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동행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리저리 먼지도 흩날렸습니다. 날씨 때문인지 거리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오전 11시. 상주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작은 가게에 문이 열리고 휠체어 하나가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휠체어를 탄 70대 할머니는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썼습니다. 창백한 얼굴만큼이나 하얀 마스크가 안쓰러웠지만 목에 두른 분홍색 스카프가 하얀 마스크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은색 머리칼이 중절모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웃의 말을 종합해 보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정해진 골목을 한 바퀴 도는 듯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복장은 달라지지만 두 내외분의 외출은 어김이 없는 듯 했습니다. 첨에는 대수롭잖게 지나쳤지만 한결같은 이 동행에 때론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날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분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할머니는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란 것뿐입니다.

 

할머니는 건강이 많이 나쁜 때문인지 퍽 신경질적이었습니다. 가끔 날카로운 목소리로 휠체어를 미는 할아버지에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퍼붓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한결 같았습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나 원망쯤은 이미 바람에 날려 버린 지 오래인 듯 얼굴엔 언제나 넉넉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중에서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이 있지요. 부모님과 스승과의 만남,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부부의 만남입니다. 첫 번째의 만남은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둘째와 셋째는 어느 정도 선택이 가능하다지만 어쩌던 이 세 만남을 우리는 운명적이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정을 설계하는 부부로의 만남이야 말로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두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자녀라는 또 다른 공동운명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남이 만나 새로운 가족으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이해와 신뢰 그리고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오래 반려자로서 함께 해야 한다는 일입니다. 세월이 변하여 이혼율이 증가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결손가정이 늘어나고 그것도 모자라 황혼이혼이란 새로운 용어까지 등장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가정은 제 자리를 지키며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기에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고 있음입니다.

 

노부부의 휠체어가 바람이 부는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두 내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는 여니 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휠체어를 밀고 갑니다. 나는 일부러 두 분이 다음 골목으로 꺾어 돌아가실 때까지 한 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불편하시지만 두 내외분이 오래 오래 행복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말입니다. 허허허.

 

 

 장판각의 ‘마구리’

 

한국국학진흥원 가는 길에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전통문화 중 유교문화의 다양한 자료와 풍부한 볼거리를 전시, 보관하는 여긴 민족문화의 산실 같은 곳입니다. 더욱 이곳 장판각은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진수인 전통 목판과 현판을 기증 또는 위탁받아 보관하는 곳으로 현재 약 7만장, 앞으로 10만장이 넘게 수집하여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등록 하려는 야심찬 꿈을 지닌 공간입니다.

 

장판각에 들어가자 빼곡히 쌓여 있는 목판(책판冊版, 현판懸板, 도판(圖板), 서판(書板), 기판(記板), 능화판(菱華板)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향(墨香)에 취해나도 모르게 수 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습니다.

 

담당자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웬일인지 글자가 새겨진 판목보다는 판목의 양쪽을 막고 있는 ‘마구리’쪽에 내 관심이 쏠렸습니다.

 

마구리란 ‘길쭉한 물건의 끝 쪽 머리에 대는 물건’을 말하는데, 대부분 마구리는 말끔하게 마무리 되지 않고 투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마구리의 역할은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목판을 손쉽게 들 만질 수 있는 역할, 목판과 목판이 맞부딪힐 때 판면의 손상 방지, 목판과 목판 사이의 원할 한 통풍, 이로 인한 변질, 뒤틀림, 트임 방지, 그리고 목판을 진열 보관했을 때 책의 제목, 권차(卷次-책의 해당 권수), 장차(張次-책의 쪽수)등을 마구리에 표시합니다. 마치 도서관의 분류기호처럼 판각의 내용을 찾기 쉽게 말입니다.

 

판목은 주로 단풍나무, 가래나무, 산벚나무, 박달나무, 감나무, 고로쇠나무와 같은 중경질의 재료를 활용했지만 마구리는 흔한 소나무입니다. 하지만 쓰임에는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목판에서도 판면에 새겨진 각자(刻字)가 주인공이라면 이 외에 미비(眉批-별도의 주석부분), 광곽(匡郭-판면을 구성하는 외곽 테두리부분), 묵계자(墨罊子-인용되는 책이나 주석가의 이름처럼 특별히 표기할 사항의 음각처리부분), 계선(界線-본문의 각 줄 사이의 경계선), 판심(版心-목판의 중심부), 권차, 장차, 와 같은 것은 조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 보존, 관리하는 일은 바로 하찮은 이름을 가진 마구리의 몫이었습니다.

 

장판각을 나오면서 생각이 깊어 졌습니다. 내 삶의 부분 부분에 마구리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정말 해야 할 일에 머뭇거리거나 소홀하지나 않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산 아래, 저만치 내려앉은 안동호에서 한 무리의 물안개가 국학진흥원 솔숲을 지나 내 가슴 속으로 환상처럼 밀려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