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9호...
   2020년 05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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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2872 2014-11-03
185 蛙, 선생에게 외1편/임연규 file
편집자
3296 2012-02-01
12. 02월.21호 시  蛙, 선생에게... 임 연 규 숲에서 당신을 만날 때 기쁘다 한 마리 개구리가 되고 싶다 나도 당신처럼 살자 했으나 진실로 용감하지 못했다 일생 母胎의 은헤를 잃은 황망함을 어쩌지 못해 不敬한 눈으로 눈물 많은 세상을 굴려보다 초탈한 몸 방향이 잘 못 된 것을 탓하지 않고 용감하게 五體投止 하고 보는.... 蛙.... 선생 일생 펄펄한 기개가 부럽다. 손톱 안개 속에 석굴암에 가서 알파요 오메가로 당신을 뵈어 올적에 내 눈을 감기는 당신의 섬세한 손가락 끝 천년의 바람에도 자라지 않는 손톱 하여 다듬어 졸 일 없는 이 사랑은 무엇인지요.  
184 사과를 질투하다 외 1편 / 권순자 file
편집자
4231 2012-02-01
12. 02월.21호 시  사과를 질투하다 권순자 사과는 거만하지 않다 사과는 사과한다고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사과를 전달한다 붉은 열정을 깨물면 네 시큼한 눈물 맛이 입안에 고인다 네가 단단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야만에 갇혀 조바심하는 이방인 사이에 네 절실한 사랑은 꿈꾸는 죄로 갇힌다 벼락 치듯 전율시키는 네 순정은 뻔뻔한 속물을 고발하였으므로 유죄이다 속물의 급소를 겨누고 있는 한 네 목소리는 베어지고 갈빗대는 부러지겠지 가면을 쓰고, 꿈꾸는 자를 가두는 손이 스스로 허구렁 판다 네가 더 무르고 더 시큼한 나라의 손을 잡을 때 비겁한 손들은 전염을 막을 수 있을까 바람이 나르고 허공이 배양하는 공기를 모두 막아낼 수 있을까 한탄조-게 아이고 오마니 태평양 넓은 물에 지가 동기들과 헤엄치고 있는데 맛있는 고기 한 덩이가 물결에 살랑거려서 고걸 물려고 다가갔지라 집게발로 잡고 고기를 먹으려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갑자기 그물이 움직이고 천당인지 지옥인지 잡혀왔지라 먹을 고기 고것이 알고 보니 닭다리였어라 천사인가 했더니 지옥문 지키는 수문장 인지 시커먼 남정네 둘이서 히죽거리며 나를 반기는 거라 오마니 내 눈을 빼야 것어라 내 더듬이를 잘라야 쓰겄소 잠깐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먹이에 혹하여 오마니와 영영 이별하고 말았지라 더듬이는 고것이 독인지 약인지 먹이인지 덫인지 구별도 못하고 먹이인 줄로만 알고 나의 판단을 흐리고 말았지라 오마니 전해주소 잘 더듬고 잘 보고 판단하라고 다른 동기들한테 전해주소 2003년 《심상》신인상. 시집으로『우목횟집』『검은 늪』등이 있다. 이메일: skjm70@empas.com 전화: 070-8600-4792, 010-6201-4792(문자가능) 주소: 서울시 양천구 신정3동 신정이펜하우스 4단지 412동301호 권순자  
183 노오란 은행나뭇잎 외1편 서병진 file
편집자
3353 2012-02-01
12. 02월.21호 시  노오란 은행나뭇잎 가산(嘉山)/서 병 진 인적 끊긴 한적한 공원 노오란 은행나뭇잎 우수수 떨어져 행인의 발자국 쓸어버린다. 못다 한 사랑 책갈피에 접고 내뱉지 못하는 숨소리야 어떻게 하라. 푸른 이야기 나눌 때가 어제 같은데 덧없는 세월이 노랗게 흘러구나. 쌓인 갈잎 마냥 못다 한 시간 노오란 눈물로 흘러 세월에 날리는 가랑잎 되어 둥글둥글 세상 굴리며 고프지 않은 사랑 다시 찾아오길 기다린다. 목련화 필 때면 목련화 필 때면 그대 생각 따라 피어 슬픈 뒷모습이 아렴풋이 잦아든다. 어느 따스한 날 목련화 한 송이 가슴에 꽂고 추억의 그림자로 함께 거닐던 사랑이어라. 목련화 뚝뚝 떨어지는 지난날의 사랑이야기 잊을 수 있을까. 그대 떠난 빈자리 가슴앓이 목련화는 새하얗게 움츠러든다. 서병진 약력 아호는 가산(嘉山), 경남고성 출생, 교육부 장학사, 주례여자고등학교장 역임. 국제펜클럽회원, 한국문인협회 남북문학교류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서울시종로문인협회 감사, 한국육필문예보존회 이사, 한국시문학아카데미회원,한국육필문예연감 편찬위원,『서울문학』심사위원. 국민훈장, 라이너마리아릴케문학상, 셰익스피어문학대상 수상 외 다수. 시집은 嘉山으로 가는 길, 이파리 없는 나무도 숨은 쉰다, 고향은 어머니 강 외 다수. *주소 : 100-827 서울시 중구 동호로8길 42-1, 103호(신당동) *전화 : 010-3861-6622 *메일 : abajin@hanmail.net  
182 무덤에서 외1편/김다솜 file
편집자
3274 2012-02-01
12. 02월.21호 시  무덤에서 김다솜 금낭화 달개비 핀 길을 걷는다 새벽마다 멧돼지 다녀간다는 길을 오른다 억새며 칡덩굴이 얼켜 있는 곳을 지나 측백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곳을 지나 멧돼지가 칡뿌리 파먹느라 파헤쳐 놓은 산마루 누워 계시는 아버님의 쉼터를 간다 시냇가 물장구치던 친구를 생각하고 계실까 애기똥풀 닮은 손자손녀를 생각하고 계실까 아님 울밑에 핀 봉숭아 닮은 아내를 생각할까 저, 맞은편 천봉산 아래 고향이 보인다 명당 옆에 서 있는 두 그루 소나무도 보인다 찔레꽃 눈부시게 만발한 봄도 보인다 둥글레 열매 맺혀 있는 가을도 보인다 바람이 경소리처럼 지나간다 발자국소리 놀란 고라니 후다닥 내려간다 새들이 비비베베 경(經)을 읊는다 --------------------- 황금줄의 집 창문을 대들보 삼아 집을 짓는 그를 본다 주인 허락도 없이 집 짓는 간 큰 건축가다 한 마리였는데, 어느 날 보니 새끼들이 턱걸이 하듯이 매달려 있다 아래, 위 줄타기 잘하는 그는 무슨 뜻인지 선명한 붉은 낙관이 배에 찍혀 있다 그의 집에는 파리며 꽃매미, 잠자리 날개가 무늬처럼 달려 있다 햇빛 쨍한 오늘 그는 어린 것들을 위해 빗물에 바람에 끓어지고 엉킨 집을 수리한다 왼발 오른발로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리모델링 하는 금빛 집 한채를 본다 *본명 김옥순 *경북 상주시 낙양동 남산1길 녹원빌라 A동 302호 * 문경출생 *상주문인협회 회원 *010-3824-0065 *altari1222@hanmail.net  
181 구찌터널과 전쟁박물관, 그리고 수상인형극/조영옥 imagefile
편집자
4129 2012-02-01
12. 02월 21호 수필 <구찌터널과 전쟁박물관, 그리고 수상인형극> 다음 날 아침 8시 15분에 구찌터널로 가는 버스를 탄다고 8시까지는 나오라 해서 갔더니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40여분이 지났다. 나는 직원아가씨에서 얼 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조금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는 것- 참 느긋하다. 그러고 한참 더 있다 붉은 옷을 입은 가이드가 나타나 따라오라 했다. 작은 여행사 가 되다보니 직접 버스운영을 하지 않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모아서 가는 것 같았다 25인승 소형버스에 타고 구찌터널을 향해 출발했다. 출근길- 엄청나게 많은 오토 바이군단이 지나 다닌다. 그 속에 버스도 가고 자전거도 간다. 그런데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신호를 하는 것을 보았다. 달리다가 좌회전을 할 것 같으면 오 토바이를 탄 사람이 왼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 뒤에 오는 차량이나 오토바이 들이 속력을 줄여주고 오토바이는 좌회전을 하였다. 도로 신호등도 좌회전이나 직 진 신호 옆에 시간이 표시되어 있어 신호를 위반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오토바이 속을 모든 차들이 신호체계는 무시한 채 질러가고 멈춰서기를 계속하면서 길을 달렸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몇 마디의 인사 외에 모든 것이 영어로 통한다. 약간은 어설픈 배트남 적인 영어, 가이드의 말을 좀은 알아듣고 복잡한 것은 지나치고 그렇게 듣는다. 사 실 내가 공부해 간 것과 뭐 그리 다른 내용이 있겠는가? 구찌터널은 호치민에서 약 75km떨어진 시골마을 구찌에 있는 총 길이 250 여 km 깊이 30m, 지하 3층 규모로 각층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는 일직선이 아니라 미로처 럼 길이 나있는 터널이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위해 48km를 뚫었는데 이 후 베트콩이 사이공 정부를 함락시키기 위해 200여km를 더 파서 지금의 터널이 되 었다 한다. 최신공법이 아닌 오로지 수공으로 만든 터널, 몸집 큰 사람은 들어갈 수 도 없는 베트남형 굴이다. 구찌지역은 치열한 사이공 전투, 미군의 엄청난 무력적 공격에 소박하지만 치밀하 고 자신들의 강점을 최고로 활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리하여 외세를 물리치 고 통일을 완성한 베트남의 승리를 상징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세와 분단이라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들과 우리의 현대사는 참 으로 다르다. 또 그들을 침략한 외세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오래 전에 알았 지만 잊고 있었던 이름이 문득 떠오른다. 게릴라전의 대가 보 구엔 지압 장군...그 리고 사이공의 현재 이름 호치민.....호 아저씨.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다는 생각- 그것은 그들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물론 경제력 앞에 좀 은 무력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외국인들 앞에서 전투상황과 터널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는 베트남 전쟁과 미국의 역할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말해 주었고 그것은 돌 아가는 길에 들른 전쟁기념관에서 완결판을 이루었다. 전쟁기념관은 3층부터 봐야 한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함께 느껴야하 기 때문이다. 미국과 베트남의 충돌의 역사가 2층에는 전쟁의 잔혹사 그리고 아직 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흔들이 있다. 부셔져 내린 페허- 그러나 대지는 새로운 건물과 길, 다리 ,그리고 번영으로 바뀌었지만 네이팜탄, 오렌지탄에 의해 죽거나 몸이 망가진 사람들은 대를 이어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침묵과 숙 연한 분위기 속에서 사진을 보다가 문득 이 세계에서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거기에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함께 간 사람들 중 미국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구찌터널에서도 미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웃으며 사진을 찍었고 또 여기에 와서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보았는데 그 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궁금했다. 일층에는 공존과 평화를 위한 장이었다. 여러 단체들의 활동과 어린이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베트남의 현재가 있다. 그들의 역사, 진실의 역사가 이렇게 말해지고 있는 한 그들은 주체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여행사가 있는 데탐거리-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구찌 가는 도중에 들른 수공예품 공장- 전쟁으로 인해 불구가 된 사람들이 고용되어 각종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나전칠기처럼 계란 껍질을 이용하여 액자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구찌터널로 가는 길-이런 숲에서 전쟁이 있었다> <구찌터널 입장하는 곳-딱지를 한장씩 몸에 붙여주었다. 이통로를 지나면 전쟁터가 전개된다> <베트콩들이 숨어서 정찰을 하던 곳이다. 너도나도 한번씩 들어가는 체험을 한다. 들어가서 나무뚜껑을 덮으면 감쪽같이 위장을 할 수 있다.> <베트콩들이 미군에 대항하여 만든 각종 함정들이다.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을 그들은 알고 미국은 몰랐기에 그 많은 군인과 최신무기를 가지고도 결국 패망했을 것이다> <터널의 숨구멍-이곳으로 맑은 공기가 들어가 굴 속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사람들은 살 수 가 있었다. 이곳으로 미군들이 매운 가루를 집어넣기도 했단다> <터널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뒷사람이 앞사람의 카메라로 찍어주고 또 그 뒤 사람이 찍어주면서 모두 기념사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들어가면 아무 짓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터널을 나와서 매점에 들어가니 이렇게 쌀전병을 만들고 있었다. 월남쌈(고이꾸온)을 먹을 때 싸는 것-이런 수공제품으로 싸먹으면 더욱 맛있을 것이다.> <쌀전병을 말리고 있는데 늘어놓은 것 자체가 예술이었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쟁후와 현재를 비교해 놓은 사진 중 하나> <그러나 인간이 당한 이 피해와 상처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표정, 그 사랑의 표정때문에 더욱 슬픈 마음이 드는 사진이었다.> <일층에 있는 각종 포스터-그리고 평화를 위한 현재의 활동을 소개하는 곳> <어린이가 만든 포스터-저 뒤쪽의 태극기가 참 부끄러웠다> 전쟁박물관을 나오니 배가 고파져 길거리 조그만 식당에 들어가 반미와 카페 다를 주문하여 먹었다. 카페 농은 진한 블랙커피, 카페에 ‘다’가 붙으면 얼음을 넣은 냉 커피가 된다. ‘스와’가 붙으면 연유와 설탕까지 들어간 달콤한 커피가 된다. 카페 스와다는 연유 설탕이 든 냉커피이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저녁 6시 30분에 공연되는 수상인형극 티켓을 120000동을 주 고 예매하였다. 그리고 다시 르 로이 거리에 가서 유명한 아이스크림집 깸 박당에 들렀다.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이 마주보고 있는 아이스크림집인데 55000동을 주고 커피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뭐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호치민에서 유명하다고 소문이 났으니까 먹어 본 것일 뿐..... 길을 가다가 붓을 파는 행상에게서 붓을 하나 샀다. 가늘고 짧은 대나무를 여러 개 붙여 숱이 수북하게 만든 백붓 같은 것이 재미있어 샀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촉박해져 뛰다시피 수상인형극공연장으로 갔다.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들의 글에서 수상인형극에 대해 호평을 한 사람은 별로 찾지 못했다 대부분 재미없다 괜히 보았다... 등의 평만 있었는데 의외로 좋았던 것 같 다. 실내에 물텀벙을 만들고 베트남 민족의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들을 악사들이 연주 하면서 노래와 대화를 하였고 꼭두각시들이 물 속에서 연기를 하는데 그 놀림이나 기교가 참으로 뛰어났다. 아주 기발한 행동 뿐만 아니라 한없이 섬세한 표현까지 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지막으로 흠뻑 젖은 꼭두각시 연기자들이 인사를 할 때는 더욱 감동이 있었다. 보지 않았으면 크게 후회하였을 것이다. 7시 20분에 공연이 끝나고 다시 벤탄 시장 쪽으로 가니 시장은 어느 새 야시장으 로 변해 있었다. 퍼 2000 앞 골목이 완전 노점으로 변하여 온통 음식점, 옷, 장신 구등을 파는 가게가 되어 있었다. 천막으로 된 음식점에 들어가 고이꾸온(월남쌈)과 사이공비어를 한병 시켜서 먹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여러 가지를 먹었다. 뭐 크게 식사라 할 것도 없이 그저 맛보아야 할 것을 이것저것 많이도 먹은 것 같다. 구찌터널에서는 찐 타피오카도 먹고 옥수수도 먹었다. 9시가 다 되어 호텔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공원에서 청춘남녀들을 보았다. 모 두 오토바이 위에 앉아 데이트를 하고 있다. 오토바이 위에 둘이 앉기도 하고 각자 의 오토바이 위에서 서로 마주보기도 하고...오토바이는 그들의 일부인 것 같다. 호.치민에서의 마지막 밤- 많은 여행객들이 밤의 문화를 맛보아야 진짜 여행이라고 하는데 왠지 흥미가 당기지는 않는다. 그냥 혼자 음악 들으며 하루를 정리하고 편 하게 자는 것이 좋다. 여자들에게 여행이란 단지 살림살이에서 얼마간이라도 벗어난다는 게 가장 큰 의미 가 되기도 하니까. 밥도 빨래도 청소도 하지 않고 주는 밥, 사먹는 밥만으로 며칠을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내일은 캄보디아 프놈펜이다. <깸박당 아이스크림집 -길 건너편에 같은 집이 하나 더 있고 나는 건너편에서 아이스크림 을 먹었다> <커피 아이스크림-3만5천동인가? 5만동인가? 기억이 안난다.> <다시 레 로이 길을 걸으면서 멀리 멋진 건물이 보여 찍어보았다. 길은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로 몹시 붐볐다> <수상인형극-양쪽에 앉은 악사들이 악기연주와 목소리 연기를 하였다> <인형들의 움직임이 아주 정교하고 다양한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에 흠뻑 젖은 꼭두각시 연기자들이다> <벤탄의 야시장 새로운 세계-음식점과 잡화점이 즐비하다> <호텔 근처에 무언가 집수리를 하는데 가만히 보니 우리나라 치킨 업체이다. 롯데리아, 더 페이스샵, 뚜레주르, 등등 여러 업체들이 진출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드디어 비비큐도 컴잉 쑤운~~~~~ >  
180 희디흰 적막으로 외1편/ 이해리 file
편집자
3124 2011-12-31
12. 01월 20호 시  희디흰 적막으로 이해리 눈썹까지 눈이 내린 산사에 와서 고드름으로 귀를 닫고 흰 눈으로 입을 봉한 암자와 마주 섰지요 댓돌 위 흰고무신엔 적막을 신겨놓고 갈피마다 눈가루 뿌린 붉은동백 앞세워 묵언정진 팻말하나로 나를 맞네요 세상에 와서 가장 많이 쓰고 가는 건 물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말이라 하던 당신 말이 생각났습니다 묵언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말이 세상에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마음만큼 전할 수 없는 말 이 해 리 여름이 돌아오는 저수지 앞에 나는 앉았습니다 둑방의 키 큰 미루는 쏴아 쏴 야단으로 춤을 추구요 물가 풀잎은 한 방울 이슬을 퐁당, 떨어뜨립니다 그 은빛 몸부림과 작은 파문으로도 나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립다는 말은 너무 흔해 뇌어보기 두렵지만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어 여름이 돌아오는 물가에 저물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약력:1988년 매일신문에 '화석'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평사리문학상에 '이팝꽃 그늘' 외 4편으로 당선 시집 :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감잎에 쓰다> 등 현재: 대구작가회의 이사  
179 새싹 하나가 외 1편/오형근 file
편집자
3187 2011-12-31
12. 01월 20호 시  새싹 하나가 외 1편 오형근 남장사 입구에서 마주친 짤따랗고, 몸통이 꽤 굵은 나무 그루터기의 나이테가 꺼뭇꺼뭇 몸통 왼쪽에서 새싹 하나가 움트며 긴 시간의 어둠을 벗겨 내고 있네 환한 빈자리 내린 눈이 며칠째 꽝꽝 녹지 않고 있는 날, 아파트 주차장 어느 나무 밑에 작년부터 고양이 밥을 사서 떨어뜨려 놓고 있는데, 오늘도 나무 밑에는 어떤 놈이 먹었는지 살아 있다는 표시로 환한 빈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환한 빈자리>에서 오형근 1988년 《불교문학》신인상, 2004년 《불교문예》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와<환한 빈자리>가 있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3동 신동아2차아파트 110동 801호 오형근 132 - 765 010 3258 0831 oh5501@daum.net  
178 숨구멍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3241 2011-12-31
12. 01월 20호 시  숨구멍 수돗가 흙 얼금얼금 내려 앉는다 옆집과의 경계인 콘크리트 담장에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맛배기로 실금 살짝 긋더니 오늘은 대놓고 쿵 꺼져 버린다 보조 미장쟁이 얼어터진 수도배관 들어 내면서 땅도 숨을 쉰다는데 오욕 덩어리 도시의 땅, 숨구멍 마다 틀어막고 있다 한다 살아가는 일 또한, 때때로 숨 쉴수 없이 막혀 내려 앉겠지만 마당은 또 다시 겨자씨만한 숨구멍 찾아 붉은 봉숭아꽃 수북히 피워 주려는가 어금니 시시때때로 내가 쏘았던 말(言)의 화살촉, 철없이 삼켰던 날 것의 욕망, 내가 씹다 삼킨 자객 같던 미각까지 얼르고 궁글리어 세상 속으로 내 주더니 3월 앞마당에 작약촉 붉던 날 그가 먼저 날 버렸다 이제는 이것 저것 가려서 할 나이라며 궤도를 수정하는 몸 약력 경북 군위 출생 2001년 계간『사람의 문학』등단 현재『사람의 문학』편집위원,한국작가회의 대구지회 부 지회장 시집『시집 밥 한 봉지』출간  
177 또다시 겨울, 외1편/김진희 file
편집자
3392 2011-12-31
12. 01월 20호 시  또다시 겨울, 김진희 또다시 겨울, 전라도 회진 메타세콰이아 길 수많은 별들이 산등성이로 굴러 떨어지며 속삭인다 또다시 겨울이라구, 빈 가지 끝 별 하나 펜촉처럼 밤하늘을 날카롭게 찌르고 웬일인지 캥거루표 구두약처럼 푹 패인 가슴 한 쪽이 찌르르- 해지는 겨울이 돌아왔다 몇 번을 헤매다 겨우 좁은 골목길을 찾아 들어가면 거기 이미 생을 마감한 소설가의 생가가 꼬막껍질처럼 누추하게 엎드려 있고 아이의 구멍난 양말이 툇마루의 못을 밟고 아- 탄성을 지른다 그건 가장 낮고 헐벗은 곳을 일깨워주는 소설가의 유언 그 낡고 초라한 툇마루가 모든 배고픈 예술가들의 생가, 죽은 은유를 떠올리지만 방명록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록해야 할 것은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폭설 밤새 누군가 쉼없이 가동하는 설차 아침이면 꽁꽁 얼어 눈으로 바스라져 내리는 별, 별들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눈 쌓인 길 위 일렬로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메타세콰이어들, 못으로 박아두지 않으면 뒤틀린 마룻장처럼 불안하게 일어서려고만 하는 이 땅, 검은 구두약으로 흰 눈을 닦는 이 곳 위기를 감지한 벌레들처럼 위기를 감지한 벌레들처럼 후다닥 집을 떠났던 가족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제삿날 현관문을 텅텅 차며 다시는 오나 봐라 씩씩대던 셋째오빠의 팔팔했던 혀는 몇 년을 눅눅한 입 속에 힘없이 갇혀 있었다 큰올케언니는 엄마 집 문 앞에서 자벌레처럼 자꾸 거리를 재고 방에 들어와서도 앉지 못하고 머뭇댄다 번데기 속에서 힘겨운 사춘기를 보낸 조카는 성충이 되어 날개를 팔락이며 날아오고 큰오빠는 홍삼 캔디를 사들고 꿈틀꿈틀 늙고 빛바랜 배추이파리를 찾아온다 안간힘으로 초록물 올린 이파리를 데치고 무쳐서 내미는 상기된 엄마 홍삼 캔디를 까서 입에 물며 얼굴에 홍조를 띠는 늙은 엄마 술 취한 개미처럼 다시 비틀비틀 집으로 오고 싶어 새벽 수화기 저 편에서 셋째오빠는 사각사각 속삭인다 그들의 배후는 세월 엄마의 전기밥솥은 너무 낡아 고장이 나고 벽을 뚫은 쥐들이 쓰레기와 함께 방 안으로 후다닥 뛰어든다 *김진희 - 1969년 부산 출생, 2006년 제1회 경남작가 신인상 경남 양산시 남부동 경남아너스빌 109동 506호 010-2632-3280 , bullaeya@hanmail.net  
176 풍요 속에 장마 비/윤정숙 file
편집자
2784 2011-12-31
12. 01월 20호 수필  풍요 속에 장마 비 윤정숙 진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새들의 낮은 비행이 휘 뿌연 물안개 사이를 감아 돌고 젖은 잎새는 간간이 부딪쳐 오는 바람에 제 몸을 맡기고 있다. 내리 사흘을 퍼붓는 폭우 속에 부러진 꽃 대궁이 어지럽게 널려진 잔디밭 위로, 혈흔처럼 점점이 떨어진 능소화 붉은 꽃잎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한 차례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의 일갈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선 감나무의 의연함을 보는가하면, 곤죽이 된 호박덩굴의 초라한 몰골 중에도 물 만난 고기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불거지는 풀들의 아성은 도무지 막을 길이 없다. 끈질긴 생명력의 명사로 치부되는 잡초의 근성을 내 익히 모르는바 아니건만, 무더운 여름 넓은 마당을 온통 풀 뽑는 일로 소비하기엔 내 게으름이 허락칠 않아 그저 마음만 오늘내일 미루다보니 집 안팎은 그야말로 잡풀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다. 연못주변에서 장독간하며, 베란다 밑 장미넝쿨 곳곳에서 웃자란 풀들이 고개를 빼어들고 제 잘난 멋을 양껏 부리며 교태를 짓는 모습이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여겨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 이래저래 조급함만 더한데다 관절로 팔까지 여의치 않다보니 예전처럼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만 같았다. 무신경한 남편만 믿고 그냥 두고 있자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닐 테고, 그저 나오느니 한숨뿐인지라 혼자서 속만 끓이고 있던 차에, 때맞춰 시어머니 기일을 맞아 형님(손위 시누이)내외분들이 찾아오셨다. 왁자하게 모여 한가한 시간을 나누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당으로 나가 호미를 찾아들고 제 각각 풀 뽑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개중에는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기리며, 이쪽 담벼락에는 매화를 심으셨고 방문 앞 쪽으로는 작약을 심는 등 평소 꽃을 좋아 하신 탓에 지천으로 심어놓은 맨드라미, 봉선화로 손톱에 꽃물들이던 어릴 적 일들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위로 내리 딸만 넷을 놓으시다 다섯에 이르러서야 아들 셋과 막내딸을 두셨으니 다복함은 둘째 치고, 가난한 옛 살림에 팔남매를 키우느라 애 쓰셨을 생각을 하면 경외심이 절로 일어 날 법하다. 하긴 그 시대의 어머니라면 어찌 궁핍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여럿남매 놓아 키우지 않으신 이 있으시랴만, 핵가족화에 이른 지금의 어머니들로선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모처럼 팔남매가 모여 자리를 이루자 마당은 그야말로 한가득 풍요로운 잔치 집 분위기였다. 잠시 비 그친 장마중이어선지 끈적한 습도와 비 오듯 하는 땀에 젖어 날이 선 풀끝에 베인 상처가 따끔거리며 아릴텐데도, 표정들만큼은 마치 큰 일을 이루고 온 개선장군처럼 뿌듯한 얼굴들이었다. 저마다 뽑은 풀 더미를 한곳에다 모으고 흙투성이가 된 손발을 씻을 즈음, 최후통첩을 알리듯 참았던 비가 장렬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황톳물이 개울을 씻으며 흐르는 소리와 함께 잔디밭 위를 적시는 빗소리는 고른 숨결처럼 퍽이나 안정감 있게 들려오고 있었다. 준비된 다과상을 앞에 놓고 창밖을 내다보니 넓은 마당이 시원스런 풍경으로 한 눈에 들어오자 즐거움에 웃는 얼굴로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깨끗해진 정원이 한결 보기가 좋아 졌다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다시 개인 하늘가로 흰 구름이 저녁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별은 볼 수 없었지만 코끝으로 상큼하게 전해져 오는 청량한 공기가 잠시 더위를 잊게 할 만큼 기분 좋은 하루였다. 고된 노독일망정 피곤함마저 달콤한 위안으로 다가올 무렵, 제사를 지내고 지방을 태우고 둘러앉아 음복을 하면서 늦은 저녁(제삿밥)을 맛있게 나눠 먹는 풍습과 함께 으쓱한 시간이 되어서야 모두들 일어났다. 물론 답례로 시골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옥수수와 부침과 떡을 싼 봉지를 한 푸대씩 들려서 말이다. 베푸는 것을 받을 줄 아는 겸손도 있거니와 작은 것 일지라도 주는 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받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만이 나눌 수 있는 고유한 인정이 아니겠는가. 다행이도 비는 그때까지 멎어 있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밤 부나비들의 곡예가 요란스런 가운데 뉘 집에선가 개 짖는 소리를 신호로 갖 젖을 떼자 팔려간 어린 송아지를 찾는 어미 소의 울음인 듯, 애끓는 목쉰 소의 울부짖음이 지척을 흔들며 마디마디 어둠을 토막 내고 있다. 늦은 밤 길 떠나는 손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산 밑으로 으스름한 나무들의 잔영이 한 차례 바람을 몰고 와 솔가지 위로 내 앉으며 후두둑 맺힌 빗물을 털어내자, 화들짝 놀란 새들이 허공을 비집고 튀어 오르는 공처럼 가볍게 솟아오른다. 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서다 말고 현관 옆 처마 밑으로 얼기설기 엮어진 거미집들 가운데 가맣게 매달려 있는 거미들의 행렬을 보고는 오스스 돋는 소름을 떼어내듯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아마 며칠이 지나면 또다시 여보라는 듯 솟아 있는 잡풀들을 대할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다시금 그들의 연하디 연한 목 줄기를 부여잡고, 아름다워서 슬프도록 싱싱한 잎사귀들을 조금씩 죄어가며 뽑아낼 것이다. 그때쯤이면 권태기에 접어들 팔월장마도 함께.  
175 칼자국 /이강산 file
편집자
3054 2011-12-31
12. 01월 20호 소설  칼자국 이강산 북부역 광장은 아스콘 냄새로 가득했다. 퇴근 무렵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 때문이었다.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철로 위에서 십여 분 남짓 빗방울이 튀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광장 맞은편 골목으로 다가섰다. 북부역 앞 국도와 직각으로 뚫린 골목이다. 그 형태가 T자 같아서 마을 사람들은 곧잘 T골목으로 불렀다. 골목으로 들어서며 심호흡을 했다. 붉은 머리 여자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여섯 시 이십오 분. 이 시간이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여자의 걸음만 보아도 골목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빠르고 정확한 걸음. 지금 한창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는 법이 없다. 시간에 쫓기기도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가, 목표가 분명해서 그렇다. 골목 밖 사람들의 걸음은 완연히 다르다. 느리고 부정확하다. 어디로 향할지 목표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이다. 골목의 불빛에 부유하는 먼지조각과도 같이 그들의 걸음은 일정한 방향이 없다. 붉은 머리 여자가 사라진 3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전면을 덮은 검푸른 유리 한 복판에서 손바닥 두 개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미인클럽 갈채의 입체 네온사인이다. 룸살롱 아방궁으로 적갈색 파마머리 둘이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파묻혔다. 그 뒤를 붉은악마 티셔츠가 수박 두 통을 들고뛰었다. 고등학교 후배다. 나처럼 여기서 나고 자랐으므로, 어머니의 과일가게에 진열된 과일을 보듯 이 바닥을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을 녀석이다. 골목 하나를 지나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허리춤에 골목을 끼고 앉은 토속마을엔 파리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소나기 때문인가? 기와지붕을 헐어내고 감자탕집으로 둔갑시킨 것은 공간이 여관이나 단란주점 따위의 건물을 올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집주인의 판단은 옳았지만 현명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감자탕집보다는 24시 야식집이 더 나을 뻔했다. 골목 하나에 감자탕집이 자그마치 다섯 개씩 늘어서 있으니, 다섯 명의 식당 주인 가운데 다리 뻗고 잠 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24시 야식집이야 열 개가 생긴들 무슨 상관이랴. 야식집을 먹여 살리는 여관들이 골목을 향해 벌떼처럼 몰려 있는 것을. 귀빈장, 행복장, 모텔 로망스, 꿈의 궁전, 청남파크……. 그리고, 하나 뿐인 송학 여인숙까지. WORLD INN-旅館. T골목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의 타이틀이다. 광역시의 북쪽 변두리에 있는 동사무소는 댐과 공업단지를 양 겨드랑이에 끼고 앉은 지리적 조건을 십분 활용이라도 하듯 골목 주변 몇 개의 블록을 분홍색으로 묶어놓은 뒤 그곳에 일련번호로 삼십팔 번을 새겨 놓았다. 동양파크부터 알프스모텔까지의 고유번호였다. 일 년 전 수정된 안내판이 세워진 뒤에 새로 들어선 모텔을 합쳐 숙박업소 사십여 개가 골목을 중심으로 누에처럼 꿈틀거렸다. 갑자기 골목이 환해졌다. 이용범 참치병장이 막 웃기 시작했다. 한성장 출입구의 호박등이 조명탄처럼 번쩍, 빛나는가 싶더니 항아리식당과 청기와집 간판이 차례로 깜박거렸다. 가요주점, 단란주점, VIP ROOM…… 이름만 다르고 실내 구조와 술과 여자들의 모습과 기능이 엇비슷한 貴族과 맨하탄과 퀸과 토마토와 옥녀궁의 불빛이 골목 이 쪽 저 쪽에서 번득였다. 여섯 시 사십 분. 서둘러야겠다. 골목 하나를 더 돌아 나오면서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아무래도 출근 시간이 늦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술마당에 닿으려면 종종걸음을 쳐도 모자라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비 그친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겠다며 길을 잡은 게 너무 멀리 돌았던 모양이었다. 아동 미술․입시 미술. 전봇대에 매달려있는 비둘기집 만한 간판이 보였다. 간판을 스치는 순간 양철대문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손가방 끈을 당겨 잡고 뛰었다. “늦었다.“ “미안해요, 언니.” 술마당 출입문을 밀고 들어선 게 일곱 시 십오 분이었다. 십 분 일찍 출근해야 되는 것을 반시간이나 늦은 셈이다.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오늘 밤 내려간다. 경희였다. 원피스의 어깨 끈에 팔뚝을 막 집어넣는 순간, 책상 위에서 휴대폰이 덜덜 떨었다. 몇 시 도착? 0시 25분. 경희의 문자를 읽으며 나는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청바지에 다리를 꿰었다. 열두 시 이십오 분이면, 퇴근하고 바로였다. 술마당에서 봐. 문자를 찍은 뒤 나는 양철대문 밖으로 후닥닥 뛰쳐나왔다. “무슨 일 있니?” “아니. 왜, 이상해요, 언니?” “뺨 때깔이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손걸레를 빨면서 화장실 거울을 봤다. 오늘 아침 고객상담실에 출근했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 볼 터치를 한 것처럼 광대뼈 부근이 불그레했다. 경희 때문인가? 아직 모든 게 잊혀질 만큼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뜻인가? 테이블 네 개가 차면서 실내가 시끄러워졌다. 주방에서 과일안주를 들고 나오며 언니가 호랑이 눈썹을 했다. 강수빈, 얼굴 좀 펴라. 그 뜻이었다. 감정을 감춰야 돼. 그래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다. 술마당에 처음 출근한 게 이 년 전이었다. 언니는 문을 닫을 때면 한 마디씩 충고했다. 정강이에 핏물이 잡히도록 허겁지겁 홀을 왕복하다가 틈틈이 언니 대신 카운터에 앉아 주문표를 만지작거리던 무렵이었다. 호칭이 사장님에서 언니로 바뀐 것도 그 즈음이었다. 크고 싶니? 프로가 되고 싶어? 그러면 미련 없이 고향을 떠. 그 말을 찜질방에서 내 왼쪽 젖에 쿡쿡 쑤셔 넣었다. 너, 함몰 유두구나? 크려면 그것도 살려. 스물에 집을 떠나 객지에서 마흔을 넘긴 언니였다. 기껏해야 생맥주와 국산 양주가 전부인 술마당의 소유주면서도 언니는 T골목에서 통뼈로 불렸다. 손님들이 유리창을 박살내는 일 따위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프로 근성 때문이었다. 어떤 씨발놈이 타이어를 찢어놨어! 테이블 절반 가까이에 사람과 술과 안주가 뒤섞여 흥청거렸다. 열 시가 막 지나는 중이었다. 이미 한 차례 술에 젖은 듯한 사각턱 사내가 들어서면서 툴툴거렸다. 개새끼, 잡히기만 해 봐라. 몇 마디를 더 뱉도록 사각턱을 따라온 일행은 대꾸가 없었다. 마치 절대로 잡힐 리 없으니 그만 좀 떠들어라 하는 것처럼. 어느 식당이나 술집 곁에 차를 세웠다가 당한 게 분명했다. T골목 안팎에서 종종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운전석 열쇠 구멍에 이쑤시개가 박히거나 백미러가 풍뎅이 목처럼 한 바퀴 돌아가는 소란 따위들. 쨍그랑. 한두 개의 테이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면서 아르바이트 여대생과 언니와 내가 부지런히 주방 안팎을 드나들고 있었다. 사각턱 테이블 바닥으로 맥주병이 나뒹굴었다. 일행이 동요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부러 깨뜨린 것은 아닌 듯했다. 언니가 주방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언니에게 눈짓을 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손님, 잠깐만요. 치워드리겠습니다. 여대생이 빗자루를 들고뛰었다. 유리 조심하세요, 손님. 나는 사각턱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희가 치워드리겠습니다. 넌 또 뭐야. 유리 조심하세요. 이 씨발, 너나 조심해. 못 들은 것처럼 카운터로 돌아서는 데 사각턱이 악을 썼다. 야, 너. 예, 손님. 술 가져와! 예. 야, 너처럼 탱탱하고 쭉 빠진 걸로. 오케이? 헛구역질이 났다. T골목에선 그래도 일당이 세다는 이유로 술마당을 견디고는 있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강수빈. 넌 아직 멀었어. 언니가 말한 대로 나는 아직 멀었다는 뜻일까. 목구멍에서 한 움큼 신물이 쳐 올라왔다. 나는 여대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골목을 떠나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이 골목을 벗어나야 해. 얼굴에 물을 끼얹고 거울을 보았다. 눈앞이 흐렸다. 손등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친절과 봉사정신으로 철도고객 열차표 예매를 했던 얼굴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개새끼를 토해낼 것처럼 교양 없이 입을 실룩거리는, 일에 지친 젊은 계집 하나가 서 있었다. 수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 한 방울이 턱 밑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사람이고 과일이고 골목에 있는 것은 전부 썩는 냄새가 나.” “썩는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그렇게 니 애비랑 토씨 하나 안 틀리냐?” “아버지하고 나를 비교하지 마.” “니 애비랑 틀려서, 틀려서 니가 집을 나가겠다는 거냐?” 무리인 줄 알면서도 내가 서울로 진학하면서부터 어머니는 돌변했다. 집을 떠나 독립을 하겠다는 말만 꺼내면 어머니는 허둥지둥 아버지를 불러왔다. 그 때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아버지는 나와 함께 방바닥에 곤두박질을 당했다. “이 골목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 줄 아니?” “눈에 흙이 들어가서도 그 말을 하겠어, 정말.” “네 눈엔 이 골목이 온통 사기꾼이나 더러운 연놈들만 들끓겠지만, 그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줄 알기나 해?” 어머니의 눈 흰자위에 핏발이 서기 시작하면 나는 어떻게든 자리를 박차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다. 침대 시트를 만지면서 널 생각한다. 니가 서울에서 무얼 하고 사는지. 소금물에 절은 배춧잎처럼 축축 늘어진 그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몰랐으므로. 이십 년이 넘도록 골목을 드나들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이 골목 사람이 아니잖아. 수없이 내 목젖을 때리던 그 말을 나는 어머니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밤만큼은, 어머니가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렇게 성실하고 정직해서 어머니는 아직도 정액이 줄줄 흐르는 콘돔이나 줍고 있어? 나는 눈두덩을 손등으로 찍어 누른 다음 화장실을 나왔다. 홀 맞은 편 벽시계의 짧은바늘이 수직에서 한 눈금 모자랐다. 경희가 북부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려면 한 시간 남짓 남아있었다. 담배 연기인지 술 냄새인지 모를 매캐한 것들로 실내는 터질 듯했다. 카운터에 서서 언니가 나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강수빈. 넌 아직 멀었어. 비즈니스클럽 M에서 홍시 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튀어나왔다. 삼촌, 애들 좀 보내. 애들이 딸려! 여자는 휴대폰을 열기가 무섭게 악을 썼다. 빨리. 안 그러면 쪽박 찬다구! 경희가 힐끗 여자를 훔쳐보면서 내가 갈까, 했다. 나는 경희의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퀸 단란주점 입구의 지하 계단에 놓인 장미다발이 반짝거렸다. 오늘밤에도 물을 뿌려놓은 모양이었다. 아무도 장미에 손대지 않았다면, 서른 세 송이가 분명했다. 퀸 여자의 나이와 같아. 일 년에 한 송이씩 늘려 가는 중이지. 매일 밤 촉촉이 빛나는 장미를 궁금해 하는 내 귀에 대고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듯 언니가 속삭였다. 지난 해 겨울이었다. 눈을 들자 어둠 속 멀리에서 야자수 두 그루가 번쩍거렸다. 모텔 허니문의 네온사인이었다. 그 옆으로 불화살이 날아다녔다. 꿈의 궁전 뾰족지붕에 걸린 하트를 향해 오늘도 밤새 불화살이 꽂힐 것이다. 나는 경희의 손을 끌고 좁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이 집 기억하니?” “청남…… 파크?” 피읖이 꺼져버린 청남파크 네온사인을 경희가 떠듬떠듬 읽었다. “나, 휴학했을 때, 너 내려와서 며칠 묵었잖아.” “아, 그 감나무집.” “그래, 감나무 아래에서 목욕했다는 집. 기억하지?” 주차장 옆 후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감나무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수빈이 너, 그 때 첫사랑에 마침표 안 찍었잖아.” 첫사랑? 그날 밤…… 내가 첫사랑을 말했던가. 경희와 새벽까지 술마당에서 젖던 밤, 그날, 사랑이라는 말을? “수빈아, 여기서 자자.” 후문을 열면서 경희가 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 집이 코앞인데, 하는 표정으로 나는 손사래를 쳤다. 경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후문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막차로 내려와 북부역을 빠져 나올 때부터 경희는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술마당에서도 그랬다. 언니와 안부를 나누고 발렌타인17년을 마시는 동안에도 혼자 중얼거렸다. “삼백오 호!” 경희가 후문을 열고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새 방을 정한 모양이었다. 경희가 후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냥, 자고 가? 오랜만에 따듯한 물로 샤워도 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우면……. 불빛 한 점 없는 폐광 같은 집. 비좁고 녹이 슬어 드나드는 순간순간 살갗과 옷이 찢길까 식은땀이 흐르는 양철대문. 그곳으로부터 단 하루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감나무집에선 그렇지 않았다. 비록 소방도로에 절반이 잘려나가 담조차 없었지만 집을 벗어나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계절마다 꽃대궐을 이루었던 감꽃과 채송화와 봉숭아. 감나무 아래 수돗가에서 이불 홑청을 둘러치고 언니들과 은밀하게 즐기던 냉수욕. 집을 날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도, 아버지가 사라진 세월만큼 여관방을 떠도는 어머니도 잊고 살았다. 오로지 꽃대궐과 물소리에 파묻힌 채. 감나무집이 헐리면서 양철대문 속으로 박스살림을 옮기던 열아홉까지 그랬다. 첫사랑.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는 첫사랑도 그 감나무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첫사랑은 아니었다. 첫 남자였을 뿐. 고등학교 동창 창수였다. 이 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집이 비던 밤, 나는 창수에게 안겼다.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꽃잎과 물소리만 가득하던 시절, 문득 쓸쓸하고 무언지 그립던 나이였다. 그 해 여름, 식구들이 집을 비우는 밤마다 내 방을 다녀가면서 창수는 등산용 칼로 감나무에 正자를 새겼다. 그러나 창수는 나에게 격렬한 통증을 남긴 첫 남자였을 뿐, 첫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잘못 꾼 꿈처럼 남아 있는 남자들. 내가 그랬듯 그들 역시 내 육체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탐닉했을 뿐, 애초부터 사랑이란 없었다. 혼자서 서울을 견디는 동안 왠지 두렵거나 허전할 때, 더듬더듬 추억에 잠기고 싶거나 까마득히 잊고 싶을 때, 그리고 문득 내 몸 어딘가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때면 나는 남자가 필요했고, 육체를 품었을 뿐이었다. “야, 강수빈.” 언제 후문을 열고 나왔는지 경희가 내 코끝에 손가락을 휘둘렀다. 경희의 손가락 끝에서 밤꽃 향기 같은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울컥, 헛구역질이 났다. 오늘 밤 양철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집안 구석구석 그런 냄새가 풍길 것이다. 그것은 벌써 이십여 년 째 여관의 침대 시트를 만져온 어머니의 몸에 배어있는 정액 냄새였다. “노닥거리다니? 아니, 어떻게 노닥거린다는 말을 해?” “죄송합니다.” “차표 한 장 때문에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굽실거려야 되겠어? 더군다나 아들 뻘도 안 되는 젊은 놈한테?” 쾅! 실장이 벌떡 일어서면서 책상을 내리쳤다. 메모지 받침대에 꽂혀 있던 연필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도대체 일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객차를 비껴 서있던 화물차가 실장실 유리창을 두드리며 우르르릉 굴러갔다. 여섯 시 반. 퇴근 시간이, 아니 술마당 출근 시간이 턱없이 지나고 있었다. 창수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고객한테 정중히 사과 전화를 한 다음에…….” 실장실을 나와 상담실 부스에 돌아와서도 입 속에서 죄송합니다가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노닥거리다니. 왜 그랬을까. 말없이 전화를 끊기만 했어도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대구 행 좌석 한 장을 사정하던 젊은 놈이 철도청 민원실과 지역 책임자와 실장에게 차례로 항의 전화를 했고, 실장은 젊은 놈이 전화번호를 찍었던 숫자만큼 허리를 굽혔다. 조심해. 어쩌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좌석을 원하다보면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 선배 직원들로부터 몇 번씩 주의를 들었음에도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봐, 아가씨. 더 뒤져봐. 서울역에서 안 나오면 영등포를 뒤져보고 그래도 안 나오면 수원이나 평택에서 뒤져봐. 툭툭 몇 마디를 던지는가 싶더니 아예 반말로 둔갑한 젊은 놈의 목소리에서 술 냄새가 끈적끈적 묻어났다. 좌석 없으면 아가씨 무릎이라도 내줘야된다는 생각으로 뒤져봐. 거기까진 참을 만했다. 낮술 한 잔 하고 객기를 부리거니 했다. 뒤지다 보면 틈이 보인다구. 틈이든 구멍이든 보이면 집어넣고…….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한 움큼 쳐 올라왔다. 이봐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 노닥거릴 시간 없습니다. 쾅! 이제 막 연등제가 시작된 사월 초파일 밤의 강물처럼 북부역 광장 맞은편은 불빛들이 출렁거렸다. 길을 건너자 WORLD INN-旅館 안내판 한복판이 붉게 빛났다. 여덟 시 반. 어제보다 술마당 출근이 한 시간이나 늦었다. T골목에 들어서기 전, 나는 숨을 몰아쉬며 건너편 북부역을 보았다. 강수빈씨. 월급봉투를 두 번씩이나 받았는데도 출근 시간을 못 지켜? 아침에 지각 사유서를 쓰라고 할 때부터 실장은 벼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미처 두 달을 채우기도 전에 세 번씩이나 지각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술마당에 손님이 넘치는 날엔 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새벽 한 시도 좋고 세 시라도 좋았다. 양철대문을 열고, 몸을 씻고, 베개에 머리를 붙였나 싶으면 탁상시계가 울렸다. 그 소리를 못 들은 게 세 번이었다. 오늘 오후 열차표 예약 시비는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실장은 예상했다는 것처럼 책상을 쳤다. 아무리 대학생이라도 그렇지, 나이가 스물여섯이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은 알 것 아냐! 퇴근하면서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잠깐 울었다. “수빈아, 한 판 붙었다며?” 고객과 시비가 붙어 좀 늦겠다고 전화를 한 게 잘못이었다. 일손이 모자랄까 싶어 언니가 경희를 부른 눈치였다. 경희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날렸다. “털고 잊어버려.” “때려치우면 되지. 뭐가 아쉬운 게 있다고.” 언니와 경희가 한 마디씩 건네고도 다들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친 년. 그깟 일로 눈에 핏발을 세워. 경희가 눈을 흘기며 등을 돌린 뒤에도 언니는 나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너, 괜찮은 거니? 나, 괜찮아요. 그렇게 눈만 마주칠 뿐 말이 없었다. 막막한 침묵이 시끄러운 실내를 방향 없이 떠다녔다. 흰자위의 실핏줄 하나가 터진 것처럼 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남자들 넷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홀로 나갔다. 잊어버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야. 언니의 눈빛 때문인지, 불현듯 슬퍼졌다. 하루 종일 그랬다. 온몸이 나른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침부터 지각 사유서를 몇 번씩 고쳐 쓰는 동안 몸 전체로 슬픔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 슬픔이 고이면서 발가락이 퉁퉁 부은 것처럼 오후 내내 걸음이 불편했다.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쓰면서 물었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마신 술에서 슬픔은 나왔을 것이다. 사유서를 찢고 포개어 또 찢는 동안 목이 메었다. 경희의 입에서 창수만 튀어나오지 않았어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삼백오 호에서 잠들기 전이었다. 경희가 불쑥 물었다. 이 골목에서 아예 썩을 거냐고? 북부역을 떠날 때까지만 있을 거야. 넌 여기가 안 어울려. 왜? 니 말대로 콘돔 썩는 냄새가 나지 않니? 일 년은 견딜 수 있어. 니가? 정말이지 나는 일 년 아니라 이 년도 견딜 수 있었다. 아니, 견뎌야만 했다. 북부역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일 년 분의 생활비와 옥탑방 전세금이 통장에 채워질 때까지. 수빈아, 나 왜 이 골목에 다시 왔는지 아니? 왜? 여기 눌러앉으려고. 뭐? 여기저기 다녀보았자 다 똑같더라. ……. 창수에게 다리 좀 놓아줄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경희가 창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두 번째 휴학을 하고 집에 내려와 있던 무렵이었다. 경희는 보름 남짓 청남파크와 양철대문집에서 지냈다. 삼 학년 일 학기를 마치고 자퇴서를 낸 경희는 유랑하듯 친구들 집을 떠도는 중이었다. 남자 때문이었다. 일 년 가까이 동거하던 남자가 짐을 싸서 사라진 게 경희를 자퇴생으로 만든 결정타였다. 경희가 남자를 만나기 전, 한 학기 가량을 경희의 옥탑방 신세를 졌던 나는 경희와 함께 남자가 옥탑방으로 올라오면서 지하실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지하실에서 빠져나와 양철대문집으로 돌아오던 그 즈음에 남자와 경희는 옥탑방에서 차례로 내려왔다. 욕실이 딸린 옥탑방 전세를 얻을 만큼 지방 출신치고는 제법 여유가 있던 경희였지만 경희는 늘 돈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무엇이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지갑에 두둑이 돈을 채워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 넘치면서도 부족한 경희의 돈 덕분에 나는 때로는 감격적으로, 때로는 우울하게 서울의 낮과 밤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추억에 사로잡혀 경희를 T골목으로 불러들였다. 경희라는 이름 대신 옥탑방으로 더 자주 불렸던, 유난히 발렌타인17년을 고집했던 음성 촌년을. T골목에서 경희가 증발한 것은 내가 첫사랑을 말했다는 그 다음 날이다. 바다를 다녀왔다고 했다. 일하던 단란주점이 내부 수리 중이어서 때마침 쉬고 있던 창수와 함께. 경희가 아니라 창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차를 몰고 이박삼일 간 동해안을 돌아본 뒤, 창수는 출근했다. 경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잊혀질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경희가 아주 사라져주기를 바랐다. 경희와 함께 했던 서울의 시간들뿐만 아니라 창수가 바다를 다녀온 이박삼일마저 와이퍼에 닦인 차창처럼 내 기억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희는 어젯밤 골목에 나타났고, 경희의 입을 통해 창수의 바다 역시 내 앞에서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냈다. 소주 두 병을 바닥낸 뒤 쓰러졌다. 입에 술을 대면 손가락을 자를 거야. 언니와 약속한 금주령을 까맣게 잊고서. 열 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하루 종일 날은 무더웠고, 몸은 끈적거렸다. 지각 사유서를 썼고, 젊은 놈에게 사과했다. “창수 좀 늦는다고 하더라.” 테이블 네 개가 찼고 다섯 개가 비어있었다. 과일안주를 들고 나오면서 언니가 창수 소식을 전했다. 약속대로 꼴찌가 쏘는 겁니다. 당연하죠. 벌주도 마시는 거야. 중년의 남자 하나에 여자 여섯이 출입문을 열면서 시끌벅적 뛰어 들었다. 사장님, 여기 맥주! 회식을 끝내고 노래방을 들린 모양이었다. 여자들이 노래방 점수와 멕시칸 사라다와 불갈비 치킨을 번갈아 지껄이는 사이, 테이블 하나가 더 찼고 두 개가 빠졌다. 어디 한 번 맘껏 즐겨 보라는 식으로 입을 다문 채 술잔만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여자들이 웃을 때마다 따라서 웃다가도 여자들보다 한 박자 앞서서 박수를 쳤다. 여자들은 남자의 태도를 힐끗거리면서 박수와 환호성을 연발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남자의 침묵. 무엇인가 비어있는 듯하면서도 역시 빈틈을 보이지 않는 여자들의 웃음과 박수. 이제 막 생의 반환점을 돌아섰을 저들의 젊은 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꿈은, 사랑은. 열 시 오 분. 창수와 약속한 시간에서 두 시간 남짓 지나고 있었다. 남자의 침묵과 여자들의 소음에 자맥질하듯 시간은 느릿느릿, 그리고 덤벙덤벙 흘렀다. “수빈아.” 실내가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을 때였다. 경희가 다급하게 불렀다. 경희 옆에 엉거주춤 걸터앉아 나는 경희가 따르는 대로 한 잔을 비웠다. “지금도 발길질이 느껴져.” “…….” “아이를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짐작했던 말이었다. 경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쓸어 내렸다. 눈가에서 반짝, 빛이 났다. “그만 마시자, 경희야.” “어젯밤도 휠체어 탔다. 흐흐. 배꼽에 또 불이 붙었다구.” 경희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그랬구나. 그 소리에 내가 잠을 깬 거였어. 두통 때문이 아니라 가위눌린 경희의 신음소리 때문이었어. 뜨거워서, 휠체어 밖으로 또 뒹굴었을 것이다. 나는 경희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어깨가 쩌르르 뒤틀렸다. “수빈아, 난 유두가 넷이야, 넷. 가슴에 둘, 배꼽 밑에 둘. 흐흐흐” 옥탑방에서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던 여름이었다. 몸살이 난 경희가 카페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있었다. 옥탑방 신세도 갚을 겸 대신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양주를 팔긴 했지만 룸카페가 아니었기에 별일 없을 줄 알았다. 이틀 째 되던 날, 사장은 휠체어를 주며 옷을 벗으라고 했다. 단골에게만 베푸는 이벤트였어. 몸에 과일조각을 올려놓고는 휠체어로 한 바퀴 도는 거야. 그러면 이쑤시개로……. 술에 취한 경희가 횡설수설한 대로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도록 제작된 휠체어였다. 지독한 년. 카페 지하 계단을 뛰어오르며 나는 경희를 씹었다. 그 돈으로 우리가 삼겹살을 먹고 강의실에서 낄낄거렸다니. 옥탑방으로 돌아왔을 때, 경희는 쭈그려 앉아 화상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몸살이 아니었다. 경희가 아르바이트를 빠진 것은 화상 때문이었다. 이쑤시개로 과일 안주를 찍어 먹던 단골 하나가 흥분을 참지 못해 담뱃불로 배꼽 아래를 지진 것이었다. 두 군데였다. 화상이 아물던 일주일 내내, 경희는 휠체어 대신 옥탑방에서 회전의자를 탔다. 회전의자가 돌기 시작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경희의 핸드백에서 꺼낸 콘돔을 천장으로 불어 날렸다. 삼겹살 타는 냄새와 죽부인만한 콘돔 풍선과 낡은 회전의자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뒤섞인 옥탑방은 찜질방처럼 푹푹 쪘다. 그 여름 끝에 남자가 옥탑방으로 올라왔다. 경희의 아랫배가 부르다는 소문과 옥탑방에서 남자가 내려왔다는 소문과 병원을 다녀왔다는 소문이 학기가 바뀔 때마다 강의실에 떠돌았다. 딱한 년. 자퇴서를 내고 잠적한 경희를 찾아 옥탑방에 갔을 때, 나는 잠긴 문고리를 흔들며 울었다. 참 딱한 년이다, 경희 너는. 얼음 좀 가져올게. 경희의 손에서 술병을 빼낸 뒤 나는 일어섰다. 언니가 주방 앞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창수 많이 늦는다고 했어요, 언니? 글쎄, 하다말고 언니가 출입문을 가리켰다. 창수가 실내로 들어서면서 손을 흔들었다. “누님한테서 소식 들었다. 아주 내려 온 거냐?” “아니, 곧 올라갈 거야. 오늘은 일 안 해?” “속 썩이는 애를 찾아왔어. 피곤해서 하루 쉬기로 했고.” 동해안을 다녀온 뒤 처음 만나는 창수였다. 경희가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발을 옮기며 비틀거렸다. 출입문을 등지고 앉은 탓에 아직 창수를 못 본 것 같았다. 창수 역시 경희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서울 생활은 어때?” “그저 그래.” “낮에도 일을 한다면서, 힘들지 않아?” “견딜만해. 너는?” “자리 잡았어. 일도 재밌고.” 견딜 만하다는 말끝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창수가 따라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사는 게, 걸어서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 같아. 어둡고 답답하고 두렵고. 창수에게 그렇게 털어놓고 싶었다. 겨울비를 흠뻑 뒤집어쓴 것 마냥 안면에서 스멀스멀 미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몸살이 날 것만 같았다. 잔을 내려놓고 화장실 쪽을 보았다. “나, 여기 떠날 거야.” “완전히?” “응.” “언제? 어, 어 저게 누구야?” 경희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경희, 어젯밤 내려왔어. 나는 창수에게 하려던 말을 또 삼켰다. “얘, 이쪽.” 경희는 곧장 다가와 창수 옆에 앉았다. 마치 창수가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오랜만이에요. 경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또 보네요. 창수는 경희의 손가락 끝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멋져 보입니다. 많이 변한 것 같아요. ……. 살 맛 나는 세상이죠. 언제든 먹고 마시고 즐기고. 돈이 문제죠. 돈이 사람의 목을 쥐어흔드는 세상이니. 사람이 더 문제죠. 돈이야 거짓말을 못 하지만 사람은……. 대충 이런 말들이 순서 없이, 누구의 입을 통해 나왔는지도 모르게, 테이블 위로 둥둥 떠다녔다. 나는 카운터를 오가며 중간 중간 끊겼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과 술잔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날파리가 날아든 것처럼 언제부턴가 귓속이 윙윙거렸다. 귓속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어떤 소리엔가 파묻힌 느낌이 들었다.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이명처럼 울리는가 싶다가도 뒤통수 어디쯤에선가 한강철교를 건너는 열차의 굉음 같은 게 들렸다. 온갖 소리들에 떠밀려 핏줄에서 붉은 피가 쭈우욱 빠져나간 것처럼 자리를 옮겨 앉을 때마다 어질어질했다. 여대생에게 얼음물을 시켜 단숨에 들이켰다. 소음과 빈혈 증세가 겨우 진정되는 듯싶었다. 실내는 한낮의 북부역 아스팔트 광장처럼 이글이글 달아올라 있었다. 오늘 하룻밤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침없이 술을 들이켰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을 후회한다는 것마냥 안주를 씹고 또 씹었다. 자정을 넘겼지만 아무도 일어설 줄을 몰랐다.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온 경희가 창수 앞으로 쓰러진 것은 넥타이를 풀어헤친 남자들이 오징어와 맥주잔을 치켜들고 지화자를 외칠 때였다. “그만 마셔, 경희야.” 나는 창수 품에서 경희를 떼어냈다. “내버려둬.” 창수 앞으로 다시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 경희가 술병을 잡았다. “민경희, 취했어.” “민경희? 수빈아, 얘 이름이 민경희야?” 술병을 잡아채면서 창수가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럼, 문주란은 뭐야?” 문주란? 문주란이 뭔데, 하면서 내가 더 궁금하다는 것처럼 창수를 바라보자 경희가 소리쳤다. 그래, 내 이름은 문주란이다. 뭐 잘못됐냐? 어라? 너는 이름도 감추고 사냐? 야, 너는 그래서 이름도 없이 꽃미남으로 팔려다니냐? 경희가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창수의 코를 찌를 듯이 흔들었다. 창수의 목이 뒤로 꺾이는가 싶다가 경희 앞으로 퉁겼다. 이런, 니기미. 나? 난 윤창수다. 윤창수. 나는 분명히 이름이 있어. 내 이름을 가지고 산다고. 그게 너 같은 인간하고 다른 점이야. 알간? 사장님! 남자를 앞장세우고 여자들이 카운터로 몰려갔다. 예, 손님. 언니가 달려갔다. 얼씨구. 니가 나하고 다른 인간이라 이거지. 출입문이 닫히는 사이 창수의 얼굴 앞에 경희가 코를 들이밀었다. 주춤, 한 걸음 물러설 줄 알았다. 창수는 경희의 가슴에 닿을 듯이 바싹 다가섰다. 이, 불쌍한 여자야. 꽃미남은 아무나 부르는 게 아냐. 너처럼 돈이고 분비물이고 철철 넘쳐서 주체를 못하는 골빈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이라고. 문주란아, 알간? 미친 자식, 꼴에 사내새끼라고 떠들어? 그만 해! 누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호소하듯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은. 언니였는지, 나였는지. 너 바다 갔을 때 그랬지? 내 것 빨면서 역시 꽃미남은 다르다고. 뭐야? 너는 새끼야. 내 배꼽 밑에 있는 유두보고 멋진 훈장이라며 거품 물고 핥았…… 그만 해! 둘 다 그만해! 핏줄 속으로 흐르던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머리끝으로 역류하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어디랄 것 없이 몸이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야, 꽃미남. 너 똑바로 들어. 나도 이 골목에서 자리 잡을 거라고. 너보다 멋지게 말야.” 목이 말랐는지 경희가 자리에 앉아 술잔을 입에 물었다. 문득 코끝으로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바락바락 악을 쓰는 경희의 입속에서 새나오는 발렌타인17년 같기도 하고 주방에서 노가리 타는 냄새 같기도 했다. 창수의 머릿기름 냄새였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몸에 배인 T골목의 냄새였는지도. 시디 신 음식 찌꺼기가 금방이라도 식도를 타고 올라올 것처럼 역겨웠다. 냄새가 난다고 집을 떠나? 떠나면, 누가 거저 먹여준다고? 내 코앞에 입을 들이대고 어머니가 악을 쓴다. 대학 가겠다고 큰언니 결혼 밑천을 잘라먹어. 너만 살겠다고, 이 독한 년아! 어머니의 입에서 꾸역꾸역 밤꽃 냄새가 풍긴다. 엄마. 수빈이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제발. 어머니의 팔뚝에 매달려 큰언니가 운다. 결혼도 못하고 애엄마가 된 큰언니의 눈물에서도 밤꽃 냄새가 번진다. 너, 이년. 빚진 것 갚아. 큰언니에게 끌려가며 어머니가 팔을 휘젓는다. 빚 갚으라고……. 강수빈. 이 흉터, 이 유두 말이야. 나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이 유두를 바라보며 산다. 어린애 젖꼭지 같은 유두만 보고 살아. 너, 그 기분 아니? 아가씨, 좌석 없으면 무릎이라도 내줘야된다는 생각으로 뒤져봐. 뒤지다 보면 구멍이 보인다구. 야, 술 가져와. 너처럼 탱탱하고 쭉 빠진 걸로. 너만 살겠다고 집을 떠나? 강수빈, 너만 살겠다고. 그만, 그만 해. 이제 그만 하라고! “재웠니?” “응.” 근화장으로 경희를 질질 끌고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경희 옆에 누워서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게 그 한 시간이었다. 창수는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물을 뒤집어 쓴 창수의 자주색 남방이 어둠침침한 아크릴 간판 불빛을 받아 낡은 군복처럼 번들거렸다. 숙박비는 누님이 계산했다. 그 말끝에 창수는 툴툴 털고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창수 너, 군복도 못 입어보았구나. 창수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 뿌린 것, 미안해. 속이 상해서.” “어떻게 된 거냐?” 그깟 물벼락쯤이야 하는 투로 창수는 딴 얘기를 했다. 민경희는 뭐고 문주란은 또 뭐야? 그게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어. 그때 쓴 이름 같아.” “룸에서? 너도?” “좀 걷자, 그냥.” 오래 전의 일이었다. 창수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걸어본 것은. 길이 끝날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었다. 기껏해야 여행용 가방만한 스무 살의 짐. 그것을 풀어놓을 공간조차 마련하지 못해 두 학기동안 허둥허둥 열차로 서울을 오르내리며, 나는 자주 울었다. 단 한 사람도 함께 걷지 못하는 서울의 길들이 낯설고 두려워서. 그러다 경희를 만났다. 옥탑방을 오르내리며 나는 또 울었다. 경희와 함께 걷는 길이 낯설고 두려워서. 이제 일 년 후면 서울로 뜬다. 그러나, 길도 익숙하지 않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사람이 누구인가 예측도 할 수 없는 스물여섯. 첫사랑을 추억하기엔 너무 이르고, 첫사랑을 갈망하기엔 좀 늦은 나이. “부탁이 있어.” “무슨?” “경희 도와 줄 수 있어?” 모텔 앙상블. 감나무만한 모텔 표지판을 올려다보면서 경희를 꺼냈다. “경희 좀 도와줘.” “경희를? 왜?” “갈 데가 없어. 여기저기서 흔들리다 쓰러질지 몰라.” “민경희, 걔는…… 안 돼. 근성은 좋은데 감정에 치우쳐.” “감정?” “이 바닥에서 감정 따위는 독이야. 감정이 앞서면 오래 못 버텨. 그리고, 걔는 너무 복잡해.” 옥탑방, 남자, 수술, 휠체어, 유두, 자퇴, 발렌타인17년, 문주란, 창수, 음성……. 경희라는 낱말만 입에 담아도 경희보다 앞서는 경희의 것들. 창수의 말대로 경희는 복잡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냉정하고 단순해야 돼. 나처럼.” 그러고 보면 창수는 T골목을 떠난 적이 없었다. T골목이 고향이고, 직장이고, 집이었다. 밥상이고, 화장실이고, 감나무고, 열차였다. 이제 갓 고등학교나 졸업했을까. 빨강 미니스커트가 인사불성이 다 된 중년 남자의 품에 안긴 채 파라오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경희 얘긴 그만 두고……, 결정했으면 떠나.” 두어 걸음 앞서 걷던 창수가 힘없이 말했다. “떠나. 떠날 거라면 빠를수록 좋아.” 얼음물을 덮어 쓴 것처럼 창수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단란주점 신세계 네온사인이 파르르 잦아들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준비? 돈이 부족해.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문득 궁금해져서, 빨강 미니스커트를 돌아볼 만큼의 침묵이 이어졌다. 보람파크 후문이 있는 주차장 입구에서 모자를 눌러 쓴 남녀가 나오려다 마주치면서 멈칫, 고개를 꺾었다. “수빈아, 돈 좀 만져볼래?” “무슨 뜻?” “골목을 뜬다고 했잖아. 뭉칫돈이 필요할거고.” “그래서? 그래서, 나보고…….” “뜰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일을 했으면 하고.” “제 정신이야?” 모자 쓴 남녀는 T골목이 처음인 게 분명했다. 이제 머지않아 저들도 골목이 익숙해질 것이고, 그러면 골목 풍경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텔을 드나들 것이다. 모자를 쓰지 않고도, 언제든 누구를 마주쳐도 얼굴을 피하지 않으면서. 뭐 문제 있어요? 그런 표정으로. “졸업도 해야 되잖아. 스물여섯이야, 스물여섯.” “괜찮아, 아직은.” “술마당보다 오히려 더 조용하고 편해. 눈 먼 돈도 깔렸고.” “됐어.” “테이블 뛰라는 게 아냐. 카운터에서 얼굴만 내놓고 있어. 어쩌다 고급 테이블에서 한두 번 웃어주기만 하면 되고. 너라면 그 정도 역할만으로도 충분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창수야, 나는 아니야. 언젠가는 무너지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너, 참 답답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눈 먼 돈 만지자는 데 뭘 무너진다고 그래?” “여긴 세상의 끄트머리야. 바닥이라고.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어.” “끄트머리? 야, 강수빈. 너, 꼭 딴 동네 사람 같이 말한다. 여기가 세상인 줄 몰라? 세상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닷없이 술마당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수빈. 넌 아직 멀었어. 빈혈 증세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너, 혹시 내 직업이 더럽다고 여기는 거 아니냐?”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이 골목이 싫을 뿐이야. 뜨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 네 말 대로 뜨겠다면 확실히 뜨란 말이야. 그러자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 “뜨려면 하루라도 빨리 떠. 아니면 눌러앉든지. 누구처럼 떠돌지 말고.” “노력하고 있어.” “뜨더라도 골목 사람들 무시하지 마라. 나처럼 물장사를 하든, 돼지뼈를 삶든, 가랑이를 벌리든, 코피 터지게 열심히 산다. 이 바닥에서 살다보면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같잖은 일인 줄 아니? 여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남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아. 남들 등쳐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든 돈푼이나 있다고 꼴값하는 눈 먼 놈들이든 서로서로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 창수, 너 깊어졌구나.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주던 네가 아니야. 창수의 장황한 말끝에 독백하듯 그렇게 지껄였나 싶었다. 시체처럼 늘어진 경희를 눕히고 뻣뻣한 나를 휘어지게 만드는, 한밤중에 벌어진 이 상황들이 낯설고 힘들었는지 창수가 보도블록에 주저앉았다. “어쨌든 떠나면, 내 몫까지 잘 해. 학교 포기하지 말고.” 창수는 담뱃불을 붙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어둠 속 허공에 야자수 두 그루가 매달려 있었다. 목표물이 사라졌는지 불화살은 날지 않았다. 내 몫까지……. 짧게 입술이 떨렸다. 어떤 비애 같은 게 덩어리로 굳어져 위벽을 두드리는 것처럼 속이 또 울렁거리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끌려가면서 창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칠 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모습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삼 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불심검문이었다. 여관 입구에서 마주쳤던 남자가 찌른 게 분명했다. 내가 죽을 게, 너라도 살아남아라. 허겁지겁 바지를 꿰면서 창수는 성폭행으로 입을 맞추자고 했다. 창수의 뜻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창수 역시 미성년자였지만,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소년 감호소에서 반년을 살았다. 쉬쉬하면서 나는 졸업했고, 달아나듯 서울로 진학했으며, 떠들썩하게 자퇴서를 낸 창수는 T골목 지하 깊숙이 파묻혔다. 그날 밤, 북부역 파출소로 불려나온 어머니는 창수의 멱살부터 잡았다. 이 나쁜 자식아. 니가 몇 살이나 처먹었다고, 이 미친놈아. 감나무집 근처에서 자란 창수를 친아들처럼 여겼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처럼 창수는 나쁜 자식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나를 여관으로 끌고 간 것은 창수였지만 몸을 연 것은 나였다. 나를 포함해 T골목의 아이들 대개가 그렇듯 창수는 모범생은 못되어도 미친놈은 아니었다. 그저 T골목에서 나고 자랐을 뿐. WORLD INN-旅館 명찰이 붙은 T골목을 드나들며 같은 또래들보다 몇 걸음 앞서서 어른들의 세상을 엿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일부가 된 지금, 나와 마찬가지로 지우기 힘든 기억이나 갚기 어려운 빚 하나씩을 심연에 가라앉힌 채 살아가는 중이었다. “저기…….” 툭툭 털고 일어서던 창수가 턱으로 길 건너 모텔을 가리켰다. 융프라우. 뾰족 지붕의 절반을 잘라 붙인 듯한 스위스 풍의 모텔이었다. 리모델링을 끝낸 건물 외벽을 뜯어내면 이화령이 나올 것이다. 칠 년 전, 그 곳이었다. “칼자국 남아있지?” “본 지 오래됐어.” 그날 방문을 열기 직전, 칼로 위협했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허벅지를 찔렀다. 방법도, 칼 솜씨도 서툴러 상처가 깊었다. 머뭇거리는 창수의 칼을 빼앗아 직접 찌른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 칼자국을 들여다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잊은 적은 없었다. 잊은 듯 외면하고 지냈을 뿐. 너, 참 독종이다. 출소하면서 창수가 했던 말이 맞는다면,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칼자국이 오늘,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는지 모른다. 골목을 드나들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 근처에서 시큰거리던 그 통증이. “경희 좀 도와줘.” 칼자국이 숨겨져 있을 허벅지 뒤를 가볍게 주무르며 나는 경희의 유두를 떠올렸다. 칼로 도려내고 싶어. 술에 취한 경희는 종종 배꼽 밑의 담뱃불 자국에 칼끝을 들이대곤 했다. 선명하진 않겠지만, 그곳에도 칼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리 잡게 해 줘." “생각해볼게.” “고마워.” “집까지 바래다줄까?” “괜찮아.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잖아.” 세 시 반. 어제 보다 두 시간이 늦었다. 실장실에 불려가 지각사유서를 쓰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창수가 T골목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휴대폰을 껐다. 등 뒤에서 언뜻 자전거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철길 위를 달리는 무쇠바퀴 소리 같기도 했다. 밤낮이 뒤바뀐 어머니의 불면증을 확고하게 다져놓은 그 쇳소리들. 청남파크 2층 유리창에서 반짝, 불이 켜졌다. 이 새벽에, 누가 목욕을 하는가. 한밤중에 몸을 씻다보면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이 세숫대야에 둥둥 떠다녔다. 수건을 내려놓으며 아하, 하고 감꽃에 놀라곤 했다. 내일 밤은 누가 또 감나무 아래에서 목욕을 할까. 피읖이 죽어버린 청남파크 네온사인을 올려다보는 사이, 어디선가 졸졸졸 물소리가 새나왔다. 서울까지 152㎞. 지금 당장 북부역으로 달려가 첫차를 타면, 물소리가 잊혀질 수 있을까. 골목 저쪽 가로등 밑에서 비둘기집 만한 간판이 희끗거렸다. 나는 조금씩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이강산 약력> o 1959년 충남 금산 출생 o 1989년 『실천문학』(시), 2007년『사람의 문학』(소설)으로 등단. o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물속의 발자국』 o 2005년 문화예술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o 2006년 문화예술진흥원 우수 도서 선정 : 시집 『물속의 발자국』 o 소설 「금반지」,「칼자국」,「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황금비늘」, 「즐거운 초상(初喪)」,「진주조개잡이」, 「그물」 발표 o 현재, <한국작가회의> , <대전작가회의> 회원  
174 그리움의 문장(文狀) / 권형하 file
편집자
2666 2011-12-31
 그리움의 문장(文狀) / 권형하 장석남 시인은 인천 덕적도 섬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6학년 때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자라나고 성장한 것을 생각해보면, 배를 미는 행위는 하나의 놀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는 미는 힘에 의해 바다로 밀려나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를 노래하고 있다.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위 시에서 <배>는 객관적상관물로 사랑했던 사람이나 그 사랑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배를 민다>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나타냄이다. 화자는 배를 미는 경험을 통해 이별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배를 민다>’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나타낸다. 화자는 배를 미는 경험을 통해 이별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으며, 화자가 배를 한껏 밀어주고는 허공으로부터 손을 거두는 그 순간을 사랑이 떠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배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통해서 이별한 후에 그리움과 사랑이 되살아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배를 민 후에 <떨어지는 손>은 이별의 순간을 나타냄이고, <허공으로부터 거둔다.>라는 시행은 배가 떠난 뒤 화자의 허탈한 감정표현이고,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는 이별로 인한 슬픔을 밀어내고 난 뒤 그리워하는 감정을 내포한다고 본다. 또 <온 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하게 배에서 멀어지는 손, 순간 환해진 손>을 사랑이라고 한다. 이것은 얼핏 산뜻한 이별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대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니 배를 힘껏 밀어보았지만 다시 내 안으로 미려오고야 마는 사랑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어지기 어려운 사랑으로 보인다. 그런가 보다. 세상 속에는 헤어지기 어려운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어린 시절 비온 뒤에 마당가에서 아이들과 진흙놀이를 많이 했다. 비 온 뒤라 땅도 손바닥과 손가락마다 찰지게 굳은, 이 진흙을 어개고 뭉쳐 단단해지면 온각 형상을 만들어 말리곤 했었다. 때로는 진흙 반죽이 묽어, 손에서 주루룩 흘러 내려 발아래 산처럼 쌓일 때가 있었다. 그때 맨 꼭대기에 뾰족한 부분에서 하늘로 치솟는 환상을 가졌거나, 혹은 그 뾰족한 흙 꼭대기 부분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환청과 함께, 내 손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매달려 붙어오는 환상을 느끼기도 했다. 또 달이 높다랗게 떠있다가 이른 새벽 서천으로 지는 모습을 통해서도 만남과 이별의 순환을 느끼곤 했다. 어쩌면 ‘배를 밀며’ 이 시도, 이별의 순간에서 눈물 뚝뚝 떨어뜨리는 황소의 눈빛과 같은, 가슴 속 짓뭉개져 쑥쑥 빠지는 진흙 구덩이 같은, 가슴 속으로 슬픔의 물이 줄줄 흐르는 기억을 나는 보았다. 이별 후에도 샘솟는 그리운 마음처럼.  
173 영화 <봄날은 간다> 평문 / 이종암 movie
이종암
3097 2011-12-03
소리로 건져올린 아스라한 사랑의 기억들 -영화<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수절은 황혼 속에 흘러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에 새가 날며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노래 <봄날은 간다>에서 8번 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눈 쌓인 소로를 한 청년이 할머니를 쫓아가는 장면으로 영화 <봄날은 간다>는 시작된다. 할머니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수색驛이 그곳이다. 수색(水色), 참 좋은 이름이다. 수색이라는 지명은 물빛이 출렁이듯 애틋한 사람사는 이야기, 그 낭만이 가득 서려있는 곳 같은 느낌으로 내게로 다가온다. 그곳에 가면 꺼져가던 사랑도 다시 타오를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있다. 왜 할머니는 매일 수색역에 가는가. 그곳 역 대합실에서 할머니는 끝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 전에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해주던 연인(남편)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죽고 없는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는 또 기다린다. 무작정으로 애절한 그 기다림으로. 영화<봄날은 간다>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중심 축으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 하나는 앞서 말한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 신혼 초 한 때 자신을 끝없이 사랑해주던 남편이 훗날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인의 품으로 떠나 가버린 가슴 아픈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는 자신을 뜨겁게 사랑해주던 청춘 시절의 남편만 애타게 찾고 그리워하며, 그 훗날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남편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부정해버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음향 채집가인 성우(유지태 분)와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 한은수(이영애 분)와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두 사람이 일 때문에 처음 만난 곳은 그럴싸한 시내 찻집도 방송국 스튜디오도 아닌 시외버스터미널이다. 돌아옴과 떠남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 버스정류장에서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이 공간 설정에서 작가와 감독은 그들의 사랑의 끝을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 속에는 '소리'가 가득 들어가 살고 있다. 영화 시작부분의 강원도 정선군 북면 어느 들판의 대밭 속에서의 파-아 파-아 거리는 대숲소리나 겨울 계곡물 흐르는 소리, 새벽 눈발에 울음우는 산사의 풍경 소리, 깊은 산골 노부부의 아라리 가락, 젊은 두 주인공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가 그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 제목도 옛날 애절하게 불려진 우리의 유행가 제목이다. 그것도 봄날은 '간다'라고 되어있다. 소리는 한 자리에 내려앉으면서도 떠나가 버리는, 사라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한 곳에 계속 머물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떠나버리는 소리들이 암시하는 바처럼 두 젊은 남녀의 사랑도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치 봄날이 가듯이. 두 남녀가 서로의 관계를 끝맺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 헤어지자"(은수-이영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상우-유지태) 이 짧은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을 찾아온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가슴에 붙들고 사는 이는 상우다. 매일 같이 수색역에 나가 오지 않는,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처럼. 자세히 보면 영화 <봄날은 간다>는 짝을 이루고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할머니와 손자의 애절한 사랑이 그렇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상대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고 묻는 손자 상우와 신혼 초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할머니 사랑이 한 쪽을 이룬다면, 사랑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헤어지자고 단숨에 말해버리는 은수 역은 할머니 곁을 훌쩍 떠나버린 할아버지와 짝을 이룬다. 그리고 작품의 주 무대인 상우의 삶의 공간(수색, 서쪽 내륙)과 은수의 삶의 공간(강릉, 동쪽 바닷가)도 대응되는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의 사랑이 막 시작되는 대숲과 사랑이라는 미망의 감정에 벗어나 상우가 새롭게 자신의 길을 나서는 끝장면의 누런 보리가 마구 출렁대는 공간도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한정된 짧은 시간 속에서도 영화의 탄탄한 구성을 갖추어 가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상우 역의 유지태 연기가 돋보였다. 사랑에 물들어갈 때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동작과 표정의 연기, 사랑을 잃어갈 때의 힘겨운 듯 애절한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에 비해 은수 역의 이영애 연기는 적잖이 실망적이었다. 밋밋한 표정 연기와 살뜰하지 않은 대사가 거슬렸다. 그러나 두 번째 다시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이 영화 속에서 이영애의 연기는 다른 어떤 그녀의 연기에 비해서 뒤지지 않는 훌륭한 연기였다. 극중에서 은수 역의 성격 그 자체가 밋밋하고 사랑의 감정에 지극히 매달리는 진진한 성격이 아닌 것이었다. 첫 사랑을 버리고 떠나간 할아버지처럼, 한 곳에 내려앉다 사라져버리는 소리들처럼. 그러면 이영애는 그런 성격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것이 된다. 영화의 종결부에 이르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상우는 허우적대던 옛사랑에 벗어나 제 길을 힘겹게 그리고 당당히 간다. 다시 쉽게 다가서려는 옛사랑의 연인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내가 사는 고장 포항시 대보면 구만리 바닷가 둔덕의 보리밭 풍경과 비슷해 몹시 인상적이었다. 보리누름철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보리물결 장면을 통해 감독은 말하고 있다. "봄날은 간다"라고. 한 시절 우리의 애절한 사랑이 가고 있다고. 첨언하고 싶은 것은 영상의 아름다움과 그 적확함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보여준, 수 많은 바람이 살러와 일렁이는 대밭의 소리들과 종결부의 파도치는 듯한 황금빛 보리물결,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겨울 산사의 풍경(風磬)의 울음 우는 장면,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까지 담고 있는 듯한 푸르스름한 새벽바다 빛깔 이 모두 빼어난 영상 미학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빼어난 영상미가 장면 장면의 내용에 아주 들어맞게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자주 정신을 잃는 부모 때문에 가슴 저려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사랑의 아픔에 힘겨워 하는 아들이 소주를 마시는 부엌의 식탁을 담아내고 있던 그 앵글이 보여준 영상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처음 영화를 보고나서 흘러간 옛 노래 <봄날은 간다>를 내 십팔번으로 갖게 된 것이고,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래의 시 하나를 건져 올렸다. 많이 어설프기는 하지만. 봄날은 간다 -영화 풍으로 소리를 따다가 고운 사람 만났네 사랑을 얻었네 겨울 산사의 풍경 소리도 다 내 것이었네 사랑은 잠시 내게 머물다 가버린다, 소리들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매달려도 보지만 소용이 없어 바람에 떠밀려 소리는 오고 다시 가는 것 봄날은 간다 그렇게 봄날이 간다  
172 그 많은 문청(文靑)은 어디로 갔는가?/신기훈 file
편집자
3776 2011-12-01
 그 많은 문청(文靑)은 어디로 갔는가? 신기훈 문학은 자연사하고 있는가. 확실히 영화, 컴퓨터, 테크놀러지, 저작권과 표절에 관한 법적 논쟁, 그리고 문학비평에 의해 문학은 예전의 위세를 잃고 있다. 앨빈 커넌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문학의 죽음은 타살인 동시에 자연사이다. 그는 저서 <문학의 죽음>에서 가족과 같이 오래되고 근본적인 제도마저 붕괴되는 마당에 ‘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형식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쇄 문화의 운명과 함께 문학은 분명 지금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건너고 있다. 문학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이면서, 예술의 영역으로 여겨짐으로써 자본의 논리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는 이중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올해도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서 전국의 예비등단자들이 목하 밤을 새우며 파지(破紙)와 싸우고 있으리라. 그런데 등단한 이후 젊은 작가들은 어디에 가버린 것일까? 작가회의 사무국장단 회의에 참석해 각 지회, 지부별 사정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젊은 작가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니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등단 연령 자체가 높아지다보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사실 문학의 외경심이 강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또 문학의 고전적 틀을 부정하는 신세대 작가들이 등장, 한국문학이 변화의 진통을 한차례 겪으리라던 예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문제는 등단 연령이 고령화되면서 문단전체의 침체를 가져 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오늘날 <문학판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외침이 유독 크게 들리는 것은 문학권 자체의 길항능력이 예상외로 약하다는 점이 확인되고, 문학 스스로가 비문학적 요소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악수하는 사례들이 어렵지 않게 목격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문화이건 그런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문단의 경우는 문단의 노령화로 인해 그 상태가 심각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등단 연령의 노령화는 치열한 작가의식을 방해하는 하나의 원인이다. 일단 문인의 이름을 얻게 되면 작가로서의 책임보다는 그 칭호가 주는 후광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에 쫒기고, 함량미달의 작품이라도 발표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하기 때문에 잡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잊을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표절­외설시비와 논리가 결여된 문학논쟁, 그리고 뚜렷한 수작은 나오지 않는 가운데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작품집들이 그 부작용의 실체들이다. 여기에다 수다한 문학상의 난립까지 합치면 <문단이 돗떼기 시장처럼 돼버렸다>는 비유가 제법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들 상서롭지 못한 현상에 대한 분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것의 확산을 막는 방도는 두세 갈래로 집약된다. 지금이라도 기존 문인들의 자기무장 강화와 등단절차의 엄격성 회복을 통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몸무게를 줄여야 한다. 현재 신인상제도를 엄격히 운영하고 있는 문예지는 전체 1백여종 중 10여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장르의 경우는 신인상 심사위원을 선정할 때 <인물난>을 겪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인맥과 정실이 워낙 심해 때묻지 않은 심사위원감이 흔치 않다는 얘기를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상업출판의 폐해는 보다 심각하다. 출판사의 제의에 의해서건 글쓴이의 요청에 의해서건 작품을 직접 출판,문단에 나오는 인구가 연간 5백~6백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절차가 생략된 이들의 작품은 대개의 경우 <함량미달>이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문단의 한귀퉁이에 슬그머니 편입되고, 문단이 별 저항감 없이 이들을 받아들이는데는 무엇보다 합리적 이성이 상실된 사회분위기가 문단에도 만연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를 두고 문단인사들은 <문단도 갈데까지 갔다>는 체념의 소리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서적 판매고와 문학 독자들의 격감 현상이 확연한 가운데서도 지금도 문학 지망생들은 크게 줄어들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이들 지망생들이 모두 순정한 열정과 굳센 결의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나마 문학 위기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푸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젊은 문학도들이 문단에 등장하고,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문학을 키치적 감수성과 여기로 여기는 중장년층이 쉽게 등단하기 위해 노력하고, 청년들은 극장으로만 몰려가서는 문학의 미래 뿐 아니라, 문화의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최악의 실업란을 겪고 있는 지금 문학은 현실과 무관한 공염불이요, 특정한 몇 명이 감당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부터 젊은 문학인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습작을 품평하는 문학동아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야 한다. 다음으로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지망이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데는 문학잡지들의 신인 발굴 및 발탁제도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문학잡지들의 신인 등단 제도는 비슷한 등단 장치인 신춘문예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신춘문예가 경박한 쇼같다는 비판을 떨치지 못한 데 반해 문학잡지 등단제는 지하수처럼 사회 밑바닥에 은은히 스며 있는 문학에의 열정을 땅위로 끌어올려 생산적으로 흐르게 하는 인공 수로로서 높이 평가된다. 신춘문예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장관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단순한 모양새의 물길(水路)이지만 문학의 샘을 살아있게 하는데에는 훨씬 요긴한 제도이자 장치일 것이다. , -신기훈(시인, 대구작가회의 사무국장)  
171 섬에서 하룻밤 외1편/김길녀 file
편집자
4892 2011-12-01
11.12월19호 시  섬에서 하룻밤 김길녀 사랑방 식당마당에 범부채 꽃 칠월을 활짝 열고 있다 또래의 여주인 화장기 없는 얼굴로 뭍에서 온 사람들에게 쟁반가득 바다를 담아낸다 땅끝자락 사람들 사이에서 떠돈다는 헌서방은 안 주고, 샛서방만 몰래 먹인다는 딱돔구이를 늙은 애인과 마주 앉아 먹는다 싱싱한 돔의 눈알 파먹는 입 안 가득 바닷물 울음 터뜨리는 울돌목의 창백한 파도소리, 일몰에 묻어 감겨온다 방금 전, 수족관에서 보았던 돔의 블루 빛깔 눈동자 거친 뼈 발라주는 그의 손등 위에서 물무늬로 어룽거린다 마당 귀퉁이 오래된 돌확에 뜬 하얀 수련 꽃망울 천천히 제 몸을 열며 술잔 속으로 스며드는 저녁 장맛비 흩날리는 낯선 섬마을에서 북해를 떠돌고 있을 빨강 오징어잡이 어선 향해 섬마을의 적요를 빗물에 섞어 띄운다 출렁이는 마음은 배를 따라 항해중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김길녀 장맛비 쏟아지는 바다를 지나 그가 온다 머리맡에 밝혀둔 인도산 장미 촛대의 검푸른 불꽃이 이제, 막 자정을 넘어 연옥으로 향하는 문지방을 넘으려고 마지막 의식을 치르고 있다 그 사이, 허공의 깃발처럼 펄럭이던 고요 속 바람의 출렁임이 흐릿하게 펄렁한 잠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오래된 침묵의 순간이 오른쪽 팔뚝을 부여잡고 순식간에 천장까지 키를 키워버린 포도나무 초록 넝쿨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동아줄을 감아 올린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숨소리가 들려 온다 비를 삼켜버린 별빛이 무겁다고 느껴져 물방울 무늬 버티칼을 빠르게 끌어 내린다 멈출 수 없는 지독한 손길의 축복과 저주가 가시덤불이 되어 잠의 나락속으로 그를 끌어 당긴다 꼼짝할 수 없는 온몸의 열기가 공중으로 손을 뻗치고 발바닥에선 지느러미가 돋기 시작한다 천천히 그를 안으면 심해에서 불어주는 피리소리가 들려 온다 초록을 빚어내던 따스한 손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약력 - 강원도 삼척 출생 -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 시집 ‘키 작은 나무의 변명’ ‘바다에게 의탁하다’ - 제 13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170 가을풍경/이한걸
편집자
3445 2011-12-01
11.12월 19호 수필 가을풍경 이한걸 2009년 10월 17일. 단풍철을 맞춰 마산에서 마침 아내가 올라왔기에 가을나들이 나섰다. 옆집 321호 여자도 동행하였다. 아내가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아내는 주문진을 오면 으레 운전을 하려든다. 운전기능을 유지하기위한 속셈이다. 옆집 여자는 혼자 뒷좌석에 앉았다. 내가 뒷좌석에 앉고 옆집 여자가 아내 옆에 앉아야 어울릴 것 같으나 그놈의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느라 내가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이미 앉아 버린 좌석을 바꿀 수 없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나들이라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준비가 없기에 더욱 즐거운 것인지 모르겠다. 오색약수터에서 약수를 받을 생각으로 물통만은 준비를 하였으나 그것마저 소용없다. 절정을 이룬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렸기 때문이다. 오색약수터에서 한계령 정상까지의 도로는 주차장이다. 가끔 빗방울을 뿌리는 굳은 날씨에 바람마저 드세다. 한계령에는 사람이 날려갈 것처럼 바람이 강하다. 대청봉에는 눈이 쌓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계절은 가을이나 날씨는 겨울이다. 보통 추위가 아니다. 날씨가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나들이에 들뜬 발길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한계령은 눈이 부실만큼 단풍이 곱다. 한계령의 절경을 실감하는 날이다. 구불구불 휘어진 도로를 메운 승용차와 관광버스는 움직일 줄 모른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연신 탄성을 지른다. 카메라에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이 추운 날씨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도 있다. 젊은 여자들은 희멀건 허벅지를 드러내고도 춥지 않은 모양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단풍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기에 여염이 없다. 정상에 위치한 한계령휴게소는 공간이 좁다. 식당은 빈자리가 없을 만큼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산채국밥은 너무 맵고 종업원은 불친절하다. 물을 부어가며 억지로라도 먹으려 했으나 도저히 먹을 수 없다. 음식이 맵다는 불평을 해도 종업원은 짜증만 낸다. 음식을 준비해오지 않은 우리가 잘못이다. 이처럼 복잡한 곳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일코스의 여행음식은 정성들여 직접 장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휴게소 뒷산을 올랐으나 바람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왔다.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다. 한계령의 절경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는 코스나 날씨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10월의 날씨가 이렇게 추운 것도 괴이한 일이다. 백담사를 향했다. 한계령은 올라가는 코스는 길고 가팔라도 넘어가는 코스는 완만하고 거리도 짧다. 한계령을 넘어서부터는 고지대라는 뜻이다. 대관령, 삽답령을 넘으면 내려가는 경사가 없는 고지대다. 이곳은 그곳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고지대다. 한계령을 넘어도 단풍은 절정이다. 백담사 입구인 인제군 용대리까지는 멀다. 굽이굽이 돌았다. 구 도로를 가다 새로 뚫리는 도로를 가다 몇 마을을 지나야했다. 백담사를 운행하는 버스정류소에 도착했을 때는 한숨이 절로 터진다. 백담사를 가기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의 줄이 끝없이 늘어섰다. 백담사를 강행할 것인가 포기하고 돌아설 것인가를 두고 망설인 끝에 늦더라도 강행하기로 하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설 수 없다는 것이다. 셔틀버스는 굽이굽이 좁은 골짜기를 달려서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우리는 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백담사를 떠나기 위한 관광객의 줄이 더욱 길었던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다리[수심교]를 건너 약 200m를 이어졌다. 백담사는 설악산대청봉에서 백 번째의 소[沼]가 있는 자리에 지어졌다하여 백담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있는 절이다. 백담사는 대한불교조계종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다. 자장의 유물로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의 하사품인 옥탑설담당부도, 연포당부도가 있는 백담사는 6·25때 불탄 것을 1957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얼이 숨 쉬는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불교계의 대덕[大德]이며 탁월한 불교운동가이기도 했던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군 서부면 용호리 한용준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이름이 유천, 자가 정옥, 건봉사의 만화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고 법명을 용운이라 한다. 만해는 법호이다. 한용운은 6세 때에 이미 신동으로 불리었고 14세에 결혼을 한다. 18세에 동학에 가담하여 1896년 창의대장 민종식의 막료가 되었으나 동학군의 패배로 좌절의 나날을 보내다 설악산 오세암을 찾는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05년 백담사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오가며 도를 깨쳤으며 님의 침묵과 불교유신론을 집필하는 등 백담사는 만해 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한국 현대시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은 만해를 한국 현대시사상 가장 빛나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한다. 백담사는 여느 사찰과 달리 깊고 깊은 산속이 아니라 앞이 확 트인 넓은 평지에 자리 잡았다. 백담사 앞 넓은 냇가에는 똬리를 틀듯 작은 돌로 탑을 쌓은 것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을 다녀간 관람객들이 소원성취를 위한 공덕의 표시일 것이다. 아내와 옆집여자도 공들여 돌을 쌓는다. 경내를 두루 관람하고 읽을 만한 책 한권을 구입하여 돌아섰다. 셔틀버스를 타려면 아무래도 2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우리는 셔틀버스를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백담사에서 셔틀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는 8Km,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면 걸어서도 충분히 갈 것이다. 우리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걸으려 했던 것은 무엇보다 가을의 정취에 흠씬 젖고 싶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백담계곡을 걸어볼 것인가? 남도의 끝에 사는 우리부부가 백담사를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아내와 옆집여자도 쉽게 동의 한다. 수심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수정처럼 맑다. 징검다리였던 이곳에 수심교가 놓이게 된 것은 1989년 11월부터 전두환 전직대통령이 이곳에 2년간 피신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솔길을 넓혀 신작로를 만들고 수심교를 놓았던 것이다. 그 일로 만해사상의 성지인 백담사가 독재자의 피난처라는 오명으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형형색색으로 절정을 이룬 단풍과 눈이 시리게 맑은 물에 오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바람이 불때마다 나풀거리며 나뭇잎이 떨어지고 다람쥐는 재빠르게 바위를 기어오른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우리는 소년소녀들처럼 재잘거렸다. 하늘이 손바닥으로 다 가려지는 협곡이다. 나룻배와 행인의 시심이 되었음직한 빼어난 운치다. 물에 첨벙 뛰어들어 물고기가 되고 싶고 한 마리 새가 되고 싶다. 백담계곡, 천상의 세계를 산보하는 기분으로 한 시간 이십분을 걸었다.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가을정취를 만끽 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극장의 막이 내리듯 어둠이 깔린다. 약력 1950년 강릉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4년 근로자문학상[시]수상 1998년 경남신문신춘문예[수필]당선 한국작가회의 및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1동 105-13 101호 전화:010-8524-0507 055-295-0507 메일:l-rorxh@hanmail.net  
169 백구의 귀환/박래녀 file [1]
편집자
4904 2011-12-01
11.12월19호 소설  백구의 귀환 마루에 걸터앉았다. 가운데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고 삽짝을 바라봤다. 텅 빈 개집이 을씨년스럽다. 개 집 앞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백구의 밥통 또한 찌부러진 채로 놓여있다. 백구는 늘 제 집 지붕에 올라가 놀기를 즐겼다. 아무리 못 올라가게 해도 지붕 위에 오뚝 올라앉는다. 백구가 지붕에서 내려올 때는 딱 정해져 있다. 똥오줌 눌 때, 밥 먹을 때, 비 올 때, 그때는 하는 수 없이 땅 바닥을 밟지만 볼일 끝내면 서둘러 제 자리에 가서 엎드린다. 축 늘어진 소나무가지 아래라 그늘이 좋아서 그런지. 서산으로 지는 햇살이 비추는 역광이 좋아서 그런지. 백구야! 나는 텅 빈 개집을 향해 개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컹 컹 컹........ 어디선가 백구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봤다. 그때, 삽짝 모롱이를 돌아 티 하나 없이 하얀 백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꼬리를 깃대처럼 하늘로 치켜세우고 신이 나서 달려왔다. 백구야, 네가 왔구나. 나는 덥석 백구의 목을 끌어안았다. 까만 코에 입을 맞추고 두 귀를 잡아 당겼다. ‘욘석, 요 이쁜 놈’하면서. 백구는 두 발로 턱 버티고 서서 그 길고 탐스러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긴 혀를 빼내 내 얼굴을 핥으며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근데 어떻게 온 거야? 너 갔잖아. 개장수가 너를 키우기로 한 거야? 그래, 맞아. 널 종자 견으로 키우기로 했구나. 너의 어미가 족보가 있으니 너도 순종에 가깝지. 그나저나 어떻게 우리 집을 찾아왔지? 아하, 진돗개는 원래 영리하지. 7백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간 녀석도 있으니 등 하나 넘어서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잘 왔다. 그나저나 개장수 아저씨한테 연락은 해 놔야겠네. 너 여기 와 있다고. 잘못하다간 또 개 도둑으로 몰릴까봐 겁난다. 이웃 간에 믿고 살 수 없다는 게 더 무섭지만. 연락 할 필요 없어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백구가 말을 했다. 사람처럼 말을 했다. 나는 백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가 말했어? 그럼요. 주인님 수다는 여전하네요. 주인님 보고 싶어 잠깐 인사차 들렸어요. 무슨 소리야? 주인님도 참, 알잖아요. 나 죽었다는 거. 개장수에게 끌려가자마자 캑 했는걸요. 나처럼 사나운 개는 키울 수 없다고. 그러니까 나는 죽었죠. 개도 죽으면 혼이 저승에 가거든요. 명부전에 갔더니 저승사자가 그러데요. ‘넌 아직 때가 안 됐는데 왜 왔어.’라고요. 그래서 이러저러해서 오게 됐다고 이실직고 했지요. 그랬더니 너무 억울하게 죽었다고 기다려 보래요.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일단 내 업이 어떻게 나와 있는지 챙겨보고 부를 테니. 잠깐 집에 다녀오라더군요. 그래서 왔어요. 그러게 왜 남의 집에 가서 사람을 물었냐. 멧돼지 잡으러 갔으면 멧돼지나 잡든지, 멧돼지 아니면 고라니나 너구리라도 잡아야지. 너구리도 못 잡으면 토끼라도 잡아야지 사람을 왜 잡나? 네 눈에 그 여자가 예쁜 암캐로 보이던? 아니요. 냄새나는 그런 회색 털 가진 암캐는 날 좋다고 쫓아와도 뒷발질로 걷어차 버리고 말지요. 그런 암캐는 누린내가 나서 교미도 못한다고요. 굴비처럼 엮어 줘도 싫다고요. 그런데 왜 물었어? 내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물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평소 내가 그렇게 폭력적인가요? 순하고 조용했잖아요. 말귀 잘 알아듣는다고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사실 내 잘못도 있어요. 그 집에 있는 멍청한 놈하고 친하고 싶었거든요. 같은 수캐끼리 한 판 붙어보면 금세 정이 들잖아요. 원래 사람도 그렇잖아요. 이성간이면 은근슬쩍 호기심부터 보이고 접근하는데. 남자들끼리는 한 판 붙어봐야 그 사람 속내도 알고, 더 친해질 수 있다 하잖아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 개들도 마찬가지지만 사람과 다른 점이 딱 한 가지 있어요. 강자가 주권을 잡는 건 사람이나 개나 마찬가지죠. 사람이 더 약아빠지긴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인간은 권모술수의 귀재 같아요. 눈도 깜짝 않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치들이거든요. 보세요. 우리는 아주 신사적이에요. 한판 붙어보고 상대방이 나보다 세다 싶으면 그 즉시 항복해요. 그리곤 끝까지 복종하죠. 힘이 길러지면 다시 붙자고 덤비지만 뒤로 호박씨 까지는 않아요. 정직하죠. 인간은 우리처럼 완벽하게 패배를 선언할 줄 몰라요. 앞에서는 성인인 척 온갖 내숭 다 떨면서 뒤로는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인간 아닌가요. 얘가 진짜,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네. 주인 앞에서 너무 난체 하다가는 턱주가리 깨진다. 조심해. 그렇지만 내가 좀 부끄럽네. 나도 인간이니 말이야. 그래도 사람은 물지 말아야지. 죽을 짓을 왜 사서 했어? 그 여자는 가만히 있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네가 튀어나와 물었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인간은 거짓말쟁이죠. 주인님도 그 말을 전적으로 믿어요? 그렇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니야, 난 네가 그렇게 무모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뭔가 있었을 거야. 그래요. 그녀를 물지 않으면 내가 죽을 판이었죠. 사실 처음엔 맞기만 했어요. 그 놈 애목을 물고 늘어졌으니 몽둥이세례를 피할 수가 없었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 놈을 확실하게 굴복시키는 건데. 에이, 그 집 식구들 진짜 무지막지해요. 벌 떼처럼 일어나 몽둥이 하나 씩 들고 와서 두들겨 패잖아요. 개 패듯 팬다는 말의 진의를 알았다니까요. 인정사정없이 강타를 하는 겁니다. 주인님이 성질났을 때 북을 갖다 놓고 패 듯이요.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것 있죠. 얄미운 놈은 그 멍청이죠. 제 편이 응원을 하자 그 놈은 더 애처롭게 나 죽겠다고 깽깽거리더군요. 하지만 그건 항복이죠. 그 놈의 항복을 받고 애목을 놓긴 했는데. 나를 향한 몽둥이는 그치지를 않잖아요. 열 받았죠. 달려들었죠.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요? 개란 짐승은 원래 간이 작으면 콩콩 짖으며 꼬리 감추고 도망치고요. 간이 크면 불의를 그냥 참지 못해요. 이래 뵈도 나 간덩이 부었잖아요.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인간을 보고 도망가는 비겁쟁이는 되기 싫었거든요. 쥐도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족보 있는 진돗개가 사람 무서워 도망친다면 진돗개 가문에 먹칠 하는 거죠. 그래, 자알 했다. 참 자알 했다. 차라리 꼬리 감추고 도망쳤으면 목숨 부지는 했잖아. 목숨만 부지해? 이웃 간에 척은 안 졌을 거 아냐. 너 때문에 클 났어. 내가 형사고발 당했잖아. 벌금 물고 치료비에 정신적 물질적 피해보상까지 다 해 줬어. 미안해요. 나도 이 성질머리 때문에 명대로 못 살았잖아요. 알긴 아네. 그나저나 진짜 너 몽둥이찜질 당했어? 다음날 아침에 응치를 못 쓰는 걸 보니 식겁을 하긴 한 것 같았지만 증거가 있어야지. 사람이 당체 너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그게 문제지. 주인님은 아시잖아요. 평소 내가 어땠는지. 또한 내 숨어 있는 꼴을 보셨잖아요. 콘테이너 구석에 콕 처박혀 있는 꼴을요.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렇게 꾀죄죄한 모습으로 처박혀 있어야 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데. 평소 내가 까분다고 주인님이 몽둥이를 든 날 있지요. 날 길들이겠다고 설치다가 결국 주인님도 손발 싹 들었잖아요. 내 집으로 몸은 숨겼지만 이빨 드러내고 달려들 태세는 멈추지 않아 주인님의 분노를 산 적이 한 두 번인가요. 이제야 말이지만 미안해요. 그래도 주인님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알아듣고 따랐잖아요. 그냥 도망쳐서 집으로 올 것이지. 나 참, 자존심 상해서 도망 안 쳤어요. 결국엔 비참한 꼴을 보이고 말았지만. 자존심 있는 놈이 그 모양이야? 나 같으면 적당히 도망치겠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니?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만 너는 개잖아. 개는 개답게 행동해야지. 영리하다 예쁘다 치켜세워줬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사람을 물어. 죽어도 싸다 싸. 그럼 때리는데 안 달려들고 배겨요. 열나 죽겠는데. 사람도 몽둥이 세 대 맞고 울 안 뛰어넘을 놈 없다 하잖아요. 사실 울 안 뛰어넘다 그 지경이 됐지만. 내 몸에 멍 자국 보셨어요? 보여야 말이지. 응치를 못 쓰고 절뚝거리는 꼴은 봤지만 누가 그러데 동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엑스레이 찍어보라고. 몽둥이에 맞은 흔적이 나올 거라고. 그 쪽에서 형사고발 했으면 우리 보고 동물 학대 죄로 맞고소 하라고 하던 걸.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면 우리 속담에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했거든.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쩌겠어. 그 집 간 너 잘못이고, 너의 잘못은 바로 주인인 내 잘못이니까. 너를 잘못 건사해서 생긴 일이니까 내가 책임 져야지. 다만 미루어 짐작하지. 그 여자가 몽둥이를 안 들었다면 영리한 네가 그 여자에게 달려들 리 만무할 것이라는 것은 알아. 넌 원래 몽둥이만 들만 열 받잖아. 기억 나? 앞 집 순애 말이야. 네가 팔을 물었었잖아. 순애는 네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너는 순애를 왜 그렇게 싫어했지? 순애, 알아요. 나를 끔찍이 괴롭혔잖아요. 주인님 있을 때는 그냥 예쁘다고 귀엽다고 쓰다듬는데. 주인님만 나가고 없으면 긴 막대기 들고 와서 쿡쿡 찔러요. 내가 피하면 피한다고 따라다니며 괴롭혔어요. 아주 끈질기게 쫓아다녔지요. 예쁘다는 것이 귀 잡고 끌어당기기, 회초리로 때리기, 막대로 찌르기, 놀부 심보는 저리 가라였어요. 참았죠. 내가 강아지 때부터 들락날락했으니까 이웃사촌이란 것 아니까 참았지요. 그랬었어? 그런데 그 날은 왜 물었어? 참는 김에 더 꾹 참지. 사실 순애가 자기 잘못이라고 미안해했지만. 순애는 너를 무지무지 좋아했어. 알지? 너를 안고 싶어 했지만 네가 곁을 주지 않았지. 으르렁거리니까 무서워서 막대기를 들고 접근했던 거야. 사람은 가끔 그렇게 자기 생각과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있거든. 상대방을 좋아하면서도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 말이야. 괴롭힘 당하는 사람은 진짜 괴롭지. 그런데도 상대방은 그 심정을 모른다는 거지. 스스로 당해보지 않고서는 말이야. 너에겐 막대기가 고문기계였는데 순애가 몰랐던 거지. 그래요. 순애가 막대기를 들고 내게 와 집적거리면 어디든 도망가서 숨어 있곤 했지요. 그런데 그 날은 진짜 열 받았잖아요. 주인님 때문에요. 알죠? 나는 구속을 무지 싫어하는데. 주인님이 날 구속했잖아요. 그랬지. 네가 세상에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이었든가. 목사리도 없이 키우던 너를 처음으로 목에 목사리를 채우고 고삐를 걸었었지. 그것도 너 잘못이야. 왜 자꾸 순애네 집에 가느냐 말이지. 순애를 싫어했다면 그 집에 얼씬도 말아야지. 틈만 나면 그 집에 가서 볼일 보고 복실이 밥을 훔쳐 먹었잖아. 그러니 순애한테 미운 털 박힌 거지. 복실이, 참 예쁜 소녀였는데. 나도 남잔데 처녀 찾아가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더구나 사춘기였는데. 첫눈에 뽕 갔는데 어떻게 집에 가만히 있어요? 내가 불귄가 뭐. 주체할 수 없이 불끈불끈 솟는 거시기 때문에 환장할 노릇이었는데. 주인님도 아시잖아요. 사랑과 욕망을. 그때 복실이가 달거리를 했어요. 저도 남잔데 복실이가 좋을 수밖에요. 그랬어? 어쨌든 순애 어머니가 너 오는 걸 아주 달가워하지 않았어. 나보고 개 단속 좀 해 달라고 마주칠 때마다 싫은 소리 했거든. 복실이 밥 다 빼앗아 먹고 복실이 집에 들어가 늘어지게 잔다고. 순애는 저거 복실이 괴롭힌다고 막대기 들고 쫓았고.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그날 너를 묶었어. 천방지축으로 집 안팎을 휘젓고 다니던 놈이 말뚝에 묶이자 죽는 시늉을 하더군. 하필이면 그날 순애가 왔던 거야. 네가 묶여 있으니 안 됐던 거야. 그러니까 사람이 어리석지요.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니 나보다 더 바보지요. 내가 화가 나 있는데도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서 ‘야, 백구! 너 쌤통이다. 우리 복실이 괴롭힌 벌이다.’ 이러면서 약 올리잖아요. 성질나서 확 달려들었는데 하필이면 그 애 팔뚝이잖아요. 그래도 사정 봐서 살짝 물었다 놓고 싶었는데. 그 애가 죽는 시늉을 하잖아요. 나도 모르게 입을 꽉 다물었어요. 엄청 재수 없는 날이었지요. 그렇다고 주인님은 나를 그렇게 패요? 개 패듯 팼으니 할 말은 없지만 쩝.......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알긴 아네. 그때 너를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팔아버릴 수가 없었어. 그 놈의 정이 뭔지. 정을 못 떼겠더라고. 또한 순애가 너를 용서해 달라고 하더군. 너를 개장수에게 팔아버리겠다고 하니까 순애가 그러데. 자기 잘못이라고, 백구는 잘 못 한 것 없다고. 다시는 그런 장난 안치겠다고. 순애가 너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널 버릴 수 있었겠어.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알아요. 지금도 잘 알고 있어요. 가슴 아파 한다는 것도요. 아는 놈이 또 그랬어? 사실 순애는 그 여자의 상처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상처가 컸었지. 이빨 두 개가 푹 들어간 상처자국에 순애 팔을 억지로 빼면서 쭉 찢어진 자국에 얼마나 경악했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끔찍해. 미안해요 주인님, 그때도 저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요? 그래, 지금도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 순애 부모가 순애 잘못이라고 치료비조차 안 받았거든. 대신 한약 한 제 지어줬지만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 지금도 순애 걔 팔뚝에는 네가 남긴 흉터가 있을 거야. 워낙 상처가 깊었으니 다 아물 때까지 고생 많이 했어. 너의 이빨에는 균이 득실득실 하잖아. 그래서 잘 안 낫지. 그 뒤로는 순애가 너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줄에 묶여 있는 너를 참 안쓰러워했지. 뼈다귀라도 나오면 가지고 와서 던져주곤 했지. 얼마 전부터 순애가 집에 없는 것 같던데 어디 갔어요? 순애 엄마가 그러는데 도시로 유학 보냈대. 아하, 그래서 잘 안 보였구나. 사실 그 사건 때문에 저는 주인님께 자유를 반납했잖아요. 주인님이 한 번 사람을 문 개는 또 문다고 그 후로는 절대로 목사리를 안 풀어주셨잖아요. 참 서러웠어요. 말뚝에 묶여 쇠줄을 질질 끌며 견딘다는 것은 체념 아니면 달관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일이죠. 저처럼 자유를 아는 녀석에겐 말이죠. 묶여 있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랍니다. 그랬니? 그랬을 거야. 이번에도 목사리가 낡은 줄 알았으면 갈아줬을 텐데. 늘 말뚝에 매어 있으니 신경을 안 쓴 거지. 아니, 네가 순해서 날뛰지를 않으니 몰랐던 거지. 내 잘못이다. 히잉! 그러니까 주인님 잘못도 인정하는 거지요? 줄이 낡았으면 새 걸로 바꾸어 주든지, 목사리가 너덜너덜하면 새 목사리로 바꾸어주던지 했으면 내가 줄을 끊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좀 억울하네. 일찌감치 힘 한 번 써 봤으면 더 일찍 자유를 찾았을 텐데. 바보처럼 묶였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복실이는 잘 있지요? 그래, 꼭 너 닮은 강아지를 쏙쏙 뽑아났다. 씨라도 남겨 놓고 가서 고맙다. 순애 어머니가 그러데 어떻게 신방을 차렸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너나 복실이나 둘 다 묶여 있었는데. 어떻게 강아지들이 하나같이 너를 쏙 빼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강아지가 날 닮았어요? 아이 좋아라. 아무리 생각해도 백구 너의 씨는 아닌 것 같아. 너를 닮은 떠내기 수캐가 복실이를 탐하고 간 건 아닐까? 주인님, 이건 진짜 비밀인데. 비밀! 무슨 비밀인데? 그 애들 내 새끼 맞아요. 순애가 오작교를 놓아주었어요. 복실이가 달거리를 하자 밤이면 아무도 몰래 순애가 복실이를 풀어줬어요. 그랬구나. 참 고마운 아이네. 그나저나 내 강생이 보고 싶네요. 살짝 가서 우리 강생이 봐야겠네. 백구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울지 마라. 다음 생에 더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면 되니까. 다음 생에 그 여자 집에 가서 강아지로 태어날까요? 아직 어리지만 미인이 자라고 있던데. 이름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남자깨나 후리게 생긴 암컷이었어요. 그 여자 네도 강아지가 있었니? 네, 그 강아지 때문에 그 놈과 대판 쌈이 난 거지요. 내가 강아지한테 예쁘다고 장난을 쳤거든요. 사실 장난이 지나치긴 했어요. 애목을 물고 쩔쩔 흔들다 놓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을 뒷다리를 물고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으니. 순애처럼 굴었구나. 그랬지요. 강아지가 싫어하는데도 내가 자꾸 괴롭히니까. 강아지가 그 놈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숨잖아요. 처음에 나는 살살 꼬리를 흔들며 다가갔어요. 친구 하자고. 강아지랑 놀고 싶다고. 그런데 그 놈이 막무가내로 이빨을 드러내잖아요. 주인님도 알다시피 우리 개들은 이성 간에는 안 싸우잖아요. 그렇지만 동성 간에는 무조건 한 판 붙고 봐야 직성이 풀리죠. 서열이 정해져야 하니까. 상대방이 처음부터 납작 엎드리면 봐 주지만. 어쨌든 서열이 정해지면 그 때부터는 싸울 일이 없죠. 강한 놈 앞에서 약한 놈은 알아서 기니까요. 그 여자네 수놈하고도 한판 붙고 친구 하고 싶었는데. 그 집 식구들이 마치 나를 중죄인 취급하잖아요.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는 거지? 그럼요. 이러다 맞아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들데요. 그래도 그 놈 애목을 꽉 물고 쩔쩔 흔들었어요. 그 놈이 나 좀 살려줘요. 나 죽어요. 하면서 깨갱깨갱 할수록 내 등짝을 후려치는 몽둥이는 더 독해졌어요. 참다 참다 그만 그 놈 애목을 놓고 나에게 몰매를 가하던 그 치들에게 달려들었죠. 내가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고 달려들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가는데 한 여자가 휘청 넘어지잖아요. 너는 이제 내 밥이야. 사정없이 달려들어 물었죠. 이빨에 힘을 꽉 주려는 찰라 왜 주인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힘이 쭉 빠져 물었던 팔을 놨어요. 여자는 팔로 얼굴을 감싸면서 저 개가 날 물었어. 저 개가......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깊이 물었을 텐데. 그랬다간 우리 집 거덜 나게 됐을 거야. 더구나 너까지 잃고. 이게 뭐니. 이제 너는 어떻게 이 빚 다 갚을래? 진짜 너는 나에게 배신 때린 거야. 얼마나 아꼈는데. 늘 묶어 놔야 하는 것이 미안했는데. 난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거든. 예전에 우리는 참 자유로웠잖아. 이곳에 우리만 살 때는 거치적거릴 것이 없어 좋았는데. 이웃이 생기면서 문제가 자꾸 커지데. 그래요. 순애 네 집이 들어서고, 그 여자 네 집이 들어섰지요. 덕분에 나는 자유를 박탈 당했고요. 그 여자는 이웃 간에 살면서 내 이빨 자국 하나 때문에 주인님을 형사고발까지 했잖아요. 사실 그 놈은 자주 우리 집 와서 똥 싸고, 내 앞에 알짱거리다 가곤 했는데. 어디 그 놈 뿐이게요. 그 앞에 에스키모에서 썰매 끌다 온 놈도 있었고, 검둥이도 있었고요. 누렁이도 있었지요. 나처럼 하얀 암캐도 있었죠. 그 암캐는 제법 엉덩이가 암팡져서 돼지 뼈다귀 묻어 놨다 파 주곤 했는데. 어느 날 보니 없데요. 복날 잔치 했는지. 복날 개 패듯 패 버렸는지. 얘가 말하는 것 좀 봐라. 참나, 너도 복날 개 패듯 했어야 정신 차렸을까. 아니요. 복날 개 패듯 팼으면 나 가출했을 걸요. 가출? 가출했으면 너만 서러웠겠지. 집 나간 놈치고 행복한 놈 못 봤다. 올가미에 걸려 개장국 그릇에 빠지기 십상이지. 그건 그래요. 사실 그 여자네 에스키모개는 참 얄미웠지요? 그랬지. 마당에 똥 싸 놓고 너의 밥통에 남은 밥 다 먹어버리곤 했지. 몽둥이로 쫓아버리려다가 너랑 친한 것 같아 봐 줬었지. 개 좀 풀어 놓지 말라고 그 여자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도 이웃 간에 그럴 수가 없어서 참았었지. 사실 그 여자네 이사 오기 전까지, 순애를 물기 전까지 나도 너를 풀어 키웠으니까. 그 때가 그립지? 네, 목사리 없이 온 산을 내 구역으로 삼고 뛰어다닐 때가 좋았어요. 처음 목사리 하고 쇠줄에 매었을 때는 진짜 죽겠더라고요. 자유의지를 꺾어버린 주인님이 미웠지요. 며칠을 생난리 쳤지만 주인님이 내 목을 쓰다듬으며 그랬지요. 미안하다. 널 풀어놓고 키우면 안 된단다. 경찰의 단속에 걸리면 벌금 물어야 돼. 힘들어도 참아, 참다보면 익숙해져. 그래서 참았지요. 참고 견디니까 익숙해지데요. 처음부터 묶여 길든 것처럼. 그 말은 아니다. 너는 사고를 쳤잖아. 줄 끊어진 줄 몰랐어요. 멧돼지가 못 둑에서 어슬렁거리며 약을 올리잖아요. 목을 길게 빼고 이빨을 드러냈는데 슬슬 앞으로 나가잖아요. 못 둑을 향해 뛰어가는데 내 목을 조이던 줄이 없는 겁니다. 신났죠. 멧돼지는 줄행랑을 놓았고, 나는 그 놈을 따라 뛰었어요. 그게 단데. 멧돼지는 나보다 날랬어요. 묶여 살던 내가 다리에 힘이 있겠어요. 멧돼지 놓치고 분한 마음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글쎄 그 여자 집 그 놈이 냄새를 맡고 컹컹 짓잖아요. 그래서 찾아갔더니 예쁜 강아지가 알랑방귀를 뀌잖아요. 덥석 물고 장난질을 쳤죠. 그래서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거잖아요. 알아. 아무리 그래도 이웃 간에 형사고발이라니 너무 했다. 우리만 살 때와 이웃이 생겼을 때의 차이점이지. 이웃 간에 민폐는 끼치지 않아야 하거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게 중요한 거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이웃을 잘 만나면 평생이 편하고, 이웃을 잘 못 만나면 평생이 불행하다고. 이웃사촌이란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 거야. 근데 그 여자도 이웃사촌 맞나요? 글쎄, 이젠 너 때문에 척을 졌으니 이웃을 잘못 만나 평생이 불행해질지 모르겠군. 솔직히 그 여자는 이웃이지만 너나들이 하긴 어렵지. 촌사람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그런 사람 아닐까. 도시에서 왔다고 아는 척 하고, 잘난 척, 있는 척하면서 돈독 올라 순박한 촌사람 등쳐먹으려는 족속들, 솔직히 나도 그런 사람은 무섭다. 그렇다고 평생 안 보고 살 수도 없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척을 진다는 것은 서로 불행한 거야. 사람이 살아보면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어. 지금은 내가 가해자가 됐지만 다음에는 내가 피해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사람은 말이야.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앙심을 품게 돼. 그 앙심이 화를 부르지.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란 게 있단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기운이 모이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기운이 모인다는구나. 앙심이라. 무섭네요. 사람은 원래 그런 동물인가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선한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는 수도 있지만 용서하기란 쉽지 않아. 그런 점에서 우리 개들은 참 순진하고 착해요. 한 사람을 좋아하면 아낌없이 주잖아요. 믿고 따르잖아요. 주인을 배반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착하지 않아요. 착한 척 할 뿐이지. 욕심덩어리죠. 언제나 자기 욕심 먼저 챙겨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요. 너의 말이 맞을지 몰라. 그래도 모두 그 여자처럼은 아니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줄 아는 사람도 있고,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도 많아.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것도 남을 위해 기꺼이 내 놓는 보살 같은 사람도 많아. 그러니까 세상은 공평한 거야. 알게 모르게 선행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런 사람 덕에 살아지는 세상이 아닐까. 이 세상에 악한 사람만 있어 봐. 세상이 어찌 되겠어. 지옥이 따로 없을 걸. 혹 알아. 그 여자도 우리와 척을 져서 그렇지 잘 지냈으면 참 좋은 이웃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 말도 일리는 있네요. 그럼 주인님도 그 여자와 그 집 식구에게 앙심 품은 것 버리세요. 그 업은 내가 다 가지고 갈게요. 어차피 난 죽은 목숨이니 나 때문에 이웃 간에 척 지지는 말라는 말이지요. 그 여자와 나는 전생에 악연이었나 봐요. 내가 그 여자고, 그 여자가 개였던가 봐요. 그 여자가 나를 물어서 내가 죽었나 봐요. 그러니까 이승에서 바꾸어 태어난 거죠. 그럼 다음 생에는 또 네가 그 여자로 태어날지 모르겠네. 그렇게 태어나지 않도록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지요. 윤회를 하려면 십년이란 기한이 있다니까. 그 십년을 절에 가서 살까 해요. 육신은 없어졌지만 영혼은 남아 있으니 지장보살님께 빌어야지요. 다음 생에는 제발 이 악연의 고리를 끊어달라고. 네가 불심이구나. 널 구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부디 다음 생에는 부처의 제자로 환생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승려가 되어라. 이제 마음 편하게 떠나렴. 내가 천도제 지내줄게. 그 여자 일은 마음 쓰지 마. 잘 해결됐으니까. 해결 됐어요. 어떻게? 며칠 전 검찰청에서 호출 명령서가 왔더라. 심문하기 전에 당사자 불러 조정하는 게 있다하데. 난 잘 모르는데 형사고발이 들어가면 조정위원횐가 뭔가 있나 봐. 다녀왔지. 여자가 병원에 다닌 영수증과 약 사 바른 영수증을 챙겨 왔더라. 얼마가 필요 하느냐. 많이 받을 생각 없다. 든 것만큼 달라며 조정위원회 위원들 앞에 영수증을 내 놓더군. 정신적 물리적 피해 보상까지 합쳐 오십만 원에 합의 봤다. 네에? 그렇게 많이요? 응급실에 갔을 때도 백신 맞고 응급처치 한 금액이 만원 조금 넘었다고 했잖아요. 어느 병원인지 가서 진짜 치료 했는지 영수증 확인하지 그랬어요? 그랬다간 또 법정 투쟁 벌이게? 말 되는 소릴 해라. 좋은 게 좋은 거란 거 모르니. 이웃 간에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닌데. 오십만 원 던져 주고 깨끗이 잊는 게 낫지. 그 사람들에 대해 통 모르는데. 또 어떤 곤혹스러운 일을 당할까 무섭다. 휴, 이제 말하기도 되다. 그만 가거라. 여기 걱정은 말고 다음에 사람으로 환생하면 우리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 네, 주인님도 건강하세요. 저를 위해 부처님께 많이 빌어주세요.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좋은 일 많이 하며 살고 싶어요. 백구는 컹! 하고 크게 한 번 짖고 희미하게 작아지더니 한 점 검은 점으로 사라졌다. “아이가 잘 한다. 자려면 방에 들어가 자야지 마루에 앉아서 졸고 있어?” 눈을 번쩍 떴더니 순애 어머니가 왕감 홍시 하나를 내 손에 놓는다. “우리 백구가 홍시라면 사족을 못 썼는데” 나는 왕감 홍시를 들고 삽짝 옆에 있는 텅 빈 개집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168 금단의 열매는 언제나 더 매혹적인 법 외1편/김종인 file
편집자
3655 2011-12-01
11.12월19호 시 금단의 열매는 언제나 더 매혹적인 법 김종인 차라리, 사랑이나 이별이나 슬픔을 끊어라. 때로는 소화가 안 되고 가스가 찰 수 있으니 고지방에 카페인 많은 것을 피하며 섬유소 많은 것을 먹고 가벼운 운동을 하라 아니면, 절대 끊지 말고 더욱 사랑하라 불안, 초조, 욕구 불만, 노여움의 증상은 자율신경계의 부조화로 인해 생기는 것이니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거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면을 생각하라 아니면, 절대 끊지 말고 더불어 즐겨라 네 사람 중 한 명은 두통이 나타난다 혈액 순환 속도가 원활해지고 산소가 정상으로 공급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니 커피는 줄이고 물을 많이 마셔라 아니면, 차라리 옛사랑에게 돌아가 다섯 가지 감각을 만끽하라 목, 잇몸, 혀의 통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유해한 화학 물질에 의해 길들여졌다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얼음물이나 주스를 마시거나 껌을 씹고 심호흡과 양치질을 하는 것도 좋으니 아니면, 헤어지지 말라 이별은 늘 후회되는 것. 금단의 열매는 언제나 더 매혹적인 법 혼자서 걸어오는 어두운 골목길을 조심하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혼자 마시는 소주를 조심하라 낙엽 떨어지는 스산한 가을에도 네 혼자뿐이며 눈 내리는 공원의 벤치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이제 그대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은근한 사랑 표현 김종인 그대가 만약 34년 10개월간의 이 지독한 사랑을 계속한다면, 뇌졸중과 혈관질환 발생률이 2~3배 증가하고 관상동맥이나 협심증의 위험이 높아지고 콜레스테롤 수치와 인슐린 저항성이 증가한다 혈액 순환을 방해하며 주름이 많아지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노화도 빨라진다 구강암에 걸릴 확률은 6배 이상 높고 잇몸 질환이나 충치, 치주염 발생이 4배 이상 치아가 전부 빠질 확률은 2배, 급성 궤사성 궤양치은염은 10배 폐암 발생률을 11.3배나 높인다. 식도암은 6.4배, 간암은 2.3배, 췌장암과 위암은 1.5배 괄약근을 약하게 해서 역류성 식도염을 일으키거나, 대장의 기능을 떨어뜨려 변비, 설사, 복통 유발 난소암의 위험은 1.6배, 자궁경부암 역시 2배 높아진다 난관의 운동성이 떨어지며 정자의 기능이 저하되고, 성기능 장애에 걸린 확률은 6배 이상 높다. 골밀도를 약화시켜 골다공증이 유발되며 에스트로겐 수준이 낮아 폐경은 더 일찍 찾아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대가 그대의 사랑을 영영 끊어버린다면, 100세에도 뛰어다닐지 모른다 폐암, 식도암, 간암, 췌장암, 위암에 걸리지 않고 잇몸 질환이나 하나의 충치도 없이 혈관도 팽팽하고 골밀도는 증가하고 에스트로겐 수준이 높아 100세가 넘어도 달거리를 하고 빛나는 피부를 자랑하며 70세 연하와 연애에 빠질지도 모른다 지속 가능한 성기능을 자랑하며 120세의 자궁에서 4.2킬로그람의 아기를 생산할지도 모른다. 선택하라, 아무도 몰래 은근히 만나는 사랑인가 ? 인생은 늘 선택의 기로에서 운명을 만나는 법이니. * 약력 1954년 경북 금릉 초실 출생 1983년 겨울 『세계의 문학』에 작품 발표 시집『흉어기의 꿈』 (서울, 온누리),『나무들의 사랑』(대구, 문예미학사), 『내 마음의 수평선』(서울, 시에) 등 분단시대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현재 김천농공고 교사로 근무 * 사진-별첨 * 주소 : 경북 김천시 황금동 74-2번지 * 전화 : 011-9570-8459 * 메일 : kmt820@hanmail.net   
167 나도 게으른 꿈을 꾸는 시인이 되고 싶어 외1편/강태규 file
편집자
4130 2011-12-01
11.12월19호 시  나도 게으른 꿈을 꾸는 시인이 되고 싶어 - 김사인 풍으로 나, 여린 새 한 마리 사는 작은 숲을 보네. 나, 하릴없이 해거름 게으름으로 높은 산으로 넘는 해를 보네. 나, 내가 가진 두 개의 눈으로 내일도 동녘 너울 위로 움실거릴 해를 기다리거나, 오늘 밤 처럼 초승달에 눈 기우리리. 저 숲에 있는 여린 날개의 새 한 마리 보듬고 싶네. 그 숲은 너무 고요해, 내 마음은 오른 쪽 물결에 주어버린다해도 낯선 숲의 모르스 부호들이 어느새 발등 톡톡거리네. 나, 이정표 없이 터벅대던 발바닥이, 봄의 고운 순들의 말을 거느리네. 어쩌나, 사막같은 외길이 토끼풀이며, 잔디꽃이 자분대는 길목에 머무네. 이쯤해서, 아랫목 뜨실 방 한 칸 만들어, 늦가을, 이른 봄으로 다시 살아볼까. 터무니는 어디서 왔는지 몰라. 내가 추스린 봉놋,화롯불이 성큼 되살아나는 것은 무슨 기묘한 마법의 동요인가. 나, 빙벽을 흐르는 바람에 대들지 않고 살아볼까나, 나, 이제 의적 로빈 훗 처럼 도적질도 하며, 숲을 가르거나, 숲의 여신도 훔쳐, 이어도 같은 섬으로 갈꺼나. 세상은 늪이고, 수렁이어서 고요한 호숫가 쪽배에 외낙 바늘로 부뚜막에 앉힐 고기도 낚으리. 새 한마리 암컷으로 훔쳐 해리포터, 마법의 불도 피우리. 이쯤하면, 하도 외지고 고요해 꽃신도 못바꾸리.그 새, 노을에 늙다가 한 숨 내어 쉬리. 가끔은 봄같이 계절이 되살기도 할 것이며, 이따금 폭풍과 하늘 북들도 숲을 빗기며 그릉대리. 하늘 번개 서릿발처럼 으릉대는 밤이면, 그 새도 쾌쾌하거나 북슬대는 품으로 안기리. 이쯤하면 사슴같고 방울초롱꽃 같은 아이들도 곁방에서 고슬대리. 이 즈음해서 베껴온 동화책처럼 울긋불긋 숲과 호수가 한 낮처럼 환해지리. 나, 그런 숲에 살고싶네. 덧칠 보지 못하거나 보이지 않는 위안이라던가 비둘기 같은 안식을 비켜서 풍경을 그린다 검은 돌틈 사이 뱉어내고 바다와 하늘 틈으로 흘리던 군역軍役 시절의 물감 라이트 옐로우, 레드 오크, 말과 물감이 귀하던 시절 백석과 이상이 살았고, 이중섭과 박수근이 살았다 지금, 사원에 머무는 현란한 시들의 눈부신 비상飛上 속에서 사원 밖의 나는, 말이 많다 강태규 서울출생 산문집 『평창이야기』와 시집 『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가 있다 서울대 및 동대학원 졸업, 현직 수의사로 있다.  
166 커피를 쏟다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3888 2011-12-01
11.12월19호 시  커피를 쏟다 며칠 내리던 비가 오지 않는 밤, 길게 쓴 문장 위를 긋는 흰색 화이트 자욱이 사막을 달리는 지프차가 일으키는 먼지처럼 환하다 우수수 쏟아지는 별들 한 줌 밥그릇에 쓸어 담아 한 주먹씩 입에 넣으며 밤을 하얗게 보낸다 내일이란 것이 있을까 분명 내일은 어제 저녁 드롭 커피 석 잔 속에 있었다 커피를 내 몸에 쏟고 까만 밤에 긋는 흰 선, 인공관절을 심은, 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가 뚜벅뚜벅 하품도 한 번 하지 않고 병실에서 바지랑대로 별을 털고 있다 엘리베이터 항상 그들이 쓴 전기는 위인전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상승기류를 타고 고층으로 오르는 자궁열차 촘촘하게 날개 돋으며 도착하는 이승과 저승 사이 휴거[携擧] 마을 그들이 쓴 전기는 항상 누름 기도문에 순명한다 ------------------------------------------------------------ 하재영 :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당선,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등 7feeling@hanmail.net 010-4523-4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