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오년 막걸리


나는 막걸리가 좋다. 그리고 막걸리는 좀 마신다. 그래서 막걸리는 간혹 마시고 싶기도 하다. 막걸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친정엄마 때문이다. 친정 엄마는 막걸리를 곧잘 집에서 빚으셨다. 아버지께서 한 때 양주장에서 일을 하셨다. 그때부터 재미 삼아 막걸리를 빚기 시작하셨다. 막걸리 맛은 주인장이 결정한 때에 따라 예민해진다. 그래서 주인장은 적정한 때를 잘 알아채야 한다. 엄마는 때를 알아채야할 때 꼭 나를 부르셨다. 나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될 때를 잘 알아채야 했지만 늘 그렇지 못했다. 어렸을 때 내가 담당했던 것은 간을 보는 것이었다. 간은 곧 음식의 때를 알아채는 것이다. 엄마는 더 넣어야 되고, 줄어야 될 때 꼭 나를 옆에 두셨다. 막걸리에는 고두밥이 중요하다. 고두밥도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술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쌀을 불려 적정한 물을 넣고 고두밥을 할 때도 엄마는 나를 부르셨다.

“얘! 물이 이 정도면 됐을까?”

“응. 엄마! 된 것도 같은데? 아니 아니다. 엄마! 물을 조금 덜어야 될 것 같은데.”

“그치? 엄마도 조금 많은 것 같더라니!”

하지만 내 대답은 나도 모르는 말이었다. 그냥 생각 없이 한 대답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가 몇 번이고 물어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것 같다. 이렇게 고두밥이 다 되면 식힌다. 이때도 나는 고두밥 간을 봐야 했다. 고두밥이 어느 정도 고들고들한지 잘 씹어서 엄마한테 말해야 했다. 나는 나도 잘 모르는 대답을 했다. 엄마는 혼자서 술 만드는 방법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도 어린 나를 모든 과정에 끌어들이셨다. 다음은 누룩과 물을 잘 섞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항아리를 잘 씻어 햇빛에 바싹 말린다. 그 항아리에 잘 섞어진 고두밥과 누룩, 물을 정성껏 담는다. 그리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를 위해 안 쓰는 낡은 이불로 며칠을 덮어 놓고, 뽀글뽀글하게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일주일 정도 지나 가라앉은 찌꺼기들을 채에 걸러내면 된다. 엄마는 이틀 정도 지나면서 간을 보셨다. 술이 너무 독하다 싶으면 물을 더 넣었다. 그리고 또 나에게 간을 물어보았다. 초등학생인 내가 무슨 술맛을 알겠는가! 그래도 엄마는 연실 물었다.

“어떠니? 술이 좀 달지 않니?”

“아니. 그냥 쓴데.”

“그래? 한 번 더 마셔봐라. 나는 어째 좀 달다.”

두 번째 간을 보게 되면 살짝 입술만 축여도 어린 내 입속에서는 독한 술맛에 눈까지 어지러워졌다. 그런데도 엄마는 연실 간을 보라 하셨고, 나는 나도 모를 답을 연실 성의 있게 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내 대답을 궁금해 하셨는지 모르겠다. 간은 엄마가 더 잘 보는 데도 말이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는 고두밥과 함께 솔잎을 넣으시는가 하면 어느 해는 구기자도 넣으셨고, 칡도 넣으셨다. 해가 지날수록 넣는 가짓수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간을 보는 내 입맛은 더욱더 모르는 맛이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연실 물었다.

“얘! 간이 어떠니? 솔잎이 너무 강하지? 칡 맛은 좀 나니?”

아니! 내가 언제 칡을 먹어봤을까? 솔잎은 또, 언제 먹어 봤을까? 나는 겨우 중학생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연실 간을 봤다. 그리고 역시 모르는 대답을 했다.

“엄마! 솔잎 더 넣어야 될 것 같은데 너무 향이 연해!”

“그치? 엄마도 그런 것 같더라!”

이렇게 술을 담그셨던 엄마는 내가 시집가는 날에도 담그셨다. 시집가는 날 오시는 집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그 때는 내가 없었다. 아마도 엄마 혼자서 간을 보셨는가보다. 첫 번째 술을 걸러 몇 병을 잘 두셨다고 한다. 그리고 잊으신 것이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아버지 기일 즈음이었다. 친정엄마는 또 술을 담그셨고, 집안에 있는 항아리를 찾아 청소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오래된 구식 변소에서 입이 깨진 항아리 하나와 금이 간 항아리를 들고 나오신 것이다. 푸세식 시골 변소는 마당 끝에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그 화장실에서 쓰러지신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 화장실에 있던 항아리는 변소 쓰레기통으로 썼었다. 엄마는 모처럼 쓰지도 않는 항아리를 내다버리시려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항아리에서 까만 봉지를 둘둘 싸맨 병이 세 개가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새까만 먼지와 똥냄새가 잔뜩 배어 있었다. 그래도 비닐봉지를 벗기고 보니 십년 전 막걸리를 담아둔 그대로였다. 엄마는 건망증이 심하셨다. 엄마의 건망증이 결혼식 때 담근 술병을 광 항아리에 넣지 않고, 변소 항아리에 넣게 한 것이다. 십년이 된 막걸리는 그렇게 우리들 앞에 드러났다. 십년 전 시간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이날 이때까지 냉대했던 엄마의 건망증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제사상 위에 모셔진 아버지도 엄마의 건망증에 박수를 보내셨을 것이고, 이 날 만큼은 할 말 잃으시고 껄껄 웃으셨을 것이다. 세 병중 한 병은 아버지 제사상에 올렸고, 한 병은 새 식구가 된 사위들과 며느리 신고식으로 마셨다. 그리고 한 병은 엄마께 몰래 달라고 했다. 꼭 드리고 싶은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 술은 친정에서 가져와 다시 우리 집에서 2년을 더 묵었다. 내일, 내일이면 갖다드려야지 하면서 뒤로 미뤘던 것이다. 술이 묵은지 십 삼년째 되던 아버지 기일에, 그 선생님도 영원히 뵙지 못할 길로 가셨다. 나는 선생님 가는 길도 내일, 내일 미루다 가보지 못했다. 내일. 내일. 내일! 나는 때를 모두 놓쳤다. 그 때는 간을 봐야할 때였고, 또 움직여야할 때였다.

그 술은 내일이면 십 오년이 된다. 내일은 아버지 기일이고, 또 선생님 기일이기도 하다. 때는 예외 없이 누구도 기다려 주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소년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처럼 그 선생님 역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 내가 놓쳐 버린 것은 모두 내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다름 아닌 나의 게으름이었다. 지금! 십 오년 묵은 막걸리를 한 잔 따라 놓고 있다. 그리고 선생님께 머리 숙여 사죄하고 있다.

제가 한 잔 올립니다. 선생님, 한 잔 받으세요! 제가 얼마나 뵙기를 고대했는지 모르시죠? 얼마나 이 술을 드리고 싶었는지 모르시죠? 이 술이 어떤 술인지 아세요? 제 게으름이, 제 그리움이, 제 못난 문장을 보여드리자 했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만이, 때를 놓친 아쉬움에 땅바닥을 치며 울어댄 통곡 소리가 녹아 있는 십 오년 묵은 막걸리입니다. 쭈욱! 드셔보세요. 드시고 간 좀 봐 주세요. 간이 어떠신지요? 오래 묵힌 시커먼 게으른 맛이 어떠신지요? 씁쓸하죠? 차마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쓰죠? 하지만 저는 단내가 펄펄 나는 술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날 밤. 혼자서 십 오년 묵은 막걸리를 마셨다. 먼저 따라 놓은 한 사발을 들이켰다. 혀가 닿는 순간 말할 수 없이 썼지만 목구멍 끝을 넘어가면서 달았다. 그리고 뱃속은 뜨거웠다. 사발을 내려놓는 순간 얼굴 전체가 뜨거워졌다. 사발을 움켜진 내 손도 뜨거워졌다. 멀리 계신 아부지 얼굴이, 선생님 얼굴이 뜨겁게 떠올랐다. 또 한 사발 따랐다. 들이켰다. 목구멍에서 꾸역꾸역 소리가 나도록 들이켰다. 그 소리에 게으름이 넘어가도록 들이켰다. 이번에는 구수했다. 십 오년 묵은 솔잎 향은 향긋했고, 누룩은 달았고, 고슬고슬한 고두밥은 눈물이 날 정도로 구수했다. 또 한 사발 따랐다. 막걸리는 쫄쫄거리며 사발에 담겨졌다. 사발 반을 겨우 넘기고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병을 거꾸로 놓고 탁탁 털었다. 마지막 몇 방울까지 사발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 사발이었다. 십 오년 시간도 이 잔으로 마지막인 것이다. 마지막 잔에 담긴 십 오년을 한참 보았다. 빛깔은 누런색이 발해져 갈색이었다. 시큼하면서 쓴맛이 강한 향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잔 위에서 똥냄새처럼 풍겨댔다. 새끼손가락을 담궈 휘이익 저었다.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 이제 선생님도 이렇게 가시렵니까?

아~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누구에게 간을 물어야 됩니까? 말씀 좀 해 주세요!

마지막 사발을 들이켰다. 막걸리는 독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독했다. 더 독한 것은 내 게으름이었다. 내 게으름은 하품을 타고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하더니 선생님께 사죄를 비는 사발 바닥까지 똥냄새를 풍기며 숨어들어 왔다. 그 독한 것이 다시 이불속까지 기어들어 왔다. 나는 눕혀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점점 돌고 있었고, 나도 돌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멀쩡한 것은 내 게으름이었다.

  

     채선후 : 충북음성에서 나고 여주 남한강변에서 자랐다.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동산불교대학,대학원에서 불교경전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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