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페이스



이제 더 이상 기사들은

여왕을 위해 성전聖戰을 하지 않았다

호밀밭을 가꾸던 농기구들을 내려놓고

여왕의 부름에도 시큰둥했다

엉겅퀴가 뒤덮인 클로버 숲에는

숙련된 첨병들이 포진하였고

해자를 덮은 성곽 위로는

하트 문양의 불덩이들이 날아다녔다

성문을 열라는 성난 군중들의 함성이

화살같이 치닫는 여왕의 침실

다이아몬드 방패로 무장한 근위병은

여왕의 눈치만 보다 안절부절하는

무능력한 킹의 조급한 그림자를 쫓아

검은 눈동자만 의미 없이 굴려댔다

군중들이 성으로 진입해 들어가

여왕을 상징하는 깃발을 불태워도

여왕은 마지막 카드조차 내어놓지 않았다

기사들의 갑작스런 변심만 탓할 뿐

여왕 자신의 감추지 못한 포커페이스로

실없는 변명만 하였다

이제 더 이상 기사들은

여왕을 위해 성전을 하지 않았다

군중에게 패를 읽혀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여왕의 추잡한 포커페이스.



붉은 립스틱


믿어 달라고

한번만 더 믿어 달라고

흙바닥에 엎드려

더럽게 애원하는

정치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유세가 끝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 게

끔찍하고 또 끔찍하다

상전이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하는 대한민국의 주권

하늘같이 믿고 싶어도

미개인 취급하는 꾼들의

능수능란한 재주를 당할 재간이 없어

정작 미개인 같은 미개인이 되어서

정치인의 말에 귀신이 든다

정치인의 혓바닥에 발린

달달한 허세를 이상처럼 좇는

좆도 없는 사람들,

한번만 믿어 달라고 더럽게 애원할 때

좆 빠지지 않게 미리 채비를 잘 하세나.


권혁재

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집 『투명인간』『고흐의 사람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