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일기

                                                  김재수


‘늦잠. 식사할 여유가 없이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토마도 쥬스를 내민다. 냉장고에 마지막 남은 토마도란다.’,

‘하늘이 너무 무겁다. 우산이 없어 난감한데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퍼붓는 소나기’.

‘미쳐 백미러 보지 않고 차선 변경하려는데 휙- 지나는 외제 승용차 한 대. 겁에 질린 내 차도 나만큼 떨고 있다. 휴-’

며칠 전부터 이상한 일기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여 ‘행복 일기’입니다. 아직은 서툴러 그냥 메모만 하는 정도입니다.

‘Carpe Diem’이란 ‘현재를 즐겨라’,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복권 당첨이나 기적 같은 사건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은 하루에도 얼마든지 많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행복은 한 개인의 감정이나 가치관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나면서 존재하므로,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주관에 의해 만족감이 성취된 심리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흔히 행복으로 인해 파생되는 심리 상태 즉 만족, 기쁨, 즐거움, 신남, 보람을 느낌, 평온감 등으로 존재하나, 매슬로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의 욕구는 계속하여 더 높은 단계를 원하기 때문에 '절대적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그 속성상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기에 가끔은 행복을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훈련을 하는 이유는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곧 편하게 되고 편함은 심리적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기대를 해 봅니다. 오늘 하루,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행복의 동행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고.


“저게 뭐냐?”

아침에 동료로부터 ‘늙은 아버지의 질문’이라는 글 하나 받았습니다. 내용인즉 82세 된 아버지와 52세의 아들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나무에 앉은 까마귀를 보고 “저게 뭐냐?”란 아버지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아들은 다정하게 “까마귀에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똑같은 질문이 네 번이나 이어지자 참다못한 아들이 큰 소리로 짜증을 내고 맙니다. 아들에게 꾸중을 들은 아버지는 말없이 아주 낡은 일기장을 가지고 나와 아들에게 내밉니다. 아들이 3살 때 쓴 아버지의 일기입니다. 그 일기장엔 오늘과 같은 똑 같은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저게 뭐냐?”란 질문을 23번이나 했고 아버지는 “까마귀란다.”는 대답을 23번이나 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한 결 같았습니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음에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고....

오늘 나도 아침에 이 글과 똑 같은 행동을 하고 왔습니다. 이제 첫돌이 다가오는 손녀에게 “도리도리”라는 말을 10번도 더했고, 말문을 열려는 아이에게 “어부바”라는 말을 20번도 더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즐거웠습니다. 아이가 따라하는 모습이 귀엽고 뭔가 하나씩 익혀가는 얼굴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며칠 전부터 화장실 출입이 더 불편해지고 환히 켜진 전자식 시계의 시간을 잘 읽지 못하는 엄마. 그 분명하던 발음이 많이 풀어진 듯 어눌해지고, 똑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씩 반복하는 엄마를 향해 나는 오늘 아침에도 심한 짜증과 화를 냈습니다. 손녀의 우유를 타는 일이며 밤중에도 일어나 냄새나는 귀저기를 갈아주면서도 짜증을 내지 않은 내가 밤새 불편한 몸으로 기저귀를 적셔낸 엄마에게 아내가 보는 앞에서 심한 말을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신 어머니가 아니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엄마의 낡은 운동화가 먼지를 덮어쓰고 현관 구석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엄마는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참을 수 없는데 막상 엄마를 보면 왜 그러는지 정말 내가 미워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어머니를 창조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어디 한적한 곳에라도 가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아침입니다.



기저귀 갈기

아빠 발 씻겨 드리기가 숙제다/ 부끄럽기도 해서 망설였지만/나를 바라보시는 선생님 모습/의자에 아빠를 앉히고/발을 씻겨드렸다/시멘트 바닥처럼 굳어버린/아빠 발/발을 씻기는 손이 떨리고/왈칵 눈물이 나왔다.

아주 오래 전 ‘상주어린이백일장’에서 장원 한 옥산초등학교 학생의 작품입니다. 지은이의 이름은 잊었지만 너무 그 장면이 생생해 외우고 있습니다.

요즘 내가 엄마의 기저귀를 갑니다. 가끔 아내와 손녀의 기저귀를 갈면서 포동포동 젓 살이 오른 다리를 보며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행복해 했는데 엄마의 기저귀를 갈면서 뼈만 앙상한 다리가 가슴이 아팠습니다.

엄마도 내가 어린 시절 내 기저귀를 갈면서 포동포동 살이 오른 날 보며 행복해 하셨겠지요. 내가 초등학교 시절 늑막염으로 한 달 간 학교를 가지 못했을 때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치지 않고 솟는 샘처럼 엄마의 사랑과 헌신으로 나는 이렇게 오늘까지 왔는데 자신의 모두를 남김없이 내게 넘겨주신 엄마는 이렇게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있습니다. 미안함과 죄송함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젠 자식이 누구인지, 며느리가 누구인지 목소리를 들어야 분간이 가능하고 그것마저 5분이 지나면 또 딴 소리를 하는 엄마. 그런 엄마의 정신과 육체를 고려하지 않고 정상인인 내 수준으로 맞추려 하니 서로 어긋난 생각과 행동의 간격으로 겪는 문제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나도 몰래 불쑥불쑥 나오는 짜증으로 스스로 감당 못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끝이 없고 세상 이치는 내리사랑은 하늘의 법이라지만 조금만 이런 이치가 반반으로 조정이 되었다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향하는 애증(愛憎)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창밖 석류나무엔 잘 익은 석류가 입을 열고 빨갛게 웃는데 푸르던 석류 이파리는 추분이 지나자 누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열매 속에 석류알맹이들은 누렇게 변해 이내 떨어질 이파리의 아픔을 알기나 할까요?

머지않아 가을 낙엽처럼 우리 곁을 떠날 엄마. 자식들의 원망과 짜증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저 잠든 모습에서 발견하는 마음을 주소서.

기도하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