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20호...
   2020년 06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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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3375 2014-11-03
452 가거도 산길 외1편/최기종 file
편집자
2601 2016-04-01
16. 4월 71호 시 가거도 산길 둥구씨와 함께 대풍리 등대로 가는 길 2구 항리 마을에서 독실산 기슭을 타고 후박나무 우거진 숲길을 지나서 중덕 삼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길 아닌 길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지름길로 가다가 안개에 쌓여서 이젠 오던 길도 잃었다. 너럭바위에 앉아서 그래도 식사는 거르지 말자고 도시락 펼치고 둥구씨 밥 한 술 떠서 고시래하고 나도 김치 한 가닥 들어서 고시래하고 포리똥나무 얼키설키 우거진 석이버섯 군락지 지나다가 소떼를 만났다. 반가운 발자국 따라서 구불구불 내려오니 거기 철장판 해안이었다. 가거도 바다 가거도 옥색바다 둥구씨와 땜마를 타고 남문, 용머리, 고래 물 품는 곳 지나서 장가살밑, 망향바위, 오리 똥 싼 데 지나서 하늘개, 빈주암, 앵화구곡, 큰덕, 작은덕 지나서 일번 검둥여, 이번 검둥여, 납덕여, 오동여 지나서 저기 거룻배 다가오니 둥구씨, 거기 보고는 "어이 종재! 재미 좀 봤는가?" "재미는 무슨 재미. 일도 없네." "엄살은 그만 떨고 몇 마리 던져 봐." “그려. 받아랑께.” 하면서 팔뚝만한 것들 던지니 “하나이, 둘이시, 셋이네, 아 너이고" 그런데 한 마리 뱃전에 닿지 못하고 바다에 풍덩 “아이, 어짤까?” 내가 아까워 하니까 둥구씨 하는 말 "아 여그가 우리 수족관이엇부러." “다음에 크면 잡징?” 최기종 : 1956년생,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 시집으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가 있음. 포엠만경 동인,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이메일 jogi-choi@hanmail.net  
451 물끄러미 외1편/윤임수 file
편집자
2345 2016-04-01
16. 4월 71호 시 물끄러미 차창 밖으로 비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대 얼굴이 차창에 떠오릅니다 나는 또 그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참 좋은 물끄러미입니다 봄비 애썼다 참말로 애썼다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 호수에 오도카니 발 담그고 서 있는 마른 버드나무 가지를 다독이며 비가 오고 있다 봄비다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어깨 축 늘어뜨리고 먼 길 느릿느릿 걸어가는 늙은 홀아비의 발걸음을 토닥이며 비가 오고 있다 봄비다  
450 겨울숲 외 1편/이민숙 file
편집자
2237 2016-04-01
16. 4월 71호 시 겨울숲 겨울숲에는 숨을 곳이 없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맨몸의 성자(聖子)들이 침묵으로 바람을 일으킨다 수백 영혼의 몸 너머로 고독이 달아난다 저 먼 별의 숲도 그러하리라 단 한 눈물도 남기지 않고 벗어버린 맨사랑 허위허위 노래하던 아름다운 가짜들이 고요히 허무를 내려놓는다 없다, 더 이상 숨을 곳이, 겨울숲에는, 시간이라는, 별 시간은 가두지 않는다 몸에도 시간은 없다 마음을 어찌 붙들까 옥신각신 올망졸망 개망초 꽃그늘이다 미망이란, 엄마의 별은 ‘아무 것도 아녀’ 나무의 별은 초록빨강노랑 아닌 청춘의 잎새 석류알 깊디깊은 뿌리 강의 별은 하냥 저냥 흘러서 출렁거리기, 천지간의 물방울 버들치 은어 금강모치 참갈겨니 쉬리……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다 빠져나간 별, 그대 억겁의 몸으로 들락거리며 끓어넘친다 내 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털중나리 곁에서 키스하던 붉은 심장 안에 콕 박혀버렸다 시간이라는 별, 데리고 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내 별은 ‘모른다’ 지금이 어디인지 그 묀지 숨찬 처녓적 파열도 모르는 채 걸어가고 있을 뿐 시간이라는 동그라미, 결정지을 수 없음이여 너울너울 허공에 널어놓은 쪽빛 하늘 한 필! 바닷물 소금 짜디짜게 풀어서 한 모금씩 마시고 낳은 탯줄의 피, 너머로 時時하게 날아가는 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1998년《사람의 깊이》창간호에 「가족」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했고,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를 펴냈다. 〈샘뿔인문학연구소〉를 운영하며 책읽기, 글쓰기에 즐거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E-mail : 123lms@hanmail.net  
449 봄날 외1편/신구자 file
편집자
2355 2016-04-01
16. 4월 71호 시 봄날 너실너실 흐드러지게 잘 퍼진 흰쌀밥 고봉으로 퍼 담고 있는 이팝꽃나무 아래 이순의 허리 훨씬 꺽었을 두 여자 배 곺았던 시절 탈탈 털어버리는가 얘기꽃 활짝 피우고 있다 산새들도 삐쭁삐쭁 고개 까닥이며 엿듣고 빵빵하게 배가 부른 흰 구름도 식곤증으로 노곤하게 누워 스물스물 흘러간다 먼데서 닭울음소리 해조음처럼 게으르게 밀려오는 봄 오후 어느날 무섬마을 겨울잠에 빠진 무섬마을 강물만 깨어나서 흘러흘러 간다 흘러가는 강물 위로 세상을 잇는 저 외나무다리 외발 디딘 학 같이 먼 산만 바라본다 연고없는 사람들만 북적이는 무섬마을 강변 모래만 혼자 반짝인다 경북 칠곡군 약목출생. 1994년 [대구문학]과 1999 년[불교문예]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한국문협, 대구문협, 대구시인협회,불교문협, 대구여성문협,칠곡문협 회원 <솔뫼> 동인,반짇고리문학 4대회장 역임 시집 [낫골 가는 길],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  
448 벼랑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2540 2016-04-01
16. 4월 71호 시 벼랑 끗발이 서리라 고년 아랫도리가 확 벗겨지듯이 삼팔 광땡이 눈알에 박히리라 패가 밟힐수록 피 냄새를 물고 숨 막히는, 패를 밟을수록 똥꼬가 오므라들고 뻣센 기운이 불알 밑으로 기어들어 뭐든 뚫어버릴 것같이 쏠리던, 열 닷섬 지기를 조져버린 그 끗발이 콱 막히고서야 새벽이 왔다지만 아베요, 치매의 벼랑 끝 턱을 바들바들 떨면서 가끔 딸내미도 몰라보는...... 아베요! 노름판이 좋았던 기 아이라 거 벼랑에 몰려 패 조이는 끗발 맛이 고년 아랫도리보다 더 기막혔던 기 아이라요? 까치집 흘림체로 내리던 비 그치고 햇살이 이토록 고운 걸 보니 가깝고도 먼 거기서는 잘 지내는지 내 숨소리와 체온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집 밖은 푸른 절벽 손닿지 않는 외진 곳 까치발로 올려다보는데 문패 한 번 달지 못한 까막눈의 늙은 집 맨발의 달을 꿀꺽 삼킨다 멀어져간 너의 까치걸음 혼자 먹는 밥그릇에 소복한데 두근두근 숨 쉬는 저 집, 하늘의 허파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시안』신인상 수상 ♧2010년 시집 『아주 작은 아침』시안 출판 ♧2015년 시집『저 환한 어둠』시와표현 출판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시협 이사, 대구문협 회원 ♧대구문학관 운영자문위원 ♧제33회 대구문학상 수상  
447 뒤안길 외1편/강정이 file
편집자
2224 2016-04-01
16. 4월 71호 시 뒤안길 머리 뚜껑 잘려나간 마네킹이 거리에 나와 있다 꽃잎만 먹는 척 이슬만 먹는 척 손톱에 때 끼지 않는 척 톡톡 물방울 털어내더니 삭은 내장을 바람에 버무리며 알몸으로 서 있다 내가 걸친 쉬폰원피스는 저 마네킹이 입혀준 것인데 치맛자락은 양귀비꽃처럼 나부끼는데 河伯의 딸인 척 백조인 척 그 척 훌렁 벗어던지고 나도 속은 문드러졌다며 마네킹 손 잡고 서 있어야 하나 가던 길 그냥 가야 하나 위선 아름다움을 위하여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 위하여 나란히 교회에 갑니다 나란히 쇼파에 앉습니다 TV를 봅니다 카멜레온이 몸색을 바꾸네요 수련 만나면 연꽃으로 구름 만나면 구름색으로 저 색깔은 카멜레온의 진심인가요 변해야 살아남는 고단한 색인가요 나란히 앉은 채 다른 마음으로 TV를 주시합니다 저런, 놀란 카멜레온이 검게 변하네요 아 저건 슬픔이라는 진실의 색인가요 TV를 끄고 나란히 방으로 흩어집니다 내가 새긴 발자국이 새파랗습니다 그 곁 또 한 발자국 새파랗습니다 신이여 내일도 나란히 교회로 향하겠습니다 나란히를 위하여 아멘 약력:1994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 2004'애지' 로 등단 수필집 '달을 찾아 나서다' '다가가다' 시집 '꽃똥'  
446 그믐달 외1편/조정숙 file
편집자
2652 2016-04-01
16. 4월 71호 시 그믐달 알고 봐야 보이는 게 있다 내 왼손 새끼손가락에 수놓아진 그믐달 어릴 때 벼 베다 생긴 낫자국이다 보여주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나의 우울 같은 것 아니, 봐도 보이지 않는 게 있다 누구나 그믐달 하나 손에 쥐고 살아가리라 짐작할 뿐이다 꽃 딸아이 방에 올 가을 처음 피어난 쑥부쟁이 한 다발 들여놨다 바람 좀 분다고 무얼 그리 흔들리는 것이냐고 너만 아픈 줄 아느냐고 웅크린 배를 쭉 펴보라고 서릿발처럼 야속했을 말들 뒤늦게 후회하며 쑥부쟁이 한 다발 들여놨다 딸아이 벗어 두고 간 속옷 생애 처음으로 피워낸 한 떨기 꽃을 보고 저 혼자 피워낸 꽃을 보고  
445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김우출 file
편집자
2353 2016-02-29
16. 03월 70호 수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김 박사님께 - 영주 시민신문 2015년 11월19일(목) / 제349호(통합 제546호) ‘시민칼럼’에서 김 박사님의 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 –애국심’을 잘 읽었습니다. 사실은 신문이 나오고 바로 읽지는 못했는데 부산을 가는 차 안에서 K시인과 P시인 두 분에게 김 박사님의 칼럼을 읽고 충격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부산을 가게 된 것은 11월 21~22일, 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하는 연중행사 중 가장 큰 전국문학인대회를 올해 30주년을 맞이하게 된 부산작가회의가 주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2년 후에는 대구·경북작가회의가 30주년이 되기 때문에 내년에 광주작가회의가 이 행사를 주관하고 그 다음 2017년에는 대구·경북이 맡아야 할 것이라는 부담도 있었지요. 행사장인 부산 금정산 오마이랜드에 도착하자 여러 가지 표어가 붙어 있었지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 ‘니 역사는 니 수첩에’라는 문구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전국문학인대회라는 행사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김 박사님도 한국작가회의 시분과 회원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탈퇴하셨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아직 회원 명부에 이름이 남아 있다면 하루빨리 정리해 주십사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다음날 영주에 돌아와서 저도 김 박사님의 글을 읽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김 박사님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아닙니까? P시인은 김 박사님과 논쟁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고, K시인은 영주 시민신문 오 국장님께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 박사님의 칼럼이 독자들의 정신건강에 위해(危害)를 가한다면 영주 시민신문 논설위원도 사퇴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저는 독자권익위원장으로서 김 박사님께 이런 글은 두 번 다시 영주 시민신문에 기고(寄稿)하지 마시라고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우선 제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결코 ’애국심‘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애국심‘은 장소나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제목을 보고 저는 왜 지난 날의 국민교육헌장이 떠오를까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장도 잘못되었지요? 이 땅에 태어나고 보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우리들 앞에 주어졌다고 하면 모를까, 이 세상에 이런 의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얄밉고 껄끄러운 일본을 욕하지만 자신들의 나라 국익을 위해선 정부, 매스컴, 온 국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네들을 보노라면,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고 우리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저력을 절감하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획일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말하면 북한을 따를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이야말로 다양성을 상실한 사회가 아닐까요? ‘차라리 없어졌으면 싶을 정도로 국익은 나 몰라 하고 정쟁만 일삼는 국회, 나라 경제는 어떻게 되든지 적자인데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삼는 귀족노조들, 어린아이들을 농단하며 북침을 얘기하는 선생들, 나만 잘 살겠다며 해외로 기술을 빼돌리는 사람들, 고압선 통과를 반대해 반도체 공장을 못하게 하는 지역이기주의! (여기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간 곳 없고 환자 진료를 돈으로만 계산하는 의사들은 빠졌네요?) 모두 다 국가의 미래, 국익이라는 큰 울타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좁은 자신 속에 매몰시키고 있는가?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가장 큰 원인은 <과도한 하향적 평등 개념의 침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 혁명 당시 내 건 슬로건이 ‘자유, 평등, 박애’였는데 ‘자유’에만 치중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에 탐닉했던 미국이 실패함으로써 수정자본주의를 도입했고, ‘평등’만을 신봉했던 소련이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남은 하나 ‘박애’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이라고 설파한 학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의 복지국가의 틀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내 편, 네 편, 좌우! 우리 사회는 목하 전쟁 중이다.’ 라고 하시는데, 김 박사님은 어디에 서 계시는가요? 너무 오른편에 서 있는 건 아닌가요? ‘한때 평등 개념이 아주 극에 달했을 때 우리나라엔 좌파정권이 득세했다. 그러다가 정권이 다시 바뀌었고 그러나 이 하향 평등 개념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여전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복지라는 얼굴이고, 과도한 하향 평등화의 변형이다.’ 우리나라에 좌파정권이 있었던가요? 흔히 조·중·동이나 종편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10년(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하시는가요? 그렇다면 김 박사님은 너무 오른쪽에 서 계시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간에 서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좌우라는 말은 상대적인 개념이죠? 말하자면 저는 김 박사님의 왼쪽에 서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교직에 있을 때도 학생들에게 북침을 말하지 않았고, 제가 소속되어 있던 전교조에도 북한을 추종하는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김 박사님, 지금의 갈등과 대립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도 아니고 좌우의 대립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도덕(道德)과 부도덕(不道德)의 싸움일 뿐입니다. ‘민주니 평등이니 추상적 단어 뒤에 숨지 말고 “나 샘나 죽겠다. 도저히 이 판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해라. 그리고 기득권층은 “당신들은 뭐라 해도 어떻게든 계속 잘 살고 싶다”라고 해라.’ ‘애국심은 추상 명사적 개념이 절대 아니다. 우리 자신,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준비이고 비전이며, 실천이다. 억울하겠지만 현실은 인정하고, 지금부터의 잘못은 절대 용인하지 말며, 대승적으로 한 발자국씩만 물러나자. 그러면 나, 우리 편이 아닌, 다른 편의 입장을 보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잘못은 억울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이라면서 지금부터의 잘못은 절대 용인하지 말자고요? 그것이 가능한가요? 김 박사님께서는 애국심을 얼마나 가지고 계신지 모르지만 앞에서 말씀하신 그런 것이 ‘애국심’이라면 ‘애국심’ 역시 ‘민주’나 ‘평등’과 같이 추상적 단어일 수밖에 없고,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그 뒤편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도정을 막고 있는, 그것을 업으로 삼으며 빌붙어 사는 사람들에게 신동엽의 시 한 구절을 읽어주고 싶다.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김 박사님의 글은 이렇게 신동엽의 시로 끝맺고 있었습니다. 정말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군요? 무엇이 껍데기고 무엇이 알맹이입니까? 김우출 김불출 ; 본명 김우출. 1987년 ‘영주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1997년 ‘작지만 큰 이야기(고래출판사)’ 공저. 1999년 ‘월간 문학세계’ 수필 신인상 당선.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회원 계간 영주문화 편집위원 E메일: k82115@hanmail.net  
444 인생의 향기/박래녀 file [1]
편집자
3003 2016-02-29
16. 03월 70호 소설 인생의 향기 사람의 삶속에는 어떤 향기들이 있다. 그 향기를 향유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반면 무엇이 향기인지도 모르면서 사는 그런 인생이 대 다수를 차지하고 사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사실 인생의 향기는 눈으로 볼 수도, 코로 맡을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남의 눈에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지위가 높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학식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는 인생의 향기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고, 혼인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기에 혼인을 했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르쳐 제 식솔 거느리게 되기까지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살이인 줄만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농사꾼이 천직이라 믿는 것도 그의 마음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이 자기의 타고난 팔자란 생각조차 해 보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논두렁 밭두렁을 한 바퀴 돌거나,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뒤뜰에 산더미처럼 쌓는 일이거나, 철따라 논밭에 거름을 내거나 씨앗을 뿌리거나 거두는 일과 외양간이 비지 않게 소를 키우는 일이었다. 자신이 왜 사는 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도 없고, 행복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알바도 아니었다. 그저 온종일 농사일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것이 고달프다는 푸념조차 하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잘 생긴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로서는 좀 작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키에 다부져 보이는 덩치를 가졌지만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네모에 가까운 얼굴에, 커지도 작지도 않은 눈과 약간 낮은 듯 한 코와 늘 웃는 것도 아니면서 꽉 다문 것 같지도 않은 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고집스러운 점도 발견해 내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좀 바보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물레미라는 마을이었다. 물레처럼 둥그스름하게 산이 싸고 있다 해서 붙은 지명이라는 설도 있고, 물레질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라 해서 물레미가 되었다고들 하지만 확실한 내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오십여 가구의 그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외양간에는 소 대신 경운기가 차지하고, 젊은 농군이 있는 집에서는 트랙터나 이앙기 등 농기계를 장만하여 농사를 짓지만, 그는 그 기계들이 무슨 괴물 같아서 옆에 가는 것도 꺼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보다 못한 큰 아들이 경운기를 장만하여 주었지만 그는 아직도 경운기에 올라앉아 보지 않았다. 경운기는 헛간에 방치되어 있다가 농사철이 되면 다니러 오는 아들들이 부리는 괴물딱지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지게나 바지게를 이용하여 거름이나 볏단을 져 나르고, 길들인 암소의 모가지에 멍에를 씌워서 논을 갈고, 밭을 가는 우직하기 짝이 없는 농사꾼이었다. 물론 부농일 수도 없었다. 자식을 오 남매나 두었지만 그다지 속 썩이는 자식은 없었다. 집안 살림 형편 때문인지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만 졸업한 자식도 있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해서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식도 있지만 다들 도시에 나가 제 밥벌이를 하다가 짝 맞추어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이제 군에 간 막내만 제대해서 장가들면 부모 노릇은 그런대로 다 한 셈이었다. 그가 농사를 짓는 농토란, 도시의 아들네를 따라 나가면서 갈라 묵기 소작을 주고 간 서너 마지기의 남의 논과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천수답 다랑이 댓 마지기와 산비탈에 아내와 둘이 손수 일군 밭 이 백여 평에 불과했다. 그 것에다 오두막일망정 텃밭이 넓고, 늙은 감나무 세 그루와 자두나무, 앵두나무 등 과일 나무가 마당가에 서 있는 집과 외양간에 매인 소 두 마리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에게 사람 사는 맛이 어떤 거냐고 물으면, 산비탈에 일구어 놓은 논밭에 철따라 나락이나 보리, 밀 등 논농사를 짓고, 밭에 푸성귀며, 들깨, 고구마, 감자 등 잡곡을 심어 거두는 재미와 외양간에 매어 키우는 새끼 달린 암소의 등을 대빗자루로 쓸어주는 일과, 여물을 쑤어다 구유에 부어주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고 꼭지가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도 하고, 칠삭둥이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남에게 해코지 하거나, 영악하여 제 잇속 챙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너무 좋아서 바보스럽다는 소리를 듣는다고도 했다. 그의 속내를 읽어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는 싫은 일도 싫다고 하는 법이 없고, 좋은 일도 좋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아, 그렇십니꺼. 그렇네 예. 지가 뭘 알아야지 예. 잘됐네 예.’등 짧은 대답을 듣는 것도 용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이미지를 말하려면 우선 어느 대학생이 붙인 별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여름철에 봉사활동을 나왔던 대학생들 중에 그를 눈여겨보았던 한 여대생이 했던 말이다. 지리산 오지 마을인 물레미에도 여름철이 되면 방학을 이용하여 대학생 단체가 <농촌 일손 돕기 봉사 활동>을 나온다. 학생들은 물레미 동네 회관에 모여 기거를 하면서 낮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도왔고, 밤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거나, 글자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한국의 농촌 현실이 거의가 다 그렇지만 물레미 마을 사람들도 거의가 오륙 십 대에다 칠팔십 대의 양로원 동네였다. 그 중에 글자를 깨치지 못한 동민이 반수가 넘었다. 그는 글자를 깨치지 못한 사람이었다. 겨우 김 만석이라는 제 이름 석자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밤마다 열심히 회관에 나갔다. 멍석을 깔거나 헌 장판을 깔고 앉아 가갸 거겨를 배웠지만 돌아서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버리는 통에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을 볼 면목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어린 여학생 선생님은 항상 첫 번째로 와서 맨 앞줄에 앉아 말없이 경청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돌아가는 그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다음 날 낮에 그 여학생은 친구들과 나락 논에서 피를 뽑다가 먼발치로 그를 보았다. 그는 논두렁에 수북이 자란 풀을 베다가 쉬는 참이었다. 그는 논두렁에 징검다리처럼 베어놓은 풀을 안아다 바지게에 담아놓고, 논 옆의 도랑가에 불룩 튀어나온 바위에 걸터앉더니 이마에 질끈 동여맨 수건을 풀어 얼굴을 닦고는 곰방대에 담배 한 개비를 꽂았다. 그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댕기더니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 뿜으면서 먼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여학생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다가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 바위 얼굴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저 분 좀 봐, 큰 바위 얼굴 같애.” 그 날 이후 대학생들은 큰 바위 아저씨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그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는 바보 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지만 근실하고, 우직하여 농사일은 빈틈없이 잘 해냈다. 남의 눈치를 살펴 일을 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약삭빠른 행동은 못하지만 행동이 굼 뜨는 대신 맡은 일은 야무지게 해 냈다. 자기 집 일이나 남의 집 일이나 빈틈없이 해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품앗이나, 품팔이는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그는 몸살이 나지 않는 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설령 자기 집에 불이 나도 남의 집의 불을 먼저 꺼 주고 자기 집 불을 끌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제 실속을 채울 줄 모르는 그는 아내의 타박도 많이 듣지만 타고난 천성이 그래서인지, 모자라서인지 웃기만 했다. 예를 들자면 자기 집 모내기 날짜를 받아놓고, 모꾼을 맞추어 놓은 아내가 사흘 뒤에 모내기를 해야 하니 논갈이를 끝내 놓으라고 하면 그는 소에게 쟁기를 채워 논갈이를 하려 간다. ‘이랴 이랴, 좌랴 좌랴’ 하면서 무논에서 논을 갈다가 이웃 영감이 찾아와 사흘 뒤에 모를 심어야 하니 당장 자기네 논을 좀 갈아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 ‘그러지 예’그 길로 그 영감님 논으로 행차를 해 버리는 사람이 그다. 사흘 뒤에 모내기할 논자리에 물만 흥건해 있어 아내가 성질을 내며 못 살겠다고 펄쩍펄쩍 뛰면 한다는 말이 “그 영감님 논이 더 급하다기에 갔더니 그 옆에 할매도 갈아달라쿠제. 그 뒤에 아재도 갈아달라쿠는데 우짜것노. 그라다 보니 우리 논 갈 여개가 없었다. 우리 모는 사나알 뒤에 심으모 안되나?” 아내는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버리곤 했다. 아무리 부아를 내질러도 성을 낼 위인이 아니란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열다섯에 시집와서 여태껏 살 맞대고 살면서도 그가 성을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내는 더 이상 말해 봤자 쇠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서 가서 우리 논 갈아놓고 오라고 닦달만 하고 말 정도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외양간으로 갔다. 토실토실 살이 오르면서 젖떼기를 한 중송아지 누렁이의 때깔을 보면서 늘름한 황소의 모색을 닮아가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누렁이의 코뚜레를 뚫을 일이 걱정으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누워 떡먹기 보다 쉬운 일이었다. 송아지의 코를 뚫는 일은 잔뼈가 굵어지면서 여태 해 오던 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코뚜레가 될 만한 감태나무와 늙은 칡덩굴을 한 짐 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허참, 고놈 갈수록 부룩데기 기질이 나는구먼. 싸움 쇠 조짐이 보이는 걸. 종자가 좋은 놈이 맞긴 맞는 모양이제. 담에 쇠장사한테 앵길 때는 임자 잘 찾아주라 캐야 되것구마.” 그는 목을 쭉 빼고 있는 누렁이의 목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하다가 한숨을 푸욱! 하고 쉬었다. 요즘 그를 괴롭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58년여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도 들면서 자신의 머리 반 넘게 차지한 흰 머리카락이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이십 년만, 아니 십 년만 더 젊어도 뭔가 길이 보일 것 같은데 가만히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 보니 환갑이 코앞에 닥쳐 있었다. 손자 녀석도 본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행동거진가 싶어 스스로를 탓해 보지만 자신의 마음을 그도 알 도리가 없었다. “당신 진짜 벌써 노망 들었어 예?” 엊그제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해 오다가 진달래가 어찌나 흐드러지게 피었든지 한 아름 꺾어 나뭇단에다 꽂아 와서 아내에게 내밀자 꽃다발을 받은 아내가 한다는 말이었다. “하도 예뿌길래.” 사실 그도 자기가 하는 행동을 알 수가 없었다. 젊어서도 아내에게 해 본 적이 없던 행동이었다. 알뜰살뜰한 정 한 번 준 적이 없는 아내였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아내도 이웃 간에 부모가 맺어준 사람이었다. 첫 날 밤이 지나서야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이 그 이기도 했다. 수더분하게 생긴 아내를 예쁘다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저 여자는 궁둥이가 펑퍼짐해서 애만 쑥쑥 잘 낳아 기르고, 살림 똑 부러지게 살아주면 그만이었다. 아내는 그런 여자였다. 그도 그런 아내에 만족하면서 살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아내에게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못난 남정네 만나 일복만 터져서 손톱이 길 새도 없이 흙 알갱이 채워 살아온 아내에게 자꾸만 미안해졌다. “참말로 요상하네 예. 안 하던 짓을 하모 구들장 지고 누울 때가 된기라데 예. 요새 당신이 좀 이상해 진거 알아 ?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모 죽는다쿱니더. 제발 정신 좀 채리소. 당신 하는 짓을 보모 예 꼭 우리 아들 사춘기 때 같거마. 밥맛을 잃어삔 걸 보모 무슨 고민이 있는 것도 같고, 오데가 아푼 기라 예?” “아니다. 우짠지 밥알이 목구녕에 걸린다.” “쑥물이라도 해 주까 예? 밥맛 돌아오는 데는 생 쑥을 집내 묵는 기 제일인데.” 그는 아내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했다. 그 까닭을 아내가 안다면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는 퉁을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별 시답잖은 소리도 다 듣는다면서 우스갯소리로 넘기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라도 여자라면 질투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길길이 날뛰면서 ‘내가 헛살았다’고 내 인생 돌려달라며 앙탈을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 소문이 아이들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엔 망신살이 단단히 뻗칠 일이었다. 아니 동네 사람들 쳐다볼 염치도 없어질 노릇이었다. “봄 타는 모양이제.” “당신도 보약 한 제 묵어야 되것소. 참 이장이 댕기감서 주택개량 신청 안할랑가 묻데 예. 우리도 이참에 방이라도 늘카 보입시더. 애들이 들이닥치모 잠자리가 불편해서 영 며누리 보기 미안커마. 어지간하모 그 자금 받아서 새집을 짓든가. 거기 안돼모 부엌 개량비라도 받아 방이나 넓히든가 양단간에 무슨 수를 내야 안 하것소. 아 들도 쬐맨씩 보탠다쿵깨내.” 아내는 또 집 고치자는 소리를 들고 나왔다. 그도 편하게 살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두가 안 났다. 너나없이 농가주택 개량 사업비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돈을 빌려 새집을 짓고, 헌집을 뜯어내거나 부엌 개량비니, 화장실 개량비니 해서 쥐꼬리만큼 나오는 국가 보조금에 생돈을 빚내서 집을 고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이자가 싸다하나 빚은 빚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맛이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아직도 그냥저냥 밥벌이 하고 사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막내 장가 들이고 나서 보자고 아내를 달래지만 내심은 새 집을 지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막내가 제대해서 제 짝을 찾으면 아무래도 큰 방 하나는 있어야 할 것이고 아내가 노인이 되면 아궁이에 불 지피기 힘겨울 테니 부엌 개량은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때 봐서 말할 참이었다. 알고 보면 그는 무척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현실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는 모르지만 수십 년을 버텨온 방 두 칸에 마루와 부엌이 달린 일자형 오두막집을 헐어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 손바닥만 한 방에서 일곱 식구가 비비적거리며 산적도 있는 데. 자식들 다 타지로 떠나버리고 영감 할멈 둘만 남아 방 한 칸씩 지고 사는 데 뭐가 부족한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다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비좁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자리가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닌가. “임자가 꿍치 논 돈뭉치가 있는가베. 밥은 전기밥솥에 하고, 가스렌진가 뭔가에 반찬 해 묵더니 간이 등어리에 가 붙는가베. 황새가 뱁새 따라 갈라쿠모 가랭이가 찢어진다는 말도 모르나? 군불 한 부석 때는 것도 귀찮아 여기모 인자 눠서 밥 떠 멕이라 안쿠것나.” “우짠일이요? 당신이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고. 살다봉깨 당신도 목구녕에 철이 드는 갑소.” 아내는 묵묵부답 말이라곤 없던 그가 몇 마디 하자 그것이 신기한지 자꾸만 실실 웃었다. 말이 많아졌어. 그것도 변화라면 변화였다. “요 참꽃을 따서 찹쌀가리에다 부쳐 부치미나 궈 묵어보까?” 그는 마루에 앉아 진달래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또 땅이 꺼지게 깊은 한숨을 쉰다. 조금 전에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아무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겠지만 지독히 부끄러웠다. 오늘도 그는 또 아랫마을에 가서 그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왔다. 돌담 너머로 그 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빨간 벽돌로 겉 마무리를 한 조립식 주택 옆을 지나면서 도둑질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병도 참 지랄 겉은 병이 들었어.”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양간을 느릿느릿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우짤라고 니가 이라노. 병신이 육갑한다는 소리 들을라꼬 이라나. 누가 알모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는 기라. 그랬다. 망신살이 뻗쳤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 처녀와 눈이 마주친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아랫마을에 사는 천평 댁 집에 가서 일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부엌 개량을 한다고 헌 집을 뼈대만 세우고 헐었다가 기둥이 썩어 지붕이 내려앉는 바람에 조립식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며칠 간 막일을 해 주었다. 그 품삯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다가 골목에서 그 처녀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는 길에다 말뚝을 박은 사람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긴 생머리를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약간 높은 굽이 달린 구두위로 쭉 뻗은 종아리가 눈부셨다. 무릎 위에 반 뼘쯤 올라간 자색원피스는 풍만한 궁둥이의 선을 매끄럽게 드러내면서 허리에서 잘록하게 조여졌고, 하얀 깃을 단 자색 윗도리는 젖가슴 밑에 찰랑거렸다. 둥글게 파인 목선이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에 상큼한 눈이며 콧날이 오뚝한 것이 갓 터지기 시작한 꽃봉오리 같았다. 어깨에 걸친 검은 색 가방조차 살아있는 것 같았다. 처녀는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고개를 까딱하고 눈인사를 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 웃음에 넋이 나간 그는 그냥 멍청이가 되었다. 아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순식간에 그의 명치끝을 치고, 가슴을 쳤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헛것을 보았는가 싶어 돌아보았다. 처녀는 골목을 나오는 이웃집의 두 아낙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편안하셨어요?” “아이고, 니가 오나? 인자 시집 가야것네. 인물이 훤하구나.” “천평띠 딸이 온제 저리 미인 됐노?” 처녀는 부끄러운 듯이 바삐 대문 안으로 들어서다가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처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날 이후, 그에게는 변화가 찾아들었다. 무덤덤하던 일상이 살아서 숨쉬기 시작했다. 펄떡거리는 대어를 낚아 올린 낚시꾼처럼 모든 삶에 잎눈이 터지면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말이 많아지기도 하고, 갑자기 어깨가 축 쳐져서 방안에 처박혀 담배만 물기도 하고, 아내에게 염색약을 사 오라고 닦달을 하기도 하고, 군에 간 아들이 입던 옷을 내어 입어보기도 하고, 씻고 닦는 것도 부지런했다. 예전엔 아내가 좀 씻고 오라고 등을 떼밀어도 마다하던 사람이 사흘들이 목욕탕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무를 해 오지도 않으면서 지게를 지고 산에 간다며 나가기도 하고, 가게에 가서 사탕을 사다가 아내에게 내밀기도 했다. 할 일도 없으면서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소를 끌고 나가 갈아놓은 밭을 다시 갈기도 했다. 그는 힘든 일을 찾아가며 해 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더 가관이었다. “내 근육 살이 좀 틔어 나온 것 같제?” 각방거처를 하던 아내 옆에 베개를 들고 와 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눕는 것이며 쭈글쭈글한 젖을 만지려한다든가 하면서 아내를 탐하려고 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눈빛에 생기가 돈다는 점이었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면서 바보스럽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자잘한 일상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가장 놀란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아내는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큰 바위 아저씨란 별호가 어울릴 정도로 우직하기만 하던 남편이 아니던가. 아무리 천둥 번개가 치고, 논밭이 벌물에 휩쓸러 가도 꿈쩍도 않았던 남편이 아니던가. 좋고 나쁘다는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바보 천치라는 뒷공론을 듣지만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도 아버지의 한 마디에 순종을 했다. 그래서 자식 교육은 반듯하게 시켰다는 사람들의 치하를 듣는다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리움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의문도 가져보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 속에 잉걸불에 달군 돌 하나를 던진 사람은 그 처녀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란 것을 그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이것이 짝사랑이라는 것일까. 내겐 사춘기가 있었던가. 없었다. 사춘기를 격어야 할 나이에 가난한 살림을 꾸러 가랴, 서툰 남편에 아버지 노릇을 하랴, 뒤 돌아볼 여가도 없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현실에 발을 맞추어 갈 때도 그는 외톨이처럼 다른 사람과 발을 맞출 수가 없었다. 모두들 바보취급을 해 버리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가슴속의 응어리를 곰삭히며 일만 죽도록 했다. 그는 삶이 힘들다고 푸념한 적도 없지만,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은 어떤 향기를 음미할만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향기를 분명 맡을 수 있었다. 말로 설명을 해라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이 현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란 점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환갑을 눈앞에 둔 남자였다. 살아온 날이 결코 헛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란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그 마을로 마실을 나가곤 했다. 그 처녀의 집을 먼발치에서 쳐다만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운이 좋은 날은 그 집에 가서 술대접도 받았다. 주말이면 가끔 그 처녀를 보기도 했다. 처녀는 예의 그 수줍음과 미소를 가지고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며 지나쳤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천평 띠 딸내미가 행인물이 아니 더마. 큰 은행에 댕긴 담서?” “중매쟁이들이 목을 매것네?” “천평 띠 말이 애인이 있다쿤단다.” 그는 동네 아낙네들이 하는 말거리를 들었다. 과년한 처녀니 혼담이 오고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 아마 그런 그의 심정을 그 처녀가 안다면 심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게에 낫과 새끼를 챙겨 얹었다. 감태 나무나 한 짐 해 와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물레미 뒷산의 개울을 따라 난 오솔길을 오르다가 그는‘참 곱기도 해라!’감탄사를 쏟았다. 활짝 핀 복사꽃이 개울을 따라 쭉 이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연분홍색의 복사꽃은 그 처녀의 볼 빛 같았다. 수 십 년 동안 그 산길을 오르내리며 본 복사꽃이지만 그 꽃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너무 예뻤다. 그는 손을 내밀어 꽃가지를 꺾었다. 냄새를 맡았다. 상큼한 꿀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미세하게 자극하면서 찌르르 통증이 왔다. 그는 깨어질까 두려운 보물단지처럼 꽃잎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꽃가지를 볼에 대어 보기도 하고, 입술에 맞추어 보기도 했다. 문득 막내가 생각났다. 천성은 제 어미를 닮아 부지런하지만 외모와 뚝심은 자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아들이었다. 며칠 있으면 그 녀석이 제대를 해서 온다는 기별을 받았다.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간 아들은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야간 대학 졸업장을 땄다고 했다. 아들은 젊은 시절의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지게를 벗어놓고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댕겼다. “이 십 대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아니, 여나므 살적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으면......”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담뱃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 날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말과 웃음을 잃어버리게 했던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도, 잊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밤마다 가위에 눌러 괴성을 지르면서도 누구 한 사람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금의 아들 나이만 했을 적에 6.25 동란이 터졌다. 아버지는 군대에 소집 영장을 받고 오른 손 엄지와 금지 손가락을 잘랐다. 홀어머니와 어린 두 아이에, 배부른 아내를 두고 차마 전쟁터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산골에도 전쟁의 포성이 들리곤 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아마 칠월이었을 것이다. 물레미 마을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사 나흘을 버티다 하룻밤 새 자치도 없이 사라졌다. 그 마지막 날 그는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날 밤에 인민군 장교는 아버지에게 등짐을 지웠다. 이동을 해야 할 처지라며 마을의 장골 대 여섯 명을 차출했다. 아버지는 등짐을 지고 인민군을 따라 나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할머니는 지름길을 통해 내달렸다. 열 살짜리 소년이었던 그도 할머니의 뒤를 몰래 따랐다. 할머니는 먼저 재를 넘어 가야 하는 산길 입구에 닿아 지키다가 인민군 장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이놈아, 날 쥑이고 우리 아 델꼬 가거라. 안 그라모 못 보낸다.” “옴마 짐만 부라 주고 퍼뜩 올끼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할머니와 실랑이를 하던 인민군 장교는 사정없이 개머리판으로 할머니의 머리를 후려쳤다. 할머니는 끄윽 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풀썩 넘어졌다. 그는 할머니를 부르지 못했다. 총 머리가 아버지의 심장을 겨누면서 앞으로 가기를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물레미 골짝을 싸고 있는 산의 구석구석을 손바닥 눈금 보듯 다 알고 있었다. 등을 넘다가 실수하는 척 하고 벼랑으로 굴렀다. 아버지가 할머니 곁에 왔을 때는 이미 할머니는 절명한 뒤였다. 그는 바위처럼 꿈쩍도 않고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는 낙상사로 처리되어 동네 사람들이 초상을 치러 주었다. 그 때부터 그는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구분 되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한 실어증에 걸려서 몇 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세월이 가면서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좀체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말하는 것이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는 막내가 무척 보고 싶었다. 입버릇처럼 농촌에 살면서 부모님은 제가 모시겠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녀석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 처녀를 생각하면 아들이 생각났다. 그 처녀만한 배필감을 구해 주고 싶었다. “아부지 막내 며느릿감 있응 깨 걱정 마이소.” 아들은 군대 생활을 하면서 휴가만 나오면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일을 도왔다. 미처 갈지 못한 논바닥이 있으면 경운기에 쟁기를 달아 갈아주기도 하고, 외양간의 거름을 끌어내다 논바닥에 깔았다. 그는 막내 녀석이 자기를 닮아서 뚝심 하나는 세구나 싶어 대견했다. 산비탈 다랑이를 일구어 과실수를 심겠다고 벼르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농사를 짓다가는 평생 가난 못 면한다고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 녀석 색싯감이 참하모 올 가실에는 장개부터 디리야 할 낀데.” 그는 막내가 오면 누렁이 코뚜레 끼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든든했다. 이제 그도 중노동에 속하는 농사일이 힘에 부쳤다. 햇살이 너무도 화창한 날이었다. 농사철이 시작된 농촌의 나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볍씨를 물에 담그고, 논밭에 거름을 내고, 씨앗을 뿌리는 철이었다. 볍씨를 뿌릴 시기를 늦추면 일 년 농사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면에서는 직파를 해 보라고 농민들을 종용하지만 그는 직파를 거부했다. 오랜 세월 해 온대로 해야 실패가 없다는 것이 그의 농사 철학이었다. 그의 논이 경지정리가 안 된 다랑이라는 것도 물론 이유였다. 다만 소작하는 논에는 이앙기를 빌어 심을 수 있도록 볍씨 파종기에 의지했다. 질 좋은 황토를 파다가 플라스틱 묘판에 담고, 그 위에 볍씨를 뿌려 다시 흙을 덮어 싹을 틔운 후 못자리로 옮겨 키우는 작업이 수월하다지만 그는 더 번거롭고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둘이서 촉이 빼족빼족 난 볍씨를 소쿠리에 건져 놓고, 애벌갈이가 끝난 논의 물배미 곁에 못자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빨리 하고 가입시더. 벌써 갸들이 들이닥쳤시모 우짤라꼬 꾸물댑니꺼?” “다 저녁때나 돼야 올 낀데.” “점심나절에 도착 한다 캤단 말이오.” 그는 아내의 조바심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아내의 얼굴이 고와 보였다. “임자도 꽤 이뿐 얼굴이네 그려.” “야? 영감도 참 실없기는.” 아내는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신과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에 막내가 제대를 하고 왔다. “충성, 소자 임무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렁찬 막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가슴이 환히 열리는 것 같았다. 아들은 며칠을 쉬면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 다시 들어갔다. 아들은 이참에 도시 생활 접어버리고 농사짓겠다는 것을 그는 우선 장가부터 들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달래서 보냈다. 그는 농사짓는 일이 수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목조목 따져서 말해 주면서 섣불리 결정해서 후회할지 모르니 애초에 심사숙고 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아들은 두 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아버지, 내일이 토요일이 지예? 참한 며느릿감 데리고 가겠습니더.” 간밤에 아들의 전화를 받고 잠을 설쳤다. 어떤 처녀를 데리고 올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잉걸불처럼 타고 있는 그 처녀에 대한 애틋한 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기에 그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 처녀와 비슷한 나이의 처녀를 며느릿감으로 볼 생각을 하니 자신이 무척 부도덕하게 느껴졌다. 못자리를 다듬어 놓고, 농기구를 챙겨 지게에 얹는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는 잰걸음으로 논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얼굴이라도 씻고, 옷이라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막내며느리 감을 맞이하고 싶은 아내의 심정을 아는지라 그는 아내의 거동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녀석만 제 식솔 거느리면 남는 것은 늙은 아내와 그였다.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면서 살아야 할 사람은 아내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설렘을 갖게 해 준 한 처녀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남은 인생을 열어줄 고귀한 향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가까이 있어 줄 수도 없고, 말 한 마디 나눌 수도 없지만, 어쩌면 먼 곳으로 시집을 가서 영영 바라볼 수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 향기는 늘 자신의 남은 생을 감싸줄 것이라 믿으며 천천히 논두렁을 걸어 나왔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며 어험, 어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안방 문이 열리면서 싱글거리는 아들의 얼굴이 쑥 나왔다. “일찍들 왔구나.” 그는 지게를 헛간 앞에 부려놓으며 말했다. 아들과 아내가 한꺼번에 마루를 나오고, 뒤 이어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인 처녀가 나왔다. “우리 아버지 알제? 인사 드려.” “안녕하셔요?” 그는 지게 등태에 받치려던 지겟작대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아부지, 놀라셨지 예? 집안끼리 서로 인사할 때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든기라 예. 숙이 씨 집에도 다녀왔습니더. 허락받고 온 길입니더. 아부지, 어서 올라오이소. 어머니께서 아버지 오시면 같이 절 받겠다 해서 기다렸습니더.” “얼렁 올라와 인사 받읍시다. 천평 띠가 올매나 좋아하는 지. 안사돈끼리는 벌써 전화로 수인사 했소.” 그는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귀에서 웅 웅 하는 이명을 들었다. “너거 아부지가 요새 부쩍 허약해지셨다. 못자리 한다꼬 땡볕에 오래 있었더니 더우 마싯는갑다. 우짜노 이 일을. 퍼뜩 찬물 한 바가지 떠 오너라. 이 양반이 몸 생각함서 일하라 그리 일렀건만 들은 척도 않더니. 이기 무슨 일인지 모르것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자꾸만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수렁에는 깊이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443 화개花開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2285 2016-02-29
16. 03월 70호 시 화개花開 서너 해 전 울지도 못하고 날아간 매미 그 포물선이 오늘도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네 투명한 날개맥 따라 물큰 폭발하는 그리움버섯 구름 깜깜한 바다 밑구녘에 가라앉아 범벅된 따그랭이 자네 몰래 하루에 한 양동이씩만 버리기로 작심하였네 하루에 한 양동이씩만 내다버리면 비워지기는 비워지려나 저 꽃 마른 가지에 영정 같은 꽃 기어이 아닌 겨울에 피어 찬비를 맞누? 목탁 ― 안종식 명장 살구꽃 그늘에서 살구나무를 깎는다 살구나무 나이테 속에 웅크리고 있던 새들이 포롱포롱 날아나온다 살구꽃 가지에 기대 울다 별이 된 그날 저녁처럼 오늘도 스피카Spica*는 눈자위를 흘기고 있을까 추억은 켜켜이 괴어 화농한 미련未練을 따라내고 독주毒酒를 부어 다시 채운 독 흐릿한 것이 돋보기 너머 세상만은 아닐지라도 처녀자리에 붙박인 별이여, 니 눈은 내 혼신이 녹아든 목탁 목탁을 조율하는 것은 새를 도로 잡아넣는 일 세월 밖에서 별의 댕기를 만지작거리는 거야 왜 살구나무에는 숨구멍이 없는지 너는 아니? *처녀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의 이름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사)한국작가회의회원, (사)우리시회원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youngghc@hanmail.net  
442 화아(火兒) 외1편/정훈교 file
편집자
2134 2016-02-29
16. 03월 70호 시 화아(火兒)정훈교 그녀가 불씨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바람에 오래 부대꼈는지 겨우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아궁이에선 옥수숫대가 화랑화랑 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요강에 뜬 초승달이 달그락 거렸습니다 불씨는 여전히 차가웠고 아무 것도 데워 줄 수 없었습니다 불씨는 여전히 흐렸고 아무도 웃어주지 않았습니다 붉은 엉덩이가 달을 낳았다는 소문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 그믐이면 더욱더 붉은 달이 태어난단 걸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달마다 몸을 푸는 불씨 하나였습니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불씨 하나였습니다 어쩔 수없이 입에 넣고 화아 삼켜버렸습니다 불씨를 먹은 그녀는 이듬해 달을 낳았습니다 한 쪽 귀가 없는, 한 쪽 눈이 없는 별주부전 정훈교 당신이 우울을 낳고 우울은 별을 낳고 별은 태풍을 낳고 태풍은 농부를 낳고 농부는 알을 낳고 알은 계모를 낳고 계모는 채찍을 낳고 채찍은 시를 낳고 시는 우울을 낳고 우울은 바람을 낳고 바람은 오월을 낳고 오월은 동백을 낳고 동백은 바다를 낳고 바다는 나비를 낳고 나비는 시장을 낳고 시장은 골목을 낳고 골목은 아이를 낳고 아이는 손목을 낳고 손목은 세월을 낳고 세월은 발목을 낳고 발목은 뼈를 낳고, 뼈는 남아있지 않고 꿈은 남아있지 않고 꿈은 꿈을 잃고 꿈은 또 우울을 낳고 우울은 울음을 낳고 우울은 별을 낳고 별은 태풍을 낳고 태풍은 농부를 낳고 농부는 알을 낳고 알은 계모를 낳고 계모는 채찍을 낳고 채찍은 시를 낳고 시는 우울을 낳고 우울은 바람을 낳고 바람은 오월을 낳고 오월은 동백을 낳고 동백은 바다를 낳고 바다는 나비를 낳고 나비는 시장을 낳고 시장은 골목을 낳고 골목은 아이를 낳고 아이는 손목을 낳고 손목은 세월을 낳고 세월은 발목을 낳고 발목은 뼈를 낳고, 뼈는 남아있지 당신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그 모든 이름을 우울이라 하니라1) 정훈교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석사), 2010년 계간 『사람의 문학』 등단, 시집 『또 하나의 입술』(시인동네,2014), 시인보호구역 대표. 010-6560-4530, poetry2000@daum.net 1) 마태복음 1장 변용  
441 은하철도 999 외1편/안민 file
편집자
2163 2016-02-29
16. 03월 70호 시 은하철도 999 - 에필로그 안민 서기 2116년, 내 눈동자, 허깨비처럼 흔들립니다 그 속으로 마흔하고도 몇 번째 가을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우주는 이미 조화를 잃고 어떤 슬픔도 정화시키지 못합니다 낙엽이 오염된 철로 위를 구릅니다 깨진 별들이 몸속을 떠돌고 퇴출당한 영혼은 날개 꺾인 새처럼 무력합니다 불의에 저항하던 영혼은 유년의 어느 간이역에 버려지고 기계 인간의 틀에 감금된 채 막막한 어둠만을 반복합니다 손목을 그었던 친구가 자주 떠오릅니다 자본과 권력을 지배한, 기계 인간만이 영생을 누리는, 그들만이 행복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이곳은 지구별입니다 고서에 등장하는 마름처럼 굴욕을 체화한 이들도 있습니다 기계 인간을 경배하고 경외하며 오래오래 갈 것입니다 우담바라가 딱딱한 철로에 피어나듯 어쩌면 중심 없는 중심에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메텔은 오래전 알 수 없는 행성으로 떠났고 겨울 별자리좌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꿈은 오로지 은하계 너머의 승차권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듯 그녀는 새벽이면 대로를 건너 기계 인간이 거주하는 메가로시티로 청소 일을 나갑니다 나는 밤마다 취하지 않으면 유년을 재우지 못합니다 그때 나도 기계 인간이 되었다면,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아득한 전설이 되었습니다 꿈속에선 우주정거장에 햇빛이 쏟아지고 행복 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타오르지만 새벽이면 동공이 충혈된 채 인력시장으로 향해야 합니다 문득, 검은 도시를 배경으로 첫눈이 몰려옵니다 오염된 낙엽을 밟으며 논술 - λ형 아래 제시문을 읽고 문제에 답하시오. 해운대 오피스텔 ‘리오’와 톈진 오피스텔 ‘위웬’이 지구 표피에 꽂혀 있고 ‘리오’엔 분실되고 싶은 k가 ‘위웬’엔 분실된 y가 거주하며 허공은 [가]에서 [다]까지 서술함. 단, 두 오피스텔 밀도는 상이하며 심장엔 인터넷만 연결되어 깜박이고 k와 y의 구간엔 무수한 구름과 파도가 시간 경계선에 엉켜 서로의 표정을 관찰함. [가] y의 고독이 해저 인터넷 광케이블 안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해운대를 향해 질주하는데 k의 어둠은 그저 멀고 먼 타밀라두로 흘러간다. 갈매기 몇 마리 난민의 길을 떠나는 중이며 갯바위는 흉통을 앓는 듯 퍼렇고 [나] 톈진의 나풀대는 미디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언뜻언뜻 비치는 속살 눈부시고 부둣가 네온사인 낯빛은 창백하다. 공허한 k의 눈동자 엉망으로 취해가는 밤, 해운대 해변의 미니스커트들 속은 황홀하고 모호하며 바다는 냉증에 시린데 센텀시티 빌딩들 여전히 키가 자라고 백사장 모래는 낮보다 뜨겁고 환하다. 꾸겨진 달맞이 길에선 승용차 한 대가 실패한 사랑처럼 전복되고 [다] 마린시티 잘못 자란 마천루가 바다에 몸을 풍덩 빠트리자 순간 수십 개의 달이 출렁이며 제 얼굴을 우려내고 가을은 예고 없이 도착했다. 해변도로는 더욱 숨 가쁘고 긴 흑발이 모니터 속 청사포에 닿을 즈음 톈진의 야윈 플라타너스는 어깨를 들썩이고 y의 가슴은 섬이 되고 1. 제시문 [가]의 내용을 근거로 제시문 [나]와 [다]의 테크놀러지를 비판적으로 지적하시오. 2. 제시문 [나]와 [다]의 의미를 확장하고 k와 y의 접촉 여부와 그 사유에 대해 설명하시오. 프로필 경남 김해 출생. 2010년《불교신문》신춘문예 등단. dominiko8@hanmail.net  
440 강의 한가운데였다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2339 2016-02-29
16. 03월 70호 시 강의 한가운데였다 나무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붉은 오디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강물은 오디 속으로 들어간 햇빛처럼 반짝이고 반짝이는 것들은 어지러웠다 얕은 다리가 풀어진 치마끈처럼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고 있었다 뻐꾹새 울음이 치마의 주름 사이로 자꾸 흘러내렸다 다 마시지 못한 술을 강에 부었다 강이 붉었다 그는 물속으로 스며든 술 향기를 발가락으로 툭툭 차고 있었다 물속에서 슬몃 기포가 올라왔다 그것은 술에 취한 물고기의 노랫가락이었다 강물이 이따금 자신을 흔들며 흘러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바람과 햇빛 속에서 그가 잠시 보이지 않았다 고인돌 그들이 암벽의 각을 떠서 주검을 덮었다 죽음의 힘으로 수천 년을 가고 있다 너는 시간을 벗어나 가고 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돌에 갇혔다 수천의 백조가 날아왔다고도 하는데 너는 보았는가 약력: 시대문학(1998)으로 문단에 나옴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장 역임 시집『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강 저 너머』 2013년 ‘문학의 집 서울’ 시낭송대회 대상 수상 중앙대학교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재 한국문인협회 제26대 낭송문화진흥위원회 위원(2015- ) 중등 국어교사로 퇴임  
439 중국여자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려면 외1편/김숙자 file
편집자
2315 2016-02-29
16. 03월 70호 시 중국여자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려면 그녀는 남편과 함께 도시에서 만두 장사를 해야한다. 만두 장사를 하다가 홀시어머니를 모시려고 시골로 내려와서 과수원 일을 하면서 남매를 낳아야한다.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에 견딜수 없어 집을 뛰쳐 나가야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야한다. 시머머니의 시집살이는 점점 더해야한다. 시어머니와 싸우다가 남편한테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아야한다. 남편 곁을 다시 떠나 아이들을 중국으로 보내고 위자료를 요구해야한다. 남편이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해서 한 푼도 받지 못해야한다. 아이들도 남편도 없이 혼자된 그녀는 남편의 장삿날, 집으로 들어가 남편의 시체를 붙잡고 통곡을 해야한다. 시누이들이 그녀의 입을 벌려 침을 뱉고 머리카락을 뜯고 욕설을 퍼부어야한다.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 숙부 시댁식구들의 박대에 견디지 못해 남편과 살던 집에서 나와야한다. 남편이 늘 뒤에 따라다니는 것 같아야한다. 헛것이 보여 길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남편인 줄 알고 팔짱을 끼어야한다. 어느 누구의 남자도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아야한다. 봄에 중국에서 온 기러기는 남편이 묻힌산을 넘어 중국으로 날아가야한다. 기럭 기럭 ... 박쥐 이웃에 박쥐 한 마리 살아라 박쥐처럼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어라 우세한 쪽에 붙어서 다른쪽에 서려는 사람한테 저쪽은 나쁘다고 설득시켜라 내 편에 서지 않으면 허리띠, 재떨이 같은 것으로 때려라 그래도 안 되면 마누라까지 동원시켜 저쪽 편에 서지 못하게 해라 우두머리 서려는 인물이 나타나면 명예를 훼손해서라도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발버둥쳐라 그가 선 쪽이 분리할 것 같으면 또 다른 쪽으로 가라 그곳에 갔다가 대우받지 못하면 다시 이쪽에 와라 대우를 안 해 준다고 찌익 찍찍 울어라 김숙자 상주출생 문학세계 신인문학상수상 나래시조 신인문학상수상 이육사 시낭송경연대회 수상 한국문인협회,상주문인협회 상주아동문학회,문경 작가사상 회원 저서:날고싶은 제비,가족사진 http://cafe.daum.net/myeong2011(별빛언덕) dkll2004@hanmail.net  
438 탑꽃 외1편/권현옥 file
편집자
2321 2016-02-29
16. 03월 70호 시 탑꽃 권현옥 사월 햇살 짱짱하게 두르고 보련산 보탑사 뒷마당 꽃 한 송이 우뚝 솟아올랐다 108척 목탑 층층 탑돌이하듯 꽃망울 망울마다 별빛을 쟁여두었나 무릎 구부리고 앉아 올려다보니 서늘한 보랏빛 꼿꼿하다 꿋꿋하다 가슴 두근거리며 탑을 쌓고 날마다 허물어뜨리는 게 일생이라는 듯 바람 타고 날아오는 풍경소리 한 층 지우고 한 층 더 쌓아올리고 있다 개밥바라기별 모두들 앞서가려고 잰걸음 서두를 때 귀 막고 눈감고 가슴을 문지르며 뒤안 굴뚝 밥 짓는 연기 피워 올린다 어둠 속 바람 억새처럼 흔들려도 달빛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창녕 술정리 초가집 한 채  
437 소쩍새 제대로 울었다/이원준 file
편집자
2127 2016-01-31
16. 02월 69호 소설 소쩍새 제대로 울었다 Q가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창밖 생태공원 산책로 사람의 물결과 엇갈려 걷던 A 때문이다. 함께 나란히 하면 거치적거린다고 판단해서였을까. 사실 처음에는 산책로가 좁게 보였다. 다른 용도였는데 발길이 닿자 만들어진 길이 아닐지 잠깐 상상했다. 루쉰의 말대로 원래 이 땅에는 길이 없었지만 누군가 먼저 가고 뒤따르는 자들이 늘어나 생긴 것이라고. 막상 그곳에 가보니 어른 두셋이 손잡고 지나도 좋을 공간이다. 누군가 개척한 길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 동네에서 생태공원으로 연결된 길목은 두 군데다. 약수터로 이어진 왕래가 잦은 오솔길 쪽이 입구, 벤치가 있는 한적한 쪽이 출구가 돼버렸다. Q가 서성이는 창에서 보자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A의 출현으로 암묵적인 질서가 흔들렸다. 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난 것이다. 익숙함에 젖어있던 공중의 정서는 그를 장애물로 여겼다. 행여 해코지로 달려들까 흡흡 놀라기도 한다. 그는 개의치 않고 물살 가르며 씩씩 간다. 다만 활갯짓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겨드랑이에 양손을 파묻은 채다. 약수터 품은 산 뒷덜미쯤에서 소쩍새가 “엇쭈!” “엇쭈!” 울었다. 그렇게 들렸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A를 아웃사이더 취급했다. 두툼한 뱃살 돌려 막 지나친 뒤통수에 손가락을 꽂는다. 서로 부딪쳐 시비 붙는 일은 없어도 창가에서 바라볼 때 이질감은 또렷하다. 당사자들과 달리 광경이 한눈에 들어와서다. 몇몇이 A와 같이 역행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후다. 처음에는 에멜무지로 따라했으리라 봤는데 하루하루 그 수가 늘어갔다. 그의 모습이 뜸하다 이사 갔는지 영구 삭제됐어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재미든 효과든 있었으리라. 물론 끝내 전향하지 않는 쪽도 있어 결과적으로 반반이다. A의 저의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달라진 것은 있다. 얼굴 마주하는 일이 잦아져 이른 아침부터 주고받는 안부의 말소리들이 Q의 귀를 두드린다. 창문을 열면 기다리는 햇살이 바글바글하다. 산새들이 밑줄처럼 날았다. 그렇게 보였다. 새로운 한 방향이 되어 흐르다 다시 침묵할지 몰라도 일단 분분하다. 그 덕분이다. 대부분 뒤끝이 뭉툭한 늦잠에 묶여 간밤에 연연하거나 끊어진 필름인 낮잠과 뒹구는 일이 사라졌다. Q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반감은 없다. 이따금 새로운 노선의 그들과 걸으며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깨어있는 시간, Q는 오랜 만에 메모를 한다. 그가 벗어놓은 그림자로 다가가자 내 몸이 얼추 들어맞는다. 날개의 싹이 있을지 몰라 팔짱을 끼고 더듬는 일이 즐겁다. 이원준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시인, 소설가. 저서 《흔들림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 《권정생》, 《김오랑》, 《이상》, 《김구》, 《노먼 베순》, 《넬슨 만델라》, 《정약용의 편지》, 《조선왕들의 속마음》 외 jjun63@naver.com  
436 깊은 얼굴 외1편/임영석 file
편집자
2421 2016-01-31
16. 02월 69호 시 깊은 얼굴 바닷속 깊이 사는 심해아귀나 도끼고기 귀신고기를 나는 직접 본 적이 없다. 납작하게 생긴 물고기 물의 깊이를 몸으로 말하며 삶의 천적을 피해서 산다 그런데 내게도 심해 물고기처럼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얼굴이 있다. 눈, 코, 잎, 귀 땅에 묻혀 있는데 내 가슴에 묻힌 얼굴, 날마다 별처럼 말똥말똥 빛난다. 하루 웃어도 하루 울어도 하루 사랑해도 하루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계간 『현대시조 』 봄호에 2회 천료 등단. 시집 『고래발자국 』,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등 5권 상재,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부분 창작기금 수혜, 2012년 강원문화재단 시조부분 창작기금 수혜 imim0123@naver.com  
435 알레프 선언 외1편/나병서 file
편집자
2384 2016-01-31
16. 02월 69호 시 알레프 선언 자본은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유일한 선이며 문화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임을 천명한다 가난은 전혀 쓸모가 없음을 선포한다 궁핍은 이 시대의 범죄형태임을 선포한다 이 시대의 모든 자본은 궁핍을 거부한다 모든 궁핍계층은 자본의 도시와 격리되어 추방되어야 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잠재적 테러리스트 계층으로 분류한다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계층은 자본의 미래를 위하여 신속히 제거되어야한다 소비할 수 없음 이라는 무기를 소지한 자는 재판 및 경고없이 사살할 수 있다 모든 궁핍계층에 대해서는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 할 때까지 무한금리의 긴급자본을 조건없이 제공한다 자본에 대한 신뢰의 결핍은 물량으로 환산하여 보상한다 수단과 방법과 가치와 의미는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완전히 무시되거나 철저히 기만되어 활용되어져야한다 모든 계층은 자본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구현을 위하여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서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제거될 때까지 철저히 소비를 목표로 생활하여야 한다 모든 종교단체는 변화의 경계와 구획사이에서 이 시대의 전술한 이념이 숨어 성장하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하여야하며 종교활동 중에라도 자본이 존경받고 의도적으로 우월시되는 문화적 풍토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자본의 무제약적 권력에 방해되는 모든 집회와 모임은 중지되며 전통적인 가정의 구성은 허락되지 아니한다 전 세계의 모든 자본이여 더욱 단결하라 가난한 종족들은 인간일 수 없다 예언 매혹적이다 미래는 대신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고 시간의 시작을 지적한다 이 곳에서 너는 그토록 원하였던 황폐와 굶주림을 섬길 것이다 인쇄된 시간을 받아들고 황금으로 된 식탁위 황금으로 된 포도주 고체의 쾌락을 마실 수 없음을 비로소 읽게 될 것이다  
434 해바라기 외1편/황무룡 file
편집자
2262 2016-01-31
16. 02월 69호 시 해바라기 황 무 룡 낮에 그렇게 눈짓하며 돌더니 간밤에 기어이 일내었구나. 노란 얼굴 피우기도 전에 부끄러워 고개 숙이는 걸 보니 부끄러워할 거 없다. 사랑도 능력이라고 바람이 간질이지 않느냐 품속에서 알알이 영글어 가는 고놈들 위해 함박 웃어도 좋다. 산 거미 나무와 나무 사이 그물 쳐놓고 먹이 감 걸리도록 기다리는 나를 한심한 눈으로 보지마라 그물 치느라 밤새도록 배꼽 우리할 만큼 줄 뽑아내고 손바닥 지문이 다 닮도록 줄 타고 발바닥 땀나게 오르내렸다. 그런데도 팍팍한 세태 쉽게 걸려들지 않아 노심초사, 공치는 날이 많다. < 프로필 > ○ 황무룡(호, 석초) ○ 1952년 경북 울진 출생 ○ 1993년 계명대학교 정책개발대학원 졸 ○ 1993년 대구문학 “종이학 등”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 〮경북문인협회 회원 ○ 경상북도공무원문학회 회장 역임 ○ 시집 『마음에 길 묻다』,『죽비소리』, 『꽃이 필요하다』『삶의 해답 찾기』등 발간 ○ 전 칠곡부군수 ○ 대구불교문인협회 회장 ○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462-1 이메일 : surkchoh@hanmail.net  
433 싸인 외1편/김다솜 file
편집자
2569 2016-01-31
16. 02월 69호 시 싸인 그룹채팅 딸꾹질소리 무음으로 해놓고 허공에 맴도는 매미합창을 감상하고 있는데 이름 없는 전화번호 문자가 꼬박꼬박 답 해달란다 유명이자 무명, 무명이자 유명한 나에게 항아리 적힌 시(詩)가 좋다며 시집 있으면 싸인해서 보내 달란다 자장암의 금개구리, 길을 가며 길을 묻고 책처럼 싸인을 정말 멋있게 잘한다면 또 몰라도 아직 싸인 한두 번밖에 못한 나는 누구인지 모를 유령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몇 날 며칠 잠 좀 잘려면 나타나는 불안과 칭찬의 문자 시집 없다하니 ㅅㅈ문학 책에 해서 보내달란다 싸인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훗날 시집이든 책이든 나올 것인데 굴림체, 궁서체, 돋움체, 휴먼 편지체....., 자장암의 금개구리, 길을 가며 길을 묻고 책의 싸인은 그분들은 노력한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 어느 동행 송편도 절편도 아닌 무슨 편을 빚는다 갑자기 어느 물결이 편, 편 만들지 말라는 뜬금없는 소리 듣는다 아니 하늘과 땅, 허공이 다 내 편인데 먼지들이 앉았다 사라지는 편, 편들의 세상에 내 편이 어디 있나? 찾고 싶어 방, 방마다 들어가니 장롱, 책상, 가방, 온갖 책이며 옷, 컴퓨터, 잡동사니들이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들이 깔깔거리며 나를 보면서 “시나 잘 써!” 어제 함께 밥이며 국 먹은 사람들이 내 편일까? 어제 함께 웃으며 울었던 사람이 내 편일까? 어제 함께 일하던 손과 발이 내 편일까? 숨바꼭질하듯 골목길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내편은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내 편 되어 달라 부탁하려니 막상 전화 할 곳이 없었다. 여행이든 게임이든 혼자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네 편, 내 편 만들어 비석치기, 줄넘기, 술래잡기, 윷놀이, 카드놀이, 크고 작은 공, 공, 공놀이... 우울한 망상을 그만하자. 물끄러미 바라보는 밤하늘이 시(詩) 그럼 시(詩)는 누구의 편일까? 로댕처럼 턱을 고이고, ** 경북문경출생 2015년 리토피아등단, 경북 문협, 경북여성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