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을 읽는 여자




                                                           이  홍사




말에도 색깔이 있다.

말에도 색깔이 있다니까 얼른 얼룩말이 연상되지만 말馬이 아니라 언어에도 색깔이 있다는 얘기다. 자야는 언어에서 색깔을 읽는 특이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말뿐이 아니라 심지어 모든 사물이 저마다 지닌 빛깔을 볼 수가 있다. 자야가 보기에는 진한 색깔을 띤 말과 연한 빛깔을 띤 부드러운 언어가 있다. 자야는 늘 연한 빛깔을 띤 흰색 계통의 말을 우아하게 하곤 한다. 자야는 수필가다. 자신이 쓴 수필에도 흰색 빛깔을 지닌 글이 있고 푸른 빛깔을 띤 수필이 있다. 자야는 지역 여류들만 모인 수필동인 모임에도 나가고 자비출간이지만 ‘하얀 연못’이라는 수필집도 낸 바가 있다. 자야는 수필가답게 교양과 지성을 지닌 말을 한다. 그게 그녀의 입에 밴 버릇이다.

교양과 지성을 지닌 말은 말하자면 흰색 언어이고 품위와 미모를 지닌 말은 카키색이거나 보랏빛 계통의 말이고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은 검정색으로 읽힌다. 수필이나 시집을 읽으면 그 말, 언어의 색깔을 선명히 느껴진다. 색깔로 읽는 것이 자야만이 지닌 독특한 글 읽기의 방식이다. 그 색깔만으로도 그 글이 지닌 이미지와 형상을 읽을 수가 있다. 글을 읽고 난 뒤에 그 색깔의 이미지가 오래토록 자야의 머리에 남는다. 지난밤에도 자야는 흰색 계통의 말을 지닌 시집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시는 흰 빛깔을 띤 시이다. 흰 빛깔을 띤 시는 진한 서정이 묻어 있고 물가에서 노니는, 여유로운 한 마리의 고귀한 학을 보는 것과 같다고 수필에 쓴 적이 있다. 시뿐이 아니라 신문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도 그 빛깔을 자야는 느낀다. 신문은 온통 총천연색이다. 그 내용에 따라 갖가지 색깔이 있다. 자야는 가급적이면 흰색을 지닌 사설이나 미담 같은 미색계통의 내용을 찾아 읽는다. 자야가 수필의 글감을 찾는 곳은 거의가 신문이다. 정치면을 읽을 적에는 그게 검정색이라는 걸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흰색이나 미색 계통의 언어가 싫을 때도 있다. 수필을 구상하고 읽고 쓰는 행위조차 싫을 때가 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오늘은 자야도 흰색 언어에 식상함을 느끼고 붉은 색 언어를 토하고 싶었다. 생리가 끝나고 사나흘 후면 늘 그렇다. 오늘은 생리가 끝난 지 사흘째다. 정신보다 몸이 붉은 색 언어를 원한다.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아침부터 몸은 붉은 색 언어를 찾고 있었다. 그런 신체변화는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지난밤에 잘 적에 미색계통의 실크 나이트가운을 입고 침대에 들어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팬티마저 벗어던진 알몸이었다. 잠결에 자신도 모르게 다 벗어 던진 모양이었다. 몸이 홧홧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런 날은 붉은 색의 언어를 듣거나 붉은 빛깔의 말을 토하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날씨마저 우중충해서 몸은 더 괴롭다.

부나비! 그 곤충의 이름이 불쑥 떠오른다. 제 몸이 타는 줄을 모르고 불로 달려드는 부나비. 자신이 지금 한 마리의 부나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제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몸이 원하는 색깔로 변색시켜주거나 풀어줄 대상이 없다.

남편은 해외로 파견 근무나간 지 이년이 넘었다. 지난밤에 필요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몸을 붉게 달구어줄 대상이었다. 외교부에 근무하는 남편은 해외 파견근무 중이지만 중간에 서너 번 다녀갔다. 물론 그녀의 몸을 불같이 달구어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생리는 매달 있는 일이고 외국에 있는 남편은 그녀의 색에 대한 갈증을 달마다 채워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없는 침실은 온통 쓸쓸한 회색이었다. 남편과의 격렬한 섹스 뒤에 나른해지는 기분으로 혼곤하게 자고나면 몸이 착 가라앉으면서 색깔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런 날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자야는 생리 후에는 자신이 변색동물이라 생각한다. 남편이 없는 동안은 몸의 색깔을 변색 시켜줄 상대가 없다. 그저 흰 빛깔의 내용이 담긴 수필이나 교양서적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몸을 달랠 수밖에 없다.   

자야는 아침에 샤워를 끝내고 지난밤에 읽던 시집을 다시 펼쳐 들었지만 흰색 언어로 점철된 시집은 그냥 눈을 훑고 지나갔다. 은유로 가려진 시적 이미지나 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더 읽을 자신이 없어 시집을 접어 침대머리에 던져두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옷장에 걸어둔 옷마저도 붉은 톤이 눈에 들어왔다. 자야는 붉은 빛깔을 지닌 옷으로 골라 입고 외출준비를 했다. 정신이 자야를 화장대 앞에 앉힌 것이 아니다. 단지 몸의 지시에 따랐다. 정신이 몸을 지배해야 이상적이지만 가끔 몸은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는 혼몽한 상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화장을 하면서 골똘히 생각해도 특별히 갈 만한 곳이 없다.

목마르게 그리운 붉은 빛깔, 그 욕정의 빛깔, 그 붉은 빛깔의 말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정신을 혼몽하게 만들어 갈 곳도 정하지 않고 외출준비를 한 것이다. 아늑하게 힘이 쭉 빠지도록 혼몽한 붉은 색 쾌락의 나락으로 아득히 빨려들고 싶다. 남편이 해외근무를 시작하면서 들어올 때마다 보기에도 민망하게 생긴 자위기구를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건전지가 들어가는, 진동이 있는 자위기구, 신음소리를 내는 자위기구, 실리콘으로 만든 남근 등 대여섯 가지의 자위기구를 사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를 생각하며 자주 쓰라고 건네주었지만 인간들은 참 희한한 것도 만든다고 생각했을 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 물건들은 장롱 맨 밑 서랍에 들어있다. 그 물건들은 빛깔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격히 꼬집어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의 빛깔은 지니지 못했다. 아무리 발전해도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냄새마저 꼭 같은 색깔로 만들 수는 없는 모양이다. 

밖은 쌀쌀하고 구름은 낮게 드리워진 회색계통의 날씨다. 자야는 외출 준비를 끝내고도 현관에서 한동안 서성이며 바깥에서 부는 바람처럼 갈등하고 있었다. 막상 외출 준비는 하고 나섰지만, 어디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 다시 흰색 계통을 찾아가며 몸을 달랠 것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야의 마음만큼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초겨울바람이 마당에 뒹굴고 있는 낙엽을 현관 앞으로 몰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면 대문 앞으로 우르르 몰고 간다. 바깥바람은 마치 망령부리는 노인의 마음같이 이리 불었다가 금세 저리 불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방도로 건너 상가에 있는 횟집에서 뒷문으로 내어놓은 쓰레기봉지 더미에서 날아온 스티로폼 박스가 부서진 채 낙엽과 함께 현관문 앞에서 뒹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람과 함께 그 쓰레기들이 현관으로 날아들 것 같아 자야는 조바심치며 현관문을 밀고 나왔다. 어제도 쓸고 주웠지만 소용없다. 금세 이 모양이다. 옆집, 중앙동에서 한의원을 한다는 늙은 한의사가 사는 집에서 날아오는 낙엽을 감당할 길이 없다. 자야는 바람결에 몰려다니는 낙엽더미에서 스티로폼만 몇 조각 주워서 대문 밖 전봇대 옆에 있는 쓰레기봉투로 눌러놓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에 살 때에는 예상도 못한 것들이 성가시게 한다. 그렇다고 옆집이나 앞 상가에 가서 항의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자야의 집 화단에 있는 목련 잎이 바람에 따라 그쪽으로 날아가기도 하는데 경우 없이 굴다가는 골목 안에서 싸가지 운운하며 교양과 품위에 있어서 거무튀튀한 여자로 낙인 되기 십상이다.

자야는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이 이제는 싫다. 일거리도 많거니와 골목을 나서도 익명성이 옅어 이웃사람을 만나면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이지 질색할 정도다. 문만 잠그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아파트가 성가시지 않고 편안했다. 그러나 남편은 아파트를 싫어했다. 아니, 체질과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형편이 되면 땅을 사서 단독주택을 짓고 정원을 꾸미고 시원한 여름날이나 선선한 초가을에는 친구들을 불러다 그 정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겠다는 것이 아파트에 살 때의 입버릇이었다. 자야는 그 희망의 초록색 입버릇을 시도 때도 없이 듣고 살았다. 남편은 그 소망에다 한 가지 덧붙였다. 단독주택을 지으면 아담한 자야만의 서재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자야는 그 말에 구미가 당겼다.

남편은 아파트에 살적에 위층의 아이들이 뛰어 다니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아래층의 눈치를 보며 운동은 고사하고 청소기도 마저도 제대로 돌릴 수가 없는 아파트가 집이냐고 자야에게 시커먼 소리를 질렀다. 특히나 오밤중에 위층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 자다가 그 오물을 뒤집어 쓴 양 못 견뎌 했다. 아파트는 마치 자야가 혼자서 설계하고 만든 집인 양 분풀이를 자야에게 해댔다. 시골에서 자란 그에게 행동반경이 한정되고 옆집과도 소통이 없을 정도로 익명성이 짙은 아파트는 영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파트에 팔 년을 살고 시내 외곽 구획정리 구간에 백팔십 평의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설계사인 남편 친구의 구상대로 집을 지었다. 그때는 구획정리 구역에 우후죽순처럼 상가와 단독주택이 들어섰다. 자야의 집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공사판이었다. 남편은 매일 퇴근 후에 자야를 태우고 자신의 꿈인 그 공사현장으로 가서 공사의 진척도를 확인하고 흐뭇해했다. 그런 남편의 얼굴은 희망이 싹트는 연두색이었다. 남편은 집보다 삼겹살을 구워먹을 정원에 더 신경을 썼고 자야는 자신이 쓸 서재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막상 정원과 서재를 지닌 단독주택을 차지하고 나니 남편의 말마따나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여름밤에는 정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헤아리고 가을밤이면 달빛이 서재에 들어와 놀다 가곤했다. 그러나 얼마간 살아보니 단독주택은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손가락에 물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잡일이 끝도 없다. 남편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자야의 일이었다. 몇 평 안 되는 잔디밭이지만 잔디를 깎고 돌아서면 한 뼘이나 웃자라 있고 잡풀은 아무리 뽑아도 마침표가 보이질 않았다. 웃자라는 잡풀은 푸른색이 아니라 자야의 눈에는 검정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적어도 단독주택을 가지려면 가정부와 정원사를 둘 형편이 되어야 한다고 자야는 늘 남편에게 분홍빛으로 투덜거렸다. 남편은 그때마다 아파트에 어떻게 살았는지 악몽 같았다고 청소기 마음대로 돌리고 아래 위층 간섭받지 않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사람은 흙을 밟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푸른색 언어로  빈정거렸다.

남편이 파견근무 나가기 전에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고기를 몇 번 구워먹었다. 그것도 자야로서는 보통일이 아니었다. 불을 남편이 피웠지만 음식준비부터 손님접대가 아파트에 살 때 꿈꾸던 간단한 잔치만은 아니었다.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가 끝나면 남편은 취해서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서 누워버리고 그 뒷설거지가 자야의 몫으로 고스란히 굳어진다. 격의 없이 지내는 남편의 친구들과 진한 농담을 하며 고기를 구워서 먹을 때야 붉은 빛깔의 분위기였지만 파장이 되어 술 취한 친구들이 돌아가고 설거지거리만 남았을 때 자야의 기분은 모든 물감을 한군데 풀어 마구 휘저어 놓은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색깔이었다.

자야는 차고에 있는 남편의 승용차를 끌고 나갈까하고 키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가 아무래도 쇼핑가는 것도 아닌데 차가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걸어서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골목 끝, 대로에 있는 농협에서 설치한 24시 편의점의 365코너에 가서 현금지급기에 카드를 넣고 얼마의 현금을 빼냈다. 카드만 쓰던 자야에겐 현금이 없었다. 현금을 농협마크가 찍힌 봉투에 담아 핸드백에 넣고 편의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마땅히 살 것이 없었다. 아니 필요한 것이 없었다. 편의점에서 나온 자야는 헤어코너로 갈까하다가 자신이 모자를 쓰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남편이 외국에서 사다준 회계계통의 양털로 짠 모자였다. 십년도 넘은 것이지만 오늘같이 추운 날 뒤를 살짝 접어서 쓰니 잘 어울린다.

편의점 앞은 바로 버스 정류장이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수필동인 모임의 후배인 숙경이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숙경에게 가서 수다나 떨까 생각하다가 숙경이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동안 어디를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하루에 너덧 번 들어오는 마을버스가 때를 맞추어 승강장으로 들어와 섰다. 자야는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마을버스에는 운전사를 빼고 겨우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마을버스는 예술회관을 거쳐 역으로 간다. 자야는 예술회관으로 가서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볼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몸이 그럴 때는 어떤 예술작품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작품이 지닌 색깔마저도 읽을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자야는 예술회관을 그냥 지나쳤다. 버스에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중앙시장이 있는 역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역 앞이 버스 종점이 되는 셈이다.

자야는 역 앞에 내려 대합실로 들어갔다. 대합실 안은 훈훈했다. 어디를 다녀올까 궁리하며 하릴없이 기차 시간표를 훑어보았다. 상행선 KTX가 올 시간이 다 되어 간다. KTX를 타고 대전에 있는 여동생에게나 가서 집안 살림이 서툰 동생에게 이것저것 간섭하다가 올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평일인데 동생은 아무래도 강의를 나갔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동생은 대전에 살면서 결혼하고 나서 뒤늦게 지방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전문대학에 시간 강사로 나가고 있다. 자야는 고개를 저으며 시간표를 외면했다. 동생의 부재보다 붉게 달아있는 몸이 대전행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신사임당이지만 생리가 끝나고 사나흘 후면 어우동이 되어버리는 자야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대합실에서 나와 광장을 잠시 거닐었다. 광장에도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 자야의 치맛자락을 몇 번이나 들추었다. 이러다가 정신이 살짝 나간 이상한 여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보도를 따라 시장 쪽으로 걸어내려 왔다. 택시들이 역에서부터 승강장까지 도열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자야의 머리에 번개처럼 후려치고 가는 무엇이 있었다. 택시기사를 하나 낚아 얘기상대로 드라이브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좀 멀리, 시 외곽으로 한 바퀴 돌면서 택시기사와 진한 농담이라도 하며 붉은 색 언어를 토하면 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 사귀기에 소극적인 그녀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스러웠지만 택시기사가 먼저 수작을 걸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을 걸어내려 온 자야는 잠시 승강장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승강장 앞에 있는 시민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 안은 훈훈했고 약사는 키가 후리후리한 여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이 약국은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 약사에게 아무 말이나 해도 먹혀들 것 같았다. 일단 자야는 피로회복제인 비타민제와 드링크를 달라고 했다. 약사는 웃음 띤 얼굴로 비타민제와 드링크 한 병을 꺼내다가 데스크 위에 놓았다. 약국안을 둘러보니 약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야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고 속삭이듯 약사에게 말했다.

-저어....... 그 약과 한 알과 드링크를 한 병 더 주세요. 남편이 밤마다 좀....... 실험 한 번 해보려고요.

-혹시 비아그라 말씀이세요?

자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약은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하는데....... 사모님 부탁이니까 거절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발기부전이나 전립선비대증이면 병원에서 상담하고 약을 따로 처방해야 합니다.

약사는 자야가 주문한 약을 봉투에 담아 건네주며 친절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붉은 톤을 지닌 따뜻한 말이었다. 자야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알겠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약봉투를 받아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고 약국을 나섰다. 승강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몇몇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눈이 오려는지 구름이 낮게 깔리어 도시 하늘을 덮고 있었다. 날씨는 회색이었다.

자야는 바로 승강장 앞에 있는 택시를 보았다. 도열해 있는 맨 뒤에 있는 택시였다. 차 유리에 선팅이 진하게 되어있어서 기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자야는 조금 망설이다가 택시의 앞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사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행히 늙은이가 아니고 말을 받아줄 상대는 될 법한 사십대 초반의 기사였다. 얼굴이 갸름하고 수염을 깔끔하게 깎은 모범기사처럼 보였다. 핸들을 잡고 택시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중학교 도덕선생처럼 보일 정도로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이럴 때는 사람을 잘 보고 골라야한다는 것을 자야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일단은 안심이다.

-저어 타도되나요?

보라색 목소리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예! 택시입니다. 손님이면 당연히 모셔야죠?

목소리도 정중하고 예절이 있어보였다. 자야는 택시 앞좌석에 올라앉았다. 택시는 출발하면서 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하면서 깍듯하게 물었다. 자야는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홍콩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 저속한 표현을 자야는 익혀두지 못했다. 택시는 직진으로 공단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자야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그냥 택시 기사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 나쁜 인상이 아니었다. 이럴 때 골치 아픈 작자를 만나면 패가망신한다는 걸 자야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사람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택시기사의 얼굴을 다시 훔쳐보았다. 기사는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조급하지 않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역시 자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뼈저린 경험, 스스로 생각해도 망신살이 뻗친 날이었다. 지난봄이었다.  생리가 끝난 후에 몸이 달아서 붉은 색 언어를 찾아서 몸을 다스린다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홀로 늦도록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같이 수필을 쓰는 숙경이가 만만했다. 숙경을 불러서, 수준에 맞지도 않고 조금 저속하지만 나이트에 가서 몸을 흔들어 스트레스를 쫙 풀겠다고 나선 길인데 숙경이가 집안에 제사라고 했다. 제사와 나이트클럽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숙경을 포기하고 같이 갈 만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같이 수필을 쓰는 길옥언니를 떠올렸지만 그 나이에 너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고 분위기가 괜찮다는 카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 카페에서 젊은 여자가 홀로 맥주를 마신다는 것이 늑대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맥주를 마시며 몸이 왜 생리 후에는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자신을 만든 신의 실수가 아닐까? 신의 실수라고 하더라도 그걸 자신의 마인드로 컨트롤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에 잠겨있으면서 힐끔힐끔 맞은편에서 앉아있던 사내와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쳤다. 아니나 다를까 맥주를 홀로 마시던 사내가 다가왔다. 자야 또래쯤 되는 남자였는데 깔끔하게 뒤로 빗어 넘긴 머리며 차림새로 보아 감각 있는 멋쟁이였다. 남자는 정장이 아니라 골프웨어를 입고 있었다. 자야는 남자의 얼굴보다 골프웨어의 바지주머니에 노란색으로 수놓은 상표부터 보았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 잔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고 그 때의 상황으로는 마다할 구실을 찾기 힘든 말이었다. 아니, 누군가가 그렇게 수작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야는 대답 없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살짝 웃어보였다. 보랏빛 웃음이었다.

-상당히 외로워 보이십니다.

웃어주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했던지 맞은 편 의자를 당겨서 앉은 남자가 한 말이었다.

-제가 외로워 보인다구요. 틀렸습니다. 고민이 좀 있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야는 아마도 그렇게 둘러댔던 것 같다. 눈치로 먹고 사는 웨이터가 맥주잔을 가져다 사내 앞에 놓아 주었고 사내가 주는 팁을 받아갔다. 실내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 자야의 달아오른 붉은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 순간 황홀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제가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자야의 잔은 비어있었다. 자야는 거절하지 않고 잔을 들어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그 남자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채워주었고 자야도 그 남자의 잔에 거품이 넘치지 않게 맥주를 채워주었다. 남자가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자야도 잔을 들었다.

-미모의 숙녀께서 지닌 이름 모를 고민의 해결을 위하여!

남자는 하얀 꽃잎이 풀풀 날리는 말을 하며 잔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위하여! 둘은 살짝 잔을 들이대고 마셨다. 그렇게 마신 맥주가 열병에 가까웠다. 카페에 들어갈 적에는 혼자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둘이 나왔다. 거기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아마도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면서도 붉은 색 언어는 소통되지 않았다. 무슨 출판기획사를 한다는 그의 명함을 받았고 누구의 흰색 수필에 대해서 얘기하며 그 수필 속에 소재로 등장한 그 산골마을에 가보고 싶고 그런 시골마을에 전원주택을 짓고 글을 쓰고 싶다는 매혹적인 말을 했던 것 같다. 카페에서 나온 남자는 입가심을 하자며 근처의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자야는 당연한 수순처럼 그저 말없이 따라갔다. 단 둘이 들어갔던 노래방은 붉은 색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컴컴한 조명과 천정에서 돌아가는 조명등이 붉게 달아있고, 적당히 취한 자야의 몸에 딱 맞았다. 둘은 한 시간 정도 노래를 불렀다. 남자는 쓸쓸한 가사를 지닌 배호의 노래와 흘러간 노래들을 가수 뺨칠 정도로 기가 막히게 불렀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자야는 춤을 추었고 거리낌 없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으며 더 나아가 서로 끌어안고 브루스를 추었다. 브루스를 추는 동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누구의 입이 큰지 살짝 입술을 대어보기도 했다. 거기서 자야는 남자만이 지닌 특유의 붉은 색 냄새를 맡았다. 남자의 냄새를 맡으니 변색동물인 자야의 몸은 붉은 빛의 어우동으로 변하는 건 당연한 이치, 자야는 그날 그 냄새를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노래방에서 나올 적에 자야는 적당히 취해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취해 가누기 힘든 척 몸을 남자에게 맡겼다. 다음 코스는 상상 가능한 분분이지만 남자가 자야를 부축하고 근처의 빨강색 네온이 켜있는 모텔로 향했다. 모텔 방에 들어가자 자야의 몸은 붉다 못해 터지기 직전의 시뻘건 자두처럼 팽팽히 달아올랐다.

모텔 방은 아늑하고 은은한 조명이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서자 자야는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 다음은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말할 수 없지만 굳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한 부분이니 에둘러감이 마땅할 것이고 두어 번의 거사를 치루고 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밖이 희뿌연 새벽이었고 탁자위에 시커먼 색깔의 글이 적힌 쪽지가 하나 남아있었다. 물론 남자는 언제 갔는지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자주 연락하죠.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 그냥 갑니다.]

자주 연락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잠과 술에서 깨어 신사임당으로 돌아온 자야는 그 쪽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지난밤 취기에 그 남자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시커먼 예감이 스쳤다. 그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었다. 몸과 정신이 흰색으로 돌아온 자야는 뼈저리게 후회를 했지만 송아지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어떻게 모텔을 나와 집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 피부가 벗겨지도록 문질러 샤워를 했고 질에 피가 나도록 때밀이 수건으로 후벼냈다. 그래도 그 욕정으로 더럽혀진 몸의 기억과 남자의 몸에서 맡은 색깔의 기억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기억이야 세월이 가면 점차 옅어지겠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자야가 시달린 것은 후회뿐이 아니라 그 남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였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안부를 가장한 전화, 만나자는 전화에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잊을만하면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남자의 전화는 집요했다. 하루가 멀다고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고 그 남자의 목소리에 마치 뱀을 밟은 것 같이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뼈저린 통증이었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이 자기반성과 내면 성찰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만약 집이라도 가르쳐 주었다면 당장 찾아와 기웃거릴 작자처럼 여겨졌다.

남자의 전화만 받아도 몸이 더럽혀진 것 같아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곤 했다. 전화벨 소리가 검정색으로 들렸고 전화기마저 검정색으로 보였다. 하룻밤 꿈을 붉게 피어난 한 송이 꽃으로 깔끔하게 개화시키지 못한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급기야 죽고 싶을 정도의 자괴감을 맛보았다. 얼굴도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그에게 받은 명함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의 전화를 받다가 견디다 못한 자야는 검다 못해 거무튀튀한 냄새까지 풍기는 그 휴대폰을 벽에 던져 박살을 내버렸다. 무엇을 부숴본 적이 없는 자야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전화번호와 전화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남편에게 국제전화를 했다. 전화기를 물에 빠트리고 휴대폰을 바꾸었다고 말하며 바뀐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늑대의 근성을 지닌 남자라는 짐승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며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다시 훑어보았다. 성실하고 착해 보였고 자야가 싫다고 하면 치근거릴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믿을 짐승이 못 된다. 늑대가 고기 맛을 보면 언제 이빨을 드러내는 하이에나로 돌변할지 모르는 동물이다. 자야는 절대로 자신이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되는 썩은 고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택시 기사는 자꾸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계면쩍은 듯이 운전을 하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자야에게 물었다.

-어디로 모시는 게 적당할까요?

-저어~ 아저씨 가고 싶은 데로 가세요. 저 오늘 시간이 많거든요.

-아! 그래요. 가끔은 이렇게 바람도 쐬며 살아야죠. 집에만 계시면 우울증이 걸리기 십상입니다.

-맞아요.

자야는 맞장구를 치면서 이때가 기회다 싶어 핸드백에서 약 봉지를 꺼냈다. 피로회복제 한 알을 보라는 듯이 입안에 털어 넣고 드링크를 마시면서 물었다.

-택시를 하시면 피곤하시죠?

-피곤하지 않은 일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택시기사는 그냥 대수롭잖게 말하며 힐끔 자야를 보며 웃어보였다. 자야는 준비한 약 한 알과 드링크의 뚜껑을 따서 기사에게 내밀었다.

-피로회복제예요. 마시면서 천천히 가시죠.

-아이쿠! 고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에 택시기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치의 의심이 없이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드링크를 마셨다. 그리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이브 삼아 강변도로나 한 바퀴 돌아서 올까요?

아무래도 초보인 모양이다. 아직도 눈치를 긁지 못했다. 숙녀가 이렇게 다정하게 굴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거늘 그 이유를 읽지 못하고 있다. 자야는 되물었다.

-아저씨! 택시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택시 말입니까? 왜 제가 운전이 서툴러 보여서요?

-아니. 운전이 서툴다는 게 아니라........

-택시로는 완전초보입니다. 오늘이 꼭 나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형광등이군요.

-형광등이라뇨?

-눈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저 오늘 시간이 많아요. Y시로 내려가는 게 어때요? 그곳에 가서 절 가져도 좋구요.

-뭐라구요?

-절 가져도 좋다고 했어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자야는 그런 붉은 말을 뱉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그 붉은 색 언어에 충격을 받았는지 차가 잠시 주춤 거렸다. Y시에는 모텔이 지천으로 늘렸다. 특히 시 외곽에는 하늘이 열리는 모텔, 무인일실 모텔, 이 시대의 수요자가 요구하는 형태의 모텔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들판에도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에는 모텔이 집단으로 형성된 곳도 있다. 택시를 시작한 지 나흘 밖에 안 되는 택시기사가 그곳을 아는지 모르겠다. 택시기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더 말이 없었고 차는 이미 강변도로를 들어서고 있었다. 하늘에는 간간히 진눈개비가 날리고 있었고 차창 밖은 온통 회색 풍경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아저씨 참 잘 생겼어요.

-그렇게 보이십니까?

-젊을 때는 좀 날렸겠어요.

할 말이 궁했던 자야는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운전을 하고 있는 택시 기사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슬쩍 그곳을 건드렸다. 약간 발기된 상태였다. 택시 기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착하고 순진한 남자처럼 보였다. 이젠 택시기사가 아니라 남자로 보였다.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성가실 일이 없는 노란색 꽃가루가 날리는 남자. 자야는 꽃가루를 찾는 한 마리 나비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꽃에서 꿀을 찾는 벌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야의 귀에는 벌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음악이라도 틀어드릴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노란 꽃가루가 날리는 남자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던지 몸 둘 바를 모르고 더듬거리고 있었다. 음악을 틀면 배호의 노래나 흘러간 노래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노래를 들으면 지난봄에 만났던 그 성가신 사내가 떠오를 것이고 그 검은 기억이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 것 같았다.

-음악보다 재미있는 얘기나 해주세요.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그건 그렇고 아까 주신 약이 피로회복제가 맞나요?

남자는 이제 감을 잡았는지, 아니면 신체 어느 부분에 진하게 나타나는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는지 약을 물고 늘어졌다. 역시 형광등이다. 오, 순진한 노란색 남자. 자야는 오늘 남자를 잘 골랐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보라색으로 점철된 농담을 했다.

-왜요? 신체 어느 부분에 이상이 오나요? 약효가 한 이틀은 갈 거예요. 오늘 쓰시고 나머지는 사모님께 오늘밤 시주하세요. 호호호.

말문이 터진 자야의 입에서는 그런 보랏빛 말들이 거침없이 나왔다.

-같이 드라이브하는 거니까, 택시비를 반만 내면 되죠? 이걸로 오늘 택시비는 충분할 거예요.

자야는 핸드백을 열고 농협마크가 찍힌 봉투를 노란색 남자의 허벅지에 올려놓으며 손등으로 그곳을 툭 쳤다. 아까보다는 훨씬 꼿꼿이 발기된 상태였다.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봉투를 집어 운전석 문에 달린 서랍에 넣었다. 자야는 고개를 쭉 빼고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순진하게 생겼고 성가시게 하지는 않을 인상이다. 그렇더라도 남자는 믿을 짐승이 못된다. 혀를 깨물고 며칠만 참으면 되는데....... 강변도로 끝나는 곳에서 차를 돌리자고 할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를 돌려 집으로 갈까? 정말로 그럴까? 자야는 생각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수필가로서 내면 성찰에 걸림돌이 될 이런 돌발 행위에 자기반성을 하며 갈등하고 있을 때 핸드백 속에 들어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폴더를 열자 숙경이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잠깐 성가시다는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받았다.

-응 숙경이네.

-언니! 눈이 오네! 첫눈이야.

-여기는 눈이 안 오는데....... 진눈개비만 날리고 있어.

-언니 어디야?

-나 지금 대전에 가고 있다.

숙경이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자기반성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자신도 모르게 대전을 둘러댔다. 자야는 자신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오는 그 거짓말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거짓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에서 술술 나왔다. 옆의 남자는 자신의 숨소리라도 난데없이 나타난 훼방꾼에게 들릴까봐 그러는지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차는 이미 강변도로 끝에 매달린 Y시 외곽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구나. 동생한테 가는 거야?

-응.

-눈이 오니까 마음이 펄럭여서 언니네 집에 가서 수다나 떨까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오늘은 안 되겠네

-아쉽당, 오늘 늦겠네?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야.

-알았어! 잘 갔다 와. 돌아오면 전화해. 알았지? 언니!

-그래. 그러자.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야의 이마에는 진땀이 나고 있었다. 검정색으로 점철된 거짓말을 둘러대느라 난 진땀인지 아니면 자기 검열에 걸려서 오는 자괴감에 의한 땀인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차는 Y시 외곽도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차가 Y시 외곽도로를 벗어나자 진눈개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눈이었다. 와이퍼를 켰지만 소용없었다. 차의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고 길이 미끄러운지 남자는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아저씨! 눈도 많이 오는데 차 돌려서 그냥 돌아갈까요?

자야는 남자를 떠보려고 그런 제안을 했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만약 그냥 돌아간다면 이 붉은 색으로 달구어진 몸, 자두빛깔로 익을 대로 익어 터질 것 같은 이 욕정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

-지금 농담이시죠? 약까지 먹여놓고서.......

역시 남자의 대답은 어림없다는 식으로 붉은 색으로 달아 있었다.

-돌아갈 때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서 그래요.

-이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금방 그칠 것 같은데.......

이 노란색 남자도 남자인 모양이다. 들은 척도 않고 그대로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차는 Y시 외곽도로를 벗어나 농로로 접어들었다. 자야는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농로는 말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농로로 들어서자 차는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멀리 모텔 촌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텔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이자 자야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 들판에 퍼붓고 있었다. 그 눈을 휘날리며 택시는 달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 있던 모텔들이 자야 쪽으로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 모텔 간판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보일 때, 눈은 흰색이 아리라 붉은 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붉은 눈이 차창 밖에서 퍼붓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빨강색이었다. 붉은 색 눈을 보는 자야의 속에서 무언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아우성치는 무엇의 이름을 모르겠다.

                

   

이홍사 lhongsa@hanmail.net 소설집<아버지는 맞아도 싸요>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