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고절(傲霜孤節)


천지에 아름다운 단풍이 드는 시월 어느 날, 시베리아 한냉전선으로 전국에는 한파주위보, 강원도 어디에는 대설주위보가 내리더니 미처 단풍도 들기 전에 고춧잎은 삶아 놓은 듯 말라 비틀어지고, 알이 덜 찬 배추, 채 굵지 않은 청무, 익지 않은 감, 싱싱하게 소리치던 대파도 얼고, 참나무 오리나무 아까시 은행잎 파랗게 얼었다가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붙어 바람 앞에 소리 지르네 강에서 저수지에서 대지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천지 사방을 덮어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바다 속에서 차는 차대로 엉금엉금 기고 항구의 배는 항로를 잃고 하늘의 비행기도 뜨기를 중단하고 사람들은 일제히 집안에 틀어박히네 대명천지에 삼라만상이 고개 숙이고 스스로 침잠하고 천지에 소리는 사라지네 스스로 아가리를 틀어막고 뻗쳐오르던 두 손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한껏 움츠리니 세상 참 조용하네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아걸고 집구석에 처박혀 연속극이나 보는지 세상 참 조용하네 시퍼렇게 살아서 소리치는 것들 푸르른 것들 된서리, 기습 추위 한방에 모두 사라지네 스스로 죽어라 하고 동굴을 파고 안방 문을 닫아걸고 이불 속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광장엔 그림자도 보이지 않네 이참에 사대강 모두 파헤치겠네 집집마다 숨죽인 것들 비웃으며 이참에 모두 문을 잠가라 봉쇄하고 압수하고 재갈을 물리고 올 겨울 참 한파주위보 자주 내리겠네 올 겨울 참 조용하겠네. 오, 그리운 오상고절! 구절초, 쑥부쟁이, 감국은 기를 쓰고 피는데, 이 황량한 들녘. 


겨울비

 

    겨울비가 내린다. 이 비 그치면,

    만산의 홍엽도 사라지고

    앙상한 나무들 바람 앞에 맨살로 서리라.

    겨울은 한 걸음 더 빠르게

    목덜미 사이로 스며들고,

    온누리 꽁꽁 얼어 붙겠지


    이 비 그치면, 김장김치라도 푸짐히 담고

    소담스레 내리는 눈을 바라볼 수 있을까

    봄이 오기 전에,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들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추운 것이 하 많은 세월

    겨울비 내리는 창밖을 보다

    문득 고개 들어 맨몸으로 찬비 맞는

    목련을 보네, 가지마다 어느새

    꽃눈송이 맺혀 있는 것을 보네

    보송보송 솜털마다

    다시 오는 봄을 예비하고 있거늘

    왜 나는 가슴으로 겨울비만 맞는가

    아무 것도 안 하고 한탄이나 하면서

    겨울비 오는 풍경만 멍청하게 바라보는가.


*** 약력 : 김종인

1954년 경북 금릉 초실 출생

시집으로『별』,『나무들의 사랑』,『내 마음의 수평선』등

분단시대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현재  김천농공고 교사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