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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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7889 2014-11-03
493 로라의 게시판 /임수랑 file
편집자
3483 2016-07-31
16.08.75호 소설 로라의 게시판 로라는 가출하지 않는다. 로라는 교실의 네모난 게시판도 벗어나지 못한다. 로라의 네모난 게시판 속엔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억압하고 절제한 로라의 욕망이 들어있다. 로라는 아이들의 사물함 이름표로 붕붕차 모양이 적당할 것 같았다. “굴뚝 달린 양옥집은 또 어떨까?” 로라는 일단 생각한 것을 뾰족하게 깎은 HB연필로 그리기 시작했다. 붕붕차나 굴뚝 달린 집은 그리기 무난했지만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우주선 모양을 하나 그렸다. 로라는 우주선이 맘에 들었다. 그래도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어 우주선을 연필로 계속 긁적거렸다. 직선으로 나가던 연필 끝이 곡선방향으로 움직였다. 사선 방향에서 바라 본 우주선 모양이었다. 우주선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었다. 연필 끝으로 양끝만 살짝 치켜 올렸을 뿐인데 우주선은 날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로라는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기분에 휩싸였다. 로라는 엄지와 중지에 가위를 끼고 서둘러 그것을 오렸다. 그러고 나서 로라는 한쪽 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게시판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저걸 언제 다 채우나.” 처음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로라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업을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네모난 게시판의 한 귀퉁이를 채워 넣고 나니 그 다음 것이 저절로 생각났다. 그것들은 이상하게 어울렸다. 게시판 전체의 아우트라인을 미리 짜지도 않았다. 가을이었다. 나뭇잎을 바닥에 하나 떨어뜨리고 나자 바람이 생각났고, 바람은 나뭇잎들을 지붕 위로 날게 했고, 저절로 머릿속엔 지붕에서 미끄러져 골목으로 떨어진 나뭇잎들이 떠올랐다. 로라의 생각대로 게시판의 풍경이 움직였다. 로라의 머릿속은 그래서 그런지 자주 아팠다. “나는 지금 과로 상태야. 이제 그만 쉬어야만 돼.” 로라는 틈이 날 때마다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나마나한 이야기였다. 새학기는 아미 시작되었다. * 로라는 동그란 돔 모양의 놀이기구 속에 아이들을 집어넣었다. 아이들은 마구 들어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돔 속에서 아이들은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없다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땀을 흘리며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로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도망가지 않도록 귀를 쫑긋거리며 옆에서 지켰다. 로라는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를 처음엔 기쁨의 변주곡쯤으로 여겼다. 제1, 제2, 제3 변주곡으로 시작된 곡은 제12곡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이제 시작이야. 시작일 뿐이라고.” 로라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것은 아침의 작은 정원에서 들리는 새소리로 시작되어 경쾌한 실로폰 소리가 되기도 했다. 숨을 고르는 사이 작은북소리로 이어지다가 마라카스를 착착 흔드는 소리처럼 규칙적인 힘의 선율을 쏟아내기도 하고 눈 쌓인 길 위에 퍼지는 핸드벨 연주 같이 로라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가끔은 이끼 낀 담벼락에 내리는 밤중의 빗소리가 되어 그녀를 외롭게 했다. 밤중의 빗소리는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는 소리로 변했다가-그 순간을 조심해야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레퍼토리를 피하기 위해서는-끝없이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비명소리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럼 끝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을 꺼내려하니 돔의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로라는 당황하여 돔의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버둥거렸다. 결사적으로 뚜껑손잡이에 매달린 끝에 로라는 겨우 돔의 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돔 안은 텅 비어있었다. 로라는 아이들을 찾아서 돔의 둘레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다가 로라는 붉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공원 안을 샅샅이 뒤졌다. 로라는 공원의 화장실에 가보기도 하고, 미술 전시관으로 가 액자 뒤도 살폈다. 지하전시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는 용 모양의 기둥이 있었다. 로라는 기둥 뒤로도 가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로라는 검은 물감에 흰 물감이 몇 줄기 번지는 것과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로라는 기둥을 부여잡고 절규했다. 기둥은 떡 버티고 서서 로라가 몸을 기댈 수 있게 허락해 줬다. 하지만 로라의 절규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아이들은 앙큼하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깊고도 커다란 원통기둥 속에 들어갔던 로라의 소리는 다시 되돌아 나왔다. 아래로 모였던 소리가 갑자기 한꺼번에 위로 터져 올라왔다. 그 충격으로 기둥에서 튕겨나간 로라는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계단 아래 양탄자 밑에 불개미들처럼 숨어 있었다. 로라가 바닥 위로 쓰러지자 한꺼번에 양탄자 밑에서 우르르 기어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로라 앞에서 벌어진 광경이었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아이들은 로라의 몸으로 뛰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한 명은 눈 속으로 한 명은 콧구멍 속으로 한 명은 목구멍 속으로 계속 들락날락하며 로라의 몸을 칭칭 돌아다녔다. 로라는 소인국에 간 걸리버가 된 느낌이었다. 로라는 아이의 발에 콕콕 찔린 눈을 껌벅거렸다. 그 바람에 눈꺼풀에 매달려있던 아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로라는 온 몸이 간질간질했다. 로라는 전 날 3시간 밖에 잠을 못 잤다. 무거운 자물쇠가 채워진 듯 슬금슬금 눈꺼풀이 자꾸 아래로 내려앉았지만 로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운동화 앞발로 운동장을 푹푹 긁으며 지나갈 때마다 운동장의 흙들이 들고 일어났다. 운동장이 흙먼지로 뿌옇게 변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흙먼지 속의 운동장을 질러 뛰어갔다. 아이들은 손에 들고 있던 짝짝이를 가끔 쳤다. 아이들의 짝짝이 소리에 맞춰 흙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흙들은 사막을 지나는 낙타 떼처럼 금빛으로 빛났다. 구령대에 가을햇빛이 스러지고 흙들은 구령대 위에서도 춤을 췄다. 아이들은 짝짝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들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도 이제는 흙먼지들이 스스로 콩나물 합주를 시작했다. 북을 치고, 기타를 치고, 오카라스를 불었다. 흙들의 합주에 맞추어 학교 정문에서 후문까지 빛은 파장을 일으키며 가마니를 굴렸다. 모래 콩나물들이 반짝거리며 박수를 치고 시소 위에서 아이들의 초록웃음과 뒤섞였다. 바람에 날아다니는 모래 가루는 서로 입을 맞추고 아이들은 야구 방망이처럼 운동장에서 막춤을 췄다. 로라는 호주머니에 숨겨놓았던 호루라기를 꺼내서 불었다. 정글짐 꼭대기에서 놀던 콩나물이 아래로 떨어져 켜켜이 쌓였다. 잠시 뒤 빛은 흙과 함께 가라앉았다. 흙먼지가 사라진 구령대는 조용했다. 긴장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 로라는 규칙적으로 잠을 잤다. 로라는 규칙적으로 그릇을 닦아냈다. 먼지 따로 진공청소기를 하루에 한 번씩 꼭 돌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따로 모은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어냈다. 로라는 규칙적으로 해를 보고 달을 보고 밥 딜런을 듣는 것을 반복했다. 음악은 대부분 슬펐다. 특히 슬픈 음악은 아이의 눈물처럼 슬프고, 유리창에 매달린 빗방울처럼 슬펐다. 음악은 그쳤고 빗소리는 아직도 들린다. 뜨거운 햇볕과 폭염이 끝이 없을 것 같더니 이틀째 비가 내린다. “나에겐 음악이 있고 아이들이 있고 잠이, 그리고 내일이 있지.” 로라의 하루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규칙이었다. 로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규칙1과 규칙2와 규칙3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다. 로라의 규칙은 신기하게도 계속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것과 반대로 뱀이 허물을 벗듯 로라의 욕망은 자꾸자꾸 떨어져나갔다. 떨어져나가고 다시 생겨나는 걸 반복했다. 로라의 남편은 몇 년 째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라는 가출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길을 가지 않고 버텼다. 햇살 같은 두 아이가 있었다. 모성이 부재한 텅 빈 방을 로라는 진작 경험했다. 좋은 남편은 아니라도 아이들에겐 좋은 아버지였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로라는 이를 악물고 규칙을 견디고 있었다. 다만 위안삼아 바람을 맞으며 걸었을 뿐이다. 빗길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한 계절이 가고, 두 계절이 가 버렸다. 진작 윤기는 사라졌다. 욕망에 대한 그럴 듯한 타당성만 남았다. 윤기를 잃은 욕망은 세상의 규칙 속에서 빈껍데기가 되어 굴러다녔다. 그것은 마치 검은 도시 속에 떨어져 길을 잃고 날뛰는 얼룩말의 공허한 뒷발질 같았다. * 로라는 병이 났다. 하필이면 겨울이 시작된 날이었다. 겨울이 오는 게 썩 기쁘지 않고, 기대되지 않고, 썩 기대되는 일이 없고, 매일매일 내일이 오는 게 영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유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매일매일 내일을 마주 했다. 위가 막혀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쓴 약이 몸에 흡수되지 않은 채 위액과 섞여 속을 훑었다. 감기 바이러스는 드디어 입 안의 혀로, 오른쪽 귓구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급기야 머릿속까지 치고 올라왔다. 사과를 반으로 딱 자른 듯 머리의 반쪽에 두통이 왔다. 눈은 자꾸 감기고 기관지에서 시작된 기침가래의 포효가 몸 전체에서 끓기 시작했다. 로라는 침대에서 솜이불을 두 개나 덮어쓰고 감기와의 한판 장전에 들어갔다. * 하얀 나무를 양쪽으로 2개 배치했다. 커튼처럼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드리우고 색종이로 오린 눈을 호지키스로 고정시켜 하늘에서 마구마구 내리게 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눈이라. 그래도 하늘은 하늘이니까, 잿빛 하늘너머에 있는 파란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루돌프 사슴이 모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마차를 상상했지만, 로라는 커다란 바퀴를 가진 신데렐라의 마차를 만들었다, 클레이 점토로 만든 분홍토끼를 마차에 태웠다. 마차가 가는 길 위로 가로등 불빛이 붉은 안개처럼 드리웠고 얼음길은 멀리 산 끝까지 이어졌다. 로라는 분홍토끼가 타고 있는 마차를 따라 얼음길로 들어섰다. 헝겊신을 신은 로라는 자꾸 미끄러졌다. 분홍토끼를 태운 마차는 이미 로라를 저만큼 앞서갔다. 로라는 헝겊신을 벗어 손에 들고 뛰기 시작했다. 스타킹을 신은 발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로라는 붉은 안개를 연출하는 가로등까지 왔다. 마차는 숲 속으로 벌써 들어가고 있었다. 로라는 가로등을 붙잡은 채 숨을 고르며 눈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봤다. 마차는 눈 쌓인 겨울 숲에서 검은 점으로 남는가 싶더니 숲 속으로 아예 사라져 버렸다. * 로라는 두 손과 두 발에 하얀 붕대를 감고 걸상에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얼음길에서 마차를 놓친 로라는 두 손과 두 발 모두 동상에 걸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얼음조각이 바삭거리며 엄지발가락부터 발뒤꿈치까지 얼음조각에 살이 베이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난로 옆에서 두 손가락은 더 간지러웠다. 둔하고 묵직한 느낌이 더해 손가락에서 내장까지 간질간질한 게 몸에 안달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로라는 난로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난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교실 안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추웠다.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로라와 난로 주변을 빙빙 돌았다. 톱밥이 날렸다. 석탄 가루가 떠다녔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교실 안에 퍼졌다. 사뿐사뿐 걷던 아이들은 갑자기 우당탕탕 교실 바닥을 뛰어다녔다. 로라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던 맨 앞줄의 남자 아이가 여자아이의 발을 밟았다. 태권도 검은 띠인 여자아이는 남자 아이의 뺨을 찰싹 때렸다. 갑자기 교실 안에 냉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로라는 걸을 수가 없어 남자아이의 뺨을 쓰다듬어 주지 못했다. 남자아이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잠시 후 남자아이의 얼굴은 분노로 차올랐다. 날렵하게 여자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여자 아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의 목소리는 난로 속의 불을 순식간에 꺼버렸다. 난로는 이내 식었다. 여자 아이의 비명 소리는 연통 속으로 들어가 돌아다녔다. 연통 속속들이 허옇게 성에가 끼었다. 남자 아이는 오줌을 찔끔 흘렸다. 로라는 무릎을 꿇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 로라는 불을 다시 켰다. 아이들의 변덕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다시 나타났다.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은 소리 질렀다. “불을 꺼, 불을 꺼.” 그러나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불을 켜요, 불을 켜 주세요,” 이번엔 불을 켜라고 소리 질렀다. 두려워서 지르는 비명 소리 같기도 하고 데시벨을 한껏 높인 고장 난 라디오 소리 같기도 했다. 불을 켠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즐겼다. “귀신이야. 호박 귀신.” 로라는 호박귀신으로 변했다. A, B, C, D, 라고 적힌 알파벳 카드가 커튼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A로 우산을 만들어 받고 나온 여자아이, D 모양의 가면을 쓰고 나온 남자아이, 마귀 모자를 쓴 할멈이 합죽이가 된 입을 내밀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이들의 변덕스런 눈으로, 몸으로 각성되는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의문을 뒤로하고 로라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 왼쪽으로 유성이 하나 떨어졌다. 모닥불은 불씨도 남지 않았다. 로라는 쓰러진 통나무에 살짝 걸터앉았다. 10개나 되는 천막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불은 다 꺼졌고 밤은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 중에 로라는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가오는 시간을 거부하고 싶었다. 잠을 자야했다. 로라는 속삭였다. “상관없어. 그래도 아직 밤이야. 밤이라구.” 로라의 마른 등은 눈 뜬 밤의 진공을 견디기 힘들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공사장바닥처럼 매번 상처자국이 났다. 눈의 움직임을 거의 제동할 수 없을 때를 포착하는 일이 일 순위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야 그나마 잘 수 있었다. 로라는 눈이 반쯤 감길 때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로라는 천막 안에 들어가 호랑이 가죽위에 비스듬히 옆으로 누웠다. 신기하게 눈이 감겼다. 그렇게 단 몇 시간이라도 잠에 빠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로라는 나룻배를 타고 파란색 도화지 위로 노를 저어갔다. 반쯤 벗겨진 털모자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뺨을 비스듬히 치켜 올린 채 노를 저었다. 로라는 건너편 오두막집을 향해 갔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오두막집 창문으로 붉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로라는 노를 젓기 힘들었다. 파란색 수면 위로 크고 흰 얼음 조각이 군데군데 떠 있었다. 얼음 조각에 나룻배가 자꾸 걸리는 바람에 건너편 오두막집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라는 노를 나룻배에 걸쳐놓고 바로 앞에 있는 크고 흰 얼음조각을 두 손으로 들어 한쪽으로 던지면서 물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호수 아래서 금방 크고 흰 얼음조각이 떠올라 앞을 가로막았다. 로라는 크고 흰 얼음조각을 두 손으로 들다가 털모자를 호수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털모자 속에 숨어있던 로라의 길게 딴 머리가 양 옆으로 드러났다. 머리털이 뽑힌 삼손처럼 로라는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로라의 입술은 점점 더 파랗게 변해갔다. 양 옆으로 삐져나온 잔 머리칼이 바람에 정신없이 날렸다. 털모자는 깊숙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로라가 노를 놓고 머리털을 수습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룻배를 찢어버렸다. 로라는 노를 얼른 잡았다. 나룻배에서 밀려난 로라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얼음 조각 위로 겨우 올라탔다. 건너편 오두막집의 불빛은 그 사이에 꺼져버렸다. 로라는 오두막을 나올 때 모르고 양초를 켜두고 나왔다. 양초는 너무 소모적이었다. 하지만 양초는 밤을 밝히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강을 부지런히 건너 거의 다 왔을 무렵 커다란 얼음조각이 시간을 끌게 했고 아이들이 나룻배를 찢어버리는 순간 로라는 오두막의 양초가 다 타고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 로라는 긴긴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봄이 오길 기다렸다. 로라는 얼음공주가 되기 싫었다. 나무 가지 사이에 꿀벌들의 집을 만들었다. 나무 밑동으로는 개미들이 떼를 지어 기어 다녔다. 무당벌레가 로라의 치맛단에 붙었다. 치마를 마구 흔들어도 빨간 무당벌레는 떨어지지 않았다. 투명했던 목공용 풀이 치마에 허옇게 잔뜩 묻었다. 떼어내려고 할수록 더 달라붙었다. 손끝에도 휴지에도 치마에도 엉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봄이 오는 작업은 번거롭고 힘들었다. 목공용 풀과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초록색 나뭇잎에다 그린 무당벌레, 하늘소, 왕개미, 꿀벌, 애벌레, 나비가 다 기어 나왔다. 날개 짓을 막 하려고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빠르게 기어서 이미 교실 구석으로 가버린 것도 있었다. 모든 벌레들이 다 사라진 초록색 나뭇잎은 불치병 환자가 복용해야 하는 알약들 같았다. 로라는 나뭇잎들을 다 뜯어냈다. 초록색 나뭇잎을 솥에 담고 수돗물을 가득 채워 가스불 위에서 팔팔 끓였다. 수돗물은 점점 초록빛으로 변해갔다. 물이 반으로 줄었을 때 로라는 가스불을 껐다. 중국은 드라이아이스와 요오드화은(銀)을 실은 로켓을 구름층에 발사해 인공강우를 내리게 하지만 로라는 초록색 나뭇잎을 끓인 수돗물로 초록비를 내리게 했다. 비가 내리자 연잎들 위로 개구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튀어 올라 개굴개굴 울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울었다. 개골개골 울 때마다 개구리의 목젖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플라스틱 까만 눈알은 투명창 안에서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것들은 다 비슷했다. 생김새도 피부색도 눈알 크기도 울음소리도 한 공장에서 만들어 나온 것처럼 같았다. 게시판은 오래된 연못이 되었다. 로라는 붉은 잉어 한 마리를 개구리밥, 생이가래, 부레옥잠이 떠 있는 연못 속에 넣었다. 붉은 잉어는 살이 통통했다. 잉어는 이내 붉은 꼬리를 흔들며 연못 아래로 사라졌다. 로라는 잉어를 부르기 위해 한 마리를 더 집어넣었다. 두 번째 넣은 붉은 잉어도 이내 사라져버렸다. 연잎 위의 개구리들만이 개굴개골 소리 내 울었다. 아이 한 명이 돌멩이를 연못 한 가운데에다 던졌다. 연못 한 가운데 피었던 수련이 돌멩이에 맞아 연못 위로 흩어졌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연꽃들의 참사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 로라는 가슴이 찢어졌다. 로라는 끝이 날카롭게 세 갈래진 갈고리를 던져 돌멩이를 건져 올렸다. 하지만 돌멩이는 단단해서 갈고리 끝에 상처 입지 않았다. * 우유를 데워서 꿀을 두 스푼 탔다. 진짜 봄이 왔다. 봄은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사월의 바람은 T,S 엘리어트를 생각나게 했다. 잔인한 달 사월. 로라는 목이 다 헐었다. 아이들은 네모난 방에서 우유 좋아, 란 노래가사를 우유 싫어, 라고 개사해 신나게 불렀다. 로라는 우유를 한 모금씩 삼키기 시작했다. 우유가 입으로 넘어갈 때마다 혓바닥과 목구멍이 따가웠다. 로라는 바닥에 누웠다. 로라는 눈을 감았다. 달콤한 낮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로라는 나갈 수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꿀벌들이 들어와 누워있는 로라의 얼굴 위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로라는 몸을 일으켜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삼분의 일 정도 창문을 가리고 있던 로만쉐이드를 위로 바짝 당겼다. 로만쉐이드는 가로로 주름이 잡히며 위로 올라갔다. 꿀벌 두 마리는 천장으로 바닥으로 빙빙 돌면서 탈출구를 찾았다. 방 안을 두세 바퀴 돌다가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다른 방으로 날아갔다. 꿀벌들은 나갈 구멍을 찾아 구석에서 빙빙 돌다가 활짝 열린 창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갔다. 로라는 바람의 기운을 따라 창밖으로 날아간 꿀벌들을 보고 조금은 희망적이 되었다. 잔인한 4월의 고비를 넘길 수 있으리라. 꿀벌들이 다 나가고 나서야 로라는 창문을 닫았다. 대기에 바짝 당겨 올린 초록색 로만쉐이드를 모두 내렸다. 커튼이 다시 걷힐 때 뜨거운 여름이 와 있을 것을 기대해도 무방하리라. * 장마가 먼저 왔다. 검은 장우산 5개가 게시판에 등장했다. 장마 구름이 몰고 온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검은 장우산 아래 노랑, 초록, 주황색 비옷을 입은 아이들은 무지개를 꿈꿨다. 빗소리는 음악 소리로 들렸다. 혹시 자기 머리 위로 벼락이라도 내리칠까 자신의 삶이 아쉽기만 한 자들이 몸서리치는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도 아이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게시판의 아이들은 노랑, 빨강, 파랑 장화를 신고 빗속을 경쾌하게 뛰어다녔다. 분홍색으로 칠한 지붕은 흰색물감의 배합이 잘못되어 너무 탁했다. 그래서 지붕 위의 빗줄기는 검은색으로 칠할 수밖에 없었다. 옆의 아이의 것은 초록색을 테두리로 한 노란색 지붕이었다. 아주 투명하여 지붕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뭇가지 마다 열린 어항들, 아이들은 어항 속에다 소라게를 넣고 싶어 했다. 로라는 아이들의 꿈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모닝글로리에서 파는 천 원짜리 소라게에 한참 빠져있었다. 엄지손톱만 했다. 손으로 자꾸 만지고 꺼내서 불빛에 비쳐봤다. 아이들의 손을 탄 소라게는 곧 죽고 말았다. 천 원짜리 소라게는 문구점에 들여놓자마자 금방 품절되곤 했다. 봄,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그랬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한 차례 기승을 부리고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곳곳에 장마의 피해가 심했다. 개천이 넘쳐나고 산기슭이 무너져 지붕을 덮치고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 수십 대도 흙더미에 파묻혔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게시판의 어항 나무를 태평양에 있는 보라보라섬이라도 되는 듯 흥미로워했다. 소라게 어항을 만든 아이는 세 명이었다. 벌레가 무서워 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는 어항 속에다 벌레들을 가두고 싶어 했다. 아이는 벌레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의 짧고 두꺼운 다리는 벌레 물린 자국으로 종아리며 넓적다리며 성한 구석이 없었다. 벌레는 혼자 집을 지키며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 앞으로 불쑥 불쑥 출몰했다. 아이가 무서워한 건 빳빳하고 까만 날개와 통통한 몸통을 가진 바퀴벌레와 다리가 많은 지네였지만 아이가 어항에 가둔 벌레는 사슴벌레와 하늘소였다. 덩치가 커다란 아이는 배가 자주 아팠다. 복통을 달래기 위해 간이담요 위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어항 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나와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친구들이 왕따를 시켜서 지붕 뒤에 숨어있던 여자아이가 얼굴만 삐죽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 주황색 비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지붕 뒤에서 나와 개구리 옆에 나란히 따라 섰다. 여자아이는 작은 구슬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개구리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지 기다렸다. 개구리는 주황색 비옷을 입은 여자아이의 무릎 위로 풀쩍 건너뛰어 올랐다. 여자아이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두 손을 동그랗게 오므려 개구리를 감싸 안았다. 애초부터 개구리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여자아이는 안심했다. * 로라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의 흔적이 손바닥에 만져지다 멀어지다 했다. 거리에는 아직 로라처럼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도 있고 접은 장우산을 지팡이 삼아 걷는 사람도 있었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로라는 우산을 접었다. 비 맞은 새 한 마리가 로라의 앞을 가로 막았다. 새는 어디서 왔을까. 비 맞은 새는 로라를 모른척하고 앞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통통 뛰어 길가 나무 아래로 갔다. 새는 나무 아래에 가서도 고개를 연신 쫑긋하며 머뭇거렸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길을 잃었을까. 갈 길을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새의 까맣고 공허해 보이는 눈은 무언가 찾고 있는 듯했다. 바닥을 이리저리 부리로 콕콕 찍는다. 먹이였다. 새의 발톱은 까맸다. 새가 부리로 나무 부근을 콕콕 찍을 때마다 나뭇가지에 고였던 빗방울들이 흔들리며 떨어져 새의 깃털을 적셨다. 새는 그럴 때마다 몸을 흔들어 빗물을 털어냈다. 나무들이 새의 눈치만 보고 새의 날개 짓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새는 다시 후드득 날개 짓을 하더니 낮게 날아갔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아파트 벽 너머에 있는 나뭇가지였다. 그리곤 금방 아래로 내려앉았다. 로라는 더 이상 새를 볼 수 없었지만 새는 아파트 담 너머에 있는 쓰레기통 주변으로 갔다. 그제야 로라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걸으며 새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는 알았다. 새는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먹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새는 거기서 빵부스러기와 생선 가시들과 쓰레기통 밑에서 털 뭉치를 감고 노는 고양이의 발과 만날지도 모른다. 로라는 새가 어미새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로라는 새의 젖은 깃털이 언제 마를까 생각해 봤다. 젖은 손이 마를 겨를이 없는 어머니들, 로라도 어미였다. 로라는 갑자기 비가 지겨웠다. 남쪽의 뜨거운 태양 아래 절벽을 타고 올라가 몸을 말리고 싶었다. 창백해진 몸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까맣게 태운다면 어떨까. 그리고 거기 서서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어떨까.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춤도 춘다.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멋진 다리를 자랑할 수 있다면. 새의 정체를 파악한 로라는 거리에 더 머물 것 없이 우산의 빗물을 털고 게시판 안으로 들어갔다. * 로라는 키위를 반으로 갈라서 아이들의 접시에 나눠줬다. 아이들은 키위를 숟가락으로 파먹었다. 아이들의 어금니 사이로 검은 씨가 우지직 씹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진저리를 치며 키위 접시를 화분 위로 던졌다. 산호수 이파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아이들은 쪼르르 화분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들을 집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여자아이는 자그마한 이파리들이 떨어진 바닥 위에 주저앉아 키위 껍질 때문에 팔이 가렵다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여린 갈색 단발은 눈물바람에 헝클어져 이리저리 날렸다. 로라는 단 한 개 있는 안락의자에 여자아이를 눕혔다. 여자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고 팔을 긁어줬다. “이거는 아스파라거스, 이거는 제라늄이야.” 로라는 자장가 소리를 듣고 진정된 아이들에게 찬찬히 온실 속의 식물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열대식물 피라켄사스, 영춘화, 히어리,” 로라가 이름을 댈 때마다 아이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게 뭐라고요?” 아이들은 온실식물원이 더워서 그런지 식물 이름을 금방 까먹었다. 흥미를 잃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준다고 로라의 카메라를 뺏었다. 그리곤 로라를 선인장이 전시된 화단 쪽으로 몰았다. 뒷걸음을 치던 로라는 노란 선인장 화분 위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선인장은 로라의 엉덩이에 내리눌려 약간 납작해졌다. 로라는 바닥에 팔꿈치를 짚고 엉덩이를 든 채 선인장 뒤로 물러나다가 허벅지에 선인장 가시가 박히고 말았다. 로라는 허벅지가 따가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찰칵 눌렀다. 로라의 스팽글이 달린 노란색 세타만 디지털카메라에 찍혔다. 로라는 몸통이 잘린 사진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저장버튼을 눌렀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로라는 아이들을 부추겼다. 아이들의 마음은 풍선처럼 방방 더 부풀어 올랐다. 커다란 잔디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잔디나무는 살아있는 식물 같지 않았다. 잔디나무는 온실 속의 허수아비 같았다. 아이들은 잔디나무 위에 올라가고 싶어 했다. 잔디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온실 천장으로 팔을 뻗어 그 안에 갇힌 하늘을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똑, 똑, 똑, 똑, 물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은 떨어져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물방울 같았다. 하늘은 더 멀어졌다. 하얀 물방울무늬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물방울을 잡으려 바닥 물웅덩이 주위를 살랑살랑 뛰어다녔다. 머리를 한줌 뒤로 묶은 분홍색 리본이 옆머리와 함께 나풀거렸다. 여자 아이는 물방울을 집어서 꽃잎과 풀잎, 줄기 위에 놓았다. 아이가 손을 펴고 가만히 꽃잎 위에 얹고 있으니까 물방울이 점점 커졌다. 여자아이는 물방울 한 개를 집어 올려 공중에 날려 보냈다. 그리곤 다시 풀잎 위에 손을 펴서 올렸다. 물방울이 송송 일어나더니 점점 커졌다. 여자아이는 손으로 물방울을 잘도 집었다. 물방울로 떨어진 아이들은 바다가 되었다. 파란 바다 위에 하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마도로스 모자를 쓴 남자가 뱃머리에 서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남자의 줄무늬 옷은 무척 가벼워 바다 위에 언제나 떠있을 것 같았다. 로라는 풀어진 여자아이의 샌들 끈을 묶어줬다. * 여름을 위한 마지막 게시판은 해바라기 꽃밭이 있는 바닷가 그림이었다. 파란 하늘 위에 하얀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낮게 떠 있고 햇빛이 해변에 가득했다. 해변에는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의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어깨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말구유에 물을 받아 아이를 목욕시키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높이 날고 있는 갈매기, 해는 수평선 너머까지 반짝이는 날개를 뻗쳤다. 바다와 모래와 아이들과 해가 있었다. 로라는 공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료 교사나 학교장, 누구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게시판이 처한 곤혹스러운 문제가 뭔지 말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아이들은 모래사장 위에서 공놀이 하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공은 해를 닮았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빠질 수 없죠. 공이 없으니 어떤 아이는 슬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저 말구유는 뭔가요?” 아무리 그래도 로라는 아이의 슬픔을 그릴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공이 없지만 슬퍼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말구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러고 있는데 로라의 거미줄 같은 머리칼이 모래 바람에 날렸다. 아이들은 여전히 모래사장에서 튜브를 마음대로 굴리고 날리며 뛰어다녔다. 로라는 튜브10개를 일렬횡대로 정렬했다. 아이들은 그제야 진정이 됐다. 모래사장에서 숨은 조개를 찾아내기도 하고 갈매기가 줄지어 따라가는 고기잡이배도 그렸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아이가 해를 발로 찼다. 해는 공처럼 느리게 곡선을 그리며 붕 떠오르더니 반대편 아이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발끝으로 모래사장에 자국을 움푹 남기면서 해를 또 찼다. 해는 또 튀어 오르면서 처음 있던 자리로 날아갔다. 로라는 바닷가의 아이들을 뒤로 하고 해바라기 꽃밭 속으로 들어갔다. 해바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해바라기는 게시판을 벗어나 천장까지 뒤덮었다. 해바라기는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로라는 계속 걸어 나갔다. 해바라기 꽃들 사이로 사람들이 한 명씩 나타났다. 로라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로라는 곧 다시 게시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약력 2003년 시 「 마른 꽃」으로, 2006년《월간문학》에서 단편소설 「 꽃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단편소설「끝나지 않는, 녹슨」으로 5.18문학상을 수상했고, 교보 <퍼플>에서 장편소설《지하철 아이》, 소설집 《끝나지 않는, 녹슨》과 《재》, 《로라의 게시판》, 《배달구역》을 비롯하여, 장편동화 <엄마의 달>, 제 1시집 <늪의 방식>과 함께 십여 권의 시집을 전자책으로 냈다.  
492 어떤 동행 외1편/김재수 file
편집자
2048 2016-07-31
16.08.75호 수필 어떤 동행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리저리 먼지도 흩날렸습니다. 날씨 때문인지 거리엔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오전 11시. 상주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작은 가게에 문이 열리고 휠체어 하나가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휠체어를 탄 70대 할머니는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썼습니다. 창백한 얼굴만큼이나 하얀 마스크가 안쓰러웠지만 목에 두른 분홍색 스카프가 하얀 마스크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은색 머리칼이 중절모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웃의 말을 종합해 보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정해진 골목을 한 바퀴 도는 듯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복장은 달라지지만 두 내외분의 외출은 어김이 없는 듯 했습니다. 첨에는 대수롭잖게 지나쳤지만 한결같은 이 동행에 때론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날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분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할머니는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란 것뿐입니다. 할머니는 건강이 많이 나쁜 때문인지 퍽 신경질적이었습니다. 가끔 날카로운 목소리로 휠체어를 미는 할아버지에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퍼붓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한결 같았습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나 원망쯤은 이미 바람에 날려 버린 지 오래인 듯 얼굴엔 언제나 넉넉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중에서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이 있지요. 부모님과 스승과의 만남,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부부의 만남입니다. 첫 번째의 만남은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둘째와 셋째는 어느 정도 선택이 가능하다지만 어쩌던 이 세 만남을 우리는 운명적이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정을 설계하는 부부로의 만남이야 말로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두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자녀라는 또 다른 공동운명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남이 만나 새로운 가족으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이해와 신뢰 그리고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오래 반려자로서 함께 해야 한다는 일입니다. 세월이 변하여 이혼율이 증가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결손가정이 늘어나고 그것도 모자라 황혼이혼이란 새로운 용어까지 등장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가정은 제 자리를 지키며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기에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고 있음입니다. 노부부의 휠체어가 바람이 부는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두 내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는 여니 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휠체어를 밀고 갑니다. 나는 일부러 두 분이 다음 골목으로 꺾어 돌아가실 때까지 한 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불편하시지만 두 내외분이 오래 오래 행복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말입니다. 허허허. 장판각의 ‘마구리’ 한국국학진흥원 가는 길에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전통문화 중 유교문화의 다양한 자료와 풍부한 볼거리를 전시, 보관하는 여긴 민족문화의 산실 같은 곳입니다. 더욱 이곳 장판각은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진수인 전통 목판과 현판을 기증 또는 위탁받아 보관하는 곳으로 현재 약 7만장, 앞으로 10만장이 넘게 수집하여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등록 하려는 야심찬 꿈을 지닌 공간입니다. 장판각에 들어가자 빼곡히 쌓여 있는 목판(책판冊版, 현판懸板, 도판(圖板), 서판(書板), 기판(記板), 능화판(菱華板)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향(墨香)에 취해나도 모르게 수 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습니다. 담당자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웬일인지 글자가 새겨진 판목보다는 판목의 양쪽을 막고 있는 ‘마구리’쪽에 내 관심이 쏠렸습니다. 마구리란 ‘길쭉한 물건의 끝 쪽 머리에 대는 물건’을 말하는데, 대부분 마구리는 말끔하게 마무리 되지 않고 투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마구리의 역할은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목판을 손쉽게 들 만질 수 있는 역할, 목판과 목판이 맞부딪힐 때 판면의 손상 방지, 목판과 목판 사이의 원할 한 통풍, 이로 인한 변질, 뒤틀림, 트임 방지, 그리고 목판을 진열 보관했을 때 책의 제목, 권차(卷次-책의 해당 권수), 장차(張次-책의 쪽수)등을 마구리에 표시합니다. 마치 도서관의 분류기호처럼 판각의 내용을 찾기 쉽게 말입니다. 판목은 주로 단풍나무, 가래나무, 산벚나무, 박달나무, 감나무, 고로쇠나무와 같은 중경질의 재료를 활용했지만 마구리는 흔한 소나무입니다. 하지만 쓰임에는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목판에서도 판면에 새겨진 각자(刻字)가 주인공이라면 이 외에 미비(眉批-별도의 주석부분), 광곽(匡郭-판면을 구성하는 외곽 테두리부분), 묵계자(墨罊子-인용되는 책이나 주석가의 이름처럼 특별히 표기할 사항의 음각처리부분), 계선(界線-본문의 각 줄 사이의 경계선), 판심(版心-목판의 중심부), 권차, 장차, 와 같은 것은 조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 보존, 관리하는 일은 바로 하찮은 이름을 가진 마구리의 몫이었습니다. 장판각을 나오면서 생각이 깊어 졌습니다. 내 삶의 부분 부분에 마구리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정말 해야 할 일에 머뭇거리거나 소홀하지나 않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산 아래, 저만치 내려앉은 안동호에서 한 무리의 물안개가 국학진흥원 솔숲을 지나 내 가슴 속으로 환상처럼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491 안계들판 외 1편/박승민 file
편집자
2524 2016-07-31
16.08.75호 시 안계들판 벼들이 해가 지는 쪽으로 일제히 눈을 맞춘다 고개를 숙이고 숙여서 자신을 바닥의 눈금 쪽에다 눕힌다 수만 개의 삼베두건이 무한 경배로 일렁이는 시간 살아 있는 몸들은 다 자란 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누군가를 베어 먹은 피 묻은 입조차 막판에는 또 어디로 가는가 지나온 몸의 시간을 묵주처럼 한 알씩 복기하는 자 혹은 최후를 수긍할 수 없어서 고개를 처든 자 기어코 자신을 옭아맨 결가부좌를 끝까지 풀지 않는 저 한 톨의 외로움까지! 벼들이 해가 뜨는 쪽으로 서서히 입을 맞춘다 고개를 숙이고 숙여서 마지막 발바닥에도 조금씩 물기를 뺀다 멀리서 전조등을 켠 콤바인이 어둠의 새벽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바퀴를 굴린다 불 앙코르와트의 관음보살이 야자나무 상공에서 입술을 다복이 물고 구름웃음 삼매경이다. 크메르인 소녀가 마른 뼈를 흔들며 원 달러! 원 달러! 먹지 같은 손바닥을 펴 보인다. 바닥이 생활밑천인 그 애의 흑단 눈망울이 내 주머니 속의 원 달러를 불경佛經인양 간절하게 읊고 있다. 두 손을 모은 저 애절함이 불佛에서 불弗로 개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가이드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고무나무에서 생고무 타는 냄새가 익어가는 저녁, 구부러진 뒷발 하나가 건기의 붉은 흙먼지 속을 파리처럼 날아서 또 다른 불에 옮겨 붙는다. 박승민 경북 영주출생.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가 있음. 제2회 <박영근작품상> 제19회 <가톨릭문학상신인상> 수상 메일주소 84bluee@hanmail.net  
490 얼룩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2563 2016-07-31
16.08.75호 시 얼룩 땡볕 그림자에 떠밀려 기우뚱거렸지만 우리 얼마나 밑바닥에 서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2년 시한부계약 시퍼런 서슬아래 코피 터지도록 바짝 엎드려 정규직으로 가는 길, 해피데이를 꿈꾸었지만 오늘도 지상의 정점에는 탈락된 목구멍들 아득히 정체 중 세 번을 갈아타야 지상에 오를 수 있는 지하철 수성구청역 에스컬레이트 다시, 고용승계 애원하듯 츠륵, 츠르륵 마지막계단 톱니 꽉 물고 설핏 비켜가는 정오의 심장에 쿡, 발자국 찍어보는 저 청년의 등짝 아직 때 아니라고 단풍도 낙엽도 되지못한 중국단풍 가지 사이로 얼룩얼룩 표류하는 섬 하나, 우산 나만 모르고 누군가의 가슴 속 까지 흠뻑 적셔버린 장대비가 된 적은 없었는가 비 그친 하늘에 대고 우산 펼쳐 말리며 드는 생각 비를 피하려 펼쳐 든 내 우산에 내가 흠뻑 젖은 적도 있었던가 젖었다 마르고 마르면 다시 젖게 하는 세상이 다 아는 순리 나만 여태 몰랐으니 약력; 경북 군위 출생 2001년<사람의 문학> 등단, 현재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489 신 황야의 무법자 외1편/김성찬 imagefile
편집자
2891 2016-07-31
16.08.75호 시 신 황야의 무법자 1 무력武歷 1961년 야음을 틈타 결사대 30명을 이끌고 지존의 거처를 급습하 여 문관들을 몰아내고 옥좌를 찬탈한 독심대제 망박은 제위 18년 동안 무자비 한 탄압과 양심적인 무림 고수들에게 철편을 날려 중원을 피바다 아귀바다 지 옥 십자관으로 만들었다 자신도 암기를 가진 자객들에게 당할까 은밀하게 사병 을 키워 안위를 도모 하였으나 호위 정보장 도청총마 규재가 돌연 민주 무림 만 세! 독제타도!를 외치며 독심대제 망박의 심장에 단검을 꼿았다 밤마다 주지육림 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꿈꾸던 종신 지존의 과욕은 결국 화를 불러온 것이다 암 살은 측근에게 당한다는 중원의 정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독심대제 망박이 척살된지 어연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딸 녹부용 혜근은 은연 자중 절치부심 마침내 몽유도원속이고비각법 필살기를 독파하여 단기필마로 광 야 저편에서 홀연히 나타나 누리당파 고수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권좌를 탈환 하 였다 전 무림은 몽유도원속이고각법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옥좌에 오르던 그날 무 협 신문들은 무림에 다시 없을 천통공감 무림 고수로 도약한 강자 중 강자인 녹부용에게 중원의 모든 영광 있으시라 천제 맏딸의 강림이다 대를 이어 충성하자 타는 이 한 목숨 녹부용 혜근 미륵에게 바치자 미사여구를 총동원 해 아첨의 극치를 보이며 1면 대문에 내걸었다 강자존 약자멸 2 봄날 나른한 햇살이 비추는 청마대에서 녹부용은 측근들과 추억 의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를 시청했다 비서관에게 주연 배우 이름 을 물었다 비서관이 머뭇거리자 녹부용은 한심 하다는 듯이 쳐다 보더니 카크다글라스 라고 했다 이에 수하들 모두가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로 지존에게 경의를 표했다 무식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 은 계속 되었다 녹부용의 치마폭 안에서 복지부동하던 모 기획관 이 민초들은 개 돼지 처럼 먹을 것만 제때에 주면 된다는 망언과 녹부용의 오른 팔 형조 판서장 관심독괴 경준이 무림 거부를 겁박 하여 금화 12억냥을 갈취 하는 비리가 밝혀지자 녹부용은 쏟아질 비난의 화살을 피해 여름 휴가를 앞당겨 사대부 나라 큰집으로 날 랐다. 일부 추종 세력들은 관심법까지 독파한 녹부용의 높은 무공 에 감탄 하였다 옴마나 반메홈! 옴마나 반메홈! 미륵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암송하며 세상 끝날에 와서 불국토를 구현 할 도솔천의 미륵임을 거품 물고 외쳤으나 대다수 민초들은 녹부용 혜 근의 사악한 주술에 분노해 옷섶을 찢고 땅을 치며 비분강개 했다 강자존 약자멸 정글의 법칙을 반성하는 무림의 신문들은 한 목소리로 기사를 대서특필 내보내며 아버지 망박의 꼼수를 믹서 해서 만들어낸 몽유도원속이고각법 으로 지존에 오른 녹부용 혜근에게 바친 충성서약 무효를 선언 했다 무림 헌법 제 1조 2항 주권은 민초들에게 있다 무림 헌법 제 1조 3항 권력은 민초에게서 나온다 현수막 앞에 모인 중원 각지에서 온 무림 고수들은 2017년 지존 뽑기 대 회에서 누리파의 얼굴 마담 녹부용 혜근 같은 무식한 지존을 찍어내서는 않된다는 결의를 다지며 황야의 무법자를 힘차게 가열차게 불러제끼던 武歷무력 2016년 7월 어느 날이었다 요즘 트위터 페이스북 더보기 싸이월드 미투데이 --> 봉숭아 꽃 전설 페러디 봉숭이 / 김성찬 옛날 옛적 어느 고을에 어릴 적 부모 여읜 봉숭이라는 처녀가 가야금을 잘 탄다는 입소문이 귀에서 귀로 전해져 대궐까지 흘 러들어 갔단다 임금님이 보내준 황금마차를 타고 대궐로 불려 간 봉숭이는 임금님의 정원 후박나무 아래에서 가야금 뜯으며 옥구슬 굴러가는 천상의 화음으로 임금님을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뜨렸단다. 대궐에서 돌아온 봉숭이는 그만 몸져 누웠더란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음계가 깔아준 주단 길 따라 봉숭이 집 으로 행차 하자 병석에서 일어나 가야금을 뜯던 봉숭이 열손가락에 피가 맺혔더란다 임금님은 모시 천에 백반을 얹어 피 맺힌 열 손가 락 마디 마다 일일이 싸매주고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땀방울까지 닦 아 주고 대궐로 돌아갔더란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건네주던 첫 정이었지만 날 때 부터 미리 정 해진 신분은 거스르지 못 할 운명이였단다 봉숭이는 대궐 향해 북향 삼배를 올린 후 은장도로 자신의 심장을 깊숙히 찔러 시대의 아픔을 안고 홀연히 떠났다는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옛적 이승에서 맺지 못 한 봉숭이의 슬픈 사랑 이야기란다 59 대구 출생 93 심상 2회 추천완료 2012 시집 파란 스웨터 출간  
488 도라지꽃 외1편/권숙월 file
편집자
2821 2016-07-31
16.08.75호 시 도라지꽃 값나가는 화장품은 그림의 떡 동동구리무 바르고도 사랑을 속삭였다 분 바르고 연지 바르면 족두리도 쓸 수 있었다 딸이 사준 화장품도 못다 쓰는 누나들 찾는 눈 별로 없는 꽃으로 피었다 흰색은 흰색끼리 보라색은 보라색끼리 끼리끼리 피면 도라지꽃이 아니지 네 편 내 편 가르는 일 없이 한데 어우러져 향기로운 나날 꿈꾸며 목 타는 가뭄에도 이슬 나누는 꽃으로 피었다 모자란다는 말 좀 모자란다는 말이 돌았을까 손위 처남 결혼 전날, 잔치 준비로 바쁜 동네 사람들 다 듣는 데서 어느 이웃이 사위 안 모자란다고 한턱내야겠다고 장모님 귀에 속삭였다 말의 진원을 밝히지 않은데다 오래된 일이라 다 잊었겠지만 딸 시집 보내놓고 베갯잇 적신 밤 수없이 많았으리 그런데도 장모님 마음 풀어줄 시 한 편 쓰지 못한 것 보면 모자란다는 말은 한턱내서 묻힐 일이 아닌 것 같다 약력: 1979년 『시문학』통해 문단에 나와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김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며 김천문화원과 백수문학관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시집 『하늘 입』 『가둔 말』 『새로 읽은 달』등 12권을 상재했으며 시문학상, 경북도문화상, 경북예술상, 김천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487 춘향이의 입덧 외1편/권천학 file
편집자
5067 2016-07-31
16.08.75호 시 춘향이의 입덧 -춘향 2 이게 꿈은 아니겠지? 향단아 간밤에 불불새 한 마리 품안으로 날아들어 둥지를 틀더니만 그 고운 깃 속에 알을 품더구나 산그늘에 젖는 언덕배기 휜 길 소나무 숲에 지는 석양을 걷어내며 히끗 히끗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더라고?! 정녕 아카시아 꽃은 아니겠지, 향단아 쑥대머리 꺾어 젖히며 풀어놓는 동편제 한 가닥 바람결에 들리더란 그 말 그만두자꾸나! 황사바람 저 켠에 더디 오는 봄 진저리쳐 지는 꽃 피고 있을 테니 그만 두자꾸나 향단아 꽃 진 자리마다 이글거리는 입덧 맺힌 열매 영글리는 여름 오고야 말테니 아니리 춘향가 -춘향 3 소문이란 본시 믿을 게 못 되는 것 어둡고 때 낀 과거를 지울 수 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해서, 각색하여 퍼트린 자전적(自傳的)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줄이야. 요새 같으면 저작권 수입만으로도 짭짤할 텐데…… 하여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에 방울을 달고…… 내 친구 애랑이 고 기집애 장난기가 좀 심해서 탈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교 있어 그 바닥에서 주가 올리다가 얼굴값 하느라고 <베비장전> 주연자리 따내어 영화판에 나서더니 요샌 국제영화제 진출을 노린다하고 천박하고 약아빠져 하는 일마다 눈총 받는 일만 골라하던 밉살댕이 추월이 고년은 눈총? 흥! 콧방귀로 밀어붙이고 화냥기 밑천 삼아 희번득 요사부리며 열쇠고리 쩔렁이더니 제 버릇 개 줄 리 없다고 요샛날 영동으로 옮겨 앉아서도 생긴대로 놀면서 그저 수표에 박힌 동그라미 숫자만 꿰어내느라 눈알이 시뻘겋다니 쯧쯧, 혹시 히로뽕은 안 쓰는지 몰라 아무리 그렇고 그런 판이라 해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야 하거늘 이그! 정나미 떨어져 머리에 든 게 많아 제법 고상하게 놀던 황진이 가슴 또한 유난히 깊어 보기 드문 멋쟁이 지성인이 됐지 걘, 가야금 잘 타던 솜씨로 사내 어우러 타는 솜씨 또한 뛰어나나 송곳 같은 정에 약한 것이 흠이 되어 못 견뎌 지는 마음 원고지 칸 칸마다 꼭꼭 쟁이더니 나와는 노는 판이 달라 얄밉긴 하지만 지금도 이불 속으로 시냇물 소리 끌어들여 밤허리 적시고 가야금 줄마다 문장 풀어 얽어매고……. 가끔씩 시 낭송에도 불려 다닌다지 아마 또 있지 빠트려선 안 될 내 친구 요절해서 가슴 아프게 한 논개년말야 하기사, 가끔 보면 일찍 죽어 빛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더라만 사주마다 개가 끼어 어려서부터 개라 불리더니 끝내는 웬수같은 왜장 새끼 물어뜯고야 말았으니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 내 친구 중에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그깟 죽고 사는 게 어디 대순가 요샛날 살아서도 죽은 목숨으로 뵈는 개뼈다귀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죽어서도 살아있는 논개가 개 같은 세상에 사람 같은 사람이지 남 얘기 해 놓고 내 얘기 안 할 수 없어 털어놓는 얘기지만 나 춘향이는 내세울 게 하나 없는 얼치기 반쪽 양반으로 태어날 때부터 한이더니 불우한 어린 시절 맺힌 설움만으로도 한 짐인데 출신성분 독하게 따지는 세상에서 내림기생이라니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 어둡고 때 낀 세월을 지울 수 만 있다면 조상 묘자린들 못 팔아먹을 까 남 설움에 내 설움 실어 우는 사람 마음 다 한 가지로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한 마디로 내 출세는 덩달아 춤추는 세상 덕이 반이고 나머지 반의반은 터트려 준 매스컴 덕, 터졌다 하면 와 몰리는 무리들 곧잘 따라 웃고 따라 우는 순진한 사람들 애간장 노려 도화선에 불붙이듯 살짝 건드려 준 것뿐인데 꼬리에 꼬리에 거품을 물고, 꼬리에 꼬리에 바퀴를 달고…… 시끌벅적한 세상 정치 문제 노사문제 게다가 교원노조까지 들어 가뜩이나 지친 사람들에게 달짝지근한 연애얘기에 눈물 살짝 발랐지 뭐 친정식구 같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본디 찬스 포착에 강하고 연극에도 소질 있던 나 춘향이 아닌가 속으로 칼 갈며 때만 노리던 터에 운 좋게도 꽃다운 나이 때맞추어 바람기 있는 미스터 리를 만났으니 그 또한 왔다였지, 솔직히 말해서 출세 싫은 사람 있을까, 속보이는 소리 그만들 하라고 혀 적당히 주무르고 삶아서 신분조장부터 받아놓고 그네 줄 밀고 당기듯 사내 속 녹여내는 연출에 열정을 다 쏟아 열녀라는 덧 이름까지 이력서에 새겨 넣었으니 그게 다 속 두고 한 짓이라, 은근 슬쩍 미스터 리 뒷대 눌러가며 받아둔 문서 덕으로 일테면 난 기상출신 VIP가 된 셈이지, 이만하면 나도 이 바닥에서 썩긴 아까운 인물이라 요즘 것들은 몰라 눈에 뵈는 것밖에 젊은 날의 모험적인 활약으로 지금은 제법 그럴 듯한 네임벨류 지니고 살면서 한 자리 하고 있는 내 남편 이 서방에 걸 맞추느라 여가선용 삼아 사회활동도 적당히 하는데 그 중에 지난날의 행적이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받아 여권협회에도 고문 격으로 앉아서 간간이 신문에 얼굴도 내밀고 남편의 내조도 반들반들 해내는 데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이라 살기 이만 허니 아무도 모르는 야무진 꿈 또 하나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말하기 좀 곤란해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그깟 베스트셀러 작가로 머물 순 없고 내 친정 식구 같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말야 저어……. 거시기……. 있잖아……, 하여튼 말야 내 실력쯤이면 누구처럼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서 감당 못 할 만큼 저질러놓지도 않고 촉새 마냥 낄 데 안 낄 데 마구 끼어 드러나게 미움을 사지도 않을 것이며 적당히 품위 유지해 가며 아니 기가 막히게 날 한번 해 볼 텐데, 끝내 주게 잘 해서 요게 진짜 <춘향전> 주인공이다 하고 꽝 터트릴 텐데…… 춘란(春蘭) 향기 한번 기차게 뿜어볼 텐데…… 현대문학데뷔,개인시집12권,영한시집2권,일어시집1권,하버드대학번역상우승,코리아타님즈시부문우승,WIN’s Award 2015 수상,국제PEN,한국시협,세계시조시인포럼 등 멤버, impoet@hanmail.net  
486 生命 외1편/임연규 file
편집자
2517 2016-07-31
16.08.75호 시 生命 책 덮고 새벽 마당을 나서니/ 어둠 속에 풍경 소리만 살아서 스란하다/ 한순간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길을 만들지 않는 바람뿐이리. /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주고/ 우리는 큰 사랑이라고 / 누가 왜? 라서 아니라/ 항상 우리가 왜 아니었을까/ 나무와 풍경에게 수작을 거는/ 무심한 바람처럼./ 무덤 고향집 마당에 쌓이는 / 무심한 고봉 볕을 내려다보며/ 동산에 부모님 무덤/ 장맛비 지나는 틈에/ 악착같이 키를 키우는 무덤의 잡초를 뽑으며/ 무심히/ ‘무덤’이란 말이 좋다/ 살아남은 자가 마지막으로 마련해 둔/ 기억의 집/ 소소하게 흐르는 생을 더듬어/ 시나브로 하나의 풍경으로/ 내 발목이 잡히는/ ‘무덤’이란 / 말이 깊다./ * 충북 괴산 출생 시집 ) 제비는 산으로 깃들지 않는다/ 꽃을 보고 가시게/ 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노을치마( 2016년 9월 출간 예정  
485 포옹 외1편(동시)/ 박 정 우 file
편집자
2754 2016-07-31
16.08.75호 시 포옹 용서해 달라 말할까 아니야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잘못 꿇어앉아 빌어 볼까 그것도 아니야 그동안 참 많이 아팠지 그래 무척 슬펐지 살며시 다가가 부둥켜안고 등 두드리며 놓아 보는 징검다리. 우린 매일 서로 하늘만 쳐다보며 뽀글뽀글 속앓이만 했지 내가 먼저 얄팍한 자존심 버리고 네가 먼저 엇갈린 생각 버리고 우리 사이 생김새가 뭐 그리 중요 하겠나 가난과 부자 사이 차림새가 뭐 그리 대단 하겠나 잘못했다 말하지 마 다만 살며시 다가가 너를 꼭 껴안고 싶다. 아가 얼굴 울퉁불퉁 돌담이 빈집을 지키는 산마을 유모차 안에 딸랑딸랑 딸랑이 낮 바람을 두드립니다. 엄마가 뽀뽀하면 아가 눈이 반짝반짝 아가가 뽀뽀하면 엄마 꿈이 뭉글뭉글 해 저문 마당에 들에 가신 아빠를 반기는 툇마루 돗자리 위에 초롱초롱 눈망울 어둔 저녁 밝힙니다. 아빠가 응얼이면 아가 얼굴 달이 되고 아가가 응얼이면 아빠 얼굴 별이 되고 <약 력> • 1993년「아동문예 문학상』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 경북아동문학, 한국문인협회상주지부 및 상주아동 문학회, 한국아동문예작가회, 오늘의 동시문학, 한국동시문학회, 한국아동문학인협 회 회원 • 경상북도글짓기교과연구회 회장, 한국문인협회상주지부회장 엮임 • 동시집『사계절의 합창』 • 수상『세계동시문학상』  
484 붉은 바다거북의 꿈 외1편/권현수 file
편집자
2651 2016-07-31
16.08.75호 시 붉은 바다거북의 꿈 내가 바다거북이었던 한 生이 있었네 방금 태어나 미처 다 붉히지 못한 붉은 바다거북이었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바다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험한 모래벌판을 벌벌벌 기어가고 있었네 채 여물지 못한 뱃살이 터지고 짧은 네다리 뼈마디가 물러 내리고 있었네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저 바다로 어서 가자 부르는 소리는 내 귓가에 난장을 치는데 참수리 수십 마리 하늘을 가리며 나를 노리고 있었네 갈고리 같은 저 발톱보다 당연히 내가 먼저 저 바다를 보아야 하였네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저 바다로 어서 가자 그러나 나는 결국 그 바다를 보지 못하였네 참수리 놈의 발톱이 기어코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네 붉게 핏발 선 내 뱃살이 제법쓰린 날 새벽 꿈이었네. 외나무 다리에서 -조주, 아홉 번째 질문 목줄 풀린 강아지가 토끼풀꽃 대궁이 속으로 킁킁킁킁 코를 박는 저물녘 노랑나비 한 마리는 민들레 이파리 위에서 팔랑팔랑 부채질 하는 풀섶이다 말을 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려는 사람 하나 지나가는 외딴 길 권현수시인 2003년 [불교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칼라차크라] [고비사막 은하수] hyonsue7@hanmail.net  
483 골든크러쉬호 /최형심 file
편집자
2166 2016-06-30
16.07월 74호 소설 골든크러쉬호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은 귀신에 홀린 듯 그 뉴스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21세기에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바다에 떠있던 배가 하늘로 증발을 했겠어, 땅으로 꺼졌겠어?” 뉴스를 들은 이들은 어이없어 했다. 조사를 맡은 다국적 팀은 몹시 불편한 얼굴로 배가 문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조사를 맡은 다국적팀의 무능함을 탓하며 혀를 끌끌 찼다. 한동안 뉴스를 장식하던 배의 행방은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질 즈음 멕시코의 어느 작은 해안에서 놀던 소년들이 유리병 하나를 발견했다. 유리병 속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소년들은 낯선 문자로 적힌 편지와 유리병을 방송국으로 가져갔다. 그 보잘 것 없는 유리병에 관심을 보인 것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그리스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였다. 뉴스에서 그 편지를 본 그는 당장 멕시코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는 공항에서 밤을 샜는지 지저분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기적이 일어나 이 편지가 내가 살던 곳에 도착한다면 부디 혼자 남은 우리 어머니에게 제가 이곳에 남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해주세요. 그것도 죽은 누나와 함께.” 편지는 그렇게 첫 부분을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토록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그리스 고전문헌은 없었어!”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단숨에 그러나 아주 집중해서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내가 겪은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아마도 누군가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모든 엄청난 일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법이다. 그날 바다는 아주 잔잔했다. 그게 앞으로 닥쳐올 폭풍 같은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다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초여름 특유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스모그인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안개만 아니라면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초호화 크루즈선 골든크러쉬호는 인천항에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댄스팀은 골든크러쉬호 승선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좀 일찍 항구에 도착해 승선을 기다렸다. 수영장과 카지노, 파티홀 그리고 최고급 레스토랑을 갖추고 있는 골든크러쉬호는 여느 다른 호화 크루즈선과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 도색했는지 유난히 하얗게 빛나 보이는 외관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이 일을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크루즈선에서 공연을 했다. 보통 보름이나 길어도 한 달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승선은 두 달 예정으로 꽤 길었다. 배는 인천항을 출발해서 태평양을 건너 카리브 해에서 잠시 머물다 유럽으로 향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다른 두 명의 무용수들과 같은 방을 쓰도록 배정받았다. 그들은 다른 공연팀의 러시아출신의 무희들이었는데 둘 다 머리를 밝은 금발로 염색했다. 그들도 나도 영어가 서툴렀으므로 우리는 이야기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다행이었다. 오키나와에 며칠 머문 것을 제외하고 육지를 본 기억이 없었다. 얼음판처럼 잔잔한 바다 위를 골든크러쉬호는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그날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면 나는 무대복을 벗지도 않고 가운만 걸친 채 갑판으로 나오곤 했다. “바다 한번 더럽게 평화롭네.” 땀에 젖은 남자의 이마 위에 머리카락들이 어지럽게 엉겨붙어있었다. 그는 일식집에서 채소를 다듬거나 설거지를 하는 주방보조였다. 남자는 언제나 갑판에 나와 혼자 담배를 피웠다. 그는 마치 곁에 누군가 함께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곤 했다. “진짜 이상해. 뭔 놈의 바다가 이렇게 잔잔하지?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하단 말이야. 안 그래?” 아무리 큰 배가 작은 배보다 흔들림이 적다지만 남자의 말처럼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물 위가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것처럼 아무런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다는 마치 본능을 상실한 짐승 같았다. 바다 위에서 며칠이 더 흘렀다. 우리는 적도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달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별들은 점점 선명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파도는 여전히 잔잔했다. 밤마다 파티가 벌어졌고 사방에 술과 음식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열기에 들떠있었다.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하얀 셔츠 위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들, 샴페인의 거품이 눈 덮인 성 같은 골든크러쉬호의 밤을 채웠다. 나는 반라의 몸으로 밤마다 춤을 추었다. 우리 팀의 공연은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다음번에도 골든크러쉬호와 계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단장은 흥분해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바다가 유리판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날은 공연을 마치자마자 대충 메이크업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여느 때처럼 갑판으로 나갔다. 땀에 젖은 몸이 바닷바람과 만났다. 무대 위에서의 긴장과 흥분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목을 뒤로 젖혔다.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한껏 팽팽해진 목덜미에서 목젖이 꿈틀거렸다. 나는 갑작스런 이물감에 치를 떨며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애써 잊은 기억들이 스물 스물 목젖을 타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빨리! 빨리 좀 와보라고!” 내 앞으로 갑자기 선원 하나가 무전기를 든 채 심각한 얼굴로 지나갔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기대 바다를 살피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야. 지금 물이 빠지고 있다니까!” 나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주춤했다. 막 머리 위에서 자정을 알리는 폭죽이 밤하늘로 퍼지고 있을 때였다. “지겹지도 않은가?” 머리가 하얀 노인 하나가 폭죽 터지는 소리에 귀를 막았다. 그는 늘 무료한 얼굴로 타인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배가 멈췄어!” 스시집 보조가 여느 때처럼 담배에 불을 붙이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처럼 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잔잔한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웅웅웅 배경음악처럼 깔리던 엔진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파티복 차림의 사람들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갑판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팔목까지 셔츠를 걷어 올린 남자 하나가 바쁘게 지나가는 직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무슨 일인지 좀 알아야겠어요. 대체 왜 오밤중에 잘 가던 배가 멈춘 거요?” “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닷물이 빠지고 있어요. 물이 너무 얕아져서 배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말이 돼? 여기는 태평양 한가운데라고! 못해도 수심이 수천 미터는 될 것 같은데……. 근처에 섬이나 육지가 있어서 수심이 얕아진 것도 아닌데, 배가 다닐 수 없을 만큼 물이 빠지다니 누가 그걸 믿겠어? 설마 길을 잃은 거 아냐? 아니면 암초에 걸린 걸 속이고 있는 거 아냐?” “항로를 이탈한 건 절대로 아니고요, 암초는 더더욱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엄청난 속도로 바닷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저희도 지금 원인을 알아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직원은 애써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과 짜증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원은 달아나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바다 쪽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밑을 바라보았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살을 가르던 배는 조용한 섬처럼 멈춰서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이 갑자기 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선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팟, 소리를 내며 배의 전원이 한꺼번에 꺼졌다. 어둠에 덮인 밤바다 위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불 꺼진 크루즈선 위에서 유난히 붉은 달이 빛을 뿜고 있었다. 바다의 수위는 소리도 없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물에 잠겨있어야 할 부분이 조금씩 드러났다. 전기가 나가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나왔다. “저기! 저기 뭔가 보여요!” 갑판으로 몰려온 사람 중 하나가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물 위로 몇 개의 기둥이 달빛을 받아 흐릿한 윤곽을 드러나고 있었다. 바닷물의 수위는 점점 낮아졌다. 파도도 바람도 없었다. 누가 지구에 구멍이라도 냈는지 불과 반시간정도 사이에 바다 한가운데 있는 기둥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났다. “저건 배 같은데…….” 난간에 기대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스시집 보조가 입을 열었다. 달빛 아래 돛대가 드러났다. 이어 갑판 위에서 찰랑거리던 바닷물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물이 빠르게 빠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물이 빠지고 난 갑판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거무죽죽하게 보이던 배가 갑자기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돛대에도 선체에도 파리한 윤기가 돌았다. “무슨 그리스시대 배 같아.” “혹시 보물을 잔뜩 싣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가라앉은 게 아닐까?” “소설 쓰지 마. 지금 저게 뭔 줄 알고?” 초조하게 갑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수위는 점점 더 내려갔다. “이러다 바닷물이 다 증발하는 거 아냐?” 스시집 보조가 웬일로 담배 피기를 멈추고 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어? 이제 물 빠지는 게 멈춘 것 같은데.” 묵묵하게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던 노인이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아래로 아래로 낮아지기만 하던 수위는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단순한 기상이변이거나 어쩌면 달의 인력이 유난히 강해지는 지점에 우리가 와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라도 구명정을 펼 수 있도록 만반의 사태를 갖추고 있었다. 물 빠져나가는 속도가 줄어든 것을 느끼자 다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술렁이던 갑판이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맞은 편 배가 순식간에 환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손등을 꼬집었다. 물에 젖어 우중충하던 배는 어느새 상아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기, 저기…… 사람이 있어요.” 구명정 곁을 지키고 있던 선원 하나가 그리스 배의 갑판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뭐야? 유령선 아냐?” 상아빛 배 위로 횃불이 하나씩 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아마포 옷을 입은 소년들이 잰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곧 아마포 옷을 입은 소년들이 작은 배를 바다에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검은 바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았다. 육지라면 어디로라도 달아날 수 있었다. 아무리 물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였다. 달아날 곳이 없었다. 나뭇잎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작은 배들이 줄지어 골든크러쉬호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는 겨우 두 명이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상아색으로 채색된 보트의 뱃머리에는 메두사인지 사자의 머리인지 알 수 없는 조각이 새겨져있었다. 작은 배들은 달빛을 받으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르르 골든크러쉬호로 다가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노를 저으며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 옅은 색 머리카락에 분홍빛 뺨을 가진 십대 소년들이었다. 노를 저을 때마다 그들의 아마포 옷자락에서 사륵사륵 모래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소년들이 골든크러쉬호에 도착했다. 그들은 갑판에 선 사람들을 향해서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뒷걸음질을 칠뿐이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특별한 여행을 돕기 위해서 왔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맨 앞에선 소년의 이마 위에서 머리카락이 황금빛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일렁이는 횃불 때문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대체 당신들은 다 뭐야?” 선장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소년은 공손하게 그러나 마치 철학자처럼 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처구니없어 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기, 저 여자분.” 사람들을 둘러보던 소년이 나를 지목했다. “저요? 제가 왜요?” 나는 뒷걸음질 쳤다.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 귀신에 홀리기까지 하다니! 거기다 귀신이 나를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까딱하다가 문자 그대로 물귀신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물기에 젖은 소년의 눈빛이 무언가를 꿰뚫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남자아이였어요. 그렇죠?” 소년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뭐야? 쟤 게이였어?” 스시집 보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달빛에 비친 내 실루엣을 아래위로 훑었다. “트렌스젠더야?” “그럼 저 가슴은 짝퉁이란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그럼, 그거, 그것도 수술했어? 남자랑 자 봤어? 느낌이 어땠어?” 중년 남자 하나가 한 발짝 나에게 다가오며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얼른 소년의 손을 잡았다. 일단 그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이 먼저였다. 소년의 손은 미끄럽고 따뜻했다. 소년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내 등 뒤에서 하나 둘 배에 오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말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그들도 나처럼 말 못할 어떤 상처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배 위의 소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가만 가만 노를 저었다. 그가 노를 젓을 때마다 소년이 입은 아마포 옷자락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옷자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그리스 배에 다다라있었다. 사다리를 올라가자 상아색 기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높게 솟은 돛대 위에 붉은 보름달이 막대사탕처럼 걸려있었다. 배에는 오랜 세월 바다에 잠겨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조가비나 산호초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은 다 과거로만 연결되어 있어요. 배 안의 각 방에는 버려진 것들이 가득 들어있지요. 다시 찾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고 나오시면 돼요. 다만 한 가지, 현재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은 가지고 가실 수가 없습니다.” 선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며 소년이 설명했다. 그와 내가 어떤 언어로 소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그는 나의 말을 이해했다. 횃불 아래 흔들리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축축했다. “아무나 이런 행운을 만나는 건 아니에요. 아주 특별한 날, 그러니까 저렇게 보름달의 인력이 강해져서 바닷물들이 한쪽으로 쓸려가는 날, 운이 아주 좋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호사지요.” “뭘, 어떻게 과거와 만난다는 거지요?” 내가 물었다. “그냥 아무 방의 문이나 열고 들어가면 돼요.” 소년이 대답했다. 나는 뭔가 너무 싱겁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깜빡였다. “아마 방 한 개의 문을 열면 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실 거예요.” 소년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잡혔다 사라졌다. 소년은 나에게 고대문자가 수놓아진 아마포 자루 하나를 건넸다. “필요하실 거예요.” 나는 말없이 소년이 건네는 자루를 받았다. “가지고 가고 싶은 걸 발견하면 여기에 담으세요. 자루에 매달린 분필처럼 생긴 조그만 막대기로 자루 표면에 가지고 가고 싶은 물건을 적기만 하면 됩니다. 이 자루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담을 수 있어요. 예컨대 노래 몇 소절, 누군가의 목소리, 차가운 공기 같은 거요. 하지만 너무 무거운 건 담을 수 없답니다. 자루에 담기지 않는 건 이 배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 소년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루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차곡차곡 접혀있는 자루를 폈더니 꽤 컸다. 뭘 그렇게 많이 담을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 소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던 목조선이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었다. 곳곳에 흔들리는 횃불이 걸려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 나무판들이 삐걱 삐걱 소리를 냈다. 배 안은 미로 같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첫 번째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어디선가 희미한 빛이 새 나오는지 앞이 뿌옇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출렁출렁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실핏줄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뭔가에 부딪쳐 왜곡되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물 밖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태중의 기억이구나. 나는 그곳에서 엄마가 부르는 노래 두 소절을 가지고 나왔다. 노래 두 소절을 담자 자루가 약간 무거워졌다. 다음 방으로 가기 위해서 다시 복도로 나왔을 때,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언제나 굴뚝처럼 담배연기를 뿜어대던 스시집 보조였다. 그는 무언가 간절하게 찾는 것이라도 있는지 초조하게 이 방 저 방,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알은 체를 하고 싶어서 그 곁을 스쳐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다른 일에 완전히 넋이 나가서 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는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어느 방문을 열어볼까 망설이다가 다섯 번째 방 앞에서 멈췄다. 문을 열자 잡동사니들이 우르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끈 떨어진 분홍색 메리제인슈즈, 파란색 구슬이 달린 장난감 귀걸이, 때 묻은 망사원피스, 팔 한쪽이 없는 금발 인형, 하얀 꽃 모양이 달린 실핀…… 나는 우두커니 서서 쏟아져 내리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이 다 떨어지고 나자 금박지 은박지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얇은 종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언니, 언니, 언니, 언니야……,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가족들이 모두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누나의 옷을 입어보곤 했다. 하얀 타이츠에 망사를 덧댄 원피스를 입은 거울 속의 나는 동그랗게 입을 모았다. 거울에 대고 나지막하게 ‘언니’라고 부르자 뽀얀 입김이 거울 속의 내 입술 위로 번졌다. 나는 그 방에 서서 새삼스레 내 입술을 만져보았다. 나는 조용히 언니……하고 불러보았다. 나는 ‘언니야’라는 한 단어를 챙겨 그 방을 나왔다. 복도로 나왔다. 이번에는 여덟 번째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문을 열자 인적도 없는 아스팔트가 펼쳐졌다. 군데군데 고장 난 가로등이 서있는 그곳은 스산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억에 없는 곳이었다. 아스팔트 양편으로 공사 중인 아파트들이 보였다. 건축자재들이 여기 저기 쌓여있었다. “흑흑…….”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은 어두운 공사장 안쪽이었다. 나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소년이 울고 있었다. 달빛도 들지 않는 파리한 벽 사이에 앉아 소년은 회색빛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소년은 울다 지치면 드문드문 내려앉는 별들을 세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난 듯 서럽게 울기를 반복했다. “현우야!”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얼른 뒤돌아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어린 누나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긴 머리카락이 어둠을 흔들고 있었다. 누나는 작은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면서 공사장 안으로 들어왔다. 야옹,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한 울음을 울며 앙상한 뼈대만 있는 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너, 여기서 뭐하니?” 소년을 발견한 그녀가 조심조심 짓다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찾았는데!” 그녀는 소년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소년의 팔이 풀빵반족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녀는 소년의 손목을 놓고 옆에 앉았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옆에 앉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까 지나갔던 고양이가 다시 그들 주변을 서성였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소년은 이윽고 컥,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가 옆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참았던 게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인지 소년은 더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소년이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한동안 울고 난 소년은 코가 막혔는지 입을 벌리고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여자 옷을 입고 놀다가 걸려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 즈음에는 그런 이유로 흠씬 두들겨 맞는 일이 잦았다. 그만큼 여성적인 것 대한 나의 집착이 강해지고 있었던 시기였으니까. 소년의 울음이 잦아졌다. 그녀는 부스럭 부스럭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딱, 경쾌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렸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소년의 입술 위로 한 겹 어둠이 덧 입혀졌다. 밝은 빛 아래였으면 분명 선명한 장밋빛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소년의 입술산을 따라 오르고 내렸다. “아, 해봐.” 소년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아,하고 입을 벌렸다. 그녀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소년의 눈이 상현달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소년은 울음을 그쳤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소년이 울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북받쳐오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술주정뱅이 누나는 오년 전,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대학을 나와 작은 회사의 경리로 들어갔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추구했던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결혼을 했지만 지독하게 불행했다. 야심차게 작은 편의점을 열었던 매형은 채 2년을 못 버티고 쫄딱 망했다. 망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망가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누나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 즈음 나는 내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기 시작했고 부모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있었다.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집은 이미 전쟁터로 변해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여자가 되는 꼴을 못 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부모의 눈에는 왜 하나밖에 없는 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갈 곳을 잃고 마음 둘 곳도 잃은 그녀는 처음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나중에는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영원히 날아가 버렸다. 마지막 순간 그녀가 입었던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립스틱 뚜껑이었다. 평소에 화장 따위는 하지 않았기에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앗, 누구세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어린 눈빛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서 여기서 나가자! 나는 그러니까 나는…….” 하지만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더는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 과정에서 실수로 그만 그녀의 머리가 콘크리트 벽에 꽝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문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다시 소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로 나오자 나는 그녀를 내려놓고 얼른 자루를 꺼내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김지우,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이러려고 이곳에 왔구나 싶었다. 갑자기 자루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윤곽이 흐릿해졌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이번에는 ‘누나’라고 적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뭐지? 이게 뭐지? 왜 안 되는 거야?” 나는 이성을 잃고 아마포 자루를 바닥에 팽개쳤다. 내 목소리에 잠이 깬 그녀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달아나려고 했다. 나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여기를 벗어나서 문밖으로 나가자.” 나는 발버둥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긴 어디에요? 대체 왜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이런 이상한 곳에 와 있는 거죠?” 질문을 퍼붓는 그녀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러니까 우리가 설에 TV에서 봤던 ‘백 투 더 퓨처’에서처럼 미래의 내가 누나를 구하러 온 거야. 알겠지? 그러니 절대 달아나지 마.” 영화 제목을 댄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말은 들은 그녀가 흠칫 놀라더니 찬찬히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정말 눈썹 위에 흉터가 있네.” 그녀는 곧 아이다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흉터는 어릴 때 놀이터에서 놀다가 누나가 휘두른 나무막대기 끝에 찢긴 자국이었다. “그런데 꼴이 그게 뭐예요? 무슨 남자가 머리는 그렇게 기르고……. 어, 화장했나? 입술은 왜 또 그렇게 빨간 거죠? 에이, 누가 보면 여자라고 해도 믿겠다!” “그러니 이제 나랑 이곳을 나가자.” 나는 그녀가 자루에 담기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복도 여기저기서 얼굴만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들 역시 가끔 나를 알아보는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않았고 어느 순간 복도에서 사라졌다. 아까 갑판에서 보았던 회의주의자 노인도 보였다. 그의 옆에는 수의를 입은 여인이 꼭 붙어있었다. 언제나 눈이 풀려있던 그 노인의 눈에서 광기에 가까운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일단 갑판으로 나가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나 누가 막아서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입에 침이 말랐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떨렸다. 그러나 내가 밖으로 나가는 문의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달려와 막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힘차게 문고리를 당겼다. 그 방의 문을 열자마자 분홍빛 꽃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멀리서 까르르 웃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스케치북을 든 그녀가 흩날리는 벚꽃 사이를 친구들과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꽃잎대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시려왔다. 코트 깃을 세운 그녀가 눈꽃 아래를 지나갔다. “아…….” 그것은 내가 지상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의 풍경이었다. 당시 사랑에 빠진 나는 파트너와 일생을 함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거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꼭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여자의 몸으로 눈꽃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그 어느 때보다 거셌다. 엄마는 기어이 음독을 시도했다. 그녀와 나는 위세척을 받고 누워있는 엄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은 파리했다. 우울증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녀의 우울증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병이 아니라 매형의 사업이 잘 풀리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휘발성 물질에 불과했다. 성별을 바꾸는 큰 수술을 결심한 내게 마음의 병이란 그저 작은 생채기쯤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머리 위로 함박눈이 쏟아졌다. 나는 그녀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그녀라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하게 그녀라면 나를 위해 나서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문제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흘깃 그녀의 옆얼굴을 넘겨다보았다. 눈에 덮인 하얀 속눈썹이 무거워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미대를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미술이란 그저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거라는 말로 아버지는 그녀의 꿈을 묵살해버렸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후, 그녀는 눈에 띄게 무기력해졌다. 가족들은 그저 사춘기의 우울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 역시 내 문제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그녀의 시퍼렇게 멍든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나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지지해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위로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휙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발이 시렸다. 몇 발자국 못 가서 나는 뒤돌아보았다. 걸음을 멈춘 채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파리하고 활기를 잃은 얼굴이 눈에 덮여 더 창백해보였다. 하얗게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는 마치 소금기둥 같았다. “누구예요?” 옆에서 잠자코 그 장면을 지켜보던 어린 그녀가 내게 물었다. 바로 그때, 쓸쓸한 얼굴로 돌아서던 그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그녀는 천천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곧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 뚝 떨어졌다. 예전의 내 모습도 그녀도 서서히 멀어졌다. 함박눈이 말없이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자.” 어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문을 나서려는데 무언가 툭, 발에 채였다. 아까 그녀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었다. 뚜껑이 없는 장미색 립스틱이었다. 새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고 산 것이 분명했다. 코끝이 찡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정신없이 다시 복도로 나갔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엇에 홀린 듯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이 문이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갑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반라의 내가 춤을 추고 있는 무대였다. 나는 민망해서 얼른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문을 알고 있는 거 맞아요?” 그녀는 지쳤는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알아, 그러니 나를 믿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밖으로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문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까 열어보았던 첫 번째 문을 다시 열었다. 핏줄이 거미줄처럼 얽힌 그 방은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복도로 나와 다른 방문을 하나씩 열었다. 어떤 방은 초등학교 입학식이었고, 또 몇 개의 방은 내가 은밀하게 숨겨둔 순정만화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방이었다. 또 어떤 방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었고, 어떤 방은 내가 수술을 받던 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밖으로 나가는 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복도로 나갔다.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지쳤는지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물이 들어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어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좋은 거 많이 건지셨어요?” 언제 나타났는지 아까 그 소년이 물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그 소년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여기 이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어요. 그런데 자루에 담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 거죠?” “너무 무거워서 그래요.” 소년이 대답했다.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가벼운데!” 나는 잠들어 있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세속의 무게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고유의 가치로 무게가 정해져요. 같은 물건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티끌만큼의 무게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산 하나만큼의 무게가 되기도 하지요. 미안하지만 데리고 나가실 수 없습니다.” 소년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애걸복걸해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묵묵히 내 말을 들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빠졌던 물이 다시 차오르고 있어요.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소년은 측은한 듯 나를 바라보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나를 내가 수도 없이 열었다 닫은 바로 그 문 앞으로 데려갔다. 나는 잠들어있는 그녀를 깨웠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왔다. 소년이 문을 열었다. 바다냄새가 확 풍겼다. 맞은편에 불이 꺼진 골든크러쉬호가 어둠속에 버티고 서있었다. 달빛을 받은 골든크러쉬호 아래로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물이 차오르는데 왜 배에 불이 안 들어오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배에서 이 배로 건너온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죠.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 배도 이 배와 마찬가지 운명이 될 거예요.” 소년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하여간 돌아가시려면 빨리 배를 띄워야 해요. 물이 다 들어오면 영영 건너갈 수가 없어요.” 소년이 독촉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닷물은 어느새 골든크러쉬호의 갑판까지 삼키고 있었다. “누구라도 저 배로 다시 돌아간다면 저 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초조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소년이 말했다. 나는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골든크러쉬호와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만약 내가 저 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머문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럼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죠. 더는 미래나 현재라는 것이 없는 삶이 되는 겁니다. 과거의 여러 방들을 돌아다니며 지내게 되는 거죠. 물론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영원히 머물 수도 있고요.” 소년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바닷물에 잠기고 있는 것은 저쪽에 있는 배만이 아니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도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여기에 머물기로 했다면 빨리 들어가야 해요.” 소년이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편지를 남길 수는 없을까요? 내 말이 약간 의외였는지 소년이 눈을 깜빡였다. “남길 수야 있지만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란 어려울 거예요. 여기는 오래된 기억들만이 가득한 곳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소년은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전히 반쯤 잠든 채 내게 이끌려 들어왔다. 막 닫히려는 문틈으로 5층 객실까지 물이 차오른 골든크러쉬호가 언뜻 보였다. 소년은 어떤 방으로 들어가더니 나에게 코르크 마개가 달린 유리병 하나와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나는 빠른 속도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완전히 잠들었다. “다시 배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그렇게 호화로운 배에 몸을 싣고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이 한 명도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건 참 의외예요.” 소년이 말했다. 글쓰기를 마치자 나는 그것을 접어서 유리병에 넣고 단단히 봉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소년이 재촉했다. “배를 띄워주세요! 저편으로 가겠어요. 단, 이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 나는 소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선언했다.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배에는 세 명이 탈 수 없어요.”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꼭 이 사람이랑 가겠어요!” “두 사람과 약간의 기억 정도의 무게만 견딜 수 있다니까요!” 소년은 내가 고집을 피우자 화를 냈다. “그럼 나랑 이 사람이 노를 저어서 가겠어요. 당신은 저기 문만 나갈 수 있도록 해주면 돼요.” 소년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에 취한 채 늘어진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소년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눈짓을 하더니 갑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소년이 목에 걸린 작은 고동모양의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까 그 작은 배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를 배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나도 배 안으로 뛰어들었다. 노를 챙겨 힘껏 젓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파도에 배가 가랑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물이 빠질 때는 그렇게 고요하더니 들어올 때는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격렬하게 밀려들었다.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면서 물보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불 꺼진 골든크러쉬호를 향해서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골든크러쉬호는 이미 선실 맨 위층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배 바닥에 죽은 듯 잠들어있었다. 나는 문득 소년이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미 소년도 배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산처럼 커다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나의 배는 점점 골든크러쉬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노를 저었다. 조금만……. 나는 골든크러쉬호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내가 탄 배가 파도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손이 닿을 듯 말 듯 자꾸만 미끄러졌다. 결국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뻗었다. 금속성 물질의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닿았다. 조금만 더…….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산 하나가 내려앉았다. 내 작은 배는 파도를 맞고 뒤집어졌다. “안 돼!” 거대한 파도가 내 비명을 삼켰다. 몸이 붕 떴다. 그리고 다시 곤두박질쳤다. 물속이었다. 거품을 일으키며 침몰하고 있는 작은 배의 파편과 편지가 든 유리병, 그리고 그림처럼 파리한 그녀가 보였다. 그녀를 보자 나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마치 아우라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얼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순간, 달빛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갑자기 그녀 주위로 소용돌이가 생기며 우리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현우야…….”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유리병이 파도를 타고 어디론가 쓸려가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약력 : 2008년 『현대시』 등단,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2014년 시인광장 작품상 수상. 메일주소 : ir48@daum.net  
482 춘몽 외1편/박관서 file
편집자
2399 2016-06-30
16.07월 74호 시 춘몽 박관서 삼월이라 삼짇날, 촌놈 생일이라는 일로 오일장에서 헛개나무 몇 그루를 사들고 혀에 감기는 간짜장에 배갈 한 돋구리를 적시는데, “캄푸터 허고 바돌을 두어서 잉간이 져부렀다“고 돌을 던졌다고 음험한 티비 앞에서 하도 지랄 오두방정들을 떨길래, 허리춤의 레디오 스위치를 올려 현처리와 태진아를 횃등처럼 켜들고 저 홀로 어두워진 집으로 돌아와 부렀어라 아 다순구미* 박관서 아야, 거만치 허천나게 처묵어 부렀으먼 인자 기냥 가부러라이 잉 머시 더 챙길 거시 있다고 고렇게 점점이 퍼질러 있다냐아 염병헐, 바다에 빠져분 사람들만 징허제 시퍼렇게 멍든 하늘만 미쳐분당게 잉 지집배 치마 같은 옷으로 갈아입고 돼놈들 왜놈들 양놈들의 대굴박 앞에 몸땡이를 조아려 얻은 쪽심으로 백년천년 제 배때기를 불려 왔겄지만 웃기지 말그라 여그는 시뻘건 화산재 뿌릴 때부터 문저리 망둥이 조구새끼 짱짱히 말려서 다시래기와 간장으로 조려먹고 살아 왔응게 징헌 파도와 햇살과 바람의 족보로 뼈와 뼈를 이어가며 살아왔응께 너그 같은 잡것들은 빨리 꺼져부러라 잉 ※ 다순구미 : 목포 유달산의 가장 남쪽에 있는 옛 자연항구인 ‘째보선창’에 달린 언덕마을로 따뜻한 햇살이 종일 비치는(다순) 후미진 곳(구미)라는 전라도말로 불리는 마을로 오래전부터 뱃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거주했음. 목포 개항기에 벽돌공장이 들어서고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어 언덕 위의 조선인 마을과 구분되었음. 현재 뉴타운 재개발의 바람을 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임. 박관서, 1996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신인추천. 시집 『철도원 일기』, 『기차 아래 사랑법』 간행. 제7회 윤상원문학상 수상. ddh21@hanmail  
481 제비꽃 외1편/정숙 file
편집자
2471 2016-06-30
16.07월 74호 시 제비꽃 허리 꼿꼿이 펴고 여군처럼 당당하게 걸어가는데 바보! 바보야! 생선 냄새 맡은 고양이 눈으로 한참 두리번거리니 땅을 깔고 앉은 보랏빛들 시 한 수 들고 시들지 않은 웃음 웃고있다 땅을 잘 밟아야지 그렇게 뾰족구두로 키 키워 하늘 바라본다고 하늘이 잘 보이니?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세상이 보이고 하늘눈치도 잘 볼 수 있지 키 낮은 것들의 울음을 사랑으로 부풀릴 수도 있지 동백꽃 동백꽃이 피네요 시집살이에 멍든 어머니 눈물꽃이 피네요 열네살 초경에 울든 소녀가 빨갛게 피어 있네요 여보 당신께 바친 열아홉 순정이 스물네살 첫날밤에 몽클몽클 피어나던 꽃 먼 이국땅에 있는 딸 현주가 보고싶어 지네요 딸아, 엄마맘 알제? 응 알제? 동백꽃이 지네요 눈물꽃이 툭,툭, 떨어지네요 떨어진 꽃들 서로 모여 다시 꽃밭을 만들어요 야 야 야 야 알제? 알제? 내 맘 알제? 응 엄마도 내 맘 알제? 그래 그래 알지러 암 하모 하모 딸아, 꽃은 지는 게 아니란다 너와 내 가슴에 핀 꽃들은 지는 게 아니라 울고 웃으면서 늘 살아 있단다 암, 그렇고 말고 알제 알제? 시인 [정 숙, ] (jungsook48@hanmail.net) 본명 정 인 숙 경산 자인 출생 경북대 문리대 국어 국문학과 졸업 경주 월성 중학교 전직 국어교사 1991년 등단 1993년 계간지<시와시학>으로 신인상 수상.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영상시집><바람다비제> <유배시편>시집과 [DVD] 출간 시극극본 [봄날은 간다] [처용아내와 손톱 칼] <시선집-돛대도 아니 달고> 제7시집<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2010, 1월 만해 ‘님’ 시인 작품상 수상 2015년 12월 23일 대구 시인 협회상 수상 포엠토피아. 시마을 , 서부도서관, 청도도서관, 북부도서관 시강의 지금 본리도서관,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중 범물 시니어 복지회관에서 내 인생의 꽃에 대한 강의 중 시와시학시인회 전회장 문학청춘 봄호에서 집중조명 2016년 5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극 극본과 연출 상화네거리에서 공연 2016년 5월 방천연가에서 처용아내와 장구쟁이 마당극 공연 http://poetjs48.ivyro.net/  
480 초승달외 1편/김주애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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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8 2016-06-30
16.07월 74호 시 초승달 김주애 집 나간 소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던 날 바지자락 흙을 털지도 못하고 미친 듯 동네를 뒤지다가 뒷골목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를 보자 망할 것 망할 것, 채찍을 휘둘러대던 아버지 단단한 어깨 한풀 내려앉아 서로의 고삐를 쥐고 집으로 가는 길 아버지 야윈 허벅지 하늘에 희부염하게 떠 있었다 얼룩지다 안방 문 뒤 누런 벽지에 점점이 말라붙은 아버지 납신다 먹지도 않고 팽개친 김칫국물에서 다시 살아보자고 내민 한약국물에서 젖은 눈 닦으시고 퉁퉁 불은 말기 간도 다 떼어내시고 추녀 날렵한 기와집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는 기둥은 아버지 대처로 향한 꿈을 내리찍어 고학력이란 낙인을 달고 평생 방앗간 주인으로 주저앉혔다 꿈을 삼킨 발동기 소리는 동네에서 제일 큰 고함소리를 가지게 했고 콸콸 쏟아지는 쌀알들은 불쑥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봉놋방 화투장에 팔공산 꿈을 쳐 넣기도 하고 한 손이면 후려칠 수 있던 밥상에 화풀이를 해대며 어느 해 둑이 터진 논둑에 벌건 눈물마저 흘러넘쳐 다섯 병 막걸리에도 들을 수 없었던 아름다운 꿈 그 텅 빈 공간은 몹쓸 암덩이가 채워지고 너무도 어이없게 마지막 밥상을 꽃송이 만발한 벽지가 쳐 먹고 몇 점 남긴 얼룩, 납작하게 말라붙어 왜 슬픈 얘기만 하는지 얼룩진 이야기는 닦아지지도 않는다 김주애 경북 상주 출생. 2014년 시집 『납작한 풍경』으로 등단.  
479 결별하기 좋은 무렵의 외1편/제리안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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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3 2016-06-30
16.07월 74호 시 결별하기 좋은 무렵의 제리안 빙설로 덮인 고산 지대에서 마젤란 해협까지 뿌리를 내린다는 선인장과 친해지려면 물기와 결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섭씨 40도의 눈빛으로 북위 56도에서 남위 54도의 간극을 넘는 동안 지상에 떨어지는 물방울로 목을 축이며 금이 오르는 표피 안에서 혀를 깨물었을 그 시간들을 나는 모른다 다만, 모래 바람처럼 몇 번쯤 일어났을 외로움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물기와 결별해 본 적 없는 나의 뿌리는 심해의 방향으로만 자란다 하여, 이따금 해초처럼 흔들리고 베개는 밤마다 습기를 머금는다 비가 오면 사막도 울음을 터뜨린다지 우기는 물기와 결별하기 좋은 무렵이다 눈물을 뿌리째 쏟아내고 나면 내 인생에도 건기가 찾아올까 수척한 얼굴로 뿌리를 움켜쥔 사람에겐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 자, 그럼 물기와 결별한 이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라일락 나무가 있던 집 제리안 거기, 라일락 나무가 없었더라면 미묘한 각도로 기울어지며 봄마다 꽃내음을 조금씩 흘려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시간들을 무어라 명명(命名)했을까 담벼락 밑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엄마 지갑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빼내거나 월담을 하다 복숭아뼈에 툭, 금이 가거나 빨간 테이프를 보기 위해 일몰에 눈 감아버렸던 그런 날들을 유년이라 불러도 좋은 건지 작은 꽃이 모여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 유약한 공동체를 떠올리면 분홍, 보라 이런 빛깔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 언제였더라, 어룽어룽 흔들리던 라일락 나무가 내게 가르쳐 준 기술이 있다면 유년을 유니언이라 읽을 수 있게 된 일 혼자이고 싶다가 혼자이기 싫다가 그 중간 어디쯤부터 환해지는 저기, 라일락 나무 좀 봐! 메일주소: pinkbiru@naver.com / 약력 : 2006 문학바탕 신인문학상 2010 평론가가 뽑은 100대 작가  
478 개꿈나라 초상화 외1편/이창한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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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 2016-06-30
16.07월 74호 시 개꿈나라 초상화 넥타이를 매다가 거울 속에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 너 지울 수 없는 개 모습 설마 아직도 술이 덜 깬걸까 우 우 욱 ! 이것봐라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근데 왜 인간이 개소리를 개 같은 놈 개가 되고 싶어 모습은 인간인데 왜 개 소리 하냐구 ... 지가 개인줄도 몰랐단 말이야 어허 인간 이랜다 ! 개보다 못한 놈 태(胎) 장작불에 그을린 아궁이 손바닥에 찍혀 나오는 송진 냄새 그을음이 목구멍으로 가득 밀려오면 엄마 ... 부르던 소리 눈물로 지워지고 하얀 손바닥 자국 찍힌 부뚜막에 왜 그래 하며 조용히 내려앉는 기억의 소리 잿불 벌겋게 묻어 나오는 고등어 토막의 뒤적이는 비린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공의 맑은 샘으로 지옥불로 타오르던 증오의 몸부림 뜨거워 엄마 ... 부르던 귓속말 삼킬 때 연기꼬리 달고 나오는 부지깽이 허리에 감겨 왜 그래 하며 덥석 잡아채는 등줄기 삶은 그래도 엄마라는 그슬리지 않는 기억에 기댈 수 있다는 것  
477 이끼 외 1편/김설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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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6 2016-06-30
16.07월 74호 시 이끼 비 그치고 수척하던 지붕이 부풀었다 지하도 언저리에 삼각그늘이 생겼다 그 그늘에 꽃이 피는 날은 일 년에 며칠뿐 박스에 누워도 이끼는 축축하다 알코올 향이 꽃술을 내민다 밤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그들의 눈동자는 어떤 경고음에도 초롱초롱하다 깊이 들지 못하는 잠이 이끼들의 잠이다 잠 밖에서 잠들 궁리를 하는 사람들 물기에서 더 푸르게 번져가는 습관으로 사지에 가늘어진 핏줄을 일으켜 세워야한다 알몸은 다른 알몸을 경계하지 않는 걸까 어깨가 닿지 않아도 후끈하다 꽃들의 대화법 테이블 위의 꽃들이 악수하며 눈빛을 맞춘다 꽃의 웃음을 까발리는 일이다 그가 먼저 백지에 찍힌 헛웃음을 꼭꼭 씹는다 그가 질겅질겅 씹은 뒤에 송곳니로 끊을 듯 야무지게 물어뜯는 또 다른 그가 있다 웃음이 점점 꽃의 입가에서 사라져 간다 웃음은 꽃잎의 이지러진 모양새에서 불편한 모양새로 자주 바뀌곤 한다 꽃의 생김새만 핥고 있다 꽃의 비의를 새기지 못한다 꽃잎의 수를 세어라 꽃술의 취기를 적어라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서 이슬방울을 체득해라 끝나지 않는 꽃에 대한 토론에 탁자 가운데 꺾인 꽃이 묵음(黙音)을 하고 있다 김설희 2014 리토피아 등단  
476 하늘을 만들다 외 1편 /정동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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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7 2016-06-30
16.07월 74호 시 하늘을 만들다 자와 컴퍼스가 하늘을 만든다 별 밤이 쌓여 심법(心法)을 전수 한다 사방칠수 한 치의 오차가 없다 황도 12궁에서 봄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온다 봄이 오는 이유를 묻자 농부가 땅을 일군다 사계의 의미를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므로 꽃피는 이유를 묻는다 꽃송이도 피우지 못한 죽음에 관하여 묻는다 판사처럼 공약이행을 촉구하다가 형장으로 사라져 간 청춘을 심리한다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므로 사라진 봄에 관하여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계의 의미를 묻는 것은 정말이지 더 이상의 의미가 없으므로 신도 아닌 주재가 죽음을 논하고 의사라도 된 것처럼 메스를 꺼내 든다 콘크리트 농수로에 빠진 고라니를 위하여 머리를 맞댄다 하늘의 일이 땅에서 꽃 핀다 의사봉이 자와 컴퍼스가 하늘을 만든다 부도지* 언어통일을 꿈꾸다 ​ 불붙은 해가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을 뿐 구체적인 형상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중년을 넘기자 부도지가 말을 걸었다. 소리만 들으면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느냐 했지만, 비로소 팔음(八音)이 들려 마고가 두 딸에게 맡기니 오음칠조지절(五音七調之節)을 이뤘다. 황궁씨 청궁씨 백소씨 흑소씨가 천지 사방에 천부의 말씀 담은 소리를 지르고 마고성(麻姑城) 여덟 손자 삼천의 무리가 순식간이었다. 일 년 365일 일월성신 항해일지를 타전하고 매달 변주된 교향곡이 지상에 내린다. 뒤척이던 초목과 금수 악보를 덮고 이내 자장가 속으로 빠져든다. ​ 오미(五味)의 변 후 암흑에 갇힌 해와 달 삼천 년을 천부삼인(天符三印) 이은 환웅씨가 8음2문(八音二文) 닦아 신시(神市)에서 개천하고 역법 수리 의약 천문 지리를 저술해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였고 아들 왕검씨가 부도(符都)를 세워 팔만 뗏목 사해형제에 띄우니 다시 신시(神市)가 열려 파도 소리가 철썩철썩 한목소리를 냈다. 쏴쏴 소리에 소나기가 쏟아지는 소리 바다에서는 들어가도 될까요? 똑똑 문소리가 벽을 허물고 앵앵 꿀벌 나는 소리에 탁탁 밤 터는 가을 하늘이 열린다. 쿵쿵 제대로 소리가 나서 태어났다는 문자가 진실로 손만 잡고 잤다는 소리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참된 소리에 덩실덩실 춤이 춰지고 신명이 난다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또다시 날조된 해와 달 삼천 년은 단군왕검이 산으로 들어가버린 후의 일, ​싸이 강남스타일이 천부적 소리로 B급 세상 꼬집는다. 말 달린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냐고 말을 탄 세계인들 몰려든다. 만 년 전 맨 처음 사과의 이웃 포도를 맛보게 하고 지구촌 끝자락 여태 잠자는 이유에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간다. 세종은 ● ㅡ ㅣ 담은 훈민정음 28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 했지만 기실 먼 아프리카 오지 한 명 한 명까지 주인으로 섬긴 소리다. 개천(開天)이란 뜬구름 잡기나 일국(一國)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 *부도지(符都誌)-신라 시대 박제상이 엮은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사서(史書) 2012년 애지 등단  
475 망우초(忘憂草)를 보면 외 1편/박찬선 file
편집자
2755 2016-06-01
16.06월 73호 시 망우초(忘憂草)를 보면 시름을 잊게 한다는 망우초를 보면 문득 생각나는 시인이 있네 당쟁과 임란으로 어지럽던 시절 바르고 곧은길을 걸어가신 선비 4살적 아주 어린 나이에 구름은 푸른 산머리를 가두고 연기는 저문 강 허리를 가르네*라고 읊은 시재(詩才)가 빼어난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선생은 시로서 두 번이나 화를 입었으니 누가 시를 여리다고 하는가 누가 시를 눈물이 마른 흔적이라 하는가 시를 벗 삼아 몇 십 년을 보냈어도 시 사랑은 저물녘 빈 하늘의 아쉬움으로 남고 높이 돋아나서 눈짓하는 별꽃인 것을 시인을 가리켜 사막에서 풀을 찾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더라도 외롭고 기나긴 밤에 화톳불을 다독여 살리듯 시를 모시는 화두는 멈출 수 없나니 사나운 바다에서 진 우리의 꽃들을 생각하면 시름을 잊지 못하는 생우초(生憂草)일 테지만 가늘고 긴 꽃대가 생명줄이듯 기다리는 마음의 시는 지울 수 없나니 어린 소년이 나팔을 부는 모습같이 청초한 망우초 꽃피는 여름이 오면 생각나는 소나무의 시인이 있네 아! 못 잊을 사월의 사람들이 있네. *雲囚碧山首 煙割暮江腰   감꽃이 필 때  어린 아기의 젖니같이  뽀얀 감꽃이 필 때는  긴 해도 아쉬워서 천천히 간다.  무성한 잎새 사이로  옛 추억 같은 이야기의 꽃은 피고  우리 무논에도 모를 심는다.  밤하늘에 별이 솟듯  푸른 잔치 집을 밝히는 향기로운 등燈  가난한 사람의 등처럼 오래도록 밝다. 먼 길 가는 기도가 끝나면 눈 오듯 이승에 앉는다.  오월이 가고  우리의 눈에서 기적같이 멀어짐이 아주 사라짐이 아니거늘 우리는 다시 향기로운 세상의  가을을 꿈꾼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현대시학』 추천. 시집으로『돌담 쌓기』『상주』 평론집『환상의 현실적 탐구』설화집『상주 이야기Ⅰ,Ⅱ』외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sunk631@daum.net  
474 어느 봄날의 기억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2353 2016-06-01
16.06월 73호 시 어느 봄날의 기억 심장이 쿵쾅대는 낯선 자본의 한복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끝으로 성당의 종탑이 굳건하다 잘 차려진 돌계단을 오르며 보았던 이식된 봄날의 평화로움 노란 간절함의 대신으로, 간혹 세월을 구걸하는 걸인의 눈빛이 멍하다 여린 꽃들이 매몰차게 수장된 한사코 눈 뗄 수 없었던 충혈된 그날 바람이 삼백 예순 날과 술래를 잡았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연민이 어둠을 재촉한다 신을 향해 제 기도를 올리는 거룩한 이들의 눈앞으로 펼쳐진 목발과 낡은 종이박스의 실루엣, 혹은 호주머니 속으로만 만지작거려지는 몇 푼의 양심이 불편하다 유난히 뾰족한 첨탑 위로 오늘도 스스로 생을 내건 십자가의 잔인한 하루가 오롯한 주홍글씨로 박힌다 곧 거행될 미사의 깊은 침묵 초대받아야 할 당신들이 문밖에서 심장을 멈춘 채 수런거린다 삼성관 졸업기 짜장면이란 이름을 다시 되찾던 날 중국집 테이블에 앉아 철 지난 드라마를 젓가락으로 훔칩니다 새로 산 넥타이를 유년의 끝자락으로 젖히고 후루룩거리는 소리에 맞춰 화면엔 어느 초등학교의 졸업식 풍경이 몇 가락의 면처럼 펼쳐집니다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은 먹을 것 없는 동네를 향해 꿈 많은 소년을 대처로 내 보내었고 마악 단무지를 노랗게 씹는 동안 벌써 자란 한 사내가 나타나 다음 편 예고를 견입합니다 따뜻한 엽차를 마시며 짜장이란 말을 다시 굴려보다가 그 인물이 매번 졸업 때마다 먹었을 짬뽕과 볶음밥이 메뉴판에 있다는 것을 문득 차례대로 발견했습니다 목안엔 제법 분필가루가 쌓여 답답했지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먹어 본 그 불맛은 영원히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이며, 2003년《시의나라》와 2010년《문학청춘》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과 산문집 『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가 있다. 청소년 문예지《푸른글터》편집주간이며,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