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옷이 내게

 

김점용

 

그 옷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가끔 내 곁에 없는 혹은 죽은 사람의 목소릴 듣기도 하는 편이어서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여겼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이 금방 떠오르지 않아 찬찬히 짚어가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하는 말이었다

 

그 옷은 누가 입다가 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온 것도 아니었다 백화점 정기세일 때 신용카드로 산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그만그만한 옷인데 그 옷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옆 의자에 걸어둔 그 옷이 그 사람의 뺨을 때리라고 개념에 빠진 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나를 다그쳤다 물론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욕을 했다 나더러 겁쟁이 돼지새끼라고 욕을 했다

 

통행증을 보여달라는 수문장의 말에 뺨을 한 대 갈겼더니 그냥 통과시켜주더라는 선가의 말도 있지만 뺨을 맞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나는 그 옷이 말하는 걸 어떻게 듣는지 모른다 귀로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등짝으로 들은 것도 같고 때로는 뼛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뺨을 맞는다고 내 귀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아버지가 찾아왔다

낯선 노인이 아버지 친구라며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다가 우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우물로 갔더니 일흔아홉의 아버지가 흰 수의에 삼베 꽃신을 신고 두레박에 손을 넣어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아버지 친구는 나뭇짐 때문에 애조원에서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며 거기로 가보라고 했다

급하게 고개를 넘고 마구촌을 지나 숨을 헐떡이며 애조원에 도착했을 때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아버지는 흰 와이셔츠에 한복 바지를 입고 문둥이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그는 꿈쩍도 않고 대신 문둥이가 뭉개진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쉿거렸다

등을 보인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버지 친구일 터

상심하여 돌아서는데 그가 이번 판만 두고 보내마, 그랬다

덜컥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으니

문둥이가 사라진 입술로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렸다

원문고개 호떡집 아줌마한테 물어봐라,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 집은 없어진 지 오래인데

안방에 촛불을 켜둔 채 급하게 나왔는데

힘이 장사인 아버지는 점점 더 젊어져서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젖히니 죽담에 선 어머니가

아버지 옷을 입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산 것들이 매달렸던 검은 가지에

저녁 빛을 모은 흰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물방울 사라지면 빛은 또 어디로 가는지……

 

 

약력/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음.

시산맥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