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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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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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53 2014-11-03
159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이성선의 詩魂 소개 / 권형하 file
편집자
2984 2011-10-31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이성선의 詩魂 소개 권형하 이성선 시인은 1941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고, 1999년에 《산시》 시집과 2000년에 마지막 출간한《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등을 포함해 총 12권의 시집을 냈으며, 2001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성선 시인의 시집 《산시(山詩) (1999년. 시와 시학사) 》는 평이한 수법의 시어로 동양적 달관의 세계를 깊이 있게 표현하였고, 시를 통한 자연과의 일체적 교감을 추구하였는데, 특히 설악산과의 친화적 합일을 모색하면서 '설악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자연'이다. 나무, 해, 달, 별, 하늘 등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 자연을 지향하는 시인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연'과 더불어 '우주'는 이 시집을 꿰뚫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다. 시인은 인간의 욕망과는 무관한 대자연을 읊조리며 우주와의 합일을 시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어의 쓰임에는 효용적인 부분도 있다는 측면에서 좀 더 포괄적으로 보자면 특히 시어의 쓰임이 이야기로 인식될 때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산시(山詩)》를 읽어보자. 저녁밥 山詩'1- / 이성선 나는 저 산을 모른다 모르는 산 속에 숨어 피는 꽃 그것이 나의 저녁밥이다. 귀를 씻다 山詩'2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앉아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山)향기가 난다 나 없는 세상 山詩 30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 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꽃 한 송이 -山詩․35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구나. 시골길 - 山詩 37 시골 길에 비 온 뒤 물이 고이고 물 속에 산이 들고 산 속에 꽃이 붉게 피고 꽃 속 절간에 동자승이 숨어서 웃고 위 시는 이성선 시인의 시어의 상징적 전통을 간직한 우리 언어의 복원으로 언어 미학적으로 승화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적 쓰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원천성을 갖고 있는 시어의 쓰임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아쉬운 점은 선(禪)적인 의미와 맞닿는 시어와 시 쓰기는 자칫하면 헛돌아가는 톱니바퀴와 다름없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목탁 두드리는 스님의 법문과 법어가 중생들을 향하여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면 의미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이성선 시인의 작품 몇 편을 통해서, 고인이 된 시인도 아마 지금쯤 산사의 깊은 어둠 속에서 우러나오는 평화의 심연 속에서 맑은 목탁소리를 자장가 삶아 잠길로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나 없는 세상'이라는 유서 같은 시를 살았을 때 남겨 놓았다 그가 심장마비라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유서가 발견되었으므로 자살로밖에 추정할 수 없듯이 그 유서는 대략 백담사 흐르는 물에 자신을 화장해서 흩어달라는 유언이었다. 그리고 '나 없는 세상'의 시비는 백담사 경내 흐르는 개울물을 등지고 서 있다. 설악산 기슭에서 바다를 앞에 두고 사는 시인의 따뜻한 눈길에 포착된 자연과 사물들을 통해 탄생과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사라짐과 회생이 자유롭게 열림으로 하여 그의 시는 상식적인 인식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158 길 1 외1편/문창길 file
편집자
3957 2011-10-31
11.11월 18호 시 길 1 문 창 길 어디쯤일까 무심결에 뒤를 돌아 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식물에 꽃이 핀 것도 보이고 야생의 풀들이 타다만 장작더미 사이로 부드럽고 연한 이파리도 보인다 다시 고개를 꺾으면 언제나 뒷덜미를 쭈뼛거리게 했던 저 벼랑에서 늘 채찍을 가했던 음흉스러운 독재자 길 2 대체 여기는 어디쯤일까 우뚝 선 시야로 오거리 팻말이 들어온다 누군가 동행한 적이 있었던가 아스팔트가 질펀거린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고무액의 성분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트럭 한 대가 으르렁대며 지나가고 버스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약력: 전북 김제 출생. 80년대 구로노동자문학회와 민주직장청년연합 문학분과 활동. 시집 <철길이 희망하는 것은>.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창작21작가회 대표. 계간 <창작21> 발행편집인. 반년간지 <작가연대> 편집주간. 연락처: 서울 중구 필동3가 28-1 서울캐피탈빌딩 B202호 전화: 02-2267-6833, 핸:010-5308-6833 이메일: dlkot108@paran.com  
157 감나무사다리 외 1편/박승민 file
편집자
4632 2011-10-31
11.11월 18호 시 감나무사다리 박승민 감나무가지를 잡고 있는 조롱박의 손 힘줄이 파랗다 나이를 한 살 더 한다는 건 허공으로 난 사다리를 오르는 일 지상의 낯익은 온기들과 멀어져 바람과 구름의 사원을 지나 낯선 별자리를 찾아 중얼거리며 가는 길 흔들려도 잡아줄 손이 더 이상 옆에 없다는 사실 아득한 꼭대기에서 누군가의 발이 후들거리는지 밤부터 울고 있었는지 내 손까지 내려오는 저릿한 통증 조롱박의 왼손이 감나무사다리를 올라 장천(長天)의 푸른 강을 넘고 있다 등꽃 1 최루탄이 등꽃처럼 터지던 날 143번 버스가 학생회관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대가 있는 대학극장 4층 목조건물까지는 이 세상 가장 긴 일주문 낡은 중세의 유리창 위로 일몰의 서해가 황금 도가니탕처럼 끓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原典 사랑이지만 그대가 앉아있는 무대 위 불란서식 고급살롱에는 소작농의 후예가 오를 수 없는 곳 그 계단을 다시 되밟아 下界하는 길은 터-억,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영락없는 한 명의 수배중인 운동권이었다 2 30년 전의 등불이 가끔씩 켜지는 것은 명치끝으로 환한 그 무엇인가가 전류처럼 아프면서도 빛나게 흐르기 때문 3 너보다 약간 더 오랜 산 표정으로 生을 만나고 싶다 박승민 경북 영주출생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시작.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가 있다  
156 늦가을 키스 외 1편 /박상봉 file
편집자
4243 2011-10-31
11.11월 18호 시 늦가을 키스 박상봉 늦은 가을 날 기차에서 잠깐 흔들렸던가 눈은 감고 있었던가 뜨고 있었던가 칸칸마다 뼈아픈 시절 나누어 싣고 하행하는 기차 안 더듬더듬 캄캄한 동굴 속 지나갈 때, 머뭇거리며 아무도 내리는 이 없는 간이역 지나칠 때, 난간에 기대어 나눈 짧은 키스, 참 미묘한 떨림이었네 눈물이 눈에 핑 괴일 정도로 무거운 것이 그것에 눌리어 죽고 싶을 만큼 가슴 꽉 메이고 화끈 낯이 붉어지는 순간, 시가 나를 찾아왔네 언제 가을이 내 안에서 이토록 붉은 적 있었던가 차창 바깥으로 스러져가는 황혼을 한껏 끌어안고 단풍잎 붉은 차창 밖, 낯설은 마을 뒷길에,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 같은 새콤달콤한 맛 오래 음미하고 싶었으나 세월보다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가을 붙잡아둘 수 없었네 늦은 가을날의 키스,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몰래 꺼내어 읽을 수 있다면 손에 땀이 차는데, 잡은 손 놓기 싫어 역방향으로 자꾸 뒷걸음치던 나, 허방 짚고 다닌 삶,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네 금오산 금오산 정상에 올라본 사람은 안다 큰바위 얼굴 왼뺨을 비스듬히 더듬다가 미간眉間에 등 기대고 몸을 눕힐 때 들끓는 산의 비명 들을 수 있다 명금폭포가 짚동 같은 눈물 쏟으며 내지르는 소리 눈 맑고 귀 밝은 사람은 다 들을 수 있다 옷깃 여미고 있는 여인의 손길 잡아보면 돌에 새겨진 몸은 비록 차갑게 굳었지만 작은 입술이 전하는 숨결 느낄 수 있다 종일 숨죽이고 누운 금오산 큰바위가 밤이 되면 왜 어깨 들썩이며 중천에 떠오른 달을 응시하는지 돌이 달을 낳은 사연, 금빛 까마귀 쉬어 가던 동굴의 풍수風水 읽을 수 있다 약력 1958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남. 1995년 『문학정신』가을호「쎄씨를 읽는 남자」외 2편 발표. 2007년 시집『카페 물땡땡』 E-mail : psbbong@hanmail.net H.P : 010-2363-1189  
155 상사화 외1편/김수화 file
편집자
3494 2011-10-31
11.11월 18호 시 상사화 김수화 봄몰이하던 꽃샘바람도 이겨내고 남 먼저 달려와 댓잎 닮은 잎 꿈결처럼 밀어 올려 마당에 초록물 번지게 하더니 벌써 몇 년째 꽃대가 올라오질 않는다 조급한 마음은 기다리지 못하고 상사화 잎 타들어간 자리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거기, 웅크리고 있는 상사화의 둥그스름한 우주 집착을 끊어버린 듯 사진첩 속의 정지된 시간처럼 메울길 없는 공백의 거리 깊디깊은 어둠이 눈부시다 목백일홍 김수화 어머닌 자식들 돌보듯 꽃밭을 가꾸셔서 화단은 늘 새로운 꽃을 피웠다 길 가다 울 넘어 낯선 꽃이 보이면 주저 않고 찾아가 한 포기 얻기 어려우면 씨앗이라도 받아오곤 하셨다 어머니의 꽃밭엔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시골에선 보기 힘든 귀한 꽃들의 잔치가 열리곤 했었다 아버지 하늘 길 열고 떠나시고 꽃밭은 큰물 휩쓸고 간 강변 땅콩 밭과 함께 후줄근한 모습으로 몇 년 버티는가 싶더니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꽃밭 갈아엎은 자리에 정구지 호박 가지 오이 고추가 심어졌다 마음을 가꾸시던 어머니의 꽃밭이 이젠 오남매 지키는 일이 가장 컸으리라 마음 밭을 지키던 자식들 제 갈 길 찾아 모두 떠나고 어머니 기도소리 팔월 염천도 물러나 지켜본다. 김수화 약력 자유문학 등단, 한군문협,경북문협,김천문협 회원, 경북여성문학 부회장 논술토론 강사, 생각하는 글쓰기 교실 운영, 시집 ‘햇살에 갇히다‘발간  
154 낙동강 외1편/권천학 file
편집자
3383 2011-10-31
11.11월 18호 시 낙동강 권 천 학 흔들지 마라 무심(無心)의 발걸음으로 너덜샘을 떠나 구불구불 골짜기들을 지나서 안동 땅 감아 안느라 허리 휘어가며 모래턱 만들어 쉬엄쉬엄 내닫기도 하고 철교 아래 이르러 피 묻은 한 시대의 시름으로 굳어진 녹물 씻어내며 한 숨 참고, 더러 고시랑거리는 풀잎소리 엮어내느라 여울도 지다가 도란거리는 마을 앞을 지날 때는 고샅에서 새어나오는 소문도 실어내며 백리도 넘는 바다에 이르는 길을 서두는 일 없이, 멈추는 일도 없이 밤낮없이 흐르노라 어깨 죽지에 깃든 논과 밭 강물에 기대어 삶을 경작하는 뚝심좋은 사람들 뿌리 아래 스며들어 풀들을 키워내고 목숨의 씨알 거두는 노곤함도 잊고 부르는 땀 젖은 노동의 메나리 곡조에 줄기줄기 피워내는 들꽃으로 화답하는 융숭한 잠 깨우지 마라 잠자는 듯 누워서도 모두 기억하는 속살의 역사 그 땅을 적시는 땀방울로 너끈한 물줄기 온갖 목숨들 가득 품어 안고 새끼 쳐 기르며 함께 가는 먼 길 자연으로 흘러가는 발걸음 막지마라 묵계서원에서 바람차 한 잔 권 천 학 장마철 지난 탓인지 가르침 외면한 채 살아가는 눅눅한 죄스러움 탓인지 낡은 기둥 받들고 있는 주춧돌 틈에 삿갓 쓴 버섯 돋아 조용하고 허물어진 담장을 타넘어 햇살도 가득, 소리 없이 뿌려지는 뜰 안 매미들끼리 모여서 글 읽는 소리 쟁쟁한 9월의 묵계서원 삭아가는 세월 잠긴 대문 빗장에 걸려 기진해있고 주인도 문지기도 없는 자갈마당에 잡초 우북하여 집 안팎이 온통 쓸쓸함 뿐인 빈집 빈 마당 조용히 귀를 열어 나지막하게 글 읽는 소리 듣고 있는 녹슨 자물통 늙은 몸으로 댓돌 위에 누워있는 무심한 한 시대를 무심으로 지키고 있어 옛 어른의 한 세월이 무색하여 돌아서다가 나지막한 처마 아래, 입을 다문 채 내려다보고 있는 현판과 눈인사 나누는 사이 안부 궁금하던 차 헐린 담장을 넘어 마실 나온 까치 한 마리 앞장 선다 지나가던 바람 한 줄기 서둘러 문밖에서 읍하더니 너울너울 손 흔드는 칡넝쿨과 함께 마지막 예를 올리며 바람에 꿀을 풀어 타내는 바람차 한 잔, 칡꽃 향기가 그나마 빈 가슴을 달래준다 ----------------------- 약력 *여원에 단편 「모래성」당선, 부록으로 출간. *여성중앙에 단편 「끊임없이 도는 풍차」당선. * 시 「지게」, 「삶의 중심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현대문학 데뷔. * 「저녁노을 붉은 꽃」, 「끈」등 드라마 당선(KBS, SBS) *월간 어머니 편집장, 풀잎문학 주간 역임. *서울신문 컬럼니스트, 관악문화신문 논설위원, 컬럼니스트 역임. *진단시동인 역임.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블루노트』발행(2002~2007년). *시 「2H₂+O₂=2H₂O」외 16편으로 하버드대학 번역대회 우승. *단편 「오이소박이」로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 *시 「금동신발 」외 9편으로 코리아타임즈 번역대회 시부문 우승 *저서 첫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을 비롯 최근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까지 단독시집 9권 공저, 동인지 다수 편저 <속담 명언 사전> 현재 토론토 거주. 이메일 impoet@hanmail.net  
153 먼 꽃 외1편/권오윤
편집자
3648 2011-10-31
11.11월 18호 시  먼 꽃 권 오윤 강 건너 꽃 들판이 더 어여뻐 물 건너 무릎앉아 가슴을 열었더니 구절초 송이마다 멍이 들었고 코스모스 한 잎은 숨을 죽였다. 우는 듯 웃고 있는 꽃 옆에서 나도 그저 우는 듯 웃는 한송이 꽃이다. 건너온 강둑 이만치서 보니 있던 자리도 그저 어여쁜 꽃밭이다. 아, 먼 꽃들은 내 먼 꽃들은 다 그만치서 어여쁘다. 입추 입추가 되면 귀뚜라미가 운단다. 할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후로 귀뚜라미소리는 입추 지나서만 내 귀에 들렸습니다. 무덤가 잔디는 이제 다 자랐는지 지난해 심어둔 국화는 심심하신지 백로 지나면 가 보려는데 오늘 밤 귀뚜라미 소리가 동그란 할매 젖가슴 따뜻하게 식은 그곳으로 먼저 떠나갑니다. 딸들에게 ‘입추 지나니 귀뚜라미가 울지?’ 해놓고선 혼자 돌아누워 귀뚜라미대신 울어보는 밤입니다.  
152 자위하는 남자/고창근 file [3] (2)
편집자
11356 2011-09-30
11.10월 17호 소설  자위하는 남자 1. 그가 그림의 포장지를 벗겨냈을 때 아내는 기겁을 했다. “망측해라. 이게 뭐예요. 이게.” 아내는 무슨 징그러운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림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애원이라도 할 듯한 간절함이 서려있었다. “영애가 보면 어떡하려고요. 빨리 치워요.” 아내가 딸의 방을 흘긋거리며 다급하게 말했기에 그는 꾸지람을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인 채 서재로 그림을 들고 들어갔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상황이었다. 아내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구박받을 줄은 몰랐다. 그는 무슨 설명이라도 했으면 싶었지만 도무지 말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어디에 걸어둔담. 그는 이제 막 퇴근했기에 몹시 피곤함을 느꼈으나 그림을 책상에 기대어 둔 채 벽을 둘러보았다. 책상 앞에는 창문이 있고 옆에는 책장이 이어져 있었기에 그림을 걸기에는 마땅치가 않았다. 그는 책장 옆에 그림을 세워 놓고 천천히 책상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한참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사내가 옷을 몽땅 벗은 채 두 손으로 자위를 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그림이었다. 허릿살이 나오고 약간 벌린 두 다리의 허벅지와 엉덩이에 살이 제법 붙은 영락없는 중년의 사내였다. ‘자위하는 남자’ 그는 그림을 바라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한 긴장된 그의 표정이 사내 앞에 나타났다. 그림은 배경이 없이 그냥 거울에 그려져 있었기에 그의 모습이 그림 옆 거울에 비쳐졌다. 자위하는 사내의 앞에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의 모습이 일종의 배경이 되어 거울 속에 있었다. 저녁을 먹으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그는 사내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서재를 나왔다. “아빠 무슨 그림 사오셨어요?” 딸이 물었고 아내가 나섰다. “얘. 말도 마라. 망측하게. 대체 그림이 아니고. 남사시럽게.” “무슨 그림인데요?” 딸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서재로 들어가려고 하자 아내가 기겁을 하며 딸의 팔을 잡았다. “그건 그림도 아니래도. 그리고 그런 건 너희들이 보는 게 아니야.” 딸은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 또한 딱히 그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자 자, 어서 밥 드셔요. 넌 방에 들어가 공부 해.” 아내는 딸을 방으로 밀었다. 그는 밀려들어가는 딸과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뭔가 불쾌한 기분이 명치께에 머물렀다. 누군가에게 몹시 경멸을 당했을 때의 느낌하고 비슷했다. 그는 식탁에 앉았다. “내일 당장 그림 치워요.” 아내는 국이 들은 그릇을 식탁에 놓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그림 살 생각을 다 했어요?” 아내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건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그 그림을 사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림을 사기는커녕 전시회에 가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그림을 샀다니. 그것도 예쁜 꽃 그림이나 풍경화가 아닌 인물화를, 자위하는 사내 그림을. 그는 들었던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왜요? 속이 안 좋아요?”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냐.” 그는 너무나 피곤했기에 쉬고 싶었고 서재로 들어갔다. 뒤에서 아내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그는 무시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림을 사왔는데도 뭔가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두 다리를 벌리고 두 손을 앞으로 가져간 사내가 뒤를 돌아 그를 보고 있었다. 사내는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를 돌아보느라 비틀어진 등은 애잔한 느낌을 주었다. 며칠 동안 고심하다 산 그림이었다. 며칠 동안 끙끙 앓다 산 그림이었다.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을 본 듯했다. 마치 자신이 자위를 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전시장에 들어갈 때부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던 거 또한 사실이었다. 2. 퇴근하던 길이었다. 출장을 갔다가 부장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조금 이른 시간에 퇴근하다 들른 갤러리였다. 시간은 오후 5시를 조금 넘었을 텐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집으로 향하지 않고 무작정 거리를 걷던 중이었다. 매번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뛰어다니던 그는 오랜만에 거리를 천천히 걷던 중이었다.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은 탓인지 거리는 조금 한가한 편이었다. 왠지 목적 없이 걷고 싶었다. 객기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몸에서 물기가 서서히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이 미라가 되어가는 듯 했다. 그는 조금 더 걷다가 눈에 띄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때 그는 가로 세로 1M가 조금 큰 펼침막을 보았다. 김선우展 - 또 다른 나. 개인전을 알리는 흔하디흔한 펼침막이었다. 시선 갤러리. 펼침막 옆에는 세로로 된 나무에 눈 그림과 함께 갤러리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무심코 지나쳤다. 개인전을 여는 이도 모를 뿐만 아니라 갤러리 역시 처음 보는 거였다. 몇 걸음 더 걸어갔을 때 그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한번 가봐. 누군가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한번 가보라니까. 또다시 같은 목소리가 그에게 재촉했다. 왜 이럴까. 며칠 동안 야근해서 몸과 마음이 피곤해서 그런가, 했다. 그러던 순간 그는 전시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절박한 무엇이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오던 길을 되돌아 시선 갤러리로 들어갔다. 김선우展은 제2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홀에 있는 20대의 아가씨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는 목례를 하고는 쭈빗거리며 제2관으로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몇 쌍과 중년 여인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가 평소에 상상했던 그림들 하고는 달랐다. 전시장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으레 꽃 그림이나 풍경화를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림들은 한 점도 없었고 대부분이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 그림이었다. 어쩌다 전신 그림이 있었는데 대부분 성기를 드러낸 채 서 있거나 누워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볼수록 그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자기 자신이 옷을 홀라당 벗고 서 있는 것 같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원 이런 그림을. 그는 괜히 왔다는 후회감이 밀려 왔지만 짐짓 팔짱을 끼고 그림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은 일행들과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곤거리거나 킥킥 웃었다. 누군가 함께 왔으면 이런 수치심이 덜 했을 텐데. 그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그림을 둘러 보다 한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흡. 숨이 확 멈추는 것 같았다. 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뿐 그를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붉게 오른 얼굴에서 열이 확확 났다. 음. 그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누가, 나를. 그는 불쾌감에 몸을 떨며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락없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그림 옆 하단에 붙은 제목을 보았다. 자위하는 남자. 그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홀라당 벗은 사내가 두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성기 쪽으로 가져간 채 뒤를 돌아보는 그림이었다. 사내는 사람 키만큼 높고 두 팔 넓이의 거울 속에 2/3쯤 차지하고 그려져 있는데 살이 오른 허리와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로 볼 때 영락없이 중년인 그 자신이었다. 마치 자신이 자위를 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그는 정신이 들었을 때, 갤러리 밖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떻게 갤러리를 빠져나왔는지 기억에 없었다. 여전히 불쾌감과 수치심이 느껴졌다. 그는 걸었다. 갑자기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순간순간 그 자신이 거울 속에 들어가 전시장에 걸려 있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젊은 남자 여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는 환영을 보기도 했다. 그는 밤새 비몽사몽으로 갤러리에 걸려 있다 새벽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도 수치심과 불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아내는 얕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베란다로 가서 담배를 연거푸 세 대를 피웠다. 목이 싸하게 따끔거렸고 윗배가 울렁거렸다. 그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치 얼굴이 물기가 모두 빠져나가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 왜 그래요?” 그제야 일어나 거실로 나온 아내는 그를 보고는 걱정을 했다. “아냐 잠을 못 자서.” “피곤해 보여요. 어디 안 좋아요?” “아냐.” 그는 짐짓 아내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아내는 그를 바라보며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자꾸만 걱정스레 물었다. 딸도 그의 푸석한 얼굴을 보더니 무슨 일이 있느냐고 했다. 그는 순간, 짜증이 났지만 애써 아내와 딸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곤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아침도 먹지 않고 출근했다. 도저히 아침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루를 보내고 어제 갔던 갤러리로 갔다. 갤러리 홀에는 아가씨가 어제처럼 목례를 했다. 그는 곧장 제2관으로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역시 어제처럼 연인처럼 보이는 몇 명의 젊은 사람들과 중년으로 보이는 남녀 몇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대충 훑어보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 어제 그 그림에 앞에 멈춰 섰다. 어제처럼 역시 그림 속의 사내는 다리를 벌리고 홀라당 벗은 몸으로 자위를 하다 그를 뒤돌아보았다. 역시 자기 자신이었다. 수치감과 불쾌감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순간 쿵, 하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몸 내부에서 들렸다. 그 자신의 몸도 아래로 추락하는 듯 했고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더니 슬픔 같은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뤄지는 일이라 그는 당혹해 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제어하지 못 했다. 한참동안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 문득 사내 앞에 서 있는, 거울에 비친 그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사내가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또다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갤러리 밖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참 묘했다. 어떻게 갤러리 밖으로 나왔는지 도통 기억에 나지 않았다. 그는 어제처럼 무작정 걸었다. 4. 역시 그날 밤에도 그는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마치 그 자신이 자위를 하며 갤러리에 걸려 있는 기분이 밤 내내 들었다. 다만 자위를 하다 들킨 당혹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제처럼 수치심이나 불쾌감보다도 대신 그림 속의 그 자신에게 동점심이 일었다. 불쌍했다. 그러자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몸 어딘가에서 쿵,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 무렵 그는 잠자리에 일어나 잠을 자지 못 해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베란다로 가서 어제처럼 담배 세 대를 피웠다. “어머. 이럴 어째.”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빠. 얼굴이 왜 그래요.” 방금 일어난 딸은 가까이 오지도 못 하고 비명을 지를 듯 했다. “당신 안 되겠어요. 오늘 병원에 한번 가 봐요. 보약을 한 질 먹든지.” 아내는 곧 울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보약은 무슨. 그는 부리나케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면도를 하면서 그는 오늘 그 그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림이 갤러리에 걸려 있는 한 그는 매일 밤 갤러리에 걸려 있어 잠을 못 잘 것이고 낮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못 할 것 같았다. 그는 아침도 먹지 않고 출근을 했다. 보는 직장 동료들마다 걱정하는 눈빛으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말하는 것조차 귀찮아 고개를 가로 젓기만 했다. 역시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부장한테 지적을 받기도 했다. 눈이 쑥 들어갈 것 같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그는 어제처럼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몇 숟가락 들다가 그만두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고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고 귀찮아졌다. 퇴근하고 술 한 잔 하자는 입사 동기인 L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L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퇴근하자마자 갤러리에 찾아갔지만 화가를 만나지 못 했다. 안내하는 아가씨는 그림을 팔 목적으로 전시를 하는 게 아니라 갤러리 기획전이라고, 물론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팔기도 하지만, 화가와 먼저 얘기가 되어야 갤러리에서 팔 수가 있다고 했다. 화가는 아마도 오늘은 만날 수 없고 미리 약속 시간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그림을 다른 이에게 절대로 팔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오겠으니 화가에게 연락해 달라고 했다. 다음 날 그가 갤러리를 찾아갔을 때 화가가 와 있다며 사무실로 그를 안내했다. 화가는 보통 키에 약간은 마른 형의 남자였다. 금테 안경 속의 눈이 날카로워 보였다. 화가는 대뜸 어째서 그림을 살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을 못 했다. 그림 속의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 같다고는 말 할 수가 없었다. 입에는 나오는 대로 말했다. “그냥 소장하고 싶습니다.” 화가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 그림은 원래 팔려고 그린 게 아닙니다. 집에 걸어두려고 이런 그림을 살 사람도 없고요.” “저는 꼭 이 그림을 사야겠습니다.”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른 관에는 풍경화나 정물화 같은…… 집에 걸어둘 만한 그림들이 많은데요.” “이유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냥 팔아주십시오. 이 그림이 꼭 필요합니다.” 그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화가는 껄껄 웃더니 옆에 앉은 여자를 소개하며 여기 관장님하고 얘기하라고 했다. 관장은 지금은 예약만 해 놓고 일주일 뒤 전시회가 끝나면 가져가라고 했다. 그는 금액은 묻지도 않고 고맙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일주일 동안이나 전시를 더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여전히 밤이면 그 자신이 벌거벗은 채 전시장에 걸려 있다는 환상에 빠졌고, 당연히 잠을 못 잤으며,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을 했다. 점심은 몇 숟가락 들다 그만두었다. 부장한테 불러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추궁을 당했고 퇴근하면서 그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는 그림 속의 사내를 불러내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림 속의 인물을 불러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술을 마셨고 그림 속의 사내를 생각했다. 일주일 동안 퇴근하면 곧장 전시장에 들렀고 자위하는 남자를 보았다. 5. 그림을 사 온 날 아내에게 무안을 당했지만 그는 그림을 집으로 가져 온 것으로도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는 그날 밤 여전히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서재에는 침대가 없어 요를 깔고 바닥에 누웠지만 여전히 자신이 거울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그는 아내의 성화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출근을 하지 않았다. 몸도 지쳐있었지만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집에 있고 싶었다. “당신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잠도 서재에서 자고.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아내는 걱정을 했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씩 웃어보였지만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내는 오늘 하루 쉬라고 했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쉬라고 했다. 그는 아침 식사 내내 숟가락만 만지작거리다 서재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학교 간다는 딸의 인사말이 들려 왔고 그는 잘 갔다 오라는 말을 하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있는 거울 속의 자위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비몽사몽으로 지냈고 점심 먹으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거실로 나왔다. 점심은 장어탕을 끓어놓았지만 그는 입맛을 잃은 지가 오래라 몇 숟가락 뜨질 못 했다. “억지로라도 드세요. 당신이 건강해야지요.” 아내는 사정을 했고 그는 구역질이 나는 걸 겨우 참으면 국물을 다 비웠다. 하지만 화장실에 간 그는 이내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그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누웠다. 만사가 다 귀찮았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저녁에 딸이 다녀왔다고 문을 열고 인사를 했지만 그는 누운 채 인사를 받았다. “아빠가 이상해.” 딸이 아내에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다음날도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지만 그는 받지 않았고 아내가 대신 그의 증상을 말해 주었다. 입사 동기인 L한테서도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신호음이 끊기자 휴대폰의 배터리를 빼버렸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20여 년 동안 결근은커녕 지각이나 조퇴 한 번 하지 않았다. 또한 애교 있는 아내랑 대학1학년이 된 딸이 있는 집에 만족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했다. 회사에서도 인정받았다. 근데 이게 왠일인가. 그는 모든 게 귀찮아졌다. 출근하기 싫었다. 나는 무얼 바라고 살아왔나. 김선우展-또 다른 나. 그는 개인전의 그 문구에 집착했다. 또 다른 나는 무엇인가. 갑자기 이렇게 살아온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주일째 출근도 안 하고 지내는 동안 아내는 별별 보양식을 다 해 주었지만 그는 먹자마자 토했다. “여보 제발 병원에 가요.” 아내는 몇 번이나 애원을 했지만 그는 서재에서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아프면 우리 집은 어떡해요. 당신이 가장인데.” 아내는 울면서 사정했다. 아내는 신경정신과에 가자고 했다. 2주일째 되는 날 그는 할 수 없이 신경정신과에 갔다. 50대 후반의 의사는 그의 증상을 묻더니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 스트레스 때문이니 우선 약을 먹어 보라고 했다. 약은 아침에 먹는 약과 점심, 저녁에 먹는 약이 각각 달랐다. 저녁에 먹는 약은 낮에 먹는 약보다 파란 약 두 알이 더 많았다. “회사에는 제가 잘 얘기해서 병가를 내놨어요. 그러니 당신은 우선 몸부터 추스르세요.” 아내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이미 회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사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잠을 잤다. 낮에 일어나 점심을 먹고 약을 먹고 잠을 잤다. 저녁에 일어나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잠을 잤다. 계속 잠이 왔다. 그는 계속해서 며칠 동안 밥 먹고 잠만 잤기 때문에 그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 속에서만 어렴풋이 그림 속의 사내를 만났다. 여전히 그 사내는 자위를 했다. 그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살이 올라 화장실이나 밥 먹으러 거실로 나올 때마다 끙, 하며 두 팔을 바닥에 집고 상체를 겨우 들어 올린 후 일어서야 했다. 옷은 어느새 작아져서 몸에 꼭 끼였다. 아내는 커다란 운동복을 사주었고 그는 그 옷만 매일 입었다. 6. 어느 날 그는 방문이 열리는 것을 이불 속에서 들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곧이어 방문이 닫혔다. 그는 일어나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 하얀 쪽지가 있었다. 그는 기어가 쪽지를 풀었다. 여보. 저 오늘부터 식당에 나가요. 밥 차려주지 못 해서 죄송해요. 상은 차려놨으니 굶지 마세요. 당신이 다 나을 때까지만 식당에 나갈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식당은 밤 10시 문 닫으니 끝나면 곧장 올게요. -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그는 침침한 눈을 끔벅이며 몇 번이나 읽었다. 그는 회사에서 잘렸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지낸 지가 몇 개월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회사로서도 많이 참아준 것 같았다. 잠깐이나마 20여 년을 다닌 직장에서 이렇게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해고 시킬 수 있는가 생각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다만 경제적으로 집안이 쪼들리는 것이 걱정이 되었으나 이내 모든 것이 귀찮아진 그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부터 그는 아내가 출근하고 난 뒤 주방으로 가서 아내가 차려놓은 식탁에 밥솥에서 밥을 퍼서 먹었다. 국이 식었지만 달게 먹었다. 때를 거르지 않았고 반찬은 남김없이 먹었다. 몇 번 더 신경정신과에 갔을 때 약은 처음과 좀 달랐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따로 먹는 것은 변함이 없으나 알약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의사는 많이 좋아졌으니 마음 편히 먹으라고 했다. 약을 먹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식욕이 일고 잠만 잔다고 했다. “너무 잠이 오면 파란 알약은 드시지 마세요.” 의사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많이 나은 것 같아 좋아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전과 같이 직장도 나가고 할 거예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 뒤로도 왕성한 식욕에 잠만 잤다. 살은 계속 쪘기에 아내는 다시 옷을 사 와야 했다. 그는 이제 일어서거나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러나 약을 먹으면 잡생각이 안 들고 하루 종일 멍하게 지냈다. 다행히 잠은 잘 잤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겨우 일어서서 밖으로 나오니 거실에 웬 여자들 서너 명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는 당황해 하고 있는데 아내가 다가 왔다. “친구들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아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화장실…….” 그는 말을 얼버무리며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날 저녁 아내는 서재로 왔다. “당신 이제 제발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아내의 말투는 싸늘했다. 그는 당황해서 무슨 말이라고 꺼내려고 하는데 아내는 이내 서재를 나갔다. 그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제 식사 때가 되면 거실의 동정을 살피고 아무도 없을 때 가만히 나와서 밥을 퍼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먹었다. 아내는 그를 위해 밥상을 차리지 않았다. 반찬도 따로 만들지 않아 그는 냉장고에서 있는 대로 반찬을 꺼내 먹었다. 하지만 그는 식욕이 왕성해서 한 끼에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점점 딸의 얼굴도 보지 못 했다. 아침에 학교에 나갈 때나 집에 오면 서재 문을 열고 다녀오겠습니다, 혹은 다녀왔습니다, 라고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그러다 점차 문을 열지 않고 인사를 했고, 언제부턴가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따지거나 훈계를 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용돈도 주지 못 하는 아빠는 그렇게 대접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 딸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땐 낮에 아무도 없을 때 나와 딸의 방을 기웃거렸다. 사진도 보고 흐트러진 옷도 잘 걸어놓고 화장품 냄새를 맡기도 했다. 책상위에는 가족끼리 관악산에 갔다가 정상 바위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벽에는 백인 청년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왠지 딸의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7. 그는 몸이 불어나서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두 다리로 뒤뚱거리며 걷는 것보다 두 팔과 무릎으로 기어 다니는 것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별로 기어 다닐 일이 없기 때문에 그는 하루 종일 누워 지냈다. 가끔 무료하기도 했고, 가끔 외로울 때도 있었고, 아주 가끔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는 낮이고 밤이고 수시로 잠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그의 인생에 크게 방해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낙은 자위하는 남자를 보는 것이었다. 항상 발가벗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위하는 남자. 뒤를 돌아보며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 그 사내도 언제부턴가 그처럼 살이 찌기 시작했다. 처음 그림을 사왔을 땐 허릿살이 오르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살이 통통한 정도였지만 지금은 우람한 채구에 팔뚝이 보통 사람 다리 굵기만 했다.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 자신이 살이 불어났기에 그림 속의 사내도 살이 불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언제부턴가 그의 아내가 간섭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머리카락은 어깻죽지까지 내려왔고 수염은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림 속의 사내도 머리가 길게 내려왔고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였다. 아내는 점점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언젠가 새벽에 아내가 퇴근하고 난 뒤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에 나왔을 때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방에서 아내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누군가 오랫동안 통화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남자인 듯 했으나 그는 짐짓 모른 채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내의 얼굴을 본 지도 꽤 지났다고 느껴지던 어느 밤이었다. 그는 기어 나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안방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새벽인 듯 했으나 아내는 금방 들어온 듯 했다. 역시나 알코올 냄새가 거실에 가득했다. 딸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방문이 열려진 채로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안방으로 기어갔다. 아내는 옷을 모두 벗고 침대 위에 누워 자고 있었다. 자다가 가끔 휘유, 하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역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그는 아내의 벗은 몸을 천천히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아직은 봉긋한 유방이며 살이 오른 허리가 창문으로 들어온 빛에 온전히 드러났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아내의 다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음. 그의 손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를 거쳐 음부에 와 닿았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의 몸을 만진다 생각했다. 아내는 다시 한 번 휘유, 긴 숨을 토해 내며 그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의 손은 배꼽을 지나 유방으로 올라갔다. 물컹한 유방이 손 가득히 들어왔다. 음. 그는 아내의 유방에 얼굴을 묻었다. 알코올 냄새와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갑자기 울고 싶었으나 참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몸이 불어났기에 옷 벗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땀을 흘리며 겨우 옷을 벗었다. 아내는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그는 아내 곁에 누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 옆에 누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팔을 밑으로 넣었다. 그리고 아내의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아내를 꼭 껴안았다. 머리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났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내도 잠결에 그를 꼭 안았다. 음. 그는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아내의 다리를 벌렸다. 그리곤 자신의 하체를 다리 사이로 넣었다. 그는 아내의 몸속으로 성기를 넣으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그의 성기는 발기되지 않았다. 휘유. 긴 김숨을 토해내던 아내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가만히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눈을 크게 떴다. “악.” 아내는 비명을 질렀다. 나야. 나. 그는 말을 했지만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우우, 하는 소리였다. “누, 누구야.” 아내는 이불을 껴안고 침대 머리맡으로 가 오들오들 떨었다. 그는 몇 번이나 당신 남편이라고 말을 했지만 우우, 우우우, 하는 소리만 입으로 나왔다. “악.” 아내는 여전히 그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손을 저으며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떨었다. “다, 당신?” 마침내 아내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당신. 방 밖으로 나오지 말랬잖아. 나가! 나가란 말이야.” 아내는 베개를 그에게 던졌다. 그는 할 수 없이 옷을 집고 엉금엉금 기어 방을 나왔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누웠다. 슬펐다. 그는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발기 되지 않은 성기는 오므라져 있었다. 그는 그림을 보았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손을 움직였다. 성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성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음. 그는 신음을 토해내며 계속 자위를 했다. 8. 아내는 집에 있을 때도 그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는 딸하고만 얘기를 나누었고 음식도 둘이서만 먹었다. 또한 샤워를 하고 난 뒤에는 마치 집에 아무도 없는 양 벌거벗고 다니기도 했다. 딸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거나 외박을 할 때면 마치 집에 혼자 있는 양 샤워를 하곤 발가벗은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하고 남자친구랑 오랫동안 통화를 하며 야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딸은 주로 새벽까지 컴퓨터를 했고 오전에는 잠을 잤다. 오후에는 외출을 했다. 치마의 길이는 점점 짧아졌고 지나간 자리에는 진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아내가 집에 있을 때 그는 곤혹스러웠다. 아내 혹은 딸이 집에 있을 때면 그는 죽은 듯이 방안에서 요의도 참고 지내야 했다. 또한 식사를 하기 위해선 아내와 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쩌다 그는 요의를 참지 못 해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때 아내와 딸은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그가 문을 열고 엉금엉금 기어 거실을 가로 질러 화장실에 갈 때도 두 모녀는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 하고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는 몇 번 그렇게 되자 과감하게 아내 혹은 딸이 있을 때도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그들은 그를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그가 거실에 있는데도 아내와 딸은 혼자 있을 때처럼 각자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오랫동안 했다. “잠깐만 참으라고. 오늘 밤에 죽여줄 테니까.” 아내는 깔깔거렸다. 아내와 딸이 없을 때 그는 가만히 기어 나와 그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었다. 아내가 그를 위해 음식을 따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어떨 땐 며칠이 지난 음식을 먹을 때도 있었고 쓰레기통을 뒤져 먹기도 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먹을 수 있을 때가 좋았다. 아내가 며칠씩 안 들어올 때는, 딸은 아예 집에서 음식을 해 먹지 않았기에, 그 또한 며칠씩 굶어야 했다. 9. 며칠째 아내와 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굶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만들기 위해 사놓은 야채실의 호박이나 파, 심지어 국수를 생으로 먹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금방 동이 났다. 그는 굶었다. 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이불 속에서만 지냈다. 전화라도 왔으면. 그는 외로웠다. 처음에 몇 번 그를 찾던 회사 동료나 친구들의 연락이 끊어진 지는 오래 되었다. 그는 무인도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누구라도 찾아왔으면. 그는 이불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딩~동!” 며칠이 지났는지 그는 혼미한 정신으로 누워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그는 꿈인가 했다. “딩~동!” 또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액정화면엔 30대로 보이는 여자 둘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인터폰을 들었다. “예. 초대장을 드리려 왔습니다.” “우우.” 그는 무슨 초대장이냐고 물었다. “초대장을 드리려고 하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 왔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천국에 갑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초대하려고 합니다.” 그는 어쨌든 초대한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가 겨우 상체를 들고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 악!” 그들은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다 그를 보고서 비명을 질렀다. “우우.우우우.” 그는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어머!” “으악!”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문을 쾅 닫았고 뒤이어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슬픔 마음에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서 서재로 들어갔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매일 자위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지냈다. 며칠 후 아내가 다녀갔지만 음식을 먹지 않고 옷가지만 챙겨갔기에 그는 먹을 것이 없었다. 딸은 새벽녘에 들어와 저녁까지 자다가 해가 지고 난 뒤 또 집을 나가서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며칠 뒤 그는 혼미해 가는 정신으로 자위하는 남자를 보고 있는데 딩동, 하며 인터폰 소리가 울렸다. 누굴까. 그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두 여인을 떠올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곧이어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문이 열려 있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시나?” 여전히 여자의 목소리. 그는 몇 번이나 몸이 뒤척인 후에야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거실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데 남의 집에 와서 무얼 하는가. 그는 두 팔을 앞으로 짚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그릇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휘청거리는 팔에 힘을 주며 엉금엉금 기어 거실로 나왔다. 회색빛 제복을 입은 여자가 정수기 뚜껑을 열고 행주로 닦고 있었다. “우우우. 우우.” 그는 여자가 놀랄까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손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악!”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우우, 우우우우.” 그는 여자에게 고개를 가로 지르며 안심하라고 했다. 이 집 주인이라고 했다. “가까이 오지 마!” 여자는 싱크대에서 재빨리 칼을 집어 들었다. 여자는 검정색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칼을 휘두르며 현관 쪽으로 옆걸음으로 나아갔다. “우우우.” 그는 절망스럽게 신음했다. 현관에 다가간 여자는 문을 열자마자 칼을 버리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우우.”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울부짖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왔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문득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의 사내는 여전히 자위를 하다 그를 뒤돌아보았다. 음. 그는 그림 쪽으로 팔을 휘청거리며 다가갔다. 그림 앞에 멈춰 선 그는 손으로 사내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동안 사내를 바라보던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이 몸에 꽉 끼였기 때문에 윗옷이 팔에서 잘 빠지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소매 끝을 물고 한 손으로 옷을 쥐었다. 우우. 그는 있는 힘껏 옷을 당겼다. 부북. 옷이 찢어지며 팔이 빠져 나왔다. 바지는 다행히 누워서 바지 끝을 손에 쥐고 힘껏 당기자 다리를 잘 빠져 나왔다. 팬티를 벗자 그의 알몸이 드러났다. 음. 그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 두 손으로 벽을 짚었다. 팔과 다리에 힘을 주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어서고 나자 오랫동안 직립보행을 하지 않은 다리도 덜덜 떨렸다. 그는 벽을 짚으며 그림에 다가갔다. 그림을 마주 보고 섰다. 잠시 그림 속의 사내를 바라보던 그는 그림 속으로 다리를 쑥 집어넣었다. 다리는 마치 물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갔다. 다른 다리도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물속에 잠기 듯 상체를 그림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며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10. 며칠 후 딸이 새벽에 들어와 점심 무렵에 나갔고 그 다음 날 아침 아내가 집에 왔다. 아내는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휘유, 긴 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를 꺼내 달게 한 대를 피웠다. 담배를 빈 병 속에 집어넣은 아내는 주위를 둘러 보다 그의 방에 시선이 머물렀다. “방문을 열어 놓았나.” 아내는 그의 방으로 와서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망측해라. 이 그림이 아직도 여기 있네.” 아내는 잠시 징그럽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다 그림을 질질 끌고 거실로 나왔다. “웬 그림이 이렇게 무겁담.” 아내는 그림을 거실 바닥에 눕혀 놓고 신발장 서랍에서 망치를 들고 왔다. 망측해. 아내는 그림을 망치로 내리쳤다. 순간 사내의 몸이 쨍, 하며 여러 갈래로 금이 갔다. 아내는 한 번 더 망치를 내리치려고 손을 들었다가 잠시 멈추었다.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비명 소리 같기도 했기에 아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다시 망치를 내리쳤다. 쨍. 사내의 몸이 여러 갈래로 깨졌다. 금이 간 부분엔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아내는 다용도실에서 빈 종이상자와 빗자루, 쓰레받기를 들고 왔다. 산산이 깨진 사내를 종이상자에 담았다. 멀리까지 튄 작은 조각까지 쓰레받기에 빗자루로 쓸어 담은 후 종이상자에 부었다. 아내는 종이상자를 현관밖에 내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옷을 갈아 입은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아내는 종이상자를 쓰레기장에 버렸다. *** 문학웹진 <문학마실> 편집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소설집 <소도(蘇塗)> <아버지의 알리바이>  
151 공락중생 共樂衆生 /박희용 file
편집자
3327 2011-09-30
11.10월 17호 수필 공락중생 共樂衆生 강은 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으면 차곡차곡 쌓여 올랐다가 마침내 부드럽게 넘어 다시 흘러간다는 매우 평범한 진리의 표상인 강. 산과 들을 떠나온 온갖 풀씨들을 품고 흐르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놓아 싹 트게 하고 꽃 피게 하고, 인간 생활이 쓰다 버린 온갖 쓰레기들을 싣고 흘러 삭혀주는 강을 바라 볼 적마다 한 작은 인간의 마음은 옷깃을 여민다. 퇴근길 달리기, 강을 안고 달려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작년 봄 이곳 평은 초등학교로 전근 와서 학구 안을 흐르는 평은강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 지 두 해째로 접어들었다. 세상엔 자기 건강을 위해서 하는 여러 가지 운동이 있지만 달리기, 흙빛 강둑길을 밟으며 달리다가 걷다하는 이 운동만큼은 내게 가장 알맞은 운동이다. 선생인 내가 건강해야 우리 반 아이들도 몸과 마음이 건강할 것이다. 봄이 한창 무르익으며 여름을 준비하는 맑은 감성의 계절 속을 달린다. 산벚나무 숲을 지나 세 마리 경비견이 컹 컹 컹 짖어대는 버섯재배 농장을 지나 한참을 달리며 다리를 건넌다. 발이 받는 촉감은 흙과 시멘트가 다르다. 다리를 건너며 힐끗 보니 다리 아래엔 너덧 명의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배터리로 지져대고 있다. 고기 다 죽겠구나 배터리 전기에 감전된 고기는 살아도 산란과 사정을 못한다는데 말이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저걸 어떻게 한다. 내가 나서서 말리면 괜히 내가 오히려 곤경에 처할 거고, 쉬운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엔 없는데 말이다. 신고하자니 핸드폰은 저 멀리 차 안에 놔두었고, 만약 신고하면 신고자가 이 곳 초등학교 교사라고 소문나 학교와 내가 순박한 농촌 지역사회의 지탄과 눈총으로 곤경에 처해질 거고 말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배터리 전기로 죽어나고 불구가 되는 평은강 물고기들을 불쌍히 여기고 신고할 생각까지 하는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경고한다든지 신고한다든지 하는 행동화의 단계는 나의 영역 밖인 것이다. 다리를 건너 저편 강둑 왼쪽으로 구비를 돌 때까지 안타깝고 찝찝한 마음이다. 천렵꾼들을 힐끗힐끗 보며 조금 달리다니 누가 “선생님!”하고 날 부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가자골 이 마을에 사는 태용이가 아닌가. 할머니와 함께 오고 있다. 연거푸 해서 “선생님! 선생님!” 큰 소리로 부른다. 그 때, 문득 천렵꾼들이 “선생님, 선생님이란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태용이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또 한참을 달린다. 가자골의 끄트머리이다. 평은강이 크게 휘어 금강리 쪽으로 흐르는 물회돌이 백사장을 보며 걷는다. 가자골 끝엔 농가 한 채가 있고 새끼 두 마리를 거느린 어미 개 발바리 한 마리와 개집이 있다. 그들은 날만 보면 열심히 짖는다. 새끼들은 부리나케 농가 쪽으로 도주하면서 연신 뒤돌아보며 짖어댄다. 어미는 자지러지게 짖으며 새끼들의 피난길을 재촉한다. 내가 이 곳 방향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씩 달리기 코스를 한 지도 벌써 두 해 짼데도 아직 내가 매우 낯서나 보다. 인간과 짐승의 관계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도둑도 아닌데 매번 컹 컹 컹 개 짖음을 당하니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저 위 버섯농장 개 세 마리도 얼마나 짖어대고 사나운지 내가 저들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일 미터 뒤를 쫒아오며 정말 두렵게 짖어댄다. 다행히 요즈음은 낯이 좀 익었는지 짖는 소리 데시벨이 좀 낮아지고 꼬리도 탈래탈래 흔들어댄다. 강둑길을 돌면 야트막한 산자락을 끼고 도는 산길이다. 완보를 하며 길섶을 보니 봄 풀꽃들이 한창이다. 자그마한 민들레들이 길섶을 따라 십 여 미터 줄지어 피어있다. 민들레, 한없는 정감을 자아내는 이름이다. 이 땅엔 크게 두 종류의 민들레가 있다. 들 민들레와 인간 민들레. 인간 민들레, 다방이나 술집에서 만나는 2-30대 여인들에게 성씨를 물으면 대게 민씨예요 한다. 어디 민씨? 관향은? 하고 물으면 그녀는 씁쓰레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 민들레,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운다. 한창 봄에는 힘센 자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남들이 아직 겨울의 끝, 따스한 봄 이불 속에 있을 때 미리 싹을 틔우고 자라고 꽃을 피워야 한다. 이 땅엔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들 민들레도 많고, 여윈 몸뚱이 하나로 삶을 헤쳐 나가야 하는 인간 민들레도 많이 있다. 민들레를 보면 진한 정감을 자아낸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며칠 전 많은 민들레를 무참히 학살했다. 이유는 딱 하나,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해서. 지난 토요일 오후에 학교 근처에서 민들레를 두 보따리나 캐서 쪄 말리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보신이 될지는 먹어봐야 알 거 지만, 말로는 한없는 정감을 자아내는 민들레 민들레 하면서 짐짓 자연 애호론자 연 하면서 내 이익을 위하여 하여튼 민들레 학살을 자행했다 나는. 다음날 출근해서 민들레 캐낸 자리를 보려니 눈이 자꾸 사시가 된다. 다시 다리 근처로 뛰어오다 보니 허연 농촌트럭 두 대가 저 건너 지방도로를 급히 달려간다. 왕유리나 금계리 방향으로 간다. 그런데, 조금 전에 있던 천렵꾼들이 하나도 없다. 그새 어디로 갔나보다. 잘 된 일이다. 그들도 알맞게 잡아갔을 거고, 감전사와 감전 성기능 장애를 면한 물고기들은 천만다행이다. 태용이가 크게 부르던 “선생님!” 소리는 분명 아이의 소리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분명 평은강 물고기들의 비명 소리일 거다. 하지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야 뭐 마음속으로만 ‘신고 해버려?’ 하고 생각했지, 행동으로 실천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오후 늦게까지 농사 준비를 하다가 매운탕 생각이 나서 천렵 나선 그들, 한 솥 가득 끓인 매운탕 안주에 막걸리 소주잔 나누며 오늘 저녁 한 때 즐거울 텐데 말이다. 부처님은 ‘공업중생’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공락중생’이 아닐까. 왜냐면 ‘업(業)이란 말은 좀 비극적인 이미지를 내포하는 말이지만,’락(樂)이란 말은 살아있음을 긍정적으로 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모든 것들 삼라만상, 식물과 동물 모두가 공락중생 할 순 없을까. 식물이 뱉는 산소로 동물이 호흡하고 동물이 뱉는 이산화탄소로 식물이 녹말을 만들고 인간이 그것을 양식으로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이 한 가지 기본 원칙이 반듯하게 설 때가 언제일까. 동물의 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인간, 그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 자연이 아니라 이미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음을 간파할 때는 언제일까. 교실에서 선생님이 ‘자연보호를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인간은 자연입니다’를 가르칠 때는 언제일까. 이십 리 남짓 평은강 내 영역을 한 바퀴 돌아 달리고 출발지 건너편에서 강을 건넌다. 종아리를 간질이는 강물들의 맑고 차가운 속삭임이 싱그럽다, 강가에서 얼굴을 씻고 발을 씻다니 벌 한 마리가 지푸라기를 부여잡고 떠내려간다. 사람하고 똑 같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살며시 건져 올려 마른 풀숲에 놓는다. 벌은 자꾸 풀숲 짙은 그늘 속으로 숨는다. 인간인 내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아직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렸는지,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려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말고 무사히 귀가 하여라 벌 한 마리. 박희용 p4092@chollian.net 시집<霜寒圖><양백집>  
150 청소 외1편/윤임수 file
편집자
4055 2011-09-30
11.10월 17호 시 청소 아는 아저씨가 청소 대행 가게를 차렸다기에 번창을 기원하며 찾아갔더니 간판에 푸른 소, 그러니까 청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씩 웃으면서 들어갔더니 소처럼 듬직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열심히 일해서 푸른 내일을 가꾸겠다고 한다. 그 모습이 하도 고와 막걸리 두 잔 들이켜고 잘 될 것이라며 밝게 웃어 주었다. 주인도 덩달아 환하게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돌아보니 간판의 푸른 소도 활짝 웃고 있었다. 경주 읍천리 주상절리 저렇게 고운 부챗살 웃음 나는 지을 수 없네 몇천 년 아니 몇억 년을 더 산다 해도 모든 것 편하게 풀어놓는 저 단단한 웃음 나는 지을 수 없네 거센 파도 앞에 하염없이 서 있어 본 적 없는 나는, 시린 바람 앞에 온몸 들어내 본 적 없는 나는, * 윤 임 수 - 충남 부여 출생 -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 - 시집 『상처의 집』(실천문학사. 2005) - 한국작가회의 회원 - 한국철도공사 홍보실 근무 - 대전시 중구 문화동 한밭우성아파트 111동 905호 - 010-2044-7699 - yunis007@hanmail.net  
149 새로운 학설 외1편/ 김재순 file
편집자
3717 2011-09-30
11.10월 17호 시 새로운 학설 공무도하가는 예언의 노래라네 오늘 그 예언의 성취를 보네 웃옷을 풀어헤친 더벅머리 중년 사내 그라목손 병을 들고 비틀비틀 강가로 가고 발끝에 꿰었던 고무신을 팽개치고 가지마라, 그러지 말거라 꼬부랑꼬부랑 쫒아가다 엎어지는 그의 어미 모래밭이 어스름에 잠기는 낙동강 가에서 공무도하가를 성취시키는 저 추레한 사내는 산 너머 마을에 서마지기 다랑논 일구고 돌담위로 벙글벙글 해바라기 올리던 사람 어린것들 재롱에 너털웃음 웃던 사람 그러나 강물은 역류했네, 조개더미 싣고 소용돌이치며 밀려들어 마을은 패총이 되고 그는 이제, 목수였던 그 사람처럼 예언을 성취시키네 낡은 운동화 가지런히 물가에 벗어놓고 공무도하가를 다 이루었네 나를 울리는 사람1 계림16통 통장님은 나를 울려요 팔할의 주민이 사유재산과 노동력이 빙점 그 빙점이 무덤처럼 이룬 16통, 통장님은 가로의 나무들을 베고 다듬고 꽃가꾸는 인부 중학교 문 앞에는 가셨을라나 글쎄요. 그러나 통장님은 나를 울리는 능력이 탁월해요 중앙선을 뛰어넘어 삿대질하며 담당직원의 멱살을 잡으려다 마음을 쓰다듬어 석문처럼 닫힌 그 마음을 열어젖히는 통장님 마음으로 살아라, 그게 사람 사는 이치다 그의 그 말은 내 마음의 돌덩이도 깨뜨려 맑은 눈물 퐁퐁 솟게 합니다. 당신이 내게 사랑한다고 취한 듯 속삭여도, 골백번 속삭여도 내 머리카락 한 올이 움직일까만,  
148 호뚜기 사랑 외1편/최순섭 file
편집자
6292 2011-09-30
11.10월 17호 시 호뚜기 사랑 최 순 섭 봄물이 오르면 이때다 싶어 수양버들 푸른 등껍데기에 도레미 구멍을 파고 세상을 향해 힘껏 불어봅니다. 호~뚜 호~뚜 함박꽃 같은 그 애와 마주보고 불면 웃음소리 흘러나오고 혼자 시냇가에 앉아서 불면 슬픈 노래가 나온다는 걸 사춘기 분홍 얼굴에서 보았습니다. 구불텅한 흙길 따라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저물녘 밭둑에는 어깨 축 늘어진 수심 깊은 수양버들이 서있습니다. 이때다 싶어 속이 빈 호뚜기를 꺼내 눈 빨갛도록 힘껏 불어 봅니다. 호~뚜 호~뚜 아, 수양버들 아버지가 춤추는 걸 보았습니다. 슈퍼 선착장 한여름 밤 아파트 입구 슈퍼 앞 노을 주점을 지나 고단한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배들이 후미진 벤치에, 더러는 흙바닥에 철퍼덕 닻을 내립니다. 막걸리 부어놓고 새롭게 떠나는 마지막 항해 이따금 타고 내리는 낯익은 승객들도 파도에 떠밀려옵니다. 누구나 방향키를 잡으면 선장이 되듯이 목적지는 그때마다 다르지요, 세계지도 펼쳐 들고 숨 쉬는 고래들이 수면 위로 나올 때쯤 목울대 카랑카랑 아파트가 들썩입니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은하 건너 아늑한 그 분의 집인데 술로 떠가는 배는 언제나 항로를 벗어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흔들립니다. 최순섭 : 충남대전 출생. 1978년<시밭>동인으로 작품활동시작. 2007년 <작가연대> 등단. 고양작가회 이사. 열린시조학회. 창작21작가회 회원.  
147 계정溪亭/박찬선 file
편집자
3962 2011-09-30
11.10월 17호 시 계정溪亭  내가 사랑하는 집이 있습니다. 기왓장이 번들거리고  추녀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대궐 같은 큰 집이 아닙니다. 방 한 칸에 마루 한 칸으로 된  아주 작은   띠집은 좁기가 나룻배와 같은* 지붕은 톡톡하게 짚으로 덮고  마루 옆에는 판자문이 나란히 달렸는데  삐걱 문을 열면  종가가 올려다 보입니다. 한 사람이 들고나기에 알맞은 키가 닿을 듯한 예쁘장한 낮은 문이  우산천을 향해 있습니다.  온통 물소리가 넘치고  솔 소리도 덩달아 들어오고  이따금 달님이 찾아와 놀다 갑니다.  우산천이 물길을 따라 굽이돌아 흐르듯 첩첩 들어온 산길을 보며  앞길을 열어갑니다. 사람이 들면  큰 집이 되는  홀로 없는 듯 자유로워지는 큰 뜻이 사는 집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는 내가 무척 사랑하는 집이 있습니다. *우복의 시 계정에 나오는 시구 계곡물은 맑기가 거울 같은데 띠집은 좁기가 나룻배와 흡사하다 溪水淸如鏡 茅堂狹似船            시인의 말    지난 여름은 지리한 장마로 한 철을 다 보냈습니다.장마 뒤에 찾아온 따가운 햇살이 가을곡식과 과일을 탐스럽게 영글게 합니다.코스모스길이 가을의 정취를 북돋우고 벼이삭이 노릿노릿 물드는 날 우복종가를 찾았습니다.T자형의 특이한 대산루의 강학,휴양,장서,독서 등 복합용도로 쓰임에도 호기심이 일지만 그 보다도 계정溪亭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계정은 우복 정경세 선생께서 1603년(41세)에 지은 정자로 청간정聽澗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방1칸,마루 1칸의 최소규모에 초가지붕을 한 3량가의 소박한 건물입니다.마루 서쪽 벽에 초가에서 보기 드문 고식의 영쌍창이 나 있습니다.삐걱-소리가 날듯한 판자문을 열면 언덕 위의 종가가 보입니다.  아파트도 단독주택도 큰 쪽을 선호하는 요즘 세태와는 거리가 먼 아주 작은 집.산골물(澗)이 흐르는 시내(溪)가에 자리 잡은 자연친화의 건물.맑은 물을 보고 물소리를 들으며 충양充養(독서,사색,詩作,학문연찬)에 전념했을 공간.그것은 집중으로 하나됨이요 물아일체의 경지로 아름다운 우산의 자연에 심취한 우산동천愚山洞天의 세계를 열었습니다.우산의 자연을 시로 읊은 우곡잡영이십절愚谷雜詠二十絶 중에 계정溪亭이 떠오릅니다.  깊은 골짜기 물바람소리 홀로 문을 닫으니萬壑風泉獨掩扃 해 긴 날 계정에 이르는 손이 없구나日長無客到溪亭 느지막에 고달파서 책 덮고 나서니晩來意倦抛書出 눈 시리도록 싱그러운 녹음 뜰에 가득 차누나.潑眼新陰綠滿庭     
146 이 편한 세상 -1/이예훈 file
편집자
3702 2011-08-31
11.09월 16호 소설 이 편한 세상 -1 이 예 훈 하늘은 맑고 공기는 신선하다. 명은 가만히 입속으로 말을 굴려본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맨살을 스칠 적마다 아련한 매연 냄새와 동글동글한 질감으로 살에 와 닿는 공기의 무게가 싫지 않다. 9월 중순이다. 이제 질긴 가을장마가 물러갈 때도 되었지. 팔월 초에 시작한 늦장마는 서너 번의 태풍과 해일로 온 들에서 익어가는 과일이며 곡식들을 진구렁에 쓸어 넣고, 해변의 건축물과 고기 배들을 마구 부셔댔다. 설익은 과일들이 즐비하게 바닥에 떨어진 모습이며, 해변의 건축물과 고깃배들이 장난감처럼 부서져 나가는 모습이 티브이 뉴스시간을 채우는 동안, 도시의 시민들은 무슨 천기라도 누설하듯 음울하게 이즈음의 이상기후에 대해 수군거리곤 했다. 근래 들어 해마다 날씨는 더 춥거나 더웠고 눈이 오면 폭설이요, 비가 오면 폭우인데, 이것은 여간 심상찮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행인들의 옷차림은 아직 여름이다. 도로변의 버스승강장 안내 모니터를 중심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성서성 버스를 기다린다. 모니터에서는 2-3초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깜빡 새로운 정보를 전송한다. 무표정하게 서있던 사람들은 가끔씩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 자신이 탈 버스가 올 시간을 확인한다. 명은 인도 안쪽에 비치한 장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망연히 거리를 바라본다. 마치 시선이 마주치는 걸 겁내기라도 하듯 애써 서로의 눈길을 피해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명은 마주보고 서있는 젊은 남녀를 찾아낸다. 둘은 무엇인가 쉼 없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보다 머리하나쯤은 커 보이는 사내애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길이 애틋한 정감으로 반짝인다.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고, 명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이제 여름은 가고 있고 공기는 가벼운 새털처럼 보송보송 하지 않은가. 기형도의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였고 공기는 더러운 담벼락 같았다. 그의 시는 그 딱딱한 공기 속에서의 헐떡임이었던 것일까. 명은 어제 산 시집을 떠올린다. 시집을 사들고 첫 시를 읽은 다음 약력 란에서 그의 탄생년도와 사망년도 사이를 손가락을 짚으며 계산했었다. 그에 따르면 그는 스물아홉 해를 살았다. 그에게 공기는 너무 딱딱하고 무거웠다. 명은 쉰다섯이다. 아직 살아서 바람이 선들선들 가볍다고 생각한다. 명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위에 손을 얻는다.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이 공기가 버거워 헐떡이며 옥상 난간으로 올라서거나 아파트 베란다의 창틀을 넘을 것이다. 그는 수능시험공부를 하다 갑자기 투명비닐봉지가 척 얼굴에 달라붙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던 고등학생일 수도, 한 평짜리 고시원에서 삼년 째 공무원시험공부를 하던 취업준비생일 수도 있다. 아니 오랜 기간 친구들로부터 집단 따돌림과 폭력에 시달리던 중학생이거나 백점을 받지 못한 시험지에 부모의 도장을 받아야 하는 초등학생이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공기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유리처럼 단단해 질 수도 실리콘처럼 말랑 거리며 숨구멍에 달라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명이 숨 쉬는 공기는 맑고 부드럽다. 그녀는 오늘 오랜만의 외출을 한 것이다. 얼마 전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던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위안을 얻는다. 명에게 그들과의 첫 만남은 그런 것이었다. 명은 조금 전에 건너온 행단보도 너머에 우뚝 솟아있는 리베라 호텔을 올려다본다. 리베라 호텔 뷔페식당에서 만난 토마스는 폐암 수술을 하고 두 번째 항암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그는 몸피가 약간 준 것 말고는 비교적 건강해보였다. 그 자리는 토마스가 호주여행을 함께 했던 이들을 초대해,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 관심을 보여줬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식사 대접을 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안부를 묻고 하는 사이, 그 자리가 토마스의 암수술과 연결된 모임이라는 걸 잊은 듯 여행지의 가볍고 자유로웠던 분위기를 홀연 재연해 내곤 했다. 하지만 곧 이성을 회복해 토마스의 무사귀환을 축하하고 빠른 쾌유를 바란다는 인사가 오고갔지만 식사분위기는 자주 토마스의 암수술에 대한 배려를 잊은 채 화들짝 부풀어 오르곤 했다. 토마스의 암은 그들에게 식사를 해칠 만큼 무겁지 않았고, 요리는 나무랄 데 없었던 것이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토마스는 혼잣말처럼 웅얼웅얼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병이 걸리기 전에는 얼마든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어요. 살만큼 살았잖아요. 아무 미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 무슨 미련이 있겠나, 나 같은 사람이. 그런데 막상 암이란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닙디다. 겁이 났어요. 죽는 다는 건 모든 게 끝이라는 거거든. 그게 막상 코앞에 닥치니까 벼락같이 가슴을 칩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그리 살다 보면, 저 죽을 날은 저절로 알게 되는 건데....... 핏기 있을 땐 그게 참 하찮고 시시해 보이더란 말이오. 도대체 그 긴 세월을 뭐에 홀려 살았던 건지 모르겠소. 그 시절에 내가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혼자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소.’ 낮은 톤으로 조용조용 풀어내는 토마스의 말이 천천히 공중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명은 마치 그의 말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듯 했고, 공기 중에 스며들어 선뜻선뜻 살갗을 스치는 것 같았다. 명은 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그가 느꼈을 그 두려움. 그가 무섭다고 말하는 것. 그 참혹한 외로움을. 의사로부터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 라고 말하는 걸 들어야 하는 자리. 그렇게 불쑥 실체를 드러낸 죽음과 마주한 순간에도 그는 혼자였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 음악교사였던 젊은 시절에 미국으로 보냈다던 아내와 자식들은 끝내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명하게 그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혼자살고 있다는 걸 그는 종종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얘기하곤 했었다. 유별나다 싶을 만큼 깔끔하고 단정해서 혼자 사는 노인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인상은 아니지만, 불쑥불쑥 드러나는 결벽과 과장된 자기변호, 시시때때로 수업의 흐름을 끊는 반어적 질문과 자기주장. 같은 행동들이 혼자 살아온 이의 외돌아진 성정을 드러내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닷새쯤 지났을까, 그들은 메시 정으로부터 핸드폰 메시지 하나씩를 받았다. ‘토마스 선생님께서 어려운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위로와 격려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그랬다. 한 학기 동안 열다섯 번쯤 만나 같은 강좌를 듣고, 6박 7일간의 해외여행을 하면서 그들은 일행 중 한명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격려 메시지 하나쯤 날려줄 만큼의 인연을 쌓은 것이다. 메시 정의 문자를 받고 놀란 일행들이 급히 모여 앞뒤 정황을 듣고 상의를 했지만 서울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에게 ‘수술 잘 받고, 쾌차하시길 빕니다.’ 따위의 핸드폰 문자 하나쯤 날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문자는 토마스의 조카가 보고 그에게 전해 줄 것이며, 보호자 이외의 누군가가 병문안을 간다고 해도 환자를 직접 볼 수는 없을 거라는 게 메시 정의 설명이었다. 일행은 그 자리에서 몇 만원씩 거출을 해 메시 정에게 맡기고 헤어졌었다. 그녀가 서울 가는 길에 잠깐 병원에 들러 토마스의 조카를 만나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흘쯤 지난 후 토마스의 조카라는 이로부터 수술은 무사히 끝났으며 아저씨도 순조롭게 회복중이라는 답신을 받았다. 여행을 떠날 때 토마스는 사흘간 입원해 건강검진을 받고 곧바로 합류했다고 말했지만 별로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일행은 모두 그저 일상적인 검진이려니 했기 때문에 별다른 염려를 하지 않았고, 여행을 다니는 동안 그의 건강검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쩌면 토마스 자신조차 건강검진 따위는 있고 있었을지 모른다. 명은 겨울도 봄도 아니던 이월의 어느 날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보이는 C대학교의 평생교육원에서 수강생을 모집하기 위해 내건 플래카드를 보았다. C대학에서는 봄가을로 늘 하던 일이었을 텐데, 명의 눈에 그것이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명은 산책길에 무작정 평생교육원 행정실을 찾아갔다. 담당자가 내준 팸플릿에는 별의별 수강과목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명은 그중에서 <외국여행을 위한 필수영어>라는 제목이 달려있는 과목을 신청했다. 아마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된 해외여행 한번 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것이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은행의 민원실에서 보냈다. 하반신을 차단대 아래 숨긴 채 상체만 불쑥불쑥 앞으로 들이밀며 업무처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명은 흡- 하고 숨을 멈추게 되는 순간 숨을 고르듯 다짐하곤 했었다. 이곳을 떠나면 반드시 두발로 뚜벅뚜벅 걸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리라. 아무도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무엇을 해내라고 요구하는 지 못하도록 꼿꼿이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갈 것이다. 명이 아직 젊었고 그녀의 직장이 많은 이들의 선망이던 때, 그 직장은 그녀가 일과 가정을 모두 갖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결혼과 일, 둘 중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다른 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직장을 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벌어오는 돈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힌 네 명의 밥과 미래가 매달려있었다. 당시 그녀를 둘러싼 공기는 가족에 대한 헌신을 그녀의 삶에 주어진 하나의 신성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신성한 의무에 충실했고 그 자부심이 그녀의 삶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한 가치를 끝없이 부각시키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동생들 또한 각자 독립해 그녀의 곁을 떠나고 났을 때, 그녀는 혼기를 한참 지난 중년 여자의 모습으로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무엇보다 긴 세월 그녀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타성을 만들어 주었던 직장에서마저 퇴직을 하고나니 마치 낯선 혹성에 홀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질긴 고삐처럼 그녀를 묶고 있던 직장과 가족들로부터 온전히 놓여나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는 은행의 민원실과 가족들이 함께 살던 집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거대한 기계에서 빠져나온 낡은 부속품 조각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치밀하고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거대한 조직체의 일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명은 자신이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깔끔하고 빈틈없이 처리할 줄 아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그것으로 그녀는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당당하게 제몫을 다하는 존재로 인정받았다. 집에서는 그녀가 한 달 동안 직장에서 일한 대가로 받아오는 월급봉투가 그녀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 가족들은 명에게 그 외의 어떤 역할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명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사로운 일들, 예컨대 아침에 몇 시에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제일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아침식사는 무엇을 먹고 출근할 때 옷은 어떤 걸 입을 지, 점심에는 무엇을 먹으며 저녁 때 퇴근을 하면 누구를 만나고 몇 시에 집에 와야 하는 지에 대해 알아야 하고 참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병약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고 있는 명에게 주어진 권리의 대가인 동시에 또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며 관심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이러한 간섭들은 그녀만의 사적인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아주 쉽게 무너뜨렸다. 그녀에게는 가족들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친구도, 가족애라는 투철한 상식을 벗어난 어떠한 행동도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항 속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금붕어처럼 명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 생활에 길들여졌다. 은행창구에 갇혀 일하는 동안 그녀가 무슨 꿈을 꾸었던 그녀는 어항 밖의 삶에 대해 어떤 경험도 지식도 없는 어항 속의 물고기일 뿐이었던 것이다. 명이 인터넷 주식거래를 시작한 것은 아마 그러한 정황들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무엇으로 채워야 좋을지 모를 텅빈 시간들. 끝없이 밀려드는, 가닥이 잡히지 않는 잡념과 불안감 같은 것들로부터 그녀를 끄집어내, 확고하게 눈앞에 드러나는 수치로 결과를 보여주는 인터넷 주식거래는 그녀에게 꽤 만만해 보이는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은행원 출신이라는 자부심은 그녀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승리감까지 안겨주지는 않았다. 주식에 몰두해 있던 삼년 동안 그녀의 퇴직금통장은 거의 바닥이 드러났다. 명이 신청한 강좌에는 스무 명 정도의 수강생이 있었다. 수강생들은 예순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들과 중년의 주부들이 주류를 이루고 드문드문 앳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사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강사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수강생들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첫날 초노의 남자 수강생들은 공무원이거나 학교 교사였던 자신의 전직을 필요이상으로 장황하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현재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고, 또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킬 뿐이었다. 명은 그들이 스스로를 완벽한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낡은 부속품처럼 느끼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젊은 강사는 나이 많은 수강생들이 강조하는 그들의 전직에 대해 아낌없는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메시 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영어회화를 하려면 영어식 이름을 하나씩 갖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용하기 좋은 잉글리시 네임 목록’이라고 쓰인 파일을 스크린에 띄워 주었다. 수강생들은 평소 생각해 두었던 이름을 내놓거나 스크린에 띄워진 파일 목록 중에서 하나씩을 골라 가졌다. 그렇게 해서 ‘외국여행을 위한 필수영어반’ 수강생들은 한 학기동안 자기 자신에게 조차 낯선 영어이름으로 대화연습을 하거나 강사가 알려주는 간단한 문장을 반복해 연습하는 방식의 수업을 받았다. 그들은 서로의 본명조차 알려주거나 익힐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색한 영어이름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두어 시간씩 영어공부를 하는 강좌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누군가 농담처럼 현장학습을 떠나자는 말을 꺼냈을 때 뜻밖에도 꽤 많은 수강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호응을 보냈다. 그 여행은 마치 한적한 공원벤치에서 만나 잠시 한담을 나누던 낯선 이웃들이 헤어지기 섭섭하니 소주나 한잔 하자고 포장마차로 발길을 돌리듯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적당한 여행패키지 프로그램을 찾아내 소개를 하고 여행계획서를 만들어 여행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준비시키는 일은 메시 정과 토마스가 맡아서 처리했다. 토마스는 우리나라에 기러기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전에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고 혼자 살아오면서 방학 때면 빠짐없이 해외여행을 다녔다던 음악교사 출신의 노신사로 왜 이 강좌에 등록했는지 이해가 안될 만큼 영어를 잘했다. 여행에 동참한 수강생은 메시 정과 토마스를 포함한 여덟 명이었다. 그들은 여행사에서 팀 구성을 위해 합류시킨 일곱 명의 다른 멤버와 공항에서 만나 함께 출발했다. -저기 왼편으로 보이는 바다가 로즈베이입니다. 해변 쪽으로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이죠? 반대편 언덕의 주택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으로 알려져 있죠. 그야말로 갑부들만 사는 동네입니다. 웬만한 한국 부자들이 왔다가 명함도 못 내밀고 가는 곳이죠. 이 해변이 로즈베이라고 불리게 된 건 초기의 이주민들과 원주민간의 전투에서 죽은 원주민들의 피가 바다를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초기에 유럽에서 이곳으로 온 이주민들이 죄수와 군인들이었다는 건 알고 계시죠?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자식들에게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죠. ‘영국인들이 이곳에 와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이 옮겨 심은 붉은 장미가 바다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았기 때문에 로즈베이라고 불리게 되었단다.’- 톰슨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현지 가이드는 익살이 담긴 서툰 성대모사로 관객들의 머릿속에 잠시 전 자신이 심어놓은 핏빛 바다의 이미지를 성급히 지워내려 한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란 단순한 호기심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끼어든 의도적인 타자들이다. 그들은 이 땅이 지닌 원죄의 기억을 완전히 덮으려고도 깊이 관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들어 알면 그뿐이다. “한국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까? 어느 정도 부자여야 저 동네에 살 수 있는 건데요?” “유명 연예인 한명이 이곳에 집을 샀다는 얘길 듣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그 사람 허영심을 채워주는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여기 생활을 제대로 누리진 못할 걸요. 유럽부자의 생활이나 사고방식은 사실 한국하고는 많이 다르거든요. 한국부자들은 돈이 있어도 여기 생활을 즐길 줄 몰라요. 유럽의 귀족들이 즐기는 문화라는 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죄수와 군인들이었다면서 귀족은 무슨, 못된 무뢰배들이 어쭙잖은 흉내나 내는 게지.” “자본주의 귀족은 돈과 시간이 만드는 거지 무슨 혈통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특히 오스트레일리아는 더하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호주에서는 과거를 묻지 마라. 이 땅에 과거는 없다. 미래만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이 나라에서 개인사를 함부로 묻는 건 금기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본인이 말하지 않는 개인사는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죠.” 앞에 앉은 제임스와 현지가이드인 톰슨박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뒷자리까지 우렁우렁 들려온다. 톰슨박은 유학생으로 이곳에 왔다가 관광가이드로 주저앉았다고 했다. 그는 공황에서 일행을 태우고 숙소로 가는 도중 호주에 대한 기본적인 안내를 시작하기도 전에 오늘 아침 한국 뉴스에 무엇이 나왔으며, 현재 한국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형편없이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그가 왜 고국에서 온 관광객을 만났을 때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지겹도록 듣고 떠들던 정치 잡설일망정, 이국땅에 와서 제나라 여행객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거친 욕설처럼 한국에 대해 떠벌이는 걸 듣는 건 뭐라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불쾌했다. 그리고 차안에 있는 누구도 그 감정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모든 불편한 것들로부터 방금 떠나온 여행객이 아니던가. 다행이 가이드는 상황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다음날 아침에 만난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유능하고 사려 깊은 관광안내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어제의 실수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 해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온통 고국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민자들의 딱한 사정에 대해서도 제법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의 솔직한 태도에 여행객들의 마음은 쉽게 풀렸다. 현지 가이드와 여행객들 사이에는 금세 타국에 나와 고생하는 젊은이를 대하는 모국의 어르신들이 가질법한 연민과 고국에 두고 온 친지를 그리는 이민자의 정성이 끈끈하게 어우러졌다. 그들은 5박 6일간 관광명소들을 돌며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감탄을 하고, 사진을 찍고, 가벼운 농담에도 까르르 까르르 즐거운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호텔 근처로 돌아와 가이드가 예약해 놓은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 여행자들의 기억 속에는 로즈베이의 핏빛 장미, 파도사이로 잠깐 솟구쳤던 고래의 무리, 작은 우리에 갇혀 여행객들의 사진 들러리가 되었던 코알라와 캥거루, 시드니의 어디를 가도 조망이 가능했던 오페라 하우스, 같은 것들이 새겨졌다. 아마 여행 일정의 마지막 날 밤 그 술집에서의 일들을 뺀다면 일행에게 호주 여행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저 흔하디흔한 패키지여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밤을 멋지게 장식하자며 일행을 호텔근처의 작은 술집으로 이끈 것은 마이클이었다. 일행이 간 술집 간판에는 커다란 올빼미 머리가 그려있었다. 누군가가 한국에도 체인점이 있다며 아는 체를 했다. 초저녁인 탓인지 어둠침침한 실내는 거의 비어있었다. 그들은 큰 탁자가 있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 특별한 모임에 함께한 사람은, 한 학기 내내 틈만 나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며 호기를 부리던 제임스, 이번 여행의 기획자였던 토마스, 전직이 행정 공무원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던 마이클, 현직 간호사인 아바, 병역을 마치고 복학 전에 잠시 쉬고 있는 아들과 함께 온 로즈여사, 그리고 명과 메시 정이었다. 로즈여사의 아들은 공항에서 만난 멤버들과 어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 팀은 로즈여사의 아들 또래인, 두 딸과 엄마가 함께 온 그룹과 신혼여행을 온 젊은 부부, 그리고 두 명의 나 홀로 여행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즈여사의 아들은 여행 내내 나 홀로 여행자인 두 여성과 어울렸다. 머뭇머뭇 어색하게 시작한 술자리였지만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한 학기짜리 평생교육원 강좌에서 만나 외국여행까지 함께하게 되다니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넉살좋은 제임스가 먼저 입을 열었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무엇보다 한 학기 동안 상냥하고 적극적인 호의로 여기까지 이끌어준 교수님에게 박수로 고마움을 전해야한다고 메시 정을 추켜세우며 일행을 부추기는 바람에 그들은 외국의 조용한 술집이라는 것도 잊고 짝짝짝 요란한 박수로 한바탕의 소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메시 정은 그들의 교수이고 실제적인 리더였지만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녀는 미국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하기위해 6년쯤 체류했던 경력으로 대학의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학기 중에도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 야회수업을 한다거나 인터넷카페를 활용해 유대감을 키우는 따위의 노력으로 강좌를 활성화하는데 공을 들였다. 이미 세상 한 편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자괴감을 얼마쯤 안고 살아가는 노년의 수강생들에게 젊은 강사의 그런 노력은 꽤 적절한 처신이었던 듯,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메시 정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 동안 꽤 많은 여행을 했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여행은 처음이에요. 정말 좋아요. 갑자기 내가 참 바보같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체 술을 즐기지 않으니까 한국에 있을 때도 잘 안가지만 여행 중에 이렇게 술집에 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여행 중에 이런 재미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요.” 토마스가 사뭇 들뜬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반장님 표정이 꼭 생전처음 놀이공원에 간 어린아이같이 해맑네요. 정말 여행 중에 한 번도 이런데 안가 봤어요? 그럼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살았대요?” 고지식한 토마스를 놀리는 게 취미인 제임스가 배꼽을 잡는 시늉을 하며 그의 시선을 쫓아 실내를 둘러본다. 어둠침침한 황색불빛이 고여 있는 눅눅한 공간을 노란색 어깨걸이 티셔츠와 빨간색 짧은 반바지를 입은 여종업원이 천천히 오가며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나르고 있다. 그녀는 백인 여성이라고 하기 민망할 만큼 옷 밖으로 드러난 살갗이 짙은 갈색으로 그을린데다 맨살을 뒤덮은 노란 털 때문에 다소 지저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훤칠한 키와 볼륨감 있는 몸매, 순박한 미소를 띤 얼굴은 제법 밉지않은 인상을 주었다. 사방 벽에는 각가지 모양의 술병과 짤막한 홍보 문구가 담긴 광고지가 나붙어있고, 술집 한가운데 설치된 진열대 위에도 다양한 술병들로 가득 차 있다. 술집의 그 묘하게 어수선한 분위기는 거부할 수없는 흡인력으로 음주를 부추기는 것 같았다. 탁자위에 술병이 쌓여 갈수 록 잔을 비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제임스가 기념촬영을 해야 한다며 옆으로 지나가는 여종업원을 불러 세운 건 아마 분위기를 좀 바꿔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녀가 선뜻 제임스와 토마스 사이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제임스가 같이 사진을 찍자며 마이클을 일으켜 세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꽤 많이 취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전혀 취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치 혼자서 먼 곳을 헤매고 온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이 양반 많이 취하셨네. 혼자서 마냥 자작을 하더니만. 자, 사진 찍읍시다. 일어나요.” “그 여자는 왜 그렇게 죽었을 까요?” 제임스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불쑥 내뱉은 마이클의 한마디는 생뚱맞고 서늘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야 말로 그때까지 의미 없이 겉돌기만 하던 좌중의 말장난들을 단번에 휘어잡아 그들 내면의 가장 깊은 골짜기로 이끌어 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2년입니다. 2년, 2년 동안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아내와 살아온 삼십년 세월과 그 2년이 어떻게 달랐던가. 수도 없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아내의 어디에서 내가 죽음의 냄새를 맡았어야 했던 건지. 그녀의 어떤 행동이 몸속에서 자라고 있던 암덩이의 징후였는지. 내가 무심했던 탓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자꾸 생각하다보면 실상 나와 결혼해서 같이 살아온 삼십년 세월에 대해서도 난 아내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왜, 왜 그 사실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걸까요? 2년 전에 병원으로부터 암 진단을 받았다는데 말입니다. 뭔가 나한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는 한 학기 내내 맨 뒤의 창문 옆자리에 앉았다가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사라지곤 해서 누구하고도 대화하는 걸 본적이 없었다. 첫 수업시간에 자기소개를 할 때 공무원이었는데 지난해 퇴임을 했다는 말을 했었다. 겉보기에도 그가 공무원이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평범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수업시간에도 강사가 질문을 할 때 말고는 거의 말이 없어서 누구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고 여행계획을 세울 때도 제일먼저 동참의사를 밝혔다. 그가 누구였던가. 수강생 모두에 대해 꽤 세심한 성향까지 파악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메시 정조차도 마이클이 한 학기 동안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던가를 기억해 내느라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약을 먹거나 목을 매 자살하는 것 보다 더 나빠요. 어떻게 2년씩이나 식구들을 속이고 혼자서 천천히 죽어갈 생각을 할 수 있죠? 선생님은 믿어지십니까? 혹시 돈 때문이냐고요? 수술할 돈이 없어서 희생할 결심을 한 거 아니냐고요? 아니요. 아닙니다. 우리 먹고 살만큼 돈 있어요. 암 보험도 들었고요. 어느 날 화장실에 쓰러져있는 아내를 병원으로 싣고 갔다가 이미 온몸에 암이 퍼져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죄의식 때문에 죽을 거 같았어요. 아내는 나와 살면서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시집 온지 십년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그 수발을 혼자 다 했어요. 그 세월이 8년입니다. 아내한테 고맙게 생각하며 살았죠. 그 후론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죠. 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2년 전에 본인에게 알렸는데 보호자가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 지 짐작이 가십니까? 아내가 말하더군요. 그냥 사는 게 너무 지루했다고. 당신 잘못 아니니까 죄의식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고. 자기가 죽으면 꼭 좋은 여자 만나서 재혼하라고. 그게 설사 아내의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건 나를 향해 날리는 비수고 조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인생의 마지막 퍼즐을 스스로 선택해서 끼워 넣을 작정을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걸까요?” 마이클의 맞은편에서 듣는 듯 마는 듯 술을 마시고 있던 아바가 시비라도 걸 듯 툭 말을 던졌다. “부인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이가 살아온 시간 속을 뒤져보세요. 한 생명의 죽음은 그 존재의 마지막 퍼즐조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다보면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양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하긴 한 인간의 퍼즐게임이 늘 완성된 형태로 마무리되는 건 아닙니다. 전 흔히들 말하는 정신 병원에 근무하고 있답니다. 그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전 퍼즐 조각의 경계가 허물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퍼즐게임을 이어가는 게 불가능하게 되죠. 정성을 다해 그려놓은 수채화에 누군가가 물 한 양동이를 쫙 쏟아 부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사람의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이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다. 그들이 천천히 자신의 정신에 가해진 충격을 걷어내고 희미해진 퍼즐의 경계를 회복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아내가 살아온 시간의 조각들을 이제 와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아내가 그렇게 가고 나니까 난 그동안 아내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을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오는 동안 나한테 바가지라는 걸 별로 긁은 적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고 꽤 화통한 사람이었죠. 아니, 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살았어요. 너그럽고 인내심도 많고 사는데 별로 불만이 없는....... 사실 나는 늘 바빴습니다.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흔히들 빈정대지만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 많은지 아십니까.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직장일로 꽉 차 있어서 집안일까지 살뜰히 살펴가며 살 여유가 없었어요. 우리는 같은 직장에서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 둘 중 한명은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돌봐야 했어요. 그래서 아내가 퇴직을 하고 어머니를 돌보며 살림을 맡게 되었죠. 그 사실이 아내한테 늘 미안하긴 했어요. 그런데 난 그런 내 마음을 왠지 아내한테 보이고 싶지가 않더군요. 아마 그래서 점점 무뚝뚝하게 대했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아내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이클 씨 어머닌데 왜 부인에게 그 일을 맡겼을까요? 똑같은 공무원이었으면 수입도 비슷했을 테고, 꼭 부인이 퇴직을 하고 그 일을 맡아야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당연히 밖에서 돈을 벌어 와야 하는 건 남자라거나.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거나 그런 고리타분한 이유 말고 다른 이유요?” 아바의 말투에는 왠지 짜증이 잔뜩 묻어있었다. 마이클은 아바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머쓱해져서 말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밖으로 표출하는 방법이 늘 똑같은 건 아닐 겁니다. 예컨대 세상에 여자라곤 자기밖에 모른다고 믿고 살아왔던 남편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숨겨둔 여자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고 합시다. 그런 때에 모든 여자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행동하지는 않는 단 말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남편의 여자에게 모욕을 주고, 위자료를 듬뿍 받아 이혼을 하거나 남편이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따위의 일들 말입니다. 여자는 남편의 관심 밖으로 벗어난 것에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자라고해서 독립적인 어떤 일을 꿈꾸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여자가 남편과 남편의 정부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두 사람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복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앎니까? 부인은 정말로 사는 게 지루해 견딜 수 없었는지. 그래서 거미가 새끼들을 제 등위에 놓아기르듯, 암덩이라도 키워야 살 수 있었는지 알 수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마이클 씨는 부인에게 몸속의 암덩이 만큼도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는, 그 사실만 슬퍼하면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즈 여사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관계가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사이의 정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2년 동안 아내가 철저하게 나를 소외 시킨 채 혼자서 감당한 그 고통과 외로움의 무게를 그렇게 가볍게 단정해 버리는 건 내 아내에 대한 모독입니다.” 대화는 점점 격해져서 좁은 실내를 휘젓는 소란으로 변질되고 삿대질이 오갈 지경이 되었을 쯤 일행은 술집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외국의 낯선 밤거리로 내동냉이 처진 그들은 뜻밖의 해방감에 몸을 떨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거리가 떠나갈 듯 웃어댔다. 무엇이 그들 사이의 경계를 한순간에 허물고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게 했는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때 그들 사이에는 은밀한 통과의례를 함께 치러낸 자들만의 동질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리베라호텔에서의 만찬은 말하자면 그것을 재확인 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승강장에 버스가 들어와 멎을 때마다 무리를 이루고 있던 행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소요가 일며 몇몇은 타고 몇몇은 내린다. 승강장의 안내 모니터에는 분 단위의 정보가 재깍재깍 쉼 없이 떠오르고 그 시각에 맞춰 새로운 버스가 왔다가 떠나간다. 그 분 단위의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무기물처럼 흘러가고 새로운 무리가 흘러든다. 명은 멀리 보이는 모니터를 유심히 살피며 704번 버스의 도착시각을 기다린다. 7분 재깍, 6분 재깍, 5분, 4분 모니터 영상의 정확하고 날렵한 변화에 따라 얇게 저며진 시각의 조각들이 도열하듯 재깍 재깍 명을 향해 다가온다. 명은 조용히 일어나 도열한 시각의 벽속으로 스며든다. 따뜻하고 편안한 무기질의 시간 속으로 진입. 약 력 1954년 충북 괴산군에서 출생 1994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불임의 숲」 당선 1995년  
145 금수회의록 외1편/강태규 file
편집자
4128 2011-08-31
11.09월 16호 시 금수회의록 강태규 꿈인지 날 것인지는 모르겠다 탕국 잘 먹고 툇마루에서 남포불을 지필 때였을 거라 왼켠 미루나무는 참견 없이 차렷 자세로 어슴프레 있건만 삭밤이라 캄캄 무인지경 저번 늦겨울 소 여럿 잡던 일 좀 잊어볼까 했지만 수이 되질 않는 그런 불씨 없는 밤. 별다방 프라스틱 라이타 불 화홧 댓지만 심지로 댕겨지질 않고 콧잔등 어디쯤해서 소쩍 소쩍대길래 그냥 집나간 제 짝 부르는 소린줄로만. 자시 쯤 되었을까 심지에 기름 좀 배이라고 남포를 들었다 놨다 하던 중, 이젠 오른 켠 귀 어디쯤 와서는 소도적 소도적, 좀 더 잘 들으라 낭낭하고 쩌렁하여 가슴까지 철렁, 마른 번개처럼 퍼떡 집히는게 뒷집 소 같은 소가家라고 쩍새한테 귀뜸한 게야 산바람 댓닢조차 흔들지 못하고 백열등 저만치 아랫말에 있는 그런 밤. 산마루께 우묵 골진 즈음에서 빈 저수지 밤배 지나 듯 흘리던 쩍새소리에 오른켠 눈 꼬리 쪽 너머, 소 외양간에서는 한 두박자 꽤어 무쇠 코뚜리 어김없이 철럭댔으니 집짐승이나 날짐승이나 서로 사람 흉을 본다는 게 억지인 것도 같지만 잠 못드는 이 밤에 소 생각을 자꾸하니 소도적이 맞는 것 같기도 해 禽獸會議錄 : 개화기 때 정의 안국선이 쓴 신소설의 제목에서 차용함 장화홍련전 강태규 상주 중덕못에 홍련이 가득하다 낚시금지 팻말에 참붕어, 청개구리, 왕두꺼비, 소금쟁이들도 잠잠하다 배무룡 둘째 딸 홍련이 장화언니 따라 못으로 들더니 수십만 쌍둥이 딸들로 복제되어 환생했다 배좌수댁 딸처럼 심학규네 청이도 소생할 차례다 이 마을, 사람의 집들 동쪽으로 앉아있고 생태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잘난 애비와 못생긴 여식女息, 계모繼母와 조사釣士들은 괴롭다  
144 순이의 하늘 외1편/안현심 file
편집자
3503 2011-08-31
11.09월 16호 시 순이의 하늘 안 현 심 마당가에 피어난 붉은 동백꽃, 이름은 순이.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 배가 고파서 도망 나왔어요 부모는 일찍 세상을 뜨고 오빠는 군대 가서 죽고 허기진 배 거머쥐고 피붙이를 찾았지만 냉대와 멸시뿐 아무도 따스운 밥 나눌 사람 없었어요 여행증 없이 숨어든 평양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살길은 두만강을 건너는 일뿐이었어요 낮에는 산에 엎드려 풀잎을 먹고 밤을 틈타 걸었어요 잡혀서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매한가지 배곯지 않을 땅을 찾아야 했어요. 칠흑 같은 강물에 떠내려가며 이렇게 죽는구나 결국은 중국 공안에게 잡히고 말았어요 살려주세요 제 발로 다시 돌아갈 테니 북한 보위부에는 넘기지 말아줘요 몰매 맞고 강제노동을 하다가 뼈만 남아 죽게 돼요 울며불며 매달리는 얼굴에 병색은 무르익어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고 앙상한 몸에 걸친 누더기 옷, 그들도 안쓰러웠던지 그럼 돌아가라 하였지요 주머니에 사탕 세 알을 넣어주며 두만강에서 흔들리는 목숨을 지켜보았어요. 배가 고파 길바닥에 쓰러졌을 때 어느 할머니가 먹을 것을 주었지요 그런데 할머니는 배곯는 처녀를 중국에 팔아넘기는 알선책이었어요 그걸 알면서도 다시 가야 하는 땅 어떤 삶을 살든지 굶주림보단 나았어요. 연변에 들어서자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느 마을에서 오줌 누러 간다하고 줄행랑을 놓았지요 개들은 무섭게 짖어대는데 낯선 집에 뛰어들어 숨겨 달라 애원했지요 노인은 감자 굴에 나를 파묻었어요 며칠을 굴 속에서 숨어 지내다 햇빛을 보았지요 그 집 농사일을 일 년 남짓 도운 후에 도회지 부잣집 가정부가 되었어요. 그러나 내 하늘은 여기가 아니에요 오 년을 살아도 십 년을 살아도 공안에게 들키면 잡혀가는 탈북자 아이를 낳고 살다가도 쇠꼬챙이에 꿰인 채 끌려가야 해요 실컷 부려먹고도 돈 한 푼 주지 않는 고용주가 들끓는 땅 여기는 내가 그리던 하늘이 아니에요. 이름은 순이, 남녘 하늘 귀퉁이 키 작은 동백꽃. 생존을 위하여 안 현 심 여행증 없이 평양 거리를 떠돌다가 즉결소에 끌려갔지요 깜깜한 방 안에 내동댕이쳐졌는데 아침이 되어서야 사방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백 명 가량의 눈만 퀭한 거지들 속에 맨 무릎이 드러난 아이 신발 대신 비닐봉지로 발을 싸맨 아이 평양 거리를 헤맨 내 신발도 앞부리가 해져 다섯 발가락이 보였어요 열다섯 처녀아이는 엉덩이를 내놓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어요 우리에게 당면한 건 배를 채우는 일 그것 외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어요 아이들은 배낭을 뒤지더니 생감자 훔친 것을 꺼내 먹고 언 시래기 훔친 것을 먹었어요 훔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 도둑질을 해야 해요 바싹 여윈 할머니가 농장에 숨어들었다가 피범벅으로 맞는 것도 보았어요. 그래도 우리는 훔쳐야 해요. 안 현 심 시인․문학평론가 <하늘소리> 외 두 권의 시집과 산문집 <오월의 편지>, 논저 <서정주 후기시의 상상력>을 펴내고, 현재 한남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  
143 Darma 法 외1편/권현수 file
편집자
4260 2011-08-31
11.09월 16호 시 Darma 法 권 현 수 法이란 것이 그런 거 아이겄나 해 뜨모 일 하고 해 지모 자고 빨간 불이모 서고 파란 불이모 가고 그라고, 내하나 묵고 니하나 주고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잉께. 구름 위를 걷는 방법 권 현 수 저 높은 산봉우리에 걸쳐있는 뭉게뭉게 뭉게구름 보이지 그 위를 걸어 보는 거야 먼저 그 무거운 외투부터 벗어버려야지 알록달록한 카드들 잘랑거리는 열쇠들 크고 작은 지갑들도 함께 말이야 그리고는 운무사雲霧絲 날개옷을 입어야지 그 전에 물론 천상수에 목욕도 하고 묵은 때를 깨끗이 벗어버린 숨구멍마다 사방팔방으로 뻗쳐있는 의식의 촉수들 무의식의 뿌리까지 잠재워 버리는 거야 그러면 기러기 깃털처럼 가벼워지겠지 그리고는 펄쩍 뛰어 보는 거야 아직도 발이 떨어지지 않으면 발목을 잡고 있는 중력 때문이야 미련을 버려야지 발 씻은 물과 함께 확 비워버려요 다시 한번 힘껏 뛰어 봐, 그렇지. 어때,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권현수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2003년 <불교문예> 신인상 시집 [칼라차크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주공아파트 436동 709호 hyonsue7@hanmail.net  
142 오늘도 무럭무럭 외1편/이상도 file
편집자
3534 2011-08-31
11.09월 16호 시 오늘도 무럭무럭 이상도 여자의 얼굴은 동글동글 난 웃는다, 실실 쪼개면서 한번 자빠뜨릴 궁리를 한다 헌혈차 한 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움직이지 않고 계속 그 자리다 헌혈은 참여와 성원 속에서, 그래서 플라타너스는 오늘도 무럭무럭 지난 겨울 삭발 당해 몰골 앙상했던 몰염치의 풍광에서 다닥다닥 푸른 순을 밀어 올리던 오월 초순 처절한 생의 아비규환을 들었다면 지금 널따란 이파리는 어쩌면 덤이랄까 그러니까 플라타너스는 생의 흉폭함 그러니까 플라타너스는 생의 잔혹함 그러니까 어젯밤 잠 못 자고 헐떡였던 건 열대야 때문이 아니라 모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으로 찰싹, 압사인지 질식사인지 벼락사인지 피 확 터트려놓고 허벅지에 엉겨 붙은 모기 사체를 훑어내다 담배 또 피워 물고 침 발라 피를 닦아내고 잠을 청해도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꿈에까지 따라와 애태우고 모기는 여전히 앵앵 오늘 밤에도 악몽은 뭇별처럼 가득할 테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무럭무럭 플라타너스는 잔인하게도 싱싱 여자의 웃음은 고맙게도 생글 그러니까 난 헌혈하기 싫다 공기 이상도 가볍게, 가볍게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 오래 지속된 우기의 눅눅한 습기 때문만은 아니다. 축 처진 길들을 배회하는 하루가 어렵다. 공기는 가벼움에 의지한 무거움이다. 얼마나 나를 짓누르고 있는가. 막강한 힘과 권위에 주눅 든다. 먹기 싫으면, 잠시라도 쉬고 있으면 죽음뿐이라는, 죽지 않기 위해 허파는 심장은 살아간다. 공기는 천천히 내려앉는다. 아무 곳에나 앉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잠시도 감시의 눈길을 버리지 않는다. 내 속에 음흉하게 숨어 들어와 내가 보지 못한 마음까지 꿰뚫고 다닌다. 유유히 빠져나가 떠돌고 또 들어오고 하는, 나와 관계 맺은,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불특정 다수에게 내 음음(陰陰)한 마음을 들키고야 마는, 이 무방비의 적나라! 나는 반성할 게 없는데 다만 부끄러울 뿐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얼마나 까발렸는지. 이것이 나의 노출증인지. 공기의 관음증인지. 이상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구미의 ‘수요문학회’와 ‘경북작가회의’의 회원이다.  
141 고래 - 천명관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
상주신문
4532 2011-07-31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소설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강추! 재미로 읽고, 가슴으로 남는 드라마 같은 소설입니다. “『고래』는 가히 소설이 무엇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 전지전능하고 고압적이며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꾼의 입담에 힘입어 소설은 엄격한 형식의 규제를 뚫고 민담과 전설, 기담들, 무협지와 장르영화의 부스러기들, 동화와 환상적 요소 등이 뒤섞이는 환상의 도가니로 돌변한다.”--신수정, 문학평론가  
140 정취암* 일박一泊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3852 2011-07-31
11.08월 15호 시 정취암* 일박一泊 차 영 호 저무는 하늘이 두툼한 구름요 깔고 누워 별 한 조각 내비치지 않는다 오밤중에 내려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별천지였구나 저 아래 숲정이 끄트머리에 북두칠성 마차부는 마을 어귀에 있고 탁 트인 저기 저 너머 아득하게 찰람거리는 은하銀河 *경남 산청군 신등면 대성산에 자리한 암자 대서大暑 무렵 ―― 지리산 연하천 건너 벽소령 넘는 마루금은 물 고흔 갈래머리들이 재잘재잘 쏟아져 나오는 방학식날 여학교 하굣길만 같아서 원추리, 비비추 입 삐죽거리는 모롱이 굽이돌면 배시시 웃는 층층잔대며 도라지모싯대,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늘말나리, 양지 바른 언덕에 올라 손차양을 하고 먼 산을 내다보는 동자, 동자꽃…… 각색 발자국 자오록한 길섶 한구석빼기에는 노루오줌에 바짓가랑이 적신 내가 멀거니 홀아비꽃대마냥 서 있고 차영호(車榮浩) 1954년 충북 청원 출생. 1986년 《내륙문학》으로 등단. 〈푸른시〉동인.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애기앉은부채』 youngghc@hanmail.net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도동 512 상도빌라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