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의 육인용 책상에는



고은주




간막이가 없는 사각의 육인용 책상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창가 자리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누가 이런 공공도서관에 자기 집 안방에서나 씀직한 방석을 놓고 갔담? 나는 누구든 나타나서 냉큼 치워주길 바라며 창가 선반에 방석을 올려두었다.

나는 오늘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아니, 새로운 사람이 될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수능열기’ ‘수능만만’ 따위의 제목이 박힌 책들을, 누가 볼까 봐 조마조마하지만, 누가 보면 어쩌랴, 하며 당당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착, 착, 착, 괜스레 책장도 소리 나게 걷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인지 도서관에는 아직 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쯤 열공했다.

인생이란 거,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정말이지 세상일이 너무도 단순해 보였다. 한 일 년 도서관 신세 좀 지고 대학에 들어간다. 졸업해서 취직이 안 되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몇 권의 책을 달달달 욉기만 하면 되는 사지선다 시험쯤이야 반 년만 준비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나도 세상의 쳇바퀴에 적당히 얽혀들어가 있겠지. 조금씩 타협하며 예의상의 썩소 정도는 날릴 줄 아는,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이 되어 있겠지. 사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루해지지만, 누가 알랴, 그런 삶의 어느 복판에서 놀랄 만한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누군가 내 맞은편 의자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사뭇 조심스러운 그 몸짓이 오히려 내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다른 데 시선을 돌리는 척하며 슬쩍 앞사람을 곁눈질했다. 여자였다. 가느다란 왼손에 방석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좀더 고개를 들어보았다. ‘내 고정석을 빼앗은 나쁜 넘!’이라며 그녀는 분명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려면 어쩌랴, ‘여기는 아가씨네 집 안방이 아니걸랑요!’라고 나도 쏘아주고는 목하 열공 중이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콕 박았다.

그런데 그녀가 창가로 바짝 다가서는 듯했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발 블라인드만큼은 그대로 내버려주길,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그녀의 손이 휘휘휙 블라인드를 올리고 말았다. 나는 아가씨의 고정석을 내드릴 테니 블라인드를 내리면 안 되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묵묵히 참고 있었다. 혹시라도 왜 내려야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한 것이다. ‘실은 제가 봄볕에 되게 민감하거든요’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작심 첫날인 만큼 종일토록 열공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일등으로 열람실 문을 열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책장을 착착착 걷었다. 맞은편 자리에는 그녀의 방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내심 불안했지만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앉았던 자리에 벌써 정이 들어버렸는지 다른 자리로 옮기면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두 시간쯤 후 예의 그 여자가 나타났다. 오자마자 휘휘휙 블라인드를 올려 밉상이었지만, 의자를 잡아당기고 책장을 펴고 펜을 꺼내 드는 동작이 사뭇 조심스러워 곱게 봐주기로 했다.

한 이레 흘렀는가, 어느 한낮 그녀의 시선이 내 뺨에 닿는 듯했다. 그녀가 이윽히 내 왼쪽 어깨를 지나 창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고 싶었지만 왠지 조금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아가씨한테 조금도 관심 없거든요’라는 뜻으로 고개를 콕 박고 말았다. 그때였다.

“소리, 못 들으셨어요?”

소리? 못 들었냐고? 지금 이 여자가 나한테 말을 거는 건가? 내가 환청을 들은 건가?

“아까부터 목련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나 이것 참, 이 여자, 이제 보니 나보다 한 수 더 뜨는 인간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오히려 태연히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무어라고 대꾸할 말은 떠오르지 않아 이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자목련이 서 있었다. 망울이 터진 지 벌써 일주일은 더 됐겠다. 내가 애써 저것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이 여자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그래서 책을 덮고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마디 쏘아주었다.

“저는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요.”


*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어요. 유난히 키가 컸던 저는 양심상 뒷자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저처럼 뒷자리에만 앉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얼굴이 호박처럼 부풀어오른 친구였지요. 병을 앓고 있어서 그렇다는군요. 우리는 하루 종일 몇 마디 나누진 않았지만 자주 짝꿍이 되었어요. 수군대는 친구들의 말로는 그 친구는 불치병을 앓고 있대요. 몇 차례나 서울로 올라가 수술을 받았지만 점점 더 허약해지고 있대요. 정말이지 그 친구가 웃는 얼굴은 한 번도 보질 못했어요.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의 저는 그런 친구를 눈앞에 두고도 왠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어요. 그 나이에 불치병을 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시골에서 요양을 하는 영화 속 소녀의 영상만 떠오를 뿐이었지요. 그런 터에 수염이 부숭부숭 난 사내애가 불치병을 앓으면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니, 그런 친구가 바로 내 옆에 있다니,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니, 다른 친구들과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다니! 그런 현실의 한복판에 내가 이렇게 멀쩡히 서 있다니!

입학한 지 한 달 남짓 됐을 때 그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수술을 받으러 서울에 갔대요. 담임이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라 해서 저희는 다함께 두 손을 모았어요. 그런데 며칠 뒤 그 친구가 죽었대요. 어리둥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사내애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느 날처럼 점심을 먹고 축구공을 찼더랬지요. 저도 그런 줄만 알았어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어요. 다른 날보다 더 힘차게 뻥뻥 공을 차댔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청소시간이었어요. 한 친구가 창가 화병에서 시든 꽃을 빼내 휴지통에 구겨넣고 있더군요. 자목련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죽은 그 친구가 꽂아놓았던 것이었어요. 서울로 가기 전날엔가, 집에서 꽃을 꺾어왔다며 모처럼 웃음을 지어 보이던 친구의 얼굴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저는 부리나케 앞으로 달려나갔어요. 꽃을 왜 버리냐고, 다짜고짜 성을 냈어요. 너 왜 그래? 뭐 잘못 먹었냐? 시들면 버려야지, 썩을 때까지 그냥 두냐?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이 친구의 얼굴로 날아갔어요. 친구도 주먹을 날렸어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꽃 때문이라면 휴지통의 꽃을 얼른 꺼내는 게 우선일 텐데 저는 주먹을 멈추지 못했어요.

결국 담임이 달려왔어요. 왜 그런 거냐고 물었지만 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어요. 추궁하던 담임이 지쳤는지 제 뺨을 때리더군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더 때려달라고 담임을 노려보았더니 고맙게도 담임은 마구마구 저를 짓밟아주더군요.

그날 이후 왼쪽 귀가 아팠지만 병원 따위는 가지 않았어요. 병원에 가서 제 몸을 달래는 건 죽은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지요. 좀더 나 자신을 나쁘게, 못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것이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던가 봐요.

그때부터였어요. 저에 대한 자학이 시작된 건,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적의를 품게 된 건. 내 속에서 왜 그리도 끊임없이 독기가 솟아오르는 건지 저도 어찌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저는 학교도 그만두고 세상을 떠돌고 다녔답니다. 불량배들과 어울려도 보고, 노숙자들과 잠도 자보고, 절에서 마당도 몇 달 쓸어도 보고 하였더랬지요. 세상의 끝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들, 끄끝네 감추어놓았다가 우리의 뒤통수를 칠 생의 비밀들,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이런 저를 늘 절망케 하는 건 다름아닌 저 햇살이었어요. 금방이라도 나를 토막 내버릴 듯 위협하면서도 언제까지고 이 세상의 베일 속에 살려둘 것만 같은 저 햇살! 이 끔찍한 아이러니에 저는 무릎을 꺾고 말았지요.

삼 년을 떠돌다 끝내 낙오자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야말로 삶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해야 할 기로였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하고야 맙니다. 스물다섯 난 사촌오빠가 스스로 생을 저버리고 말았지요. 허! 그것 참, 헛웃음이 나와버리더군요. 정작 죽으려는 사람은 나인데 선수를 치다니!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제가 하고 있었던 생각은 한 집안에 잇따른 죽음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당분간 살아 있기로 했지요.

살다 보니 이만큼 살아졌네요. 내년이면 제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요 몇 년간 저의 도피처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었어요. 다른 일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어요. 글을 읽으며 쓰며 저는 조금씩 살고 싶어졌던 것 같아요. 여전히 삶의 비의는 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지만 친구의 죽음에서, 사촌오빠의 죽음에서 조금씩 놓여나게 된 것 같아요.

스물다섯 이후까지 시인이 되려고 하는 자에게는 역사의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T. S. 엘리엇의 말이 있지요. 그 말 때문인가요, 혹은 사촌오빠의 죽음 때문인가요, 저는 언젠가부터 스물다섯 나이를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함부로 스물다섯에 들어서서는 아니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 스물다섯에도 내 안의 독기를 어쩌지 못해 스스로 앓아댄다면 나는 온전히 스물다섯을 살아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지요.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된 것은 스물다섯이 되기 위한 어떤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은밀하고 절실한 어떤 의식…….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편지로써 그 의식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목련이 떨어지고 있었어요”라는 당신의 말을 들은 뒤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불현듯 당신께 편지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저는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저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친구의 죽음 이후 아무에게도 열어 보이지 못했던 저의 마음을 낱낱이 고백해야만 한다는 절박감에 휩싸여 있었던가 봐요. 고백이라도 해야만 비로소 저의 애끓는 젊음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절박감, 그래야만 친구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절박감! 그동안의 저의 방황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전에, 한낱 추억 나부랭이가 되어버리기 전에 말이에요. 먼 훗날에 가서야 추억이니 무어니 감상에 젖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궤를 찬 복부인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일 거예요. 추억이라니요! 열일곱 살 친구의 죽음이 어찌 한낱 추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의 이야기가 흐물흐물한 추억이 되기 전에 한 켜 한 켜 쌓아올려 성스러운 다비식을 치러주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레테의 강으로 흘려 보낸 뒤에는 영영 다시 돌아보지 않으렵니다. 돌아보는 것으로, 추억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죄닦음을 대신하는 구역질 나는 행동은 어설픈 피에로에게나 하라지요.

당신이 바로 이러한 저의 의식에 대한 증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그리 부담 느끼실 건 없습니다. 그저 이 해가 가기 전에, 그러니까 제가 스물다섯이 되기까지 앞으로 몇 번 더 이어질 저의 편지를 받아주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답장 같은 건 필요없어요. 다만 읽고 나서는 불에 태워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이 해를 보내고 나면 저는 한결 가뿐하게 스물다섯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고 나면 저도 저 봄볕 아래서 자목련 떨어지는 소리에 온전히 귀를 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


이 편지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한 달이 가도록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아마 한 달쯤 더 기다려보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굳이 기다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두어 달 봉투 속에 갇혀 있다 나온 나의 고백은 이미 빛을 잃어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한 달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던 편지를 꺼내어 불에 태워버렸다. 어서 빨리 사그라져 레테의 강으로 흘러가는 게 이 편지가 제 몫을 다하는 일이리라.

나는 맹렬히 수능시험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편지라니, 흥, 유치하게시리, 가끔씩 속으로 흥흥거렸더니 공부가 더 잘되는 듯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수능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모의고사 점수는 더욱 만족스럽게 나왔다. 나는 더 자주 흥흥거렸다. 다시는 편지 따위, 글 따위 쓰지 않고도 살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련다. 흥흥거릴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부쳐지지 못한 편지를 떠올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제대로운 스물다섯이 되기는 그른 것 같다는 조바심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제대로운 스물다섯’이라, 어쩌면 이것은 어리석은 독단일지도, 어쩌면 이 전체의 글 자체가 굉장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두려운 일이다. 이러한 독단과 오류가 스물다섯 이후로도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