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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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2741 2014-11-03
746 서울의 낙타 외 1편/권순자 file
편집자
585 2019-04-30
서울의 낙타 여긴 사막이야 희뿌연 사방! 앞이 보이지 않아 모래먼지 속에 하루를 토해낸다 냉방기를 설치하는 손발 분초시간까지 맞추는 나의 하루 뼈 마디마디 땀을 게워낸다 땀범벅 전신을 삼키려는 칠월의 열기 이 싸움은 불공정하다 무거운 짐 끌고 오르내리는 기나긴 행로 팽팽한 목숨의 줄다리기 멈출 수 없다 더딘 하루 묵묵히 가지만 뼛속까지 잠긴 여름의 열기를 빼내고 싶다 갈증과 허기로 배 속이 타들어간다 뜨거운 회색 사막 고단한 길 치명적인 길 더듬거리며 흔들리며 팽팽한 열기에 저항하며 젖으며 간다 힘줄이 타고 견디어온 날들이 타고, 사막에서 부는 약간의 바람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곱창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곱창을 먹는다 구불구불한 길 토막 난 현기증 곱씹다 보면 환해지는 순간아 찾아온다 배알 틀리던 굴욕의 기억이 씹히고 씹혀 잘근잘근 길을 열고 강줄기를 부른다 말 달리던 원시의 기백이 다시 싱싱해져 늑대처럼 포효하며 일어서는 배짱의 으름장! 얼음장 같이 숨죽인 고개를 들고 느슨한 근육이 불끈 솟아 숨통이 트이고 뱃속이 열리는 곱창집 사내는 두 다리 꼿꼿이 세워 자신의 길 뚜벅뚜벅 새벽을 걷는다 길이 보이지 않거든 곱창집에 가보라 잘려나간 길을 찾아 헤치고 뒤지며 길을 찾는 눈물에 젖은 손들이 깃발을 흔들어 환하게 길을 보여줄 것이다. 권순자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청춘 고래』등이 있음.  
745 강박 외1편/남태식 file
편집자
540 2019-04-30
강박 내 꿈의 무게는 몇 그램일까.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가는 길에 체중계를 툭 찬다. 오늘은 몇 그램? 식전에 먹는 약 넥시움정 20밀리그램 한 알을 꿀떡 삼킨다. 약 한 알에 물 한 컵. 거실을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체중계 위에 올라선다. 그새 300그램이 빠졌다. 오늘 내 꿈의 무게는 300그램? 내 꿈의 무게는 매일 다르다. 달라도 늘 200그램에서 400그램 사이에는 있다. 딱 그저 그만한 가벼운 내 꿈의 무게, 또는 잠의 무게. 나는 일 년 열두 달 매일 다이어트 중이다. 꿈꾸기 아빠는 꿈이 뭐야. 으음, 내 꿈은 시인. 그럼 아빠는 꿈을 이뤘네. 시인은 됐고 이제 아빠는 꿈이 뭐야. 으음, 내 꿈은 시인. 시인은 됐는데 뭔 꿈이 또 시인이야. 으음, 됐어도 아빠 꿈은 여전히 시인.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시시하다. 대단한 데가 없어서 보잘 것 없다. 좀스럽고 쩨쩨하다. 어린 자식들은 이제 다 자라서 아빠에게 더 이상 꿈을 묻지 않는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꿈을 묻지 않는다. 꿈은 묻고 답하는 퀴즈풀기가 아니니까. 네 팸은 우리 팸과 다른 것 같애.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현이의 꿈은 무엇이었지. 꿈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꿈꾸기라면 소현이의 꿈은 혹시나, 꿈꾸기? 어쩌면 우리 모두의 꿈 역시 꿈꾸기일 수도 있다. 꿈은 꾸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 꿈은 꾸는 동안만 꿈이니까. 꿈은 하나의 강박이다. 꾸고 있는 동안만은 아름다운 강박. 시시한 꿈은 없다. 시시해도 꿈이다. 꿈이 끝장인 것은 시시해서가 아니라 시시해져서이다. * 영화에 시, 조현훈‘꿈의 제인’ * 약력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망상가들의 마을』, 리토피아문학상(2012) 김구용시문학상(2016) 수상  
744 미얀마 가는 길 외1편/이상훈 file
편집자
447 2019-04-30
미얀마 가는 길 미얀마행 비행기 두어 달 동안 이미 몸에 배어 있는 겨울 그 위에 다시 달려드는 차가운 바람 겨울에서 여름을 건너는 다리가 휘청거린다 나는 온몸을 속으로 꽁꽁 말아넣고서도 마치 두려움처럼 덜덜덜 떨며 벗어버린 나를 고민한다 입고 벗는 사소함마저 아직 내 몸에 온전히 붙어 있지 못한 것일까 수십년을 살아 수만 번을 입고 벗어도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한 사소한 일상 앞에 나는 늘 너무 판단이 가볍다 비행기를 내려서도 나는 더 강하게 다가오는 바람 앞에서 몇 날을 끙끙대며 떨고 있다 눈길을 걷다 눈 내린 새재길을 오른다 모퉁이마다 나를 알아보는 흔적 살아온 햇수만큼 뚜렷하고 꽁꽁 싸맨 나를 따라오는 숨소리마저 낯익다 내가 가는 곳에는 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뽀도독 뽀도독 알려주는데도 미끌 발을 헛디디는 방심 그 위에 철퍼덕 누우면 마치 내가 나의 길이 된 듯 나를 밟고 지나가는 또 다른 나 약력 문경에서 출생하여 교직생활을 오랫동안 상주에서 하면서 정착하게 됨. 상주들문학회 회원, 경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씀. 시집, ‘나팔꽃 그림자’를 출간하였으며 산문집은 ‘서른에 만난 열여섯’이 있다.  
743 구부러진 못 외1편/김인구 file
편집자
441 2019-04-30
구부러진 못 볕이 잠시 앉았다 떠난 따스한 그늘 아래로 너, 몸을 구부렸구나 너도 많이 외로웠구나 나도 그 곁에 나란히 마주보고 누워본다 서로 마주 보고 누우면 외로움의 각도 작아져 마침내 흔쾌한 合이 되지 않을까? 푸른 바람 한 줄 따스한 그늘 밑으로 올라오는 오후가 거기 그렇게 서서 한웅큼 쏟아지는 우울을 가리고 있다 들락거리는 햇볕만이라도 소박하게 끌어안고 이 그늘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 이방인 반듯하게, 반듯한 햇살 아래 눕는다.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홍수 몸의 테두리가 꽃봉오리 분수처럼 솟구쳐 하늘에 닿는다. 당당하게 충만한 하루가 서슴없이 튕겨져 나와 나무 아래 보도블럭을 걸어간다. 걸어가는 빛들은 보송보송하고 친절하게 흐느적거린다. 거리의 반은 햇살, 반은 아침과 저녁 반듯한 햇살나무 아래 누워 배반을 배우는 여자의 빠알간 입술 충만함이 가득한 거리 햇살이 길을 내고 길을 막아서고. 약력 전북 남원출생. 1991년 <시와 의식> 여름호에 <비, 여자> 외 2편을 발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신림동 연가> <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2014년 세종 우수도서 선정)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742 과일을 깎으며 외1편/신성철 file
편집자
358 2019-04-30
과일을 깎으며 수다쟁이 말성쟁이 이쁜이 하나 식탁 위로 납치하던 날 급작스레 당한 일에 겁이 났던지 처음 손을 타 뺨을 붉히며 찡끗 흘겨 보다가 서늘한 혀 끝으로 온몸을 애무하면 찌릿찌릿 짜릿짜릿 뭐가 그리 다급한지 입꼬리에 침도 질질 흘리는데 수치도 염치도 팽게치고 팔딱이다 할딱이다 꽃무늬 속옷 마저 훌떡 벗어 버린 알몸뚱이야 S라인이면 어떻고 D라인이면 어때 오냐 오냐 그래 그래 덮쳐주마 죽여주마. 명지바람 달빛으로 다가오는 그림자 치마 끝에 초롱꽃이 환한 명지바람이려오 스치는 풀잎에 발등을 행구고 달뜬 마음 바람에 물들이는 명지바람이려오 너의 눈동자 노을빛에 담겄다가 살짝 흔들어 은방울로 찰랑이다 귓불을 애만지는 명지바람이려오 약력 1950년 서울 출생 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2004년 전국근로자문학제 은상, 2010년 열린시학 신인상, 2011년 백교문학 우수상, 2013년 지필문학 신인상, 2014년 문장21 신인상 수상 2010년 시집 3천원짜리봄 출간  
741 생의 찬가 외1편/ 청향 임소형 file
편집자
369 2019-04-30
생의 찬가 흔들리는 상념의 그네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고 뚜렷한 흔적으로 남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반복되는 습성이다 후회와 번민 가슴 치는 절규가 그것이고 주저앉아 버린 유약한 다짐들의 말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반복적인 결의가 또 그것이다 미완으로 낙인 찍힌 고독의 실루엣이 끈적거리는 망막의 진액을 무서리로 쏟게 하던 밤 포성을 울렸던 야심에 찬 출발의 신호탄 허무한 불발로 불꽃 사그라질 때쯤 남겨진 미련에의 끈끈한 애착 아름다운 날을 담아내지 못한 쓸쓸한 미련만이 아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아픔에 쓰디쓴 고통을 토로하는 절규는 더욱이 아니다 빼곡히 채우지 못한 가버린 날의 희망이 섦은 뭉치로 무겁게 내리누르는 피폐함이었으니 흐릿한 수묵화 향 피워 달 속에 잠식하는 떠나는 날의 엘레지여! 끈적이는 촉수 곧추세워 서걱거리는 찬바람 비웃듯 파안으로 피어나라 침묵으로 일관한 모호한 허세에 마른버짐처럼 허옇게 핀 너덜너덜해진 희망아! 내 생애 마지막 남은 따스한 사연 풀어 사부작사부작 꽃물로 채울 테니 푸르게 푸르게 만월로 차오르라 오랜 기다림 끝에 부르는 나의 시 나의 노래가 되어 낙화 어느 누군들 꿈의 빛깔 피우고 싶지 않았겠냐 향기 돋친 날개 펄럭이며 숲길을 걷던 날에도 눈길을 걸었던 날에도 달빛에 걸린 그리움 움켜잡고 사뭇 꿈의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꽃을 피웠다 우우 저 소리 없이 훑어내는 바람의 정적 초점잃은 누 안에 빼곡히 들어와 밟히는 청춘의 눈물 눈물 눈물  
740 2019' 동해, 붉은 봄 외1편/이선정 file
편집자
393 2019-04-30
2019' 동해, 붉은 봄 꽃놀이는 저 너머 그쪽의 봄, 너희들의 일 그날 밤 죽음의 불꽃놀이는 바람, 네가 자행한 일 옥계휴게소에 출입통제 테이프가 처졌다 붉은색 데드라인 너머 언덕배기로 살인미수에 그친 물먹은 화마(火魔)가 소나무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새카맣게 죽어 자빠져있다 가랑이 벌린 앙상한 뼈대 사이로 퍼렇게 질려 누운 바다 매캐한 허공에 몇 년 전 급작스레 간 친구 녀석 몸 태우던 화장터 냄새가 난다 죽은 것들은 하나같이 독한 미련을 풍기는지 곧 피어날 아카시아 밑동의 생식기 타는 냄새 같은 미련.. 어쩌다 이곳은 화장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최고가 된 건가 그 화장실에 앉아 며칠새 바짝 늙은 주름진 바다를 다린다 신에게 덤비는 좀비가 있다면 2019년 동해안의 봄, 죽은 봄 위에 봄을 심는 사람들 기울어진 생의 부하를 날마다 하나씩 차곡차곡 끌어올려 채우고 있다 기웃대던 바람을 뚫고 붉은봄 살아남은 어린 싹 하나 저쪽 푸른 바다를 향해 끙차, 짧은 팔을 뻗는다 2019.4.9 산불 5일째 꽃말론(論) 스노우드롭 - 인내 산당화 - 겸손 바이올렛 - 영원한 우정 호피나리 - 순결 라일락 - 우애 이 꽃들의 평생, 지겹지 않니? 살아생전 늘 똑같이 아름답기만 해야 할 네 운명 로벨리아 - 불신 라난큐라스 - 비난 리아트리스 - 고집장이 금어초 - 오만 주목나무 - 비애 이 꽃들의 후생, 서럽지 않니? 다시 태어나도 변함없이 비난받아야 할 네 운명 저 꽃들의 운명 점지해준 사람 최후의 꽃잎 한장 들추고 보드라운 수술, 그 속까지 파고들어 한 잠이라도 자본 건가 오만과 불신의 벼랑 끝에서 영원한 우정과 우애의 칼침을 등에 맞고 나락으로 뚝 떨어져 보지 않은 자여 마치, 내 꽃말을 손에 쥔 당신처럼 프로필 2016' 문학광장 신인상 황금찬시맥회 문학광장 정회원 지하철스크린도어 시공모전 당선 대한민국 공예대전 특별상 한양예술대전 시화분과 심사위원  
739 아버지 등 외1편/최기종 file
편집자
651 2019-04-01
아버지 등 아버지 등을 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등도 비바람 피하지 못하는가 나이 타는 얼굴처럼 검버섯 돋아나고 낡고 해지고 주름지고 어릴적 아버지 너른 등 따개비처럼 한참을 밀었어도 당당 멀었었다. 이제는 손이 커져서 여름소나기 지나가듯 밀어대니 등도 부끄럼 타는 것일까 아버지 굽은 등 결기도 핏기도 자존도 없어지고 등도 조금씩 잊혀지는 것일까 황사에 패이고 깎여서 종잘거리던 시내도 말라 버렸으니 비바람 찬서리 내리다 보면 등도 갑각류 문양이 되는 것일까 아버지 필적 젊어서 아버지 필체가 좋았다. 근골이 튼튼한 집을 짓듯 그것 좌우로 기울지도 않고 앞뒤로 엇박이 나지도 않고 자모자가 반듯반듯 했었다. 중년에 들어서서 아버지 궁굴리는 솜씨가 늘어나서 조련마 발놀림하는 것처럼 경쾌하게 옆으로 달렸다. 필선이 유연하여 좌우를 거느리고 앞으로 달렸다. 이제 노년이 되어서 힘도 빠지고 어깨도 쳐지고 손도 떨리니 길이 흔들리고 필체도 삐틀삐틀 필선도 들쭉날쭉 더디게 고갯길 넘어 갔지만 필력은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모래밭의 기러기처럼 발림을 노닐었다. 오늘도 아버지 부주돈 봉투 쓰시면서 무릎 꿇고 엎드려서 솔가리 냄새 풍기신다. 이젠 갈필이 되어서 죽은 귀신 부르는 필적이다. 최기종 1956년 전북 부안 산,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나쁜 사과』, 『어머니 나라』,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슬픔아 놀라』, 등,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738 가거도 산다이 외1편/박관서 file
편집자
607 2019-04-01
가거도 산다이 단애의 발목으로 착착 감겨오는 독실산 아홉 골짜기 너머 향리마을 비탈진 동구에서 만났지 한쪽 가지는 말라죽은 지 오래 다른 가지는 생생이 살아 오른 연리지 소나무 하늘 길로 아슬한 줄기를 따라 기나긴 돌무지 울안으로 숨은 집들 골골이 서너 뼘의 텃밭들을 내보이며 겨우 죽어 누울 자리만한 뙈기 안에서 살기위해 서로를 가르는 담장들을 두르고 옹기종기 골육처럼 꼭 껴안고 무시로 노략하는 폭우, 태풍, 땡볕, 시월도지, 날칼 같은 북서풍을 향해 쉼 없이 슬픈 항쟁을 벌였던 흔적인가 쏟아질듯 몰려오는 저녁 어스름 슬슬 달겨 알뿌리로 캐어 말리며 칠순의 생애를 일구던 가거도 할마씨 내게 말했지 사내도 자식도 오래전에 떠나고 혼자 사니께 후박술 줄 텐께 산다이판 함 벌려보자고 저녁에 놀러오라고 놀러 갈랑께 꼭 기다리라던 산다이 약속 가거도의 너울로 몰려오곤 한다 가거도行 밀려난 꿈은 가장자리가 가장 깊다 사는 일에 목을 걸고 맴을 돌다 국토의 맨 끝 가거도에 이르러 이웃나라 닭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녹섬 앞 둥구회집 평상에 앉아 검정 보리술로 목을 헹구면 박혀있던 낚시미늘마저 따뜻해진다 밤 깊은 동개해변 찰랑거리는 둥근 달빛에 흠뻑 젖어 사는 일 흔적도 없이 지워져 남의 나라 남의 일이 된 즈음에야 새로워진 나를 만난다 스스로 깊어진 가장자리를 만난다 생무릎 꺾여 밀려나보지 않은 이들은 평생을 살아도 가거도에는 이르르지 못하리 박관서. 전북 정읍 출생, 1996년 계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신인추천. 제7회 윤상원문학상 수상. 시집 『철도원 일기』, 『기차 아래 사랑법』 간행.  
737 동백 외1편/윤임수 file
편집자
566 2019-04-01
동백 겨울 갈맷길을 걷다가 바닷바람에 몸을 뒤척이면서도 애써 꽃눈 밀어 올리는 맑은 동백을 만나면 당신이 오래오래 나를 기다린 것으로 알겠습니다. 맑은 대구탕 모처럼 오붓하게 떠난 여행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근처에서 아내와 좀 늦은 아침 식사를 위해 맑은 대구탕을 청하고 기다리는데 한바탕 단체 손님이 남기고 간 소란이 아직도 빈 그릇을 달그락거리고 있는데 주름진 식당 주인 어르신 부부 가만가만 걸으며 나긋나긋 웃으며 대구탕 냄비 가득 선하고 맑은 마음을 담아주셨다 그 마음에 나도 한껏 맑아져 탕이 짜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 윤 임 수 - 충남 부여 출생,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 - 시집 『상처의 집』, 『절반의 길』  
736 복사꽃 수평선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613 2019-04-01
복사꽃 수평선 도로를 내로 바꾸고 차는 쪽배로 바꾸면 흐르고 흘러 닿을 수 있을까 무릉武陵 복사꽃 붉게 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젓대를 불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무릎을 베고 눕는 수평선 설익은 음률에도 바다는 파도를 파견하여 장단을 맞추고 추임새로 보구치 복복 성대는 분홍, 꽃분홍 복사꽃 풀풀 풀 흩어질 때 자꾸 뒤돌아보며 작별하는 어깨 너머 화개花開를 기약할 까닭들이 차곡차곡 쟁여진 고리짝이 있어…… 내는 다시 도로로 바꾸고 쪽배를 차로 바꿔 밟아, 밟고 또 쌔려 밟으면 세월을 추월하여 먼저 닿을 수 있을까, 내년도, 후년도, 내후년도치 도원桃源 박바위* 수평선 그날 우리는 구룡포항 방파제 아래 수평선을 매놓고 언덕을 감돌아 응암산鷹岩山 박바위에 올라섰다 그런데, 객석인양 마련된 널따란 바위마당에 바다가 이동극장 스크린처럼 펼쳐져 있고 바지랑대 몇 개를 이어 괸 빨랫줄 같이 수평선이 높다랗다 수평선 아래 배 배 흘수선 아래 갈매기 갈매기 날갯죽지 아래 읍내 지붕이 오보록한 영상 동해는 그믐사리 간만도 긴가민가한데 등산객 붐비는 토요일이라고 야트막한 산이 이리 높이 해수면을 끌어올릴 재주가 어디 있었누? 산꼭대기 움푹 팬 바위 웅덩이에 괸 물에 손을 담그니 리모컨을 누른 듯 화들짝 화면이 바뀐다 속보, 누가 조금 아까 매, 아니 부엉이처럼 훌훌 벼랑을 날아내렸다는 * 포항시 구룡포읍에 있는 응암산 봉우리 이름. 해발 158m. ********************************** 차영호 (車榮浩)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youngghc@hanmail.net  
735 오래된 책과 함께 외1편/이승호 file
편집자
503 2019-04-01
오래된 책과 함께 여행가방 안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철지난 옷가지 속에 여전히 향기와 기품이 느껴지는 그 오래된 책이 깊숙한 곳에 파묻혀 아직 누구의 영혼과도 만난 적이 없어요 고백이라도 하듯 내 눈길을 바라고 있었다 커다랗고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며 마치 사랑의 재회를 꿈꾸는 연인처럼 그것들, 이제 내다버리지 끝내 버리지 못하는 몇 권의 책이 있고 아직도 떠나지 못한 단 한 번의 여행이 내게 남아 있다. 안녕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모두 안녕 행복과 불행도 안녕 선생이 안녕 장난꾸러기 학생이 안녕 파블로 아저씨 안녕 생의 최대의 사건이 죽음이라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여 영원히, 아침 꽃이여 안녕 나 죽을 때 푸른 강물에 누워 흐를 때 저 울음소리 목이 쉰 물오리 떼 강안으로 날아오르리 저 세상에서 그렇게 시작했으면 좋을 걸, 안녕 그녀의 낡은 옷소매처럼 다정한 말 시작이면서 끝인 침묵의 그 말 사랑이 너무 빠른 슬픔이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힘겹게 하루를 마감하고 일생을 걸어 잠글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말 그윽한 것들은 남으리라 영원히 새로움을 감춘 후대들이여 안녕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아이들처럼 버찌를 따먹다 떡갈나뭇잎 모자를 엮어 쓰다 주머니 안의 도토리 몇 알을 만지작거리다 여름은 두 번째 계절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다 이제는 그대여 안녕 생의 물음표에 대한 완벽한 답을 갖고 있는 저녁 새에 대하여 물고기가 뛰어오를 때의 그 말 나는 지금 누워서 어두워오는 산의 뒷면을 보고 있다 눈을 감은 채 죽음의 역광을, 생을. 이승호 춘천 출생. 2003년『창작21』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느 겨울을 지나며』『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외.  
734 섣달 뻐꾸기 외1편/신구자 file
편집자
442 2019-04-01
섣달 뻐꾸기 섣달 뻐꾸기 아무런 도움 줄 수없어 저리 애닯게 우는가 차가운 아파트 담벼락에 의지한 채 늙은 노구, 조롱조롱 매달린 새끼들 미래의 꿈들 키워주겠노라고 다둑이고 있는 저 목련나무, 희망과 좌절 체념의 길들, 파도처럼 넘나들며 섣달 햇살따라 젖먹은 힘 다 짜내고 있는 저 꽃봉우리들, 수상한 시절 황사만 자욱히 밀려오는데 뻐꾹뻐꾹 섣달 뻐꾸기,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카멜레온 같은 이 세상 상처 저 목련꽃들, 여름밤 불빛 찾아 모여들던 하루살이처럼 북쪽으로 북쪽으로 고개 꼬운 채, 저리도 간절할까 접지못한 사무친 그리움, 묻어둔 삭은 세월 망울망울 눈물 글썽일 때면 돌부리에 발끝 부딪치 듯 돋아나는 상처여 약력 1994년<대구문학> 1999년<불교문예>시 당선 등단 시집 [낫골 가는 길]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  
733 간질거리다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419 2019-04-01
간질거리다 등에 싹이 나려는지 밤새 가려웠다. 뭘 잘못 먹었다는 동네의사 친구야, 네 말이 맞을지 몰라도 나는 3월 말고는 달리 먹은 게 없네. 뿌연 안개 속 굴뚝에도 골목어귀 쓰레기 밭에도 내 마음 속 휴전선이나 뒷면만 보는 아침 신문의 앞면에도 분명 초록 잎으로, 붉은 피로, 깨어지는 함성으로 오돌토돌 솟아나고 있는 걸, 나는 가려워, 간질거리고 있어. 새봄 매화 피었단 소릴 듣고 냉동고를 열었다. 투명한 병 속에 일 년을 얼어 있던 꽃잎들 홀로 선 봄날의 아쉬움이 눈물 녹자 매화향만 새롭다. 이 봄엔 저녁 달빛 꽃 그늘에 함께 앉을 수 있을까. 연약한 믿음의 손으로 다시 몇 송이 새 봄을 따 얼려놓는다. 새 봄.  
732 쌍팔년도 메아리/김인기 file
편집자
402 2019-03-03
쌍팔년도 메아리 다 알아. 그럼, 다 알지. 누구라도 무지나 부주의를 피할 수 없는 만큼 착오도 범한다. 그래서 모모가 쌍팔년을 단기 4288년이 아니라 서기 1988년으로 알아도 놀랍지 않다. 난들 서기 1955년 분위기를 어찌 제대로 알까. 아마 단기 쌍팔년엔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저마다 심신을 추스르느라 바빴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서기 쌍팔년이 마치 엊그제인 듯한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얼마 전 수원화성(水原華城)에 갔다. 예전에 친구와 이곳에 들렀는데, 그게 대략 30여 년 전이다. 내가 무심했던가? 세월이 순식간에 흘렀던가? 그날 이후로 다시 여기로 온 적이 없다. 그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도 이미 오래이다. 홀로 자문해본다. ‘그 친구가 보고 싶은가?’ 이내 자답한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이제는 우리들 사이도 멀어진 것이다. 어쩌다 어디에서 만나 서로서로 알아본다고 해도 이내 덤덤해질 것만 같다. 피차 성품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해도 서먹서먹할 것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과거 사진을 다시 보면서도 알고, 그때 책을 다시 읽으면서도 안다. 어쩌면 이게 이럴 수가 있을까? 동일한 사물조차 이렇게나 달라 보이는데, 하물며 그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과거를 향해 고함을 지르면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까? 설령 이게 가능하다 해도 기대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원경을 바라보며 한때 저기 살았다던 민물고기 서호납줄갱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어릴 적에 저 서호(西湖)에서 물놀이를 했노라 했고. 이 근방에 있었던 그 집에도 놀러갔다. 대체로 남루한 거처였다. 담장도 낮았다. 마침 마당 한 구석 수돗가에서 여동생이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게 못생겼지?” 오라버니가 이 무슨 말본새냐! 만약 동생이 들었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그즈음 아무개는 내게 누구를 ‘천사’라고 자랑했는데. 그래서 나로서는 무척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하기야 천사라고 해서 어찌 다 같으랴. 이들 가운데 왈패도 있겠지. 더러는 비속어도 마다하지 않으리. 수원 그 친구는 멋대가리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대꾸하나. “응. 못생겼어!” 그는 잘 지내겠지. 아무렴, 무슨 변고야 있었으랴. 그도 나를 잊고 살려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미련도 없다. 이건 내가 별나서가 아니다. 실지로 인연이 내내 이어졌다고 하자. 그런들 뭐가 달라졌을까? 나 없는 그 자리에 누가 대신 있겠지. 그의 삶에도 우연과 필연이 뒤섞였겠지. 그래, 그러고 보니, 내가 다시 화성에 오게 된 사연도 그렇잖아. 아내가 고집을 부렸다. 작년에 아들이 인근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학기마다 기숙사로 짐을 들이고 빼낸다. 누구나 처음이야 부모가 따라가는 게 자연스럽다. 그 학교가 어떤 곳인가? 당장 이것부터가 궁금하다. 그러나 개강과 종강이 한두 차례 잇따르면, 부모도 으레 그러려니 한다. 요즘은 택배업도 발달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달랐다. ‘왜 저 사람은 쓸데없이 이러는가?’ 이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다. ‘아하, 그렇지.’ 생전에 어머니도 이와 비슷했다. 이게 효율성과는 무관하다. 어머니도 나를 자꾸만 시장으로 데리고 다니려 했다. 나는 흥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가게에서 내 관심사도 아닌 옷가지를 자꾸만 입히려 했다. 이게 요즘은 아내가 하는 바로 그 행태이기도 하다. 이 와중에 내가 더러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이거 어때요?” 질문은 단순하다. 정답도 쉽다. 내가 솔직히 의견을 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아내가 옷가게에서 자기 옷을 고르면서 이럴 때마다 나는 그만 아득해진다. 내가 경험으로 안다. 이 답변도 아니고, 저 답변도 아니다. 어디에도 정답이 없다. 이럴 바에야 왜 묻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보기에는 이거나 저거나 별반 차이도 없다. 이래서 동일한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도 상당한 수준의 번역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기호학 지식을 빌려와 기의(記意)와 기표(記表)의 차이부터 납득해야 한다. 여기에 혼동이 오면 매사가 어그러진다. 발화자(發話者)와 청취자(聽取者) 가운데 누구라도 이걸 확실히 간파해야 그나마 파탄을 면할 수 있다. 이게 쉽지가 않다. “이 모자가 예뻐요?” 아내가 모자를 쓰고 던지는 이 질문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한다면, 그 답변이야 어떻든 좋다. 그러나 이게 기표로는 ‘모자가 예쁘냐?’는 거지만, 기의로는 ‘내가 예쁘냐?’이다. 때로는 이게 ‘당신은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일 수도 있어. 어쩌다 부부싸움이라도 벌인 처지라면, 남편의 답변이 모자의 형태나 색채와는 무관해야 한다. “뭐, 그런 걸 또……. 당신은 허영심과 낭비벽이 너무 심해. 그러니까 간밤에도 내가 그랬지. 이미 가지고 있는 모자만 해도 도대체 몇 개냐?” 아마 하느님도 이렇게나 아둔한 남자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그대한테 홀딱 반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온 만큼 이참에 맛이 가버리자. “우와, 그대가 바로 절세가인입니다.” 이러고도 고민해야 한다. ‘더 참신한 말은 없나?’ 아마 나도 구닥다리일 것이다. 내게도 쌍팔년도 정서가 있으니까. 이걸 내면 깊이 간직하려는 버릇마저 있다. 이러고서야 어찌 함부로 신세대의 미래에 참견하랴. 그렇다고 아들이 아버지와 많이 다를까? 뭐, 가끔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자식이 그 아비를 닮는다. 이 자식은 또 자기 닮은 자식을 둘 테고. 기숙사로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간 이것도 언젠가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짐은 아들이 나중에 알아서 풀기로 하고, 일단 모두 사진이나 찍으며 놀기로 했다. 내게도 욕심이 있어서 아들 성향이 나와 유사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둘이서 농담을 해도 잘 통할 테니까. 아들은 화학공학을 지망했다. 나는 곧 적응했다. 이 분야라 해서 나쁠 것도 없지. 어느 분야든 깊이 들어가면 어딘가에서 만나겠지. 그러자면 여기에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데. ‘혹시 아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서 결정하는 게 아닐까?’ 이게 궁금했다. 남들이야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막상 본인이 뭘 하고자 하면, 이게 결코 만만치 않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광고지 한 장에도 누군가의 땀방울이 스몄다. 아무나 인쇄기를 돌려 뚝딱 만들 수가 없다. 그런데 누가 이걸 마지못해 해야 한다면, 이것도 무지무지 고역일 것이다. 본인도 고달프고, 기계도 탈이 난다. 먼저 그 방면에 적합한 유전자가 있어야지. 당장 나부터가 그렇다. 노래방에 갔으면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도, 화면의 자막을 보면서 무심코 가사를 다듬는다. 무협영화를 보면서도 저렇게나 정교한 장면을 어떻게 문장으로 구성할까 궁리한다. 가로수들이 산들바람에 가만가만 흔들리는 풍경마저도 행간의 분위기와 연관을 짓는다. 이런 걸 누가 억지로 시킬 수는 없다. 녹음 아래에서 책을 읽노라면 책장에 자그마한 벌레들이 떨어진다. 요렇게나 작은 것들한테 나무는 엄청나게 광대한 세계이다. 여기를 보금자리 삼아 악전고투하는 생명체들이 있고, 또 이들을 노리는 천적들도 있다. 한낮의 폭염이 물러나자 한밤의 폭우가 쏟아진다. 누군가는 온몸으로 이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이러니, 어쩔 거냐.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꿈마저 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서로 말도 없이 지내나. 아들이 가만히 있으면 나라도 나서야지. 연전에도 그랬다. 지하철역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아들을 기다렸다. 이것도 아내가 수험생 아버지의 책무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나타났다. 책가방이 무거운 듯했다. 내가 말했다. “이 가방에 헬륨 넣은 풍선을 달면 어떨까?” 아들이 즉각 반박했다. 헬륨이라는 물질의 성질이 이러저러해서, 이 가방의 무게를 영(零)으로 하자면, 풍선의 지름이 최소한 얼마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이걸 달고는 전철이나 버스의 비좁은 출입문을 도저히 드나들 수 없다. 나는 이때 아들의 생각머리가 이렇다면 화학공학을 전공해도 괜찮으리라 판단했다. “한 변의 길이가 10인 정육면체와 동일한 체적의 구(球)는 지름이 얼마인가?” 한때는 나도 해법을 알았을 것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정육면체의 체적은 그렇다 하더라도 구(球)의 체적은 어떻게 구하지? 이것조차 오리무중이다. 이건 내가 무심했기 때문이다. 매사가 이렇다. 그 역도 다르지 않다. 비록 고난도의 문제라 해도 거듭 궁리하다 보면 끝내 풀리겠으나, 이것도 애정이 없으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원피스가 3벌이라면 경우의 수는 3이다. 그러나 투피스가 3벌이라면, 이게 9이다. 여기에 모자와 손가방이 3개씩이라면, 이게 자그마치 81이다. 식탁에 놓는 음식도 이렇게 추산할 수 있다. 국수나 죽이 아니라 오로지 밥만 먹는다고 하자. 이에 따르는 국과 탕을 한 가지로 하고, 무침과 볶음과 절임을 두어 가지로 하자. 이래도 경우의 수가 많다. 어디에든 변수는 있다. 조화가 깨어지면 오로지 난잡하기만 하고 유용성이 사라진다.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도 그래. 삼삼오오 모여 정담을 나누는 그 자리에 하필이면 빚쟁이가 끼어들다니! 디자인이 좋아야지. 그러자면 안목이 높아야 하고. 이마저도 어려우면 어떻게 하나? 탁자에 꽃병을 놓거나 술병을 놓자. 이러니 설령 헛소리를 하더라도 뭘 알고 해야 한다. “아들아! 만약에 네가 어머니한테 죄를 지으면…….” 이러면 아들도 다음 내 말이 ‘어디에도 빌 곳이 없다.’인 줄 안다. “나야 속인이어서 누가 실수하더라도 용서 받을 수 있으나, 네 어머니는 천사여서 사정이 매우 다르다. 옛말에도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했다. 천사는 하늘에 속하는 존재이다.” 과연 내가 많이도 한 소리이다. 이게 형식은 아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내용은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 만큼 나는 언제나 이 말을 아내가 듣는 앞에서 한다. 그런데 혹시 엉뚱한 게 궁금한 분들도 있으려나. 누가 누구를 정말 그렇게나 사랑하는지 마는지. 우문이다. 그거야 어떻든 응답은 같으니까. 초점은 그 말의 진위가 아니고 그 말의 역할이다. 사람들이 헷갈리나 보다. 혹시 각자가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동쪽에서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으로 가자고 하면, 어휴, 서쪽에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거야, 뭐, 콩나물 사러 가자는 것 아닌가요? 부부가 이러고도 30년 동안을 함께 살았다니! 진작 누가 설명이라도 해줬어야지. 이런 과정마저 없었다. 그러니까 남편의 입도 주먹만큼 나온다. “제발 좀 기의와 기표가…….” 아, 아니다! 여기서 나는 멈춰야지. 각자가 질문도 제기하고 해답도 궁구해야 한다. 이게 합당하다. 혹자는 콩가루 집안 출신이어서 부부가 나란히 시장에 가는 모습만 봐도 부럽다. 또 이렇게 작은 위안도 있다. 봐라, 여기 내 편이 있다. 이러다가 치를 떤다. ‘남편’이 ‘남의 편’이었다니! 더러는 느닷없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겁도 난다. 누가 괴성이라도 지르면 어쩌지? 그렇다고 너도나도 내내 외면할 수도 없다. 바로 두 달 전이었다. 식구들이 성균관대학교에 갔다. 늦더위가 남은 교정을 다니면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또 이제는 몰락한 왕조의 염원이 서린 화성(華城)에도 갔다. 장안문(長安門)이라. 그렇지, 오래오래 안녕해야지. 200여 년 전 정조도 심심해서 공사를 벌인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나도 그래. 어쩌면 과거사를 떠올리는 이 행태 역시 자신도 모르는 슬픔의 발로인지도 몰라. 선의도 때로는 병통이 된다. 조언도 신중히 하자. 자식은 이미 나를 구시대의 꼰대로 알지 않을까? 심지어 나는 다소 우스운 당부도 했다. 혹시 너 좋다고 성가시게 하는 처녀가 있더라도 너무 구박하지는 말아라. 쌍팔년도 그 무렵에 꼭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 유독 아무개한테 나는 너무나도 야박했다. 참 미안한 일이었지. 하기야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녀석이 아들로 태어나지도 못했겠지만. 혹은 어머니가 바뀌었거나. 어감이란 게 있어. 어째 ‘쌍팔년도’라는 낱말에는 싸구려 기운이 훅 느껴져. 이제는 워낙 케케묵었으니 그만 내다버릴까. 그러나 그 시절에는 이게 최신식이었고 최첨단이었다. 또 이건 내게 여전히 익숙하다는 미덕도 있다. 그러고 보면 서기 2018년 오늘도 30년쯤 뒤에는 무척이나 아련한 과거로 변하겠다. 나는 인공지능로봇과 쪼그리고 앉아 개미나 들여다보고 있을까? 행여 그럴 수 있다면, 그나마 나름대로는 장수하는 거지만. 김인기 수필가 경상북도 영천 출생(1962). 1991년《월간에세이》로 등단. 수필집『함께 가는 우리들』(1999),『참 좋은 날』(2006),『장등산 개나리꽃』(2017).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  
731 산과 강 외1편/임영석 file
편집자
499 2019-03-03
산과 강 산과 강 그 높이와 깊이를 생각하면은 포물선 하나가 그려진다 어느 거리에서는 산과 강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데 나는 산은 산, 강은 강, 그대로 불러지기를 바란다 아직도 나의 오랜 그리움의 질투가 하늘이 되지 못하고 유성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에 관한 素描 가시고기는 제 몸에 가시가 있어 다른 고기가 쉽게 덤벼들지 않는다 독(毒)이 아닌 가시를 지녔다는 것은 가시가 창이 아닌 방패라는 것이다 가시가 달린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어 쉽게 꺾지 못한다 독한 냄새가 아닌 가시를 지녔다는 것은 악연보다는 인연을 맺어 살겠다는 것이다 가시고기의 몸에 가시가 있어도 흐르는 물은 아파하지 않는다 가시나무의 몸에 가시가 있어도 지나가는 바람은 멍들지 않는다 임영석/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현대시조』 봄호 등단. 시집으로 『받아쓰기』 외 5권, 시조집으로 『꽃불』외 2권,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 이 있고,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제15회 천상병귀천 문학상 우수상을 받았고, 글만 쓰고 살고 있다.  
730 마추픽추 나무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535 2019-03-03
마추픽추 나무 그것은 아득한 거리에 숨어 있는 사랑이었네. 잉카인들 삶의 무늬 부드럽게 넣었던 바윗돌은 비바람이 닦는 오랜 시간에 반질반질 숨을 쉬고 먼 우주에서 막 착륙한 우주인 모습으로 작은 우산을 펼치고 아득한 거리 구름안개 뭉개며 찾은 공중도시 마추픽추는 두꺼운 문 단단히 걸고 짙은 사색에 잠겨 있었네.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여행객 떨어지는 구름 빗방울을 또 다른 인연으로 바닥을 보며 날씨 맑은 후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미래를 떠올리며 좁은 비탈길을 밟고 밟았네. 찰흙 주무르듯 바위를 매만진 잉카인의 손길 태양의 신전 앞 나무 한 그루 허공 높이 곧게 올리고 망지기에서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 콘도로 신전으로 걷는 거리를 태양에서 지구, 그리고 달까지 거리라고 시계 방향으로 잉카 흔적 더듬으며 걷는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며 구름안개 저편 숨은 잉카의 속살 이야기 빗방울로 들러주고 있었네. 밝은 태양 밑 그림자를 신전 위에 그을 마추픽추의 키 큰 나무 한 그루 해시계로 머물며 가지에 푸른 바위 종 하나 단단히 걸고 잉카의 소리 은은히 울리고 있었네. *망지기 :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구름의 그림자 내가 그대에게 가는 길은 구름의 그림자를 찾아가는 일 먼먼 나라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 투어를 마친 그 다음 날 이따금 라마가 길가에서 풀을 뜯고 여우가 귀를 쫑긋하는 먼 길 앞으로 줄줄이 설산도 보이는 고원의 숨 가쁜 길을 현지 가이드이며 지프차 운전기사인 카멜은 앞차가 일으키는 부연 먼지에도 익숙한 듯 불평 없이 옛날처럼 세상을 달리네. 물 고인 우유니 소금 사막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린 맘으로 폼을 잡으며 사진 찍을 때 하늘과 호수가 몸을 합치는 몽환적 분위기에 풍덩 빠져들었네.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풍경 바라보며 시간만 흐르게 할 때 소금 꽃을 피우던 태양은 붉은 놀 아래로 윤슬을 뿌리고 또 뿌렸네. 어제의 그제의 그 풍경 담은 폰 속 사진 되새김질하며 오늘 낯선 여행지 해발 고도를 높이며 찾아가는 저 앞쪽으로 새롭게 풍경을 만드는 안데스 설산들 그리워했지만 아직 내가 이름 모르는 산이라네. 해발 사천 미터 아래위로 이어지는 구불구불 긴 길 따라 오천 미터 이상 산들은 구름과 눈을 성자(聖者)처럼 걸치고 내가 그대에게 가는 길은 구름의 그림자 사랑 높은 그것이라네. ------------------------------------------------------ 하재영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 등  
729 적송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441 2019-03-03
적송 몸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 목을 쭉 빼고 날개를 높게 폈다 깃털을 쫙 펼치고 있다 다리를 뻗어 막 솟구쳐 오르다 영원에 붙잡힌 것일까 그의 각도와 내 시선의 각이 부딪힌 자리에서 한 마리 커다란 새가 난다 고개를 약간 비틀어 멀리 보는 네게 검은 사유가 어른거린다 푸른 날개를 펼치고 날았던 갠지스 강 내음을 기억하는지 하늘을 움켜쥐었던 손아귀에서 구름이 흘려 나온다 빛의 음계가 붉다 노랗다 초록이다 자주다 아무 것도 아니다 더께 앉고 갈라진 수피 사이로 검은 강이 흐른다 과학할까요 그대 입술이 내 입술을 더듬으면 마치 초콜릿을 녹이듯 혀의 감각이 살아나요 대뇌피질에서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앤드로핀이 분비돼요 입술의 감각이 더 예민해져요 그대 입술의 움직임을 내 몸으로 따라가요 말할 수 없는 쾌감에 젖어들어요 계속 하고 싶은 충동에 몸이 떨려요 온 몸이 나른해져요 온 감각이 한 곳에 모여요 심장의 박동수는 130까지 올라가죠 혀가 혀를 애무하는 동안 침 속의 그대 호르몬 테스통스테론은 나에게로 옮겨지죠 9mg수분과 0.18mg의 수용성물질이 교환 되죠 0.7mg의 지방과 0.45mg의 미네랄이 교환 되죠 박테리아 수백만 마리가 교환 되죠 나의 면역력이 높아지죠 뜨거운 키스는 한번에 12Kcal를 소모시켜요 키스가 길어질수록 그대 좀더 키스를 잘 할 수 있도록 내 입주변의 키스근육은 모양을 잡아주죠 그대의 흡입력에 내 몸이 빨려들어 나는 눈을 감고 그대 혀의 움직임을 음미하고 뭉크 씨는 아직도 절규하고 있다 함께 과학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728 흔적 외1편/안민 file
편집자
488 2019-03-03
흔적 나는 나무나 풀꽃이 아니다 강물도 아니다 그저 길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때론 강물 넘쳐 흘러들거나 산과 나무 쓸쓸한 영혼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길 아닌 어떤 흔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발목이 내 몸 아득한 오지에서 흔들리면 늦은 가을이다 그러면 어떤 얼룩이 선명해진다 오래전 우기雨期의 가을, 그날 소년은 우산도 없이 내 안에서 흘러가다 학교 교정 플라타너스 쪽에 닿았다 늦은 오후, 소년은 다시 내게 얹혔는데 뺨에 손바닥이 붉게 판각*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한적한 곳 어디쯤에서 동그마니 접힌 채 동시 적힌 노트를 찢어 종이배를 접는 것이었다 이젠 어디도 소년은 없고 낡은 그림자만 보인다 밤이면 내 몸 위를 자주 비틀대는 * 열한 살 아이가 동시 숙제를 검열받기 위해 교탁 난간에 걸려 있다. 가자미눈으로 변이된 여교사의 눈, 엄마가 해줬다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붉은 입술, 이윽고 울고 있는 아이가 복도로 질질 끌려간다. 뺨에 손바닥이 판각된 채 추락하는 아이, 창가의 빗물도 하얗게 질려 흩날리고…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얼굴에 판각된 선생의 손바닥을 쥐가 갉아놓은 비누로 씻어낸다. 밤일 다니는 엄마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있고 침대가 있는 무대 1 입이 없다. 입이 없지만 때로는 운다. 나는 겨울이거나 낙엽. 밤이 오는 게 두렵다는 듯 아프게 우는 새에게 경의를 표한다. 새의 울음은 독백이거나 문학. 당신의 문학은 불온했습니까. 최소한 나의 구간은 눅눅하고 음습합니다. 몰락의 바닥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다. 몰락은 홀로 하는 전위예술. 깨어진 선인장 화분이거나 찢어진 명태. 2 복수複數 혹은 복합인 적이 없다. 나는 오리 알이거나 소녀의 잃어버린 한쪽 귀걸이. 몸을 사각 끝에 걸치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하다. 사각은 감옥이거나 그믐. 어깨를 면에 기대고 있을 때도 위태하다. 그건 불면이거나 몽유. 무용하지 않지만 용이함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졸다가 나를 놓치게 되면 영혼이 출렁대거나 영혼이 얼굴을 놓아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3 눈이 내린다. 나무와 개와 불빛과 차량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검은 승용차와 위태한 인간이 쾅 부딪힌다. 떠나가고 떠나오는 눈송이들. 밖은 혼란스럽고 입 없는 물상은 어떤 동요도 없이 고정되어 있다. 친근하면서도 무서운 짐승이다. 입이 없다는 건, 의자이거나 젖가슴. 아무리 가슴을 더듬어도 꽃이 필 기미는 없다. 꽃을 아무리 더듬어도 가슴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에는 흥분과 발화를 모색하지 않을 거다. 4 가면증은 유전이다. 나무가 바다로 향하고 있다. 바다를 마신 사내가 나무를 끌어안고 운다. 가면증은 추상이거나 연극. 빗새가 향하고 있는 곳은 심장이거나 노을. 내 얼굴에 더는 걸칠 여분의 가면이 없다. 동공에서 자라는 건 원뿔이거나 얼음. 오독이 밤을 메우고 닿을 수 없는 곳에선 애인이 나를 위해 가면을 낳고 있다. 하나, 둘, 셋… 마흔다섯. 5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생각이 가시밭에서 자란다. 누가 가시를 엮어 침대를 조립하는가. 가시밭은 전생이거나 후생의 오늘 밤. 내가 누운 곳은 한 뼘 지도일 수도 다쉬테 사막일 수도 있다. 수음을 설계하다 그만두는 밤이면 모래먼지가 뿌옇게 들이친다. 나도 침대도 더는 키가 자랄 수 없다는 걸 생각할 때면 눈 안에서 붉은 선인장이 피어난다. 6 그녀는 어느 별에서 폭발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죽은 개 때문일 수도 있고 미술 때문일 수도 있다. 추억엔 왜 꼭 배경이 필요한 걸까. 미술은 새의 울음이거나 푸른 독백. 매주 금요일에 새의 울음을 두 편씩 그리기로 했던가. 내가 분리 수거될 수 있음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기도 또한 전위 예술이거나 선인장. 후생에선 찢어진 명태이거나 조화. 매일 밤 독거인 채로 낡아 가거나 액자가 된다. 7 화면 속에선 언제나 하나 이상이 펼쳐진다. 드물게 셋일 때도 있다. 둘 혹은 셋이란 건 섹스이거나 분쟁. 섹스이든 분쟁이든 고독에 대해 나무의 심장이 운다. 그것은 질투이거나 질색. 침대의 입장에선 얼마나 무기력할까. 나는 다리가 두 개, 침대는 다리가 네 개, 침대는 최소한 네 개 이상을 지탱할 수 있다며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 여섯 개의 다리는 어떨까. 그건 이사移徙이거나 영화. 8 누구도 의도하고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의도를 품고 절벽 아래로 낙하한다는 건 겨울새이거나 빗물. 자살을 위장한 무의식이 위통을 앓는다. 꿈이 너무나 선명한 것에 위통을 앓는다. 위통이 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해석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9 노래를 짓는 식물과의 동침을 갈망하곤 했다. 혹, 그 날이 오면 체위는 나의 형태일까, 아니면 식물의 형태일까, 생각에 잠기면 회색 졸음이 목 근처에 도달한다. 10 오늘은 입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다. 말없이 삐걱삐걱 울기만 한다. 내가 잠을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잠이 침대를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침대가 여자를 꿈꾼 것인지, 왜 불면인지 도무지 말이 없다. 어쩌면 머지않아 침대가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슬픔을 함께했으니 서로의 수음을 관찰한다는 건, 달빛에 젖은 안개 같은 거. 몸이 나무처럼 딱딱해지는 것은 성욕이거나 식욕. 몸이 시트처럼 푹신한 것은 위통이거나 나무의 심장. 사춘기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잤지. 그런데 왜 이 계절에도 눈은 식은땀을 흘리는 걸까. 침대의 키가 자라지 않는 것은 침대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이고 침대 바깥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를 계산하기 때문. 오늘 밤에도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잠들 것이다. 그러면 내 머리 위로 토막잠처럼 낯선 새들이 토막토막 날거고 . 본명 안병호, 경남 김해 출생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2018년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특성화지원사업 수혜 .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 제 18회 부산작가상 수상 . 시집 『게헨나』 현대시기획선 .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 dominiko8@hjanmail.net  
727 구두실 외1편/이순영 file
편집자
348 2019-03-03
구두실 뒤안 대숲이 무섭게 울었다 문풍지 밤새 버릉버릉 떨고 돌담으로 드나드는 바람 소나무 가지 내려앉는 소리에 뒤척이다가 새벽잠 든 날은 엄마 목소리 다락보다 높았다 청솟갑 쳐대는 매캐한 아궁이 불길 활활 치솟고 세숫물 데워 바가지 띄워 놓으면 튼 손등 따가워 고양이 세수를 했다 소반 위에 간장 종지 미끌어지고 문 꼬리 쩍쩍 붙지만 기름 동동 뜨는 고깃국이라도 먹는 날은 한 마장 넘는 등굣길 아랑곳 않고 북풍이 몰고 온 눈보라에도 기죽지 않았다 애면글면 아파도 고향집 삐걱거리던 마루 이끼 낀 돌담 그을린 정지문 흙 마당에 자욱이 깔리는 저녁 연기 젊은 엄마의 광목 앞치마 일곱 여덟 살 때의 겨울 농학 박사 비 개인 토요일 오후 이웃 논이 소란스럽다 삼부자 노란 줄 잡고 춤추듯 일렁인다 박사학위 받았다는 큰아들 큰 은행 다니는 작은아들 아버지는 이리저리 나락을 헤치며 약을 친다 경운기 딸딸거리는 소리와 멀리 약대를 잡은 아버지의 고함소리 압력에 약줄이 빠져 포물선 그리며 애먼 하늘만 허옇게 소독하고 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큰아들 둑 중간에 멀뚱이 줄 잡은 작은아들 논 한복판을 질러 뛰는 칠십 대 농학박사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