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溪亭 

 

내가 사랑하는 집이 있습니다.

 

기왓장이 번들거리고 

추녀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대궐 같은 큰 집이 아닙니다.

 

방 한 칸에 마루 한 칸으로 된 

아주 작은  

띠집은 좁기가 나룻배와 같은*

 

지붕은 톡톡하게 짚으로 덮고 

마루 옆에는 판자문이 나란히 달렸는데 

삐걱 문을 열면 

종가가 올려다 보입니다.

 

한 사람이 들고나기에 알맞은

키가 닿을 듯한 예쁘장한 낮은 문이 

우산천을 향해 있습니다. 

 

온통 물소리가 넘치고 

솔 소리도 덩달아 들어오고 

이따금 달님이 찾아와 놀다 갑니다. 

 

우산천이 물길을 따라 굽이돌아 흐르듯

첩첩 들어온 산길을 보며 

앞길을 열어갑니다.

 

사람이 들면 

큰 집이 되는 

홀로 없는 듯 자유로워지는

큰 뜻이 사는 집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는

내가 무척 사랑하는 집이 있습니다.

 

*우복의 시 계정에 나오는 시구 계곡물은 맑기가 거울 같은데 띠집은 좁기가 나룻배와 흡사하다 溪水淸如鏡 茅堂狹似船

 

 

           시인의 말

 

 지난 여름은 지리한 장마로 한 철을 다 보냈습니다.장마 뒤에 찾아온 따가운 햇살이 가을곡식과 과일을 탐스럽게 영글게 합니다.코스모스길이 가을의 정취를 북돋우고 벼이삭이 노릿노릿 물드는 날 우복종가를 찾았습니다.T자형의 특이한 대산루의 강학,휴양,장서,독서 등 복합용도로 쓰임에도 호기심이 일지만 그 보다도 계정溪亭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계정은 우복 정경세 선생께서 1603년(41세)에 지은 정자로 청간정聽澗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방1칸,마루 1칸의 최소규모에 초가지붕을 한 3량가의 소박한 건물입니다.마루 서쪽 벽에 초가에서 보기 드문 고식의 영쌍창이 나 있습니다.삐걱-소리가 날듯한 판자문을 열면 언덕 위의 종가가 보입니다.

 아파트도 단독주택도 큰 쪽을 선호하는 요즘 세태와는 거리가 먼 아주 작은 집.산골물(澗)이 흐르는 시내(溪)가에 자리 잡은 자연친화의 건물.맑은 물을 보고 물소리를 들으며 충양充養(독서,사색,詩作,학문연찬)에 전념했을 공간.그것은 집중으로 하나됨이요 물아일체의 경지로 아름다운 우산의 자연에 심취한 우산동천愚山洞天의 세계를 열었습니다.우산의 자연을 시로 읊은 우곡잡영이십절愚谷雜詠二十絶 중에 계정溪亭이 떠오릅니다.

 깊은 골짜기 물바람소리 홀로 문을 닫으니萬壑風泉獨掩扃 해 긴 날 계정에 이르는 손이 없구나日長無客到溪亭 느지막에 고달파서 책 덮고 나서니晩來意倦抛書出 눈 시리도록 싱그러운 녹음 뜰에 가득 차누나.潑眼新陰綠滿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