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화분

              김설희



담 구석빼기에 조소 같은 분하나 엎어져 있다

화분은 없는데 꼭 분모양이다

둥글 길쭉한 덩어리에 흙보다 뿌리가 더 많다

뙤약볕에 비스듬히 누운 그것을 세우자

화초 한포기 누렇게 말라 죽어 있다

흙은 뿌리들을 그러모은 채 딴딴하게 굳어있다

아니 뿌리들이 흙을 안고 엉켜있다

뿌리들, 돌처럼 침묵하고 있다

발로 툭 차 그것들을 깨워본다

깍지 낀 채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안에서만 자란 탓인지 뿌리들이 가늘고 길다

아래로 뻗어간 뿌리

내려가다 옆으로 가다 위로 올라간 뿌리

중간쯤에서 화분의 둘레를 따라 둥그스름히 길을 튼 뿌리

서로의 다리를 걸고 있는 뿌리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뿌리

발목을 접질린 뿌리

더 이상 밀고 나갈 데가 없었는지

잔뿌리들 아래쪽으로 몰려 옹차게 껴안고 있다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꽃 한포기가

조금씩 흙을 밀어내며

온몸으로 제 틀을 만들었던 저것

 











걷는다는 것은

                      김설희



보도블록을 밟는 것

그 틈새로 올라온 잡풀을 보는 것

색소폰소리 걸어 나오는 레코드가게에 들러

테이프 하나 사서 미리 상상해보는 것

빨간불에 잡히면 그냥 잠깐 서 있다가

수신호 않아도 파란 불이 켜지면

미끄러지듯 흰 줄을 밟으며 가는 것

자전거 도로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

자전거가 따라오면 비킬까 말까

생각하게 하는 길을 기어코 걷는 것

제 발자국 지우는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두 발에 온 생(生)을 휘감는 것

화장품 가게 앞에서 라벤더 허브 로즈메리.....

큼큼 코로 걷다가 눈으로 걷다가

그만 내가 거리의 꽃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