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9호...
   2020년 05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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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2873 2014-11-03
205 도라지 피다 외 1편/이민숙 file
편집자
2902 2012-04-30
12.05월.24호 시  도라지 피다 이민숙 지금은 깊은 밤 희디흰 도라지꽃 아주 작은 망울 하나 보일 듯 사라질 듯 언제부터였을까 그 자리, 9층 아파트 베란다 끄트머리 고요하다 온 허공 숨 멈췄다 세상은 언제나 저 깊은 우물로부터 깨어난다 내 어릴 적 먼 새벽 샘물 길어 항아리에 붓던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 들리는 듯 사라져가는 듯 목숨 피워내는 것들 이 밤 가볍게 한숨 쉰다 붓질 없이 형체도 없이 허공의 흙 후벼 태어난 저 도라지꽃 눈 비끼면 날아갈 것 같은 천 길 낭떠러지 에 나를 세워버린다 아슬아슬 아슬아슬 새벽과 밤 사이 흰, 소리 없는 천둥 번개 칼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 돗자리에 누워 구름처럼 흘러나가고 있는데 칼 가는 소리 들린다 시스 스시 스스슥 남편 웬일, 저토록 뜨거운 눈빛, 칼을 가는 걸까 갑자기 더위 물러난다 저 날카롭게 빛나는 칼로 탁 잘라서, 내 병든 육체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절망의 꼬리 하나 휙 창밖으로 던진다면 붉푸른 핏방울들 안개 속 한들거리고 있는 애기단풍잎에 뿌려지고 노란 핏방울은 내 무의식의 은행잎에 물을 들이리 칼, 한 번도 제대로 갈아본 적 없는 나는 기억 속 썩은 혹, 욕망, 썩은 질투, 쓰윽 베어본 날 언제일까 누군가 갈아준 길 위의 칼 아닌 미련마저 던져 갈아 날카로운 칼날 아래 너덜너덜 곪은 발, 저 꼬리의 상처 싹둑 잘라 던지고 싶다 새 살이야 오르건 말건 꿈꾸듯 생경하게 몸통 하나인 저 고양이 내일 없이 오늘 피비린내 나는 저 고양이처럼 단애의 숫돌에 곧추 서서 내 휘청거리는 날개 버린다는 것, 칼을 간다는 것, 이민숙 약력 : 1998년 <사람의 깊이>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 한국작가회의 회원. 여수에 작은 도서관 ‘샘뿔 인문학 연구소’를 열었으며 소 박한 인문학적 사유의 시간을 통해 이웃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음.  
204 오늘 하루 외 1편/최영복 file
편집자
2934 2012-04-30
12.05월.24호 시  오늘 하루 하늘 -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대낮부터 흘러가던 낮달은 맑은 구름 위로 아주 천천히 미끄러지고 ... 땅 - 땅 따먹기 놀이하는 아이들 바로 그 옆에서 나란히 나란히 개미들은 애벌레를 끌어가는데, 발 빠른 생쥐들은 그 밑으로 나 있는 하수구를 챙기고 있더라고. 시간 - 옛 추억으로 우리가 유랑하는 사이에 오늘이라는 하루는 슬그머니 해거름하며 저물어 가고 있구먼 ! - 오늘 하루를 보내며 - 낮달 - 대낮부터 떠 있던 달은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며 새털구름 위로 천천히 흘러가고 -. 다람쥐 - 등산객이 식식거리며 오르고 있는 산길 옆 나뭇가지 위에서는 발 빠른 다람쥐가 도토리를 챙기고 ! 하루 - 우리가 가을이라고 하는 계절을 앓고 있는 사이에 오늘이라는 하루는 재빠르게 해거름하며 하늘을 또 다시 접수 하고 있구먼 ! 최 영복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공부 하였고, 서울보건 대학, 강원대학교 의과대학, 삼육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현재 대학 강의를 하면서, 보건학 관련 서적과 일반 교양서를 쓰고 있습니다. - 전화 : 010 - 5566 - 8494 이메일 주소 : choichar2002@Gmail.com  
203 아내는 미래다/고창근 file [3]
편집자
3175 2012-03-31
12.04월 23호 수필  아내는 미래다 고창근 봄이 왔다. 봄이 오면 우리집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게 있다. 그것은 마당가에 있는 텃밭에 땅을 갈고 씨앗을 넣는 일이다. 텃밭은 넓지 않아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데 이 날은 온 가족-이라야 큰놈이 객지에 있는 바람에 나와 아내, 고딩1짜리 아들 한 놈밖에 안 되지만-이 함께 일하는 날이다. 먼저 텃밭에 있는 가을에 묻었던 장독을 꺼낸다. 지난겨울에 동치미를 담았던 장독이다. 아들과 나는 일전을 겨루는 병사처럼 삽과 괭이를 쥐고 달려든다. 신발에 흙이 들어가고 이마에 땀이 날 즈음에 장독을 다 꺼내어 수돗가에 놓는다. 그러면 씻는 것은 아내의 몫. 이제부터 본격적인 일하기. 아들은 우선 쇠스랑으로 땅을 뒤집는다.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인데, 그 힘든 일은 우리집에 엥겔계수만 높이는 아들 녀석의 몫이다. 녀석은 그걸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만 덩치 큰 소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쇠스랑질을 하는 것 보면 역시 노동은 신성하다는 것을 느낀다. 녀석은 부정할 테지만 말이다. 다음은 내 차례. 쇠갈쿠리로 흙을 고르는 작업이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나면 골을 탄다. 좀 비뚤어도 상관없다. 다만 적당하게 파야한다. 너무 깊게 파거나 얕게 파면 씨앗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 일을 할 때면 꼭 아내를 부른다. 오늘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 씨앗을 넣는 일이다. 아내는 만물의 창조자답게 위엄을 갖추고 상추 씨앗을 골고루 뿌린다. 나는 씨앗을 뿌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노라면 어떤 엄숙함을 느낀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숭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아내가 씨앗을 뿌려야 안심이 된다. 언젠가 내가 뿌려봤는데 뭔가 어색했다. 그리곤 도대체 미덥지가 않았다. 씨앗이 날까? 안심이 안 되었다. 며칠 후 보면 역시 예상대로였다. 씨앗이 드문드문 난 것이다. 역시 씨앗은 아내가 뿌려야 한다. 태초부터 생명을 잉태한 것은 여자가 아니던가. 그 다음 씨앗을 덮는 일은 내 몫이다. 깊게 묻지도, 얕게 묻지도 않게, 적당하게 묻어야 한다. 나는 이게 아주 예술적이라 생각하는데 아내와 아들은 가장 손쉬운 일이란다. 이 위대한 일은 아내와 아들이 몰라주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은 끝. 이마엔 땀이 맺혔다. 이제 며칠 후면 싹이 트고 몇 주 뒤면 뽑아 먹을 만큼 클 것이다. 당연히 농약도 안 치고 화학 비료도 안 한다. 100% 무공해 식품. 그 다음은? 당연히 막걸리 마시는 시간이다. 일을 하고 난 뒤 마시는 막걸리의 맛을 아는 사람은 노동의 신성함을 아는 사람이다. 당연히 이 맛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마당에서 휴대용 카스레인지에 불판을 올려놓고 삼겹살을 굽는다. 나는 아내의 잔에 술을 따르고 아내는 내 잔에 술을 따른다. 이제 노동의 대가로 향연을 베푸는 것이다. 고기가 익으면 아들은 상추에 고기를 두 점씩 놓는다. 술을 마시는 속도에 비해 고기는 늦게 익기에 먹을 고기가 모자라는 데도 그렇다. 한 입에 고기 두 점씩이나? 엥겔계수만 높이는 이 녀석을 두고만 볼 수 없어 내가 호통이라도 치면 아내가 펄쩍 뛴다. “한참 커는 아이한테 왜 그래?” 그러면서 아이한텐, “많이 먹어라. 힘들었지?” 고기를 아들 쪽으로 밀쳐놓는다. 개코나, 쇠스랑질 몇 번이 힘들다고. 나는 투덜거리지만 아들은 내 표정을 살피곤 선수를 친다. “엄마, 손에 물집.” 제 엄마 코앞에 손바닥을 편다. 손바닥 중앙에 물방울처럼 물집이 돋아나 있다. 역시 일 안 하는 손은 틀리다. 나는 셈통이다, 하고 고기를 날렴. 집어 먹고 아내는 안타까운 눈길로 아들의 손바닥을 바라본다. 막걸리는 한 잔 두 잔으로, 어느새 한 병 두 병을 넘어서고 세 병 네 병까지 늘어난다. 이 정도면 일을 해서 술 마신 게 아니라 술 마시기 위해 일한 거다. 그렇다. 솔직히, 아내와 난 술 마시기 위해 일을 한 거다. 적당히 일을 하고 난 뒤 아내와 술 마시는 기분이란. 아내는 최고의 기분이란다. 물론 나도 최고의 기분. 아들의 요즘 생활, 진로문제, 아내의 학교생활, 나의 요즘 관심 분야. 밤이 늦도록 우리 가족은 향연을 벌인다. 또한 다음 날 아침 북엇국을 끓여놓는 아내. 역시 아내는 미래다. 문학웹진 <문학마실>편집인 소설집 <소도> <아버지의 알리바이> 서양화 개인전 1회  
202 감나무사다리 외 1편/박승민 file
편집자
2880 2012-03-31
12.04월 23호 시  감나무사다리 박승민 감나무가지를 잡고 있는 조롱박의 손 힘줄이 파랗다 나이를 한 살 더 한다는 건 허공으로 난 사다리를 오르는 일 지상의 낯익은 온기들과 멀어져 바람과 구름의 사원을 지나 낯선 별자리를 찾아 중얼거리며 가는 길 흔들려도 잡아줄 손이 더 이상 옆에 없다는 사실 아득한 꼭대기에서 누군가의 발이 후들거리는지 밤부터 울고 있었는지 내 손까지 내려오는 저릿한 통증 조롱박의 왼손이 감나무사다리를 올라 장천(長天)의 푸른 강을 넘고 있다 천공(天空) 스물두 살 때 폐에 구멍이 생기는 기흉(氣胸)을 앓은 적 있었지 웃으면 가슴이 바늘로 찔린 듯 그래서 웃음의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던 시절 어찌어찌 不惑 지나 天命을 알리라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는 아직도 반 뼘 바람구멍이 있는 듯 채우자마자 휙,,, 휘리리,,, 풍선처럼 빠져나가는 천공(天空)이 숨어사는 듯 늘 복대를 하고 깻단의 마른 몸 이쪽저쪽을 옮겨 놓으시는 음지마을 할매의 몸속에도 그런 살바람 쿨럭이는 구멍이 있는지 흙바닥이 거울인양 서울로 공무원 살러간 아들의 주름살도 보이고 중증장애 손녀도 보이고 종종 영감도 다녀가시는지 오늘은 부처님의 영험까지도 고구마줄기처럼 내려오시는지 흙의 법당 마루로 자꾸 고개를 숙이는데 숙이기만 하고 가끔은 고개 드는 것도 깜빡깜빡하시는데, 삼배 삼백배 일만이천배를 느릿느릿 채우고 내려가는 고샅길 너머 빨리 온 가을, 빨리 늙는 은행나무 옹이 곁으로 한창 불붙은 맨드라미들 붉은자줏 융단을 펼쳐들고 겹겹이 벽을 두르고 있는데  
201 영산강 외1편/ 최기종 file
편집자
3082 2012-03-31
12.04월 23호 시  영산강 최기종 병실에서 어머니 활짝 웃으셨다. 노인성치매 증상으로 먹은 나이 조금씩 까먹어서 이제는 갓스물이 되시어 인공때 노래 부르면서 복사꽃 화알짝 피우신다. 이것 걸리면 최근 기억부터 파먹는다고 어제는 맵고 맵던 시집살이 살더니 오늘은 인공을 살고 해방을 살던 처녀적이다. 그 많은 세월 참고 살았던 둑이 터졌는지 아침에는 구부러진 여울목에서 눈 흘기더니 지금은 눈꼬리 내리며 아들이 반갑다고 하신다. 주치의는 기억의 두께가 점점 내려간다고 마음의 폭이 점점 좁아진다고 했다. 이렇게 쑥물이 빠지다 보면 하얗게 색이 바래지는 것일까 이렇게 강이 밭아지다 보면 바닥이 드러나서 흐름이 멈추는 것일까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기만 해서 영산강 오니층처럼 요실금 앓는 것인지 너무 많이 까먹기만 해서 영산강 하얀 풀잎처럼 떠가고 있는 것인지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진 어머니 강둑에서 지팽이 짚고 아들이 반갑다고 하신다. 영산강 하구언에서 광주에서 나주에서 영암, 함평, 무안에서 밀려온 쓰레기들 플라스틱, 스티로폼, 페트병, 캔류, 나무조각, 신발짝, 비닐봉지 같은 것들 이제 더 이상 밀려날 곳 없어서 거대한 체증이 되었나 부유물질 쌓이고 쌓여서 한풀이 시위라도 벌이고 있나 밀려날 대로 밀려나면 새 길이 보인다고 하던데 여기는 별 하나 뜨지 않는구나 있는 것 없는 것 다 버리면 새처럼 날 수 있다고 하던데 변비통 잡념만이 바리바리 떠있구나 쓰레기들 밀리듯이 이 몸도 거대한 체증에 걸렸나 버려지는 뼈아픔에 걸렸나 물안개 낀 주룡포구에서 폐선 하나 가물거리는구나 최기종 195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남. <포엠만경> 동인, 교육문예창작회 활동, 1992년 교문창 시집『대통령 얼굴이 또 바뀌면』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나무 위의 여자』,『만다라화』, 『어머니 나라』가 있음. 목포작가회의 회장 주소 : 목포시 옥암동 1321번지 한라비발디아파트 108동 801호 메일 주소 : jogi-choi@hanmail.net  
200 괴물시집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3085 2012-03-31
12.04월 23호 시  괴물시집 서 하 아침부터 까챙이가 울어쌌더니 두툼한 택배가 왔는데요 우째 이런 일이 함께 2쇄에 들어간 오탁번쌤의 시집<우리 동네> 시 열한 편이 서하 시집<아주 작은 아침>에 갈구쟁이를 휘딱 걸치고 있었어요 우두망찰! 알고보니 내 시 열편은 오쌤의 시집 어느 갈피에 몽땅 쏘옥 안겨 있다네요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한눈 팔지 않은 사람은 시방 돌아앉으세요 뜨거운 밀회, 보리밭인지 물방앗간인지 스스럼없이 고의춤 끌런 핫아비와 새물내가, 문장과 문장이, 꼬장주 벗고 홍글래비처럼 그림자 꼬꾸장하게 비치었겟지요 싱싱한 모국어와 끗발이 저토록 편안히 몸 섞다니요 달콤하게 서로의 품안에서 백마 타고 자갈길 달릴 동안 먼지는 또 얼마나 은밀히 댓바람에 끊어졌다 휘어졌다 했을까요 아무리 배 채워도 허기가 멎지 않는 가오나시*도 울고 갈 시치미 딱 떼고 미동조차 없는 저 영악한 괴물! 우리 동네, 아주 작은 아침이 갈피갈피 온전히 껴안는 일, 엉덩이 뿔난 봄날, 만삭의 햇살처럼 두툼하네요 *가오나시: 애니메이션 ‘센과 치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아무리 배를 채워도 허기가 멎지 않는 괴물 달맞이꽃 남들 공부할 때 일하고 남들 다 잠 든 밤에 책을 펼친다 밀어낼 수 없는 잠이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몸을 점점 옥죈다 잠은 어디서 놀다가 이제야 산처럼 밀려오는지 볼펜 꼭지에 이마를 짓찧기 일쑤다 나를 잠들게 내버려 둬다오 몸이 맘 놓고 무너지도록 정신만 가래처럼 카악! 뱉어다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는데 잠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팔도 없고 다리도 없는 달빛은 왜 수런수런 번지는지 내 마음은 왜 환해지는지  
199 저녁노을 외1편/임명선 file
편집자
3613 2012-03-31
12.04월 23호 시  저녁노을 임명선 하늘 끝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보지만 정녕 끝은 아니다 인생의 끝인가 싶어 체념하려 해도 정녕 끝나지 않은 것인가 모든 사랑을 감싸고 가는 하늘 성자의 구름일러니 저 타는 붉은 저녁노을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하늘이 그려내는 누군가의 몸짓 성자의 몸짓! 손으로 그려내는 누군가의 몸짓 진정 아니야! 하루가 저물어 가는 끝없는 하늘가 내 마음을 앗을 듯 저녁 붉은 노을이 나를 부른다 소리 없는 성자의 언어로서 저기 붉은 노을 한 귀퉁이에 점 하나 꼬-옥 찍고 싶디 내 영혼의 무언의 점을 찍고 싶다 저 고운 성자의 붉은 노을에 심술을 부리고 싶은 욕망 아직은 덜된 나의 심성이 앳된 모습으로 해지는 붉은 노을 가에 머물고 있다 사랑의 인연설 처음엔 독이 되었던 사랑으로 맺었던 독한 인연 이었거늘 내 마음 안을 가득 매워버린 사랑으로 모습을 바꾸었네. 당신을 처음 본 모습은 꿈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직은 덜된 풋내 풍기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었어요. 세월이 물같이 흘러가면서 바람같이 훌쩍 지나가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이란 것을 알아가면서 당신의 꿈에 본 그 모습으로 변했지요. 사랑의 힘은 나를 바꾸었고 당신의 풋내 풍기는 덜된 모습을 시원스레 바꾸어 놓았어요. 진실의 냄새는 미움과 미움으로 가득 풍기던 내 깊-은 속내를 가득가득 채워졌지요 당신은 고마운 사람으로 진실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리매김 했지요 그것이 진정 사랑인가 봅니다. 내가 진정 거친 산 넘어 꿈길에서 힐끗 본 당신의 진솔한 모습인가 봅니다. 약력 春蒙 임명선 1957년 나주에서 출생 천안연암대학교 원예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졸업 현 나주시청 농업정책과 근무 2010년 산림문학으로 등단 산림문학 정회원  
198 지우개 외1편/신구자 file
편집자
3113 2012-03-31
12.04월 23호 시  지우개 신 구 자 지금 머리 속에는 지우개 하나 내 보폭만큼 함께 자라나면서 갈잎 갉아먹듯 사각사각 맛있게 뇌를 갉아 먹고 있는 모양이다 그제는 우리집 기둥 아들 생일을 콩까먹더니 오늘은 생각만 해도 아롱삼삼한 손녀 생일도, 무수히 꽃피고 꽃지던 속수무책의 그리움도 봄눈 녹듯 사르르 녹여버린다 멀쩡하게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도 기억의 괄약근이 풀어지면 멍하니 먼산 돌아서는 구름의 뒷꽁지를 쫓다 개울물에 빠지기도, 발길질 당하기도 한다 두렵다 큰길 접어두고 지름길로 달려오고 있는것 같은 저 무뢰한의 지우개, 살살 꼬드겨 꽃그늘 속에 코 박아 도끼자루 삭아내리도록 잠재울 수 없을까 돌부리에 걸려 무릅 팍, 꺾이게 할 수 없을까 송포역엔 경주에서 대구 오는 사이 두 번씩이나 새마을호를 마중하고 배웅해야 하는 무궁화호 열차 깃발 쥐고 흔들어 주던 역무원 대신 철로변에 마중 나온듯 줄지어선 개나리와 볼 붉힌 살구나무만 배웅하고 있다 봄햇살만 나른히 조을고 있던 송포연엔  
197 (중편)바타비아로 가는 항로 /이윤길 file
편집자
3652 2012-03-31
12.04월 23호 소설  바타비아로 가는 항로 1 배는 쉬지 않고 남지나해를 북상하고 있었다. 화물을 싣고 있고, 그 화물을 양륙할 항구가 지정되어 있는 한 머뭇거릴 아무런 이유는 없다. 바다는 잔잔한 편이었다. 자바 해 남쪽 바다를 서성이고 있는 열대성 저기압의 영향인지 항해등 불빛 속으로 실안개가 춤을 추고 있었고, 목덜미로는 습기 찬 바람이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어제 말라카 해협을 통항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말레이반도와 자바 섬 사이의 좁은 협수로인 그곳에서 돌풍이 휘몰아쳤는데, 그 바람에 갑판은 어디라고 없이 물기로 질퍽하게 젖어버렸다. 만약 남지나해로 들어선 다음에도 사정이 변하지 않았다면 앞길은 결코 지금처럼 순탄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앞으로는 큰 문제없겠어.” 선장은 마치 크루즈를 타고 세상 유람에 나선 관광객처럼 아주 무덤덤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여유로움일 것이었다. 2등항해사 장혜옥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03시 변침하는 거 잊지 말아.” 선장의 지시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재차 돌풍이 휘몰아치더라도 그 억양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2등항해사 장혜옥은 조타실을 나가는 선장의 뒷모습을 잠시 훔쳐보았다. 그녀는 물론 선장의 지시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배는 지금 028도의 침로로 전속력 항진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와 동지나해를 북상하는 배라면 반드시 채택하여야 하는 침로였다. 그리고 그 침로로 꼭 아홉 시간을 달리면 방금 선장이 지시한 변침점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침로의 정확한 유지가 항해의 핵심이자, 특히 항해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단 1도의 오차가 개입하여도 배는 영락없이 엉뚱한 바다로 굴러간다. 진수한 지 10년도 넘은 화물선 오션 글로벌 호가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와 경제속력인 13노트로 아홉 시간을 항주하면 남지나해의 아남바스 군도에 속한 망카이 섬을 지나치게 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르네오의 부속도서 가운데 하나인 망카이 섬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지나해를 북상하는 모든 배의 침로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새벽 세 시경, 오션 글로벌 호가 망카이 섬에서 침로를 변경하면 그 때부터 중국 해남도 인근의 서사군도에 이르기까지 향후 나흘 동안은 오로지 남지나해의 쪽빛 바닷물을 가르는 일만 남게 된다. 그 같은 여건에서, 만약 컴퍼스와 엔진을 비롯한 모든 항해 장비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거기에 기상이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조타실을 지키더라도 항해 결과는 똑같아질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변수가 작용한다. 항해란 원래부터 엉뚱한 마술로 사람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드는 요술쟁이인 것이다. 2 “2항사님, 수고하세요.” 오션 글로벌 호 2등항해사 장혜옥이 조타실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3항사는 벌써부터 계단을 내려갈 채비였다. 자정에 이르도록 눈을 멀거니 뜬 채 조타실을 지켰으니 폭신한 침대 생각이 굴뚝같을 만도 하다. “그래. 들어가 쉬어.” 일상적인 응답이었다. 그 순간부터 배의 운항은 전적으로 그녀에게로 넘겨졌다. 그녀는 플래시를 비추어 흑판에 적힌 선장의 지시 사항을 읽었다. - 03:00 a/co. 037. 어제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오면서 그녀가 손수 적은 내용 그대로였다. 3항사가 조타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그녀는 먼저 현재의 컴퍼스 눈금부터 확인했다. - 028도. 그 또한 틀릴 까닭이 조금도 없었다. 침로는 어제 오후 여섯 시, 싱가포르 해협 어귀의 이스턴 뱅크에서 오토파일럿 팅으로 전환된 이래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자정 무렵이면 앞서 말한 대로 새 침로로 변침된다.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참이라 흐릿한 항해등 불빛이 전부인 시야는 아무래도 깜깜 칠흑일 수밖에 없었다. 좌현 브리지 윙에는 등을 보인 워치 맨 한 명이 상체를 난간에 의지한 채 전방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배를 탄 지 10년도 더 된다는 미얀마 출신 갑판원 샌디다. 미래 어느 날 항해사가 되는 게 꿈이라는 그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한국 국적의 배만 타왔다고 한다. 외국인 선원은 샌디 혼자만이 아니다. 그를 포함한 세 명이 같은 나라 출신이고, 필리핀과 태국인이 각각 두 명씩이다. 거기에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 군을 보탠다면 승조원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외국인이다. 그게 한국 국적 화물선 오션 글로벌 호의 현 승조원 구성현황인 것이다. 오션 글로벌 호의 선원구성이야말로 다국적 혼성팀인 셈이다. 물론 한국 국적의 선박이니까 그 승선원들은 당연히 한국인으로만 짜여 지는 게 만 번 옳다. 하지만 승선 희망자가 많지 않은 오늘 날 승조원 정원을 채우지 않으면 출항 허가가 떨어지는 않는 선박안전법 규정상 부득이 모자라는 머릿수는 외국인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문제가 생긴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무작정 어느 한 나라 출신으로만 국한할 수 없다는 게 그것이다. 몇 해 전, 원양어선 패스카마 호에서 작업에 불만을 품은 조선족 선원들이 똘똘 뭉쳐 선장을 비롯한 한국인 사관들을 모두 살해한 사고도 멋모르고 여덟 명이라는 숫자적 우위를 부여한 결과였던 것이다. 미얀마 출신 워치 맨 샌디는 여전히 뚫어져라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포트 켈랑을 출항한 어제 밤에도 그랬다. 레이더를 확인하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녀석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쁜 감정은 숨어 있지 않았다. 추측컨대 아마도 2등항해사인 자신이 아직도 일반 화물선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조타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웬일인지 가슴이 설레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1만 톤급 육중한 선체를 내려다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고, 거대한 선체가 물결을 일으키며 짙푸른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격동적인 광경도 그랬다. 네 시간의 당직근무 동안 누구의 간섭이나 지시를 받음도 없이 오로지 그녀만의 판단과 조치로 거대한 배의 운항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긴장의 끈이 늦추어지지 않는 것이다. 동서양 요충지인 남지나해에는 통항선이 많다. 시야로는 오가는 배들의 항해등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먹물을 쏟아 부은 듯 한 칠흑의 밤바다여서 항해등은 더욱 명료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불빛이 너무 멀리 보인다. 실안개 때문일까. 그녀는 재차 배의 위치를 확인했다. GPS는 매초 매초 위도와 경도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녀는 옛날의 천문항해술에 대체하여, 현대과학의 결정체 가운데 하나인 GPS가 보이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해도에 옮겼다. 그게 당직 항해사가 수행하여야 할 기본적 책무가운데 하나였다. 그 일이야말로 전투에 임한 병사의 소총과 실탄에 해당한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배는 예정 침로로부터 엄청나게, 자그마치 6~7마일도 더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위치가 풀라우 다마르라는 작은 바위섬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섬과의 충돌이거나 좌초가 아닌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앞뒤 살필 겨를도 없었다. 무작정 조타실을 뛰쳐나가 우선 배의 선수 방향부터 살폈다. 만약 방금 위치를 알려준 GPS가 에러를 갖고 있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선수 방향으로 틀림없이 바위섬 하나가 버티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겁도 없이 돌진해 오는 배의 선수부를 사정없이 뭉갤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머리칼이 뾰족 곤두섰다. 하지만 칠흑의 밤바다가 그녀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러자 문득 그 섬에 등대가 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매 3초마다 한 번씩 섬광을 발한다고 해도는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배가 예정된 항로를 정확히 밟아 왔다면 그 등댓불은 지금 우현 방향 6~7마일 거리에서 명멸하고 있어야 옳았다. 그러나 사방 어디에도 등댓불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를 얼른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두 다리가 마냥 후들거렸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들쑤셔댔다. “워치 포워드!”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미얀마 워치 맨 샌디에게 전방을 잘 살펴볼 것을 지시하면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선수 방향 조금 우현 쪽으로 거무튀튀하고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물체 하나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완강한 돌진이라고 해야 옳았다.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그것은 마치 새벽 야음을 틈타 아군 진지를 향해 당당하게 굴러오는 적의 장갑차와도 같은 중압감이었다. 그 순간의 전율스러움이라니! - 섬이다! 풀라우 다마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방금 해도에서 확인한 풀라우 다마르라는 바로 그 섬이었다. 불과 몇 백 미터 남짓한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어둠 속을 표류하는 유령선처럼 섬은 소리도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뒤 살필 겨를도 없었다. 조타실로 뛰어든 그녀는 무조건 자이로컴퍼스 리피터의 중앙 놉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그러면 전타를 하는 것과 똑같은 타효를 얻어낸다. 키를 수동으로 전환할 여유도 없었다. 순간 타이타닉 호가 떠올랐다. 바위도 아닌 한갓 얼음덩이를 스쳤을 뿐인데도 불침을 장담하던 타이타닉 호 외판은 아주 쉽게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자이로컴퍼스의 헤드라인에 못 박혀 있었다. 지금쯤, 컴퍼스 눈금은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옳다. 그래야 뱃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꼼짝도 않는다. 그녀는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좀 전의 물기 머금은 바위섬은 지금쯤 아마도 뱃머리 가까이로 다가와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들려올 것 같았다. 두 다리가 마냥 후들거렸다. 이윽고 딸깍거리는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눈금이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선수 방향으로 보이는 카시오페이아 성좌가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드디어 뱃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우현 뱃전으로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로 물기 번질번질한 바위섬 하나가 마치 슬로비디오의 화면처럼 소리도 없이 지나치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얼마든지 게딱지와 소라고둥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 바위섬 꼭대기에 하얗고 장승처럼 높다란 구조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등대였다. 해도가 말한 바로 그 풀라우 다마르 섬의 등대였다. 하지만 그건 섬광이 꺼져버린 죽은 등대였다. 태양광으로 충전하는 배터리가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인지, 생명력을 잃은 허수아비였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단 몇 초만 늦었더라도 배는 한순간 타이타닉 호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섬을 들이받은 배는 그대로 중심을 잃으면서 전복하고 만다. 온몸의 힘이 죽 빠져나갔다. 정신이 멍한 게 마치 무중력의 공간 속을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휠 스탠드의 난간을 움켜쥔 채, 겨우 몸을 버틴 그녀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배가 원침로로부터 수 마일도 더 벗어났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의문은 곧 풀렸다. 자이로컴퍼스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녀는 천문항법의 논리에 근거하여 그것을 알아냈다. 마침 좌현 정횡 방향, 수평선 나지막이로 영롱한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동양에서는 직녀성이라 부르고, 그리스신화에서는 아폴로가 음악의 명수인 오르페우스에게 선사한 거문고라는 일등성 ‘비거’였다. 그녀는 곧 시진방위법으로 얻어낸 비거 성에 대한 진방위 수치를 자이로컴퍼스의 눈금과 비교한 끝에 지금까지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항진하게 한 원인을 알아냈던 것이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팽이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원리에 근거하여 아주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자이로컴퍼스가 자그마치 오른쪽으로 7도나 치우치는 엄청난 오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확인한 메인 자이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로터 케이스가 오른쪽으로 꼭 7도만큼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배는 원침로인 028도에서 7도가 가산된 035도의 방위로 항진한 셈이었던 것이다. 7도의 에러로 일곱 시간을 달리면 예정된 항로에서 대략 7~8마일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극히도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조타실에 나타난 선장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선장은 방금 전까지 배가 처한 아슬아슬한 상황을 금방 파악해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베테랑 선장이 그걸 모를 까닭이 없었다. “아이구나,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모두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거네.” 그게 한참 만에 입을 연 선장의 첫마디였다. “기계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게 선장의 결론이었다. “이거 액땜을 한 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늦게 브리지에 나타난 해군부사관 출신 1항사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3 2항사 장혜옥에게 오션 글로벌 호로 전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출항을 겨우 이틀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 동안 그녀는 미주를 왕복하는 4,000TEU급 컨테이너선에 2등항해사로 승선하고 있었다. 부산 감만동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떠난 배는 때로는 일본의 요코하마를 경유하면서 대권항법(大圈航法)으로 불과 보름여 만에 태평양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에 기항하곤 하였는데, 항해의 단조로움에 따분함을 느껴 다소간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을 때였다. 전선 사유는 병을 얻은 전임자의 하선으로 생겨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하선자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선주는 옳다구나 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여섯 척의 항해사를 대상으로 승선선박을 재배당하는 인사를 단행하여 보따리를 싼 항해사들이 이 배 저 배로 옮기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해군제독 출신인 선주는 무엇보다도 항해사들의 정신상태가 올바르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사고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그만의 독특한 지론과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걸 위해 선주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면서 항해사들에 대한 정신훈육을 맹렬하게 펼치곤 하였는데, 그 방법의 하나가 사관들을 곧 이 배 저 배로 전선시키는 일대 인사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선 명령을 받은 사관들은 짐을 꾸리면서 내내, 선주는 함대도 아닌 일반 해운회사에서 아주 철저하게 군대식 운용을 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꼭 모가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선주의 눈 밖에 나면 그것으로 해원의 생명은 곧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선주의 그 지론을 현장에서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또한 오션 글로벌 호의 선장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배에 승선한 날 곧바로 확인되었다. 선장은 승선신고를 하는 신임 2등항해사 장혜옥에게 마치 신병교육대의 훈련조교처럼 다음과 같이 카랑카랑하게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이거 원, 하필이면 여자 항해사라니!” 선장은 그렇게 마뜩찮아 했다. 불만은 곧 그녀에 대한 자질 평가로 이어졌다. “그래, 귀 항해사는 지금 이 배가 어느 항로를 뛰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마치 갓 배속된 신병을 닦달하는 부대 지휘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긴장한 채, 알고 있습니다, 동남아 항로입니다- 그렇게 답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건 항해사가 아닌 미얀마 출신 평선원이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답변이었다. 꼭 그 대답을 해야 하나, 하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선장이 가로채고 나섰다. “지금 이 배는 야만적인 해적 놈들이 들끓고 있는 동남아 일대를 뛰고 있다네!” 선장은 그처럼 단호했다. 전선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곧장 여객기 편으로 쿠알라룸푸르로 날아간 다음, 마중 나온 대리점 직원의 안내로 그곳에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포트 켈랑 부두에 도착하였는데, 그 시각 배는 이미 출항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원래 2등항해사가 공석인 배의 출항은 불가능하므로 선장은 그녀가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 항해사라니! 그게 꼬장꼬장한 오션 글로벌 호 선장의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임자의 하선 사유가 문제가 된다. 못난 전임자는 일주일 전쯤 계단을 굴러 떨어지면서 그만 한쪽 다리를 삐는 사고를 당하였는데, 내내 죽는 시늉을 하더니 급기야 추연골 헤르니아라는 괴상한 자기소견을 내세우며 하선을 자청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선장은 당연히 첫 마디로 핑계라고 일축했다. 선장의 단언에 의하면, 추연골 헤르니아라는 요상한 병을 빙자한 환자는 1년 전 승선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어떻게 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얼른거리는 동남아 항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자면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오션 글로벌 호에서 탈출하는 게 급선무 아닌가, 오로지 그 하나의 음모에만 골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아나? 아주 혼절할 만큼 두들겨 패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어떡하겠나? 정승도 제 하기 싫다면 그만이라지 않던가! 그래 두 번째는 따지지도 않고 녀석의 하선을 승낙해버렸지. 그게 선장의 후일담이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자네 역시 무슨 괴상한 병을 빙자할 요량이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멀쩡한 사내 녀석도 해괴한 병을 빙자하여 도망쳤는데, 여자로써야! 그게 제독의 첫 번째 대리인인 선장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걸 달리 표현하자면, 귀하와 같은 여자라면 차라리 얼마든지 한가하고 고급스러운 무슨 유람선이나 찾아보는 게 만 번 옳지 않겠느냐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었다. 하기는 선장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육지를 떠난 장기간의 항해는 무엇보다도 강인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바다란 분명코 변덕스럽기 짝이 없어서, 당장은 잔잔하고 고즈넉하다가도 언제 어느 때 악마의 망토를 펄럭일지 알 수 없다. 그 같은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며 장기간의 항해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려면 무엇보다도 마음 다짐부터 옹골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그녀는 아주 작심을 하고, 고집불통의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제가 이 배에 승선한 것은 여자도 남자 이상으로 항해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여자 운운하지 말라는 게 그녀의 주장인 것이었다. 고맙게도 선장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 다음 포트 켈랑을 출항한 오션 글로벌 호는 지금 중국 광저우 만의 황푸 항을 향해 속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말라카해협 통항은 몇 차례나 쏟아진 스콜로 해서 갑판이 축축해진 것 말고는 매우 순조로웠다. 다만 싱가포르를 앞둔 풀라우 쿠쿱(풀라우란 인도네시아 말로 섬이라는 뜻) 인근에서 수상한 고기잡이배 하나가 그물을 푸는 시늉으로 꼼지락거리고 있어서 바짝 긴장하였으나 다행히도 배들의 왕래가 잦은 항로여서 아무 탈 없었다. 그만큼 세상은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령 조난에 처한 표류선을 발견하더라도 인정에 끌리지 말라는 게 동남아 항로를 뛰는 선박 사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딱하다 싶어 무심코 접근하였더니, 표류자들이 갑자기 기관총을 꺼내들며 일순간 해적으로 돌변하기가 예사였던 것이다. 4 포트 켈랑을 출항한 다음의 일이었다. 방에서 한창 짐을 풀고 있는데 선장의 호출이 왔다. 캡틴 룸은 조타실 뒤쪽의 한 층 위에 있었다. “이걸 잘 보관하게나.” 방으로 들어서자 천천히 몸을 돌린 선장이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말했다. “무엇입니까?” 그녀가 물었다. “비상 선용금인데, 1만8천 달러야. 나머지 2천 달러는 내가 보관하겠다. 선용금 모두를 해적 놈들에게 몽땅 털릴 수야 없지 않나?” 원양항로를 뛰는 배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선주는 얼마간의 비상금을 선장에게 맡기는데, 그 돈의 상당액수를 2항사더러 따로 보관하라는 것이었다. 앞서의 미주를 뛰던 컨테이너선에서는 못 보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선장은 이번 항해에서 해적과의 조우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는 말인가. 결코 반가운 일일 수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선장이 곧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유비무환! 알았냐?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몹쓸 녀석들을 만난 적이 없지만 말이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봉투를 든 채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은닉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배든 마찬가지지만, 항해사 전용 공간이라야 그게 그거 아닌가.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배로 기어 올라온 해적 놈들이 선교를 점령한 상황에서 숨겨둔 선용금을 내놓으라며 총을 들이대기라도 하면 이놈의 봉투 때문에 어떤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비닐봉지에 싼 봉투를 냉장고 동결실 한 귀퉁이에 쑤셔 넣어버렸던 것이다. 항해는 아무래도 순조로울 것 같지 않았다. 출항 임박하여 본사로부터 메시지가 온 게 그 단서였다. 당초의 스케줄에 의하면 다음 기항지는 대만의 타이베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메시지는 당초의 스케줄을 무효로 한 다음, 새로운 스케줄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거 원!” 선장이 또 혀를 끌끌 찼다. 선장은 걸핏하면 혀를 끌끌 찼다. 평생을 바다에서만 살아온 그에게는 무엇이든 만족스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백이나 정력으로만 따진다면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벌써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에 아직도 현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같은 불타는 정열 덕분일 것이다. “이거 원! 우리더러 평생을 남지나해에서 살라는 거야, 뭐야? 올라갔다가 또 내려갔다가!” 수신지를 든 선장의 손등에 힘줄이 시퍼렜다. 본사가 타전한 새 스케줄에 의하면, 대만의 타이베이 대신 중국 광저우 만의 황푸 항으로 선수를 돌릴 것과, 그곳에다 포트 켈랑에서 적재한 화물을 모두 양륙한 다음 다시 지정된 화물을 싣고 재차 남하하여 자바의 자카르타 항으로 직항하라는 것이었다. 어선의 항로는 고기 떼가 결정하지만, 상선의 항로는 해치 속 화물이 결정한다. 따라서 일반 화물선이 화물을 찾아 이 항구 저 항구를 맴도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또 그 일로 태평양을 열두 번 왕복하라한들 무슨 항변을 할 것인가. 특히 남지나해를 주 항로로 하는 오션 글로벌 호 입장에서 보면 이번 항해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선장이 불만을 토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장의 불만은 메시지 끄트머리에 토끼 꼬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다음 문구를 보자 쑥 들어갔다. - ……따라서 금차 항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본사는 별도의 과외수당을 지급할 계획으로 있음. 귀선의 안전항해를 기원함. 마치 상급부대로부터 하달된 작전 명령서와도 같았다. 선장이 수신지를 해도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룸으로 돌아가자 다음에는 해군부사관 출신 1등항해사가 나섰다. “도대체 뭘 갖고 그러시는 거야?” 그러더니 눈을 번쩍 떴다. “뭐? 과외수당이라고?” 그의 견해인즉, 원래부터 월급만 꼬장꼬장 지급해 온 회사가 갑자기 무슨 까닭으로 과외수당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느냐는 것이다. 매번 당해본 경험 끝의 일이지만, 상황이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입을 쓰윽 닦고 마는 게 화물선을 부리는 회사들의 고약한 심보가 아니냐는 것이다. 돈 문제라면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선원들이 거대한 골리앗인 회사를 상대로 꼬치꼬치 대들고 따지는 것은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샤일록도 두 손 번쩍 들 구두쇠가 생돈을? 그렇다면 답은 뻔해. 이번에 실을 화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안 그래, 2항사?” 그렇게 그녀에게 동의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해군부사관 출신인 1항사는 원래부터 선주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로 말하자면 참수리 포술장을 하던 하사관 때는 야밤중에 NLL을 넘어 온 북한 경비정을 대파시킨 무공으로 훈장을 받았고, 전역 직전까지는 주력 구축함에서 조타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런 다음에는 복무 중 취득한 해기사 자격증으로 지금의 오션 글로벌 호에 승선하면서 새로운 바다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 세월이 어느덧 5개성상이라던가. 그런데 아쉽게도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선장으로 승진하지 못 하고 있다. 방금 작전명령문을 타전한 선주가 왕년에 함대를 쩡쩡 울려댄 해군제독 출신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승진이 이처럼 지연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흔쾌한 일이 못 된다. 그 이유를 2등항해사인 그녀는 해군부사관 출신의 지나치게 깐깐하고 소심한 탓은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출항하기 전 무심코 침실 문을 열었다가 목격한 일에서도 충분히 확인되고 있었다. 그 순간 해군부사관 출신은 치약을 묻힌 칫솔로 한창 비닐 바닥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선내를 마음껏 질질 끌고 돌아다니던 슬리퍼 그대로 드나들기를 예사로이 하던 침실 바닥을 칫솔로 박박 문지르다니! 그 순간 느낀 것이 저처럼 결벽성이 지나치니까 대범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깐깐한 소인배로 치부되는 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해군부사관이 내던진 메시지를 다음에는 그녀가 집어 들었다. - ……안전항해를 기원함. 마음에 걸리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해를 앞두고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것은 용기를 북돋우는 격려의 당부이자, 선주로서의 애틋한 바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말라카해협 통항을 앞둔 오션 글로벌 호 입장에서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멀쩡한 사람을 두고 공연히 안색이 나쁘다거나 건강에 유념하라고 곱씹는 것과 같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 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동남아 항로에 투입된 선박 처지에서 남지나해는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외나무다리였다. 말로만 망망대해지, 그곳이야말로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진 막다른 길목이자 악몽의 터널이 분명했다. 정작 들어서고 보면 육지 자락이라곤 눈에 띄지도 않는 광활한 바다가 분명한데도 해도에서 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섬들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항해를 하는 동안이면 브리지 사관들은 말 그대로 오금을 절이고 만다. 거기에다 요 앞 태평양을 뛸 때와는 달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해적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판이다. 해군부사관 출신 말에 의하면 앞 항해에서도 그랬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해적선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괴선박 하나가 몇 시간 동안이나 배 꽁무니를 따라붙고 있어서 그걸 떨쳐내느라 선원 모두가 마치 적의 총공격에 대비한 진지 속 병사들처럼 꼬박 뜬눈으로 밤을 하얗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요행히도 마침 이라크 앞바다의 페르시아 만으로 향하는지 일단의 미국함대가 전투대형으로 길게 줄을 잇고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그 대열로 슬쩍 끼어들었는데, 그 덕분인지 수상한 배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반 상선의 입장에서 말라카해협과 남지나해는 정나미 떨어지는 해적 놈들의 진짜 소굴인 것이었다. 2항사 장혜옥도 오션 글로벌 호가 처한 제반 상황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욱 국내 연근해가 아닌 외항선을 타기로 작정한 이상, 자신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 배만 골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오션 글로벌 호에 승선한 첫날, 자네 역시 무슨 괴상한 병으로 하선할 요량이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라고 한 선장의 말에서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었다. 5 당직근무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 온 2항사 장혜옥은 우선 침대에다 몸부터 털썩 내던졌다. 사지는 나른하였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게 미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육체는 상당 시간의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은 딴판이었다. 알맞은 실내온도와 폭신한 매트의 감촉이 더없이 안온하였건만 쉽게 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있으려니 풀라우 다마르 섬의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에서 맴을 돌았다. 몸을 뒤척이는데 머리맡으로 딱딱한 물체 하나가 손에 잡혔다. 짐을 풀 때 꺼내놓은 <In The Heart of The Sea>라는 두꺼운 책자였다. 오래 전 어느 고래연구가가 미국 포경산업의 본거지이던 낸터키트 섬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에식스라는 포경선이 고래에 받혀 난파하면서 바다에 내던져진 선원들이 겪은 끔찍하면서도 처절한 표류기였다. 처음에는 스무 명의 선원들이 세 척의 보트에 나누어 타고 표류를 시작하였으나 나중 구조되었을 때는 단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토록 표류하였던지 퀭한 얼굴에 피골이 상접한 두 생존자는 구조선이 다가가도 알아보지 못한 채 무언가를 열심히 핥고 있었다. 그게 죽은 동료들의 뼈 조각이었음을 안 사람들은 경악했다. 두 사람은 92일 동안이나 표류를 하는 동안 나중에는 동료들의 인육을 뜯어먹으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전율스럽기 그지없는 그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그녀는 자신도 언젠가는 그 같은 고립무원의 조난자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망념에 푹 빠져 들었다. 지금까지 허다한 조난기를 읽어 보았지만, 그 책만큼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책장을 펼쳤으나 시선은 헛돌기만 하였고,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상념이 머문 곳은 여자인 자신이 어떻게 하여 금단의 영역인 외항선에 승무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후회스러운 생각에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가 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것은 꼭 아버지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권유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아버지는 살아가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고기잡이배를 타기로 하였는데, 그게 그만 평생의 직업으로 굳어진 경우였다. 바다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서는 언제나 상큼한 소금 냄새가 풍겨났다. 특히 먼 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뉴스를 들은 다음이면 그 냄새는 더욱 농도가 짙었다. 높은 파도와 싸우느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바닷물에 찌들어 있었다. - 나도 자격증만 가졌다면 벌써 그놈의 선장이라는 것을 해먹었을 텐데. 동해안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는 채낚기선에서 나중 갑판장까지 한 아버지는 한 잔 술만 들이켜면 잠꼬대처럼 그렇게 한탄하기를 버릇으로 하였다. 그게 그녀로서는 멍에였던가. 어느 날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종자라는 이름으로 수색의 대상이 되었으나 며칠 후 수색선들이 앞 다투어 철수하면서 그만 기억 속에 파묻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중학을 다닐 때부터 그녀는 또래의 다른 여학생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유별나게도 콜럼버스와 마젤란, 그리고 섀클턴 등 숱한 모험가들이 겪었던 모험기가 환영 이상의 실체로 다가와 이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배를 타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양어선을 타고 남태평양과 대서양을 두루 다녀온 사촌오빠로부터 전해들은 외국 항구의 이야기들은 그녀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외국선박에서는 허다한 여자들이 사관으로 승선하여 얼마든지 자신들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고 있다는 대목이 그녀를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귀항하지 않은 아버지의 빈자리는 순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동도 트기 전에 집을 나선 어머니는 어시장에서 마련한 생선을 함지박에 하나 가득 담아서는 머리에 인 채 먼 시골길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 처지에서 대학진학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녀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바다 계통의 대학으로 진학하여 외국선박에서처럼 사관으로 승무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자가 승선 가능한 외국으로 나가는 건 어떨까. 그 같은 궁리는 꼭 바다에 뼈를 묻은 아버지의 한이나 미련 때문일 수는 없었다. 세상은 날로 급변하는데, 한국은 아직도 근대 이전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배에 타면 재수 없다는 말이 아직도 횡행하던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여자가 배에 타면 안 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심지어 어느 고전소설에서는 출항하기에 앞서 용왕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친 다음에야 비로소 돛을 펼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야만 안전항해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도대체 삼면이 바다인 어엿한 해양국이면서, 바다를 공포와 지옥의 세계로만 치부하는 게 이 나라의 오랜 인식이자 관념인 것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96년 가을, 영도에 자리 잡은 한국해양대학이 그 미신을 타파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 여파였던가. 그 3년 후에야 해군사관학교도 여자생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니 영도 대학의 결단은 참으로 선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캠퍼스에는 기숙사까지 마련해 두고 있고, 학비도 전액 국고로 지원하고 있다는 대목은 그녀의 마음을 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보란 듯이 동남아 항로를 뛰고 있는 화물선의 2등항해사로 어엿이 승선해 있는 것이다. 순간, 그녀의 망막 속으로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학 동안 친구 이상의 정을 나누어 온 남학생이었다. 미래의 멋진 해기사답게 매사 적극적이면서 활달하기 그지없는 그의 성격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캠퍼스 부두에 나란히 앉아 우람하기 그지없는 실습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우리도 미구에 저처럼 멋들어진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거라며 얼마나 마음을 부풀렸던가. 그런 그가 졸업 임박하여 스스로 승선을 포기한다고 말했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가 그 이유라고 하였으나 구차한 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귀한 해기사 자격증이 아깝게도 휴지가 되어버렸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련 없는 헤어짐이었고, 그 뒤로 피차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6 망카이 섬에서 변침한 다음에도 바다는 여전히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가 잔잔한 것은 바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귀밑 머리칼을 휘날리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의 항진에 의한 대기의 심술궂은 희롱 때문일 것이다. 남지나해의 뜨거운 열기가 갑판으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한바탕 쏟아진 스콜 덕분에 더위는 한 풀 꺾여 있었다. 때때로 몸통 굵은 날치가 뱃전 물결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열대 해역의 날치는 몸통이 크다. 한껏 날개를 벌리고 허공을 날 때의 몸매는 프로펠러 단발기에 영락없다. 그래서 밤사이 방향을 잘못 잡거나 혹은 된 바람을 이겨내지 못해 잘못 갑판에 떨어진 놈들은 선원들의 더없는 별식이 된다. 배기가스의 열기로 가마솥만큼이나 뜨거운 연돌 속에 잠깐 넣어두는 것으로 날치는 꽁치 맛을 내는 훌륭한 소금구이로 변모하는 것이다. “2항사님, 이거 하나 드실래요?” 미얀마 출신 샌디가 날개도 뜯어내지 않은 갓 구워낸 날치 한 마리를 내민 적이 있었다. “맛있어?” 그 호의가 너무 고마워 그녀가 물었다. “그럼요. 꼭 고등어 맛이거든요.” 거무스레한 피부여서 배시시 웃는 입술 사이의 치아가 더욱 하얗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다던가. 어디에도 천적(天敵)이 보이지 않는데, 날치 떼가 일제히 바닷물을 박차 올라서는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고 있다. 필경 오션 글로벌 호가 일으키고 있는 거대한 물결 때문이리라. 무슨 까닭인지, 돌고래와 판이하면서도 돌핀이라는 같은 이름을 얻어낸 만다이라는 물고기는 날치 떼를 보면 한사코 따라붙는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기운이 소진되어 바닷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날치를 천적인 만다이는 한입에 집어삼키는 것이다. 다음날도 기상은 여전했다. 다만 멀리 아마득한 수평선 낮게 비를 머금은 구름덩이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만, 걱정할 일은 못 되었다. 필경 두어 차례 스콜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것은 끝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녀가 주간당직을 끝낼 시각이었다. 시간은 15시 45분이 되어 있었다. 다음 당직자는 해군부사관 출신이었다. 오랫동안 해군에 몸담아서인지 시간관념이 투철하기가 자명종 시계 그대로였다. 우정 일깨우지 않더라도 자로 잰 듯 정확한 시간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었다. 그걸 보고 그녀는 군대란 사람을 정밀기계로 만드는 공장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미스 장, 수고했어. 가서 쉬도록 하게.” 해군부사관 출신은 2등항해사라는 엄연한 직함을 두고도 장난기 섞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른다. 처음에는 무척 거슬렸다.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건가. 아니면 치밀하게 연출하는 신종 성희롱인가. 하지만 별다른 악의가 엿보이지 않아 그냥 흘려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되어도 통 나타날 기미가 없다. 도대체 정밀기계가 웬일일까. 깊이 잠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해군부사관 출신은 결국 정시를 넘겨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직교대는 정시보다 15분 빨리 이루어진다. 항해일지 정리를 마친 그녀는 결국 계단을 내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했다.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좀 더 세게 두드렸다. 역시 무응답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복도를 꺾어 돌아 살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예기치 못한 목소리를 들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보아 해군부사관 출신이 틀림없었다. “3번 해치야. 거기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방금 해군부사관이 말한 3번 해치에는 포트 켈랑에서 선적한 화물로 가득 차 있다. “조심해. 누구도 알아서는 재미없으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염려 마세요, 하고 동조했다. 의외에도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였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재빨리 조타실로 뛰어 올라갔다. “미스 장, 수고했어.” 정시에서 20분도 더 지나 조타실에 모습을 나타낸 해군부사관 출신이었다. “좀 늦었네.” 멋쩍은 웃음이었다. “괜찮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의아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 3번 해치야. 거기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해군부사관 출신의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 그녀는 포트 켈랑을 출항하기 전 선장이 세 명 항해사 앞에서 메시지를 읽어 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 해군부사관 출신은 ‘틀림없이 이번에 실을 화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안 그래, 2항사?’라고 동의를 구하기까지 했었다. 그걸 놓고 해군부사관 출신은,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화물이던가 아니면 불법적인 화물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마약일까, 금괴일까. 아니면 세상을 발칵 뒤집어엎을 만큼 무시무시한 비밀 병기를 싣기라도 했단 말인가. 적하목록에는 다만 일반잡화로 되어 있는 게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어쨌거나 지금 자신이 승선해 있는 오션 글로벌 호는 본의든 아니든 간에 어떤 알지 못할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항해를 완료하는 대로 과외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본사의 제의를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 순간의 미묘함도 있었다. 7 남지나해를 북상하면서 세 번째로 맞는 새벽 무렵, 방금 수평선을 딛고 솟아오른 보름달이 잔잔한 바다에 은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달을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곳은 고향 마을이라던가. 문득 지금도 여전히 먼 시골 길을 맴돌고 있을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세월의 연륜이 더한 만큼 주름은 깊어지고 손마디는 더욱 거칠어져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판다린 갑을 통과하면서 2등항해사 장혜옥은 침로를 다시 015도로 변침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015도에서 자이로컴퍼스의 오차 수치인 7도를 뺀 008도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항해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배의 조종이 자신의 손끝 하나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벽시계는 정확하게 새벽 2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는 줄곧 경제속도인 시속 12노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가 10년도 넘은 화물선이 그만한 속력을 갖고 있다면 그건 우량아인 편이었다. 시야 어느 곳에서도 불빛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외로운 항해였다. 따분한 느낌도 들었다. 기지개라도 켜고 싶었다. 문득 읽다 만 난파선 에섹스 호 뒷이야기를 읽는 건 어떨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행위야말로 항해사 본분을 망각한 짓이다. 그녀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고자 하였다. 그 같은 정갈한 근무 자세가 바위섬 풀라우 다마르에서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시오페아 좌는 더욱 고도를 높이고 있었고, 그 무렵부터 선수 좌현 방향으로 아주 낮게 폴라리스(북극성)가 수줍게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북극성은 눈어림으로 대략 10도 가량의 고도를 갖고 있었다. 북반구에서 북극성의 고도는 배의 위도와 일치한다. 천문항법에서는 이를 극성위도법이라 한다. 따라서 굳이 GPS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위도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다. 곧, 방금 변침을 단행한 판다란 곶의 지리상 위도가 정확하게 북위 12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뱃전으로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물결 틈으로 야광충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다는 수많은 생명체로 충만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는 야광충들은 새우나 규조 따위의 플랑크톤이 틀림없었다. 물속 유기물질을 섭취하면서 자라난 플랑크톤은 멸치나 전갱이의 먹이가 되고, 이들 회유성 작은 물고기는 참치나 상어 등 대형어류의 포식 대상이 된다. 이를 사람들은 바다라는 대자연에서 항용 벌어지고 있는 먹이연쇄라 말한다. 결국 바다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신비와 마법의 별천지인 것이다. 스웰이 넘실거리는 수면으로 물속에 잠긴 밤하늘의 별들이 배의 부단한 요동으로 일렁일렁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새벽 네 시 15분 전, 정확하게 해군부사관 출신이 브리지에 나타났다. 어느 새 교대 시간이 된 것이다. 어머님 얼굴을 떠올리고, 에섹스 호 표류자들의 사투에 경악하고, 북극성을 벗 삼고, 그리고 바다라는 대자연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을 마음껏 그려보는 동안 네 시간이라는 고독한 당직근무가 끝이 난 것이다. 이제 브리지는 해군부사관 출신에게로 넘겨졌다. 방으로 돌아 온 그녀는 근무복 차림 그대로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온 몸을 조이고 있던 나사들이 깡그리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현창 너머로 희끗한 플래시 불빛을 보았다. 처음에는 환영인가 하였다. 여명까지는 아직도 한참이었다. - 3번 해치야. 거기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문득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에게 은밀히 건네던 해군부사관 출신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떠올랐다. 그 속삭임에 인도네시아 출신은 아무 염려 말라고 응답했었다. 한국 선박을 오래 탄 인도네시아 출신은 한국말을 제법 잘 구사했다. 해군부사관 출신은 자신의 음모에 만만한 인도네시아 출신을 끌어들인 게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알지 못 하는 무슨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뿌리칠 수 없는 궁금증이었다.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복도로 나갔다. 그 시각 복도는 비어 있었다. 백열등 불빛이 흐릿했다. 그녀는 우선 살롱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해군부사관 출신이 인도네시아 출신 3기사 마르코스와 은밀하게 속삭이던 곳이다.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살롱은 비어 있었고, 빈 찻잔 두 개만 뒹굴고 있었다. 그 옆, 상갑판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밤공기는 서늘했고, 곧 동이 트려는지 한쪽 수평선이 희붐해지고 있었다. 문득 얼른거리는 불빛을 보았다. 메인 데크 3번 해치 부근이었고, 불빛은 두 개였다. 그녀는 어둠을 방패삼아 살금살금 브리지로 올라갔다. 양쪽 윙을 살폈으나 역시 예상한 대로 워치 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확신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메인 데크의 불빛은 인도네시아 출신 3기사와 워치 맨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해군부사관 출신이었다. “미스 장, 잠이 오지 않아?” 가슴이 철렁하였으나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워치 맨 보이지 않네요.” 그 말에 해군부사관 출신이 움찔했다. “서드 엔지니어(3기사)와 갑판 순찰을 돌게 했다.” “메인 데크 쪽인가요?” “별거 아냐! 미스 장은 가서 잠이나 자라고.” “안전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려고요?” “매사 자상한 건 좋지만, 너무 지나치면 그건 탈이 될 수도 있어. 그래서 부탁하는데, 내가 하는 일에는 제발 좀 모르는 척 해줘, 응.” 산호해 바위틈에서 곰치를 만난 돌돔 처지였다. 그대로 물러서는 게 상지상책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방으로 돌아왔으나 미심쩍은 생각은 쉽게 털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해군부사관 출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8 장기간의 항해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둘러보면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와 그 바다를 체육관의 돔처럼 뒤덮은 하늘뿐이다. 거기에 마주치는 사람이라야 제한되고 각인된 몇몇 선원들. 무료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해 선원들은 간혹 장난을 친다. 해치 속 화물의 포장을 뜯어낸 다음 갖가지 내용물을 점검하여서는 적당한 메뉴가 발견되면 그것으로 퇴화한 미각을 되살리는 따위의 짓이다. 고급 비스킷이나 냉동 육류가 얻어걸릴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잘 정제된 고급 위스키가 튀어나올 때도 있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화물의 손상이나 분실은 흔한 일이다. 설령 클레임을 거는 화주가 나타나더라도 항행 중 조우한 태풍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걸 문제 삼는 화주는 없다. 해군부사관 출신은 어쩌면 그 같은 유희에 맛을 들인지도 모른다. 그는 때때로 병마개를 딴다. 체스터에 숨겨둔 위스키가 그의 심신을 달래는 데는 그저 그만이다. 서해교전 때 눈앞에서 스러져간 부하 수병들의 얼굴이 얼른거릴 때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임무와 관련한 실수를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방금 두 명의 외국인 선원을 갑판으로 내려 보낸 것일까. 위스키 병이 바닥나서인가. 온갖 잡화로 가득한 화물 뭉치 속에 위스키는 빠지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그건 비도덕적인 일이며, 결단코 칭찬할 일이 못 된다. 더욱 1등항해사로 말하자면 그 같은 행위를 일삼는 선원들을 단속해야 할 최고 책임자가 아닌가. 어쨌거나 제발 엉뚱한 말썽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그녀는 고대했다. 그런데 날이 밝으면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2항사 장혜옥은 갑판으로부터 왁자한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 일곱 시 무렵이었다. 잠자리에 들고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소란은 틀림없이 해군부사관 출신의 해치 수색작전의 결과라고 그녀는 단정했다. 어쩌면 조타실에서 병을 거꾸로 치켜들다가 선장의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그 혼자만의 자유 영역인 방에서라면 모를까, 조타실은 사정이 다르다. 비록 제독 출신은 아니지만, 선주 이상의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완고하기 그지없는 선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창 남지나해 바닷물을 헤치고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야 할 배가 기관을 끈 채 타력만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었다. 그녀는 결국 잠을 포기하고 갑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 배가 멈춘 까닭을 알아냈다. 배 주위로 많은 부유물이 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난파선의 잔해임이 분명했다. 박살 난 널빤지 조각도 보였고, 눈을 시리게 하는 붉은 색깔의 구명재킷도 보였다. 고기잡이에 나선 소형 목선 하나가 거대한 화물선 선체에 정통으로 들이받힌 게 분명했다. 동남아 해역의 고기잡이배는 소형선이 대부분이어서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도 않는다. 주낙 깔기를 마치면 두어 시간 대기를 하게 되는데, 호롱불 하나 밝히지도 않고 배를 띄워둔 채 잠이 든 탓으로 앞길이 바쁘기만 한 일반 상선들의 충돌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 충격 또한 미미하기 그지없어서 대형선들은 알아채지도 못 한다. 그 날 아침의 참극도 그 경우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에도 생존자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침몰선은 도대체 무슨 고기를 잡으려다 변을 당한 것일까.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런 한가한 생각을 했다. 작은 고깃배가 한가로이 낚시를 드리울 만큼 육지는 가깝지 않았다. 지금도 거리를 정확히 외우고 있는데, 그곳은 중국의 하이난다오로부터 적어도 1백마일 이상 떨어진 한바다가 된다. “1항사,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장이었다. 그만한 소란이었으니 선장인들 깨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충돌사고입니다.” 해군부사관 출신의 대답이었다. 잠시 조용하였으나, 이내 선장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배를 세운 거야?”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메이데이라도 수신했나?” “그건……아닙니다.” 그러자 선장이 버럭, 역정을 냈다. “이거 원! 자네는 그렇게도 한가한가?” 다시 항해가 재개되었다. 널브러진 잔해를 피해 배는 반 바퀴나 원을 그렸다. 배가 일으킨 파도가 부유물들을 한곳으로 끌어 모으면서 일렁일렁 그네를 태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배는 드디어 광저우의 황푸 항으로 들어섰다. 고대 적, 상아와 비취 등 진귀한 보물을 탐낸 진시황에 의해 몇 차례나 경략된 중국 남부 지방의 광저우는 청나라 시대에 아편전쟁의 무대가 되었을 만큼 번영과 쇠퇴를 반복한 역사 속의 성도였다. 그게 오늘에 이르러 철강․조선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번창하면서 해외무역의 허브 항으로 떠오른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화물의 종류도 많았을 뿐 아니라 포장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그야말로 해상운송물의 총체적 전시품인 것이었다. 오션 글로벌 호는 그 항구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포트 켈랑에서 선적한 화물 양륙을 끝낸 다음 다시 자카르타로 운송할 새 화물을 받아 싣기까지의 체항 기간이었다. 자카르타로 운송할 화물은 많았다. 다섯 개 해치를 모두 채우고도 화물이 넘쳐 부득이 12피트 중형 컨테이너 한 짝은 갑판에 적재할 수밖에 없었다. 악천후에 대비하여 와이어로프로 튼튼히 고정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화물 적재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웬 일인지 해군부사관 출신이 직접 갑판을 쏘다니며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일이었다. 화물의 적하와 양륙작업은 전적으로 2등항해사 몫이다. 그런데 그는 적하목록과 화물을 꼼꼼히 대조하면서, 미심쩍다 싶으면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 극성까지 떨었다. 좀체 없던 일로, 그렇다고 그를 만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샘플 한두 개로 충분하지 않나?” 시간이 지체된다는 한 가지 이유로 선장이 그렇게 한 차례 제동을 걸었을 뿐이었다. 침실 바닥을 칫솔로 박박 문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지나친 결벽증도 일종의 병이라면, 결과적으로 고질적이라고나 해야 할 1항사의 그 병으로 한 가지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를 붙잡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한창 12피트 컨테이너를 적재하고 있을 때였다. “1항사님, 이놈 좀 보십시오. 허락도 없이 선미갑판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태국 출신 기관원이 중국인 한 명을 1항사 앞으로 끌고 왔다. 1항사 면전에서 사내는 무조건 도망치려고 외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왼쪽 광대뼈를 거쳐 턱밑까지 깊게 납빛 흉터를 가진 인상이 험악한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상처를 입을 때 안구까지 탈이 난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예리한 칼끝으로 길게 내려 그어지지 않은 한 결코 생겨날 수 없는 흉측한 상처였다. “당신 중국인이야?” 1항사가 안전모를 벗으며 서투른 중국말로 물었다. 이마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답 대신 사내는 한사코 1항사로부터 멀어지려고 버둥거렸으나 태국 출신 기관원이 워낙 허리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사내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외국 항에 기항한 화물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보세구역이 된다. 양륙하거나 선적되는 모든 화물은 세관 당국에 의해 철저한 검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불법적인 화물이 되면서 엄격한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밀수품인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 당해 선박이나 화물과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든 연고를 갖지 않는 한 함부로 선박에 오르내릴 수 없다. “너, 도둑놈이야? 아님 밀항 꾼인가?” 1항사의 아주 단정적인 닦달이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여전히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1항사가 둘러선 선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외국 항구에서 부두에 배를 대고 있을 때면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곳이 차이나라면 더욱 그렇다. 중국은 아직도 자유가 넉넉하지 않다. 봐라, 러시아가 철의 장막을 거둬내고 개방하면서 자유경제 체제로 전환하자 맨 먼저 생겨난 것이 미국처럼 마피아와 약(마약)장수였다. 사회주의 때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가 달라지자마자 사람들 마음이 먼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밀항꾼들이 득시글거린다. 앞으로 이런 놈이 다시 갑판을 어정거릴 때면 우선 네놈들부터 혼 내주겠다!” 서슬 퍼런 1항사의 고함소리에 선원들이 주춤했다. 한 선박의 1등항해사라면 잘못을 저지르는 선원들을 강제 하선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그게 외국인 선원들이 항해사관을 겁내는 이유다. 갱웨이라고 한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면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를 걸쳐두는데, 현문이라고 하는 그곳 갑판에는 반드시 한 사람의 선원이 배치되어 승하선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검문한다. 특히 정박 중인 군함에서는 당직 장교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누구누구 승함!’ 또는 ‘누구누구 하함!’ 등의 구령으로 요란하기 그지없다. 그만큼 갱웨이는 정박선의 가장 중추적인 메인 게이트여서,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배에 오르거나 내릴 수 없게 되어 있다. 허락 없는 승하선은 무단침입으로 간주되어 당장 현지 경찰에 신병을 넘길 수도 있다. 더욱 오션 글로벌 호 1등항해사로 말하자면 오랫동안 엄격한 규정 속의 함상 생활이 몸에 밴 해군부사관 출신이 아닌가. 문제는 한창 화물 선적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별도로 현문당직자를 배치하지 않는 데 있었다. 부두에는 세관원이나 경비원들이 산재해 있고, 선상에서는 작업이 분주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그 같은 상황에서 구태여 당직자를 따로 배치하지 않더라도 몰래 숨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디에든 구멍은 있다. 가령 한창 작업 때의 선미갑판이 좋은 예다. 갑판은 비록 눈코 뜰 새 없이 작업으로 분주해 있지만, 기관원들이 기계를 점검하느라 모두 엔진룸으로 몰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선미갑판은 비어 있기 십상이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뱃전을 기어오를 수 있다. 왼쪽 뺨따귀로 깊은 납빛 상처를 새기고 있는 녀석도 아마 틀림없이 그 허점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 틈에 태국 출신 기관원이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불법 침입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1항사가 선내질서 유지에 그토록 예민한 것은 그 자신이 오래토록 해군부사관으로 함정 생활을 한 덕분일 것이다. 전역하자마자 그가 오션 글로벌 호에 승선하여 처음으로 마닐라 항에 기항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배는 접안 차례가 올 때까지 잠시 내항 한 곳에 닻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선수갑판에 예비해 두고 있던 계류삭 한 코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중에 추정된 일이지만, 좀도둑들이 닻줄을 타고 기어 올라와 방수제이면서 비중도 낮은 폴리에틸렌 계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계류삭을 통째 바닷물로 끌어내린 다음 마치 사행(蛇行)하는 바다뱀처럼 감쪽같이 육지로 끌고 가버렸던 것이다. 1항사가 납빛 상처의 중국인을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그 같은 악몽이 되살아나서였다. “아님, 그럼 공짜로 자카르타에 가려고 했단 말이야!” 그러고 나서도 해군부사관 출신의 닦달은 그치지 않았다. “아닙……니다.” 태국 출신 기관원의 손아귀에 붙들린 사내는 사색이었다. 뱃전 난간까지 밀린 사내가 시선을 문득 부두 쪽으로 보냈다. 그곳에 검은 선 그라스를 낀 또 다른 사내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 녀석과 한 패란 거야?” 그렇잖아도 1항사는 아까부터 부두 가까이에서 내내 선적작업을 훔쳐보고 있던 선 그라스의 사내가 마뜩치 않았다. 그가 적하목록과 화물을 꼼꼼히 대조하는 동안 마피아 조직의 부두목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시종 날선 눈빛으로 갑판을 넘겨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1항사로서는 아직도 포트 켈랑을 출항하기 전 본사로부터 받은 지시문에서 과외수당 어쩌고 하는 대목을 보고, ‘그렇다면 답은 뻔해. 이번에 실을 화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안 그래, 2항사?’라며 의문을 제기했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해군부사관 출신은 결국 수상한 사내의 엉덩이를 자신의 구둣발로 힘껏 내지른 다음 배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그 여파 때문이었을까. 선적작업을 끝내고 출항을 앞둔 저녁 시간에 상륙을 나갔던 해군부사관 출신이 배로 돌아오던 길에 일단의 괴한으로부터 기습 폭행을 당하는 의외의 사고를 당했다. 괴한들은 혼자인 그를 다짜고짜 각목으로 난타한 다음 지갑과 쇼핑 물 등을 챙겨 바람처럼 사라졌는데,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도둑의 짓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만약 그 순간 부두 경비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해도 다행이야.” 선장이 위로하였으나, 1항사는 이빨을 우두둑 갈았다. “바로 그 자식이야!” 오른쪽 어깨에서 팔목까지 칭칭 붕대로 동여맨 해군부사관 출신은 분함을 참지 못 했다. 왼쪽 눈두덩으로 멍 자국이 손바닥만큼이나 번져나 있었고, 뒷머리도 살점이 찢어져 크게 부풀어 오른 판이었다. 아예 죽이기로 작정한 무자비한 폭행에 틀림없었다. “1항사님, 누가 말입니까?” 붕대를 처매면서 2등기관사가 물었다.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한 그는 선내에서 발생하는 웬만한 안전사고 끝의 상처 부위는 제법 완벽하게 처치해 낼 만큼 돌팔이 이상의 봉합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 장궈이란 놈! 색안경을 끼고 12피트 컨테이너 박스를 지키고 있던 놈! 바로 그 마피아가 틀림없어!” “뭐라고요?” 물론 2기사가 그 내막을 알아들을 턱이 없다. 그는 선적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내내 말썽을 부려 온 발전기를 점검하느라 기관실에만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이맛살을 찌푸리며 선장이 듣고 있었다. “틀림없다고요! 나를 공격할 때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로 콧잔등을 가리고 있었지만, 선 그라스를 낀 꼬락서니가 그 자식이 틀림없었다고요! 그 새끼가 컴컴한 부두에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 “그 놈은……화물을 선적하는 동안 한시도 부두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컨테이너 내부를 확인하겠다고 하니까, 이미 세관 검열을 마쳤다면서 한사코 제지했었고요.” 그걸 헛소리라고 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장님, 뭔가 일이 있습니다! 당장 배를 돌려 신고부터 하고 보십시다!” 하지만 선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황푸 항을 떠난 뒤였고, 설령 신고를 해봤자 수사 주체라는 게 그들 패거리인 중국 공안부일 게 뻔 한 만큼 결과는 보나마나가 아니겠느냐는 게 선장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며칠이나 날짜를 까먹게 될 테고…….”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선장의 속내는 달랐다. 한시라도 빨리 닻을 감아올려야 1등항해사의 하선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임 2등항해사도 헤르니안가 뭔가 하는 요상한 병을 핑계로 하선을 실행하지 않았던가. 1항사의 유고는 곧 항해 중단을 의미한다. 기관 부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세 명 항해사 가운데 한 사람만 탈이 나도 정상적 운용은 불가능하다. 전임 2항사의 억지 하선을 경험한 선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2항사 장혜옥은 어쩐지 자카르타 항까지의 항해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9 황푸 항을 뒤로한 오션 글로벌 호는 자이로컴퍼스의 고질적인 오작동조차 수정하지 못한 채 그렇게 엊그제의 침로를 되짚어나가는 역행(逆行) 길에 올랐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가운데 오션 글로벌 호의 항해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틀째 한밤중, 오션 글로벌 호는 다시금 남지나해의 서사군도를 좌현으로 두고 지나쳤다. 침로는 적어도 사흘 동안은 정남(正南) 방향을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 동안 몇 차례 쏟아진 스콜을 제외한다면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콜이 그치면 하늘은 더욱 청명해졌고, 날치 몸통도 자꾸만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눅눅해지더니 급기야 안개가 번져나기 시작했다. 짙은 해무(海霧)였다. 연안도 아닌 한바다에서 안개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2항사 장혜옥은 레이더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도 풀라우 다마르에서의 악몽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독하군. 이것도 다 지구온난화 때문인가?” 선장은 깊이 잠들지 못 했다. 오랜 해상생활로 긴장감이 체질화된 탓인지, 한밤중이면 느닷없이 조타실로 나타나서는 바람이나 기압 등, 배를 에워싸고 있는 대기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선장의 견해는 그녀로서도 공감이었다. 지구온난화는 특히 바다 환경을 급변시키는 주범이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세렝게티 국립공원에다 생명력을 부여하는 우기처럼 자주자주 스콜이 쏟아지는 것도, 북회귀선 해역에서 편서풍이 기세를 누그러뜨린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리핀 동해의 적도 해역에서 태풍발생의 빈도가 부쩍 증가한 것도 모두가 지구온난화에 근거한 게 틀림없다는 게 기상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꽁꽁 얼어붙은 베링 해의 만년빙도 허물어지면서 유럽으로 가는 최단코스가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나오는 판국이다. 이를 반갑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구의 종말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지금인 것이다. 마스트 꼭대기에 매달린 항해등 주위를 안개가 칭칭 휘감고 있었다. 안개는 쉬이 걷힐 것 같지 않았다. “2항사, 들어가 눈 좀 붙이게.” 선장의 배려였다. 선장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부상을 당하여 침실에 처박힌 1항사 때문에 2등항해사인 그녀의 당직 몫이 배로 증가한 사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선장님.” 말은 그렇게 하였어도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쪽 수평선이 희멀개질 무렵에는 두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면서 버티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여자라고 해서 동정의 대상이 되는 건 싫었다. 대학 시절 본 어느 영화에서 강건한 체력의 남자들 사이에 끼인 어느 여자군인 하나가 인간 능력의 한계를 훨씬 초월하는 특수훈련 과정을 훌륭히 극복해내면서 나중 뛰어난 지휘관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보았다. 그 드라마가 그녀에게는 한 권의 교과서였다. 어차피 남자세계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정신무장은 물론 신체적 강건함까지 갖추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거기에 모자라는 것은 오로지 인내심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10킬로미터 왕복주영에도 기꺼이 참가하였고, 거기에 서너 가지 호신술 연마에도 소홀하지 않았었다. “자네를 만난 건 나로서 행운이야.” 브리지 앞 유리창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에게 선장이 새삼스러운 말을 꺼냈다. 처음 포트 켈랑에서 승선신고를 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만 목구멍으로 무엇이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평생 자네만큼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은 보지 못 했네.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처음에는 얼마나 견뎌낼까 했었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단 말이다.” 마치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번 항해를 마치는 대로 그만 배를 내릴까도 싶네. 힘도 의욕도 예전 같지 않아.” 선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전에 듣지 못한 자조 섞인 말이었다. “그래서…… 자네를 후임으로 추천하려고 하네.” 그만 가슴이 고동을 쳤다. 얼마나 고대하고 바라던 말인가.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과연 내가 선장 직을 무난하게 수행해낼 수 있을까. 폭풍우 속에서 배를 안전하게 운용하는 것만이 선장에게 주어진 책무의 전부는 아니다. 상상 이상의 거대한 파도를 만나면 키 조작 하나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념이다. 아니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만큼 키가 움직여 줄까. 순간적이지만, 공연한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더구나 배에는 그녀보다 오랜 경력의 해군부사관 출신이 있다. 그녀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 완강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사흘째는 산호초 무더기인 남사군도를 멀찌감치 비켜갔다.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시야를 가로막은 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남사군도는 원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등 주변 국가가 아주 적절하게 분할, 점유해 온 광활한 산호 군도다. 지금도 산호가 무럭무럭 자라나 섬 숫자가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그 산호초 일대로 석유와 가스 등 엄청난 양의 해저자원이 부존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어느 날, 중국은 소총을 든 인민군 병사 몇 명을 목까지 차오르는 산호초 위에다 세워 놓고, 구(舊) 소련으로부터 사들인 뤼다 급 구축함 서너 척을 주변에 띄워놓은 가운데 서둘러 시멘트를 퍼부어댔다. 작업은 밤낮 가리지 않고 두어 달 가량 계속되었는데, 나중에 보니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을 만큼 큰 인공섬 하나가 축조되어 있었다. 중국은 그 섬에다 소 하이난다오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놓고 아예 군인들을 상주시킨 채 안방살림을 차렸다. 놀란 주변국들이 함정을 출동시켜 시위를 벌였으나 거대한 중국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게 바로 대륙 국가이던 중국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해군본부가 펴낸 《동북아 3개국 해양력 비교》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었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마오쩌둥 시대가 아니었다. 미국의 절대적 통제 하에 있던 태평양마저도 넘겨다보는 신생 해양국가로 거듭난 것이었다. 댜오위다오(조어도)만 하더라도 그 실체는 분명해진다. 마오쩌둥은 ‘그 섬은 원래 우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리 해군력이 일본을 능가할 때가 곧 그 시기가 된다.’라고 사태해결의 시기를 먼 미래로 미루었다. 마오쩌둥의 그 말이야말로 미래 어느 날 일본과의 한 판 대결을 전제한 예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핵 항모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그 옛날 마오쩌둥의 말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10 항푸 항을 출항하고 나흘째, 오션 글로벌 호는 이제 태양의 열기가 이글거리는 열대해역으로 들어서 있었다. 보르네오 섬의 중허리쯤인데, 그 외곽으로 남 베사르 섬의 부속 도서가 올망졸망 널려 있어서 공연히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그 해역에서 모처럼 안개가 걷혔다. 항해등 불빛 속으로 몇 마리 도둑갈매기들의 날갯짓이 보이더니 얼마 안 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언제나 바다에서만 맴도는 해조들이었다. 짙은 안개로 며칠 동안 먹이를 찾아내지 못해 굶주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 오션 글로벌 호가 남기고 있는 하얀 물거품의 항적을 보고 고기잡이에 나선 배로 오인하였을 수도 있다. 예망작업을 끝낸 트롤선이 그물을 선미 가까이로 끌어당기면 틀림없이 무수한 바닷새가 떼를 지어 몰려드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틀렸다. 아무리 따라붙어도 양망의 낌새가 없자 그만 따라붙기를 포기한 것이었다. “이상 없습니다.” 조타실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 3항사가 경례를 붙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가. 가만 보니 얼굴이 꺼칠해져 있었고 윗입술 한쪽으로 물집이 허옇게 잡혀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몸져누운 선배(1항사)의 몫을 나누어 감당하느라 피곤이 겹친 게 틀림없었다. “가서 푹 좀 쉬기나 해.” 그게 그녀가 건네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었다. “2항사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웬일인지 3항사는 전과 달리 얼른 조타실을 뛰쳐나가지 않았다. 긴장의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어?” 그녀는 항푸 항 부두에서 도둑의 습격을 받은 1항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였다. 그 동안 해군부사관 출신은 침실에만 처박혀 있었다. 조타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황푸 항을 떠난 지 사흘째가 되는 어제 저녁때였다. 부스스한 얼굴이 영락없는 환자였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쪽 팔을 온통 붕대로 동여매고 있으니 민망할 수밖에는 없다. 어쩐지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간간히 팔꿈치를 꼼지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상박골 어디가 크게 결딴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3항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2항사님, 레이더 말인데요……아무래도 이상하더란 말입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잠시 조타실엘 들렀었다. 간밤의 일이 꺼림칙해서였다. 야간당직 중 아직도 안개가 스멀거리고 있을 때여서 간간이 레이더를 지켜보았는데, 수상한 물체 하나가 후방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15마일 가량 되는 거리에서였다. 휑한 바다에 수상한 물체라면 배밖에 없다. 고기잡이배일 수도 있고, 항로가 다른 여객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스코프에 잡히다가 때로는 사라지는 게 여간 미심쩍지 않았다.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괴선박은 황푸 항을 떠난 직후부터 내내 뒤쫓아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틀리지 않다면 이거야말로 원양작전이자 대양작전에 나선 해적선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체가 해적선이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든 것도 그 때였다. 해적선이라고 무작정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놈들도 어떤 식으로든 그럴 듯한 정보망을 확보하고 있어서, 가령 어느 배가 무슨 종류의 화물을 싣고 있으며, 그리고 어디를 목적항으로 삼고 있는가 하는 따위의 정보는 갖고 있을 것이다. 어렵사리 배 하나를 장악하였는데, 해치를 열고 보니 겨우 석탄이나 철광석 따위만 싣고 있다면 놈들로서도 망연자실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물 내용물을 알아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선적작업 중인 부두를 어슬렁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낟알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면 패거리 중 한 녀석을 부두노무자로 가장시켜 투입시키는 것도 한 가지 훌륭한 방법이 되고, 처음부터 아예 세관원을 구워삶는 것도 좋은 계책일 수 있다. 세관원 치고 밀수에 가담하지 않은 작자는 보지 못 했다. 해적들은 그렇게 치밀하게 정보를 얻어낸 다음 고가의 화물을 실은 배 하나를 지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3항사에게 레이더를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2항사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선미 쪽으로 계속……방향과 거리에 변화가 없는 것도 그렇고요. 지금도 그래요.” 순간 그녀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3항사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그런데 마침 선장님이 조타실로 나오시기에 보고를 드렸더니 일언지하로 무시해버렸어요. 선장님, 선미 쪽에 수상한 배 하나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고 드렸더니 짜증을 내시면서, 여기는 공해상이야, 바다에 배가 떠다니는 게 이상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그만 입을 꽉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가서 좀 쉬기나 해.” 그녀는 즉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그대로였다. 선미 후방 15마일 거리에 물체 하나가 포착되고 있었다. 레이더 스코프에서 움직이는 두 물체의 방향과 거리에 변화가 없다면 두 배는 똑같은 침로에 똑같은 속력으로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물표의 방위는 변함이 없는데, 피차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본선을 추월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보아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신경이 곤두섰다. 보르네오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해역은 오래 전부터 해적출몰로 잦은 높은 곳이다.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본부를 둔 IMO(국제해사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해적으로 인한 선박 피해가 매년 100건을 상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변국이 많다보니 도대체 해적 놈들의 정체를 분간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동남아 해적들은 근래 들어 기승을 부리는 소말리아 해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역사도 오래된다. 중세기 적 이슬람 전제군주의 최고 권위자이던 술탄 시대부터 필리핀의 루손과 민다나오와 비사야 등지를 근거지로 기세를 떨친 이래, 나중에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시키기까지 한 천하무적의 조직적인 집단이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얼마 전에는 정박 중인 해군함정까지 습격하여 갑판에 장착하고 있던 51밀리 함포를 통째 뜯어간 경우도 있었다. 함대라면 모를까, 단독으로 출동한 전투함도 겁내지 않는 판국이다. 도대체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피해를 입은 당사국도 감을 잡지 못 하는 형편인 것이다. 해적이라면 조우(遭遇)하는 것부터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한 번 목표물로 찍히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아무런 방어무기를 갖지 못한 일반선 처지에서 총을 난사해대며 공격해 오는 해적과 대적하는 것은 파멸일 수밖에 없다. 선박이나 화물도 문제지만, 당장 승조원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도 더 우습게 여기는 놈들 아닌가. 그런 다음에는 선박을 통째 몰고 달아나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어느 항구에서는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버젓이 선명까지 바꾼 실종 선박을 찾아낸 적도 있는 판국인 것이다. 정체불명의 물체는 다시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도 일렀다. 11 다음 날 새벽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가 헐떡거리며 브리지로 달려왔다. “2항사님, 이걸 좀 보십시오.” 그의 손에는 손톱만한 단자 조각 하나가 들리어 있었다. “그게 뭔데?”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글쎄 말입니다.” 모르기는 마르코스도 마찬가지였다. 메인 엔진 거대한 실린더가 방아를 찧어대는 것만 지켜보았지, 이 같은 정체불명의 게딱지는 처음인 것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그녀가 물었다. “선미갑판에서요.” 마르코스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새벽께 하복부가 뻑뻑해진 그는 눈을 떴다. 당장 오줌통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방광이 부풀어 오른 때문이었다. 그는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게 아쉬워 애써 눈을 깜박이며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압박감이 증대되기만 하여 그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모포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단을 더듬어 선미갑판으로 올라갔는데, 웬일인지 시야가 전 같지 않게 지나치게 어둡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하다 싶어 얼굴을 들고 보니 언제나 갑판을 알맞게 밝히고 있던, 야간항해 중이면 반드시 밝혀져 있어야 하는 선미 백등이 꺼져 있더라는 것이다. 흐릿하지만 적어도 5마일 범위의 광달거리를 가진 그 불빛으로 타 선박은 이쪽의 진로 방향을 알아내면서 충돌을 예방하는 안전조치를 강구하게 하는 항해등의 하나였다. 그는 방광을 짜내면서 전구가 나간 때문이라 판단하고 즉시 예비품으로 갈아 끼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약 그가 기관사가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예사롭게 넘겨버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곧 창고에서 예비품을 찾아내어 다시 선미갑판으로 올라갔다. 선미등은 세 길 높이의 작은 마스트 꼭대기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기관실 지붕을 거쳐 원숭이처럼 마스트를 타고 올라가 덮개를 연 다음 필라멘트가 끊어진 스크루 식 전구를 돌려 빼낸 다음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그러자 불이 들어오면서 선미갑판이 환해졌다. 다시 마스트를 내려오는데 문득 발끝에서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갑판을 내려다보았더니 손톱 크기만 한 요상한 물건이 하나 굴러 떨어져 있었다. 도대체 기둥뿐인 밋밋한 마스트에서 떨어져나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게 손톱만큼 한 칩이었고, 마르코스는 그 요상한 물건을 당직 중인 2항사에게로 갖고 온 것이었다. “어디 좀 보자.” 마르코스로부터 받아든 그 요상한 물건을 그녀는 자세히 관찰했다. 아마도 거칠고 투박한 남자와 달리 여자들만이 갖는 천부의 섬세함과 예민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글쎄 이게 뭐지?”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암튼 수고했다.” 마르코스를 돌려보낸 그녀는 그 요상한 물건을 상의 포켓에 집어넣은 다음 날이 밝는 대로 통신장에게 그 정체를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물건을 본 통신장이 의외의 말을 했다. “이건……칩의 일종이군요. 크기는 작지만 고도의 성능을 가진 송신기 같은 거죠.” 그러면서 통신장은 꽤 멀리까지 전파를 송신할 수 있는 위치 추적장치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럴까요?” 순간 그녀는 황푸 항 부두에서 한창 화물 적재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선미갑판을 서성거리다 붙들린 납빛 흉터의 중국인 사내를 기억해냈다. 바로 그 사내가 이 요상한 칩을 몰래 갖다 붙인 게로구나. 그렇다면 지금 선미 방향 15마일 거리에서 꼼지락거리는 괴선박이야말로 이 요상한 물건이 발사하는 전파를 수신하며 아주 쉽게 오션 글로벌 호의 항적을 따라붙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희귀동물의 생태적 활동을 추적 연구하는 동물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추론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얼른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추론이 옳다면 이거야말로 당장 선장에게 보고하여야 할 중대 사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선장이 쉽게 납득하고 수긍할까. “수고 많네, 미스 장.” 그 때 1등항해사가 조타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만큼은 너무 반가웠다. 1항사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주자주 브리지로 올라와 해도를 들여다보며 자카르타까지의 남은 항정을 재보는 일이 그의 유일한 일과일 정도였다. 그런 다음이면 반드시, 아직도 사흘이나 더 가야 돼? 그렇게 혼잣소리로 웅얼거리곤 하였다. 그가 바람은 오로지 한시라도 빨리 목적 항에 도착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채 닻을 던져 넣기도 전에 첨버덩 물로 뛰어들어 병원으로 달려갈 요량이었다. 그래서 선장에 대한 존경심이나 외경감도 일찌감치 달아나 있었다. 저놈의 영감탱이가 나를 죽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악을 쓰기도 여러 번이었으니 말이었다. 1항사는 여느 때처럼 해도실부터 들렀다. 아까처럼 자카르타까지의 잔여 항정을 재보기 위해서였다. “제기랄, 아직도 사흘이나 남았네.” 또 투덜댔다. “어? 국장(배에서의 통칭)이 웬 일이야?” 그 때야 1항사는 조타실 한 귀퉁이에 서 있던 통신장을 알아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해군부사관 출신은 눈치가 빨랐다. 통신장이 조타실에 나타나는 건 반드시 수신한 메시지가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었다. “1항사님, 이것 좀 보세요.”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칩을 꺼냈다. “선미 마스트에서 마르코스 군이 찾아낸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 1항사가 두 눈을 홉뜨면서 소리쳤다. 그는 금세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맞다! 바로 그 자식이야!” 버럭 소리쳤다. 그 바람에 조타실 바닥이 삐걱거렸다. 그녀로부터 칩을 받아든 1항사가 통신장을 가까이 불렀다. “국장, 당장 리시버로 수신 체크를 해 봐요. 이놈이 요상한 전파를 발사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잡힐 거 아뇨?” 1항사의 판단을 옳았다. “알았습니다.” 통신장이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통신실로 뛰어든 통신장이 헤드 리시버를 끼고 수신기의 다이얼을 찬찬히 돌리기 시작했다. 다이얼 바늘이 주파수 눈금을 치훑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시버로 크고 작은 갖가지 사운드가 들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얼 바늘이 1,300케이시에 이르자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 한 모스부호가 흘러나왔다. 통신장이 흘러나오는 문자부호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 TTWS308, TTWS308……. 수신기를 끌 여유도 없이 통신장은 조타실로 뛰어 올라갔다. “이겁니다. 이 괴상한 문자가 잡혔습니다.” 헐떡거리며 통신장이 메모지를 내밀었다. “맞다! 놈들 수작이다! 이 요상한 콜사인을 따라 줄곧 우리 배를 추적해 온 거야!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게 1항사의 판단이었다. “선장님께 보고 드려야지요?” 2항사가 물었다. 그게 순서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1항사는 단호했다. “그런다고 캡틴께서 수긍할까? 절대로 아니지! 이거 원, 무슨 쓸데없는 걱정인가! 그렇게 뭉개버리고 말 텐데. 그만하면 캡틴의 성격을 알고도 남지 않아?” 일언지하로 묵살한 다음 1항사가 느닷없이 갑판장을 호출했다. 눈을 부비며 조타실로 들어서는 갑판장에게 1항사가 말했다. “갑판장, 물에 띄울 거 하나 갖고 와.” 갑판장은 얼른 분간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물에 띄울 거니까요. 아무 거나 뜨는 거면 됩니다.” 2항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갑판장이 곧 플라스틱 제 부이 한 개를 갖고 왔다. “맞다, 바로 이거다. 이걸 반창고 같은 걸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매달도록 해!” 1항사는 거침이 없었다. “네.” 땀을 뻘뻘 흘리며 갑판장이 부이에다 칩을 꽁꽁 동여맸다. “됐다! 그걸 바다에 던져 넣어!” “네.” 그렇게 부이는 내던져졌다. “잘 부탁한다.” 배 꽁무니 쪽으로 멀리 떠내려가는 부이를 향해 1항사는 손 키스까지 해 보였다. 해군부사관 출신의 조치는 옳았다. 칩이 부착된 부표는 지금의 위치에서 출렁거리고 있을 테고, 시간이 흐를수록 배와의 거리도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면 놈들은 자신들이 추적하고자 하는 오션 글로벌 호가 아닌, 적어도 한참 동안은 남지나해의 거친 물결에 희롱당하고 있을 부표를 따라잡는 엉뚱한 짓거리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것이다. 1항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놈들을 교란시킬 필요가 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침로를 변경하는 일이었다. 변침은 배를 원래의 항로를 벗어나게 만든다. 만약 놈들이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만으로도 놈들을 따돌리는 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마침 남 베사르 군도를 통과한 참이어서 인근에는 어느 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배는 운신의 폭이 넓어 있었다. “좌현 30도로 서너 시간이면 충분할 거야.” 1항사의 견해였다. 그녀도 물론 동의했다. 물론 침로의 설정이나 변경은 전적으로 선장의 책임이자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1항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중 문제가 생기면 이건 모두 내 책임이다.” 1항사의 결심은 확고했다. 1항사의 견해를 수용하여 침로는 곧 30도 좌현으로 돌아갔다. 배는 이제 전혀 엉뚱한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차피 난 이번으로 항해는 끝이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게 해군부사관 출신인 1등항해사의 자조 섞인 혼잣소리였다. 12 며칠 전부터 선장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자주자주 밭은기침을 하는가 하면, 오한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제는 두 끼니 식사도 걸렀다. 나이를 고려한다면 흔한 몸살 정도로 가볍게 넘길 일도 아니었다. 그저께는 이번 항해를 마치는 대로 하선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선장의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꿈꾼다. 경제적인 여유만 있다면 무럭무럭 커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가정이란 인간만사의 가장 기본적 토대이자 울타리가 아닌가. 고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선장은 그게 아쉬울지도 모른다. 회고해 보면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의 대부분을 가정을 떠나 오로지 황량하고 건조하기만한 바다에서 흘려보낸 셈이다. 서글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 갑자기 선장의 서글픈 모습만 떠오르는 것일까. 선장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일까. 갑자기 어느 날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상큼한 소금 냄새도 풍겼다. 특히 먼 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뉴스를 들은 다음의 바로 그 농도 짙은 냄새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바닷물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장은 달랐다. 소금 냄새는커녕 퀴퀴한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선장은 그렇게 깔끔했다. 오징어 채낚기선에서 갑판장을 한 아버지와는 달리 바닷물을 뒤집어쓸 일도 없고, 하루 종일 해풍으로 눅눅해진 피부도 매일처럼 잠들기 전 캡틴 룸에 딸린 샤워실에서 반드시 깔끔하게 씻어낸 덕분일 것이다. - 나도 자격증만 가졌다면 벌써 그놈의 선장이라는 것을 해먹었을 텐데. 한 잔 술만 들이켜면 아버지는 잠꼬대처럼 언제나 그렇게 한탄하기를 버릇으로 했었다. 하지만 선장은 그 같은 사사로운 한탄을 늘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미완의 꿈이 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혼자 간직하고 있던 내밀한 이야기를 토로하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인 것이다. 하지만 선장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내의 모습이나 성격은 어떠하며, 슬하에 자식은 몇 명이나 되며, 또 틀림없이 장성하여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자식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입을 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장은 그녀에게 선배가 된다. 선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선장 역시 영도의 아치 섬을 통째 캠퍼스로 점령한 해양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졸업한 그 해부터 배를 탔다. 그 햇수가 어언 35년이나 된다. 선장이 대학을 다닐 때는 물론 여자가 없었다. 그녀가 비로소 첫 입학생이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당연히 궁금한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장은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는 성격 탓일까. 그 문제라면 앞전의 미주를 왕복하던 컨테이너선 선장과 확연히 달랐다. 태평양은 넓다. 태평양을 건너는 보름여 동안 섬 조각 하나도 구경할 수 없다. 중간에 하와이제도가 올망졸망 늘어서 있지만, 대권항법으로 북위 40도를 거슬러 가는 관계로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다. 세계의 바다를 통틀어 미주를 왕복하는 태평양 항로야말로 망망대해를 실감케 하는 유일한 곳이다. 그럴 때면 앞전의 컨테이너선 선장은 무료함을 주체하지 못해 심야당직자인 그녀와 함께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아직 쉰 살도 안 된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그 선장은 특히 영도 아치 섬에 자리 잡은 자신의 모교가 가장 먼저 여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데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게 한국이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의 하나라고 역설하기까지 했다. - 이거 원, 하필이면 여자 항해사라니! 물론 그 같은 푸념을 늘어놓은 적도 없다. 한 번은 아내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 선장 말에 의하면, 아내가 된 여자는 순전히 마도로스의 멋진 제복에 반해 먼저 접근해 왔다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였는데 그녀는, 나는 마도로스 아내가 되는 게 꿈이에요, 그러더라는 것이다. 연신 허허 하고 헤프게 웃어대던 그 선장의 표현에 따르면, 제법 얼굴이 반반한 편이어서 싫지는 않았는데, 지금 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조금 모자라는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미주를 왕복하는 배를 탄 덕분에 두 달이면 반드시 집엘 들르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주칠 적마다 조금 모자라는 여자라는 생각만 들어 이제는 자꾸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 같다는 말도 했다. 선장은 또 허허 웃고 나서, 만약 자신이 지금처럼 마도로스를 꿈꾸는 여자와 함께 대학을 다니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와 결혼하고 말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잡다한 선장 이야기는 날이 희붐해서야 겨우 끝났었다. 2항사 장혜옥의 소망은 우선 단 한 가지였다.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임무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게 국내 최초의 여자항해사가 된 그녀의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버텨 왔다. 다음 날 오후 두 시, 당직을 교대하면서 그녀는 다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그것은 시계 초침보다도 더 정확하게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녀는 안도했다. 스코프 어디에도 괴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선장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부표를 내던지고 침로를 바꾼 덕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낮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해적 놈들은 마치 아군의 진지를 공략하는 적군들처럼 오로지 야밤만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안도는 길게 가지 못 했다. 그 날 자정께, 교대시간이어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조타실로 들어서자 레이더를 들여다보고 난 3항사가 보고했다. “2항사님, 이것 좀 보세요.” 그만 머리끝이 곤두섰다. 이제 레이더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났다.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그렇게 소리치고도 싶었다. 이럴 때는 선장처럼 대범해졌으면 싶었다. 자네는 그렇게도 한가한가? 여긴 바다야! 바다니까 배가 있는 건 당연하지! 그렇게 흉내 내고도 싶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변한다더니, 이렇게 사람이 표변하는가도 싶었다.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른 다음 스코프에 시선을 박았다. 3항사가 잘못 볼 리 없었다. 어제와 똑같은 거리를 두고 밤하늘의 1등성처럼 물표는 명멸하고 있었다. 물표 크기로 미루어 대형선은 아니었다. 해적선이 클 필요는 없다. 기관총과 자동로켓포로 무장하고, 속력을 높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도 미확인 물체일 뿐이다. 다만 저 수상하고 확인 불가능한 물체가 잔혹하고 야만적인 해적선이 아니기만 빌고 또 빌 뿐이었다. 배는 은은한 진동을 남기며 꾸준히 항진하고 있었다. 페가수스 좌가 머리 꼭대기로 올려다보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천마(天馬)로 불리는 별자리다. 천공(天空)의 적도(赤道)에 걸려 있으니까 지구상 적도인 보르네오 섬 인근에서 머리 꼭대기로 보이는 건 당연하다. 오늘따라 삼태성(三台星)이 더욱 명료했다. 배는 이제 보르네오 섬의 남서쪽 카리마타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사방이 어지러운 산호해였다. 따라서 마음껏 침로를 회피할 만큼 여유롭지 못 하다. 그녀는 언뜻 시간을 읽었다. 02시 50분. 세상이 깊이 잠든 한밤중이다. 다시 레이더를 확인했다. 싱가포르 해협을 통항하고 남지나해로 진입한 날 한밤중, 만약 그녀가 레이더부터 확인하였더라면 등대 고장으로 불이 꺼진 풀라우 다마르에 접근하는 아찔한 사고는 얼마든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더야말로 항해사에게는 둘도 없는 벗이자, 자신감을 부여하는 반려자인 것이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수상한 물체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처음의 15마일이 지금은 10마일로 좁혀져 있었다.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5마일 이상 단축된 셈이다. 대형선이라면 얼마든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쾌속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10여 분이 지났다. - 8마일! 그 잠깐 사이에 2마일이나 좁혀졌다. 속력이 20노트에 상당하는 쾌속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실리콘 칩을 물에 띄워 괴선박을 교란시키고자 한 일도, 그리고 서너 시간이나 변침을 가하여 위치를 속인 일도 모두 헛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놈들 역시 고성능 레이더를 갖추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 이쪽의 교란 행위를 금세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은 이제 너무도 분명해져 있었다. 선미 쪽 괴물체는 황푸 항을 출항할 순간부터 미행에 나선 게 틀림없었다. 그게 옳다면 놈들은 지금 오션 글로벌 호가 선적하고 있는 화물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파악을 끝내고 있을 것이다. 놈들은 어쩌면 갑판에 적재하고 있는 컨테이너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상한 배는 그 정보를 넘겨받았음에 틀림없다. 황푸 부두에서 선적 화물을 꼼꼼히 체크하던 1항사의 모습도 떠올랐다. 점점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야릇한 전율이 그녀의 육체를 관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브리지 윙으로 나가 후방을 응시했다. 시야는 여전히 캄캄 칠흑 속이었다. 그래서 별들이 더욱 명료해 보였다. 선수 방향으로 남십자성인 크럭스(Crux) 좌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장담컨대, 후방의 괴물체도 지금 남십자성을 향해 쾌속으로 바닷물을 가르고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항해등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레이더를 확인했다. - 7마일! 이제는 항해등이 초인될 때도 되었다. 그런데 어둠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더로는 확인이 되는데, 항해등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불을 밝히지 않은 개 틀림없다. 그 사이 괴선박은 5마일 거리로 접근해 있었다. 그 때서야 쌍안경으로 제법 명료하게 괴선박의 형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아무런 불빛도 내비치지 않은 20톤이나 될까 한 소형선이었다. 이제는 더 망설일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선장에게 보고해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위기에 봉착한 때의 모든 지휘는 선장 몫이다. 깊이 잠든 승조원들을 깨우는 일도, 그리고 일제히 비상체제로 돌입시키는 일도 모두 선장의 지휘명령권에 속한다.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동남아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된 선원들이지만, 해적의 목표물이 되기로는 똑같은 처지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삐이- 인터폰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선장님, 2등항해사입니다. 곧 브리지로 올라 오셔야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목소리가 까칠까칠했다. 기침 소리도 섞여 있었다. “수상한 물체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선장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가장 신뢰하는 항해사의 보고여서일 것이다. “수상한 물체라고? 언제부터지?” 조타실로 올라온 선장이 물었다. “한 시간 전부터입니다.” 한 시간 전이면 상대선과 15마일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불과 몇 마일로 좁혀져 있다! 괴선박이 갑자기 속력을 높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똑바로 오션 글로벌 호를 향해 내달아왔다. 놈들은, 지금이야말로 공격의 기회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추적용 칩의 존재가 발각되면서 오히려 역이용당한 다음의 일이다. 놈들로서도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그렇더라도 왜 하필이면 운신의 폭이 좁은 카리마타 해협에서인가. 바로 이 부근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들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란 말인가. 술탄 시대 때는 본거지가 필리핀의 루손과 민다나오와 비사야 등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시대가 바뀐 오늘 날에 이르러서까지 놈들이 그 섬 일대를 고수할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어느 배든 공격하기 만만하고, 약탈할 화물이 가득 실려 있는 한 목표물로 손색이 없을 게 아닌가. 선장 역시 머뭇거리지 않았다. 빼내 든 선내 마이크로 소리쳤다. “전 선원, 비상!” 그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선실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이쪽의 움직임을 해적에게 미리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선장의 명령에 깊이 잠들었던 배가 깨어났다. 해군부사관 출신과 3항사가 조타실로 뛰어 올라왔다. 갑판장도 통신장도 빠지지 않았다. 상갑판에서는 갑판장 얼굴도 보였다. 안색이 모두 납빛이었다. 심야에 비상이 걸렸으니 정신이 혼미해질 건 당연한 일이다. 항행 중의 비상벨 소리는 누구에게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선내에서 휘파람을 불어서도 안 되고, 언성을 높여서도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느 배에서나 정숙을 미덕으로 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메이데이를 타전합니까?” 1항사였다. 완전 해군 식이었다. “구조요청도 하고, 본사에 보고도 해.” 그 일이야말로 자신이 수행해야 한다고 믿은 통신장이 별도의 지시도 받지 않은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것으로 해적과의 조우는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다. 모든 것은 분명해 있었다. 하지만 조난신호를 발사한다고 해서 그 효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을 가상하여 경비정이나 군함이 따라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과는 달리, 대양을 항행하는 모든 배들을 호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의 모든 배들은 오로지 자선 혼자서만 외로운 항해를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 설령 긴급히 구조 요청을 타전하더라도 구조대가 도착할 때쯤이면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다. 13 “전 선원, 부서 배치!” 마치 군사작전 그대로였다. 해적선은 이제 우현 1마일 거리로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총성이 들릴지 모른다. 외국인 선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부산항을 출항하고 동지나해를 남하하는 동안 해군부사관 출신이 주도하여 꼭 한 번 비상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조타수는 키를 잡고 있었고, 3항사는 엔진 텔레그래프에 바짝 붙어 있었다. “물대포!” 1항사가 소리쳤다. 갑판 양현으로 길게 배관되고 있는 해수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찬 물줄기를 말한다. 물줄기가 제법이어서 뱃전을 기어오르는 놈들을 향해 정통으로 쏘아 맞히면 나가떨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시적인 퇴치 방법은 될지 몰라도 격멸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기 꼴이다. 갑판장이 앞장 선 가운데 외국인 선원들이 부지런히 호스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기관 전속!” 선장은 몇 번이나 같은 명령을 되풀이했다. 배는 물론 진작부터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1만 톤급 대형 화물선이 낼 수 있는 속력이라야 뻔 하지 않은가. 해적선은 그 사이에 반마일 거리로 접근해 있었다. 육안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실제로 몇 개의 그림자가 갑판에서 얼른거리는 게 보였다. 군복을 걸친 녀석이 있는가 하면 아예 반바지 차림의 알몸인 녀석도 있었다. 기관총으로 보이는 무기도 여러 정이나 되었고, 뱃전 난간에다 걸치려는지 훅이 엮어진 로프 가닥도 보였다. 곧 해적선으로부터 강렬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날라 왔다. 그 불빛 속에서 오션 글로벌 호의 선체가 환히 드러났다. 그 상황에서 엔진을 정지하라는 놈들의 핸드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레이시아 계 원주민들의 고함소리였다. 술탄의 피를 이어받은 악마가 틀림없었다. “전속전진! 알피엠 최고로!” 기관실로 연결된 보이스튜브로 선장의 연이은 명령이 쏟아졌다. 선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배를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왔지만 그가 지금까지 해적을 만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몹쓸 일을 당하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급격한 알피엠 상승으로 엔진이 요동을 쳤다. 완전 연소되지 못한 배기가스가 연돌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속력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엔진은 진작부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톱! 엔진 스톱!” 연이은 해적선의 핸드 마이크 소리였다. 이제는 뱃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상태였다. 오션 글로벌 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일 뿐이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총성은 거푸 들렸다. 밤바다 적막을 깨트리기에 충분한 파열음이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놈들은 이제 아주 본격적인 공격 자세로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머리 위로 어지럽게 총탄이 날았다. 뱃전에서는 몇 차례나 총알이 튕겨났다. 그럴 때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불꽃이 튀어 날았다. 2항사 장혜옥은 브리지 윙을 방패삼아 몸을 숙이고 있었다. 계속 총알이 허공을 갈라내고 있어서 머리를 들 수도 없었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되풀이, 이로써 바다에 대한 사랑도 평화로운 항해도 그리고 희망의 장밋빛 미래도 끝이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다는 외경 그 자체이고, 폭풍우 또한 두렵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언제까지나 바다사람이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이 깨트려지고 있었다. 처음 배를 탔을 때, 그녀는 광활하면서도 거대한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바다로 나온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했었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이면 뭇 시선이 제복 차림의 집중되곤 했었다. 그녀는 얼마든지 그 시선을 느꼈다. 남자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여자들에게서는 부러움과 함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해기사 자격증을 따고서도 스스로 승선을 포기한 못난 사내 대신 그녀는 그녀만의 바다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4년의 긴 대학생활을 거치는 동안 그 사내라면 얼마든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다짐하였건만, 바다를 외면한 그에게는 미련조차 둘 필요가 없었다. 이후 자신은 어느 무엇에도 구속되거나 견인되지 않는 차가운 열정으로 오로지 바다만을 삶의 목표이자 무대로 삼아 왔다. 그리하여 어느 먼 훗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멋진 캡틴이 된다! 장엄하고 멋들어진 배를 이 자그맣고 연약한 손으로 지휘하여 끝내 광대한 대양을 건너리라!…… 해적선은 이제 뱃전에 달라붙기 직전이었다. 치솟는 물결에 자그만 배는 조랑말처럼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오션 글로벌 호 중앙 뱃전으로 바짝 접근할 작정이었다. 그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고속으로 배 주위를 맴돌며 자동소총을 난사하기도 몇 차례였다. 그럴수록 선장의 결심은 더욱 확고했다. 해적에게 장악된 배들은 모두 총탄 공격에 주눅이 들어 기관을 끈 게 그 화근이었다. 설령 뱃전으로 총탄 자국이 남는다고 해도 그쯤으로 배가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절대로 배를 세우지 마라!” 그게 선장의 지시였고, 확고한 신념이었다. 하긴 그 같은 상황에서 이쪽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지그재그로 사행하는 것 말고는 아무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총탄은 계속 머리 위를 날았다. 브리지 곳곳으로 총탄 자국이 무수했다. 그 같은 위기의 순간순간은 한 시간 너머나 계속됐다. 배가 멈추지 않는 한 놈들로서도 뱃전을 타오르기는 쉽지 않다. 갑판은 너무 높고, 배의 항진이 만들어내는 거친 파도도 놈들의 접근을 방해하는 데 퍽 유용했다. 날이 밝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었다. 상대를 빤히 바라볼 수 있는 한낮이라면 아무래도 이쪽이 먼저 주눅이 들고 말았을 것이다. “세 시 방향, 물대포!” 선장의 외침에 드디어 방어가 시작됐다.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던가. 때를 놓치지 않고 갑판장이 동키 호스로 물대포 세례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 효과가 없지도 않았다. 물대포를 맞은 한 녀석이 맥없이 갑판으로 나가떨어졌으니 말이었다. 외국인 선원들의 적극적인 행동도 눈물겨운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 3등기관사 마르코스는 필리핀 출신 샌디 군과 함께 해치의 화물 속에서 찾아낸 오렌지 박스를 꺼내 놓고 있었다. 태국 출신 기관원 민라이 군은 선미창고에서 들고 나온 고철 조각들을 발밑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었다. 그게 시방 뱃전을 타오르려는 해적 놈들에 대한 최선의 방어용 무기인 것이었다. 어떻게든 놈들이 갑판으로 올라오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내야 했다. 그러면 그 뒤의 일은 너무도 뻔하다. 이내 브리지부터 점거되면서 배는 통째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지금의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끝을 모른다고 해서 순순히 손을 들 수는 없는 일이다. “물대포!” 선장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쉰 소리에서 진한 분노가 묻어나고 있었다. 다시 총성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경기관총이었다. 브리지를 똑바로 겨냥하고 있었다. 총알 하나가 브리지 유리창을 꿰뚫었다. 몽니를 부리는 파도를 정통으로 맞더라도 견뎌낸 유리창이지만 총탄을 튕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리가 박살나는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그것을 신호로 드디어 놈들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오션 글로벌 호와 속력을 나란히 맞춘 다음 로프를 던져 올리기 시작한 것이 그 하나였다. 아까 본 네 가닥 갈고리를 매단 로프였다. 그걸 뱃전 난간에다 걸고는 원숭이처럼 기어오를 작정이었다. 그 때마다 갑판장은 손도끼를 휘둘러 로프를 잘라냈다. 도끼를 맞은 철판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은 로프를 절단했다는 증거였다. 그럴 때면 난간에는 갈고리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기관장도 해적선을 따라 상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환갑을 앞둔 그의 손에는 긴 쇠 파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갑판장, 위험해!” 상갑판에서 1항사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악!” 동시에 데크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 갑판장이었다. 한쪽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흐릿한 항해등 불빛 속으로 작업복 왼쪽 어깨 부분이 벌겋게 물들고 있는 게 보였다. “갑판장이 맞았다!” 3기사 마르코스가 먼저 데크로 뛰어 내려가 갑판장을 들춰 맸다. 곧 두 선원이 갑판장을 울러 메고 살롱으로 옮겼다. 2기사가 달려왔다. 손에 약통이 들려 있었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습니다.” 총탄은 갑판장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놈들을 막아야 해.” 신음 섞인 갑판장의 당부였다. 그 역시 환갑의 나이였다. 소학교를 나온 열다섯 살 때부터 배와 인연을 맺었다는데, 이제는 시퍼런 바닷물만 보아도 멀미가 난다며 넌더리를 쳤다. 정작 바다가 기승을 부리는 파도 속에서도 멀쩡했던 노수부다. 다시 해적선이 중앙 뱃전으로 달라붙었다. 야만적이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놈들이니 순순히 물러설 턱이 없다. 2항사 장혜옥은 다시 브리지 윙으로 나갔다. 우현 뱃전 가까이로 놈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여간 끈질기지 않았다. 이쯤에서 그만두면 어떨까.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이쪽의 기대일 뿐이다. 이제는 오히려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순순히 물러설 놈들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머리 위로 총알이 빗발쳤다. 허공으로 총탄 음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렌지 박스를 든 샌디 군이 그녀 가까이로 다가온 것은 그 때였다. 우현 갑판에서 기관장과 함께 오렌지를 내던지던 필리핀 출신 갑판원이었다. “2항사님, 조심하세요.” “그래, 너도.” 그녀도 오렌지를 투척했다. 총을 난사하는 놈들에게 물렁물렁한 오렌지가 당키나 할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때의 적절한 퇴치법은 없는 것일까. 국가가 시행하는 해기사면허시험에 해적퇴치법을 논한 과목은 없다. 다만 구술시험에서 어느 시험관이 물은 적이 있다. 거기에 정답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최선의 방어책은 해적과 조우하지 않는 겁니다, 하고 답했다. 시험관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결코 틀리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앗, 위험해요!” 순간 샌디 군이 소리치며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분명 무슨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으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쓰러진 그대로 그녀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굳은 듯 한 샌디 군의 몸뚱이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밀쳐내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샌디 군의 긴 머리칼을 걷어냈다. 그러자 밤하늘의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이 총을 맞은 것이라 생각했다. 손바닥으로 이상한 감촉을 느껴서렷다. 따스하고 끈적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바닥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두려워서였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브리지 상단에서 빛을 발하는 불그레한 우현 항해등 불빛 속에서 그것은 검붉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피였다. 샌디 군의 가슴팍에서 뿜어 나오는 피였다. 샌디 군은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총탄으로부터 막아낸 것이었다. “아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분노와 함께 증오감이 머리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다. 결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감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시그널 로켓이었다. 선박이 위기에 처할 때면 공중으로 높이 쏘아 올려 조난선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지만, 그 위력의 대단함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원통형인 신호탄을 한손으로 움켜쥐고 발사 끈을 잡아당기면 슈우욱! 하는 폭발음과 함께 고공 70미터의 높이까지 솟구쳐 오른다. 그런 다음 마치 불꽃놀이 때처럼 화염을 내뿜으며 천천히 낙하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퇴선한 1항사 머독이 구명보트에서 허공에다 대고 권총 형의 발사기로 쏘아올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만한 높이까지 화염이 솟구쳐 오르면 반경 20마일 이내의 모든 선박에 대해 조난 사실을 알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의 위력이니 가까운 거리의 놈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조타실 한편의 수납장 문을 열고 신호탄 박스를 꺼냈다. 그 속에는 여섯 개의 신호탄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급한 대로 우선 두 개를 손에 쥐고 우현 쪽 브리지 윙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 뱃전 가까이로 달라붙은 해적선 갑판에서 한 녀석이 로프를 휘두르는 게 보였다. 그 곁에서 다른 녀석 하나는 연신 자동소총을 난사해대고 있었다. 놈들로서는 목표물이 분명한 만큼 아무 주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윙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먼저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있는 녀석을 조준했다. 그리고 와락 발사 끈을 잡아당겼다. 콰앙! 고막을 찢을 듯 한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내용물이 신호탄 껍질을 박차는 충격과 함께 통을 쥔 그녀의 왼쪽 팔뚝을 사정없이 뒤로 밀쳐냈다. 순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신호탄은 마치 영양을 좇는 날렵한 치타처럼 아주 정확하게 해적선 갑판을 향해 사행해 갔다. 그리고 그 폭약은 한창 자동소총을 난사해대던 녀석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췄다. 곧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머뭇거리지 않고 두 번째 발사 끈도 잡아챘다. 이번에는 로프를 휘두르는 녀석을 겨냥했다. 하지만 크게 빗나갔다. 의외의 공격에 놀란 해적선이 급히 뱃머리를 돌린 결과였다. 그러나 그걸 다만 빗나갔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손을 떠난 두 번째 화염 줄기는 해적선 조타실 내부를 관통한 다음 반대편 바닷물에 꽂히면서 한 길이나 되는 물기둥을 치솟게 하였으니 말이었다. 조타실 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선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효력은 대단했다. 무어라고 왁자하게 떠들어대며 해적선이 저만치로 물러간 게 그 증거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에 혼비백산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총질을 그친 것은 아니었다. 더욱 요란스럽게, 완전한 난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녀는 다시 나머지 신호탄을 꺼내올 참이었다. 순간 상갑판 저만치서 무엇이 허물어지는 듯 한 소리를 들었다. 1항사였다. 총알을 맞은 게 틀림없었다. 서해교전 때는 참수리에 승무하면서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을 대파했었고, 한창 때는 주력 구축함에서 조타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해군의 부사관 출신이었다. “앗! 1항사님!” 소리치며 그녀는 다짜고짜 선배에게로 달려갔다. 14 상갑판으로 옮겨진 1항사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을 감싸 안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압박붕대!” 선장이 소리쳤다. “저는……괜찮습니다.” 1항사의 잦아든 목소리였다.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눈망울이었다. 갑자기 사방이 적막 속에 빠졌다. 웬 까닭인지, 해적선의 난사가 그쳐 있었다. “미스 장, 대단해……. 아주……대단해.” 1항사가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려고 애 쓰는 것 같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그 손을 잡았다. “미스 장……저기 말이야…….” 1항사의 시선이 갑판 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와이어로프로 고정된 12피트 소형 컨테이너 쪽이었다. “저 컨테이너 말인가요?” 그녀 물음에 1항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기에 뭐가 있나요?” 그녀가 다그쳤다. 꼭 알아내어야 할 일이었다. “놈들은……놈들은 저걸 노리고 있었다.” 두어 번 실눈을 깜박이며 1항사가 말을 이었다. 꼭 당부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뭐라더라? 도용이라던가……중국 후베이 성 어딘가에서 발굴된 진 나라 때의 시황제 유물 같은 거……병사와 함께 수레도 있었고, 말도 있었지? 수천 구도 더 되었다지, 아마? 그게 컨테이너 속에……그 장궈이란……마피아……그래서 아마 비싼 운송료가 제의된 거 같아……우리 선주는 물론 알지 못 했고……수당 어쩌고 하는 말은 거기서 나왔던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1항사는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본사의 메시지를 수신한 순간부터 의구심을 씻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혼자서 퀴즈풀이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포트 켈랑을 출항한 직후 선원들을 시켜 해치를 조사한 건가요?” “그건……포트 켈랑에서 실은 천연고무 원료 라텍스 같은 거……그건 아니고……황푸 항의 컨테이너……그 속에 진시황릉의 유물이 들어 있어. 그 장궈이란 일당의 수작이었어. 해적 놈들은 그걸 노렸고.” “아, 이제야 알겠어요.”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순간, 맞잡은 1항사의 손이 스르르 풀리는가 싶더니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젖혀졌다. “1항사님……!” 2항사 장혜옥은 그만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15 대양의 맑은 아침이었다. 바다에는 잔 비늘 하나 보이지 않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떠 있지 않았다. 모처럼 하늘과 바다가 맞붙어 있었다. 어제 적도를 통과한 배는 남지나해의 마지막 섬인 빌리톤을 뒤로한 다음 이제 마지막 기항지인 자카르타 항을 향해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내일 오후면 도착할 수 있을까. 동남아 항로를 뛰는 오션 글로벌 호의 자이로컴퍼스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7도의 에러를 갖고 있었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항로를 밟아나가고 있었다. 부상한 갑판장은 곧 입항할 자카르타에서 병원조치를 받으면 얼마든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선장이 맡긴 1만8천 달러의 비상 선용금도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항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갑판에 적재된 12피트 컨테이너와 관련한 미스터리는 자카르타 항에 도착하는 대로 그 내막이 깡그리 밝혀질 것이다. 2항사 장혜옥은 광대하게 펼쳐진 남지나해 끝자락을 망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독히도 두렵고 두려웠지만, 정겹고 따사로울 때가 더 많은 바다였다. “2항사, 내가 끓였다.” 다음 날 오후, 아직도 기침을 멈추지 못한 노선장이 조타실로 올라왔다. 평생 동안 외항선에 승선하여 세계의 바다를 누벼온 올드 캡틴이었다. “고맙습니다, 선장님.” 선장이 건네 준 커피는 따뜻했다. 때맞추어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바타비아라 불리었던 자카르타 항의 산자락이 수평선 나지막이 솟아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끝> 약력 주문진 수산고, 강원도립대학 해양산업학과 졸업. 과학기술부장관명의 해양학사 취득. 한국해양대학교대학원 국제지역문화학과 석사과정. 제 3회 원양산업노조공모전 대상 <해양시> 제 1회 <계간문예> 영목신인상〈시〉 제12회 바다의 날 해수부장관 표창 제11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해양시〉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해양소설〉 제 4회 해양문학상 우수상 <해양소설> 제13회 여수해양문학상 우수상 <해양소설> 제 2회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대상 <해양소설> 해양시집〈진화하지 못한 물고기〉<대왕고래를 만나다> 해양산문<바다 위에서> 어선, 상선1급항해사. 동력레저조종1급항해사. 소형선박항해사. 요트항해사. GOC항해사. 한국해양문학연구회-빅블루 동인. 원양봉수망 선장  
196 난초네 옆집에는 베고니아가 산다/노정희 file
편집자
2869 2012-02-29
12.03월 22호 수필  난초네 옆집에는 베고니아가 산다 노 정 희 “아!” 보세난에 꽃대가 올라와 있었다. 베란다에서 찬 기운 견디고 당차게 올린 꽃대는 부화하기 직전의 숭고한 모습으로 둥지를 틀었다. 화한 백학이 되고, 코끝 아릿한 향기의 홍학이 되어 날개를 펼칠 그 자태를 상상하며 마음이 먼저 꽃을 피웠다. 밤낮으로 들여다보고픈 욕심이 앞서 난 분 세 개를 거실로 옮겼다. 십여 년도 넘었을 게야, 친구 집에서 한 줄기 얻어 온 타이거베고니아는 저희들끼리 엉덩이를 비비면서도 잘 자라주었다. 여기저기 분양해 주었는데도 무성하여 해마다 꽃대를 올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인다. 난초 옆에 타이거베고니아를 겹살림하니 모양새가 어울린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 설 전날, 장롱위에 올려 둔 비상금을 꺼내려다 받침대가 기우뚱하여 넘어지신 것이다. 손자들한테 줄 세뱃돈은 장롱위에서 쿨쿨 게으른 잠을 잤다. 어머님은 온화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분이라 차도가 빨랐다. 병원에 계시니 더운밥에 세면장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되레 시골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보다 편하다고 하셨다. 옆 병상에 할머니 한 분도 같은 날 입원을 하셨다. 설 준비하느라 바쁘게 일하다가 넘어 졌는데 골반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며느리들은 직장 생활하느라 바쁘다며 아들들이 차례로 다녀갔는데 내 손길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한 옴큼의 짚단처럼 가벼웠다. 병상에 누워서도 집안일을 걱정하였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는 정신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시며 겹겹 말아두었던 지나간 시간을 횡설수설 풀어내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한다며 몸을 일으키다가 수술한 골반 뼈가 어긋나 침대에 묶이는 형편에 까지 이르렀다. 추운 날 몸져누운 두 할머니, 허리 굽은 떡갈나무마냥 평생을 가족위해 헌신하며 산골마을에 뿌리 내린 두 분은 형광등 불빛 아래 각각의 표정을 짓고 계셨다. 어머님은 TV연속극에 귀를 여시고, 할머니는 내가 읽어 주는 잡지속의 글귀에 귀를 여셨다. 한참 책을 읽다가 돌아보면 하얀 빛을 쏟아내는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도토리 굴리듯 데구루루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창백하게 시들어 갔다. 거실로 옮겨온 난초는 겉보기에는 탈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망울이 말라서 배배틀어지는 게 아닌가. 물을 뿌려주고 영양제를 주었는데도 기어이 꽃망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신이 자라던 환경이 아니라고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타이거베고니아는 따뜻한 거실에서 꽃대를 힘차게 올렸다. 화드득 무리지어 피어난 흰 꽃은 떼 지은 참새마냥 무수히 날개를 퍼덕였다. 검붉고 두툼한 잎사귀가 건강함을 과시하며 화사함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어머님은 두 달간의 병원생활을 마쳤다. 업혀서 들어갔던 병원문을 걸어서 나오셨다. 군위 한밤마을 홍씨댁 맏딸로 아버님께 시집올 때는 고운 꿈을 꾸셨겠지. 그러나 운명은 얄궂어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사십대 후반에 남편 여의고 어린 육남매 바라보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슬픔에 잠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었겠는가, 어머님은 둥지에 있는 새끼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그 힘든 현실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스스로 아름다운 꽃이길 포기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강인한 들꽃이 되기를 자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담담하게 병원 문을 나서는 어머니 눈길에 같은 병실의 할머니걱정이 물컹거렸다. 완전히 정신 줄을 놓아 버린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뒤틀며 허공에 휘휘 손을 저었다. 날고 싶은 게야, 훨훨 날아서 집으로 가고 싶은 게야. 끝내 그 새는 이승에서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 빛살 속에 새들이 날아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지난해의 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다시금 보세난 두개의 분에서 꽃대가 올라온 것이다. 욕심 부리지 말자고 마음먹으며 틈틈이 베란다에 나가서 꽃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연둣빛과 갈색빛깔의 날개를 펼친 모습이 고고하다. 난 옆집에는 여전히 베고니아가 살림을 하며 올망졸망 참새 눈알같은 꽃망울을 달고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오늘, 베란다에 꽃향기 분분하다. --------------- 노정희 대구문인협회, 대구작가회의, 달구벌수필 문학회, 열린수필동인 대구수필가협회 간사, 문장작가회의 사무국장, 수필과지성 아카데미 사무국장 계간<문장>편집위원 주소 : 대구시 수성구 범물2동 서한화성타운 102동 1002호 메일 : -roh-@hanmail.net  
195 오이소박이/권천학 file
편집자
2854 2012-02-29
12.03월 22호 소설  오이소박이 권 천 학 “배라먹을 짜식!” 아리랑식당의 뒤뜰, 울타리 가의 벤치 위에 쏟아지는 오후 3시의 초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경애는 주방장 모자를 벗어 벤치 위에 떨어진 햇살을 툭툭 날려버리고 걸터앉자마자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담배부터 꺼내 문다. “너 혹시 내가 식당주방에서 일한다는 말 진수에게 한 거 아냐?” 경애가 주방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수에게 하지 말라고 경주에게 당부한 것은 진수에게 좀 더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진수가 힘든 엄마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포자기에 빠질까봐서. 머지않아 스스로 옷가게를 차려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진수를 데려올 작정이라고, 좀 성급하지만 이른 언질을 준 것도 그것이 더 진수에겐 희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수가 4년제가 아닌 전문대학을 간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데 요리전공, 그것도 한국요리를 전공하겠다고 하니 억지로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경주에게 다져본 말이었다. “아니, 안 했어. 언니가 그 말은 하지 말랬잖아. 너무 뜻밖이라서 나도 놀랐어.” 아직도 경주의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아직도 뱅뱅 돈다. 어미에 대한 반감으로 빗나간 걸까? 떨어져 산 6년 가까운 시간동안 아이의 적성도 모르고 지난 것이 또다시 죄의식으로 덮쳐왔다. 삶이 이토록 파김치로 죽 쑤어질 운명이 될 줄이야. 이게 다 그 ‘베라먹은 짜식’ 때문이다. 여자라 해서 다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요리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먹으면 된다. 경애가 그렇다. 어릴 때 가끔 어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리면 식구들이 맛있다고는 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가지나물을 만들어 상에 올리면 아버지는 늘 어머니가 하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했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빵공장에 다니는 엄마가 늦어질 때 대신하는 경애에게 미안함을 대신한 칭찬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결혼해서 살 동안에 경애가 담근 파김치는 유난히 맛있다고들 했다. 남편은 물론 올케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경애표 파김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애가 요리를 먹고사는 방편으로 삼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진수까지 요리전공학과로 진학을 하겠다니. 참 묘하게 변했구나. 9월, 벌써 들쭉날쭉 늘어선 지붕들 너머로 보이는 크리스티 피츠 파크 (Christie Pits Park) 귀퉁이의 나무들이 가을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가슴에 맺힌 울분도 가을을 맞이하여 색이 바래지는 나뭇잎처럼 바래졌으면 좋으련만 택도 없다. 경주와의 통화로 오히려 묵직한 쇳덩이가 얹히고 그 ‘배라먹을 짜식’에 대한 분이 다시금 솟구쳐왔다. “개새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나서 가슴 밑바닥까지 고여 있을 니코틴을 뿜어내기라도 하듯, 후욱~ 머금은 담배연기를 깊게 토해낸다. 그냥 ‘빌어먹은 자식’이라고 하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서 말을 비틀어 ‘배라먹을 짜식’이라고 하고, 그 한 마디로도 부족하여 ‘개새끼’가 한 마디 더 붙여졌다. 그 두 마디 말로서 어찌 분한 마음을 다 풀어낼까만 그래도 그 두 마디는 한 쌍을 이루어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속에 쌓여있는 울화의 어느 한 귀퉁이를 눈곱만큼이라도 삭여내는 것으로 써먹는 육자배기가 되어 아예 입에 올라 혼잣소리처럼 수시로 튀어나오는 입버릇이 된지 오래다. 오늘따라 한 쌍의 육자배기를 뱉어내어도 시원치가 않다. 늘 하던 대로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고 저녁식사 준비시간 사이에 잠깐 나와 피우는 담배의 꿀맛도 사라졌다. 어디 4년제 대학만 대학이냐. 중요한 시기에 어미 떨어져 할머니와 살면서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니 뭔들 충분할 것이며 뭔들 힘들지 않을까. 다 내 탓이고 내 잘못이지. 그래, 경애말대로 전문대학이라도 가서 취업이라도 하겠다니 그것만 해도 신통방통이지. “그나저나 언닌 어때? 잘 지내지? 건강하구? 언니일이 빨리 풀려야 오든지 가든지 빨리 합치지. 진수 할머니도 연세치곤 아직까지는 짱짱하시지만 그래도 어디 노인네 건강 믿을 수 있어? 그러니까 언니, 언니자신을 위해서도 포기할건 포기해버려. 이젠 시간도 그만큼 흘러 버렸으니 분을 삭힐 때도 됐잖아. 언니가 빨리 마음도 잡고 자리도 잡아야지.” 6년, 분을 삭힐 때가 됐다고? 흥,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마지막 화풀이라도 하듯 허리를 굽혀 시멘트 바닥에 담뱃불을 거칠게 눌러 비벼 끄고는 마당 귀퉁이에 줄서듯 놓여있는 세 개의 쓰레기통을 향하여 휘익 꽁초를 던진다. 아까부터 쓰레기통을 들락거리던 갈매기 두 마리가 움찔 하다가 다시 돌아와 여전히 쓰레기통 주변을 알짱거린다. “뭐 먹잘 게 있다고… 쯧” 괜히 기러기가 측은하게 느껴져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의미 없이 던진다. 처음 토론토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도시의 건물 위에 날아다니는 기러기가 너무 신기했다. 도시의 지붕에 웬 기러기? 비둘기라면 모르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왠지 자기 자신이 기러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살면서 줄곧 기러기는 가을 새이거나 바닷새이거나. 거기다 더하여 시리게 푸른 가을 창공을 지나 먼 길을 떠나는 철새 정도의 상식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던 새였다. 그리고 기러기가 아니라 갈매기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지만 기러기나 갈매기나 경애에겐 낯선 곳을 떠도는 외롭고 썰렁한 존재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불쑥 떠오르는 노래 한 가닥, 아주 오래 전에 불렀던 기억 속의 노래 한 소절을 웅얼거리곤 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긴, 쓰레기통 뒤지는 니 신세나 낯선 땅에서 헤매는 내 신세나… 그게 다” 육자배기가 또 튀어나오려는 순간 식당의 뒷문이 열리며 주방 보조인 한씨 아줌마가 얼굴을 내민다. “오이 배달 왔어. 진수 엄마. 지금 절일까?” “그러세요.” 한씨아줌마의 모습이 안으로 사라지자 경애는 벤치에서 일어나 옆에 놓았던 주방장 모자를 들어 허벅지 위에 대고 탈탈 턴다. 마치 앞치마에 내려앉는 가을볕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그 ‘개새끼’를 두드려 패기라도 하듯이. 아리랑식당의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한 첫날, 주문받은 오징어볶음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바짝 달아오른 프라이팬에서 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가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물기 한 방울이 얼굴로 튀었다. 순간적으로 앗 뜨거! 하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배라먹을 짜식!’하고 뱉어내었다. 그리고 이어 커다란 뒤지개로 뒤집어가면서 ‘개새끼!’ 물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육자배기였다. 보고 있던 한씨 아줌마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다음부턴 오-징어 볶음 주문받지 말까-요 주방장니임?”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간 육자배기 때문이라는 걸 직감했다. 어쩌면 경애가 오징어볶음을 잘 할 줄 모르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못 들은 척 했다. 한씨아줌마가 뜨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했다. 오징어볶음을 서빙하고 주방으로 들어와 경애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주방장님, 저어 다음부턴 오징어볶음…” “왜요? 주문 많이 받아야지요. 그래야 장사가 잘 되죠. 장사가 잘 돼야 아줌마나 나나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 아녜요?” 경애가 말허리를 자르며 능청을 떨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웃기까지 했다. 그런 경애를 보고 오히려 야릇해진 것은 한씨아줌마였다. “참, 아줌마 성이 한씨라고 했죠?” “네에-. 왜요?”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이상하다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찾는 배라먹을 개새끼가 한 씨라서요.’하고 싶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한 씨라고 하는 개자식이 있어서요’하는 말을 혀 아래 눌러버렸다. “여기 사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여기 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쓰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한씨 아줌마도 그런가 해서요.” 이민 8년차인 한씨아줌마, 이민 선배라고 해서 별반 사정이 나아보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대충 고향친구의 말만 믿고 이민 왔다가 몽땅 날리고 이제 겨우 안정이 되어간다는 것과 남편이 한인교회에서 허드렛일을 봐주며 살아간다고 했다. 안정이 되어간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안정이 아니라 사기를 당하고 쓰러진 몸과 마음을 이제야 겨우 추스르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네에, 난 또… 난 내가 한씨예요.” 그래도 뭔가 석연찮았는지 한씨아줌마 역시 조금 전에 성애가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삐쭉하는 제스처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났다. 김빠진다는 표시 같았다. 경애가 다시 김빠진 분위기를 부추켰다. “한씨아줌마, 절 주방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도 한씨아줌마 대신 언니라고 부를게요.” 마흔 아홉인 자신에겐 언니뻘 되는 오십대 중반의 주방보조 한씨아줌마와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였다. “그럼 내가 뭐라고 불러?” “진수 엄마.” “아하, 아들 이름이 진수구나. 그럼 그러지 뭐.” 그렇게 서로 호칭을 풀었어도 가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삐딱할 땐 ‘주방장님’이나 ‘한씨아줌마’로 돌아가긴 했지만, 한결 친숙하고 편안해졌다. 경애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이 진수의 엄마임을 스스로에게 새겨두고 싶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절여지고 있는 오이들을 뒤적이며 경애가 말했다. 한씨아줌마가 대답대신 바라봤다. 어디 다녀올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한씨아줌마는 연배도 연배지만 타국생활에 많은 경험을 한 탓인지 비교적 사려 깊고, 서양식 예절도 어느 정도 잘 습득하고 있다. 그런 한씨아줌마에 대한 예의로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한다. “은행에 잠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체국에도 아예 다녀 올 계획이다. “알았어. 오래 걸리지 않지?” “녜, 갔다 와서 이거 담을 테니까 준비 끝내 놓으세요, 언니.” 경애는 앞치마를 벗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은행은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생각은 닷새분량이다. 진수 통장으로 5천불을 송금하고 은행을 나왔다. 마음 같아서야 이곳으로 데려와서 공부시키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송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5천불, 한화로 환산하면 5백만 원 정도이다. 그동안 몸과 마음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모은 돈이기도 하다. 진수의 대학 등록금이라도 치러주고 싶었다. 물론 경주가 염려 말라곤 했지만 그냥 말 수가 없었다. 경애에겐 큰 돈이면서 적은 돈이기도 하다. 은행을 나와서 근처의 우체국코너가 있는 대형 잡화점 샤퍼즈 드럭 마트(Shoppers Drug Mart)에 갔다. 카드판매대에 먼저 들렀다. ‘Love’ 라고 인쇄되어 있는 카드 한 장을 골라 창가의 의자로 갔다. 가슴이 떨렸다. 손가락도 떨렸다. 힘들게, 천천히 썼다. <진수야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요즘 대학입시 때문에 힘들지? 전문대학 간다면서?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리라고 믿어. 진수를 사랑하고, 언제나 미안한 엄마가> 처음으로 부치는 카드. 이 짤막한 문장을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동안 가슴 속에 쌓여있는 말들이 고작 이것뿐이라니. 먹먹하기만 했다. 마지막 ‘엄마가’를 쓸 때쯤엔 기어이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도 내가 엄마일 수 있을까? 아직도 어미 자격이 유효한가? 그래서 ‘이곳으로 너를 초청할게.’ 라는 말을 차마 쓰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수월치 않았는데 앞으로 또 일이 어떻게 풀릴지. 언제쯤 형편이 좋아질지, 짐작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장담했다간 거짓말쟁이가 되어 진수를 더욱 실망 시킬 것 같아서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줘’라고만 썼다. 그래도 카드를 부치고 돌아오는 거리는 한결 산뜻했다. 바람이 서늘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가벼워졌다. 이번 겨울이 따뜻할 거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아니, 이번 겨울은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바람결에 밀려온다. 모처럼 마음이 뿌듯해진 경애가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와 오이소박이를 담기 시작했다. 잘 절여진 오이와 준비한 양념들을 알맞게 버무려 소를 박았다. 사흘 후면 제임스가 회사동료들을 몰고 올 예약일이니 그 날짜에 맞추어서 오이소박이를 충분히 준비해놔야 한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한씨아줌마가 입을 연다. “역시 진수엄마 손맛이 최고라니까.” 제임스가 주문한 오이소박이의 제 맛을 살리려면 오늘 담아서 숙성시켜놔야 한다. 제임스는 갓 담은 오이소박이도 좋아하지만 약간 숙성된 오이소박이를 더 좋아한다. 한씨아줌마가 다시 입을 연다. “제임스 그 사람 참 괜찮아 보이잖아?” 제임스가 은근히 경애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경애의 속을 떠보는 말이다. 두 사람이 맺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을 열지 않는 경애가 안타깝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자식 떼어놓고 혼자서 낯선 나라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돌아갈 것 같진 않으니 그럴 바엔 누군가와 맺어져 사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치루는 타국생활이 얼마나 힘들까? 그런 경애가 동생처럼 여겨져서 늘 안쓰럽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버무려진 오이소박이를 항아리에 담는 경애를 향해서 한 톤 높여 한 마디 더 던진다. “안 그래요 주 방 장 님?” “여기 진수엄마밖에 없는데요.” “그거나 저거나…” ‘뭐가 그거나 저거나예요? 어 다르고 아 다른데···” “워킹비자 갱신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런가요, 한 씨 아 줌 마?” “이그. 알았어, 알았어, 진 수 엄 마.” 그제야 두 사람이 서로 통한 속을 알고 싱겁게 웃는다. 아리랑식당의 주방장이 되기까지 고생도 할 만큼 했고, 토론토바닥을 뒤질 만큼 뒤지기도 해서 이젠 알 만큼 알게도 되었다. 그동안 온갖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희숙의 집에서 눈치 보며 빈둥거리기도 했고, 희숙의 소개로 사무실 청소도 해봤다. 한인식당의 설거지나 반찬보조를 하면서 옮겨 다닌 식당이 세 군데나 된다. 희숙의 고마움에 대한 답으로 짬을 내어 희숙에게 반찬 만들어 준 것이 계기로 혼자 먹기 아깝다면서 희숙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전하여 돈을 받고 반찬을 공급하도록 주었다. 투 잡이 되었다. ‘개새끼’를 찾기 위해서라도 토론토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자니 경제적 자립이 더욱 절실해졌다. 경제적 자립이 되면 진수와 시어머니도 모셔올 수 있다. 지금까지 해본 일 중에서 식당 일이 가장 수월했다. 영어도 서툰데다 ‘개새끼’의 거처를 염탐하거나 잡는 일에도 유리할 것 같았다. ‘언제건 처먹으러 나타나겠지. 지가 안 먹고 견뎌?’ 어리석은 기대일진 모르나 접지는 않았다. 언제 나타날래? 개미귀신이라도 되어 구덩이 파놓고 기다리마 하며 이를 악물었다. 기왕 코리아타운의 한식당주인들 사이에 음식솜씨가 어는 정도 인정받는 판이니 요리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지름길로 판단됐다. 그래서 어렵사리 영어공부도 하면서 요리학원을 다녔다. 일 년 만에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마침 지금의 아리랑식당의 주방장 자리가 나자 주인아저씨가 먼저 손을 뻗어왔다. 사실 요리사가 된 후 첫 직장인지라 경애에게는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다. 요리에는 특별한 재주가 없을망정 기왕 요리사로 취직을 했으니 원망은 듣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경애가 일하기 시작하면서 아리랑식당의 음식 맛이 좋다는 평이 나고 손님들도 늘었다. 반찬 만들기에 더욱 신경을 썼다. 한국식당이면 다 하는 일반 메뉴들이지만 주 요리와 함께 나오는 반찬들에 대한 평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김치를 비롯하여 멸치볶음, 감자볶음, 땅콩조림, 콩나물, 무나물, 배추나물 등의 나물류와 오징어채무침, 그리고 오이소박이 등이다. 그 중에서도 오이소박이의 인기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옛 추억을 되살리며 파김치라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김치를 담가보기도 했다. 그러나 캐나다의 파 품종으로 담그는 파김치로는 한국에서의 ‘경애표 파김치’의 맛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진수가 좋아하던 오이소박이를 담아보기로 했다. 물론 오이도 한국의 오이와 똑같은 품종은 찾기 어려웠다. 한국의 오이를 최소한 서너 개는 합쳐야 할 만큼 큰 캐나다의 오이, 그 팔뚝만한 크기에서부터 사람을 질리게 했다. 맛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맛도 없다. 다행히 육질이 단단하여 사각거리고 맛도 한국오이와 비슷한 피클용이나 통조림용으로 쓰이는 품종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피클용 오이로 담그면 오히려 한국에서의 오이소박이보다 더 사각거리고 고들거려서 좋았다. 쉽게 물러지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실험과 궁리 끝에 담가내는 오이소박이가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자연히 오이소박이 떨어지는 날이 없도록 신경 쓰게 되었다. 한국 손님들도 그랬지만 한국음식을 좋아해서 아리랑식당을 찾아오는 외국사람 단골들도 오이소박이를 즐겨 찾았고, 어쩌다가 우연히 찾아온 외국손님들 중에는 오이소박이 때문에 단골이 되기도 했다. 산뜻하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셈이다. 주로 샐러드로 이용하거나 피클로 만들어 햄버거사이에 끼워먹는 정도의 오이를 김치로 만들어먹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리랑식당의 오이소박이’란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매콤하면서도 새콤달콤한 오이소박이. ‘아리랑식당의 오이소박이’가 유명해지면서 주인아저씨의 얼굴도 싱글벙글이 되었고, 경애의 입지도 좋아졌다. 한씨아줌마는 ‘역시 진수엄마 손맛이 최고야’ 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경애에게는 오이소박이가 가슴 아픈 메뉴이기도 하다. 진수가 좋아하는 반찬이었기 때문이다. 진수는 어렸을 때부터 경애의 매콤한 오이소박이를 좋아했다. 오이소박이가 적당히 익어 신맛이 돌 때까지도 진수는 오이소박이 한 가지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녀석이었다. 막 담갔을 때는 싱싱해서 좋다면서 경애의 귀에 입을 대고 사각사각 씹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시큼하게 익으면 익어서 좋다고 하며 시어진 국물에 밥을 비벼먹곤 했다. 그런 아이를 ‘배라먹을 놈’ 때문에 할머니에게 맡기고 흔한 오이소박이를 먹이지 못하다니. 오이소박이를 담글 때마다 가슴에 걸려있는 자식, 죄인일수밖에 없는 어미의 마음이다. 진수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오이를 절이고, 고춧가루에 부추 소를 버무리면서 아리게 생각하고, 아린 속으로 울고, 울면서 사죄하고… 그러면서 ‘개새끼’를 어떻게 잡을까 이를 간다. 제임스는 오이소박이가 좋아서 아리랑식당을 찾아오는 외국사람 중의 하나다. 한국음식이 좋아서 가끔 코리아타운에 온다는 그가 우연히 아리랑식당에 들렸다가 오이소박이 맛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는 단골이 되었다. 단골이 되어 낯이 익어갈 무렵인 어느 날 그가 꽃다발을 들고 식당에 왔다. 오이소박이를 만들어낸 주방장을 만나고 싶다고 면담을 요청했다. 주인아저씨의 부름을 받고 홀로 나온 경애에게 그는 맛있는 오이소박이를 먹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아리랑식당사람들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가족처럼 친근한 단골이 되었고, 갓 버무린 오이소박이에서부터 약간 숙성된 오이소박이, 많이 시어진 오이소박이까지 다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오이소박이라면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삼일 숙성되어 약간 새큼한 맛을 내기 시작했을 때의 오이소박이를 더 좋아했다. 시어진 국물에 밥 한술 넣어 비벼먹는 것까지 영락없는 한국사람 입맛이다. 그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오이소박이를 먹거나 시어터진 오이소박이 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것을 볼 때마다 경애는 자신도 모르게 진수도 그랬는데… 하고 떠올리며 마음이 시어졌다. 그렇게 말문을 튼 제임스와는 친구처럼 되어갔다. 주말이나 휴일, 특별한 날, 이를테면 경애가 한 달에 한번 일찍 들어가는 마지막 목요일 같은 날에 맞춰 박물관에도 가고 교외로 드라이브도 한다. 답답한 경애의 일상에 숨통을 터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아저씨나 한씨아줌마도 은근히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해주었다. 그가 올 때마다 경애는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직접 서빙도 하고 대화도 나누게 되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서로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는 영 스트리트(Yonge Street)와 칼리지 스트리트(College Street)가 만나는 곳에서 조그만 프린트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십년 전에 아내와 이혼하고 싱글로 살고 있었다. 일하는 사이사이 주방과 홀 사이에 나지막하게 막아진 유리창 너머로 자주 홀을 살피 는 것이 경애의 습관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저 습관이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지만 한씨아줌마는 뭔가 낌새를 눈치 채고 있다. 홀을 살피는 경애의 눈매에서 어딘가 심상찮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냥 홀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홀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일일이 체크한다고 이해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대한 손님들의 반응이 어떤가 살피는 것. 그래서 가끔 한씨아줌마는 필요이상의 말을 경애에게 한다. 경애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려는 의도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식당 음식이 참 맛있다는 거 손님들이 다들 인정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땐 ‘저쪽 7번 테이블 있잖아, 저 손님이 우리 집 불고기 양념이 아주 특이하대. 자기가 지금까지 먹어본 중에서 가장 맛있다는 거야. 그래서 불고기 먹고싶을 땐 꼭 우리 집으로 온다잖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오이소박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경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한씨아줌마의 배려라는 것을 경애가 모를 리 없다. “한국음식 중에서도 김치 불고기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저쪽 구석에 있는 팀들이 오이소박이를 벌써 세 번째 추가야. 오늘 처음 먹어보았는데 아주 특이한 맛이라는 거야. 역시 진수엄마 손맛이 최고라니까.” 하지만 경애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는 한씨아줌마의 말은 귓가를 겉돌 뿐이다. 경애는 그런 한씨아줌마가 미안해서 피식 웃고, 한씨 아줌마는 자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아 눈을 흘긴다. 갑자기 도마 위에서 소리를 내며 뚜닥거리던 칼질소리가 멈췄다. 아주 짧은 시간, 홀 쪽을 응시하는 경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숨이 멎는 듯, 머리끝이 쭈뼛, 소름이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하나, 두울, 셋! 숨을 고르던 경애가 튕겨지듯 홀 쪽으로 뛰쳐나갔다. 문턱을 넘어오던 한씨아줌마가 아슬아슬하게 비켜섰다. 주방 안쪽에서 양파를 다듬고 있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학생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놀란 한씨아줌마의 눈길이 경애의 뒤를 따랐다. 홀로 뛰어나간 경애는 벽면에 잇대어있는 8번 테이블에 다가서자마자 거기 앉아서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남자의 멱살을 휘어잡는다. “이 배라먹을 자식~ 야 이 개새끼야~” 조용하던 홀의 분위기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계산대에 앉아있던 주인아저씨도 놀라서 바라본다. 경애에게 멱살을 잡힌 남자가 토끼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경애의 팔을 비틀어 잡으며 일어섰다. 그 순간, 아! 소리와 함께 입에 비수라도 문 듯 날카롭던 경애가 멱살잡이 한 손을 놓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홀에서 서빙을 하던 두 아가씨가 놀라 일손을 멈춘 채 바라보고, 주인아저씨가 다가가고, 한씨아줌마도 다가가고,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오우, 쏘리, 쏘리, 쏘리, 쏘리…” 횡설수설 쏘리라는 단어만 입에 올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경애가 한씨아줌마에게 끌려서 주방으로 떠밀려 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찾는 도둑놈인 줄 알고 그만.” 주방으로 들어와서 영문을 묻는 주인아저씨에게 대답하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급하게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토끼 눈을 하고 서있는 손님에게 다가가서 극진하게 해명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해명이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다. “If he looks like me, he must be a pretty good-looking guy…(나를 닮았다면, 꽤 잘 생긴 모양입니다…)” 토끼눈의 남자가 던지는 위트 있는 한 마디로 홀 안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돌발적으로 일어난 짤막한 해프닝이 싱겁게 막을 내렸다. 경애가 아리랑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여섯 달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엉뚱한 실수를 하고보니 경애로선 겸연쩍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리랑식당 식구들에게 감추고 있던 비밀을 온통 다 들통이 난 기분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일을 계기로 그동안 경애가 주방에서 일하는 중에도 수시로 홀을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씨아줌마의 생각도 바뀌었다. 자신의 음식에 대한 소님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그 일로 해서 어정쩡하게 다소 풀죽은 모습이긴 했으나 치 뜬 시선으로 수시로 유리 칸막이 너머 홀을 훑어 내리는 경애의 습관은 변함이 없었다. 한국이 IMF의 직격탄을 맞았을 때 남편은 다니던 자동차부품 생산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실직자가 되었다. 실직자생활로 갈피를 못 잡던 남편이 택시운전을 해보겠다고 택시회사를 전전하다가 자유롭고, 노후보장이 된다는 말에 혹하여 빚을 내어 비싼 권리금까지 주어가며 개인택시를 사들였다. 개인택시를 사들인지 석 달쯤 된 어느 늦은 밤에 무단횡단을 하는 행인을 피해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앞서가는 트럭을 들이받고 전신주에 부딪쳐서 논두렁에 처박히는 대형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중환자실에서 반년을 보낸 남편은 빚만 잔뜩 남기고 끝내 마흔 아홉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른아홉의 경애에게도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았다. 졸지에 과부가 되고, 알거지가 되고, 빚장이가 된 경애에게 시어머니는 쌍 아홉수가 악수(惡數)라고 한탄하면서 살던 시골집과 코딱지만 한 논밭 떼기를 모조리 팔아 아들 병원비를 청산하는데 보탰다. 경애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빚을 대충 갚고 전셋집을 얻어 시어머니와 합쳤다. 진수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대형슈퍼마켓의 매장에 판매원으로 취직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러다가 동생 경주의 도움으로 신림동에서 조그만 피자가게를 인수받아 경영하기 시작했다. 판매원으로 일 할 때 보다 수입이 좋았지만 일은 훨씬 고되었다. 굴절을 겪고 후 다시 희망이 보일락 말락 할 때 지친 몸과 마음을 의지할 데가 필요했다. 피자가게가 있는 건물의 3층에 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면서 만나게 된 놈이 ‘개새끼’ 한성조이다. 겨우 일어서려는 자신의 삶을 헝클어버린 놈. 교회의 부목사였고 경애와는 동갑나기였다. 동갑나기라고 더욱 친하기도 했고 워낙 성실하여 신도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놈이다.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심방 때도 그랬지만 가끔 핏자가게에 들려서 어울리지 않는 오이소박이를 곁들인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청주 어딘가에 개척교회를 차려서 나가게 되었다. 신도들은 유능한 젊은 부목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또 하나의 역사(役事)를 이루어내는 것을 기뻐하며 축하했다. 자발적으로 개척교회의 모금을 했다. 알게 모르게 개인적으로 헌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날 ‘개새끼’가 은밀하게 경애를 찾아왔다. 진지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 일이니 몇 배의 축복이 내려지리라고 하면서 틀림없이 일 년 후에 큰 이자를 붙여 돌려주겠다고 했다. 많은 신도들이 관여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마(魔)가 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차피 모아진 돈을 통장에 넣어봤자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니어서 성스러운 일에 쓰이는 것이 훨씬 뜻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의심 없이 물론 이자도 없이 빌려주었다. 오년 동안 피자가게를 해서 모은 5천만 원이었다. 시어머니께 시골집을 마련해드리려던 돈이다. 그러나 ‘개새끼’가 청주로 내려간 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사기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자 없이 준 이유 때문에 경애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경애와 ‘개새끼’ 둘이서 배를 맞춰가며 벌인 사기극이니 은신처를 대라고 몰아붙였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은 진실처럼 굳어져갔다. 아무리 경애가 아니라고 한들 소용이 없었다. 혼자 사는 점, 동갑나기라고 친하게 지낸 점, 이자 없이 큰돈은 준 점까지 모두가 경애를 공범으로 몰아세우는데 잘도 들어맞았다. 법에 고소하고 싶지만 교회의 일이라 차마 못한다고 윽박질렀다. 법으로 호소하고 싶은 사람은 경애였다. 언제 ‘개새끼’와 미래를 속삭이기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이런 추잡한 소문에 휘말린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경애는 이를 갈았다. 어린 진수는? 그리고 시어머니는? 죽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더러운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죽을 수가 없었다. 세상 끝까지라도 뒤져서 ‘개새끼’를 찾아내어 목을 따버리고 말겠다고 작정했다. 토론토 어딘가로 잠적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비싼 비행기 싹을 들여가며 서울에서 토론토를 오가게 되자 가정을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그럴수록 분노와 증오가 단단해져갔다. 토론토 근교에 있는 교회들까지 안 뒤진 데가 없을 정도로 뒤지고 다녔다. 한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뒤졌다. 다행히 80년대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 희숙이를 수소문 끝에 연결되어 도움을 받았다. 3개월에 한 번씩 국외로 들락거려야 했다. 지금이야 취업비자를 받아서 연장해가고 있지만, 기어코 ‘개새끼’를 잡기 전에는 안 떠나리라. 제임스의 예약파티도 무사히 치르고 특별한 일 없는 나날이 흘러가면서 가을만 저 혼자 익어가는 어느 날, 저녁타임 준비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경주의 전화를 받았다. 경애는 핸드폰을 들고 뒤뜰로 나왔다. “언니, 진수가 돈을 가져왔어. 언니에게 돌려주라고.” 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감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작년부터 이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더니 언젠가는 이메일마저 반송되었으니까. ‘제 힘으로 하겠대. 내가 주는 것도 안 받아. 그동안 알바를 계속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언니, 이런 말을 해야 할지… 한국요리 전공한 건 엄마대신 스스로 오이소박이 실컷 담가먹을 거라고… 언니, 언니 듣는 거야? 언니 기분 아는데… 그래도 알고 있긴 해야 할 거 같아서…’ 뭐 대충 이런 말이 들려온 것 같긴 한데,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귀가 멍해지면서 아무소리도 안 들리고 그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힘없이 핸드폰의 커버를 덮었다. 크리스티 피츠 파크의 나뭇잎들이 붉고 노랗게 마지막 용을 쓰고 있는 것이 확연하다. 이번 겨울은 따뜻할 것 같던 예감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얼마 전의 기대가 일순간 노랗게 부서져버렸다.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수 천 수 만 개로 흩날려 보인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속사정을 한씨아줌마에게 털어놓았다. “너무 실망할 것 없어. 그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지. 조금만 참고 견뎌봐. 천륜은 쉽게 끊어지지 않아. 누가 알아? 아들놈이 엄마를 찾아와 최고의 맛을 내는 오이소박이 밥상을 차려낼지··· 알 수 없는 일이야.” 희극 같은 그 말이 경애의 마음을 옭아매기도 했지만 열리게도 해주었다. 그래 맞아. 지금까지 견뎠는데. 조금만 더 견디자. 견디면서 나도 이 코리아타운에서 오이소박이를 한국음식의 대표주자로 만들어봐? 놀라운 역설에 경애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경애의 마음이 가라앉을 무렵 한씨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이봐. 진수엄마. 나 부탁이 있어. 이번 목요일이 진수엄마 일찍 들어가는 날이잖아. 그날 저녁에 내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올 텐데, 그날 나와 주면 안 될까?” “중요한 사람인가보죠?” “응, 저런 꼬맹이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그래. 아무래도 손발 맞는 진수엄마가 있어야 주인아저씨 눈치 덜 보이고 대접하지. 대신 내가 다른 날 하루 대신 일해 줄게.” “알았어요.” 약속한 목요일, 초저녁 경애는 일찍 퇴근하지 않고 주방에 있었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신경을 쓰던 한씨아줌마가 서로 부축하듯 들어오는 두 남자를 보고 달려 나가 맞이했다. 그때 마침 화장실 계단에서 올라오던 경애가 힐끗 바라봤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는 것을 돕고 있었고 한씨아줌마도 그 옆에 서 거들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겨우 자리에 앉는 남자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몸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중환자였다. 돕는 남자가 한씨아줌마의 남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가가서 도울까 하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들어온 한씨아줌마가 음식 서빙을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양노원에서 계시는 분인데, 따져보니 우리 먼 친척뻘 되는 분이더라구. 무슨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데… 중증중독인데다 골수암까지 번져서… 한식다운 한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아마 마지막 외출이 될 거야.” 한씨아줌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리 칸막이 너머로 시선을 보내던 경애가 윽! 소리를 냈다. 겨우 좌정한 후 힘겹게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 수염과 머리카락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데다 퀭한 눈과 광대뼈가 거의 해골을 연상시키는 남자, 손까지 덜덜 떨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 ‘배라먹을 놈’, ‘개새끼’, 한성주였다. 경애의 태도에 한씨아줌마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목울대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 온몸을 조여 오는 전율. 경애는 애써 견디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흔들며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딴청을 부리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주저앉아지는 무릎을 겨우 조리대를 짚고 버텼다. 땀이 솟았다. 한씨아줌마가 들이대는 물컵을 받아 마셨다. 이를 악물고 최대한으로 태연을 가장하며 요리를 하고, 한씨아줌마의 요청 이상으로 성의를 다해 음식을 내보냈다. 오이소박이도 담아냈다. 교회모임에서 오이소박이를 맛있게 먹으며 칭찬하던 일이 떠올랐다. 물론 사단이 나기 전의 일이다. ‘빌어먹을. 왜 이 순간에 그런 일까지 떠오르는 거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정신이 제대로 있는지. 그저 둥둥 뜬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가득 먼지들이 들어차는 기분? 야구방망이로 된통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이럴까? 수습되지 않는 감정으로 허둥대느라고 한숨도 못 잤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었다. 분노도 울분도 더 이상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11월도 다 가는 마지막 금요일. 경애는 전날 밤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방에서 한씨아줌마와 부딪치지 않도록 비켜가면서 아무 일 없었던 듯 평소처럼 보내느라고 애쓰다 보니 오히려 뭔가 더 어색해졌다. 가끔씩 코웃음도 아닌, 한숨도 아닌 야릇한 헛웃음이 코를 통해서 나왔다. 오히려 한씨아줌마가 더 걱정스러운 눈으로 경애를 살폈다. “그 양반, 오늘을 못 넘길 거래.” 귓등으로 들었지만 경애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여울을 만들었다. 그때 제임스가 들어왔다. 저녁 9시경. 평소의 저녁식사 시간보다 좀 늦은 시간이다. 경애는 여울을 건너 뛰어 홀로 나갔다. 제임스는 지난 번 회식 때 고마웠다는 인사를 빠트리지 않았다. “오늘 저녁 일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어요, 오이씨?” 자진해서 서빙을 하던 경애가 멈칫, 제임스를 바라본다. ‘오이’는 친근함을 표시하느라고 제임스가 붙인 경애의 애칭이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오이씨.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크리스티 피츠 파크로 가요. 거기 차를 세워두었거든요.” 알았다고 했다. 안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유리칸막이 너머에서 한씨아줌마가 두 사람을 향하여 윙크하는 것을 등 쪽으로 선 경애는 알아채지 못했다. 마주 보이는 제임스만 싱긋 웃었다. 모든 뒤처리를 한씨아줌마 몫으로 맡기고 조금 일찍 제임스와 함께 식당을 나왔다. 벌써 문을 닫은 가게들도 있었다. 공원이어선지 공기가 한결 싸늘했다. 서쪽 길가의 나무 아래 제임스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혹시 어디를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닌데, 어떻게 입막음을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제임스가 차 문을 열지 않고 차 뒤편으로 갔다. “오이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요.” 제임스가 트렁크 뚜껑을 열었다. 다가가서 트렁크 안을 들여다보던 경애의 눈이 커졌다. 어머나!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고 있는 차 트렁크 안에는 오이가 가득 실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오이, 이 오이로 오이소박이 담으면 얼마동안 먹을 수 있을까?” “…………?…………” “오이에게 부탁하는데, 이 오이로 오이소박이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한 번에 다 만들어주는 것보다 두고두고 조금씩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평생 동안.” “…………?…………” “모르겠어요? 오이씨? 나 지금 오이씨에게 청혼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경애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바늘밥이 터진 부대자루 같았다. 어디서 그렇게 웃음이 용솟음쳐 나오는지 자신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동안 웃어본 일이 없는, 숨겨져있던 웃음보가 터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어도 가시지 않는 웃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나무 둥치를 손으로 짚었다. 생각 같아서는 공원의 잔디밭에 나뒹굴고 싶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웃었다. 지켜보던 제임스가 어깨를 들먹이며 따라 웃기 시작했다. 큰 입을 벌리고 제임스가 웃자 경애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큰 키의 우둠지에서 검은 피부 때문에 드러나는 제임스의 하얀 이가 마치 공중에 떠있는 팔찌 같아서였다. ‘무슨 팔찌가 공중에 떠있냐? 입도 크다’ 하면서 웃었고, 순간 아, 저 팔찌가 내 운명을 묵는 수갑이구나 하며 스쳤다. 이내 웃음이 잦아들면서 눈물이 났다. 허탈했다. 눈물을 감추느라고 우우우 이상한 신음소리까지 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제임스는 ‘오이,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웃는 거야? 우는 거야?’ 하며 따라 웃었다. ‘정말 오이소박이 하나 잘 키워야 할까 봐. 진수를 만날 때까지…’ 경애는 그 생각을 웃음 사이에 띄워 날린다. 둘이서 웃어 재치는 소리가 뒤엉켜 공원의 잔디 위를 비추고 있는 불빛 사이를 지나 밤하늘로 따뜻하게 퍼져 나갔다.  
194 간이역 소식 외1편/박관서 file
편집자
3490 2012-02-29
12.03월 22호 시  간이역 소식 박관서 풀벌레 울음소리 가득하다 이른 저녁 땅거미와 함께 찾아와 군데군데 무너진 역사 둘레 담벼락을 무시로 타고 넘어 풀수밭 가득히 밤늦도록 멈추지 않는 풀벌레 울음소리여 낯선 숙직실 얄팍한 선잠을 걷어내고 부스스한 얼굴로 나선 새벽 두 시의 작은 역사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벌레들의 울음소리여 아무런 인수인계도 손뼉치는 맞교대도 없이 떠나감을 준비하는 풀벌레들의 아우성 속으로 푸짐한 수육 한 접시에 소주 몇 병을 나눠 마시고 어둔 얼굴로 밀려남을 걱정하며 돌아가던 옛 동료의 뼈처럼 깊은 위안이 들려오고 간간이 먼길을 달려온 야간열차의 환한 불빛 맑은 기적소리에 묻혀 짙푸른 밤하늘의 별들 총총한 속삭임과 함께 지새는 한 밤이 어찌 슬픔뿐이랴 돌아서서 단단한, 흰 소금기둥으로 한 점 불빛으로 지켜내는 어둔 들녘은 또 이리 아름다워서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온몸 가득 돋아나는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신새벽 통근기차가 올 때까지 나는 전호등처럼 깜박깜박 잠들지 않았다 봄소식 어머니와 아내가 외출 나갔다 식도 들어내고 위를 잘라낸 어머니 근 석 달 동안 멀건 미음 한 두 수저로 하루하루를 때우던 칠순의 어머니 끍 끍, 온 삭신을 쥐어 비틀어 밭은 가래를 뱉어 낼 때말고는 한 점의 기력도 없이 나날이 졸아드는 팔다리 일어난 각질들 이불 옷 카펫에 폴폴 달라붙어 눈 흘기는 식구들이야 그러건 말건 소멸되는 것들은 다 홀로라는 듯 세상 무엇도 싫어 고개만 절래절래 피마자 씨알처럼 탱글탱글한 눈으로 속으로만 속으로만 파들어 가던 어머니와 아내가 목욕을 갔다 창틀 가득 피어난 연둣빛 햇살, 눈이 다 환하다 봄님이 오셨다 박관서/ 전북 정읍생, 조선대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 1996년 계간『삶, 사회 그리고 문학』신인추천. 제7회 윤상원문학상 수상. 시집『철도원 일기』간행. 한국작가회의. 리얼리스트100 회원. 현 호남선 무안역 근무. ddh21@hanmail.net 주소: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예술인촌 월선길 129-2 ddh21@hanmail.net  
193 김숙자 외1편/박희용 file
편집자
3035 2012-02-29
12.03월 22호 시  김숙자 보상금이 풀리자 문전옥답을 물밑에 넣은 사내들의 주머니 속 돈 냄새가 퍼지자 진한 화장을 한 철새들이 몰려들었다 이주단지 변두리 판자촌 술집 마다 아 아 예안의 밤이여 젓가락 장단소리 뭇 새들이 뽑는 유행가 요란했다 새 한 마리 돌아가지 못했다 검은 머리 둥근 눈망울 붉은 입술 그만 돌아 갈 날을 잊고 말았다 여행 가방 가득 가득 지폐를 담아 부산 가는 길 훌훌 날아가야 했는데 유부남이 달콤한 말로 세우는 하루 밤 풋사랑에 그만 청춘이 묶이고 말았다 호반식당 있던 자리에서 늦은 점심이다 노릿한 꽁치구이 냄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집 한 채를 세내어 이젠 아가씨가 아니라 주인 행세로 잉어회를 뜨며 술을 팔았다 애비를 꼭 닮은 사내 아이 둘 예안 호 푸른 물속에 넣지 않고 키웠다 손님 방 벽에 걸어놓은 아이들의 상장을 자랑하며 가끔 안개처럼 치솟는 신분의 못을 탱탱한 엉덩이로 꾹꾹 눌렀다 그 언니 인물은 참 좋았지요 출신이 좀 솔직히 첩이잖아요 송 씨 아재는 두 아들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질 않았지요 아이들이 서른이 넘도록 벌이는 안 하고 부산 바다에 낚시만 다닌 데요 분열증 약을 먹으며 모텔엔가 청소 일 다닌 데요 그 언니는 아직 뒤태가 처녀 같아요 남자 성보고 결혼 했다는 식당 여주인은 그 언니 사는 꼴 보고 가슴이 아팠단 말을 여러 번 했다 종유석처럼 자란 못은 끝내 뒤태를 뚫고 아이들의 삼십 대까지 꿰고 말았다 춘설 난분분난분분 지상에 닿으면 금방 자유를 잃어버리는 너는 요단강에 보탠 세례 요한의 눈물 잉태의 뒤에 숨어 가만히 훔쳐 보는 너는 진이의 디리속곳에 묻은 오줌 난분분난분분 학가산온천으로 갈까 풍산주막으로 갈까 온탕과 냉탕 갈림길에서 11번 버스를 타고 흔들리는 너는 난분분난분분 九天에 깊이 숨어 한숨 자고 다시 맑은 얼굴로 입춘을 타고 올라가 가지마다 쩡쩡 강 얼음 풀어지는 소리 내며 봉긋 목련 꽃눈으로 필 너는  
192 우포늪에서 외1편/박해자 file
편집자
2842 2012-02-29
12.03월 22호 시  우포늪에서 박 해 자 한 발짝 물러서서 다리 꼬고 앉은 바람 옛 생각 공 굴리다 백악기를 여행 중이고 수 억년 침전된 역사 외톨이로 서성인다. 앞산도 무너질라 공룡의 기침소리 그 원혼 장엄하게 회생의 날 손꼽으며 비상할 채비 하느라 목을 빼고 살핀다. 늪지를 굽어보는 경칩은 목전인데 길은 멀고 낮 설어도 부표처럼 깜빡이는 떠날 곳 정하지 못한 여린 철새 눈이 붉다 그래도 그 영감탱이가 세상에서 몸아픈게 젤로 섧은께 아프지 말고 살어 맨 날 술이나 퍼 마시고 돈 생기면 노름에 기집 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다 돈 떨어지면 집구석에 기 들어와 날 개패 듯 때리고 해서 저놈 언제 자빠져 죽을라나~하며 살았는데 작년에 영감탱이가 죽었거든 근데 한 여섯 달쯤 지나니까 글쎄 그놈의 영감탱이가 보고 싶어지더라니까 박 해 자 상주출생 . 중대예술대학원문창과수료 . 숲문학회장  
191 영천댐 옆 삼귀리 정류장 외1편/성군경 file
편집자
4287 2012-02-29
12.03월 22호 시 영천댐 옆 삼귀리 정류장 성군경 지금 살아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어떤 일이든지 일어난다 매번 스쳐가는 일상이 똑같이는 다가오지는 않을 것 어떤 일이 또 일어날까 낮과 밤의 차이는 햇볕이 있고 없고 인데 보이지 않는 밤은 두렵다.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생의 2/3 를 허비한다고 한다 지구위에서 생존하고, 역사에 남는 것은 그때의 환경과 상황에 잘 적응하는 자의 것이다. 멸종되어 화석만 남은 네안데르탈인을 우연히 발견한 현 인류 호모사피엔스는 신기한 듯 논문을 쓴다 서양에서는 라콘느 강, 동양에서는 요단강. 이 강을 건너려면 눈꺼풀위에 금화를 올리고 손에는 엽전을 쥐어 준다 영천댐을 가로지르는 삼귀리 다리를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댐의 물은 갈수기라서 그런지 녹조를 띠며 메말라 있었고 물이 줄면서 드러나는 바닥이 층층 계단을 이루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계단을 만들어 왔을까 녹조가 짙은 물속에 남아있는 물고기는 빵조각 하나를 위하여 도덕과 지식을 내팽개치고 인간 최말단의 형태를 연출한 독일 아우슈비츠수용소의 형상이리라 시야에 들어오는 붉은 산들 앞으로 열 번만 산이 붉게 변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차를 세워 놓은 다리 이쪽은 이승, 저쪽은 저승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건너본다 인적 없는 다리를 빠져 나오니 좁은 길이 나오고 눈에 들어오는 얕트막한 집들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에는 사과가 한가로이 달려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의 풍경이다 주변에 두고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만약 지금 나의 생이 한 개의 CD판에 속하여 있다면 지금 속한 CD판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악역일까, 아니면 선한 역일까 모두가 서로 다른 배역을 맡은 배우일 뿐인지도 모른다 선악의 구분이 없이 단지 주어진 대본에만 충실한 담배, 약물은 인간을 서서히 죽여도 허락받을 수 있고 다리위에서 떨어지는 자살은 말린다 담배 피우는 상황은 이해하면서 죽음을 결심하는 현재의 처지는 알려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일들은 두려움에서 출발할는지도 모른다 지금 걱정하는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 것인가 두려움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빛과 그림자이리라 세워 놓은 차 곁으로 다가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글씨 ‘삼귀리 정류장’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낡은 나무의자에는 다 팔아도 몇 만 원 될 것 같지 않은 자신의 몸뚱이만한 보따리를 옆에 놓고 검게 바랜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시선을 고정한 채 가을석양처럼 무념한 표정의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네안데르탈인:35만 년 전에 나타났다가 3만 년 전에 멸종한 인종으로 현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와는 유전자가 다르며 불을 사용하고 매장문화가 있다고 함. 마지막 술잔 성군경 한계를 침탈하는 겁 없는 불빛이 비칠 때 노란 위스키 보다 투명한 소주가 제격이다 술은 제가 물인지 모르고 스스로 취해 간다. 나도 경구를 짓이기는 광란교의 교주가 되어 혼미한 주술을 외우고 싶다 북회귀선의 마지막 전율로 눈부신 생명력을 찾아 그어진 잣대를 모두 지워버리고 넘쳐흐르는 불가능의 물줄기에 주사위를 던져보자 새벽은 보이지 않고 어쩌면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졸음을 따라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동트기 전 마지막 술잔은 기준도 망설임도 없는 또 다른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성군경 소개 1.본명 : 성군경 ( 成君慶 ) 1.필명 : 白川 1.출생 : 1958. 10. 15일 대구시 대봉동 1.주소 : 대구 시지동 498 고산노변타운 상가 1동 208호 1.연락처 : 010 2812 2888 1.E-mail : sahrangni@hanmail.net ◈ 履歷 1.1989년 : 제1시집 “흔들리지 않는 건들바위 관사촌 (남북문화사刊)” 발표 1.1991년 : 제2시집“고속터미널에 핀 네온사인(남북문화사刊)” 발표 1.1992년 : 제3시집“어항속의 泛魚로터리(남북문화사刊)” 발표 1.1993년 : 영남일보 건강칼럼 연재 1.1994년 : 대구 공인중개사협회 창립고문역임 1.1995년 : 낙동강 페놀사건으로 결성 된 시민환경단체인 “낙동강살리기 대구환경연합회”에서 수질평가위원장 담당. 1.1997년 : 보리수 청년회 회장 역임 1.2000년 : 일본 선단 임플란트개발 객원연구교수역임(~05년) 1.2004년 : 축구단 N I F C 구단주역임(~10년) 1.2005년 : 경제정의실천연합회 월간회지에 독일월드컵 출전 격려문 및 승리기원시(06년) 발표. 1.2006년 : 대구경북시민신문에 건강칼럼연재 1.2006년 : 6월 30일 낙동강문학 3대 지침 및 창립제안문을 국내인터넷에 발표하고 뜻을 같이하는 전국각지 문학인이 모여 결성된 낙동강문인협회 , 낙동강문학 발족추진위원회의 수석부회장직을 담당함. 1.2006년 : 낙동강문학 제1회 동인. 종합문예지“사람의 문학”에 작품발표. 1.2006년 : 제4시집 “벚꽃도 거리에 날리더라(가야문학사 刊)” 발표. 1.2006년 : 12월 낙동강문인협회 회장으로 被選. 1.2007년 : 한국작가회의 회원 입회. 1.2007년 : 대구 앞산 고산골 등산로 및 무주 덕유산 등산로에 시화전 개최. 1.2007년 : 한중문학인 합동토론회(한국고대사.가림토문자,인성문학론) 좌장담당. 1.2007년 : 7월 한국시민문학협회 회장으로 被選. 1.2008년 : 제5시집“영천댐 옆 삼귀리 정류장(실천문학사 刊)”발표 1.2008년 : 중국조선족 자치구 연길시 인민공원에서 “시와 민중의 만남 한중한글시화전” 개최. 1.2008년 : 대구 앞산 고산골등산로에서 “가림토문자 시화전”개최. 1.2008년 : 대운하 반대 시집(그냥 놔두라, 쓰라린 백년소원 이것이다)에 시“최악의 예고편”기고. 1.2008년 : 중국조선문독서사로부터 감사패 수령. 1.2009년 : 영남일보 화요논단에 시사칼럼을 1년간 연재. 1.2009년 :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거 100주년기념 한중시화전 개최. 1.2009년 : 7월 한국시민문학협회 제 2대 회장으로 再選됨. 1.2009년 : 노무현 추모시집(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에 추모시“노란 꽃잎 흩날리는”기고. 1.2010년 : 백두산 및 두만강에서 “한반도통일 및 동북아번영기원 한중시화전” 개최. 1.2010년 : 중국청소년문화진흥회로부터 감사패 수령. 1.2011년 : 대구신문 “좋은시를 찾아서”시 선정및 해설위원회 위원장 재임중. 1.2011년 : 제5회 낙동강문학상 수상 (부산 낙동강문학상 운영위원회 주관)  
190 4번 염색체에 대한 연구 외1편/정훈교 file
편집자
3333 2012-02-29
12.03월 22호 시 4번 염색체에 대한 연구 겔(Ger)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문패에 새겨진 암호를 풀어야 했다 머리 한쪽에 뿔이 난 낙타와 등 한쪽에 말갈기가 달린 생선,에 대해 북극星에서 왔다는, 알콜램프 거인처럼 겔은, 칭기즈 칸이라고, 과학실에서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각종 수식과 기호를 다량으로 섭취한, 주정뱅이처럼, 아이락을 마시며 괄호 안의 부호들은, 괄호 밖 말줄임표와 작은따옴표의 동정심에 놀아나지도 않았다 분할과 덧셈은 과다 세포증식을 가져왔지만 누구의 파이도 파이만큼 늘어나진 않았다 막 구워낸 전각과 반각의 기호들이 수식의 강으로 뛰어들었다 사라진 콩나물대가리를 수식의 강기슭에서 봤다는 제보도 있었고 어느 교각에서 봤다는 제보도 잇따랐다 이 와중에도 잠수부들은 다이빙을 멈추지 않았고 그 누구도 불어터진 입술에 대고 인공호흡을 요구하지 않았다 막 태어난 별이 꼬리를 물고 자진했다는 소식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반쯤 잘린 높은음자리의 마디는 병상에 누워 연방 기침을 해댔다, 덕분에 부호들은 헐값에 전각기호․반각기호․콩나물대가리․별꼴을 얻을 수 있었다 괄호 밖 주전부리가 된 낱말과 헐값에 잘려나간 생선의 뿔을 찾기 위해 마이크로현미경을 조절하며 초원을 누빈 시간은(행운을 찾겠다고 클로버 밭에 머리를 파묻고 온 그날만큼) 웃자라 있곤 했다 녹슬지 않은 젓가락과 바람은 굽은 평행선을 달리면서도 전력질주를 하진 않았다 다만 다리 위 난간은 늘 먹성이 좋았고 반찬투정을 하는 강물은 (사계절 내내) 푸른 이를 번득이며 출렁거렸다 강 밖으로 밀려난 인공호흡과 교각에서 사라진 파이가 피를 흘리며 * 4번 염색체 : 46개 염색체 가운데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유전자 바람벽에 바람이 머무는 밤 10 2010-10-18[09:24] 인터넷 0 200,000 3,417,168 흑점의사내 전자금융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어요 단풍에 물든 그녀가 바스락거리며 말했어요 불을 삼켰어요 그의 불은 더 뜨거웠어요 불을 삼킨 입술은 달콤했고 발자국소리 들리지 않게 몰래 빠져나오기만 하면 그뿐이었죠 펼쳐진 당신보다 입으로 쓰윽 밀려오는 딱딱한 카드가 더 좋았어요 딩동♬ 붉은심장이 정훈교님의 정자은행 007-007*** 계좌로 45,000원을 송금하였습니다. 34 2010-10-28[19:05] 붉은심장 45,000 0 3,372,168 소금장수 가상계좌 파란 바람이 살랑살랑 꼬리칠 때마다 한 놈 두 놈 목이 딸려나갔어요 앙다문 갈비뼈가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한 쪽으로 몰린 힘의 무게가 결국 한 쪽 귓볼을 갉아 먹어요 원래 그녀와의 거리는 찰랑거리는 물결 한 장 차이로 가까웠는데 불을 삼킨 놈을 보더니 더 좋다고 가버렸어요 눈두덩에 빨간 마스카라 칠하고 가을이 노오랗게 물들었지요, 이제 훅훅 눈보라 몰아칠 테고 여편네는 학학 가쁜 숨 몰아쉬겠죠 ※ 마니(MAN-YI) : 2007년 제 4호 태풍이 많이 그리워요 뭐든 휩쓸어가는 그녀는 곧 터질 거예요 24 2010-11-10[19:05] 안드로이드(星) 12,000 0 3,360,168 주기율표 전자금융 그녀의 촉수에 팽팽한 긴장이 돋았어요 발기된 별은 혀를 낼름거려요, 드라이아이스로 된 카드전표기에 여편네가 몸을 넣는가 싶더니 공중부양하며 강으로 급선회하지 뭐예요 할미꽃처럼 오래된 해저엔 지금쯤 단풍이 들었겠죠 일제침략, 부처 목이 달아나고 그녀의 손등을 꿈처럼 꼬집어요 마당께 밝혀 놓은 백열등 아래서 그녀의 첫소릴 들었어요 심지가 까맣게 탄 촛불은,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었나봐요 한쪽이 패하자 남은 한쪽은 불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썼어요 잠시 스쳐간 바람이였대요 영화 ‘연애의 목적’ 강혜정이 박해일에게 얘기합니다 “처음 봤는데 내가 왜 좋아요?” 34 2010-12-25[00:00] 모나리자 0 44,000 3,316,168 흰눈썹의그녀 가상계좌 평소에 안 쓰던 근육들이 곤혹스러워 해요 허리가 잘록한 마네킨과 활엽수 방식에 대해 길게 용서를 구했고, 나지막한 추도식도 가졌어요 까맣게 타다만 그녀의 눈동자가 초경을 시작했어요 수백 년 길어 올렸다던 눈물샘이 마르기 시작했다는 증거예요 흐르네 지금.감사.고마워요.그녀가 마지막은 절대 아니라고 했어요 딩동! 000님! 더 이상 인쇄할 면이 없습니다 다음 장으로 넘겨주세요 약력 : 2010년 계간 『사람의 문학』등단. 대구작가회의 사무차장 대구광역시 북구 대현2동 502-3번지 3층, poetry2000@daum.net  
189 시와 미술의 만남 소개 - 김환기 그림과 김광섭 시와의 만남/권형하 file
편집자
4783 2012-02-01
<시와 미술의 만남 소개 - 김환기 그림과 김광섭 시와의 만남>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노래한 김광섭(金珖燮) 시와 김환기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저녁에 / 김 광 섭 ( 1969년 11월 월간중앙 제20호 발표) 이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이다. 시의 형식은 전3연 11행으로 이루어진 자유시이고, 내용은 별을 시의 제재로 삼아 관조적·사색적 어조로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운명을 노래한 상징적 성격의 서정시이다. 1969년 11월 《월간중앙》(제20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1975년에 출판된 김광섭의 시집 《겨울날》에 실려 있다. 제1연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밝은 별들과 그에 대조되는 인간현실의 고뇌를 '저렇게 많은 중에서의 별 하나'와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나 하나'로 대응시켜 별과 나의 운명적 선택과 친밀감과 관계맺음을 노래하였다. 핵심연인 제2연에서는 밝음 속으로 사라지는 별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나를 통해 '별'로 대표되는 자연과 '나'로 대표되는 인간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인간은 숙명적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거리감과 헤어짐을 나타내어 강조하였다. 별과 나의 거리감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갈수록 심해지는 인간관계의 단절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숙명을 노래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3연에서는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보는 시인의 생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다. 별(너)과 나(시인)는 빛과 어둠이라는 정반대의 모순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유한적 존재이지만 화자는 불교적 인연관과 윤회사상을 느끼게 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을 통해서 시인은 관계 회복과 소망을 다짐하며, 점점 물신화되어가는 각박한 인간사회라 하더라도 살아갈 희망과 가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재회의 기대감으로 표현하였다. 이 시는 생명 자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노래한 김광섭의 후기작품으로 화려한 시적 수사를 절제해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물질문명으로 인해 인간적인 따뜻함과 진솔함을 상실해가는 현대인들의 고독한 모습을 '별'과 '나'의 대조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형상화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김광섭은(1952~70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무기 정간되자 그 충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이듬해 서울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도중 홈런된 야구 볼에 머리를 맞아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 생의 기쁨을 노래한 시 ‘생의 감각’도 있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72세 때 돌아갔다.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산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이산은 감광섭의 아호이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전남 신안출생 서양화가로 전남 신안서 태어나 니혼대학 미술학부에서 추상미술을 배운 김환기는 1937년 귀국, '신사실파'를 결성해 한국적 미감을 추구한다. 전시작 '피난열차'(1951)는 초기 서울시대(1937~1956)를 대표하는 작품과, 콩나물시루처럼 피란민을 실은 열차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그려냈다. 한국과 파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초기에는 추상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인 서양화가지 후기에는 동양적 서정을 탐구한 작품, 달, 산. 학, 매화, 등을 소재로 하여 민족 정서를 양식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문인들과의 교류가 깊어 문학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뉴욕에 체류하던 서양화가 김환기가 1970년 그린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수상작’으로 김환기의 대표작이다. 김환기 그림의 주조를 이루는 특유의 푸른색은 파리 유학시절(1956~ 1959)에 등장한다. 푸른색은 한국의 하늘과 동해를 상징하는 빛깔이다. 조선 백자를 열성적으로 수집했던 김환기가 백자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푸른 하늘과 달을 배경으로 백자 항아리 두 점을 그려 넣은 '항아리'(1955~1956) 등이 전시에 나왔다. 1959년 다시 귀국한 김환기는 한국의 자연을 추상화해 그리기 시작한다. 뉴욕 시대를 예감케 하는 두 번째 서울시대(1959~1963)의 작품으로 '달과 매화와 새'(1959)가 소개됐다. 김환기는 일본 서울 프랑스를 전전하다가 미국에서 작고하여 영원한 망향의 화가라 지칭되고 있다. 김환기는 김광섭의 <저녁에> 시의 마지막 구절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화제(畵題)로 대작을 그리게 된다. 이 그림은 화면 전체가 모든 그리운 것들을 점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화가의 고향이 전남 신안의 그 흔한 김의 모습에서 착상했다는 점과 민족 정서를 환기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김광섭의 시에 곡을 붙인 유심초의 대중가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만들어져 애창되기도 했다. 그림은 모든 그리운 것들을 점으로 표현하였다. 불규칙적인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는 점묘법으로 만남과 인연의 문학적 주제를 회화적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가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유화(236×172㎝ 인터넷 검색 요망)>은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을 연상할 수도 있고, 점들은 네모 모양이고 그 안에 둥근 모양은 크기도 작기도 하여 남의 자리 영역을 침범하는 욕심쟁이 같기도 하다. 또 점들이 붙어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어 공간적 거리감과 절망감을 느껴볼 수도 있다. <그림은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다음 검색창 참조하시기 바람.>  
188 산홍아 산홍아/하아무 file
편집자
3278 2012-02-01
12. 02월 21호 소설  산홍아 산홍아 하아무 1 “하하하, 산홍(山紅)아. 어서 오너라.” 귀에 익은 목소리에 산홍은 흠칫 몸을 떨었다. 중추원(中樞院) 의장 이지용이었다. 부러 호탕함을 가장한 목소리는 턱없이 높고 쇳소리가 섞여 거부감부터 일었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릴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일인자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자리 아니던가. “네가 진주에서 한양에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내 한달음에 달려왔느니라.” 산홍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보다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2 그는 서너 발자국 앞서 걸어간다. 앞쪽으로는 배꽃이 하늘하늘 비처럼 내린다. 꽃잎은 흩날릴 땐 나비 같다가 지고나면 구름 같다가 한다. 그는 마치 천상의 신선처럼 꽃비를 맞으며 걷는다. 고개를 돌려 부안 명기 매창(梅窓)의 시를 읊는 그의 표정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배꽃 비처럼 휘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 가을바람 지는 잎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산홍도 화답하는 시로 흥취를 잇는다. 죽은 정인의 시묘살이까지 했던 기생 홍랑(洪娘)의 시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그와 이렇게 함께 걷는 것이 꿈만 같다. 꿈이 아니기를,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기를 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졌던 희망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기에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일식이 닥친 듯 갑자기 해가 빛을 잃고 사위는 어둠속으로 빠져든다. 두리번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크고 시커먼 그림자 둘이 나타나 돌연 그를 에워싼다. 그를 붙잡아 오라를 지운 그림자는 일경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아아, 안 돼! 그 분은 아무 죄가 없어! 산홍은 다급하게 소리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소리는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림자는 비웃듯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멀어진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죄가 될 수 없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때 산홍은 그 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의 유난히 빛나는 눈빛,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코, 막 자라기 시작한 콧수염, 섬처럼 오똑 솟은 목젖 따위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의 파장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느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미처 따져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사들에게 끌려가는 그를 보고서야 산홍은 비로소 깨닫는다. 사내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품은 생각, 하는 행동 모두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나라 잃은 설움에 가슴 아파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멀어져가는 그를 안타깝게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고 이내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산홍은 애타는 마음에 손짓을 해보고 힘껏 달려가 보지만 그럴수록 무언가 자신을 붙잡고 억누르는 것만 같다. 급기야 산홍은 두 팔을 휘저으며 발버둥을 쳐댄다. 도련님, 도련니임……. 3 낯선 방안이다. 비교적 넓은 방에 장과 농이 정연하게 놓여 있다. 갓밝이의 어슴푸레한 빛이 윗목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삼층장을 비추었다. 다른 벽 한 켠에는 반닫이와 이불장이 하나씩 놓여 있다. 모두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임을 주장하듯 작은 빛에도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돌았다. 산홍은 그제야 자신이 진주의 기방(妓房)이 아닌 한양에 있음을 깨달았다. 문을 연지 이제 서너 달 남짓 된 명월관 뒤편의 한성기생조합 숙소였다. “산홍아, 무슨 일이 있느냐?” 옆방 문이 열리고 걱정하는 완자(完子)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냥 나쁜 꿈을 좀 꾸었을 뿐입니다.” “그래, 어제 천릿길을 오느라고 몹시 고단하였던 모양이구나. 좀 더 눈을 붙이거라.” 산홍은 대답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밤늦게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술시중까지 드느라 피곤하였는지 기생 셋이 어빡자빡 엎드러져 자고 있다. 코까지 고는 모습이나 시큼한 술냄새까지 진주나 한양이나 다를 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 한양 땅에 있다. 지난해 겨울, 진주 기방에 왔을 때 그의 친구들이 분명 보성전문학교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홍은 꿈속에서 본 그의 표정이 잘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내가 한양에 올라온 걸 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건 다행히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하기는 했지만 꿈임에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래도 꿈에서처럼 그가 순사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했으면? 아니, 혹시라도 다른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본래 꿈은 생시와 반대라 하였으니 붙잡혀 가지 않았을 거야. 또 혹시 알아? 그 분과 이별이 아닌 뜻밖의 해후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 좋게 생각하자. 다 잘 될 거야. 산홍은 부러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눈을 꼭 감고 걱정거리를 밀어내고 좋은 생각만 키웠다. 방문 틈으로 신선한 새벽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하였다. 4 완자는 정성스레 산홍의 머리를 오래 매만져 주었다. 그녀가 진주에 있을 때도 자주 그랬다. 완자도 이제 스물을 갓 넘겼지만 산홍의 머릿결과 피부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산홍이 넌 갈수록 더 고와지는 것 같아.” 완자의 칭찬에 산홍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도 참, 그거야 뭐 언니가 발라준 백분 덕이겠지요.” 완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산홍에게 미안수(美顔水)로 씻도록 하였다. 수세미를 잘라 넣고 삶은 물에 박하잎을 넣어 향이 좋았다. 살결을 곱고 부드럽게 하고 윤기 흐르는 피부로 가꾸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얼굴에 꿀 찌꺼기를 펴 발랐다가 조금 후에 떼어내는 미안법(美顔法)을 가르쳐주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 활석과 쌀가루를 섞어 만든 백분을 얼굴에 정성스레 발랐다.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게 보이는 것을 산홍이 싫어하는 줄 아는 완자는 상체를 뒤로 젖혀 괜찮나 보았다가 다가앉곤 하였다. 이어 눈썹먹[眉墨]으로 눈썹을 칠했다. 눈썹먹은 목화의 자색꽃을 태워, 그 재를 관솔에서 나오는 유연(油煙)에 묻혀 참기름에 갠 것을 썼다. 마지막으로 잇꽃[紅花]연지보다 색깔이 선명하다는 주사(朱砂)로 만든 연지[丹脂]로 입술과 뺨을 붉게 칠하여 화장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네 재주를 처음 선보이는 날이니까 단지(丹脂)를 썼지만 이건 자주 안 쓰는 게 좋아. 단독(丹毒)에 걸릴 수도 있거든. 피부가 빨갛게 붓고 나중엔 썩어들어가는 병이야. 웬만하면 잇꽃연지를 쓰는 게 좋아.” 완자의 설명에 산홍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재주를 처음 선보이는 날이라는 완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하였다. 산홍은 생각했다. 변학도의 기생 점고(點考)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춘향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자신을 불러내어 기어이 수청을 들게 하기 위한 술수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춘향은 백분을 바르고 연지를 발랐을까? 언제 올지, 올 수나 있을지 알 수 없는 몽룡을 생각하며 침착할 수 있었을까? “너, 또 그 도련님을 생각하고 있느냐? 이름이 강학수라 했던가?” 완자의 손길이 돌연 뚝 멈추었다. “아, 아니에요, 언니. 제가 어떻게 감히…….” 부정해놓고 보니 목소리나 내저은 손사래가 턱없이 컸다. 속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것아, 기녀가 사랑에 빠지면 그날로 볼장 다 본 게야. 내가 몇 번을 얘기했지 않느냐. 그리 되면 사랑도 못 건지고 기녀 노릇도 끝장난다는 말이다.” 안다. 기방의 언니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그 말이 야속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산홍의 마음인 양 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5 “그래, 네가 산홍이냐? 완자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예, 언니가 저를 진주에 있을 때부터 어여삐 봐주셨지요.” 산홍은 대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한성기생조합의 행수기생 초란(草蘭)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곱고 예뻐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환갑’이라 한다지만 초란은 완숙미까지 더해져 중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돌아 왠지 모르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저어하는 듯하였다. “넌 소리를 잘 한다더구나. 시에도 능하고…….” “과찬입니다. 그저 조금 흉내를 낼 줄 아는 정도입니다.” “네 소리를 한번 들어보자꾸나. 제일 자신 있는 대목을 불러보거라.” “예, 춘향가 중에서 기생점고(妓生點考)하는 대목을 부르겠습니다. 여자로는 처음으로 명창이 되었던 진채선이 특히 잘 불렀다는 대목이지요.” 산홍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자리를 잡았다. 이어 북을 잡고 준비하고 있던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아니리로 소리를 시작했다. “객사에 연명허고 동헌에 좌정하야 도임상 잡수신 후에 삼행수(三行首) 입례 받고 육방하인 현신 후에, 호장 부르라. 숙이라. 호장이요. 네. 여봐라. 예이. 육방하인 점고는 제삼일로 물리치고 우선 기생점고부터 하여라. 예이. 호장이 기안을 안고 영창 밑에 엎드리며 기생점고를 하는디…….” 이어 능소화를 바라보듯 진양조 가락으로 넘어갔다. “우후 동산의 명월이, 명월이가 들어온다. 명월이라 허는 기생은 기생 중에는 일행수라, 점고를 맞으랴고 큰머리 단장을 곱게 허고 아장아장 이긋거려서 예 등대나오. 좌부진퇴(左部進退)로 물러난다. 청정자연이나 불개서래로다. 기불탁속 굳은 절개 만수문장의 채봉이요. 채봉이가 들어온다…….” 초란은 손으로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거나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면서 소리를 음미했다. 고수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소리꾼을 만났다는 듯 신명을 내었다. 소리를 마치자 완자가 나섰다. “지금껏 여러 소리꾼의 기생점고 대목을 들어보았지만 저리 맛깔나게 부르는 건 산홍이뿐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은 진채선 명창이 살아온 듯합니다. 신재효 선생도 계셨다면 아마 감탄했을 것이요. 어떠시오, 언니. 정말 잘 하지요?” “그래, 그럭저럭 들을 만하구나.” 초란은 기뻐하는 얼굴빛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초란이 처음부터 칭찬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은 완자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최고인 줄 착각하여 기고만장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오늘까지는 푹 쉬고, 내일부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여라.” 6 한양은 한창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었다. 오래된 집을 부순 자리에 넓은 길이 생기고 신식 건물이 들어섰다. 자전거상회와 양장점, 큰 요릿집이 생기고 밤이면 전등을 밝혀 휘황한 불야성을 이루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양복을 입은 신사, 세련된 신여성과 함께 기모노와 게다를 신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자전거와 인력거가 분주히 오가고 간혹 자동차가 거만스레 경적을 울리며 사람들을 길에서 쫓아내기도 하였다. “얘,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 촌티난다.” 완자는 여러 번 산홍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산홍은 무심한 듯 걷다가도 어느새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고 만다. 서너 번 주의를 주던 완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기만 했다. “자, 우선 옷부터 맞추자. 너도 신여성이 되는 거야.” 완자는 단골인 듯한 양장점으로 산홍을 이끌었다. 완자는 왜말을 섞어 산홍에게 몇 벌을 입어볼 수 있게 청하였다. “어머, 넌 정말 무얼 입어도 잘 어울리는구나.” “하지만 전 입었는지 말았는지, 도무지 어색하고 민망하기만 한 걸요.” “아니야, 너무 잘 어울려. 다 잘 어울리니 무엇으로 선택할 지 고민이구나. 참, 기왕 나온 김에 양장 한 벌 하고 기모노도 한 벌 사자.” “기모노요? 그건 뭐하게요?” “일본 손님도 심심찮게 있고, 간혹 손님 중에는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나와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단다.” “저는 싫습니다. 손님이 원하면 거절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건 내키지 않습니다.” “얘, 누군들 내켜서 기모노를 입겠느냐?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게지.” “아무리 그래도 언니, 제가 명색이 소리기생인데 왜옷을 걸치고 춘향가니, 심청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걸 요구할 얼뜨기 손님도 없겠지만, 설령 원한다손 쳐도 그럴 수야 없지요. 왜옷을 입는 순간 소리가 탁 막혀서 목구멍을 넘지도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벌거벗고 깨춤을 추지요.” 완자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7 둘은 상점을 몇 군데 더 돌았다. 주로 박래품(舶來品,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물품)을 취급하는 곳이 많았는데, 주로 산홍이 쓸 화장품과 속옷을 샀다. 생전 처음 보는 속옷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가리지도 못할 것처럼 작고 몸을 조이는 것들이라 불편해 보여 손을 내저었지만 완자는 제멋대로 골라 담았다. “저기는 어딘데 저리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요?” 완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응, 저기는 ‘팔딱사진’ 보는 데야.” “‘팔딱사진’요?” “활동사진 있잖니, 팔딱팔딱 넘어가는 사진. 2, 3년 전에 문을 연 단성사란 극장인데 항상 저리 북적거린단다.” “아아……. 저도 본 적 있어요. 호준가 미국인가 선교사가 남강가에 천막을 치고 보여준 적이 있어요. 저걸 보기 위해 집을 따로 짓기도 하는구나.” “그래. 오늘은 이것저것 짐이 있으니까 다음에 같이 와서 보자꾸나.” 산홍은 극장을 처음 보았다. 건물 앞면에는 커다란 광고판이 붙어 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외국사람의 모습과 함께 <噫, 無情>이란 제목이 크게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들어가기 전에 저기 들렀다 가자.” 완자가 자그마한 간판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네모네 茶房>이라 적혀 있었다. 완자는 산홍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코오피 두 잔을 시켰다. 코오피는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다. 산홍은 마시면서 얼굴을 살풋 찡그렸다가 풀었다. “호호호, 처음엔 그래도 마시다보면 자꾸 찾게 된단다.” 산홍은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한 모금 더 홀짝였다. “그런데 언니, 아네모네가 뭐예요?” “서양 꽃이름. 저기 저 그림 속에 있는 꽃이라더라.” 그림 속에는 붉은색, 자색, 청색, 흰색 따위의 잎이 큰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예쁘네요. 화려하고…….” “그런데, 꽃말이라고,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으로 붙인 말이 있다는구나. 백합꽃은 순결, 클로버는 행운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네모네는 뭔데요?” “그게……, ‘사랑의 괴로움’이라는구나.” 산홍은 혼잣말처럼 ‘사랑의 괴로움’을 되뇌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까만 코오피 속에서 강학수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자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코오피의 맛이 입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런 양을 보고 있던 완자가 한참 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네가 마음 아파할 것 같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산홍은 물끄러미 완자의 얇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강학수 도령이…….” “아니, 언니. 도련님이 어디 있는지 안단 말이우?” “그게 말이다…….” “왜 빨리 말을 못하시오. 어디 아프시오? 아니면…….” 완자는 엽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어차피 말할 거, 다 얘기해주마.” “언니, 답답하요. 빨리 얘기해주시오.” “학수 도령이 말이다…….” 8 학수는 피가 끓었다. 나라를 팔아먹고서도 버젓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처음엔 젊은 혈기에 을사오적의 집에 돌팔매질을 하거나 욕을 퍼붓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그러다 같은 학교 선배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였다. 그런 얼뜨기 반편이 같은 짓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결국 학수는 ‘을사오적척결단’의 조직원이 되었다. 전문학교 학생들로만 조직된 척결단은 다 합쳐 여남은 명 남짓에 불과하였다. 몸이 약한 학수는 주로 을사오적의 집 주변을 맴돌며 그들이 드나드는 시각과 행동반경, 주변인물 등을 파악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을 응징하는 일은 행동이 민첩하고 덩치가 큰 고학년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워낙 경비가 삼엄한 데다가 일경과 헌병들까지 그들을 비호하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군부대신 이근택 습격사건 때 학수도 붙잡혔다. 다행히 그는 단순가담자로 분류되어 이틀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진주 본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부하러 간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이 경무청에서 붙잡아 갔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실신하기까지 했다. 풀려나자마자 진주 집에 불려 내려가야 했다. 겨우 학업에만 열중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며칠 동안 부모를 설득한 후에야 한양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학수의 피는 여전히 뜨겁게 끓어올랐고, 점점 더 항일운동에 조금씩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자연히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일경은 전력이 있는 그들부터 불러들여 불문곡직하고 심문을 해대었다. 척결단은 이지용을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이지용은 고종 임금의 종질(從姪)로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사람이었다.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였고,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은사금을 두둑이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고 했다던가. 그 얘기를 들은 이들 중에는 침을 뱉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척결단의 비밀이 새나가는 바람에 암살은 계획 단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계획을 모의한 학수와 두 명의 동지가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1907년 3월 을사오적암살단이 암살에 실패한 후 일경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학수가 감옥에서 병을 얻은 것이었다. 본래 몸이 허약한 데다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모진 겨울 한파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산홍이 한양으로 올라오기 전, 출소를 기념해 명월관에 들른 사람들 틈에 학수가 있는 것을 완자가 발견하였다.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한번씩 기방에 들르곤 해서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완자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밖에서 기침을 해대던 학수가 피묻은 손수건을 숨기던 것도 놓치지 않았다. “술 취한 학수 도령이 그러더라. 산홍이 네 소리가 듣고 싶다고, 네가 부르는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 듣고 싶다고 말이다. 내가 그렇지 않아도 네 재주가 아까워 한양으로 불러올리려고 했었니라. 그런 참에 학수 도령의 말을 들으니 더 지체할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당장 올라오라고 기별했던 것이니라. 네가 학수 도령을 사모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9 그러나 학수는 한양이 없었다. 폐병을 치료하고 요양할 겸해서 하동 악양에 내려가 있었다. 학교 선배의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산홍은 절망했다. 학수는 노류장화의 몸으로 감히 사모한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래도 학수가 있는 한양 하늘 아래에 머무른다는 희망, 스치듯, 혹은 먼 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천릿길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권번에 매인 몸으로 그를 찾아 떠날 수도 없고. 어디선가 최고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노래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였다. 꿈길밖에 길 없는 우리 신세 님 만나러 가니 님은 날 찾아갔구나 원컨대 아득하게 어긋나는 꿈으로 하여금 동시에 길 한가운데서 서로 만나게 했으면. 아, 학수 도련님은 이런 산홍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10 “네 이년, 산홍이가 왔으면 진즉 나한테 먼저 알렸어야지.” 이지용은 짐짓 목소리를 엄하게 꾸며 초란을 나무랐다. “아니, 대감마님은 워낙 자주 오시고 우리 명월관 주인과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명월관에 관한 거라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한테 새삼스럽게 알리다니요?” 초란도 부러 콧소리를 내며 살짝 눈을 흘겼다. “어허, 너는 산홍이의 미색과 재주를 보고도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느냐. 북평양 남진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기생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고, 하다못해 일본 게이샤들까지 들어오는 판이다만 어디 산홍이만한 년이 있더냐. 게다가 미색이 출중한 년 치고 소리 잘하는 년 없고 거꾸로 소리 잘하는 년 치고 미색 출중한 년 없는 법. 그건 너도 잘 아는 사실 아니더냐. 그런데 저리 곱고 소리 잘하는 산홍이를 언제 어느 시러배 같은 놈이 채갈 지 모르는 판에 앉아서 기다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대감마님. 언제는 이 조선팔도에서 제가 제일 곱다면서요?” “어? 내가 그랬나? 허허…….” “밉습니다. 전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허허, 이 여우 같은 년. 그건 산홍이가 오기 전 일이고, 이제 산홍이가 왔으니 니가 두 번째니라.” “흥, 그럼 어디 첫 번째와 잘해 보십시오. 저는 나가서 눈삔 두 번째 낭군님이나 찾아볼랍니다.” 초란은 나가면서까지 이지용과 농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미월(眉月)이 쪼르르 이지용의 곁에 가 앉았다. “근데요, 대감마니임. 잠자리에서는 제가 최고인 거 맞지요? 전에 그러셨잖아요.” 미월의 찢어진 눈가로 색기가 흘렀다. “떽! 헛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따르거라.” 이지용은 소리 내어 한잔 들이킨 후 고기산적을 우물거렸다. 산홍은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그들을 외면했다. 학수가 암살을 계획할 정도의 매국노 앞에서 소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자아, 산홍아. 이제 네 소리를 들어보자꾸나.” 엉거주춤 비켜나 앉아 있던 산홍이 가운데로 자리를 잡았다. “대감께서 특히 좋아하시는 대목이지요. <춘향가> 중에서 기생점고하는 대목입니다.” 이어 고수가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쿵다닥’ 북을 쳤다. 11 이지용을 진주를 좋아했다. 10여 년 전, 경상관찰사로 진주에 부임해가면서부터였다.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출세의 길은 탄탄대로로 열려 있는 셈이었다. 사도세자의 5대손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이최응의 손자인데, 완영군 이재긍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에 고종의 종질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런 것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광대놀음이나 판소리와 같은 풍류를 즐기고 늘 도박판을 기웃거리며 기생을 끼고 살았다. 그런 그에게 진주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지리산이 바라다 보이고 남강을 낀 촉석루의 풍광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한 자리 얻어보려고 도박 판돈을 슬금슬금 들이미는 재력가도 있었으며, 조선 최고의 기생도 즐비했다. 특히 그는 판소리를 좋아했다. 소리 좀 한다 하는 소리꾼은 죄다 불러서 먹이고 입히고 소리채까지 두둑이 쥐어주었다. 그 중에는 <새타령>으로 유명한 이동백 명창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동백은 한낱 이름 없는 소리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지용은 천인절벽에 떨어지는 폭포 같고 원기는 창공을 찌를 듯한 이동백의 소리에 매료되었다. 이지용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연회가 있을 때마다 불렀다. 이때부터 이동백은 명창으로 이름을 얻고 날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전라도에서 소리 배워 경상도에서 시험 본다”든가, “전라도에서 배워 경상도에서 풀어먹는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명창이 진주에 머물면서 기생들한테 소리를 가르쳐주게.” 이지용은 이동백에게 지시했다. 경상도는 시나위조의 판소리보다 메나리조 민요가 성행해 제대로 소리를 할 줄 아는 기생이 없었던 것이다. 이지용은 소리기생을 키우는 데 각별히 관심을 두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절대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이 여류 명창 진채선에게 마음을 뺏겨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곁에 두었던 것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갓 권번에 들었던 산홍이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녀의 나이 여덟 살이던 때었다. 소리를 배우는 여러 기생 중에 산홍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지용은 한번씩 소리를 얼마나 익혔는지 점검하곤 했는데, 산홍의 영특함을 칭찬하곤 했다. 그 후 진주를 떠난 뒤에도 경상도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진주에 들러 산홍의 소리를 듣곤 하였다. “산홍아, 이리 오너라. 내가 오늘 네 머리를 올려주겠다.” 한번은 술이 거나해진 이지용이 산홍의 소리를 청해 듣고 흐느적거리며 안으려 했다. 행수기생은 산홍이 아직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간신히 말렸다. 산홍이 열두 살 때였는데 워낙 조숙해서 처녀티가 완연하였다. 이지용은 한 해 두어 차례 들를 때마다 비슷한 행패를 부려 진땀을 빼게 했다. 제 권력과 금력만 믿고 시정잡배처럼 패악을 부리는 데에는 모두들 진절머리를 쳤다. “열여섯은 되어야 머리를 올리든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든 할 것 아닙니까.” 행수기생은 매번 같은 말로 산홍을 감싸안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이곳은 진주권번도 아니고, 이제 산홍이도 열여섯이 되었기 때문이다. 12 “네이년,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이지용은 술상을 소리나게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어디서 마셨는지 이미 대취한 터라 혀는 꼬부라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대감마님을 능멸하겠습니까. 저는 다만 있는 그대로 고했을 따름입니다.” 처음엔 한양으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신이 지쳤다고 했다. 보름 쯤 지난 뒤에는 잦은달거리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다시 보름 쯤 지나서는 고뿔에 몸살기로 굴신조차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많은달거리로 허리가 아픈 데다가 어지럽다고 고하던 참이었다. “내가 너를 찾을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였다. 그러는 것이 나를 능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핑계가 아닙니다. 행수 언니에게 물어보면 다 아실 것입니다.” “필요 없다! 달거리를 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오늘은 내 침소로 들거라!” 그러나 이지용이 강경하게 나올수록 산홍도 물러서지 않았다. “절대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돌연 이지용이 야비한 웃음을 빼물며 이기죽거렸다. “오호라, 네년한테 따로 정인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게로구나.” 그러더니 미월이를 불렀다. 문 뒤에 서 있던 미월이 쪼르르 이지용 곁으로 가 섰다. “미월이 네가 나한테 말한 대로 다시 얘기해 보아라.” “사실입니다요. 제가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진주 사는 도령이라는데 지금은 어디 전문학교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경하게도 대감을 죽이려고 한다는 얘기까지 틀림없이 들었다니까요.” 산홍은 음란살(淫亂煞)이라는, 미월의 눈꼬리에 낀 주름살을 노려보았다. “그건 완자 언니가 넘겨짚어 얘기한 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돈 몇 푼에 기생이 된 계집입니다. 그런 제가 감히 지체 높은 집 도련님을 사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 분의 부모형제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진주 기방에 친구분들과 같이 온 것을 잠깐 본 후로 다시는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13 이지용의 눈에 선 핏발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초란이 달려오고 미월까지 제발 진정하라고 빌다시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대며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밖에서는 하인들과 부엌어멈까지 주루룩 나와 안의 눈치를 살피는 판이었다. 게다가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과 명월관 밖 인력거꾼들과 행인들까지 무슨 일이 났는지 기웃거리고 있었다. “좋다. 그놈이 네 정인이 아니라면 나한테 못 올 이유도 없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을 하거라. 내 너에게 천금을 주겠다. 아니 천금 아니라 만금을 달라 해도 주겠다. 내 첩이 되어 주거라.” 돌연 소란스러움이 싹 가셨다. 모두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이지용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만큼 돈이면 돈, 집이면 집, 뭐든 주겠다 그 말이다. 내 첩이 되어 다오.” 그제야 초란과 미월이 얼었다가 풀리기라도 한듯 이지용을 말렸다. “오늘 너무 취하셨습니다. 우선 좌정을 하시고 좀 쉬시지요.” “마음에도 없는 말씀 하시지 말고 진정하시어요.” 하지만 이지용을 발을 구르며 상을 걷어차 버렸다. “네 이년들, 썩 비키지 못할까! 내가 술에 취해서 앞뒤 없이 내뱉는 말인 줄 아느냐. 내가 산홍이를 마음에 둔 지 이미 수삼년이 되었다. 내가 못할 것 같으냐? 내가 대일본제국으로부터 훈장과 함께 은사금 받은 것만 해도 너희들이 상상도 못할 큰 돈이다. 돈을 원하면 돈을 주겠다. 한강변 언덕 위에 커다란 양옥집을 달라면 그것도 주겠다. 집과 돈을 다 달라면 그것도 문제 없다. 산홍이 네가 내 첩만 되어준다면 다 주겠단 말이다.” 산홍은 미동도 없다. 그것이 이지용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나를 죽이려 했던 놈을 연모한다고 믿을 수밖에. 그렇다면 나는 네년도 죽이고 그놈도 찾아내 숨통을 끊어놓고 말 것이다. 너도 알 것이다. 세상 누구도 나를 말릴 자는 없다. 명월관이고 뭐고 문을 닫게 하는 건 물론이고 무슨 기생조합? 내 모조리 물고를 내고 말 것이다. 자, 솔직하게 말해 보아라. 내 첩이 되어 주겠느냐 말겠느냐. 이제는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얼른 마음 속 말을 꺼내보아라.” 여기저기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이지용을 욕하고 혀를 차는 소리였다. 하지만 누구도 이지용의 귀에 들릴 정도의 크기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지용이 박차고 나와 좌중을 둘러볼 때 다들 헛기침만 해댈 뿐이었다. 14 “대감께서 원하시는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점잖게 제 머리를 올려주시겠다 하실 때는 승낙도 거절도 하기 어렵더이다. 헌데 수천 수만금을 주시겠다 하고 집도 주시겠다 하니까 좀더 말씀드리기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많은 재물을 어떻게 가져보겠습니까. 설령 그 많은 재물이 당장 제 것이 되었다 해도 제 것이라 생각할 수도, 한 푼 쓸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대감께서 제가 첩이 되지 않으면 저를 죽이고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도령까지 찾아내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하시니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재물을 얻기 위해,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감의 첩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주의 도령에게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대감은 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주의 도령도 저 혼자 연모하는 것일 뿐 그 도령이 아직 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그러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누구에게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다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대감도 아시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들 하더이다. 대감의 그 많은 돈이 어떤 돈입니까. 왕실의 종친으로 뇌물을 받고 군수직을 열다섯 개나 팔았기 때문 아닙니까. 할아버지 때부터 매관매직으로 온갖 보화를 긁어들인 결과가 아닙니까. 게다가 왜놈들이 주는 돈을 받고 여기저기 도장을 함부로 찍어준 결과가 아니냐 말입니다. 대감뿐만이 아니더군요. 부인도 한일부인회인지 뭔지 하는 친일단체를 조직해 대감 못지 않게 나라를 좀먹는 데 앞장서고 있다더군요. 여러 일본인들과 드러내놓고 정을 통하고 있다는 건 장안의 코흘리개도 다 아는 사실이구요. 이게 도대체 사람이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짓입니까? 제가 비록 천하디 천한 기생이라고 하나 사람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의 탈을 쓴 이리의 노리개 노릇을 할 수야 없지요.” 이지용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일본 요릿집 하월루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총독부 관리들은 이미 헤어지고 없었다. 그는 혼자 구종배 하나만 데리고 명월관에 온 터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이지용은 하인놈에게 헌병을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산홍이의 일갈에 손님들과 인력거꾼,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호응하며 몰려들었다. 하인이 겨우 몸을 빼 명월관을 나서려고 할 때 몸이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왈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명월관에서 고용한 ‘어깨’였다. 15 완자는 산홍의 손을 꼭 잡았다. “알겠니? 진주나 하동으로 가면 안 돼. 발이 빠른 사람을 그쪽으로 보내 학수 도령이 피하도록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미안해요, 언니.” “무슨 소리니. 그런 생각 아예 하지도 마. 다들 얼마나 시원하게 생각하는지 몰라. 누가 이지용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니. 아마 네 이야기가 며칠 안으로 장안에 파다할 거야.” 옆에서 하인 박서방이 재촉하듯 헛기침을 했다. “아예 북쪽으로 가거나 청나라 만주나 홍콩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거야. 저기 박서방이 알아서 잘 해줄 거야. 그리고 이건 행수언니가 주는 거야. 이 반지는 혹시 급할 때 팔아서 쓰고…….” 완자는 노자가 두둑이 든 보자기와 함께 자신이 끼고 있던 금반지를 건내었다. 이내 산홍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마워요, 언니.” “무사해야 돼. 산홍아…….” 산홍은 앞장서 걷는 박서방의 뒤를 쫓아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이내 짙은 새벽 안개가 그녀를 숨기듯 하얗게 내려앉았다. 하아무 약력 196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3년 <작가와 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8년 MBC창작동화공모대상을 수상했다. 소설과 동화를 써왔지만 최근 단편소설 「백제고시원」을 각색해 연극무대(극단 현장)에 올린 이후 희곡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창작집으로 『마우스브리더』와 『황새』가 있고, 그 외에 5권의 민중자서전을 기획하고 엮었다. 현재 <예술IN 예술人> 편집장이고, MBC금성동화문학회와 (사)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경남소설가협회 회장이다.  
187 초승달을 보며 외1편/임영석 file
편집자
3521 2012-02-01
12. 02월.21호 시  초승달을 보며 임영석  괄호도 아니고 반 괄호로 달이 떠서 어떤 말의 의미들을 풀어줘야 할 것인데 앞 문장 깊은 여백에 품은 글이 사라졌다. 내 나이 다섯 살에 죽었다는 아버지는 콩깍지 속 콩들처럼 칠남매를 남겼지만 어머닌 육십 평생을 반 괄호로 살았다. 괄호()로 묶어내도 쭉정이가 많을 건대 어떻게 칠남매를 혼자서 키웠는지 반 괄호 달빛을 보니 그 의문이 풀린다. 둥그런 달빛 속을 파고 든 저 그림자 제 몸을 다 내주고 그림자로 채운 마음 서로가 품고 품어서 반 괄호가 되어 있다. 불혹의 내 나이도 반 괄호가 되었지만 자식의 숨소리에 쫑긋 세운 내 두 귀는 언제나 초승달처럼 앞 괄호를 열어둔다.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작 족문(足文) -구룡포에서 족문으로 써 내려간 갈매기의 생각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뒤를 향한 화살표다 제 몸이 뒤에 있다는 눈속임의 글 한줄 적벽에 그려 놓은 반가사유 미소처럼 알아도 모르는 척 그 글의 끝을 보니 날아가 쓰지 못한 글 모래알보다 더 많다 임영석:1985년 현대시조 봄호 2회 천료, 시집 『고래발자국 』외 5권, 2009년 한국문화예술 창작기금 수혜,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186 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날 때 외1편/진란 file
편집자
4089 2012-02-01
12. 02월.21호 시 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날 때 진란 사하라에도 물 흐르는 길은 있다 보드라운 모래를 열고 은신하는 곳 열대 우림의 가슴 언저리부터 스며들던 빗물이 제 속으로 길을 내어 흐르다 오아시스에 머물 때 모래 폭풍의 적막과 별의 고요와 사막을 건너야 했던 뜨거운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쉬임없이 떠나오고 떠나가던 길 위거나 흔적없이도, 조급하게 스며들었던 건물의 지하거나 회한과 단절의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 속으로거나 신기루의 마른 길이라도 물은 흐르는 것이다 사하라의 오아시스에 고속의 교차로가 만들어지듯 눈을 감으면 물은 어디로나 소통의 길을 내는 것이다 저 길을 따라 짚어가면 사막의 밤을 밀어 낸 낙타의 높은 무릎 사이로 떠있는 야윈 달이 보이고 그 틈으로 지나가는 바람의 지혜와 여유와 멈춤과 비움을 듣는 것이다 구름, 나무, 풀, 돌, 새소리, 물소리, 춤추는 소리들 그대 심장 가까이 귀를 대고 누우면 오랜 그 물길을 거슬러오르는 팔베개에서도 네게로 돌아가는 목숨의 파닥임이 들린다 겨울 -오후 4시 하루가 지나고 있다는 헛헛함이 바래는, 누군가를 불러 차 한 잔을 나누어도 오랜동안 빚지지 않을 것 같은, 도시의 그림자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비탈의 시간 얇은 햇살을 등지고 가는 낯선 이의 모르는 생각처럼 아직 머무르는 겨울 속에서 봄맞이꽃이나 별꽃의 안부를 묻기에는 너무 이른 것인지 불혹의 문자가 보도블록으로 길게 깔린 모퉁이 골목을 들어선다 기다리면 늘, 조금 늦게 도착하는 버스처럼 소소리바람 닿는 햇살도 길어져서 오후 4시를 이렇게 오래도록 명명하고 있는지 혼자 차를 비우는 시간 문득 네게로 건너가고 싶은, 가서 봄이 되고싶은 화악한 벚꽃의 꿈 꽃비로, 꽃비로 내려서 봄비, 그대의 어깨에 얹히고 싶은 그래. 봄이 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싶은 시집 『혼자 노는 숲』(나무아래서, 2011) ranigy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