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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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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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96 2014-11-03
559 카스트로 평화 서울 촛불 외1편/남효선 file
편집자
1886 2017-04-30
17.05월 84호 시 카스트로 평화 서울 촛불 피델 카스트로가 죽던 날 한반도 서울에 첫 눈이 나렸다. 첫 눈을 머리에 이고 사람들은 광화문에서 촛불을 피우고 횃불을 지피고 청와대로 향했다. 86명의 혁명시민을 이끌고 바스타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56년 전 쿠바 시민혁명을 세운 피델 카스트로가 죽던 날 한반도에서는 200만개의 촛불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향해 평화와 자유의 불길을 지폈다. 서울에 첫 눈이 나리던 날 헌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의 턱 밑에서 국민주권을 되찾는 200만개의 촛불이 축제의 시위를 펼쳤다.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을 버리던 날 서울 광화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섬마을 제주에서 아비는 아이를 무동태우고 어미는 딸애 손을 꼭 잡고 이웃끼리 동창끼리 친구들끼리 김밥 싸들고 따뜻한 유자차 끓여 새로운 공화국 새로운 나라 건설위해 ‘이게 나라냐’ 손팻말 흔들며 광장으로 청와대로 소풍잔치를 벌였다 촛불은 강물이 되고 파도처럼 출렁이며 마침내 혁명으로 내달았다 2017년 3월23일 팽목항 세월이 떠 올랐다. 3년 간 숨막히고 찢기고 갈래갈래 짓뭉긴 진실이 떠올랐다. 파면당한 대통령이 대검찰청에서 21시간의 조사를 받고 제 집으로 돌아간 다음날 국민을 오열과 분노로 수장시켰던 세월호가 떠올랐다. 파면당한 박근혜의 관저 7시간의 형형한 진실이 떠올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쪽같은 내 새끼 영문도 모르고 팽목항 천길 바다 밑으로 수장된 사백 여린 영혼들이 별처럼 떠올랐다. 기어코 광장으로 촛불로 되살아 나 침하나 안 바르고 국민을 적으로 몰고 친일에 빨갱이에 독재로 범벅이 된 지 애비의 복수를 갈며 국민을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편 가르던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에서 파면시키던 날 칠흑의 어둠을 살라먹고 파면당한 박근혜 정권의 모진 은폐와 금기를 뚫고 수 삼년 광장을 떠돌던 시린 가슴패기들이 투명한 진실과 용기와 정의로 반짝 별처럼 사백 여린 영혼들이 떠올랐다. 1073일 칠흑의 바다 속에서 앗긴 희망과 꿈이 솟아올랐다. 1073일 이제 시작이다.  
558 빈 못 외 1편/남태식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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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5 2017-04-30
17.05월 84호 시 빈 못 그 날 밤 그 못 가의 숲을 나와 한하늘은 더 깊은 숲으로 갔다. 다 주겠다고 했던가, 다 주었다고 했던가, 토해내던 신음 끝에 갔다가 다시 온다고 했던가. 못에 연꽃이 피기에는 이른 철이었다. 꽃도 달도 없는 밤 숲에서 한하늘은 온 몸으로 꽃대를 받아 안았다. 사내는 반 잠을 잤다. 깨어서는 반 잠, 자면서는 반 깸. 탕 속에 빠진 듯 사내는 낮밤 없이 젖었다. 꿈속에서 한하늘은 육중한 몸을 벗고 자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날도 반 잠의 꿈속이었던가. 갑작스레 몰려와 한하늘과 엉키는 한 떼의 구름이 웅크린 사내 위로 삽시간에 소나기를 퍼부었다. 구름을 터뜨리는 총성을 들었던 듯도 하고……, 사내는 해일처럼 일어나 반 잠을 꿈을 밀었다. 그 해 여름이 다가도록 그 못에는 연꽃이 피지 않았다. 숲을 이룬 너른 잎들은 바람결에 파도처럼 일렁거렸지만 한하늘의 소식은 실어 오지 않았다. 십 수 년 후 사내가 다시 그 못을 찾았을 때 그 못에는 마른 꽃대들만 꼿꼿 못을 지키고 서 있었다. 못은 꽃 안 피워 올린 지 십 수 년 쯤 된다고 했다. 무지개는 입치리처럼 그 아침 어떤 병의 예감도 없이 사내의 입술 왼 언저리에 입치리가 왔다. 그 날 사내는 한하늘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 전 한하늘은 사내에게 사내의 무지개가 되겠다고 했던가. 한하늘의 우물은 아늑했지만 그 때 이미 사내는 바람이었다. 붙박인 한하늘이 안으로 웅크리는 동안 사내는 가끔 돌아와 팔을 활짝 벌렸지만 마르지 않는 우물곁에서도 바람은 늘 더워서 조갈燥渴스러워 했다. 한하늘을 떠난 사내는 결국 제 무지개를 품었을까. 그 새벽 밤새 혼자 뒤척이던 한하늘은 웅크림을 풀고 우물을 벗어나 피가 빠지고 살이 녹고 뼈가 마르는 제 우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는 제가 바람이 되어 사내에게 들러 사내의 곁에 잠시 머물렀던 것일까. 혹 외려 사내가 한하늘의 무지개? 그 겨울 입치리는 자주 사내를 찾았다. 오거나 가거나 어떤 병의 예감은 없었다. * 약력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망상가들의 마을』외,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557 나의 사랑은 외1편 / 권순자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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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2017-04-30
17.05월 84호 시 나의 사랑은 나의 살이 녹아내려 물이 되었어요 나의 뼈가 녹아내려 물살이 되었어요 어머니 저는 굽이치는 파도에요 나의 꿈이 하얗게 부유하고 날아오르던 나의 시절이 낮아지고 낮아져서 바닷물길이 되었어요 나의 복사뼈는 미역사이로 헤엄치고 나의 사랑은 물결사이로 햇빛처럼 들이치고 있어요 봄꽃 낯설게 흐드러진 사월 단맛이 줄기를 지나 허공으로 뿌리내리는 즐거운 계절에 품어온 깊은 설움이 개나리꽃잎으로 흩날리고 있어요 나는 뛰어가요 달려가요 햇살처럼 날아가요 어머니의 나라로 신발이 쪽배처럼 흔들리는 오후 바닷길에서 노숙을 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잡아먹고 또 먹어요 물결을 밟고 가는 그림자 울음이 그렁그렁 파도를 넘고 충혈된 눈으로 노을이 노려보는 바닷가 자줏빛 슬픔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다가 소용돌이로 타오르는 나의 영원한 사랑이 깜깜하게 건너는 길목 물고기들이 등을 받치고 길을 만드는 하늘 길 나의 불꽃이 별똥별로 타오르던 꽃길, 꿈길 봄밤 복사뼈 사이로 꽃대를 밀어 올리는 바람 겨우내 고독한 시간을 참고 견디어 분노보다 뜨거운 걸음이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번갈아 이 세상에 생을 의탁하러 오네 물렁한 꿈이 헐거워진 몸속에 스며들고 흐느끼던 겨울은 독한 바람에 소리치다가 앙상한 울음을 피우네 악몽이 구름처럼 뭉글거리며 피는 밤 허공에 번지는 붉은 노래 가지마다 기억이 붉어질 때까지 단맛이 나무의 등뼈를 지나 푸른 눈동자를 지나 간절해진 손끝에 제 생을 펼치네 허공의 목숨을 먹이는 단맛 붉은 혀 수천 개 하늘을 향해 붉은 노래 부르네 후미진 언덕 얼어붙은 가슴마다 불을 놓은 향긋한 침략자 이 불편한 세상에 한밤중 어둠을 헤치고 잠을 깨우는, 슬픔을 재우고 고통을 희석하는 수많은 날개들 지친 발마다 향유를 바르는 수천 개의 붉은 손들 불안한 시간이 타올라 가장 뜨거운 입술로 가장 차가운 음성으로 봄밤 언덕에 한없이 부른 노래 뿌리를 달래어서 줄기를 흔들어서 잠을 깨운 노래들이 언덕마다 하얗게 피네 복사꽃 피네. 권순자 경주 출생.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 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Mother's Dawn』(『검은 늪』영역시집) 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556 경청 외1편/김인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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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 2017-04-30
17.05월 84호 시 경청 눈을 들어 눈과 눈 속의 이야기가 건너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요 외투를 벗어 놓은 몸은 15도 아주 조금만 기울여요 당신에게로만 가만히 입과 귀가 길을 내도록 내버려 두어요 내 눈 속의 당신과 당신 눈 속의 내가 서로에게 스며 번질 수 있는 허공에 길을 내어요 기울어지는 몸의 각도에 보이지 않는 나무 한그루 당신과 나만의 허공의 각도를 허락 합니다 노을, 번지다 나, 어느 한 생에서 지극히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오늘, 이 땅에서 찬란한 반짝임으로 다시 만난다 매끈한 너의 등허리에 사알짝 나의 둔부를 걸쳐 놓고 끊임없는 삶의 기적, 누추한 희망을 중얼거려 본다 바람처럼 가슴이 깊어지는 바닥 어디에선가 世世生生 노래해야 할 삶의 이유, 한 덩이 꽃으로 게워내는 빛나는 저녁나절 푸른 접변과 붉은 밑변의 둥근 힘이 끝내 우리가 되어야 하는 너와 나를 하나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전북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의식> 여름호에 <비, 여자>외 2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시작. 작품집으로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신림동 연가>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 외 공저 다수 전자우편 ingu8151@hanmail.net  
555 그 림 자 /고창근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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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 2017-03-31
17.04월 83호 소설 그 림 자 놈이 끼어 있는 자리는 늘 거북스럽다. 아니, 놈이 있는 자리뿐만 아니라 놈의 행동거지, 말투, 옷차림 하나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놈만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며 얼굴을 반이나 덮은 지저분한 수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뱉는 음담패설.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멋대로의 행동. 그는 평생토록 놈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식당을 나오자마자 골목길을 벗어난다. 화실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술자리가 끝날 때쯤 식당으로 갈 작정이다. 어제 그가 '그림사랑'회원들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무엇을 먹겠냐고 물었다. 물론 물은 건 예의였다. 그의 머리속엔 조용하고 쾌적한 일식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회원들 저마다 회장님 맘대로 하세요, 라고 했지만 놈은 달랐다. 내가 잘 아는 과부집이 있는데, 했다. 손두부찌개를 아주 쥑이게 잘 하는 데 있거든요. 회원들은 모두 그러자, 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과부집으로 정했다. 예상대로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옆테이블엔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놈이 미리 얘기를 한 모양인지 다행히 방을 차지하긴 했지만 홀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회원들이 둘러앉아 제대로 얘기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큰길로 나와 인도를 따라 걷는다. 술집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술에 취해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9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가로수를 붙잡고 토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썩었어. 푹 썩었어, 세상이. 인상을 찡그린다. 그는 술집이 밀집해 있는 거리를 벗어나자마자 슈퍼 앞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건다. 중1인 큰딸이 받는다. 저녁은 먹었니? 다정스럽게 묻는다. 예. 엄마 바꿔드릴게요. 딸애는 중학교에 올라가고부터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다. 사춘기려니 생각해도 마음 한 쪽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키운 녀석인데. 그는 딸애의 얼굴을 떠올린다. 제 엄마를 닮아 얼굴이 전체적으로 둥글고 살이 통통하게 찐 편이다. 그가 보기엔 달덩이처럼 예쁘기만 한데 딸애는 제 엄마를 닮아 못 생겼다고 늘 불만이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어도 딸애만은 반듯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6학년에 올라갔을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염색을 해달라는 거였다. 녀석이 직접 말한 게 아니라 아내를 통해서였다. 중학교 올라가면 못하니까 연예인들처럼 머리를 꾸며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딸애가 그런 요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딸애는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극히 모범생이었다. 그는 화를 내며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 염색을 하는 애들은 뻔한 애들이니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내가 한 번만 요구를 들어주자고 은근히 얘기했을 때도 그는 아내에게 역정을 냈다. 그때부터였을까, 딸애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다정스럽게 말을 걸어도 녀석이 먼저 피했다. 딸애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썩은 세상에 딸애만은 곱게 키우고 싶었는데 전혀 자신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 말씀 안 하세요? 갑자기 휴대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어, 전화 바꿨나? 그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다. 몇 번이나 말을 해도 대답이 없어서요. 그랬는가? 그는 헛기침을 몇 번하고 나서 말한다. 저녁은 먹고? 애들은? 그럼 먹었지요. 애들은 공부하고 있어요. 당신도 식사하셨어요? 아내는 살갑게 말한다. 아내는 말 그대로 현모양처다. 그는 그런 아내가 마음에 든다. 아내에게 조금 있다 들어가겠노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는다. 그는 특별한 일 외에는 집에 늦게 들어간 적이 없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12시를 넘기지 않았다. 회원들이 그가 없을 때 '범생이'이라고 부르는 걸 안다. 그는 그런 말이 좋다. 슈퍼와 치킨집이 붙어 있는 상가를 지나 화실 건물이 있는 왼쪽 골목으로 걸어간다. 아무 문제없는 집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유쾌하다. 하지만 막상 화실 앞에 도착하니 어쩔 수 없이 놈이 떠오른다. 그림 그리는 후배와 함께 화실에 나타난 놈은 처음부터 불쾌했다. 꽁지머리며 돼지털 같은 수염이며 몇 년간 세탁을 하지 않은 듯싶은 옷차림이 그랬다. 하지만 후배한테 그림을 배운 터라 아는 형이라며 회원으로 받아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후배는 30여 평의 개인 화실을 만들어 낮에는 자신의 그림에 몰두하고 밤에는 일반인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그도 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림 배우러 화실에 나왔다. 그림을 배우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활에 활력이 붙었다. 나이 사십에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게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학창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기에 열심히 했고, 1년이 넘자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게 되었다. 그 무렵 후배는 갑자기 일이 생겨 화실 운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림을 배우던 이들은 이대로 그만 둘 수 없다며 모임을 조직하고 돈을 거둬 화실을 계속 꾸려나가기로 했다. 이름을 '그림사랑'이라 하고 나이가 제일 많은 그를 회장으로 뽑았다.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직장인들이었고 결혼한 이들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들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처럼 정식으로 미대를 졸업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놈은 화실 구석에 생활공간까지 마련해 달라고 했다. 화실 청소 및 관리를 책임진다고 했다. 그는 자기와 동갑인 것을 생각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놈은 어느 무엇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기 싫어 혼자 산다고 신입 환영회 술자리에서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다음날 각목과 합판을 구해와 화실 한 쪽에 칸막이를 쳤다. 앵글로 침대를 만들고 간단한 살림도구를 가져왔는데 그 또한 가관이었다. 밥 그릇 하나에 수저 한 짝. 휴대용 가스레인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전부였다. 설거지를 화장실에서 했으니 더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그런 놈을 경멸했다. 될 수 있으면 놈이 없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퇴근하고 가면 언제나 놈이 있었다. 그림 또한 놈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의 그림은 음탕했다. 방금 전 술자리에서 놈은 술을 마시다 대뜸 회장님 백마 타 봤슈? 하고 물었다. 그는 불쾌하여 놈의 얼굴을 외면하는데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껄였다. 어떤 젊은 놈이 미국엘 유학 갔는데 말이여, 백마를 타고 싶었는기라. 그래서 그런 곳엘 갔는데……. 놈의 음담패설에 회원들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백인 여자보다 흑인여자, 그러니까 흑마가 더 좋은데 말이야. 더 쫄깃쫄깃하다고나 할까? 여자 회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렸다. 그는 이쯤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화장실 가는 척하고 식당을 나온 것이다. 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 옆에 있는 분전함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다. 놈의 그림은 보지 않으리라.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간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으로 사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놈의 그림은 안쪽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놈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저질 포르노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놈은 남녀 나신을 추상적으로 그렸다. 그가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그림 몇 점들이 다 그랬다. 남자의 나신, 여자의 나신, 소녀의 나신, 남자의 나신에 여자의 음부가 그려진 그림, 반대로 여자의 나신에 남자의 성기가 달린 그림. 서로 몸을 둥글게 말아 상대방의 성기를 물고 있는 태극 모양의 그림. 그는 놈의 그림을 경멸했다. 그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놈의 그림이 있는 쪽을 애써 외면하는데 갑자기 뭉크의 그림 몇 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업무가 밤 10시쯤 끝나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화실에 들른 날이었다. 회원들은 일찍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고 놈 혼자서 소파에 앉아 화집을 보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화집을 바라보던 놈이 그를 발견하고는 팔을 강제로 끌고 소파에 앉혔다. 이 그림 좀 봐요. 이 그림. 놈은 흥분하였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그가 내민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풍만한 엉덩이가 육감적인 알몸의 여자가 누르스름한 무엇을 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불쾌감으로 고개를 돌리며 일어서려 했다. 놈이 그의 팔을 잡았다. 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뻘겋게 달아 오른 얼굴에 광채를 발하는 눈은 흡사 청도에서 보았던 싸움하는 수소의 그것이었다. 놈의 몸에서 수소의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는 놈에게서 엉덩이를 옆으로 비켰다. 놈은 그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그림에 대해 중얼거렸다. 이 벌거벗은 여자는 소녀요. 아직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처녀지요. 소녀가 안고 있는 누르스름한 것은 해골이요. 오른쪽에 있는 외계인처럼 생긴 게 바로 태아요. 태아란 말이요. 왼쪽에 올챙이처럼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자요. 정자. 아……. 그림을 쥔 놈의 손이 떨렸다. 순간 그는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피부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 그림도 보시오. 이 그림. 그는 몇 장을 넘겼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 죽어있고, 중앙엔 나신의 소녀가 죽은 남자를 뒤로하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아……. 놈은 어떠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떤 힘에 눌러 다리를 뗄 수가 없었다. 놈은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며 그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침대 위의 빨간 깔개에 앉은 벌거벗은 여인. 빨간색 회색 등의 색깔이 어지럽게 칠해져 있는 배경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신의 여인.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 두 손으로 치부를 가리고 앉아 있는 소녀. 놈은 그림을 넘기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하, 숨을 크게 내 뱉기도 했다. 그는 그만 도망가리라 하며 망설이는데 놈이 책을 탁, 소리나게 탁자 위에 놓았다. 표지엔 MUNCH 라고 쓰여져 있었다. 난 말이요. 이 뭉크의 그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오. 그는 놈의 강한 시선을 피했다. 난 도대체 이런 그림을 이해할 수 없소. 그림은 일단 아름다워야 하오. 그는 겨우 말을 마치고 문으로 걸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그의 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놈이 벌거벗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뒹굴다 물감을 손에 짜 얼굴에 바르고 가슴 팔 다리에 발랐다. 그는 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봉두난발이 되었고 수염에는 여러 물감이 묻었다. 놈은 여러 색깔을 한 짐승처럼 보였다. 아니, 분명 짐승이었다. 놈은 계속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다 순간, 가슴이 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익숙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집으로 왔지만 꼬박 밤을 새웠다. 섬뜩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물감을 온 몸에 바르고 바닥을 뒹굴기라도 한 듯 가슴이 떨렸다. 며칠동안 화실에 나가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다. 그림은 아름다워야 해.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만족한다. 완성된 그림은 집 거실이나 방에 걸어두거나 친구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가 주로 그리는 그림은 풍경화였다. 들이 있고 산이 있는 그림. 물이 흐르고 물에 비치는 커다란 나무나 다리가 있는 그림. 그는 놈의 그림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치켜올린다. 놈을 경멸하는 것처럼 놈의 그림도 경멸했다. 더럽고 추잡한 놈. 음탕한 놈. 놈을 다시는 상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자신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밝은 불빛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 회원들의 그림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어두운 면은 더 어둡고 밝은 부분은 어두운 부분과 대비되어 사실감이 든다. 그는 문 쪽에 있는 자신의 이젤 앞에 선다. 놈과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문 옆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캠퍼스가 창문을 등지고 있어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우선 캠퍼스의 크기가 다르다. 자신이 그리던 것은 60호인데 이것은 90호가 넘는 것 같다. 또한 가로로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세로로 세워져 있다. 그는 천천히 그림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그는 그림을 들어 창문 쪽으로 돌린다. 여자의 나신 그림이다. 어둠 속에서 보니 붓 자국이 없어 더 추상적이다. 그는 옆에 있는 그림을 들어본다.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그리던 풍경화다. 다른 그림을 봐도 회원들이 그리던 그림이 맞다. 근데 유독 그의 그림만이 바뀌어져 있다. 그는 놈을 떠올리다 그림을 바닥에 팽개치고 놈이 그리던 장소로 뛰어간다. 놈의 이젤엔 침대에 드러누워 성기를 움켜쥐고 자위하는 사내의 그림이 놓여져 있다. 옆을 둘러 봐도 자신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돌아서다 멈칫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놈의 그림을 들어 창 쪽으로 가져간다. 황토색의 자위하는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악, 비명을 지른다. 그림 속의 사내는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놓자마자 그림이 바닥에 뒹군다. 캠퍼스 위의 그가 성난 성기를 움켜쥐고 자위하고 있다. 캠퍼스 위의 그는 눈을 감은 채 황홀경에 빠져있다. 수치심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캠퍼스 위의 그의 얼굴을 짓이기기 시작한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황토빛 상체의 가슴 부위에 불에 댄 듯한 흉터가 남는다. 캠퍼스 위의 자신의 얼굴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 되었을 때에야 그는 짓이기던 발을 멈춘다. 입에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성기와 엉덩이를 보자 다시 캠퍼스 위에 올라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두 밑창으로 비빈다. 숨을 몰아쉬던 그는 자신이 그리던 장소로 흐느적거리며 걸어간다. 이젤에 놓여 있는 나신의 그림을 머리위로 들어 벽을 향해 내리친다. 캠퍼스의 나무가 퍽,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캠퍼스에서 나신의 여자가 얼굴이 뒤틀린 채 기묘하게 웃고 있다. 캠퍼스의 나무가 부러지자 천을 떼어내 바닥에 놓고 그림의 형체가 완전히 변할 때까지 짓이긴다. 그는 놈이 그린 그림 전부를 짓이기다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그림 위에 엎어진다. 잠시 후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어 아래에 깔린 그림을 바라본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광활한 풀밭에서 성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남자는 자신이고 여자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의 얼굴이다. 그는 몸을 돌려 천정을 바라본다. 천정에서 놈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똑같은 놈들이 마치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아간다. 원시인들이 사냥감을 앞에 놓고 집단으로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는 자신도 놈과 함께 춤추는 것 같은 느낌이 언뜻 든다. 놈의 몸뚱이가 낯설지 않다. 언젠가 밤늦게 보았던 놈의 모습이 머리 속에 나타난다. 놈이 웬일인지 20여 일 동안 화실을 비운 다음 날이었다. 놈은 원래 밖에서 자는 날이 많기 때문에 며칠동안 모습이 안 보인다고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0여 일이 지나자 회원들 사이에 걱정스런 얘기들이 나왔다. 15일 정도 지나자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직접 찾아보겠다는 회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놈은 어디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오고 싶을 때 오는 놈이라 마땅히 어디 물어 볼 때도 없었다. 20여 일쯤 지났을 때, 그는 직장 일을 늦게 끝내고 1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다 화실 창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았다. 그는 놈이 돌아 왔구나 하며 그냥 지나치려다 이상한 예감에 화실로 갔다. 화실 문을 소리나지 않게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수많은 촛불이 켜져 있었고 놈은 벌거벗은 채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앞엔 벌거벗은 몸에 여러 색의 물감을 칠한 여자가 천정을 보며 누워 있었다. 여자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었다. 아이가 둘 딸린 주부인데 무척이나 수줍음을 탔었다. 놈이 그리는 그림은 황토색 바탕으로 여자 회원을 그리는 중이었다. 원래 그런 그림을 그리는 놈이라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앞에 모델로 누워 있는 주부 회원은 의외였다. 그 회원도 놈이 자리를 비운 동안 화실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 회원은 태연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누가 들어올까 두려운 생각이 든다. 누가 들어와 이 그림들을 본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모두 벗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는 쌓여있는 그림들을 바라본다. 살의를 느낀다. 사랑은 사람을 구속 시켜요. 언젠가 놈에게 한 회원이 결혼 안 하냐고 물었을 때 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제가 왜 결혼해요?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싫답니다요. 놈은 부러운 눈치를 보내는 회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가고 싶은 데 가는 놈의 자유가 회원들의 동경을 산 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치부했다. 자신의 화목하고 아무 문제없는 가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인간은 인간스러울 때가 가장 아름답지요. 자유? 그거 좋지요. 하지만 지나치면 추합디다. 그의 말이 끝나자 놈은 크게 웃었다. 인간스러움요? 그게 뭔데요? 가정을 위해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러 다니는 게 인간스러운 행동입니까? 한 사람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을 느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게 가장 인간스러움일까요? 그는 그림을 서너 개씩 들고 화실 뒤에 있는 담벼락 옆으로 옮긴다. 누가 들어오기 전에,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불태워야 한다. 그림을 다 옮기고 나서 다시 한번 더 화실을 둘러보고 담벼락으로 온다. 위에 있는 그림을 든다. 그림 속 자신의 배꼽에 라이터를 켠다. 파란 불꽃이 일며 순식간에 자신이 사라지고 없다. 불에 그을린 캔버스 중앙이 휑하니 뚫려있다. 순간, 가슴이 아리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는 느낌이다. 그는 분노로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그림 하나하나에 불을 붙인다. 순식간에 천이 없어지고 불에 그을린 캔버스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마지막 한 점을 들고 불을 붙이려다 그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에 걸려있는 붉게 물든 구름을 배경으로 수많은 그가 수많은 여자들과, 또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 그림이다. 멀리서 찍은 사진처럼 인물이 희미했지만 그 남자들이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직감으로 안다. 바다 속에서, 모래사장에서 수많은 그가 성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그는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다 잊혀졌던 어떤 장면 하나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놈이 회원으로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단합대회란 명목으로 회원 전원이 경북 영덕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회원들은 탄성을 질렀고, 그를 비롯하여 회원들 저마다 준비해간 화구로 바위로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그렸다. 아마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 좀처럼 이런 풍경을 그림으로 그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흥분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놈은 그림 그릴 생각은 않고 바다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서 혼자 깡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전 날 밤에 과음한 탓으로 심한 갈증에 눈을 떴을 때 놈은 방에 없었다. 아예 이부자리도 없었다. 함께 밤늦도록 바닷가에서 술 마신 기억은 나는데 같이 민박집으로 온 기억은 없었다. 창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놈은 웬 여자와 함께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었다. 무척 다정스런 돌고래 한 쌍 같았다. 수영 실력도 상당했다. 제법 멀리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수영을 하던 두 사람이 바닷가로 나오더니 길고 긴 섹스를 했다.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긴 채. 그는 수치심을 잃고 그들의 행동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한껏 달아올랐다. 그는 그림을 다시 들어 자세히 본다. 남자들은 분명 자기자신이다. 여자들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 얼굴을 그림 가까이 가져간다. 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 소리를 토한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모두 화실 회원들이다. 섹스 파트너 중엔 남자 회원도 있다. 아내는 없다. 섹스를 하는 형태도 다양하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하는 형상도 있다. 마치 동물 무리들이 아침해가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집단 교미를 하는 것 같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림 중앙에 라이터 불을 붙인다. 순식간에 수많은 그와 여자들을 삼킨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 같다. 그림이 다 타고 각목만 남자 그는 화실로 올라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다. 구석구석 뒤진다. 침대 밑에서 조각용 삼각칼을 꺼낸다. 날 끝을 오른손 엄지로 만져본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듯하다. 그는 삼각칼을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화실문을 잠그는 것도 잊고 계단을 내려간다. 식당 앞에 도착한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갑자기 딸의 얼굴이 떠오른다. 앞으로 딸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볼 것 같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홀을 가로질러 회원들이 있는 방문을 거칠게 연다. 놈이 보이지 않는다. 회원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다. 그…… 놈 어디 갔어? 그는 말을 더듬는다. 회원들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얘기를 계속한다. 그는 화가 나 방으로 들어가 고함을 지른다. 그 새끼 말이야. 털보 새끼. 어디 갔어! 회장님은 어디 갔지? 화장실 갔나 봐요. 그럼 슬슬 나가지. 회원들은 그의 말에 아랑곳없이 자기들끼리 얘기하다 일어선다. 그는 시청에 다니는 남자 회원의 멱살을 잡으려다 참는다. 나가서 얘기하지. 홀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여 회원들을 따라 밖으로 나와 계산대로 걸어간다. 놈은 화장실에 갔으리라. 밖에 나가서 보자. 계산대 앞에 서서 지갑을 꺼낸다. 얼마요?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은 아무 반응이 없다. 얼마입니까? 음성을 높인다. 뒤에는 회원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간다. 주인은 옆에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여기 얼마요, 마담? 그의 오른쪽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나자 그제야 주인은 반색을 하며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그도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놈이다. 그는 주머니에 든 조각칼을 만지작거린다. 팔만 칠천 원이네요. 주인은 놈에게 말한다. 그는 구만 원을 꺼내 주인에게 내민다. 주인은 받을 생각은 않고 놈만 바라본다. 놈이 만원짜리 아홉 장을 꺼내 주인에게 건넨다. 주인은 받아 삼천 원을 되돌려준다. 그는 불쾌감으로 주인을 노려본다. 주인은 아랑곳 않고 놈에게 자주 오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회장님, 돈 많이 안 나왔어요? 농협에 다니는 주부 회원이 놈에게 말한다. 뭐? 회장님? 그는 의아하게 놈과 주부 회원을 바라본다. 조금요. 2차로 노래방 갈까요? 좋지요. 놈이 먼저 나가고 주부 회원이 뒤를 따른다. 그는 주인을 향해 뭐라 한마디 하려다 밖으로 나간다. 회원들이 놈 주위에 몰려있다. 회장님께서 2차는 노래방으로 우리를 모시겠답니다. 농협에 다니는 주부 회원이 마치 빅뉴스라도 알리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우리 회장님은 언제 봐도 멋져요. 여자 회원이 놈의 팔짱을 낀다. 회장님, 사모님한테 전화 안 하세요? 늦는다고? 여자 회원의 말에 놈은 너털웃음을 짓는다. 우린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 구속하지 않아요. 늦게 들어오든 다음날 들어오든 상관하지 않아요. 역시 우리 회장님은 자유주의자! 병원에 다니는 아가씨가 놈의 팔을 낀다. 그는 어이가 없어 놈을 노려보다가 가까이 다가간다. 너 나 좀 보자. 그는 분을 삭이며 말한다. 하지만 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옆에 있는 여자회원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큰소리로 웃는다. 자, 갑시다. 밤새도록 놉시다. 놈은 평소의 습관대로 오른팔을 머리위로 휘어지게 들어올리며 유흥가가 밀집되어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이 새끼가. 그는 놈의 뒤를 따라가 어깨를 잡는다. 어?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놈의 어깨가 잡히지 않고 그대로 통과한다. 다시 달려가 뒤통수를 후려친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놈의 머리를 통과한다. 그는 걸어가는 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농협에 다니는 주부 회원이 그의 몸을 통과하여 놈의 뒤를 따른다. 남자 회원과 다른 회원들도 그를 통과해 놈을 따라간다. 이럴 수가. 그는 유흥가로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각칼을 만지작거리다 뒤돌아걷는다. 허방을 짚은 느낌이다. 어디로 갈까. 지금 심정으론 집으로 갈 생각이 없다. 순식간에 길을 잃은 느낌이다. 갈 데가 없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망설이다 화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소란스런 느낌에 눈을 뜬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잠시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화실이다. 소파에 누워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는 황급히 일어나 앉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회장님 왜 먼저 나오셨어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묻는다. 언제 왔는지 회원들 대부분 화실로 와 있다. “회장님이 가고 나니까 그만 흥이 깨져서 화실에서 차나 한잔 마시려고 왔어요.” 다른 회원이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농협에 다닌 회원에게 묻는다. “지금 노래방 끝나고 오는 길이에요? 난 피곤해서 잠깐 졸았나 봅니다.” 그의 말에 다른 회원이 말한다. “노래방에서는 그렇게 신나게 노시더니. 좀 쉬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회원은 물이 끓고 있는 커피포트 쪽으로 걸어간다. “내가 노래방에 갔었다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회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난 식당에서 그냥 바로 이리로 왔어요. 놈하고 갔잖아요.” “놈이요? 누구지?” 회원들은 의아한 듯 서로 바라보았다. “놈 몰라요? 저기 칸막이에서 생활하던 놈 말이요?” 응큼한 그림만 그리는 놈 있잖소, 라고 말하려다 침을 삼킨다. 회원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불쾌한 생각이 든다. “저기는 회장님이 사용하시는 공간이잖아요.” 회원들의 말에 마침내 그는 불컥, 화를 냈다. “왜 자꾸 사람을 놀리고 그래요.” 그는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뒤로 제키고 눈을 감았다. “이거 대추차인데 한 잔 드셔요. 마시면 술이 깰 거에요.” 회원의 말에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은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말하려다 급한 마음에 말머리를 돌린다. “여기에 있던 놈이 그린 그림 봤어요?” 그의 의심스런 눈빛에 회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림요? 무슨 그림요?” “놈이 그린 그림이요.” 그는 쿡쿡 찌르는 머리를 오른 손 엄지와 검지로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놈은 대체 누구에요? 아까부터 자꾸 놈이라 그러고. 그림은 또 뭐에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그 왜 있잖아요. 음탕한 그림이요. 놈은 맨날 그런 그림만 그리잖아요.” 그는 숨이 차서 씩씩거렸고 회원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탕한 그림은 또 뭐에요?” 그의 말을 종잡을 수 없다는 듯 회원이 물었다. “아.”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뭔가 속임수에 빠진 느낌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와서 외계인과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했다. 우선 집에 가서 푹 쉬고 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되돌아올 것 같았다. “잠깐만요.” 농협에 다니는 회원이 칸막이에서 점퍼를 가져왔다. “옷 놔두고 가셨어요. 밖에 추울 텐데.” 그는 회원이 건네주는 카키색 점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털보가 입던 옷이었다. 1년 내내 빨지도 않고 입어 속으로 욕하던 옷이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고 놈의 것이잖아요.”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왔다. 어둠이 와락 달려들었다.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 장편소설『누드모델』『존재의 이유』『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  
554 출가 /박종희 file
편집자
1648 2017-03-31
17.04월 83호 수필 출가 스님이 된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친구를 따라 절에 다녀왔다. 비구니 절이라 그런지 어느 것 하나도 제멋대로 놓여있는 것이 없었다. 화장실이며, 화단, 사방을 둘러보아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절 뜨락에 가을볕이 한 번씩 추임새를 넣을 때마다 가을이 조금씩 물들어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도 설쳤다는 스님의 이마 위에 여윈 햇살이 얄랑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겼는데 스님이 되어 있더라는 그녀를 친구도 10여 년 만에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애써 태연한 척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합장했다. 내 친구와 친구이니 나하고도 친구가 되지만 승복을 입은 그녀한테 감히 말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가을에는 구수한 황차가 맛이 좋다면서 스님은 물을 끓여 물식힘 사발에 부었다.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다루는 그녀의 단아한 몸짓과 섬세함이 한 눈에도 천생 여자 같았다. 스님이 따라주는 차를 입안에 궁굴리면서 오래전 내가 출가하던 때가 떠올랐다. 25년 전 나도 한 남자를 따라 출가했다. 태어나서 27년을 살던 집에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홀연히 떠나오니 시누이가 세 명 있었다. 남편의 동생이니 손아래지만, 체격이 좋아 남편이 동생처럼 보였다. 옛날 어르신 같지 않게 시어머니도 키가 크셔 시댁 식구들 사이에 내가 끼이면 작은 내 몸집이 더 작아 보였다. 어머니한테 새 며느리를 들이는 일은 말 잘 듣는 세탁기를 들여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어머니의 부엌은 폐업 신고를 마친 것처럼 어지럽고 냉기가 돌았다. 그때부터 시나브로 수행이 시작되었다. 집안에 행사가 있거나 명절날이면 나 혼자만 바빴다. 시누들이나 어머니는 부엌 근처에 얼씬하지 않고, 집안일은 당연히 며느리인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30년 가까이 다르게 살아온 낯선 집 주방에서 찬장을 뒤져가며 혼자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방안에서 나는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시누들과 어머니가 이야기하며 웃는 웃음이 벽을 타고 주방으로 들어와 금세 음식 냄새와 섞였다. 남편도 한편이 되어 내 존재는 안중에도 없으니 처음 몇 년은 도무지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해보지도 않던 큰일을 혼자서 하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데, 성이 다른 나만 외톨이가 되는 것 같은 소외감과 서운한 마음이 지친 몸을 더 고단하게 했다. 속상하고 서러운 생각이 들 때면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가 등 떠밀어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던가 싶어 자리를 박차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현실은 절박하고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했다. 시어머니가 쓰러져 자리에 누워계실 때는 정말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내 앞에 펼쳐지는 앞날이 마냥 부옇고 암담하기만 했다. 대, 소변 받아내고 밥 먹여 드리고 밤늦도록 이불빨래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야속하게도 아침은 빨리 왔다. 고되고 힘들기는 스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검정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장대비가 날카로운 철사처럼 마구 쏟아져 꽂히던 날, 무작정 집을 나섰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절 방에 누워있더라고 했다. 마음속에 원망이 없어진 후에 결정하라는 스님의 말씀에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머리카락을 삭발했다. 그날부터 그녀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준비하고 동료 스님들의 빨래와 고무신까지 뽀얗게 닦으며 손등이 터지도록 일만 했다. 일에 묻혀 다른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었다. 종일 육신을 부리다 밤이 되면 피곤함에 절어 곯아떨어졌다. 속세를 떠나온 지 서너 달쯤 지났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 삭발한 딸을 보고 그 자리에 무너앉던 어머니한테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모진 소리를 해 돌려보냈다. 사사로운 정에 얽히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괴괴한 절간에 딸 혼자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차마 발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어른거려,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새웠을 스님의 얼굴 위로 초라하기만 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스님은 인연을 맺는 것도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욕심과 원망을 버리고 자신을 내려놓으니 편안해지더라고 했다. 스님의 말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다. 결혼하고 줄곧 ‘내 집’, ‘네 집’하며 시댁과 친정을 철저하게 구분 짓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굳어진 시댁식구와 남편의 사고가 바뀌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한결 편안해지며 비로소 식구들이 가족처럼 눈에 들어왔다. 여자로서 며느리에게 마지막 자존심마저 보여야 하는 시어머님이 진심으로 안쓰러워지고, 시누이로밖에 안 보이던 남편의 여동생도 피붙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명절만 되면 병이 나고 입술이 부르트던 것도 우리 식구가 먹을 음식을 장만한다고 생각하니 몸도 가뿐해졌다. 옛말에 ‘딸은 남의 집 식구다.’고 하더니 꼭 나를 두고 한 말처럼 언제부턴가 시댁이 친정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시댁 사람이 되기까지는 녹록하지 않았던 삶과 소태처럼 쓴 날들이 많았다. 시집와서 한동안은 시댁식구들과 융화하지 못해 구르는 돌처럼 모서리를 세우고 각지게 산 날들도 있었다. 차남이면서 장남 노릇을 해야만 하는 남편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식구들 앞에서 떨그럭거리는 소리도 자주 냈다. 더러는 원망과 욕심으로 뭉쳐진 마음의 결을 다스리지 못해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다. 10년 만에 친구를 만나 잠깐이지만 다시 여자로 돌아온 스님은 공유했던 추억을 끄집어낼 때마다 얼굴에 백일홍 꽃잎처럼 수줍게 물이 들었다. 가끔 행자 스님들 흉을 볼 때는 목젖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다. 추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졌기에 속세와 절교하고 삭발한 그녀의 마음조차 쥐고 흔드는 걸까. 친구 스님은 다시 주전자를 들고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쭈르르, 찻물 따르는 소리에 쌉싸래한 차 향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스님이 따라 준 차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밖을 내다보니 댓돌 위에 놓여있는 하얀 남자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스님도 고무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민망했던지 스님은 “보기엔 투박해도 저 고무신이 참, 편해요.”라고 하며 수줍은 듯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스님의 짧은 한마디에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하며 느꺼워졌다. 편안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큼 절 생활이 익숙해졌다는 것일까. 스님은 한 남자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출가했고 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려고 출가했지만, 어느새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가장 맛이 좋을 거라며 스님은 찻잔에 세 번째 우린 차를 따랐다. 쪼르르, 찻물 떨어지는 소리에 출가를 꿈꾸던 가을 햇볕이 슬그머니 달아난다.  
553 나라가, 나라가 외1편/박관서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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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2017-03-31
17.04월 83호 시 나라가, 나라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네 나라가, 나라가 일어서서 나를 쫓아오는 꿈이었네 황당했네 나라가, 나라가 나를 죽이려하다니 도망가기는커녕 움직여지지도 않아 숨쉬기도 힘들었네 나라가, 나라가 나를 덮쳐 물에 빠진 두더지가 되어 빈지기 눈만 껌벅였네 가슴만 터질 듯 했네 나라가, 나라가 소리 없이 외치다가 꿈을 깨니 TV에 수장된 나라가, 나라가 먹물들의 붉은 혓바닥을 나부끼며 자꾸만 가라앉고 있었네 나라가, 나라가 백마강 햇살 아래 그녀가 왜 울었는지 모른다 부소산 그늘 아래 강물에 잠긴 흰 말의 잔등을 타고 날아오르던 은빛 물뱀들이 홀로 잠든 방문을 아무도 두드리지 않는 밤은 없건만 그녀를 비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그는, 살거죽을 비집으며 실한 광대뼈가 솟아오른 술잔을 홀짝홀짝 비우며 손으로 슬픔을 쓰다듬었다 얼핏 천년 정도의 순간을 건너온 달빛이 그녀를 회수해갔다며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창자를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지만 사내들은 너무 많이 안다 그녀의 혀가 금세 차가워지듯이 날카롭게 지워지듯이 그도, 나도 결국은 하나의 사과알 혹은 가을날에 슬슬 다시 차오르는 햇살이었다 춤추던 문자들을 미끼로 매달고 그래, 참, 오랜만에 누워보는 박관서 / 전북 정읍생, 1996년 계간『삶, 사회 그리고 문학』신인추천. 제7회윤상원문학상, 2014도라지문학상 수상. 시집『철도원 일기』,『기차 아래 사랑법』간행. ddh21@hanmail.net  
552 2016년 12월 외1편/최기종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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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017-03-31
17.04월 83호 시 2016년 12월 광화문 광장에서 파도가 되다. 내 작은 물방울 하나 얼마나 절실했으면 스스로 돕는 하늘이 되었을까 내 작은 촛불 하나 얼마나 분노했으면 꺾이지 않는 갈기가 되었을까 광화문 광장에서 노도가 되다. 이건 나라도 아니라고 손 한 번 들었을 뿐인데 그게 민심이 되고 천심이 되고 하야 하라고 적폐 청산하라고 소리 한 번 질렀을 뿐인데 그게 함성이 되고 뇌성벽력이 되고 광화문 광장에서 대도가 되다. 남에서 북에서 지하에서 좀비처럼 모여들었다. 죽어도 좋다고 모여들었다. 성주사람 내 집에 저런 먹구름 들이지 마라. 내 가슴에 유기질 단내 나는 내 가슴에 저런 두려운 것 심지 마라. 내 곧은 눈 화톳불 이글거리는 두 눈에 저런 고약한 사술 피우지 마라. 내 가는 길 닿는 대로 평화이고 푸르던 내 길에 저런 철조망 치지 마라. 내 기침소리 벌겋게 각혈하는 내 기침소리 저런 불구덩이 외세는 OUT아웃 최기종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로 작품 활동. 시집 『나무 위의 여자』, 『나쁜 사과』,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외. 포엠만경 동인,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전남민예총 이사장 메일 ; jogi-choi@hanmail.net  
551 당신이라는 이름 외1편/윤임수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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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2017-03-31
17.04월 83호 시 당신이라는 이름 강원도 고성 땅 금강산 화암사 일주문 지나 신선봉에 오르다가 만난 수바위 그 커다란 바위틈에 뿌리 내린 채 이슬과 햇살과 바람을 먹고 자랐다는 마디마디 굽은 소나무 두 그루 저 나무를 살게 하는 것은 제 의지일까 바위의 힘일까 곰곰 생각하다가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는데 당연하다는 듯 떠오르는 당신 커다란 바위처럼 두 눈 가득 들어오는 당신 나는 당신이라는 이름 앞에 잠시 마음 모아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조남희 여사 경기도 의왕시 부곡도깨비시장 개성 있게 살고 싶은 남편이 이름 붙인 개성왕족발 안주인 조남희 여사 언제나 환하게 웃는 모습 참 보기 좋은데 전통시장 명품가게로 인증되어 더 기분 좋게 콩나물국 끓이고 마늘을 써는 조남희 여사 오늘도 별 소득 없이 하루를 마쳤지만 그럭저럭 수고했다고 매운 족발에 소주를 치는 우리들 말 안주에 기꺼이 끼어 사람들이 존함을 물어보면 아직도 어색해요 존함이 뭐예요 물으면 당연히 조남희요 하는데 자꾸 장난한다고 뭐라고들 하니까요 하면서 스스럼없이 키득거리는데 족발도 좋지만 정 가득한 그 웃음이 더 좋아 홀짝, 소주를 한 잔 더 들이켜게 되는데 세상사 근심 걱정일랑 온데간데없어라 술잔을 가득가득 또 채우게 되는 것이니 그리하여 이 저녁도 제법 좋아졌으니 오, 고마워라, 개성 만점 조남희 여사 ●충남 부여 출생,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 시집 『상처의 집』  
550 성주의 생명 문화유적 기행 외1편/권오윤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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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 2017-03-31
17.04월 83호 시 성주의 생명 문화유적 기행 월항면 인조리에 세종은 태어난 아기들의 태를 묻고 왕자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돌에 새겼다지만 다섯 왕자는 죽임을 당하고 돌마저 깎였더군요. 초전면 소성리 성자가 태를 묻은 산에 철망치고 대포 심어 돌 대신 총칼에 평화를 새긴다는데 성주읍 경산리 성 밖에는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려고 왕버들 심어 지킨 지 오백 년에 쉰 아홉 그루 늙은 나무가 돌보다 평화롭더군요. 봄 한 번 보고 알면 좋겠지만 쉰 번을 넘게 봐도 모르겠다니 예순 번이라도 보여주마. 눈을 가진 자들이라고 다 보는 것은 아니라며 백주 대낮에 그녀가 온 몸을 내보이고 있다. 안동출신 oyoon@hanmail.net  
549 열쇠고리 외 1편/김이숙 file
편집자
1836 2017-03-31
17.04월 83호 시 열쇠고리 칠십 평생 뭔들 맘대로 해본 적 없는 엄마에게 물고기 한 마리 보냈다 뱃속 깊이 감춰둔 둥근 굴레 가두고 싶은 것 다, 철겅 열어젖히고 싶은 것 다, 철겅 겁먹지 말고 위로 아래로 자신있게 가슴지느러미 균형 잡아 헤엄치면 된다 꼬리지느러미 살살 빠르게 살살 느리게 그렇게 속도 조절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물이 흐려도 파문 거세도 괜찮다 괜찮다고 눈만 뜨고 있으라고 한 땀 한 땀 간절함으로 물고기 한 마리, 내게 왔다 웃는다 마흔 살이 웃는다 거울을 보다 문득 문득 일흔 살을 마주칠 때마다 움찔 찬장 구석 단단히 자리 잡은 가스 활명수 찌든 때 가득 가스렌지 위 멀건 흰죽 볼 때마다 덜컥 자꾸만 짓무르는 눈 당기는 대로 늘어나는 검붉은 살가죽이 서러워 못내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란 고무줄 땡땡 묶어 고추장 된장 건네주는 일흔 살을 보며 마흔 살이 웃는다 마주 보고 웃는다 경북 상주 출생. 2014년 시집 『밥줄』로 등단. ‘느티나무시’ 동인. 전자주소: hosoo71@hanmail.net  
548 괜찮아 외1편/신구자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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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2017-03-31
17.04월 83호 시 괜찮아 봄이 와도 오금을 펴지못한 채 옹송거리고 있는 꿈, 고향의 안방처럼 포근하게 품어주는 말, 괜찮아 그 누구에게 든든한 언덕이 되려고 노력했는데도 어긋난 돼지발톱처럼 상처를 주고 누를 끼치게 했을 때도 괜찮아, 뜨거운 사막 맨발로 걸어온 길들이 한갓 물거품이 되어 고개 꺽었을 때도 안개꽃 같이 둘러리가 되어 위로해 주는 말, 괜찮아 모든 걸 다 품어주는 어머니 품속 같은 말랑말랑한 말의 씨앗 괜찮아, 괜찮아, 어깨 다둑여 주는 말, 정말 괜찮아 선비고을 나들이 가다가 도로변에 흐드러지게 흰 쌀밥 한 소쿠리씩 퍼 담고 서 있는 이팝나무를 보다 늘 배가 고파 이슬방울 같은 눈물방울 대롱대롱 매 단 채 노랗게 외꽃 피우던, 베베꼬인 대추나무 한 그루 담벼락에 박혀있던 점쟁이 논실댁 끝분이를 생각하다, 찰랑찰랑 물을 채워놓은 논을 보다 천봉답 논뀌 물싸움으로 꼭두새벽부터 고성이 오가던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님을 생각하다, 나무지개 위에 참꽃을 꺽어 수북이 지고와 쑥스러운 듯 고개 외로 꼬은 채 슬며시 마루에 내려놓던, 상주에서 머슴살러 왔던 고봉밥에 부지런했던 박서방을 생각하다, 삭발당한 등피 두꺼운 능금나무 곁을 지나다 삼대독자 외며느리 입덧에 하회탈 웃음 귀에 건 채, 겨우 꽃 떨어진 콩알만한 풋살구나무 밑을 맴돌던 등이 굽은 등개할매를 생각하다, 검은 히잡을 쓴 채 변신의 날 참고 견디는 인삼밭 보다 봄을 타는 나에게 최고의 명약이라며 사오던 6년근 풍기인삼, 백년해로 약속 어긴 채 푸른 산천 혼자 선경에 던 그를 생각하다, 간밤 내린비에 황사먼지 깨끗이 씻은, 푸른 하늘 두둥실 흘러가는 흰 구름 따라가다 산절로 물절로 속절없이 흘러가는 봄날을 생각하다 경북 약목 출생. 1994년【대구문학】과 1999년 【 불교문예】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대구문잉협회. 대구시인협회. 불교문인협회. 대구여성문인협회 '솔뫼동인'. 반짇고리문학회 회장 역임. 시집 【 낫골 가는 길]. [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있을까] sgj1918@hanmail.net  
547 그 샘가의 풍개나무/박래녀 imagefile
편집자
1593 2017-03-01
17.03월 82호 소설 그 샘가의 풍개나무 1. 우리 집 장독간 옆에는 깊은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두충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두충나무를 처음 봤을 때는 처녀 팔목만 하던 둥치가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은 아이 한 둘 낳고 두루뭉술해진 아낙네 허리통만큼 굵어졌다. 나뭇가지는 쫙 벌어져 우물가를 시원한 그늘로 만든다. 나는 가끔 우물가에서 푸성귀를 씻거나 빨래를 하다가 두충나무를 올려다보곤 한다. 두충나무를 보면 그 집 뒤란에 있던 풍개나무가 생각난다. 두충나무와 풍개나무는 전혀 닮지 않았다. 나무 겉피나 나뭇잎 생김새도 영 딴판이고 두충나무는 열매도 없지만 내 눈에는 저것이 풍개나무 아닐까 착각할 때가 있다. 내 기억속의 풍개나무는 둥치가 굉장히 컸고 가지도 무성했다. 풍개도 오지게 달리곤 했다. 겉이 매끈한 녹색일 때는 보이지 않던 풍개가 여름부터 가을 즈음까지 검붉게 익어갈 때면 저절로 손이 갈 만큼 탐났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온 동네를 감쌌다. 그 집은 친정 이웃에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집 울타리 새에 개구멍을 만들어 놓고 드나들었다. 심술궂게 생긴 인산 아재는 아이들을 몹시 싫어했다. 아이들만 보면 마당 빗자루를 들고 후려치며 풍개나무를 넘보지 못하게 했지만 아이들은 용케 주인 눈을 피해 풍개를 훔쳐 오곤 했다. 나도 몇 번이나 아이들과 어울려 그 집 개구멍을 드나들다가 어머니께 덜미를 잡혔다. 어머니는 내 앞섶에 불룩하게 주워 온 풍개를 압수해서 돼지 막에 던져 버렸다. 돼지들이 살판났다고 달려들어 풍개를 주워 먹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나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왜 저걸 못 먹게 하는데? 내가 주운 건데. 옴마가 왜 못 먹게 하는데.” 훌쩍거리며 어머니께 항의를 하자 어머니는 매정하게 “인산 띠 집 새미 가에 한 분만 더 갔다가는 다리 몽디가 뿌러질 줄 알아라. 그 집 풍개는 못 먹는 풍개라니까 말만한 가스나가 왜 이리 말귀가 어둡노 이? 몇 분을 말해야 알아 듣것노. 인산양반한테 붙잡히서 도독년 소리 듣고 볼기 맞아야 정신 차리 것나.” “다른 애들도 다 따 묵는데. 암시랑토 안더라.” 그렇게 어머니께 혼이 나면서도 번번이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개구멍을 드나들었다. 그 집 뒤란은 널찍한 공터여서 아이들이 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뒤란이라고는 하나 본채와 사랑채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원래 그 집에 딸린 텃밭이었던 것을 밭으로 이용하지 않고 뒷마당으로 사용했다. 낮에는 마구간에 있던 소를 끌어내다 말뚝에 매 놓는 자리고 솔가리나 장작 등 나뭇단을 해다가 집채만큼 재 놓는 곳이고 가을이면 짚동을 재 놓는 곳이기도 했다. 그 곳은 우리들이 숨바꼭질 하고 놀기에도 제격이었다. 인산아재만 없으면 그 집 뒤란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더구나 굵은 풍개나무 아래는 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샘가에서 소꿉장난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했다. 나는 매번 남쪽으로 뻗어 굵게 자란 우리 집 두충나무 가지에 새끼를 굵게 꼬아 그네를 맸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네를 타고 노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네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그 집의 풍개나무에 걸렸던 그네와 그네를 타는 아이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내 기억 창고를 뒤집어보면 늘 그 집 뒤란의 풍개나무 가지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그네에는 서너 살짜리 아이가 앉아 있고 누군가 그네를 밀었다. 그네가 마당 쪽으로 휘익 날아오르면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하늘로 고개를 잔뜩 젖힌다. 아이 얼굴은 보이지 않고 맨살의 다리만 하늘로 솟구친다. 아이는 두 다리를 하늘에 대고 버둥거리며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누구일까. 그네를 미는 아이도, 그네를 타는 아이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날 듯 말 듯 희미한 기억만 간간히 나를 짓누른다.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릴 적 친구인 순이도 아니고 영희도 아니다. 누굴까. 나는 가끔 그 아이가 누군지 참 많이 궁금하다. 아니, 아이만 궁금한 것이 아니라 새미다. 그 집 뒤란의 샘이 우리 집 장독간 앞의 깊은 우물 같은 그런 깊은 우물로 내 기억창고 깊숙한 곳에 아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처녀시절 어쩌다 고향 집에 갔을 때였다. 그 집에 들렀었다. 빈집이었다. 장독간도 세간도 그대로 있었지만 마루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집 뒤란을 바라봤다. 뒤란의 풍개나무는 여전히 건재했다. 고목이 된 풍개나무는 볼품이 없었다. 가지를 베어낸 자리마다 굵은 옹이가 박히고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고 울퉁불퉁하게 변해 있었지만 몸통만은 여전히 실했다. 풍개나무 아래 새미에서 흘러나오는 물도 여전히 맑았다. 풍개나무 가지에 굵은 풍개가 매달려 발그레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군침이 돌았다. 풍개를 따고 싶어 새미가로 다가가던 나는 돌마다 이끼가 파랗게 돋은 새미가 보이자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아니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오금이 저렸다.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나무에 잔뜩 달린 풍개를 보다가 그 아래 새미에서 도랑으로 졸졸 물을 흘러 보내는 물을 보다가 그냥 돌아 나왔다. “엄마, 그 집이 비었데. 인산아재 죽었다는 것은 알지만 아지매는 어떻게 됐어?” 어머니께 여쭤 봤다. “인산 띠 말이가? 인산양반 죽고 얼매 안 있어 대군가 오데 사는 딸한테 갔제. 가끔 댕기 가기는 한다마는 딸네 집 얹히 사는 기 심든 갑더라.” “인산아재가 험하게 죽었다며? 어떻게 죽었는데?” “풍개나무 가지를 베삤다 아이가. 점쟁이가 그 가지를 베모 죽는다 캤다는데. 풍개나무 가지가 축 늘어져서 새미 속에 뿌리를 박는 기라. 하루는 술이 망깡이 돼 온 인산양반이 ‘이 놈의 벼락 맞을 풍개낭구 땜새 집안에 망쪼 들었다 아이가. 진작 베삐는 걸 놔 돗더니 인자 새미에까지 발을 뻗어’ 함서 벴단다.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아이가. 인산양반 죽고 인산 띠가 귀신 붙은 풍개낭구라꼬 싹 베삐고 집도 새로 질라 카더마 거기 안 쉬운 기라. 저 풍개낭구 벨 사람이 있어야제. 모다 지 목숨 뺐길까 무서버서 손을 몬 대는 기라.” “진짜 귀신 붙은 풍개나무 맞는 갑네. 굿이라도 해야겠네. 난 이상하게 그 집 풍개나무와 새미만 보면 무서워. 근데도 이상하게 뭐가 자꾸 끌리는 것 같애. 왜 그렇지? 엄마, 혹시 나 어려서 그 집 풍개나무와 그 아래 새미에서 무슨 일 있었나? 인산 아지매한테 맞은 적 있나?” “뭔 소리고? 그래, 맞은 적은 있을 끼다. 밤에 자다 옷에 오좀 쌌다고 아침에 챙이 씌고 소금 얻으로 보냈제. 인산 띠가 주걱으로 빰을 때맀다 카더마. 인산 띠한테 뺨맞고 대성통곡을 함서 왔던 적이 있제. 올매나 무안했는지 그 담부터 인산 띠만 보모 도망 댕깄제.” “아니야, 그것 말고 뭔가 있어. 엄마, 난 물은 안 무서운데 그 새미는 겁나서 옆에 갈 수가 없는 걸. 물귀신이 빨아 댕기는 것 같아서.” “다 큰 아가 별소리 다 한다. 새삼시레 구전재전 이약 꺼낼 일 없다. 그 집은 이자삐고 살아도 탈 없다.” 어머니는 더 이상 그 집 이야기는 하기 싫다는 듯이 등을 돌렸었다. 아침 일찍 우리 집 우물가에 앉았다. 김장을 하려고 배추 100포기를 잘 다듬어 배추 한 포기를 반 토막 내고 반 토막의 중간에 칼질을 했다. 큰 고무 통 세 개를 우물가에 놓고 큰 양은 다래기에 소금을 풀었다. 노란 속살을 드러낸 배추를 담갔다가 건져 고무 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속이 꽉 찬 배추 속을 뒤적거리며 굵은 소금도 슬슬 뿌렸다. 소금에 너무 짜게 절여도 배추가 질기고, 너무 싱거워도 김치 맛이 안 난다. 배추 숨을 고루 죽여야 김치가 맛있다. 물론 온갖 양념이 얼버무려져 맛을 내지만 일단은 배추 숨이 알맞게 죽어야 한다. 배추 절이는 일은 계속 구부려서 하는 일이라 허리가 아팠다. 허리를 쭉 펴고 두충나무를 올려다봤다. 나뭇잎 하나 팔랑팔랑 떨어져 우물을 덮은 나무뚜껑 위에 사뿐히 앉는다. 나뭇잎을 쫓던 내 눈이 뚜껑 아래 우물 속으로 빠진다. 우물 속에는 두충나무 가지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우물 속에는 하늘이 있고, 구름이 있고, 방금 빠진 나뭇잎이 떠 있을 것이다. 둥근 화판에 수묵화 한 점 그려졌겠지. 언뜻 한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아이가 싱긋 웃는다. 누굴까. ‘너 누구니?’ 아이에게 말을 건다. 우렁우렁 우물 속에 둥근 파문이 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웃는 소리일까. 그 집 뒤란의 새미 속에 빠졌던 하늘이 우리 집 우물 속에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백일몽을 꾼다. 단발머리 여자애가 샘가에 앉아 뭔가를 찧고 있다. 자세히 봐도 쑥인지 풀인지 잘 모르겠다. 납작한 빨래 돌에 풀을 놓고 몽돌로 콩콩 찧었다. 조막손으로 짓뭉개진 풀을 두 손으로 감싸서 이가 빠진 사발에 대고 짰다. 짙은 녹색 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방울이 안 떨어질 때까지 꼭꼭 눌러 짰다. 아이는 그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혀에 댔다. 인상을 쓰면서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그것을 납작한 쑥색 깡통에 담았다. 알맹이는 까먹고 버린 깡통이다. 아이는 풀물이 담긴 깡통을 물 퍼는 박 바가지에 담더니 머리에 이는 시늉을 한다. 바가지에 담긴 깡통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한 아이가 바가지를 이고 샘가를 나와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가의 울타리 앞에는 멍석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또 한 아이가 누워 있다. 멍석 한 쪽에는 납작한 돌이 놓여 있고, 돌 위에는 살림살이가 차려져 있다. 뚝배기와 장독 뚜껑, 사발이나 접시, 항아리, 아주 작은 단지 등 질그릇 깨어진 조각이다. 모서리를 돌로 톡톡 깨어 동글납작하게 만든 크고 작은 그릇과 바가지 깨어진 것 등이다. 부엌 살강에 어머니가 그릇을 씻어 엎어 놓았듯이 가지런하다. 단발머니 여자애가 쑥물이 담긴 깡통을 누워 있는 갈래머리 여자애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았다. “어무이 약 자실소.” “치아라 고마, 내가 지금 약 물 처지가? 계집년 잘 못 들어와 대 끊어지게 생겼는데. 넘들은 머스마만 쑥쑥 잘도 놓더마. 논 머스마도 몬 키우는 년이 낯데기는 빤빤해 가지고 나가라 고마 딱 뵈기 싫다. 니만 보모 엊지녁에 묵은 밥도 올라 올라쿤다. 구엑질이 난다. 썩 꺼지라는데도” 병자 흉내를 내는 여자애가 윗몸을 발딱 일으켰다. 쑥물이 든 깡통을 마당으로 휙 던져버린다. 도끼눈으로 며느리 흉내를 내는 여자애를 잡아먹을 듯이 째려본다. 참 표독스러운 눈빛이다. 그러더니 ‘아이고 머리야 내 죽것네.’ 하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풀썩 드러눕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면서 “내가 니 년 땜에 내 명 대로 몬 살끼다. 뵈기도 싫으니 썩 나가래두” 고함을 치다가 다시 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고 죽는 시늉을 한다. 시어머니 흉내를 내던 여자애가 다시 발딱 일어나 도끼눈을 뜬다. 며느리 흉내를 내는 여자애를 째려본다. 며느리 여자애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쪼그리고 앉아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한다. “니 진짜 우는 기가?” 표독스럽게 몰아치던 갈래머리 여자애가 놀라서 우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다. 내가 진짜 우는 줄 알았더나?” 두 아이가 마주보며 깔깔깔 웃는다. 백일몽에서 깨어보니 배추 백포기는 말끔히 소금물에 절여져 통에 담겨 있었다. 처음 시집 왔을 때 우리 집 우물은 펌프질로 물을 퍼 올려야 했다. 마중물을 부어 힘차게 손으로 펌프를 저어야 물이 펑펑 쏟아졌다. 팔 힘이 약한 나는 늘 물 길어 올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비지땀을 흘렸다. 펌프질이 맘대로 안 되면 우물의 나무뚜껑을 열고 두레박으로 퍼 올려 써야 했지만 나는 우물의 나무뚜껑을 열지 못했다. 무서웠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게 정말 무서웠다. 설령 우물을 덮었던 뚜껑이 열려 있어도, 긴 두레박줄이 우물 속으로 드리워져 있어도 두레박질은 꿈도 못 꾸었다. 허둥지둥 남편을 찾거나 시어른께 도움을 청했다. “얼라도 아니고 번번이 왜 그러냐? 두레박질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 시어른과 남편의 퉁을 먹으면서도 그 버릇은 여전히 고칠 수가 없었다. 대신 얼마 후,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물을 받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그가 도시 생활에 길든 아내가 안쓰러워 거금을 투자했던 것이다. 수중 모터를 사서 우물 속에 넣었다. 그 뒤 우물의 뚜껑을 열어젖히거나 우물 속을 들여다 볼 일은 없었다. 가끔 우물 벽도 말리고 우물 속에도 바람 좀 들락거리게 해야 한다고 우물을 덮었던 뚜껑을 열어놓기도 하지만 그 때는 나 스스로 우물을 외면했다. 뚜껑이 덮일 때까지 우물가 쪽으로 눈을 안 돌렸다. 우물과 눈이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빨려들 것 같은 위기감을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십 년을 살면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아직 나는 우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무심히 지나치다가도 은연중에 기피하는 현상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우물은 내게 늘 풀리지 않는 숙제 같다. 이젠 어떤 이야기든지 털어놔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나절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100포기의 절임 배추를 맑게 씻어내려면 물이 한정 없이 필요했다. 수도꼭지를 있는 대로 틀어놓고 철철 흐르는 물에 배추를 씻어 헹구는데 갑자기 수도꼭지에서 물줄기가 가늘어진다 싶더니 뚝 끊어졌다. 수중 모터는 계속 도는데 물이 안 나왔다. 겨우 재벌 씻기에 돌입했을 뿐인데 우물 바닥이 드러났다는 것은 심각했다. 물이 찰 때까지 기다리든가 개울에 가지고 나가서 씻든가 결정을 내려야 할 사항이 된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새된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 마루로 나왔다. “와 그라노?” “새미 뚜껑을 열어봐야 하는데 예” “와? 새미 뚜껑만 열모 걸음아 날 살려라 캄서 도망치던 아가 우짠 일이고?” “물이 바닥났어 예. 모다는 잘 도는 것 같은데. 새미에 물이 없나봐 예.” “야가 시방 뭔 소리 하는 기고? 새미에 물이 없다니? 올매나 짚은 새민데.” 어머님이 슬리퍼를 찔찔 끌고 우물가로 오셨다. “띠비 함 열어봐라.” “어머님이 열어 보세요. 저는 싫어 예.” “니 참말로 오데가 이상한 거 아이가. 새미 띠비만 열모 난리니 말이다. 그라지 말고 일로 와서 새미 속이나 딜다 봐라. 저 새미 판다고 너거 시아베랑 이웃 아재 몇이서 몇날 며칠을 올매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무서워서 들어다보는 것은 싫어 예. 물이 있습니꺼?” “니 나가 올해 몇이고? 우리 집에 시집 온지 올매나 됐노? 인자 철 날 때도 됐건만 하는 기 와 그 모양이고. 서너 살짜리 얼나도 아니고.”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어머님의 꾸지람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우물이라면 진저리부터 친다. 철철 흐르는 개울에 가서는 빨래도 하고, 수영도 하고 잘도 노는데 동네 우물이건, 동네 샘이건 깊은 곳을 내려다보는 것에는 자신 없다. 꼭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끌고 들어갈 것 같다. 그 아이만이 아닌 듯한 느낌만으로도 오싹하다. 마흔여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다.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기억창고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두려움은 자기 자신 속에서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내 속에 있는 두려움은 내가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장골 서너 질은 족히 될 깊은 우물인데 몇 달 동안 아무리 가물었기로서니 벌써 바닥이 날 리 없다고 하셨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전기 코드를 뺐다. 어머님이 우물을 덮었던 나무뚜껑을 열고 속을 들여다봤다. “니 눈으로 직접 봐라. 나는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인다.” 끝내 나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고집이라면 한 고집 하는 줄 익히 아는 시어머니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을까. 발이 저려왔다. “야가,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었나. 참 별스런 아도 다 보것다. 인자 물 찼을 끼다. 꼭지 틀어봐라. 배추를 어서 씨꺼 놔야 물이 빠지제. 올 가실에는 하도 가물어서 새미 물이 많이 줄었던 기라. 배추 몇 피 씻고 바닥을 드러내는 걸 보니 엔간히 가물긴 했는 갑다. 우리 집 새미는 하도 짚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 떨어진 일은 없다. 쪼매 줄다가 다시 항그석 차 오리니라.” 시어머님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발자국소리를 듣고서야 부스스 일어났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맑고 하얀 물줄기가 거침없이 콸콸 쏟아졌다. 헐렁헐렁 배추를 씻어 소쿠리에 건지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김장 해 놓고 김장김치 몇 포기 담아 친정에 다녀와야겠다고. 가는 길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그 집 뒤란에 들려봐야겠다고. 2. 심호흡을 했다. 주춤주춤 새미 곁으로 다가갔다. 고목이 된 풍개나무는 잔등이 뚝 부러진 채 볼품이라곤 없었지만 여전히 새미 가에 건재했고, 샘에는 여전히 물이 넘쳤다. 새미 안에는 가랑잎이 소복이 쌓였고, 붉은 배에 검은 반점을 가진 비단개구리의 서식지로 바뀌었지만 맑은 물은 도랑을 타고 동네 가운데로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새미 곁에 바짝 다가섰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감고 손을 뻗쳤다. 물에 손이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나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두 손을 등 뒤의 땅을 짚은 자세로 가랑이를 벌린 꼴이 꼭 그네를 타는 그 아이가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버둥거리며 까르르 웃던 풍경이다. 몸을 젖힌 상태로 하늘을 봤다. 풍개나무 가지 하나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나뭇잎 하나 하늘하늘 날아와 내 얼굴에 앉는다. 거기 심장 모양의 검붉은 풍개 하나 대롱대롱 매달려 햇살에 반짝거렸다. 서쪽 하늘로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내 얼굴을 따갑게 비췄다. “야가, 오데 갔나 했더이 여게 와 있었나?” 순간 친정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윗몸을 일으키고 안자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내 뒤에 와 서 있었다. “청개구리 삼시랑을 타고 났는지. 인산양반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그 때 뿌인 기라. 너거들은 꼭 어른들 눈을 피해서 이 새미 가에 와서 놀았니라. 반주깨미도 살고, 술래잡기도 함서. 니 에릴 때 말이다.” “내가 그 일 쳤을 때가 몇 살 때였어?” “그 일? 죽은 니 동상 말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푸시 떠오르는 것은 저 풍개나무가 그 때는 억수로 컸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둥치만 컸제 그네를 맬만한 가지가 안 보이네. 어째서 내 기억에는 저 풍개나무에 그네가 매달려 있을까?” “풍개낭구에 그네가 매어 있기는 했제. 그네 맸던 가지는 그 때 끊어 불 땠다. 쪼무래기들이 뒷마당에 나와 놀고로 해 논기 탈이었어. 어른들 잘못이 더 컸던 기라. 인산양반이 험상궂게 생겼어도 아~들 한테는 자상한 아부지였던 기라. 우에 가스나들이 자꾸 그네 타령을 하자 저 낭구 가지에다 새끼를 꼬아 맸제. 앉아서만 노라꼬. 널빤지도 넙직한 걸 대 놨던 기라. 그 풍개낭구 가지는 새미랑 반대쪽으로 뻗은 데다 거기는 편편했거든. 아~들이 놀기에는 안성맞춤이라 별 걱정 안 한 기라. 그 뒤에 저 풍개낭구 그네 맸던 가지 베고 인산양반이 시름시름 앓다 갔제. 인산양반 그리 가고 저 낭구도 시나브로 말라 가더마.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네.” 여름방학 때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늘 그 집 뒤란의 울타리에 개구멍을 냈다. 주인이 없을 때는 그 개구멍으로 들어가 샘가에서 놀았다. 샘은 맑았고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았지만 물은 늘 철철 넘쳐나 도랑으로 이어졌다. 도랑은 제법 너르게 반석이 깔려 있었다. 도랑 역시 깊지 않아서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놀기에도 제격이었고, 풍개나무 가지에 매달렸다가 도랑으로 뛰어내리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덜 익은 시큼한 풍개를 따 먹으며 배고픔을 삭이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 끼일 수 없었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풍개나무와 새미가 내겐 사천왕처럼 무서웠다. 보리타작을 할 즈음이었다. 초여름이라 덥고 후덥지근한 날이었나 보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자 집이 텅 비어 있었다. 배가 고파 밥솥을 열어봤지만 고구마도 감자도 없었다. 그 순간 그 집 뒤란의 풍개가 떠올랐다. 꿀꺽 군침을 삼켰다. 아직 단맛이 덜 들었지만 그게 대순가. 시큼한 것이 더 입맛을 돋울 나이였다. 하지만 나는 외면했다. 책 보따리를 마루에 던져놓고 찬물 한 바가지로 헛헛한 뱃속을 채우고 마루에 앉아 무료하게 햇살바라기를 하는데 삽짝에서 친구들이 불렀다. 아랫마을에 사는 영이와 숙이었다. “우리 그 집에 풍개 따 무로 가자. 아까 살짝 가 봤는데 아무도 없더라.” 숙이는 싫다는 나를 끌고 그 집의 뒤란으로 달려갔다. 울타리에 개구멍을 내고 그 집 뒤란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풍개나무와 샘에서 멀찍이 떨어진 사랑채 처마 밑에서 망을 보고 친구들은 풍개나무 둥치에 올라가 가지를 잡고 발로 쿵쿵 굴렀다. 풍개가 밤송이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밑에 떨어진 것은 나중에 주워 먹어도 된다면서 그 애들은 나무둥치에 올라앉아 손에 잡히는 것을 따서 먹었다. 두 아이는 굵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깔깔댔다. 나는 불안해 죽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숙이가 휘청거리는 나뭇가지를 타고 미끄러졌는데 하필이면 새미 속으로 첨벙 쳐 박혔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 순간, 들에 나갔다 들어오던 인산 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아이고, 우짜꼬, 저 일을 우짜고.” 하면서 달려오던 아주머니 얼굴이 백납처럼 하얗게 질려 샘가에 퍼질러 앉는 것을 봤다. 순간 내 입이 딱 벌어졌다. 다리는 자석에 붙은 쇠붙이가 되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달달 떨었다. 새미에 떨어진 숙이는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벌떡 일어났다. 물은 숙이의 허벅지밖에 안 닿았다. 숙이는 아무 상처 없이 물만 뒤집어쓰고 새미에서 제 발로 나왔다. 그 때였다. 샘가에 퍼질러 앉았던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달려왔다. “대번에 이것을 그냥” 하면서 내 팔을 휙 낚아채더니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쳤다. 숙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나도 넋이 반쯤 빠져있었다.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멍한 상태에서 아주머니께 호된 등짝 세례를 받자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아주머니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처마 밑에 재인 나뭇단에서 회초리 감을 빼내 나를 사정없이 때리시며 이렇게 사설을 읊었다. “아이구 이년아, 내가 니 때매 몬 산다. 내캉 무슨 원수가 졌기에 또 이라노. 니만 보모 내가 소름이 끼친다. 저 풍개낭구가 귀신 붙은 기 아이고, 니가 귀신 붙은 년이다.” 영문도 모르고 매 타작을 당하는 나를 보자 숙이랑 영희는 내 뺐다. “아, 고마 잡아라. 너머 아 잡것다.” 험상궂게 생긴 인산아재가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내 팔을 놓았고, 나는 손살 같이 달려 우리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달려가는 내 등 뒤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히는 화살이 있었다. “저걸 그냥! 당신이 저 가스나 역성을 든께 저기 버르장머리가 없이 또 우리 집에 들락날락 안 하요. 아를 우찌 키우길래 저 모양인지. 우리 아를 자가 밀었다는 거 당신 잊었소. 내가 저 가스나만 보모 가심이 갈갈이 찢어지는데. 차라리 이사를 나가든지 풍개낭구를 베삐든지 해야지. 이라다가 나도 내 명대로 몬 살고 죽것소. 내 자슥 생각하면 지금도 간이 벌렁벌렁한데. 저 가스나 커는 거 보모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됐다 고마. 저 집도 마찬가지다. 함부레 씰데없는 말 하지 마라. 저 아가 미는 거 본 사람 없다 캐도. 별일 없시모 됐제. 저 낭구가 문제다. 내가 저 낭구를 베삐야 탈이 없제.” “아이가, 저 낭구 베모 클 난다는 말 못 들었소. 함부레 벨 생각 마소. 목신이 또 한 번 더 노하모 우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요. 올 가실에는 푸닥거리를 좀 크게 해야겠소.” 나는 눈물 자국을 없애고 집으로 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후 내내 만화책을 보며 방안에 있었다. 저녁에 집에 오신 어머니께서 나를 불렀다. “아까 올매나 놀랬노. 인산 띠도 성이 많이 났는 갑다. 매 맞을 짓 했다. 새미가 안 짚어서 다행이지 전에 맹키로 짚었시모 우짤뿐 했노. 거게는 가지마라 쿵께 말라 갔더노?” “숙이랑 영이가 와서 자꾸 가자캐서 예.” “그 아아들이 가자캐도 니는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기다. 알것제?” 어머니는 내 이마를 짚어보고, 내 다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인산아주머니께 맞은 자리가 아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밤에 작은 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도란도란 주고받는 소리를 들었다. “내사 마 그 때 생각하모 또옥 인산 띠 보기 미안해서. 그란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질 뿐 했으니 인산 띠도 많이 놀랬을 끼요. 얼라가 올매나 놀랬는지 얼굴이 잘 익은 탱자 같소. 너머 귀한 가스나를 그래 패모 우짤끼고.” “괘한타. 이웃 간에 그만한 일로 다툴 거 없다.” “인산 띠는 저 풍개낭구를 베삐든지 새미를 메카든지 하제 와 저대로 두고 속을 써카꼬. 저 풍개낭구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데. 이라다가 또 생떼 겉은 아 잡을까 겁납니더. 저거 아만 빠져 죽은 기 아니지만도 우리 선이 볼 때마다 내 가심도 먹먹한데. 선이를 보는 인산 띠 맘도 내 모를 바는 아니지만 내가 또옥 인산 띠만 보모 죄인이 되는데. 아무리 우리 아 잘못이 아니라지만 사람 맘이 그런 기 아인기라 예.” “우리한테 맺힌 기 많다는 뜻이제. 그 맴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맞십니더. 4대 독자였는데.”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서럽게, 서럽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집의 새미 바닥은 더 얕아졌다. 동네 장정 서넛이 힘을 모아 황토와 잔돌을 져다 섞어 매웠다고 했다. 서너 살짜리 아이가 들어가 놀아도 될 만큼, 도랑과 비슷하게 반반하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바가지로 살살 물을 퍼내야 흙탕물이 안 일어날 정도로 그렇게 메워버렸던 것이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 뒤로는 아이들은 물론 나도 그 집 뒤란의 새미에 가서 노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낮에도 그 집 근처에도 안 갔지만 밤에는 마당에 나와도 그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나무 숲이 바람에 우우 흔들리는 소리가 꼭 새미에 빠져 죽었다는 아이의 흑흑 우는 울음소리 같았고,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푼 여자가 내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아서 후닥닥 방으로 뛰어들곤 했다. 밤마다 가위 눌림에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기도 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언니를 따라 도시로 나가 살면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도 그 집 뒤란의 풍개나무와 샘을 생각하면 얼굴 윤곽 밖에 떠오르지 않는 한 아이의 희미한 모습이 기억나고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가끔 고향에 가면 그 집과 풍개나무와 샘의 안부가 궁금했다. “옴마, 인산아지매는 아직 거기 사시는가예?” “이사 간 지가 오래 됐제. 한분 씩 댕기로 온다. 조만간 여게 와 살것다더라. 저거 사우가 집 지어 준다 캤단다.” “옴마, 그 때 죽은 아이 이름이 뭐지? 인산아지매 집 아들 말이야. 아직 궁금한 것은 왜 내가 그 애의 죽음과 얽혀 있는지 이해가 안 돼. 나도 어렸다는데. 내가 우물과 샘을 무서워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이야기는 아무도 해 주지 않아서 몰라.” “모르것제. 모두 쉬쉬 했으니. 머 좋은 일이라꼬 미주알고주알 말하것노. 모를수록 좋은 긴데. 그 아 이름이 석이였제. 4대 독자였어. 니보다 두 살이 아래였다. 니 동생하고 동갑이었제. 인물이 참 좋았니라. 대장부 감이었제. 인산양반이랑 너거 아부지랑 우스갯말로 사돈 사돈 함서 친했던 기라. 머스마가 또옥 쌀강아지 같앴건마. 아가 너무 잘생겨도 귀신이 시샘을 한다더니 그랬는지도 모르제. 그래서 애기들 보고 ‘허 고놈 밉상이네.’이래야 귀신이 안 잡아 간다 안하나. 니가 대엿 살 때제. 인산 띠가 좀 모진 데가 있니라. 그날이 오일장이었단다. 장에 간다고 니 불러서 석이 좀 데리고 놀아라 캤다더마. 그 아는 울고불고함서 지 에미 따라갈라 쿠다가 골목에서 매차리로 맞고 집으로 돌아왔제. 그 아가 울면서 우리 집에 온 기라. 니는 석이를 달래서 니 동생 경자랑 셋이서 손잡고 석이 저거 집에 간기라. 나도 등 너머 밭에 갔었제. 너거 엉가 핵교 파하고 올 때가 되서 탐탐 믿었던 기 화근이었제. 그 집 뒤란이 따시거든. 새미에 물도 있으니 반주깨미 살기도 좋고.......” 어머니는 그 대목에서 긴 한숨을 쉬었다. 수십 년이 흘러도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지 흐릿한 눈자위가 불그스름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괜한 말을 꺼냈다 싶어 후회하면서도 겉으로는 멀쩡한 척, 너스레를 풀었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나도 알았어. 나 때문이란 거. 할매가 썽만 나모 나를 꾸짖으면서 그랬던 거. ‘니가 너머 집 대 끊었다.’고. 인산 아지매는 내가 참 미웠을 기라. 그 집 할매 무섭었잖아. 인산아지매가 그 할매한테 오지게 구박 받고 살았잖아.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그게 다 나 때문이었다니. 인산아지매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그랬것제. 너거 아부지가 그러데. 죽은 자슥보다 산 자슥이 낫다고. 니랑 경자가 둘 다 새미에 빠져 죽었다모 우리 심정이 우떻것느냐고. 니 많이 예뻐하라 쿠데. 너거 아부지가 니를 애지중지 한 것도 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기 아닌가 싶다.” 울컥 목젖이 아파왔다. 그랬었구나. 행여나 내가 어린 기억에 상처받을까봐 그렇게 애지중지 하셨구나. 아버지의 너른 가슴을 진작 느낄 수 없었던 게 한스러웠다. 더구나 석이를 잃고 혼절했다 일어난 인산아주머니는 오래오래 병상에 계셨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석녀가 되었다. 나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지도 못한 채 우물과 풍개나무와 아이 사이에는 뭔가 있는 것 같은 흐릿한 안개 속을 헤매면서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물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그 아이의 얼굴이 인산 아주머니 아들이었단 말인가. 내 동생이 아니라. 우물과 풍개나무를 떠올리면 오금이 저렸던 것도 두 어머니의 고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어린 가슴 깊숙이 난 상흔 자국이 아팠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근데 엄마, 정말 어쩌다 그렇게 됐다는 거 아는 사람 있어?”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아무리 다그쳐도 경자를 그네 태워줬다는 말만 했단다. 다만 추론을 했을 뿐이다. 석이가 풍개를 따 먹으려다 물에 빠지게 되었고, 경자를 그네에 앉히고 밀어주던 내가 석이를 건지러 간다고 그네를 놓치는 바람에 경자가 그네에서 떨어져 새미에 빠졌고 두 아이가 허우적거리자 무서워진 내가 어른들을 부르러 뛰어갔을 것이라고. “왜냐면 말이다. 니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밭으로 달려온 거야. ‘옴마 경자가, 석이가 새미에 빠졌어. 새미에 빠졌어.’ 하더니 그 자리에 픽 자빠졌제. 나는 부랴부랴 니를 업고 달려왔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아이는 가 삤더라. 나들이 갔던 인산양반이 돌아와 발견한 모양이야. 인산양반이 건져놓고 넋이 빠져 있더마.” 3. 얼마 전, 친정어머니가 아파 간병을 하러 친정에 갔을 때였다. 그 집이 사라져버렸다. 그 집 뒤란에 있던 풍개나무도, 샘도 사라져버렸다. 움푹 꺼져서 굼티 집이라 불리던 집터가 쑥 올라와 그 집 뒤란은 공터와 같이 반반하게 바뀌어버렸다. 더구나 그 옆에는 낡은 재래식 집이 아니라 현대식으로 아담하게 꾸민 양옥 한 채가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 그 집이 없어졌네. 새 집이 들어섰는데. 누가 들어와 살아?” “인산 띠가 도로 왔단다.” “그 귀신 붙은 풍개나무랑 새미는 어떻게 치우고?” “시님을 모시다가 굿을 크게 했니라. 그라고 굴착기로 풍개낭구는 뿌리째 빼 삐고 새미는 큰 관을 땅 밑으로 짚이 묻어서 집 밖으로 빼 내고, 그 위에 흙과 돌을 몇 차 갖다 붓다. 그라고 공골을 뚜껍고로 쳤다. 인산 띠도 인자 편할 끼다.” “진작 저리 만들지. 흉가로 있어 늘 찝찝했는데. 내 속도 후련하네.” 한참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점심 준비를 하는데 손님이 오셨다. “나도 밥 한 숟가락 주나. 혼자 밥 묵기 싫어서 밥내 맡고 왔다. 밥 있나?” 하면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인산아주머니였다. 이십 수 년 만에 처음 보는데도 늙지도 않으셨다. 여든 여섯이라는데 너무 정정하셔서 놀랐다. 친정어머니보다 대여섯 살은 많으셨지만 어머니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잘 오셨다고, 어머니와 함께 겸상을 봐 드렸다. 그 뒤부터 밥 때만 되면 찾아오셨다. 밥 잘 드시고 돌아가면서 하는 말은 늘 이랬다. “사돈, 너거 선이 덕분에 한 끼 잘 묵고 간다. 내가 안 죽고 이리 오래 정정하게 사는 것도 알고보모 다 업인기라. 선이 니는 내한테 밥 좀 해 조도 된다. 내가 니 커는 거 봄서 참 많이 아팠니라. 인자 니도 늙는 갑다. 머리가 하얀 것을 보니. 너거 옴마한테 잘 해려이. 너거 옴마가 내한테 참 잘했니라. 그 속 우찌 모르 것노. 그렇제 사둔.” “하모, 선아, 우리 사돈 맺은 거 니는 모르끼다만 우리는 사돈이다. 니도 인자 아지매라 쿠지 말고 사돈어른이라 캐라. 뭔 말인고 하니 석이랑 경자를 영가 혼례 치라 준 지도 꽤 오래 됐다. 우리 둘이서 그렇게 해 준 기라. 인산양반 가고 나서.” 이젠 나도 털어버리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우물 속의 아이도 내 마음에서 보내버리자. 그 아이가 석이든 경자든 아이에게서 가벼워지는 길이 남은 내 인생을 편하게 해 주는 길이리라. 집에 돌아오는 즉시 눈 딱 감고 우물의 뚜껑을 열었다. 우물 속을 들여다봤다. 우물 속에는 여전히 두 아이가 웃고 있었다. 두충나무 잎 하나 떨어진다. 두충나무 잎은 작은 주낙배로 변해 두 아이를 태우고 하늘로 오른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아이도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다음 생에 우리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수 있을 거야.’  
546 108과 33이라는 숫자의 비밀/김우출 file
편집자
1554 2017-03-01
17.03월 82호 수필 108과 33이라는 숫자의 비밀 사찰에서는 종을 왜 백 여덟 번 칠까? 종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나는 까닭에 예부터 사찰의 중요 법기(法器) 중의 하나로 여겼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종을 치는 전통은 502년~549년 중국남조 양무제(梁武帝) 때부터 시작되었다. 양나라 초대 황제였던 무제는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양무제는 죄를 짓고 깨우침도 없이 죽음에 이르는 백성들을 보며 그들의 사후가 걱정되었다. 어느 날 양무제는 고승 보지(寶志)화상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어떻게 해야만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에 화상은 “업보(業報)의 고통은 일시에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만약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잠시나마 고통을 멈출 수는 있을 겁니다” 라고 답했다. 양무제는 즉시 조서를 내려 사찰에서 매일 종을 치도록 했다고 한다. 사찰에서 사용하는 종은 아침저녁 시간을 알릴 때와 사람들을 소집할 때 치는 범종과 법회나 경축행사에서 불사의 시작을 알리는 환종이 있지만 이외에도 기상, 식사, 예불, 취침 등 명령을 전달할 때에도 종을 쳐서 그 소리를 사용했다. 당나라 회해선사(懷海禪師)는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총림의 호령은 큰 종소리로 시작된다” 라고 했을 정도로 승려들은 종소리를 경계로 삼아 수련을 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새벽종은 긴 밤을 열고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고 저녁 종은 어두운 미혹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종은 청성한 마음으로 쳐야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며, 무릇 36번씩 3차례 종을 치는데 총 108번을 친다.” 라는 말이 나온다. 그럼 왜 하필 108번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역(周易)으로는 9는 상서로운 숫자로서 9의 배수인 108을 지고무상(至高無上)을 상징하는 의미로 보았으며, 불교(佛敎)에서는 사람의 번뇌가 연중 108가지라 종을 108번을 쳐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의미로 삼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1년 12달 24절기 5일이 1후인 72후를 합한 숫자가 108이며 이는 매년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신년을 알리는 제야의 종을 우리나라에서는 33번을 치지만 중국에서는 아직도 108번을 친다고 한다. 108번뇌와 108염주에서 108이라는 수(數)는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각가지 경계에 부딪치는 입구를 보통 ‘안(眼)·이(耳)·비(卑)·설(舌)·신(身)·의(意)’라고 말한다. 즉 눈과 귀, 코, 혀, 몸, 생각이 있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오감(五感)에 생각을 보태서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으로 잘못 받아들여서 나타나는 여섯 가지 경계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 그리고 감촉과 느낌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경계를 말하는데 육경(六境)이라고 한다. 이 6경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하는 인식 작용. 곧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을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누구나 이것과 마주치게 되어 피할 수가 없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만났을 때 반응하는 것을 육적(六賊)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여섯 가지 도둑을 일컫는 말인데 눈으로 보면 탐심(貪心)이 생기고 좋은 소리만 듣고 싶고 좋은 냄새, 맛있는 음식, 부드러운 감촉을 탐하는 마음이 바로 도적과 같다는 것이다. 108이라는 숫자의 계산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 육근이 육경을 일으키는 경우의 수는 6×6=36가지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생, 금생, 내생의 3생에 걸쳐 나타나니, 36×3=108이라고 한다. 두 번째, 안 · 이 · 비 · 설 · 신 · 의의 6근(六根)이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6진(六塵)을 대할 때 호(好: 좋아함) · 오(惡: 싫어함) · 평(平: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음)의 3가지로 분별하기 때문에 총 18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18) 이 18가지 번뇌의 각각이 다시 염(染) · 정(淨)의 2가지로 나뉘기 때문에 총 36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2 = 36) 이 36가지 번뇌가 다시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三世)로 나타나기 때문에 총 108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2 × 3 = 108) 세 번째, 6근(六根)이 6진(六塵)을 대할 때 고수(苦受) · 낙수(樂受) · 사수(捨受)의 3수(三受)로 분별하기 때문에 총 18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18) 또한 6근(六根)이 6진(六塵)을 대할 때 호(好: 좋아함) · 오(惡: 싫어함) · 평(平: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음)의 3가지로 분별하기 때문에 총 18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18) 따라서 이 둘을 합하여 6근이 6진을 대할 때 총 36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6 × 3)) = 36) 이 36가지 번뇌가 다시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三世)로 나타나기 때문에 총 108가지의 번뇌가 있다. (((6 × 3) + (6 × 3)) × 3 = 108) 이런 경계에 휘말리다 보면 내가 나임을 잊고 도둑이 내안에 들어와 활개를 친다는 말과도 같은 상황이 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뜻도 될 것이다. 이런 도둑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 올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아닌 무수히 많은 다른 나의 서식처가 내 몸인 것이다. 여섯 가지 도둑으로부터 내 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입구를 차단하면 된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을 보지 않고 듣고 싶은 것을 듣지 않기 위해 눈 감고 귀 막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아야 하고 듣고 싶지 않은 것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항상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의 향내를 맡고 부처님께 향배(向拜)하고 항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새해 첫날 자정, 보신각에서는 제야의 종을 왜 33번 울리는 것일까? 옛날 지금과 같은 시계가 없던 시대에 선인들은 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겠지만 밤에는 시간을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밤 시간을 알려줬는데, 12시간 중 밤에 해당하는 5시간(술시~인시)을 초경∼오경으로 나누어 각 경마다 북을 쳤다. 또 한 각 경은 다시 5점으로 나누어 각 점마다 징이나 꽹과리를 쳤다. 한 경은 오늘날 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이고, 한 점은 24분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이 이 소리를 다 들을 수는 없었다. 이에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이경(밤 10시경)과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새벽 4시경)만큼은 종로 보신각에 있는 대종을 쳐서 널리 알린 것이다. 이는 조선 초기인 태조5년(1396년)부터 시행되었는데, 도성의 4대문(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과 4소문(혜화문, 소덕문, 광희문, 창의문)을 일제히 여닫을 때 종을 쳤다고 한다. 보신각이라는 오늘의 명칭은 고종 32년(1895년)부터 사용했으며 당시에는 종루(鐘樓)로 불렸다. 밤 10시경 28번의 종을 쳤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했고, 새벽 4시경 33번의 종을 치는 것을 ‘파루(罷漏)’라고 했다. 즉 인정에 치는 종은 통행금지를 알리면서 도성의 문을 일제히 닫았고, 파루에는 통금을 해제하고 도성 8문을 열어 그날의 활동을 시작하는 종을 친 것이다. 또 28번의 종을 친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28별자리에 밤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고, 33번의 종을 친 것은 제석천(불교의 수호신)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그날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연유로 제야의 타종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시민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반고(班固)는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종을 치면 양기가 지하에서 나와 만물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제야에 치는 종소리는 인생의 108번뇌가 제야와 함께 모두 사라지고 새해 첫새벽을 연다는 의미가 있다. “달 지고 까마귀 울어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강가 단풍나무, 고깃배 등불 마주하고 시름 속에 졸고 있네 소주성 밖 한산사(寒山寺) 깊은 밤, 종소리가 객선까지 닿는구나.“ 이 시는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인데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는 이 시 한 수로 자신의 이름과 한 산사의 아름다운 종소리를 천하에 알렸다고 한다.  
545 Y 외1편/차영호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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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2017-03-01
17.03월 82호 시 Y 내가 사는 길목마다 니 몸내 나지 않는 곳 있을까 마음 속 체 눈을 더 성긴 것으로 바꾸어도 헛일 얼기미에조차 얼금 얼금 걸리니…… 상괭이*도 너끈히 삐져나갈 만큼 코가 큰 그물로 교체하여야겠다 물밑바닥 암초에 걸려 추 다 떨어지고 찢어진 그물이 풍력발전기 날개처럼 너풀거리는데 속살 속살 걸려 올라오는 목소리 목성 골짜기 깊숙하게 말을 숨겨도 저만치 안개 낀 성간星間에서 하늘 하늘 훌라후프 돌리는 허리 사랑의 흔적은 푸른 바다에서 작살에 찔린 물고기의 피같이 붉게 번지니 아직은 가본 적 없는 우주모퉁이 어디쯤 니 그림자 어룽이지 않는 곳 없을까 * 쇠돌고래 명命 해삼이 지 먹을 게 없으면 먼저 내장을 버리고 몸무게 줄여 버틴다하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해삼을 썰다가 후루룩 문어는 먹을 게 없으면 지 다리를 뜯어먹으며 새 다리가 돋을 때까지 기다린다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삶은 문어다리를 질겅질겅 온갖 것들로 채워진 나의 장기臟器여 우리도 열흘쯤 굶게 되면 베갯잇이라도 뜯어먹고 웅크리겠지 그런 줄도 모르고 누군가 확인해 볼 거야 발길로 툭툭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사)한국작가회의 회원, (사)우리시 회원.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youngghc@hanmail.net  
544 폐허 외1편/정훈교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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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2017-03-01
17.03월 82호 시 폐허 바람이 드나들던 그곳에 몇 개의 못 자국만 한 때, 이승의 이빨자국인 것처럼 웅성거리고 있다 당신이라는 문장을 읽다, 골반을 드러낸 채로 저녁이 온다 하얀 눈밭을 지나 산 하나를 지우며 당신이 온다 며칠 내내 입으로만 전해지던 소문이 마침내 발 앞에 내려앉는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당신이 어제 문을 닫았다는, 당신의 빈자리가 늘수록 골목의 그림자는 더 짙게 눕는다 점멸등처럼 말을 더듬거리던 당신이 오늘은 아예 문을 닫는다 못 볼 걸 많이 봤다며 결국엔 말을 닫은 것이다 아파트는 그대로고 골목만 낡아가는, 저녁은 그대로고 당신만 낡아가는, 아주 오래 된 저녁을 열고, 눈발이 날린다 나무로 된 절름발이 의자 위로 당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쌓인다. 정훈교 2010년 『사람의문학』 등단, 시집 『또 하나의 입술』과 시에세이집 『당신의 감성일기』가 있음. 시집서점 겸 출판사 <시인보호구역> 대표. 메일 : poetry2000@daum.net 주소 : 대구광역시 북구 호암로 40, 시인보호구역  
543 말의 씨앗 외1편/조재학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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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2017-03-01
17.03월 82호 시 말의 씨앗 기저귀 가는 데 다리를 들어서 몸을 뒤집는다 “아이고 요놈 봐라”하며 다시 뒤집어 허벅지 가만 눌러 잡으니 입술을 오므리고 뿌― 한다 소리들이 작은 구슬처럼 튀어나간다 바운서에 뉘어놓으면 몸을 비틀고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또 입술을 오므리고 뿌― 한다 저것이 말의 씨앗일까 무궁화가 하얗게 필 때 말이 세상에 없는 색깔로 피어나고 말이 누구도 그려내지 못할 모양으로 피어나고 천상의 목소리로 피어나고 말이 ‘음마-’ 라는 말이 연두 빛으로 피어나는 것을 본 적 있다 침이 꽃처럼 흘렀다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눈을 비벼대는 아기의 울음 밖에서 누군가의 말씀처럼 눈이 나린다 발가락 하나를 그림 밖으로 내놓고 - 최돈정 화백 초대전에 와서 녹색 녹색이 모여 녹색의 세상을 이룬 화폭에서 붉은 점 같은 것은 화석 속 이파리였다가 깃털 다 뜯긴 큰 부리 새였다가 거꾸로 선 화살촉이었다가 뼈만 남은 물고기였다가 빙글빙글 도는 무희였다가 잡은 손을 놓치는 연인이었다가 수백 년 달려와서는 없는 강물에 빠지는 붉은 별이 되었소 별을 생각하다가 커다랗고 네모진 소리 앞에 서오 소리는 검은 직선이고 소리는 붉은 곡선이고 구멍 뚫리고 절룩거리고 소리는 소리 속에 갇혀 까무러치고 악쓰고 고요하고 비틀거리고 하얗게 녹슬고 뿌리도 없고 우듬지도 없는 나무에 동글동글 매달리고 달려가고 뛰어오르고 흘러내리고 소리는 듣지 못하는 나는 우두커니가 되었소 우두커니는 강물인 듯 꿈결인 듯 어른거리는 것 앞으로 왔소 어른거리는 것은 네모네모네모로 쪼개지고 흩어지고 모이고 가라앉으면서 빛을 만지고 있소 슬그머니 우두커니를 만지오 긴 부리를 가진 대머리 둘이서 등을 맞대고 섰소 서로 반대 방향을 보면서 동행이라오 다가가 자세히 보오 팔 하나를 뒤로 내밀어 서로 손을 꼬옥 붙잡고 있소 (소리 없는 웃음이 전시장을 뛰어다니오) 내부를 술병으로 가득 채운 집이 있소 집이 왼손으로 맥주잔을 잡고 있소 맥주병에선 붉고 파란 거품이 솟아오르고 동그라미들은 뱅글뱅글 돌아가오 집은 눈동자가 빨갛소 자화상의 눈동자가 빨갛소 능소화가 노을처럼 피고 있소  
542 고립국 2 외1편/안민 file
편집자
1931 2017-03-01
17.03월 82호 시 고립국 2 - 제례의 구간 휘파람이 동굴을 인식할 수 없다 새들이 동굴을 예배할 수 없다 가을의 풀꽃도 그렇다 잘 죽고 싶은 심정은 몸 안의 대륙을 떠돌다 어떤 유전자와 결합해 발화하는 것일까 바람이 바람을 불러오듯 어둠만이 어둠의 눈동자를 인식할 수 있는 법, 아득한 묵시黙市의 세계, 자신도 모르게 유령이 되어버린, 가령 사연 많은 침묵이 그러하다 흠향하지 못한 영혼들이 나부낀다 동굴은 예전에도 많았다 바람을 맞고 화석이 되어버린 아버지도 그랬다 언어를 압류당한 아버지는 입과 눈은 물론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암전 상태였다 심장을 짓누르던 좁은 방과 산허리에 걸쳐진 모든 길과 무거운 허공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모든 것들이 뭉쳐져 거대한 동굴이 되었고 동굴 속에선 흐린 음악처럼 안개가 풀려나왔다 아버지는 동굴을 불러들이며 동굴을 느끼며 동굴을 인식하며 마침내 완전한 동굴이 되어 동굴 속으로 떠나갔다 딱딱하게 마비된 문양으로 쓸쓸한 어깨가 무너지며 교정 플라타너스 벤치 아래 그림자만 걸쳐두고 장기 결석한 친구 k도 그랬다 내가 그의 집에 당도했을 때 그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앓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구석에서 박쥐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토굴보다 더 깊숙한 지대, 음습하고 침침한 냄새만 떠다녔다 그 밤, 허공에선 아름다운 별들이 무수히 엉켜 흘러다녔고 다시 그와 같은 기압이 흐르는 밤이다 아홉 개의 구멍에서 아홉 개의 침묵이 흘러나온다 침묵의 입자들이 공간을 빼곡히 메운다 동굴이 확장되는 지대는 늘 이러한 구간이다 후면을 드러내지 않는 등이 더욱 고적하다는 걸 나는 꽃 시들어가는 걸 보며 알았다 수분이 빠져나간 꽃잎의 날刀은 더는 예리하지 않다 꽃은 빨강과 노랑을 잃고 어두운 빛깔로 얼룩이 지고 그 황량한 빛깔 사이로 아버지들은 온다 그렇다 지금은 가장 무겁고 고요한 구간, 나는 전생도 후생도 아닌 영역에 놓여 있다 누가 내 후생을 저당 잡히고는 내 몸을 연주하고 있는 걸까 고양이는 잠들 수 있으므로 최소한 나보다 위대하다 내가 불면을 앓는 것은 잠 속에서 반복적으로 집행당하기 때문이다 집행은 유전병과 같은 것이고 현실과 꿈은 형장에서조차 단절되지 못한다 누구나 의도와 상관없이 죽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들은 나를 끌어안고 오래 흐느꼈다 하지만 나는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영정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물끄러미 나를 주시했다 누군가 내 안을 건너고 있었다 사진 속에선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밖의 풍경보다 더 캄캄했다 빛의 알갱이들이 빠른 속도로 탈출하고 있었던가 이건 분명 악몽일 것입니다 사실 나는 집행 전인 게 분명하죠 그 착오가 꿈이란다 굳은 표정을 벗겨냈을 때 더 단단한 빛깔이 드러나게 마련이지 우린 이 모든 걸 경계해야 한단다 사방은 침침하고 분리된 손들이 너무 분주해요 손이 기도 근처에서 펄럭이는 게 보이지 않니 흐릿한 예감 몇 개가 지나간다 예감은 늘 적중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세계世系는 겨울 안개처럼 희미했다 오래전 내가 지은 미사곡이 공명을 일으키며 사방을 떠다닌다 나는 그 속에서 수장되는 짐승처럼 천천히 가라앉는다 제례는 내 뼈를 도굴함에 다름 아니므로 아직 비문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꽃잎의 날刀들을 모두 절취당했습니다 동굴이 무대일까 무대가 동굴일까 누군가 무덤이 허공에서 흘러가고 있다고 적은 걸 본 적 있다 동굴은 오래전부터 허공에도 존재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무덤은 동굴 안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가면을 벗기 위함이라고 웅변하곤 했는데 고백하자면 외면 저편의 깊숙한 내면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빗물로 환생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까 어두웠던 어느 겨울 저녁, 장애 앓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운 채 빗물 위를 떠가는 노인과 조우한 적 있다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라며 축축한 등록증을 내민 손과 조우한 적도 있다 그들은 모두 눈 안쪽이 동굴처럼 막막했고 빗물이 새고 있었다 나는 자주 침수되고 길들은 허망하게 지워진다 화분에 규범적으로 물을 주듯 몸 안에 알코올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완전히 수몰되기 직전에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사막보다 내 몸이 더 건조함을 안다면 애인은 나를 지워버릴 수 있을까, 라는 지문 위로 겨울비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계속 묵시黙市의 상태이고 시장市場은 규칙적이다 사전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통증은 보이지 않는다 동굴 저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연락 한 번 없었어 여기는 잠이 없는 세계고 항상 배우처럼 분주해 배가 부를 때 가장 배가 고프고 가장 주릴 때 어떤 욕구도 일어나지 않아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 어떤 음성은 진부한 자막보다 더 실패일 수 있다 박약한 심장이 쿵쾅거린다 사전을 반복적으로 뒤져본다 도처에 증거와 흔적이 가득하다 이 또한 집행 후의 습성이다 나는 여전히 집행 전이거나 동굴 밖이라고 오인할 때가 많다 통증을 정의한 지문은 어디에도 없는데 눈을 감으면 수만 개의 가시가 우수수 몸을 일으킨다 입을 틀어막는 배우는 숭고하다 떠나간 여자는, 떠나간 가계는, 떠나갔지만 남겨진 장애는, 그것을 연주하는, 악보는 어디쯤에서 안녕할 것인가 마지막 풍경은 카메라 눈동자가 형상을 각인하듯 여덟 번째 동굴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집행을 당하기 전 내가 먼저 나를 집행해야 했는데 뚜껑 없는 동굴 안으로 죄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아직 인간의 껍질을 버리지 못한 슬픔으로 10분에 한 장씩, 하루에 144장의 제문이 필요하다 이것이 타인과 다른 나의 영역이다 촛불은 배달되지 않는다 의자는 배달되지 않는다 현란한 몰락과 빛나는 절망만이 당도할 뿐이다 가시덤불도 그렇게 완성된다 분향은 계속되고 나는 시집을 찢어 뒷면에 삼차 함수와 도달하지 못할 변곡점과 열아홉 단계의 교차방정식을 풀어낸다 동굴 속에선 풀지 못할 함수가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오래전 경험한 적 있다 풀어낸 함수 위에 축문을 써내려간다 나를 스쳐 간 이들이 동굴 속에서 변이계수를 설계하며 절벽을 구상한다 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행복하고 화려하다 홀로 침묵을 팔고 홀로 침묵을 사는 구간, 내가 실수로 엎질러버린 계절은 리터 규모 6의 강진 같은 것일까 폐렴과 폐인은 어디서 어디까지 구간입니까 동굴은 어디서 어디까지 무너지고 있습니까 분노의 끝에 슬픔이 매달려 있다고 했는데 누구의 눈과 입이 슬픔을 점유하여 소멸을 매매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잃고 발이 아홉 개 달린 괴물이 절벽 아래에 있다 나를 껴안고 울던 아버지들이 이젠 괴물을 끌어안고 흐느낀다 내 그림자가 먼저 절벽 쪽에서 나를 배웅하고 있다 자정의 동굴은 가장 어두우면서 적확하다 메카는 천 년 후의 새벽처럼 아득하고 죄송합니다 심장이 칠흑보다 캄캄합니다 오늘도 셀 수 없이 어둠을 조립했습니다 내가 유치되어도 동굴의 내일은 염려하지 마시길 그러므로 지천세사祗薦歲事 상尙, 향饗 고립국 3 -沒 0015. 1100. 0023. 나는 계절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겨울 속에서 내내 펄럭이기만 할 뿐입니다 프로필 본명 안병호, 경남 김해 출생, 2010년 《불교신문》신춘문예 당선, 부산작가회의 회원 메일; dominiko8@hanmail.net  
541 유전자 검사한 독도 외1편/김숙자 file
편집자
1800 2017-03-01
17.03월 82호 시 유전자 검사한 독도 대한민국 자궁에서 태어난 막내 독도야 울지 말아라 일본이 너를 데리고 갈까봐 무서워 하지 말아라 유괴범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모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자꾸나 어미는 일본이 너를 자기자식이라고 우길까봐 유전자검사를 했단다. 검사결과 너는 나의 핏줄 한국 주권의 상징이 되어버린 섬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우리 영토 당연한 일을 논란거리가 되도록 방치한 어미의 무관심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어지게 했구나 너 없으면 못사는 나의 자식아 속 울음일랑 긴 세월에 묻어두고 두 발 쭉 뻗고 잘 자거라 중국여자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려면 그녀는 남편과 함께 도시에서 만두 장사를 해야 한다. 만두 장사를 하다가 홀시어머니를 모시려고 시골로 내려와서 과수원 일을 하면서 남매를 낳아야한다.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에 견딜 수 없어 집을 나가야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야한다. 시머머니의 시집살이는 점점 더해야한다. 시어머니와 싸우다가 남편한테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아야한다. 남편 곁을 다시 떠나 아이들을 중국으로 보내고 위자료를 요구해야한다. 남편이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해서 한 푼도 받지 못해야한다. 아이들도 남편도 없이 혼자된 그녀는 남편의 장삿날, 집으로 들어가 남편의 시체를 붙잡고 통곡을 해야한다. 시누이들이 그녀의 입을 벌려 침을 뱉고 머리카락을 뜯고 욕설을 퍼부어야한다.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 숙부 시댁식구들의 박대에 견디지 못해 남편과 살던 집에서 나와야한다. 남편이 늘 뒤에 따라다니는 것 같아야한다. 헛것이 보여 길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남편인 줄 알고 팔짱을 끼어야한다. 어느 누구의 남자도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아야한다. 봄에 중국에서 온 기러기는 남편이 묻힌산을 넘어 중국으로 날아가야 한다. 기럭기럭 ... 아호:명헌(茗軒) 김숙자 저서:날고싶은제비(소설) :가족사진(시집) 문학세계 신인문학상수상 나래시조 신인문학상수상 미당 서정주 시회 문학상 수상 메일:dkll2004@hanmail.net http://cafe.daum.net/myeong2011(별빛언덕)  
540 절망의 기원 외1편/이승호 file
편집자
2009 2017-03-01
17.03월 82호 시 절망의 기원 절망은 자라난 것 출생과 함께 어머니의 대지에 버려져 이 고깃덩어리 육체 안에서 먹고 마시며 커간 것 모든 희망의 말을 달콤하게 삼키고 영원 불멸의 악귀처럼 나를 먹고 더불어 살아온 것 나의 풍부함 스스로에게 놀랐다면 그것은 절망 때문 지난 희망 목록에서 절망이 걸어 나왔기 때문 희망은 아직도 절망의 반대라고 생각하는가 세계의 가르침 낮과 밤의 콘트라스트 절망은 멀리서 느닷없이 오지 않는다. 긍정의 노래 2 다시 어떻게 시작하지 그 물음에 답하려거든 주위를 둘러보라 네가 남긴 기록과 결의는 희미해지고 절망이라도 예찬할 듯이 들떠 방황하는 청년의 시대는 사라졌으나 가난한 자들의 유랑처럼 안식도 없이 이제 남은 것은 찔끔거리는 눈물과 오그라든 육신뿐이라고 마치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풍쟁이와 주정꾼과 난폭한 자처럼 사람들이 네게 퍼붓는 욕설을 헛되이 비웃어주며 너의 운명을 사랑하는 신에게조차 가련한 자여, 탕자의 노래는 그렇게 시작했는가 그러나 오늘 새의 노래가 아름다운 이유는 충심으로 생을 소진하고 되살아오르는 늙은 나무에게 생명이 생명에게로 돌아가는 저 숭고와 명랑함이 서로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낮지만 지혜로운 뱀은 알고 있으니 극복의 형상들 대지 위에 수를 놓고 죽은 자들은 다시 돌아와 고단한 자의 마른 입술에 물을 적셔준다 새는 또 아침의 기쁨 정겹게 열려 있는 대지의 품으로 걸어가리라 그때 생이란 눈에 가득 찬 것들이 가슴을 채우고 남아 어쩔 줄 모르고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슬픔에 빠질 때에도 대지는 다만 우리의 보금자리를 다시 한 번 감싸려는 것이니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옳다, 나는 나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발본색원이란 무지하고 포악한 권력자의 말 긍정의 노래는 부정의 노래와 함께 한다 이 땅에서 아아 몸을 뜨겁게 하려고 새들은 날아오른다 모든 남아 있는 자들의 봄을 위하여. 이승호 강원 춘천 출생. 2003년『창작21』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느 겨울을 지나며』『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외. E-mail : nacham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