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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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8318 2014-11-03
473 버려짐에 대하여 외1편/이미령 file
편집자
2407 2016-06-01
16.06월 73호 시 버려짐에 대하여 어둠이 잿빛 발로 걸어오는 저녁 어스름 전봇대 아래 박스에 담긴 강아지 한 마리 낑낑거린다 툭, 낯선 세상에 툭, 썩은 모과처럼 처박힌 그의 눈은 눈곱 반 눈물 반 엉치털 숭숭 빠져나간 자리에 십 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선홍빛 도장 자국 버려진다는 건 어둠의 사막을 맨발로 걷는 일 검은 꽃과 검은 나무와 검은 하늘과 검은 햇빛 검은 웃음과 검은 눈물과 검은 말, 말들 긴 터널 건너와도 기억 저편 얼굴들은 검은빛 투성이 세상의 죄 죄다 끌어안은 눈빛으로 갈 곳 잃은 강아지 한 마리 벼랑 끝 목줄 잡아당긴다 흐린 눈 크게 뜨고 반달이 따라온다 봄을 읽다 창녕 말흘리 태암 선생 댁 서둘러 달려온 봄이 다리 뻗고 앉아있다 봄볕은 마당 구석구석 기웃거리며 꽃망울 몇 개 터트려놓고 흥얼흥얼 긴 우울증 끝내고 바깥으로 나온 진진이* 모닝커피 향 진하게 코끝에 올려놓자 솜털바람 진진이 등을 타고 놀고 있다 목단꽃 닮은 화가 사모님 텃밭에 호미로 그리는 그림 연둣빛, 분홍빛으로 깨어나는데 화왕산 그림자 슬며시 내려와 툇마루 나와 앉은 고서를 어눌하게 읽고 있다 * 태암 선생께서 붙여준 진돗개 이름 경북 상주 출생. 2014년 시집『문』으로 등단.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상주느티나무시 동인  
472 낮달이 되어 외1편/곽도경 file
편집자
2223 2016-06-01
16.06월 73호 시 낮달이 되어 소를 찾아 떠난 길 위에 꽃 수를 놓는 그녀 분홍낮달맞이, 무리를 이룰 때까지 심어 놓고서야 바늘에 찔린 손가락 호호 불며 하늘 한 번 올려다본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경계 그 어디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화두 하나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잡지 못하고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출가하여 꽃이었던 기억조차 까무룩 지워버린 그녀 오월 하늘에 희미한 낮달로 걸려 먼 수행 길 가고 있다. 풍장 서러워말자 모진 겨울, 언 땅을 걸어 와 검은 몸뚱이 희디흰 꽃송이 환하게 피웠나니 비록 순간이라 한들 서러울 일 없는 일생이다 한 몸으로 엉겨 서로를 붙들고 있던 꽃잎들 한 잎 한 잎 흩어져 바람 따라 길 떠나는 저마다의 비행 어디에 떨어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지 알 수 없는 윤회의 고리 안에서 벚꽃 잎들 파르르 온 몸 떨며 환생을 기다리고 있다. [계간시선]으로 등단 시집/ 풍금이 있는 풍경  
471 발 없는 한 끼 외 1편/채들 file
편집자
2158 2016-06-01
16.06월 73호 시 발 없는 한 끼 비좁은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초복 머리가 없는 이열치열이다 묘한 체위다 갓 병아리 티를 벗은 어린 것이 다리를 꼬고 누워있다 거름더미를 헤치던 두 발처럼 젓가락 한 벌이 연한 몸을 발라낸다 발 없는 한 끼, 보양이 되는 맨살. 머리를 버린 몸뚱어리가 뜨겁다 꽉 차 있는 속을 가만 보니 제 것인 것이 없다 그 누구의 위장 속인들 제 것인 것이 있겠는가 곡물을 먹던 습관을 예우하듯 내장 빠진 자리에 온갖 곡물이 꽉 차 있다 콩팥처럼 도드라진 대추 한 알이 찌그러진 절기처럼 박혀있다 연한 갈비뼈 그늘진 곳에 서식한 種일까 머리를 버린 사람처럼 인삼 한 뿌리 누워 있다 오롯이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날개 얼마나 무책임한 위안인가 삶도 계戒도 아닌 뜨거운 몸 발 없는 한 끼 식사다 화투, 꽃 전쟁 훅, 불면 금세 바람에 흩어질 것 같은 민들레 씨앗 같은 머리들이 둘러 앉아 꽃판을 벌인다 백 원짜리 동전을 틀니 앞에 쌓아두고 남은 세월 주고받는다 난초를 내주고 흑싸리 붉은 싸리 들고 꽃 그림자를 쓸라치면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 자리에 공산이 떠오르고 패 뒤집히듯 국진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캐시미어 담요위에 꽃판 벌어지고 뒤집을 패 몇 장 남지 않았어도 이미 화투판 판세는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돌아봐도 낙장불입의 순간이 떠오르지 않는 희끗희끗한 패짝들 이 판은 내가 갖고 다음 판은 네가 갖고 오고가는 판 사이에 막걸리 두부김치가 차려져도 몇 푼 은전을 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가 이기고 진 것도 없이 패 들여다 본 사이 개평 쌓이듯 늙어버렸다 늙은 세월 골고루 나눠가졌다 채 들 | 2005년 《불교문예》와 《월간문학》으로 등단. 제23회 새벗문학상 수상. 저서로는 시집 『허공 한 다발』, 어린이그림책 『복숭아씨 하나』가 있음. moolflowers@hanmail.net/  
470 비 내리는데 외1편/신순말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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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9 2016-06-01
16.06월 73호 시 비 내리는데 수런대는 수다사 물소리가 듣고 싶다 내리는 물 흐르는 물 거침없이 만나면 골골이 수다 삼매경 산천이 개운하겠다 눈이 봄이 된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 눈물이 된다 간혹, 마음 맑은 이는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아름다운 말을 건네온다 눈이 녹아도 여전히 내겐 눈물이지만 아름다움의 근처 서성이며 징검돌을 건너본다 눈물은 봄이 된다고 가만히 뇌어 본다 상주출생 상주들문학. 대구경북작가 회원 시집 《단단한 슬픔》 (시와에세이)  
469 마더 외1편/한보경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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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1 2016-06-01
16.06월 73호 시 마더 내 방에는 엄마가 없다 한 번도 엄마가 된 적이 없는, 나는 엄마의 모든 이름을 몰래 숨기고 엄마를 표절한다 표절은 가슴에 표절이란 이름표를 달지 않는다 표절은 표절만 꿈꿀 수 있으므로,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없는 표절이 갇힌 방 거울은 없다 엄마의 심장을 표절하고, 끝도 없이 엄마가 되기를 표절하고, 엄마로 늙어가기를 표절한다 거울은 없다 나는 엄마가 벗어둔 옷을 최대한 헐렁하게 걸치고 엄마의 최대값을 숨긴 엄마의 좌표를 겹겹이 껴입고 표절과 표절이 만나는 x축과 y축의 절정에 대해 궁리한다 그 궁리의 벼랑 끝에서 망설이지 않고 엄마를 벗어 버린다? 완벽하게 엄마를 표절하는, 결코 늙지 않는 표절 엄마는 표절이 꿈꾸는 궁극이며 표절의 표절조차 찾아오기 힘든 너무 먼 표절이다 느닷없이, 죽는 표절이다 시의 귀 귀를 잘라 버리면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남는다지요 귀만 남는 전설이 될 수도 있다지요 눈도 사라지고 코도 사라지고, 입도 사라지고 얼굴마저 뭉개진 무시무시한 전설이 될 수 있겠군요 전설이 되려 해요 기억할 수 없는 물고기였던, 파충류였던, 거대한 포유류였던 먼 자궁의 자궁을 걸어온 전생이고 후생이었던 무거운 귀를 벗을 수 없어서 벗어서 걸어둘 고리가 없어서 귀를 잘라요 잘린 귀에서 아무도 모르게 귀 하나가 새로 자라 때론 눈이 되고 코가 되고, 입술이 되어 잘린 귀의 전설을 폭로하더라도 귀를 잘라요 먼저 전설이 되려고 해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관한 시작과 결말 같은, 전설이 되려 해요 1, 2009 불교문예 등단 시집 < 여기가 거기였을 때> 2, e-mail : jandi21@hanmail.net  
468 사랑의 압화 외1편/박은숙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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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1 2016-06-01
16.06월 73호 시 사랑의 압화 하늘은 바다에 밀착밀착 스며들고 바다도 그와 같이 하늘에 스며들어 한 획 수평선이 되듯 너는 나에게로 그들처럼 스며들어 나도 너와 더불어 그렇게 스며들어 한 송이 붉은 장미꽃, 사랑의 꽃이 피네 그리하여 만들어진 거룩한 사랑의 압화를 우리는 어느 시집 갈피에 끼워 두고 영원까지 살아 볼거나 꽃 돌 당신은 왜 꽃병에 물을 갈듯 돌 담긴 어항의 물을 그렇게 열심히 갈아 줍니까 허 허, 이것은 꽃 돌일세 꽃이 물을 품듯 꽃돌도 물을 몸에 지녀야 천연의 색감을 낼 수 있지 옆에 두고 보노라면 아기의 숨소리 들리는 듯하여 둥둥 떠다니는 물때가 보이면 뽀드득 뽀드득 신생아처럼 목욕을 시켜 준다네 가끔 말이지 참 맛있는 잠을 잤다 싶은 아침에는 간밤 꽃 돌 속에 잠이 들었던 것이네 그날 하루는 아~그날 하루는 다시 탄생한 갓난아기 돌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묵상의 아침이기도 하지  
467 천의 바람/김성찬 file
편집자
2383 2016-06-01
16.06월 73호 시 천의 바람 사람들 사이로 바람 불어오는 날이면 내 맘이 시렵다 생이 엇갈린 마지막 부두 밤바다와 마주 서 있으면 파랑물결이 바람 밀고와 방파제에 부딧혀 물방울 알갱이로 부서진다 니가 바람 되어 왔다고 난 믿지만 넌 잡을 손이 없어 내 허리 맴돌다 간다 하늘마을 가는 천 개의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자꾸 멀어지는 모습 바라보다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흰국화 다발로 올려 놓은 사진 앞에 모여 너를 위해 불러주던 노래 나즉이 입술 오므리고 따라 불러 본다 니가 뒤돌아 본 세상 마지막 풍경은 어땠을까  
466 해 신/이윤길 file
편집자
2109 2016-05-31
16.06월 73호 소설 해 신 이 윤 길 1 폭우가 태평양 전역을 휩쓸고 있다. 비는 며칠째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선회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굵었다. 정우는 바람과 파도가 엇섞여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다. 바다는 한낮인데도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아 컴컴했다. 어둠은 정우의 항해와는 상관이 없다는 듯 영원의 끝처럼 회색이다. 적도에서 발생한 태풍 탓이다. -끙. 정우는 낮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15노트로 북상했던 속력이 5노트로 떨어졌다. 기압이 988헥토파스칼로 낮아지고 있었다. 태풍은 세를 불리기 위해서 정체하고 있다. 태풍의 이동이 시작되기 전에 안전한 피항지로 가야했다. 이따금씩 어둠을 뚫고 크고 날카로운 섬광이 뱃머리를 강타했다. 곧이어 고막을 찢는 천둥소리도 정우의 귓바퀴를 뚫고 지나갔다. 대기의 파동으로 선체가 부르르 떨렸다. 정우는 몰려오는 두려움을 지우듯 두툼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묵직하던 어깨가 더욱 무겁다. 정우의 황천항해에 대한 경험은 풍부했다. 게다가 태풍이 움직이는 진로예측에도 뛰어났지만 이번만큼은 예상을 벗어났다. 피항 계획을 빨리 수정해야 했다. 본래 계획이라면 피항지는 쿠릴열도에 속한 작은 섬 구나시리다. 그러나 태풍이 발달을 계속하면 위험반원에 들어갈 수 있다. 파도와 바람을 막아줄 해안지형이 든든하지 못한 곳에서는 배와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정우는 혼슈우 북단 시리야사키 항을 새로운 피항지로 변경했다. -220도. 조타륜을 잡고 있던 2항사가 항로수정을 알렸다. 배는 선미로부터 달려드는 파도에 부딪치며 심하게 좌우로 기울었다. 파도의 방향이 변침으로 뱃머리가 선외하자 바뀌었던 까닭이다. 미처 리깅하지 못한 브리지 기물들이 이리저리 나뒹굴며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선체에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은 뱃사람인 정우가 짊어진 삶의 굴레였다. 태풍이 이동할 것이다. 정우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조바심에 선속을 좀 더 높였다. 파도는 마치 날개를 펴고 둥지를 표표히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몰려오고 몰려갔다. 2항사는 힐끔힐끔 곁눈질로 얼씬거리는 파도를 훔쳐보았다. 브리지 외벽을 흩고 가는 파도의 세력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파도는 뱃전을 넘어와 미처 배수가 안 된 바닷물과 엇섞여 갑판을 물바다로 몰아갔다. 정우는 파도에 쫓기며 눈앞에서 하얗게 끓어오르는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쿵쿵 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브리지 계단에서 들렸다 -예상도가 나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나타났다. -끔찍하군요. 통신장은 기상예상도를 건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침내 태풍이 10노트 속력으로 이동하며 북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980헥토파스칼까지 발달한 중심파고는 12미터가 넘는다. A급으로 태풍이 커진 까닭이다. 정우의 뒷머리가 지근거렸다. 피항지를 변경한 탓에 12시간은 달려야했다. 닻을 던질 피항지는 멀고 시간은 없다. 속력과 진행방향을 다시 계산해 봐도 세력권에서 벗어나긴 틀렸다. 적어도 서너 시간은 족히 태풍의 광기 속에 휘둘려야 할 것이다. 시퍼런 물덩이에서 아우성치는 선원들 모습이 떠올랐다. 체증에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태풍 밖의 세상에는 만선과 더불어 무사하게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피항항해는 벌써부터 끔찍했다. 정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래의 부상은 핵잠수함처럼 웅장하고 거대했다. 시커먼 물체는 파도를 뚫고 하늘을 향해 크게 치솟았다. 정우는 떠다니는 원목이거나 황천항해로 컨테이너선에서 떨어뜨린 컨테이너 박스인 줄 알았다. 근데 크기부터 차이가 났다. 컨테이너 박스와는 비교가 안 될 덩치다. 곧이어 에어 혼 같이 푸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파도가 뱃전을 두들기는 소리와 뚜렷하게 구별이 되는 소리다. 분기음이었다. 고래였다. -고래입니다. 황천의 날씨를 홀로 헤치는 선장이다. 그런 선장의 외로움을 알기에 브리지에서 얼쩡거렸던 통신장이였다. -고래…. 고래가 배를 따라오고 있었다. 고래가 배를 따라오다니. 지금은 황천의 바다가 아닌가. 바다에서 일생을 보낸 고래지만 사납고 거친 파도를 헤쳐가기란 힘겨울 거였다. 심해로 들어가 은신처에 몸을 숨기면 적막뿐인데 파도와 힘을 여투듯 배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전속으로 항진하는 배와 바짝 붙어 치솟는가 싶더니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유영하는 고래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경계심이란 찾아 볼 수가 없다. 누군가가 부추기라도 하면 꼬리지느러미라도 만질 수도 있는 거리다. 고래는 파도가 몰려오면 몸을 숨겼다가 힘찬 분기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한 유영모습을 지켜보던 정우는 황천이란 사실마저 잃어버렸다. 파도가 다시 몰려왔다. 고래가 잠수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정우와 고래의 눈이 마주쳤다. 찰라이다. 정우는 고래의 그윽한 눈빛에 눈이 부셨다. 그 순간 정우의 가슴은 정체모를 뜨거운 것으로 화끈거렸다. -아. 피항으로 굳어졌던 정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우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가슴이 먹먹한 채 몇 분이 흘렀을까? 고래는 시큼한 분기공의 냄새만 남겨 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 아버지는 타고난 뱃사람이었다. 더불어 우리나라 마지막 포경선 동해호 선주 겸 포장이었다. 정우의 선조는 반구대 암벽화에 고래를 암각한 선사인일지도 모른다. 일가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고래 잡는 일에 종사해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철들기 전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고래를 쫓아 다녔다. 만약 국제포경위원회가 상업포경을 금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고래의 분기공을 쫓아 바다를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국제포경위원회의 조약이 발효된 날이었다. 아버지는 묶여있는 동해호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구룡포 김 포장 말이야. 자네도 김 포장 알지? 포경허가를 넘기고 택시 사업권을 땄다고 하더군. 자네도 빨리 마음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네. 해부장 김 씨가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젠 배를 포구에 묶어 둘 수조차 없네. 선박원부도 없어지고 선적항도 사라졌으니까. 국제기구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나. 포기해야 하네. 해부장 김 씨는 아버지와 함께 고래를 쫓았다. 해부장 김 씨 라고 마음이 착잡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국제기구의 의결 사항을 따르는 방침은 정해졌다. 정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보상을 받으라는 충고였다. -내가 태어난 곳이네. 내가 살아온 곳이란 말이네. 내 삶의 터전에서 내 배를 부리겠다는데 보상은 무슨 놈의 보상인가? 아버지 고집은 갓 잡아 해체한 고래의 힘줄보다 질겼다. -내가 맹세하건데 고래잡이는 끝났네. 해부장 김 씨의 일격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배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그만 죽으라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돌아가신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동해호는 고래를 쫓아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여전히 장생포 한편에 묶여 세월에 녹슬어 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포경회의의 상업포경금지조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고래 해체장이 있던 장생포에서도 오베기를 맛보려면 힘들었다. 고래가 좌초하기를 기다려야했기 때문이다. -고래가 보고 싶구나. 아버지는 잠꼬대마저 그렇게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고래를 쫓지 못하게 되자 눈에 띠게 기력을 잃어갔었다. 그러면서 바다로부터도 멀어졌다. 상업포경금지는 아버지의 현재와 미래를 한 줌의 먼지로 날려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와 고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거였다. 고래를 잡아 귀항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싱싱했던가. 아버지가 얼마나 고래를 기다리시는지. 다시는 활기에 찬 얼굴의 아버지를 볼 수 없어 정우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동해호 포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상업포경이 금지되기 전 어느 해인가 대왕고래를 포획한 날이다. 장생포에서 작살 맞은 마지막 대왕고래이었으리라. 고래를 잡았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포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썩거렸다. 장생포라곤 하지만 대왕고래를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대왕고래는 잡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모두가 바다에서 포경업에 종사하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흔하게 잡혀온 밍크나 곱세기를 지나가다 보는 게 고래의 전부였다. 모두들 대왕고래란 말에 흥분했다. 수평선에서는 징소리부터 들려왔다. 고래잡이배 전통에 따라 고래를 잡았다는 통보였다. 천천히 동해호가 포구로 들어왔다. 노을이 풀어진 선수마스트에는 오방색 만선기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붉게 빛나는 동해호 이물은 당연히 포장인 아버지 차지였다. 동해호 옆구리에 묶어 놓은 대왕고래를 제압하듯 허리에 팔을 걸치고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정우는 손나팔을 만들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정우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정우를 바라보며 고래의 롭테일링처럼 손을 높이 흔들었다. 그 순간 정우는 동해호 옆구리 묶여 작은 산처럼 보이는 대왕고래보다 아버지가 더 커 보였다. 아버지가 더 대왕고래다워 보였다. -아버지. 정우는 아버지를 향해 재차 손을 흔들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눈길은 대왕고래로 향했다. 바다의 제왕이라는 대왕고래는 동해호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정우는 그 크기에 놀랐다. 꾸경군들은 대왕고래에 대한 경외감에 젖어들며 암벽 밖으로 목을 빼어냈었다. 그리고 물 밖으로 채 나오지도 않은 위압적인 덩치에 그만 질려버렸었다. 대왕고래는 성장이 끝나면 체구는 거의 30미터에 달하고 무게는 200톤에 육박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포유류였다. -와. 와. 감탄으로 가득 찬 탄성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당당할 것도 같은 아버지의 이날도 포경인생에서는 아침햇살에 빛나던 윤슬의 일부분일 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바람이 부나 파도가 높으나 고래를 쫓아, 고래잡이로 삶을 시간에 실려 보낸 아버지였으니까. 말하자면 이날이라고 특별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물에 서있던 아버지와 동해호 옆구리에 묶여 있던 대왕고래가 주는 이미지가 같아, 그토록 자연스런 동화는 같은 것끼리의 연대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날의 모습은 정우에게 아버지가 대왕고래 같다는 생각으로 떠오르곤 했다. 3 시투를 하고 보름이 지나갔다. 불황은 계속되었다. 남극해로부터 냉수대인 훔볼트해류의 세력이 강해지는 시기였다. 당연히 이곳을 기점으로 합류하는 남적도해류와 크롬웰해류 그리고 멕시코난류 세력도 강해져야만 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적도에서 발생한 엘니뇨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때문에 훔볼트해류는 북상을 못하고 먹이사슬도 형성되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되는 난바다곤쟁이마저 적었다. -선장. 만선만 해줘. 정우는 까야호 항을 출항할 때의 사장이 떠올랐다. 페루 까야오항은 대서양을 무대로 어로활동을 하는 국적선의 전진기지였다. 간절한 바람으로 손을 흔들었던 사장은 퇴직공무원이다. 갈라파고스근해에 서식하는 훔볼트오징어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정보로 수산회사를 설립했다. 해양수산부 고위직으로 근무했던 까닭에 시험조사 쿼타는 어렵지 않게 따올 수 있었다. 사장은 첫 선장으로 정우를 선택했다. 정우의 첫 선장 발령이다. 정우 역시 중요한 출어였다. 어획성과에 따라 선장으로서의 생명과 명예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험조사란 것이 그렇다. 새로운 어장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장을 찾기만 하면 대박이다. 회사는 시험조사한 어장에 관한 독점권을 한동안 인정했다. 그동안 독점한 어장에서 타조업선과 경쟁하지 않고 엄청난 물고기를 잡을 수가 있다. 전재산을 투자한 사장의 미래가 정우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때가 이른 건 아닐까요? 정우의 눈치를 살피며 통신장이 말을 건넸다. 물고기가 없다고 하지만 한 마리 입질도 없는 선장의 머릿속이 불안과 초조로 복잡해보였다. 통신장으로서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불황이 스며든 바다에 적당히 바람도 불어주고 파도도 쳐서 바닷물을 섞어 주면 좋으련만 날씨마저 좋았다. -감아라. 정우는 통신장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마이크를 잡았다. 정우는 선수드럼 앞에서 대기 중인 1항사에게 씨앙카를 감아드릴 것을 지시했다. 어장을 옮겨볼 참이다. 주변에는 병코돌고래라고 부르는 돌고래가 많았다. 훔볼트오징어를 이놈들이 모두 흩트리는 통에 어황이 없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군탐지기 탐지영역은 표층에서부터 1,000미터다. 정우는 어군탐지기에서 한시라도 벗어날 수 없었다. 정확히 작살을 던지기 위한 방편으로 고래의 숨구멍을 집요하게 노렸던 아버지처럼 절박한 만선의 낚싯줄을 당기려면 집중해야 했다. 정우가 노리는 훔볼트오징어는 체구가 크다. 동장이 2미터를 넘는 놈도 있다. 홀로 유영을 하기도 하지만 무리를 이루어 움직이기도 한다. 훔볼트오징어의 크기라면… 무리를 이뤄 떼로 움직인다면… 어군탐지기가 발견 해 낼 수 있었다. 정우의 눈이 번쩍하고 벌어졌다. 250미터 수심에 깨알 같은 점이 나타났던 것이다. 점은 시간 차이를 두고 다섯 개까지 늘어났다. 정우는 전속으로 달리던 배를 정지했다. 엔진을 정지하자 배는 관성에 따라 바다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정우는 수심을 조정하는 볼륨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띠가 먼저 나타났다. 주간이라 부상하지 않은 동물성플랑크톤 일 것이다. 그런데 꺼림칙했다. 흐릿한 띠 주면의 점들이 수평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부분 두족류들은 수직이동을 한다. 훔볼트오징어라고해서 습관과 본능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였다. -데드슬로우. 어군탐지기를 바라보고 있던 2항사가 후다닥 텔레그래프 쪽으로 움직였다. -포트. 2항사가 큰소리로 복창했다. 배는 자연스럽게 좌현으로 선회를 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 기록이 나타난 주변을 더 살펴보기 위해서다. 정우는 뱃머리를 어디로 잡을까 망설였다. 불현듯 남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로를 남쪽으로 정침했다. 다시 점 기록이 나타났다. 하나 둘, 점을 세어가는 정우의 시선은 어군탐지기로 빨려들어 갈 것 같다. 긴장감으로 팽팽한 브리지엔 뱃전에서 부서져 내리는 파도소리가 고요를 밀어냈다. 정우의 온몸이 점점 바다로 변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랄까. 뱃사람들은 어획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어군탐지기라든가 소나 등 최신예 어로장비에 의탁한다. 반면에 오감에도 충실해야했다. 때때로 더 정확하게 곤두선 오감이 물고기를 찾아낼 때도 있었다. 날씨가 좋은 탓에 바다는 잔잔했고 시야는 넓었다. 정우는 어군탐지기에 의지하지만 가끔 해면을 살피는 눈탐도 병영했다. 새 떼를 찾기 위해서다. 새 떼가 날고 있는 바닷물 아래에서는 어장이 만들어질 확률이 높았다. 새가 날고 있는 바닷물 속으로 이뤄진 먹이사슬 때문이다. 새 떼는 먹이사냥을 그런 곳에서 주로 했다. 해면을 살피던 정우의 시야에 뚜렷하게 눈에 띄는 물길이 보였다. 물길은 바다와 바다를 이편과 저편으로 가르며 굽이쳐 수평선을 넘어갔다. 남적도와 남극에서 바삐 흘러온 훔볼트해류와 크롬웰해류가 맞부딪치는 접경지대였다. 흔히 수렴대라고 부르는 물길은 성질 다른 바닷물이 섞이며 수군거리듯 찰랑거렸다. 게다가 무수한 물방울에 햇살이 굴절되어 블루 다이몬드처럼 빛났다. 바람이라도 불어 바다가 거칠면 두 해류가 뒤섞어 구별되기 어렵지만 날씨가 좋은 탓에 발견하기 수월했다. 당연이 많은 바닷새들이 먹이사냥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우는 이곳을 어장으로 택할지 고민했다. -훔볼트해류가 강해졌나? 라고 정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정우는 다시 배를 정지 시키고 조업준비를 내렸다. 선원들 몸놀림이 빨라졌다. 때를 맞추어 어군탐지기에 나타났던 몇 개의 점들에게 무슨 상황이 생겼는지 흰 잔영을 끌고 수직으로 치솟았다. 흰 잔영은 수면에 가까워지자 한꺼번에 붉은 점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어군탐지기에서 없어졌다. 시간차를 두고 흰 잔영마저 사라졌다. 어군탐지기에서 점들이 사라지자 불안한 조짐으로 브리지에는 막막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때 갑판으로부터 떠들썩한 환호성이 들렸다. -고래다. 아버지가 그렇게 쫓고자 했던 고래다. 바다로 나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했다. 아버지는 하루하루를 강소주로 채워갔다. 정우가 바람이나 쐬자 낚시질을 권해도 거부했다. 아버지의 꿈은 오로지 고래를 향하여 작살을 날리다 죽는 거였다. 그건 아버지가 자신을 바다와 융합하는 방법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잊힐 것이 있었고 절대로 잊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길 거부한 채 자괴감 속으로 노년을 흘려보냈다. 포경이 금지되고 정우는 아버지의 세상으로 발길을 들여 놓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원양어선에 승선했다. 그리고 선장이 되었다. -고래다. 거듭해서 선원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검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선회창 밖으로 정우는 목을 빼냈다. 동시에 푸 하는 소리와 함께 브리지 곁에서 고래가 숨을 몰아쉬었다. 솟아오른 고래의 물뿜기는 9미터 상공에까지 이르렀다. 잠수하는 고래의 등에는 삿갓조개가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고래가 솟구친 파동으로 만들어진 파도가 연거푸 뱃전을 두들겼다. 고래는 점수하기 전 정우를 응시했다. 낯설지만 맑은 눈이었다. 정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왔다. 얼마나 가까웠던지 내뿜는 물줄기를 뒤집어쓴 옷깃이 모두 젖었다. 반백년 바다와 섞여 살아온 정우였지만 가까이서 살아있는 고래를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4 뱃머리 앞에서 고래가 떠올랐다. 정우는 깜짝 놀랐다. 스트랜딩은 아니지만 배와 충동할 수 있는 거리다. 고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긴 가슴지느러미로 인해 앞뒤 구분조차 안됐다. 고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뱃머리를 가로 질러 잠수했다. 정우는 굵고 주름진 피부 밑에서 고래의 눈을 얼핏 보았다. 게슴츠레한 고래의 눈빛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 눈빛은 임종 직전 정우를 지긋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것과 닮아있다. 순간적이긴 했으나 고래의 눈은 정우와 아버지를 연결하는 끈이었다. 정우의 가슴 안쪽에 해인을 받듯 고래의 눈빛이 새겨졌다. 어디선가 또 다른 고래의 물뿜기 소리가 푸 하고 들렸다. 무관심한 고래는 배가 다가옴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며 정우의 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두려움이 없는 바다의 제왕다운 몸짓이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통신장이 말했다. 배와 멀지 않는 곳에 크고 작은 고래들이 보였다. 개중에 등치가 작은 놈도 관찰되는 거로 보아 가족이 분명했다. 기이하게도 고래들은 쉬지 않고 수면 위를 엇박자로 솟구쳤다. 솟구치는 타이밍에 맞추어 작은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뛰어 올랐다. 고래 무리는 이따금씩 잠수를 멈추고 허공으로 물을 뿜어냈다. 물줄기는 하늘로 치솟았고 분수처럼 퍼져 짙은 수증기로 피어올랐다. 물보라는 바람에 실려 정우의 얼굴까지 날아와 내렸다. 물보라 속에는 퀴퀴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먹이가 소화되며 발생한 냄새였다.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고래의 먹이사냥 풍경이다. 훔볼트오징어 어장을 찾던 정우는 고래의 먹이사냥 터를 찾아내던 것이다. 정우가 수렴대라 생각했던 것은 포경선원들 은어로 라면 ‘맥’이다. 고래의 길이라고도 부르는 ‘맥’은 고래의 회유통로였고 먹이사냥 터이기도 했다. -고랜가 봅니다. 통신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 정우는 맥 풀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군탐지기에 나타났던 점 이야기다. 정우는 점 기록을 훔볼트오징어 라고 단정하지 못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던 점들은 재빠르게 수평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배를 정선하고 조업을 준비를 시킨 건 훔볼트오징어 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오랫동안 불황에 시달렸던 탓이다. 잔뜩 걸었던 기대가 통신장의 지적으로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렇다고 실망감에 젖을 필요는 없었다. 때로 고래는 돌고래와 달리 물고기를 한곳으로 모아주기도 했다. 훔볼트오징어 라고 다를 리 없다. 정우의 마음 속 한편에 이렇게 숨은 계산이 있었다. 고래는 바다에 떠다니는 모든 것을 먹는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식물성 플랑크톤에서부터 바다사자까지 먹이였다. 놀랍게도 동족인 고래도 공격했다. 정우가 노리는 훔볼트오징어도 고래의 먹이다. 정우는 낚시를 이용해 훔볼트오징어를 어획했다. 그러나 고래들은 버블클라우드 라는 물방울 그물을 만든다. 정우에게 어탐은 뒷전이 되었다. 고래의 사냥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러자면 좀 더 고래에게 근접해야했다. 정우는 2항사에게 미속으로 전진할 것을 지시했다. 가벼운 진동이 생기면서 배는 슬금슬금 고래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고래들은 전혀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포경선으로부터 작살을 받고 멸종의 길에 들만도 했다. 먹이사냥에는 경험이 풍부한 고래가 리더를 맡는다고 했다. 마치 포경선에서 작살을 날리는 포장처럼 상황에 따라, 먹이에 따라 전략을 짜기 때문이다. 이번 사냥에는 뱃머리 앞에서 솟구쳤던 고래가 리더였다. 흩어졌던 고래 무리가 한 팀을 이뤄 일정한 방향을 향해 몰려들었다. 고래들은 이때에 소리를 내며 먹이를 한 곳으로 몬다고 한다. 리더인 고래가 물방울 그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다 속으로부터 스쿠버다이버가 공기를 뱉듯 크고 작은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고래는 분수공의 근육을 이용해 물방울의 크기도 바꿀 수 있다 했다. 물방울 그물은 밀렵꾼이 숨겨 놓은 눈밭 속 올무 같았다. 고래 무리는 물방울 그물을 빙빙 돌았다. 이동하던 배가 물방울 그물의 범위에 들어섰다. 배 주변의 해수면이 뚜렷한 윤곽선을 만들며 끓어올랐다. 정우는 배의 정지를 지시했다. 더 다가간다면 먹이사냥을 방해할 것 같았다. 고래의 먹이로 전락한 물고기에겐 공포였겠지만 철저한 협동과 물방울 그물로 먹이를 군집시키는 두뇌가 놀라울 뿐이다. 물방울 그물에 물방을 그물이 겹쳐서 물고기의 탈출로는 없었다. 고래들은 번갈아 숨을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 뿜었다. 물줄기는 햇살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모두 다섯 마리였다. 고래 무리의 사냥은 성공을 예측하듯 일요일 오후에 하는 산책처럼 느긋했다. 아니 아름다웠다. 시간차를 두고 물방울 그물은 점점 좁혀졌다. 때때로 중간에서 뜨거운 물에 들어간 물고기처럼 군집된 물고기들이 퍼덕이며 뛰어 올랐다. 물고기가 뛰어 오르는 소리는 정우에게까지 들렸다. 물고기들이 생존을 다투는 처절한 율동을 둘러싸고 고래 무리는 마치 축구경기에 나선 선수들처럼 절묘하게 팀을 이루었다. 마침내 물고기들의 목숨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시간이 당도했다. 생명의 위엄으로 가득한 해수면이 1미터 정도 순간적으로 출렁거리며 상승했다. 수초가 지나지 않아 그 중간을 무너뜨리며 고래가 연거푸 치솟아 올랐다. 물고기들이 쏘아진 물방울 그물에 쫓겨 해수면 위에서 벚꽃처럼 흐드러질 때 정우가 발견한 건 고래의 커다란 입이다. 그리고 죽음과 신생이 공존하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흰 뱃구레였다. -와. 선원들로부터 동시에 환호성이 터졌다. 고래가족은 그렇게 반복해서 사냥을 계속했다. 먹이를 둘러쌓던 물방울 그물이 사라졌다. 마침내 고래가족의 먹이사냥이 끝났다. 고래의 먹이사냥을 돕던 새 때도 둥치를 찾아 돌아갔다. 배를 채운 고래 무리는 꼬리로 해수면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가볍게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롭테일링이라고 부르는 고래들의 놀이다. 정우는 대왕고래를 잡아 장생포 항으로 귀항하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한쪽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려왔다. 정우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고래가족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곳이 어장이다. 마음을 결정한 정우는 시앙카를 던지라는 지시를 내렸다. -고기다. 조업을 감독하고 있던 1항사가 외쳤다. 고함소리에 놀란 정우는 잠에서 깨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밤 9시다. 시앙카를 던져 놓고 선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고기다.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도 따라 들렸다. 정우는 재빨리 어군탐지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군탐지기가 온통 붉게 변해있다. 갑판은 벌써부터 훔볼트오징어가 뿜어 놓은 먹물로 먹물바다였다. 갑판이곳저곳에서 훔볼트오징어를 당겨 올리려는 선원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정우는 훔볼트오징어를 바라보며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토록 애를 태웠던 어장을 찾았다. 5 결국 정우는 태풍에 휩쓸렸다. 기압은 멈출 줄 모르고 떨어졌다. 태풍은 북상을 하며 발달했다. 예상보다 이동하는 속력이 빨랐다. 브리지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더욱더 굵었다. 간간이 우박마저 내렸다. 항로를 변경한 탓에 선미로부터 엄청난 파도가 밀려들었다. 피항항법 중 가장 위험하다는 스커딩 항해다. 선미바람이 세크퍼 30미터다. 바다는 순식간에 화이트아웃 상태가 되었다. 자동조타마저 불가능하다. 아차 하면 선원들 미래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넘쳐 들어온 바닷물이 선내로 밀려들었다. 갑판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봉쇄했다. 정우는 선원들에게 라이프자켓 착용을 지시했다. 정우의 심각함을 깨달았는가. 2항사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흘수선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쿵쿵 하고 들렸다. 7미터를 넘어가는 파고다. 배는 풍압 때문에 선수 방향을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끝없이 몰려오는 바람과 파도로 바다는 거칠어져 갔다. 정우는 배의 속력을 더 가속한 다음 직접 조타를 했다. 황천에는 선속과 선수방향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느려도 안 된다. 잘못해서 파도에 뱃머리가 밀리기라도 한다면 브로칭 투가 된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브로칭 투가 되면 대부분 배가 전복된다. 당연히 많은 배가 브로칭 투로 침몰했다. 그런 까닭에 황천에는 노련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바닷물을 뒤집어 쓴 탓에 습기가 차 앞이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히터의 레벨을 강으로 올렸다. 하지만 조타륜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는 식은땀이 저절로 고여 왔다. 피항의 긴장감으로 갈증이 일었다. 정우는 생수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풍을 몇 개나 겪었지만 이번 것은 상상 밖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 SET는 포기해야했다. 그러나 SET에 30톤도 너끈한 물고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물고기를 따라 다니는 건 뱃사람의 숙명이기도 했다. 바다가 두렵다면 애당초 배를 타지 말아야 했다. 서둘렀다. 작업은 예상하고 있던 시간을 훨씬 넘겨 끝났다. 게다가 항로마저 변경하지 않았던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후회였다. 태풍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황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다. 갈라파고스뿐만이 아니다. 황천항해중인 드레이크해협에서, 하리케인에 쫓기던 뉴펀들랜드 그랜드뱅크에서, 죽음의 암초들로 가득했던 마이크로네시아에서 고래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항로를 이끌었다. 그저 고래다. 처음엔 신기하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가 오묘하다지만 넓고 넓은 대양에서 고래를 만나기가 쉬운 건 아니다. 곤경에 빠질 때면 나타나 힘을 보태어주는 고래였다. 무언가 인연의 질긴 줄이 닿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정우는 언제부터인가 뱃머리 앞에 불쑥, 불쑥 솟는 고래가 아버지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똑같은 일이 반복될까. 아버지는 정우가 자신 뒤를 이어주길 바랐다. 장생포를 찾을 때면 꼭 정우를 대동하곤 했다. 그런 까닭에 아직까지 동해호를 처분하지 못한 채 세월에 맡겨 놓고 있다. 아버지는 임종 직전 정우에게 고백했다. 평생을 뱃사람으로 보낸 고독함과 쓸쓸함에 대하여, 다정다감하게 자식들과 소통하지 못한 미안함에 대하여, 그리고 고래를 쫓아 내달렸던 수평선에 대하여, 그 경계에서 생겼다 사라지는 일출과 일몰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을 바다에 뿌리라고 부탁했다. -안 된다. 어머니는 단번에 거부했다.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유골을 경해바다에 뿌렸다. 아버지 생각으로 정우가 정신을 잠시 놓고 있을 때 우지직 거리는 소리가 선미 쪽에서 들렸다. 선미를 후려친 파도였다. 상갑판에 지어진 마른 부식창고가 산산조각 났다. 배는 휘청거리며 왼쪽으로 기울었다. 정우는 충격에 의해 조타륜을 놓고 브리지 구석에 쳐 박혔다. 뒷머리가 어질어질 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우는 엉금엉금 기어 필사적으로 조타륜을 붙잡았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정우도 두려웠다. 기상상태로 보아 이대로 침몰하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배는 재빨리 복원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항로를 유지했다. 고래였다. 다시 고래가 보였다. 정우가 조타륜을 잡고 안간힘으로 버틸 때 뱃머리 앞의 등치는 것은 틀림없는 고래였다. 정우 앞에서 고래는 거침없이 파도를 헤치고 있었다. 하얀 포말의 파도가 뒤를 따랐다. 정우는 바다의 군주라는 듯,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두 줄기 물줄기를 시원하게 뿜으며 로깅하는 고래가 그렇게 듬직할 수 없었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우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등대입니다. 2항사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등댓불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정우는 얼른 레이더 화면을 들여 보았다. 거리가 18마일로 고정된 레이더에는 비구름 밖에 찍히지 않았다. 기상이 엉망인 탓이다. 정우는 그제야 DGPS 프로트화면을 확인했다. 묘박지로 선정한 시리야사끼 등대와 12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다시 등댓불이 반짝거렸다. 정우는 마음으로 섬광 시간을 세었다. 시리야사끼 등대였다. -기압이 멈췄습니다. 등댓불을 초인한 2항사 목소리는 활기찼다. 기압이 하강하지 않는다는 건 태풍 중심에 근접해 있고 중심을 통과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바람의 세기만으로 짐작 할 수 있다. 물론 육지에 근접하면 육지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긴 했다. 바람은 세크퍼 15미터였다. 세크퍼 15미터이면 맞바람을 받고 걸어갈 수 없지만 세크퍼 30미터로 워낙 강했던 바람이라 잦아든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6마일 거리에서 해안선이 레이더에 찍혔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대양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풋풋한 나뭇잎 냄새도 맡아졌다. 후폭풍이 더 무섭다는 뱃사람 말이 있었다. 기압의 이동으로 인해 떨어진 기압이 원래 기압을 회복하며 부는 바람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면 안전한 묘박지에 닻을 내릴 것이다. 정우는 고래를 찾았다. 고래는 정우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전히 잠수와 부상을 거듭하며 배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버지. 고래 행적을 쫓아가던 정우의 눈이 붉어졌고 젖어갔다. <끝>  
465 세방골에 뜬 달/노정희 file
편집자
2358 2016-05-31
16.06월 73호 수필 세방골에 뜬 달 노 정 희 부부동반 모임날이다. 남편은 잠시 객지에 나가있는 관계로 불참하겠단다. 무슨 떼돈 벌겠다고 마누라만이라도 모임에 다녀오라며 등을 밀까. 회원들은 짝 맞춰서 와야 한다며 말마디 마다 압력이다. “필요하면 지나가는 나그네라도 낚아채어 급조달하겠습니다.” 혼자 가니 만고강산 유람이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의 거리가 만만찮으나 버스 타고, 택시를 탄다. “장소가 어디, 성서 쪽의 셋방골?” 1등이다. 세방골에 달이 환하다. 하루만이라도 독신이다. ‘혼자’라는 명찰에 주가가 뛴다. 많이 먹으라고 여기저기서 챙겨준다. 달 보며 금메달(소주) 딴다. 잔 받으시오, 부으시오, 마시시오. 세방골 고깃간에 지글지글, 모임도 잘 익는다. 남의 살 먹으며 젓가락 위에 남편 흉을 조금, 조금만 올린다. 고기 먹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이야기 푼다. 달빛도 휘황하다. 지화자 화려강산이다. 모임을 마치자 모두 종종걸음이다. “날씨가 와 이리 맵노?” 쌍쌍이 걸어가는 등짝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옆구리가 시리다. “모임 혼자 보내서 미안하대이~” 남편 전화에 눈물이 난다. 삶의 봉우리가 높든 낮든 독신보다 동반이 외롭지 않다며 세방골에 내린 달빛이 자죽자죽 눈물을 찍는다. 아, 적막강산이다. 노정희 계간 《문장》편집위원 대구문학관 도슨트 수필교실 강사 수필낭독 강사 대구매일신문 객원기자 수필집 『빨간수필』,『어글이』 이메일 -roh-@hanmail.net  
464 千佛千塔 운주사에 다녀와서/이양섭 file
편집자
1833 2016-04-30
16.05월 72호 수필 千佛千塔 운주사에 다녀와서 여행은 물처럼 흘러 가버리는 시간을 아주 맛있게 야금야금 빨아먹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라고 시선을 좀 멀리 두고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해본다. 그 맛있는 시간과 공간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우러지기 위해선,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본다거나, 산길 바위 턱이나 고찰의 마당에 앉아 나중의 기억을 위해 메모를 한다거나 하는 짓은 외려 그 소중한 시간과 공간을 흩트리는 모양이 될 수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대충 먹으며 딴 짓을 하거나 음식의 내용(Recipe)을 기록하느라 그 귀한 맛과 분위기를 간과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다. 단 한번 지나가는 그 시간과 공간의 맛을 매순간 음미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본래의 자기를 찾아 익은 시간과 공간을 내려놓고 나온 여행이라면, 되도록 풍경과 나무들과 흙내음 바람향기 새소리 등을 살피며 흙길을 천천히 걷고, 시골 정류장에서 오래 기다리기도 하며, 삽시간에 변해버릴 많은 것들을 눈에 담고 귀에 담아 그 시간과 공간의 씨알들을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랜 직장생활을 접고 처음이다시피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떠났지만, 문학 동호회에서 알게 된 지인들이 곳곳에 있어 여정은 저절로 길 따라 사람 따라 길어지고 있었다. 강원도 정선 산골에 혼자 사는 아우와 쏟아지는 별빛 속에 하룻밤을 꿈같이 보냈고, 포항에서 이틀 동안 선배의 환대를 받은데 이어, 친구 찾아 광주에 와서 무등산에 올랐다가 저녁에는 더 모인 지인들과 열락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술이 덜 깬 나를 태우고 친구는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차를 몰았다. 운주사 입구 주차장에 들어서 차에서 내렸을 때, 눈이 부셨고 입이 벌어졌고 지잉~ 정수리로 무엇이 들어오는 떨림이 있었다. 포항에서 선배의 안내로 오어사에 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기운이었다. 오어사에서는 움푹 들어간 듯 보이는 그 절과 주변의 물과 산과 바람에 천년 전의 기운이 가라앉아 고여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거기에 다가서는 나도 그 기운에 젖어드는 느낌을 갖고 시공과 세월의 경계를 지우는 기분에 들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 비포장 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곳곳의 석탑과 석불들로 하여 여기저기 온통 천년 전의 기운이 배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에 쉬 젖지 못하고 더욱 몸을 비벼 넣으며 느껴야만 했다. 세월의 진액이 배어든 웅혼한 정령이 서린 9층 석탑은 바람처럼 왔다가는 나그네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합장하고 우러러 한 바퀴 돌며 뒤돌아섰을 때, 아! 햇살, 오후의 햇살이 석탑에 광휘를 부여하며 나를 비추었다. 천년 전의 그 햇살이었다. 천불과 천탑이 있었다는 이곳에는 길가의 돌 하나에도 천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나는 세월을 보았다.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잠시 입정하였다. 친구의 안내로 옆 산자락을 따라 올라 머슴부처를 보고 유명한 와불이 있는 곳으로 갔다. 머리가 더 낮게 자리하고 있어 좀 불편해 보였다. 절을 하고 탑돌이를 하는 기분으로 그 언저리를 돌았다. 그 근처 퍽 크게 자리 잡은 어느 양반의 무덤 뒤편, 솔숲 사이로 아주 커다랗게 주홍빛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저리 클까? 자세히 보려니 솔가지가 그냥 그리 알라는 듯 시선을 가리고, 그 너머 먼 산 위로 부푼 구름이 둥그렇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는 시간이 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가, 나는 좀 더 머뭇거리며 해 지는 광경을 볼까하다가 친구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곳곳에 늘려있는 석불은 대부분 아마추어가 만든 모양으로 일정하지도 않고 형상이 구체화되거나 면밀하지 않았다. 하늘의 석공들이 내려와 하룻밤에 만들었다는 전설은 별개로 하고, 내 생각으로는 천년도 훨씬 전에 동네의 재앙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일치 단합하여 잘 만드는 사람 못 만드는 사람 구별 없이 염원을 담아 다양한 불상을 나름의 성의를 다하여 만들어 바친 것 같았다. 그러니 그 순수성과 정감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민초의 기운을 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올라갔던 그 길로 찬바람 맞으며 다시 내려오는데 나는 알지 못할 회한에 잠시 빠졌다. 천년의 기운을 뒤로하고 지금의 내 삶에 다가서야 하는 아쉬움과 내 존재의 가치와 역할에 연연하는 이 마음이 무거웠다. 무상(無常)이란 말은 그냥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말일진대, 오늘 이 순간에 갑자기 천년 세월의 더께를 입고 선 돌 조각 앞에 괜스레 처연한 감정에 휩싸일 까닭도 아니었다. 내 살아있음으로 하여 좋은 친구와 함께 이런 세월의 깊이를 더듬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내 마음에 들어 온 이 정경과 느낌을 담아두면 생각일랑 다른 때에 또 다른 각도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새삼 친구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밝음이 역할을 다한 듯 자리를 내어주고 어둠이 아주 천천히 산천을 장악하기 전, 하늘빛은 참으로 깊은 단 한 번의 순간을 연출한다. 서녘하늘의 노을은 먼저 가신 아버지의 미소처럼 사라지고 장중한 어둠이 천천히 수묵화를 그리며 안온하게 다가서면, 하늘은 어느새 또 다른 모양으로 열리며 별들을 하나 둘 쏟아 놓는 것이었다. 운주사에서 나오는 길에 친구의 안내로 들어간 '흑두부사랑집'은 원목으로 웅대하게 짓고 실내에 우람한 고목을 들여놓아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나는 안타깝게도 검정콩으로 만든 흑두부 등 그 맛있는 음식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전날, 밤을 새는 과음으로 속이 몹시 아팠는데 아침에 친구가 안내한 복집의 그 유명하다는 복지리를 먹고 속이 거짓말처럼 풀렸건만, 운주사 다실에서 그 분위기에 취해 녹차를 거푸 많이 마시고는 다시 아프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 두부 음식들을 먹고 다시 조금 나아졌다. 연이틀 주말의 귀한 시간을 온통 내게 할애한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지금껏 내 삶이 강퍅했는지 몰라도 목적 없이 베푸는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이를 따져 채무의 감정을 갖는 것은 친구에게나 나에게도 마땅치 않는 듯하여 내 합리화 삼아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이는 비단 이 친구에게만이 아니라 이번의 여행에서 만난 곳곳의 고마운 사람들에게 정중히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현세에 나와 인연 지어진 소중한 사람들에게 갖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겠다. 하나는, 정선의 자연인 아우가 들려준 '지게이야기'를 떠올려 응용해 본다. 어차피 인생이란 지게를 지고 가는 길이라면, 그 지게에 적당한 짐이 얹혀 있을 때 발걸음과 자세도 안정된다. 또한 그 짐을 잘 운반하려는 줄곧 정신을 가다듬어야할 테고, 힘을 써 땀을 흘리고 그 땀으로 시원한 바람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야 할 짐 속에는 삶의 목적이나 인연의 고리나 책임과 의무 등 갖가지가 포함될 것이다. 여기에는 누군가에게 베풀거나 신세를 진 기억도 포함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내 것을 빼앗기거나 상처 입은 기억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삶의 애환을 다 잊고 초탈하여 지게마저 벗어버리고, 수도승이나 도인처럼 살 수 없을 바에는, 이런 인간적인 부담감 같은 것도 얼마큼 적당히 그 짐의 무게에 보태어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빚만은 지지 않고 살아야지 하던 생각에 다소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빚은 없이 산다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가난하고 어려웠던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형편이 다소 나아진 지금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손을 거친 먹을거리를 먹고 누군가 쓴 책을 읽고 누군가 만든 물건을 사용하며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당연시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찌 모든 것이 물질적 기준의 대가로 상쇄되어질 수 있겠는가. 둘은, 어느 Life Therapist(삶의 치료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 생각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존재계(存在界)에는 '보이지 않는 순환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기운의 나눔이나 파장의 전파 법칙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는데, 내가 어떤 대상에게 알게 모르게 물질이나 기운(선행이냐 악행이냐, 좋다 나쁘다는 그 기준이 다양하고 선입견일 경우가 많음)을 나누어주게 되면, 그 당사자로부터 내게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주로 그 대상은 또 다른 대상에게 그 기운이나 물질을 나누어주게 되고, 나는 내가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에게서 그런 기운이나 물질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내가 베푼 것으로 꼭 내가 아니라 내 가족이나 주변에서 받게 되기도 하고, 내 가까운 사람의 베풂이나 저지름으로 내가 그것을 되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시간흐름에 따라 증폭되기도 하고 서서히 작아져 소멸되기도 하는데 이를 복(福)이나 화(禍)로 받아들이게 된다. '보이지 않는 순환의 법칙'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뭐든 주는 대로 막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베풂과 저지름으로 이런 결과를 얻게 되나 생각해 볼 일이며, 다시 누군가에게 선업을 베풀어야 할 마땅한 도리를 지켜야 한다. 내가 가난하면 형태를 바꾸어 마음이나 몸을 바쳐 봉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기운을 대상에게 보내야하는 것이다. 고마운 인연들이 너무도 많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우리는 자기 안에 갇혀서 미처 그 인식을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과분한 신세를 졌다. 그들의 선한 마음과 순수한 호의를 잊지 않으며 나는 또 다른 대상에게 증폭시켜 베풀고 봉사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친구 덕분에 인연이 된 천년고찰 운주사와 천년 세월 너머 선인들의 기운을 받아 나는 또 새로워졌고 나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463 상사화 외1편/남효선 file
편집자
2589 2016-04-30
16.05월 72호 시 상사화 올 여름 상사화 꽃 보지 못했네. 전 해 피웠던 상사화 그 자리 새벽마다 기웃거리지만 못내 상사화 연한 살빛 만나지 못했네 몇 달 전 마당 가운데 수도관을 묻으며 내내 우려했지만 상사화는 종내 피질 않았네 가슴 한쪽 웅크리고 앉아 평생 떠날 것 같지 않던 첫사랑 기억 저만치 혼자 있네 힐끗 돌아보니 홀로 아련한 불꽃 한줄 피우고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네 여름햇살 온몸으로 반짝이며 상사화 끝내 피질 않았네. 지네 지네 발가락의 수는 알 수 없다. 봄이 되면 월동을 마치고 어김없이 찾아든다. 아내는 이월 초순에 지네를 만난다. 능숙한 솜씨로 지네를 잡아 노끈에 맨다. 달은 훤한데 지네는 잡혀 달 속에 있다. 지네가 슬슬 달을 갉아 먹는다. 시월 가을바람이 깊어지던 어느 날 아내는 폐경을 만났다. 남효선 약력 1958년 경북 울진서 나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와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서 공부했다. 1989년 『문학사상』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 『둘게삼』 시화집 『눈도 무게가 있다』외 다수 있다. 民俗誌 공저『도리깨질 끝나면 점심은 없다』『남자는 그물치고 여자는 모를 심고』외 다수가 있다. 시민사회신문 전국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아시아뉴스통신 기자로 일하고 있다. 울진군축제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462 나를 잊으셨나요 외 1편 / 권순자 file
편집자
2412 2016-04-30
16.05월 72호 시 나를 잊으셨나요 죽음의 땅에서 살아나온 나를 잊으셨나요 울기엔 너무 지치고 너무 슬퍼서 대화를 잊어버렸어요 온몸엔 상처뿐 지옥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소녀를 잊으셨나요 지옥 한복판에서 폭력의 나날을 눈보라처럼 온몸으로 맞으며 폭력에 젖어들었죠 빛이 숨기는 악마의 검은 손아귀 소녀의 목숨이 파들거렸어요 인간이기를 거부한 악마들에게 짓밟힌 어린 꽃들 꽃잎이 찢어지고 시커멓게 멍들었죠 절망한 소녀는 그러나 달이 차오르듯 삶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온몸에 부풀어올랐죠 끌려간 전쟁터가 너무 멀어서 나를 잊으셨나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지옥이 잊혀지지 않아요 지옥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우려 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서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는데 완벽하게 잊으려고 애쓰는군요 포근하고 아늑하던 시절을 꿈꾸고 있어요 순진한 소녀들 순박한 소녀들 폭력에 놀라고 기진하여 붉게 흐느끼는 모습 자주 보여요 다리 어릴 적 동네어귀를 지나 읍내에 가려면 큰 내를 건너야 했다 어른들이 여름이면 외나무다리를 새로 놓았다 큰 비가 오면 나무다리는 흔적도 없이 홍수에 떠내려가 버렸다 읍내 장보러 갈 때나 들녘에 아버지 참 갖다 주러 갈 때에는 어머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물 흐르는 것을 보면 어지러워서 다리를 못 건너겠구나 어머니는 신발을 벗어들고 시내를 건넜다 어머니는 산골출신이었다 나는 다람쥐처럼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외나무다리는 겨울에도 있었다 어머니는 겨울에도 버선을 벗고 고무신을 벗고 건넜다 어지러워서 물 흐르는 것을 보니 어지러워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권순자 경주 출생.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 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Mother's Dawn』(『검은 늪』영역시집) 이 있음. 이메일: 479sky@naver.com 전화: 010-6201-4792  
461 잃은 배 외 1편/남태식 file
편집자
2189 2016-04-30
16.05월 72호 시 잃은 배 바람 잠잠해지자 다문 입이라기도 하고 마른 눈이라기도 하는 주술의 반이 욕인 선무당이 왔다. 선무당은 교활했다. 굳게 다문 입으로 신음을 터트리며 겨우 마른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 잔잔하던 우물은 끓어 넘쳐 다시 거친 풍랑이 일었다. 번번이 그랬다. 선무당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고 겨우 마른 눈물이 떨어지면 안간힘으로 곧추 서 버티던 방주는 풍랑을 못 이겨 우물 아래로 가라앉거나 배를 뒤집었다. 결국 주술은 다 욕이어서 그런 그 날 많은 여자와 사내들이 방주를 잃었고 그런 그 날 이후 방주를 잃은 여자와 사내들은 오래 광장과 거리를 떠돌았다. 기미幾微 기미가 있었던가. 첫 번째 터널을 지나니 들어서기 전까지 전혀 기미가 없던 하늘이 비를 뿌렸다. 게릴라성 소나기려니 금세 지나가려니 하고 두 번째 긴 터널을 지났더니 비는 호우로 바뀌어 있었다. 갈까 멈출까 고민하다가 세 번째 터널까지 지났는데 비는 드디어 장막을 쳤다. 슬픔은 이렇게 소나기처럼 와서 터널에서처럼 잊히다가 터널을 지나면서 점점 더 거세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치유되지 않은 슬픔은 더 그렇다. 이제 그만 하자고? 기미는 여전하다. * 약력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망상가들의 마을』  
460 안녕, 주르륵 랩소디 외1편/진란 file
편집자
2312 2016-04-30
16.05월 72호 시 안녕, 주르륵 랩소디 안녕, 꽃들아 우리 연애할까 봄이 오나봐, 연애하고 싶으니 봄이 온 거지 문 밖으로 긴 꼬리를 끌며 사라진 너의 길 위에 서서 연분홍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너의 우울을, 등 뒤로 흘러내리는 안개꽃 같은 네 손짓들을 보았지 안녕, 우리 연애나 할까 우리의 하루는 지상에 단 한 번의 기회 지금 우리의 봄인 거지, 그들이 온다잖아 온 세상이 다 웃고 흐드러져도 네가 나를 울지 않으면 우리는 흔적 없이 없는 것들이 되는 거야 버려진 가면 사이로 빛나던 허황한 눈빛을 끌어안고 불면의 하데스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젊었던 오르페우스의 사랑처럼 영원한 리라가 되자 해마다 오는 봄이라는데 우리의 봄은 멀리 흘러갔지 동무들과 목젖이 보이도록 웃으며 네가 떠날 때 허공에서 큰 소리로 네 이름을 불렀을 때 샤갈의 하늘에 떠서 인형처럼 딱딱한 다리로 헤엄을 치면서 더 큰 소리로 네 이름을 불렀을 때 붉은 장미꽃들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푸른 잎들이 우레처럼 피어났다고 했던가? 우리는 각각의 우주가 다른 투명한 비눗방울과 방울 서로를 넘어서지 못하고 부딪혀 깨어지고 잊어버렸지 그리고는 동무들과 큰 소리로 웃으며 너는 달려가 버렸지 웅크려 밤을 지새우고 숨죽여 눈물을 위해 노래를 흥얼거리고 내가 더 어두워졌을 때에도 네 웃음소리는 들려왔어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가 좋아서 네게 주었을 뿐인데 그게 최선은 아니었던 거라고 이봐 안녕, 우리 연애라도 다시 할까? 이번엔 네가 좋아하는 것을 줄게, 꽃아 봄눈이 가렵다 그대라는 꽃잎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어색하던 첫 만남처럼 쑥스러운, 무성한 그대의 안부가 훌훌 날아온다 뭉텅뭉텅 어디에 숨겨두었던 말인지 손을 내밀면 금새 눈물로 글썽이는 솜눈이 하염없을 것처럼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닿자마자 사라지면서도 무심코 던지던 말처럼 내 어깨를 툭 툭 건들고 가는구나 꽃잎같은 그대 그 날의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 간신히, 손 내밀어 잡지 못하던 고요를 뭉치며 주머니 속의 손난로만 만지작거렸었지 두 마리 짐승만 남아 서로의 어깨를 물어뜯으며 여우 구름 피어오르는 골짜기에 묻히고 싶다던 그 생각이 차갑게 뺨을 때린다 잊혔다고 접어버린 마음 위에 봄눈 흩날린다 산벚꽃 질 때처럼 글썽이는 입술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눈 시린 그대 불투명했던 겨울을 보내는 마지막 인사는 가볍고 차갑고 쓸모없는 잔정처럼 무책임한 봄눈 같았다고 봄눈 날린다 진란 약력 전주 출생, 2002년 계간《주변인과 詩》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집 『혼자 노는 숲』  
459 새로 오는 네가 누구든 외1편/이상훈 file
편집자
2122 2016-04-30
16.05월 72호 시 새로 오는 네가 누구든 사람이든 꽃이든 눈물이든 하물며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든 누군가 새로 오는 네가 오는 날이면 하늘도 슬그머니 키를 낮추어 햇빛이든 별빛이든 가깝게 밝혀두고 바람도 귀 열어 숨죽이는 마당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 위에 가락 하나 얹히고 고운 향기 안개처럼 깔리면 사람이든 꽃이든 때로는 사람이 꽃이 되든 꽃이 사람이 되든 아, 물결처럼 일어서는 노래 한 자락 가는 네가 누구든 가는 뒷모습은 늘 겨울 냄새 나는 황무지 사람이든 꽃이든 눈물이든 하물며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든 누군가 가는 네가 문득 엄마일 때쯤엔 그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빈 집 거미줄 엉키고 슬레이트 지붕 한 쪽 슬그머니 내려앉고 자주 귀신도 나와 씨나락을 까먹으며 앉아 있는 길 위에서 가는 걸음이 오는 걸음을 만나면 그 속도와 무게와 부피를 잴 염도 없이 다만 가소롭다 가는 네가 누구든 간다는 것은 세상 하나 무너져 내리는 일 이상훈 경북 문경 출생 들문학회, 경북작가회의 활동, 시집 '나팔꽃 그림자', 산문집 '서른에 만난 열여섯', hunahuna7185@hanmail.net  
458 복숭아꽃밭을 찾던 여자 외1편 / 김재순 file
편집자
2043 2016-04-30
16.05월 72호 시 복숭아꽃밭을 찾던 여자 저 여자 이제 그 꽃밭을 찾았을까 얇은 입술에 꽃잎 한 점 묻어있네 옛 사람이 거닐었다는 복숭아꽃밭은 어디 있을까 번쩍이는 불빛 속에 숨었을까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 속을 다 보여주지만 그 만큼 지독한 게 또 있을까 무릉도원은 분명 그 속에 숨었을 게야 벌컥벌컥 병째 소주를 들이키던 여자 자욱한 담배연기 요술램프 연기처럼, 문득 도원에 데려다 놓을 것 같아 쿨럭쿨럭 줄담배 피우던 여자 아아, 그의 가슴은 정말 활짝 핀 복사꽃밭일 거야 어린 것들 떼어놓고 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던 여자, 저 여자. 네온의 꽃밭을 보다 어둠을 쨍쨍한 봄볕이라 생각했을까 형형색색 네온꽃이 만발했다 에버랜드의 플라워 스트리트처럼 꽃들의 축제장이 된 유리창 저 너머 거리 목말을 탄 아이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젊은 커플들은 꽃그늘로 들어간다 웨딩카 같은 자동차들 계속 지나간다 그러나 저 거리 네온이 피기 전 저 곳은 마음 한 곳이 절단된 어미 곁에 눈물 가득 머금은 어린이가 쪼그려 있던 곳 실버카에 몸을 기댄 노인들이 휴지 줍는 일자리로 몰려들던 곳 담요를 두른 중년의 남자가 기초생계비 신청하러 가던 곳 담벼락의 그늘에 몸을 걸치고 맨발의 주정꾼이 잠을 자던 곳 빗줄기는 후두둑 쏟아져 저 길바닥도 온통 꽃빛으로 어룽지는데 낯빛이 어두운 사람 하나 유리문에 기대섰다 김재순: 경북 상주출생 상주작가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457 실업급여 외1편/이석현 file
편집자
2242 2016-04-30
16.05월 72호 시 실업급여 남들은 회사로 출근 하는데 나는 산으로 가고 남들 월급 받을 때 나는 실업 급여를 받는다. 구름 가린 운제산에 올라 산 아래를 보니 멀리 용광로에선 쇳물이 끓고 운전실안 분주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오늘도 하루 해가 길겠다. 성산포 사랑 조껍데기 술을 먹고 성산포 바다로 간다. 바다가 취한건지 내가 취한건지 파도가 지난 사랑을 파헤친다. 일출봉에 뜬 해가 먹구름에 가려질때 유채꽃은 환하게 내 가슴에 불을 지핀다 조껍데기 술에 취해서 성산포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술도 사랑도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가슴을 태운다는 걸 둘다 껍데기였다는 것을 <이석현시인 약력> 2002년 [작가정신] 등단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포항문학 회원 포스코 인재개발원 자문교수 에너지절감기업"이에스테크" 대표  
456 노숙 외1편/김성찬 file
편집자
2333 2016-04-30
16.05월 72호 시 노숙 김성찬 부산역 뒷편 공터 무료 급식소 생을 저당 잡힌 이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표정이 한결 같이 굳어 있다 막차가 떠났다 담배를 꺼내 어둠을 길게 당겼다가 훅- 불어낸다 돌아갈 수 없는 몸뚱아리 앙상한 갈비뼈 마저 지나가는 ktx 레일 위에 통째로 던져 주고 싶었다 첫 차는 새벽 다섯시 서울행 KTX 안내 방송이 나간 직후 철도경찰 구두들이 요란스럽게 달려와 꾸던 꿈 마저 포박한다 대합실 곳 곳에서는 쫒고 쫒기는 대활극이 리얼하게 상영 중이다 누군가 닳도록 밟고 갔을 지하도 복도 한켠 바닥에 얹어본 시린 손 따습은 고향집 아랫목이 그립다 신문지로 바람을 꼭 꼭 막고 잠을 청해보지만 자꾸 새어나오는 노숙의 잠 꿈은 마구 흥클어져 혼돈 속에 빠져 있다 서포를 추억하다* 1 백련 포구 얕은 바다 건너 큰골 허리등논배미 초옥 언덕배기 소나무숲 사이로 쪽빛 바다는 거친 바위틈을 벌린다 바람의 씨앗으로 잉태되어 자란 뒤틀린 흑송의 삶 껴안는 앵강바다 어머니 안부 돛단배에 실려오네 이름모를 풀들과 몸 비벼대며 한 땀 한 땀 채마밭 일구고 고단한 흙발로 걸어온 만월 선반에 올려둔 그릇안에서 달거닥거리던 삼경 무렵 아주까리 등불 밝혀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시를 쓰자 하나* *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 어머니 생신날 지은 시 읊조려 보다가 승상 계옵신 북천하늘 바라보며 불충했던 마음 뜯으며 자책하던 삼경 무렵 아랫마을 마지막 등불 꺼질 때까지 못 이루던 잠은 혼돈이었다 2 삿갓처럼 엎어진 섬 등에 지고 돌아나오는 길 소금바람 찾아와 헤진 꿈들 누덕누덕 기워 덮은 지붕 들춰보고 있다 파도가 가끔 엿보고 가는 적소를 뒤돌아보며 곧게 살았거라 곧게 살아가거라 어머니 당부 떠올라 불효한 날들에 얼굴 붉어져서 뱃전에 기대 있을 때 내 볼 스쳐가던 두셋바람 은빛 톱날 되어 사백년 웅크린 노도섬의 결(結)을 잘게 썰어 귀양바다 저 바다 눈물바다 저 바다 한 뼘 한 뼘 메우고 있다 -졸시집 파란 스웨타 수록 * 서포 김만중 조선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을 지었으며 숙종 재위 때 인현왕후 폐출에 반대하다가 남해 노도에서 귀양 중 병사 했다 **노도 유배지에서 어머니 생신날 지었다는 시천시 59년 대구 출생 92년 kbs.심상 공동 공모전 당선 2012년 파란 스웨타 출간 현제 카톨릭 문인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455 門 외1편/김인구 file
편집자
2036 2016-04-30
16.05월 72호 시 門 공장 문을 닫았다 폐업 신고가 되지 않는다 설핏 얼룩이 다녀간 공장 내부에선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은 기계 부품들이 기척을 내며 햇살의 그림자가 놓일 창틀의 오후를 필요로 한다 조금 열린 창 너머로 적당한 먼지를 품은 햇볕들은 여전히 제집처럼 공장 안을 들락거린다 쉰 소리를 내며, 신음소리를 삼키며 근근히 가동되는 낡은 기계들의 엄살이 공장 문에 기대어 농성 중이다 뜨거운 물을 틀어본다, 흘려보내 본다, 흐르는 물소리가 희미한 기계 작동음들과 뒤섞이며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제 흔적만큼은 기억해 달라고 아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온갖 회로와 통로를 통해 저마다 육성과 주파수를 나누어 보낸다 문을 닫아도 폐업처리가 되지 않는 공장들의 낡아가는 벽돌과 연기가 끊어진 굴뚝과 쓸데없이 예민해지는 안테나는 공장 내부를 지키는 명분이다 숭고한 그늘 한켠이 천천히 태어나는 오후 네 시 해 넘어가는 풍광을 배경으로 또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 낯설지 않는 문이 열린다 결혼, 매혹의 사기를 觀하다 전 생애가 거짓인 나는 오늘도 해를 품는다. 달려 나오는 풍경사이로 몸을 숨기고 아그배나무 꽃술에서 열리는 만삭의 해가 지길 기다린다. 기다림 너머에 우뚝 서 있는 어둠을 눈뭉치처럼 뭉쳐 가장 우아하게 앉아있는 고양이 목에 매단다. 윤기 나는 고양이의 털끝이 밀린 기지개를 털어낸다. 키스가 달콤한 시간은 사랑하는 연인의 어깨를 넘어 목덜미를 넘어 목 넘김이 상쾌한 흑맥주 거품 같은 어둠의 결을 매만진다. 눈을 감고 나는 거짓의 실타래를 풀어 당신의 목에, 팔에, 다리에, 손가락에 깍지처럼 어둠을 건다. 허밍처럼 눈이 감기고 호객행위가 당당한 십이월 짧은 오후가 지상에 방치된다. 전 생애가 사기인 나는 어디서나 시작이고 끝이다. 푸석한 어둠에 풀어지는 농담이다. 틀어지는 반전이다. 해가 진 거리를 너덜거리는 구두 밑창에 구겨 넣고 걷는다. 고양이가 목젖을 ㅂ자처럼 떨며 운다. 온통 ㅂ자로 둔갑한 어둠으로 퍼져 나가는 고양이 울음소리 한 생애를 살아온 내게 해는 떠오르지 않았고 어둠은 뭉쳐지지 않았다. 고양이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담을 뛰어 넘었고 키스는 내게 건너오기 전에 사라졌다. 팔꿈치의 통증이 온몸의 혈관을 두드려 어디에도 있지 않은 나를 증명한다. 어디에도 없는 당신의 환상을 찾아 헤매고 오지 않을 기다림을 기꺼이 기다린다. 짤랑짤랑 소리 나는 어둠을 손바닥 안에 가두고 내일을 흔든다. 전 생애가 거짓이고 사기인 나는 오늘 하루도 부드러운 무명천으로 광기 돋는 해를 닦는다. 어둠을 닦는다. 빠알갛게 접힌다 나는, 하늘 한가득 거짓별이 솟는다. 나는 링 없는 코너에 던져진다. 오늘은 어제다. 전북 남원 출생. 91년 시집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로 작품활동 시작 작품집으로 『신림동 연가』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외 다수의 공저  
454 길을 헤매다/고창근 file
편집자
1875 2016-04-01
16. 4월 71호 소설 길을 헤매다 “어머, 저⋯⋯.” 아내는 그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뒷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그런 표정에 아랑곳 않고 늘 그렇듯 미소를 띠곤 거실로 들어섰다. 2박 3일 동안 도청에서 이뤄진 정신건강교육에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에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정신건강교육은 창조적 혁신역량을 강화하고 직무수행 능력과 행정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명분이었으나 대부분 가지 않으려고 해 그가 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교육이었다. “당신, 이번엔 더 많이 작아진 거 같아요.” 안방으로 따라 들어온 아내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의 양복을 받아들며 키를 재 보기라도 하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왜 이래.”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대충 보아도 그의 키는 아내의 가슴에도 못 미치었다. 꿈을 꾸어서 그래, 꿈을.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내는 그의 양복을 옷장에 건 뒤에도 한 동안 그를 바라보다 씻고 식사하라는 말을 남기곤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잠시 서 있다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나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꿈 때문이야, 꿈. 그는 한숨을 쉬었다. 잠을 자지 못할수록 키는 작아졌다. 키가 작아질수록 꿈은 그에 비례해서 많아졌다. 꿈은 보통 사람들이 꾸는 일반적 꿈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심하게 치고 박는 싸움이거나 혹은 그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때리는 꿈이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누구를 때려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심하게 언쟁을 한 적도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성실하고 착한 사람으로 여겼다. 소위 법 없어도 살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평판에 흡족해 했다. 가정에 충실했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였다. 아이들에게도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아빠로서 충고하기도 했다. 자신 또한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것을 인생의 미덕이자 당연한 의무라고 여겼다. 그런데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을 둥 살 둥 싸우는 꿈을 꾸다니. 그는 그런 꿈을 꿀 때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키는 작아졌다. 물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면 표시가 났다. 이제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예전에 그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는 160cm 가까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171cm까지 나갔다. 그때 키가 어른이 되고나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싸우는 꿈을 꾸기 시작한 지가 5여 년이 지났을 어느 날이었다. “계장님 발이 불편하세요?” 여직원이 결재 서류를 그의 책상 위에 놓으며 물었다. 그의 뒷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는 다른 부서 여직원이었다. 서류는 협조공문이었다. “발? 아니.” 그는 의자를 뒤로 빼고 슬리퍼를 신은 발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편한 점도 없었다. 슬리퍼를 벗고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봤는데 계장님이 항상 발뒤꿈치를 들고 계시길레 혹시 발이 불편하신가 했어요.” “아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슬리퍼를 신고 의자를 책상 앞으로 당겼다. 그리곤 여직원이 가져온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곧이어 그는 서류를 들고 가는 여직원의 시선을 느꼈다. 뭔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 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여직원의 시선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발바닥을 앞뒤로 움직였는데 뒤꿈치에 와 닿는 바닥의 느낌이 없었다. 그는 의자를 뒤로 빼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암 조직 검사를 하고 결과를 보는 심정이 이럴까. 또 다시 그는 어,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역시 가슴에서 쿵, 하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꿈치가 공중에 떠 있었다. 일이 센티나 될까, 그 정도였다. 그는 뒤꿈치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의자의 삐꺼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가 앞으로 쏠리며 뒤꿈치가 바닥에 닿았다. 자신도 모르게 휴, 하고 숨을 토해냈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에게 말한 여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과장한테 결재 받으려 간 모양이었다. 다시 발바닥을 여러 번 움직여보자 다행히 뒤꿈치는 바닥에 닿았다. 그러면서도 차마 엉덩이를 뒤로 빼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금 앞으로 당겼다. 10여 년 전이었다. 물론 지금은 발바닥 앞 쪽, 그러니까 발가락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이틀 동안 꾼 꿈을 되새겼다. 평소에 집에서 잘 때에도 꿈을 꾸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낯선 곳이니 증세가 더 심해 이틀 동안 계속 꿈만 꾸었다. 이번엔 뱀과 똥이 나오는 꿈이었다. 첫날 밤 꿈은 이랬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있는데 똥이 마려웠다. 장소는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이었다. 그는 급하게 공중 화장실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똥을 쌀 것 같았고 급한 김에 낯선 집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집조차도 모두 문이 잠겨 있었다.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어김없이 화장실엔 문이 잠겨 있었다. 그러다 화장실을 겨우 찾았으나 이번엔 오줌 누는 데만 있고 똥을 누는 곳이 없었다. 생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는 소변 누는 곳에 똥을 눌까 망설였다.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데 재빨리 누고 나오면 누가 알까. 망설이고 있는데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얼른 밖으로 나와 다른 화장실을 찾아 나섰지만 매양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건 꿈이야. 그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드디어 똥을 눌 수 있는 화장실을 찾았고 급한 김에 바지와 팬티를 내렸다. 그런데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들어왔다. 희한하게도 그가 똥을 누는 곳은 칸막이가 없는 곳이었다. 들어올 땐 분명히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뭐라 지껄이며 소변을 누었고 그는 빨리 누고 나가야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런, 똥이 나오지 않았다. 정리를 하자면 이런 꿈을 계속 꾸다가 밤 3시경에 잠을 깼고 그 뒤로 잠이 오지 않아 아침 기상 시간까지 비몽사몽으로 지냈다. 그러니 낮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강사의 말은 수많은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웽~ 소리로 들렸다. 두 번째 밤에는 어느 낯선 곳을 가고 있는데 뱀이 한 마리 있었다. 뱀을 피해 겨우 지나갔는데 또 뱀이 나타났다. 뱀을 건너뛰면 또 다른 뱀이, 이번엔 두 마리가 나타났다. 건너뛰면 서너 마리, 겨우 피해 지나가면 이번엔 수십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물릴까봐 두려움에 떨면서 껑충껑충 뛰다보면 숨이 가빠왔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뱀을 피해다니는 것 같은 환상에 시달렸다. 그렇게 밤새 뱀과 사투를 벌이다보면 어느새 창밖이 뿌옇게 밝아왔다. 자신의 키가 1센티는 작아진 느낌이었다. 실제로 세면실로 가 세수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목은커녕 얼굴조차도 겨우 보일 지경이었다. 뒤꿈치를 들고 보면 겨우 가느다란 목이 보였다. “어떡해요, 당신.” 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는 그를 곁눈으로 보던 아내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식탁 의자에 앉은 그의 발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어젯밤 잠을 도통 못 자서 그래. 낯선 곳이니 오죽 하겠어.” 그는 건조하게 말하곤 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마른 모래를 입에 문 느낌이었다. 된장찌개를 떠서 입에 넣자 씹기가 한결 나았다. 연거푸 된장찌개 세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갈치구이와 더덕구이가 있었지만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된장찌개로만 밥을 다 먹고는 일어섰다. “약은 꼬박 먹는 거지요?” 아내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약은 정신과 약이었다. 여러 과를 거쳐 마지막으로 간 정신과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정신과 약은 그의 키가 줄어드는데 아무런 항거를 하지 못했다. “네비를 업그레이드 해야겠어.” 그는 대답대신 네비게이션 얘기를 꺼냈다. “네비가 왜요?” 아내는 밥그릇을 개수대에 놓고 수돗물을 틀면서 물었다. “그게 말이야.” 그는 방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쪽 길밖에 몰라. 그 왜 있잖아. 대구에 가려면 고속도로가 있고 국도 4차선도 있잖아.” “그런데요?” 아내는 반찬을 냉장고에 넣다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네비는 계속 고속도로만 안내하는 거야. 나는 국도로 가고 있는데. 국도가 요금도 없고 고속도로나 진배 없는데 말이야.” “원래 네비는 주도로만 안내하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그는 쓴 한약을 마신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구에 가는 길을 잘 알지만 대구 시내에서 도청으로 가는 길이 매번 헷갈렸다. 그래서 아예 집에서 출발할 때 네비게이션에 도청을 도착지로 설정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톨게이트로 들어가지 않고 국도로 가자 가는 길에 계속 되돌아오라는 안내가 나왔다. 100m 전방에서 좌회전하십시오, 라는 안내가 나왔고 무시하고 계속 가다보면 또 200m 전방에서 우회전 하십시오, 라는 안내가 연이어 나왔다. 네비게이션의 여자는 집요했다. 국도 4차선에 진입하고도 몇 번 더 되돌아오라는 안내를 하더니 결국 포기하고 계속 직진하라는 차가운 금속성 음성으로 안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구시내에서도 대충 도청 가는 길을 아는지라 복잡한 8차선 도로로 가지 않고 2차선 도로로 길을 잡았다. 그 길은 가로질러 갈 뿐만 아니라 신호등도 많지 않은 도로였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은 계속 100m전방에서 좌회전하세요, 200m전방에서 우회전하십시오, 라는 말을 계속했다. 자꾸 듣다보니 왠지 그 길로 가야할 것 같은,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항상 도덕과 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온 그에게는 여자의 차가운 음성에 불안감이 솟아올랐고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드러누웠다. 잠이 쏟아졌다. 매일 누구와 싸우느라 잠을 못 자니 하루 종일 잠이 왔다. 그렇다고 막상 드러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매번 그렇듯 금방이라고 잠이 들 것 같은 느낌에서 정신이 점점 맑아오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어머. 집에 왔을 때 아내의 얕은 비명과 함께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랐다. 이번엔 많이 작아진 거 같아요. 그는 오른 팔을 들어 이마로 가져갔다. 처음 몸이 이상하게 느낄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벌써 10년이 지났는데도 서늘한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옷을 입을 때였다. 바지를 입었는데 헐렁한 느낌이었다. 뱃살이 빠졌나. 뱃살을 빼기 위해 특별히 운동을 하거나 식이요법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윗옷을 입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헐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팔을 앞으로 뻗으니 소매 끝이 손등을 모두 가렸다. 겨드랑이에서 찬 땀방울 하나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곤 그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다만 고개를 숙이고 옷을 한번 둘러보았다. 2년 전 아내가 세일한다며 사온 체크무늬 양복이 맞았다. 마음에 들던 옷이라 자주 입는 편이었다. 다음엔⋯⋯ 그는 음, 신음소리를 내며 오른 팔을 이마에서 내리고 왼 팔을 올렸다. 방에서 나와 현관에서 구두를 신을 때도 그랬다. 발이 쏙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뒤를 벌릴 필요가 없었다. “왜요? 뭐 잘못 됐어요?” 아내가 물기가 남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왔을 때 그는 구두를 이리저리 살피던 중이었다. “근데, 원래 신발이 좀 컸었나?” 그는 이상하다는 투로 고개를 들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 구두가 왜 이리 크지? 전엔 왼쪽 구두가 조금 작은 거 같다고 투덜거렸잖아요.” “그래, 그랬지.” 또 다시 서늘한 느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는 잠만 자면 싸우는 꿈을 꾸기 시작한 지가 1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 전날 꿈에는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때리는 꿈이었다. 무엇 때문에 때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상대방은 벽에 기대고 있는데 그가 양 주먹으로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강타하는 것이었다. 때리고 또 때리고⋯⋯. 상대방은 맞기만 하였다. 반항하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 상대방이 곧 죽을 것처럼 쓰러졌을 때에야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주먹도 퉁퉁 부은 것처럼 아팠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군지 안다면 왜 때렸는지 이유라도 짐작하겠건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런 꿈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여 년 동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꾸었고, 그럴 때마다 깨어나서는 낭패감과 당혹감에 온 몸을 떨었다. 아마 그 무렵 정신과에 갔다. 잠을 거의 못 자고, 잔다고 해도 싸우는 꿈에 시달리다보니 도대체 출근해서 업무를 볼 수 없었다. 요즘 화나는 일이 있으세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수 없이 스스로에게 물은 질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요? 업무나 아님 상사나 동료들에게나. 아뇨.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직장은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상사나 동료들에게도 업무나 대인관계에서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성실하고 무던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술자리에 가면 끝까지 그의 주위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집에서는요. 사모님이나 애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말이지요? 아뇨. 그는 또다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내와의 관계도 원만하였다. 아내는 그야말로 현모양처였다. 전업주부지만 살림 잘 하고 내조 잘 하고 아이들에게도 다정한 엄마였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생인 딸도 착했다. 그에게 한 번도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고분고분했고 때로는 재롱을 부리기도 했다. 물론 용돈을 더 타기 위해서였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한 달 용돈에 버금가는 돈을 주기도 했다. 일단 약을 먹어봅시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으니 마음을 편히 먹으라고 했다. 그건 의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자신도 짐작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가 마음 편안하게 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성격은 느릿했고 여유로웠다. 강계장처럼 살면 세상 걱정 없겠소. 직속 과장인 황이 한 말이었다. 물론 그 무렵 이상한 건 있었다. 눈물을 흘릴 때가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렸다. 이런, 내가 나이가 드는구나, 싶었다. 아내 또한 나이가 50세가 넘어서면서 드라마를 보며 자주 눈물을 훔치니 다들 그렇구나 싶었다. 아마 그 무렵이었다. “어? 강계장이 나보다 키가 작았었나?” 황과장이 지나가다 그의 곁으로 와서 아래위로 보며 말했다. “글쎄요.” 그는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듯 허허 웃고 말았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황과장이 자신보다 5cm는 더 큰 것 같았다. “이상하다. 강계장이 나보다 키가 큰 것 같았는데.” 황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났다. “맞아요. 과장님이 더 작았는데. 제가 분명 알아요.” 옆에 있는 계원인 여직원이 말했다. “그런가?” 그는 또다시 허허, 웃고 말았지만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쯤 분명하게 자신이 예전보다 작아졌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서서히 그랬는지 아니면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그렇더라, 인지는 잘 판별되지 않았다. 다음날 과장에게 교육다녀 온 것에 대해 보고를 하고 나자 기획실에서 전화가 왔다. 누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렸는데 당장 조치하라고 했다. 그는 서둘러 시청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쓰레기더미로 난장판이 된 낙동강 자전거 쉼터’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클릭했다. 정부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 낙동강 사업을 하고 자전거도로를 만들었는데 관리가 허술하다는 지적이었다. 낙동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형성되어 있는데 군데군데 나무 의자가 설치된 쉼터가 있었다. 그 어느 한 곳에 사람들이 캔이나 병 쓰레기를 버려 많이 쌓여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세금을 받고 사는 공무원들은 도대체 그런 일도 안 하고 무엇 하냐며 힐난성 글로 마무리 되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자신이 국가시책으로 조성된 자전거도로 주위를 깨끗이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직무유기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접 가서 보고 처리할 생각이었다. “계장님이 직접 가시게요? 천 씨가 할 텐데요.” 앞에 앉은 정주사가 말했다. 물론 그런 일은 기능직인 천 씨가 담당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고 자유게시판에 사과의 글과 함께 처리했다는 글을 직접 올리고 싶었다. “같이 가보지.” 그가 책상 위를 정리하자 정주사는 휴대폰으로 천 씨에게 빨리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계장님은 그냥 계셔요. 천 씨가 다 알아서 할 거예요.” 정주사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그는 여기서 밀릴 수는 없다는 각오를 다졌다. 계속 한직으로 밀리다 공원관리 주무로 왔다. 시민들과 직접 접촉할 일이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과장은 배려라고 했다. 그가 아무래도 몸이 작아 불편하니 시민들과 부딪칠 일도 없는 곳으로 발령냈으니 마음 편안하게 근무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꾸만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의 부서가 민원인들과 직접 접촉할 일이 없으니 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를 안 들으래야 안 들을 수 없었다. 민원인들과 직접 접촉하는 부서를 피해서 좋다는 둥, 말들이 나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 하는 일은 키가 작다고 해서 못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인사이동철이 되면 괜히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다들 그가 자신들의 부서로 오는 것을 마뜩치 않았다. “에이, 계장님은 계셔요. 제가 얼른 처리하고 올게요.” 언제 왔는지 천 씨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냐, 같이 가자구.” 그는 천 씨 쪽으로 다가갔다. 키가 천 씨의 가슴께까지 왔다. “그냥 계셔요. 핑, 갔다 올게요.” 잡을 새도 없이 천 씨는 출입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렇게 빨리 가면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천 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방석 4개가 올려져 있었다. 천 씨는 관용차로 갈 것이기에 자신의 차로 따라가면 되지만 오지 말라는 완강한 표현에 그는 포기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같으면 서로 그와 출장을 가려고 했다. 그와 함께 가면 일을 까다롭게 시키지도 않을 뿐더러 끝나면 술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부서원들이 자신과 동행하기 꺼린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동료들은 점심 먹으러 갈 때조차도 자신에겐 말도 하지 않고 갔다. 퇴근 후 부서 모임에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고 누구 하나 술 한잔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여전히 밤새 누군가와 싸우는 꿈을 꾸었다. 상대방이 아는 사람이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떨 땐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동기와 싸우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깨어나서도 어이없어했다. 물론 동기와는 학교 다닐 때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싸우지도 않았다. 그는 외로웠다. 시민들과 접촉하지 않는 주무에다 부서원들마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니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는 그 날 밤 꿈을 꾸었다. 혼자 여행하는 꿈이었다. 근데 가고자 하는 곳을 찾지 못해 조바심에 허둥대었다. 네비게이션을 켰지만 이상하게 가다보면 막다른 곳이 나오기도 하고 산길이 나오기도 했다. 네비게이션을 끄고 가자 이번엔 낯선 곳을 헤매었다. 그러다 지쳐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모텔 주인이 나오는데 직장 여자 부서원이었다. 부서원은 그에게 객실 키를 건네주며 여자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는 필요 없다고, 좀 쉬고 싶다고 말했다. 키를 받아 객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그가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여자의 어깨를 두르고 침대로 갔다. 순식간에 그들은 알몸이 되었고 서로의 몸을 탐했다. 그리고는 여러 체형의 섹스를 했고 너무나 황홀했다. 결국 그는 절정의 순간에 사정을 했는데 여자의 얼굴을 보니 여자 부서원이었다. 놀람과 동시에 그는 꿈에서 깼다. 손을 팬티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순간 수치감이 몰려왔고 고개를 돌렸다. 아내는 얕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일어나 옷장에서 팬티를 꺼내 거실에 있는 욕실로 갔다. 허참.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 나이에 몽정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매일 보는 부서원과 섹스를 했다는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부서원과 한 것처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옷 바지와 팬티를 벗고 샤워기로 아랫도리를 씻으며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지금껏 바람피우기는커녕 아내외의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예전에 회식하고 노래방에서 동료들이 도우미를 강제로 그의 품에 안겨주었을 때에도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다. 외도를 한다는 것은 그의 도덕과 윤리의식에 상당히 반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외도를 할 때에도 속으로 엄청나게 화를 내었다. 그러면서 그런 인간말종과는 상종을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런 그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그것도 매일 보는 부서원 여자와 섹스를 하다니. 물론 꿈이라지만 그는 실제로 한 것처럼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시장은 그에게 은근히 명퇴를 요구했다. 명퇴를 하면 과장으로 승진이 되며 명퇴 수당과 연금을 받으면 다닐 때의 월급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녔다. 사람이 살다보면 항상 나쁜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기쁜 일이 생겼다. 물론 매일 밤마다 누군가와 싸웠지만 대학 졸업반인 그의 큰아들이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아내에게서 들었다. “글쎄, 눈물이 막 나오지 뭐예요.” 아들에게서 합격 소식을 듣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도 코끝이 시큰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말을 하고나서도 계속 눈물을 흘렀다. 그는 직장에 출근해 주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으나 모두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에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무탈한 생활이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 밤 싸웠지만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직장에서의 명퇴압력에도 꿋꿋이 다녔다. 비록 투명인간이나마 직장에 다니고 있고 또한 곧 결혼을 할 아들을 생각하며 근검절약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 또한 식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오전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생활이었지만 둘째가 대학을 앞둔 상황이라 하루라도 더 젊을 때 돈을 모아야겠다고 아내는 말했다. 키가 점점 작아지면서 친구들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동창회조차도 연락이 없었다. 그 또한 이런 몸으로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동기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여자 동기들은 더욱 더 그랬다. 여자 동기들 중에는 그와 섹스를 한 여자도 있었다. 물론 꿈에서 그랬지만 황홀하고 생생한 느낌은 실제와 다름없었다. 아들이 직장에 들어간 지 1년이 지난 어느 일요일 아침에 아내는 아들한테 여친이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학 나왔고 서울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집도 서울이라고 했다. 그는 그럼 당장 집으로 데려 오라고 했다. 자고로 남자는 결혼을 해야 생활이 안정이 된다는 입장이었다. 아들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 그쪽 부모와 상견례 날짜 잡으면 되잖아.” 그는 아들이 어떤 여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찬성할 생각이었다. 아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저⋯⋯ 상견례를 하면⋯⋯.” 아내는 머뭇거렸다.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게 아니고, 상견례를 하면 양가 부모 모두 만나야 하는데⋯⋯.” “만나면 되지. 장소가 문제야? 우리가 서울로 가든지.” 그는 머뭇거리는 아내의 태도에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음성을 높였다. “그렇긴 한데⋯⋯.” 그만합시다, 하고 아내는 일어섰다. 아들이 오면 그때 얘기하자고 했다. 그는 어떤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아내는 10시쯤에 식당에 간다며 상을 차려놓았으니 국만 데워서 식사하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휴일 낮이나 저녁을 혼자 먹는 게 익숙해졌다. 평일 저녁도 혼자 먹었다. 처음에는 뭔가 어색했는데 자꾸 먹다보니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아내가 출근하고 난 뒤 그는 점심을 먹다가 텔레비전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노모와 아들이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상봉하는 장면이었다. 울컥, 하고 목이 메여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내와 그런 말을 한 후 며칠 후 그는 경찰서로부터 출두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사기혐의였다. 그의 명의로 된 사람이 서울의 한 게임방에서 사이버머니를 사기쳤다고 했다. 금액은 300만원이 넘었다. 이틀 후 오후 2시까지 경찰서로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간다고 하자 여자 경찰은 사이버수사대로 나오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찰서에 가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했다. 자신은 게임을 할지도 모르고 더구나 서울에 간 적이 없었기에 마음은 놓였지만 불안한 마음은 있었다. 여경 앞에 앉으니 꼭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여경은 한참동안 컴퓨터를 바라보더니 이런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데 선생님이 범인이 아닌 줄 알지만 어쨌든 조서를 꾸며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3개월 전 몇 월 몇 일 서울에 간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서울에 간 적이 없다고 하자 여경은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튀니지라는 게임 아세요? 전혀요. 또 자판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 게임업체에서 선생님 명의로 300만원 게임머니를 사기쳤다고. 몇 가지 더 물었지만 형식적인 물음이라 사실대로 대답했다. 서울의 청량리 한 게임방에서 범행이 이뤄졌다고 했다. 이런 일 자주 일어납니다. 개인정보는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경은 위로의 말을 던지며 종이를 내밀었다. “자, 이거 읽어보시고 지장 찍어주세요.” 여경과 자신이 한 말이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대충 읽고 이름 옆에 지장을 찍었다. 여경이 휴지를 내밀었다. “집에 가셔서 튀니지 게임 사이트로 회원탈퇴 요청을 하세요. 신분증 복사해서 보내면 선생님 명의로 그 게임 사이트에 회원 등록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여경에게 인사를 하고는 경찰서를 나왔다. 혐의가 없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경찰 앞에서 조사를 받은 자체로 가슴이 아팠다. 며칠 후 아내는 아들한테 전화가 왔는데 상견례는 생략하고 곧장 가을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한다고 했다. 가을이면 2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도리가 아닌데. 그는 중얼거렸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꼭 해야 한다고 우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돈 간에 인사야 결혼식 끝나고 피로연 자리에 따로 자리를 마련한대요.” 아내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아내는 전세값이 너무 비싸니 결혼 비용은 얼마 정도가 들까, 여러 말을 했지만 그는 잠자코 있었다. 처음인데 남들처럼은 해야 될 텐데. 그가 방으로 들어오는데 아내가 혼잣말로 했다.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화내는 꿈이었다. 대부분 그렇듯 상대방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상대방에게 엄청 화를 내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분해 죽겠다는 듯 그는 따지며 화를 냈다. 상대방은 변명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밤새 모르는 사람에게 화를 내다 새벽에 잠이 깼고 더 이상 잠이 들지 못했다. 아침 7시가 되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했다. 한 달 후 아들은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왔다. 키가 크고 얼굴이 시원스레 생겨서 그는 마음이 흡족했다. 아내 또한 흡족한 눈치였다. 절을 받고 보니 이제 아들이 장가를 간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절을 끝낸 아가씨는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가정교육이 잘 돼서 그런 거야. 그는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그래. 잘 왔다.” 그는 어른답게 덕담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길을 피하는지라 입을 다물었다. 아내와 아들은 예단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도 함께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아내는 피곤할 텐데 방에 들어가 쉬라고 했다. 그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드러누워 오른 팔을 들어 이마에 댔다. 막상 드러누우니 피곤이 몰려왔다. 잠이 쏟아지다가도 막상 베개에 머리를 대면 잠이 달아났다.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있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문을 열려는데 아들의 아빠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아마 안 가시겠지.” 아내의 말이었다 “꼭 안 와야 해요. 이 사람 집에는 아빠가 편찮으셔서 못 오는 걸로 할게요.” 아들의 말이었다. “알았다.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 아빠 결혼식장에 못 가게 하마.” 아내의 말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돌아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차를 타고 가는 꿈이었다. 어딘지는 모르는데 네비게이션은 자꾸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100m앞에서 좌회전 하십시오. 200m 앞에서 우회전 하십시오. 그는 꼭 가야한다는 절박함으로 네비게이션의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달리면 그 여자 또한 집요하게 좌회전 우회전을 외쳤다. 아냐, 계속 가야해. 돌아가면 갈 수 없어. 그는 안간힘을 쓰며 차를 몰았다. 계속해서 네비게이션의 여자는 죄회전 하십시오, 우회전 하십시오, 를 외쳤다. 고창근/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途)』『아버지의 알리바이』『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장편소설 『누드모델』『존재의 이유』『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서양화 개인전 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