/정동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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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 2017-07-31
17.08월 86호 시 도통 ​ ​영원히 끝나지 않는 몽유도원도 속처럼 한 폭 그림이다 사람들이 그림을 둘러싼다 ​왜가리 떼가 똥 싼 것도 아닌데 괜히 닦지 말라고 구도에 대해 설법한다 힐긋힐긋 훔쳐보던 숲속 원숭이들이 먹었으면 입 닦고 쌌으면 밑 닦는 게 득도라고 제대로 깔깔댄다 꿈속이라도 좋아서 잠이 깨지 않길 바랐다 마른다, 바로 닦아라 그래야 제대로 된 수도지 산사 비구를 내려다보던 양떼구름이 떡이라도 만들 기세로 입방아 찧는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다 도통 모르겠냐고, 도통 모르겠다고 해도 달도 밤낮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폭설 ​ 아나운서의 폭설 경보라는 말마저 얼어붙어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길이 먼저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의 길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 덕분에 하루 이틀 쉬면 좋겠다는 말도 녹아들지 못하고 쌓여있다 그만 그치라는 말이 창밖 나무에 걸려 있다 뚝 떨어진다 쩍 쩍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흰 살결을 드러낸다 ​ ​대부분의 가난은 쌓인 눈보다 더 희다 독설 아닌 독설에 자꾸 미끄러지는 사람들 허한 고개를 넘고 있다 ​ 싸리비도 눈가래도 모두 손을 놓았다 눈밭에 발자국을 심는 드문드문 아이들과 멍멍이가 보인다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다​ 족히 삼 일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 2012년 <<애지>>로 등단 이메일: 별이소년@naver.com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3로 73,602동 1205호(곡촌마을) 우편번호: 10061 핸드폰: 010-7736-7230  
571 초복 외1편/김주애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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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 2017-07-31
17.08월 86호 시 초복 죽전리 이장님 때마침 마누라가 건네 준 16만원을 들고 개한마리를 사서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올여름도 목이 타는 날들을 견뎌내려면 흔해 빠진 개새끼가 딱이라 서둘러 목에 줄을 묶어 나무에 매달려는 순간 고만 개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그 눈빛이라 주춤하는 사이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찰나를 눈치 채고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갔다 화들짝 놀란 죽전리 이장님 부리나케 개를 쫓아 온산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땀은 등줄기 줄줄 흘러내리고 끓어오르는 부아에 더위는 다 잊고 산 속을 헤매고 다녔더니 어느새 해는 저물고 죽전리 이장님 배는 우르릉 우르릉 울었는데 이런 낭패가 어디있냐고 주인 없는 목줄만 가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초복에 신이 난 개가 산등성이에서 실컷 울고 있었다 송현이 길을 가다 나는 순장(殉葬)녀 송현이 봄 햇살이 자꾸만 가슴팍을 헤집고 들어서던 날이었지 아마 아버지가 맑은 물 한 사발을 건네던 날 비로소 새 세상이 열리던 그 날 내 나이 열여섯 대궐처럼 넓은 집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그늘 진 담장 밑 제비꽃이 피고 민들레가 피었어 쭈그려 앉아 꽃잎을 쥐어 뜯으며 피지 말아라 피지 말아라 주문을 외우고 돌아서면 나는 열여섯 살 몸종 주인의 놋숟가락은 열여섯 내 살점을 파먹고도 반짝반짝 윤이 났어 안채 쿨룩이는 기침소리 들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무릎은 도망가자고 자꾸 졸랐어 하지만 사방으로 난 길은 모두 주인에게 가는 길 온종일 축축하고 고단한 하루, 쏟아지는 꿈은 매번 담장을 넘지 못했어 꽃피는 열일곱을 넘지 못했지 다시 태어난 열일곱, 담을 넘어 길을 나섰지 눈물 찍어가며 가던 그 길에 천년 전 마중 나온 바람이 햇살 속으로 손짓하더라 주)송현이-1500년 전 16살 나이로 비사벌(현 경남 창녕)에 순장된 소녀. 2007년 12월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되었다고 하여 이름이 ‘송현이’로 붙여졌다. 이들 죽음의 사인은 중독 또는 질식사라고 한다.  
570 누군가를 보고 있다 외1편/이창한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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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 2017-07-31
17.08월 86호 시 누군가를 보고 있다 나무 나무 사이로 봄빛이 구르며 꽃 색을 부르고 있다 하얀 면티셔츠에 달라붙는 봄기운 연두색, 살구꽃 색으로 묻어나고 나는 누군가를 보고 있다 가슴은 순한 하늘을 닮아서 잊혀진 듯 그대로인데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아 그가 추위 풀린 언덕에 앉아 기억 속에 남겨진 사연을 펼쳐 놓고 조심스레 연주한다 봄, 꽃, 나비…사랑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있을까. 그게 우리들의 봄인 것을 실없이 웃음이 나는 그런 것 말이다 이러다가 봄바람 나겄다…… 봄 몸살 앓다 봄이다! 있는 대로 생트집 잡으며 피어나는 꽃 자태 꽃이다! 아우성으로 터지는 헤픈 웃음 서두러지 않아도 한 뜸씩 바느질로 피워내고 순한 향으로 물들여 내놓은 솜씨 부끄러워 화사한 꽃 뒤에 숨어 낯가림하는 눈웃음 애송이 들킬까보아 돌아앉아 손톱만 물어뜯는 아린가슴 또 두어 달 봄 몸살을 앓아야 하나보다…….  
569 나도 엄마가 있으면/임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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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2017-07-31
17.08월 86호 수필 나도 엄마가 있으면 임재수 전화가 왔다. 한 마을 사는 친구 명석이다. "순구가 와서 한잔 하고 있엉께 얼런 와" "지금 점심 먹고 있는데" "그냥 내려 와 순구네 집으로" 숟갈을 들다 말고 그냥 내려 갔다. 근처에 가자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마당에 들어서자 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덕(철망)위에서 삼겹살이 노릿노릿 익고 있었다. "얼렁 와!" 순구 어머니께서 반색을 하신다. 작년에 팔순을 지내신 분이다. "아이구 고생이 많습니다." "고생은 무슨~" "이게 얼마 만이야? 얼굴 잊어 먹겠다" 나는 친구를 향해 인사를 했다. "작년 봄에 밨자나?" "엄마 혼자 계시는데 더 자주 와야지?" "야! 그동안 몇 번 왔다 갔었지" "왔으면 이 놈아 형님 보고 인사를 하고 가야지" "그건 미안하다, 그런데 말이야 내 혼자 가면 노인네 밥하기 귀찮다고 마누라가 말리더라" 그러자 소주잔을 들이키던 명석이가 순구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너 참 나쁜 놈이다?" 옆에 계시던 순구 엄마가 갑자기 눈이 뚱그래 지신다. "왜 그래?" "어무이 팔십이 넘어서 아들 밥상 차려 줘요? 지손으로 해 묵으라카지" "난 또 머라고, 아직 내가 꿈적거릴 수 있고 가끔 아들 얼굴 보니 좋지 멀 더 바래" "나는 엄마만 있다면~" "그래서?" 순구가 채근을 한다. "매일 찾아 뵙고 밥상 차려 드리겠다." 나도 한 마디 보탰다. "나는 매일 밥상도 차려 드리고 설겆이 빨래 목욕까지 다해 드리는 걸" 그러자 순구가 "에라이 순~" 한마디 내 뱉았고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명석이 눈에는 방울이 맺혔다. 그날 저녁 고이 자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깨우셨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회초리를 들고 계셨다. 눈초리가 매섭다. "종아리 걷어라" "영감 왜 그러시우" "매일 밥상 설겆이 빨래 목욕까지? 아 글쎄 이놈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나는 종아리를 걷고 섰다. 어머니께서 혀를 차신다. "ㅉㅉ 영감도 망령이지 저 어린 게 뭘 안다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고 물으신다. "네 나이 올해 몇이냐?" "예순 하나입니다." "나보다 나가 더 많은데 철이 언제 들꼬?" 회초리를 휘두른다. 어이된 까닭인지 하나도 안 아픈데 눈물이 쏟아지고 서러웠다. 골목길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한참 후 누나가 다가 왔다. "칠성아" "누야 왜!" "지금부터라도 잘 해 드리면 대는 거야" "정말? " "그래, 다가오는 주말에 우리 육남매 함께 찾아 가자." 그래서 나는 동생들한테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고기도 사고 불판도 사고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주말이 왔다. 모두 함께 고향집을 찾았다. "빨리 안 오고 머하노" "오빠야 숨이 차서 못 띠겠다. 좀 싰다 가면 안 대나" "어이구 답답해라" "그러면 쓰나 어린 동생들 잘 데리고 가야지" 우여곡절 끝에 정든 고향집에 도착했다. "엄마 저들 왔어요!" 마당에 들어서며 모두들 합창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만면에 웃음을 띄고 문을 열고 나오실 텐데 현관문은 닫혀 있고 인기척이 없다. "엄마 어데 갔노?" 막내 동생이 금새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우씨 필리핀서 모처럼 엄마 보러 왔는데" 그 위의 동생이 투덜댄다. 마실 가셨나 찾아 나섰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잡고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단다. 그러다가 순구네 엄마를 만났다. "순구네 엄마요, 우리 엄마 어데 가셨는지 알아요?" "이사 갔자나?" "예?" "벌써 오래 댔는데?" "어대로 갔어요?" "저기 늦은목 뒷산으로" 순구 엄마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노란 잔디 그리고 할미꽃이 피어 있는 산소였다. 맥이 빠진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런데 옆에서 서서 계시던 순구 엄마 얼굴이 우리 엄마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마디 하신다. "일에는 다 때가 있는기라"  
568 샴/최형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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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 2017-07-31
17.08월 86호소설 샴 - 최형심 나는 그와 한 몸이다. 문제는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다. * 연못이 있다. 그 아래 바다가 흐른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안다. 빗방울이 나무의 기억을 털어내고 있다. 저마다 서로의 기억을 버린 것들이 땅을 적신다. 나는 기억을 털고 연못 속으로 뛰어내린다. 연못은 깊다. 나는 끝없이 가라앉는다. 눈을 떴다. 나는 양수 속에 있다. 여기는 우리의 바다……. * 우리는 가슴 아래로 몸이 붙은 채 버려졌다. 그날을 전후로 나의 기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해졌다. 기억만이 아니다. 나의 감각 또한 더 없이 예민해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늘면 늘수록 그가 잊어가는 것도 그만큼 늘었다. 그는 그날의 불길 속에 시력마저 잃었다. 등이 붙어있었으므로 우리는 한 몸이나 결코 마주볼 수 없었다. 나는 자주 그립다고 말했다. 그는 자주 그 단어의 뜻을 잊었다. * 어머나! 어쩌면 좋아! 신문지를 들춰본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 좀 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낡은 박스 안, 피 묻은 거즈와 약솜들 속에서 하나의 살덩어리인 우리가 세상과 마주쳤다. 그들은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남녀가 한 몸이야, 여자가 남자를 보았다. 신고해,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십이월의 밤이었다. 곧 119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우중충한 계단으로 올라왔다. 깜빡거리는 형광등 아래 우리의 모습을 본 대원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쳤다. 웃어, 나는 그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나도 그도 웃어야 했다. 그러나 웃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울상이 되었다. 그래서 울었다. 웃으려고 했는데 울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한 가지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119대원은 우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우리를 앞뒤로 돌려보며 난처한 얼굴이 된 대원이 쓱 아랫도리를 살폈다. 이런! 119대원은 이렇게 말하고 코를 킁킁 들이마셨다. 이런! 이건 우리를 맞은 사람들의 인사법 같은 것이었다. 다시 이런! 이라고 외치고 그는 가지고 온 담요로 우리를 둘둘 말았다. 119대원의 품에 안겨 우리는 허름한 연립주택의 복도를 벗어났다. 우리가 담겨있던 더러운 박스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작은 별처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웃어, 내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 그는 울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싸구려 장식등이 내 눈물 속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 우리는 부활했으나 라면박스에 버려졌다. 병원 응급실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글쎄요, 생후 한 열흘? 아니 한 달? 아니 일 년? 어쩌면 천 년 쯤, 의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뭐, 그런 대답이 다 있어요? 119대원이 한심한 듯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샴쌍둥이는 성별이 같아야 하는데 얘들은 남녀라니까요, 썀 쌍둥이는 일란성 쌍생아에게만 발생하는 거거든요, 의사가 말했다. 네? 119대원이 인상을 썼다. 남녀가 샴쌍둥이가 될 확률은 당신 고양이가 어느 날 햄릿을 읊을 확률과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죠, 의사가 말했다. 그럼 고양이도 햄릿을 읊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건가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야옹, 119대원이 눈을 껌뻑거렸다. 내 말은, 의사가 말을 더듬으며 두툼한 책을 꺼내 읽어주었다. 썀쌍둥이는 서로 다르게 발달하던 두 개의 개체가 달라붙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였던 수정란이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렇다고요. 아, 그래요? 얘들 어떻게 해야 하죠? 갈라서 둘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119대원이 물었다. 허? 샴쌍둥이 분리하는 게 생일케익 나누는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에요, 의사가 말했다. * 다음날 의사가 법학자와 그의 제자를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이들은 등이 서로 붙은 형태의 샴쌍둥이인데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우리를 본 법학자의 제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선생님, 샴쌍둥이의 권리능력은 어떻게 되는 거죠? 한 사람인가요, 두 사람인가요? 하나의 육체 안에 서로 다른 자아가 공존하는 다중인격장애와는 구별의 실익이 존재하나요? 샴쌍둥이 중 한 사람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는 항상 공동불법행위가 되나요? 다른 한쪽은 항상 방조자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 선생님? 또 만약에 한 사람이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면 다른 한 사람도 감옥에 가야하나요? 법학자가 갑자기 손을 들어 제자의 말을 가로 막았다. - 미친놈!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갑자기 텅 비었다. 그 다음날 의사와 법학자는 철학자를 데리고 왔다. 우리를 본 철학자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현신이라니!” 의사가 우리의 몸을 더듬는 동안 철학자는 우리를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날 한 시인과 함께 나타났다. 시인은 우리를 보더니 다시 다음날 연극배우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의사와 법학자와 철학자와 시인과 연극배우는 우리를 에워쌌다. 그리고 연극배우가 선포하듯 시를 낭송했다. -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기원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침을 삼켰다. - 옛날에는 자웅동성의 인간이 있었고 둥그런 등과 원형의 옆구리에 네 개의 팔과 다리가 있었네. 둥그런 목에 두 얼굴이 반대방향으로 보는 머리가 있었으며 성기도 둘이라네. 원 모양으로 굴러가기도 했던 이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들까지 공격했다네. 인간의 오만함을 참을 수 없어 제우스는 마가목 열매를 자르는 사람처럼 또는 달걀을 말총으로 나누는 사람처럼 인간을 둘로 나누고 두 다리로 걷도록 했네. 인간은 자신의 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팔로 상대방을 껴안고 얼싸안으며 한 몸이 되기를 원하며 굶주림 또는 무기력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네. 반쪽이 죽으면 살아남은 반쪽은 남녀를 불문한 다른 반쪽과 결합하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멸종할 지경에 이르렀다네. 자웅동체일 때는 성기가 바깥으로 향했기 때문에 인간은 매미처럼 땅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제우스는 인간의 성기를 앞으로 향하게 해서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결합하여 자식을 낳게 했다네. 인간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태초부터 인간의 본성 속에 있었는데 둘을 하나로 하는 결합이 인간의 상처받은 본성을 치료했다네. ‘에로스, 그 심연의 비밀’ 중에서, 김백겸,이라고 연극배우가 말하고 모두가 울었다. * 그리고 우리는 병원을 나왔다. 모두가 슬퍼해야 했지만 아무도 슬프지 않았다. 병원을 나온 후 우리는 임시로 한 개척교회에 맡겨졌다. 타일 몇 개가 떨어져나간 외벽에서 삐뚜름한 붉은 십자가가 깜빡거리는 상가건물 6층 66호, 꼬질꼬질한 방석 위에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했다. 주여, 죄인을 용서하소서, 우리를 보며 울부짖는 한 떼의 사람들을 보고 그는 까무러치듯 울었다. 얇은 칸막이에는 집나간 목사 아내의 사진이 아무도 모르게 흔들렸다. 그 아래서 표정 없는 딸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목사는 딸을 거칠게 밀어내고 샴쌍둥이를 검색했다. 샴쌍둥이는 지명에서 비롯됐다, 19세기 초 창 엥과 분커라는 중국계 형제가 태어난 곳이 태국의 옛 지명인 샴이다, 버넌이라는 사람은 이들을 '샴쌍둥이'라고 이름 짓고 광대를 시키며 돈을 벌게 했다, 이건 신의 뜻이야!, 인터넷을 뒤적이던 목사가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우리를 내세운 신의 사업은 대박을 쳤다. 헌금함에 차곡차곡 돈이 쌓이고 목사는 곡마단의 주인처럼 돈을 벌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근처여서 더 그랬다. 이 정도 벌이면 6개월만 모아도 교회 하나는 새로 짓겠어, 그가 뿌듯하게 장부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난 쟤들 싫어, 언제나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리던 목사의 딸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흥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에게 감명을 받은 누군가가 신문사에 전화를 했다. 기자들이 찾아왔다.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여전히 웃어야 했으나 내내 울었다. 다음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다. 구청복지과에서 사람이 나왔다. 난 쟤들 싫어, 언제나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리던 목사의 딸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목사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었다. 우리는 구립 복지원으로 옮겨졌다. 복지원에 맡겨진 다음날 그는 등 뒤에서 할렐루야를 외쳤다. 할아버지래, 보모가 말했다. 옹알이치곤 특이하군, 봉사 온 여학생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그의 발음이 나날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 이 품 저 품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무도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잘 자랐다. 복지원 원장은 우리에게 님과 남이라는 이름을 각각 붙여주었다. 그런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센스 있음에 스스로 탄복해서 자주 사람들에게 우리 이름을 자랑했다. - 님과 남은 한 몸이야? 어때?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을 빌자면, 그는 좌절했으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사실 그는 배가 좀 거대했다. 그는 때때로 지역신문에 전화를 했고 기자들에게 우리 한 달 식비보다 더 비싼 저녁을 샀다. 가끔씩 그는 지역신문의 소식란을 장식했다. 그럴 때면 사진에 찍히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안아야 했다. 기자들이 가고난 후 그는 살가죽이 쪼그라들도록 비누로 손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그런 날 우리는 구석에서 오랫동안 손가락을 빨았다. * 나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몸이 자라는 속도는 너무 더뎠다. 우리는 옆으로 누워 자주 뒤척였다.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본지 천년도 더 된 것 같았다. 그래 정말 어쩌면 천년도 더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날 그가 중얼거렸다. 기억하는거야? 내가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눕는 바람에 나도 돌아누워야 했다. 나는 때때로 엄마였던 여자를 기억했다. * 그는 자주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엄마에게 가면 엄마의 손님이던 아저씨가 많이 컸다고 나를 한 번 안아 보자고 했다. 그 남자는 내 몸을 만졌다. 엄마였던 여자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나를 낚아챘다. 자식은 다 부모 따라 가는 거야,라고 그 남자가 말하자 엄마는 우리에게 저녁으로 먹다 남긴 볶음밥을 주었다. 나는 날파리가 앉아있던 밥을 먹었다. 그는 날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잘 먹지 않았다. 내가 날파리를 쫒으며 입을 벌릴 때, 그의 하얀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작고 여리고 예민했다. 저 자식은 주제를 모른다,고 엄마였던 여자는 자주 분노했다. 하얀 뺨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갔다. 그럴 때면 엄마였던 여자의 새하얀 피부가 보랏빛으로 빛났다. 나는 엄마였던 여자의 길고 가느다란 팔이 그리는 포물선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여자의 보랏빛 팔은 느린 화면처럼 움직였다. 그는 울었다. 그는 언제나 울었다.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울고 엄마에게 맞아서 울었다. 아니, 어쩌면 웃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랬다. * 엄마는 자주 편지를 받았다. 엄마는 아빠가 중국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모들, 그러니까 엄마의 동료들이 우리에게 아빠는 교도소에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교도소가 중국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또 어느 날 엄마의 손님들은 엄마가 몸 파는 여자라고 했다. 엄마의 몸은 팔아도 줄어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머리를 파는 것 보다는 그래도 몸을 파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머리는 딱딱했지만 엄마의 몸은 부드러웠다. 어느 날은 아빠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 중국은 모든 것이 다르구나,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그 문장을 우리에게 읽어주며 엄마는 픽, 웃었다. 우리는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편지는 중국에서 아빠가,로 끝났다. 그날 엄마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새벽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엄마, 오줌이 마려워, 예민한 그가 뒤척이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야, 너는 지 애비 닮아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이제 날 그만 좀 들볶아, 여자가 그의 하얀 목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그는 잠이 덜 깬 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흔들렸다.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 지긋지긋한 비극에서 독백은 항상 너무 길었다. 엄마였던 여자는 귀를 막고 쓰러졌다.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그만 해, 여자가 우리를 향해서 울먹이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우리는 요의가 싹 가신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안은 항상 한 여름이었다. 때로 한 겨울이었다. * 어느 날 우리는 공사장에서 산처럼 쌓인 스티로폼 더미를 발견했다. 우리는 밤을 틈타 그것들을 집으로 날랐다. 연탄재가 버려진, 뱀처럼 요리조리 굽은 골목을 지나왔다. 텅 빈 살구색 연탄아궁이가 눈에 들어왔다. 베니어합판으로 조각보를 깁듯 붙여놓은 벽이 보였다. 이어 군데군데 함석판으로 때운 벽과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귀퉁이가 깨진 슬레이트 지붕에서 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집이다, 그의 말에 귀가 환해졌다. 한 층 한 층 높아져 가는 스티로폼 더미를 바라보며 우리는 감격했다. 침대가 생겼어,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단어를 말했다. 침대. 기압이 낮아진 날처럼 검고 긴 그의 속눈썹이 젖었다. 눈꺼풀이 살풋 내려앉았다, 단 한 방울의 눈물을 떨구기 위해. 나는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는 하얀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정성들여 씹었다. 가늘고 순결하고 신경질적인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첫눈이 내렸다. 스티로폼처럼 하얀 밤이었다. 우리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눈 오는 풍경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스티로폼 침대 위에 올라가 꼭 껴안았다. 저 아래 냉골보다 그의 체온이 좋았다. 우리가 껴안은 곳에서 코딱지만 한 유리창이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더 세게 껴안았다.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토끼털처럼 부드러워졌다. * 다음날 우리는 새하얀 침대에서 일어나 새하얀 세상으로 나갔다. 새벽은 하얗고 발목이 시린 경험이었다. 그날 엄마는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했다. 우리는 눈 위를 굴렀다. 뛰었다. 다시 굴렀다. 그러다 눈을 뭉쳐 그를 향해 던졌다. 그는 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잇몸사이에 끼어 웃음소리가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가 웃음이라는 언어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커다란 눈덩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굴렀다. 하얀 바닥을 하얗게 굴렀다. 빙글빙글 빨리 돌아가는 건물과 거리와 가로등이 있었다. 그러다 나는 무언가에 탁, 부딪쳐 멈추었다. 아직 채 둥글어지지도 않았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 이게 누구야? 술에 취한 남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은 붉었다. 나는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 말린 몸을 풀었다. 저만치 그가 도르르 굴러가며 까르르 웃었다. 나는 행복한 그를 보다가 다시 술에 취한 남자를 보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빡였다. - 엄마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엄마의 손님이었다. 얼마나 컸나 나를 만져보던 그 손님이었다. - 그래? 집이 어디야? 나는 저만치 멀어져온 집을 가리켰다.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집들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 여기서 이러고 놀면 위험해. 아저씨가 데려다 줄게.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누런 이를 드러냈다. 내 손을 낚아챘다. 나는 손을 뺐다. 엄마의 손님은 인상을 쓰더니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엄마의 손님은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 우리 집 쪽으로 향했다. 나는 소리치려 했지만 입이 얼어붙어있었다.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어버버, 나는 끝내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 우리들의 새하얀 세상은 끝장이 났다. 새빨간 피가 도르르 도르르 스티로폼 위를 굴러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을 흘러 하얀, 방금까지 하얗던 세상으로 흘러갔다. 남자의 눈은 붉고 나의 피는 따뜻했다. 세상은 하얗고 나의 피는 따뜻했다. 나는 깜빡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돌린 곳에 언제나처럼 그가 울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그의 하얀 얼굴이 납작해져 있었다. 유리창 밖, 그가 눈 온 풍경처럼 얼어붙어있었다. * 야, 이 개새끼야! 엄마였던 여자의 검은 사막 같은 눈동자가 곧 모래알처럼 바스라질 것 같았다. 남자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어차피 얘도 언젠가는 하게 될 텐데 뭘, 남자가 바지에 다리를 끼우려고 허둥대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였던 여자의 손톱이 남자의 등에서 부러졌다. 아이 왜 그래 씨팔, 남자가 엄마였던 여자의 손목을 꺾으며 소리쳤다. 엄마였던 여자가 짐승처럼 소리쳤다. 나는 무서웠다. 나는 구석으로 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속은 한겨울이었다. 토끼털처럼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몹시 그리웠다. * 기억나? 나는 등 뒤의 그에게 매일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자랐다. 너무 빨리 자라서 관절 마디마디가 자주 쑤셨다. 나는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그는 약은 먹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주 꿈을 꾸었다. 자주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키가 부쩍 자라고 있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이 자라는 몸 때문에 매일 아팠다. 이제 원장은 더 이상 카메라 앞에서 우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어느 날 원장은 카메라 앞에서 우리를 안다가 손목인대를 다쳤다. 원장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 온 후 우리는 골방에 갇혀 지냈다. 그러나 우리를 내쫒지는 않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상징이야, 인간의 죄악을 보여주러 신이 우리에게 보내신 거지, 원장은 목사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 했다.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러온 학생들이 열심히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서로의 몸을 지탱하기에 우리는 너무 지쳤다. 우리는 주로 누워서 지내기로 했다. * 그날 이후 엄마였던 여자는 열쇠를 채우고 일하러 나가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였던 여자가 일하는 동안 우리는 꼼짝없이 방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방안에 요강이 하나 더 생긴 것 빼고는 사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팠으며 여전히 방바닥은 세상처럼 차가웠다. 한때 우리는 나가서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럴 때면 그는 우리의 초라한 집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은 훨씬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닫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어, 그가 말했다. 둥근 이마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추웠다 정말 추웠다. 그 겨울 내내 추웠다. 그래서 우리는 침대 위에서 지냈다. 그 겨울, 냉골인 방바닥 위에는 버석거리는 우리들의 침대가 있었다. * 나의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으나 내가 흘린 피는 굳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엄마였던 여자는 돈을 요구했다. 나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벽처럼 꾸덕꾸덕 굳어가고 있었다. 엄마의 손님이었던 남자는 서운하지 않게 값을 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오고 있었다. 그는 하얀 손을 깨물며 누나 아파?, 아파?, 나도 아파,라고 중얼거렸다. 간호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구석으로 밀었다. 나를 실은 스테인레스 침대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곧 나는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환한 불빛 아래 누웠다. 안경을 낀 의사가 하얀 고무장갑을 낀 열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의사의 눈도 붉었다. 그것은 나의 피 때문이라고 생각하려는데 잠이 들었다. * 나는 실밥을 풀었고 엄마였던 여자는 두둑한 돈뭉치를 셌다. 침을 퉤퉤 뱉으며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돈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네, 그리고 다시 돌아갔다. 아이 씨, 중간에 숫자를 까먹었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네, 숫자는 항상 거기에서 멈췄다. 뭐야? 그 다음이 뭐였지? 엄마였던 여자는 사실 열다섯 너머의 숫자를 셀 줄 몰랐다. 그녀의 오빠가 그녀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던 날, 그녀는 열다섯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자주 자해를 했는데 주로 머리를 찧었다고 했다. 그래서 덕분에 열다섯이 넘어가는 숫자는 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여자는 그 이후의 삶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이상한 계산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십오진법이었다. 세상에 없는 계산법으로 그녀는 세상을 쟀다. 그러니까 여자는 열넷에서 멈춘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열넷까지 셌다. 그런 식으로 계산을 했다. 나는 물었다. 열넷에서 멈추는데 왜 십오진법이냐고. 엄마였던 여자는 화를 버럭 냈다. 야 이년아, 이진법도 빵부터 세잖아, 십진법도 빵부터 세잖아, 빵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빼냐? 빵 그래 빵, 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빵……. 여자의 십오진법은 항상 울음으로 끝났다. * 우리는 그 겨울을 스티로폼 침대 위에서 보냈다. 단단히 잠긴 문 안은 더 없이 추웠다. 우리는 꼭 껴안았다. 그의 가늘고 포동포동한 팔이 내 목을 감았다. 목도리야? 내가 물었다. 그는 응, 대답했다. 분홍색 손바닥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목을 더듬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허리를 더듬었다. 우리는 서로의 팔을 감았다. 우리는 서로의 다리를 감았다. 우리는 배를 더듬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몸뿐이었다. 서로의 안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따뜻해졌다. 그럴수록 겨울은 더 혹독했다. * 우리의 몸은 어느새 부쩍 자라있었다. 원장은 우리가 거인이 될까 두려웠다. 우리는 먹고 잤다. 자고 나면 뼈마디가 훌쩍 자랐다. 우리가 자랄수록 원장의 걱정도 커져갔다. 우리는 덩치가 이미 열서너 살짜리 아이만큼 자라 있었다. 십 개월 좀 넘었다더니 열 살도 넘은 것 같아, 어느 날 봉사활동 나온 중년여자가 소리쳤다. 그 중년여자는 한참 진주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결심이 선 듯 우리를 벗겼다. 막 가슴이 생기려고 하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즈음 우리의 몸에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함께 화장실에 가고 함께 목욕을 할 때마다 스물 스물 등 뒤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가 밤마다 휴지를 잔뜩 말아 쥐고 무언가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그가 돌아서 오줌을 눌 때마다 부끄러움에 귀를 닫아야 했다. 목욕을 위해 옷을 벗어야 할 때는 등이 붙은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비누거품을 말아 쥐고 슥슥 아래를 닦을 때마다 나는 그가 묻힌 비누거품이 내 비밀스런 영역으로 넘어올까 침을 삼켰다. 우리가 목욕봉사에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은 너무 어려 몸을 가눌 수 없어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몸이 부쩍 커진 이후 목욕봉사는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원장은 목욕봉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포기할 줄 몰랐다. 그 중년여자는 남편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우리를 목욕시키기를 원했다. 물론 봉투를 받은 몇몇 사진기자들을 위해서 욕실문을 활짝 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서 터지는 플래시들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 우리는 서로의 체온에 기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더 이상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들 수 없을 만큼 파고들었는데도 겨울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였던 여자의 벌이는 그즈음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내 치료비로 받은 돈은 곧 바닥이 났다. 여자는 그 돈으로 코 수술을 했다.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다짐을 하던 손님한테 얼굴을 한 대 맞고는 그만 코가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였던 여자는 코의 보형물을 빼고는 며칠을 끙끙 앓았다. 그 바람에 일을 못하게 되자 안 그래도 밀린 방세는 더 밀렸다. 결국은 수도도 끊어지고 전기도 끊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 여자는 진통제를 탈탈 털어 먹고 일을 하러 나갔다. 일을 나가기 전에 우리를 위해 초를 한 자루 사왔다. 아껴 써, 그게 우리가 지상에서 그 여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밖에서 문을 잠갔다. 우리는 어두워오는 판잣집에 남겨졌다. * 중년여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매니큐어의 반짝이는 펄이 불빛에 흩어졌다. 우리는 부끄러워 최대한 몸을 말았다. 무슨 현대미술작품 같군, 중년여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차가운 물을 한바가지 확 끼얹었다. 우리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중년여자는 마치 물건을 닦듯 우리를 닦았다. 카메라의 불빛이 우리를 낱낱이 보고 있었다. 우리가 몸을 말면 말수록 잘 관리된 중년여자의 손은 더 신경질적으로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중년여자는 수건으로 우리의 사타구니를 벅벅 밀었다. 아 씨, 그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중년여자를 거세게 밀쳤다. 중년여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중년여자는 카메라들을 향해 열려있던 문을 쾅 닫았다. 중년여자가 다시 손을 들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만, 그만 우리를 놔줘요, 나는 중년여자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중년여자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 손을 뿌리쳤다. 추악한 게 어딜! 전생에 뭔 짓을 했기에 이런 해괴한 꼴이야! 중년여자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울컥할 수 없을 만큼 서러웠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당신들이 뭘 안다고 ……. 그는 울음을 그치는 대신 이렇게 중얼거렸다. 닥쳐! 이번에는 중년여자가 아니라 내가 소리쳤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숨죽여 흐느꼈다. 중년여자가 찬물을 확 끼얹더니 일어났다. * 밖은 청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희고 세상은 어두웠다. 빛이 들지 않는 방에서 우리는 밖을 보았다. 잔잔한 불빛들이 부동항을 찾은 겨울 배들처럼 다정했다. 그는 입으로 뿌우 소리를 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인천 연안부두에 갔던 때를 기억했다. 우리는 바다냄새와 연료가 타면서 나는 묘한 냄새가 어우러진 이별의 느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는 오지 않았다. 아빠는 중국에 있었다. 아빠는 오지 않았다. 아빠, 중국은 날씨 어때?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중국이라고 말하려는데 왈칵 울음이 나왔다. 바다는 우리를 알지 못했다. 바다는 우리 아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를 알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밤이 오도록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바다가 우리를 떠났다. 누군가 우리를 부랑자로 신고했던 것이다. 세상은 참 친절했다. * 어둠이 내리지 않아도 세상은 우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홑이불과 스티로폼 침대와 서로의 체온과 작은 창으로 난 세상의 풍경만을 소유했다. 밤의 무늬로 우리가 서로를 그릴 때 우리는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전기밥솥에는 언제 했는지 알 수 없는 누렇고 딱딱한 밥알들이 서로 엉켜있었다. 우리는 살얼음이 낀 페트병에 든 물을 밥통에 붓고 말아먹었다. 희멀건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나서 우리는 침대로 돌아갔다. 얇은 이불 밑으로 파르르 떠는 파르스름한 그의 손이 보였다. 나는 그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었다. 따뜻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우윳빛 국물이 입가에 다 마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몸을 밀착한 채 언제나처럼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 아래 동네에는 환하게 밤을 밝히는 전구들이 거리마다 깔려 있었다. 저 트리의 불빛들은 따뜻할까? 그는 작은 입술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돌아누워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교회에서 집 앞에 세워준 크리스마스트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넷, 나의 셈도 거기에서 끝났다. 이건 유전인지도 몰라, 나는 열넷에서 멈춘 나의 숫자를 생각했다. 열네 살이 되려면 두 배는 더 살아야 했다. * 어쩌면 내일 열네 살이 될지도 몰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며 그가 말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내가 말했다. 떠나자, 그가 말했다. 어디로?, 내가 물었다. 엄마에게 가자, 그가 전생에서처럼 말했다. 그건 이생의 단어가 아니야, 아마 내일이면 너는 그 단어를 잊을 거야, 내가 말했다. 이러다 정말 열네 살이 되면 그때는 어쩔 거야?, 그가 말했다. 그럼 열네 살이 되는 거지, 내가 말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나도 딸려 일어났다. 나는 가야겠어, 그가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 우리는 열넷까지 숫자를 셌다. 이제 양초에 불을 붙이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열넷까지 숫자를 셀까하다가 멈칫했다. 그의 눈가에 고인 물기가 정말 곧 얼어붙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불꽃이 생겨난 성냥개비를 조심스럽게 심지로 가져갔다. 그의 눈동자 속에 작은 불씨가 생겨났다. 이제 따뜻해질 거야, 나는 자랑스럽게 성냥개비의 불을 흔들어 끄며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뚝 떨어졌다. 생명체를 가둔 작은 호박처럼 그의 눈물 속에는 작은 불꽃이 갇혀있었다. 거봐, 얼어붙어있던 눈물이 벌써 녹았잖아, 내가 말했다. 그는 말없이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추워, 그가 말했다. 아직도 추워? 응 추워. 그는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추워? 응 추워. 그는 몸을 말았다, 추워? 추워. 나는 무릎으로 기어가서 그를 꼭 껴안았다.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 발목이 따뜻한 꿈을 꾸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눈 쌓인 대륙을 걷고 있었다. 하얀 언덕과 은빛 바다와 하얀 털로 뒤덮인 북극곰들로 우리의 눈동자에는 하얀 점들이 돋아났다. 따뜻해, 내 귀에 대고 그가 속삭였다. 그의 입김이 따뜻했다. 그러자 우리의 하얀 세계가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독한 냄새가 순식간에 반쯤 빈 위장까지 가득 찼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불타고 있었다. 발밑을 타고오던 온기가 어느새 우리의 존재를 녹이고 있었다. 나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떠야 했다. 발이 불타고 있었다. 다리가, 팔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떠야 했다. 그의 발이 불타고 있었다. 그의 하얀 손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달팽이처럼 웅크린 자세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얼핏 그가 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우리는 불타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꿈도 불타고 있었다. 살갗 위에서 끈적끈적한 옷가지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겨울 내내 껴입고 벗은 적이 없는 옷을 벗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직 봄은 멀었다. 꽃은 피었다. 불꽃, 불꽃이었다. * 곧 봄이 올 지도 몰라, 그가 밤을 틈타 문을 열었다. 그는 걸었다. 나는 걸었다. 그래서 우리는 걸었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때로 그가 앞에 서서 걸었다. 그럴 때면 나는 뒷걸음질을 치느라 허우적거렸다. 때로는 내가 앞서 걷느라 그가 스텝을 놓치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밤에 걸었다. 대낮에 우리를 보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낮 동안 우리는 후미진 건물의 안쪽이나 기차역 구석에서 담요로 몸을 말고 지냈다. 낡은 담요에 싸인 우리들을 향해서 누군가는 가끔씩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거북처럼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곱이 낀 얼굴로 햇빛 속에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는 자주 찌푸렸다.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이 그의 하얀 얼굴에 드리워져있었다. 그는 담요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자주 바닥에 알 수 없는 문자로 무언가를 썼다. 그럴 때면 나는 등 뒤가 몹시 궁급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편지, 그가 대답했다. 어디로 보낼 거야?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울이 없는 나라, 아니 거울이 있다가 없는 나라,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우리의 여행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때로 물었다. 그는 자주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자주 소리 없이 울었다. 가끔 진눈깨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오소소 어깨를 떨었다. 나는 덩달아 떨리는 내 어깨를 어쩌지 못했다. 엄마, 엄마에게 가고 싶어, 그가 중얼거렸다. 질척거리는 거리에서였다. 엄마? 엄마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했었나?,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그건 그에게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어느새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한때 우리는 거기에 살았었다. 그러니까 그날 이전에……, 그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그 도시를 2킬로미터 정도 남긴 곳에 서있었다. 그날?, 내가 메아리처럼 되물었다. 그래 그날, 우리가 불길에 휩싸인 날, 우리의 살가죽이 불타버리고 맨몸으로 뒤엉켜 그곳을 빠져나오던 날……,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가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 전등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긴 복도를 가진 여인숙 같은 건물이었다. 발밑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낡은 실내화를 질질 끌며 노파가 앞서가고 있었다. 복도를 따라 줄지어 있는 방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있었다. 침침한 실내에는 깊은 숲속 같은 냄새가 났다. 그 복도 끝에 우리의 과거가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끝까지 우리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발끝이 저렸다. 그는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뒤로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허둥대던 내 손이 잡은 것은 단단하게 굳어있는 그의 근육이었다. 나는 낯선 그 감촉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복지원을 떠나온 사이 그는 부쩍 자라 어른이 되어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는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뚜벅 뚜벅 뚜벅 뚜벅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그의 걸음은 복도 끝에서 멈췄다. * 여자는 늙고 추한 모습이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는 두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를 그렇게 불렀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돌아섰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여자와의 대면을 받아들였다. 아빠는 중국에서 왔어? 나는 기억나지 않는 존재를 더듬어 기억하려고 했다. 나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손톱으로 입술을 잡아 뜯었다. 내가 입술을 뜯기 시작하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자는 갑자기 손가락을 쫙 폈다. 손가락마다 첫마디가 모조리 잘려나가 있었다. 아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응? 그럼 중국은 다 뭐야? 아니지, 감옥은 다 뭐야? 나는 물었다. 오빠야, 여자의 눈이 허공을 보는지 나를 보는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멈췄다. 뿌리를 더듬는…… 흙 속의 잠…… 나무에는 싹이 트고…… 두 개의 가지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향해 여자가 띄엄띄엄 단어들을 쏟아냈다. * 우리를 안내한 노파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엄마였던 여자는 자해를 했다고 했다. 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고 노파 집의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잡고 아파, 너무 아파,를 외쳤다고 했다. 사람들은 달아났다고 했다. 여자는 날마다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잘랐다고 했다. 그의 촉감을 낱낱이 기억하는 손가락들이 쑥쑥 자라는 꿈을 매일 매일 꾸었다고 했다. 손가락들이 어느 날 나를 꿰뚫고 말거야,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했다.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의 마디들이 먼저 차례로 잘려나가고 오른손 손가락들이 서툴게 잘려나갔다고 했다. 여자는 피 흘리는 손가락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 했다. 겹겹이 나의 입술에 묻은 그 이름을, 그 입술을, 그의 체온을, 나를 위해 하얀 생일 케익을 훔치던 그 손을, 생일케익을 빼앗은 기름 낀 뱃가죽을 케익 대신 반으로 갈라버린 그의 피를, 그를 지우고 싶어, 여자는 입술마저 잡아 뜯었다고 했다. 여자가 서있는 주변이 노을처럼 붉게 번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여자는 점점 더 멀리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엄마였던 여자 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주로 입시를 앞둔 부모들이거나 결혼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여자의 공허한 눈이 가리키는 방향은 틀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노파는 엄마였던 여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고 했다. - 애들이 있었는데 불타서 죽었대. 그것 때문에 충격이 컸나 봐. 언젠가는 상상임신을 한 적도 있었지. 죽은 아이들이 뱃속에서 뒤엉켜있다나? 글쎄 상상만으로 배가 엄청나게 부풀었다니까. 그래서 배를 갈랐는데 거기에는…….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아무 것도 없었어. * 아물지 않는 겨울풍경 속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눈썹의 윤곽을 더듬고 있었다. 추워, 그는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하나의 빛깔과 하나의 숨결과 하나의 요람 그리고 하나의 죽음, 그는 웅얼웅얼 라마승처럼 중얼거렸다. 오래된 숲으로 향하는 것들은 모두 외눈박이들이야, 그가 엄마였던 여자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움직이는 미궁 아니, 자궁 같아, 나는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 아마도 그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침묵했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와 한 몸인 채 혼자라는 사실에 오싹해졌다. 서로의 몸을 파고들었던 자리에는 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이따금 금속성 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내부에서 오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탯줄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그가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내부를 순환하고 있는 그의 피와 그의 목소리와 그를 향하는 나의 생각들을 생각했다. 내부에서 오는 신호음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가 완강한 감정으로 나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이 세계가 우리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어둠이 다가와 나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누가 한 줌의 별을 뿌려 우리를 기억해줄까, 나는 눈을 비볐다. * 끼이……………………………………………………이……………………………………이…………………………………이………………………끼……………이…………………………………이……………………………………이…………………………………………………………………………………………………………………이……………………………………이…………………………………이……………………………………이………………………………………………………………………………………………………………………………………………………………………………………………………………………………………………………………익……………………. * 기차가 섰다. 그의 몸이 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예리한 칼날에 손을 베일 때처럼 처음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는 통증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불에 타던 그때처럼 온몸으로 데굴데굴 구르며 파르르 떨었다. 머릿속은 아득해지고 이내 통증으로 점점 머릿속이 비어갔다. 나는 떨리는 눈꺼풀로 저 멀리 굴러가는 그의 몸을 순간, 보았던 것 같았다. 반 바퀴쯤 구르고 고통에 일그러진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나와 마주쳤다. 때마침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는 한때 한 몸이었던 나를 막막한 시선으로 넘겨다보았다. 어딘가 엄마였던 여자를 닮아있었다. 순식간에 눈발이 거세지고 굉음을 내며 기차가 섰다. 더 이상 그는 보이지 않았다. 새파란 기차는 어둠 속에 멈춰 선 채 이편과 저편으로 나뉜 피 흘리는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은 날리고 분계(分界)를 가지게 된 두 세계가 고통 받고 있었다. 꼭 잡고 있던 나의 손아귀가 저절로 열렸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몇 가닥 바람에 날렸다. 눈발에 쓸려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살아있는 신화였다면 지금의 우리는 죽어가는 현실인가. 그가 있던 자리가 흥건하다. 나대신 눈물 흘리는 등짝이라니, 멀리 때 늦은 크리스마스의 캐럴이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그리움으로 분열하고 있는 중이다. 무심히 눈이 내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약력 및 주소 성명 : 최형심 약력 : 2008년 『현대시』등단.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수상.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수상. 2014년 『시인광장』시작품상 수상. 전화번호 : 010-4314-5114 메일주소 : elqut@hotmail.com  
567 촉/노정희 file
편집자
1836 2017-06-01
17.06월 85호 수필 촉 여자는 예민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하다. 비가 올 것 같으면 뼈마디가 쑤시고 기온이 내려갈 것 같으면 발목이 시리다. 그뿐인가, 남편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촉’이라는 범상치 않은 감각기관은 늘 고주파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요즘 대주 大主 의 행동이 이상타. 이 추위에, 더구나 저녁때에 손수 세차를 하는가 하면, 일요일 저녁에 모임에 간다며 바지에 칼날을 세운다. 어떻게 할까, 정면 돌파로 직진하면 미리 대응하여 막아설 수 있으니 우회해야 하나. 이 격랑의 수압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는지 생각이 생각의 끈을 문다. 격랑의 바닷물에 빠져 마냥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무언가 부유물이라도 잡아야 한다. 신년 빨간 날짜에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바다 쪽이 좋겠지, 남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지에서 사용할 용품과 먹을거리를 장만하러 막 나서는데 남편 폰에 카톡이 뜬다. 순간 감전되듯 찌릿하게 ‘촉’이 작동한다. 폰을 감추려는 쪽과 확인하려는 쪽의 몸싸움이 발생했다. 모른 체 넘어갔으면 여행이라도 다녀올 것을 기어이 사단이 난 것이다. -땅거미 지는데 세차하는 사람도 이상하거니와 일요일 저녁에 모임 하는 얼간이족이라니, 분명 구린내가 진동한다 싶더니만. 그래, 누군가와 열심히 카톡 중이었어? -지는 남자들과 모임도 하고, 문자와 전화도 잘도 하더라만 내는 카톡하믄 왜 안 되는데? -내는 모임의 사람인께 그라지요, 당신은 부킹해서 만난 사람이잖우. -뭔 부킹? -저번 주에 부킹한다고 이마빡에 써 붙이고 나가 더 만. 거기서 만난 여자 아이가? -그래, 맞다. 근데 그게 그거제, 니캉 내캉 뭐가 다르노?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칼바람을 안고 동네를 두어 바퀴 돌았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혼자 소주잔 기울이기도 그렇거니와 이슥한 밤 시간에 친구를 부르기도 뭣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춥다. 얼굴이 꽝꽝 얼어붙는다. 내가 젊은이도 아니고 오십 넘은 나이에 쓰러지면 ‘지화자’ 할 사람은 따로 있겠지. 집으로 돌아와 안방 문을 잠갔다. 문 열어달란다. 대화 좀 하잔다. 이 풍진 세상에 어찌 일부종사를 강요할 수 있으랴, 낙락장송이 되어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린 것도 아니고. 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다면 ‘들키지’ 말았어야했다. 변명을 늘어놓는다. 마누라는 매일 바쁘고, 집에 오면 아프다고 하고, 혼자 외로웠단다. 부킹은 딱 한 번 했는데 카톡을 주고받다가 마누라한테 들킨 것이다. 남자의 ‘아내에 대한 지능지수’는 얼마일까. 내가 놀러 다닌 것도 아니고 푼돈 벌겠다며 허리에 복대하고 다니는 것을 누누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본인 생각만이 우선이다. 하기야 나도 잘 한 것은 없다. 남편을 외롭게 방치한 대가라면 달게 받을 수밖에. 며칠 후, 남편은 친구들과 등산을 가기로 했다며 눈치를 본다. 등산하려니 웃옷이 낡아서 하나 장만해야겠다며 웅얼거린다. 카톡 사건도 있거니와 이제 모든 일이 의심 쪽으로 ‘촉’이 선다. 두 발로 다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마누라 속이는 일이야 눈 감고 아웅 하면 알 게 뭐람. 그냥 내가 선 자리에서 내 역할에나 충실하자. 옛말에도 있잖은가, 안에서 잘하면 미안해서라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그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남편이니 그 고마움을 상기하련다. 차가운 바람보다는 따스한 햇살로 감싸줘야지, 등산갈 때 멋진 윗도리 사 입혀서 대범한 마누라라는 느낌이 들도록 해야겠다. 아,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을 눈치 챈 큰아이가 귀띔한다. -남자에게 비싼 옷을 사 입히면 고마워할 겁니다. 그러나 현명한 여자는요, 남자에게 헌신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몸을 가꾸어 건강하고 예뻐져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본인이 비싼 옷을 사 입어야 남자의 관심을 끕니다. 고마운 여자보다는 사랑 받는 여자가 되십시오. 이럴 수가, 생각의 세대 차이를 느낀다. 곱씹어보니 딸아이의 말이 명쾌하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누에는 뽕잎만 먹고, 배추벌레는 배추만 먹으니 자기 수준에서 몰입하느라 생각의 폭을 넓히지 못했다. 먹고 보는 데만 집착하느라 ‘벌레’로서만 머물렀다. 나방이 되고 나비가 되고 비단을 뽑는 성장의 길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촉 觸 ’을 운운하며 행동에 ‘촉 鏃 ’을 세웠다. 내 삶을 돌보고 가꾸기도 버거운데 나이 오십 넘어서까지 남편 바깥일을 일일이 간섭하랴, 너그럽게 보아 넘기자. 작금의 사회생활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건전한 만남이라면 슬며시 눈을 감을 수밖에. 남편인들 고운 추억 하나쯤 안주머니에 감추어 두고 싶지 않으랴. 모든 근원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볼 일이다. 결혼생활 30년이 흘렀는데 어찌 배우자가 한결같기를 바라랴. 어찌 몸을 묶고 마음을 묶으랴. 단지 지나온 걸음이 남루하지 않기를 바라자. 이 겨울 지나기 전에 내안에 파란 촉 하나 심어야겠다. 이 밤 지나기 전에 내 가정에 환한 촉 하나 밝혀야겠다. 계간《문장》편집장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수필교실 강사 수필낭독 강사 수필집『빨간수필』,『어글이』 -ro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