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佛千塔 운주사에 다녀와서

 

여행은 물처럼 흘러 가버리는 시간을 아주 맛있게 야금야금 빨아먹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라고 시선을 좀 멀리 두고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해본다. 그 맛있는 시간과 공간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우러지기 위해선,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본다거나, 산길 바위 턱이나 고찰의 마당에 앉아 나중의 기억을 위해 메모를 한다거나 하는 짓은 외려 그 소중한 시간과 공간을 흩트리는 모양이 될 수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대충 먹으며 딴 짓을 하거나 음식의 내용(Recipe)을 기록하느라 그 귀한 맛과 분위기를 간과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다. 단 한번 지나가는 그 시간과 공간의 맛을 매순간 음미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본래의 자기를 찾아 익은 시간과 공간을 내려놓고 나온 여행이라면, 되도록 풍경과 나무들과 흙내음 바람향기 새소리 등을 살피며 흙길을 천천히 걷고, 시골 정류장에서 오래 기다리기도 하며, 삽시간에 변해버릴 많은 것들을 눈에 담고 귀에 담아 그 시간과 공간의 씨알들을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랜 직장생활을 접고 처음이다시피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떠났지만, 문학 동호회에서 알게 된 지인들이 곳곳에 있어 여정은 저절로 길 따라 사람 따라 길어지고 있었다.

 

강원도 정선 산골에 혼자 사는 아우와 쏟아지는 별빛 속에 하룻밤을 꿈같이 보냈고, 포항에서 이틀 동안 선배의 환대를 받은데 이어, 친구 찾아 광주에 와서 무등산에 올랐다가 저녁에는 더 모인 지인들과 열락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술이 덜 깬 나를 태우고 친구는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차를 몰았다. 운주사 입구 주차장에 들어서 차에서 내렸을 때, 눈이 부셨고 입이 벌어졌고 지잉~ 정수리로 무엇이 들어오는 떨림이 있었다. 포항에서 선배의 안내로 오어사에 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기운이었다. 오어사에서는 움푹 들어간 듯 보이는 그 절과 주변의 물과 산과 바람에 천년 전의 기운이 가라앉아 고여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거기에 다가서는 나도 그 기운에 젖어드는 느낌을 갖고 시공과 세월의 경계를 지우는 기분에 들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 비포장 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곳곳의 석탑과 석불들로 하여 여기저기 온통 천년 전의 기운이 배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에 쉬 젖지 못하고 더욱 몸을 비벼 넣으며 느껴야만 했다. 세월의 진액이 배어든 웅혼한 정령이 서린 9층 석탑은 바람처럼 왔다가는 나그네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합장하고 우러러 한 바퀴 돌며 뒤돌아섰을 때, 아! 햇살, 오후의 햇살이 석탑에 광휘를 부여하며 나를 비추었다. 천년 전의 그 햇살이었다. 천불과 천탑이 있었다는 이곳에는 길가의 돌 하나에도 천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나는 세월을 보았다.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잠시 입정하였다. 친구의 안내로 옆 산자락을 따라 올라 머슴부처를 보고 유명한 와불이 있는 곳으로 갔다. 머리가 더 낮게 자리하고 있어 좀 불편해 보였다. 절을 하고 탑돌이를 하는 기분으로 그 언저리를 돌았다. 그 근처 퍽 크게 자리 잡은 어느 양반의 무덤 뒤편, 솔숲 사이로 아주 커다랗게 주홍빛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저리 클까? 자세히 보려니 솔가지가 그냥 그리 알라는 듯 시선을 가리고, 그 너머 먼 산 위로 부푼 구름이 둥그렇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는 시간이 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가, 나는 좀 더 머뭇거리며 해 지는 광경을 볼까하다가 친구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곳곳에 늘려있는 석불은 대부분 아마추어가 만든 모양으로 일정하지도 않고 형상이 구체화되거나 면밀하지 않았다. 하늘의 석공들이 내려와 하룻밤에 만들었다는 전설은 별개로 하고, 내 생각으로는 천년도 훨씬 전에 동네의 재앙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일치 단합하여 잘 만드는 사람 못 만드는 사람 구별 없이 염원을 담아 다양한 불상을 나름의 성의를 다하여 만들어 바친 것 같았다. 그러니 그 순수성과 정감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민초의 기운을 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올라갔던 그 길로 찬바람 맞으며 다시 내려오는데 나는 알지 못할 회한에 잠시 빠졌다. 천년의 기운을 뒤로하고 지금의 내 삶에 다가서야 하는 아쉬움과 내 존재의 가치와 역할에 연연하는 이 마음이 무거웠다. 무상(無常)이란 말은 그냥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말일진대, 오늘 이 순간에 갑자기 천년 세월의 더께를 입고 선 돌 조각 앞에 괜스레 처연한 감정에 휩싸일 까닭도 아니었다. 내 살아있음으로 하여 좋은 친구와 함께 이런 세월의 깊이를 더듬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내 마음에 들어 온 이 정경과 느낌을 담아두면 생각일랑 다른 때에 또 다른 각도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새삼 친구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밝음이 역할을 다한 듯 자리를 내어주고 어둠이 아주 천천히 산천을 장악하기 전, 하늘빛은 참으로 깊은 단 한 번의 순간을 연출한다. 서녘하늘의 노을은 먼저 가신 아버지의 미소처럼 사라지고 장중한 어둠이 천천히 수묵화를 그리며 안온하게 다가서면, 하늘은 어느새 또 다른 모양으로 열리며 별들을 하나 둘 쏟아 놓는 것이었다.

운주사에서 나오는 길에 친구의 안내로 들어간 '흑두부사랑집'은 원목으로 웅대하게 짓고 실내에 우람한 고목을 들여놓아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나는 안타깝게도 검정콩으로 만든 흑두부 등 그 맛있는 음식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전날, 밤을 새는 과음으로 속이 몹시 아팠는데 아침에 친구가 안내한 복집의 그 유명하다는 복지리를 먹고 속이 거짓말처럼 풀렸건만, 운주사 다실에서 그 분위기에 취해 녹차를 거푸 많이 마시고는 다시 아프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 두부 음식들을 먹고 다시 조금 나아졌다. 연이틀 주말의 귀한 시간을 온통 내게 할애한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지금껏 내 삶이 강퍅했는지 몰라도 목적 없이 베푸는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이를 따져 채무의 감정을 갖는 것은 친구에게나 나에게도 마땅치 않는 듯하여 내 합리화 삼아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이는 비단 이 친구에게만이 아니라 이번의 여행에서 만난 곳곳의 고마운 사람들에게 정중히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현세에 나와 인연 지어진 소중한 사람들에게 갖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겠다.

 

하나는, 정선의 자연인 아우가 들려준 '지게이야기'를 떠올려 응용해 본다. 어차피 인생이란 지게를 지고 가는 길이라면, 그 지게에 적당한 짐이 얹혀 있을 때 발걸음과 자세도 안정된다. 또한 그 짐을 잘 운반하려는 줄곧 정신을 가다듬어야할 테고, 힘을 써 땀을 흘리고 그 땀으로 시원한 바람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야 할 짐 속에는 삶의 목적이나 인연의 고리나 책임과 의무 등 갖가지가 포함될 것이다. 여기에는 누군가에게 베풀거나 신세를 진 기억도 포함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내 것을 빼앗기거나 상처 입은 기억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삶의 애환을 다 잊고 초탈하여 지게마저 벗어버리고, 수도승이나 도인처럼 살 수 없을 바에는, 이런 인간적인 부담감 같은 것도 얼마큼 적당히 그 짐의 무게에 보태어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빚만은 지지 않고 살아야지 하던 생각에 다소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빚은 없이 산다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가난하고 어려웠던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형편이 다소 나아진 지금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손을 거친 먹을거리를 먹고 누군가 쓴 책을 읽고 누군가 만든 물건을 사용하며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당연시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찌 모든 것이 물질적 기준의 대가로 상쇄되어질 수 있겠는가.

 

둘은, 어느 Life Therapist(삶의 치료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 생각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존재계(存在界)에는 '보이지 않는 순환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기운의 나눔이나 파장의 전파 법칙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는데, 내가 어떤 대상에게 알게 모르게 물질이나 기운(선행이냐 악행이냐, 좋다 나쁘다는 그 기준이 다양하고 선입견일 경우가 많음)을 나누어주게 되면, 그 당사자로부터 내게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주로 그 대상은 또 다른 대상에게 그 기운이나 물질을 나누어주게 되고, 나는 내가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에게서 그런 기운이나 물질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내가 베푼 것으로 꼭 내가 아니라 내 가족이나 주변에서 받게 되기도 하고, 내 가까운 사람의 베풂이나 저지름으로 내가 그것을 되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시간흐름에 따라 증폭되기도 하고 서서히 작아져 소멸되기도 하는데 이를 복(福)이나 화(禍)로 받아들이게 된다. '보이지 않는 순환의 법칙'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뭐든 주는 대로 막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베풂과 저지름으로 이런 결과를 얻게 되나 생각해 볼 일이며, 다시 누군가에게 선업을 베풀어야 할 마땅한 도리를 지켜야 한다. 내가 가난하면 형태를 바꾸어 마음이나 몸을 바쳐 봉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기운을 대상에게 보내야하는 것이다. 고마운 인연들이 너무도 많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는 자기 안에 갇혀서 미처 그 인식을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과분한 신세를 졌다. 그들의 선한 마음과 순수한 호의를 잊지 않으며 나는 또 다른 대상에게 증폭시켜 베풀고 봉사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친구 덕분에 인연이 된 천년고찰 운주사와 천년 세월 너머 선인들의 기운을 받아 나는 또 새로워졌고 나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