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마애불기(龍巖磨崖佛記)


                    정복태

갈증으로 눈을 떴을 때 TV 소리가 귀로 자글대며 밀려들고 있었다. 현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혀 물주전자를 입에 대고 벌컥이며 정신없이 마셨다. 속은 뒤끓고 있었다. 어제 편집국장과 마지막 헤어진 뒤 현은 결국 T술집에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담이 한껏 말렸으나 계속하여 머리끝이 하얗게 될 때까지 마신 기억만 겨우 떠올랐다. 비교적 이런 소도시에서는 조용한 그런대로 술집 분위기도 한껏 주인의 디자인에 의하여 잘 갖추어 놓은 그런 술집이어서 현은 신문사일이 끝나면 편안한 마음으로 곧잘 가곤 하는 곳이었다. 마담은 언제나 한복을 입고서 그윽한 그 나름대로의 기품을 은은히 풍기며 손님들을 편안하게 하는 곳이어서 현은 그런 분위기로 하여 이따금 이 집을 드나들었다. 지자체 선거가 끝나고 이제 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의욕적으로 일상의 업무에 들어서서 의욕적으로 시 행정을 펼쳐 나가는 때이기에 현이 몸담고 있는 K지방신문은 새로운 기사가 넘쳐나서 무척 바쁘기만 할 때였다. 편집국장과 사장이 동석한 술자리였는데 결국 술판이 과열된 것은 편집국장의 사장에 대한 불만이 터지고 부터였다. 현은 말이 편집부장이란 직책이었지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금방 입사한 신출내기 기자 노릇을 해야만 했다. 싸움은 처음 현 시국에 대한 사장과 편집국장의 고정화된 의견 차이에서 벌어졌다. 정작 그것이 번진 것은 편집국장의 일을 한 댓가에 대한 사장에 대한 불만이 나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산불처럼 번져서 현으로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수습 불능의 상태로 격화되어 버렸다. 주전자 구멍에서 입을 떼자 현의 귓가로 무언가 아나운서의 말과 함께 화면의 글씨들이 눈시울로 들어오고 있었다. 거북한 속임에도 불구하고 현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그 뉴스가 범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낙단보 공사 현장에서 고려 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마애불이 그 광배 부위가 인부의 실수에 의하여 파손되어 버려서 조계종 종단의 총무원장과 종단의 고위 스님들이 가뜩이나 자연보호를 주장하던 조계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서 이번에 대규모 항의 법회를 광배 부위가 구멍이 난 사실에 대하여 정부에 시위집회를 하기로 했다는 뉴스였다. 술을 먹은 배는 뒤끓었으나 현은 이미 술기운이 걷히고 있었다. 어제 사장과 편집국장의 회식에서의 집요한 의견 다툼도 역시 이번에 새로 시작된 시장과 이 고을 국회의원 사이의 권력 겨루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현이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떠올랐다. 그것은 이 고을을 대표하는 두 인사가 암암리에 이 소도시에서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새로운 시정을 펼치면서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일이었다. 중앙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시작한 4대강 사업으로 하여 야당의 집요한 공략을 받고 있으며 지난 번 연평도에서 일어난 북한군에 의한 천안함 침몰로 인한 작전 중이던 한국군 46명이 서해 바다로 산화하면서 그에 대한 정부의 한참 뒤의 성명은  북한에 의한 계획된 어뢰공격에 의한 것이라 발표한 것에 대하여 야당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정부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라의 의견은 반반으로 갈라져 뜨거운  논쟁으로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야당은 지금 정부가 국가사업으로 확정하여 실행에 옮긴 4대강 사업을 국민 복지를 위한 기금으로 전환하지 않은 현 정부를 5공식 독재라면서 그들 식의 공세를 거세게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불교계와 환경단체에서는 자연 훼손에 대한 생각으로 강렬하게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현은 그 일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개인적 생각은 하지만 평행선으로 치다르며 국론이 분열되는 듯한 모양은 아니란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현이 살고 있는 이 소도시는 선사 시대부터 존재한 고대 도시의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 시대에는 북방의 고구려의 침범을 막아내는 첨병 역할을 했던 중요한 요충지였다. 신라가 통일 이후 귀족들의 골육분쟁과 이권 다툼으로 서서히 천년 왕국이 기울어져 갈 때 이곳 근처의 가은에서 아자개의 아들 견훤이 왕을 칭하여 멀리 전라도 지역으로 옮겨 후백제를 세우고 멀리 경기도 철원 지방에서 신라 왕국의 후손인 궁예가 태봉이란 나라를 세웠고, 궁예의 측근이었던 왕건은, 해괴한 미륵 신앙에 심취하여 여러 이름으로 국명을  바꾼 궁예를 대신하여 결국 역사에서 기록되었 듯이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을 굴복 시켰고,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귀순으로 고려를 세웠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원산 이남의 삼국통일을 하고 그 이후 당나라의 위세를 함께 물리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일과 왕건에 의한 지방 토호 세력과 함께 고려를 세움으로써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단일 국가 형성은 그 성격이 조금은 그에 대한 느낌이 다를 수도 있는 점이다. 현이 살고 있는 이 고대도시이자 지금 그렇게 화려하게 큰 도시로 성장은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현이 살고 있는 고대 도시는 역사에서 특히 과거부터 대단한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지금 나라는 20여 년 전부터 지방화 정책을 실시하여 우리나라는 과히 지방 축제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그 지역의 경제적 인프라 구축에 중앙 정부와 치열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4년 전 새로 출범한 현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확정하여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을 집중적으로 친환경적 환경을 위하여 대대적 4대강 사업이란 국가적 대 정비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현이 있는 이곳  소도시에서도 비로소 강다운 낙동강이 시작되는 곳으로서 일찍이 신라 이전에 고대 부족 국가 형태의 옛사람의 살아갔던 유물이 대규모 도로 사업을 하면서 그 이후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그 성과가 옛 이곳의 역사적 삶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에 병합되기 이전의 사벌국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지게 되어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즈음에는 ‘사벌국 보존회’를 결성하여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도 발굴 밑 유적 보존을 위한 대대적  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방 자치제는 지방의 재정 자립도가 늘 중앙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곤 하여서 지방 정부의 의도대로 그 사업의 필연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재정적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서 순탄하게 진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의회는 조직 되었고 지방의 대표자들은 세비 문제를 거론하면서 지역민의 비난을 늘 받곤하지만 그들 지자체 의원들은 해외 선진지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잦은 나들이로 인하여 지역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그 상황에서 지역 신문은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져 작은 시골 소도시에서 과잉공급으로 인하여 신문사마다 재정적 시달림에 곤경을 맞고 있었다. 현이 처음 이곳 지방 신문에 일자리라고 찾아와서 시청의 언론 브리핑을 받으면서 적어도 많은 재정적 부담을 견디고 있는 신문은 적어도 어떤 큰 컨소시엄으로 선의의 통합을 절실히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 자체가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에 조그만 지역 기사일지라도 어떤 특정인을 향한 기사는 사실 보도하기에 힘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농경사회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현이 그 날 새로 발굴된 용암마애불을 기자로서 처음 찾아갔을 때 이곳저곳은 낙단보 공사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대형트럭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여기저기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이 일에 몰두해 있는 광경이 먼저 눈에 띄었다. 현이 현장에 가서 확인한 결과 마애불은 연꽃을 받침대로한 좌상 형태로 매우 부드러운 음각으로 만들어진 고려 초기불 형식의 마애불 좌상이었다. 그런데 인부의 실수로 부처님 뒤의 광배 부분의 왼쪽에 깊게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 동안 도로 밑에 깊숙이 들어 있으면서 지축에 시달려서인지 이곳저곳으로 금이 간 부분이 많이 균열되어 있었다. 새로 마애불이 발굴되었다기보다는 일제 시대 산미 증산 계획으로 급하게 만들어진 신작로에 함부로 매장되었다가 이번 4대강 사업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멀리 맞은편으로 이 지역의 진산격인 나각산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다. 나각산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 마을의 전설이 있었다. 그 곳에는 마고할미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천 년을 사는 신통력을 갖춘 마고할미가 어느 날 무언가에 홀려서 자신의 수명을 빼앗길 운세에 처했을 때 큰 돌을 안고 굴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하늘의 신선에 의해서 마고굴에 갇혔다가 간신히 그 위기를 헤쳐나간 뒤에 그 굴을 다녀간 마을 사람들이 자식을 보았기에 그 마고할미 굴을 새 생명을 얻는 영험  있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신성시하고 기도를 드린 곳으로 전해져 왔는데, 어떤 행패스런 인사가 그 돌을 치워 버렸다고 전한다. 하여튼 지금 현이 서있는 마애불상에서 바라보면 바로 나각산의 한 곳을 집중적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현은 마애불이 있는 현재 있는 자리와 멀리 마고 할미의 굴과의 깊은 연관성을 생각해 보았다. 균열이 여기저기 나있는 원만 구족한 연화 받침대 위의 고려 초기 불상은 비록 어떤 노동자에 의해 광배 부분에 구멍이 났지만 그런대로 오히려 얼굴이 예쁜 여자 같은 어여쁜 모습까지도 엿볼 수 있는 부처님의 경외의 모습보다는 예쁜 상호였다. 언덕 아래로 강물은 붉고 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근처로는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모여서 시회를 열었다는 관수루가 지역 독지가에 의해서 복원되어 시원하고 정취있는 풍경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근처는 오랜 세월 동안, 오늘날의 낙단교가 세워지기 전에, 낙동과 낙정을 이어주던 목선이 있어서 나루터의 역할을 한 곳이다. 그 시절 나루터는 동네의 많은 장삼이사들이 모여서 기생들과 술추렴을 하면서 사람들의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다. 강에서 잡아 올린 뱀장어와 잉어들이 지천으로 그 시절의 술 안주감으로 술상에 올랐던 시절이었다. 자연히 나루 근처에서 사람들은 장사를 했고 나름대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음으로 파시를 이루던 곳이었다. 양정으로 향한 길은 도청 소재지가 있었던 대구로 향하는 길이었고, 마애불이 있는 용암 바위 길은 인근의 의성으로 통하던 길이었다. 옛날 신라시대부터 이곳은 상주 지역이었다. 의성을 가기 전에 있는 비록 면단위 마을이지만 안계는 근처에서도 이름난 곡창지대로 특히 대단히 번성한 장을 이루던 곳이었다. 그리고 안계는 벌이 넓어서 무진장한 벼농사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하여 일제 시대 이 곳 용암 바위 근처를 통하여 일제에 의해 산미 증산 계획에 의하여 함부로 산의 옆을 절단하여 도로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 때 이 마애불상이 땅 속으로 묻혀 버린 듯했다. 일제는 1920년대 두 번에 걸친 산미 증산 계획을 강압적으로 해서 이 땅의 좋은 쌀을 저들의 일본땅으로 날랐다. 그 결과 일본 내의 농민들이 자신들 농업의 경제적 취약성으로 인한  반발로 결국 그 산미 증산 계획은 ‘30년 이전에 폐지돼 버렸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용암마애불의 광배 부분이 공사장의 부주의로 파손이 된 뉴스는, 결국 조계종의 총무원장과 주요 간부급 스님들로 하여금 대규모 대정부 집회를 하게 하였고, 그 이후 문화재청장과 정부 내 고위인사가 시위중인 스님들 앞에서 복원상의 잘못을 인정하고 마애불상을 원래의 자리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소중히 할 것이고, 또 하나의 장군 보살상을 발굴하는데 전문가를 통해 철저히 발굴할 것을 발표하면서 스님들의 시위는 하룻만에 끝이 났었다. 지방 신문이며 방송에서도 그 사실에 대한 보도가 계속 이어져 하마터면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 시위로 번질 뻔하기도 한 일들이 이어졌다. 현지 지역민들에 대한, 과거 이 마애불상의 존재에 대한 불교계 신문들의 취재 열기도 더욱 관심을 고조시켰다.

 신라는 골품제도에 의한 왕족의 사치와 방탕이 AD 8C를 전후하여 왕권을 쥔 진성왕 이후 중앙집권적 권위가 실추되면서 여기저기 반란이 계속하여 발생하여 백성들은 귀족에 의한 착취뿐만 아니라 비적의 무리들에게 시달리게 되면서 그들의 곤궁함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 시대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상주의 가은지방에서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이,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기에서 구출한다는 대의를 내걸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천년 사직의  신라를 향한 저항 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반란군인 견훤의 무리에 휩쓸려 함께 신라에 저항했던 사람을 아버지로 두었던 승려 효각(曉覺)은, 그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었다. 천 년 역사를 지켜온 신라는 이제 사직을 유지하기에는 힘이 너무 빠져 버렸다. 곳곳에서 민란의 빈번한 발생으로 백성들의 삶은 풍전등화였고 그 목숨이 초로와 같은 누란지위의 시절이었다. 효각의 아버지는 견훤 무리의 중간 무장이었는데, 왕건과의 전투에서 그만 장열하게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 이후 효각의 어미는 두 남매를 데리고 마을의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열심히 살고자 했으나, 그것도 일철이 지나면 추운 겨울을 맞으면서 의식주 해결이 어려워지자, 근처의 절로 들어가 공양주보살로 들어가 두 남매를 키웠고, 결국 효각은 그곳에서 사미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었다. 함께 한 어미와 누이의 품을 떠나 효각은 전국의 사찰을 돌면서 스스로의 불심을 닦아 나갔다. 효각이 단밀의 만경산 자락에 있는 절을 찾은 것은 이미 궁예며 견훤 세력이 왕건에 의한 개성 세력으로 변하고 있을 때였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아들인 마의 태자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신라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천 년 사직을 새로운 개성의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그리고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그 이후 비운의 마의태자는 사직을 잃은 슬픔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효각은 아비가 견훤의 수하에서 일을 하고 그 일로 하여 목숨을 잃었지만 개성 출신의 왕건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었다. 효각에게는 그것이 늘 마음 속의 어떤 알 수 없는 일로 풀리지 않는 마음의 갈등으로 남았다. 일찍이 진성여왕 시대, 시무 10조라는 글을 써서 무너지는 골품제도의 부당성과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는 간곡하고 절박한 고운 선생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천년을 이어온 신라는 서서히 저무는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고운 최치원은 송도의 왕건을 은근히 찬양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고 효각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아비가 견훤 수하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전쟁터에서 세상을 하직하였으면 응당 효각 역시 견훤을 숭모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겠으나 효각은 송도의 왕건에 대하여 은근히 존숭의 마음을 느껴왔다. 만행을 하면서 들은 그 당시의 백성들의 여러 갈래 어지러운 시대에 대한 의견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많은 대다수의 중생들은 왕건을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각 지역의 호족들과 왕씨 집안 간의 혼인을 통해 지지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효각은 드디어 용바위 근처의 작은 암자에서 시대의 혼란과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근원을 깨치기 위하여 용맹정진의 장좌불와 참선에 들어갔다.

 현은 용암마애불에 대한 르뽀 기사를 쓰기 위하여 인근의 나이 많은 할머니들을 찾아 다니면서 마애불에 관련된 역사를 찾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일제 시대를 살았던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옛날의 마애불은 마을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으로 모셔져 일제 시대에도 존재해서 집안의 어려운 일을 해원하기 위하여 맞은 편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소원을 빌곤 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집안의 길흉사를 절대적 존재인 마애 부처님께 빌었다는 사실을 현은 현지답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의 절대적 구원의 대상으로 모셨던 마애불상이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일제에 의한 강제적 산미 증산 계획으로 인한 일제 총독부의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경원시로 그러한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총독부는  질 좋은 양질의 조선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강압적인 신작로 공사를 강제로 실행하여 조선 문화 훼손을 단지 그들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악랄한 전시에 사용할 양식을 갖추기 위하여 식민지 소설의 산하를 여러 악랄한 방법으로 잔인하게 유린하였다. 그 때 신작로 공사로 인하여 천여 년 전에 조성된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재가 일제에 의한 마구잡이식 신작로 공사로 인하여 용암마애불이 매몰된 사실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현은 의성 군청의 문화관광과에 들러 마애불의 존재에 대한 첫 파악이 이루어진 시점을 알아 보았다. 눈빛이 순한 담당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 그 동안의 마애불 실상을 자세하게 현에게 알려 주었다. 군청에서 마애불의 두부 부분이 발견되면서 군청 담당자는 군수의 직인으로 마애불 보호를 위하여 공사 책임자에 대한 그 부근 일대를 보호해 달라고 공문을 벌써 여러 번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공사 책임자는 그 공문을 철저히 무시하고 공사를 감행하다가 이런 사태를 발생시키게 되었다고 군청 직원은 공무원다운 정확한 저간의 사실을 말하면서 전국으로 흘러나간 뉴스를 걱정하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현이 군 청사를 나와서 다시 용암마애불이 있는 곳을 찾았을 때, 근처 마을에서 청년 몇 명이 텐트를 치고 마애불 보존을 위한 자원 봉사자를 자임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애불 앞으로는 큰 차단막을 쳐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다. 강의 여기저기로 줄을 이은 대형트럭이 강에 쌓인 퇴적물을 운반하는 분주한 광경을 보다가 현은 신문사로 돌아왔다.

  효각은 밤낮으로 그 혼란한 시대에 희생된 가여운 중생들에 대한  화평에의 기원과, 효각 자신에 매달린 삶의 근원적 문제를 화두로 하여 정진하였다. 그 어느 날이었다. 잠시 암자의 토굴을 빠져나와 지친 심신을 아무런 생각 없이 서서 무연히 여름날 아침의 청정한 대기를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눈 앞에서, 작은 떨켜나무가 눈시울로 비쳐들면서 나뭇잎 사이 가지에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이 안광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미 거미는 포획한 곤충을 먹어버렸고 앙상한 껍질만 거미줄에 대롱대롱 그 흔적만 남은 것이 안광으로 강하게 밀려들었다. 효각은 불현듯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바로 거미줄에 갇혀버린 불쌍한 곤충 같은 존재로 느껴지면서 온몸이 부르르 전율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그 운명처럼 갇힌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효각은 마음의 눈이 뇌성벽력같이 환하게 밝아오는 깨달음을 느꼈다. 그래, 중생이, 구도자가, 깨우쳐야 할 것은, 번뇌와 오욕칠정이 바닷물만큼이나 출렁이는 속세의 번민의 세계에서의 깨달음의 지혜란, 거미줄처럼 얽어 매인 운명의 실에서 벗어나야 함을 효각은 천둥과 같은 대오각성으로 도를 깨친 것이었다.

 그날 이후 효각은 행운유수의 운수납자로 중생이 살아가는 저잣거리로 나섰다.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 즉 업(業)은 현생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전생에서 유래한 업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그 한 인간의 현생에 걸려 있는 문제일진데, 효각은 자신이 처한 변화하는 그 시대에 대하여 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적 일임을 아프게 깨달았다. 도처의 대중들은 도탄에 빠져서 신음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깊은 산길에서 여러 무리가 떼를 지어서 승려인 효각의 바랑을 뒤질 때에도, 효각은 그들 도적을 위하여 참으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축원을 해 주었다. 골품제도에 깊이 빠져든 귀족층의 사치하고 방탕한 풍조에서 신음하는 그 시대의 민초들은, 너무나 깊은 시름에 겨워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도처에 그러한 모습을 보는 효각의 마음은 아팠다.

 그리하여 덧없는 행운유수의 운수납자의 세월을 보내고 그가 처음 득도한 암자로 돌아와서 그 날부터 큰 화강암 바위에 부처님의 상호를 음각하는 지난한 작업을 결심하였다. 암각에 원만구족한 부처님 상호를 새기는 작업 전에 먼저 효각은 온몸을 깨끗이 씻고 향을 사루면서 부처님을 향한 일념을 곧추 세워 조금씩 조금씨 작업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 부처님 상호를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하는 문제로 여러 날을 효각은 깊이 궁구하면서 수천 번의 참배를 올리면서 자신의 마음 속 불심의 끈을 도사려 잡았다. 작업이 진척이 되지 않을 때는 토굴에 들어가 면벽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력을 간절히 빌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처님 마음이 효각 자신의 마음으로 스며드는 무아의 경지에서 바위에 상호를 그려 나갔다.

 현이 그 동안의 용암마애불에 대한 기사문을 사진과 함께 편집국장의 데스크에 올리자 얼마 전의 사장과의 언쟁으로 아직도 부어 있는 편집국장은 얼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O.K사인을 해 주었다. 현은 자리로 돌아와 자신이 기록한 기사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 보았다. 현은 이 소도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방신문의 기자인 자신의 현재를 떠올리며 씁쓸한 마음이 마음의 한 부분에서 서서히 의식되면서 갑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헛헛해졌다. 언제나 변방에 유배 나온 듯한 자신이 어쩌면 더욱 그런 마음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서울에서도 이름이 있는 대기업체의 노조일을 하다가 현은 직장을 떠나게 되었다. 하여 고향인 이 작은 소도시에서 선배의 주선으로 신문사 일을 보게 되면서 이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체득하였다. 대체로 보수적이면서 농경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곳 소도시는 대체로 계모임을 통해서 서로 간의 길흉사를 상부상조하는 옛날의 풍습을 엄격히 지키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 이웃들이 큰 원환처럼 관계되어진 소도시민들의 삶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소도시이면서도 닷새마다 열리는 장날이 되면 이 지역의 가까운 인근 사람들로 붐비고 특히 풍물 시장이라는 곳에서 서민들의 물건을 사고 파는 현장에서는 아기자기한 이 곳 사람들의 삶의 따뜻한 모습들이 아직도 전통적인 경향을 짙게 풍기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장의 돼지고기 집에서는 고기 삶은 구수한 냄새가 시장 전체로 가득 차올라 시장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기도 하였다. 대체로 푸성귀며 반찬용 향미료가 그 시장 전체의 주요 품목이었다. 현은 그런 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그들과 더불어 돼지국밥을 먹으면서 이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과 마음으로 가까워지기 위하여 현 자신의 마음을 기울이곤 하였다. 이따금 낮술의 소주도 반주로 곁들여 마신 날은 근처의 남산에 올라서 이곳저곳의 시내 전체를 조망을 하기도 하였다. 남산은 시민 공원처럼 둘레를 걷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일주 도로까지도 만들어 놓았다. 국궁을 하는 활터가 있었고 이 지방과 관련이 깊은 서애 류성룡의 유허비도 자리를 하고 공원 이곳저곳으로 시민들이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쉴 수 있는 의자들도 도처에 설치해 놓은 곳이었다. 평화로운 이곳의 생활의 모습은 언제나 현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였다. 다만 시의 경제적 주름을 펴게 하는 기업 유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 소도시의 살림살이는 그렇게 풍요롭지 못한 것이 이곳 사람들의 시름이라면 시름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삼백 즉, 쌀, 누에, 그리고 곶감이 이곳 사람들의 주생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근대적 농산품은 그렇게 이 고을을 풍요롭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마침 상주보와 낙단보 공사를 통한 현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이곳 마을을 위해서는 조금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많은 크고 작은 기업들이 이 사업의 하청을 따내서 소도시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조금은 주름을 펴는 계기가 되게 할 수 있었다.

  밤낮으로 효각은 화강석에 심혈을 기울여 언젠가 들렸던 서산 삼존불과, 영주 가흥리의 삼존석불을 떠올리며 자신의 부처를 향한 일념을 담아서 작업을 해 나갔다. 효각은 자신의 삶 존재 전체를 마애불에 혼신으로 담아나갔다. 그 일은 효각에게 불도에 귀의 한 중생을 계도하는 납자로서의 온마음의 총화였다. 서서히 부처님의 상호가 드러나면서 효각은 더욱 마음의 끝을 한 마음에 담고서 조금씩 조금씩 형상화해 나갔다. 이따금 나각산 정상의 바위굴에 살았다는 마고할머니의 굴을 바라보았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억겁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사람은 불심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지만 강물은 언제나 사람살이의 지극히 필수적인 물을 풍부하게 가지고 흘러가고 있었다. 효각은 영원히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 영원한 부처님 상호를 조성하는 일로 언제부터인가 어렴풋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본적이 있는 백제 시대에 조성된 서산 마애불상의 원만하면서도 푸근하게 잔잔히 웃는 그 부처님의 상호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효각이 조성하는 연화 받침대위의 부처님 상호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는 것도 그런 인연에서 유래되었는지 몰랐다. ‘일체유심조’의 초발심으로 효각의 손끝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부처님 상호는 효각의 마음을 더욱 가파르게 옭죄는 숨을 멈춘 듯한 긴장을 가지게 하였다. 새벽의 부우연 여명이 안광으로 느껴지는 때 효각은 작업을 멈추었다. 효각은 이마위로 흥건히 흐르는 땀을 장삼 자락으로 닦아냈다. 마음은 너무나 평안했다. 효각은 굴을 나와 멀리 나각산 쪽으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마고 할미굴을 향하여 두 손을 모아서 합장을 올렸다. 중생들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구원을 생각하며 효각은 간절한 기원을 드렸다.

  현이 올린 용암마애불에 대한 그간의 기사를 내보내자 경향 각지의 신문사에서 그에 대한 기사의 문의가 계속하여 신문사 전화기로 이어졌다. 때마침 병인양요로 프랑스에 가있던 조선의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폭되면서 현이 기사화한 용암마애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현은 그 동안 자신이 직접 발로 뛰어서 현장 주변에 관계된 내용을 가능한 자세하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사장 역시 지방 신문에서 낸 기사에 대한 경향 각지의 여러 곳에서 문의가 이어지자 매우 만족한 눈길을 현에게 쏟았다. 현은 풍물 시장에 들러 대낮부터 순대를 씹으면서 소주를 야금야금 마셔댔다. 시장 주변은 가난한 시골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푸성귀를 펼쳐놓고 한낮의 뙤약볕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을 현은 쓸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마음은 종이 상자를 실은 리어커를  힘겹게 끄는 노인들의 모습을 시내에서 목격할 때 느끼는 연민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의 작은 수입이 바로 생활이었다. 현은 근처의 임란 전적지가 있는 북천교를 건너 경내로 들어섰다. 왜적이 상주로 진입할 때 불과 800여 명의 의병과 관군으로 장렬히 순사한 선조들을 모신 곳이었다. 현은 돌계단을 올라서 위령각에 가 참배를 드렸고 천천히 북천교 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근처의 아름다운 정경이 오히려 나라를 위해 아까운 목숨을 내던지신 영령들을 생각하니 더욱 쓸쓸함에 젖는 자신을 느꼈다. 선비들이 시회를 열었던 침천정, 그 시절의 사신을 맞이했던 상산관, 그리고 동학으로 목숨을 잃었던 한이 서린 태평루가 보였다. 현은 역사의 흐름을 늘 이 임란전적지에 오면 절실하게 느끼곤 하면서 나라를 위해 의로운 목숨을 던지신 선령들에게 추모의 마음이 솟구치는 애달픔을 생각하고 머리를 숙이고 추모의 마음을 드렸다. 이곳 소도시는 그런 추로지향의 고을, 그리고 충절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북천교 아래로는 때마침 방학을 맞이한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요란스럽게 뒤엉켜서 여름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에서는 몇 년 전부터 북천교 아래에 아이들을 위한 강수욕장을 설치하여 도시 서민들의 아이들 물놀이를 즐기는 장소로 만들어 놓았다. 폭염을 피하기에는 다리 밑이 금상첨화의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후천교에서 이 고을의 고찰 남장사에 이르는 이른바 MRF길에는 벚나무를 심어서 멋진 걷기 운동을 하게 하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MRF란 M(Mountain), R(River), F(Field)를 일컫는 말로서 시민들의 슬로 시티 운동을 위하여 특별이 만든 열서너 곳의 걷기에 좋은 산, 강, 들을 끼고 건강과 레져를 위하여 걷는 길이었다. 참으로 이곳 소도시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리고 시내의 중심지 길의 이름을 삼백로로 하여 이 도시의 상징인 감나무로 가로수를 설치하여 삼백의 고장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게 힘을 쏟아 놓기도 했다. 바야흐로 시는 이곳 소도시의 특징을 한껏 아름답고 그윽하게 힘을 쏟아 부었다.

 시내를 벗어난 곳에는 이 소도시의 옛 터전이었던 사벌에 박물관을 설립하여 전통 깊은 이 고을을 더욱 유서 깊은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현도 박물관을 취재하면서 이곳 소도시의 아스라한 오랜 역사의 깊은 내력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한 여러 유물이 도굴꾼들에 의해서 벌써 여러 곳으로 옮겨져 조금은 그 규모가 부족한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이 전통의 소도시를 위해서는 매우 뜻있는 일이기도 하다고 현은 생각했다. 박물관은 인근의 산천과 어울려 참으로 아름다운 공원처럼 서 있었다. 군데군데 연못도 설치하고 이곳 소도시의 여러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을 야외 드넓은 잔디위에 친절히 알려주는 설치물도 이곳저곳에 있었다. 현은 박물관에 들어설 때면 마음의 평안함을 느끼곤 하였다.

 그래서 현은 낙단교 공사장에서 발견된 용암마애불을 보면서 아득한 천여 년 전의 선조의 소중한 손길에서 탄생한 연꽃 위에 가부좌로 앉아 계신 부처님 상호의 모습에서 눈물겹도록 그윽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어느 불심 깊은 스님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온몸을 다바쳐서 거룩하게 이루어낸, 천 년을 넘어서까지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따뜻한 부처님마음의 정화라고 현은 깨달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