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락중생 共樂衆生

 

 강은 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으면 차곡차곡 쌓여 올랐다가 마침내 부드럽게 넘어 다시 흘러간다는 매우 평범한 진리의 표상인 강. 산과 들을 떠나온 온갖 풀씨들을 품고 흐르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놓아 싹 트게 하고 꽃 피게 하고, 인간 생활이 쓰다 버린 온갖 쓰레기들을 싣고 흘러 삭혀주는 강을   바라 볼 적마다 한 작은 인간의 마음은 옷깃을 여민다.

 퇴근길 달리기, 강을 안고 달려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작년 봄 이곳 평은 초등학교로 전근 와서 학구 안을 흐르는 평은강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 지 두 해째로 접어들었다. 세상엔 자기 건강을 위해서 하는 여러 가지 운동이 있지만 달리기, 흙빛 강둑길을 밟으며 달리다가 걷다하는 이 운동만큼은 내게 가장 알맞은 운동이다. 선생인 내가 건강해야 우리 반 아이들도 몸과 마음이 건강할 것이다.

 봄이 한창 무르익으며 여름을 준비하는 맑은 감성의 계절 속을 달린다. 산벚나무 숲을 지나 세 마리 경비견이 컹 컹 컹 짖어대는 버섯재배 농장을 지나  한참을 달리며 다리를 건넌다. 발이 받는 촉감은 흙과 시멘트가 다르다.

다리를 건너며 힐끗 보니 다리 아래엔 너덧 명의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배터리로 지져대고 있다. 고기 다 죽겠구나  배터리 전기에 감전된 고기는 살아도 산란과 사정을 못한다는데 말이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저걸 어떻게 한다. 내가 나서서 말리면 괜히 내가 오히려 곤경에 처할 거고, 쉬운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엔 없는데 말이다. 신고하자니 핸드폰은 저 멀리 차 안에 놔두었고, 만약 신고하면 신고자가 이 곳 초등학교 교사라고 소문나 학교와 내가 순박한 농촌 지역사회의 지탄과 눈총으로 곤경에 처해질 거고 말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배터리 전기로 죽어나고 불구가 되는 평은강 물고기들을 불쌍히 여기고 신고할 생각까지 하는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경고한다든지 신고한다든지 하는 행동화의 단계는 나의 영역 밖인 것이다. 다리를 건너 저편 강둑 왼쪽으로 구비를 돌 때까지 안타깝고 찝찝한 마음이다.

 천렵꾼들을 힐끗힐끗 보며 조금 달리다니 누가 “선생님!”하고 날 부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가자골 이 마을에 사는 태용이가 아닌가. 할머니와 함께 오고 있다. 연거푸 해서 “선생님! 선생님!” 큰 소리로 부른다.

그 때, 문득 천렵꾼들이 “선생님, 선생님이란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태용이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또 한참을 달린다. 가자골의 끄트머리이다. 평은강이 크게 휘어 금강리 쪽으로 흐르는 물회돌이 백사장을 보며 걷는다. 가자골 끝엔 농가 한 채가 있고 새끼 두 마리를 거느린 어미 개 발바리 한 마리와 개집이 있다. 그들은 날만 보면 열심히 짖는다. 새끼들은 부리나케 농가 쪽으로 도주하면서 연신 뒤돌아보며 짖어댄다. 어미는 자지러지게 짖으며 새끼들의 피난길을 재촉한다.

 내가 이 곳 방향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씩 달리기 코스를 한 지도 벌써 두 해 짼데도 아직 내가 매우 낯서나 보다. 인간과 짐승의 관계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도둑도 아닌데 매번 컹 컹 컹 개 짖음을 당하니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저 위 버섯농장 개 세 마리도 얼마나 짖어대고 사나운지 내가 저들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일 미터 뒤를 쫒아오며 정말 두렵게 짖어댄다. 다행히 요즈음은 낯이 좀 익었는지 짖는 소리 데시벨이 좀 낮아지고 꼬리도 탈래탈래 흔들어댄다.

 강둑길을 돌면 야트막한 산자락을 끼고 도는 산길이다. 완보를 하며 길섶을 보니 봄 풀꽃들이 한창이다. 자그마한 민들레들이 길섶을 따라 십 여 미터 줄지어 피어있다. 민들레, 한없는 정감을 자아내는 이름이다. 이 땅엔 크게 두 종류의 민들레가 있다. 들 민들레와 인간 민들레.

 인간 민들레, 다방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2-30대 여인들에게 성씨를 물으면 대게 민씨예요 한다. 어디 민씨? 관향은? 하고 물으면 그녀는 씁쓰레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 민들레,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운다. 한창 봄에는 힘센 자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남들이 아직 겨울의 끝, 따스한 봄 이불 속에 있을 때 미리 싹을 틔우고 자라고 꽃을 피워야 한다. 이 땅엔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들 민들레도 많고, 여윈 몸뚱이 하나로 삶을 헤쳐 나가야 하는 인간 민들레도 많이 있다.  

 민들레를 보면 진한 정감을 자아낸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며칠 전 많은 민들레를 무참히 학살했다. 이유는 딱 하나,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해서. 지난 토요일 오후에 학교 근처에서 민들레를 두 보따리나 캐서 쪄 말리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보신이 될지는 먹어봐야 알 거 지만, 말로는 한없는 정감을 자아내는 민들레 민들레 하면서 짐짓 자연 애호론자 연 하면서 내 이익을 위하여 하여튼 민들레 학살을 자행했다 나는. 다음날 출근해서 민들레 캐낸 자리를 보려니 눈이 자꾸 사시가 된다.

 다시 다리 근처로 뛰어오다 보니 허연 농촌트럭 두 대가 저 건너 지방도로를 급히 달려간다. 왕유리나 금계리 방향으로 간다. 그런데, 조금 전에 있던 천렵꾼들이 하나도 없다. 그새 어디로 갔나보다. 잘 된 일이다. 그들도 알맞게 잡아갔을 거고, 감전사와 감전 성기능 장애를 면한 물고기들은 천만다행이다.

 태용이가 크게 부르던 “선생님!” 소리는 분명 아이의 소리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분명 평은강 물고기들의 비명 소리일 거다.

 하지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야 뭐 마음속으로만 ‘신고 해버려?’ 하고 생각했지, 행동으로 실천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오후 늦게까지 농사 준비를 하다가 매운탕 생각이 나서 천렵 나선 그들, 한 솥 가득  끓인 매운탕 안주에 막걸리 소주잔 나누며 오늘 저녁 한 때 즐거울 텐데 말이다.

 부처님은 ‘공업중생’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공락중생’이 아닐까. 왜냐면 ‘업(業)이란 말은 좀 비극적인 이미지를 내포하는 말이지만,’락(樂)이란 말은 살아있음을 긍정적으로 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모든 것들 삼라만상, 식물과 동물 모두가 공락중생 할 순 없을까.

 식물이 뱉는 산소로 동물이 호흡하고 동물이 뱉는 이산화탄소로 식물이 녹말을 만들고 인간이 그것을 양식으로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이 한 가지 기본 원칙이 반듯하게 설 때가 언제일까. 동물의 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인간, 그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 자연이 아니라 이미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음을 간파할 때는 언제일까. 교실에서 선생님이 ‘자연보호를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인간은 자연입니다’를 가르칠 때는 언제일까.

 이십 리 남짓 평은강 내 영역을 한 바퀴 돌아 달리고 출발지 건너편에서 강을 건넌다. 종아리를 간질이는 강물들의 맑고 차가운 속삭임이 싱그럽다, 강가에서 얼굴을 씻고 발을 씻다니 벌 한 마리가 지푸라기를 부여잡고 떠내려간다. 사람하고 똑 같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살며시 건져 올려 마른 풀숲에 놓는다. 벌은 자꾸 풀숲 짙은 그늘 속으로 숨는다. 인간인 내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아직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렸는지,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려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말고 무사히 귀가 하여라 벌 한 마리.

 

박희용  p4092@chollian.net 시집<霜寒圖><양백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