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크러쉬호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은 귀신에 홀린 듯 그 뉴스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21세기에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바다에 떠있던 배가 하늘로 증발을 했겠어, 땅으로 꺼졌겠어?”

뉴스를 들은 이들은 어이없어 했다. 조사를 맡은 다국적 팀은 몹시 불편한 얼굴로 배가 문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조사를 맡은 다국적팀의 무능함을 탓하며 혀를 끌끌 찼다. 한동안 뉴스를 장식하던 배의 행방은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질 즈음 멕시코의 어느 작은 해안에서 놀던 소년들이 유리병 하나를 발견했다. 유리병 속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소년들은 낯선 문자로 적힌 편지와 유리병을 방송국으로 가져갔다. 그 보잘 것 없는 유리병에 관심을 보인 것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그리스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였다. 뉴스에서 그 편지를 본 그는 당장 멕시코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는 공항에서 밤을 샜는지 지저분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기적이 일어나 이 편지가 내가 살던 곳에 도착한다면 부디 혼자 남은 우리 어머니에게 제가 이곳에 남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해주세요. 그것도 죽은 누나와 함께.”

편지는 그렇게 첫 부분을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토록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그리스 고전문헌은 없었어!”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단숨에 그러나 아주 집중해서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내가 겪은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아마도 누군가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모든 엄청난 일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법이다. 그날 바다는 아주 잔잔했다. 그게 앞으로 닥쳐올 폭풍 같은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다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초여름 특유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스모그인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안개만 아니라면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초호화 크루즈선 골든크러쉬호는 인천항에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댄스팀은 골든크러쉬호 승선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좀 일찍 항구에 도착해 승선을 기다렸다. 수영장과 카지노, 파티홀 그리고 최고급 레스토랑을 갖추고 있는 골든크러쉬호는 여느 다른 호화 크루즈선과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 도색했는지 유난히 하얗게 빛나 보이는 외관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이 일을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크루즈선에서 공연을 했다. 보통 보름이나 길어도 한 달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승선은 두 달 예정으로 꽤 길었다. 배는 인천항을 출발해서 태평양을 건너 카리브 해에서 잠시 머물다 유럽으로 향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다른 두 명의 무용수들과 같은 방을 쓰도록 배정받았다. 그들은 다른 공연팀의 러시아출신의 무희들이었는데 둘 다 머리를 밝은 금발로 염색했다. 그들도 나도 영어가 서툴렀으므로 우리는 이야기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다행이었다.

 

오키나와에 며칠 머문 것을 제외하고 육지를 본 기억이 없었다. 얼음판처럼 잔잔한 바다 위를 골든크러쉬호는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그날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면 나는 무대복을 벗지도 않고 가운만 걸친 채 갑판으로 나오곤 했다.

“바다 한번 더럽게 평화롭네.”

땀에 젖은 남자의 이마 위에 머리카락들이 어지럽게 엉겨붙어있었다. 그는 일식집에서 채소를 다듬거나 설거지를 하는 주방보조였다. 남자는 언제나 갑판에 나와 혼자 담배를 피웠다. 그는 마치 곁에 누군가 함께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곤 했다.

“진짜 이상해. 뭔 놈의 바다가 이렇게 잔잔하지?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하단 말이야. 안 그래?”

아무리 큰 배가 작은 배보다 흔들림이 적다지만 남자의 말처럼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물 위가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것처럼 아무런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다는 마치 본능을 상실한 짐승 같았다.

바다 위에서 며칠이 더 흘렀다. 우리는 적도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달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별들은 점점 선명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파도는 여전히 잔잔했다. 밤마다 파티가 벌어졌고 사방에 술과 음식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열기에 들떠있었다.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하얀 셔츠 위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들, 샴페인의 거품이 눈 덮인 성 같은 골든크러쉬호의 밤을 채웠다. 나는 반라의 몸으로 밤마다 춤을 추었다. 우리 팀의 공연은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다음번에도 골든크러쉬호와 계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단장은 흥분해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바다가 유리판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날은 공연을 마치자마자 대충 메이크업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여느 때처럼 갑판으로 나갔다. 땀에 젖은 몸이 바닷바람과 만났다. 무대 위에서의 긴장과 흥분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목을 뒤로 젖혔다.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한껏 팽팽해진 목덜미에서 목젖이 꿈틀거렸다. 나는 갑작스런 이물감에 치를 떨며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애써 잊은 기억들이 스물 스물 목젖을 타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빨리! 빨리 좀 와보라고!”

내 앞으로 갑자기 선원 하나가 무전기를 든 채 심각한 얼굴로 지나갔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기대 바다를 살피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야. 지금 물이 빠지고 있다니까!”

나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주춤했다. 막 머리 위에서 자정을 알리는 폭죽이 밤하늘로 퍼지고 있을 때였다.

“지겹지도 않은가?”

머리가 하얀 노인 하나가 폭죽 터지는 소리에 귀를 막았다. 그는 늘 무료한 얼굴로 타인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배가 멈췄어!”

스시집 보조가 여느 때처럼 담배에 불을 붙이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처럼 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잔잔한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웅웅웅 배경음악처럼 깔리던 엔진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파티복 차림의 사람들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갑판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팔목까지 셔츠를 걷어 올린 남자 하나가 바쁘게 지나가는 직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무슨 일인지 좀 알아야겠어요. 대체 왜 오밤중에 잘 가던 배가 멈춘 거요?”

“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닷물이 빠지고 있어요. 물이 너무 얕아져서 배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말이 돼? 여기는 태평양 한가운데라고! 못해도 수심이 수천 미터는 될 것 같은데……. 근처에 섬이나 육지가 있어서 수심이 얕아진 것도 아닌데, 배가 다닐 수 없을 만큼 물이 빠지다니 누가 그걸 믿겠어? 설마 길을 잃은 거 아냐? 아니면 암초에 걸린 걸 속이고 있는 거 아냐?”

“항로를 이탈한 건 절대로 아니고요, 암초는 더더욱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엄청난 속도로 바닷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저희도 지금 원인을 알아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직원은 애써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과 짜증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원은 달아나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바다 쪽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밑을 바라보았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살을 가르던 배는 조용한 섬처럼 멈춰서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이 갑자기 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선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팟, 소리를 내며 배의 전원이 한꺼번에 꺼졌다.

 

어둠에 덮인 밤바다 위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불 꺼진 크루즈선 위에서 유난히 붉은 달이 빛을 뿜고 있었다. 바다의 수위는 소리도 없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물에 잠겨있어야 할 부분이 조금씩 드러났다.

전기가 나가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나왔다.

“저기! 저기 뭔가 보여요!”

갑판으로 몰려온 사람 중 하나가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물 위로 몇 개의 기둥이 달빛을 받아 흐릿한 윤곽을 드러나고 있었다.

바닷물의 수위는 점점 낮아졌다. 파도도 바람도 없었다. 누가 지구에 구멍이라도 냈는지 불과 반시간정도 사이에 바다 한가운데 있는 기둥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났다.

“저건 배 같은데…….”

난간에 기대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스시집 보조가 입을 열었다.

달빛 아래 돛대가 드러났다. 이어 갑판 위에서 찰랑거리던 바닷물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물이 빠르게 빠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물이 빠지고 난 갑판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거무죽죽하게 보이던 배가 갑자기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돛대에도 선체에도 파리한 윤기가 돌았다.

“무슨 그리스시대 배 같아.”

“혹시 보물을 잔뜩 싣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가라앉은 게 아닐까?”

“소설 쓰지 마. 지금 저게 뭔 줄 알고?”

초조하게 갑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수위는 점점 더 내려갔다.

“이러다 바닷물이 다 증발하는 거 아냐?”

스시집 보조가 웬일로 담배 피기를 멈추고 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어? 이제 물 빠지는 게 멈춘 것 같은데.”

묵묵하게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던 노인이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아래로 아래로 낮아지기만 하던 수위는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단순한 기상이변이거나 어쩌면 달의 인력이 유난히 강해지는 지점에 우리가 와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라도 구명정을 펼 수 있도록 만반의 사태를 갖추고 있었다. 물 빠져나가는 속도가 줄어든 것을 느끼자 다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술렁이던 갑판이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맞은 편 배가 순식간에 환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손등을 꼬집었다. 물에 젖어 우중충하던 배는 어느새 상아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기, 저기…… 사람이 있어요.”

구명정 곁을 지키고 있던 선원 하나가 그리스 배의 갑판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뭐야? 유령선 아냐?”

상아빛 배 위로 횃불이 하나씩 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아마포 옷을 입은 소년들이 잰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곧 아마포 옷을 입은 소년들이 작은 배를 바다에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검은 바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았다. 육지라면 어디로라도 달아날 수 있었다. 아무리 물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였다. 달아날 곳이 없었다.

나뭇잎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작은 배들이 줄지어 골든크러쉬호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는 겨우 두 명이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상아색으로 채색된 보트의 뱃머리에는 메두사인지 사자의 머리인지 알 수 없는 조각이 새겨져있었다. 작은 배들은 달빛을 받으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르르 골든크러쉬호로 다가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노를 저으며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 옅은 색 머리카락에 분홍빛 뺨을 가진 십대 소년들이었다. 노를 저을 때마다 그들의 아마포 옷자락에서 사륵사륵 모래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소년들이 골든크러쉬호에 도착했다. 그들은 갑판에 선 사람들을 향해서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뒷걸음질을 칠뿐이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특별한 여행을 돕기 위해서 왔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맨 앞에선 소년의 이마 위에서 머리카락이 황금빛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일렁이는 횃불 때문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대체 당신들은 다 뭐야?”

선장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소년은 공손하게 그러나 마치 철학자처럼 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처구니없어 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기, 저 여자분.”

사람들을 둘러보던 소년이 나를 지목했다.

“저요? 제가 왜요?”

나는 뒷걸음질 쳤다.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 귀신에 홀리기까지 하다니! 거기다 귀신이 나를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까딱하다가 문자 그대로 물귀신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물기에 젖은 소년의 눈빛이 무언가를 꿰뚫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남자아이였어요. 그렇죠?”

소년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뭐야? 쟤 게이였어?”

스시집 보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달빛에 비친 내 실루엣을 아래위로 훑었다.

“트렌스젠더야?”

“그럼 저 가슴은 짝퉁이란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그럼, 그거, 그것도 수술했어? 남자랑 자 봤어? 느낌이 어땠어?”

중년 남자 하나가 한 발짝 나에게 다가오며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얼른 소년의 손을 잡았다. 일단 그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이 먼저였다. 소년의 손은 미끄럽고 따뜻했다.

소년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내 등 뒤에서 하나 둘 배에 오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말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그들도 나처럼 말 못할 어떤 상처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배 위의 소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가만 가만 노를 저었다. 그가 노를 젓을 때마다 소년이 입은 아마포 옷자락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옷자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그리스 배에 다다라있었다.

사다리를 올라가자 상아색 기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높게 솟은 돛대 위에 붉은 보름달이 막대사탕처럼 걸려있었다. 배에는 오랜 세월 바다에 잠겨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조가비나 산호초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은 다 과거로만 연결되어 있어요. 배 안의 각 방에는 버려진 것들이 가득 들어있지요. 다시 찾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고 나오시면 돼요. 다만 한 가지, 현재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은 가지고 가실 수가 없습니다.”

선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며 소년이 설명했다. 그와 내가 어떤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그는 나의 말을 이해했다. 횃불 아래 흔들리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축축했다.

“아무나 이런 행운을 만나는 건 아니에요. 아주 특별한 날, 그러니까 저렇게 보름달의 인력이 강해져서 바닷물들이 한쪽으로 쓸려가는 날, 운이 아주 좋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호사지요.”

“뭘, 어떻게 과거와 만난다는 거지요?”

내가 물었다.

“그냥 아무 방의 문이나 열고 들어가면 돼요.”

소년이 대답했다. 나는 뭔가 너무 싱겁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깜빡였다.

“아마 방 한 개의 문을 열면 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실 거예요.”

소년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잡혔다 사라졌다.

소년은 나에게 고대문자가 수놓아진 아마포 자루 하나를 건넸다.

“필요하실 거예요.”

나는 말없이 소년이 건네는 자루를 받았다.

“가지고 가고 싶은 걸 발견하면 여기에 담으세요. 자루에 매달린 분필처럼 생긴 조그만 막대기로 자루 표면에 가지고 가고 싶은 물건을 적기만 하면 됩니다. 이 자루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담을 수 있어요. 예컨대 노래 몇 소절, 누군가의 목소리, 차가운 공기 같은 거요. 하지만 너무 무거운 건 담을 수 없답니다. 자루에 담기지 않는 건 이 배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

소년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루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차곡차곡 접혀있는 자루를 폈더니 꽤 컸다. 뭘 그렇게 많이 담을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 소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던 목조선이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었다. 곳곳에 흔들리는 횃불이 걸려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 나무판들이 삐걱 삐걱 소리를 냈다. 배 안은 미로 같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첫 번째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어디선가 희미한 빛이 새 나오는지 앞이 뿌옇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출렁출렁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실핏줄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뭔가에 부딪쳐 왜곡되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물 밖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태중의 기억이구나. 나는 그곳에서 엄마가 부르는 노래 두 소절을 가지고 나왔다.

노래 두 소절을 담자 자루가 약간 무거워졌다.

다음 방으로 가기 위해서 다시 복도로 나왔을 때,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언제나 굴뚝처럼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스시집 보조였다. 그는 무언가 간절하게 찾는 것이라도 있는지 초조하게 이 방 저 방,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알은 체를 하고 싶어서 그 곁을 스쳐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다른 일에 완전히 넋이 나가서 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는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어느 방문을 열어볼까 망설이다가 다섯 번째 방 앞에서 멈췄다. 문을 열자 잡동사니들이 우르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끈 떨어진 분홍색 메리제인슈즈, 파란색 구슬이 달린 장난감 귀걸이, 때 묻은 망사원피스, 팔 한쪽이 없는 금발 인형, 하얀 꽃 모양이 달린 실핀…… 나는 우두커니 서서 쏟아져 내리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이 다 떨어지고 나자 금박지 은박지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얇은 종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언니, 언니, 언니, 언니야……,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가족들이 모두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누나의 옷을 입어보곤 했다. 하얀 타이츠에 망사를 덧댄 원피스를 입은 거울 속의 나는 동그랗게 입을 모았다. 거울에 대고 나지막하게 ‘언니’라고 부르자 뽀얀 입김이 거울 속의 내 입술 위로 번졌다.

나는 그 방에 서서 새삼스레 내 입술을 만져보았다. 나는 조용히 언니……하고 불러보았다. 나는 ‘언니야’라는 한 단어를 챙겨 그 방을 나왔다.

복도로 나왔다. 이번에는 여덟 번째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문을 열자 인적도 없는 아스팔트가 펼쳐졌다. 군데군데 고장 난 가로등이 서있는 그곳은 스산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억에 없는 곳이었다. 아스팔트 양편으로 공사 중인 아파트들이 보였다. 건축자재들이 여기 저기 쌓여있었다.

“흑흑…….”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은 어두운 공사장 안쪽이었다. 나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소년이 울고 있었다. 달빛도 들지 않는 파리한 벽 사이에 앉아 소년은 회색빛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소년은 울다 지치면 드문드문 내려앉는 별들을 세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난 듯 서럽게 울기를 반복했다.

“현우야!”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얼른 뒤돌아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어린 누나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긴 머리카락이 어둠을 흔들고 있었다. 누나는 작은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면서 공사장 안으로 들어왔다. 야옹,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한 울음을 울며 앙상한 뼈대만 있는 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너, 여기서 뭐하니?”

소년을 발견한 그녀가 조심조심 짓다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찾았는데!”

그녀는 소년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소년의 팔이 풀빵반족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녀는 소년의 손목을 놓고 옆에 앉았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옆에 앉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까 지나갔던 고양이가 다시 그들 주변을 서성였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소년은 이윽고 컥,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가 옆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참았던 게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인지 소년은 더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소년이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한동안 울고 난 소년은 코가 막혔는지 입을 벌리고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여자 옷을 입고 놀다가 걸려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 즈음에는 그런 이유로 흠씬 두들겨 맞는 일이 잦았다. 그만큼 여성적인 것 대한 나의 집착이 강해지고 있었던 시기였으니까.

소년의 울음이 잦아졌다. 그녀는 부스럭 부스럭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딱, 경쾌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렸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소년의 입술 위로 한 겹 어둠이 덧 입혀졌다. 밝은 빛 아래였으면 분명 선명한 장밋빛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소년의 입술산을 따라 오르고 내렸다.

“아, 해봐.”

소년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아,하고 입을 벌렸다. 그녀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소년의 눈이 상현달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소년은 울음을 그쳤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소년이 울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북받쳐오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술주정뱅이 누나는 오년 전,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대학을 나와 작은 회사의 경리로 들어갔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추구했던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결혼을 했지만 지독하게 불행했다. 야심차게 작은 편의점을 열었던 매형은 채 2년을 못 버티고 쫄딱 망했다. 망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망가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누나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 즈음 나는 내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기 시작했고 부모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있었다.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집은 이미 전쟁터로 변해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여자가 되는 꼴을 못 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부모의 눈에는 왜 하나밖에 없는 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갈 곳을 잃고 마음 둘 곳도 잃은 그녀는 처음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나중에는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영원히 날아가 버렸다.

마지막 순간 그녀가 입었던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립스틱 뚜껑이었다. 평소에 화장 따위는 하지 않았기에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앗, 누구세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어린 눈빛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서 여기서 나가자! 나는 그러니까 나는…….”

하지만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더는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그만 그녀의 머리가 콘크리트 벽에 꽝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문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다시 소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로 나오자 나는 그녀를 내려놓고 얼른 자루를 꺼내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김지우,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이러려고 이곳에 왔구나 싶었다.

갑자기 자루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윤곽이 흐릿해졌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이번에는 ‘누나’라고 적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뭐지? 이게 뭐지? 왜 안 되는 거야?”

나는 이성을 잃고 아마포 자루를 바닥에 팽개쳤다. 내 목소리에 잠이 깬 그녀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달아나려고 했다. 나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여기를 벗어나서 문밖으로 나가자.”

나는 발버둥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긴 어디에요? 대체 왜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이런 이상한 곳에 와 있는 거죠?”

질문을 퍼붓는 그녀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러니까 우리가 설에 TV에서 봤던 ‘백 투 더 퓨처’에서처럼 미래의 내가 누나를 구하러 온 거야. 알겠지? 그러니 절대 달아나지 마.”

영화 제목을 댄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말은 들은 그녀가 흠칫 놀라더니 찬찬히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정말 눈썹 위에 흉터가 있네.”

그녀는 곧 아이다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흉터는 어릴 때 놀이터에서 놀다가 누나가 휘두른 나무막대기 끝에 찢긴 자국이었다.

“그런데 꼴이 그게 뭐예요? 무슨 남자가 머리는 그렇게 기르고……. 어, 화장했나? 입술은 왜 또 그렇게 빨간 거죠? 에이, 누가 보면 여자라고 해도 믿겠다!”

“그러니 이제 나랑 이곳을 나가자.”

나는 그녀가 자루에 담기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복도 여기저기서 얼굴만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들 역시 가끔 나를 알아보는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않았고 어느 순간 복도에서 사라졌다. 아까 갑판에서 보았던 회의주의자 노인도 보였다. 그의 옆에는 수의를 입은 여인이 꼭 붙어있었다. 언제나 눈이 풀려있던 그 노인의 눈에서 광기에 가까운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일단 갑판으로 나가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나 누가 막아서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입에 침이 말랐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렸다. 그러나 내가 밖으로 나가는 문의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달려와 막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힘차게 문고리를 당겼다.

그 방의 문을 열자마자 분홍빛 꽃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멀리서 까르르 웃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스케치북을 든 그녀가 흩날리는 벚꽃 사이를 친구들과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꽃잎대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시려왔다. 코트 깃을 세운 그녀가 눈꽃 아래를 지나갔다.

“아…….”

그것은 내가 지상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의 풍경이었다. 당시 사랑에 빠진 나는 파트너와 일생을 함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거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꼭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여자의 몸으로 눈꽃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그 어느 때보다 거셌다. 엄마는 기어이 음독을 시도했다. 그녀와 나는 위세척을 받고 누워있는 엄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은 파리했다. 우울증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녀의 우울증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병이 아니라 매형의 사업이 잘 풀리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휘발성 물질에 불과했다. 성별을 바꾸는 큰 수술을 결심한 내게 마음의 병이란 그저 작은 생채기쯤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머리 위로 함박눈이 쏟아졌다. 나는 그녀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그녀라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하게 그녀라면 나를 위해 나서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문제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흘깃 그녀의 옆얼굴을 넘겨다보았다. 눈에 덮인 하얀 속눈썹이 무거워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미대를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미술이란 그저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거라는 말로 아버지는 그녀의 꿈을 묵살해버렸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후, 그녀는 눈에 띄게 무기력해졌다. 가족들은 그저 사춘기의 우울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 역시 내 문제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그녀의 시퍼렇게 멍든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나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지지해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위로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휙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발이 시렸다. 몇 발자국 못 가서 나는 뒤돌아보았다. 걸음을 멈춘 채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파리하고 활기를 잃은 얼굴이 눈에 덮여 더 창백해보였다. 하얗게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는 마치 소금기둥 같았다.

“누구예요?”

옆에서 잠자코 그 장면을 지켜보던 어린 그녀가 내게 물었다. 바로 그때, 쓸쓸한 얼굴로 돌아서던 그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그녀는 천천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곧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 뚝 떨어졌다.

예전의 내 모습도 그녀도 서서히 멀어졌다. 함박눈이 말없이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자.”

어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문을 나서려는데 무언가 툭, 발에 채였다. 아까 그녀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었다. 뚜껑이 없는 장미색 립스틱이었다. 새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고 산 것이 분명했다. 코끝이 찡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정신없이 다시 복도로 나갔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엇에 홀린 듯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이 문이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갑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반라의 내가 춤을 추고 있는 무대였다. 나는 민망해서 얼른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문을 알고 있는 거 맞아요?”

그녀는 지쳤는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알아, 그러니 나를 믿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밖으로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문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까 열어보았던 첫 번째 문을 다시 열었다. 핏줄이 거미줄처럼 얽힌 그 방은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복도로 나와 다른 방문을 하나씩 열었다. 어떤 방은 초등학교 입학식이었고, 또 몇 개의 방은 내가 은밀하게 숨겨둔 순정만화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방이었다. 또 어떤 방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었고, 어떤 방은 내가 수술을 받던 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밖으로 나가는 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복도로 나갔다.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지쳤는지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물이 들어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어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좋은 거 많이 건지셨어요?”

언제 나타났는지 아까 그 소년이 물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그 소년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여기 이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어요. 그런데 자루에 담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 거죠?”

“너무 무거워서 그래요.”

소년이 대답했다.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가벼운데!”

나는 잠들어 있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세속의 무게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고유의 가치로 무게가 정해져요. 같은 물건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티끌만큼의 무게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산 하나만큼의 무게가 되기도 하지요. 미안하지만 데리고 나가실 수 없습니다.”

소년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애걸복걸해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묵묵히 내 말을 들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빠졌던 물이 다시 차오르고 있어요.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소년은 측은한 듯 나를 바라보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나를 내가 수도 없이 열었다 닫은 바로 그 문 앞으로 데려갔다. 나는 잠들어있는 그녀를 깨웠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왔다.

소년이 문을 열었다. 바다냄새가 확 풍겼다. 맞은편에 불이 꺼진 골든크러쉬호가 어둠속에 버티고 서있었다. 달빛을 받은 골든크러쉬호 아래로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물이 차오르는데 왜 배에 불이 안 들어오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배에서 이 배로 건너온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 배도 이 배와 마찬가지 운명이 될 거예요.”

소년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하여간 돌아가시려면 빨리 배를 띄워야 해요. 물이 다 들어오면 영영 건너갈 수가 없어요.”

소년이 독촉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닷물은 어느새 골든크러쉬호의 갑판까지 삼키고 있었다.

“누구라도 저 배로 다시 돌아간다면 저 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초조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소년이 말했다. 나는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골든크러쉬호와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만약 내가 저 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머문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럼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죠. 더는 미래나 현재라는 것이 없는 삶이 되는 겁니다. 과거의 여러 방들을 돌아다니며 지내게 되는 거죠. 물론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영원히 머물 수도 있고요.”

소년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바닷물에 잠기고 있는 것은 저쪽에 있는 배만이 아니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도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여기에 머물기로 했다면 빨리 들어가야 해요.”

소년이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편지를 남길 수는 없을까요?

내 말이 약간 의외였는지 소년이 눈을 깜빡였다.

“남길 수야 있지만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란 어려울 거예요. 여기는 오래된 기억들만이 가득한 곳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소년은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반쯤 잠든 채 내게 이끌려 들어왔다. 막 닫히려는 문틈으로 5층 객실까지 물이 차오른 골든크러쉬호가 언뜻 보였다.

소년은 어떤 방으로 들어가더니 나에게 코르크 마개가 달린 유리병 하나와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나는 빠른 속도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완전히 잠들었다.

“다시 배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그렇게 호화로운 배에 몸을 싣고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이 한 명도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건 참 의외예요.”

소년이 말했다.

글쓰기를 마치자 나는 그것을 접어서 유리병에 넣고 단단히 봉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소년이 재촉했다.

“배를 띄워주세요! 저편으로 가겠어요. 단, 이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

나는 소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선언했다.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배에는 세 명이 탈 수 없어요.”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꼭 이 사람이랑 가겠어요!”

“두 사람과 약간의 기억 정도의 무게만 견딜 수 있다니까요!”

소년은 내가 고집을 피우자 화를 냈다.

“그럼 나랑 이 사람이 노를 저어서 가겠어요. 당신은 저기 문만 나갈 수 있도록 해주면 돼요.”

소년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에 취한 채 늘어진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소년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눈짓을 하더니 갑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소년이 목에 걸린 작은 고동모양의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까 그 작은 배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를 배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나도 배 안으로 뛰어들었다. 노를 챙겨 힘껏 젓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파도에 배가 가랑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물이 빠질 때는 그렇게 고요하더니 들어올 때는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격렬하게 밀려들었다.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면서 물보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불 꺼진 골든크러쉬호를 향해서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골든크러쉬호는 이미 선실 맨 위층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배 바닥에 죽은 듯 잠들어있었다.

나는 문득 소년이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미 소년도 배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산처럼 커다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나의 배는 점점 골든크러쉬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노를 저었다. 조금만……. 나는 골든크러쉬호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내가 탄 배가 파도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손이 닿을 듯 말 듯 자꾸만 미끄러졌다. 결국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뻗었다. 금속성 물질의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닿았다. 조금만 더…….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산 하나가 내려앉았다. 내 작은 배는 파도를 맞고 뒤집어졌다.

“안 돼!”

거대한 파도가 내 비명을 삼켰다. 몸이 붕 떴다. 그리고 다시 곤두박질쳤다.

물속이었다. 거품을 일으키며 침몰하고 있는 작은 배의 파편과 편지가 든 유리병, 그리고 그림처럼 파리한 그녀가 보였다. 그녀를 보자 나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마치 아우라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얼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순간, 달빛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갑자기 그녀 주위로 소용돌이가 생기며 우리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현우야…….”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유리병이 파도를 타고 어디론가 쓸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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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약력 : 2008년 『현대시』 등단,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2014년 시인광장 작품상 수상.

메일주소 : ir48@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