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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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1289 2014-11-03
519 어머니의 나라 외1편/김성찬 file
편집자
1893 2016-12-01
16. 12월 79호 시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깨 바칩니다 어머니의 나라 하루를 솎아내던 해도 지쳤습니다 지평선 끝 하늘까지 흙발로 걸어가 붉은 노을 속 구름에 고단한 몸 뉘입니다 평생을 아무개 엄마라고 불려지며 살았습니다 남루한 살림의 한 축이 되어 맵찬 바람 다 막아낸 자식들 비받이였습니다 작지만 맵고 깡아리 있는 조선의 여인이였습니다 언제올래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갈라진 목소리 그 이틑날 어머니 이름 천상에 올려질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계절의 문이 수없이 열렸다가 닫혀도 꽃들이 지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나라 별들이 총총이 박힌 쪽문 열고 얘야 부르는 소리 바람에 잠시 끊겼다가 싱싱한 하늘에 메아리로 맴돌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판화로 영원토록 새겨진 어머니 그리운 이름 나즈막이 불러 봅니다 어머니--이-이-- 이-- 어느 날의 기록 퍼붓는 함박눈 하늘도 온통눈밭이다 숨비소리 뿜어내며 테왁에 매달려 올려다 본 하늘 뒤란 감나무에 목을 맨 청춘이 홀로 눈밭을 걷고 있다 자맥질로 낚아 올린 가난의 부스러기들 생활의 망사리에 우겨넣고 흥정해서 올릴 제사상은 슬픔의 저울추를 밀고 있다 눈발 그치자 급하게 불려나온 해가 셔터를 열고 시장 끄트머리 사진관 물먹은 유리창을 찍어대자 추억처럼 청춘 남녀가 걸려 있다 맑게 웃는 아기까지 판화처럼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바람도 발목 삔 걸음으로 더디 걷던 쌓인 눈 얼어붙은 밤길 절름거리며 먼 길을 걸어온 청춘이 젯밥 한 술 뜨고 있을 때 홀시어미 흐느낌 속에 스물한 살 청상이 절 하고 있다 혼불 나불나불 타올라 잘근잘근 어둠 잘라먹던 방 한 켠 잠깬 아기를 고요가 구덕을 흔들어 다시 재우고 있다  
518 외 침 외1편/허남기 file
편집자
1683 2016-12-01
16. 12월 79호 시 외 침 ㅡ세월호를 생각하며ㅡ 그들의 소리는 어둠속의 울부짖음이다 흘수선이 오뚜기가 될때부터 갈매기의 요란한 신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닷물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태연히 아무것도 모른 채 발끝에 물이 흥건히 젖고서야 비로소 파도소리에 꺽인 침몰의 수마는 꽃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세상의 손길이 닿지않은 허우적의 외침들이 어른들과 신의 무관심속에서 이미 흘러내린 통한의 눈물로 짜디짠 바다의 농도를 더하여 내 영혼의 뺨을 때리고 귀 멀고 눈 먼 세상을 몰아 붙였다 침묵은 이제야 번쩍이며 저 아득한 곳 외침들을 깨운다 그들은 오늘밤도 혜성이되어 어제 처럼 지상을 오르내린다 가 을 계절의 간사함이 출렁이고 감동의 물결이 풋풋함을 길 들이는 동안 신선한 바람이 가을의 속내를 탐독하고 있다 새벽부터 내린 비로 가슴을 풀어 헤친 가을의 속살들이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축 늘어진 가지나 결실들이 낮게 나르는 잠자리의 호외소리에 제자리를 찾아 뜨거운 햇살로 몸을 익히며 부풀리고 있다 목 놓아 소리치던 매미의 허물은 허공의 북망으로 떠나고 갸날픈 귀뚤이의 울음만이 들녘의 고요를 메우며 여전히 따가운 시선으로 풍요로운 노제를 올리고 있다 그해 길들여진 추색의 몸살만이 다가올 삭풍에 귀를 쫑긋 세운다 허남기:경북 영천 출생ᆞ2014《문장21》등단 《문학광장》신인상. 한국문협 경북지회 회원 ᆞ영천문협회원  
517 십자가의 고백 외1편/정숙정 file
편집자
1957 2016-12-01
16. 12월 79호 시 십자가의 고백 -어머니께 올리는- 광기 어린 눈동자 사이 그만 저절로 굽신거리며 매질 당한 등 위에 매달렸습니다 요동치는 심장소리 차오르는 숨소리 차마 포근히 느끼며 골고타 언덕을 올랐습니다 꾸역꾸역 자라온 생명이 한없이 무겁습니다 당신의 기도소리가 한없이 슬픕니다 천사들이 당신을 데려갈 때 나는 왜 당신의 십자가여야 했는지 이 불운을 따지고야 말겠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기도대로 부디 용서하소서 자신이 하는 일을 몰랐습니다 혼자 남다 땀나는 발다닥을 이고 종일 뛰어야 했던 그것이 행복이었다 하늘이 청명한데 갈 곳을 잃고 짝은 어디로 갔을까 수많은 인연이 스쳐도 머무는 이 없이 가장 버려진 모습으로 처분만 기다리는 고속도로 가드레일 옆 운동화 한 짝 숲문학 회원  
516 나도 모르는,/고창근 file [1]
편집자
2210 2016-12-01
16. 12월 79호 소설 나도 모르는, 내가 여기 왜 왔지? 춘식은 자리에 앉으며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이 잠 잘 때 번쩍 들어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올 생각도 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식당에 있었다. 주방 쪽으로 눈길이 슬며시 돌아갔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춘식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기보다는 생각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에 있는 텔레비전이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가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 있다고. 춘식은 텔레비전에 머문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옛날이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 나와 함께 할 것이요 구원될 것이니 항상 하느님을 믿고 따라야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곳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춘식은 천당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계속 시선을 두었지만 사실 텔레비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터였다. 하얀 가운에 보라색 비로드를 부착한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목사 뒤에는 삐쩍 마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형상이 보였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천당이라. 춘식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야지, 아무도 없을 때 가야지. 춘식은 또다시 슬그머니 주방 쪽으로 눈길을 돌리려다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굳게 다물며 일어서려는데 한 사내가 물컵을 들고 앞에 서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사내가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사내는 물컵을 탁자에 놓았다. “요 앞에 쓰레기 버리려 가느라 자리를 비웠네요. 뭘 드릴까요?” 50대를 갓 넘겼을까, 머리숱이 별로 없고 그나마 대머리인 사내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그러니까.” 춘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애초부터 오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니고 또한 나가려던 참인지라 말까지 더듬었다. “그럼 천천히 주문하세요.” 사내는 공손히 말하곤 홀 중앙에 있는 난로가로 갔다. 그제야 춘식은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허름하지만 꽤나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탁자는 여섯 개가 있었고 벽에 걸린 메뉴판에는 씨레기 해장국부터 순대국까지 열 가지가 넘는 메뉴가 적혀 있었다. 메뉴판 옆에는 속옷만 입은 여자가 소주병을 들고 있는 달력이 바람이 없는 데도 가늘게 펄럭이는 것 같았다. 바닥은 시멘트 바닥인데 깨끗하게 물청소되어 있었다.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 시간이면 손님이 있을 법도 한데 하나도 없으니 오히려 춘식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랄. 자신의 그런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다 지난 간 일이다. 춘식은 신발로 바닥에다 가로로 세로로 줄을 그었다. 어쩌자고 왔는가. 생각할수록 기이했고 울화통이 올랐다. 형님, 어제 형수님 봤습니데이. 한 달 전 아니, 두 달 전인가 직장 동료이자 고향 후배인 박씨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다가와 속삭이듯 한 말이었다. 그때 춘식은 아침부터 무슨 지랄 같은 말이라는 듯 박씨를 바라보았다. 분명하다카께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카께요. 박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긍께 어제 야근하고 집에 가다 해장이나 한잔할까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씨레기 해장국 판다는 가게가 있질 않겠소. 그래 들어갔더니 글쎄, 분명하다카께요. 20년도 더 지난 여편네였다. 춘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나마 죽지 않고, 식당이라도 하니 병들지도 않고 살아있는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박씨가 그곳이 어디라고 뒤따라오며 말했을 때에도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당연히 다 잊었다. 아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술만 들어가면 박씨가 가르쳐준 식당이 마치 단골집이라도 되는 듯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자신이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 앞으로 몇 번 지나가기도 했었다. 식당 옆 전파사가 있고 그 옆에 미장원이 있고 그 옆엔 철물점이 있고⋯⋯ 환장할 일이었다. 가보지도 않았는데 그 주위의 풍경이 눈에 자세히 그려졌다. 야당은 유례없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양산 그리고 많은 자영업자들의 몰락 노인들과 빈곤층의 자살 증가 등 민생을 파탄시키고 경제도 파탄시킨 책임을 묻는 선거가 ⋯⋯ 여당은 이번 선거에서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 노인들의 기초연금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주인 사내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 모양이었다. 선거철이라 그런지 텔레비전만 켜면 정치 얘기였다. 춘식은 메뉴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땅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그렇다고 소주만 마실 수는 없었다. “여기 소주 하나 하고 술국 하나 주세요.” 춘식의 말에 사내는 주방을 향해 말했다. “술국 하나.” 그러자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수돗물 소리가 났다. 주방 옆에 골방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우선 드시고 계시면 빨리 가져오겠습니다.” 사내는 소주와 잔 깍두기를 내놓았다. 춘식은 아무 말 없이 잔에 소주를 따라 단숨에 입에 털어넣었다. 주방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과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다. 허! 두 잔을 연거푸 입에 털어넣고나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20여 년 전에 집을 나간 마누라년이 보고 싶었단 말인가. 죽음을 앞두니까 마음이 약해졌다는 말인가. 허! 또다시 헛웃음이 터져나와 황급히 잔에 술을 따라 입에 털어넣었다. 반은 흘러 소매를 적시고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내가 죽고나면 사람들은 무어라 말할까. 죽기 전에 누구나 죽음을 암시하는 행동이나 글을 남긴다는데. 춘식이라는 사람은 죽기 하루 전 어느 식당에 들렸는데 그 이유를 파악 중입니다. 이렇게 떠들까. 그러면 후배 박씨가 나서서 그 식당 여주인이 전처였다고, 매일이다시피 개 패듯 마누라를 팼다고, 그래서 이혼 당했다고, 그렇게 말할까. “이것 좀 드세요.” 주인 사내가 오이무침을 담은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안주는 먹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는 걸 지켜본 것 같았다. “행복하시오?” 춘식은 말을 해놓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을 할 작정이 아니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주 한 병만 마시고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묻다니. 술기운일까. 춘식은 스스로 민망함에 다시 술을 따라 단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사는 게 뭐 그렇지요.” 사내는 두 손을 만지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사는 게 행복하냐구요.” 술기운일까. 자꾸만 말이 의도와 다르게 나왔다. “그냥 뭐. 사는 거지요.” 사내는 제대로 답을 못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술국 나왔어요. 주방에서 가늘면서도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춘식은 자기도 모르게 주방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다시 애꿎은 소주병을 들었다. 맞다. 저 놈의 목소리. 쉰 듯한. 살아오면서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 같은 목소리. 사내는 주방으로 가서 김이 솟아오르는 뚝배기를 들고 왔다. “우선 안주 좀 드시면서.” 주인 사내는 여전히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술국은 양이 많았다. 순대국에 머리고기를 많이 넣었다. “한 잔 하시겠소?” 춘식은 주인 사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시지요, 손님도 없는데.” 사내는 주방으로 가서 소주 한 병과 소주잔을 들고 왔다. 주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으로 춘식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신의 잔에도 따려는 걸 춘식은 소주병을 재빨리 낚아채어 사내의 잔에 따랐다. “안주 좀 드시고.” 사내는 술국에 청량고추와 새우젓 다재기를 넣고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우유 같은 국이 뻘겋게 물들어갔다. 사내는 숟가락을 춘식 쪽으로 놓았다. “한 잔 합시다.” 춘식이 잔을 들자 사내도 덩달아 두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춘식은 단숨에 마셨고 사내는 반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안주 좀 드시고. 빈속에 마시면 속 베릴 텐데요.” 안주를 먹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말했다. 허, 또다시 춘식의 입에서 가벼운 헛웃음이 나왔다. 길어도 하루, 짧으면 몇 시간 후 자신의 몸은 주검으로 발견될 터였다. 그런데 빈속에 술을 마시면 속 버린다고 걱정하다니. 허, 또다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사내는 그런 춘식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싶어 손을 잡고 사과라도 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춘식은 사내의 그런 표정에 아랑곳 않고 사내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행복하시오?” 춘식은 또다시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말에 놀랐고 사내는 말없이 자신의 잔을 들었다. “누군들 행복하겠냐마는요. 그래도 삼시세끼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사내의 말에 춘식은 질문도 그렇지만 답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행복하다는 말? 살기 힘들다는 말? 여편네는? 그러니까 당신 말고 여편네가 행복하냐고 물었던가. “그렇지요. 삼시세끼 밥 먹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춘식의 체념한 듯한 말투에 사내가 물었다. “퇴근하시는 중인가 보죠? 일성 반도체?” 춘식의 놀라는 표정에 사내는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저도 한 20여 년 물장사 밥장사하다보니 대충 사람 볼 줄 압니다. 허허.” 사내의 말에 춘식은 대꾸도 않고 술을 들었다. 술국은 식어서 위에 기름기가 끼기 시작했다. “아직 원인을 모르지요?” 춘식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회사 내 사람들보다 바깥사람들이 언론이나 소문을 통해 더 많이 알 터였다. “내일은 누가 죽으려나.” 사내는 한숨 섞인 말을 하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요. 나라면 믿을 수 있겠소? 춘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양쪽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일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반도체의 한 회사의 사원들이 매일 한 사람씩 죽어 가는데. 사원이 수만 명이 된다해도 매일 사원이 원인도 다양하게 죽어 가는데 대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보건기구와 UN에서도 전문가가 파견되어 조사를 벌이는 중이었다. 죽은 사람을 보면 직업병이랄 수도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산에 가다 추락사한 사람, 잠자다 죽은 사람, 평소에 질병을 앓던 사람⋯⋯.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같은 반도체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매일 한 명씩 죽으니 이상한 소문만 돌 뿐 대책도 없었다. “근데 죽는 사람은 안다면서요?” 사내가 무심히 물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계속 죽어왔고 이젠 텔레비전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으니 오히려 별 얘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키우던 개를 학대해 구속된 사람이 화제가 되었다. “이유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소.” 춘식은 말해 놓고 자신의 말에 놀랐다.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하다니.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선 이미 일반 사람들처럼 회사 내에서도 별 얘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명확하게 백혈병처럼 겉으로 회사의 문제가 드러났다면 모르지만 표면상으론 회사와 아무런 관련 없는 죽음이었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꼭 흔적을 남기니 말이요.” 사내의 말에 춘식은 대꾸를 않고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랬다. 죽은 사람은 예감을 했는지 평소에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부모의 집을 찾는다든지, 평소엔 자식에게 데면하게 굴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건강하라든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데 취직하라든지, 몇 년째 연락을 안 하던 친구한테 전화를 한다든지. 며칠 전 춘식이 아는 사람은 죽기 하루 전 키우던 개의 목사리를 풀어주었다. 춘식과 자주 술을 마시던 사이였는데 죽기 전까지는 어떠한 징후도 없었다. 쾌활했고 회사에서도 평소와 같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퇴근해 저녁을 먹고 난 뒤 바람 좀 쐬고 온다더니 집 앞 길에서 뺑소니차에 치였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산책을 하기 전 키우던 개의 목사리를 풀어주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 별게 아닌데도 죽고 나니 그것이 마치 죽음의 징후가 되었다. 맞는 말이다. 춘식은 사내가 따라놓은 잔을 들어 입에 털어넣었다. 죽는 사람은 예감이 온다고 소문만 무성하더니 맞았다. 자신이 그랬다. 내가 죽는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다니. 며칠 전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핏, 웃어 넘겼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죽는다는 것이 자명하게 느껴졌다. 결국 내 차례구나.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억울했고 그래서 부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죽음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니. 물론 억울하기도 하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야 아직 남아있지만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와 비교해 그렇다는 얘기다. “허, 국이 식었네요. 데워오겠습니다.” 사내는 뚝배기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춘식은 자신도 모르게 주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고 가슴 한 켠에 서늘한 바람 한 점이 들이닥쳤다. 대통령께서는 경제를 살리려고 얼마나 걱정을 하시는데 야당이 발목을 잡아서 그런 거 아닙니까. 이번 선거에서 야당을 심판해야 합니다. 야당은 노동법을 통과시키지 말자는 입장이 아닙니다. 독소조항인 해고를 쉽게 하는 법과 파견법을 개선하면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는 입장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 두 명이 나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고 늦었네요.” 사내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종종 걸어와 뚝배기를 탁자에 놓았다. 뜨거운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춘식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조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식당에서 직접 꼬았는지 국물이 진하게 우러났다. “고기 좀 드시고.” 처음엔 먹을 마음이 없었는데 막상 국물을 떠먹고 보니 맛이 입에 감겼다. 그러다보니 자꾸 국물만 떠먹는 형국이 되었다. 역시 음식 솜씨는 좋은 여편네였다. 그렇게 자신한테 맞고도 아침이면 시원하고 얼큰한 해장국을 끓여놓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 해장국을 먹어보지 못했다. 춘식은 사내 앞으로 뚝배기를 밀었다. “같이 좀 드시지요.” 춘식은 사내 쪽으로 밀어놓고 머리고기를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고기도 알맞게 익어 쫄깃했다. 처음엔 시장기를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국물이랑 고기를 떠먹다 보니 오히려 시장기를 느꼈다. 몇 번 떠먹는 동안 사내는 춘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순식간에 술국이 절반이하로 줄었다. 후. 춘식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속에 뜨거운 것이 들어가니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손님도 없는데 담배 피우셔도 됩니다.” 춘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거리자 사내가 재빨리 말했다. “아, 아닙니다.” 춘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마침 오줌도 마려운 터였다. 허!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또다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몇 시간 후면 죽을 몸이 따끈한 술국 한 그릇에 이렇게 황홀해하는 것이 가소로웠다. 바지를 내리고 쪼그라든 성기를 꺼내 변기를 향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오줌이 잘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담배를 연거푸 빨았다. 순간 20여 년 전 여편네지만 얼굴이라도 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인가. 죽기 전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말?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안 보고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그냥 나가면, 죽어버리면 저승에 가서도 후회될 것 같았다. 근데 어떻게 말을 붙여? 혹 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지는 않을까. 20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춘식은 한 손은 쪼그라든 성기를 잡고 한 손으로 담배를 든 채 생각했다. 담배를 한 대 다 피울 동안 오줌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춘식은 피우던 담배를 변기에 던졌다. 픽, 소리가 나더니 담배는 불빛을 잃고 오줌에 젖어갔다. 성기를 잡은 손으로 담배를 꺼내니 성기는 팬티 속으로 들어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성기를 꺼내 변기를 향해 정조준했다. 힘을 주었지만 여전히 오줌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담배연기를 길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남편이란 작자가 없으면 주방으로 가면 될 텐데 남편이 있으니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놔? 내가 저 년의 옛 남편이었다고. 죽을 때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왔다고. 그렇다고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왔다고. 몸은 흔들거렸고 중심을 잡으며 연거푸 담배를 빨았다. 허! 생각을 할수록 자신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필터까지 타 들어온 담배를 변기에 던졌다. 다시 한 번 아랫도리에 힘을 주었지만 오줌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성기를 안으로 집어넣고 팬티와 바지를 올렸다. 변기에 침을 찍, 뱉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춘식은 주방으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곧장 자리로 왔다. 사내는 왜이리 늦었느냐는 듯 걱정스런 표정으로 춘식을 바라보았다. “자, 한잔 하시오.” 춘식은 사내의 잔에 술을 따랐다. 사내 또한 춘식에게서 소주병을 빼앗아 잔에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건배!” 춘식은 사내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고 사내 또한 건배, 를 외쳤다. “근데 평소에도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거요?” 춘식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고 사내는 춘식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있을 땐 있고 없을 땐 통 없는데 요즘엔 더 그러네요. 경기가 나쁘다카더니만.” “그래도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야.” 춘식은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의도와 다르게 말은 거미줄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그래도 밥 먹고 사는 것만 해도 얼마입니까. 마누라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렇지.” 사내는 술잔을 입을 가져가 반만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국을 좀 데워와야겠네요.” 사내는 취기가 오르는지 약간 비틀거렸다. 춘식은 두 손으로 뚝배기를 들고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내는 다리를 많이 절었다.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엔 술에 취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오른쪽으로 다리를 많이 절었다. 바보 같은 년. 제대로 고르든지. 춘식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어떻게 해서 저런 놈을 만났을까. 나하고 헤어지고 곧장 만났을까. 행복하기는 하는 걸까. 아까 아프다고 그랬는데. 춘식은 주방으로 곁눈길을 했지만 여편네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취기가 올랐다. 오늘만은 술을 마시지 않으려 했는데. 저승길만은 술에 취하지 않고 제대로 가려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하루라도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떻게 죽게 될까. 아는 동료처럼 뺑소니한테 치여 죽을까. 아니면 술에 취해 길을 가다 쓰러져 그대로 죽을까. 그렇지 길에서 죽는 게 그나마 폼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도 없고 마누라도 자식도 없는데 뭐가 아쉬우랴. 춘식은 고개를 숙인 채 잠깐 졸았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사내의 말에 춘식은 눈을 떴다. 계란찜이 춘식 앞에 놓여 있었다. 순간 입에 침이 고였다. 계란찜은 춘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여편네와 살 때 한 끼라도 계란찜이 없을 때가 없었다. “드셔보세요. 집사람이 건강이 안 좋아 이것저것 못해서리.” 사내는 또다시 송구스런 표정을 지었다. 춘식은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그 맛이었다. 매콤하면서도 비릿한 맛. 청량 고추와 파를 총총 썰어 넣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맵습니까? 나한테 줄 땐 청량고추를 안 넣는데 손님 드실 거라고 넣었나?” 사내는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앗따 시기 맵네요.” 사내는 입을 오므리고 호호 숨을 토해냈다. 춘식은 그런 사내의 모습에 아랑곳 않고 연거푸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오면서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그러면서 정신은 명징해졌다. 예전에도 그랬다.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청량고추를 듬뿍 넣어 계란찜을 해 먹으면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그러고 나면 기분이 개운해졌다. 꼭 그때의 맛이었다. 몇 번 떠먹지 않았는데도 이마에서 땀이 볼로 흘러내렸다. “참, 아까 어디 아프다고 하더니만요.” 춘식은 손등으로 이마와 볼의 땀을 닦으며 주방을 흘깃거렸다. “옛날부터 아프던 것이라.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한가봐요.” “어디 다치기라도 했는가요?” 휴지로 코를 풀면서 춘식이 물었다. “허 참, 이거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내는 술잔을 들어 한 입에 다 털어넣더니 스스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춘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런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옛날에 말이요. 그러니까 나를 만나기 전이니까 20년 저쪽 이쪽쯤 될 거 같은데. 어떤 나쁜 놈을 만났는가 봅니다. 남편이란 작자가 자기 마누라를 얼마나 팼는지 지금도 몸이 성한 데가 없다오.” 사내는 또다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춘식은 아무 말도 않고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나쁜 놈이 누구겠는가. 간신히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그, 그래서 지금도 몸이 안 좋다는 말인지.” “그때 속병 겉병 다 들었는가 봅니다. 한때는 우울증에 걸려 물에도 뛰어들었고. 왼쪽 팔은 지금도 잘 못 쓰고. 아마도 천벌을 받을 게요, 천벌을.” 그때 춘식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긴장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좀 많이 나았나 싶었는데 그 증상이 또 나타났다. 춘식은 고개를 숙이고 떠는 다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때리는 게 일이었다. 이유라면 회사에서 동료나 상사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거나 하다못해 퇴근하다 기분 나쁜 일이 일이 있었다거나. 이유는 무한정 많았다. 퇴근하면 우선 여편네를 두들겨패곤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여편네를 때리기 위해 하루를 산 것처럼 말이다. 하얀 방진복을 입고 클린룸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부품을 만지노라면 자신이 사람이 아닌 회사의 기계부품인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를 돌아보면 수백 명의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만히 서서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휴식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를 못 들을 때도 있었다. 씨발 닭이 된 기분이야 언젠가 휴게실에서 믹스 커피를 마시며 동료가 말했다. 양계장의 닭들이 꼼짝 않고 알만 낳듯이 자신들도 매일 선 채로 부품을 낳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이 느껴졌다. 그 왜 있잖아. 알도 낳지 못하고 빌빌거리면 주인이 와서 냉큼 집어내 손수레에 싣고 가 개장수한테 팔아버리잖아. 개장수는 산 채로 개집에 던져주고. 우리가 그 꼴이 아닐까. 몇 년째 매일 직원들이 죽어나가니까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눈 얘기였다. 양계장의 닭이 된 느낌. 그러니까 여편네를 두들겨 패는 이유가 하루 종일 말도 없이 서서 부품만 만지다 집에 와서 근질거리는 몸을 푸는 식이었다. 근데 이상한 것은 여편네가 반항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엔 반항도 하고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여편네가 도망가 보았자 옆 동네 찜질방이었다. 나중엔 아예 반항도 가출도 하지 않았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때리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가면 정갈하게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춘식이 좋아하는 청량고추가 듬뿍 들어간 계란찜이 있었고 씨레기 무침이 있었다. 한 끼도 고기가 없는 날이 없었다. 하다못해 생선토막이라도 올려져 있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져도 밥상을 차려놓았다. 병원을 갈 때는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이렇게 미련스런 사람이 다 있나 싶게 팔이 부러졌는데도 그때까지 참았다. 지금 팔을 잘 못쓴다는 게 아마도 그 때의 구타 때문인 것 같았다. 춘식 자신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 못해 직장을 옮길까 생각했지만 중졸 학력에 기술도 없는 자신이 갈만 한 데는 없었다. 국내의 최고 기업인 일성기업의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것도 먼 친척의 도움 때문이었다. “왜요? 다리가 안 좋은 가요?” 춘식이 다리를 계속 떨자 사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보죠.” 춘식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직업병 아닌가요? 반도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매일 서서 하느라 다리나 허리 안 좋은 사람들 많던데요.” “뭘, 이 정도로.” 춘식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사내가 재빨리 병을 빼앗아 춘식의 잔에 따랐다. “언제부터 식당을 했소?” 춘식의 말에 사내는 30여 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그럼⋯⋯.” 춘식이 주방을 바라보며 말을 하자 사내는 잠시 춘식의 얼굴과 주방을 번갈아 보았다. “아, 저 혼자 하다가. 제 마누라가 암에 걸려 죽는 바람에 혼자 하다가 지금 마누라를 만났지요. 음식 솜씨가 좋아 주방일 맡기다보니 정이 들어서. 허허.”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 잔 하슈.” 춘식은 사내의 잔에 술잔을 부딪쳤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밥 먹고 사는 걸 보니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죽을 때 땅을 치며 후회해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가는 게 그나마 여편네에게 도리인 것 같았다. 만약에 자신에게 도리란 게 있다면 말이다. 다행이라면 자신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가졌으나 춘식의 폭행으로 유산이 되었을 때 이혼을 했다. 그 뒤로 춘식은 혼자 살아왔다. “여기 얼마요?” 춘식이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사내가 팔을 내밀어 춘식의 팔을 잡았다. “괜찮소.” 사내의 말에 춘식은 바지 주머니에서 오만 원을 꺼내 탁자에 놓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꾸만 주방 쪽으로 돌아가는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싶은 걸 참으며 겨우 출입문을 열었다. “잔돈 여기 있습니다.” 사내가 뒤따라와 바지 주머니에 잔돈을 넣었다. “뭘, 안 줘도 되는데.” 춘식은 말을 하면서 흘끗 출입문에 붙인 선팅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보였는가. 주방 쪽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것이 여편네였나. 갑자기 가슴 중앙이 아려왔다. 언뜻 여편네를 본 듯했기에 그것이면 됐다 싶었다. “조심해서 가시오.” 사내의 말에 춘식은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다 어? 하며 식당 쪽을 바라보았다. “이게 똑바로 서 있어야 손님이 오지.” 춘식은 식당 앞으로 걸어가 각종 메뉴판이 적힌 입간판이 넘어진 것을 똑바로 세웠다. “아이고, 제가 하면 되는데요.” 사내는 춘식에게 다가오더니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하, 됐네. 이제 손님들 많이 올 거요.” 춘식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입을 벌려 우물거리다 한 마디 했다. “그 머시야, 행, 행복하시오.” 뒤돌아섰다.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느낌이 와락 몰려 왔다. 다음날 주인 사내는 텔레비전을 보다 어? 어? 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주방에 있던 여자가 홀로 걸어 나와 텔레비전 앞으로 갔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야산의 한 산소에 있는 하얀 천을 비춰주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원 안에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늙은이의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늘 저녁 일성 반도체의 이천오백일흔두 번째 사망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오십 오세 지모씨로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앞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저, 저 양반 어제 저녁 그 손님 아냐?”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여자는 잠자코 텔레비전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옆에 소주 한 병이 있고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으며 곧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해 정확한 사인을 밝힐 예정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지모씨가 사망한 산소는 친어머니가 묻힌 곳으로 지모씨가 어릴 때 바람이 나 집을 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모씨는 어린 시절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며 불우한 생활을 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지모씨는 술만 취하면 친어머니를 찾아 죽이겠다고 행패를 부린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맞지? 당신 못 봤어? 우째 이런 일이.” 사내는 거듭 여자에게 물으며 탄식했고 여자는 말없이 주방으로 걸어갔다. 이날 따라 더욱 심하게 왼쪽 팔이 흔들거렸다. 고창근/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장편소설『누드모델』『존재의 이유』『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  
515 나는 괜찮은데/손달호 file
편집자
1635 2016-12-01
16. 12월 79호 수필 나는 괜찮은데 씨줄과 날줄로 결어진 피는 그 성질이 끈끈하고 진하다. 천륜이 지중한 것은 피로 맺어진 숭고한 관계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인연이랄 천륜지정엔 어떠한 조건도 개입될 수 없다. 피를 수수(收受)한 사이에서 분출되는 사랑에는 호리의 이해관계도 끼어들 수 없는 강력한 보호막이 있다. 어머니는 치매로 수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는데 문밖출입을 거의 못하고 방안에서만 보내니 그 고충인들 오죽할까. 몇 년을 한결같이 병 수발을 드는 아내의 수고며, 아이들의 고충 역시 만만치가 않다. 치매 환자를 둔 가정치고 많은 인내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은 집은 아마 없을 것이다. 손으로 방바닥을 치며 방안을 빙빙 돌아다니는 것이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다. 주무실 때만 빼고 밤낮으로 ‘찰싹’, ‘찰싹’ 온 종일 들리는 손바닥과 방바닥의 마찰음은 가족들의 귀에 적잖이 거슬림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병이니 어쩔 것인가. 내심 나도 듣기 거북하지만 추호도 내색할 수 없음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가장인 나는 식구들의 불평이 안 나오도록 쓰다듬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는 적절하게 교육도 시킨다. 특히 아내의 귀를 누그러뜨리는 데는 무척 신경을 쓴다. 어쩌다 아이들이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엄중히 꾸중한다. 아내도 살림에만 충실히 열중해온 전업 주부라면 지금쯤은 음식 한 접실 들고 이웃집 문을 자신 있게 두드릴 수 있을만한 연력이다. 그러나 화실을 하고 있는 아내의 요리 솜씬 좀 딸리는 편이다. 어느 일요일 저녁 때로 기억된다. 이 날은 아내가 요리책까지 펴놓고 이것저것 뒤적거리며 요리할 종목을 찾고 있었다. 그 옆에 나는 팔베개 한 채로 누워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리 책에 눈길을 쏟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몸과 마음이 늘 그림 속에 있다 보니 아직 얼굴이 천진해 보였다. 내 마음 귀퉁이에 지금도 사랑스런 구석이 남아 있음이다. 엄지손톱에 덜 지워진 물감 자국은 하는 일이 뭔지를 금방 알게 해 준다. 방 한 켠에는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녀석이 학원에서 배운 한자 쓰기 연습 중이다. 나는 아내가 식구들의 식단을 위해 열중하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당신 왜 그리 못생겼쑤?” 하고 너스레를 떨고는 겸연쩍어 누운 채로 아내의 무릎을 발로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아내의 반응이 있기 전에 쓰던 한문을 지우개로 지우던 둘째 녀석이 “뭐라, 나는 괜찮은데” 하고 얼른 되받았다. 걸림 없이 금방 튀어나온 이 말을 한, 녀석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괜찮은데’ 하기야 저를 낳아준 제 어민데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 무슨 상관있으랴. 내가 다니는 테니스장에는 삽사리와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살이 통통하게 쪄서 ‘살진이’라고 불렀는데 아직 어리지만 꾀도 있는 편이다. 삽사리에겐 두 마리의 새끼가 있으며, 그 이름은 둔치와 둘리다. 둔치는 살이 찐데다 몸이 둔해서 ‘둔치’라고 부르지만 곰살갑고 영리한 데도 있다. 둔치처럼 몸이 둔하지 않은 둘리는 내가 산을 내려오면 주차장까지 따라와서 꼬리를 흔들며 배웅해 준다. 호젓한 산 속이라서 고양이와 개들은 한 식구처럼 지낸다. 살진인 가끔 약삭빠르게 굴다가 둘리 형제로부터 따돌릴 때도 있다. 둘리와 살진이, 둔치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핥고 뒹굴고 야단스럽게 장난이다. 살이 통통한 둔치는 살진이에게 잘 덤벼들지만 뒤가 무거워 제풀에 넘어지곤 하는데 이럴 때 삽사리는 뒤에서 점잖게 구경을 한다. 둔치가 갈개 옆으로 가더니 다리를 살짝 벌리고 뒤를 낮춘다. 오줌을 누다가 둔한 것이 힘을 너무 준 탓인지 도랑으로 조르르 미끄러져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적셔졌다. 둔치의 털에 묻은 물기가 살진이 몸에 닿자 고양이인 살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구석으로 얼른 피했다. 그리고는 옹그리고 앉아 둔치를 째려보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경계 심리가 발동했기 때문인가 보다. 형제 개들은 퀴퀴한 하수구 냄새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에 입 맞추고 서로의 앞발을 들어 올리며 연해 장난이다. 뒤에서는 어미 삽사리가 둔치의 꼬리를 이따금 핥고 있었다. 공연히 속만 드러낸 살진인 심술이 났는지 뾰로통해져 있다. 어미 삽사리와 둘리는 이구동성으로 “나는 괜찮은데” “나도 괜찮은데” 하는 것 같다. 한집에 살아도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 것, 고양이와 개는 물 위의 기름이었다. 직장에서 귀가했더니 어머니는 여전히 방바닥을 치고 계셨다. 오늘은 뭔가 마음이 더 불편하신 모양이다. ‘찰싹’하는 소리가 유난히 세차고 날카롭게 들렸다. 내가 듣기에도 평소보다 좀 더한 것 같았다. “여보, 당신은 저 소리가 싫지 않나요?” 내 표정에서도 그런 기색이 보였던지, 아내는 내 얼굴에 눈길을 멈추며 다음에 나올 내 말을 기다렸다. 난 생각할 것도 없이 아들이 말한 대로 “나는 괜찮은데.” 해 놓고는 참 그 자리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아내가 묻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는 이보다 더한 명답이 어디 있겠는가! 천륜의 정은 무조건적이고 본능적이며, 거룩한 애정임에 틀림없다. 교원문학상(2011.1.1) 수필집《소쇄원》 포항이동중학교 교사  
514 낮달과 침묵의 11월/김인기 file
편집자
1792 2016-11-01
16.11월 78호 수필 낮달과 침묵의 11월 바람이나 돌덩이도 이즈음이면 묵상에 잠긴다. 낮달이 걸린 나뭇가지나 엽차가 조금 담긴 찻잔이라면 또 어떨까. 이것이 내가 느끼는 11월의 이미지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주로 이 달에 감기에 걸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곁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고, 가끔은 외로이 앓기도 했다. 이제는 단풍마저 빛이 바래서 이런가. 누가 서럽다며 과음을 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잊는다. 얼마 전에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간 적이 있다. 이십대 처녀로 보이는 약사가 내게 약의 복용법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요건 식전에 드시고요, 이건 식후에 드세요…….” 기침이 나서 조금 전에 병원에 다녀온 터였다. 그런데도 약사의 지시에 잘 따라야 하는 내가 정작 중요한 건 다 잊고 속으로는 이랬다. ‘거참, 야무진 처녀구나!’ 하마터면 내가 약사한테 엉뚱한 질문을 할 뻔 했다. ‘처자는 올해 나이가…….' 이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게 바로 예전 어르신들 정서로구나!’ 그랬다. 그 시절에 나는 이 분들의 언행에 아연실색했다. 올해 나이가 몇 살인지, 양친은 다 계시는지, 안항은 또 어떻게 되는지를 왜 묻나? 그런 사생활은 알아서 뭘 하자는 걸까? 이내 다 잊어버릴 그것들을 어른들이 감탄까지 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그래서 낯선 젊은이의 성씨는 물론 관향마저 캐묻고는 돌아서서 나를 보며 아까 그가 당신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하더냐 했다. ‘이러던 분들이 이제는 다 이승을 떠났구나.’ 너도 나도 늙는다. 이러다가 다 사라진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벌써 이 나이에 그 어르신들의 태도를 닮을 건 없잖아. 더더구나 시절이 요즘은 그때와 달라서 나이가 곧바로 존엄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아내도 곁에서 내게 핀잔을 줬다. 그럴 때도 아니면서 영감님 행세는 그만 삼가시라! 지당한 말씀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 건 나도 싫다. 그럴 이유도 없다. 따지고 보면 과거 그 어르신들도 훌륭하지는 못했다. 저 젊은이가 뭘 고민하나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그 질문의 바탕이 그 어른들의 완고한 관습에 맞춰졌다. 그래서 그 관심사도 그렇게 된 것이다. 하기야 사회변동이 미미하다면 그래도 좋다. 그 문답 자체가 우리들 모두의 현재이며 미래이니까. 사람들한테는 종종 경험도 독이 된다. 과거 내게 합당했던 것들이 현재 남들한테 통하지 않는다. 이걸 인정하기 어렵다. 성공이 도리어 눈을 멀게 한다. 이게 장삼이사들의 항다반사이다. 이러니까 질문도 바로 하기 어렵다. 당장 고정관념이 장벽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우선 덤덤히 이 늦가을의 풍정을 알려줄 것이다. 망치나 끌을 들고 성화를 부리며 덤비는 자들한테는 일단 찬물이나 한 잔 마시라 권해야지. 사태를 파악하지도 못하고서 뭘 쪼아댈 수는 없지 않으랴. 많은 지식을 빨리 축적하자면 누구라도 촌음을 아끼며 바지런을 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고요한 가운데 자란다. ‘그러면 그 고요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단순성에서 온다.’ 11월이면 활엽수들이 옷을 다 벗는다. 사람들도 뭔가를 털어내려고 한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11월은 공기마저 다르다. 3월이나 4월 또는 7월이나 8월을 상기해 보라. 아무래도 11월은 바람마저도 소슬하다. 이때 듣는 음악이나 읽는 글마저도 깊은 슬픔이 묻어나는데, 이건 한때의 열정과 사랑이 남긴 잔상이기도 하다. 나는 문득 궁금하다. ‘인생에도 이런 가을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꾸 낯선 이들한테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자신을 진작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는 날들이 있어야 그나마 주책바가지는 면할 게 아니냐 싶기도 하다. 이리하여 이즈음에 나는 누구한테라도 이렇게 말한다. “웬만하면…….” 그래, 웬만하면 설레발을 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지내시라. 그러면 아주 소중하나 그간 지나친 것들이 보일 것이다. 가족들과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낮달을 보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근래에는 시내 구석구석에 커피전문점이 생겼다. 여기에서 그간 격조했던 몇몇 사람들을 만나 생소한 이름의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어떨까. 말이야 하지 않아도 좋다. 경상북도 영천 출생(1962). 《월간에세이》로 등단(1991) 수필집『함께 가는 우리들』(1999),『참 좋은 날』(2006). 대구경북작가회의,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  
513 누명 외1편/김은령 file
편집자
2032 2016-10-31
16.11월 78호 시 누명 무슨 말을 할려고? 채독든 손가락 사이사이의 가려움을 촛농으로 눌러 죽인 밤이 있었다고 법당 안 마룻짱에 숨은 무늬를 죽으라, 죽으라, 마른걸레질로 살려내던 날들이었다고 겨울밤, 쩡,쩡,쩡 남장지 제 몸 깨는 소리 하현달 싸늘하게 와서 문살에 기대 엿만 보고 가는 소리 붕긋하게 젖가슴 커지는 소리 두고 온 그리움 부스럭 부스럭 몸 비트는 소리 소리, 들에 눌려 관절마다 물주머니 하나씩 달았었다고 병명에도 없는 '동물성 단백질 결핍'에 목덜미 잡혀 절뚝이며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여, 지금 너를 가둔 감옥 한 채의 비밀이 다 그것들의 음모였었다고, 그렇다고? 저것 봐라, 파초! 남국의 햇빛과 바람과 바다와 모래의 결핍을 몸속 깊이 눌러 죽이고 갓 스물의 사미니 하나를 기억하는 남장마을 그 흰 길을 꾸역꾸역 삼키며 버티는 저 푸른 오기 네가 버린 남장사 관음선원 절집 한 채를 통째로 삼키고도 끄떡없는 저 이국종의 푸른 독기를 파초는 알고 있다! 어디다 대고 감히, 지금에 와서 누구에게? 무늬 도배를 하면서 문설주 옆 꺾어진 부분에 사방연속무늬의 귀를 맞추다가 잔뜩 풀먹어 처진 벽지를 떼었다 붙였다가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문득, 이방 너머 세상의 벽, 그 무늬 궁금한거라 하여, 슬핏 들여다 본 그곳 현란하네 색 확 두드러지기 상하 좌우 무시하고 뒤섞이기 돌출되기, 또는 함몰되기 자기의 무늬만을 고집하는 수천만, 수억의 내가 그리고 네가 잔뜩 풀 먹힌 채로 악착같이 달라붙고 있는 벽 잘 꾸며진 하나의 방을 만들려면 벽지의 무늬부터 맞추어야 한다는 거 각진 부분에선 무늬의 반을 잘라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저 벽, 저 완벽한 치졸미를 이루고 있는 세상의 벽 무늬들 속 어디 끼여 있을 나의 무늬는 알기는 할랑가 몰라 경북 고령생 1998년 『불교문예』등단 시집으로『통조림』,『차경』있음  
512 번함(Buruham)*)공원에서 점을 보다 외1편/정선호 file
편집자
2188 2016-10-31
16.11월 78호 시 번함(Buruham)*)공원에서 점을 보다 휴일 번함공원의 호수에선 사람들 배를 타고 호수 주위엔 늙은 여자 몇이 점을 치고 있네요 그들은 한국 여느 점쟁이같이 출생일과 손금으로 점괘를 진지하게 알려주고 사람들은 듣고 있네요 지천명을 바라보며 미래나 운명이라는 낱말과 한참 멀어진 나도 장난삼아 점을 봤지요 한국과 떠 있는 해와 달, 별의 위치가 다르고 점쟁이와 내가 가진 정서와 문화가 다른데 점쟁이가 어떤 점괘를 말해줄지 궁금해지는 시간, 우주가 생성되고 지구에 땅이 만들어진 후 점쟁이와 나는 다른 문화와 자연에서 살며 산과 들판, 바다와 관계 맺으며 살아 왔지요 다만 그녀가 전생에 한번쯤 한국인으로 살았거나 내가 전생에 필리핀인으로 살았던 적 있다면 점괘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날 내가 해발 천오백미터에 있는 바기오시에 갔고 번함공원에서 점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내 운명은 죽을 때까지 공원 호수에서 머무는 것인가 이국의 산속 도시에서 펼쳐진 내 운명, 수많은 내가 살아 온 수천년의 세월이 스쳐갔네 *) 필리핀 루손섬 북부 바기오시 도심에 있는 공원 타잔이 왔다 타잔이 필리핀의 밀림에 왔다 밀림 안에는 타잔의 친구인 치타도 있고 악어며 긴 방울뱀들이 모여 살았다 다만 사자와 얼룩말, 기린같은 동물은 살지 않았다 필리핀인들은 일년내내 크는 나무와 가지식물로 울창해지고 목숨을 해칠 수도 있는 사나운 짐승 때문에 밀림 안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날도 타잔이 큰 소리로 포효하자 밀림의 온갖 짐승들 모여들어 밀림의 평화를 지켜냈으며 밀림은 변함없이 날로 울창해져갔다 우기엔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가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렸다 타잔은 갑자기 내리는 비에 상관없이 코키리와 원숭이를 데리고 다녔으며 그들이 있다면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타잔도 나약한 하나의 사람일 뿐이었다 필리핀 밀림에 매일 타잔이 왔다 타잔이 포효했다 매일 밀림 안에 내가 있다 방울뱀이 미끄러지며 나를 향해 왔으며 악어도 나를 삼키려 오고 있다 나는 매일 밤 타잔을 찾아 밤새도록 꿈속을 헤맸다 충남 서천 출생,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내 몸 속의 지구』『세온도를 그리다』가 있으며, 시집 『세온도를 그리다』(2015년 세종우수도서)가 있다 *. E-MAIL : sshish@hanmail.net  
511 눈길 외1편/김수화 file
편집자
1971 2016-10-31
16.11월 78호 시 눈길 눈길로만 키운 것들엔 닿을 수 없는 애절함이 스며있다. 북쪽으로 난 서재 창 너머 발길은커녕 눈길조차 외면당한 후미진 곳 나리꽃 몇 송이 몇 년째 저 혼자 세월을 이고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 그저 묵연히 바라만 볼 뿐 지독한 가뭄에도 물 한 모금 건네지 못했지만 때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창을 두드린다. 출렁이는 빌딩숲 꼬박꼬박 내는 월세에 저당 잡혀 연애도 결혼도 자식도 꿈도 희망도 포기해야하는 5포 세대의 막막한 산길 같은 청춘이 시름시름, 산그늘마냥 깊어가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하는 물노을에 깃든 마음길이다. 문득, 허공 산경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가쁜 숨 헐떡이며 오르는 등산로 보랏빛 꽃송이가 눈에 밟힌다. 누가 뿌렸을까 사방이 초록물결인 여름 산에 아무리 둘러봐도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데 이 무슨 조화인가 싶어 고개를 제켜 하늘을 보았다. 거기, 상수리나무 가지 끝 손바닥만 한 잎사귀 사이 자잘한 보랏빛 눈웃음 짓는 바람과 햇살로 허공이 키운 칡넝쿨 꽃밭 내안의 울타리 일시에 허문다. 경북선산출생, 2003년 ‘자유문학’신인상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북문인협회 감사, 경북여성문학회 회장, 김천문인협회 사무국장, 백수문학제운영위원, 생각하는 글쓰기교실 운영, 논술토론 강사, 제3회 경상북도여성문학상 수상, 시집 ‘햇살에 갇히다’ sohie4280@hanmail.net  
510 아버지는 학생이 되셨다 외1편/조정숙 file
편집자
2064 2016-10-31
16.11월 78호 시 아버지는 학생이 되셨다 기다란 장삼 자락 가다듬으며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이름 석 자 절 마당에 비질로 그려보던 어린 불목하니 자라서, 설법전 기둥 우뚝 세우고 한짐 지고도 묵묵히 노음산 꼭대기 중궁암까지 올랐다 국민학교 문턱만 넘었어도 원이 없었겠다는 아버지 지난 부처님 오신날, 기어이 학생(學生)*이 되셨다 부처님은 오셨다가 내년을 기약하고 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다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우리 아버지 오토바이 불빛인가, 글자 다 배워 아버지가 내게 처음 쓰신 편지인가, 그렁그렁한 별빛 별과 별 사이를 이어 나도 답장을 쓴다 거기, 잘 있어요? 여기도 잘 있어요 *學生 1. 배우는 사람 2.배우는 신분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말 3.생전에 벼슬 없이 죽은 사람의 명정(銘旌), 지방(紙榜), 신주(神主) 따위에 쓰는 존칭 안아 주는 베개 여덟 살 아들에게는 안아 주는 베개가 있다 안아 주는 베개가 아니라 네가 안는 베개 아냐, 해도 한사코 안아 주는 베개란다 곤한 하루를 안아 주고 받아쓰기 팔십 점 맞은, 아이의 눈물을 안아 주는 베개 가끔 삶으로 흐느끼는 나에게도 안아 주는 베개가 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하며 그 자그마한 품으로 나를 안아 일으켜 주는 안아 주는 베개  
509 벽시계 외1편/고현자 file
편집자
1902 2016-10-31
16.11월 78호 시 벽시계 서슬 퍼런 초침 끼니도 잊은 채 자정을 넘어가고 있다 문턱을 넘어온 비릿한 달빛 사이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잃어버린 밤 엇갈리는 뼈마디의 비명 나이를 먹지 않는 맥박은 심장 속으로 폭풍처럼 잠적한다 적막이 누운 자리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빈맥頻脈의 공황은 방바닥에 깔린 초침 소리뿐이다 *빈맥 : 잦은 맥박 신발 구도하는 수도승 같은 늘 바닥에 엎드려 낮은 자세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풍파를 겪어 내는 고행 창 닳은 한 발 코 터진 한 짝 주름살 숫자만큼 꿰매고 덧꿰매도 축축하고 음산한 그곳 언제나 묵언 수행 말라가는 핏줄 굽이 굽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운명 지친 몸 안고 품으며 바닥으로 살아온 희생 네 피와 살이 나의 뼈가 된 어미와 새끼처럼 인연과 정으로 나란히 함께 가는 사랑  
508 가을의 티눈 외1편/한양수 file
편집자
1746 2016-10-31
16.11월 78호 시 가을의 티눈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 같은 까치발을 서고 가래톳이 찣어지는 신열의 꽃 잔치 같다 눈의 시경이 나를 넘어뜨릴 감각에 몇기의 통증을 혀끝에 녹여가고 있는가 숱하게 꺽어왔던 미로의 길 따라 살 냄새 이름 냄새 나뭇잎 한장마다 그리고 서서 이젠 단풍 이라니 가슴속에 꾸려온것 어떻게 물들어 갈까 힐금 힐금 돌아보며 낙엽들이 으석이는 소리 그 소리를 밟고 가는 나는 이 악문 세월의 흉터 무언의 결박을 풀지 못하고 있다 . 가을서곡 삶의 눈빛 확인하는 낙엽 하나가 바람에 날린다 세상은 이 낙엽이 날리든 말든 거들떠 보지 않지만 아프게 날 깨우는 어느 미화원의 빗자루 쓰는 소리는 단 한번뿐인 생의 흔들림 찿고 있다 등 뒤에서만 터지는 울음 목침을 반듯이 벤체 모여드는 원경 흔들어도 점점 나상에 떨어지는 신음소리 낼수 없었다 어쩌자고 살아 있는 날은 흔들면 흔들수록 한 세월 버릴수 없을까 나는 번번히 한번도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다 . 원경~ 멀리보이는 경치 나상~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 2014년 시와 창작 등단 시와 창작 회원  
507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안지숙
편집자
1763 2016-10-31
16.11월 78호 소설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 안지숙 정거장에서 내려 길찾기 앱을 열었다. 오늘로 이것도 끝이구나. 나는 길찾기 앱의 검색 칸에 시장 이름을 적어 넣으면서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펼치는 판판프로젝트는 내가 해송문화재단에 들어와서 2년간 맡아해 온 일이었다. 계약 연장이 된다면 내년에도 재래시장을 돌아다니게 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시장입구에 미홍이 목도리를 둘둘 감고 서있는 게 보였다. 미홍은 내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도 뻣뻣하게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준비 안 하고. 미홍은 입만 삐죽 내밀었고, 길바닥에서 햇볕을 쬐던 고양이가 배추를 실은 트럭 밑으로 들어갔다. 볕 좋은 마트 앞에 모여 있던 극단 밝음의 단원들이 나한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아침 추위에 다들 코끝이 빨갰다. “저래가지고 공연이 되겠어요?” 미홍이 시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꼈다. 마트에서 시작해 고가도로 밑까지 자리를 잡은 시장은 일자형으로 길쭉했다. 연기자 네 명이 공연을 펼치기에는 공간이 협소했다. 미리 현장답사를 해야 했는데 내 실책이었다. 나는 차도 쪽으로 몇 걸음 옮겨서 시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장 중간에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고, 바깥도로에는 가게에서 내놓은 허섭스레기들이 널려있었다. 저걸 대충 치우고 공연을 할 것인가, 잠시 궁리를 하다가 포기했다. 치우는 일도 만만찮았고, 차도와 붙어있어 교통방해 신고가 들어올 게 뻔했다. “동작 없애고 대사로만 치고 가자. 방법이 없네.” 내 말에 미홍이 발끈했다. “언니는, 연기까지 했던 사람이 왜 그래.” “내가 무슨 연기를 해.” 연기를 하긴 했지만 십수 년 전 일이었다. 음, 딕션은 소영이가 최고다. 기억 안나? 미홍이 비난조로 말했다. 대학 때 연극반 지도교수는 직구를 던지듯 발성을 하라면서 내 발음을 칭찬했다. 미홍은 특히 그 교수에게 발음 지적을 많이 당했다. 그게 미홍에게 상처가 됐을 것 같지도 않은데 딕션이니 뭐니 얘기를 꺼내는 게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공연 횟수 신경 써야 하는 거 다들 알죠? 빨리 시작합시다. 내 말에 단원들이 미홍을 쳐다보았다. 아, 진짜 그림 안 나오는데……. 미홍은 시장입구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나는 미홍에게 한마디 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외주작업자가 뻗댈 때는 말문을 닫는 게 효과적이었다. 입을 닫고 있으면, 그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현장에서는 그들에게 내가 재단이었다. 애들아, 우리 컨셉 좀 잡자. 미홍이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단원들을 데리고 마트 앞으로 몰려갔다. 여자들 다섯이 머리를 맞대고 둘러선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미홍을 불렀다. 고개를 삐뚜름히 돌려 쳐다보는 미홍에게 손목시계를 들어보였다. 삐쳐서 모른 척할 것 같던 미홍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홍에게 마트 이층에 있는 카페를 가리켜 보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출입문을 열자 주방과 가까운 테이블에서 냅킨을 접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된 카페 안에 손님이 아무도 없어 괜히 횡재한 기분이었다. 나는 드립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구석자리로 갔다. 엉덩이를 들지 않아도 거리가 훤히 내다보였다. 공연 상황을 체크하면서 과제를 해치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알록달록한 몸뻬바지를 입은 배우 넷이 생선가게로 우쭐우쭐 몰려갔다. 생선가게 아줌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두어 차례 공연을 쳐낸 뒤로는 미홍과 배우들이 구술자 섭외도 알아서 했다. 해송문화재단이 서울시 지원금을 받아서 진행하는 판판프로젝트 공연은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매장으로만 몰리는 사람들을 재래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게 목적이었다. 판판프로젝트의 외주업체를 선정하는 면접 자리에서 미홍은 자신의 연출 포인트가 신파와 감동이라고 밝혀 점수를 땄다. 극단 밝음의 대표이자 연출가이기도 한 미홍은 대본 없는 즉석공연을 하겠다고 기획서에 적어냈다. 작년에 했던 극단은 시장유래를 조사해서 극본을 준비해 가던데요. 팀장의 말에 미홍은 살짝 코웃음을 쳤다. 신파와 감동은 짜놓은 대본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어디서 나오는데요? 팀장이 물어보자 미홍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말했다. 별의별 고생을 다 했지만,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요. 누구든 자기 인생에서는 주인공이잖아요. 주인공이 꾸려가는 가게를 무대배경으로 해서 그 사람 인생을 눈앞에서 펼쳐 보이는 겁니다. 생각해 보라고요. 자기 인생이 펼쳐지는데 감동을 하지, 안하겠어요? 주인공 스토리가 알려지면 손님도 늘 거고요. 같은 물건을 사도 이왕이면 인생내력을 알게 된 사람 가게에서 사고 싶잖아요. 인간적으로요.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마케팅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미홍의 대답은 훌륭했다. 대본이 필요 없는 극단 밝음의 공연은 섭외가 관건이었다. 시장바닥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모자란다고 큰소리치는 상인을 두세 명 정도 확보하면 그날 공연은 성공이었다. 상인들로부터 살아온 내력을 들으면 극단 밝음 단원들은 그 이야기 속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었다. 상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빙의한 무당처럼 설치는 연기자들을 보면서 어색하고 민망해했지만, 대부분 금세 공연에 빠져들었다. 이웃가게 주인들과 장 보러 온 손님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주인공의 시장인생을 지켜보았다. 미홍은 능력 있는 연출가였다. 연출로 풀리긴 했지만, 대학연극부 때 미홍은 주인공급 역할을 많이 맡았다. 선배들은 발음 지적을 받던 미홍에게 비중 있는 역할을 안기면서 내게는 중요한 배역을 맡기지 않았다. 제 아무리 딕션이 좋아도 무대욕심 없이는 인물 소화 못해. 넌 연기는 아냐. 조연출의 충고가 크게 섭섭하거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나는 무대에 서는 것보다 조명실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했다. 여배우1이나 행인2 같은, 내가 나오는 몇 장면이 끝나면 대본을 말아 쥐고 조명실로 뛰어올라가곤 했다. 불이 꺼진 조명실에서 내려다보는 무대야말로 진짜 무대였다. 사람들이 등장하고, 움직이고, 사라지는 무대는 나의 부재로 인해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변모했다.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사람들의 기억과 부재가 고여 있는 무대는 마치 인류의 운명을 항해하는 커다란 배와 같았다. 조명실의 어둠 속에 앉아서 내가 빠져나온 배를 내려다보던 그때를 떠올리자 어떤 비애 같은 것이 밀려왔다. 나는 늙은 여자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탁자에 내려놓던 카페남자가 나를 힐끔 보았다. 시장통 카페치고는 커피 맛이 괜찮았다. 한 모금을 마시고, 또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나서 구닥다리 넷북을 켰다. 오전 중에는 오늘저녁 명리학교실에서 발표할 내 사주명식을 정리하고, 오후에는 공연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공연사진은 미홍이 알아서 찍어놓을 것이다. 나는 불과 흙으로 채워진 내 사주명식을 불러냈다. 을乙 병丙 경庚 기己 미未 인寅 오午 미未 내가 태어난 해는 1979년 기미년이었다. 기미년, 기미년부터 해석을 하자. 기미년을 되뇌어도, 욕설을 내뱉는 것 같은 후련함은 있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강의를 들을 때는 뭔가 알 것 같더니 막상 혼자서 분석을 하려니 기본 용어조차 가물거렸다. 괜히 발표하겠다고 나섰나.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자기 명식을 발표해야 사부가 총평 삼아 들려주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강의내용에 얽매이지 말고, 본인의 직관과 직감으로 정리해 오면 됩니다. 사부가 일러준 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부터 짚어가기로 하고 메모장을 열었다. 내가 명리학에 꽂힌 건 지난 여름휴가 때였다. 뤽 베송 감독이 만든 영화 ‘제5원소’를 토렌트에서 다운받아 본 뒤 5원소를 검색하다가 명리학 사이트로 들어가게 됐다. 명리학의 5원소인 오행(五行)에 대해 적어놓은 글이 눈에 띄었다. 수성, 목성, 화성, 토성, 금성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지구는 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의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5원소보다 명리학의 5원소가 더 그럴싸해 보였다. 나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배를 깔고 엎드려 노트북을 클릭해가며 몇 시간 동안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읽었다. 근시안에 도수를 맞춘 안경 하나를 코에 걸친 느낌이었다. 나는 링크를 걸어놓은 명리학교실로 들어갔다. 명리학입문반 과정이 개설돼 있었다. 첫 강의는 이미 지나갔지만 바로 신청을 했다. 명리학이라는 게 태양계를 도는 행성들의 움직임까지 살펴서 사람의 일과 사물의 이치를 해석해주는 학문이라니,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틀어진 내 인생행로쯤 가뿐하게 짚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운의 절정기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절정기라기보다는 결정적인 해라는 게 맞겠다. 그해 2002년은 임오년(壬午年)으로 힘이 지나치게 세서 문제가 되는 겁재의 기운이 내게 들어온 해였다. 겁재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적인 욕구의 저장고인 이드(Id) 같은 거였다. 내 사주명식 자체에 이미 겁재가 있는데, 임오년이 되면서 겁재가 하나 더 들어왔으니 눈에 뵈는 게 없었을 것이다. 겁재의 괴력으로 기가 펄펄 살아서인지 나는 R쇼핑 취업에 성공했다. R쇼핑에서 나는 마케팅부 막내사원이었고, 홍보담당자인 정대리가 내 사수였다. 사수가 시키는 일을 하라고 있는 게 막내였으므로, 나는 찍어온 사진파일을 정리하고, 교정을 보고, 약속이 잡힌 인터뷰이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다음 달에도 그 일을 했고, 그 다음 달에도 그 일만 했다. 테마 잡고, 취재하고,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은 막내가 해서는 안 되는 건가,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잡무만 시키는 데 대한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견딘 게 대기업 신입사원으로서 내가 몇 달간 해낸 일이었다. 정대리가 Y여대 언론정보학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다는 소문을 다른 부서에 있는 입사동기에게서 들었다. 나는 Y여대의 언론정보학과를 나왔다. 그 나이에 웬 지질함이래. 빈정거리는 내 말을 입사동기는 못들은 척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할 일이 없어 남아도는 시간에 지난 호 사보를 뒤적이며 눈치 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정대리가 시키건 말건 다음호 작업에 필요하겠다 싶은 자료를 찾아서 공유폴더에 올려놓았다. 미친 거 아니냐는 눈총을 정대리가 쏘아 보냈지만 못 본 척했다. 나는 꿋꿋이 여름시즌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확보했고, 신제품 홍보에 필요한 컨셉 아이디어도 생각날 때마다 올렸다. 누군가 그걸 쓰든지 버리든지 상관없었다.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도 없고, 어딘지 엉큼해. 재수 없어. 휴게실에서 정대리가 다른 선배들과 쑥덕거리는 소리를 옆 테이블에 앉아서 듣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힘들었다. 조직에서는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않았다. 나는 8월 초에 사직서를 냈다. 다음 인사이동을 기다려보라는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는 정대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지질한 인간들한테 나를 던져두는 건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첫 직장을 때려치우고 두 달 남짓 쉬다가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간단한 서류번역을 하고 사무를 봤는데 재미가 없었다. 수틀리면 또 때려치우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면서 출근하기가 싫었다. 그래도 다녔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기본적으로 성실한 편이고 튀는 것을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사직서를 던지는 객기는 한 번으로 족했다. 무역회사가 부도를 맞아 망한 뒤에는 영상 제작업체 몇 군데를 옮겨 다녔다. 종합복지관, 입시학원, 신문사 교열부 등에서도 일을 했다. 종합복지관에서는 11개월째 월급이 찍힌 다음날 해지통고를 받았고, 신문사에서는 정규직 전환을 코앞에 두고 잘렸다. 지금 다니는 문화재단에서도 조만간 계약해지 통고를 받게 될 터였다. 첫 직장부터 지금 다니는 재단까지, 내 사주명식의 대운과 연결시켜가며 사회생활을 징검징검 정리하고 나서 메모장을 저장했다. 그래프로 그리면 45도 기울기의 인생이었다. 뭔가 억울하다기보다 어이가 없다는 기분이었다. 재단에서 계약해지를 통고받으면, 45도 기울기의 직선 끄트머리에 점 하나 찍힐 것이고, 그 점을 뭉개면서 일직선은 아래로 내리꽂힐 것이다. 분기별 사업이 12월 중으로 마무리되니까 이번 달 말, 늦어도 12월 초까지는 해지통고가 날아올 거였다. 재계약은 대개 일회에 그쳤다. 계약직에 대한 통상적인 처리방식이 그랬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뭔가에 쫓기듯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해지통고를 받게 될까봐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딱히 근거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수시로 밀려들었다. 사람이 이유 없이 불안한 것도 사주에 들어있는지, 명리학교실에 나오는 여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강의시간에 사부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져 눈총을 사긴 해도 실력은 있어 보였다. 불안한 거 맞네. 겁재가 안방에 들앉았으니 힘이 오죽할까. 반말 비슷하게 던지고 난 여자가 내 사주명식을 한참 더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여자의 입을 쳐다보았다. 자기한테는 겁재가 불이잖아. 불이 나무를 다 태워버리니 몸도 가시방석이요, 마음도 가시방석일밖에. 어디 기댈 데가 없으니 불편하고 불안하지. 여자는 거침없이 풀이했다. 내 명식에서 나무는 문서, 엄마, 공부 같은 것을 의미했다.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나무가 불에 타버린다는 것은, 뭔가 배우러 다니는 게 저한테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인가요. 여자는 내가 사다준 커피를 빨아먹으며 어깨를 들었다 놨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언니, 사주보는 거야?” 갑자기 미홍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미홍이 내 옆에 서서 만세력을 띄워놓은 넷북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 하여간 부지런한 언니라며 나를 치켜세운 미홍이 카페 남자에게 라테를 주문했다. “볼 줄 알면 내꺼도 좀 봐줘. 공연지원금 신청해놨는데 그거 안 되면 우리 극단 완전 죽음이야. 굶어죽을지도 몰라.” 미홍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호들갑스럽긴 해도 엄살은 아닐 거였다. 오늘만 해도 연출까지 다섯 명이 아침 아홉시 반에 나와서 오후 서너 시까지 뛰는데, 책정된 공연비는 겨우 40만 원이었다. 교통비와 점심값과 소품비가 포함된 금액이 그 정도였다. 그래도 미홍은 해송문화재단 사업은 공연비 떼일 걱정을 안 해도 된다며 판판 공연업체로 선정됐을 때 엄청 좋아했다. “언니, 잘 먹을게.” 카페라테를 받아든 미홍이 잔을 들어 올리며 애교를 부렸다. 대학교 때는 미홍이 저러지 않았다. 몇 년간 서로 연락이 끊겼다가 재단 일을 하면서 만났는데, 미홍은 성격이 많이 변해있었다. “애들은 잘하고 있고?” “우리 애들이야 늘 잘하지. 내가 운영 능력이 없어 문제지. 극단도 요즘은 전문마케팅이 필요한데 언제 그런 걸 배웠어야 말이지.” 입술에 라테 거품을 묻힌 채 투덜거리던 미홍이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입을 놀리지 않고 있으니 미홍의 얼굴이 해쓱해보였다. 그래, 쉬어라. 너도 좀 쉬어야지. 속으로 한 말인데, 미홍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넷북을 덮었다. 키보드소리로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미홍이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금세 잠이 들었는지 가슴이 조용히 오르내렸다. 미홍은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극단에서 제대로 된 배역을 따내지 못했다. 연출가로부터 발음이 부정확하고 호흡이 짧다는 지적을 받았다. 자신의 폐활량에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자 미홍은 연출로 돌아섰다. 연출, 이거 재밌어. 첫 연출작을 무대에 올렸을 때 초대장을 보낸 미홍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말했다. 그 뒤로는 내가 연극에서 관심을 거뒀으므로 만날 일이 없었다. 재단 일로 다시 만났을 때 미홍은 극단 대표가 돼있었다. 극단 밝음을 만들고 나서 사람들한테 기피 인물로 찍혔다고 미홍은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털어놓았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선후배와 동기들을 찾아다니며 표를 강매했고, 밥값과 사무실 운영비를 뜯었다고 했다. 덕분에 빈대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미홍이, 나는 부러웠다. 빈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붙잡고 갈만한 뭔가가 있다면 막막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게는 미홍의 밝음 같은 게 없었다. “내 생년월일 불러줄까?” 나지막이 코를 골던 미홍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고 말했다. “아니다. 4월 1일, 밝음 창단 날짜로 봐줘. 내년에 우리 극단, 운빨이 어떨 것 같아?” “그거 알아맞힐 실력이면 자리 깔았게.” 극단 창립일과 내년 연운이 합인지 충인지 정도만 봐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몇 년간 열심히 극단을 이끌어 온 것 자체가 운빨이지, 머. 나는 미홍에게 고리타분한 말로 둘러댔다. 그런가. 미홍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아참, 이건 오늘 구술자들 섭외한 거.” 미홍이 가게 상호와 전화번호를 적은 진행기록지를 내놓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뭘?” “나 배고파. 아침에 보니까 밥통에 밥이 하나도 없더라. 누가 또 친구들을 끌고 와서 싹쓸이를 했나봐.” 아침저녁 두 끼를 고시원 밥으로 때우는 미홍은 시장공연이 있는 날 툭하면 손을 벌렸다. 공연비에 점심값이 포함돼 있다는 말은 차마 안 나왔다. 시장통이라 밥값이 싼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가 다시 지갑을 열고 만 원짜리 세 장을 더 꺼냈다. 미홍이 눈을 끔벅거렸다. 오늘 마지막 공연이잖아. 재단에서는 프로젝트를 끝낸 외주업체에 회식비를 주는 대신 기념품을 발송했다. 기념품이라는 게 작은 액자나 무릎담요 같은 거라서 주고도 욕을 먹었다. 언니, 맛있는 거 사먹을게. 미홍이 손에 쥔 지폐를 흔들어 보이고는 출입문을 나갔다. 카페 남자가 우리 둘이 하는 양을 쳐다보고는 실쭉 웃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카페에는 아직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넷북을 다시 켜고 명식 정리를 다 끝낼 때까지도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는 남의 카페를 봐주러 온 사람처럼 태평했다. 그러니까 저 태평스러운 얼굴을 나는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경복궁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바리스타 기초과정을 배울 때였다. 무슨 제약회사에 다닌다고 했던 기억도 났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에서 시장통 카페 주인으로 변모한 남자의 사주명식을 가져가면 명리학교실 사부가 좋아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넷북을 끄고 가방을 챙겼다. 카드를 내미는 내게 남자가 눈인사를 했다. 잠깐 망설이다 귀찮아서 알은척하지 않았다. 카페 계단을 내려가자 미홍이 생선가게 앞에서 손짓을 했다. 이제 한 집만 더 하면 돼. 공연반응이 좋은지 미홍의 목소리가 통통 튀었다. 여기 생선가게 아줌마가 사람들 신상을 다 꿰고 있어. 저기 신발집 사장님은 오일장 돌던 장돌뱅이 출신인데 인생이 수목 드라마야. 나는 진행기록지에 미홍이 일러주는 내용을 메모하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를 돌면서 공연소감을 듣고, 공연장면을 액자로 만들어서 드릴 건데 특별히 넣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고,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재단에서 전화가 올 경우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은지 힌트를 주었다. 마지막 가게까지 도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상인들과 주고받은 말을 탈탈 털어서 공연보고서를 채우면 오늘 업무는 끝이었다. 공연은 끝났지만, 보고서를 완성해 놓고 카톡을 보내기로 했다. 지금 공연종료를 알렸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소리가 나오면 골치 아팠다. 명리학교실과 재단사무실은 서울의 양 끝에 있었다. 미홍이 단원 네 명과 소품들로 가득 채운 차를 몰고 돌아간 뒤 나는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편의점 탁자에 자리를 잡고 넷북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가 가까웠다. 미홍이 넘겨준 공연사진을 띄워가며 구술자의 스토리와 공연장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식으로 보고서를 썼다. 말이 보고서지 거의 공연 팸플릿 분량이었다. 공연 틈틈이 작성했어야 할 내용을 몰아 쓰고 나자 어깨가 따끔거렸다. 양쪽 팔을 번갈아 치켜들고는 천천히 돌렸다. 계산대를 지키는 여자애가 내가 앉아 있는 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물리고 일어나 진열대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라면이 붇기를 기다리며 목 운동을 하는데 뿌드득 소리가 났다. 삼각김밥을 먹고 라면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서 팀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공연 5회 완료. 공연팀에 부과된 하루 공연 횟수는 5회 이상이었다. 읽음 표시가 뜨는데 답이 없었다. 마지막 남은 한 꼭지를 마저 작성하고 나서 다시 카톡을 날렸다. 한 건 정도 더할까 싶어 나가봤는데 섭외가 안 되네요. 보고서는 메일로 보낼게요. 즉시 답변이 왔다. 알았음. 이모티콘이나 물결표시 없이 오는 답글은 화가 났다는 표현이었다. 가끔 반말을 툭툭 날리는 팀장은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뜨거운 컵라면 국물을 먹고 나니 괜찮은 것 같더니 밖으로 나오자 등이 으슬으슬했다. 요즘은 조금 무리를 하면 맥이 풀리듯 몸에서 힘이 빠졌다. 직장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강좌를 쫓아다니느라 내가 생각해도 바쁘게 살긴 살았는데, 그 때문에 피로가 쌓인 거라면 왠지 부끄러웠다. 지난 몇 년간 나는 한 강좌가 끝나면 또 다른 강좌를 찾아 등록을 했다. 퇴근하고 누구를 만나 저녁을 먹는다거나 술을 홀짝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없었다. 그냥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낯선 강사를 앞에 두고 뭔가에 집중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배워두면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는 계산으로 강좌를 선택한 건 처음 한두 번이었다. 내가 새로운 강좌를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동기들은 고만고만한 회사의 팀장급으로 승진해 있었다. R쇼핑에 입사했을 때 나를 부러워했던 동기들이었다. 만날 뭐가 그렇게 바빠. 내게 연락을 해오던 동기들이 나중에는 화를 냈다. 내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나도 몰랐다. 나는 치부를 들춰내듯 내 일정을 그들에게 알렸다. 스페인어 배우러 다니느라 시간이 통 안 나네. 요즘 벨리댄스 배우고 있어. 매일 가는데 벌써 네 달째야. 나 고기 안 먹어. 얼마 전부터 몸살림운동 시작했어……. 카메라를 배우고, 비누공예를 하고, 귀농학교를 다니고,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실제로 늘 바빴다. 어쩌면 늘 바쁠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열심히 강좌를 쫓아다닌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뭔가를 하려고 달려가는 길은 덜 막막했다. 문구점에서 내 명식을 풀이한 과제를 프린트로 뽑아 복사한 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몸살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문구점으로 도로 들어가 주인여자에게 약국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주인여자가 한참 생각하더니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을 거라고 했다. 나처럼 눈썰미가 어지간히 없는 여자였다. 아침에 버스에서 내렸던 정류장 건너편에 약국이 보였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스마트폰을 열었다. 길찾기 앱을 열고 시장에서 명리학교실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한 시간 거리였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는데 카톡이 울렸다. 잠깐 신경이 곤두섰다. 해지통고는 아니었다. 아버지 또 시골로 잠적. 혼자 배달 뛰느라 죽을 지경임. 카톡은 남동생한테서 온 거였다. 답장을 하지 않자 전화가 걸려왔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가서 전화를 받았다. 저녁에 와서 홀 좀 봐주라. 엄마가 닭 튀기다가 뛰어나와 맥주잔 나르고 있어. 동생이 고함을 질렀다. 갈 데 있어서 안 돼. 바빠. 바쁘지 않아도 치킨냄새 맡으면서 맥주잔 나르기는 싫었다. 아버지는 재작년에 정년퇴직을 하고, 집을 판 돈에다 미리 찾아 쓰고 조금 남아있던 퇴직금을 보태 동생한테 치킨집을 차려주었다. 온가족 생활비를 책임지겠다며 큰소리쳤던 동생은 엄마와 아버지를 종업원으로 부리고 있었다. 집을 팔고 전세로 들어가면서 동생은 방 두 개짜리를 계약했다. 거실에서 자도 된다는 동생한테 방을 내주고 나는 원룸을 얻어 나왔다. 덕분에 매달 원룸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몇 달 푹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처지였다. 내 사주명식을 정리하면서 부모 형제 덕이 없다는 내용을 넣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리학교실이 있는 회관으로 들어서자 사부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발표를 하는 날인데 삼십 분이나 늦었다. 약국에서 나와 길찾기 앱이 일러준 150번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다보니 반대방향이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환승해 오는데 길이 막혔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부글거리며 술이 괴듯 조용히 화가 괴어올랐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면서 한 시간 남짓을 서서 왔다. 오는 동안 몸에 약 기운이 퍼졌는지 으슬으슬한 느낌은 덜했다. “외모만 성형하는 줄 알아? 아니야, 여러분. 팔자도 성형을 해요. 해마다 재기통문이 든 날에 생일잔치를 하고, 그날 태어났다고 우기는 거야. 재물이 붙을 사주라고 지한테도 우기고 남한테도 우기면서 사주 자체를 바꿔버리는 거야. 사주 바꾸기 참 쉽죠이.” 꼬리를 늘이는 사부의 말투에 수강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웃음소리로 소란해진 틈을 타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방에서 수강생들에게 나눠줄 복사 뭉치를 꺼내자 U자로 배치된 자리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철학공방 남자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보였다. 어색한 티가 묻어나는 포즈에 웃음이 나왔다. 그가 방장으로 있던 철학공방에 꽤 오래 참석한 적이 있었다. 무슨 유행처럼 서울 곳곳에 인문학카페가 생길 무렵이었다. 철학공방은 그런 카페에서 꾸리던 철학서 읽기 모임이었다. 카페를 찾아간 첫날 얼굴이 네모나게 각진 남자가 철학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하다고 말을 건넸다. 철학을 하면 내가 바라는 게 어떤 삶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고, 나는 준비된 대답을 했다. 내 태도가 조신해 보였는지 사람들이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각진 남자가 철학공방 모임의 방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는 환영사를 했다. “여긴 다들 형편껏 자신의 입장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철학공방이라는 배가 항해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배를 탄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이 있을 겁니다.”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한다는 방장의 말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계속 모임에 나올지 말지 쭈뼛거리던 마음도 사라졌다. 배에 탄 사람들은 자주 바뀌었지만 철학공방 남자를 중심으로 매주 모임이 이어졌다. 나는 일 년 가까이 참석을 하다가 영상센터에서 하는 동영상 편집강좌를 듣게 되면서 빠졌다. 빠진 뒤에도 철학공방은 하나의 커다란 배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았다. 그 후 내가 참석했던 강좌나 모임에서도 나는 새로 만난 사람들과 어울려 잠시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거라 생각했다. “명식 발표 합시다. 오늘 누구지?” 사부의 말에 나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갔다. 숨을 고르며 사람들을 둘러보다 철학공방 남자에게 눈을 맞췄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철학공방 모임 때도 그랬다. 겨우 해독한 내용을 떠듬떠듬 늘어놓으면서도 네모나게 각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었다. “이소영 씨, 생일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요?” 발표가 끝나자 내 명식에 화(火)가 넘쳐 나무를 다 태운다고 풀이했던 여자가 질문을 했다. 질문이 아니라 추궁하는 말투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쁠 뻔했다. “양력으로 79년 6월 28일 맞아요.” “아까 직장을 이곳저곳 옮겨다녔다고 했는데… 명식이 안 맞아요. 느낌적 느낌으로.” 느낌적 느낌 같은 소리는 할 필요 없고 근거를 말하라고 구석에 앉아있던 사부가 참견을 했다. 사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기죽지 않고 여자가 빔으로 띄워놓은 내 사주명식을 가리켰다. “재물을 겁탈하는 겁재에다 직장 운을 망치는 상관이 저렇게 들앉았는데 직장을 그리 쉽게 찾아 들어갔다고요? 쉬지도 않고? 저 명식이면 쪽박을 차도 벌써 찼겠네. 겁재에 상관에 편인에……, 흉신이 저 정도면 정신적으로 먼저 문제가 생겼지 싶은데요.” 여자의 말은 사주에 귀격 천격이 따로 없고, 길신 흉신이 정해진 게 아니라는 사부의 강의내용을 대놓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부는 겁재나 상관이 흉신이 아니라 낡은 판을 치우고 새로운 판을 짜는 기운이라고 가르쳤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철학공방이 손을 들었다. 사람들 눈길이 여자한테서 철학공방으로 옮겨갔다. “사람 한평생을 생로병사라 이르지 않습니까. 생로병사에서 좋은 게 뭐 있나요? 태어난다는 거, 이거 하나가 좋을라나. 평생 힘들게 괴롭게 살다가 좁쌀만큼 괜찮은 게 있으면 우리는 그 좁쌀 하나 갖고 죽인다느니 대박이라느니 하잖습니까. 어차피 사람 사는 게 열에 아홉 쪽박입니다. 도긴개긴 인생에 쪽박 명식이다 뭐다 겁주고 겁먹고 그럴 거 없지 싶어요. 하하하!” 살짝 험악해진 교실 분위기를 눅이려는 듯 수강생들이 철학공방을 따라 웃었다. 철학공방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소영 씨 대운을 보니 지금은 좀 갑갑하지만 오륙년 뒤부터는 일이 풀릴 것 같습니다. 43대운부터 용신인 해수 자수가 들어오고…….” 철학공방이 주제를 대운으로 바꾸었고, 내가 살아온 내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추측하는 의견들이 나왔다. 수업이 끝날 때쯤 사부가 내 명식의 특징을 짚으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내용이 두루뭉술해 기대했던 것에 못 미쳤지만 역시 그러려니 했다. 나도 속으로는 명리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반쯤은 접어두었던 모양이다. 사부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되 뭐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는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두 번 반복했다. 열 시에 수업이 끝나고, 나는 뒤풀이에 몰려가는 사람들 뒤로 빠졌다. 약 기운으로 찌그러져 있던 한기가 어깨를 두드렸다. 철학공방이 같이 가자고 손짓을 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철학공방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다음 달인 12월 둘째 주에 명리학교실 입문반이 끝나고, 내년 1월 심화반 과정이 시작될 터였다. 나는 심화반을 등록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자기 명식에 올라탄 사람은 본인이 가고 싶은 대로 죽 가면 돼. 사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말을 밉상스럽게 해서 그렇지 여자는 내 삶의 핵심을 짚었다. 사주 때문이든 아니든, 나는 내 쪽박을 깼다. 직장을 구할 때마다 나는 일이 년 다니고 나면 해지통고를 받게 될 곳을 골라서 들어갔다. 일부러 그런 직장을 골랐던 건 아니었다. 그나마 숨쉬기가 편한 곳을 고른 게 결과적으로 그랬다.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찾아들었던 강좌 가운데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게 많았다. 나오고 나서 후회했던 대기업 정규직도, 피곤을 무릅쓰고 쫓아다녔던 그 많은 강좌들도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거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하고 싶은 게 없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냥저냥 살면 되지 머.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서면, 바로 불안했다. 스스로 방향을 가늠하고, 낫낫이 손질을 해가며, 간절히 뭔가를 붙잡고 가는 사람의 배에 올라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스마트폰 주소록에서 미홍의 이름을 찾아 눌렀다. 내가 먼저 전화한 적이 없어서인지 미홍은 내 목소리를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극단 밝음에 합류할까 싶다. 나는 미홍에게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연말 다가오니까 외로워서 그래? 미홍의 말에서 전해지는 긴장이 내 숨소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연기 해보려고 그러지. 내가 딕션은 좋았잖아. 미홍은 전화 저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미묘하게 미홍이 나하고 안 맞는 지점이었다. 일단 와서 보고 결정해. 회관 로비의 불빛 아래 서서 나는 미홍이 불러준 주소를 길찾기 앱의 검색 칸에 적어 넣었다. 나 같은 길치가 찾아가기 애매한 지점에 극단사무실이 있었다. 실핏줄처럼 사방에 퍼져있는 선은 사무실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골목길일 것이다. 길찾기 앱이 일러준 정거장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오십 미터쯤 걸어 들어가니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 중간에 있는 옆길을 못보고 지나친 듯했다. 돌아 나오다가 목재를 쌓아둔 곳에서 옆길로 접어들었다. 걸어갈수록 점점 길이 넓어지더니 조금 전 버스에서 내린 정거장이 나왔다. 다시 원래 골목으로 들어와 미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있는 데가 어디냐고 미홍이 물었다. 간판이 붙은 가게도 없고 큰 건물도 없었다. 일반주택이랑 길냥이가 몇 마리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이 동네는 다 주택이고 길냥이들 천지야. 미홍이 키들키들 웃었다. 극단 사무실이 어떨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미홍이 웃음을 그치고 물었다. 요즘은 극단운영도 전문마케팅이 필요하다며? 내가 마케팅을 맡아서 극단연습실도 만들고, 조명실도 만들고 제대로 키워보려고 그런다. 그러니 날 붙잡으란 말이다. 이 말은 지원금에 목매고 삼시세끼 해결하기도 힘들다는 극단 밝음의 사무실을 본 뒤에 할 작정이었다. 내게는 여배우1이나 행인2가 되어 더듬거렸던 무대를 벗어나서 틀어박힐 수 있는 조명실이 필요했다. 밤공기가 사뭇 차가워지면서 온몸이 떨려왔다. 나는 닥닥닥 이를 부딪치면서 길냥이가 올라앉아 있는 담벼락을 지나 골목을 돌아나갔다.  
506 충주호 물길을 따라가다 외1편 / 김재순 file
편집자
1968 2016-10-01
16.10월 77호 시 충주호 물길을 따라가다 관광선에 실려 충주호 물길을 에돌아 간다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 같은 기암괴석이 영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저기 갑판에 서 있는 사람 그 때 보상금 받아 도시로 떠날 꿈에 부풀었을 사람일까 수위가 낮아 드러난 수풀 무성한 저 둔덕이 물에 잠겨도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던* 그의 집터일까 남자는 상념에 젖었다 이제 관광객이 몰려들고 유람선이 뜨는 이곳 속을 보여주지 않은 혼탁한 강물은 저 남자의 가난은 확실히 수장시킨 듯 초로를 향하는 남자는 수려한데 숲 속 몇 채 남은 인가는 아직 낮고 낮다 물가를 빙빙거리던 새 한 마리 문득 난간에 올라앉는다 찌그러진 오두막을 물속에 던지고 이대로 흘러흘러 한강에 닿으리라 불야성의 그 도시 서울에 스며들어 마지막 꿈을 조명탑처럼 펼치리라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람 거센 난간을 꽉 붙잡는 할미새 한 마리 유람선은 천천히 절경을 내보인다 *신경림의 강물2에서 차용 위층에는 누가 살까 폭우가 지나간 계곡처럼 콸콸 욕실 배관으로 내리는 물소리 아침 저녁 시들어 가는 내 집에 생기를 들이붓는다 위층에는 누가 살까 바람 없는 숲처럼 물소리만 내려 보내는 위층 아득한 전설처럼 샤먼처럼 기도하는 여인이 살까 그 여인이 모시는 신은 꽃의 여신이어서 집 안 가득 꽃을 꽂고 꽃잎 다려 몸을 씻을까 물소리 콸콸콸 줄줄줄 내리면 장미향 솔향이 내 집에 가득찬다 소리는 향기를 부려놓고 급류처럼 사라지고 위층은 기도에 들어간 듯 숲 속처럼 다시 고요하다 위층에는 누가 살까 김재순: 경북 상주출생 상주작가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nok9105@hanmail.net  
505 혀 외1편/유준화 file
편집자
1712 2016-10-01
16.10월 77호 시 혀 어항이 있다 가두리 양식장도 있다 그 어항에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출항하여 잡아 올린 언어들로 가득하다 늘 이탈을 꿈꾸는 언어의 날개는 혀다 특이한 언어는 냉동실로 실려 가고 평범한 언어는 소금 뿌리고 좋은 언어는 횟집으로 팔려가 사랑의 도구가 된다 상한 언어는 그냥 두면 냄새가 난다 언어의 치어는 어항을 떠나 바다로 간다 파도를 잘못 만나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잘 자란 언어는 천 냥 빚도 갚아 주며 돌아온다 바다에는 수만 마리 언어가 돌아다닌다 혀는 그 어항의 어부가 되어 미끼를 던져 언어를 잡고 잡아 올린 언어를 경매한다 좋은 언어를 건지려고 어항의 공판장은 붐빈다 갈치 이야기 칠흑의 바다 그 깊은 물 길 속에서도 굳은 절개가 필요 했나보다 서릿발 시린 장검을 휘둘러 어둠의 바다와 파도를 가르고 몸 깊은 곳에 백두대간의 정신처럼 마디마디 대나무를 길러내어 보란 듯이 세상에 보여주는 구나 밥상 위에 놓여있는 갈치 한 마리 약력 충남 공주 출생 2003년 불교문예. 시집 : 초저녁 빗소리 울안에 서성대는 밤. 외 한국시인협회. 충남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공주지부장 역임.  
504 자리 외1편/김설희 file
편집자
2369 2016-10-01
16.10월 77호 시 자리 돌멩이 아래 돌멩이만한 그늘이 누워 있고 돌멩이 위에 깃털 하나 붙어 있다 어느 날개 죽지에서 빠져나온 것일까 동그랗게 말린 피가 날개의 그늘을 지운다 한 계절이 낯선 계절을 끌고 돌아올 때쯤 피가 묻었던 자리는 원래의 상처보다 넓게 가려웠다 새것이 앉을 자리는 그렇게 미리 가려웠다 제 몸을 띄워 올려야 허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새 깃털 하나, 빈 자리 쪽으로 기운다 새 살이 제 자리를 잡을 동안 상처는 얼마나 더 아프고 근질거려야 할까 우두커니 깃털 빠져나간 자리를 생각한다 몇 년 전, 빈 아버지의 자리에 바람결보다 고운 숨결이 먼저 누워 있다 안의 바닥 좁쌀만 한 가려움이 있는 것일까 턱의 종기를 긁고 있다 손톱이 날카롭게 안을 불러내고 있다 핏물이다 한 시인이 쓴 ‘불콰한 노을’을 생각하며 노을 속을 다 찾을 것처럼 할퀴고 닦고 할퀴고 닦아낸다 그러나 불그스레 핏물만 보여주는 종기 하얀 휴지 한 장이 찌그러진 붉은 꽃이 되어가는 중이다 곧 버려질 꽃 핏물이 그치고 작은 혹이 평평해질 무렵 끈적끈적한 진물이 흐른다 보이지 않는 안의 비밀이다 김설희 경북 상주 출생 2014년 리토피아 등단 seal0308@hanmail.net  
503 하얀 달빛 외1편/박규해 file
편집자
2016 2016-10-01
16.10월 77호 시 하얀 달빛 詩 翠松 朴 圭 海 파란 잔디 위에 까만 그림자 하나 동쪽으로 향한 그 모습이 나의 그림자 풀벌레 울음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고요가 밀려온다. 무엇하러 서 있는지 조차 모르는 자신을 뒤 돌아보니 외로움만 가득하구나! 포말처럼 애절한 사연들 저 망망한 바다에 띄어 보내자 인생사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일 두 번 다시 태어날 수 없고 두 번 다시 죽을 일 없지만 우리 인생 한평생 살면서 희로애락하며 살지만 인생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앞만 보고 가고 뒤 돌아 보아 소용없고 때로는 그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아 힘들 땐 따뜻한 말에 힘 얻어 살며 즐거울 땐 웃음 웃으며 행복해 하고 슬플 땐 함께 슬퍼 하니 가족 있어 힘 얻어 산다네. 이래저래 한평생이라 세상 어찌 보면 참 좋은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하나이면 참 좋겠다. 박 규 해 프로필 ㅇ 아호 : 취송(翠松) ㅇ 고향 : 경북 상주 ㅇ 현 거주지 인천 ㅇ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 ㅇ 함창중고등학교 근무 정년퇴임(2002년) ㅇ 62년도 김용호 시인님의 추천 됨(4.19 3주년 기념 시) ㅇ 사랑․ 소설계사 기자 근무 ㅇ 현대시조 “바램”으로 천료(97) ㅇ 97 ~새 시대시조(계간) 출품 외 9곳 문예지 출품 ㅇ 시조집 : 희망의 횃불. 찔레꽃이 피면. 풋풋한 삶을 살자 ㅇ 대통령 표장 외 15 ㅇ 수상 : 시와 수상문학 특별상(2010) ㅇ 현대시조 이달의 작가상(97년도) ㅇ 한울문학 이달의 작가상(2000년 5월호) ㅇ 동인지: 시인파라다이스 외 55권 외 ㅇ 현재 : 한국 문인 협회 경북 지회 회원. 현대시조 인단 회원. 한울문학 회원. 파라문예회원. 시와 수상문학. 국보문학 회원. 한비문학 회원. 시와 늪 문학 회원. 시와 글 사랑 회원. 지필문학 회원. 문학광장 회원. 스토리문학 회원. 한국미소 문학 회원  
502 쪼구 외1편/남수현 file
편집자
1960 2016-10-01
16.10월 77호 시 쪼구 지난 초가을, 위암 말기 6개월 진단 받고 항암치료 마다하고 시골로 돌아온 영감 평생 짜게 먹은 것이 원인이라 한다 옛날, 어떤 자린고비가 된장독에 잠시 쉬었다 가는 쇠파리를 십여 리쯤 쫓아가서 된장만 쪽 빨아먹고 날려줬다는 밥상머리 훈계를 아들에게 무시로 하던 영감 오일장 서는 날이면 눈요기만 실컷 하고 털레털레 돌아와 손자들에게 소한추우에 까자장사 다 얼어죽었더라고 말하던 영감 그 덕분에 찐쪼구 마른쪼구 새끼쪼구라 식구들까지 싸잡아 놀림을 당해도 남의 얘기인 듯 허허거리던 영감 예정일 지나고도 두어 달, 뼈마디와 살가죽만 남아가도록 일흔여덟 평생 그을린 얼굴 보름달 아래 박꽃 마냥 창백해가도록 하천둑에 땅콩 몇 알 밭두렁에 옥수수 몇 알 감나무 아래 빈터에 까만 파씨 솔솔 뿌리던 영감 그러한 날 밤이면 방문을 뻘쭘히 반쯤 열어놓고서야 겨우 잠들던 영감 언젠가 그 문 활짝 열리는 날 잘 마른 쪼구가 되어 유유히 헤엄쳐 나올 것이다 눈물 치매를 앓다가 큰혈관이 터져 하루만에 의식을 잃은 시어머니, 쉰 중반을 넘긴 맏시누이의 말에 따라 시동생이 두 손가락으로 꼭 감긴 눈을 열었다. 엄마, 바로 앞에 막내 보이나, 지금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있지, 들리면 눈을 깜빡깜빡하든가 손이라도 한번 움직여봐... 지금 둘째 보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나, 금요일 부대에서 훈련 끝나면 곧바로 엄마 보러 온대... 그때 잠시 자리를 비운 남편이 들어왔다. 엄마, 여기 셋째 보여, 엄마 아버지 닮아 시골에서 힘든 일 제일 많이 하는 아들, 엄마, 동생이 힘에 달리는 농사일 하다가 술병(病) 얻은거 엄마도 알고 있잖아, 엄마 갈 때 동생 병 다 거두어가고 평생 건강하라고 빌어 줘... 쭈루룩 눈물을 흘리신다 남수현 : 경북 문경 출생 상주작가 회원 본명은 남순현 2015년 국민연금 수급자 생활수기 장려상 받음  
501 부벽완월/이병순 file
편집자
1924 2016-08-31
16.09월 76호 소설 부벽완월 부식은 우물자락에 드리운 물앵두가지를 잡아당겨 열매를 훑는다. 계속된 폭염 탓에 물앵두는 제 철보다 이르게 영글었다. 느슨해진 행장을 새로 여미기 위해 솔숲 쪽으로 들지 않았다면 우물을 못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우물가에는 떨어진 앵두로 여기저기 발긋발긋하다. 앵두나무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부벽루는 손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을밀대에서도 굽어보는 맛이 있었는데 부벽루까지 다다른다면 서경자락이 한눈에 훤히 들여다보일 터였다. 이곳이 언제 관군의 진압을 받았던가 싶게 한가롭다. 대동강을 오가는 나룻배와, 강어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모습과 엿판을 안고 어슬렁거리는 엿장수들의 모습은 그림 속 풍경 같다. 갈증과 허기를 달래기엔 앵두는 감질 난다. 부식은 두레박줄을 둘둘 풀어 우물에 풍덩 빠뜨린다. 줄을 끌어당길 때마다 두레박에 넘쳐 우물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경쾌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물총새 소리 같다. 부식은 입안에서 굴리던 앵두 씨를 뱉고 두레박물을 들이켠다. 물에서 이끼 냄새가 난다. 두레박줄을 당기면서 우물 벽에 부딪쳐 이끼를 긁어왔다. 두레박질은 쉽지 않았다. 물 한 바가지 길어 올리는 것도 요령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다. 무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한겨울 새벽에 우물물을 뒤집어썼다는 정지상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우물과 우물가의 풍경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아낙들이 모여 푸성귀를 헹구거나 빨래를 하는 모습과 대숲을 맴도는 잠자리도 모두 글감으로 보였다. 남바위를 훌렁 벗고 물을 덮어 쓰고 싶다. 바짝 묶은 신들메도 풀렸고 바짓가랑이를 죈 행전은 발목위로 자꾸 당겨 올라 종아리와 허벅지에 쩍쩍 엉겨 붙었다. 적지에 홀로 남으려면 촌부 차림이어야 안전하다는 부하들의 말을 따르기 잘 한 것 같다. 대동강 언저리를 돌 때도 부식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촌부 차림은 갑옷에 비한다면 깃털이다. 묘청의 난은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개경에 승전보를 띄웠지만 부식에겐 승리감이 차오르지 않는다. 서경 군사들은 끝까지 장렬했고 적장의 자결로 싸움은 끝났다. 부식은 어제 나루터까지 따라온 병사들을 한사코 돌려보냈다. 굳이 혼자 부벽루를 오르려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부하들은 안타깝게 물었다. 부벽루에 올라서서 대동강을 굽어보며 지상이 품었을 시적감흥을 상상해보고 싶다고 부하들에게 말 할 필요는 없었다. 부벽완월이 서경 팔경 중 하나라지만 정지상 없는 서경은 아무리 풍치가 빼어나도 부식에겐 절경이 되지 못했다. 정지상은 서경 진압을 하러 오기 전부터 개경에서 부식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서경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서경 출신 중에 걸출한 인물이 많다고 하나 그 모두가 지상만하지 않았다. 지상은 연광정이나 대동강변의 어느 주막을 서성거리거나 영명사를 돌며 시구라도 읊조릴 것만 같다. 서경에 머무는 동안 어느 때보다 지상의 환영에 붙들려 있었다. 임금은 난을 일으킨 주요 인물만 처치하라고 명했다. 부식이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지상을 죽인 것을 두고 그를 향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시기심에 사로잡혀 지상을 죽였다는 말은 틀렸다. 나라를 더 혼란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부식이 그때 지상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람들은 흉흉하게 부식을 몰아갔다. 지상을 향했던 순정한 동경과 그를 품었던 절절한 마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떤 소문에도 의연해야 했다. 좀 더 일찍 지상을 처치했더라면 혼란한 정세가 빨리 수습되었을 것이란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지상에게 질투심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지상의 경지에 닿지 못한다는 자각에 이를 때마다 그를 향한 질투심은 더욱 맹렬해졌다. 부식의 시구는 시원하게 나아가는 맛없이 행간마다 머뭇거렸다. 그것은 조촐하면서 유려한 맛이 감도는 지상의 시구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시작부터 막혀 먹물 잔뜩 적신 붓을 그러쥐고 하염없이 창호지만 바라보기만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며칠을 두문불출하고 시작에 매달린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변변한 시 한 편 자아내지 못했다. 붓을 내팽개치기엔 억울했으며 붓을 잡았다하면 자신이 무척 한심하기만 했다. 눈을 감으면 지상의 초강초강한 얼굴만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시구를 자아올리느라 핼쑥해졌으리라 여겼다. 지상의 ‘대동강’을 필사한다면 그의 정서에 가 닿으려나 싶었다. 부식은 ‘대동강’을 수십 번씩 필사했다. 雨歇長堤草色多 비갠 긴 언덕에 봄빛은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로 임 보내는 구슬픈 마음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는 것을. 같은 시를 계절을 바꿔가면서 필사를 했다. 때마다 감흥이 달랐다. 송나라 사신들이 부벽루 판액에 적힌 정지상의 시 ‘대동강’을 가리켜 ‘너희 나라에도 이런 시인이 있었구나’ 하며 탄성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시인묵객들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두들 지상의 재기발랄한 감수성을 치켜세울 때 부식은 지상을 부추기지 않았다. 지상의 반만이라도 시를 쓸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상을 부정하면서도 그에게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은 고통이었다. 지상의 경지에 닿지 못할 바엔 그를 끌어내려야 했다. 치졸했으나 질투심을 누그러뜨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국자감의 쌍벽이라 하면 학문에서는 윤언이요, 문장에서는 부식이라고 일찌감치 한림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지만 지상을 빼고 문장을 논한다는 것은 호랑이 없는 산속에 토끼가 왕 노릇하는 꼴이었다. 지상을 서열에서 뺀 것은 그를 따로 받드는 것만 같았다. 시 꽤나 쓴다는 풍류객들 중에서도 지상 시만큼 선경후정의 대구를 절묘하게 지어내는 이도 드물었다. 잠꼬대 같기도 하고 선문답 같기도 한 지상의 시는 만당(晩唐)시인들의 시풍과 닮았으나 만당시와는 분명히 달랐다. 자연을 묘사하는 감각적인 색채 언어의 구사력은 지상이 만당 시인들보다 몇 수 위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지상의 시는 옥에 티였다. 백성들의 세상살이를 외면한 시는 풍악일 뿐이지 시가 될 수 없노라 못 박았다. 선동적이지 않으면서 적확한 어휘로 백성들의 삶을 잘 그려낸 당나라 백낙천의 시들을 들먹이며 지상의 심미주의적인 시작법에 엉너리를 쳤다. 부식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지상에게 더욱 안달을 했다.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의 시구들을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여러 시인들의 시를 뒤져보아도 지상의 시구와 같거나 비슷한 구절들은 찾지 못했다. 지상을 글도둑으로 몰 끄나풀을 찾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지상만큼 정한을 풋풋하게 살려낸 시인이 드물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지상을 향한 질투심이 타오를 때마다 시궁창의 오물을 핥는 생쥐처럼 한없이 초라했다. 문풍지에 밴 달빛을 노려보며 어서 해가 밝기만을 기다렸다. 푸른 관복을 입고 조정으로 뚜벅뚜벅 걷는다면 시구쯤은 하찮게 여겨질 것 같았다. 시라는 망령에 빠져 미망에 흔들렸던 자신을 빨리 일깨워주는 것은 푸른 관복일 터였다. 자신이 기필코 해야 하는 일은 백성들이 안위한 삶을 일구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시를 쓴다손 치더라도 백성이 주인공이 되는 시어야 했다. 들판을 지나다가도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마음이 놓였다. 곡기든 구근이든 풀죽이든 지핀 불에 익힐 식량이 있다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백성의 어려움을 드러내거나 사람들의 계몽을 부추기는 시구들은 용을 쓰지 않아도 줄줄 흘러나왔다. 누군가 부식의 시에 골샌님 냄새가 푹푹 난다는 말을 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땅에서 끼쳐오는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 부식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길섶으로 비켜선다. 흑립은 내리쬐는 햇볕을 조금도 가려주지 못한다. 시퍼런 억새줄기 사이로 더운 기운이 훅훅 올라온다. 손은 핏물로 끈적끈적하다.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 주느라 길섶을 비켜서다가 미끄러졌다. 시퍼런 억새줄기를 잡다 손이 베는 줄도 몰랐다. 손뿐만 아니라 억새에 쓸린 턱과 목도 따끔거린다. 부식은 왔던 길을 되돌아 굽어본다. 억새 덤불 사이로 사내들 등짝이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오르막길에 숨이 차오를 때마다 입에서 숙취가 난다. 서경을 진압한 기념으로 어제 밤에 벌인 자축연 때 술을 마셨다. 빈속이었지만 여느 때의 주량 두 배가량은 마셨을 것 같다. 전하! 서경을 완전히 토벌한 이 마당에 무엇이 두렵습니까, 흔쾌히 한 잔 들이켜십시오.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부식에게 보좌관이 호기롭게 외쳤다. 적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취기로 보내고 싶지 않아 자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취하고도 싶었다. 만감을 달래는 데는 술이 으뜸이었다. 술기가 돌수록 지상만 떠올랐다. 마음을 다해 지상을 따랐지만 그와 허심탄회한 술자리 한 번 갖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늘 퇴짜만 맞은 것 같았다. 지상에게 퇴짜를 맞고 온 날이면 먹을 흠뻑 갈아댔다. 황모필에 먹을 듬뿍 적셔 종이를 여며 잡으면 머리가 암담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먹물 튄 수십 장의 고려지는 구겨진 채 온 방을 굴러다녔고 눈을 뜨면 창호에 여명이 스며들었다. 도포를 벗지 않고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며칠 밤을 황모필에 매달려 살다시피 했다. 지상의 시를 알기 전에는 결코 없던 일이었다. 돌림병을 앓는 이처럼, 횟배 앓는 이처럼 시를 앓았다. 지상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지상의 말을 무조건 따르리라 작정했다. 좋은 시를 쓸 수만 있다면 뭐든 할 마음이었다. 한 일 자 긋는 일부터 익혀야 한다고 해도 할 터였다. 염원은 간곡했다. 지상은 부식의 꿈에 나타나 한수 가르쳐 주었다. 부식은 어느 화창한 봄날에 취해 두련 함련 첫 두 구절을 지어 지상에게 보였다. 柳色千絲綠(버들 빛은 천 가지가 푸르고) 桃花點萬紅(복사꽃은 만 점이 붉구나) 지상은 종이를 내치며 호통을 쳤다. ‘네가 버들잎이 천 가지인지 꽃이 만 점인지 다 헤아려 봤단 말이냐, 왜 柳色絲絲綠(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桃花點點紅(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하지 못하느냐’라며 재빠르게 한 글자씩 빼고 넣어주었다. 글자 하나 바꿨을 뿐인데 바꾸기 전과 시의 분위기는 달랐다. 테두리를 벗어버린 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버들가지 휘늘어지고 복사꽃 만발한 봄날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부식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두 구절을 적어 두었다. 꿈에서 얻은 두 구절에 덧붙여 오언절구를 완성해 지상에게 보였다. “차라리 경전을 쓰시지요.” 조롱이었다. 나머지 두 구절이 훈계조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부식의 시구는 경전과 시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말은 시평 때마다 나왔던 말이었지만 지상에게 듣기는 처음이었다. “경전이 시가 못 되는 이유라도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식은 지상에게 받아든 고려지를 돌돌 말며 공손하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부식보다 열 살가량이나 적은 지상이었으나 그를 조금도 하대하지 않았다. 좌정언이라는 지상의 벼슬은 대제학 보문각에 몸담고 있던 부식의 벼슬에 비한다면 한참 낮은 자리였다. 지상이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왔다는 걸 들먹이며 은근히 지상을 무시하려 드는 관료들도 있었다. 영웅은 고향이 없다고 했 듯, 지상이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았다고 해도 그것은 부식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지상의 시에서 묻어나는 청신한 기운은 소박했던 그의 삶에서 우러났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지상이 도포자락을 젖히고 걸을 때면 학의 날갯짓처럼 보였다. 부식은 아낙의 치마에 닿지 않으려고 좁은 풀 섶을 조심스레 걷는다. 아낙은 치맛자락을 여몄지만 풍성한 치맛자락은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다. 쪼그려 앉은 아낙은 앵초 무더기에서 가는 꽃줄기를 뽑아 올린다. 아낙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뭉쳐있다. “메꽃이 흐벅지게 피었구나야!” 연분홍 꽃 넝쿨에 뛰어드는 아낙의 얼굴은 메꽃만큼 환하다. 여인네 몇 명도 덩달아 꽃 넝쿨로 몰려간다. 여인네들 손에는 메꽃, 은방울꽃, 산나리 등 들꽃이 들려있다. 여름철이면 개경 들녘이나 뒷산에서도 흔히 피는 꽃들이다. 꽃이라면 부식의 집 울안을 메우던 능소화나 매화, 당국화와 창포 등의 이름만 알았을 뿐, 들꽃은 모두가 그게 그것 같았다. 부식은 들꽃이나 새, 곤충처럼 뭇 야생들의 생명에 조예가 깊지 못했다. 곤충이나 새, 들꽃의 이름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도 지상 때문이었다. 울 밖의 것을 야생이라 이름 붙이는 것도 지상의 말투였다. 뭇 야생들의 자태에서 삼라만상을 생각한다는 지상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가 율조를 띤 것 같았다. 琳宮梵語罷 법당의 독경 소리 마치자 天色淨琉璃 하늘 빛 맑기가 유리 같구나. 언젠가 술자리에서 지상이 즉흥적으로 읊조린 구절이었다. 지상은 술자리에 오기 전에 어느 암자를 다녀오는 길인 듯 했다. 지상의 손에 갖가지 들꽃이 들려 있었다. 낮술을 마셨는지 그의 음조는 취기에 젖어 있었다. 술에 취하면 지상이 불쑥불쑥 시를 읊곤 한다는 말이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두련과 함련을 뱉고 지상은 입을 다물었다. 군더더기 없는 시구였다. 좌중의 모두는 지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지상은 입을 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정적은 제법 오래 갔다. “남호! 그 두 구절 나한테 주시지요. 다음 구절은 내가 지어 볼 것이오.” 부식이 정적을 깨며 호기롭게 외쳤으나 지상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시구를 달라는 말이 너무 쉽게 튀어나와 부식 자신도 당황했다. 누군가 부식의 빈 잔에 술을 채우지 않았다면 어색한 침묵은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식은 성급하게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두 구절 나한테 주시지요.” 밀어붙이자는 심정이었다. “글 동냥을 하는 이가 있다하더니 헛말이 아닌가 보오, 허허허.” 술상 끝에 앉은 윤언이었다. 그는 부식이 넘지 못할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학문의 깊이나 넓이가 부식을 넘는 이는 윤언이었다. 윤언이는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쓰기로 했던 그의 아버지 윤관을 밀어낸 사람이 부식이라고 여기고 호시탐탐 부식에게 앙갚음할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그도 도참사상과 풍수 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역성을 드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평소 남호의 시를 애송하고 있었소. 그런데 방금 그 같은 영롱한 시는 또 다른 맛을 자아내는 것 같소이다. 두 구절 내가 가져다가 나머지 구절을 지어 남호에게 보이겠소이다.” 부식의 어조는 더욱 간곡했다. “그깟 하품 같은 소리가 시가 되기나 하겠소? 하품을 시라 하니 뇌천 취향이 참으로 독특하십니다, 하하하.” 술잔을 잡은 그의 손에 풀물이 배어 있었다. 지상이 겸손한 것인지 만용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식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기는 싫었다. “나는 방금 읊조린 남호의 시구가 진정으로 좋다고 했소. 그런데 남호가 나를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소이다.” “허참! 제가 왜 뇌천을 빈정거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식은 지상의 말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강절편을 문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지상은 문을 밀치고 나갔다. 지상의 도포자락이 일으킨 바람에 호리병에 잠긴 초롱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관료들의 헛기침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부식도 지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관료들의 웃음이 뒤통수에 따라붙는 것 같았다. 지상은 오동나무 둥치에 기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댔기 때문인지 지상이 쓴 갓이 삐뚜름해 보였다. 부식이 연못 앞으로 다가갈 즈음 지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게 피안을 주려고 시를 쓰오. 뇌천께서도 뇌천 자신을 움직이는 시를 쓰시오. 세상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이미 그건 시가 아니라 헛소리지요. 그리고 뇌천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시에 매달리지 않아도 재미있는 일 무척 많으실 텐데 무엇 때문에 애면글면 시에 매달리시는지 모르겠소.” 연못가에 둘러 핀 창포 줄기는 햇볕에 겨워 시들했다. 못의 수면이 파르르 떨었다. 소금쟁이 몇 마리가 자맥질을 했다. 신명을 다했으나 무게를 싣지 않은 자맥질이었다. 백일홍 가지와 부식의 얼굴이 뒤섞여 연못에 어룽거렸다. “송나라 소순의 아들들 말이오, 소식과 소철이라는. 그들의 시가 뛰어나다고는 하나 내 보기에는 그들의 시가 말방울의 요령소리보다 나을 게 없소이다. 소식의 적벽부는 경(景)만 있지, 정(情)이 빠져 있소. 문물이 발전한다 해도 시는 갈수록 뒷걸음질 치는 것 같지 않소?” 지상은 기어코 소식과 소철을 들먹였다. 부식이란 이름도 소식이란 이름에서 땄고 동생 부철의 이름도 소철이란 이름에서 땄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부식의 형제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서긍은 부식을 해동 제일의 석학이라 추켜세우며 문장에 뛰어난 동생과 함께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들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 송을 통틀어 빼어난 문장가에 드는 소식과 소철의 이름을 하사받은 것은 가문의 영화였다. 지상은 소식과 소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나라 것을 취하고자하는 부식을 비비꼬았다. 지상의 관심거리는 오로지 고구려였다. 그는 고구려 도읍지인 서경에 도읍을 정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번창할 것이라고 믿었다. 시 외의 이야기를 펼친다면 그건 분명 정론과 쟁론일 터였다. 서경파 이야기라면 실랑이하듯 입에 올릴 사안은 아니었다. 부식은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지상은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만 들려왔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했다. 지상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싶었다. 그 후 부식은 여러 번 지상을 찾아갔다. 지상을 스승으로 받들어 그에게 시를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꼭 보이고 싶었다. 굴욕을 감내할 각오가 없었다면 삼고초려를 시도하지 않았을 터였다. 굴욕은 참을 수 있었으나 꿈쩍하지 않는 지상을 움직일 방도는 없었다. 지상은 시에 관한 이야기는커녕 좀체 부식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지상과 마주앉아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며 그냥 돌아 온 적도 있었다. 어쩌다 입을 열면 서경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흘렸다. 나라가 내우외환이 겹치는 것은 개경의 지덕이 쇠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부식은 궤변인지 야설인지 분간이 서지 않는 지상의 말들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한 수 배워 얻기는 무척 어려웠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상을 찾았다. 지상의 서실은 들큼한 묵향으로 가득했다. 서실에서 시를 짓고 있는 지상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서실 바닥은 말할 것도 없이 구석 모퉁이마다 먹물이 밴 고려지가 수북했다. 왜가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그림 한 폭이 구석에 나밀려 있었고 바닥에는 먹물에 젖은 붓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찻상을 마주앉은 지상의 모습을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지상의 볼은 움푹 패었고 눈두덩도 푹 꺼져 있었다. 많은 습작지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천재들은 어떤 대목에서 고심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한 수 배우고자 하오. 부디 내치지 말고 가르쳐 주시오. 두련을 쓸 때 인상적인 장면을 쓰는 게 중요한지 마음부터 드러내는 게 중요한지 몹시 답답합니다. 그것만이라도 좀 가르쳐 주시오.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시를 쓰는데 딱히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뇌천도 충분히 아실 텐데요.” 지상은 널브러진 종이들을 걷어 뭉치면서 중얼거렸다. 지상의 앙상한 목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부식은 지상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들을 펼쳐보고 싶었다. 근골이 메말라가면서 지상이 부여잡고 매달린 시구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종이 뭉치들은 천의무봉한 시구들을 움켜쥐고 있을 것 같았다. “이것들을 좀 보아 주시오. 그리고 한 말씀만 듣고자 하오.” 부식은 가져 간 습작품 몇 개를 서실 바닥에 죽 펼쳤다. “보잘 것 없고 많이 모자라는 나부랭이올시다. 부디 좀 보아 주시오.” 부식은 펼친 종이를 지상 앞으로 밀어 올렸다. 지상은 종이를 받아 찬찬히 훑었다. 부식은 지상의 입과 눈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버리는 것부터 할 줄 알아야 하오. 시는 붓으로 쓰는 게 아니라 칼로 쓴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말이고요. 공들여 쓴 것이라 하더라도 아니다 싶은 것을 베어 낼 줄 알아야 하지요.” “무엇을 베어내야 하는 것인지요.” 부식은 습작품을 지상에게 바싹 갖다 댔다. “뇌천! 뇌천께서는 지금 그대로가 시인입니다. 꼭 종이에 먹물을 찍어내야 시인인 것은 아니지요.” 지상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피안이라고 하셨소? 그런 세계가 어떤 것인지 나도 알고 싶소.” 부식은 서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상 쪽으로 다가갔다. “허허허, 내가 피안이라는 말을 했던가요? 피안이라, 무슨 신명에 그런 헛소리를 했나 모르겠소.” “가르쳐 주시오. 이토록 간청하오.” 부식은 서상 모서리를 움켜쥐며 지상 앞에 바투 다가앉았다. 지상의 눈을 그토록 가까이서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눈빛은 불구슬처럼 이글거렸다. 눈빛을 맞받아내기가 버거워 부식은 헛기침을 하면서 가부좌를 틀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합각기둥을 받친 흘림기둥은 반질반질하다. 기둥을 어루만지는 부식에게 아낙이 음식 추렴을 해 온다. 몇 번이나 사양해도 아낙은 망개 잎에 싸인 절편과 깨강정을 펼쳐놓는다. 가요를 읊조리며 측간 모퉁이 누대에 걸터앉은 사내들은 누각 바닥으로 둘러앉았다. 이쪽으로 향한 사내들의 얼굴이 달빛에 비친다. 가무잡잡한 사내들의 얼굴은 조약돌처럼 단단해 보인다. 날벌레들이 얼굴에 들러붙어 간질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강에서 풍기는 물비린내가 물씬하다. 중년 사내 서너 명이 이쪽 돌계단을 딛고 오른다.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은 늘어난다. 사람들 대부분이 영명사를 들렀다 오는 것 같다. 지상도 시상이 막힐 때면 홀로 이곳 영명사를 찾는다고 했다. 영명사뿐만 아니라 지상은 종종 여러 절을 찾아다닌 듯 했다. 琳宮梵語罷 법당의 독경 소리 마치자 天色淨琉璃 하늘 빛 맑기가 유리 같구나. 지상의 하품을 시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게 부식의 화두였다. 나머지 두 구절, 경련과 미련을 채워 넣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구절을 썼다 지웠다 했지만 지상의 두 구절을 뒷받침할 만한 율조는 되어주지 않았다. 겨우 완성했다 싶으면 지상의 두 구절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한 줄 시구를 찾으려고 비오는 산봉우리를 걸터듬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대비를 맞으며 숲속을 헤매다 심한 고뿔에 걸려 보름을 몸져누웠다. 고뿔이 나았다 싶으면 몸살이 다시 도졌고 몸살기가 가라앉는다 싶으면 치아가 들쑤셨다. 입맛을 잃었고 잠이 줄었다. 날이 갈수록 잠도 오지 않았다. 깊은 밤, 그동안 써놓았던 시구들을 끌어내 읽었다. 누가 볼세라 꼭꼭 숨겨둔 습작품들이었다. 모두 췌사였다. 꽃을 읊은 것도 아니고 백성의 삶을 읊은 것도 아닌 낙서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들뿐이었다. 부식을 미망에 가둬놓은 것은 나부랭이들, 그것들이었다. 종이뭉치들을 둘둘 뭉쳐 뜰로 내려섰다. 불살랐다. 불길은 미망쪼가리들을 날름날름 핥아댔다. 어둠 속에서 솟구치는 불길은 펄럭펄럭 힘찬 기운을 내뿜었다. 아내와 하인들이 맨발로 마당을 뛰어나오지 않았다면 종이뭉치들은 금세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맨발로 불을 밟아 끄는 하인들 옆에서 아내는 반쯤 타버린 종이쪼가리들을 차곡차곡 챙기고 있었다. 그동안 부식과 함께 식음을 끊다시피 했던 아내였다. 어둠 속에 웅크린 아내가 한 줌 잿더미로 보였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이 봇물처럼 끓어올랐다. 서경파들이 서경에 대화궁을 지어놓고 인종을 불러들인다는 소리를 듣고도 부식은 허깨비에게 붙들려 있었다. 초미를 다투는 나라 일에 손 놓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시급한 일이 지상을 처치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미루고만 있었다. 달은 중천에 있다. 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구성진 목소리가 언덕을 메운다. 메기고 받는 소리는 강물소리처럼 어기차다. 유월 보름에 아! 벼랑 가에 버린 빗 같아라. 돌보실 임을 잠시라도 쫓아가겠습니다. 아으 동동다리 칠월 보름 백중에 아! 갖가지 음식을 벌여 두고 임과 함께 살고자 소원을 비나이다. 아으 동동 다리. 팔월 보름에 아! 한가윗날이라……. 가요를 부르는 저들의 목청은 무구하다. 고려 도읍지가 서경이든 개경이든 그 어디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에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목소리들이다. 노랫말은 여울도 없이 졸졸 흐르는 물 같다. 저 홀로 발아되어 꽃을 피운 가요처럼 지상의 시들도 모두 제 흥에 겨운 시들이었다. 지상의 시 어디에도 세상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서려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은 세상의 한 복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부식은 딱 한 번 숙명이란 말을 떠올렸다. 묘청의 난 반란 진압 총사령관이 하필이면 부식이었고 난의 핵심 인물이 지상이었다는 것은 숙명이란 말 외에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까 싶었다. 서경진압 총사령관의 임무가 떨어지자마자 지상을 덮쳤다. 지상이 세심정이란 찻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말을 몰았다. 세심정은 만월대와 멀지 않았다. 서경을 토평하러 가야지 왜 세심정을 향하느냐고 궁금해 하던 부하들에게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다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다탁 주위로 사내 여럿이 둘러 앉아 있었다. 묘청의 제자인 김안과 백수한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짐작은 왔다. 모사를 꾸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지상은 서경에서 묘청이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 줄도 몰랐기에 그는 반란의 가담자는 아니었지만 서경파의 핵심이었다. 서경파의 핵심인물들은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서경에서 난을 벌이고 있는 묘청의 계획은 엉성하고 졸렬했다. “이 무슨 행패요?” 지상이 장검을 짚고 있는 부식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역모를 꾀해 조정을 어지럽힌 반란자를 처치하러 왔다.” “역모라니! 말씀 가려 하시오.” 지상이 벌떡 일어나 부식 앞에 버텼다. 목소리는 우렁찼으나 걱실걱실 했다. 얇은 눈꺼풀에 핏발 선 눈은 더욱 퀭해 보였다. 음모의 주모자다운 눈빛이었다. 시를 읊을 때의 매끄럽고 고졸한 소리와는 대조적이었다. 운을 자아올리려던 아련한 눈빛은 아니었다. 명아주 풀물에 젖은 손으로 술잔을 거머쥐던 풋풋한 향취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지상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었다. 위험한 모사꾼이었다. 지상이 이자겸의 사돈인 척준경을 탄핵시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조정은 자칫하면 지상의 손아귀에 놀아날 판이라던 대신들의 말들이 그냥 떠돈 게 아니었다. 반란자를 놓아주려 그를 찾았다니, 부식은 찬물을 동이 째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희들은 역모를 꾸며 나라를 어지럽힌 죄인들이다.” “당치 않은 말씀! 개경 문벌들의 꼴사나운 짓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우리가 나서서 조정을 수습하려는 것뿐이오. 이자겸도 우리가 나서서 해결했다는 걸 그새 잊었단 말이오?” 지상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상을 놔두고 묘청일파만 처치한다는 것은 뿌리는 두고 가지만 쳐내는 꼴이었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이오, 김부식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소? 어서 이곳을 나가 주시오!”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우리는 잘못 한 거 하나도 없소이다! 그러니 당장 나가 달란 말이오!” 지상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부식은 장검을 지상의 가슴에 겨누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했느니라!” “고작 이 따위 쇠꼬챙이를 휘두르려고 그토록 임금에게 빌붙어 온갖 권좌를 오갔던 게요? 썩 치우시오!” 지상은 눈을 치뜨고 부식을 노려보았다. 지상을 얼러댈 시간이 더는 없었다. 세심정 먼발치에서부터 말채찍을 크게 휘두른 것은 지상이 도망갈 틈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상이 세심정 뒤란을 통해 사라져버리기를 바랐다. 개경도 서경도 아닌 어느 먼 곳으로 달아나 기상을 마음껏 펼치는 시를 지으며 살길 바랐다. 초야에 묻혀 시를 갈고 살다보면 그가 잠시 빠졌던 도참사상이 미혹이었음을 이내 깨달을 것이라 믿었다. 미혹을 건너온 지상의 시는 더욱 여물 터였다. 지상이 삼라만상을 울리는 대 시인이 되기를 바라며 말고삐를 힘차게 세심정으로 당겼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묘청이 난동을 부리는 서경으로 달리는 관군들 함성은 더욱 크고 높았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부식은 칼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단칼이었다. 허허허, 그동안 먹을 간 게 아니라 칼을 갈았구료, 어쩐지 칼잡이가 썩 어울린다 했지 허허허……내 죽어 음귀가 되어서라도……. 지상은 말을 맺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지상의 몸은 잎 다 떨어진 한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단단했다. 부식은 지상의 눈을 감겼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지상의 콧날은 높고도 서늘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누각 끄트머리에서 여인네들은 달을 향해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린다. 허리끈을 질끈 묶은 치마는 강동하다. 여인네들의 모습 위로 달빛이 내리비친다. 월령가요를 부를 때의 는실난실한 자태는 간 곳 없다. 달을 향한 몸짓은 모두들 어엿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무심하기만 하다. 병법을 구하느라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군막 밖을 나와 홀로 어둠을 서성거렸다. 달빛 아래서 병영일지를 끼적거리기도 했다. 괜한 감흥이 밀려올 때면 일지에 시구를 써 넣기도 했다. 지상이 남긴 두 구절에 두 구절을 지어 보내 오언절구도 완성시켜 두었다. 시구라도 좋았고 노래라도 좋았다. 琳宮梵語罷 법당의 독경소리 마치자 天色淨硫璃 하늘 빛 맑기가 유리 같구나. 獨坐消長日 홀로 앉아 긴긴 날 보내노라니 那堪苦憶友 벗 그리운 생각을 어찌 견디랴. 두 구절은 힘들지 않게 채웠다. ‘그야 쓰는 사람 마음이지요.’ 지상의 한 수는 그토록 쉬웠다. 작위를 금하고 생각을 옭아매지 말라는 뜻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강변을 밝히던 호야불도 하나둘 사라지고 달빛에 젖은 강물은 희끗희끗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피로 물든 대동강이었다. 지상이 ‘대동강’을 쓸 무렵에는 서경은 평온했다. 개경도 평온했다. 나라 안은 모처럼 봄날이었다. 그런데도 지상은 봄을 노래하지 않았다. 지상이 일찍부터 만화방창의 덧없음을 깨닫지 않았다면 푸른 봄볕의 비갠 언덕에서 임과 이별하는 장면을 빚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제 시에 예언마저 바쳐놓았을 줄이야. 달이 중천에 다가갈수록 바람은 삽상하다. 바람이 소맷자락 안으로 스민다. 땀에 젖은 남바위는 밤바람에 절로 마를 것이다. 잇새에 깨물고 잘근거리는 나뭇잎에서 알싸한 풋내가 감돈다. <끝>  
500 십 오년 막걸리/채선후 file
편집자
2156 2016-08-31
16.09월 76호 수필 십 오년 막걸리 나는 막걸리가 좋다. 그리고 막걸리는 좀 마신다. 그래서 막걸리는 간혹 마시고 싶기도 하다. 막걸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친정엄마 때문이다. 친정 엄마는 막걸리를 곧잘 집에서 빚으셨다. 아버지께서 한 때 양주장에서 일을 하셨다. 그때부터 재미 삼아 막걸리를 빚기 시작하셨다. 막걸리 맛은 주인장이 결정한 때에 따라 예민해진다. 그래서 주인장은 적정한 때를 잘 알아채야 한다. 엄마는 때를 알아채야할 때 꼭 나를 부르셨다. 나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될 때를 잘 알아채야 했지만 늘 그렇지 못했다. 어렸을 때 내가 담당했던 것은 간을 보는 것이었다. 간은 곧 음식의 때를 알아채는 것이다. 엄마는 더 넣어야 되고, 줄어야 될 때 꼭 나를 옆에 두셨다. 막걸리에는 고두밥이 중요하다. 고두밥도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술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쌀을 불려 적정한 물을 넣고 고두밥을 할 때도 엄마는 나를 부르셨다. “얘! 물이 이 정도면 됐을까?” “응. 엄마! 된 것도 같은데? 아니 아니다. 엄마! 물을 조금 덜어야 될 것 같은데.” “그치? 엄마도 조금 많은 것 같더라니!” 하지만 내 대답은 나도 모르는 말이었다. 그냥 생각 없이 한 대답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가 몇 번이고 물어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것 같다. 이렇게 고두밥이 다 되면 식힌다. 이때도 나는 고두밥 간을 봐야 했다. 고두밥이 어느 정도 고들고들한지 잘 씹어서 엄마한테 말해야 했다. 나는 나도 잘 모르는 대답을 했다. 엄마는 혼자서 술 만드는 방법을 다 알고 계셨을 텐데도 어린 나를 모든 과정에 끌어들이셨다. 다음은 누룩과 물을 잘 섞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항아리를 잘 씻어 햇빛에 바싹 말린다. 그 항아리에 잘 섞어진 고두밥과 누룩, 물을 정성껏 담는다. 그리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를 위해 안 쓰는 낡은 이불로 며칠을 덮어 놓고, 뽀글뽀글하게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일주일 정도 지나 가라앉은 찌꺼기들을 채에 걸러내면 된다. 엄마는 이틀 정도 지나면서 간을 보셨다. 술이 너무 독하다 싶으면 물을 더 넣었다. 그리고 또 나에게 간을 물어보았다. 초등학생인 내가 무슨 술맛을 알겠는가! 그래도 엄마는 연실 물었다. “어떠니? 술이 좀 달지 않니?” “아니. 그냥 쓴데.” “그래? 한 번 더 마셔봐라. 나는 어째 좀 달다.” 두 번째 간을 보게 되면 살짝 입술만 축여도 어린 내 입속에서는 독한 술맛에 눈까지 어지러워졌다. 그런데도 엄마는 연실 간을 보라 하셨고, 나는 나도 모를 답을 연실 성의 있게 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내 대답을 궁금해 하셨는지 모르겠다. 간은 엄마가 더 잘 보는 데도 말이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는 고두밥과 함께 솔잎을 넣으시는가 하면 어느 해는 구기자도 넣으셨고, 칡도 넣으셨다. 해가 지날수록 넣는 가짓수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간을 보는 내 입맛은 더욱더 모르는 맛이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연실 물었다. “얘! 간이 어떠니? 솔잎이 너무 강하지? 칡 맛은 좀 나니?” 아니! 내가 언제 칡을 먹어봤을까? 솔잎은 또, 언제 먹어 봤을까? 나는 겨우 중학생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연실 간을 봤다. 그리고 역시 모르는 대답을 했다. “엄마! 솔잎 더 넣어야 될 것 같은데 너무 향이 연해!” “그치? 엄마도 그런 것 같더라!” 이렇게 술을 담그셨던 엄마는 내가 시집가는 날에도 담그셨다. 시집가는 날 오시는 집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그 때는 내가 없었다. 아마도 엄마 혼자서 간을 보셨는가보다. 첫 번째 술을 걸러 몇 병을 잘 두셨다고 한다. 그리고 잊으신 것이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아버지 기일 즈음이었다. 친정엄마는 또 술을 담그셨고, 집안에 있는 항아리를 찾아 청소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오래된 구식 변소에서 입이 깨진 항아리 하나와 금이 간 항아리를 들고 나오신 것이다. 푸세식 시골 변소는 마당 끝에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그 화장실에서 쓰러지신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 화장실에 있던 항아리는 변소 쓰레기통으로 썼었다. 엄마는 모처럼 쓰지도 않는 항아리를 내다버리시려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항아리에서 까만 봉지를 둘둘 싸맨 병이 세 개가 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새까만 먼지와 똥냄새가 잔뜩 배어 있었다. 그래도 비닐봉지를 벗기고 보니 십년 전 막걸리를 담아둔 그대로였다. 엄마는 건망증이 심하셨다. 엄마의 건망증이 결혼식 때 담근 술병을 광 항아리에 넣지 않고, 변소 항아리에 넣게 한 것이다. 십년이 된 막걸리는 그렇게 우리들 앞에 드러났다. 십년 전 시간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이날 이때까지 냉대했던 엄마의 건망증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제사상 위에 모셔진 아버지도 엄마의 건망증에 박수를 보내셨을 것이고, 이 날 만큼은 할 말 잃으시고 껄껄 웃으셨을 것이다. 세 병중 한 병은 아버지 제사상에 올렸고, 한 병은 새 식구가 된 사위들과 며느리 신고식으로 마셨다. 그리고 한 병은 엄마께 몰래 달라고 했다. 꼭 드리고 싶은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 술은 친정에서 가져와 다시 우리 집에서 2년을 더 묵었다. 내일, 내일이면 갖다드려야지 하면서 뒤로 미뤘던 것이다. 술이 묵은지 십 삼년째 되던 아버지 기일에, 그 선생님도 영원히 뵙지 못할 길로 가셨다. 나는 선생님 가는 길도 내일, 내일 미루다 가보지 못했다. 내일. 내일. 내일! 나는 때를 모두 놓쳤다. 그 때는 간을 봐야할 때였고, 또 움직여야할 때였다. 그 술은 내일이면 십 오년이 된다. 내일은 아버지 기일이고, 또 선생님 기일이기도 하다. 때는 예외 없이 누구도 기다려 주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소년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처럼 그 선생님 역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 내가 놓쳐 버린 것은 모두 내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다름 아닌 나의 게으름이었다. 지금! 십 오년 묵은 막걸리를 한 잔 따라 놓고 있다. 그리고 선생님께 머리 숙여 사죄하고 있다. 제가 한 잔 올립니다. 선생님, 한 잔 받으세요! 제가 얼마나 뵙기를 고대했는지 모르시죠? 얼마나 이 술을 드리고 싶었는지 모르시죠? 이 술이 어떤 술인지 아세요? 제 게으름이, 제 그리움이, 제 못난 문장을 보여드리자 했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만이, 때를 놓친 아쉬움에 땅바닥을 치며 울어댄 통곡 소리가 녹아 있는 십 오년 묵은 막걸리입니다. 쭈욱! 드셔보세요. 드시고 간 좀 봐 주세요. 간이 어떠신지요? 오래 묵힌 시커먼 게으른 맛이 어떠신지요? 씁쓸하죠? 차마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쓰죠? 하지만 저는 단내가 펄펄 나는 술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날 밤. 혼자서 십 오년 묵은 막걸리를 마셨다. 먼저 따라 놓은 한 사발을 들이켰다. 혀가 닿는 순간 말할 수 없이 썼지만 목구멍 끝을 넘어가면서 달았다. 그리고 뱃속은 뜨거웠다. 사발을 내려놓는 순간 얼굴 전체가 뜨거워졌다. 사발을 움켜진 내 손도 뜨거워졌다. 멀리 계신 아부지 얼굴이, 선생님 얼굴이 뜨겁게 떠올랐다. 또 한 사발 따랐다. 들이켰다. 목구멍에서 꾸역꾸역 소리가 나도록 들이켰다. 그 소리에 게으름이 넘어가도록 들이켰다. 이번에는 구수했다. 십 오년 묵은 솔잎 향은 향긋했고, 누룩은 달았고, 고슬고슬한 고두밥은 눈물이 날 정도로 구수했다. 또 한 사발 따랐다. 막걸리는 쫄쫄거리며 사발에 담겨졌다. 사발 반을 겨우 넘기고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병을 거꾸로 놓고 탁탁 털었다. 마지막 몇 방울까지 사발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 사발이었다. 십 오년 시간도 이 잔으로 마지막인 것이다. 마지막 잔에 담긴 십 오년을 한참 보았다. 빛깔은 누런색이 발해져 갈색이었다. 시큼하면서 쓴맛이 강한 향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잔 위에서 똥냄새처럼 풍겨댔다. 새끼손가락을 담궈 휘이익 저었다.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 이제 선생님도 이렇게 가시렵니까? 아~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저는 누구에게 간을 물어야 됩니까? 말씀 좀 해 주세요! 마지막 사발을 들이켰다. 막걸리는 독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독했다. 더 독한 것은 내 게으름이었다. 내 게으름은 하품을 타고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하더니 선생님께 사죄를 비는 사발 바닥까지 똥냄새를 풍기며 숨어들어 왔다. 그 독한 것이 다시 이불속까지 기어들어 왔다. 나는 눕혀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점점 돌고 있었고, 나도 돌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멀쩡한 것은 내 게으름이었다. 채선후 : 충북음성에서 나고 여주 남한강변에서 자랐다.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동산불교대학,대학원에서 불교경전을 공부했다.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