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벽완월



부식은 우물자락에 드리운 물앵두가지를 잡아당겨 열매를 훑는다. 계속된 폭염 탓에 물앵두는 제 철보다 이르게 영글었다. 느슨해진 행장을 새로 여미기 위해 솔숲 쪽으로 들지 않았다면 우물을 못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우물가에는 떨어진 앵두로 여기저기 발긋발긋하다. 앵두나무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부벽루는 손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을밀대에서도 굽어보는 맛이 있었는데 부벽루까지 다다른다면 서경자락이 한눈에 훤히 들여다보일 터였다. 이곳이 언제 관군의 진압을 받았던가 싶게 한가롭다. 대동강을 오가는 나룻배와, 강어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모습과 엿판을 안고 어슬렁거리는 엿장수들의 모습은 그림 속 풍경 같다.

갈증과 허기를 달래기엔 앵두는 감질 난다. 부식은 두레박줄을 둘둘 풀어 우물에 풍덩 빠뜨린다. 줄을 끌어당길 때마다 두레박에 넘쳐 우물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경쾌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물총새 소리 같다. 부식은 입안에서 굴리던 앵두 씨를 뱉고 두레박물을 들이켠다. 물에서 이끼 냄새가 난다. 두레박줄을 당기면서 우물 벽에 부딪쳐 이끼를 긁어왔다. 두레박질은 쉽지 않았다. 물 한 바가지 길어 올리는 것도 요령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다. 무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한겨울 새벽에 우물물을 뒤집어썼다는 정지상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우물과 우물가의 풍경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아낙들이 모여 푸성귀를 헹구거나 빨래를 하는 모습과 대숲을 맴도는 잠자리도 모두 글감으로 보였다.

남바위를 훌렁 벗고 물을 덮어 쓰고 싶다. 바짝 묶은 신들메도 풀렸고 바짓가랑이를 죈 행전은 발목위로 자꾸 당겨 올라 종아리와 허벅지에 쩍쩍 엉겨 붙었다. 적지에 홀로 남으려면 촌부 차림이어야 안전하다는 부하들의 말을 따르기 잘 한 것 같다. 대동강 언저리를 돌 때도 부식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촌부 차림은 갑옷에 비한다면 깃털이다.

묘청의 난은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개경에 승전보를 띄웠지만 부식에겐 승리감이 차오르지 않는다. 서경 군사들은 끝까지 장렬했고 적장의 자결로 싸움은 끝났다. 부식은 어제 나루터까지 따라온 병사들을 한사코 돌려보냈다. 굳이 혼자 부벽루를 오르려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부하들은 안타깝게 물었다. 부벽루에 올라서서 대동강을 굽어보며 지상이 품었을 시적감흥을 상상해보고 싶다고 부하들에게 말 할 필요는 없었다.

부벽완월이 서경 팔경 중 하나라지만 정지상 없는 서경은 아무리 풍치가 빼어나도 부식에겐 절경이 되지 못했다. 정지상은 서경 진압을 하러 오기 전부터 개경에서 부식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서경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서경 출신 중에 걸출한 인물이 많다고 하나 그 모두가 지상만하지 않았다. 지상은 연광정이나 대동강변의 어느 주막을 서성거리거나 영명사를 돌며 시구라도 읊조릴 것만 같다. 서경에 머무는 동안 어느 때보다 지상의 환영에 붙들려 있었다.

임금은 난을 일으킨 주요 인물만 처치하라고 명했다. 부식이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지상을 죽인 것을 두고 그를 향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시기심에 사로잡혀 지상을 죽였다는 말은 틀렸다. 나라를 더 혼란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부식이 그때 지상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람들은 흉흉하게 부식을 몰아갔다. 지상을 향했던 순정한 동경과 그를 품었던 절절한 마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떤 소문에도 의연해야 했다. 좀 더 일찍 지상을 처치했더라면 혼란한 정세가 빨리 수습되었을 것이란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지상에게 질투심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지상의 경지에 닿지 못한다는 자각에 이를 때마다 그를 향한 질투심은 더욱 맹렬해졌다. 부식의 시구는 시원하게 나아가는 맛없이 행간마다 머뭇거렸다. 그것은 조촐하면서 유려한 맛이 감도는 지상의 시구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시작부터 막혀 먹물 잔뜩 적신 붓을 그러쥐고 하염없이 창호지만 바라보기만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며칠을 두문불출하고 시작에 매달린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변변한 시 한 편 자아내지 못했다. 붓을 내팽개치기엔 억울했으며 붓을 잡았다하면 자신이 무척 한심하기만 했다. 눈을 감으면 지상의 초강초강한 얼굴만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시구를 자아올리느라 핼쑥해졌으리라 여겼다.

지상의 ‘대동강’을 필사한다면 그의 정서에 가 닿으려나 싶었다. 부식은 ‘대동강’을 수십 번씩 필사했다.

雨歇長堤草色多 비갠 긴 언덕에 봄빛은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로 임 보내는 구슬픈 마음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는 것을.

같은 시를 계절을 바꿔가면서 필사를 했다. 때마다 감흥이 달랐다. 송나라 사신들이 부벽루 판액에 적힌 정지상의 시 ‘대동강’을 가리켜 ‘너희 나라에도 이런 시인이 있었구나’ 하며 탄성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시인묵객들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두들 지상의 재기발랄한 감수성을 치켜세울 때 부식은 지상을 부추기지 않았다. 지상의 반만이라도 시를 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상을 부정하면서도 그에게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은 고통이었다. 지상의 경지에 닿지 못할 바엔 그를 끌어내려야 했다. 치졸했으나 질투심을 누그러뜨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국자감의 쌍벽이라 하면 학문에서는 윤언이요, 문장에서는 부식이라고 일찌감치 한림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지만 지상을 빼고 문장을 논한다는 것은 호랑이 없는 산속에 토끼가 왕 노릇하는 꼴이었다. 지상을 서열에서 뺀 것은 그를 따로 받드는 것만 같았다. 시 꽤나 쓴다는 풍류객들 중에서도 지상 시만큼 선경후정의 대구를 절묘하게 지어내는 이도 드물었다. 잠꼬대 같기도 하고 선문답 같기도 한 지상의 시는 만당(晩唐)시인들의 시풍과 닮았으나 만당시와는 분명히 달랐다. 자연을 묘사하는 감각적인 색채 언어의 구사력은 지상이 만당 시인들보다 몇 수 위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지상의 시는 옥에 티였다. 백성들의 세상살이를 외면한 시는 풍악일 뿐이지 시가 될 수 없노라 못 박았다. 선동적이지 않으면서 적확한 어휘로 백성들의 삶을 잘 그려낸 당나라 백낙천의 시들을 들먹이며 지상의 심미주의적인 시작법에 엉너리를 쳤다. 부식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지상에게 더욱 안달을 했다.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의 시구들을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여러 시인들의 시를 뒤져보아도 지상의 시구와 같거나 비슷한 구절들은 찾지 못했다. 지상을 글도둑으로 몰 끄나풀을 찾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지상만큼 정한을 풋풋하게 살려낸 시인이 드물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지상을 향한 질투심이 타오를 때마다 시궁창의 오물을 핥는 생쥐처럼 한없이 초라했다. 문풍지에 밴 달빛을 노려보며 어서 해가 밝기만을 기다렸다. 푸른 관복을 입고 조정으로 뚜벅뚜벅 걷는다면 시구쯤은 하찮게 여겨질 것 같았다. 시라는 망령에 빠져 미망에 흔들렸던 자신을 빨리 일깨워주는 것은 푸른 관복일 터였다. 자신이 기필코 해야 하는 일은 백성들이 안위한 삶을 일구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시를 쓴다손 치더라도 백성이 주인공이 되는 시어야 했다.

들판을 지나다가도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마음이 놓였다. 곡기든 구근이든 풀죽이든 지핀 불에 익힐 식량이 있다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백성의 어려움을 드러내거나 사람들의 계몽을 부추기는 시구들은 용을 쓰지 않아도 줄줄 흘러나왔다. 누군가 부식의 시에 골샌님 냄새가 푹푹 난다는 말을 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땅에서 끼쳐오는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 부식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길섶으로 비켜선다. 흑립은 내리쬐는 햇볕을 조금도 가려주지 못한다. 시퍼런 억새줄기 사이로 더운 기운이 훅훅 올라온다. 손은 핏물로 끈적끈적하다.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 주느라 길섶을 비켜서다가 미끄러졌다. 시퍼런 억새줄기를 잡다 손이 베는 줄도 몰랐다. 손뿐만 아니라 억새에 쓸린 턱과 목도 따끔거린다.

부식은 왔던 길을 되돌아 굽어본다. 억새 덤불 사이로 사내들 등짝이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오르막길에 숨이 차오를 때마다 입에서 숙취가 난다. 서경을 진압한 기념으로 어제 밤에 벌인 자축연 때 술을 마셨다. 빈속이었지만 여느 때의 주량 두 배가량은 마셨을 것 같다. 전하! 서경을 완전히 토벌한 이 마당에 무엇이 두렵습니까, 흔쾌히 한 잔 들이켜십시오.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부식에게 보좌관이 호기롭게 외쳤다.

적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취기로 보내고 싶지 않아 자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취하고도 싶었다. 만감을 달래는 데는 술이 으뜸이었다. 술기가 돌수록 지상만 떠올랐다. 마음을 다해 지상을 따랐지만 그와 허심탄회한 술자리 한 번 갖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늘 퇴짜만 맞은 것 같았다. 지상에게 퇴짜를 맞고 온 날이면 먹을 흠뻑 갈아댔다.

황모필에 먹을 듬뿍 적셔 종이를 여며 잡으면 머리가 암담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먹물 튄 수십 장의 고려지는 구겨진 채 온 방을 굴러다녔고 눈을 뜨면 창호에 여명이 스며들었다. 도포를 벗지 않고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며칠 밤을 황모필에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지상의 시를 알기 전에는 결코 없던 일이었다. 돌림병을 앓는 이처럼, 횟배 앓는 이처럼 시를 앓았다.

지상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지상의 말을 무조건 따르리라 작정했다. 좋은 시를 쓸 수만 있다면 뭐든 할 마음이었다. 한 일 자 긋는 일부터 익혀야 한다고 해도 할 터였다. 염원은 간곡했다. 지상은 부식의 꿈에 나타나 한수 가르쳐 주었다. 부식은 어느 화창한 봄날에 취해 두련 함련 첫 두 구절을 지어 지상에게 보였다. 柳色千絲綠(버들 빛은 천 가지가 푸르고) 桃花點萬紅(복사꽃은 만 점이 붉구나) 지상은 종이를 내치며 호통을 쳤다. ‘네가 버들잎이 천 가지인지 꽃이 만 점인지 다 헤아려 봤단 말이냐, 왜 柳色絲絲綠(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桃花點點紅(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하지 못하느냐’라며 재빠르게 한 글자씩 빼고 넣어주었다. 글자 하나 바꿨을 뿐인데 바꾸기 전과 시의 분위기는 달랐다. 테두리를 벗어버린 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버들가지 휘늘어지고 복사꽃 만발한 봄날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부식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두 구절을 적어 두었다.

꿈에서 얻은 두 구절에 덧붙여 오언절구를 완성해 지상에게 보였다.

“차라리 경전을 쓰시지요.”

조롱이었다. 나머지 두 구절이 훈계조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부식의 시구는 경전과 시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말은 시평 때마다 나왔던 말이었지만 지상에게 듣기는 처음이었다.

“경전이 시가 못 되는 이유라도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식은 지상에게 받아든 고려지를 돌돌 말며 공손하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부식보다 열 살가량이나 적은 지상이었으나 그를 조금도 하대하지 않았다. 좌정언이라는 지상의 벼슬은 대제학 보문각에 몸담고 있던 부식의 벼슬에 비한다면 한참 낮은 자리였다.

지상이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왔다는 걸 들먹이며 은근히 지상을 무시하려 드는 관료들도 있었다. 영웅은 고향이 없다고 했 듯, 지상이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았다고 해도 그것은 부식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지상의 시에서 묻어나는 청신한 기운은 소박했던 그의 삶에서 우러났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지상이 도포자락을 젖히고 걸을 때면 학의 날갯짓처럼 보였다.

부식은 아낙의 치마에 닿지 않으려고 좁은 풀 섶을 조심스레 걷는다. 아낙은 치맛자락을 여몄지만 풍성한 치맛자락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다. 쪼그려 앉은 아낙은 앵초 무더기에서 가는 꽃줄기를 뽑아 올린다. 아낙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뭉쳐있다.

“메꽃이 흐벅지게 피었구나야!”

연분홍 꽃 넝쿨에 뛰어드는 아낙의 얼굴은 메꽃만큼 환하다. 여인네 몇 명도 덩달아 꽃 넝쿨로 몰려간다. 여인네들 손에는 메꽃, 은방울꽃, 산나리 등 들꽃이 들려있다. 여름철이면 개경 들녘이나 뒷산에서도 흔히 피는 꽃들이다. 꽃이라면 부식의 집 울안을 메우던 능소화나 매화, 당국화와 창포 등의 이름만 알았을 뿐, 들꽃은 모두가 그게 그것 같았다. 부식은 들꽃이나 새, 곤충처럼 뭇 야생들의 생명에 조예가 깊지 못했다. 곤충이나 새, 들꽃의 이름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도 지상 때문이었다. 울 밖의 것을 야생이라 이름 붙이는 것도 지상의 말투였다. 뭇 야생들의 자태에서 삼라만상을 생각한다는 지상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가 율조를 띤 것 같았다.

琳宮梵語罷 법당의 독경 소리 마치자

天色淨琉璃 하늘 빛 맑기가 유리 같구나.

언젠가 술자리에서 지상이 즉흥적으로 읊조린 구절이었다. 지상은 술자리에 오기 전에 어느 암자를 다녀오는 길인 듯 했다. 지상의 손에 갖가지 들꽃이 들려 있었다. 낮술을 마셨는지 그의 음조는 취기에 젖어 있었다. 술에 취하면 지상이 불쑥불쑥 시를 읊곤 한다는 말이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두련과 함련을 뱉고 지상은 입을 다물었다. 군더더기 없는 시구였다. 좌중의 모두는 지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지상은 입을 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정적은 제법 오래 갔다.

“남호! 그 두 구절 나한테 주시지요. 다음 구절은 내가 지어 볼 것이오.”

부식이 정적을 깨며 호기롭게 외쳤으나 지상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시구를 달라는 말이 너무 쉽게 튀어나와 부식 자신도 당황했다. 누군가 부식의 빈 잔에 술을 채우지 않았다면 어색한 침묵은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식은 성급하게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두 구절 나한테 주시지요.”

밀어붙이자는 심정이었다.

“글 동냥을 하는 이가 있다하더니 헛말이 아닌가 보오, 허허허.”

술상 끝에 앉은 윤언이었다. 그는 부식이 넘지 못할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학문의 깊이나 넓이가 부식을 넘는 이는 윤언이었다. 윤언이는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쓰기로 했던 그의 아버지 윤관을 밀어낸 사람이 부식이라고 여기고 호시탐탐 부식에게 앙갚음할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그도 도참사상과 풍수 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역성을 드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평소 남호의 시를 애송하고 있었소. 그런데 방금 그 같은 영롱한 시는 또 다른 맛을 자아내는 것 같소이다. 두 구절 내가 가져다가 나머지 구절을 지어 남호에게 보이겠소이다.”

부식의 어조는 더욱 간곡했다.

“그깟 하품 같은 소리가 시가 되기나 하겠소? 하품을 시라 하니 뇌천 취향이 참으로 독특하십니다, 하하하.”

술잔을 잡은 그의 손에 풀물이 배어 있었다. 지상이 겸손한 것인지 만용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식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기는 싫었다.

“나는 방금 읊조린 남호의 시구가 진정으로 좋다고 했소. 그런데 남호가 나를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소이다.”

“허참! 제가 왜 뇌천을 빈정거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식은 지상의 말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강절편을 문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지상은 문을 밀치고 나갔다. 지상의 도포자락이 일으킨 바람에 호리병에 잠긴 초롱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관료들의 헛기침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부식도 지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관료들의 웃음이 뒤통수에 따라붙는 것 같았다. 지상은 오동나무 둥치에 기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댔기 때문인지 지상이 쓴 갓이 삐뚜름해 보였다. 부식이 연못 앞으로 다가갈 즈음 지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게 피안을 주려고 시를 쓰오. 뇌천께서도 뇌천 자신을 움직이는 시를 쓰시오. 세상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이미 그건 시가 아니라 헛소리지요. 그리고 뇌천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시에 매달리지 않아도 재미있는 일 무척 많으실 텐데 무엇 때문에 애면글면 시에 매달리시는지 모르겠소.”

연못가에 둘러 핀 창포 줄기는 햇볕에 겨워 시들했다. 못의 수면이 파르르 떨었다. 소금쟁이 몇 마리가 자맥질을 했다. 신명을 다했으나 무게를 싣지 않은 자맥질이었다. 백일홍 가지와 부식의 얼굴이 뒤섞여 연못에 어룽거렸다.

“송나라 소순의 아들들 말이오, 소식과 소철이라는. 그들의 시가 뛰어나다고는 하나 내 보기에는 그들의 시가 말방울의 요령소리보다 나을 게 없소이다. 소식의 적벽부는 경(景)만 있지, 정(情)이 빠져 있소. 문물이 발전한다 해도 시는 갈수록 뒷걸음질 치는 것 같지 않소?”

지상은 기어코 소식과 소철을 들먹였다. 부식이란 이름도 소식이란 이름에서 땄고 동생 부철의 이름도 소철이란 이름에서 땄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부식의 형제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서긍은 부식을 해동 제일의 석학이라 추켜세우며 문장에 뛰어난 동생과 함께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들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 송을 통틀어 빼어난 문장가에 드는 소식과 소철의 이름을 하사받은 것은 가문의 영화였다. 지상은 소식과 소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나라 것을 취하고자하는 부식을 비비꼬았다.

지상의 관심거리는 오로지 고구려였다. 그는 고구려 도읍지인 서경에 도읍을 정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번창할 것이라고 믿었다. 시 외의 이야기를 펼친다면 그건 분명 정론과 쟁론일 터였다. 서경파 이야기라면 실랑이하듯 입에 올릴 사안은 아니었다. 부식은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지상은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만 들려왔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했다. 지상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싶었다. 그 후 부식은 여러 번 지상을 찾아갔다. 지상을 스승으로 받들어 그에게 시를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꼭 보이고 싶었다. 굴욕을 감내할 각오가 없었다면 삼고초려를 시도하지 않았을 터였다. 굴욕은 참을 수 있었으나 꿈쩍하지 않는 지상을 움직일 방도는 없었다. 지상은 시에 관한 이야기는커녕 좀체 부식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지상과 마주앉아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며 그냥 돌아 온 적도 있었다. 어쩌다 입을 열면 서경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흘렸다. 나라가 내우외환이 겹치는 것은 개경의 지덕이 쇠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부식은 궤변인지 야설인지 분간이 서지 않는 지상의 말들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한 수 배워 얻기는 무척 어려웠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상을 찾았다. 지상의 서실은 들큼한 묵향으로 가득했다. 서실에서 시를 짓고 있는 지상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서실 바닥은 말할 것도 없이 구석 모퉁이마다 먹물이 밴 고려지가 수북했다. 왜가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그림 한 폭이 구석에 나밀려 있었고 바닥에는 먹물에 젖은 붓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찻상을 마주앉은 지상의 모습을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지상의 볼은 움푹 패었고 눈두덩도 푹 꺼져 있었다. 많은 습작지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천재들은 어떤 대목에서 고심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한 수 배우고자 하오. 부디 내치지 말고 가르쳐 주시오. 두련을 쓸 때 인상적인 장면을 쓰는 게 중요한지 마음부터 드러내는 게 중요한지 몹시 답답합니다. 그것만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시를 쓰는데 딱히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뇌천도 충분히 아실 텐데요.”

지상은 널브러진 종이들을 걷어 뭉치면서 중얼거렸다. 지상의 앙상한 목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부식은 지상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들을 펼쳐보고 싶었다. 근골이 메말라가면서 지상이 부여잡고 매달린 시구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종이 뭉치들은 천의무봉한 시구들을 움켜쥐고 있을 것 같았다.

“이것들을 좀 보아 주시오. 그리고 한 말씀만 듣고자 하오.”

부식은 가져 간 습작품 몇 개를 서실 바닥에 죽 펼쳤다.

“보잘 것 없고 많이 모자라는 나부랭이올시다. 부디 좀 보아 주시오.”

부식은 펼친 종이를 지상 앞으로 밀어 올렸다. 지상은 종이를 받아 찬찬히 훑었다. 부식은 지상의 입과 눈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버리는 것부터 할 줄 알아야 하오. 시는 붓으로 쓰는 게 아니라 칼로 쓴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말이고요. 공들여 쓴 것이라 하더라도 아니다 싶은 것을 베어 낼 줄 알아야 하지요.”

“무엇을 베어내야 하는 것인지요.”

부식은 습작품을 지상에게 바싹 갖다 댔다.

“뇌천! 뇌천께서는 지금 그대로가 시인입니다. 꼭 종이에 먹물을 찍어내야 시인인 것은 아니지요.”

지상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피안이라고 하셨소? 그런 세계가 어떤 것인지 나도 알고 싶소.”

부식은 서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상 쪽으로 다가갔다.

“허허허, 내가 피안이라는 말을 했던가요? 피안이라, 무슨 신명에 그런 헛소리를 했나 모르겠소.”

“가르쳐 주시오. 이토록 간청하오.”

부식은 서상 모서리를 움켜쥐며 지상 앞에 바투 다가앉았다. 지상의 눈을 그토록 가까이서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눈빛은 불구슬처럼 이글거렸다. 눈빛을 맞받아내기가 버거워 부식은 헛기침을 하면서 가부좌를 틀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합각기둥을 받친 흘림기둥은 반질반질하다. 기둥을 어루만지는 부식에게 아낙이 음식 추렴을 해 온다. 몇 번이나 사양해도 아낙은 망개 잎에 싸인 절편과 깨강정을 펼쳐놓는다. 가요를 읊조리며 측간 모퉁이 누대에 걸터앉은 사내들은 누각 바닥으로 둘러앉았다. 이쪽으로 향한 사내들의 얼굴이 달빛에 비친다. 가무잡잡한 사내들의 얼굴은 조약돌처럼 단단해 보인다. 날벌레들이 얼굴에 들러붙어 간질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강에서 풍기는 물비린내가 물씬하다. 중년 사내 서너 명이 이쪽 돌계단을 딛고 오른다.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은 늘어난다. 사람들 대부분이 영명사를 들렀다 오는 것 같다. 지상도 시상이 막힐 때면 홀로 이곳 영명사를 찾는다고 했다. 영명사뿐만 아니라 지상은 종종 여러 절을 찾아다닌 듯 했다.

琳宮梵語罷 법당의 독경 소리 마치자

天色淨琉璃 하늘 빛 맑기가 유리 같구나.

지상의 하품을 시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게 부식의 화두였다. 나머지 두 구절, 경련과 미련을 채워 넣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절을 썼다 지웠다 했지만 지상의 두 구절을 뒷받침할 만한 율조는 되어주지 않았다. 겨우 완성했다 싶으면 지상의 두 구절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한 줄 시구를 찾으려고 비오는 산봉우리를 걸터듬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대비를 맞으며 숲속을 헤매다 심한 고뿔에 걸려 보름을 몸져누웠다. 고뿔이 나았다 싶으면 몸살이 다시 도졌고 몸살기가 가라앉는다 싶으면 치아가 들쑤셨다. 입맛을 잃었고 잠이 줄었다.

날이 갈수록 잠도 오지 않았다. 깊은 밤, 그동안 써놓았던 시구들을 끌어내 읽었다. 누가 볼세라 꼭꼭 숨겨둔 습작품들이었다. 모두 췌사였다. 꽃을 읊은 것도 아니고 백성의 삶을 읊은 것도 아닌 낙서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들뿐이었다. 부식을 미망에 가둬놓은 것은 나부랭이들, 그것들이었다. 종이뭉치들을 둘둘 뭉쳐 뜰로 내려섰다. 불살랐다. 불길은 미망쪼가리들을 날름날름 핥아댔다. 어둠 속에서 솟구치는 불길은 펄럭펄럭 힘찬 기운을 내뿜었다.

아내와 하인들이 맨발로 마당을 뛰어나오지 않았다면 종이뭉치들은 금세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맨발로 불을 밟아 끄는 하인들 옆에서 아내는 반쯤 타버린 종이쪼가리들을 차곡차곡 챙기고 있었다. 그동안 부식과 함께 식음을 끊다시피 했던 아내였다. 어둠 속에 웅크린 아내가 한 줌 잿더미로 보였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이 봇물처럼 끓어올랐다. 서경파들이 서경에 대화궁을 지어놓고 인종을 불러들인다는 소리를 듣고도 부식은 허깨비에게 붙들려 있었다. 초미를 다투는 나라 일에 손 놓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시급한 일이 지상을 처치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미루고만 있었다.

달은 중천에 있다. 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구성진 목소리가 언덕을 메운다. 메기고 받는 소리는 강물소리처럼 어기차다.

유월 보름에 아! 벼랑 가에 버린 빗 같아라.

돌보실 임을 잠시라도 쫓아가겠습니다.

아으 동동다리

칠월 보름 백중에 아! 갖가지 음식을 벌여 두고

임과 함께 살고자 소원을 비나이다.

아으 동동 다리.

팔월 보름에 아! 한가윗날이라…….

가요를 부르는 저들의 목청은 무구하다. 고려 도읍지가 서경이든 개경이든 그 어디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에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목소리들이다. 노랫말은 여울도 없이 졸졸 흐르는 물 같다. 저 홀로 발아되어 꽃을 피운 가요처럼 지상의 시들도 모두 제 흥에 겨운 시들이었다. 지상의 시 어디에도 세상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서려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은 세상의 한 복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부식은 딱 한 번 숙명이란 말을 떠올렸다. 묘청의 난 반란 진압 총사령관이 하필이면 부식이었고 난의 핵심 인물이 지상이었다는 것은 숙명이란 말 외에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까 싶었다.

서경진압 총사령관의 임무가 떨어지자마자 지상을 덮쳤다. 지상이 세심정이란 찻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말을 몰았다. 세심정은 만월대와 멀지 않았다. 서경을 토평하러 가야지 왜 세심정을 향하느냐고 궁금해 하던 부하들에게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다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다탁 주위로 사내 여럿이 둘러 앉아 있었다. 묘청의 제자인 김안과 백수한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짐작은 왔다. 모사를 꾸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지상은 서경에서 묘청이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 줄도 몰랐기에 그는 반란의 가담자는 아니었지만 서경파의 핵심이었다. 서경파의 핵심인물들은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서경에서 난을 벌이고 있는 묘청의 계획은 엉성하고 졸렬했다.

“이 무슨 행패요?”

지상이 장검을 짚고 있는 부식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역모를 꾀해 조정을 어지럽힌 반란자를 처치하러 왔다.”

“역모라니! 말씀 가려 하시오.”

지상이 벌떡 일어나 부식 앞에 버텼다. 목소리는 우렁찼으나 걱실걱실 했다. 얇은 눈꺼풀에 핏발 선 눈은 더욱 퀭해 보였다. 음모의 주모자다운 눈빛이었다. 시를 읊을 때의 매끄럽고 고졸한 소리와는 대조적이었다. 운을 자아올리려던 아련한 눈빛은 아니었다. 명아주 풀물에 젖은 손으로 술잔을 거머쥐던 풋풋한 향취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지상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었다. 위험한 모사꾼이었다. 지상이 이자겸의 사돈인 척준경을 탄핵시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조정은 자칫하면 지상의 손아귀에 놀아날 판이라던 대신들의 말들이 그냥 떠돈 게 아니었다. 반란자를 놓아주려 그를 찾았다니, 부식은 찬물을 동이 째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희들은 역모를 꾸며 나라를 어지럽힌 죄인들이다.”

“당치 않은 말씀! 개경 문벌들의 꼴사나운 짓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우리가 나서서 조정을 수습하려는 것뿐이오. 이자겸도 우리가 나서서 해결했다는 걸 그새 잊었단 말이오?”

지상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상을 놔두고 묘청일파만 처치한다는 것은 뿌리는 두고 가지만 쳐내는 꼴이었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이오, 김부식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소? 어서 이곳을 나가 주시오!”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우리는 잘못 한 거 하나도 없소이다! 그러니 당장 나가 달란 말이오!”

지상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부식은 장검을 지상의 가슴에 겨누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했느니라!”

“고작 이 따위 쇠꼬챙이를 휘두르려고 그토록 임금에게 빌붙어 온갖 권좌를 오갔던 게요? 썩 치우시오!”

지상은 눈을 치뜨고 부식을 노려보았다. 지상을 얼러댈 시간이 더는 없었다.

세심정 먼발치에서부터 말채찍을 크게 휘두른 것은 지상이 도망갈 틈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상이 세심정 뒤란을 통해 사라져버리기를 바랐다. 개경도 서경도 아닌 어느 먼 곳으로 달아나 기상을 마음껏 펼치는 시를 지으며 살길 바랐다. 초야에 묻혀 시를 갈고 살다보면 그가 잠시 빠졌던 도참사상이 미혹이었음을 이내 깨달을 것이라 믿었다. 미혹을 건너온 지상의 시는 더욱 여물 터였다. 지상이 삼라만상을 울리는 대 시인이 되기를 바라며 말고삐를 힘차게 세심정으로 당겼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묘청이 난동을 부리는 서경으로 달리는 관군들 함성은 더욱 크고 높았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부식은 칼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단칼이었다. 허허허, 그동안 먹을 간 게 아니라 칼을 갈았구료, 어쩐지 칼잡이가 썩 어울린다 했지 허허허……내 죽어 음귀가 되어서라도……. 지상은 말을 맺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지상의 몸은 잎 다 떨어진 한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단단했다. 부식은 지상의 눈을 감겼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지상의 콧날은 높고도 서늘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누각 끄트머리에서 여인네들은 달을 향해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린다. 허리끈을 질끈 묶은 치마는 강동하다. 여인네들의 모습 위로 달빛이 내리비친다. 월령가요를 부를 때의 는실난실한 자태는 간 곳 없다. 달을 향한 몸짓은 모두들 어엿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무심하기만 하다. 병법을 구하느라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군막 밖을 나와 홀로 어둠을 서성거렸다. 달빛 아래서 병영일지를 끼적거리기도 했다. 괜한 감흥이 밀려올 때면 일지에 시구를 써 넣기도 했다. 지상이 남긴 두 구절에 두 구절을 지어 보내 오언절구도 완성시켜 두었다. 시구라도 좋았고 노래라도 좋았다.

琳宮梵語罷 법당의 독경소리 마치자

天色淨硫璃 하늘 빛 맑기가 유리 같구나.

獨坐消長日 홀로 앉아 긴긴 날 보내노라니

那堪苦憶友 벗 그리운 생각을 어찌 견디랴.

두 구절은 힘들지 않게 채웠다. ‘그야 쓰는 사람 마음이지요.’ 지상의 한 수는 그토록 쉬웠다. 작위를 금하고 생각을 옭아매지 말라는 뜻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강변을 밝히던 호야불도 하나둘 사라지고 달빛에 젖은 강물은 희끗희끗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피로 물든 대동강이었다. 지상이 ‘대동강’을 쓸 무렵에는 서경은 평온했다. 개경도 평온했다. 나라 안은 모처럼 봄날이었다. 그런데도 지상은 봄을 노래하지 않았다. 지상이 일찍부터 만화방창의 덧없음을 깨닫지 않았다면 푸른 봄볕의 비갠 언덕에서 임과 이별하는 장면을 빚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제 시에 예언마저 바쳐놓았을 줄이야.

달이 중천에 다가갈수록 바람은 삽상하다. 바람이 소맷자락 안으로 스민다. 땀에 젖은 남바위는 밤바람에 절로 마를 것이다. 잇새에 깨물고 잘근거리는 나뭇잎에서 알싸한 풋내가 감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