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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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7890 2014-11-03
213 오늘을 파는 서점은 없나요?/이수풀 file
편집자
2804 2012-05-31
12.06월 25호 시  오늘을 파는 서점은 없나요? 이 수 풀 오늘을 잃어버렸다 어떤 일의 징조인가 숨바꼭질인가 많은 날과 사건 숟가락들 중 왜 하필 꼭 오늘을 대문 밖으로 들고 나간 일 없다 물론 집은 무너지지 않았고 날씨는 쾌청, 두 개의 앞니는 화목하고 아이들은 둥근 공기 속으로 손 장난치며 들어간다 분명 집안에 있다 그러나 없다 장롱이나 서럽 구겨진 침대 시트 깨진 어항이나 탁자 위 아래 안에도 밖에도 없다 온갖 잡동사니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책장에도 꽂혀있지 않다 태양이 도끼 눈 뜨고 내려다보는 벌건 대낮 오늘은 어떻게 촘촘한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을까 이건 반칙이다 혹시 뱀인가 메뚜기 날짜인가 날 찾아봐라 숨었다 깊이 잠든 금고 속 현금인가 시간 맞춰 놓고 기다리면 구워진 빵처럼 잘 익었을까 오늘은 내 곁으로 잘 찾아올까 분실물센터에 전화라도? 어느 허름한 헌책방에 기대 서있을까 절판되기 전 오늘을 구입해야 한다 자정이 되기 전 반납해야 내일을 대출받을 수 있다 갑이 구천 원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늘을 파는 서점은 어디 없나요? 이수풀 충남 공주 출생 2006년 <현대시학>신인상으로 등단. e-mail: esupul3@hanmail.net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212 패랭이꽃이 진다 외1편/임성용
편집자
2456 2012-05-31
12.06월 25호 시  패랭이꽃이 진다 덜 여문 씨앗은 싹이 트지 않는다 아이야, 화분에 자꾸 물을 뿌리지 말아라 아빠는 못나서, 세상에 얼굴 밝히는 저 잘난 것들 앞에 덜 여문 시절이 또록또록 여물도록 양지녘 볕 좋은 곳에 한나절을 세워두고 싶지만 내일은 아침부터 또 비가 온다더라 작은 우산을 들고 오랫만에 손을 꼭 모듬 쥐고 아득한 들판을 지나 강둑 건너 사시사철 꽃이 피는 마을, 읍내 화원을 찾아가자 낡은 경운기가 버려진 논두렁 밭두렁 항시 어머니의 등허리만 보이는 사래 긴 끝자락 폐가 한 채가 엎드려 있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자 거긴 말이다, 마당가에도 울타리에도 누가 제 욕심으로 애써 씨 부리지 않아도 해마다 나고 자란 패랭이꽃들이 풀인지 꽃인지 모르게 여름내 피어나고 까불까불 찾아오는 이 없어도 좋아라 나비 한 마리 날아가는 날개짓에 하늘하늘 패랭이꽃이 진다 산과 들이 진다. 억부인 국수집 억부인 국수집에 모처럼 억수로 많은 손님들이 들었는지라 점심 지나 아직 준비해 둔 국수도 없는데 왁자지껄, 얼른 국수를 내오라는 성화인지라 막걸리에 우선 물김치를 주고 된장에 풋고추를 주고 육수를 데우면서 국수를 바삐 삶는데 이놈의 손님들 개울앞 돌망태기 인부들인지라 퍼런 장화에 진창 황토흙이 달라붙어 식당 바닥이 온통 흙투성이 난장판인지라 그중엔 염치 있는 양반도 있어 수돗가에 대충 장화를 씻고 들어오지만 양푼 가득 절여놓은 열무에 흙물이 튀는지라 국수를 나르는 억부인 안절부절 못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시원한 국수 한그릇 훌훌 말아먹고 아이구, 잘 먹었다. 내일두 참은 여그서 먹지 그랴? 떼지어 장화를 털고 식당 문을 나서는 사람들 *임성용 1965년, 전남 보성 출생 2002년, 전태일문학상 / 2011년 조영관창작기금 수상 현재 진보작가네트워크 '리얼리스트100'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화물운수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211 모나리자에게 보내는 편지/이홍사 file
편집자
3175 2012-04-30
12. 05월 24호 소설  모나리자에게 보내는 편지 모나리자! 부르고 또 불러도 자꾸만 부르고 싶은 그대! 이렇게 호명하는 게 천박하고 상투적인 그리움의 표현인가요? 이상하게도 당신에게는 현학적인 서술어를 쓰고 싶지 않아요. 지금 시간의 주머니를 뒤집니다. 주머니를 뒤져 흩어진 자투리 시간을 모아보니 참으로 여유롭고 평온한 시간이오. 이런 시간이면 어김없이 내 그리움의 좌향, 그 나침반 바늘은 어김없이 당신을 향해 돌아앉습니다. 이런 심정을 두고 애통하고 절실하다고 말하는 건가요? 못 견디게, 미치도록 그야말로 환장하도록 그립다는 말은 아물어가는 내 가슴의 상처를 위하여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당신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런 시간이면 당신이 앞치마를 걸치고 캔버스 옆에 서서 유화로 그리던 모나리자의 기름기가 마르지 않은 물감의 색체를 구상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의 모나리자!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물결은 참으로 잔잔합니다. 작년과 달리 올 겨울은 너무 조용합니다. 당신이 가기 전에 견적을 넣고 재설계하고 다니던 수몰지역의 고택은 이주 자리로 완벽하게 옮겨 준공이 끝났고 보수하던 제실공사도 마쳤습니다. 고택은 서까래 몇 개와 부서진 기와 몇 장 바꾸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 재현했죠.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작품입니다. 지금 견적 넣는 정자 보수공사가 낙찰될 때까지 시간이 남아돕니다. 업종이 문화재와 고건축개보수는 현대건축과 달리 시청 관내 입찰이 아니라 도내 입찰이거든요. 경쟁이 치열합니다. 적당한 가격을 뽑아 눈치껏 견적을 넣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레오나로도보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더 잘 그리던 당신! 붓을 들고 서 있는 당신을 찾아 화실에 들어서며 행숙이라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늘 모나리자라고 불렀지요. 그래요. 당신은 행숙이라는 이름을 무지 싫어했지요. 행숙이 보다 모나리자라는 호칭이 더 마음에 드는지 당신은 그 호칭을 좋아했고 나는 모나리자의 미소라고 당신을 호명하며 당신이 그리던 모나리자의 미소를 떠올리고 이 편지을 씁니다. 어제 오전에도 편지를 썼습니다. 어제는 두루마리 한지에다 4B연필로 도면을 구상하며 스케치하듯이 제문 같은 편지를 막힘없이 줄줄 썼죠. 장문의 편지를 써서 한번 읽어보곤 작업실 연탄난로에 태웠지요. 그 글을 소지하는 행위가 당신에게 읽히도록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제 그 편지를 읽으셨겠죠? 어쩌면 이 글은 행숙이나 모나리자에게 쓰는 글이 아니라 내 작업실에 서 있는 당신의 유작, 미완성 모나리자에게 쓰는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떠나고, 주인 잃은 당신의 화실에서 가져온 미완성의 모나리자 유화를 내 작업실에 걸어놓고 미완성 미소를 보며 편지를 씁니다. 달리 말하면 모나리자, 당신이 아니라 미완성 모나리자의 미소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화가가 가장 아름답게 죽는 게 어떤 죽음일까요? 바로 당신처럼 죽는 것입니다. 작업실에서 붓을 입에 물고 작품을 구상하다가 코피 몇 방울 흘리고 그렇게 조용히 요절하는 것. 그게 작가로서 순직이지요. 가장 아름다운, 가장 치열한 작가다운 순직을 당신은 택했습니다. 나의 모나리자! 그 장렬한 순직을 생각하면 당신이 없어 서운함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 안에서 서식하던 나는 자꾸만 허기가 집니다. 비록 지금은 옆에 없지만, 밤이 되면 내 곁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되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허기를 달랩니다. 당신은 나에게서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별이 된 게 확실하지요? 이상한 이야기지만 내가 들리도록 속 시원히 대답을 좀 할 수는 없나요? 그게 환청이라도 좋습니다. 하늘에서도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리고 계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곳에서 그리는 모나리자의 미소도 나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작품세계에 대해서, 모나리자의 미소에 대해서 토론해야 합니다. 그 소통의 수단이 꿈이라도 좋습니다. 솔직히 당신이 없는 시간이 너무 무료합니다. 내가 한 번도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죠. 사랑에는 공식이 있죠. 그렇게 입으로 나불대는 사랑은 두텁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는 거죠. 당신이 그리는 모나리자에 가장 애착을 가지던 내가 당신이 없어도 이렇게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죄스럽군요. 하지만 절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으로 나불대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이니까요. 모나리자! 어제 일어난 일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좀 해줄까요? 내 생활 습관이 바뀌었어요. 당신이 떠나고 작품이나 일보다 술에 의존하는 시간이 더 늘었지요. 당신이 없는 허전한 시간을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와 수단이 술이라고 할까요. 내 작품의 구성과, 작업하는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감보다는 술이 더 허전함을 달래준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술자리가 기가 막히게 연결되네요. 어제는 수미공방 최 작가가 찾아왔습니다. 가마에 불을 지피기 전이라 초조하다며 찾아와 한 잔하며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뒤 늦게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하던 전문대학 강단에조차 서지 못한 최 작가는 그 점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어요. 작업실에서 소주를 사다가 취하도록 마시며 얘기를 했습니다. 물론 얘기 중간에 모나리자 당신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최 작가가 돌아가고 나는 집으로 들어가 옷도 벗지 않고 바로 쓰러져 잤습니다. 숙면이라고 칭할 정도로 푹 잤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당신 꿈도 꾸지 않고 실컷,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잠이 깨면서 잠시 숙면에 대해 생각 했었고, 모나리자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시 허전함을 느끼고 머리맡에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보니 웬걸! 겨우 열 시 십 분인 거 있죠. 어라? 초저녁인데? 시계를 잘못 보았나 싶어 휴대폰 폴더를 열어보니 열두 시 반이었어요. 만취한 최 작가를 보낸 게 오후 네 시였으니 실컷 잔 것이죠. 손목시계를 다시 보았습니다. 삼 년 전에 당신이 생일 선물로 준 그 시계 말입니다. 열 시 십 분에서 초침이 멈춰있었어요. 어라? 이게 숨을 거두었군! 한마디 뱉고 검지로 시계를 한번 툭 쳐보았죠. 그래도 초침은 꿈적도 않았어요. 순간적으로 당신이 가고 없으니 당신이 준 시간마저도 당신을 따라간 모양이라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아마도 시계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어요. 오밤중에 깨어난 정신은 초롱같았어요. 모나리자! 그런 시간에 잠이 깨면 무얼 해야 할지 당신이 가고부터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담배부터 한 대 물고 거실로 나가 보니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아들 녀석이 주방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공부를 할 리가 없고 보나마나 제 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출출함을 달래려고 라면을 끓이는 것이겠죠. 슬며시 주방으로 들어가 젓가락을 들고 섰다가 녀석이 먹는 라면에, 냄비뚜껑을 들고 싱크대 앞에 선채로 개평을 좀 들었지요. 아내는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지 조용했지요. 불콰한 얼굴로 들어와 저녁도 먹지 않고 잤으니 연일 술이라고, 입버릇처럼 잔소리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 -라면을 하나 더 끓일까요? 아들 녀석은 나를 보며 제의 했어요. -아냐! 됐어. 라면국물에 밥 말아 먹자.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은 밥솥을 열고 밥을 푹 퍼서 라면국물에 말았습니다. 그것도 나는 식탁에 앉지 않고 싱크대 앞에 서서 부자간에 사이좋게 나눠먹었죠. 모나리자! 라면 얘기를 하니까 당신 작업실에서 둘이서 라면을 끓여 서서 먹던 생각이 나네요. -너 저녁 안 먹었냐? -이게 저녁이죠. 아들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며 한마디 덧붙였죠. -제 시간에 좀 챙겨 처먹어라. 먹고 나니 속이 좀 풀렸어요. 잠은 올 것 같지 않고, 이 시간에 뭘 하나? 당신이 없는데 그런 시간을 넘기기에 익숙하지가 않죠. 까딱하다간 낯선 시간 속에 그대로 방치되는 게 아닐까 염려스러웠죠. 이제 무얼 할까 궁리하다가 아들 녀석에게 제의했죠. -야! 아버지하고 금오산에 한 번 가볼까? -산에는 뭐하려고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자식이 원래 퉁명스럽잖아요. 대답이라고 한 푼 어치도 맘에 들지 않았죠. -잠이 안 오니까 산책삼아 가는 거지! -잠이 안 오는 건 초저녁에 정신없이 주무신 아버지고, 저는 이제 잠이 오는데요. -그런가? 지금부터 뭐하지? -아버지 혼자 다녀오세요. 잠이 안 오는 과부들이 많이 올라올 거예요. -이 자식이 대가리가 좀 컸다고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또 아들 녀석의 목덜미를 철썩 때렸죠. 아들 녀석도 지지 않습디다. -아버지 호색가잖아요? 카사노바! -그래 맞다. 이 자식아! 아버지 과부 찾아 산에 갈란다. 그렇게 대꾸하며 아들 녀석의 목덜미를 겨냥해서 다시 손을 드는 찰라, 아들 녀석이 내 손목을 움켜잡았죠. 상황이 그렇게 되면 물리적으로는 안 되는 걸 당신도 아시죠. 턱도 없죠. 전공이 체육학이고, 80킬로가 넘는 거구를 물리적으로 재치고 목덜미를 다시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놔라! 놔! 아부지 산에 갈란다. 그제야 녀석은 손목을 놓아주고는 낄낄거리며 잽싸게 후다닥, 주방을 빠져나갔죠. -야! 인마. 설거지는 하고 가야지? -잠이 안 오면 아버지가 설거지 좀 하세요. 녀석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갔어요. 엉덩이라도 한 대 차고 싶었지만 닭 쫓던 개가 따로 없었죠. 빈 그릇을 아내의 몫으로 개수대에 처넣고 방으로 들어왔죠. 문지방을 넘는 순간 방은 낯선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니, 낯선 시간이죠. 아내는 딸애가 해외 어학연수를 떠나고부터 딸애 침대를 쓰고 있어요. 아내가 방에 있다면 슬며시 음탕한 수작을 걸어보겠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죠. -이 시간에 무얼 할까? 낯선 시간에 고요히 담겨 잠시 생각했죠. 당신이 떠나고부터 그런 시간이 싫어졌어요. 정말 산에나 갈까? 아니면 당신과 언젠가 단둘이 작품의 모티브를 얻기 위해 밤새 돌아다니던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올까? 슬슬 도지는 역마살을 감당하기 힘들었죠. 그렇게 생각하다가 차에 기름을 넣지 않았음을 깨달았죠. 연료가 조금밖에 없는데....... 이 시간에 주유소에 영업을 할까? 그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도저히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다시 누우면 불면의 영역에서 괜히 당신에 대한 갖가지 망상에 시달릴 것은 불 보듯 하고, 창을 열어보았어요. 깊은 겨울의 깊은 밤이었죠. 그래 산에나 가보자. 그렇게 다짐하니 당신이 밖에 어디에선가 기다리는 것만 같았어요. 혹시 당신이 나를 불렀나요? 옷장을 열고 여태 한 번도 입지 않은 기능성 내의를 꺼내 입었죠. 지난 생일 때 딸애가 용돈을 모아 선물이라며 사 온 것인데 기능성내의라고 이름 붙여진 옷의 기능을 시험할 겸 입어본 것이죠. 기능성이라 그런지 활동에 지장이 없을 것 같고 착용감도 좋았어요. 그 위에 방한복을 찾아 입고, 접힌 부분을 내리면 귀까지 덮는 골프 모자를 썼죠. 그렇게 중무장 하니 눈밭에 굴러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양말도 두꺼운 등산용을 찾아 신고 현관을 나섰죠. 현관문을 여는데 아들 녀석이 방문을 열고 소리쳤어요. -아버지! 정말 이 밤중에 산에 가실 거예요? -정상은 무리고 가는데 까지 가보지 뭐. 폭포까지만 가보던지........ -아버지 이거 가지고 가세요. 뭘까? 잠시 현관 앞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녀석은 기특하게도 제 방에서 등산용 손전등을 찾아 가지고 나왔어요. 그것을 받아들고 당신이 기다리고 섰을 것만 같은 계단을 내려왔어요. 역시 당신이 없는 바깥은 쌀쌀하고 허전했어요. 대문 앞에 선 차를 끌고 도로로 나섰죠. 달리 얘기하면 당신을 찾아 나선 거죠. 길은 한산했어요. 차가 없어 팅 빈 몇 개의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통을 관통하며 보니 중앙통은 불야성입디다. 연말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지만 술집들이 문을 열고 있었고 취객과 야행성 젊은이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어요. 중앙통을 지나쳐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저수지를 지나고 곧장 금오산이죠. 금오산 초입부터 가로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어요. 그곳도 도립공원이라 그 시간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어요. 아내는 작년에 아들 녀석 대입을 앞두고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백일기도를 다녔죠. 그 사실은 당신도 아시죠. 새벽 운동 겸 폭포 아래에 있는 약사암에서 백팔 배를 하고 오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죠.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낮에 주차료를 받는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어요. 빈 주차장을 지나쳐 등산로 초입까지 올라가 구급차나 도립공원 관계차량을 돌리는 곳으로 올라가 길가에 차를 세웠죠. 낮이면 통제가 되겠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간섭하는 이가 있을 턱이 없었어요. 당신은 다녀봐서 알겠지만 거기서 폭포까지 올라가려면 보통 삼사십 분 정도 걸리죠. 왕복 한 시간이면, 당신을 그리며 달밤의 체조로는 적당할 듯싶었어요. 산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트렁크에 있는 등산지팡이를 꺼내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옆에 당신이 따라 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생각하니 참 오랜만에 올라보는 금오산이었어요. 예전에 당신과 운동을 빙자한 데이트로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오르던 길이었죠. 그곳에 가니 당신과 함께한 즐거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당신이 아련히 그리워졌어요. 당신이 없다는 생각에 씁쓸한 입맛을 달래며 다시 나무계단을 오르며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당신은 없었어요. 깊은 산의 밤은 웅숭깊은 사내의 속처럼 말이 없고 장엄했어요. 당신이 좋아하던 스카이라인을 훑어보았죠. 스카이라인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올려보아야 했어요. 깎아지른 절벽위로 보이는 스카이라인은 한 폭의 산수화 같았어요. 실제로 보는 절경은 산수화보다 수려하죠. 주위 솔숲에는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있었어요. 당신을 생각하며 오르다보니 성문을 지나고 돌계단이 나왔어요. 예전에 그곳까지 가면 슬며시 당신 손을 잡아주던 그 돌계단. 조금만 올라가면 약수터가 있고, 약수터 위에 바로 약사암이 있죠. 몇 백 년 전 지극한 불심으로 정으로 바위를 쪼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지은 작은 암자죠. 가로등은 약수터까지 길을 비추고 있었어요. 약수터를 떠올리자 숙취 뒤에 따라오는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계단을 올라 약수터로 올라서 보니 약수터는 휑하니 비어 있었어요. 스텐리스 걸이에 걸린 바가지를 떼어다가 돌 틈으로 당신 말마따나 사내아기 오줌 줄기처럼 흘러나오는 약수를 한바가지 받았죠. 당신에게 먼저 먹이고 싶은 마음에 돌 틈에 부었죠. 다시 한바가지 받아서 숨을 몰아가며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어요. 한바가지를 다 마시고 다시 반 바가지를 받아서 들이키다. 물을 버리고 바가지를 씻어 제자리에 걸어 놓고 생각했어요. 이제 내려가면 당신 생각을 접고 잠이 잘 올 것이라 생각하고 약사암에 들리지 않고 바로 하산 길로 들어섰어요. 하산하는 길에도 손을 잡아주던 당신이 없으니 허전했어요. 당신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의 파편, 그 시간들을 형형색색 구슬로 만들어 색동실로 엮어 목에 걸고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기분에 젖어 돌계단을 내려오고 나무계단으로 들어섰답니다. 그 사내를 만난 것은 성문을 지나고 조금 내려오던 솔밭이었었어요. 성문을 지나고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 옆의 솔밭에 사이로 난 개울 건너에서 담뱃불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어요. 이 시간에 누가 저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앉아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 든, 아들 녀석이 준 손전등을 꺼내 나무 사이로 비춰보았죠. 나무 계단 아래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물이 말라버린 작은 개울 건너 솔밭에서 사내 하나가 낙엽위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고개를 갸웃했던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죠. 당신도 그랬겠죠. -누구세요? 사내는 대답이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어요. -게서 뭐하는 것이오? 역시 대답이 없었어요.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니, 뭔가 심상찮은 구석이 있어 그냥 지나쳐 내려갈 성질이 아님을 깨우치고 기어이 계단의 밧줄로 된 난간을 넘고 개울 건너 사내가 앉은 근처로 갔죠. 모나리자! 한 눈에 보아도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는 풍경이었어요. 사내는 옆의 소나무 가지에 흰색 태권도 띠로 올가미를 묶어 만반의 준비해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었어요. 전등으로 비추어보니 빈 소주병 하나는 낙엽 위에 뒹굴고 한 병은 반쯤 비어 있고 안주는 없었고요. 소주를 다 마시면 올가미에 사내의 목을 걸 것이죠. 어쩌면 피우고 있는 담배가 생의 마지막 담배가 될 것이고. 띠를 묶어놓은 소나무 가지는 꽤나 높아, 발이 닿지 않았는지 올가미 아래 개울에 있던 넓적한 돌을 세 개나 쌓아 놓아 돌 위에 서서 키 높이와 연습을 이미 해 본 것 같았어요. 그 정도면 저승을 빗장을 풀기에는 부족함이 없이 완벽했어요. 사내에 대해서, 그 상황에 대해서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요소를 두루 갖춘 분위기였어요. 손전등으로 주위를 비추어보며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고 사내에게 말을 걸었죠.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으셨군요. 마지막으로 그 소주를 한 모금 적선하고 가시죠? 내 말에 사내는 앉은 채로 힐끔 올려다봅디다. 그리고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어요. 말이 하기 싫은 내색이 역력한 청동입술을 지닌 인간이었어요. -권하지 않으면 개평이라도 들어야겠군. 당신이 늘 못마땅해 하던 내 특유의 객기와 오지랖을 발휘하여 소주병을 들었죠. 사내 옆에, 사내와 똑 같은 자세로 앉아 소주를 한 모금 병나발 불고는 슬며시 낙엽위에 소주를 부어버리고 빈병으로 만들어 있던 자리에 세워 놓았죠. 사내는 개의치 않고 꽁초가 된 담배를 볼이 패이도록 빨고 있었어요.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은근히 떠보아도 사내는 말이 없었어요. 역시 청동입술이었죠. -어허, 이거 어떻게 하나? 내가 그냥 내려가면 자살방조죈가? 뭐 그런 고약한 법에 저촉되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고........ 이거 참 난감하네! 그 말에 사내는 힐끔 나를 한 번 쳐다보았어요. -우리 내려갑시다. 요 아래 가서 한잔 더 하고 나는 바로 내려가고, 올라와서 거사를 진행하죠? 내가 작년에 한 번 시도해봐서 아는데 소주 두 병으로는 죽지 못해요. 소주를 대여섯 병정도 마셔야 목을 걸 수 있지. 내가 작년에 실패했던 사람이오. 내려가서 소주를 댓 병 더 마십시다. 그리고 당신은 이리로 올라오고 나는 집으로 가고 그래야 내가 자살방조죄에 걸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내가 먼저 일어섰죠. 사내는 대답 없이 뜨악한 눈길로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어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사내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죠. 의외로 사내는 저항하지 않았어요. -자! 한 잔 더 하러 갑시다. 사내는 팔을 잡아끄는데도 거부하지 않고 일어섭디다. 그렇게 거부하지 않는 작자가 더 무서운 법이죠. 내려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부하고 버티는 자는 결국 올가미에 제 목을 걸지 못하는데 이런 작자가 더 무섭고 독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사내를 뒤에서 부축해서 난간을 넘어 나무계단으로 올라왔어요. -여기가 어디쯤인지 확실히 알아두시오. 술을 더 마시고 올라와서 어딘가 잊어버리지 말고, 난간에 표시를 하시던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걸었죠. -찾아 올 수 있소. 매일 다니는 길인데........ 얼래? 사내의 굳게 닫힌 입술이 열리는 거 있죠. 내려가면 술집에 마주 앉아서도 수월하게 입을 열 것이고 죽으려고 마음을 먹게 된 기구한 사연에 대해서 듣겠구나 생각하며 사내 옆에 나란히 서서 계단을 내려왔어요. 십 분 이상 서로가 말없이 나란히 걸었죠. 그 침묵의 동행은 서로가 저울질하는 시간이라는 건 말을 안 해도 아시죠. 차가 있는 곳까지 내려와 차문을 열자 사내가 먼저 조수석에 날름 올라앉았어요. 아마도 조금 아래 있는 도립공원 주차장 상가까지 타고 가자는 심산인 모양입디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아스팔트에 발로 비벼 끄고는 차를 돌려 길을 되짚어 내려와 주차장에 들어서서 상가를 쭉 훑어보니, 어라? 잘못 들어갔어요. 한 군데도 문을 연 식당이 없더군요. 그렇게 호객행위를 하며 붐비던 상가는 오밤중, 모두 잠이 들어있어요. 컴컴하게 아가리를 닫은 상가를 빠져나와 저수지 옆길을 내려오며 조수석에 탄 사내를 힐끔 돌아보고 말을 걸었죠. -다시 올라가려면 발품을 엄청 팔아야겠는데? 대답 없이 사내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물고는 조수석 차창을 조금 내렸어요. -내가 다시 태워다 주지는 않을 것이니 걸어서 올라갈 각오를 하시오. 슬쩍 떠보았지만 역시 사내는 말이 없었어요. 속에 말 못할 무엇이 잔뜩 들어 있는 모양이죠. 누구에겐가 후련하게 뱉고 나면 맘이 변할지 모를 일이죠. 저수지 아래에 있는 1번 주차장에 내려오니 매점이 문을 열어놓고 있더군요. 주차장에는 아베크족과 드라이브 나온 연인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음침한 곳에 차를 세우고 카섹스를 즐기는 족속들도 있었을 겁니다. 연일 북적이던 매점 앞 플라스틱 파라솔 탁자는 바람만 가득하니 비어 있었어요. 사내에게 턱짓으로 탁자를 가리키며 기다리라 하고 매점 안으로 들어가 소주 두 병을 사고 안줏거리를 찾다가 김이 술술 나는 어묵을 보고, 한 사발 담아달라고 아줌마에게 부탁하고 나왔어요. 날씨가 추운 탓에 김이 술술 나는 어묵이 먹음직스러웠죠. 플라스틱 탁자에 마주 앉아서 보니 사내는 모노물산이라는 마크와 이름이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었어요. 모노물산이라면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의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유망 중소기업, 모나리자! 당신도 아시죠? -모노물산에 다니시우? 사내는 안주도 나오지 않았는데 소주병을 따서 내 잔에 채워주며 긍정을 표시했어요. -모노물산은 사원 복지도 좋고 인원감축도 없고 노사 간의 분쟁도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연유로, 이렇게 남 보기에 껄끄럽고, 자신에게 아름답지 못한 거사를 집행하려 하시우? 사내는 제 잔에도 소주를 부어서 한잔 마시고는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푸념처럼 늘어놓았어요. -너무 좋아서 탈이지요. 자고로 인생은 질곡이 있어야 치유하는 법이 익히는데 너무 정확하게 인생이 시계 초침처럼 돌아가니 탈이 난거죠. 선생! 야간 근무를 하는데 갑자기 전력에 이상이 생겨서 생산을 중단하고 사원들을 퇴근시키면 집으로 바로 돌아갈 작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청동입술의 사내가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며 되물었어요. -없겠죠. 어디 가서 한잔 걸치고 들어가야겠죠. -그렇죠? 그런데 끼리끼리 몰려간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렀는데 제 마누라가 쑥 들어온다면 선생은 기분이 어떻겠소? 주객전도! 느닷없는 사내의 물음에 내가 문책을 당하는 꼴로 둔갑했어요. 그 때 아줌마가 어묵이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놓고 갔고 갑자기 말문이 막힌 나는 앞에 놓인 소주를 마시고 어묵을 하나를 집으며 그 물음에 되물었죠. -선생께서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이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소주잔을 들어 한 잔을 비우고 느긋하게 청동입술을 열었어요. -오늘은 야간조라서, 네 시에 출근해서 다섯 시까지 일 하다가 퇴근을 해서 회사 근처에서 한잔하고 이 차로 간 노래방이었소. 초저녁에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오. 그것도 바로 나에게....... 말꼬리를 사린 사내는 고개를 들고 나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내는 생산직 단순노동에 단련된 사고를 지닌 인간이라 융통성이 없어 보였어요. 여기서 내가 말을 잘못하면 사내는 다시 올가미가 있는 곳으로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래야한다는 책임감과, 괜히 객기를 부린다고 심야산행을 와서 어지간히 성가신 작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어요. 참 이기적이죠? -남의 일이라 그런지 흥미롭구먼, 그래서 어떻게 했소? -지금 빈정거리는 것이오? 사내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번쩍, 살의가 실려 있었어요. 섬뜩했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다는 말이오. 직접 들은 적은 처음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고 나왔소? -그러니까....... 노래방으로 들어서는데 서로가 눈이 마주친 거죠. 워낙 화장을 진하게 해서 몰라볼 뻔 했소. 눈이 마주치자 마누라가 더 놀랐겠죠. 멈칫, 하는 순간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 노래방을 빠져 나왔소. 물론 마누라는 나보다 더 먼저 노래방에서 날아버리고....... 그 다음은 더 듣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한 일이죠. -혹시 잘못 본 건 아니오? -제 마누라를 몰라보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회사 동료들이 아내의 얼굴을 알고 있소? -석 달 전에 부서를 옮겨서 그 자리에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었슴돠. -거 참, 잘 되었네. -뭐가 잘 되었다는 말입니까?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이오. 얼굴을 아는 작자가 없었으니....... 그런데 아내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고 있소? 궁금하지 않소? 내가 잘못 넘겨짚었지요. 내 물음에 전혀 상반된 대답을 했어요. 따귀를 후려치고 아내를 내쫓은 사내는 노래방을 나와 전봇대 아래 서서 담배를 한 대 피고는 바로 집으로 갔는데, 이게 무슨 조화야?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던 아내가 평상복차림에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개수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어요. 뭐에 홀린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고, 아내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긋나긋, 왜 이렇게 일찍 퇴근했느냐고 물으며 그를 대하더라는 것이었죠. 사내는 상냥하게 구는 아내를 소파에 난폭하게 밀치고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내달았다는 말을 했어요. 모나리자! 뭔가 이상하죠? -노래방에서 여자를 잘못 본 것 아니오? -틀림없이 마누라였소! 사내의 목소리는 단호했어요. 턱없이 강한 부정은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법이라고 당신이 언젠가 말했지요. -그래요? 평소에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소? 이런 사람에게는 말을 많이 시켜야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죠. 굳어있던 사내의 입술이 상당히 유연해졌다는 건 말할 바도 없고요. 사내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노래방 도우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했어요. 노래방 도우미라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일마다 성당에 착실히 나가고 또 성당 교우들과 만든 봉사활동단체에서 교우들과 어울려 독거노인들의 목욕 봉사를 하는, 그야말로 천사의 라벨이 붙은 여자라고 했어요. 사내는 성당에 관심이 없지만 쉬는 주일이면 성당에 같이 가자는 아내의 종용을 뿌리치느라 편히 쉴 수가 없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하며, 덧붙여 중풍이 든 시어머니 대소변을 사 년이나 받아내며 봉양한 아내라고 하고는, 입 안이 쓴지 소주를 한 잔 털어 넣더군요. 그가 술기운에 컴컴한 조명의 노래방에 들어서는 여자를 잘못 보았거나 환시를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나는 자꾸 유도성이 짙은 질문을 해서 사내의 입이 닫히지 않게 만들었지요. -아내를 보았다는 그 노래방에서 집까지 얼마나 걸리오? -차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어요. -차를 끌고 바로 집으로 갔단 말이오? -예. 차를 끌고 바로 집으로 갔지요. 마누라는 멀쩡히 있었고.......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요. -분명히 노래방에서 여자를 잘못 본 것이 확실하오. 엉뚱한 여자 따귀를 때렸구만....... 어떤 사태가 생길 거라고 추측을 집요하게 보면 그런 환시를 느낄 수가 있는 법이지요. -환시? 그런 것 같죠? 사내의 눈이 잠시 빛났어요. -그 딴 일로 왜 거사를 집행하려고 했소? 죽을만한 일이 아닌데? -마누라가 노래방 도우미로 들어왔더라도 죽을 일이고, 내가 환시를 느낄 정도로 미쳐도 죽을 일이고.......술기운에 생각하니 모두가 죽을 일뿐입니다. -그 딴 일로 죽으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그 일 뿐만이 아니란 말이오.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한마디를 불쑥 뱉었어요. -다른 일이란 뭐요? 사내는 말하기 곤란한 듯, 안 해도 될 소리를 한 듯이 고개를 팍 숙였어요. 뭔가 심상찮은 구석이 있었다. 보아하니 사내가 쉽게 일을 열 성질의 고민이 아닌 듯 했어요. 그건 들으나마나 분명 돈 문제나 여자 문제죠. -사나이 대 사나이의 얘기요. 뭔지 말해보시오. 혹시 도박해서 왕창 날린 것이오? -그게 아니라....... 사내는 말꼬리를 사렸어요. 잠시 침묵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침을 꿀꺽 삼키고 사내의 입술이 열리는 그 잠시를 기다렸지요. -여자가 있었소. 그런데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고....... -남편이 있는 여자였소?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어요. -그럼 과부란 말이오? -이혼녀였소. -이혼녀? 어차피 내 물건이 아니잖소? 잊어야 하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소.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너무 좋아했소. 이렇게 비참하게 차이고 보니 세상사는 맛이....... -단도직입적으로, 그건 사랑이 아니오. 불륜이지. 어차피 내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다! 이것을 명제로 삼고 남의 물건 잘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시고 미련을 접어시오.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거리라고 생각하시오. 살다보면 더 좋은 여자를 또 만날 수가 있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지....... 사내는 들고 있던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고개를 숙였어요. 그런 사내는 삶의 의지와 희망, 책임감을 심어 주어야하죠? 그런 데는 자식들 이야기가 최고죠? 나는 말머리를 돌렸어요. -아이는 몇이나 두었소? 남매를 두었다고 했어요. 큰 애는 아들인데 고등학교 이 학년이고 둘째는 딸인데 고등학교 일 학년, 연년생으로 두었고 다들 공부를 잘한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술술 했어요. -당신이 죽으면 그 애들 어떻게 되겠소? 자! 날씨도 추운데 이제 정리합시다. 초저녁에 노래방에서 본 아내는 술기운에 잘못보고 엉뚱한 여자의 따귀를 때렸죠? 맞지요? 알리바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인정하시오. 내 말에 사내는 부정을 표시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목을 매도록 매정하게 차 버리고 간 그 이혼녀는 뭐하는 인간이오? 대수롭잖게 물었는데 사내의 대답에 나는 흠칫 놀랐어요. -미용실을 하는 여잡니다. 비산동 미성상가에서....... 제 이종사촌 동생이 비산동 미성상가에서 미용실을 하거든요. 아, 참 모나리자! 당신도 한 번 보았죠. 재작년엔가, 그 애가 마음을 못 잡고 있을 적에 당신에게 그림을 배우라고 내 소개로 한 번 만났었죠. 추 희정이라고, 미용실을 한다고 했잖아요. 미적인 감각을 지닌 동생이죠. 총명한 아이였는데 시집을 잘못 가서 남편이 부도 왕창 맞고 파산에 결국 이혼까지 했죠. 그 아이를 생각하고 미성상가에 미용실이 몇 개나 되나 싶어 사내에게 물었어요. -혹시 추 희정이라는 여자가 아니오? 모나리자! 정말 세상이 좁더군요. 내 말에 사내는 더 놀라는 거 있죠. 그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어떻게....... 어떻게 아시는 사이죠? 사내는 몸이 달았고 나는 최대한 능청을 떨었어요. -첨단 디지털 도시라고 불리는, 인구 겨우 40만인 이 조그만 공단 도시에 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 여자 두어 달 전부터 나랑 사귀고 있거든요. 왜? 돌려드릴까요? -그게 아니라....... 정말 어,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내가 말했잖소? 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이제 거사를 집행하러 올라가야죠.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내가 그 여자에게 당신이 참신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겠소. 말을 마치고 나는 자리를 털었어요. 차가 있는 곳으로 가며 힐끔 보니 사내는 벌떡 일어섭디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조수석에 올라앉더군요. 나는 시동을 걸며 사내에게 말했어요. -나는 당신이 거사를 집행하는 곳까지 태워다 줄 생각이 없습니다. 내리시오. -그게 아니라 아이들을 한 번만 보고 가야겠습니다. 가시는 길까지만 좀 태워다 주세요. 나는 사내를 태우고 우리 집이 있는 부곡동을 향해 달렸어요. 사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입을 떼지 못하고 줄담배를 피우더군요. 중앙통을 지나쳐도 내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더군요. 이 작자가 결국 우리 집까지 가서 택시를 타고 돌아가겠다는 예감으로 나는 내처 집으로 향해 달렸어요. 그 사내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그런데 부곡동 입구 그린 아파트 앞을 지나는데 세워달라고 하더군요. 그 인간 집이 그린 아파트라고 하더군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리는 곳이죠. 그 사내는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요. 그 사내가 무슨 말인가 꺼내려면 내가 계속 말문을 막았거든요. 저어....... 하며 말문을 열면 날씨를 들먹이고, 또 저어....... 하면 경기를 들먹여 사내의 입술을 청동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끝내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 내려주었어요. 모나리자! 어제는 참 이상한 날이었죠? 낮술에 취한 것도 이상하고 그 시간에 작업실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 저녁도 먹지 않고 잔 것도, 당신이 부르는 것처럼 몽롱하게 금오산을 간 것도 그렇고 모종의 사내를 이상한 인연으로 만난 것도 마찬가지, 혹시 당신이 나를 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네요. 혹시 당신이 어디선가 나를 조정한다면 당신과 똑 같은 여자를 하나 만나게 해주면 어떻겠소? 마음씨도 당신과 똑 같고 외모와 우아한 행동들이 당신과 똑 같은 여자, 내가 따귀를 맞을 소리를 모나리자에게 한 건가요? 아니면 보이지는 않지만 늘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조종해주세요. 당신이 보고 싶을 땐 당신을 그리워하고 작업을 할 땐 잡념 없이 작업 몰입할 수 있도록 당신이 보이지 않지만 옆에서 조정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래도 골목 슈퍼에 가서 소주를 두어 병 사와야겠어요. 일주일 전부터 짜던 목조창의 격자무늬가 맘에 들지 않고 작업이 하기 싫어졌어요. 그대로 밀쳐놓고 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아, 참!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생긴 그대로 목각하고 싶었어요. 키와 손의 크기 다리의 길이, 체격 그대로 목각을 조각하고 싶은데 재료가 마땅찮아 미루고 있었어요. 그렇게 목각하더라도 당신의 혼을 불어넣을 수야 없겠지요. 그런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더라도 무늬만 모나리자, 아니 행숙이가 되는 건가요. 오늘도 낮술을 먹으며 내 머리에서 당신의 체격과 미소를 떠올리고 머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작업을 해야겠죠. 어떤 재료의 목질이 좋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모나리자! 잠깐만요. 아무래도 나사서 소주부터 사와야겠어요. 먹다 남은 육포가 냉장고 어디엔가 있을 겁니다. 그걸 안주로 한잔 합시다. 술보다 당신에게 취하고 싶네요. 보이지 않는 당신과 건배를 하며 한잔하고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좀 취한 다음에 이 편지도 소지를 하여야겠지요. 그래야만 당신이 읽을 수가 있을 거니까요. 무엇에 대해서 건배를 하죠? 당신과 나의 돈독하고 특별한 우정을 위하여? 아니면 내가 구상하는 당신의 목각에 영혼을 불어넣기를 기원하면서? 아무튼 나가서 소주부터 사오는 게 순서인 것 같군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 가슴에 달라붙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소멸하지 않을 것 같군요. 종이컵은 두 개를 마련하겠소. 비록 내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마주앉아 한잔 합시다. 모나리자! 이렇게 빈 작업실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당신이 그립고 애틋하겠소? 당신이 꼭 같이 마셔주어야 하오. 내가 취하면 주저리주저리 당신에게 무슨 푸념을 할 것이 분명하오. 그 푸념이 먼저 떠났다는 원망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요. 술을 마시다가 그리움을 제어하지 못하고, 만취상태에서 지난번처럼 당신의 빈 화실로 찾아가 당신의 그림을 보며 울다가 또 취기에 잠이 들 수도 있겠지요. 소주를 사러 나가기 전에 이 편지를 당신에게 보내야겠습니다. 어제처럼 저 연탄난로에 소지하면 당신이 읽을 수가 있겠지요. 이 글을 읽고 당신이 꼭 내 작업실로 와야 합니다. 그리운 모나리자!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음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늘 내 곁에 붙어 다니며 나를 실의에 찬 인간이나 그리움의 도가니로 빠트리지 마세요. 소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불러봅니다. 나의 모나리자! 사랑한다는 상투적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이 편지를 연탄난로에 소지하고 소주를 사러 나가겠습니다. 요즘은 늘 이래요. 작업실이 아니라 음주 궁리실로 전환되었지요. 어떤 이유를 끌어다 붙이든 술자리를 만들어요. 오늘은 당신과 대작이라는 이유로 후딱 나가서 술을 소주를 사오겠습니다. 그 사이에 편지를 읽은 당신이 와서 기다리면 좋겠어요. 빈 작업실에서 혼자서 처량하게 술을 마시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꼭 오세요. 연일 술이라고 아내처럼 잔소리만은 하지를 말고. 당신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머금고 대작하러 꼭 오리라 믿습니다.  
210 향, 그 유혹에 대해/황정인 file
편집자
2513 2012-04-30
12. 05월 24호 수필  향, 그 유혹에 대해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보고 황정인 참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춘 채 뒤돌아서서 그 남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붙박은 듯 서 있었다. 짧은 동안, 몸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에 사로잡힌 채 내부에서 급격하게 일어나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둔감하던 내 몸의 60조나 되는 세포가 일제히 성적 충동에 이끌려 그를 안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길을 가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던 충동이 단지 그 남자에게서만 일어났다. 마음의 변화도 기이하지만 난데없는 욕구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새어나온 욕구와 대면하게 된 이성은 내 안의 욕망들을 가까스로 돌아보게 했다. 겨울나무에 매달린 자잘한 알전구에 스위치를 넣는 순간, 수 천 수만의 빛이 비로소 나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처럼 내 안에서도 자극과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성적 충동이 그렇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는 모르는 남자다. 뒷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나이나 생김조차 가늠할 수가 없다. 뒷모습이라고 해봐야 내가 유혹을 느낄만한 어떤 사안도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왜 순식간에 열병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것인지 자신 안에서 생성된 감정임에도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힘들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나지 않던 향기가 났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흔히 맡을 수 있는 달콤하거나 청량감 있는 향이 아니라 뜨거운 여름날 혼곤하게 낮잠에서 일어나면 땀에 배인 몸에서 나는 냄새처럼 어딘가 은밀하고 습한 기운이 묻어나는 그런 향이었다. 그러나 향이 사라지자 느낌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향에 대한 민망한 기억으로 오랜 세월 보낸 후, 이해 받을 수도 이해 할 수도 없던 부분에 대해 마침내 이해하게 되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으로 보게 된 영화 ‘향수’, 그 내용이나 영상이 잠시도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도 했지만 향에 대한 기이한 경험 때문에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까지도 이해가 가능하던 영화였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만큼 빠른 것은 없는 모양이다. 향수는 2006년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던 영화인데 아마 극장에서 그 적나라한 마지막 영상을 대했던 사람들은 당황스럽고 억지스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한다. 영화가 주는 미묘한 끌림에 의해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쥐스킨트의 ‘향수’는 1985년 발매되자마자 이 년 만에 이백만부나 팔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영화는 작품이 발간된 이후 십 수 년이 지난 다음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작품을 영화화해서 성공한 사례는 드물지만 이 영화는 원작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충실하게 따라가려 했다는 것을 책을 보고나니 확연히 느껴졌다. 향수라는 생소한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는 18세기 프랑스와 향수의 고장인 그라스를 배경으로 향수의 제조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시대의 서민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볼거리를 더해주고 있었다. 책이 보여줄 수 없는 영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상호 보완적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더럽고 악취가 가득한 생선 시장의 쓰레기 더미 위에서 태어나 버려졌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체취를 지니지 않은 채 태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냄새에 있어서는 천재적이다. 그의 뛰어난 후각은 냄새로 모든 사물을 구분했고 냄새로 인식을 햇으며 세상의 어떤 냄새도 구분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냄새를 만들 수 있는 재능까지 타고 났다. 파리 뒷골목의 가죽 무두장에서 처절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루누이는 어느 날, 이제 그 명성을 잃고 망해가기 시작하는 향수 제조업자 발디니의 가게에 배달을 가게 된다. 그 곳에서 자신의 후각으로만 향을 섞어 새로운 향수를 만들어 준 후, 발디니의 도제로 들어가 그 곳에서 각종 식물에서 향을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만 사람의 향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우연한 방황 끝에 향수의 고장인 그라스에 들어가 그 곳에서 향을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고 동물의 향까지 추출할 수 있게 된다. 체취가 없는 그는 자신이 사용할 향수를 만들어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는 향,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향,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는 향 등으로 자신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향기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향을 만들고 싶어 한다. 사랑을 느끼게 하는 향을 만들기 위해 그는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여자들을 서서히 죽이고 그 사람들 몸에서 향을 채취하고 증류하여 열세개의 작은 통에 사람의 향을 보관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체포되어 공개 처형을 당하게 되지만 공개처형 되는 날, 그는 자신이 만든 그 향을 조합하여 온몸에 뿌리고 나가자 광장에 모여 있던 수백만 인파에게서 기적이 일어난다. 25명을 죽인 살인마에 대한 분노로 들끓던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 향을 맡는 순간, 갑자기 그루누이가 살인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고 믿게 되고 그의 볼품없는 외모조차도 눈물 흘린 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심지어 그에게 딸을 잃은 귀족조차도 그의 살인을 용서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모든 분노나 증오 대신 사랑이 광장을 뒤덮어 사람들은 서로 처음 보는 상대를 안고 열광하며 옷을 벗어 던진 채 육체적 사랑까지 나누게 된다. 환상에 사로잡힌 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난교를 벌이던 대중을 바라보던 그루누이 자신은 오히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인간과 신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그들을 비웃게 되고 오히려 증오심이 일어난다. 사형수였던 그는 유유히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람의 맘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 담긴 말이나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말이나 행동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이런 향기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말이나 행동이 오랜 시간 공들여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비한다면 향은 순식간에 이성을 마비시켜 무조건적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공포를 느끼게도 한다. 물론 ‘향수’는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향으로 세상을 인식했고 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해 향을 만드는 일에만 집착하여 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몰두하는 것이 있다. 그루누이가 향수에 몰두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 본연의 욕망인 물징이나 권력이나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향이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화학 성분에 불과하지만 감각을 자극해 전혀 의외의 사고를 하고 그 사고로 전 생을 바꿀 수 있다는 설정이 가능했던 것처럼 우리의 욕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설정이 비약이기만 한 것일까? 오래전, 향이 사라지자 마음도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 느낌이 가끔은 그리울 때도 있다.  
209 喜捨函 외1편/임술랑 file
편집자
3023 2012-04-30
12.05월.24호 시 喜捨函 임술랑 보싯돈 희사함은 우리 아이 주머니 같다 어두운 통 속으로 주르르 밀어 넣는 돈은 아이의 용돈이지 싶다 돈도 내고 절도 하는 큰 부처님 앞은 아이와 내가 소통되는 장소이다 아프지 마라 배곯지 마라 조심조심 건너는 세상 어두운 희사함 속 지폐는 잘 날아가서 우리 아이 주머니 속에 들어 갈 것이니 땀 흘리며 一 拜 二 拜 百八 拜 품 떠난 자식을 다시 안아 보는 것이다 횡단보도 앞에 선 趙光祖 임술랑 늘 그렇듯 깨어있는 그것도 새벽에 이리저리 미망을 헤매던 한적한 도로 횡단보도 앞에 선 조광조 지켜 본 것은 동쪽 하늘에 샛별뿐이었는데 우두커니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에 붙박였는가 했습니다 마침내 푸른 별빛을 보고 우주를 가로 지르듯 휑하니 조선의 옷자락을 휘휘 날리며 장엄한 발걸음을 옮길 때 산도 그가 가는 방향으로 쏠렸고 강물도 그를 따라 걷는 것이었습니다   
208 그 옷이 내게 외1편/김점용 file
편집자
3064 2012-04-30
12.05월.24호 시  그 옷이 내게 김점용 그 옷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가끔 내 곁에 없는 혹은 죽은 사람의 목소릴 듣기도 하는 편이어서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여겼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이 금방 떠오르지 않아 찬찬히 짚어가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하는 말이었다 그 옷은 누가 입다가 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온 것도 아니었다 백화점 정기세일 때 신용카드로 산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그만그만한 옷인데 그 옷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옆 의자에 걸어둔 그 옷이 그 사람의 뺨을 때리라고 개념에 빠진 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나를 다그쳤다 물론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욕을 했다 나더러 겁쟁이 돼지새끼라고 욕을 했다 통행증을 보여달라는 수문장의 말에 뺨을 한 대 갈겼더니 그냥 통과시켜주더라는 선가의 말도 있지만 뺨을 맞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나는 그 옷이 말하는 걸 어떻게 듣는지 모른다 귀로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등짝으로 들은 것도 같고 때로는 뼛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뺨을 맞는다고 내 귀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아버지가 찾아왔다 낯선 노인이 아버지 친구라며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다가 우물가에서 혼자 놀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우물로 갔더니 일흔아홉의 아버지가 흰 수의에 삼베 꽃신을 신고 두레박에 손을 넣어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아버지 친구는 나뭇짐 때문에 애조원에서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며 거기로 가보라고 했다 급하게 고개를 넘고 마구촌을 지나 숨을 헐떡이며 애조원에 도착했을 때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아버지는 흰 와이셔츠에 한복 바지를 입고 문둥이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그는 꿈쩍도 않고 대신 문둥이가 뭉개진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쉿거렸다 등을 보인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버지 친구일 터 상심하여 돌아서는데 그가 이번 판만 두고 보내마, 그랬다 덜컥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으니 문둥이가 사라진 입술로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렸다 원문고개 호떡집 아줌마한테 물어봐라,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 집은 없어진 지 오래인데 안방에 촛불을 켜둔 채 급하게 나왔는데 힘이 장사인 아버지는 점점 더 젊어져서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젖히니 죽담에 선 어머니가 아버지 옷을 입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산 것들이 매달렸던 검은 가지에 저녁 빛을 모은 흰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물방울 사라지면 빛은 또 어디로 가는지…… 약력/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7 방천시장 1 외 1편 /곽도경 file
편집자
2734 2012-04-30
12.05월.24호 시  방천시장 1 -입춘 카페 플로체는 아직 동안거 중이다 출입문 앞 이젤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과 함께 늦잠에 빠진 아이를 깨우듯 가만히 그들을 불러본다 핸드드립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잠에서 깬 글씨들이 긴 하품을 하며 비실비실 목젖을 타고 넘어간다 커피 향이 슬쩍 코끝에 걸린다. “수도가 얼어서 영업을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문고리에 걸린 안내문이 바람에 흔들린다 맞은 편 가게문은 성급히 봄을 풀칠하고 있다. 방천시장 2 -광석 앓이 통기타가 김광석을 끌고 골목을 걸어가요 그 발자국 밟으며 나도 걸어가요 골목은 온 종일 그와 노래하고 그와 골목 사이 슬쩍 끼어 나도 함께 노래해요 그가 벤치에 앉아 흐린 하늘에 편지를 써요 그의 어깨에 기대어 편지를 읽어요 카메라 렌즈가 그와 나를 냉큼 집어 삼켜요 사진 속에 박제된 그와 내가 제법 잘 어울려요 나는 지금 ‘광석 앓이’ 중이에요 곽도경 2010년 《시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풍금이 있는 풍금』이 있음. 현, 《시하늘》 운영자.  
206 면벽 외1편/동길산 file
편집자
3293 2012-04-30
12.05월.24호 시  면벽 동길산 집이 남향이라서 마루에 앉으면 나도 남향이다 집이 방향을 틀어야 나도 방향을 튼다 집이 끌어들이는 길 남쪽을 거쳐서 오고 내가 끌어들이는 길 남쪽을 거쳐서 온다 남쪽은 집 한 채 사 두고 싶은 곳 평당 몇 만 원 촌집 손질해 평생 내 집이란 데서 살고 싶은 곳 그리고 남쪽은 높아지지도 않고 불어나지도 않는 곳 더는 높아지지 않는 산이 남쪽에 있고 더는 불어나지 않는 저수지 물이 남쪽에 있다 산이 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이 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은 지 백 년이나 한 방향 가부좌 집이 남향이라서 나도 남향이다 한밤 개구리는 용하다 수십 마리 수백 마리 개구리 옆구리 붙이고 다니면서 옆에 개구리 옆구리 쿡쿡 찔러 행동을 같이 하자고 신호를 보내는지 울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울기 시작하고 그치면 한꺼번에 그친다 옆구리 찔러도 한 마리쯤 두 마리쯤 울음이 뚝 그쳐지지 않아 꺼이꺼이 계속 울어댈 만도 한데 숨이 막힐 정도로 찔러대는지 뚝 그치지 않는 개구리 한 마리도 두 마리도 없다 남 다 자는 한밤 누가 옆구리 찌르는지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난다 나야 할 때 나지 않은 눈물이 나야 할 때가 아닌데 난다 진정이 되지 않아 내 옆구리 내가 치는 밤 동길산 -----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뻐꾸기 트럭’ ‘무화과 한 그루’ 등 시집 다섯 권과 산문집 ‘길에게 묻다’를 펴냈다. 1992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경남 고성 산골로 들어가 지금은 한 달의 절반은 산골에서, 절반은 도시에서 지낸다. dgs1116@hanmail.net  
205 도라지 피다 외 1편/이민숙 file
편집자
2740 2012-04-30
12.05월.24호 시  도라지 피다 이민숙 지금은 깊은 밤 희디흰 도라지꽃 아주 작은 망울 하나 보일 듯 사라질 듯 언제부터였을까 그 자리, 9층 아파트 베란다 끄트머리 고요하다 온 허공 숨 멈췄다 세상은 언제나 저 깊은 우물로부터 깨어난다 내 어릴 적 먼 새벽 샘물 길어 항아리에 붓던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 들리는 듯 사라져가는 듯 목숨 피워내는 것들 이 밤 가볍게 한숨 쉰다 붓질 없이 형체도 없이 허공의 흙 후벼 태어난 저 도라지꽃 눈 비끼면 날아갈 것 같은 천 길 낭떠러지 에 나를 세워버린다 아슬아슬 아슬아슬 새벽과 밤 사이 흰, 소리 없는 천둥 번개 칼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 돗자리에 누워 구름처럼 흘러나가고 있는데 칼 가는 소리 들린다 시스 스시 스스슥 남편 웬일, 저토록 뜨거운 눈빛, 칼을 가는 걸까 갑자기 더위 물러난다 저 날카롭게 빛나는 칼로 탁 잘라서, 내 병든 육체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절망의 꼬리 하나 휙 창밖으로 던진다면 붉푸른 핏방울들 안개 속 한들거리고 있는 애기단풍잎에 뿌려지고 노란 핏방울은 내 무의식의 은행잎에 물을 들이리 칼, 한 번도 제대로 갈아본 적 없는 나는 기억 속 썩은 혹, 욕망, 썩은 질투, 쓰윽 베어본 날 언제일까 누군가 갈아준 길 위의 칼 아닌 미련마저 던져 갈아 날카로운 칼날 아래 너덜너덜 곪은 발, 저 꼬리의 상처 싹둑 잘라 던지고 싶다 새 살이야 오르건 말건 꿈꾸듯 생경하게 몸통 하나인 저 고양이 내일 없이 오늘 피비린내 나는 저 고양이처럼 단애의 숫돌에 곧추 서서 내 휘청거리는 날개 버린다는 것, 칼을 간다는 것, 이민숙 약력 : 1998년 <사람의 깊이>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 한국작가회의 회원. 여수에 작은 도서관 ‘샘뿔 인문학 연구소’를 열었으며 소 박한 인문학적 사유의 시간을 통해 이웃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음.  
204 오늘 하루 외 1편/최영복 file
편집자
2756 2012-04-30
12.05월.24호 시  오늘 하루 하늘 -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대낮부터 흘러가던 낮달은 맑은 구름 위로 아주 천천히 미끄러지고 ... 땅 - 땅 따먹기 놀이하는 아이들 바로 그 옆에서 나란히 나란히 개미들은 애벌레를 끌어가는데, 발 빠른 생쥐들은 그 밑으로 나 있는 하수구를 챙기고 있더라고. 시간 - 옛 추억으로 우리가 유랑하는 사이에 오늘이라는 하루는 슬그머니 해거름하며 저물어 가고 있구먼 ! - 오늘 하루를 보내며 - 낮달 - 대낮부터 떠 있던 달은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며 새털구름 위로 천천히 흘러가고 -. 다람쥐 - 등산객이 식식거리며 오르고 있는 산길 옆 나뭇가지 위에서는 발 빠른 다람쥐가 도토리를 챙기고 ! 하루 - 우리가 가을이라고 하는 계절을 앓고 있는 사이에 오늘이라는 하루는 재빠르게 해거름하며 하늘을 또 다시 접수 하고 있구먼 ! 최 영복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공부 하였고, 서울보건 대학, 강원대학교 의과대학, 삼육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현재 대학 강의를 하면서, 보건학 관련 서적과 일반 교양서를 쓰고 있습니다. - 전화 : 010 - 5566 - 8494 이메일 주소 : choichar2002@Gmail.com  
203 아내는 미래다/고창근 file [3]
편집자
3058 2012-03-31
12.04월 23호 수필  아내는 미래다 고창근 봄이 왔다. 봄이 오면 우리집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게 있다. 그것은 마당가에 있는 텃밭에 땅을 갈고 씨앗을 넣는 일이다. 텃밭은 넓지 않아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데 이 날은 온 가족-이라야 큰놈이 객지에 있는 바람에 나와 아내, 고딩1짜리 아들 한 놈밖에 안 되지만-이 함께 일하는 날이다. 먼저 텃밭에 있는 가을에 묻었던 장독을 꺼낸다. 지난겨울에 동치미를 담았던 장독이다. 아들과 나는 일전을 겨루는 병사처럼 삽과 괭이를 쥐고 달려든다. 신발에 흙이 들어가고 이마에 땀이 날 즈음에 장독을 다 꺼내어 수돗가에 놓는다. 그러면 씻는 것은 아내의 몫. 이제부터 본격적인 일하기. 아들은 우선 쇠스랑으로 땅을 뒤집는다.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인데, 그 힘든 일은 우리집에 엥겔계수만 높이는 아들 녀석의 몫이다. 녀석은 그걸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만 덩치 큰 소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쇠스랑질을 하는 것 보면 역시 노동은 신성하다는 것을 느낀다. 녀석은 부정할 테지만 말이다. 다음은 내 차례. 쇠갈쿠리로 흙을 고르는 작업이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나면 골을 탄다. 좀 비뚤어도 상관없다. 다만 적당하게 파야한다. 너무 깊게 파거나 얕게 파면 씨앗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 일을 할 때면 꼭 아내를 부른다. 오늘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 씨앗을 넣는 일이다. 아내는 만물의 창조자답게 위엄을 갖추고 상추 씨앗을 골고루 뿌린다. 나는 씨앗을 뿌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노라면 어떤 엄숙함을 느낀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숭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아내가 씨앗을 뿌려야 안심이 된다. 언젠가 내가 뿌려봤는데 뭔가 어색했다. 그리곤 도대체 미덥지가 않았다. 씨앗이 날까? 안심이 안 되었다. 며칠 후 보면 역시 예상대로였다. 씨앗이 드문드문 난 것이다. 역시 씨앗은 아내가 뿌려야 한다. 태초부터 생명을 잉태한 것은 여자가 아니던가. 그 다음 씨앗을 덮는 일은 내 몫이다. 깊게 묻지도, 얕게 묻지도 않게, 적당하게 묻어야 한다. 나는 이게 아주 예술적이라 생각하는데 아내와 아들은 가장 손쉬운 일이란다. 이 위대한 일은 아내와 아들이 몰라주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은 끝. 이마엔 땀이 맺혔다. 이제 며칠 후면 싹이 트고 몇 주 뒤면 뽑아 먹을 만큼 클 것이다. 당연히 농약도 안 치고 화학 비료도 안 한다. 100% 무공해 식품. 그 다음은? 당연히 막걸리 마시는 시간이다. 일을 하고 난 뒤 마시는 막걸리의 맛을 아는 사람은 노동의 신성함을 아는 사람이다. 당연히 이 맛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마당에서 휴대용 카스레인지에 불판을 올려놓고 삼겹살을 굽는다. 나는 아내의 잔에 술을 따르고 아내는 내 잔에 술을 따른다. 이제 노동의 대가로 향연을 베푸는 것이다. 고기가 익으면 아들은 상추에 고기를 두 점씩 놓는다. 술을 마시는 속도에 비해 고기는 늦게 익기에 먹을 고기가 모자라는 데도 그렇다. 한 입에 고기 두 점씩이나? 엥겔계수만 높이는 이 녀석을 두고만 볼 수 없어 내가 호통이라도 치면 아내가 펄쩍 뛴다. “한참 커는 아이한테 왜 그래?” 그러면서 아이한텐, “많이 먹어라. 힘들었지?” 고기를 아들 쪽으로 밀쳐놓는다. 개코나, 쇠스랑질 몇 번이 힘들다고. 나는 투덜거리지만 아들은 내 표정을 살피곤 선수를 친다. “엄마, 손에 물집.” 제 엄마 코앞에 손바닥을 편다. 손바닥 중앙에 물방울처럼 물집이 돋아나 있다. 역시 일 안 하는 손은 틀리다. 나는 셈통이다, 하고 고기를 날렴. 집어 먹고 아내는 안타까운 눈길로 아들의 손바닥을 바라본다. 막걸리는 한 잔 두 잔으로, 어느새 한 병 두 병을 넘어서고 세 병 네 병까지 늘어난다. 이 정도면 일을 해서 술 마신 게 아니라 술 마시기 위해 일한 거다. 그렇다. 솔직히, 아내와 난 술 마시기 위해 일을 한 거다. 적당히 일을 하고 난 뒤 아내와 술 마시는 기분이란. 아내는 최고의 기분이란다. 물론 나도 최고의 기분. 아들의 요즘 생활, 진로문제, 아내의 학교생활, 나의 요즘 관심 분야. 밤이 늦도록 우리 가족은 향연을 벌인다. 또한 다음 날 아침 북엇국을 끓여놓는 아내. 역시 아내는 미래다. 문학웹진 <문학마실>편집인 소설집 <소도> <아버지의 알리바이> 서양화 개인전 1회  
202 감나무사다리 외 1편/박승민 file
편집자
2690 2012-03-31
12.04월 23호 시  감나무사다리 박승민 감나무가지를 잡고 있는 조롱박의 손 힘줄이 파랗다 나이를 한 살 더 한다는 건 허공으로 난 사다리를 오르는 일 지상의 낯익은 온기들과 멀어져 바람과 구름의 사원을 지나 낯선 별자리를 찾아 중얼거리며 가는 길 흔들려도 잡아줄 손이 더 이상 옆에 없다는 사실 아득한 꼭대기에서 누군가의 발이 후들거리는지 밤부터 울고 있었는지 내 손까지 내려오는 저릿한 통증 조롱박의 왼손이 감나무사다리를 올라 장천(長天)의 푸른 강을 넘고 있다 천공(天空) 스물두 살 때 폐에 구멍이 생기는 기흉(氣胸)을 앓은 적 있었지 웃으면 가슴이 바늘로 찔린 듯 그래서 웃음의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던 시절 어찌어찌 不惑 지나 天命을 알리라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는 아직도 반 뼘 바람구멍이 있는 듯 채우자마자 휙,,, 휘리리,,, 풍선처럼 빠져나가는 천공(天空)이 숨어사는 듯 늘 복대를 하고 깻단의 마른 몸 이쪽저쪽을 옮겨 놓으시는 음지마을 할매의 몸속에도 그런 살바람 쿨럭이는 구멍이 있는지 흙바닥이 거울인양 서울로 공무원 살러간 아들의 주름살도 보이고 중증장애 손녀도 보이고 종종 영감도 다녀가시는지 오늘은 부처님의 영험까지도 고구마줄기처럼 내려오시는지 흙의 법당 마루로 자꾸 고개를 숙이는데 숙이기만 하고 가끔은 고개 드는 것도 깜빡깜빡하시는데, 삼배 삼백배 일만이천배를 느릿느릿 채우고 내려가는 고샅길 너머 빨리 온 가을, 빨리 늙는 은행나무 옹이 곁으로 한창 불붙은 맨드라미들 붉은자줏 융단을 펼쳐들고 겹겹이 벽을 두르고 있는데  
201 영산강 외1편/ 최기종 file
편집자
2915 2012-03-31
12.04월 23호 시  영산강 최기종 병실에서 어머니 활짝 웃으셨다. 노인성치매 증상으로 먹은 나이 조금씩 까먹어서 이제는 갓스물이 되시어 인공때 노래 부르면서 복사꽃 화알짝 피우신다. 이것 걸리면 최근 기억부터 파먹는다고 어제는 맵고 맵던 시집살이 살더니 오늘은 인공을 살고 해방을 살던 처녀적이다. 그 많은 세월 참고 살았던 둑이 터졌는지 아침에는 구부러진 여울목에서 눈 흘기더니 지금은 눈꼬리 내리며 아들이 반갑다고 하신다. 주치의는 기억의 두께가 점점 내려간다고 마음의 폭이 점점 좁아진다고 했다. 이렇게 쑥물이 빠지다 보면 하얗게 색이 바래지는 것일까 이렇게 강이 밭아지다 보면 바닥이 드러나서 흐름이 멈추는 것일까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기만 해서 영산강 오니층처럼 요실금 앓는 것인지 너무 많이 까먹기만 해서 영산강 하얀 풀잎처럼 떠가고 있는 것인지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진 어머니 강둑에서 지팽이 짚고 아들이 반갑다고 하신다. 영산강 하구언에서 광주에서 나주에서 영암, 함평, 무안에서 밀려온 쓰레기들 플라스틱, 스티로폼, 페트병, 캔류, 나무조각, 신발짝, 비닐봉지 같은 것들 이제 더 이상 밀려날 곳 없어서 거대한 체증이 되었나 부유물질 쌓이고 쌓여서 한풀이 시위라도 벌이고 있나 밀려날 대로 밀려나면 새 길이 보인다고 하던데 여기는 별 하나 뜨지 않는구나 있는 것 없는 것 다 버리면 새처럼 날 수 있다고 하던데 변비통 잡념만이 바리바리 떠있구나 쓰레기들 밀리듯이 이 몸도 거대한 체증에 걸렸나 버려지는 뼈아픔에 걸렸나 물안개 낀 주룡포구에서 폐선 하나 가물거리는구나 최기종 195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남. <포엠만경> 동인, 교육문예창작회 활동, 1992년 교문창 시집『대통령 얼굴이 또 바뀌면』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나무 위의 여자』,『만다라화』, 『어머니 나라』가 있음. 목포작가회의 회장 주소 : 목포시 옥암동 1321번지 한라비발디아파트 108동 801호 메일 주소 : jogi-choi@hanmail.net  
200 괴물시집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2929 2012-03-31
12.04월 23호 시  괴물시집 서 하 아침부터 까챙이가 울어쌌더니 두툼한 택배가 왔는데요 우째 이런 일이 함께 2쇄에 들어간 오탁번쌤의 시집<우리 동네> 시 열한 편이 서하 시집<아주 작은 아침>에 갈구쟁이를 휘딱 걸치고 있었어요 우두망찰! 알고보니 내 시 열편은 오쌤의 시집 어느 갈피에 몽땅 쏘옥 안겨 있다네요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한눈 팔지 않은 사람은 시방 돌아앉으세요 뜨거운 밀회, 보리밭인지 물방앗간인지 스스럼없이 고의춤 끌런 핫아비와 새물내가, 문장과 문장이, 꼬장주 벗고 홍글래비처럼 그림자 꼬꾸장하게 비치었겟지요 싱싱한 모국어와 끗발이 저토록 편안히 몸 섞다니요 달콤하게 서로의 품안에서 백마 타고 자갈길 달릴 동안 먼지는 또 얼마나 은밀히 댓바람에 끊어졌다 휘어졌다 했을까요 아무리 배 채워도 허기가 멎지 않는 가오나시*도 울고 갈 시치미 딱 떼고 미동조차 없는 저 영악한 괴물! 우리 동네, 아주 작은 아침이 갈피갈피 온전히 껴안는 일, 엉덩이 뿔난 봄날, 만삭의 햇살처럼 두툼하네요 *가오나시: 애니메이션 ‘센과 치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아무리 배를 채워도 허기가 멎지 않는 괴물 달맞이꽃 남들 공부할 때 일하고 남들 다 잠 든 밤에 책을 펼친다 밀어낼 수 없는 잠이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몸을 점점 옥죈다 잠은 어디서 놀다가 이제야 산처럼 밀려오는지 볼펜 꼭지에 이마를 짓찧기 일쑤다 나를 잠들게 내버려 둬다오 몸이 맘 놓고 무너지도록 정신만 가래처럼 카악! 뱉어다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는데 잠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팔도 없고 다리도 없는 달빛은 왜 수런수런 번지는지 내 마음은 왜 환해지는지  
199 저녁노을 외1편/임명선 file
편집자
3453 2012-03-31
12.04월 23호 시  저녁노을 임명선 하늘 끝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보지만 정녕 끝은 아니다 인생의 끝인가 싶어 체념하려 해도 정녕 끝나지 않은 것인가 모든 사랑을 감싸고 가는 하늘 성자의 구름일러니 저 타는 붉은 저녁노을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하늘이 그려내는 누군가의 몸짓 성자의 몸짓! 손으로 그려내는 누군가의 몸짓 진정 아니야! 하루가 저물어 가는 끝없는 하늘가 내 마음을 앗을 듯 저녁 붉은 노을이 나를 부른다 소리 없는 성자의 언어로서 저기 붉은 노을 한 귀퉁이에 점 하나 꼬-옥 찍고 싶디 내 영혼의 무언의 점을 찍고 싶다 저 고운 성자의 붉은 노을에 심술을 부리고 싶은 욕망 아직은 덜된 나의 심성이 앳된 모습으로 해지는 붉은 노을 가에 머물고 있다 사랑의 인연설 처음엔 독이 되었던 사랑으로 맺었던 독한 인연 이었거늘 내 마음 안을 가득 매워버린 사랑으로 모습을 바꾸었네. 당신을 처음 본 모습은 꿈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직은 덜된 풋내 풍기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었어요. 세월이 물같이 흘러가면서 바람같이 훌쩍 지나가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이란 것을 알아가면서 당신의 꿈에 본 그 모습으로 변했지요. 사랑의 힘은 나를 바꾸었고 당신의 풋내 풍기는 덜된 모습을 시원스레 바꾸어 놓았어요. 진실의 냄새는 미움과 미움으로 가득 풍기던 내 깊-은 속내를 가득가득 채워졌지요 당신은 고마운 사람으로 진실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리매김 했지요 그것이 진정 사랑인가 봅니다. 내가 진정 거친 산 넘어 꿈길에서 힐끗 본 당신의 진솔한 모습인가 봅니다. 약력 春蒙 임명선 1957년 나주에서 출생 천안연암대학교 원예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졸업 현 나주시청 농업정책과 근무 2010년 산림문학으로 등단 산림문학 정회원  
198 지우개 외1편/신구자 file
편집자
2956 2012-03-31
12.04월 23호 시  지우개 신 구 자 지금 머리 속에는 지우개 하나 내 보폭만큼 함께 자라나면서 갈잎 갉아먹듯 사각사각 맛있게 뇌를 갉아 먹고 있는 모양이다 그제는 우리집 기둥 아들 생일을 콩까먹더니 오늘은 생각만 해도 아롱삼삼한 손녀 생일도, 무수히 꽃피고 꽃지던 속수무책의 그리움도 봄눈 녹듯 사르르 녹여버린다 멀쩡하게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도 기억의 괄약근이 풀어지면 멍하니 먼산 돌아서는 구름의 뒷꽁지를 쫓다 개울물에 빠지기도, 발길질 당하기도 한다 두렵다 큰길 접어두고 지름길로 달려오고 있는것 같은 저 무뢰한의 지우개, 살살 꼬드겨 꽃그늘 속에 코 박아 도끼자루 삭아내리도록 잠재울 수 없을까 돌부리에 걸려 무릅 팍, 꺾이게 할 수 없을까 송포역엔 경주에서 대구 오는 사이 두 번씩이나 새마을호를 마중하고 배웅해야 하는 무궁화호 열차 깃발 쥐고 흔들어 주던 역무원 대신 철로변에 마중 나온듯 줄지어선 개나리와 볼 붉힌 살구나무만 배웅하고 있다 봄햇살만 나른히 조을고 있던 송포연엔  
197 (중편)바타비아로 가는 항로 /이윤길 file
편집자
3471 2012-03-31
12.04월 23호 소설  바타비아로 가는 항로 1 배는 쉬지 않고 남지나해를 북상하고 있었다. 화물을 싣고 있고, 그 화물을 양륙할 항구가 지정되어 있는 한 머뭇거릴 아무런 이유는 없다. 바다는 잔잔한 편이었다. 자바 해 남쪽 바다를 서성이고 있는 열대성 저기압의 영향인지 항해등 불빛 속으로 실안개가 춤을 추고 있었고, 목덜미로는 습기 찬 바람이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어제 말라카 해협을 통항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말레이반도와 자바 섬 사이의 좁은 협수로인 그곳에서 돌풍이 휘몰아쳤는데, 그 바람에 갑판은 어디라고 없이 물기로 질퍽하게 젖어버렸다. 만약 남지나해로 들어선 다음에도 사정이 변하지 않았다면 앞길은 결코 지금처럼 순탄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앞으로는 큰 문제없겠어.” 선장은 마치 크루즈를 타고 세상 유람에 나선 관광객처럼 아주 무덤덤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여유로움일 것이었다. 2등항해사 장혜옥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03시 변침하는 거 잊지 말아.” 선장의 지시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재차 돌풍이 휘몰아치더라도 그 억양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2등항해사 장혜옥은 조타실을 나가는 선장의 뒷모습을 잠시 훔쳐보았다. 그녀는 물론 선장의 지시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배는 지금 028도의 침로로 전속력 항진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와 동지나해를 북상하는 배라면 반드시 채택하여야 하는 침로였다. 그리고 그 침로로 꼭 아홉 시간을 달리면 방금 선장이 지시한 변침점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침로의 정확한 유지가 항해의 핵심이자, 특히 항해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단 1도의 오차가 개입하여도 배는 영락없이 엉뚱한 바다로 굴러간다. 진수한 지 10년도 넘은 화물선 오션 글로벌 호가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와 경제속력인 13노트로 아홉 시간을 항주하면 남지나해의 아남바스 군도에 속한 망카이 섬을 지나치게 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르네오의 부속도서 가운데 하나인 망카이 섬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지나해를 북상하는 모든 배의 침로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새벽 세 시경, 오션 글로벌 호가 망카이 섬에서 침로를 변경하면 그 때부터 중국 해남도 인근의 서사군도에 이르기까지 향후 나흘 동안은 오로지 남지나해의 쪽빛 바닷물을 가르는 일만 남게 된다. 그 같은 여건에서, 만약 컴퍼스와 엔진을 비롯한 모든 항해 장비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거기에 기상이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조타실을 지키더라도 항해 결과는 똑같아질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변수가 작용한다. 항해란 원래부터 엉뚱한 마술로 사람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드는 요술쟁이인 것이다. 2 “2항사님, 수고하세요.” 오션 글로벌 호 2등항해사 장혜옥이 조타실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3항사는 벌써부터 계단을 내려갈 채비였다. 자정에 이르도록 눈을 멀거니 뜬 채 조타실을 지켰으니 폭신한 침대 생각이 굴뚝같을 만도 하다. “그래. 들어가 쉬어.” 일상적인 응답이었다. 그 순간부터 배의 운항은 전적으로 그녀에게로 넘겨졌다. 그녀는 플래시를 비추어 흑판에 적힌 선장의 지시 사항을 읽었다. - 03:00 a/co. 037. 어제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오면서 그녀가 손수 적은 내용 그대로였다. 3항사가 조타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그녀는 먼저 현재의 컴퍼스 눈금부터 확인했다. - 028도. 그 또한 틀릴 까닭이 조금도 없었다. 침로는 어제 오후 여섯 시, 싱가포르 해협 어귀의 이스턴 뱅크에서 오토파일럿 팅으로 전환된 이래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자정 무렵이면 앞서 말한 대로 새 침로로 변침된다.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참이라 흐릿한 항해등 불빛이 전부인 시야는 아무래도 깜깜 칠흑일 수밖에 없었다. 좌현 브리지 윙에는 등을 보인 워치 맨 한 명이 상체를 난간에 의지한 채 전방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배를 탄 지 10년도 더 된다는 미얀마 출신 갑판원 샌디다. 미래 어느 날 항해사가 되는 게 꿈이라는 그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한국 국적의 배만 타왔다고 한다. 외국인 선원은 샌디 혼자만이 아니다. 그를 포함한 세 명이 같은 나라 출신이고, 필리핀과 태국인이 각각 두 명씩이다. 거기에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 군을 보탠다면 승조원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외국인이다. 그게 한국 국적 화물선 오션 글로벌 호의 현 승조원 구성현황인 것이다. 오션 글로벌 호의 선원구성이야말로 다국적 혼성팀인 셈이다. 물론 한국 국적의 선박이니까 그 승선원들은 당연히 한국인으로만 짜여 지는 게 만 번 옳다. 하지만 승선 희망자가 많지 않은 오늘 날 승조원 정원을 채우지 않으면 출항 허가가 떨어지는 않는 선박안전법 규정상 부득이 모자라는 머릿수는 외국인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문제가 생긴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무작정 어느 한 나라 출신으로만 국한할 수 없다는 게 그것이다. 몇 해 전, 원양어선 패스카마 호에서 작업에 불만을 품은 조선족 선원들이 똘똘 뭉쳐 선장을 비롯한 한국인 사관들을 모두 살해한 사고도 멋모르고 여덟 명이라는 숫자적 우위를 부여한 결과였던 것이다. 미얀마 출신 워치 맨 샌디는 여전히 뚫어져라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포트 켈랑을 출항한 어제 밤에도 그랬다. 레이더를 확인하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녀석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쁜 감정은 숨어 있지 않았다. 추측컨대 아마도 2등항해사인 자신이 아직도 일반 화물선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조타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웬일인지 가슴이 설레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1만 톤급 육중한 선체를 내려다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고, 거대한 선체가 물결을 일으키며 짙푸른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격동적인 광경도 그랬다. 네 시간의 당직근무 동안 누구의 간섭이나 지시를 받음도 없이 오로지 그녀만의 판단과 조치로 거대한 배의 운항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긴장의 끈이 늦추어지지 않는 것이다. 동서양 요충지인 남지나해에는 통항선이 많다. 시야로는 오가는 배들의 항해등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먹물을 쏟아 부은 듯 한 칠흑의 밤바다여서 항해등은 더욱 명료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불빛이 너무 멀리 보인다. 실안개 때문일까. 그녀는 재차 배의 위치를 확인했다. GPS는 매초 매초 위도와 경도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녀는 옛날의 천문항해술에 대체하여, 현대과학의 결정체 가운데 하나인 GPS가 보이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해도에 옮겼다. 그게 당직 항해사가 수행하여야 할 기본적 책무가운데 하나였다. 그 일이야말로 전투에 임한 병사의 소총과 실탄에 해당한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배는 예정 침로로부터 엄청나게, 자그마치 6~7마일도 더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위치가 풀라우 다마르라는 작은 바위섬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섬과의 충돌이거나 좌초가 아닌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앞뒤 살필 겨를도 없었다. 무작정 조타실을 뛰쳐나가 우선 배의 선수 방향부터 살폈다. 만약 방금 위치를 알려준 GPS가 에러를 갖고 있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선수 방향으로 틀림없이 바위섬 하나가 버티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겁도 없이 돌진해 오는 배의 선수부를 사정없이 뭉갤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머리칼이 뾰족 곤두섰다. 하지만 칠흑의 밤바다가 그녀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러자 문득 그 섬에 등대가 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매 3초마다 한 번씩 섬광을 발한다고 해도는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배가 예정된 항로를 정확히 밟아 왔다면 그 등댓불은 지금 우현 방향 6~7마일 거리에서 명멸하고 있어야 옳았다. 그러나 사방 어디에도 등댓불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얼른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두 다리가 마냥 후들거렸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들쑤셔댔다. “워치 포워드!”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미얀마 워치 맨 샌디에게 전방을 잘 살펴볼 것을 지시하면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선수 방향 조금 우현 쪽으로 거무튀튀하고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물체 하나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완강한 돌진이라고 해야 옳았다.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그것은 마치 새벽 야음을 틈타 아군 진지를 향해 당당하게 굴러오는 적의 장갑차와도 같은 중압감이었다. 그 순간의 전율스러움이라니! - 섬이다! 풀라우 다마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방금 해도에서 확인한 풀라우 다마르라는 바로 그 섬이었다. 불과 몇 백 미터 남짓한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어둠 속을 표류하는 유령선처럼 섬은 소리도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뒤 살필 겨를도 없었다. 조타실로 뛰어든 그녀는 무조건 자이로컴퍼스 리피터의 중앙 놉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그러면 전타를 하는 것과 똑같은 타효를 얻어낸다. 키를 수동으로 전환할 여유도 없었다. 순간 타이타닉 호가 떠올랐다. 바위도 아닌 한갓 얼음덩이를 스쳤을 뿐인데도 불침을 장담하던 타이타닉 호 외판은 아주 쉽게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자이로컴퍼스의 헤드라인에 못 박혀 있었다. 지금쯤, 컴퍼스 눈금은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옳다. 그래야 뱃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꼼짝도 않는다. 그녀는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좀 전의 물기 머금은 바위섬은 지금쯤 아마도 뱃머리 가까이로 다가와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들려올 것 같았다. 두 다리가 마냥 후들거렸다. 이윽고 딸깍거리는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눈금이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선수 방향으로 보이는 카시오페이아 성좌가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드디어 뱃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우현 뱃전으로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로 물기 번질번질한 바위섬 하나가 마치 슬로비디오의 화면처럼 소리도 없이 지나치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얼마든지 게딱지와 소라고둥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 바위섬 꼭대기에 하얗고 장승처럼 높다란 구조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등대였다. 해도가 말한 바로 그 풀라우 다마르 섬의 등대였다. 하지만 그건 섬광이 꺼져버린 죽은 등대였다. 태양광으로 충전하는 배터리가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인지, 생명력을 잃은 허수아비였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단 몇 초만 늦었더라도 배는 한순간 타이타닉 호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섬을 들이받은 배는 그대로 중심을 잃으면서 전복하고 만다. 온몸의 힘이 죽 빠져나갔다. 정신이 멍한 게 마치 무중력의 공간 속을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휠 스탠드의 난간을 움켜쥔 채, 겨우 몸을 버틴 그녀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배가 원침로로부터 수 마일도 더 벗어났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의문은 곧 풀렸다. 자이로컴퍼스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녀는 천문항법의 논리에 근거하여 그것을 알아냈다. 마침 좌현 정횡 방향, 수평선 나지막이로 영롱한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동양에서는 직녀성이라 부르고, 그리스신화에서는 아폴로가 음악의 명수인 오르페우스에게 선사한 거문고라는 일등성 ‘비거’였다. 그녀는 곧 시진방위법으로 얻어낸 비거 성에 대한 진방위 수치를 자이로컴퍼스의 눈금과 비교한 끝에 지금까지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항진하게 한 원인을 알아냈던 것이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팽이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원리에 근거하여 아주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자이로컴퍼스가 자그마치 오른쪽으로 7도나 치우치는 엄청난 오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확인한 메인 자이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로터 케이스가 오른쪽으로 꼭 7도만큼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배는 원침로인 028도에서 7도가 가산된 035도의 방위로 항진한 셈이었던 것이다. 7도의 에러로 일곱 시간을 달리면 예정된 항로에서 대략 7~8마일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극히도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조타실에 나타난 선장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선장은 방금 전까지 배가 처한 아슬아슬한 상황을 금방 파악해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베테랑 선장이 그걸 모를 까닭이 없었다. “아이구나,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모두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거네.” 그게 한참 만에 입을 연 선장의 첫마디였다. “기계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게 선장의 결론이었다. “이거 액땜을 한 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늦게 브리지에 나타난 해군부사관 출신 1항사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3 2항사 장혜옥에게 오션 글로벌 호로 전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출항을 겨우 이틀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 동안 그녀는 미주를 왕복하는 4,000TEU급 컨테이너선에 2등항해사로 승선하고 있었다. 부산 감만동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떠난 배는 때로는 일본의 요코하마를 경유하면서 대권항법(大圈航法)으로 불과 보름여 만에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에 기항하곤 하였는데, 항해의 단조로움에 따분함을 느껴 다소간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을 때였다. 전선 사유는 병을 얻은 전임자의 하선으로 생겨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하선자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선주는 옳다구나 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여섯 척의 항해사를 대상으로 승선선박을 재배당하는 인사를 단행하여 보따리를 싼 항해사들이 이 배 저 배로 옮기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해군제독 출신인 선주는 무엇보다도 항해사들의 정신상태가 올바르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사고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그만의 독특한 지론과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걸 위해 선주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면서 항해사들에 대한 정신훈육을 맹렬하게 펼치곤 하였는데, 그 방법의 하나가 사관들을 곧 이 배 저 배로 전선시키는 일대 인사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선 명령을 받은 사관들은 짐을 꾸리면서 내내, 선주는 함대도 아닌 일반 해운회사에서 아주 철저하게 군대식 운용을 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꼭 모가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선주의 눈 밖에 나면 그것으로 해원의 생명은 곧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선주의 그 지론을 현장에서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또한 오션 글로벌 호의 선장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배에 승선한 날 곧바로 확인되었다. 선장은 승선신고를 하는 신임 2등항해사 장혜옥에게 마치 신병교육대의 훈련조교처럼 다음과 같이 카랑카랑하게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이거 원, 하필이면 여자 항해사라니!” 선장은 그렇게 마뜩찮아 했다. 불만은 곧 그녀에 대한 자질 평가로 이어졌다. “그래, 귀 항해사는 지금 이 배가 어느 항로를 뛰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마치 갓 배속된 신병을 닦달하는 부대 지휘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긴장한 채, 알고 있습니다, 동남아 항로입니다- 그렇게 답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건 항해사가 아닌 미얀마 출신 평선원이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답변이었다. 꼭 그 대답을 해야 하나, 하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선장이 가로채고 나섰다. “지금 이 배는 야만적인 해적 놈들이 들끓고 있는 동남아 일대를 뛰고 있다네!” 선장은 그처럼 단호했다. 전선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곧장 여객기 편으로 쿠알라룸푸르로 날아간 다음, 마중 나온 대리점 직원의 안내로 그곳에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포트 켈랑 부두에 도착하였는데, 그 시각 배는 이미 출항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원래 2등항해사가 공석인 배의 출항은 불가능하므로 선장은 그녀가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 항해사라니! 그게 꼬장꼬장한 오션 글로벌 호 선장의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임자의 하선 사유가 문제가 된다. 못난 전임자는 일주일 전쯤 계단을 굴러 떨어지면서 그만 한쪽 다리를 삐는 사고를 당하였는데, 내내 죽는 시늉을 하더니 급기야 추연골 헤르니아라는 괴상한 자기소견을 내세우며 하선을 자청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선장은 당연히 첫 마디로 핑계라고 일축했다. 선장의 단언에 의하면, 추연골 헤르니아라는 요상한 병을 빙자한 환자는 1년 전 승선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어떻게 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얼른거리는 동남아 항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자면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오션 글로벌 호에서 탈출하는 게 급선무 아닌가, 오로지 그 하나의 음모에만 골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아나? 아주 혼절할 만큼 두들겨 패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어떡하겠나? 정승도 제 하기 싫다면 그만이라지 않던가! 그래 두 번째는 따지지도 않고 녀석의 하선을 승낙해버렸지. 그게 선장의 후일담이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자네 역시 무슨 괴상한 병을 빙자할 요량이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멀쩡한 사내 녀석도 해괴한 병을 빙자하여 도망쳤는데, 여자로써야! 그게 제독의 첫 번째 대리인인 선장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걸 달리 표현하자면, 귀하와 같은 여자라면 차라리 얼마든지 한가하고 고급스러운 무슨 유람선이나 찾아보는 게 만 번 옳지 않겠느냐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었다. 하기는 선장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육지를 떠난 장기간의 항해는 무엇보다도 강인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바다란 분명코 변덕스럽기 짝이 없어서, 당장은 잔잔하고 고즈넉하다가도 언제 어느 때 악마의 망토를 펄럭일지 알 수 없다. 그 같은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며 장기간의 항해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려면 무엇보다도 마음 다짐부터 옹골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그녀는 아주 작심을 하고, 고집불통의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제가 이 배에 승선한 것은 여자도 남자 이상으로 항해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여자 운운하지 말라는 게 그녀의 주장인 것이었다. 고맙게도 선장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 다음 포트 켈랑을 출항한 오션 글로벌 호는 지금 중국 광저우 만의 황푸 항을 향해 속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말라카해협 통항은 몇 차례나 쏟아진 스콜로 해서 갑판이 축축해진 것 말고는 매우 순조로웠다. 다만 싱가포르를 앞둔 풀라우 쿠쿱(풀라우란 인도네시아 말로 섬이라는 뜻) 인근에서 수상한 고기잡이배 하나가 그물을 푸는 시늉으로 꼼지락거리고 있어서 바짝 긴장하였으나 다행히도 배들의 왕래가 잦은 항로여서 아무 탈 없었다. 그만큼 세상은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령 조난에 처한 표류선을 발견하더라도 인정에 끌리지 말라는 게 동남아 항로를 뛰는 선박 사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딱하다 싶어 무심코 접근하였더니, 표류자들이 갑자기 기관총을 꺼내들며 일순간 해적으로 돌변하기가 예사였던 것이다. 4 포트 켈랑을 출항한 다음의 일이었다. 방에서 한창 짐을 풀고 있는데 선장의 호출이 왔다. 캡틴 룸은 조타실 뒤쪽의 한 층 위에 있었다. “이걸 잘 보관하게나.” 방으로 들어서자 천천히 몸을 돌린 선장이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말했다. “무엇입니까?” 그녀가 물었다. “비상 선용금인데, 1만8천 달러야. 나머지 2천 달러는 내가 보관하겠다. 선용금 모두를 해적 놈들에게 몽땅 털릴 수야 없지 않나?” 원양항로를 뛰는 배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선주는 얼마간의 비상금을 선장에게 맡기는데, 그 돈의 상당액수를 2항사더러 따로 보관하라는 것이었다. 앞서의 미주를 뛰던 컨테이너선에서는 못 보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선장은 이번 항해에서 해적과의 조우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는 말인가. 결코 반가운 일일 수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선장이 곧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유비무환! 알았냐?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몹쓸 녀석들을 만난 적이 없지만 말이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봉투를 든 채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은닉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배든 마찬가지지만, 항해사 전용 공간이라야 그게 그거 아닌가.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배로 기어 올라온 해적 놈들이 선교를 점령한 상황에서 숨겨둔 선용금을 내놓으라며 총을 들이대기라도 하면 이놈의 봉투 때문에 어떤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비닐봉지에 싼 봉투를 냉장고 동결실 한 귀퉁이에 쑤셔 넣어버렸던 것이다. 항해는 아무래도 순조로울 것 같지 않았다. 출항 임박하여 본사로부터 메시지가 온 게 그 단서였다. 당초의 스케줄에 의하면 다음 기항지는 대만의 타이베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메시지는 당초의 스케줄을 무효로 한 다음, 새로운 스케줄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거 원!” 선장이 또 혀를 끌끌 찼다. 선장은 걸핏하면 혀를 끌끌 찼다. 평생을 바다에서만 살아온 그에게는 무엇이든 만족스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백이나 정력으로만 따진다면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벌써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에 아직도 현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같은 불타는 정열 덕분일 것이다. “이거 원! 우리더러 평생을 남지나해에서 살라는 거야, 뭐야? 올라갔다가 또 내려갔다가!” 수신지를 든 선장의 손등에 힘줄이 시퍼렜다. 본사가 타전한 새 스케줄에 의하면, 대만의 타이베이 대신 중국 광저우 만의 황푸 항으로 선수를 돌릴 것과, 그곳에다 포트 켈랑에서 적재한 화물을 모두 양륙한 다음 다시 지정된 화물을 싣고 재차 남하하여 자바의 자카르타 항으로 직항하라는 것이었다. 어선의 항로는 고기 떼가 결정하지만, 상선의 항로는 해치 속 화물이 결정한다. 따라서 일반 화물선이 화물을 찾아 이 항구 저 항구를 맴도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또 그 일로 태평양을 열두 번 왕복하라한들 무슨 항변을 할 것인가. 특히 남지나해를 주 항로로 하는 오션 글로벌 호 입장에서 보면 이번 항해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선장이 불만을 토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장의 불만은 메시지 끄트머리에 토끼 꼬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다음 문구를 보자 쑥 들어갔다. - ……따라서 금차 항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본사는 별도의 과외수당을 지급할 계획으로 있음. 귀선의 안전항해를 기원함. 마치 상급부대로부터 하달된 작전 명령서와도 같았다. 선장이 수신지를 해도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룸으로 돌아가자 다음에는 해군부사관 출신 1등항해사가 나섰다. “도대체 뭘 갖고 그러시는 거야?” 그러더니 눈을 번쩍 떴다. “뭐? 과외수당이라고?” 그의 견해인즉, 원래부터 월급만 꼬장꼬장 지급해 온 회사가 갑자기 무슨 까닭으로 과외수당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느냐는 것이다. 매번 당해본 경험 끝의 일이지만, 상황이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입을 쓰윽 닦고 마는 게 화물선을 부리는 회사들의 고약한 심보가 아니냐는 것이다. 돈 문제라면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선원들이 거대한 골리앗인 회사를 상대로 꼬치꼬치 대들고 따지는 것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샤일록도 두 손 번쩍 들 구두쇠가 생돈을? 그렇다면 답은 뻔해. 이번에 실을 화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안 그래, 2항사?” 그렇게 그녀에게 동의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해군부사관 출신인 1항사는 원래부터 선주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로 말하자면 참수리 포술장을 하던 하사관 때는 야밤중에 NLL을 넘어 온 북한 경비정을 대파시킨 무공으로 훈장을 받았고, 전역 직전까지는 주력 구축함에서 조타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런 다음에는 복무 중 취득한 해기사 자격증으로 지금의 오션 글로벌 호에 승선하면서 새로운 바다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 세월이 어느덧 5개성상이라던가. 그런데 아쉽게도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선장으로 승진하지 못 하고 있다. 방금 작전명령문을 타전한 선주가 왕년에 함대를 쩡쩡 울려댄 해군제독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승진이 이처럼 지연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흔쾌한 일이 못 된다. 그 이유를 2등항해사인 그녀는 해군부사관 출신의 지나치게 깐깐하고 소심한 탓은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출항하기 전 무심코 침실 문을 열었다가 목격한 일에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있었다. 그 순간 해군부사관 출신은 치약을 묻힌 칫솔로 한창 비닐 바닥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선내를 마음껏 질질 끌고 돌아다니던 슬리퍼 그대로 드나들기를 예사로이 하던 침실 바닥을 칫솔로 박박 문지르다니! 그 순간 느낀 것이 저처럼 결벽성이 지나치니까 대범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깐깐한 소인배로 치부되는 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해군부사관이 내던진 메시지를 다음에는 그녀가 집어 들었다. - ……안전항해를 기원함. 마음에 걸리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해를 앞두고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것은 용기를 북돋우는 격려의 당부이자, 선주로서의 애틋한 바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말라카해협 통항을 앞둔 오션 글로벌 호 입장에서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멀쩡한 사람을 두고 공연히 안색이 나쁘다거나 건강에 유념하라고 곱씹는 것과 같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 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동남아 항로에 투입된 선박 처지에서 남지나해는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외나무다리였다. 말로만 망망대해지, 그곳이야말로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진 막다른 길목이자 악몽의 터널이 분명했다. 정작 들어서고 보면 육지 자락이라곤 눈에 띄지도 않는 광활한 바다가 분명한데도 해도에서 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섬들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항해를 하는 동안이면 브리지 사관들은 말 그대로 오금을 절이고 만다. 거기에다 요 앞 태평양을 뛸 때와는 달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해적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판이다. 해군부사관 출신 말에 의하면 앞 항해에서도 그랬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해적선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괴선박 하나가 몇 시간 동안이나 배 꽁무니를 따라붙고 있어서 그걸 떨쳐내느라 선원 모두가 마치 적의 총공격에 대비한 진지 속 병사들처럼 꼬박 뜬눈으로 밤을 하얗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요행히도 마침 이라크 앞바다의 페르시아 만으로 향하는지 일단의 미국함대가 전투대형으로 길게 줄을 잇고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그 대열로 슬쩍 끼어들었는데, 그 덕분인지 수상한 배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반 상선의 입장에서 말라카해협과 남지나해는 정나미 떨어지는 해적 놈들의 진짜 소굴인 것이었다. 2항사 장혜옥도 오션 글로벌 호가 처한 제반 상황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욱 국내 연근해가 아닌 외항선을 타기로 작정한 이상, 자신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 배만 골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오션 글로벌 호에 승선한 첫날, 자네 역시 무슨 괴상한 병으로 하선할 요량이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라고 한 선장의 말에서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었다. 5 당직근무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 온 2항사 장혜옥은 우선 침대에다 몸부터 털썩 내던졌다. 사지는 나른하였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게 미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육체는 상당 시간의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은 딴판이었다. 알맞은 실내온도와 폭신한 매트의 감촉이 더없이 안온하였건만 쉽게 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있으려니 풀라우 다마르 섬의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에서 맴을 돌았다. 몸을 뒤척이는데 머리맡으로 딱딱한 물체 하나가 손에 잡혔다. 짐을 풀 때 꺼내놓은 <In The Heart of The Sea>라는 두꺼운 책자였다. 오래 전 어느 고래연구가가 미국 포경산업의 본거지이던 낸터키트 섬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에식스라는 포경선이 고래에 받혀 난파하면서 바다에 내던져진 선원들이 겪은 끔찍하면서도 처절한 표류기였다. 처음에는 스무 명의 선원들이 세 척의 보트에 나누어 타고 표류를 시작하였으나 나중 구조되었을 때는 단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토록 표류하였던지 퀭한 얼굴에 피골이 상접한 두 생존자는 구조선이 다가가도 알아보지 못한 채 무언가를 열심히 핥고 있었다. 그게 죽은 동료들의 뼈 조각이었음을 안 사람들은 경악했다. 두 사람은 92일 동안이나 표류를 하는 동안 나중에는 동료들의 인육을 뜯어먹으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전율스럽기 그지없는 그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그녀는 자신도 언젠가는 그 같은 고립무원의 조난자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망념에 푹 빠져 들었다. 지금까지 허다한 조난기를 읽어 보았지만, 그 책만큼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책장을 펼쳤으나 시선은 헛돌기만 하였고,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상념이 머문 곳은 여자인 자신이 어떻게 하여 금단의 영역인 외항선에 승무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후회스러운 생각에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가 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것은 꼭 아버지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권유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아버지는 살아가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고기잡이배를 타기로 하였는데, 그게 그만 평생의 직업으로 굳어진 경우였다. 바다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서는 언제나 상큼한 소금 냄새가 풍겨났다. 특히 먼 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뉴스를 들은 다음이면 그 냄새는 더욱 농도가 짙었다. 높은 파도와 싸우느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바닷물에 찌들어 있었다. - 나도 자격증만 가졌다면 벌써 그놈의 선장이라는 것을 해먹었을 텐데. 동해안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는 채낚기선에서 나중 갑판장까지 한 아버지는 한 잔 술만 들이켜면 잠꼬대처럼 그렇게 한탄하기를 버릇으로 하였다. 그게 그녀로서는 멍에였던가. 어느 날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종자라는 이름으로 수색의 대상이 되었으나 며칠 후 수색선들이 앞 다투어 철수하면서 그만 기억 속에 파묻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중학을 다닐 때부터 그녀는 또래의 다른 여학생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유별나게도 콜럼버스와 마젤란, 그리고 섀클턴 등 숱한 모험가들이 겪었던 모험기가 환영 이상의 실체로 다가와 이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배를 타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양어선을 타고 남태평양과 대서양을 두루 다녀온 사촌오빠로부터 전해들은 외국 항구의 이야기들은 그녀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외국선박에서는 허다한 여자들이 사관으로 승선하여 얼마든지 자신들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고 있다는 대목이 그녀를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귀항하지 않은 아버지의 빈자리는 순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동도 트기 전에 집을 나선 어머니는 어시장에서 마련한 생선을 함지박에 하나 가득 담아서는 머리에 인 채 먼 시골길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 처지에서 대학진학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녀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바다 계통의 대학으로 진학하여 외국선박에서처럼 사관으로 승무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자가 승선 가능한 외국으로 나가는 건 어떨까. 그 같은 궁리는 꼭 바다에 뼈를 묻은 아버지의 한이나 미련 때문일 수는 없었다. 세상은 날로 급변하는데, 한국은 아직도 근대 이전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배에 타면 재수 없다는 말이 아직도 횡행하던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여자가 배에 타면 안 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심지어 어느 고전소설에서는 출항하기에 앞서 용왕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친 다음에야 비로소 돛을 펼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야만 안전항해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도대체 삼면이 바다인 어엿한 해양국이면서, 바다를 공포와 지옥의 세계로만 치부하는 게 이 나라의 오랜 인식이자 관념인 것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96년 가을, 영도에 자리 잡은 한국해양대학이 그 미신을 타파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 여파였던가. 그 3년 후에야 해군사관학교도 여자생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니 영도 대학의 결단은 참으로 선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캠퍼스에는 기숙사까지 마련해 두고 있고, 학비도 전액 국고로 지원하고 있다는 대목은 그녀의 마음을 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보란 듯이 동남아 항로를 뛰고 있는 화물선의 2등항해사로 어엿이 승선해 있는 것이다. 순간, 그녀의 망막 속으로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학 동안 친구 이상의 정을 나누어 온 남학생이었다. 미래의 멋진 해기사답게 매사 적극적이면서 활달하기 그지없는 그의 성격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캠퍼스 부두에 나란히 앉아 우람하기 그지없는 실습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우리도 미구에 저처럼 멋들어진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거라며 얼마나 마음을 부풀렸던가. 그런 그가 졸업 임박하여 스스로 승선을 포기한다고 말했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가 그 이유라고 하였으나 구차한 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귀한 해기사 자격증이 아깝게도 휴지가 되어버렸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련 없는 헤어짐이었고, 그 뒤로 피차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6 망카이 섬에서 변침한 다음에도 바다는 여전히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가 잔잔한 것은 바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귀밑 머리칼을 휘날리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의 항진에 의한 대기의 심술궂은 희롱 때문일 것이다. 남지나해의 뜨거운 열기가 갑판으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한바탕 쏟아진 스콜 덕분에 더위는 한 풀 꺾여 있었다. 때때로 몸통 굵은 날치가 뱃전 물결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열대 해역의 날치는 몸통이 크다. 한껏 날개를 벌리고 허공을 날 때의 몸매는 프로펠러 단발기에 영락없다. 그래서 밤사이 방향을 잘못 잡거나 혹은 된 바람을 이겨내지 못해 잘못 갑판에 떨어진 놈들은 선원들의 더없는 별식이 된다. 배기가스의 열기로 가마솥만큼이나 뜨거운 연돌 속에 잠깐 넣어두는 것으로 날치는 꽁치 맛을 내는 훌륭한 소금구이로 변모하는 것이다. “2항사님, 이거 하나 드실래요?” 미얀마 출신 샌디가 날개도 뜯어내지 않은 갓 구워낸 날치 한 마리를 내민 적이 있었다. “맛있어?” 그 호의가 너무 고마워 그녀가 물었다. “그럼요. 꼭 고등어 맛이거든요.” 거무스레한 피부여서 배시시 웃는 입술 사이의 치아가 더욱 하얗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다던가. 어디에도 천적(天敵)이 보이지 않는데, 날치 떼가 일제히 바닷물을 박차 올라서는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고 있다. 필경 오션 글로벌 호가 일으키고 있는 거대한 물결 때문이리라. 무슨 까닭인지, 돌고래와 판이하면서도 돌핀이라는 같은 이름을 얻어낸 만다이라는 물고기는 날치 떼를 보면 한사코 따라붙는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기운이 소진되어 바닷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날치를 천적인 만다이는 한입에 집어삼키는 것이다. 다음날도 기상은 여전했다. 다만 멀리 아마득한 수평선 낮게 비를 머금은 구름덩이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걱정할 일은 못 되었다. 필경 두어 차례 스콜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것은 끝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녀가 주간당직을 끝낼 시각이었다. 시간은 15시 45분이 되어 있었다. 다음 당직자는 해군부사관 출신이었다. 오랫동안 해군에 몸담아서인지 시간관념이 투철하기가 자명종 시계 그대로였다. 우정 일깨우지 않더라도 자로 잰 듯 정확한 시간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었다. 그걸 보고 그녀는 군대란 사람을 정밀기계로 만드는 공장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미스 장, 수고했어. 가서 쉬도록 하게.” 해군부사관 출신은 2등항해사라는 엄연한 직함을 두고도 장난기 섞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른다. 처음에는 무척 거슬렸다.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건가. 아니면 치밀하게 연출하는 신종 성희롱인가. 하지만 별다른 악의가 엿보이지 않아 그냥 흘려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되어도 통 나타날 기미가 없다. 도대체 정밀기계가 웬일일까. 깊이 잠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해군부사관 출신은 결국 정시를 넘겨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직교대는 정시보다 15분 빨리 이루어진다. 항해일지 정리를 마친 그녀는 결국 계단을 내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했다.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좀 더 세게 두드렸다. 역시 무응답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복도를 꺾어 돌아 살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예기치 못한 목소리를 들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보아 해군부사관 출신이 틀림없었다. “3번 해치야. 거기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방금 해군부사관이 말한 3번 해치에는 포트 켈랑에서 선적한 화물로 가득 차 있다. “조심해. 누구도 알아서는 재미없으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염려 마세요, 하고 동조했다. 의외에도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였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재빨리 조타실로 뛰어 올라갔다. “미스 장, 수고했어.” 정시에서 20분도 더 지나 조타실에 모습을 나타낸 해군부사관 출신이었다. “좀 늦었네.” 멋쩍은 웃음이었다. “괜찮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의아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 3번 해치야. 거기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해군부사관 출신의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 그녀는 포트 켈랑을 출항하기 전 선장이 세 명 항해사 앞에서 메시지를 읽어 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 해군부사관 출신은 ‘틀림없이 이번에 실을 화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안 그래, 2항사?’라고 동의를 구하기까지 했었다. 그걸 놓고 해군부사관 출신은,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화물이던가 아니면 불법적인 화물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마약일까, 금괴일까. 아니면 세상을 발칵 뒤집어엎을 만큼 무시무시한 비밀 병기를 싣기라도 했단 말인가. 적하목록에는 다만 일반잡화로 되어 있는 게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어쨌거나 지금 자신이 승선해 있는 오션 글로벌 호는 본의든 아니든 간에 어떤 알지 못할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항해를 완료하는 대로 과외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본사의 제의를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 순간의 미묘함도 있었다. 7 남지나해를 북상하면서 세 번째로 맞는 새벽 무렵, 방금 수평선을 딛고 솟아오른 보름달이 잔잔한 바다에 은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달을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곳은 고향 마을이라던가. 문득 지금도 여전히 먼 시골 길을 맴돌고 있을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세월의 연륜이 더한 만큼 주름은 깊어지고 손마디는 더욱 거칠어져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판다린 갑을 통과하면서 2등항해사 장혜옥은 침로를 다시 015도로 변침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015도에서 자이로컴퍼스의 오차 수치인 7도를 뺀 008도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항해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배의 조종이 자신의 손끝 하나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벽시계는 정확하게 새벽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는 줄곧 경제속도인 시속 12노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가 10년도 넘은 화물선이 그만한 속력을 갖고 있다면 그건 우량아인 편이었다. 시야 어느 곳에서도 불빛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외로운 항해였다. 따분한 느낌도 들었다. 기지개라도 켜고 싶었다. 문득 읽다 만 난파선 에섹스 호 뒷이야기를 읽는 건 어떨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행위야말로 항해사 본분을 망각한 짓이다. 그녀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고자 하였다. 그 같은 정갈한 근무 자세가 바위섬 풀라우 다마르에서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시오페아 좌는 더욱 고도를 높이고 있었고, 그 무렵부터 선수 좌현 방향으로 아주 낮게 폴라리스(북극성)가 수줍게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북극성은 눈어림으로 대략 10도 가량의 고도를 갖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북극성의 고도는 배의 위도와 일치한다. 천문항법에서는 이를 극성위도법이라 한다. 따라서 굳이 GPS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위도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다. 곧, 방금 변침을 단행한 판다란 곶의 지리상 위도가 정확하게 북위 12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뱃전으로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물결 틈으로 야광충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수많은 생명체로 충만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는 야광충들은 새우나 규조 따위의 플랑크톤이 틀림없었다. 물속 유기물질을 섭취하면서 자라난 플랑크톤은 멸치나 전갱이의 먹이가 되고, 이들 회유성 작은 물고기는 참치나 상어 등 대형어류의 포식 대상이 된다. 이를 사람들은 바다라는 대자연에서 항용 벌어지고 있는 먹이연쇄라 말한다. 결국 바다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신비와 마법의 별천지인 것이다. 스웰이 넘실거리는 수면으로 물속에 잠긴 밤하늘의 별들이 배의 부단한 요동으로 일렁일렁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새벽 네 시 15분 전, 정확하게 해군부사관 출신이 브리지에 나타났다. 어느 새 교대 시간이 된 것이다. 어머님 얼굴을 떠올리고, 에섹스 호 표류자들의 사투에 경악하고, 북극성을 벗 삼고, 그리고 바다라는 대자연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을 마음껏 그려보는 동안 네 시간이라는 고독한 당직근무가 끝이 난 것이다. 이제 브리지는 해군부사관 출신에게로 넘겨졌다. 방으로 돌아 온 그녀는 근무복 차림 그대로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온 몸을 조이고 있던 나사들이 깡그리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현창 너머로 희끗한 플래시 불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환영인가 하였다. 여명까지는 아직도 한참이었다. - 3번 해치야. 거기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문득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에게 은밀히 건네던 해군부사관 출신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떠올랐다. 그 속삭임에 인도네시아 출신은 아무 염려 말라고 응답했었다. 한국 선박을 오래 탄 인도네시아 출신은 한국말을 제법 잘 구사했다. 해군부사관 출신은 자신의 음모에 만만한 인도네시아 출신을 끌어들인 게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알지 못 하는 무슨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뿌리칠 수 없는 궁금증이었다.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복도로 나갔다. 그 시각 복도는 비어 있었다. 백열등 불빛이 흐릿했다. 그녀는 우선 살롱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해군부사관 출신이 인도네시아 출신 3기사 마르코스와 은밀하게 속삭이던 곳이다.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살롱은 비어 있었고, 빈 찻잔 두 개만 뒹굴고 있었다. 그 옆, 상갑판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밤공기는 서늘했고, 곧 동이 트려는지 한쪽 수평선이 희붐해지고 있었다. 문득 얼른거리는 불빛을 보았다. 메인 데크 3번 해치 부근이었고, 불빛은 두 개였다. 그녀는 어둠을 방패삼아 살금살금 브리지로 올라갔다. 양쪽 윙을 살폈으나 역시 예상한 대로 워치 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확신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메인 데크의 불빛은 인도네시아 출신 3기사와 워치 맨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해군부사관 출신이었다. “미스 장, 잠이 오지 않아?” 가슴이 철렁하였으나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워치 맨 보이지 않네요.” 그 말에 해군부사관 출신이 움찔했다. “서드 엔지니어(3기사)와 갑판 순찰을 돌게 했다.” “메인 데크 쪽인가요?” “별거 아냐! 미스 장은 가서 잠이나 자라고.” “안전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려고요?” “매사 자상한 건 좋지만, 너무 지나치면 그건 탈이 될 수도 있어. 그래서 부탁하는데, 내가 하는 일에는 제발 좀 모르는 척 해줘, 응.” 산호해 바위틈에서 곰치를 만난 돌돔 처지였다. 그대로 물러서는 게 상지상책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방으로 돌아왔으나 미심쩍은 생각은 쉽게 털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해군부사관 출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8 장기간의 항해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둘러보면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와 그 바다를 체육관의 돔처럼 뒤덮은 하늘뿐이다. 거기에 마주치는 사람이라야 제한되고 각인된 몇몇 선원들. 무료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해 선원들은 간혹 장난을 친다. 해치 속 화물의 포장을 뜯어낸 다음 갖가지 내용물을 점검하여서는 적당한 메뉴가 발견되면 그것으로 퇴화한 미각을 되살리는 따위의 짓이다. 고급 비스킷이나 냉동 육류가 얻어걸릴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잘 정제된 고급 위스키가 튀어나올 때도 있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화물의 손상이나 분실은 흔한 일이다. 설령 클레임을 거는 화주가 나타나더라도 항행 중 조우한 태풍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걸 문제 삼는 화주는 없다. 해군부사관 출신은 어쩌면 그 같은 유희에 맛을 들인지도 모른다. 그는 때때로 병마개를 딴다. 체스터에 숨겨둔 위스키가 그의 심신을 달래는 데는 그저 그만이다. 서해교전 때 눈앞에서 스러져간 부하 수병들의 얼굴이 얼른거릴 때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임무와 관련한 실수를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방금 두 명의 외국인 선원을 갑판으로 내려 보낸 것일까. 위스키 병이 바닥나서인가. 온갖 잡화로 가득한 화물 뭉치 속에 위스키는 빠지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그건 비도덕적인 일이며, 결단코 칭찬할 일이 못 된다. 더욱 1등항해사로 말하자면 그 같은 행위를 일삼는 선원들을 단속해야 할 최고 책임자가 아닌가. 어쨌거나 제발 엉뚱한 말썽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그녀는 고대했다. 그런데 날이 밝으면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2항사 장혜옥은 갑판으로부터 왁자한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 일곱 시 무렵이었다. 잠자리에 들고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소란은 틀림없이 해군부사관 출신의 해치 수색작전의 결과라고 그녀는 단정했다. 어쩌면 조타실에서 병을 거꾸로 치켜들다가 선장의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그 혼자만의 자유 영역인 방에서라면 모를까, 조타실은 사정이 다르다. 비록 제독 출신은 아니지만, 선주 이상의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완고하기 그지없는 선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창 남지나해 바닷물을 헤치고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야 할 배가 기관을 끈 채 타력만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었다. 그녀는 결국 잠을 포기하고 갑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 배가 멈춘 까닭을 알아냈다. 배 주위로 많은 부유물이 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난파선의 잔해임이 분명했다. 박살 난 널빤지 조각도 보였고, 눈을 시리게 하는 붉은 색깔의 구명재킷도 보였다. 고기잡이에 나선 소형 목선 하나가 거대한 화물선 선체에 정통으로 들이받힌 게 분명했다. 동남아 해역의 고기잡이배는 소형선이 대부분이어서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도 않는다. 주낙 깔기를 마치면 두어 시간 대기를 하게 되는데, 호롱불 하나 밝히지도 않고 배를 띄워둔 채 잠이 든 탓으로 앞길이 바쁘기만 한 일반 상선들의 충돌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 충격 또한 미미하기 그지없어서 대형선들은 알아채지도 못 한다. 그 날 아침의 참극도 그 경우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에도 생존자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침몰선은 도대체 무슨 고기를 잡으려다 변을 당한 것일까.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런 한가한 생각을 했다. 작은 고깃배가 한가로이 낚시를 드리울 만큼 육지는 가깝지 않았다. 지금도 거리를 정확히 외우고 있는데, 그곳은 중국의 하이난다오로부터 적어도 1백마일 이상 떨어진 한바다가 된다. “1항사,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장이었다. 그만한 소란이었으니 선장인들 깨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충돌사고입니다.” 해군부사관 출신의 대답이었다. 잠시 조용하였으나, 이내 선장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배를 세운 거야?”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메이데이라도 수신했나?” “그건……아닙니다.” 그러자 선장이 버럭, 역정을 냈다. “이거 원! 자네는 그렇게도 한가한가?” 다시 항해가 재개되었다. 널브러진 잔해를 피해 배는 반 바퀴나 원을 그렸다. 배가 일으킨 파도가 부유물들을 한곳으로 끌어 모으면서 일렁일렁 그네를 태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배는 드디어 광저우의 황푸 항으로 들어섰다. 고대 적, 상아와 비취 등 진귀한 보물을 탐낸 진시황에 의해 몇 차례나 경략된 중국 남부 지방의 광저우는 청나라 시대에 아편전쟁의 무대가 되었을 만큼 번영과 쇠퇴를 반복한 역사 속의 성도였다. 그게 오늘에 이르러 철강․조선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번창하면서 해외무역의 허브 항으로 떠오른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화물의 종류도 많았을 뿐 아니라 포장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그야말로 해상운송물의 총체적 전시품인 것이었다. 오션 글로벌 호는 그 항구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포트 켈랑에서 선적한 화물 양륙을 끝낸 다음 다시 자카르타로 운송할 새 화물을 받아 싣기까지의 체항 기간이었다. 자카르타로 운송할 화물은 많았다. 다섯 개 해치를 모두 채우고도 화물이 넘쳐 부득이 12피트 중형 컨테이너 한 짝은 갑판에 적재할 수밖에 없었다. 악천후에 대비하여 와이어로프로 튼튼히 고정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화물 적재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웬 일인지 해군부사관 출신이 직접 갑판을 쏘다니며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일이었다. 화물의 적하와 양륙작업은 전적으로 2등항해사 몫이다. 그런데 그는 적하목록과 화물을 꼼꼼히 대조하면서, 미심쩍다 싶으면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 극성까지 떨었다. 좀체 없던 일로, 그렇다고 그를 만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샘플 한두 개로 충분하지 않나?” 시간이 지체된다는 한 가지 이유로 선장이 그렇게 한 차례 제동을 걸었을 뿐이었다. 침실 바닥을 칫솔로 박박 문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지나친 결벽증도 일종의 병이라면, 결과적으로 고질적이라고나 해야 할 1항사의 그 병으로 한 가지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를 붙잡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한창 12피트 컨테이너를 적재하고 있을 때였다. “1항사님, 이놈 좀 보십시오. 허락도 없이 선미갑판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태국 출신 기관원이 중국인 한 명을 1항사 앞으로 끌고 왔다. 1항사 면전에서 사내는 무조건 도망치려고 외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왼쪽 광대뼈를 거쳐 턱밑까지 깊게 납빛 흉터를 가진 인상이 험악한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상처를 입을 때 안구까지 탈이 난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예리한 칼끝으로 길게 내려 그어지지 않은 한 결코 생겨날 수 없는 흉측한 상처였다. “당신 중국인이야?” 1항사가 안전모를 벗으며 서투른 중국말로 물었다. 이마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답 대신 사내는 한사코 1항사로부터 멀어지려고 버둥거렸으나 태국 출신 기관원이 워낙 허리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사내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외국 항에 기항한 화물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보세구역이 된다. 양륙하거나 선적되는 모든 화물은 세관 당국에 의해 철저한 검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불법적인 화물이 되면서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밀수품인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 당해 선박이나 화물과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든 연고를 갖지 않는 한 함부로 선박에 오르내릴 수 없다. “너, 도둑놈이야? 아님 밀항 꾼인가?” 1항사의 아주 단정적인 닦달이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여전히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1항사가 둘러선 선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외국 항구에서 부두에 배를 대고 있을 때면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곳이 차이나라면 더욱 그렇다. 중국은 아직도 자유가 넉넉하지 않다. 봐라, 러시아가 철의 장막을 거둬내고 개방하면서 자유경제 체제로 전환하자 맨 먼저 생겨난 것이 미국처럼 마피아와 약(마약)장수였다. 사회주의 때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가 달라지자마자 사람들 마음이 먼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밀항꾼들이 득시글거린다. 앞으로 이런 놈이 다시 갑판을 어정거릴 때면 우선 네놈들부터 혼 내주겠다!” 서슬 퍼런 1항사의 고함소리에 선원들이 주춤했다. 한 선박의 1등항해사라면 잘못을 저지르는 선원들을 강제 하선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그게 외국인 선원들이 항해사관을 겁내는 이유다. 갱웨이라고 한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면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를 걸쳐두는데, 현문이라고 하는 그곳 갑판에는 반드시 한 사람의 선원이 배치되어 승하선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검문한다. 특히 정박 중인 군함에서는 당직 장교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누구누구 승함!’ 또는 ‘누구누구 하함!’ 등의 구령으로 요란하기 그지없다. 그만큼 갱웨이는 정박선의 가장 중추적인 메인 게이트여서,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배에 오르거나 내릴 수 없게 되어 있다. 허락 없는 승하선은 무단침입으로 간주되어 당장 현지 경찰에 신병을 넘길 수도 있다. 더욱 오션 글로벌 호 1등항해사로 말하자면 오랫동안 엄격한 규정 속의 함상 생활이 몸에 밴 해군부사관 출신이 아닌가. 문제는 한창 화물 선적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별도로 현문당직자를 배치하지 않는 데 있었다. 부두에는 세관원이나 경비원들이 산재해 있고, 선상에서는 작업이 분주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그 같은 상황에서 구태여 당직자를 따로 배치하지 않더라도 몰래 숨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디에든 구멍은 있다. 가령 한창 작업 때의 선미갑판이 좋은 예다. 갑판은 비록 눈코 뜰 새 없이 작업으로 분주해 있지만, 기관원들이 기계를 점검하느라 모두 엔진룸으로 몰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선미갑판은 비어 있기 십상이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뱃전을 기어오를 수 있다. 왼쪽 뺨따귀로 깊은 납빛 상처를 새기고 있는 녀석도 아마 틀림없이 그 허점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 틈에 태국 출신 기관원이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불법 침입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1항사가 선내질서 유지에 그토록 예민한 것은 그 자신이 오래토록 해군부사관으로 함정 생활을 한 덕분일 것이다. 전역하자마자 그가 오션 글로벌 호에 승선하여 처음으로 마닐라 항에 기항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배는 접안 차례가 올 때까지 잠시 내항 한 곳에 닻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선수갑판에 예비해 두고 있던 계류삭 한 코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중에 추정된 일이지만, 좀도둑들이 닻줄을 타고 기어 올라와 방수제이면서 비중도 낮은 폴리에틸렌 계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계류삭을 통째 바닷물로 끌어내린 다음 마치 사행(蛇行)하는 바다뱀처럼 감쪽같이 육지로 끌고 가버렸던 것이다. 1항사가 납빛 상처의 중국인을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그 같은 악몽이 되살아나서였다. “아님, 그럼 공짜로 자카르타에 가려고 했단 말이야!” 그러고 나서도 해군부사관 출신의 닦달은 그치지 않았다. “아닙……니다.” 태국 출신 기관원의 손아귀에 붙들린 사내는 사색이었다. 뱃전 난간까지 밀린 사내가 시선을 문득 부두 쪽으로 보냈다. 그곳에 검은 선 그라스를 낀 또 다른 사내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 녀석과 한 패란 거야?” 그렇잖아도 1항사는 아까부터 부두 가까이에서 내내 선적작업을 훔쳐보고 있던 선 그라스의 사내가 마뜩치 않았다. 그가 적하목록과 화물을 꼼꼼히 대조하는 동안 마피아 조직의 부두목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시종 날선 눈빛으로 갑판을 넘겨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1항사로서는 아직도 포트 켈랑을 출항하기 전 본사로부터 받은 지시문에서 과외수당 어쩌고 하는 대목을 보고, ‘그렇다면 답은 뻔해. 이번에 실을 화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안 그래, 2항사?’라며 의문을 제기했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해군부사관 출신은 결국 수상한 사내의 엉덩이를 자신의 구둣발로 힘껏 내지른 다음 배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그 여파 때문이었을까. 선적작업을 끝내고 출항을 앞둔 저녁 시간에 상륙을 나갔던 해군부사관 출신이 배로 돌아오던 길에 일단의 괴한으로부터 기습 폭행을 당하는 의외의 사고를 당했다. 괴한들은 혼자인 그를 다짜고짜 각목으로 난타한 다음 지갑과 쇼핑 물 등을 챙겨 바람처럼 사라졌는데,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도둑의 짓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만약 그 순간 부두 경비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해도 다행이야.” 선장이 위로하였으나, 1항사는 이빨을 우두둑 갈았다. “바로 그 자식이야!” 오른쪽 어깨에서 팔목까지 칭칭 붕대로 동여맨 해군부사관 출신은 분함을 참지 못 했다. 왼쪽 눈두덩으로 멍 자국이 손바닥만큼이나 번져나 있었고, 뒷머리도 살점이 찢어져 크게 부풀어 오른 판이었다. 아예 죽이기로 작정한 무자비한 폭행에 틀림없었다. “1항사님, 누가 말입니까?” 붕대를 처매면서 2등기관사가 물었다.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한 그는 선내에서 발생하는 웬만한 안전사고 끝의 상처 부위는 제법 완벽하게 처치해 낼 만큼 돌팔이 이상의 봉합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 장궈이란 놈! 색안경을 끼고 12피트 컨테이너 박스를 지키고 있던 놈! 바로 그 마피아가 틀림없어!” “뭐라고요?” 물론 2기사가 그 내막을 알아들을 턱이 없다. 그는 선적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내내 말썽을 부려 온 발전기를 점검하느라 기관실에만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이맛살을 찌푸리며 선장이 듣고 있었다. “틀림없다고요! 나를 공격할 때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로 콧잔등을 가리고 있었지만, 선 그라스를 낀 꼬락서니가 그 자식이 틀림없었다고요! 그 새끼가 컴컴한 부두에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 “그 놈은……화물을 선적하는 동안 한시도 부두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컨테이너 내부를 확인하겠다고 하니까, 이미 세관 검열을 마쳤다면서 한사코 제지했었고요.” 그걸 헛소리라고 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장님, 뭔가 일이 있습니다! 당장 배를 돌려 신고부터 하고 보십시다!” 하지만 선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황푸 항을 떠난 뒤였고, 설령 신고를 해봤자 수사 주체라는 게 그들 패거리인 중국 공안부일 게 뻔 한 만큼 결과는 보나마나가 아니겠느냐는 게 선장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며칠이나 날짜를 까먹게 될 테고…….”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선장의 속내는 달랐다. 한시라도 빨리 닻을 감아올려야 1등항해사의 하선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임 2등항해사도 헤르니안가 뭔가 하는 요상한 병을 핑계로 하선을 실행하지 않았던가. 1항사의 유고는 곧 항해 중단을 의미한다. 기관 부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세 명 항해사 가운데 한 사람만 탈이 나도 정상적 운용은 불가능하다. 전임 2항사의 억지 하선을 경험한 선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2항사 장혜옥은 어쩐지 자카르타 항까지의 항해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9 황푸 항을 뒤로한 오션 글로벌 호는 자이로컴퍼스의 고질적인 오작동조차 수정하지 못한 채 그렇게 엊그제의 침로를 되짚어나가는 역행(逆行) 길에 올랐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가운데 오션 글로벌 호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틀째 한밤중, 오션 글로벌 호는 다시금 남지나해의 서사군도를 좌현으로 두고 지나쳤다. 침로는 적어도 사흘 동안은 정남(正南) 방향을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 동안 몇 차례 쏟아진 스콜을 제외한다면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콜이 그치면 하늘은 더욱 청명해졌고, 날치 몸통도 자꾸만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눅눅해지더니 급기야 안개가 번져나기 시작했다. 짙은 해무(海霧)였다. 연안도 아닌 한바다에서 안개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2항사 장혜옥은 레이더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도 풀라우 다마르에서의 악몽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독하군. 이것도 다 지구온난화 때문인가?” 선장은 깊이 잠들지 못 했다. 오랜 해상생활로 긴장감이 체질화된 탓인지, 한밤중이면 느닷없이 조타실로 나타나서는 바람이나 기압 등, 배를 에워싸고 있는 대기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선장의 견해는 그녀로서도 공감이었다. 지구온난화는 특히 바다 환경을 급변시키는 주범이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세렝게티 국립공원에다 생명력을 부여하는 우기처럼 자주자주 스콜이 쏟아지는 것도, 북회귀선 해역에서 편서풍이 기세를 누그러뜨린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리핀 동해의 적도 해역에서 태풍발생의 빈도가 부쩍 증가한 것도 모두가 지구온난화에 근거한 게 틀림없다는 게 기상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꽁꽁 얼어붙은 베링 해의 만년빙도 허물어지면서 유럽으로 가는 최단코스가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나오는 판국이다. 이를 반갑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구의 종말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지금인 것이다. 마스트 꼭대기에 매달린 항해등 주위를 안개가 칭칭 휘감고 있었다. 안개는 쉬이 걷힐 것 같지 않았다. “2항사, 들어가 눈 좀 붙이게.” 선장의 배려였다. 선장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부상을 당하여 침실에 처박힌 1항사 때문에 2등항해사인 그녀의 당직 몫이 배로 증가한 사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선장님.” 말은 그렇게 하였어도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쪽 수평선이 희멀개질 무렵에는 두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면서 버티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여자라고 해서 동정의 대상이 되는 건 싫었다. 대학 시절 본 어느 영화에서 강건한 체력의 남자들 사이에 끼인 어느 여자군인 하나가 인간 능력의 한계를 훨씬 초월하는 특수훈련 과정을 훌륭히 극복해내면서 나중 뛰어난 지휘관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보았다. 그 드라마가 그녀에게는 한 권의 교과서였다. 어차피 남자세계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정신무장은 물론 신체적 강건함까지 갖추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거기에 모자라는 것은 오로지 인내심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10킬로미터 왕복주영에도 기꺼이 참가하였고, 거기에 서너 가지 호신술 연마에도 소홀하지 않았었다. “자네를 만난 건 나로서 행운이야.” 브리지 앞 유리창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에게 선장이 새삼스러운 말을 꺼냈다. 처음 포트 켈랑에서 승선신고를 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만 목구멍으로 무엇이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평생 자네만큼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은 보지 못 했네.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처음에는 얼마나 견뎌낼까 했었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단 말이다.” 마치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번 항해를 마치는 대로 그만 배를 내릴까도 싶네. 힘도 의욕도 예전 같지 않아.” 선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전에 듣지 못한 자조 섞인 말이었다. “그래서…… 자네를 후임으로 추천하려고 하네.” 그만 가슴이 고동을 쳤다. 얼마나 고대하고 바라던 말인가.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과연 내가 선장 직을 무난하게 수행해낼 수 있을까. 폭풍우 속에서 배를 안전하게 운용하는 것만이 선장에게 주어진 책무의 전부는 아니다. 상상 이상의 거대한 파도를 만나면 키 조작 하나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념이다. 아니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만큼 키가 움직여 줄까. 순간적이지만, 공연한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더구나 배에는 그녀보다 오랜 경력의 해군부사관 출신이 있다. 그녀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완강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사흘째는 산호초 무더기인 남사군도를 멀찌감치 비켜갔다.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시야를 가로막은 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남사군도는 원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등 주변 국가가 아주 적절하게 분할, 점유해 온 광활한 산호 군도다. 지금도 산호가 무럭무럭 자라나 섬 숫자가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그 산호초 일대로 석유와 가스 등 엄청난 양의 해저자원이 부존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어느 날, 중국은 소총을 든 인민군 병사 몇 명을 목까지 차오르는 산호초 위에다 세워 놓고, 구(舊) 소련으로부터 사들인 뤼다 급 구축함 서너 척을 주변에 띄워놓은 가운데 서둘러 시멘트를 퍼부어댔다. 작업은 밤낮 가리지 않고 두어 달 가량 계속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을 만큼 큰 인공섬 하나가 축조되어 있었다. 중국은 그 섬에다 소 하이난다오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놓고 아예 군인들을 상주시킨 채 안방살림을 차렸다. 놀란 주변국들이 함정을 출동시켜 시위를 벌였으나 거대한 중국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게 바로 대륙 국가이던 중국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해군본부가 펴낸 《동북아 3개국 해양력 비교》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었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마오쩌둥 시대가 아니었다. 미국의 절대적 통제 하에 있던 태평양마저도 넘겨다보는 신생 해양국가로 거듭난 것이었다. 댜오위다오(조어도)만 하더라도 그 실체는 분명해진다. 마오쩌둥은 ‘그 섬은 원래 우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리 해군력이 일본을 능가할 때가 곧 그 시기가 된다.’라고 사태해결의 시기를 먼 미래로 미루었다. 마오쩌둥의 그 말이야말로 미래 어느 날 일본과의 한 판 대결을 전제한 예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핵 항모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그 옛날 마오쩌둥의 말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10 항푸 항을 출항하고 나흘째, 오션 글로벌 호는 이제 태양의 열기가 이글거리는 열대해역으로 들어서 있었다. 보르네오 섬의 중허리쯤인데, 그 외곽으로 남 베사르 섬의 부속 도서가 올망졸망 널려 있어서 공연히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그 해역에서 모처럼 안개가 걷혔다. 항해등 불빛 속으로 몇 마리 도둑갈매기들의 날갯짓이 보이더니 얼마 안 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언제나 바다에서만 맴도는 해조들이었다. 짙은 안개로 며칠 동안 먹이를 찾아내지 못해 굶주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 오션 글로벌 호가 남기고 있는 하얀 물거품의 항적을 보고 고기잡이에 나선 배로 오인하였을 수도 있다. 예망작업을 끝낸 트롤선이 그물을 선미 가까이로 끌어당기면 틀림없이 무수한 바닷새가 떼를 지어 몰려드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틀렸다. 아무리 따라붙어도 양망의 낌새가 없자 그만 따라붙기를 포기한 것이었다. “이상 없습니다.” 조타실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 3항사가 경례를 붙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가. 가만 보니 얼굴이 꺼칠해져 있었고 윗입술 한쪽으로 물집이 허옇게 잡혀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몸져누운 선배(1항사)의 몫을 나누어 감당하느라 피곤이 겹친 게 틀림없었다. “가서 푹 좀 쉬기나 해.” 그게 그녀가 건네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었다. “2항사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웬일인지 3항사는 전과 달리 얼른 조타실을 뛰쳐나가지 않았다. 긴장의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어?” 그녀는 항푸 항 부두에서 도둑의 습격을 받은 1항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였다. 그 동안 해군부사관 출신은 침실에만 처박혀 있었다. 조타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황푸 항을 떠난 지 사흘째가 되는 어제 저녁때였다. 부스스한 얼굴이 영락없는 환자였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쪽 팔을 온통 붕대로 동여매고 있으니 민망할 수밖에는 없다. 어쩐지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간간히 팔꿈치를 꼼지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상박골 어디가 크게 결딴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3항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2항사님, 레이더 말인데요……아무래도 이상하더란 말입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잠시 조타실엘 들렀었다. 간밤의 일이 꺼림칙해서였다. 야간당직 중 아직도 안개가 스멀거리고 있을 때여서 간간이 레이더를 지켜보았는데, 수상한 물체 하나가 후방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15마일 가량 되는 거리에서였다. 휑한 바다에 수상한 물체라면 배밖에 없다. 고기잡이배일 수도 있고, 항로가 다른 여객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스코프에 잡히다가 때로는 사라지는 게 여간 미심쩍지 않았다.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괴선박은 황푸 항을 떠난 직후부터 내내 뒤쫓아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틀리지 않다면 이거야말로 원양작전이자 대양작전에 나선 해적선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체가 해적선이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든 것도 그 때였다. 해적선이라고 무작정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놈들도 어떤 식으로든 그럴 듯한 정보망을 확보하고 있어서, 가령 어느 배가 무슨 종류의 화물을 싣고 있으며, 그리고 어디를 목적항으로 삼고 있는가 하는 따위의 정보는 갖고 있을 것이다. 어렵사리 배 하나를 장악하였는데, 해치를 열고 보니 겨우 석탄이나 철광석 따위만 싣고 있다면 놈들로서도 망연자실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물 내용물을 알아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선적작업 중인 부두를 어슬렁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낟알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면 패거리 중 한 녀석을 부두노무자로 가장시켜 투입시키는 것도 한 가지 훌륭한 방법이 되고, 처음부터 아예 세관원을 구워삶는 것도 좋은 계책일 수 있다. 세관원 치고 밀수에 가담하지 않은 작자는 보지 못 했다. 해적들은 그렇게 치밀하게 정보를 얻어낸 다음 고가의 화물을 실은 배 하나를 지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3항사에게 레이더를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2항사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선미 쪽으로 계속……방향과 거리에 변화가 없는 것도 그렇고요. 지금도 그래요.” 순간 그녀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3항사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그런데 마침 선장님이 조타실로 나오시기에 보고를 드렸더니 일언지하로 무시해버렸어요. 선장님, 선미 쪽에 수상한 배 하나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고 드렸더니 짜증을 내시면서, 여기는 공해상이야, 바다에 배가 떠다니는 게 이상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그만 입을 꽉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가서 좀 쉬기나 해.” 그녀는 즉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그대로였다. 선미 후방 15마일 거리에 물체 하나가 포착되고 있었다. 레이더 스코프에서 움직이는 두 물체의 방향과 거리에 변화가 없다면 두 배는 똑같은 침로에 똑같은 속력으로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물표의 방위는 변함이 없는데, 피차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본선을 추월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보아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신경이 곤두섰다. 보르네오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해역은 오래 전부터 해적출몰로 잦은 높은 곳이다.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본부를 둔 IMO(국제해사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해적으로 인한 선박 피해가 매년 100건을 상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변국이 많다보니 도대체 해적 놈들의 정체를 분간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동남아 해적들은 근래 들어 기승을 부리는 소말리아 해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역사도 오래된다. 중세기 적 이슬람 전제군주의 최고 권위자이던 술탄 시대부터 필리핀의 루손과 민다나오와 비사야 등지를 근거지로 기세를 떨친 이래, 나중에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시키기까지 한 천하무적의 조직적인 집단이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얼마 전에는 정박 중인 해군함정까지 습격하여 갑판에 장착하고 있던 51밀리 함포를 통째 뜯어간 경우도 있었다. 함대라면 모를까, 단독으로 출동한 전투함도 겁내지 않는 판국이다. 도대체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피해를 입은 당사국도 감을 잡지 못 하는 형편인 것이다. 해적이라면 조우(遭遇)하는 것부터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한 번 목표물로 찍히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아무런 방어무기를 갖지 못한 일반선 처지에서 총을 난사해대며 공격해 오는 해적과 대적하는 것은 파멸일 수밖에 없다. 선박이나 화물도 문제지만, 당장 승조원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도 더 우습게 여기는 놈들 아닌가. 그런 다음에는 선박을 통째 몰고 달아나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어느 항구에서는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버젓이 선명까지 바꾼 실종 선박을 찾아낸 적도 있는 판국인 것이다. 정체불명의 물체는 다시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도 일렀다. 11 다음 날 새벽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가 헐떡거리며 브리지로 달려왔다. “2항사님, 이걸 좀 보십시오.” 그의 손에는 손톱만한 단자 조각 하나가 들리어 있었다. “그게 뭔데?”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글쎄 말입니다.” 모르기는 마르코스도 마찬가지였다. 메인 엔진 거대한 실린더가 방아를 찧어대는 것만 지켜보았지, 이 같은 정체불명의 게딱지는 처음인 것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그녀가 물었다. “선미갑판에서요.” 마르코스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새벽께 하복부가 뻑뻑해진 그는 눈을 떴다. 당장 오줌통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방광이 부풀어 오른 때문이었다. 그는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게 아쉬워 애써 눈을 깜박이며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압박감이 증대되기만 하여 그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모포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단을 더듬어 선미갑판으로 올라갔는데, 웬일인지 시야가 전 같지 않게 지나치게 어둡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하다 싶어 얼굴을 들고 보니 언제나 갑판을 알맞게 밝히고 있던, 야간항해 중이면 반드시 밝혀져 있어야 하는 선미 백등이 꺼져 있더라는 것이다. 흐릿하지만 적어도 5마일 범위의 광달거리를 가진 그 불빛으로 타 선박은 이쪽의 진로 방향을 알아내면서 충돌을 예방하는 안전조치를 강구하게 하는 항해등의 하나였다. 그는 방광을 짜내면서 전구가 나간 때문이라 판단하고 즉시 예비품으로 갈아 끼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약 그가 기관사가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예사롭게 넘겨버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곧 창고에서 예비품을 찾아내어 다시 선미갑판으로 올라갔다. 선미등은 세 길 높이의 작은 마스트 꼭대기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기관실 지붕을 거쳐 원숭이처럼 마스트를 타고 올라가 덮개를 연 다음 필라멘트가 끊어진 스크루 식 전구를 돌려 빼낸 다음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그러자 불이 들어오면서 선미갑판이 환해졌다. 다시 마스트를 내려오는데 문득 발끝에서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갑판을 내려다보았더니 손톱 크기만 한 요상한 물건이 하나 굴러 떨어져 있었다. 도대체 기둥뿐인 밋밋한 마스트에서 떨어져나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게 손톱만큼 한 칩이었고, 마르코스는 그 요상한 물건을 당직 중인 2항사에게로 갖고 온 것이었다. “어디 좀 보자.” 마르코스로부터 받아든 그 요상한 물건을 그녀는 자세히 관찰했다. 아마도 거칠고 투박한 남자와 달리 여자들만이 갖는 천부의 섬세함과 예민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글쎄 이게 뭐지?”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암튼 수고했다.” 마르코스를 돌려보낸 그녀는 그 요상한 물건을 상의 포켓에 집어넣은 다음 날이 밝는 대로 통신장에게 그 정체를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물건을 본 통신장이 의외의 말을 했다. “이건……칩의 일종이군요. 크기는 작지만 고도의 성능을 가진 송신기 같은 거죠.” 그러면서 통신장은 꽤 멀리까지 전파를 송신할 수 있는 위치 추적장치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럴까요?” 순간 그녀는 황푸 항 부두에서 한창 화물 적재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선미갑판을 서성거리다 붙들린 납빛 흉터의 중국인 사내를 기억해냈다. 바로 그 사내가 이 요상한 칩을 몰래 갖다 붙인 게로구나. 그렇다면 지금 선미 방향 15마일 거리에서 꼼지락거리는 괴선박이야말로 이 요상한 물건이 발사하는 전파를 수신하며 아주 쉽게 오션 글로벌 호의 항적을 따라붙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희귀동물의 생태적 활동을 추적 연구하는 동물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추론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얼른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추론이 옳다면 이거야말로 당장 선장에게 보고하여야 할 중대 사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선장이 쉽게 납득하고 수긍할까. “수고 많네, 미스 장.” 그 때 1등항해사가 조타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만큼은 너무 반가웠다. 1항사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주자주 브리지로 올라와 해도를 들여다보며 자카르타까지의 남은 항정을 재보는 일이 그의 유일한 일과일 정도였다. 그런 다음이면 반드시, 아직도 사흘이나 더 가야 돼? 그렇게 혼잣소리로 웅얼거리곤 하였다. 그가 바람은 오로지 한시라도 빨리 목적 항에 도착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채 닻을 던져 넣기도 전에 첨버덩 물로 뛰어들어 병원으로 달려갈 요량이었다. 그래서 선장에 대한 존경심이나 외경감도 일찌감치 달아나 있었다. 저놈의 영감탱이가 나를 죽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악을 쓰기도 여러 번이었으니 말이었다. 1항사는 여느 때처럼 해도실부터 들렀다. 아까처럼 자카르타까지의 잔여 항정을 재보기 위해서였다. “제기랄, 아직도 사흘이나 남았네.” 또 투덜댔다. “어? 국장(배에서의 통칭)이 웬 일이야?” 그 때야 1항사는 조타실 한 귀퉁이에 서 있던 통신장을 알아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해군부사관 출신은 눈치가 빨랐다. 통신장이 조타실에 나타나는 건 반드시 수신한 메시지가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었다. “1항사님, 이것 좀 보세요.”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칩을 꺼냈다. “선미 마스트에서 마르코스 군이 찾아낸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 1항사가 두 눈을 홉뜨면서 소리쳤다. 그는 금세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맞다! 바로 그 자식이야!” 버럭 소리쳤다. 그 바람에 조타실 바닥이 삐걱거렸다. 그녀로부터 칩을 받아든 1항사가 통신장을 가까이 불렀다. “국장, 당장 리시버로 수신 체크를 해 봐요. 이놈이 요상한 전파를 발사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잡힐 거 아뇨?” 1항사의 판단을 옳았다. “알았습니다.” 통신장이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통신실로 뛰어든 통신장이 헤드 리시버를 끼고 수신기의 다이얼을 찬찬히 돌리기 시작했다. 다이얼 바늘이 주파수 눈금을 치훑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시버로 크고 작은 갖가지 사운드가 들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얼 바늘이 1,300케이시에 이르자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 한 모스부호가 흘러나왔다. 통신장이 흘러나오는 문자부호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 TTWS308, TTWS308……. 수신기를 끌 여유도 없이 통신장은 조타실로 뛰어 올라갔다. “이겁니다. 이 괴상한 문자가 잡혔습니다.” 헐떡거리며 통신장이 메모지를 내밀었다. “맞다! 놈들 수작이다! 이 요상한 콜사인을 따라 줄곧 우리 배를 추적해 온 거야!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게 1항사의 판단이었다. “선장님께 보고 드려야지요?” 2항사가 물었다. 그게 순서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1항사는 단호했다. “그런다고 캡틴께서 수긍할까? 절대로 아니지! 이거 원, 무슨 쓸데없는 걱정인가! 그렇게 뭉개버리고 말 텐데. 그만하면 캡틴의 성격을 알고도 남지 않아?” 일언지하로 묵살한 다음 1항사가 느닷없이 갑판장을 호출했다. 눈을 부비며 조타실로 들어서는 갑판장에게 1항사가 말했다. “갑판장, 물에 띄울 거 하나 갖고 와.” 갑판장은 얼른 분간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물에 띄울 거니까요. 아무 거나 뜨는 거면 됩니다.” 2항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갑판장이 곧 플라스틱 제 부이 한 개를 갖고 왔다. “맞다, 바로 이거다. 이걸 반창고 같은 걸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매달도록 해!” 1항사는 거침이 없었다. “네.” 땀을 뻘뻘 흘리며 갑판장이 부이에다 칩을 꽁꽁 동여맸다. “됐다! 그걸 바다에 던져 넣어!” “네.” 그렇게 부이는 내던져졌다. “잘 부탁한다.” 배 꽁무니 쪽으로 멀리 떠내려가는 부이를 향해 1항사는 손 키스까지 해 보였다. 해군부사관 출신의 조치는 옳았다. 칩이 부착된 부표는 지금의 위치에서 출렁거리고 있을 테고, 시간이 흐를수록 배와의 거리도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면 놈들은 자신들이 추적하고자 하는 오션 글로벌 호가 아닌, 적어도 한참 동안은 남지나해의 거친 물결에 희롱당하고 있을 부표를 따라잡는 엉뚱한 짓거리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것이다. 1항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놈들을 교란시킬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침로를 변경하는 일이었다. 변침은 배를 원래의 항로를 벗어나게 만든다. 만약 놈들이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만으로도 놈들을 따돌리는 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마침 남 베사르 군도를 통과한 참이어서 인근에는 어느 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배는 운신의 폭이 넓어 있었다. “좌현 30도로 서너 시간이면 충분할 거야.” 1항사의 견해였다. 그녀도 물론 동의했다. 물론 침로의 설정이나 변경은 전적으로 선장의 책임이자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1항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중 문제가 생기면 이건 모두 내 책임이다.” 1항사의 결심은 확고했다. 1항사의 견해를 수용하여 침로는 곧 30도 좌현으로 돌아갔다. 배는 이제 전혀 엉뚱한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차피 난 이번으로 항해는 끝이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게 해군부사관 출신인 1등항해사의 자조 섞인 혼잣소리였다. 12 며칠 전부터 선장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자주자주 밭은기침을 하는가 하면, 오한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제는 두 끼니 식사도 걸렀다. 나이를 고려한다면 흔한 몸살 정도로 가볍게 넘길 일도 아니었다. 그저께는 이번 항해를 마치는 대로 하선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선장의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꿈꾼다. 경제적인 여유만 있다면 무럭무럭 커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가정이란 인간만사의 가장 기본적 토대이자 울타리가 아닌가. 고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선장은 그게 아쉬울지도 모른다. 회고해 보면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의 대부분을 가정을 떠나 오로지 황량하고 건조하기만한 바다에서 흘려보낸 셈이다. 서글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 갑자기 선장의 서글픈 모습만 떠오르는 것일까. 선장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일까. 갑자기 어느 날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상큼한 소금 냄새도 풍겼다. 특히 먼 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뉴스를 들은 다음의 바로 그 농도 짙은 냄새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바닷물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장은 달랐다. 소금 냄새는커녕 퀴퀴한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선장은 그렇게 깔끔했다. 오징어 채낚기선에서 갑판장을 한 아버지와는 달리 바닷물을 뒤집어쓸 일도 없고, 하루 종일 해풍으로 눅눅해진 피부도 매일처럼 잠들기 전 캡틴 룸에 딸린 샤워실에서 반드시 깔끔하게 씻어낸 덕분일 것이다. - 나도 자격증만 가졌다면 벌써 그놈의 선장이라는 것을 해먹었을 텐데. 한 잔 술만 들이켜면 아버지는 잠꼬대처럼 언제나 그렇게 한탄하기를 버릇으로 했었다. 하지만 선장은 그 같은 사사로운 한탄을 늘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미완의 꿈이 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혼자 간직하고 있던 내밀한 이야기를 토로하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인 것이다. 하지만 선장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내의 모습이나 성격은 어떠하며, 슬하에 자식은 몇 명이나 되며, 또 틀림없이 장성하여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자식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입을 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장은 그녀에게 선배가 된다. 선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선장 역시 영도의 아치 섬을 통째 캠퍼스로 점령한 해양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졸업한 그 해부터 배를 탔다. 그 햇수가 어언 35년이나 된다. 선장이 대학을 다닐 때는 물론 여자가 없었다. 그녀가 비로소 첫 입학생이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당연히 궁금한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장은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는 성격 탓일까. 그 문제라면 앞전의 미주를 왕복하던 컨테이너선 선장과 확연히 달랐다. 태평양은 넓다. 태평양을 건너는 보름여 동안 섬 조각 하나도 구경할 수 없다. 중간에 하와이제도가 올망졸망 늘어서 있지만, 대권항법으로 북위 40도를 거슬러 가는 관계로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다. 세계의 바다를 통틀어 미주를 왕복하는 태평양 항로야말로 망망대해를 실감케 하는 유일한 곳이다. 그럴 때면 앞전의 컨테이너선 선장은 무료함을 주체하지 못해 심야당직자인 그녀와 함께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아직 쉰 살도 안 된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그 선장은 특히 영도 아치 섬에 자리 잡은 자신의 모교가 가장 먼저 여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데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게 한국이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의 하나라고 역설하기까지 했다. - 이거 원, 하필이면 여자 항해사라니! 물론 그 같은 푸념을 늘어놓은 적도 없다. 한 번은 아내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 선장 말에 의하면, 아내가 된 여자는 순전히 마도로스의 멋진 제복에 반해 먼저 접근해 왔다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였는데 그녀는, 나는 마도로스 아내가 되는 게 꿈이에요, 그러더라는 것이다. 연신 허허 하고 헤프게 웃어대던 그 선장의 표현에 따르면, 제법 얼굴이 반반한 편이어서 싫지는 않았는데, 지금 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조금 모자라는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미주를 왕복하는 배를 탄 덕분에 두 달이면 반드시 집엘 들르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주칠 적마다 조금 모자라는 여자라는 생각만 들어 이제는 자꾸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 같다는 말도 했다. 선장은 또 허허 웃고 나서, 만약 자신이 지금처럼 마도로스를 꿈꾸는 여자와 함께 대학을 다니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와 결혼하고 말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잡다한 선장 이야기는 날이 희붐해서야 겨우 끝났었다. 2항사 장혜옥의 소망은 우선 단 한 가지였다.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임무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게 국내 최초의 여자항해사가 된 그녀의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버텨 왔다. 다음 날 오후 두 시, 당직을 교대하면서 그녀는 다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그것은 시계 초침보다도 더 정확하게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녀는 안도했다. 스코프 어디에도 괴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선장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부표를 내던지고 침로를 바꾼 덕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낮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해적 놈들은 마치 아군의 진지를 공략하는 적군들처럼 오로지 야밤만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안도는 길게 가지 못 했다. 그 날 자정께, 교대시간이어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조타실로 들어서자 레이더를 들여다보고 난 3항사가 보고했다. “2항사님, 이것 좀 보세요.” 그만 머리끝이 곤두섰다. 이제 레이더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났다.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그렇게 소리치고도 싶었다. 이럴 때는 선장처럼 대범해졌으면 싶었다. 자네는 그렇게도 한가한가? 여긴 바다야! 바다니까 배가 있는 건 당연하지! 그렇게 흉내 내고도 싶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변한다더니, 이렇게 사람이 표변하는가도 싶었다.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른 다음 스코프에 시선을 박았다. 3항사가 잘못 볼 리 없었다. 어제와 똑같은 거리를 두고 밤하늘의 1등성처럼 물표는 명멸하고 있었다. 물표 크기로 미루어 대형선은 아니었다. 해적선이 클 필요는 없다. 기관총과 자동로켓포로 무장하고, 속력을 높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도 미확인 물체일 뿐이다. 다만 저 수상하고 확인 불가능한 물체가 잔혹하고 야만적인 해적선이 아니기만 빌고 또 빌 뿐이었다. 배는 은은한 진동을 남기며 꾸준히 항진하고 있었다. 페가수스 좌가 머리 꼭대기로 올려다보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천마(天馬)로 불리는 별자리다. 천공(天空)의 적도(赤道)에 걸려 있으니까 지구상 적도인 보르네오 섬 인근에서 머리 꼭대기로 보이는 건 당연하다. 오늘따라 삼태성(三台星)이 더욱 명료했다. 배는 이제 보르네오 섬의 남서쪽 카리마타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사방이 어지러운 산호해였다. 따라서 마음껏 침로를 회피할 만큼 여유롭지 못 하다. 그녀는 언뜻 시간을 읽었다. 02시 50분. 세상이 깊이 잠든 한밤중이다. 다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싱가포르 해협을 통항하고 남지나해로 진입한 날 한밤중, 만약 그녀가 레이더부터 확인하였더라면 등대 고장으로 불이 꺼진 풀라우 다마르에 접근하는 아찔한 사고는 얼마든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더야말로 항해사에게는 둘도 없는 벗이자, 자신감을 부여하는 반려자인 것이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수상한 물체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처음의 15마일이 지금은 10마일로 좁혀져 있었다.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5마일 이상 단축된 셈이다. 대형선이라면 얼마든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쾌속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10여 분이 지났다. - 8마일! 그 잠깐 사이에 2마일이나 좁혀졌다. 속력이 20노트에 상당하는 쾌속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실리콘 칩을 물에 띄워 괴선박을 교란시키고자 한 일도, 그리고 서너 시간이나 변침을 가하여 위치를 속인 일도 모두 헛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놈들 역시 고성능 레이더를 갖추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 이쪽의 교란 행위를 금세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은 이제 너무도 분명해져 있었다. 선미 쪽 괴물체는 황푸 항을 출항할 순간부터 미행에 나선 게 틀림없었다. 그게 옳다면 놈들은 지금 오션 글로벌 호가 선적하고 있는 화물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파악을 끝내고 있을 것이다. 놈들은 어쩌면 갑판에 적재하고 있는 컨테이너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상한 배는 그 정보를 넘겨받았음에 틀림없다. 황푸 부두에서 선적 화물을 꼼꼼히 체크하던 1항사의 모습도 떠올랐다. 점점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야릇한 전율이 그녀의 육체를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브리지 윙으로 나가 후방을 응시했다. 시야는 여전히 캄캄 칠흑 속이었다. 그래서 별들이 더욱 명료해 보였다. 선수 방향으로 남십자성인 크럭스(Crux) 좌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장담컨대, 후방의 괴물체도 지금 남십자성을 향해 쾌속으로 바닷물을 가르고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항해등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레이더를 확인했다. - 7마일! 이제는 항해등이 초인될 때도 되었다. 그런데 어둠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더로는 확인이 되는데, 항해등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불을 밝히지 않은 개 틀림없다. 그 사이 괴선박은 5마일 거리로 접근해 있었다. 그 때서야 쌍안경으로 제법 명료하게 괴선박의 형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아무런 불빛도 내비치지 않은 20톤이나 될까 한 소형선이었다. 이제는 더 망설일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선장에게 보고해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위기에 봉착한 때의 모든 지휘는 선장 몫이다. 깊이 잠든 승조원들을 깨우는 일도, 그리고 일제히 비상체제로 돌입시키는 일도 모두 선장의 지휘명령권에 속한다.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동남아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된 선원들이지만, 해적의 목표물이 되기로는 똑같은 처지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삐이- 인터폰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선장님, 2등항해사입니다. 곧 브리지로 올라 오셔야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목소리가 까칠까칠했다. 기침 소리도 섞여 있었다. “수상한 물체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선장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가장 신뢰하는 항해사의 보고여서일 것이다. “수상한 물체라고? 언제부터지?” 조타실로 올라온 선장이 물었다. “한 시간 전부터입니다.” 한 시간 전이면 상대선과 15마일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불과 몇 마일로 좁혀져 있다! 괴선박이 갑자기 속력을 높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똑바로 오션 글로벌 호를 향해 내달아왔다. 놈들은, 지금이야말로 공격의 기회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추적용 칩의 존재가 발각되면서 오히려 역이용당한 다음의 일이다. 놈들로서도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그렇더라도 왜 하필이면 운신의 폭이 좁은 카리마타 해협에서인가. 바로 이 부근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들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란 말인가. 술탄 시대 때는 본거지가 필리핀의 루손과 민다나오와 비사야 등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시대가 바뀐 오늘 날에 이르러서까지 놈들이 그 섬 일대를 고수할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어느 배든 공격하기 만만하고, 약탈할 화물이 가득 실려 있는 한 목표물로 손색이 없을 게 아닌가. 선장 역시 머뭇거리지 않았다. 빼내 든 선내 마이크로 소리쳤다. “전 선원, 비상!” 그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선실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이쪽의 움직임을 해적에게 미리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선장의 명령에 깊이 잠들었던 배가 깨어났다. 해군부사관 출신과 3항사가 조타실로 뛰어 올라왔다. 갑판장도 통신장도 빠지지 않았다. 상갑판에서는 갑판장 얼굴도 보였다. 안색이 모두 납빛이었다. 심야에 비상이 걸렸으니 정신이 혼미해질 건 당연한 일이다. 항행 중의 비상벨 소리는 누구에게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선내에서 휘파람을 불어서도 안 되고, 언성을 높여서도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느 배에서나 정숙을 미덕으로 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메이데이를 타전합니까?” 1항사였다. 완전 해군 식이었다. “구조요청도 하고, 본사에 보고도 해.” 그 일이야말로 자신이 수행해야 한다고 믿은 통신장이 별도의 지시도 받지 않은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것으로 해적과의 조우는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다. 모든 것은 분명해 있었다. 하지만 조난신호를 발사한다고 해서 그 효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을 가상하여 경비정이나 군함이 따라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과는 달리, 대양을 항행하는 모든 배들을 호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의 모든 배들은 오로지 자선 혼자서만 외로운 항해를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 설령 긴급히 구조 요청을 타전하더라도 구조대가 도착할 때쯤이면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다. 13 “전 선원, 부서 배치!” 마치 군사작전 그대로였다. 해적선은 이제 우현 1마일 거리로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총성이 들릴지 모른다. 외국인 선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부산항을 출항하고 동지나해를 남하하는 동안 해군부사관 출신이 주도하여 꼭 한 번 비상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조타수는 키를 잡고 있었고, 3항사는 엔진 텔레그래프에 바짝 붙어 있었다. “물대포!” 1항사가 소리쳤다. 갑판 양현으로 길게 배관되고 있는 해수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찬 물줄기를 말한다. 물줄기가 제법이어서 뱃전을 기어오르는 놈들을 향해 정통으로 쏘아 맞히면 나가떨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시적인 퇴치 방법은 될지 몰라도 격멸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기 꼴이다. 갑판장이 앞장 선 가운데 외국인 선원들이 부지런히 호스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기관 전속!” 선장은 몇 번이나 같은 명령을 되풀이했다. 배는 물론 진작부터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1만 톤급 대형 화물선이 낼 수 있는 속력이라야 뻔 하지 않은가. 해적선은 그 사이에 반마일 거리로 접근해 있었다. 육안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실제로 몇 개의 그림자가 갑판에서 얼른거리는 게 보였다. 군복을 걸친 녀석이 있는가 하면 아예 반바지 차림의 알몸인 녀석도 있었다. 기관총으로 보이는 무기도 여러 정이나 되었고, 뱃전 난간에다 걸치려는지 훅이 엮어진 로프 가닥도 보였다. 곧 해적선으로부터 강렬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날라 왔다. 그 불빛 속에서 오션 글로벌 호의 선체가 환히 드러났다. 그 상황에서 엔진을 정지하라는 놈들의 핸드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레이시아 계 원주민들의 고함소리였다. 술탄의 피를 이어받은 악마가 틀림없었다. “전속전진! 알피엠 최고로!” 기관실로 연결된 보이스튜브로 선장의 연이은 명령이 쏟아졌다. 선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배를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왔지만 그가 지금까지 해적을 만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몹쓸 일을 당하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급격한 알피엠 상승으로 엔진이 요동을 쳤다. 완전 연소되지 못한 배기가스가 연돌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속력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엔진은 진작부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톱! 엔진 스톱!” 연이은 해적선의 핸드 마이크 소리였다. 이제는 뱃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상태였다. 오션 글로벌 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일 뿐이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총성은 거푸 들렸다. 밤바다 적막을 깨트리기에 충분한 파열음이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놈들은 이제 아주 본격적인 공격 자세로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머리 위로 어지럽게 총탄이 날았다. 뱃전에서는 몇 차례나 총알이 튕겨났다. 그럴 때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불꽃이 튀어 날았다. 2항사 장혜옥은 브리지 윙을 방패삼아 몸을 숙이고 있었다. 계속 총알이 허공을 갈라내고 있어서 머리를 들 수도 없었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되풀이, 이로써 바다에 대한 사랑도 평화로운 항해도 그리고 희망의 장밋빛 미래도 끝이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다는 외경 그 자체이고, 폭풍우 또한 두렵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언제까지나 바다사람이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이 깨트려지고 있었다. 처음 배를 탔을 때, 그녀는 광활하면서도 거대한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바다로 나온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했었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이면 뭇 시선이 제복 차림의 집중되곤 했었다. 그녀는 얼마든지 그 시선을 느꼈다. 남자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여자들에게서는 부러움과 함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해기사 자격증을 따고서도 스스로 승선을 포기한 못난 사내 대신 그녀는 그녀만의 바다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4년의 긴 대학생활을 거치는 동안 그 사내라면 얼마든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다짐하였건만, 바다를 외면한 그에게는 미련조차 둘 필요가 없었다. 이후 자신은 어느 무엇에도 구속되거나 견인되지 않는 차가운 열정으로 오로지 바다만을 삶의 목표이자 무대로 삼아 왔다. 그리하여 어느 먼 훗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멋진 캡틴이 된다! 장엄하고 멋들어진 배를 이 자그맣고 연약한 손으로 지휘하여 끝내 광대한 대양을 건너리라!…… 해적선은 이제 뱃전에 달라붙기 직전이었다. 치솟는 물결에 자그만 배는 조랑말처럼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오션 글로벌 호 중앙 뱃전으로 바짝 접근할 작정이었다. 그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고속으로 배 주위를 맴돌며 자동소총을 난사하기도 몇 차례였다. 그럴수록 선장의 결심은 더욱 확고했다. 해적에게 장악된 배들은 모두 총탄 공격에 주눅이 들어 기관을 끈 게 그 화근이었다. 설령 뱃전으로 총탄 자국이 남는다고 해도 그쯤으로 배가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절대로 배를 세우지 마라!” 그게 선장의 지시였고, 확고한 신념이었다. 하긴 그 같은 상황에서 이쪽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지그재그로 사행하는 것 말고는 아무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총탄은 계속 머리 위를 날았다. 브리지 곳곳으로 총탄 자국이 무수했다. 그 같은 위기의 순간순간은 한 시간 너머나 계속됐다. 배가 멈추지 않는 한 놈들로서도 뱃전을 타오르기는 쉽지 않다. 갑판은 너무 높고, 배의 항진이 만들어내는 거친 파도도 놈들의 접근을 방해하는 데 퍽 유용했다. 날이 밝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었다. 상대를 빤히 바라볼 수 있는 한낮이라면 아무래도 이쪽이 먼저 주눅이 들고 말았을 것이다. “세 시 방향, 물대포!” 선장의 외침에 드디어 방어가 시작됐다.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던가. 때를 놓치지 않고 갑판장이 동키 호스로 물대포 세례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 효과가 없지도 않았다. 물대포를 맞은 한 녀석이 맥없이 갑판으로 나가떨어졌으니 말이었다. 외국인 선원들의 적극적인 행동도 눈물겨운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는 필리핀 출신 샌디 군과 함께 해치의 화물 속에서 찾아낸 오렌지 박스를 꺼내 놓고 있었다. 태국 출신 기관원 민라이 군은 선미창고에서 들고 나온 고철 조각들을 발밑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었다. 그게 시방 뱃전을 타오르려는 해적 놈들에 대한 최선의 방어용 무기인 것이었다. 어떻게든 놈들이 갑판으로 올라오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내야 했다. 그러면 그 뒤의 일은 너무도 뻔하다. 이내 브리지부터 점거되면서 배는 통째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지금의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끝을 모른다고 해서 순순히 손을 들 수는 없는 일이다. “물대포!” 선장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쉰 소리에서 진한 분노가 묻어나고 있었다. 다시 총성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경기관총이었다. 브리지를 똑바로 겨냥하고 있었다. 총알 하나가 브리지 유리창을 꿰뚫었다. 몽니를 부리는 파도를 정통으로 맞더라도 견뎌낸 유리창이지만 총탄을 튕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리가 박살나는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그것을 신호로 드디어 놈들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오션 글로벌 호와 속력을 나란히 맞춘 다음 로프를 던져 올리기 시작한 것이 그 하나였다. 아까 본 네 가닥 갈고리를 매단 로프였다. 그걸 뱃전 난간에다 걸고는 원숭이처럼 기어오를 작정이었다. 그 때마다 갑판장은 손도끼를 휘둘러 로프를 잘라냈다. 도끼를 맞은 철판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은 로프를 절단했다는 증거였다. 그럴 때면 난간에는 갈고리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관장도 해적선을 따라 상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환갑을 앞둔 그의 손에는 긴 쇠 파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갑판장, 위험해!” 상갑판에서 1항사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악!” 동시에 데크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 갑판장이었다. 한쪽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흐릿한 항해등 불빛 속으로 작업복 왼쪽 어깨 부분이 벌겋게 물들고 있는 게 보였다. “갑판장이 맞았다!” 3기사 마르코스가 먼저 데크로 뛰어 내려가 갑판장을 들춰 맸다. 곧 두 선원이 갑판장을 울러 메고 살롱으로 옮겼다. 2기사가 달려왔다. 손에 약통이 들려 있었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습니다.” 총탄은 갑판장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놈들을 막아야 해.” 신음 섞인 갑판장의 당부였다. 그 역시 환갑의 나이였다. 소학교를 나온 열다섯 살 때부터 배와 인연을 맺었다는데, 이제는 시퍼런 바닷물만 보아도 멀미가 난다며 넌더리를 쳤다. 정작 바다가 기승을 부리는 파도 속에서도 멀쩡했던 노수부다. 다시 해적선이 중앙 뱃전으로 달라붙었다. 야만적이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들이니 순순히 물러설 턱이 없다. 2항사 장혜옥은 다시 브리지 윙으로 나갔다. 우현 뱃전 가까이로 놈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여간 끈질기지 않았다. 이쯤에서 그만두면 어떨까.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이쪽의 기대일 뿐이다. 이제는 오히려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순순히 물러설 놈들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머리 위로 총알이 빗발쳤다. 허공으로 총탄 음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렌지 박스를 든 샌디 군이 그녀 가까이로 다가온 것은 그 때였다. 우현 갑판에서 기관장과 함께 오렌지를 내던지던 필리핀 출신 갑판원이었다. “2항사님, 조심하세요.” “그래, 너도.” 그녀도 오렌지를 투척했다. 총을 난사하는 놈들에게 물렁물렁한 오렌지가 당키나 할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때의 적절한 퇴치법은 없는 것일까. 국가가 시행하는 해기사면허시험에 해적퇴치법을 논한 과목은 없다. 다만 구술시험에서 어느 시험관이 물은 적이 있다. 거기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최선의 방어책은 해적과 조우하지 않는 겁니다, 하고 답했다. 시험관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결코 틀리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앗, 위험해요!” 순간 샌디 군이 소리치며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분명 무슨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으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쓰러진 그대로 그녀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굳은 듯 한 샌디 군의 몸뚱이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밀쳐내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샌디 군의 긴 머리칼을 걷어냈다. 그러자 밤하늘의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이 총을 맞은 것이라 생각했다. 손바닥으로 이상한 감촉을 느껴서렷다. 따스하고 끈적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바닥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두려워서였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브리지 상단에서 빛을 발하는 불그레한 우현 항해등 불빛 속에서 그것은 검붉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피였다. 샌디 군의 가슴팍에서 뿜어 나오는 피였다. 샌디 군은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총탄으로부터 막아낸 것이었다. “아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분노와 함께 증오감이 머리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다. 결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감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시그널 로켓이었다. 선박이 위기에 처할 때면 공중으로 높이 쏘아 올려 조난선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지만, 그 위력의 대단함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원통형인 신호탄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발사 끈을 잡아당기면 슈우욱! 하는 폭발음과 함께 고공 70미터의 높이까지 솟구쳐 오른다. 그런 다음 마치 불꽃놀이 때처럼 화염을 내뿜으며 천천히 낙하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퇴선한 1항사 머독이 구명보트에서 허공에다 대고 권총 형의 발사기로 쏘아올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만한 높이까지 화염이 솟구쳐 오르면 반경 20마일 이내의 모든 선박에 대해 조난 사실을 알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의 위력이니 가까운 거리의 놈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조타실 한편의 수납장 문을 열고 신호탄 박스를 꺼냈다. 그 속에는 여섯 개의 신호탄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급한 대로 우선 두 개를 손에 쥐고 우현 쪽 브리지 윙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 뱃전 가까이로 달라붙은 해적선 갑판에서 한 녀석이 로프를 휘두르는 게 보였다. 그 곁에서 다른 녀석 하나는 연신 자동소총을 난사해대고 있었다. 놈들로서는 목표물이 분명한 만큼 아무 주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윙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먼저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있는 녀석을 조준했다. 그리고 와락 발사 끈을 잡아당겼다. 콰앙! 고막을 찢을 듯 한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내용물이 신호탄 껍질을 박차는 충격과 함께 통을 쥔 그녀의 왼쪽 팔뚝을 사정없이 뒤로 밀쳐냈다. 순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신호탄은 마치 영양을 좇는 날렵한 치타처럼 아주 정확하게 해적선 갑판을 향해 사행해 갔다. 그리고 그 폭약은 한창 자동소총을 난사해대던 녀석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췄다. 곧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머뭇거리지 않고 두 번째 발사 끈도 잡아챘다. 이번에는 로프를 휘두르는 녀석을 겨냥했다. 하지만 크게 빗나갔다. 의외의 공격에 놀란 해적선이 급히 뱃머리를 돌린 결과였다. 그러나 그걸 다만 빗나갔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손을 떠난 두 번째 화염 줄기는 해적선 조타실 내부를 관통한 다음 반대편 바닷물에 꽂히면서 한 길이나 되는 물기둥을 치솟게 하였으니 말이었다. 조타실 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선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효력은 대단했다. 무어라고 왁자하게 떠들어대며 해적선이 저만치로 물러간 게 그 증거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에 혼비백산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총질을 그친 것은 아니었다. 더욱 요란스럽게, 완전한 난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녀는 다시 나머지 신호탄을 꺼내올 참이었다. 순간 상갑판 저만치서 무엇이 허물어지는 듯 한 소리를 들었다. 1항사였다. 총알을 맞은 게 틀림없었다. 서해교전 때는 참수리에 승무하면서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을 대파했었고, 한창 때는 주력 구축함에서 조타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해군의 부사관 출신이었다. “앗! 1항사님!” 소리치며 그녀는 다짜고짜 선배에게로 달려갔다. 14 상갑판으로 옮겨진 1항사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을 감싸 안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압박붕대!” 선장이 소리쳤다. “저는……괜찮습니다.” 1항사의 잦아든 목소리였다.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눈망울이었다. 갑자기 사방이 적막 속에 빠졌다. 웬 까닭인지, 해적선의 난사가 그쳐 있었다. “미스 장, 대단해……. 아주……대단해.” 1항사가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려고 애 쓰는 것 같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그 손을 잡았다. “미스 장……저기 말이야…….” 1항사의 시선이 갑판 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와이어로프로 고정된 12피트 소형 컨테이너 쪽이었다. “저 컨테이너 말인가요?” 그녀 물음에 1항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기에 뭐가 있나요?” 그녀가 다그쳤다. 꼭 알아내어야 할 일이었다. “놈들은……놈들은 저걸 노리고 있었다.” 두어 번 실눈을 깜박이며 1항사가 말을 이었다. 꼭 당부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뭐라더라? 도용이라던가……중국 후베이 성 어딘가에서 발굴된 진 나라 때의 시황제 유물 같은 거……병사와 함께 수레도 있었고, 말도 있었지? 수천 구도 더 되었다지, 아마? 그게 컨테이너 속에……그 장궈이란……마피아……그래서 아마 비싼 운송료가 제의된 거 같아……우리 선주는 물론 알지 못 했고……수당 어쩌고 하는 말은 거기서 나왔던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1항사는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본사의 메시지를 수신한 순간부터 의구심을 씻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혼자서 퀴즈풀이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포트 켈랑을 출항한 직후 선원들을 시켜 해치를 조사한 건가요?” “그건……포트 켈랑에서 실은 천연고무 원료 라텍스 같은 거……그건 아니고……황푸 항의 컨테이너……그 속에 진시황릉의 유물이 들어 있어. 그 장궈이란 일당의 수작이었어. 해적 놈들은 그걸 노렸고.” “아, 이제야 알겠어요.”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순간, 맞잡은 1항사의 손이 스르르 풀리는가 싶더니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젖혀졌다. “1항사님……!” 2항사 장혜옥은 그만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15 대양의 맑은 아침이었다. 바다에는 잔 비늘 하나 보이지 않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떠 있지 않았다. 모처럼 하늘과 바다가 맞붙어 있었다. 어제 적도를 통과한 배는 남지나해의 마지막 섬인 빌리톤을 뒤로한 다음 이제 마지막 기항지인 자카르타 항을 향해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내일 오후면 도착할 수 있을까. 동남아 항로를 뛰는 오션 글로벌 호의 자이로컴퍼스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7도의 에러를 갖고 있었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항로를 밟아나가고 있었다. 부상한 갑판장은 곧 입항할 자카르타에서 병원조치를 받으면 얼마든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선장이 맡긴 1만8천 달러의 비상 선용금도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항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갑판에 적재된 12피트 컨테이너와 관련한 미스터리는 자카르타 항에 도착하는 대로 그 내막이 깡그리 밝혀질 것이다. 2항사 장혜옥은 광대하게 펼쳐진 남지나해 끝자락을 망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독히도 두렵고 두려웠지만, 정겹고 따사로울 때가 더 많은 바다였다. “2항사, 내가 끓였다.” 다음 날 오후, 아직도 기침을 멈추지 못한 노선장이 조타실로 올라왔다. 평생 동안 외항선에 승선하여 세계의 바다를 누벼온 올드 캡틴이었다. “고맙습니다, 선장님.” 선장이 건네 준 커피는 따뜻했다. 때맞추어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바타비아라 불리었던 자카르타 항의 산자락이 수평선 나지막이 솟아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끝> 약력 주문진 수산고, 강원도립대학 해양산업학과 졸업. 과학기술부장관명의 해양학사 취득. 한국해양대학교대학원 국제지역문화학과 석사과정. 제 3회 원양산업노조공모전 대상 <해양시> 제 1회 <계간문예> 영목신인상〈시〉 제12회 바다의 날 해수부장관 표창 제11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해양시〉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해양소설〉 제 4회 해양문학상 우수상 <해양소설> 제13회 여수해양문학상 우수상 <해양소설> 제 2회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대상 <해양소설> 해양시집〈진화하지 못한 물고기〉<대왕고래를 만나다> 해양산문<바다 위에서> 어선, 상선1급항해사. 동력레저조종1급항해사. 소형선박항해사. 요트항해사. GOC항해사. 한국해양문학연구회-빅블루 동인. 원양봉수망 선장  
196 난초네 옆집에는 베고니아가 산다/노정희 file
편집자
2722 2012-02-29
12.03월 22호 수필  난초네 옆집에는 베고니아가 산다 노 정 희 “아!” 보세난에 꽃대가 올라와 있었다. 베란다에서 찬 기운 견디고 당차게 올린 꽃대는 부화하기 직전의 숭고한 모습으로 둥지를 틀었다. 화한 백학이 되고, 코끝 아릿한 향기의 홍학이 되어 날개를 펼칠 그 자태를 상상하며 마음이 먼저 꽃을 피웠다. 밤낮으로 들여다보고픈 욕심이 앞서 난 분 세 개를 거실로 옮겼다. 십여 년도 넘었을 게야, 친구 집에서 한 줄기 얻어 온 타이거베고니아는 저희들끼리 엉덩이를 비비면서도 잘 자라주었다. 여기저기 분양해 주었는데도 무성하여 해마다 꽃대를 올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인다. 난초 옆에 타이거베고니아를 겹살림하니 모양새가 어울린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 설 전날, 장롱위에 올려 둔 비상금을 꺼내려다 받침대가 기우뚱하여 넘어지신 것이다. 손자들한테 줄 세뱃돈은 장롱위에서 쿨쿨 게으른 잠을 잤다. 어머님은 온화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분이라 차도가 빨랐다. 병원에 계시니 더운밥에 세면장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되레 시골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보다 편하다고 하셨다. 옆 병상에 할머니 한 분도 같은 날 입원을 하셨다. 설 준비하느라 바쁘게 일하다가 넘어 졌는데 골반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며느리들은 직장 생활하느라 바쁘다며 아들들이 차례로 다녀갔는데 내 손길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한 옴큼의 짚단처럼 가벼웠다. 병상에 누워서도 집안일을 걱정하였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는 정신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시며 겹겹 말아두었던 지나간 시간을 횡설수설 풀어내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한다며 몸을 일으키다가 수술한 골반 뼈가 어긋나 침대에 묶이는 형편에 까지 이르렀다. 추운 날 몸져누운 두 할머니, 허리 굽은 떡갈나무마냥 평생을 가족위해 헌신하며 산골마을에 뿌리 내린 두 분은 형광등 불빛 아래 각각의 표정을 짓고 계셨다. 어머님은 TV연속극에 귀를 여시고, 할머니는 내가 읽어 주는 잡지속의 글귀에 귀를 여셨다. 한참 책을 읽다가 돌아보면 하얀 빛을 쏟아내는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도토리 굴리듯 데구루루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창백하게 시들어 갔다. 거실로 옮겨온 난초는 겉보기에는 탈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망울이 말라서 배배틀어지는 게 아닌가. 물을 뿌려주고 영양제를 주었는데도 기어이 꽃망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신이 자라던 환경이 아니라고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타이거베고니아는 따뜻한 거실에서 꽃대를 힘차게 올렸다. 화드득 무리지어 피어난 흰 꽃은 떼 지은 참새마냥 무수히 날개를 퍼덕였다. 검붉고 두툼한 잎사귀가 건강함을 과시하며 화사함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어머님은 두 달간의 병원생활을 마쳤다. 업혀서 들어갔던 병원문을 걸어서 나오셨다. 군위 한밤마을 홍씨댁 맏딸로 아버님께 시집올 때는 고운 꿈을 꾸셨겠지. 그러나 운명은 얄궂어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사십대 후반에 남편 여의고 어린 육남매 바라보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슬픔에 잠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었겠는가, 어머님은 둥지에 있는 새끼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그 힘든 현실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스스로 아름다운 꽃이길 포기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강인한 들꽃이 되기를 자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담담하게 병원 문을 나서는 어머니 눈길에 같은 병실의 할머니걱정이 물컹거렸다. 완전히 정신 줄을 놓아 버린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뒤틀며 허공에 휘휘 손을 저었다. 날고 싶은 게야, 훨훨 날아서 집으로 가고 싶은 게야. 끝내 그 새는 이승에서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 빛살 속에 새들이 날아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지난해의 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다시금 보세난 두개의 분에서 꽃대가 올라온 것이다. 욕심 부리지 말자고 마음먹으며 틈틈이 베란다에 나가서 꽃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연둣빛과 갈색빛깔의 날개를 펼친 모습이 고고하다. 난 옆집에는 여전히 베고니아가 살림을 하며 올망졸망 참새 눈알같은 꽃망울을 달고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오늘, 베란다에 꽃향기 분분하다. --------------- 노정희 대구문인협회, 대구작가회의, 달구벌수필 문학회, 열린수필동인 대구수필가협회 간사, 문장작가회의 사무국장, 수필과지성 아카데미 사무국장 계간<문장>편집위원 주소 : 대구시 수성구 범물2동 서한화성타운 102동 1002호 메일 : -roh-@hanmail.net  
195 오이소박이/권천학 file
편집자
2714 2012-02-29
12.03월 22호 소설  오이소박이 권 천 학 “배라먹을 짜식!” 아리랑식당의 뒤뜰, 울타리 가의 벤치 위에 쏟아지는 오후 3시의 초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경애는 주방장 모자를 벗어 벤치 위에 떨어진 햇살을 툭툭 날려버리고 걸터앉자마자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담배부터 꺼내 문다. “너 혹시 내가 식당주방에서 일한다는 말 진수에게 한 거 아냐?” 경애가 주방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수에게 하지 말라고 경주에게 당부한 것은 진수에게 좀 더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진수가 힘든 엄마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포자기에 빠질까봐서. 머지않아 스스로 옷가게를 차려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진수를 데려올 작정이라고, 좀 성급하지만 이른 언질을 준 것도 그것이 더 진수에겐 희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수가 4년제가 아닌 전문대학을 간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데 요리전공, 그것도 한국요리를 전공하겠다고 하니 억지로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경주에게 다져본 말이었다. “아니, 안 했어. 언니가 그 말은 하지 말랬잖아. 너무 뜻밖이라서 나도 놀랐어.” 아직도 경주의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아직도 뱅뱅 돈다. 어미에 대한 반감으로 빗나간 걸까? 떨어져 산 6년 가까운 시간동안 아이의 적성도 모르고 지난 것이 또다시 죄의식으로 덮쳐왔다. 삶이 이토록 파김치로 죽 쑤어질 운명이 될 줄이야. 이게 다 그 ‘베라먹은 짜식’ 때문이다. 여자라 해서 다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요리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먹으면 된다. 경애가 그렇다. 어릴 때 가끔 어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리면 식구들이 맛있다고는 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가지나물을 만들어 상에 올리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가 하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했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빵공장에 다니는 엄마가 늦어질 때 대신하는 경애에게 미안함을 대신한 칭찬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결혼해서 살 동안에 경애가 담근 파김치는 유난히 맛있다고들 했다. 남편은 물론 올케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경애표 파김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애가 요리를 먹고사는 방편으로 삼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진수까지 요리전공학과로 진학을 하겠다니. 참 묘하게 변했구나. 9월, 벌써 들쭉날쭉 늘어선 지붕들 너머로 보이는 크리스티 피츠 파크 (Christie Pits Park) 귀퉁이의 나무들이 가을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가슴에 맺힌 울분도 가을을 맞이하여 색이 바래지는 나뭇잎처럼 바래졌으면 좋으련만 택도 없다. 경주와의 통화로 오히려 묵직한 쇳덩이가 얹히고 그 ‘배라먹을 짜식’에 대한 분이 다시금 솟구쳐왔다. “개새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나서 가슴 밑바닥까지 고여 있을 니코틴을 뿜어내기라도 하듯, 후욱~ 머금은 담배연기를 깊게 토해낸다. 그냥 ‘빌어먹은 자식’이라고 하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서 말을 비틀어 ‘배라먹을 짜식’이라고 하고, 그 한 마디로도 부족하여 ‘개새끼’가 한 마디 더 붙여졌다. 그 두 마디 말로서 어찌 분한 마음을 다 풀어낼까만 그래도 그 두 마디는 한 쌍을 이루어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속에 쌓여있는 울화의 어느 한 귀퉁이를 눈곱만큼이라도 삭여내는 것으로 써먹는 육자배기가 되어 아예 입에 올라 혼잣소리처럼 수시로 튀어나오는 입버릇이 된지 오래다. 오늘따라 한 쌍의 육자배기를 뱉어내어도 시원치가 않다. 늘 하던 대로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고 저녁식사 준비시간 사이에 잠깐 나와 피우는 담배의 꿀맛도 사라졌다. 어디 4년제 대학만 대학이냐. 중요한 시기에 어미 떨어져 할머니와 살면서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니 뭔들 충분할 것이며 뭔들 힘들지 않을까. 다 내 탓이고 내 잘못이지. 그래, 경애말대로 전문대학이라도 가서 취업이라도 하겠다니 그것만 해도 신통방통이지. “그나저나 언닌 어때? 잘 지내지? 건강하구? 언니일이 빨리 풀려야 오든지 가든지 빨리 합치지. 진수 할머니도 연세치곤 아직까지는 짱짱하시지만 그래도 어디 노인네 건강 믿을 수 있어? 그러니까 언니, 언니자신을 위해서도 포기할건 포기해버려. 이젠 시간도 그만큼 흘러 버렸으니 분을 삭힐 때도 됐잖아. 언니가 빨리 마음도 잡고 자리도 잡아야지.” 6년, 분을 삭힐 때가 됐다고? 흥,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마지막 화풀이라도 하듯 허리를 굽혀 시멘트 바닥에 담뱃불을 거칠게 눌러 비벼 끄고는 마당 귀퉁이에 줄서듯 놓여있는 세 개의 쓰레기통을 향하여 휘익 꽁초를 던진다. 아까부터 쓰레기통을 들락거리던 갈매기 두 마리가 움찔 하다가 다시 돌아와 여전히 쓰레기통 주변을 알짱거린다. “뭐 먹잘 게 있다고… 쯧” 괜히 기러기가 측은하게 느껴져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의미 없이 던진다. 처음 토론토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도시의 건물 위에 날아다니는 기러기가 너무 신기했다. 도시의 지붕에 웬 기러기? 비둘기라면 모르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왠지 자기 자신이 기러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살면서 줄곧 기러기는 가을 새이거나 바닷새이거나. 거기다 더하여 시리게 푸른 가을 창공을 지나 먼 길을 떠나는 철새 정도의 상식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던 새였다. 그리고 기러기가 아니라 갈매기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지만 기러기나 갈매기나 경애에겐 낯선 곳을 떠도는 외롭고 썰렁한 존재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불쑥 떠오르는 노래 한 가닥, 아주 오래 전에 불렀던 기억 속의 노래 한 소절을 웅얼거리곤 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긴, 쓰레기통 뒤지는 니 신세나 낯선 땅에서 헤매는 내 신세나… 그게 다” 육자배기가 또 튀어나오려는 순간 식당의 뒷문이 열리며 주방 보조인 한씨 아줌마가 얼굴을 내민다. “오이 배달 왔어. 진수 엄마. 지금 절일까?” “그러세요.” 한씨아줌마의 모습이 안으로 사라지자 경애는 벤치에서 일어나 옆에 놓았던 주방장 모자를 들어 허벅지 위에 대고 탈탈 턴다. 마치 앞치마에 내려앉는 가을볕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그 ‘개새끼’를 두드려 패기라도 하듯이. 아리랑식당의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한 첫날, 주문받은 오징어볶음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바짝 달아오른 프라이팬에서 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가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물기 한 방울이 얼굴로 튀었다. 순간적으로 앗 뜨거! 하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배라먹을 짜식!’하고 뱉어내었다. 그리고 이어 커다란 뒤지개로 뒤집어가면서 ‘개새끼!’ 물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육자배기였다. 보고 있던 한씨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다음부턴 오-징어 볶음 주문받지 말까-요 주방장니임?”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간 육자배기 때문이라는 걸 직감했다. 어쩌면 경애가 오징어볶음을 잘 할 줄 모르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못 들은 척 했다. 한씨아줌마가 뜨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했다. 오징어볶음을 서빙하고 주방으로 들어와 경애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주방장님, 저어 다음부턴 오징어볶음…” “왜요? 주문 많이 받아야지요. 그래야 장사가 잘 되죠. 장사가 잘 돼야 아줌마나 나나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 아녜요?” 경애가 말허리를 자르며 능청을 떨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웃기까지 했다. 그런 경애를 보고 오히려 야릇해진 것은 한씨아줌마였다. “참, 아줌마 성이 한씨라고 했죠?” “네에-. 왜요?”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이상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찾는 배라먹을 개새끼가 한 씨라서요.’하고 싶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한 씨라고 하는 개자식이 있어서요’하는 말을 혀 아래 눌러버렸다. “여기 사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여기 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쓰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한씨 아줌마도 그런가 해서요.” 이민 8년차인 한씨아줌마, 이민 선배라고 해서 별반 사정이 나아보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대충 고향친구의 말만 믿고 이민 왔다가 몽땅 날리고 이제 겨우 안정이 되어간다는 것과 남편이 한인교회에서 허드렛일을 봐주며 살아간다고 했다. 안정이 되어간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안정이 아니라 사기를 당하고 쓰러진 몸과 마음을 이제야 겨우 추스르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네에, 난 또… 난 내가 한씨예요.” 그래도 뭔가 석연찮았는지 한씨아줌마 역시 조금 전에 성애가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삐쭉하는 제스처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 김빠진다는 표시 같았다. 경애가 다시 김빠진 분위기를 부추켰다. “한씨아줌마, 절 주방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도 한씨아줌마 대신 언니라고 부를게요.” 마흔 아홉인 자신에겐 언니뻘 되는 오십대 중반의 주방보조 한씨아줌마와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였다. “그럼 내가 뭐라고 불러?” “진수 엄마.” “아하, 아들 이름이 진수구나. 그럼 그러지 뭐.” 그렇게 서로 호칭을 풀었어도 가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삐딱할 땐 ‘주방장님’이나 ‘한씨아줌마’로 돌아가긴 했지만, 한결 친숙하고 편안해졌다. 경애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이 진수의 엄마임을 스스로에게 새겨두고 싶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절여지고 있는 오이들을 뒤적이며 경애가 말했다. 한씨아줌마가 대답대신 바라봤다. 어디 다녀올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한씨아줌마는 연배도 연배지만 타국생활에 많은 경험을 한 탓인지 비교적 사려 깊고, 서양식 예절도 어느 정도 잘 습득하고 있다. 그런 한씨아줌마에 대한 예의로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한다. “은행에 잠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체국에도 아예 다녀 올 계획이다. “알았어. 오래 걸리지 않지?” “녜, 갔다 와서 이거 담을 테니까 준비 끝내 놓으세요, 언니.” 경애는 앞치마를 벗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은행은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생각은 닷새분량이다. 진수 통장으로 5천불을 송금하고 은행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야 이곳으로 데려와서 공부시키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송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5천불, 한화로 환산하면 5백만 원 정도이다. 그동안 몸과 마음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모은 돈이기도 하다. 진수의 대학 등록금이라도 치러주고 싶었다. 물론 경주가 염려 말라곤 했지만 그냥 말 수가 없었다. 경애에겐 큰 돈이면서 적은 돈이기도 하다. 은행을 나와서 근처의 우체국코너가 있는 대형 잡화점 샤퍼즈 드럭 마트(Shoppers Drug Mart)에 갔다. 카드판매대에 먼저 들렀다. ‘Love’ 라고 인쇄되어 있는 카드 한 장을 골라 창가의 의자로 갔다. 가슴이 떨렸다. 손가락도 떨렸다. 힘들게, 천천히 썼다. <진수야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요즘 대학입시 때문에 힘들지? 전문대학 간다면서?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리라고 믿어. 진수를 사랑하고, 언제나 미안한 엄마가> 처음으로 부치는 카드. 이 짤막한 문장을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동안 가슴 속에 쌓여있는 말들이 고작 이것뿐이라니. 먹먹하기만 했다. 마지막 ‘엄마가’를 쓸 때쯤엔 기어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도 내가 엄마일 수 있을까? 아직도 어미 자격이 유효한가? 그래서 ‘이곳으로 너를 초청할게.’ 라는 말을 차마 쓰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수월치 않았는데 앞으로 또 일이 어떻게 풀릴지. 언제쯤 형편이 좋아질지, 짐작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장담했다간 거짓말쟁이가 되어 진수를 더욱 실망 시킬 것 같아서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줘’라고만 썼다. 그래도 카드를 부치고 돌아오는 거리는 한결 산뜻했다. 바람이 서늘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가벼워졌다. 이번 겨울이 따뜻할 거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아니, 이번 겨울은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바람결에 밀려온다. 모처럼 마음이 뿌듯해진 경애가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와 오이소박이를 담기 시작했다. 잘 절여진 오이와 준비한 양념들을 알맞게 버무려 소를 박았다. 사흘 후면 제임스가 회사동료들을 몰고 올 예약일이니 그 날짜에 맞추어서 오이소박이를 충분히 준비해놔야 한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한씨아줌마가 입을 연다. “역시 진수엄마 손맛이 최고라니까.” 제임스가 주문한 오이소박이의 제 맛을 살리려면 오늘 담아서 숙성시켜놔야 한다. 제임스는 갓 담은 오이소박이도 좋아하지만 약간 숙성된 오이소박이를 더 좋아한다. 한씨아줌마가 다시 입을 연다. “제임스 그 사람 참 괜찮아 보이잖아?” 제임스가 은근히 경애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경애의 속을 떠보는 말이다. 두 사람이 맺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을 열지 않는 경애가 안타깝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자식 떼어놓고 혼자서 낯선 나라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돌아갈 것 같진 않으니 그럴 바엔 누군가와 맺어져 사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치루는 타국생활이 얼마나 힘들까? 그런 경애가 동생처럼 여겨져서 늘 안쓰럽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버무려진 오이소박이를 항아리에 담는 경애를 향해서 한 톤 높여 한 마디 더 던진다. “안 그래요 주 방 장 님?” “여기 진수엄마밖에 없는데요.” “그거나 저거나…” ‘뭐가 그거나 저거나예요? 어 다르고 아 다른데···” “워킹비자 갱신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런가요, 한 씨 아 줌 마?” “이그. 알았어, 알았어, 진 수 엄 마.” 그제야 두 사람이 서로 통한 속을 알고 싱겁게 웃는다. 아리랑식당의 주방장이 되기까지 고생도 할 만큼 했고, 토론토바닥을 뒤질 만큼 뒤지기도 해서 이젠 알 만큼 알게도 되었다. 그동안 온갖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희숙의 집에서 눈치 보며 빈둥거리기도 했고, 희숙의 소개로 사무실 청소도 해봤다. 한인식당의 설거지나 반찬보조를 하면서 옮겨 다닌 식당이 세 군데나 된다. 희숙의 고마움에 대한 답으로 짬을 내어 희숙에게 반찬 만들어 준 것이 계기로 혼자 먹기 아깝다면서 희숙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전하여 돈을 받고 반찬을 공급하도록 주었다. 투 잡이 되었다. ‘개새끼’를 찾기 위해서라도 토론토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자니 경제적 자립이 더욱 절실해졌다. 경제적 자립이 되면 진수와 시어머니도 모셔올 수 있다. 지금까지 해본 일 중에서 식당 일이 가장 수월했다. 영어도 서툰데다 ‘개새끼’의 거처를 염탐하거나 잡는 일에도 유리할 것 같았다. ‘언제건 처먹으러 나타나겠지. 지가 안 먹고 견뎌?’ 어리석은 기대일진 모르나 접지는 않았다. 언제 나타날래? 개미귀신이라도 되어 구덩이 파놓고 기다리마 하며 이를 악물었다. 기왕 코리아타운의 한식당주인들 사이에 음식솜씨가 어는 정도 인정받는 판이니 요리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지름길로 판단됐다. 그래서 어렵사리 영어공부도 하면서 요리학원을 다녔다. 일 년 만에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마침 지금의 아리랑식당의 주방장 자리가 나자 주인아저씨가 먼저 손을 뻗어왔다. 사실 요리사가 된 후 첫 직장인지라 경애에게는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다. 요리에는 특별한 재주가 없을망정 기왕 요리사로 취직을 했으니 원망은 듣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경애가 일하기 시작하면서 아리랑식당의 음식 맛이 좋다는 평이 나고 손님들도 늘었다. 반찬 만들기에 더욱 신경을 썼다. 한국식당이면 다 하는 일반 메뉴들이지만 주 요리와 함께 나오는 반찬들에 대한 평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김치를 비롯하여 멸치볶음, 감자볶음, 땅콩조림, 콩나물, 무나물, 배추나물 등의 나물류와 오징어채무침, 그리고 오이소박이 등이다. 그 중에서도 오이소박이의 인기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옛 추억을 되살리며 파김치라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김치를 담가보기도 했다. 그러나 캐나다의 파 품종으로 담그는 파김치로는 한국에서의 ‘경애표 파김치’의 맛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진수가 좋아하던 오이소박이를 담아보기로 했다. 물론 오이도 한국의 오이와 똑같은 품종은 찾기 어려웠다. 한국의 오이를 최소한 서너 개는 합쳐야 할 만큼 큰 캐나다의 오이, 그 팔뚝만한 크기에서부터 사람을 질리게 했다. 맛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맛도 없다. 다행히 육질이 단단하여 사각거리고 맛도 한국오이와 비슷한 피클용이나 통조림용으로 쓰이는 품종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피클용 오이로 담그면 오히려 한국에서의 오이소박이보다 더 사각거리고 고들거려서 좋았다. 쉽게 물러지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실험과 궁리 끝에 담가내는 오이소박이가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자연히 오이소박이 떨어지는 날이 없도록 신경 쓰게 되었다. 한국 손님들도 그랬지만 한국음식을 좋아해서 아리랑식당을 찾아오는 외국사람 단골들도 오이소박이를 즐겨 찾았고, 어쩌다가 우연히 찾아온 외국손님들 중에는 오이소박이 때문에 단골이 되기도 했다. 산뜻하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셈이다. 주로 샐러드로 이용하거나 피클로 만들어 햄버거사이에 끼워먹는 정도의 오이를 김치로 만들어먹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리랑식당의 오이소박이’란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매콤하면서도 새콤달콤한 오이소박이. ‘아리랑식당의 오이소박이’가 유명해지면서 주인아저씨의 얼굴도 싱글벙글이 되었고, 경애의 입지도 좋아졌다. 한씨아줌마는 ‘역시 진수엄마 손맛이 최고야’ 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경애에게는 오이소박이가 가슴 아픈 메뉴이기도 하다. 진수가 좋아하는 반찬이었기 때문이다. 진수는 어렸을 때부터 경애의 매콤한 오이소박이를 좋아했다. 오이소박이가 적당히 익어 신맛이 돌 때까지도 진수는 오이소박이 한 가지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녀석이었다. 막 담갔을 때는 싱싱해서 좋다면서 경애의 귀에 입을 대고 사각사각 씹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시큼하게 익으면 익어서 좋다고 하며 시어진 국물에 밥을 비벼먹곤 했다. 그런 아이를 ‘배라먹을 놈’ 때문에 할머니에게 맡기고 흔한 오이소박이를 먹이지 못하다니. 오이소박이를 담글 때마다 가슴에 걸려있는 자식, 죄인일수밖에 없는 어미의 마음이다. 진수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오이를 절이고, 고춧가루에 부추 소를 버무리면서 아리게 생각하고, 아린 속으로 울고, 울면서 사죄하고… 그러면서 ‘개새끼’를 어떻게 잡을까 이를 간다. 제임스는 오이소박이가 좋아서 아리랑식당을 찾아오는 외국사람 중의 하나다. 한국음식이 좋아서 가끔 코리아타운에 온다는 그가 우연히 아리랑식당에 들렸다가 오이소박이 맛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는 단골이 되었다. 단골이 되어 낯이 익어갈 무렵인 어느 날 그가 꽃다발을 들고 식당에 왔다. 오이소박이를 만들어낸 주방장을 만나고 싶다고 면담을 요청했다. 주인아저씨의 부름을 받고 홀로 나온 경애에게 그는 맛있는 오이소박이를 먹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아리랑식당사람들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가족처럼 친근한 단골이 되었고, 갓 버무린 오이소박이에서부터 약간 숙성된 오이소박이, 많이 시어진 오이소박이까지 다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오이소박이라면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삼일 숙성되어 약간 새큼한 맛을 내기 시작했을 때의 오이소박이를 더 좋아했다. 시어진 국물에 밥 한술 넣어 비벼먹는 것까지 영락없는 한국사람 입맛이다. 그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오이소박이를 먹거나 시어터진 오이소박이 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것을 볼 때마다 경애는 자신도 모르게 진수도 그랬는데… 하고 떠올리며 마음이 시어졌다. 그렇게 말문을 튼 제임스와는 친구처럼 되어갔다. 주말이나 휴일, 특별한 날, 이를테면 경애가 한 달에 한번 일찍 들어가는 마지막 목요일 같은 날에 맞춰 박물관에도 가고 교외로 드라이브도 한다. 답답한 경애의 일상에 숨통을 터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아저씨나 한씨아줌마도 은근히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해주었다. 그가 올 때마다 경애는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직접 서빙도 하고 대화도 나누게 되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서로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는 영 스트리트(Yonge Street)와 칼리지 스트리트(College Street)가 만나는 곳에서 조그만 프린트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십년 전에 아내와 이혼하고 싱글로 살고 있었다. 일하는 사이사이 주방과 홀 사이에 나지막하게 막아진 유리창 너머로 자주 홀을 살피 는 것이 경애의 습관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저 습관이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지만 한씨아줌마는 뭔가 낌새를 눈치 채고 있다. 홀을 살피는 경애의 눈매에서 어딘가 심상찮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냥 홀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홀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일일이 체크한다고 이해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대한 손님들의 반응이 어떤가 살피는 것. 그래서 가끔 한씨아줌마는 필요이상의 말을 경애에게 한다. 경애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려는 의도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식당 음식이 참 맛있다는 거 손님들이 다들 인정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땐 ‘저쪽 7번 테이블 있잖아, 저 손님이 우리 집 불고기 양념이 아주 특이하대. 자기가 지금까지 먹어본 중에서 가장 맛있다는 거야. 그래서 불고기 먹고싶을 땐 꼭 우리 집으로 온다잖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오이소박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경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한씨아줌마의 배려라는 것을 경애가 모를 리 없다. “한국음식 중에서도 김치 불고기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저쪽 구석에 있는 팀들이 오이소박이를 벌써 세 번째 추가야. 오늘 처음 먹어보았는데 아주 특이한 맛이라는 거야. 역시 진수엄마 손맛이 최고라니까.” 하지만 경애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는 한씨아줌마의 말은 귓가를 겉돌 뿐이다. 경애는 그런 한씨아줌마가 미안해서 피식 웃고, 한씨 아줌마는 자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눈을 흘긴다. 갑자기 도마 위에서 소리를 내며 뚜닥거리던 칼질소리가 멈췄다. 아주 짧은 시간, 홀 쪽을 응시하는 경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숨이 멎는 듯, 머리끝이 쭈뼛, 소름이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하나, 두울, 셋! 숨을 고르던 경애가 튕겨지듯 홀 쪽으로 뛰쳐나갔다. 문턱을 넘어오던 한씨아줌마가 아슬아슬하게 비켜섰다. 주방 안쪽에서 양파를 다듬고 있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학생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놀란 한씨아줌마의 눈길이 경애의 뒤를 따랐다. 홀로 뛰어나간 경애는 벽면에 잇대어있는 8번 테이블에 다가서자마자 거기 앉아서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휘어잡는다. “이 배라먹을 자식~ 야 이 개새끼야~” 조용하던 홀의 분위기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계산대에 앉아있던 주인아저씨도 놀라서 바라본다. 경애에게 멱살을 잡힌 남자가 토끼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경애의 팔을 비틀어 잡으며 일어섰다. 그 순간, 아! 소리와 함께 입에 비수라도 문 듯 날카롭던 경애가 멱살잡이 한 손을 놓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홀에서 서빙을 하던 두 아가씨가 놀라 일손을 멈춘 채 바라보고, 주인아저씨가 다가가고, 한씨아줌마도 다가가고,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오우, 쏘리, 쏘리, 쏘리, 쏘리…” 횡설수설 쏘리라는 단어만 입에 올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경애가 한씨아줌마에게 끌려서 주방으로 떠밀려 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찾는 도둑놈인 줄 알고 그만.” 주방으로 들어와서 영문을 묻는 주인아저씨에게 대답하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급하게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토끼 눈을 하고 서있는 손님에게 다가가서 극진하게 해명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해명이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다. “If he looks like me, he must be a pretty good-looking guy…(나를 닮았다면, 꽤 잘 생긴 모양입니다…)” 토끼눈의 남자가 던지는 위트 있는 한 마디로 홀 안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돌발적으로 일어난 짤막한 해프닝이 싱겁게 막을 내렸다. 경애가 아리랑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여섯 달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엉뚱한 실수를 하고보니 경애로선 겸연쩍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리랑식당 식구들에게 감추고 있던 비밀을 온통 다 들통이 난 기분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일을 계기로 그동안 경애가 주방에서 일하는 중에도 수시로 홀을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씨아줌마의 생각도 바뀌었다. 자신의 음식에 대한 소님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그 일로 해서 어정쩡하게 다소 풀죽은 모습이긴 했으나 치 뜬 시선으로 수시로 유리 칸막이 너머 홀을 훑어 내리는 경애의 습관은 변함이 없었다. 한국이 IMF의 직격탄을 맞았을 때 남편은 다니던 자동차부품 생산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실직자가 되었다. 실직자생활로 갈피를 못 잡던 남편이 택시운전을 해보겠다고 택시회사를 전전하다가 자유롭고, 노후보장이 된다는 말에 혹하여 빚을 내어 비싼 권리금까지 주어가며 개인택시를 사들였다. 개인택시를 사들인지 석 달쯤 된 어느 늦은 밤에 무단횡단을 하는 행인을 피해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앞서가는 트럭을 들이받고 전신주에 부딪쳐서 논두렁에 처박히는 대형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중환자실에서 반년을 보낸 남편은 빚만 잔뜩 남기고 끝내 마흔 아홉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른아홉의 경애에게도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았다. 졸지에 과부가 되고, 알거지가 되고, 빚장이가 된 경애에게 시어머니는 쌍 아홉수가 악수(惡數)라고 한탄하면서 살던 시골집과 코딱지만 한 논밭 떼기를 모조리 팔아 아들 병원비를 청산하는데 보탰다. 경애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빚을 대충 갚고 전셋집을 얻어 시어머니와 합쳤다. 진수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대형슈퍼마켓의 매장에 판매원으로 취직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러다가 동생 경주의 도움으로 신림동에서 조그만 피자가게를 인수받아 경영하기 시작했다. 판매원으로 일 할 때 보다 수입이 좋았지만 일은 훨씬 고되었다. 굴절을 겪고 후 다시 희망이 보일락 말락 할 때 지친 몸과 마음을 의지할 데가 필요했다. 피자가게가 있는 건물의 3층에 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면서 만나게 된 놈이 ‘개새끼’ 한성조이다. 겨우 일어서려는 자신의 삶을 헝클어버린 놈. 교회의 부목사였고 경애와는 동갑나기였다. 동갑나기라고 더욱 친하기도 했고 워낙 성실하여 신도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놈이다.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심방 때도 그랬지만 가끔 핏자가게에 들려서 어울리지 않는 오이소박이를 곁들인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청주 어딘가에 개척교회를 차려서 나가게 되었다. 신도들은 유능한 젊은 부목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또 하나의 역사(役事)를 이루어내는 것을 기뻐하며 축하했다. 자발적으로 개척교회의 모금을 했다. 알게 모르게 개인적으로 헌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날 ‘개새끼’가 은밀하게 경애를 찾아왔다. 진지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 일이니 몇 배의 축복이 내려지리라고 하면서 틀림없이 일 년 후에 큰 이자를 붙여 돌려주겠다고 했다. 많은 신도들이 관여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마(魔)가 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차피 모아진 돈을 통장에 넣어봤자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니어서 성스러운 일에 쓰이는 것이 훨씬 뜻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의심 없이 물론 이자도 없이 빌려주었다. 오년 동안 피자가게를 해서 모은 5천만 원이었다. 시어머니께 시골집을 마련해드리려던 돈이다. 그러나 ‘개새끼’가 청주로 내려간 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사기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자 없이 준 이유 때문에 경애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경애와 ‘개새끼’ 둘이서 배를 맞춰가며 벌인 사기극이니 은신처를 대라고 몰아붙였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은 진실처럼 굳어져갔다. 아무리 경애가 아니라고 한들 소용이 없었다. 혼자 사는 점, 동갑나기라고 친하게 지낸 점, 이자 없이 큰돈은 준 점까지 모두가 경애를 공범으로 몰아세우는데 잘도 들어맞았다. 법에 고소하고 싶지만 교회의 일이라 차마 못한다고 윽박질렀다. 법으로 호소하고 싶은 사람은 경애였다. 언제 ‘개새끼’와 미래를 속삭이기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이런 추잡한 소문에 휘말린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경애는 이를 갈았다. 어린 진수는? 그리고 시어머니는? 죽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더러운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죽을 수가 없었다. 세상 끝까지라도 뒤져서 ‘개새끼’를 찾아내어 목을 따버리고 말겠다고 작정했다. 토론토 어딘가로 잠적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비싼 비행기 싹을 들여가며 서울에서 토론토를 오가게 되자 가정을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그럴수록 분노와 증오가 단단해져갔다. 토론토 근교에 있는 교회들까지 안 뒤진 데가 없을 정도로 뒤지고 다녔다. 한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뒤졌다. 다행히 80년대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 희숙이를 수소문 끝에 연결되어 도움을 받았다. 3개월에 한 번씩 국외로 들락거려야 했다. 지금이야 취업비자를 받아서 연장해가고 있지만, 기어코 ‘개새끼’를 잡기 전에는 안 떠나리라. 제임스의 예약파티도 무사히 치르고 특별한 일 없는 나날이 흘러가면서 가을만 저 혼자 익어가는 어느 날, 저녁타임 준비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경주의 전화를 받았다. 경애는 핸드폰을 들고 뒤뜰로 나왔다. “언니, 진수가 돈을 가져왔어. 언니에게 돌려주라고.” 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감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작년부터 이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더니 언젠가는 이메일마저 반송되었으니까. ‘제 힘으로 하겠대. 내가 주는 것도 안 받아. 그동안 알바를 계속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언니, 이런 말을 해야 할지… 한국요리 전공한 건 엄마대신 스스로 오이소박이 실컷 담가먹을 거라고… 언니, 언니 듣는 거야? 언니 기분 아는데… 그래도 알고 있긴 해야 할 거 같아서…’ 뭐 대충 이런 말이 들려온 것 같긴 한데,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귀가 멍해지면서 아무소리도 안 들리고 그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힘없이 핸드폰의 커버를 덮었다. 크리스티 피츠 파크의 나뭇잎들이 붉고 노랗게 마지막 용을 쓰고 있는 것이 확연하다. 이번 겨울은 따뜻할 것 같던 예감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얼마 전의 기대가 일순간 노랗게 부서져버렸다.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수 천 수 만 개로 흩날려 보인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속사정을 한씨아줌마에게 털어놓았다. “너무 실망할 것 없어. 그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지. 조금만 참고 견뎌봐. 천륜은 쉽게 끊어지지 않아. 누가 알아? 아들놈이 엄마를 찾아와 최고의 맛을 내는 오이소박이 밥상을 차려낼지··· 알 수 없는 일이야.” 희극 같은 그 말이 경애의 마음을 옭아매기도 했지만 열리게도 해주었다. 그래 맞아. 지금까지 견뎠는데. 조금만 더 견디자. 견디면서 나도 이 코리아타운에서 오이소박이를 한국음식의 대표주자로 만들어봐? 놀라운 역설에 경애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경애의 마음이 가라앉을 무렵 한씨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이봐. 진수엄마. 나 부탁이 있어. 이번 목요일이 진수엄마 일찍 들어가는 날이잖아. 그날 저녁에 내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올 텐데, 그날 나와 주면 안 될까?” “중요한 사람인가보죠?” “응, 저런 꼬맹이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그래. 아무래도 손발 맞는 진수엄마가 있어야 주인아저씨 눈치 덜 보이고 대접하지. 대신 내가 다른 날 하루 대신 일해 줄게.” “알았어요.” 약속한 목요일, 초저녁 경애는 일찍 퇴근하지 않고 주방에 있었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신경을 쓰던 한씨아줌마가 서로 부축하듯 들어오는 두 남자를 보고 달려 나가 맞이했다. 그때 마침 화장실 계단에서 올라오던 경애가 힐끗 바라봤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는 것을 돕고 있었고 한씨아줌마도 그 옆에 서 거들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겨우 자리에 앉는 남자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몸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중환자였다. 돕는 남자가 한씨아줌마의 남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가가서 도울까 하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들어온 한씨아줌마가 음식 서빙을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양노원에서 계시는 분인데, 따져보니 우리 먼 친척뻘 되는 분이더라구. 무슨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데… 중증중독인데다 골수암까지 번져서… 한식다운 한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아마 마지막 외출이 될 거야.” 한씨아줌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리 칸막이 너머로 시선을 보내던 경애가 윽! 소리를 냈다. 겨우 좌정한 후 힘겹게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 수염과 머리카락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데다 퀭한 눈과 광대뼈가 거의 해골을 연상시키는 남자, 손까지 덜덜 떨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 ‘배라먹을 놈’, ‘개새끼’, 한성주였다. 경애의 태도에 한씨아줌마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목울대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 온몸을 조여 오는 전율. 경애는 애써 견디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흔들며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딴청을 부리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주저앉아지는 무릎을 겨우 조리대를 짚고 버텼다. 땀이 솟았다. 한씨아줌마가 들이대는 물컵을 받아 마셨다. 이를 악물고 최대한으로 태연을 가장하며 요리를 하고, 한씨아줌마의 요청 이상으로 성의를 다해 음식을 내보냈다. 오이소박이도 담아냈다. 교회모임에서 오이소박이를 맛있게 먹으며 칭찬하던 일이 떠올랐다. 물론 사단이 나기 전의 일이다. ‘빌어먹을. 왜 이 순간에 그런 일까지 떠오르는 거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정신이 제대로 있는지. 그저 둥둥 뜬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가득 먼지들이 들어차는 기분? 야구방망이로 된통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이럴까? 수습되지 않는 감정으로 허둥대느라고 한숨도 못 잤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었다. 분노도 울분도 더 이상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11월도 다 가는 마지막 금요일. 경애는 전날 밤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방에서 한씨아줌마와 부딪치지 않도록 비켜가면서 아무 일 없었던 듯 평소처럼 보내느라고 애쓰다 보니 오히려 뭔가 더 어색해졌다. 가끔씩 코웃음도 아닌, 한숨도 아닌 야릇한 헛웃음이 코를 통해서 나왔다. 오히려 한씨아줌마가 더 걱정스러운 눈으로 경애를 살폈다. “그 양반, 오늘을 못 넘길 거래.” 귓등으로 들었지만 경애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여울을 만들었다. 그때 제임스가 들어왔다. 저녁 9시경. 평소의 저녁식사 시간보다 좀 늦은 시간이다. 경애는 여울을 건너 뛰어 홀로 나갔다. 제임스는 지난 번 회식 때 고마웠다는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오늘 저녁 일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어요, 오이씨?” 자진해서 서빙을 하던 경애가 멈칫, 제임스를 바라본다. ‘오이’는 친근함을 표시하느라고 제임스가 붙인 경애의 애칭이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오이씨.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크리스티 피츠 파크로 가요. 거기 차를 세워두었거든요.” 알았다고 했다. 안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유리칸막이 너머에서 한씨아줌마가 두 사람을 향하여 윙크하는 것을 등 쪽으로 선 경애는 알아채지 못했다. 마주 보이는 제임스만 싱긋 웃었다. 모든 뒤처리를 한씨아줌마 몫으로 맡기고 조금 일찍 제임스와 함께 식당을 나왔다. 벌써 문을 닫은 가게들도 있었다. 공원이어선지 공기가 한결 싸늘했다. 서쪽 길가의 나무 아래 제임스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혹시 어디를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닌데, 어떻게 입막음을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제임스가 차 문을 열지 않고 차 뒤편으로 갔다. “오이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요.” 제임스가 트렁크 뚜껑을 열었다. 다가가서 트렁크 안을 들여다보던 경애의 눈이 커졌다. 어머나!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고 있는 차 트렁크 안에는 오이가 가득 실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오이, 이 오이로 오이소박이 담으면 얼마동안 먹을 수 있을까?” “…………?…………” “오이에게 부탁하는데, 이 오이로 오이소박이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한 번에 다 만들어주는 것보다 두고두고 조금씩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평생 동안.” “…………?…………” “모르겠어요? 오이씨? 나 지금 오이씨에게 청혼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경애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바늘밥이 터진 부대자루 같았다. 어디서 그렇게 웃음이 용솟음쳐 나오는지 자신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동안 웃어본 일이 없는, 숨겨져있던 웃음보가 터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어도 가시지 않는 웃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무 둥치를 손으로 짚었다. 생각 같아서는 공원의 잔디밭에 나뒹굴고 싶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웃었다. 지켜보던 제임스가 어깨를 들먹이며 따라 웃기 시작했다. 큰 입을 벌리고 제임스가 웃자 경애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큰 키의 우둠지에서 검은 피부 때문에 드러나는 제임스의 하얀 이가 마치 공중에 떠있는 팔찌 같아서였다. ‘무슨 팔찌가 공중에 떠있냐? 입도 크다’ 하면서 웃었고, 순간 아, 저 팔찌가 내 운명을 묵는 수갑이구나 하며 스쳤다. 이내 웃음이 잦아들면서 눈물이 났다. 허탈했다. 눈물을 감추느라고 우우우 이상한 신음소리까지 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제임스는 ‘오이,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웃는 거야? 우는 거야?’ 하며 따라 웃었다. ‘정말 오이소박이 하나 잘 키워야 할까 봐. 진수를 만날 때까지…’ 경애는 그 생각을 웃음 사이에 띄워 날린다. 둘이서 웃어 재치는 소리가 뒤엉켜 공원의 잔디 위를 비추고 있는 불빛 사이를 지나 밤하늘로 따뜻하게 퍼져 나갔다.  
194 간이역 소식 외1편/박관서 file
편집자
3331 2012-02-29
12.03월 22호 시  간이역 소식 박관서 풀벌레 울음소리 가득하다 이른 저녁 땅거미와 함께 찾아와 군데군데 무너진 역사 둘레 담벼락을 무시로 타고 넘어 풀수밭 가득히 밤늦도록 멈추지 않는 풀벌레 울음소리여 낯선 숙직실 얄팍한 선잠을 걷어내고 부스스한 얼굴로 나선 새벽 두 시의 작은 역사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벌레들의 울음소리여 아무런 인수인계도 손뼉치는 맞교대도 없이 떠나감을 준비하는 풀벌레들의 아우성 속으로 푸짐한 수육 한 접시에 소주 몇 병을 나눠 마시고 어둔 얼굴로 밀려남을 걱정하며 돌아가던 옛 동료의 뼈처럼 깊은 위안이 들려오고 간간이 먼길을 달려온 야간열차의 환한 불빛 맑은 기적소리에 묻혀 짙푸른 밤하늘의 별들 총총한 속삭임과 함께 지새는 한 밤이 어찌 슬픔뿐이랴 돌아서서 단단한, 흰 소금기둥으로 한 점 불빛으로 지켜내는 어둔 들녘은 또 이리 아름다워서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온몸 가득 돋아나는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신새벽 통근기차가 올 때까지 나는 전호등처럼 깜박깜박 잠들지 않았다 봄소식 어머니와 아내가 외출 나갔다 식도 들어내고 위를 잘라낸 어머니 근 석 달 동안 멀건 미음 한 두 수저로 하루하루를 때우던 칠순의 어머니 끍 끍, 온 삭신을 쥐어 비틀어 밭은 가래를 뱉어 낼 때말고는 한 점의 기력도 없이 나날이 졸아드는 팔다리 일어난 각질들 이불 옷 카펫에 폴폴 달라붙어 눈 흘기는 식구들이야 그러건 말건 소멸되는 것들은 다 홀로라는 듯 세상 무엇도 싫어 고개만 절래절래 피마자 씨알처럼 탱글탱글한 눈으로 속으로만 속으로만 파들어 가던 어머니와 아내가 목욕을 갔다 창틀 가득 피어난 연둣빛 햇살, 눈이 다 환하다 봄님이 오셨다 박관서/ 전북 정읍생, 조선대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 1996년 계간『삶, 사회 그리고 문학』신인추천. 제7회 윤상원문학상 수상. 시집『철도원 일기』간행. 한국작가회의. 리얼리스트100 회원. 현 호남선 무안역 근무. ddh21@hanmail.net 주소: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예술인촌 월선길 129-2 ddh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