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으셨나요  

 

죽음의 땅에서 살아나온 나를 잊으셨나요

 

울기엔 너무 지치고 너무 슬퍼서

대화를 잊어버렸어요

온몸엔 상처뿐

 

지옥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소녀를

잊으셨나요

 

지옥 한복판에서 폭력의 나날을

눈보라처럼 온몸으로 맞으며

폭력에 젖어들었죠

 

빛이 숨기는 악마의 검은 손아귀

소녀의 목숨이 파들거렸어요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마들에게

짓밟힌 어린 꽃들

꽃잎이 찢어지고 시커멓게 멍들었죠

 

절망한 소녀는 그러나

달이 차오르듯

삶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온몸에 부풀어올랐죠

 

끌려간 전쟁터가

너무 멀어서 나를 잊으셨나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지옥이 잊혀지지 않아요

지옥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우려 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서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는데

완벽하게 잊으려고 애쓰는군요

 

포근하고 아늑하던 시절을 꿈꾸고 있어요

 

순진한 소녀들

순박한 소녀들

폭력에 놀라고 기진하여

붉게 흐느끼는 모습 자주 보여요

 

 

              다리

 

 

어릴 적

동네어귀를 지나 읍내에 가려면

큰 내를 건너야 했다

어른들이 여름이면 외나무다리를 새로 놓았다

 

큰 비가 오면

나무다리는 흔적도 없이

홍수에 떠내려가 버렸다

 

읍내 장보러 갈 때나

들녘에 아버지 참 갖다 주러 갈 때에는

어머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물 흐르는 것을 보면

어지러워서

다리를 못 건너겠구나

 

어머니는 신발을 벗어들고

시내를 건넜다

어머니는 산골출신이었다

나는 다람쥐처럼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외나무다리는 겨울에도 있었다

어머니는 겨울에도 버선을 벗고

고무신을 벗고 건넜다

 

어지러워서

물 흐르는 것을 보니 어지러워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권순자

경주 출생.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 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Mother's Dawn(『검은 늪』영역시집) 이 있음.

이메일: 479sky@naver.com 

 

전화: 010-6201-4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