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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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0099 2014-11-03
99 버스정류장 / 마루야마 겐지
주진
4929 2011-02-21
내가 좋아하는 소설 도시로 나가 돈을 버는 딸이 가난한 시골 집에 다니러 왔을 때의 분위기는 세계 어느 곳이든 비슷할 것이다. 이 소설속의 정경도 우리나라 70, 80년대를 거친 세대라면 무척이나 익숙한 얘기리라. 시골 사람들이 갖는 도시에 대한 환상은 도시 물 먹은 주인공을 통해 형상화되고 부풀려진다. 그러나 돈의 위력에 무릎을 꿇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사이 특히 부모 자식간의 정을 돈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을 게다. 어머니는 딸의 불안을 손수건으로 거둬주고 딸은 보답으로 돈을 줘야 편안하고... 그러나 그 딸이 만약 어머니가 된다면 똑같이 자기 딸의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그 딸의 딸은 똑같이 돈으로 보답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누가 되든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설령 딸이 던진 돈을 받아 주머니에 챙겨넣는다 하더라도. 버스정류장 마루야마 겐지 쉬지 않고 걸었더니 예상보다 빨리 정거장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숨 한번 돌리지 않았지만 난 매우 힘들었다. 폐는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무릎관절 부위가 한없이 떨리는 것이 영락없는 환자 같았다. 게다가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땀이 범벅이 되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앞으로 40분 정도 있어야 한다고 말해놓고도 어머니는 쉼 없이 현도(현에서 관리하는 도로) 저쪽 어두운 계곡 사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이는 꾸불꾸불한 길이 잡초나 논에 둘러싸여 있을 뿐, 버스는커녕 인적조차 없었다. 주위는 무덥고 눈이 부신데다 고요하기만 했다. 근처에 녹음이 없어 나는 거칠게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논과 수풀 지대에 서있는 것이라고는 그 버스 정거장의 표식이 유일했다. 양산이라도 가지고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헐떡거리는 숨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단 2년 동안 내 몸의 상태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다. 마을을 떠난 순간부터 엉망이 된 것이다. 약간 경사진 길이 나타나도 소리를 지르고 싶고 한 걸음 떼는 것이 정말이지 귀찮았다. 도시 생활로 나는 상당히 변했다. 그러나 고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2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깜짝 놀랐다. 놀란 나머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곳은 지루했다. 이런 땅에서 10여년 헛되이 보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얘기하고 싶은 것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아버지나 어머니, 이웃 사람들은 거의 화제가 없었다. 고작 작년 가을에 일어난 산불 얘기가 화젯거리였다. 모두들 나를 보면 ‘촌티 벗었다’는 말을 연발하며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의심받지 않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곧이곧대로 믿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난 셀 수 없을 정도로 거짓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도시 생활에 대해 지어낸 얘기가 꽤 많았다. 얘기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용돈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더더욱 날 믿어주었다. 내 얼굴을 보려 몰려드는 사람에게 일일이 돈을 주었던 것이다.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즐거워했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사흘 연속해서 각각 5천 엔씩 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와 같이 생활하고 싶다 하시며 부상을 당해 읍내 병원에 누워 있는 동생을 홀대하는 듯한 말을 무심코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어머니마저 그런 표현을 이웃에 다니며 흘리고 다니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거짓말쟁이였다. 동생에게 집을 맡긴 후 나와 함께 도시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했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도시는 노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못된다, 라고. 돈은 드리지만 함께 생활할 수 없다고. 동생의 얼굴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을 수 있을 정도의 병으로 일부러 문병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님이나 이웃사람들이 열심히 권유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 병원에 들를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정말 즐거운 휴일이었다. 2년 동안 겪었던 어떤 놀이보다도 재미있었다. 3일 동안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도 사람들 앞에서는 피우지 않았으며 남자들에게 기세 좋게 대들거나 하지 않고 매일같이 뒹굴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언제나 즐거운 기분이었다. 지루했지만 기분은 최상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내 입장은 완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풍선처럼 떠다니며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웃사람들도 나를 우러러보며 한숨만 쉬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나도 피곤해졌다. 적당히 좋은 말만 지껄여대는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마침내 내가 지갑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여러 사람의 표정이 바뀌는 것이 느껴질 때 돌아가고 싶어졌다. 도시로 돌아가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껏 떠들고 싶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돌아간다는 말을 하자 아버지는 울먹이셨다. 하룻밤만 더 자고 가면 안 되겠니? 하고 말씀하셨다. 요 사흘 간 특별한 불만은 없었다. 단지 하나, 부모님이 중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던 일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누구나 내 직업에 대해 자세하게 물으려 하지 않았다. 2년 전의 백화점 판매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혹은 대강 짐작을 하고 있어서 일부러 묻지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의 대답 정도는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말이다. 이제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로써 당분간 이곳에서의 일을 떠올리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였다. 나는 이곳 마을사람들이 아니다. 게다가 약간의 부자였다. 지금 나는 고향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산이나 밭의 의미가 아닌 그리고 저금액도 아닌 단지 지갑의 내용물을 서로 비교해본다면 틀림없이 내가 최고 부자일 것이다. 그만큼 호기 있게 선심을 썼지만 아직 내 지갑은 불룩하다. 그런 내가 머리에 손수건을 두르고 쨍쨍 내리쬐는 햇빛 아래 서있는 것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라면 과거에 도시로 직장을 구하러 나가는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날은 참담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울었다. 이웃사람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고 반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 동생, 그리고 나도 하염없이 울었었다. 내가 숲에서 풍기는 푹푹한 열기에 끊임없이 타격당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기분 좋은 듯 앉아 계셨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을 어머니는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다. 얼굴과 비슷하게 검게 그을린 손으로 내 가방을 소중한 듯 품에 안고 풀 위에 앉아 매우 즐거워보였다. 어머니가 가끔 현도 건너편을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버스가 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를, 돈 많은 딸을 분명 자랑스럽게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나를 되도록 많은 고향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훌륭한 옷차림과 유행하는 머리모양, 잘 다듬은 얼굴모양, 비싼 핸드백 등을 전부 보여주고 싶었다. 근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골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읍에서 택시를 부리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두세 사람은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는 없고 주위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컴컴한 계곡 쪽에서 불어오는 썰렁한 바람만 아니었어도 나는 지쳐 주저앉아버렸을 것이다. 시원한 바람만이 의지였다. 달맞이꽃이 살짝 흔들리고 풀숲 깊숙한 곳에서 울던 벌레 소리가 뚝 끊기며 계곡 물로 식혀진 공기가 나를 감싸주었다. 순식간에 땀이 식으며 정수리 부분까지 시원해졌다. 우리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없고 나는 나대로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가까운 읍에서 택시를 불러야 했었다. 그렇게 하면 열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땀투성이가 될 일은 없었고 지금쯤 벌써 고향 일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냉방이 잘된 차 안에서 편안하게 쉬며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고 얼음으로 차게 식힌 캔 맥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래, 맥주를 마시자, 우선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자, 열차가 달리는 동안 쭈욱 마시자, 그러면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해 그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동거하고 있는 그 여자가 얼간이 같은 남자와 함께 있더라도 나는 아마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가방을 방 한가운데 휙 내던지고 알몸으로 서로 껴안은 채 뒹굴고 있을 두 사람을 내려보며 큰소리로 웃을 것이다. 그리고 위스키로 목을 축이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큰소리로 밤이 밝을 때까지 시끌벅적하게 소동을 벌이자. 도시 동료들에게 술 없이 사흘 정도를 보냈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캔 맥주를 목구멍에 들이붓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목 언저리에 무더위 때문이 아닌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맥주가 내 손에 오기까지는 앞으로 1시간 이상이나 걸릴 것이다. 버스가 오기까지 30분, 버스가 읍내 역 앞에 도착하기까지 적어도 40분. 버스가 아닌 몹시 낡은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일단 지나쳤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운전하고 있는 남자는 황색 헬멧에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어머니와는 안면이 있는 듯했다. 어머니는 댐 공사에 와 있다며 좋은 사람이라는 사족을 붙였다. 그러나 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눈에 어떤 타입의 남자인지 알아보았다. 남자는 마음씨 좋은 웃음을 띤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읍내까지 가는 것이라면 태워준다고 했다. 어머니는 매우 기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내가 근무하는 가게에 오는 손님 중에도 그와 같은 남자가 몇 명 있었다. 방심할 수 없는, 돈을 쓰지 않고 즐기려고만 하는 남자 부류에 드는 사내임이 분명했다. 읍내로 나가려면 인적이 드문 숲을 두 곳이나 지나가야 한다. 남자는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이런 무더위에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며 승용차라면 버스보다 훨씬 빠르다며 마침내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타고 가려무나, 얘야.” 어머니도 쉼 없이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버스가 멀미도 하지 않고 오랜만에 타고 싶다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 얼굴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발갛게 빛나 마치 토마토 도깨비처럼 보였다. 그러나 추남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태연하게 해치울 수 있는 그런 인상으로, 그 남자도 나를 간파하고 있는 낌새였다. 평범한 여자를 보는 눈초리가 아니었다. 도시에서 자랐거나 도시에 대해 도통한 남자가 아니라면 그런 눈으로 나를 볼 수 없을 터였다. “어?” 남자는 짐짓 연극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어디선가 한번 만난 것 같은데?” 나는 순간적으로 꼬리를 내렸다. 좀더 말을 걸기 위한 구실임을 알지만 나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남자는 하루에도 대여섯 명이나 되었다. 나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남자들은 잊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남자는 차를 조금씩 움직였지만 출발하지는 않고 반대로 내 쪽으로 더 다가왔다. 차를 버스 정류장 옆에 정차한 후 엔진을 끄고 여전히 느글거리는 웃음을 띤 채였다. 작업복에는 땀자국이 여기저기에 나 있어 마치 무늬처럼 보였다. 남자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 앉았다. 강렬한 암내가 코를 찌르는 통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를 유혹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그는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공사가 예정보다 지체 되었다는 둥, 말을 늘어놓는 와중에 자신이 아직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말을 슬쩍 흐린다. 이런 거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가정을 꾸릴 틈이 없다고 남자가 말한 순간 어머니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나는 더욱더 경계심이 일었다. 그 남자가 차에서 내린 그 순간부터 언제라도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눈초리로 연신 주위를 살피는 모양이 괴이했다. 나이 먹은 어머니를 해치우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우람한 팔을 한번만 휘두르면 모든 상황은 끝난다. 그리고 그 다음 내가 당할 차례이다. 아니 그는 그 전에 좀더 조용하고 숙련된 방법으로 최선을 다 해볼 작정일 것이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우선 자신과 어머니가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가 나에게 보여준 후 다시 나를 차에 태우려도 할 의도는 아닐까? 어떤 방법이든 그런 수에 걸려들 내가 아니었다. 겨드랑이 액취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의 목표는 나뿐이 아닐 수도 있다. 나와 내 가방속의 내용물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입을 다물고 계시던 어머니의 말문이 드디어 물 만난 고기처럼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로 나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계셨다. 집안부터 시작해 내 지갑 속까지 좔좔 풀어 놓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자의 팔과 다리를 만지며 엄지손가락에 슬쩍 힘을 줘보기도 한다. 그것은 죽은 할아버지가 농사용 말을 살 때 사용하시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모른 채 땀에 젖은 담배에 불을 붙여 멋쩍은 듯 뿜어댄다. 남자가 가끔 곁눈으로 이쪽을 보았지만 나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착한 딸 이라우.” 라고 말한 순간 나는 가방을 열고 담배를 꺼내 들었다. 양절담배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린 후 입에 물고 마을 남자의 한 달분 수입보다도 비싼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그 장소에서 위스키 병으로 나발을 분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을 모조리 벗어버린다 해도……. 어머니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가 어떤 범주의 인간에 속하는지 진즉부터 어머니는 말씀하시던 터였다. 입을 다문 어머니는 어두운 계곡이 아닌 여름 햇살이 쨍쨍 내리 꽂고 있는 남쪽 계곡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대기는 성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늦는 구먼요, 버스가.”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남자는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쩌면 저 남자와 내가 정말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자신만만해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일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설령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발뺌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첫째, 도시에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다.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중에서도 쌍둥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닮은 여자가 세 명이나 있다. 코와 눈 모양만 정돈하면 대개의 얼굴은 거기서 거기이다. 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붙일 틈도 내주지 않는 내게 데었는지 남자는 불안해했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략 감이 왔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모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때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남김없이 주고 목숨을 지키는 쪽이 영리한 판단일 것이다. 이윽고 남자는 묵묵히 일어섰다. 나는 갖고 있던 핸드백을 살짝 옆 덤불 속에 감추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깨에 손을 얻어 상냥한 말을 남긴 후 다시 뜨거운 목욕탕을 방불케 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는 단념한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일을 그는 깨끗하게 포기해버린 것이다. 남자는 나를 향해 “조심하시게”라는 말을 던진 후 강렬한 액취를 풍기며 여름을 향해 사라져갔다. 날아오르던 흙먼지가 풀과 벼 위로 떨어지며 하얗게 물들였다. 잠시 후 벌레 소리가 또 들려왔다. 어두운 계곡에서 불어온 바람이 내 땀을 식혀주곤 이내 멀어져갔다. 피우던 담배를 개미집에 비벼 끄고 덤불 속에 감춰두었던 핸드백을 움켜쥐었다. 난 아직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정말 포기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일 뿐 실은 다른 동료를 부르러 간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숲 속 어딘가에서 강제로 버스를 세워 타고 올 작정일 수도…….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시간은 아직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평소의 어머니로 돌아가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가끔 내 쪽을 쳐다보았지만 결국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담배 사건에 대해 묻고 싶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피우게 되었는지 묻고 되도록 피우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운운하고 싶었을 것이다. 댐 공사로 와 있던 그 남자가 갑자기 일어서서 돌아 가버린 것도 그 담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변명하지 않을 작정이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생각한 것처럼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잠자코 담배 연기를 뿜어 보여주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보라색 연기가 몇 번 피어올랐다. “용돈 좀 드릴까요?” 갑자기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런 말을 할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버렸다.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할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머니 주머니 속에 지폐 한 장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 머릿속의 떨떠름한 그 무엇이 단숨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의 눈빛이 더욱 반짝인 것 같았다. 막 받은 돈을 주머니에서 꺼내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것을 어디에 감출까 고민하는 것 같더니 양말 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갑자기 어머니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어머니가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아직 젊었을 적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어머니는 바짝 마르셨다. 똑같은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오는 동안 겨울 건초처럼 지쳐버린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이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 아직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 근래 2년 동안 내게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도시, 남자, 세상, 결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물론 언젠가는 나도 어머니처럼 말라비틀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다. 그래도 어머니의 10배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이미 몇 년 전에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가까운 사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나에게 용돈을 받을 때만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전에는 두 분 모두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신 적이 없었다. 컴컴한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이 뚝 끊겼다. 내 몸은 땀으로 젖어갔다. 후끈거리는 열기 속에서 2년 동안 일하다보니 땀에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태양열 아래 고스란히 몸을 드러낸 상태로는 참을 수 없었다. 눈을 반쯤 감고 있어도, 눈이 부셔 손수건을 뒤집어써도 효과가 없었다. 나는 일어섰다 앉았다를 몇 번인가 반복하여 어서 버스가 오지 않나 초조해하며 현도로 빠지는 길 건너편을 노려보다가,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쑥 위에 앉아 손발을 움츠린 채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엉뚱한 곳을 보고 계셨다. 그 모습은 나무통에 들어 앉혀놓은 모습과 흡사했고 또 새끼를 끌어안고 있는 엄마 원숭이와 닮기도 했다. 나는 드디어 폭발했다. “언제 버스가 오는 거야!” 마음속에서는 단지 버스가 늦는다고 중얼거렸을 뿐인데 막상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험악한 어조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올 시간이 되지 않은 것이다. 계속 투덜거리며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택시를 불렀으면 이런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둥, 집에서 좀더 기다리다 천천히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둥 어머니에게 악을 쓰며 퍼부어댔다. 그랬다. 사흘 전 2년 만에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이런 재미없는 곳에서 사흘간이나 지낸 것은 어머니에게 퍼부어댈 수 있는 꼬투리를 잡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에게 퍼부어대고 싶었다. 이웃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살아갈 거냐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나는 화를 냈다. 마을에 남아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모두, 다 멍청이들이야. 그러나 어머니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날 상대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시당했다고 강하게 느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외치고 말았다. “가, 돌아가, 이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외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어린애가 아니니까, 나 혼자 버스 같은 거 탈 수 있어!”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에게 등을 떠밀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 집 쪽으로 밀었다. 어머니는 잠시 한숨을 쉬며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질질 끄는 발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갔다. 어머니가 멈춰서거나 뒤를 돌아볼 때마다 나는 심하게 흔들렸다.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발아래 돌멩이를 걷어차기도 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둑 아래로 사라진 그 순간 만에라도 버스가 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차가운 캔 맥주를 시작으로 다시 새로운 생활로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무시한 것이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도착 시간이 되었지만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곳의 버스가 늦는 일은 흔했으나 결국 나는 발끈하고 말았다. 갖고 있던 핸드백을 머리 위에서 마구 흔들어댔다. 핸드백을 붕붕 돌려대는 나에게 두 여자가 덤벼들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막 닫은 가게 안에서 두 사람을 쫓아다녔다. 모두 재미있어 하며 날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한 여자는 사투리를 흉내 내며 나를 놀려댔다. 그리고 다른 한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얼굴로 이런 장사를 잘도 하겠구나, 라고. 지금은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고 돈을 들인 덕분인지 얼굴도 한결 예뻐졌다. 그래도 동료 여자들과 늘상 싸움질을 해댔다. 손님이 적은 날에는 누구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때마다 나는 핸드백을 돌려댔다. 핸드백 입구가 열려 화장품 도구가 쏟아지고 지갑 내용물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만약 돌풍이라도 불고 있었더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은 없고 지폐는 내 주위에 떨어져 내렸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쪽저쪽 부지런히 손발을 벌려 기듯 하며 돈을 주워 모았다. 몇 번인고 몇 번이고 세 보았다. 아무래도 한 장이 부족했다. 아까 어머니에게 용돈이라고 드렸던 것을 생각해내기 전까지 미친 듯이 풀숲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돈을 지갑에 잘 집어넣은 후 핸드백 깊숙이 넣고서 핸드백을 꽉 안았다. 아기라도 껴안듯 가슴에 꼬옥 안았다. 아직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어머니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이 났다. 쫓아가고 싶었다. 다시 용돈을 드리고 싶었다. 곧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폐 한 장을 주머니에 찔러주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열차 안에서 차가운 캔 맥주를 마셔도 아무 느낌도 일지 않을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하룻밤 더 묵고 내일 다시 출발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청량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읍내 택시를 불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잠깐 손을 흔들어주고 재빨리 헤어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결국 나는 버스 정류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담배를 피우며 작렬하는 태양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직 버스가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달맞이꽃 밑에서는 여전히 벌레가 울고 있었다. 어두운 계곡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나는 떨고 있었다. 이런 무더운 날씨에 이렇게 떨어야 될 이유를 나도 알 수 없었다. 마치 고개를 끄덕거리는 인형처럼 연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황금색 빛이 있을 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곳이 만약 도시였다면 설령 한밤중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달맞이꽃 수만큼이나 많은 인간들로 득실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나 혼자였다. 무시하는 놈조차 없었다. 나는 계속 떨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한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심한 오한이 느껴졌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초조해할 기운조차 사라져 태양 아래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일사병에라도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 될 정도였다. 알고 지내는 몇몇 여자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떠들썩하게 놀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고향을 떠나고 한동안 전철 안에서, 떨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두려웠고, 차가웠고 공허했었다. 지금 왜, 더구나 이런 무더위 속에서 떨고 있어야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2년 전의 내가 아니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알고 돈도 갖고 있다. 그 순간 갑자기 생각났다. 댐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예의 그 남자가 혹시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 차가 다시 눈앞을 지나가는 일이 있다면 나는 손을 들어 정지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채 말을 걸기도 전에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탈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듯 하여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오한이 이는데도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땅 위에 떨어져 흡수되거나 지나가는 개미위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문득 고개를 들자 그곳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머니가 다가오는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느 사이엔가 되돌아온 것이다. 그때의 어머니는 생기가 있어 보였다. 도리어 내가 참담한 모습을 한 채 늙어버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무표정하게 일어서서 몸에 붙은 모래를 손으로 털기도 하고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오른손이 천천히 다가오는가 싶더니 내 얼굴을 부드러운 헝겊으로 포근하게 감싼다. 어머니는 손수건 대신 항상 가지고 다니는 수건으로 내 얼굴의 땀을 닦아주려 한 것이다. 땀뿐만이 아니라 코까지 훔쳐 주려고 했다. 나의 떨림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나는 화장이 지워지는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의 손을 살짝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됐어”라고 했다. 어머니는 수건을 매우 소중한 물건인 듯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만약 그곳에 버스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어색한 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했을 것이다. 버스는 예정보다 15분이나 늦게 어두운 계곡 사이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앞 유리창과 범퍼를 반짝반짝 빛내며 흙먼지를 날리면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어머니는 현명하게 손을 흔들어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엔진열기를 훅 내뿜으며 타이어가 요란하게 땅 위에서 버티는 소리가 났다. 짐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어머니의 몇 번이고 운전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어머니의 옛 버릇이었다. 내가 아직 어렸을 적 읍내 치과병원에 다닐 때 어머니는 자주 그렇게 나를 버스에 태워 보냈었다. 뒤따르는 승객이 없어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는 출발했다. 어머니는 이쪽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옛날 그대로였다. 나도 약간 손을 흔들었다. 그것도 옛날 그대로였다. 다른 점은 그 후였다. 나는 황급히 서둘러 지갑을 열고 지폐를 한 장 꺼내 들고 창밖으로 던졌다. 흙먼지와 함께 그 지폐는 어머니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창밖으로 던져진 돈이 무사히 어머니 손에 쥐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돈을 던진 것을 안 어머니가 당황하여 부산을 떨며 그 돈을 주웠을 수도 있고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아직도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멀어진 지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버스 안은 시원했다. 직사광선을 쬘 염려도 없고 바람도 끊임없이 불어왔다. 나는 코에 손을 대 보았다. 어머니도 아까 그곳을 만졌다. 그러나 모습을 바꾸기 위해 삽입한 플라스틱 때문에 코끝은 썰렁했다. 이미 나는 건강을 회복했다. 다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얼음 조각에 묻어둔 캔 맥주를 입에 가져갈 때의 느낌을 상상하자 목 주위가 싸아, 해졌다.  
98 몸의 진화, 정신의 진화 /박희용 imagefile
편집자
2672 2011-01-28
몸의 진화, 정신의 진화 양백산인 박 희 용 ‘進化’하면 누구나 몸의 ‘점진적 변화’를 생각하는데, 몸의 진화와 병행하는 게, 오히려 앞서는 게 ‘정신 진화’이다. 즉 몸의 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은 정신이다. 몸의 진화 다음에 정신의 진화가 따라오는 게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신이 꼭 고급의식 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微物의 단순감각도 정신의 일부분이다. 비록 저급하지만 말이다. 일단 통틀어서 정신이라고 정의 하는데, 그 정신의 속성은 감각, 의식, 생각, 의지 등이며 각각에는 관습적인 면과 창조적인 면이 혼재되어 있다. 생활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는 기술적인 방법에 대한 욕구를 정신이 느끼면 그것이 아주 서서히 -물론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순식간인- 몸의 변형-변화를 초래한다. 사회적 진화란 관계의 진화 -그것이 다양한 인간 개체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도출해내는 적당한 관계-를 의미하며, 그것은 개체들의 정신작용에 의해 결정되고 조정된다. 그것은 群集社會가 갖는 기본적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한 특성이 저변에 흐르기 때문에 群集社會에서 小數의 권력 독과점은 항구적인 당위성을 갖지 못한다. 즉 무리를 구성하는 개체 수가 증가하면서 상호 이익과 손해를 조정하고, 권력에 대한 참여 욕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소수의 권력자들은 다수의 群集에 의해 차츰 거세되면서 참여 민주주의가 역사적 당위가 된다. 사실 인류사는 얼마나 야만스러운가. 인류 역사 곳곳에 동물성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있다. 원시시대는 두말할 나위 없고, 봉건왕조시대만 해도 왕과 극소수 기득권 계급은 국가권력이라는 포장으로 싼 무소불위의 동물성을 휘둘렀다. 그들에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란 아예 생각 밖의 것이었다. 또, 전쟁은 어떠한가. 각 시대마다 뜻있는 현인들이 나서서 지성과 문화를 말했지만 야만은 어느 시대에나 펄펄 끓고 있었다. 영장류에서 分岐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분기 초기엔 他 영장류로부터 많은 여성 사피엔스들이 강간을 당했을 것이다. 왜냐면 사피엔스들의 정신력은 우수했을지 몰라도 육체적 힘은 영장류 짐승들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非 호모 사피엔스들의 DNA가 인류의 피에 일부 섞여들었을 것이다. 種의 분화가 오랜 시간 계속되어 異種 교배가 안 되고 여성 사피엔스들의 미적 감각력과 남성 선별력이 발달하면서, 他 영장류로부터의 DNA 혼류가 그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원시적 인류 문명이 태동하게 되었다. 수십만 년 동안의 태동기를 거쳐 ‘문명’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인류 문명이 발아한지 약 1만년, 인류 문명은 종점이 아니라 도중에 있다. 문명의 원동력은 ‘정신’인데, 그 ‘정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완성되지 않은 원인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野獸性’이다. 他 영장류와의 교배가 가능하던 수백만 년 전 시대에 호모 사피엔스의 DNA에 혼입된 非人類種들의 DNA가 갖는 ‘野獸性’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장류 DNA 인류 DNA 700만년 전 1 C 21 C 30 C 40 C <시대별 지성도> 그 DNA는 차츰 소멸되고 있는 중이다. 짐승 DNA는 劣性이기 때문에 優性 DNA인 인류 DNA에 밀려 거세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다. 그래서 영장류 DNA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他 영장류와는 특이한 성질을 갖는 인류 DNA를 따로 진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몇 세기 후에는 짐승 DNA는 거의 소멸하고 건강한 인류 DNA가 인체의 전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野獸性 DNA'는 정도의 차이이지 인간 누구나 갖고 있다. 野獸性은 惡이고 인간성은 善인데, 인간은 누구나 악과 선을 공유하고 있다. 정신이 진화 도중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 심성은 악이 점유하는 부분보다 선이 점유하는 부분이 훨씬 넓다. 그러나 악의 부분이 훨씬 많은 인간 -살육이나 폭력을 저지르거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지배자가 되어 국민을 노예로 취급하며 권력을 광포하게 휘두르거나, 보편적인 국민 여론을 무시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강간하거나, 방화하는 -들을 세상에서 아직 볼 수 있는데, 그들은 '野獸性 DNA'가 충만한 자들이다. 그러나 善과 평화를 애호하는 인류 정신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들의 DNA도 멀잖아 소멸하고 말 것이다. 문제는, 정신적 DNA의 淨化進化는 바람직하지만, 자칫하면 육체적 DNA가 퇴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정신을 고도로 사용하되 육체도 알맞게 사용해야 한다. 육체 없는 정신은 없다. 정신적 진화에만 치중하다 육체가 퇴화되어, 결국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種 의 멸종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정신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정신과 육체, 야수성과 인간성’, 이런 말은 상대적 개념이다. 상대적 개념이란 절대적 개념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럼 절대적 개념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있기 때문에 생물이 존재하고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문명은 자연이라는 절대적 개념을 아주 무시하고 있다. 자연의 한 부분임이 분명한 인간이, 자연을 종속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다. 편리한 생활을 위하여 자연 자원을 무작정 채취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변형, 파괴, 오염, 왜곡, 수몰, 제거시키는, 절대적 개념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제 한 몸과 가족의 생활 편리를 위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쌓고 자연을 남용, 파괴, 오염시키는 행위란, 먹이와 번식을 위해선 저돌적인 야수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서, 자연을 함부로 변형, 파괴하는 행위는 ‘선과 악’의 차원이 아니라 생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삼가고 삼가야 할 일이다. 현대 문명은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갖는데, 부정적인 면을 사상하고 긍정적인 면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진화하는 정신’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야수성’을 묽게 하고 ‘인간성’을 진하게 하는 것이 생각하는 갈대인 인류의 ‘진화의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한다. ‘야수성’의 본질과 ‘인간성’의 진화 과정을 정확하게 투시함으로서 나라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각종 난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분자생물학. 미셀 모랑쥬. 몸과 마음. 2002> <진화론의 유혹. 데이비드 슬론 윌슨. 북스토리. 2009> <화담집> <퇴계집> <율곡집>  
97 말/ 정의선 file
편집자
3721 2011-01-28
11. 02월 9호 수필 말. 말. 말. 말의 성찬이요. 지옥이요. 천국인 세상이다. 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데 사람을 음해하고 매도하기위해 던지는 말은 살인미수와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글도 별반 다름없을 것이다. 교언성색의 미사여구로 꾸민 글을 보노라면 글의 아름다움이 퇴색하다 못해 그 글을 읽는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해질 때도 있을 정도이니 말과 글의 치부가 한껏 회자되는 세상인 모양이다. 이러함에 일찍 삶과 말, 글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상주 출신 학자인 息山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息山先生文集卷之十一 雜著’에 “脩恥贈學者 (부끄러움을 닦는 법)”을 남겼나보다. 부끄러움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때문에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워함이 있는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워함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없게 되려고 생각하게 되고,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있으려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이것을 일러 부끄러움을 닦는다고 한다. 요컨대 이를 닦아 힘써 행할 뿐이다. 有恥可恥。無恥亦可恥。有恥者。必無恥。無恥者。 必有恥。故恥無恥。則能有恥。恥有恥。 則能無恥。恥有恥者。以恥爲恥也。恥無恥者。 以無恥爲恥也。以恥爲恥。故思無恥。 以無恥爲恥。故思有恥。恥無恥而能有恥。 恥有恥而能無恥。則是謂脩恥。要脩之力行而已。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천국에서 보내는 첫 번째 유언’ 이란 글로 비하하고 글을 퇴색시킨 한 언론인의 사설에 분노하여 쓴 패러디 댓글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천국에서 보내는 첫 번째 유언’이 아닐까하여 쓴 그 유명한(?) 언론인 역시 죽어 이런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추론하며 물론 역시 똑같은 말과 글의 추함이 더해졌겠지만 치미는 화를 삭이지 못해 쓴 글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설은 반대로 읽으면 되겠기에 지면 관계상 생략.) “歲月(세월)이 끝났다. 그리고 그도 떠났다. 그의 혼령이 있다면 단 한 사람의 국민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어쩌면 하늘나라에서 남은 우리에게 첫 번째 유언처럼 당부의 말을 쓴다면 이렇게 써 보냈을지 모른다. 국민 여러분, 못난 저를 위해 그간 힘들게 읽어준 글들에 연민과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언론인 노릇도 부족했고 修身齊家(수신제가)도 제대로 못 하고, 나라와 국민 여러분께 번듯하게 남겨 드린 것도 없는 저에게 언론인이라는 과분한 명예 주신 점 또한 고맙습니다. 요 며칠 새 저는 구정물이 난무하는 천국(川國)에서 만난 많은 분들의 말씀과 위로를 들으며 문득문득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깨우치게도 됩니다. 민주주의를 깨고 독재를 위해 애썼다는 칭찬도 들었습니다. 패밀리신문들이 고맙게도 저의 모자란 모습들을 좋은 모습으로 비쳐 보여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천국(天國) 옆 동네 천국(川國)에서 제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사이비 기자도 못됩니다. 저의 죽음은 민주광장에서 최루탄에 맞은 열사의 죽음도 아니고 광주의 아픔 속에서 희생된 뜨거운 魂들의 죽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토록 슬픈 척 애도한 사랑, 가슴 아리도록 고마울 뿐입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은 더 이상 저를 마치 독재를 수호하다 희생당한 영웅인 양 그리지 말아 주십시오. 겸손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사랑한 패밀리신문과 아끼고 믿어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서 당부하고 싶습니다. 많은 언론인과 나의 옛 동료에게도 당부합니다. 나 같은 친구를 언론인으로 내세웠음이 내가 부끄럽다’고….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임에도 시민광장을 봉쇄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치는 분들, 그리고 ‘배후를 발본색원하겠다.’며 촛불을 든 유모차 어머니들을 소환하고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정마저 패대기치며 의경의 작은 실수로 돌리는 공권력과 언론인 후배들에게도 저는 충고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법치와 공권력을 지키기 위해 현 대통령이었던 측근까지 의혹이 있나 없나 수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별로 구속할 사안이 없어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지만 그런 용기와 원칙적 자세는 칭찬하면 했지 탓할 일이 아닙니다. 본분을 다한 공직자에게 무슨 ‘책임’을 묻겠다는 겁니까? 살아서 이런 글을 올린 스스로가 부끄럽고 다시는 나 같은 언론인이 없기를 충고하며 당부하고 싶습니다. 저와 가족을 위해 울어주신 신문사 사장님께도 한 말씀 드립니다. 저의 반쪽이라시면서 ‘나도 똑같이 했을(곡필) 것이다’고 하신 것은 큰 언론사 대표가 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천국(川國)에 와 보니 그런 말씀은 저에겐 결코 위로가 아닌 화합을 깨고 분열을 부추기는 선동이란 생각이 들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딸아, 신문사 사장님이 내 처지를 감안해 행여 퇴직 연금을 중단하더라도 이 아비 너희 모르게 미국 땅에 아파트 숨겨둔 게 정말 있으니 끝까지 항의하거나 원망하지 말거라. 그것이 우리 집안과 이 아버지의 남은 자존심을 지켜주는 길이다. 그리고 엄마랑 함께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유족을 찾아가 나 대신 위로와 사죄를 전하거라. 그게 사람 사는 도리였다. 그리고 친 독재, 반언론, 자네들은 喪主(상주)도 아니면서 골방에서 참회하며 기도나 하고 있지 나를 위한 애도 기간 신청은 왜 해서 TV 앞에 얼굴을 치 들고 다녔나? 자네들을 부추긴 신문사 사주도 고맙거나 인자하다는 생각보다는 겁먹은 것 같은 유약함과 법 정신의 원칙을 허무는 것 같아 앞날이 걱정스럽네. 신문사 사장이 배짱 하나는 죽은 나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마저 드네. 일부 보수층 여러분도 이젠 국민에게로 돌아가십시오. 민심이 흉흉한 이때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 교육이나 더 시켜주십시오. 극 보수, 타도 진보 여러분도 힘들지만 참으십시오. 경제가 난리인 이때 여러분의 손에는 아직 공권력이나 철거 대신 民主(민주)와 휴먼빅딜들이 쥐어져야 합니다. 오늘의 양보와 희생은 언젠가 나라와 국민이 모아서 갚아주실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천국에서 보내는 저의 첫 번째 유언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고맙고 미안합니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글도 이런 댓글도 사라져야할 글의 폭력이다. 수십 년째 말의 폭력과 난동에 지친 몸으로 새해에는 당부하고 싶다. 이십년 전부터 ‘이사 갔다.’ ‘파산했다.’ ‘이혼했다.’ ‘돈을 횡령해 고발당했다.’ 했지만 신묘년 올해까지 이사 가지 않고, 파산하지 않고, 이혼하지 않고, 고발당한 일 없으니 소설 같은 말은 더 각색을 첨가하여 그럴듯한 말을 해주면 좋겠다. ‘이효리 같은 미인과 데이트를 하더라.’ 이런 군침 나는 이야기는 절대로 사양하지 않고 거짓말투성이인 그대들을 칭찬하며 우리 말, 우리글의 아름다움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한해를 보내련만……. 초대받지 못한 땅 때로는 절규(絶叫) 때로는 묵언(黙言) 구비마다 채색 달리하며 유유히 흘러가는 저 洛江 보며 상념에 잠기지 말자. 거기 담긴 나의 영혼 혼돈이란 이름으로 외면하고 있다. 물 어린 시시껄렁한 모습일랑 추억조차 남기지 말고 그저 물 흐르듯 세월의 뒤안길 흘려버리자. 버리자 지워 버리자. 손잡은 인연도 손 놓은 악연 모두 나의 몫이다. 백화산 모퉁이 저승문 열고 저승골 닫고 남은 흔적도 없이 바람 저리 부는데 섶다리 외로운 자태로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미친 하늘 너머 숨죽인 세상 부르고 있다. http://www.podoo.com 나는 농부이로소이다.  
96 소녀의 손거울 속 소년/윤이주 file
편집자
3471 2011-01-28
11.02월 9호 소설 소녀의 손거울 속 소년 윤이주 심야 영화가 끝난 극장 복도를 터벅터벅 걷는다. 관객의 발자국이 사라진지 오래다. 복도는 텅 비어 있다. 저주받은 마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모텔 노트르담으로 향한다. 생의 마지막 몇 시간을 위해 노트르담으로 향하던 수많은 발자국에 쌓이던 달빛을 나 역시 맞이하고 있다. 아직 누구도 비껴가지 못한 곳으로 목숨을 넘겨주러 이 밤을 내가 걷는다. 요절이란 얼마나 매혹적인 사건인가. 마지막 한 호흡은 짧고 단호해야 한다.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 모양이 꼭 초승달인 이것은 황소의 뿔과도 흡사하다. 그것이 빠져나간 양 옆구리에서 뭉텅뭉텅 솟구치는 피를 막기 위해 나는 숨을 참는다. 극장에서 모텔까지는 무수한 생략이 매복되어 있다. 노트르담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끊겨 있다. 하지만 나는 곧 모텔입구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내가 낸 길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요절을 앞둔 천재가 아니라 바보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나의 길이 이리 저리로 거미줄처럼 만난다. 대체로 나는 미로에 빠진 쥐처럼 길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한자리를 맴돌곤 했으나 최근에 내가 낸 지름길을 성공적으로 이을 수 있었다. 길은 이제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스르륵 스르륵. 입체감이라고는 없는 얇은 막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노트르담은 수직 절벽 저 너머에 있다. 절벽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노트르담의 이 절벽은 하나의 공포다. 아니, 흑마술처럼 보일 것이다. 이 절벽을 힘들게 기어오를 필요는 없지만 당당히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기어다니는 놈들에 대해 턱없는 공포와 경멸을 품고 자란 까닭에 이 절벽을 통과하는 일이 노트르담 입성의 가장 어려운 지점이지만 이 모텔 이용자 모두가 그러하니 불평할 수는 없다. 절벽이 거대한 파충류란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판판한 얇은 저 막이 실은 사십오 분을 걸어가야 하는 파충류의 표피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실내는 적당히 은은하다. 몇 개의 실내조명 아래서 매니저 김이 나를 맞이한다. 그는 절대로 손님을 맞기 위해 일어서는 법이 없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열쇠 함에서 열쇠를 꺼낼 뿐이다. 또한 그는 단 한 번도 웃은 일이 없다. 여기서는 결코 나에게 말을 붙여온 적도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호기심을 보인 적도 당연히 없다. 그저 빈틈없이 한결같은 동작으로 싸구려 티를 벗지 못한 분홍색 사각 플라스틱 접시를 내 쪽으로 내밀 뿐이다. 그 안엔 306이란 나무 표찰을 가진 열쇠가 들어있다. 그 열쇠를 볼 때마다 나는 빨리 객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발작처럼 터져나오곤 한다. 플라스틱 접시에서 열쇠를 거머쥐자 투명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지하 층 없이 지상 위에 세워진 3층짜리 건물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는 사방이 투명한 유리벽이다.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전류가 흐른다. 굳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접시에서 열쇠를 거머쥐는 순간 언제나 문은 저절로 열린다. 이런 게 바로 마술이다. 마술이……, 오늘은 유려하지가 않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는다. 프런트에 앉은 김이 오늘따라 유심히 엘리베이터 내부를 주시한다. 하지만 나 역시 그에 대해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다. 내가 김을 처음으로 만난 건 작년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그 날은 바로 모나미 극장에서 막 새 영화 몇 편을 동시에 개봉하던 날이었다. 그날은 또 모텔 노트르담이 개업 60주년을 맞은 날이기도 했다. 물론 내가 그 사실을 안 건 매니저인 김을 통해서였다. 영화가 끝나고 텅 빈 객석에 남아 영화의 뒷감당을 하며 쭐쭐 눈물까지 흘리고 있던 나에게 유난히 키가 작다싶은 사내가 다가왔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내가 성이 난 얼굴을 감추듯 숙이며 가벼운 인사를 해왔던 것인데 나도 얼떨결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고 말았다. 그는 대뜸, 호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작은 손거울 하나를 꺼내는 것이었다. 손잡이와 둥근 테두리가 상아로 둘러진 고급스러운 손거울이었다. 이제는 내 호주머니 안쪽에 들어와 버린 이 작은 거울에 대해 몇 마디를 미리 얘기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아마 모두가 믿기 어려운 얘기일 것이다. 하더라도 나는 이 작은 손거울의 비밀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손거울을 지닌 자의 처절한 운명이다. 두려워하면서도 얘기를 꺼내고 싶은, 혼자 간직하기엔 숨가쁜 그런 유혹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김의 눈이 나에게서 데스크로 옮겨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문 역시 투명하므로 매니저 김을 나는 각도를 달리해서 좇는다. 그는 고개를 들면 나와 눈이 마주칠까봐 아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느라 애쓰는 중이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김의 짓이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늘 제 곁에 세워두어야 안심이 되는 놈이다. 자주빛 융단을 밟아온 발의 감촉이 현관 대리석을 구별해낸다. 나쁘지 않다. 늘 그렇듯 방문은 열려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이 거울이 어찌하여 노트르담의 김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김의 말처럼 어느 달 밝은 가을밤 노트르담을 에워싸고 있던 바다 어디쯤에서 불쑥 솟아난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몽롱한 어조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것을 사실로 믿을 만큼 김의 얘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내 모든 감각을 불태워버린 영화 뒤끝에 이어진 만남이었던 탓일 것이다. “형씨, 그때 말이오, 광활한 우주 같은 소녀가 나타나더란 말이오. 광활한 우주,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같다는 말이 그때야 실감으로 다가옵디다. 소녀의 용모를 표현할 재주가 있다면 난 아까 그 영화의 곱추처럼, 참, 그이의 모델은 로트렉이 분명해 보이오, 그이처럼 좋은 화가가 되고도 남았을 거요. 이것 봐요, 난 이미 곱추는 되었으니 말이오, 히히. 허나 난 그림을 그릴 재주는 가지지 못했으니 그저 막연하게 소녀를 얘기할 수밖에 없소. 노트르담 앞마당으로 들어오는 그 소녀는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이었지요.” 김과 만난 그 날은 겨울비치고 꽤나 굵은 비가 밤 내내 극장 뒷골목위로 떨어져 내렸다. 김의 그 소녀 얘기보다 야식집 앞에 쌓이는 빗소리가 내 맘 가득 차지하고 있었지만 가끔은 그 광활한 우주 같다는 소녀를 영화 속의 여배우와 대비시킨 것도 같다. 그러나 본 것과 볼 수 없는 것과의 차이만큼 즉흥적이고 주관적인 대비였음을 인정한다. 그 날 김의 얘기 중에 빗소리를 멀찍이 밀어내고 내 맘으로 들어온 게 바로 이 작은 손거울 얘기였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젠 내 호주머니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이 거울 말이다. 김의 말을 대략 종합해 보면 이 거울에 대해 소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김은 불룩 솟은 등을 다 가리는, 풍성한 제 머리칼만큼 기름진 음성으로 얘길 꺼냈다. 야식집안의 축축한 습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울림이 컸다. 나는 그가 꺼낸 말머리가 소녀가 한 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화법으로만 받아들였으나 그게 거울 이야기의 독특한 형식이란 걸 곧 알게 되었다. 거울에 대한 직접․간접의 모든 표현 앞에 붙는 일종의 여음인 이 말을 여기서는 한 번만 쓰겠지만 거울 얘기의 형식이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일종의 서사시였다는 걸 밝혀둔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형식을 완전히 동일하게 따를 수는 없다. 나의 기억 능력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시대 탓을 하기는 뭐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식대로만 얘기를 옮길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충분하고도 뼈아프게 깨닫고 말았으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누구나 자기식대로만 말하면 된다. 어쩌면 벌써 이 거울의 비밀에 다가가기 시작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기억력과 직관이 모두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부언을 하자면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여음이 바로 거울의 비밀을 푸는 열쇠란 사실을 지금 내가 지나치게 친절하다 싶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의 내 동작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지금 내가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가져간다. 상아로 만든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고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퍽이나 아름답긴 하지만 딱 손바닥 만한 평범한 손거울일 뿐이다, 아직은. 지금 여기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 자체로써 아름다운 것은 없는 법이다. 아름답게 보인 것은 그 작은 거울이 내 동작과 표정을 읽어내는 보통의 거울이란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개가 아름다운 것은 그 조개를 다른 여느 조개들과 비교할 수 있는 조개다운 유사성이 있은 뒤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개 중에 어떤 것이 특별히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하면서부터일 테니까. 하물며 누군가의 정교한 손길로 만들어 진 이 작은 거울을 보고 내가 어찌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이 순간, 바로 이 순간에 거울은 마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마술 역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수만 가지 모습으로 저를 드러내지만 적어도 몇 사람이 마술이라고 느끼려면 공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저것으로 변할 수 있지? 하는 강한 의문을 동반하는 변화가 그 장소에 함께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드러나야 한다. 이 거울의 마술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문(呪文)은 입을 동글게 말고 목구멍에서 궁글린 목소리로 노래하듯 이렇게 시작된다.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거울을 보며 나는 주문을 왼다. 그리고 프런트에 앉아있을 매니저 김을 떠올린다. 놀라운 일이다. 생각만 하면 여기 이 거울이 상을 드러낸다. 해상도가 아주 높은 그림이 나타난다. 그는 지금 프런트를 나와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언제나 가벼운 왁스냄새와 함께 정갈하게 반들거린다. 계단을 올라오는 그의 발이 보이고 내 방 호수가 거울에 나타난다. 306. 그가 지금 내 방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거울엔 복도에 깔린 흑자주색 융단이 보인다. 그가 융단을 밟아오고 있다. 나의 방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거울엔 이미 뒷산이 보인다. 그가 이미 뒷산을 마주보고 서 있다면 오른쪽 제일 끝 방인 내 방 앞에 이미 도달했다는 얘기다. 다시 김의 신발이 보인다. 그는 흰색 바탕에 빨간 줄이 들어간 볼링화를 신고 있다. 또다시 붉은 융단이 보이고 거울엔 비상구를 표시하는 초록색 등이 보이고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김이 드러난다. 그는 늘 이렇게 나를 주시해오고 있다. 이 거울을 통해 나는 무수히 많은 것과 자유자재로 만나왔다. 그러나 내 마지막 몇 시간이 거울의 상에 뺏기는 걸 나는 원하지 않는다. 남은 시간을 최대한 자유롭게 보내고 싶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분명하다. 내 상념을 내 신체에 묶어놓는 일이다. 잠을 자겠다는 뜻이다. 대리석으로 바닥을 깐 욕실로 들어가 면도를 시작한다. 샤워시간은 5분이 넘지 않는다. 깨끗이 세탁된 하얀 가운을 입기 전에 내가 가장 아끼는 향수 ‘소녀의 향기’ 한 방울을 귓불과 손목에 바른다. 기분을 바꾸기에 ‘소녀의 향기’만한 향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이제 나는 편안한 잠 속으로 빠지기 위해 이 방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藤)으로 만든 흔들의자에 기댄다. 서툴지만 정성을 많이 쏟은 탓에 앉고 싶다는 강한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성공한 이 의자는 지난 여름, 근 한 달을 이곳에 눌러 살며 만든 내 작품이다.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등가구 제작은 나에게 대단한 활력을 찾게 해준 일이었다. 김이 만들어준 화덕 위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양옆에 설치한 길다란 나무 기둥에 장대를 매달고 등을 걸쳐놓고 가마솥에 불을 땐다. 물이 끓으면 가마솥 뚜껑을 열고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로 등을 쪄낸다.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몇번 실신을 하기도 했다. 더운 여름날 조그만 창고 안은 후끈거리는 열기로 모든 게 흐물거렸다. 잘 쪄서 말린 등나무 줄기를 한 올 한 올 매어가는 작업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처럼 즐거웠지만 말이다. 흔들의자의 형태가 잡혀진 뒤에 나는 니스칠까지 곱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균형감을 찾지 못해 의자는 보기보다 불편하다. 노트르담을 감싸고 있는 습기는 등나무 의자에 치명적이다. 야자과의 덩굴 식물로 내가 뭔가 만들어냈다는 은근한 자부심으로 견디고 있지만 말이다. 꽃무늬 사각 쟁반에 놓인 컵 모양이 퍽 인상적이다. 상반신의 푸른 여체.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날은 유리창 전면을 초록으로 뒤덮은 커다란 측백나무와 잠시 얘기를 나눈 후,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 같은 침대 시트를 젖히고 들어가면 좋지만 오늘밤의 달빛은 너무 밝다. 김이 등나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지금 그는 빽빽이 들어선 측백나무 숲으로 들어서려고 한다. 저곳은 노트르담의 차고다. 바람이 부는지 그가 고개를 떨구고 오랫동안 뺨에 양손을 대고 서 있다. 차고는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지상으로부터 3층이나 올라온 곳에서도 둥그렇게 빈 부분만 보일 뿐 주차장 마당은 보이지 않는다. 손님이 있었던가. 김을 따라 하얀 양산 하나가 측백나무 숲을 빠져 나와 뒷마당을 가로지른다. 오랜만에 내 맘이 뜨거워지고 있다. 저 아래서 바람과 춤을 추던 강아지풀을 모두 밀어내고 대리석을 깔아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이 궁금하다. 김의 두서너 발짝 뒤에 서서 머뭇거리던 하얀 양산이 멈춘다. 김이 하얀 양산에게로 다가가면 그때서야 양산은 멈칫거리며 움직인다. 가까스레 현관 앞까지 당도한 두 사람은 마당을 지나올 때보다 더 오랫동안 멈춰 서 있다. 아셨겠지만 이곳은 앞마당이 없다. 현관은 뒷산 쪽으로 나 있다. 혹, 저 하얀 양산이 이 거울의 주인은 아닐까. 때마침 이곳에 든 손님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갑자기 바빠진다. 그러나 거울의 주인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른다. 이제까지의 노력이 실패해서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남은 몇 시간이 있다는 사실은 새삼 즐거움을 준다. 사실 지난 일 년이 즐겁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 수면제를 털어넣고 쉽게 마술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마술은 풀렸겠지만 그걸 내가 볼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오늘까지 유예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몇 시간의 깊은 수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 일이 잘 되면 새로운 밤을 맞아 오랜만에 숙면할 것이고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깨지도 않을 고요한 잠 속에 더 깊이 들어가면 그만이다. 인터넷 채팅방에 아무데나 불쑥 들어가서 거기 누구 없어요, 이런 사람 없어요, 혹시 광활한 우주 같은 소녀를 만난 적 없어요, 하는 건 여간 황당한 방법이 아니다. 내가 차라리 죽고 마는 게 낫지 아무에게나 불쑥 이런 사람 좀 만나게 해주, 하기는 죽기보다 싫다. 내가 왜 이렇게 죽는 타령을 하는지 어쩌면 나는 그걸 먼저 얘기했어야 옳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여간 독자를 짜증스럽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당신들, 특히 내 고정 독자들은 나의 스타일을 이미 파악한 분들이 아닌가. 죽는 마당에 스타일까지 바꿔가며 애쓰고 싶지 않은 내 맘을 조금은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저 내 식대로 무식하게 나아갈 테니 너무 나무라지는 말라. 어쨌거나 지금은 오늘 자정 무렵에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수만 가지 이유 중 생각나는 한두 가지만이라도 밝혀야 옳겠다는 걸 인정한다. 달빛 환한 밤에 하얀 양산을 쓰고 이곳에 나타난 이는 잠시 잊기로 한다. 우선, 내가 오늘 자정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가장 매혹적인 것은 내가 요절이란 말을 내 전 영혼을 바칠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 스스로 정한 요절의 조건은 서른 살이다. 오늘이 내 서른 살의 마지막 날이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또 한 이유는 바로 이 작은 손거울인데, 이 손거울의 주술에 빠지고 일 년을 버틴 사람은 없다. 그러한 손거울의 내력 또한 내 죽음의 커다란 이유가 될 것이다. 내가 이 손거울을 김으로부터 받은 게 꼭 일 년 전 자정 무렵이었으니 어쨌거나 별다른 수를 찾지 못하면 자정 무렵 나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것이다. 미흡하나마 이 정도가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이 거울과 내 목숨을 함께 넘겨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더라도 도대체 김으로부터 왜 내가 손거울을 넘겨받았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데, 내가 벌써 수백 차례 품어 본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나도 모른다. 그날 김은 아주 절박해 보였다. 극장 입구에서부터 야식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어두운 골목을 훑는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골목 여기저기에 쏘아붙이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주기에 나는 이걸 받았다. 내가 아는 이유는 이것 이상은 없다. 이 요상한 거울의 마술을 미리 알았다면 결단코 난 손거울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급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유연애 사상을 가진 내가 마법을 풀어주는 광활한 우주 같은 소녀, 그 한 소녀를 찾아 나설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없다. 나는 누군가를 찾아 단 한 걸음도 서성거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소녀, 소녀…. 제길 어디까지가 소녀란 말인지. 또 광활한 우주는 뭐고, 자기가 그 소녀를 봤다면 저 스스로 찾을 것이지 나한테 왜 넘긴 거야, 망할놈의 곱사등이 같으니라구! “형씨, 생각해보슈. 난 몸도 불편하고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안내책상에 붙박여 있어야 하는 직업으로 먹고 산다오.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 모텔에 누가 오겠소. 길을 내지 않은 곳이고, 가까이 배 한 척이 자나간다 해도 눈길 하나 줄 수 없는 측백나무만 빽빽이 둘러쳐진 섬일뿐더러, 내 좀 있다 한번 데리고 갈 테니 잘 봐보오, 거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오. 다람쥐나 산토끼를 손님으로 받는 날은 그나마 고놈들 귀여운 짓에 맘이라도 푸근해지지만 멧돼지나 살모사 같은 놈들이 고개를 디밀어봐요. 아이쿠야 비명이 절로 나온다오. 형씨, 내 사정이 이런데 내일이면 내가 이 손거울을 받은 지 꼭 1년이 된단 말이오. 제발 나 좀 도와줘요. 이 거울을 제발 좀 받아주오.” 그날 밤, 김은 광활한 우주 같은 소녀는 고사하고 뺑덕이네 같은 여편네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인상을 흠씬 풍겨대긴 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 역시 별 뾰족한 수도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뭔 수가 있다고 이걸 넙죽 받아 버렸는지, 생각할 때마다 가슴엔 수많은 의문부호만 쌓일 뿐이다.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거울의 마술에 두 달은 정신없이 빠져 있었다. 두 달은 룸펜을 벗어나 명망 있는 몽상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꿈꾸던 요절의 필수 조건인 그럴듯한 작품도 하나 나오는가 싶었고, 늘 표 한 장 끊어 갖고 들어가 하루 종일 뒹굴던 영화관 생활도 슬슬 물리기 시작했던 때여서 거울의 마술이 묘하게 내 맘을 끌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좀 더 면밀히 따지고 예측해서 1년이 지난 후에는 어찌 될 건지에 대한 한두 가지의 방안은 세웠어야 옳았다. 아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이라는 뻔히 보이는 끝을 향해 줄달음치지 않는가. 우리 중 누구도 부드러운 흐름을 견뎌내지 못한다. 딱딱한 껍질을 둘러치기 위해 음악을 듣고 회랑을 걸으며 그림을 본다. 머리에 집이 그려지면 그 안에 무수히 잡다한 가구를 채우고 싶어한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머리를 흔들며 연필을 준비하여 종이에 머릿속을 정리해보는 어리석은 짓까지 한다. 나의 느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만용으로 좀 더 반듯하고 그럴듯하게 선을 긋는다. 논리적이도록 스스로를 부추기는 것이다. 내가 작은 손거울을 만나기 전까지 내 삶은 그랬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 틀에 매이지 않은 헐렁한 룸펜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안다. 룸펜이야말로 수많은 눈들 아래서 스스로의 공간을 구획하고 스스로 분규하며 스스로 더 촘촘해진 사람이란 걸 나는 안다. 현실은 절대로 유연하지 않다. 이런 제길, <산타클로스의 흰 수염>이 그렇게 공전의 히트만 치지 않았어도 난 좀 더 인간적으로 고민이란 걸 했을 거다. 게다가 두 번째 작품 <소녀의 향기>로 나는 대중들과 화려한 결별을 이미 계획해 두고 있었단 말이다. <소녀의 향기>를 쓰며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철학적 고뇌와 감각적 문체가 절묘하게 만난, 정말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라는 말들이 조심스럽게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또 대다수의 냉혹한 평이 이어지리라 예감했다. 그걸 굳게 이겨내며 초탈한 도인처럼 어느 먼 곳으로 사라지는 나의 시나리오도 완성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책이 출간된 지 보름 만에 출판계에 밀리언셀러로 등록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져 나는 사실 그때부터 더욱 황폐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해불가다. 사오십 대 아줌마들이 그 책을 그렇게나 사서 뭐에 썼을라나? 소녀들은 그렇다 쳐도 떠듬거리며 글을 읽는 유치원생 여아들에게마저 <소녀의 향기>는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갔다. 난 돈벼락을 맞고 말았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S향수회사에서 ‘소녀의 향기’ 이름값으로 백만 불을 책정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덕에 나는 남아공 월드컵도 귀빈석에서 관람했다. 아프리카 전역을 누비다가 돌아왔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녀의 향기>는 99퍼센트가 표절인데 말이다. 물론 형식의 표절을 의미한다. 나도 한 사람의 작가로써 심각한 내용의 표절이었다면 진즉 작가직함을 버렸겠지만,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를 후렴구로 반복했다는 것 외에 사실 내용이야 독창적인 내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로 고칠 수 없는 그 이상한 뉘앙스를 내가 100퍼센트 빌어쓴 건 사실이다.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차임벨 소리가 숨죽인 교정을 흔들어 깨워요. 나는 성난 파도처럼 교문을 부수고 도로를 점령하여 앞으로 앞으로 흘러나갑니다.”와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차임벨 소리가 교정을 흔들어 깨운다. 나는 성난 파도처럼 교문을 부수고 도로를 점령하여 앞으로 앞으로 흘러나간다.”는 그야말로 천양지차가 아닌가. 이런 구절 때문에 학생들이 열광했을 거라고 나름대로 진단하지만 그래도 나는 씁쓸하다. 뿐만 아니라 “소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혼란과 동요를 기억하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해요. 아무 것도 몰랐어도 예감이 먼저 왔지요. 당신을 만난 그날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어요.” 지랄. 이런 부분은 중장년층과 아줌마들에게 상당한 어필을 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런 믿기지 않는 판매부수보다는 지겨운 하품을 원했다. 나는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마니아가 내 세계를 탐닉해 들어올 줄 알았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컬트 작가의 꿈을 키워왔던 것이니. 중학생으로써 마지막 겨울을 나던 열여섯의 난 남들처럼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나면 좋았겠지만 계집애처럼 뽀얀 얼굴이 창피스러워 그룹 미팅이 있을 때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어두운 극장 안으로 도망 다니곤 했다. 마침 우리동네 모나미 극장이 수리 끝에 개봉관으로 오픈을 했다. 극장은 지린내를 풍기지도 않았고 플라스틱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시멘트 바닥에 아무렇게나 침을 뱉는 사람도 없는 세련되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입구부터 예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넓고 낮은 계단을 따라 지린내가 풍겨나는 입구가 아니라 거울처럼 빛나는 질감의 좁은 계단을 출입하면서 나는 계단에 비치는 내 얼굴을 사뭇 감탄하며 바라보곤 했다. 아름다웠다. 미래는 아마도 매끄럽고 반질거리는 것들이 득세할거라는 예감도 얻었던 것 같다. 극장 내부는 또 어땠는가. 매표소 직원들의 산뜻한 유니폼과 정갈한 말투, 해사한 눈웃음에 나는 오랫동안 정신을 놓고 모나미 극장을 드나들었다.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있는 극장 안은 아홉 개 열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적당히 작았고, 푹신한 소파는 언제나 날 흥분시켰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부터 나는 충분히 흥분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달빛에서 햇빛까지>란 영화가 내 인생에 들어왔다. 그 영화를 보고 내가 받은 충격을 다시 술회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이 바로 그 현실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건 말할 수 있다. 그날 난 모나미 극장에 드나든 이래 처음으로 부드러운 소파가 주는 이질감 때문에 울었다. 울다가 잠이 들었다. 저기 나보다 먼저 거울을 손에 넣어 점점 작아지며 등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김이 보인다. 오늘 김은 나를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뒷마당을 서성이고 있다. 김에 대해서 내가 뭘 잘못알고 있는 걸까? 하얀 양산의 여자―나는 하얀 양산을 쓰고 이곳에 온 이가 확실치는 않으나 여자라고 생각된다―가 내가 묵고 있는 3층이나 2층에 방을 배정받았다면 그이도 자주빛 융단을 밟아갔을 테고 객실이 두 개뿐인 1층에 들었다면 그는 자잘한 조약돌을 맨발로 밟아가 방문을 열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느 방이든 그이가 현관 오른쪽 벽에 붙은 열쇠함에 이미 열쇠를 꽂았다면 그이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전등불 아래 망연히 서 있는 자신만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이에게로 향하는 호기심을 서둘러 막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거울을 이용한 지름길을 택하진 않겠다. 거울 속에 비춘 상이 사실 그대로라고 장담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나는 작은 손거울로 세상을 관찰해왔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이제 어쩌면 나는 모텔 매니저 김에게 다가가 내 목소리로 뭔가를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아주 오랜만에 의문이 목소리를 타고 하늘을 날지도 모른다. 빗자루를 탄 마법사처럼. 등으로 만든 이 의자는 앉고 싶다는 유혹에 걸맞지 않게 불편하다. 삐거덕거리며 한 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내 왼발은 늘 굳게 방바닥을 지지하고 있어야 한다. 현관으로 들어가려던 김이 걸음을 돌려 노트르담을 끼고 사라지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앞쪽으로 그가 걸음을 옮기고 있다. 노트르담 전면은 건물과 측백나무 사이의 오솔길이 있을 뿐이다. 아니 넓은 해자(垓字)가 있다. 그렇다. 여긴 사실 섬일 리가 없다. 아무도 함께 살지 않는 건 분명하나 섬은 아니다. 제법 넓은 해자를 가진 성(城)일 따름이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기만 한다면 김은 간단한 조작으로 부교를 만들어 내는 지도 모른다. 그가 지그시 밟으면 땅 속 깊이 들어가 다리를 만드는 사각의 돌이 어디에 있는지도 나는 알 것 같다. 김이 다시 모텔 현관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갈 차례다. 전깃불이 이제는 햇빛에게 제 임무를 서서히 이전해도 좋은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방을 나온 나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아직은 어둠이 채 빠져나가지 못한 비상계단을 택한다. 2층 계단을 돌자 바람의 군사들이 돌진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쏴아 쏴아 솟구쳤다 낙하하는 물소리. 프런트 앞 작은 연못에 분수가 작동하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인 모양이다. 융단 끝에 매달린 황금색 수술이 마지막 층계 끝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웬만한 청년 앉은키만한 바위들과 물가식물을 알맞게 배치한 일반객실 크기의 인공연못가 평평한 바위 위에 앉은 사람은 내 예감대로 여자다. 긴 머리에 맑은 피부를 지녔다. 그 옆에 있는 이는 방금 현관으로 들어온 김이다. 김이 나를 보며 손짓을 한다. 절대로 노트르담에서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다. 나는 김을 바라보고 그런 나를 김의 옆에 있는 여자가 바라본다. 원망과 두려움을 담고 있는 눈이다. 여자는 다시 김에게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 말을 건넨다. 여자는 쉬지도 않고 말을 하고 있다. 김은 탐스러운 머리칼을 흔들며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든 사람이 있다. 이 여자가 바로 그런 부류인 모양이다. 가끔 내 쪽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쉽게 연민하고 또 쉽게 배신한다. 현실에 너무 주눅이 들었거나 그 반대일 가능성이 많은 유형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끊고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기보다 계단에 앉아있는 게 내겐 더욱 편하다. 다시금 분수가 세차게 작동하기 시작하고 물소리에 섞여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은 분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분명히 하얀 양산을 받고 들어온 이가 있다. 바로 저 여자다. 저 여자가 궁금하다. 주머니 속 거울을 만지작거리는 손에 땀이 밴다. 아직 시간은 많다. 소녀는 딱딱한 간이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의자 팔걸이를 찾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놓는 흉내를 내곤 했다. 그 자세로 묶은 머리를 다시 풀어 손으로 빗질을 했고 천천히 다시 묶었다. 초조한 듯 잘근잘근 입술을 씹고 있는 소녀가 그래도 푸근한 눈빛을 주는 것은 커다란 유리창이었다. 소녀의 왼편에 놓인 야자수 잎이 불타오르는 석양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소녀가 반쯤 그늘에 들어가 있을 때 짧은 머리를 한 소년이 장구 모양으로 생긴 컵에 물을 따랐다. 소년은 서향인 창을 탓하며 블라인드를 쳤다. 소녀가 땀을 송송 흘리며 어설픈 배려를 감행하던 소년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속에 잠긴 오리발처럼 모텔 뒤꼍을 뒤덮은 강아지풀이 부산스럽게 요동치고 있었다. 소년은 집착과 책임 사이에서 점점 더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흔들의자가 있으면 좋겠어.’ 소녀는 딱딱한 간이 의자에 앉아 강아지풀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등나무의 둥근 터널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얘, 일어나. 물에 흠뻑 젖겠어.” 무엇인가가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있다. 나는 놀라 벌떡 일어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분수대 옆이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다가 저를 건드린 소녀를 발견한다. 김과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노트르담이 아니고 모나미극장이다. 저만치로 멀어지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극장 관리인 최씨 아저씨가 열쇠 꾸러미를 쩔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소년을 보고는 켁켁 쉰 소릴 낸다. “명우야, 오늘은 집에 가서 자라. 청소는 내일 하자꾸나. 대신 내일은 공휴일이니까 아침부터 나오너라. 1관에서 9관까지 죄 청소를 해야 돼. 내일 지배인이 오는 날이잖니. 오늘은 꼭 집에 가야한다. 어머니가 좀 나아지셨는지 모르겠네. 너 정말 학교는 안 다닐꺼야? 중학교는 나와야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투명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최씨 아저씨가 불룩한 배를 더욱 앞으로 내밀며 어기적거리고 돌아가자 소녀도 극장 안을 두리번거리며 출입구를 찾는다. 소년이 일하는 모나미 극장은 엘리베이터가 네 대나 되고 비상계단도 세 군데나 있다. 그러나 그 일곱 곳을 찾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좁은 통로를 따라가면 어김없이 출구를 만날 수 있겠지만 중간에 길을 잃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겐 은빛 알루미늄으로 마감한 극장의 복도는 공포스럽다. 소녀의 까만 학생구두가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는 것 같다. 들려진 오른발앞머리가 이리저리 방향을 탐지하고 있다. “그쪽 아니야. 날 따라와.”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에 소년이 놀란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챙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는 소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물체가 들어온다. 무언가를 떨어뜨리고도 소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자박자박 소년을 향해 걸어온다. 다가오는 소녀를 외면한 채 소년은 그 아이가 떨어뜨린 것을 향해 걷는다. 소녀가 황망한 걸음으로 되돌아가 제가 떨어뜨린 걸 주워들 때까지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소녀가 주워드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상아로 테를 두른 손거울이었다. “지금 여름이니?” 소년은 소녀의 반팔 원피스와 제 겨울 잠바를 번갈아보며 중얼거린다. 어째 그것도 몰라?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 웃음을 퍼뜨린다. 소녀가 상아로 만들어진 손거울을 작은 가방에 넣는다. 저것이 먼 훗날 어찌어찌하여 저에게 와서 저를 죽음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이상 하지 않기로 한다. 소년은 극장 밖을 나서며 챙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쓴다. 비가 온다. 소녀의 하얀 원피스가 다 젖을 것이다. 도로에 떨어지는 빗방울 수를 세어가던 소년의 눈에 하얀 색 바탕에 빨간 줄무늬가 그려진 볼링화가 들어온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뒤에서 따라오던 소녀가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가 안긴다. 안기는 게 아니라 안아준다. 아담한 소녀의 키보다 그 남자의 키는 반뼘쯤 더 작다. 부녀지간인지 연인사인인지 모르겠지만 둘은 다정해 보인다. 걸음을 돌리는 소년의 등에 비의 장벽을 뚫고 온 소리 한자락이 닿는다. “오랜만이야.” 소녀의 그 남자가 소년에게 웃음을 날리고는 소녀와 맞잡은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걸어간다. 불룩 솟은 그의 등에다 소년이 비열한 웃음을 흘린다. 소녀가 무언가를 길바닥에 떨어뜨린다. 세계가 구부러지고 엉키더니 산산조각난다. 조각난 세계 위로 방울방울 빗방울이 흐른다.  
95 가을, 누가 지나갔다 외 1편/ 진 란 file
편집자
4390 2011-01-28
11.02월 9호 시 가을, 누가 지나갔다 진란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키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지상에서의 하루 바람과 함께 하늘을 걸어가는 너랑 구름과 함께 바람을 걸어가는 나랑 지상에서 단 하루, 뜨겁게 피어날 수 있었다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슬픔도 없을까 아주아주 오랜 후에 후회도 없을까 꽃은 자주 피어나고 숫한* 꽃잎들 뛰어내리는데 떨리는 마음, 내 무덤에 숨겨두고 그리운 마음, 하늘에 흔들리면서 내가 가고 없는 조등에 무어라고, 나의 무엇이여라고 쓸 수 있을까 그때에야 네 이름 석자 쓰면서 이슬받이 기울여 추억한다고 하면 기쁠까 저 풀잎, 쉼을 얻지 못하고 저 바람, 멈춤을 구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버린 네 눈동자와 네 숨소리와 너의 따스한 손과 어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한번 피었다 지는 저 가을꽃도 제 설움에 겨워 다시 꽃으로 피지 않으리라고 꽃으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흐린 세상에 그런 말 남기고 싶어질까 *숫한:숫하다:(형)순박하고 어수룩하다 진란 2002년 시전문계간《주변인과詩》로 작품활동 《주변인과詩》편집장 역임 현재 월간《우리시》교정위원 이메일 : ranigy21@hanmail.net  
94 어두워지면 외 1편 / 권순자 file
편집자
5004 2011-01-28
11.02월 9호 시 어두워지면 권순자 염전에 소금이 쏟아져 내렸다 오랜 동안의 그리움이 알알이 맺혀 허공에 가늘게 떨며 빛나다가 어둠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시간이면 어제의 기억들이 하얗게 쏟아졌다 허기진 노래처럼 울림 깊은 소리로 온몸으로 피었다 비우고 다시 비운 뒤에 찾아온 현기증 나는 달빛 타는 속내 파동으로 읽어내는 몸짓 잠결 같은 물소리는 바래고 바래서 하얗다 여위는 파도소리 오랜 호흡도 우려내면 저렇게 투명해지는가 핏빛 울음도 붉어지던 눈자위도 기다림의 시간을 달이고 달이면 꽃보다 환한 빛으로 태어나는가 섬 일몰이 황홀하게 살벌한 시간의 체를 거치고 상처를 거부하는 울음이 수면으로 가라앉는 밤 병원 침대에 누워 구름냄새를 맡는구나 삶의 그을음이 온통 뼛속에 침전물로 남아서 바람처럼 스치는 달빛을 받네 고운 꽃 쏟아내던 때가 언제였던가 싸늘한 고양이 울음이 잉크처럼 번지는 밤 외로운 어둠의 강 위에 몸 둥둥 떠가네 차라리 헤엄쳐 갈까 저 하늘로 저 바다로 바람소리 창틈으로 물 새듯 쏟아들고 몽환처럼 서성이는 달빛이 서러워 내 몸을 핥아대는 먹먹한 그리움이 아파서 욱신거리는 온몸을 질질 끌고 내 영혼은 한 점 섬으로 떠도네 슬프고 다정한 눈동자를 보라 추락하지 않는 노래는 귀전에 출렁거리고 내 신음은 중얼거리며 날아오르네 울렁거리는 울음을 물고 밤새 뒤척이는 눈동자를 보라 허공에 바람을 물고 질척이는 섬을 보라 권순자 경주 출생. 2003년 《심상》등단. 시집『우목횟집』,『검은 늪』 포항문학회원. 한국작가회의회원, 한국시인협회회원. 이메일 skjm70@empas.com  
93 여름 밤 외 1편 /임영석 file
편집자
4247 2011-01-28
11.02월 9호 시 여름 밤 임영석 내가 잠든 척해도 스며드는 꽃향기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하늘의 수많은 발자국 나는 결코 잊지 않겠다. 내 몸의 바퀴 내 목구멍은 늘 불안한 외발 자전거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출생, 1985년 현대시조 봄호에 2회천료,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지발표 우수작 선정,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받음, 시집으로 『이중 창문을 굳게 닫고 』,1987년 『사랑엽서』, 1990년 『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 놓고 싶다』, 1992년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2006년 『배경』, 2008년 『고래 발자국』, 2009년이 있음. 스토리문학 부주간 등 활동 주소: 220-797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1850 건영아파트 105동 1106호  
92 구제역(口蹄疫) 외 1 편/김소인 file
편집자
4839 2011-01-28
11.02월 9호 시 구제역(口蹄疫) 구제할 수 없는 욕망 덮씌우더니 급기야 *구체없이 되었다 *구체적 해결책이나 다른 방법이 없어 그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는 경북지방 방언 *파토(破鬪) 뱁새눈깔 유리알 걸친다고 씨발놈이 젠틀맨되나 언제는 죽도록 사랑한다고 주둥이질이더니 이제와 거지발싸개로 아는 저런 개새끼 모신 년놈이나 씹 주고 뺨 맞은 기분이나 쉰 걸음 백 걸음 반만년 역사 이래 본 데 없는 저지레 끝 간 데 없이 파토난 삼천리 걸레강산 *파투의 잘못  
91 마른화분 외 1편/김설희
편집자
4856 2011-01-28
11.02월 9호 시 마른화분 김설희 담 구석빼기에 조소 같은 분하나 엎어져 있다 화분은 없는데 꼭 분모양이다 둥글 길쭉한 덩어리에 흙보다 뿌리가 더 많다 뙤약볕에 비스듬히 누운 그것을 세우자 화초 한포기 누렇게 말라 죽어 있다 흙은 뿌리들을 그러모은 채 딴딴하게 굳어있다 아니 뿌리들이 흙을 안고 엉켜있다 뿌리들, 돌처럼 침묵하고 있다 발로 툭 차 그것들을 깨워본다 깍지 낀 채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안에서만 자란 탓인지 뿌리들이 가늘고 길다 아래로 뻗어간 뿌리 내려가다 옆으로 가다 위로 올라간 뿌리 중간쯤에서 화분의 둘레를 따라 둥그스름히 길을 튼 뿌리 서로의 다리를 걸고 있는 뿌리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뿌리 발목을 접질린 뿌리 더 이상 밀고 나갈 데가 없었는지 잔뿌리들 아래쪽으로 몰려 옹차게 껴안고 있다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꽃 한포기가 조금씩 흙을 밀어내며 온몸으로 제 틀을 만들었던 저것 걷는다는 것은 김설희 보도블록을 밟는 것 그 틈새로 올라온 잡풀을 보는 것 색소폰소리 걸어 나오는 레코드가게에 들러 테이프 하나 사서 미리 상상해보는 것 빨간불에 잡히면 그냥 잠깐 서 있다가 수신호 않아도 파란 불이 켜지면 미끄러지듯 흰 줄을 밟으며 가는 것 자전거 도로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 자전거가 따라오면 비킬까 말까 생각하게 하는 길을 기어코 걷는 것 제 발자국 지우는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두 발에 온 생(生)을 휘감는 것 화장품 가게 앞에서 라벤더 허브 로즈메리..... 큼큼 코로 걷다가 눈으로 걷다가 그만 내가 거리의 꽃이 되는 것  
90 아더 모리슨, <<한 푼도 없다>>
고창근
4597 2011-01-25
내가 좋아하는 소설 파업이 불어닥치고,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은 먹고 살 방도를 찾아 무더기로 길을 떠난다. 터벅터벅 걷는 그 길에는 아코디언 연주와 연설이 있다. 그러나 그 황톳길에서 사람들은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망가진다. 기침하고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노동자는 "나는 그저 실컷 갖고 놀다 망가진 아코디언 건반"이라고 부르짖지만... 대답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 아더 모리슨, <<한 푼도 없다>> 이스트 런던 지역의 사람들은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거나, 얼쩡거리며 걸어다니기도 하고 길가에 숨어 기다리다가 튀어나와 소란을 부리거나, 먹을 것이 다 떨어진 부엌에서 울부짖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총파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미리 파업을 준비하고 있던 조합은 파업에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파업에 들어갔다. 그보다 규모가 적은데다 준비도 덜 된 조합들 역시 동조 파업에 들어가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역시 마찬가지로 파업에 들어갔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그런 노동조합들도 분위기를 타게 되었다. 이들에게도 파업이 한창이니 동조하라는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역시 파업에 들어갔다. 연계 업종에서 대부분 파업이 진행되는 바람에 일거리는 거의 사라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 가운데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부두로 떼를 지어 몰려가서 소란을 피우고 난리를 피웠다는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들려줬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은 자기네들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을 본받아 하는 일없이 떼를 지어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튼 이스트 런던 지역은 대단히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은 거의 다 굶주리고 있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대단히 흥미롭게 이 지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여러 가지 충고를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여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조합에서 파업 수당도 받지 못하고 먹을 것마저 부족했다. 상황이 별로 유리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맨체스터나 버밍엄, 리버풀이나 뉴캐슬 등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런던의 북쪽 그레이트 노스 가로에선 열 명씩 또는 스무 명씩 사람들이 무리지어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혼자 또는 두 사람이 함께 걷기도 했다.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버데트 거리에 모여 빅토리아 공원, 클랩튼, 스탠포드 힐을 거쳐 엔필드 거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 뒤쪽에 세 사람의 사나이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입심 좋은 사내,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과묵한 사나이, 그리고 얼굴이 창백하고 근심 어린 표정의 키가 작은 사나이가 일행이었다. 얼굴이 창백한 사나이는 연장 배낭을 둘러멘 채 이따금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이 일행은 거의 말이 없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 보도와 차도를 따라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도 이들 노동자의 모습은 아직 부랑인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도 깨끗이 씻었고 옷도 잘 기워서 손질이 되어 있었다. 지방 법원에서 배심원으로 재판을 방청한 다음 돌아오는 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밭이 듬성듬성 드러나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도착하자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의 맨 앞에 서서 가던 젊은 친구는 아직 마음에 걸리는 가족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이번 여행을 일종의 기분 전환이나 심심풀이 나들이 정도로 생각하는 기분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코디언까지 둘러메고 있었다. 그는 일행의 분위기가 침울한 것이 못마땅한지 지금 다들 알렉산드라 궁전으로 가고 있다는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그때 배낭을 메고 맨 뒤에서 따라오던 키 작은 사나이가 무의식중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에는 3실링의 돈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말했다. "아마 린드라일 거야. 내가 나올 때 몰래 살짝 넣은 거겠지! 이런 짓을 왜 해? 자기는 겨우 1실링으로 애들과 함께 지내야 할 텐데..." 그는 걱정스러운 듯 갑자기 땀을 흘렸다. "우체국을 보면 바로 다시 부쳐주어야겠군. 그러면 되겠지." "부치다니? 쓸 데 없는 짓이야!" 그와 나란히 걸어가던 입심 좋은 젊은 사나이가 경멸하듯이 말했다. "집사람은 끄덕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자네 앞가림이나 하라구... 여자들이란 항상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단 말씀이야. 이봐, 조이. 곧 피눈물이 날 정도로 그 돈이 필요할 때가 올 테니 내 말대로 그냥 갖고 있는 게 좋아. 그렇지 않아, 데이브??" 그는 과묵한 사나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거 참, 이상도 하지..." 과묵한 사니이가 대꾸했다. "우리 마누라는 내가 떠나기 전에 주머니 밑바닥까지 샅샅이 뒤져서 가져가던데... 게다가 곧 돈을 더 보내지 않으면 자기를 빌어먹게 했다고 사람을 보내고 난리를 피우고 재판이라도 걸 거야... 여자도 여자 나름이야." 여행은 계속되고, 길은 갈수록 점점 더 먼지투성이였다. 맨 앞에 서서 가던 그 쾌활한 사나이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팔머즈그린에 도착하자, 무리 가운데 네 명의 사나이가 엔필드 병기 공장에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면서 곧장 앞으로 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어 왼쪽 퍼터즈바 쪽으로 걸어갔다. 키 작은 사나이 - 조이 클레이튼이 오래 침묵하다가 데이브에게 물었다. "데이브, 어느 쪽이 더 가까운가? 뉴캐슬인가, 아님 미들즈버러인가?" "미들즈버러가 더 가까워. 내가 걸어가 본 적이 있어." "걷는 것도 별로 힘든 건 아니군, 안 그런가?" 조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자네가 걸을 때도 괜찮지 않았어?" "나는 죽 걸어갔지... 길이 고되기도 하지만, 그야 형편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운이지, 운. 내가 걸어갈 땐 날씨가 사나웠어." "만약 지금 가는 곳에 좋은 일자리가 없으면 말이야... 젠장, 거기서도 한바탕 파업이나 일으키는 거야." 입심 좋은 젊은 사나이가 떠들어댔다. "거기서 파업을 일으킨다고?" 조이가 놀란 듯 큰소리로 반문했다. "어떻게? 누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야?" "내가 하면 되지, 뭘... 나도 그만한 재주는 있다네, 안 그래? 자, 들어보라구!" "여러분, 노동자들이 이마에 땀을 흘려 부와 풍요와 사치를 생산했으면서도 그 한가운데서 할 일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노동자 형제들이여,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노동자를 착취하여 살이 뒤룩뒤룩 찐 저 자본가들을 무릎 꿇게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옳소! 야, 멋지구먼!" 조이 클레이튼이 큰소리로 환호했다. 사실 이것은 귀에 익숙한, 많이 들어본 말들이었다. "뉴먼, 아주 잘하는데!" 뉴먼은 사실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한바탕 연설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토론회에서 익힌 재주였다. 그리고 조이 클레이튼은 언제나 뉴먼의 열성적인 청중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코디언이 이제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뉴먼이 다시 한 번 열변을 토했다. "공장에선 모두들 나를 보고 농땡이꾼 뉴먼이라고 부릅니다. 왜냐구요? 그거야 물론 내가 농땡이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래!" 이번에는 데이브가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러분, 난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난 철저하게 농땡이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농땡이꾼일 겁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일을 덜 하면 자본가들은 그만큼 더 노동자를 고용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난 농땡이를 친다, 이 말씀입니다." "한두 주일 정도라면 자네 맘대로 농땡이를 칠 수도 있겠지..." 데이브 버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을 좀더 삼가는 게 좋겠어." 포터즈힐에 이르자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울타리 그늘에 앉아 빵과 치즈를 먹고 깡통에 든 차가운 차를 마셨다. 그냥 빵만 먹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 것도 준비해 오지 않은 농땡이꾼 뉴먼은 친구 두 사람 것을 얻어서 먹고 마셨다. 일행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그레이트 노스 거리에 들어서자 때 뉴먼은 허리를 펴더니 교활한 눈으로 조이 클레이튼 쪽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나한테 한두 실링만 있어도 자네들한테 맥주 한 잔씩 앵길 텐데 말씀이야..." 조이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자네한테 돈이 없으면 나라도 한턱 내야 되겠지..." 그는 불안한 듯 이렇게 말하고 가까운 술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이와 뉴먼은 걸음을 멈추려하지 않는 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 잔 하지 않으려나?" 그러나 데이브는 천천히 대답했다. "글쎄, 그런 식으로 멋 부리는 건 잘하는 짓 같지 않구먼..." 조금 지나서 조이는 적어도 2실링 정도는 부칠 생각으로 우체국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뉴먼이 나서서 반대했다. 만일의 경우 필요할지도 모르는 돈을 멀리 보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여자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존재라는 자신의 논리를 몇 번씩 되풀이했다. 조이는 일단 돈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하루 이틀 정도 미루기로 한 것이다. 길은 점점 더 나빠졌다. 먼지가 심해서 일행의 꼬락서니도 점점 더 뜨내기 무전 여행객의 행색이 드러났다. 이따금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그것도 완전히 멎고 말았다. 연주하는 사람이 지친 것도 지친 것이지만, 일행 가운데 나이 많은 몇몇 사람들이 걷는 일이 피곤해지면서 아코디언 소리마저 소음을 듣는 것처럼 짜증을 냈던 것이다. 조이 클레이튼은 먼지 때문에 기침이 더욱 심해져서 특히 아코디언 소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질 때마다 열댓 번씩 되풀이되는 아코디언의 그 연주 소리가 정말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아코디언의 느리고도 웅웅거리는 소리...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지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트필드 역에서는 일행의 앞에서 걷던 두 사람이 어떤 승객의 무거운 짐을 거들어 주고 동전 몇 닢을 벌었다. 딕스웰 힐까지 오자 그 동안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의 길다란 줄도 거의 흩어졌다. 뉴먼도 이젠 연설을 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맑게 갠 밤 하늘의 공기에는 달콤한 냄새마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웰원과 코디코트 중간 지점에서 일행은 잠을 청할 만한 헛간 같은 곳을 찾아 모두 흩어졌다. 아코디언 연주자만은 웰원에 있는 자그마한 주막을 찾아갔다. 한 곡 연주해서 재수가 좋으면 맥주 한 잔에다 헛간 구석자리라도 얻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데이브 버지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초가 오두막 한 채를 찾아냈다. 그 안에는 아직 다발로 묶지 않은 건초더미가 쌓여 있었다. 뉴먼은 건초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가장 아늑한 구석자리로 가서 몸을 눕혔다. 데이브 버지는 뉴면이 누운 자리에서 마른 풀을 좀 끄집어내더니 괜찮아 보이는 장소에 조이 클레이튼을 도와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이내 잠이 들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이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기침을 하면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이런 환경에 익숙치 않을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감옥 신세라도 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다들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헛간에서 자는 패거리들 가운데는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엔 다행히 코디코트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세 사람이 음식점에서 찬 고기와 빵을 사서 먹여 주었던 것이다. 아코디언을 가진 사나이는 그들을 따라갔다. 잠자리와 아침 식사, 그리고 8펜스의 돈을 얻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히친에 머물러 하루 정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에는 일행과 헤어져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닐 속셈이었다. 그래서 히친을 지난 뒤부터는 그나마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조이 클레이튼의 처지기 시작했다. 뉴먼은 마음속으로 뭔가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세 사람은 다른 일행보다 훨씬 뒤떨어지게 되었다. 조이는 힘겹게 비틀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겨우 따라가고 있었다. 원래 체력이 달리는데다 잠도 부족했던 것이다. 데이브 버지가 연장 배낭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조이는 몇 번이나 길에서 쉬어야 했다. 뉴먼은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동료들과 떨어지지 안겠다고 자기 결심을 말했다. 그러더니 한 잔 하자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데이브 버지는 헨로우에 있는 철도 건널목에서 놀라 날뛰는 말을 잡아 주고 2펜스를 벌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말이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조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조이는 길의 노랗게 빛나는 색깔만 보아도 현기증이 일었다. 어떤 때는 세상이 빨갛게 보이고 또 어떤 때는 파랗게 보이기도 했다. 기침이 심해서 몸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는 가끔씩 동료의 부축을 받고, 때로는 혼자 비틀거리며 걸었다. 자기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거의 의식불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일행들은 대부분 한참 앞으로 가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풍차가 있는데 거기에 가서 쉰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비들스웨이드 바로 바깥쪽 강가의 낡은 보트 오두막에서 걸음을 멈췄다. 거의 졸면서 걷고 있던 조이는 털썩 바닥에 쓰러지더니 해질 무렵부터 다음 날 아침 해가 훤할 때까지 꼼짝도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데이브 버지는 문 쪽에 앉아 있었으나, 뉴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의 연장 배낭도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았자 헛일이야." 데이브가 말했다. "그놈이 한 짓이야." "뭐?" "그 농땡이꾼 자식 말이야. 자네 연장을 슬쩍 채 가지고 달아난 거야. 그 자식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지." "그럴 리가!" 조이는 파랗게 질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연장을 훔쳐가다니... 설마 그럴 리가... 세상에... 그 배낭에 든 연장은 15실링이나 하는 값비싼 물건인데... 두께나 지름을 재는 캘리퍼스까지 있는데...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뺑소니를 치다니..." 그러나 데이브 버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주머니도 한 번 뒤져보게. 아마 거기에도 손을 댔을 걸세." 그가 말한 대로였다. 조이는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 2실링은 집에 부칠 참이었는데... 게다가 연장도 없어졌으니 일은 어떻게 하지? 정 일자리를 못 구하면 그거라도 잡혀서 집에다 돈을 부칠 작정이었는데... 정말이야...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너무 하는군!" 잠을 많이 자기는 했지만 걷느라고 너무 지쳐서 조이는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데이브는 그런 조이를 다시 걷게 하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조이는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앞서 가던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묻기도 했다. 두 사람은 몇 마일을 아무 말도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조이가 길가의 풀덤불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았다. "왜 다들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난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사람이야. 어렸을 때부터 20년 동안이나 리터슨 공장에서 일을 해왔어. 그런데 파업을 하라고 그러길래 모두 함께 파업을 했지. 아무 일도 없었지.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 사실이야. 그래도 하라니깐 파업을 했지... 이건 하나님도 알고 계셔. 그런데 그들이 나보고 나가라고 그러길래 난 즉시 나와 버렸어. 그러다가 섬에 가서 다른 일자리를 구했더니, 덩치 큰 친구들이 넷씩이나 몰려와서 나를 반쯤 죽도록 때리더군. 난 그곳이 파업 지역이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몰랐어... 그 친구들 가운데 두 명이 경찰에 붙잡혔지. 조합은 나더러 그들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라고 그러더군. 그렇게 하면 파업 수당을 다시 주겠다고 그러더란 말일세.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지. 그런데 조합 자식들, 파업 수당을 주기는커녕 실컷 비웃은 다음에 날 쫓아내더란 말이야... 그래서 이젠 길바닥에 앉아 굶어죽게 되었어... 그 농땡이꾼 자식... 해도 너무하는군... 그 친구마저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조이는 차츰 화물차 뒤에서 스웨덴 무를 빼내 먹는 법도 배우고, 철 이른 무나마 감지덕지 여기게 되었다. 구걸하거나 도둑질하는 재주도 없고, 그런 일을 감히 해볼 엄두도 못내는 사람에게 떠돌이 생활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도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줄곧 기침을 했다... 기침이 너무 심해지면 기둥이나 문을 붙잡고 피를 토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로 기계적으로 터벅터벅 걸을 뿐이었다. 한 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묻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다른 사람이라니?" 데이브는 순간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 그래...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 알다시피 다들 훨씬 앞으로 가 버렸다네." 조이는 입을 다문 채 반 마일 가량 걷더니 다시 말했다. "그 친구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겠지." "응, 아마 그럴 거야..." 데이브가 말했다. 잠깐잠깐 기침을 할 때를 빼면 조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코디언을 갖고 있지 않겠지... 하지만 먼 길을 걸을 땐 아코디언이 있어야 해.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아코디언을 갖고 있더군. 아주 잘 지내더라구...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가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 데이브 버지는 모자 위로 머리를 긁으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이의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농가에서 빵 부스러기를 좀 얻어먹었을 뿐이다. 언덕을 넘고 다른 길로 들어서도 길은 끝없이 누렇게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조이는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데이브 버지보다 한결 더 차분하게 견디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조이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가면 그렇게 힘들 건 없어. 그 친구들 아코디언을 아주 제대로 써먹더군... 이제 정말 못 견디겠어..." 그러다가 갑자기 덧붙였다. "그래, 우리는 모두 아코디언이나 마찬가지야!" 그는 킥킥대는가 싶더니 금방 기침 때문에 목구멍을 그렁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인간이란 단지 아코디언을 수없이 모아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구..." 겨우 숨을 가다듬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아코디언 다루듯이 자기들이 원하는 아무 곡이나 연주해대는 거야... 그걸로 다들 먹고사는 거지. 여보게, 데이브... 우린 모두 아코디언 비슷한 거란 말일세." 이렇게 말하고서 그가 웃었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군." 데이브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상대의 표정을 묘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조이가 그런 식으로 웃음소리를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이는 자신의 이 생각이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이따금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아코디언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모두가 아코디언이야... 빌어먹을. 시키는 대로 어떤 곡이라도 뽑아내는 그런 아코디언이란 말이야... 인간은 그냥 아코디언 신세일까? 아니야, 그 정도도 못돼. 우린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건반에 불과하지... 노래에 맞춰 제멋대로 눌러대는 그런 건반 말이야... 빌어먹을, 양철 조각같이 보잘 것 없는 건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건반 말이야... 그 동안 나를 갖고 꽤나 잘 논 셈이지... 오랫동안 나를 갖고 논 거야..." 데이브 버지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꿔보려고 했다. 그러나 조이는 데이브의 말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동안 나를 갖고 꽤나 잘 놀았어... 오랫동안 갖고 놀았더란 말이야." 그는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나를 갖고 놀다가 그만 스프링이 끊어지고 만 거라구..." 밤에는 더욱 운이 나빴다. 가죽 각반을 차고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나이가 모처럼 찾은 괜찮은 헛간에서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그들은 한참 동안 더 가면서 이슬을 피할 장소를 찾았지만 마땅한 잠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건초더미를 하나 발견했다. 꼭대기에는 잘만한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올라갈 사다리가 걸쳐 있었다. 버지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축축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을 떠 보니 짙은 안개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데이브, 나야..." 클레이튼이 말을 걸었다. "난 자네가 없어져버린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다 뭔가? 설마 물은 아니겠지? 우리가 물에 빠진 건가? 옷이 몽땅 젖어버렸어." 버지도 속옷까지 몽땅 젖어 있었다. 그는 조이를 눕히고선 어서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침이 발작적으로 나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코디언 소리 때문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말았어." 기침이 멎자 조이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럭저럭 밤이 지나가고, 회색빛 새벽빛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두 명의 떠돌이는 건초더미에서 내려왔다. 오돌오돌 떨리는 몸을 녹이기 위해 일부러 발에 힘을 주어 걸으며 한길로 나갔다. 그날 아침 조이는 이따금 현기증을 일으켜 잠깐 동안 정신을 잃곤 했다. "스프링이 끊어져 버린 거야." 정신이 들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양철 조각으로 만든 그 보잘 것 없는 건반이 고장이 나 버린 거야."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한 곡 더 울릴 참이야. 보라구, 바로 저거야... 저게 죽음의 행진곡이라는 걸세."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서 조이는 어느 집 문에 기대어 기침을 했다. 살이 찐 늙은 부인이 조그만 털북숭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다가 그에게 1실링을 주었다. 조이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아 돈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데이브가 그것을 주워서 조이에게 주었다. "이봐, 조이. 1실링짜리야. 어떤 마나님이 자네한테 주는 걸세. 자, 어서 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세." 그들은 데이브가 전날 번 돈으로 2페니짜리 빵을 사고 조그만 주막으로 들어갔다. 데이브는 맥주를 주문했으나, 조이는 1페니 어치 진을 섞은 독한 스타우트 맥주를 주문했다. 이윽고 조이는 머리꼭지까지 취해 탁자 위로 머리를 떨구었다. 깊이 잠든 것이다. 1실링을 내고 받은 거스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데이브는 일어나서 남은 빵 조각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당구에서 쓰는 초크를 집어들고 술집 구석 조그만 흑판에 이렇게 썼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 남자를 구빈원에 데려다 주십시오.' 그런 다음 그는 식탁 위에 널려 있던 동전을 한데 모아 놓고 조용히 거리로 나갔다. <끝>  
89 꽃 피고 바람 불어/고창근 file
편집자
4143 2011-01-01
11. 1월 8호 소설 꽃 피고 바람 불어 “살살 다루야 한데이.” 덕만은 두 이랑 건너에서 오디를 줍고 있는 아들과 며느리한테 이르고 또 이른 말을 습관처럼 내뱉고 만다. 아기의 속살처럼 여린 오디는 익을 대로 익어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알맹이가 터져 검은 물기가 번져 나왔다. 장사꾼은 처음 오디가 나올 땐 좀 물러도, 좀 빨간 기색이 있는 덜 익은 오디도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잘도 받아 주더니 요즘 들어 한창 오디가 쏟아져 나오니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오디 재배농민들 역시 장사꾼이 까다롭게 굴수록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디 나무 밑에 처 놓은 그물에 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오디를 바구니에 담아 한꺼번에 스티로폼 상자에 담으면 일이 한결 수월하겠는데 한 번 만지고 두 번 만질수록 오디는 물러 물기가 스며 나왔고 장사꾼은 너무 무르다 하여 받아주질 않았다. 그러니 오디를 일일이 하나씩 주워 4kg짜리 스티로폼 상자에 곧장 담으니 일손이 더디기는 배는 더 더뎠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장사꾼이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판로가 없으니 상전도 그런 상전이 따로 없다. “알아요. 맨날 하는 일 뭐 그거.” 예, 하면 좀 좋은가. 아들은 퉁명스럽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덕만은 하지만 에이,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오디를 줍는 일이 한창 기운 쓸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만 쪼그리고 있어도 무릎이 아프고 허리 등 근육이 당겨왔다. 다행히 며느리는 재미있어 했다. 태어나서 처음 딴다고 했다. 역시 남자에겐 여자가 있어야 한다. 며느리가 새로 들어오고부터 아들이 그나마 마음을 잡고 일을 한다. 복이 넝쿨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께 좀 쉬다 하거래이.” 덕만은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며 혼자 쉬기도 뭣 하여 덕담처럼 한마디 했다. 그럽시다. 아내가 먼저 앉았고, “우린 괜찮아요. 아빠하고 엄마나 좀 쉬세요.” 며느리의 대답이 냉큼 달려왔다. 아빠? 흐흐흐. 들을수록 또 듣고 싶은 말이다. 시아버지한테 아빠가 뭐여. 아내는 궁시렁거렸지만 덕만은 듣기가 좋았다. 며느리는 시집을 오자마자 아빠 아빠하며 살갑게 굴었다. 하기야 아는 말이 몇 안 되는 줄은 알았지만 아버님보다야 얼마나 듣기 좋단 말인가. 흐흐흐. “이 양반은 메눌 아이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니께.” 아내는 덕만을 보며 질투를 한다. 질투. 그렇다. 덕만의 눈엔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질투 또한 싫지가 않았다. 한여름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어쩌다 들른 며느리가 있을 땐 남우세스럽게 덕만에게 달려들어 등목을 하자고 웃통을 벗겼다. “야가 왜 이런다야.” 처음엔 덕만은 기겁을 했다. “아빠. 덥잖아요. 제가 물 끼얹어드릴게요.” 며느리는 반 강제로 웃통을 벗기곤 수돗가에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웃통을 벗은 채 또다시 옷을 입기도 뭣 하여 옛날 군대갔을 때처럼 엎드려뻗쳐를 하니 시원한 물과 함께 보드라운 손길이 등과 옆구리를 살살 문질러 왔다. “아가 대충 해뿌려라. 차갑다카이.” 겉으로야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야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등목 하는 거 너들 나라에서도 하든?” 필리핀에서도 이런 풍습이 있나 했더니 한국에 와서 배웠단다. 복덩이야. 덕만은 며느리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겉으로 말하면 복이 달아날 것 같았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아들이 며느리와 결혼한 게 꿈만 같았다. 구미 공장에 다니던 아들은 반도체 공장이라고 하던 직장이 경기도 파주로 이전해 가면서 강제로 명퇴를 당했다. 직장을 잃으니 부부 싸움이 곧잘 일어나고 기어코 며느리가 짐을 쌌다. 큰애가 다섯 살 작은애가 세 살 때였다. 아들보다 저 손자들을 어떻게 하나 자면서도 꿈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일여 년 지날 무렵 아내가 지나가는 투로 요즘 국제결혼도 잘 하던데, 하였다. 국제결혼? 덕만은 오랫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한 동네 사람이 읍내에 있는 결혼업체에 다니다 보니 이 근방엔 일찍 그쪽 방면으로 눈을 떠 며느리가 외국인 집이 여럿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저녁 마실이 잦다 했더니 천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고 덕만은 못 이기는 체 내놓았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아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아들이 필리핀에 군말 없이 다녀왔다. 저도 아내 없이 애들 둘이나 키울러니 자신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못 사는 외국에서 온다고 해도 자식이 둘이나 있는 홀아비한테 누가 시집오려나 했더니 신기하게도 필리핀에서 색시가 왔다. 처음엔 색시는 못 살겠다고 사기 결혼이라고 울고불고 지랄했다. 뜻도 모르는 영어로 말했지만 덕만은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다. 자식이 없는 줄 알았단다. 속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파하기가 쉬운가. 아내 또한 근 1년 동안 아들네 집에 가 살다시피 하더니 이내 저들끼리 정도 붙고 애도 낳으니 둘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때는 아들도 마음을 잡아 구미 생활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읍내에 방을 장만한 후 본격적으로 논농사를 지었다. 200여 마지기. 3만 평. 소리만 들어도 억, 하고 뒤로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많은 논을 소유한 사람을 듣도 보지도 못 했다. 물론 남의 땅이었지만 트랙터며 이앙기 등 모든 논기계을 장만하여 농사를 지으니 옛날 다섯 마지기 논일거리도 되지 않았다. “내년부터는 짓지 말아요.” 아들은 오디가 든 스티로폼 상자를 한쪽으로 쌓으면 말했다. 덕만은 오디 상자를 세었다. 22개. 얼추 잡아도 44만원이다. “왜. 내가 할 테니 어여 집에 들어가.” 덕만은 이 녀석이 왜 또 이러나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왜 이딴 걸 짓는다고 사람을 오라 가라 해요.” “그럼 오디 따러 오지 말든가.” 덕만은 녀석의 아픈 점을 찔러 보았다. 아들은 10여 일 전 오디 따러 오라니까 대뜸 그 돈도 안 되는 오디를 뭐 할라고 심어가꼬, 했다. 그럼 오기 싫으면 오지 말든지 했더니 트럭에 며느리를 태우고 와 매일 오디를 땄다. 아마도 며느리가 또 잘 구슬린 것 같았다. 덕만은 집 옆에 딸린 500여 평에 2년 전 오디 나무 400주를 심었다. 다시는 아들이 그 땅에 가타부타 말하지 못하기 위한 것도 그랬고 일손이 적게 들면서 수익이 괜찮은 게 오디였기 때문이었다. 그 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이었다. 덕만도 그 땅에서 농사를 배웠다. 그런 땅에 아들은 팔고 돈을 은행에 집어넣으면 이자도 안 되는 농사를 짓는다고 퉁을 주었다. 땅을 팔아서 읍내에 작은 가게라도 내고 싶다고 타령을 부르더니 그 땅만 보면 시비를 걸었다. 땅이 동네에 있으니 집터로 값이 제법 나갔다. 요즘 전원주택이다 하여 읍내 사람들이 변두리에 있는 땅을 많이 구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덕만은 그 땅만은 팔 수가 없었다. 땅 판 사람치곤 잘 된 사람을 보지 못 했다. 어디 땅만한 게 있는가. “아버지는 이 오디 농사가 인건비는 고사하고 이자라도 나오는 줄 아시는가배.” “농사를 어디 이윤타산만 보고 짓는다더냐.” “이윤을 따지야지요. 이젠 농사도 기업처럼 경영해야 한다고요.” “그냥 짓는 거여. 이윤 쫒다가 땅 팔고 사업하다 망한 사람 한 둘이 아니다.” “망한 사람보다 서울에서 집 사 놔서 수십 억 번 사람은 아버지는 듣도 보도 못 했소.” “아, 그만 하소.” 아내가 나섰다. 이러다 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뭔 불상사라도 일어나지 싶었던 모양이었다. 덕만은 오디 상자를 두 개씩 들고 마을회관 앞으로 날랐다. 장사꾼이 오디를 가지러 오는 곳이 마을회관 앞이었다. 오디 농사를 처음 시작한 곳이 이 동네라 나이 든 사람들이 오디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러니 작목반을 구성했을 때 어디에 오디를 모아두고 장사꾼을 오게 할 것인가 의견이 분분할 때 마을 이장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동네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사실 수만 많았지 양으로 치면 얼마 안 되었다.)오디 농사를 짓고 또한 나이가 많아 차로 다른 지역으로 운반할 수 없으니 이 동네로 오디를 모두 가지고 와야 한다, 고 했다. 다른 동네서 짓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라 차도 있고 제법 오디 짓는 평수도 넓었다. 차를 가진 젊은이들이 양보를 해서 이 동네 마을회관 앞으로 결정 되었다. 덕만은 오디를 다 옮긴 후 수돗가에 가서 오디 물이 든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저도 갈게요.” 며느리가 뒤를 따라나섰다. “집에 안 가?” “그이가 잠깐 이장 좀 만나고 온대요. 내년 영농자금 대출 좀 알아본다고.” “그 이자 싸다고 영농자금 탐내다가 큰코 다친다. 그게 다 빚이여. 빚.” “저도 알아여. 아빠.” 며느리는 덕만과 팔짱을 끼었다. “아그들 밥은?” “학원 갔다가 오니까 일곱 시 넘어서 올 거예요.” 며느리는 이제 제법 한국말을 또렷이 했다. 큰손자가 중2. 작은손자가 초등학교 6학년이다. 이 며느리가 낳은 막내 손자가 초등3학년이다. 며느리가 들어온 지 벌써 10여 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젠 시골 아낙이 다 된 것 같다. 며느리는 다른 시골 아낙처럼 챙이 큰 모자에 수건을 두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위를 잘 타지 않았고 피부가 그을릴까봐 걱정도 하지 않았다. 챙을 내리면 꼭 외계인처럼 보이는 햇빛 차단용 모자만 썼다. “안즉 나이가 몟 살인데 학원 보내여. 생고생 시키지 말고 맘껏 뛰놀게 해여." 덕만은 나잇살 훈시를 했다. “요샌 걸음마만 배우면 학원 다 보내는 걸요. 그래도 우린 영어 학원은 안 보내잖아요.” 며느리는 또한 애들이 학원에 있다가 와야지 낮에 일을 거들 수 있다는 말을 보탰다. 며느리는 아들 뒤를 따라다니며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했다. 덕만이 생각하기에도 며느리는 똑똑했다. 필리핀에서 대학물까지 먹었다는데 오히려 덕만은 그것이 걸렸다. 마누라는 자고로 서방보다 못 해야 집안이 편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도 처음엔 그것이 걸린다고 했지만 애들이 크자 애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덕만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선생님'이다. 올해 안으로 어떻게 하든 친정에 보내줘야 할낀데. 덕만은 속으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는 5톤 트럭에 하얀 스티로폼 상자가 사람 키 높이보다 더 높게 반 이상이 실려 있고 사람들은 무리지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이런 걸 가져오면 어떡해요. 내 참.” 5톤 트럭 짐칸 위에서 장사꾼이 큰소리로 말했다. 트럭 뒤에는 최영감네 할멈이 어쩔 줄 모르며 장사꾼에게 사정을 했다. 몇 년 전에 최영감이 암으로 죽고 난 뒤 혼자 산다. “담엔 잘 선별해 가꼬 올끼니께 이번만 봐줘요.” 할멈은 애절하게 말했고 “이렇게 무른 것은 사람들이 안 사간다니까요. 저 쪽으로 치워요.” 장사꾼은 트럭 위에서 호령했다. 덕만이 보기에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이다. 객지에 사는 자식들도 넉넉지 않아 할멈이 오디를 팔고 옥수수나 채소 같은 걸 시장에 팔아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다. 한쪽에선 사람들이 모여 성토를 하고 있다. 스티로폼 상자가 모자란다고 했다. 스티로폼상자는 장사꾼이 10여 일 전 일주일치 분량이라며 4000여 개를 마을회관 앞에 갖다 놓은 것인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로 많이 가져가 스치로폼 상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많이 따지 않은 사람도 공짜니까 넉넉하게 12개짜리 한 뭉치를 몇 개씩 더 가져가 스티로폼 상자가 부족하다고 다들 난리였다. “그런 사람은 작목반에서 제명해야 돼.” “전화를 하면 받지도 안 해여.” 몇몇이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했다. “알았어요. 다음 회의 때 제명할게요.” 작목반 회장이 모여든 사람에게 말하곤 장사꾼에게 다가갔다. 한참이나 뭔가를 설명하는가 싶더니 모여든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 오디는 장사꾼도 안 받기로 했어요.” “잘 했어. 어려울수록 잘 협조를 해야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아직 오디를 따지 않는 품종을 가진 사람이 스티로폼 상자 300개를 가져갔다고 했다. 그러니 스티로폼이 모자라 회장이 왜 상자를 그렇게 많이 가져갔느냐. 당신은 지금 따지 않고 나중에 따지 않느냐. 그러니 우선 상자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주고 나중에 상자가 더 도착하면 그때 가져가라, 했더니 처음엔 바쁘다고 갖다 줄 시간이 없다고 했다가 아예 이젠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고 했다. “저 사람이 스티로폼 상자를 많이 갖다 주면 되잖아요.” 며느리가 안타깝다는 듯이 장사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도 살 만큼만 상자를 주문했겠지만 어쨌든 상자 때문에 서로 맘 상하는 건 경우에 맞지 않다. 하지만 서로 꼭 그것 때문이겠냐.” 덕만은 사람들 표정에 서려 있는 악의를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사람들이 진작에 느끼고 있는 것은 스티로폼 상자에 있지 않았다. 상자야 모자라서 아우성을 쳤지만 몇 개씩이라도 장사꾼이 매일 가져와 그러저럭 아쉬운 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상자를 많이 가져간 사람을 성토하면서도 장사꾼과 최씨네 할멈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상황을 곁눈길로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오디가 출하할 때 한 상자에 25,000원, 1kg에 6,250원 하던 오디가 어제부터 한 상자에 20,000원으로 내렸다. 그러니까 1kg에 5,000원으로 수매했다. 오디가 많이 나올수록 가격이 내려가는 데에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가격이 너무 많이 내렸다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거기다 조금이라도 무르거나 붉은 기가 도는 덜 익은 오디도 엄격하게 재단하여 받지 않았다. 그러니 오디를 팔지 못 하고 도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결국 최씨네 할멈은 꾸부정한 허리로 오디 상자를 한 쪽으로 치우고 있었다. 누가 봐도 힘겹게 옮기고 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덕만의 팔을 잡고 있던 며느리가 트럭으로 다가가 상자 두 개를 들더니 마을회관 옆 수돗가에 있는 그늘로 옮겼다. 나머지 두 개도 옮겨놓더니 두 손을 탁탁 털었다. 할멈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기 봐요.” “아. 나도 눈 있어.” “정말 보고만 있을 거요?” 모여든 사람들은 회장을 바라보았다. “너무 무르거나 덜 익은 오디는 저 사람도 팔아먹지 못 한다는데 어떡하겠어요.” 회장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며칠 전까진 다 받아주더니 말이야.” “양이 많이 나오니까 자기도 최상품만 가져가겠다는 것이지.” “젊은 사람이 너무 겁대가리가 없어.” 말은 말을 이은 채 무수히 쏟아졌다. 하지만 트럭 위에서 호령하는 장사꾼에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마을회관이 있는 동네에서 오디 농사를 짓는 노인네들은 그나마 장사꾼과 흥정을 잘 했다. “내일부텀 잘 해 올 테니까 잘 봐줘바여.” “빨갛잖아요. 이러면 안 돼요.” “담부터 잘 선별 할 팅께” 넉살좋은 노인과 장사꾼이 입씨름하는 것을 사람들은 지켜보았다. “그럼 사천오백에 합시다.” 1kg에 500원 깎겠다는 의사였다. “그래여.” 그렇게 거래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끔 젊은 사람들과는 마찰이 일었다. 노인네들은 오디가 적고 젊은이들은 오디가 많기도 했다. kg당 몇 백 원이 100kg가 넘으면 총 금액은 많이 달라졌다. 매일 따는 오디라 가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 후레자식 같은 놈.” 젊은 누군가가 말을 했고. “듣겠네 이 사람아.” 나이 많은 사람이 뒤를 받았다. “순 도둑놈이랑께.” “날강도여.” 저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그렇다고 저 사람이 안 사가면 어쩌겠나.”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사람들은 발밑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담배를 꺼내 물었고 누구는 가래침을 뱉었다. “우리도 걱정인데요.” 며느리가 덕만에게 다가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좀 무른 편이제? 그 정도는 괜찮을 끼다.” 덕만은 속으론 걱정이 되었지만 겉으론 태연한 척 했다. 어제도 좀 무르다고 장사꾼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잘 구슬러 팔지 않았던가. “원래 이래요?” “원래 그래.” 덕만은 쪼그리고 앉으며 말을 받았다. “정말 너무 하네요.” “그려, 너무 하지.” 옆에 앉은 며느리의 말에 덕만은 추렴을 넣었다. “그만 집에 가 봐여.” “파는 거 보고요. 뒤빠꾸하면 어쩌려구요.” “너들 있다고 뒤빠꾸가 뒤빠꾸 안 할 꺼 같으냐?” 덕만은 오히려 며느리가 있는 게 신경 쓰였다. “가져가서 소나 먹여야겠네.” 산모퉁이에 사는 차영감이 덕만의 옆으로 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잘 익었는데.” 멀리서 보기엔 알맞게 거무스름했다. “덜 익었다야. 내 참. 이 정도면 최상품이지.” 잘 익은 오디는 장사꾼에게 팔고 좀 덜 익거나 무른 건 소가 있는 집에서 소에게 주었다. “소가 횡재하겠구만. 그 몸에 좋다는 오디를 소가 다 먹으니.” “소나마 잘 키우면 어디 더 나을 수도 있어.” 덕만은 차영감에게 위로한답시고 말을 했지만 영 개운치가 않았다. 사람 먹는 것을 짐승에게 주다니. “작목반에서 뭔 대책을 안 세우는가?” “오늘 뭔 얘기를 한다는구만.” 차영감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뱃값은 올라가고.” “이 참에 끊어. 오디 따서 담뱃값도 못하려고.”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담배연기가 차영감의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그래도 오디만한 효자가 없는데 말이야.” “그려. 오디 따고 나믄 전지하고 거름 주믄 올해 일은 끝이 아닌가.” 다른 과수에 비해 오디농사가 일손이 많이 안 가 노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초겨울부터 전지하고 거름하고 약 치고 봉지 씌우고 1년 내내 일을 해야 하는 다른 과수에 비하면 오디 딸 때 15일 정도 바쁜 거 외에는 거의 일이 없었다. 오디 따는 시기도 모심기가 끝나고 난 뒤인 6월 초부터다. 오디 나무 가꾸는 거야 노인들이 선수였다. 예전에 뽕나무를 많이 키워봤기 때문이다. 덕만도 아들이 팔라고 통 사정하는 집 옆 밭을 안 팔고 오디 나무를 심은 것도 이 정도면 죽을 때까지 가용으로는 요긴하게 쓰겠다 싶어서이다. 읍내에서 가까운 스무 마지기는 이미 아들에게 넘겨준 지는 오래되었다. 새로 며느리가 들어오고 아들이 마음을 잡자 단단히 단도리를 할 겸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제 딴 생각 품지 말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 일가를 잘 이끌어 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열심히 농사짓던 아들은 자꾸 땅 팔 생각을 한다. 오이 하우스를 크게 지을까 곶감 하우스를 지을까 궁리하는 듯 한데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애들도 크고 학원비도 많이 드는데.” “곧 있으면 애들 대학 갈 낀데.” 곧잘 사투리를 쓰는 며느리도 이젠 한국 사람이 다 되어 교육열이 높았다. 이번 겨울 방학 때는 중2짜리 큰애를 필리핀 친정에 있게 할 작정이란다. “지금 쌀값이 얼만지 알아요?” 덕만이 웬만하면 그대로 논농사를 짓지, 하면 아들은 음성을 높였다. 요 몇 년 사이 쌀값이 폭락했다는 것이다. 농산물 가격이야 오를 때도 있고 내릴 때도 있다고 했더니 아들은 전망이 없다고 했다. 언제 농사꾼이 전망 보고 농살 지었냐. 오를 때가 되면 오르겠지, 했더니. “쌀이 시방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얼만지 알아요? 얼마나 남아돌면 가축 사료로 쓸 계획이라고 해요.” 저런 처죽일놈들. 쌀을.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아무리 그래도 쌀을 가축 사료로? 이 정도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들을 설득시키지 못 할 것 같았다. “북한에 보내야 해요. 저 쪽 사람들 굶어 죽는다잖아요.” 며느리가 전망 있게 얘기했다.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아들이 나름대로 원인을 내놓았다. 아들이 원인 분석했고 며느리가 전망을 내놓았으니 추렴만 넣어주면 될 걸, “그 쌀을 군량미로 쓰면 어쩐다야. 핵무기를 만들면.” 덕만은 기어코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했다. “그러니까 안 돼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도적으로다 굶는 사람은 도와줘야제.” 집을 나서는 아들 내외에게 담배를 물며 겨우 그 말을 했을 뿐이었다. 이제 몇 년 안에 물려준 스무 마지기 논을 팔고 무슨 수작을 꾸밀 것 같은데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게 덕만으로서는 답답했다. 쌀이 남아돌아 사료로 쓴다는데 쌀농사를 계속 지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몇 억이 드는 곶감 농장이나 하우스 시설을 하라고 하기엔 돈이 없었고 대출을 내어 짓는다 해도 매년 대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것도 크게 없을 듯 싶었다. 그러다 망하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이 하우스나 곶감 농장을 많은 빚을 내어 하다가 망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으면 망한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대로 하잖 말이요?” 덕만은 생각에 잠겼다가 큰소리에 깜짝 놀랐다. 장사꾼에게 오디를 파는 사람들은 주로 노인네들이었고 젊은이들과 오디를 다 판 사람들이 살구나무 그늘 아래 모여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잖으면 어쩌잔 말이여?” 두 사람 다 답답하다는 듯 음성을 높였다. “내 말은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잔 말이여.” “어떻게? 모두들 팔지 말자는 말이여?” “그래야지요. 모두 다 팔지 말아 봐요. 장사꾼 저도 뭐로 장사할거여?” “그 뒤론?” “가격이랑 까다롭게 선별하는 거 흥정을 해야지요.” “맞아요. 그렇게라도 해야지” “맞아.” 몇몇 사람들이 동의를 했다. 하지만 반대편도 지지 않았다. “그럼 저 사람이 오디를 안사겠다면?” “안 살 리가 있어요? 여기만 많이 나오는데.” “그럴 수도 있잖아. 만약 안 사믄? 이 많은 모든 오디 다 버리자고?” 사람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오디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대로 참고 그냥 팔자는 쪽이고 젊은 사람들과 오디가 적은 사람들은 하루 이틀 오디를 못 파는 한이 있더라도 장사꾼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가격이 좀 내려간다고 해도 다른 작물에 비해 일손이 적게 들어 괜찮은 편이었다. 오디 농사를 몇 천 평 짓는 사람들은 올해는 그냥 넘어가고 내년에 어떻게 해 보자고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한 사람에게만 팔믄 안 된다고 얼매나 그랬어? 그런데 회장단에선 내 말을 무시하더니만.” 이젠 작목반의 집행부에게로 화살이 돌아갔다. “판로를 여러 군데로 해 놔야지 장사꾼도 지 멋대로 못 한다카께.” 년 초에 작목반 총회를 하면서 지금의 장사꾼에게 팔겠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회장단에서 묵살했다. 이제 와서 장사꾼을 찾지도 못 할 뿐더러 찾는다 해도 이미 다른 지역에서 사고 있어 가격 흥정에 약점이 있었다. 덕만은 사람들 틈에 끼여 있는 아들을 보았다. 이 녀석이 여기는 왜 왔냐. 볼일 다 봤으면 집으로 곧장 가든지. 여긴 왜 왔냐. 그는 불만스럽게 아들을 노려보았다. 아들은 작목반원이 아니라 그런지 묵묵히 있었다. 다행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이럴 때 다수의 결정에 따라가는 게 상책이었다. 장사꾼도 눈치를 챘는지 이미 많이 너그러워져 있었다. 가재 눈을 뜨고 회의를 하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오디를 사던 장사꾼은 말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젠 됐다 고마 해라. 덕만은 이쯤에서 회의를 끝내기를 바랐다. 장사꾼도 이 정도면 이쪽의 뜻을 이해했으리라 믿었다. 최상품으로만 가져가고 싶은 게 장사꾼의 심정 아니겠는가. 그 또한 나무랄 일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은 돌아가 오디가 실린 자신의 차 꽁무니를 장사꾼 차에 붙이고 오디를 팔았고 아직 팔지 않은 사람들도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집으로 돌아갔다. 살구나무 아래 그늘엔 회장단을 비롯해 몇몇의 젊은이들만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덕만이 오디 상자를 실을 차례가 오자 아들이 먼저 알고 다가왔다. “왜 집으로 가지.” “이것만 실어주고요.” “아직 이 팔다리 쓸만 해.” “나중에 약값이 더 들어요.” “일 안해도 약은 먹어야 혀.” “저리로 가소.” 아들은 오디 상자를 들고 차로 날랐다. 덕만은 뒤로 나앉았다. 막상 뒤로 나 앉고 보니 그리 싫지는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하던 일이 하나둘 아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려. 이제 니들의 세상이여. 덕만은 길 옆 담벼락 그늘에 앉았다. 며느리가 아들이 오디 상자를 장사꾼 트럭으로 옮기고 있는 것을 도우러 갔다 왔다. 트럭에는 상자가 거의 다 실어갔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몇 되지 않았다. “결론 난 게 뭐 있다야?” 덕만은 며느리에게 물었다. 뭘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결론난 게 뭐 있겠어요.”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제도 그렇고 아레께도 그렇고 맨날 회의해도 뾰쪽한 수가 없다.” “오디 많은 사람들이 좀 나서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하루 이틀만 빠져도 손해가 막심하다.” “그래도 장사꾼이 그런 사람을 제일 무서워하는데요.” 며느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덕만은 그런 며느리가 맘에 들면서도 불안했다. 농사꾼은 너무 많이 생각해도 안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쟈가 왜 저런다야?” 덕만은 눈을 훼둥그레 떴다. 며느리와 얘기하며 눈길은 아들에게 두고 있었는데 아들은 장사꾼과 싸우고 있었다. 처음 몇 상자는 잘 싣더니 장사꾼이 몇 개를 옆으로 밀쳐놓았다. 바닥에 있는 상자는 몇 되지 않았다. 밀쳐놓은 게 어림잡아도 다섯 상자는 되는 듯 했다. 아들은 장사꾼에게 따지는 듯 했다. “저걸 어째.” 며느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좀 가야겠다.” 덕만은 아들보다는 자신이 직접 가서 얘기하는 게 나을 듯 했다. 어제도 두 상자를 얘기 잘 하여 kg당 500원 적은 가격으로 팔았다. “좀 기다려 봐요.” 일어서는 덕만의 팔을 며느리가 잡았다. 아녀 가서 내가 얘기해야 혀, 하고 덕만이 일어서려는 찰나, 아들은 오디 상자를 내동댕이쳤다. 어. 주위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저 놈이.” 덕만은 어이가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때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딴 건데 이게 무르면.” 아들은 장사꾼을 노려보았다. “이것 봐요. 무르잖아요.” “이 정도는 다 물려. 그 위에 있는 거 내려 봐. 한번 비교해 보란 말이야.” “함 보세요.” 장사꾼도 트럭 위에서 지지 않고 맞고함 쳤다. “씨발, 오디 안 팔아.” 아들은 장사꾼이 밀쳐놓았던 상자 또 하나를 내동댕이쳤다. 사람들이 트럭 주위에 모여들었다. “저, 저런 놈이.” 덕만은 팔을 부르르 떨었다. 곧장 아들에게 달려들 기세인데 며느리가 덕만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아이고 저러다 오디 다 박살내겠다. 저 놈이 미쳤지.” “잠깐만 기다려 봐요.” 며느리는 덕만의 허리를 잡았다. “네가 가서 좀 말리든지.” 며느리도 뚜렷한 판단이 서지 않는지 덕만의 허리춤만 잡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괜찮은데 뭘.” “이 정도도 안 받어?” “너무 하구만.” “어, 씨발.” 모여든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고 누구는 욕을 내뱉었다. “내꺼 빨리 내려. 씨발.” 아들은 장사꾼을 보며 악을 썼고 장사꾼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정도도 안 받으면 어떡해요?” 회장이 나섰다.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않나요?” 총무가 거들었다. “왜 안 받는 줄 알아?” 아들은 잡혀 있는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트럭을 봐. 다 찼잖아. 그러니까 이젠 아주 최상품만 가져가겠다는 심보 아냐.” 아들은 트럭의 짐칸을 가리켰다. 짐칸에는 빈자리가 없고 뒷자리가 조금 낮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남은 오디 중에 좋은 것만 가져갈라고. 우리 농사꾼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에이…….” 아들은 또다시 밀쳐놓았던 오디 상자를 집어 들었고 사람들은 팔을 잡았다. “아조 박살을 내라, 내.” 덕만은 어찌할 줄 몰라 며느리에게 허리춤을 잡힌 채 악을 썼다. 아들은 마을회관 뒤로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정말 그러요? 회장이 나섰다. 모여든 사람들은 일제히 장사꾼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고.……” 장사꾼은 난감하다는 듯 아직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오디를 훑어보았다. “그게 아니믄.” “그럼 안 되지.” “오디 많이 나왔다꼬 또 값 내릴라고 그러는 거 아니여?”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말을 했다. 덕만은 며느리의 팔을 뿌리치고 트럭 가까이 다가왔다. 며느리가 옆에 섰다. “그거 내려놓으라고.” 덕만은 턱으로 트럭 위에 올려져 있는 팔린 오디를 가리켰다. “예?” 장사꾼은 덕만을 바라보았고 “안 판다니께. 내 꺼 다 내려놔!” 덕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며느리가 울상을 지었다. 그때 회장이 장사꾼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장사꾼은 한참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럼 다 살게요. 대신 담부턴 좀 좋은 것만 잘 선별해서 가져오셔요.” “이만하면 최상품이여.” 덕만은 호기롭게 말했다. 그럼. 최상품 중에서도 최상품이지. 주위 사람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자 실어요.” 회장이 덕만을 밀어내고 남은 오디를 다 실었다. 장사꾼이 밀쳐놓은 상자까지 트럭에 쌓았다. 장사꾼이 돈주머니에서 돈을 내어 세었다. “사십만 원이요.” 덕만은 돈을 받았다. “버린 두 상자 값은 안 줘?” “맞아 줘야지.” 사람들은 장사꾼에게 독촉했다. “이 사람들아 뭔 소리여. 그건 경우가 아니여.” 덕만은 큰소리로 말했다. 아들이 다가왔다. 덕만은 아들과 며느리를 살구나무 아래로 끌었다. "너 성질 좀 죽여라. 이놈아.” “어떻게 그래요. 눈 뻔히 뜨고 당할 판인데.” “그래도 먹는 거 갖고 그러는 게 아니여.” “그래도 아버지가 주운 거는 하나도 손 안 됐어요.” “오디에 이름 붙어 났던?” “보믄 알아요.” 아들은 꼬박꼬박 대꾸했다. “저도 아빠가 주운 거 아니라믄 엎고 싶었어요.” 며느리가 말했다. 기가 막혔다. 이것들이 아주 썅으로 놀고 있구나 싶었다. “남자가 그러더라도 여자는 그러면 안 되제.” 덕만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체면 살린다 싶어 그만 마무리 하였다. “자 받어.” 며느리에게 오디 판 돈을 내 밀었다. “이걸 왜요?” 며느리가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거 사 먹어.” “됐어요.” 아들이 말했다. “너 주는 거 아니여. 우리 며느리 주는 거여. 어른이 주믄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여.” “고맙습니다. 아빠.” 며느리는 낼름 받았다. “허허.” 덕만은 웃음을 지었다. 며느리의 얼굴을 보니 꽃 피고 바람 부는 날이었다.  
88 상상을 통한 시적 진실 드러내기와 감추기 / 권형하 file
편집자
3274 2011-01-01
상상을 통한 시적 진실 드러내기와 감추기 / 권형하 문학이 삶의 표현을 통하여 내밀한 감동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허구이다. 시도 시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치밀하게 재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시적 허구이다. 환언한다면 시인은 삶 속에서 유추된 세계를 통해 또 다른 진실을 만들어내어 치밀하게 재구성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시는 시적 진실을 전해주는 양식이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재의 삶 속에서 유추된 세계를 통하여 또 다른 진실한 삶의 방법이나 생의 해법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시인이 만들어낸 시적 진실은 어떤 역사적 사실이거나 현실적인 일들보다 생동감 있는 진실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근간에 읽은 김영남의 시 ⌜적요한 풍경⌟은 이러한 시적 진실을 드러내기에 값하는 작품으로 읽었다. 김영남 시인의 등단 작품인 ⌜정동진 역⌟(1997년 세계일보 당선작) 후반부에서는,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 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 을 다는/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 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 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라고 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시를 쓰는 시인은 화자를 통해서 말해야지 시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시인이 시 속으로 뛰어든다면 시는 있었던 사실만을 그리는 것만 되었지, 삶의 진실이거나 생의 가치들이 시적 장치를 통해서 융숭하게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김영남의 시 ⌜적요한 풍경⌟은 시적 화자를 통해서 상상력을 증폭시켜 나가고 시상을 확대해서 개진해 나가고 있다. 그러면 김영남의 시 ⌜적요한 풍경⌟을 통해 고적한 산촌 풍경을 시적 상상력으로 배가시킨 작품을 읽어보자. 적요한 풍경 / 김영남 이런 곳에서 이조백자 하나를 만난 것은 순전히 행운이다. 백자에는 한옥 다섯 채와 허물어진 돌담길, 팽나무 한 그루를 동네 한가운데 앉혔다. 마을 앞개울도 한옥 뒤란의 대숲을 통째로 빼앗아 흐른다. 그리도 그 집들은 그걸 돌려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싸운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는 평화, 개울물도 저희들끼리 부딪치고 엉켜 싸울지라도 넘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 아랫마을로 향한다. 갑자기 장끼 한 마리가 논두렁 위로 날아간다. 백자가 파삭 깨져버린다. 깨지는 순간은 언제나 처연하다. 아니 찬연하다. 누구의 눈부셨던 시절로 나타나 어리둥절해 한다. 그런 풍경을 다독거리기나 하려는 듯 남정네와 아낙이 소를 몰고 느릿느릿 간다. 깨진 백자도 황소 울음소리에 아물어 한 번 깊어진다. 위 시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한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실린 작품이다. ⌜적요한 풍경⌟은 전체가 6연 줄시로 되어 있고 각 연마다 관념적인 풍경들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하여 화자의 정서가 증폭되고 있다. <이조백자>로 환유된 시적 대상은 ‘푸른 하늘’의 비유이다. 그리고 <깨진 푸른 하늘>이 다시 아물어 붙는 것은, 다시 찾아낸 정신적 세계가 완성되는 심도 깊은 시적 경지를 보여준다. 1연에서 3연까지가 풍경의 외면이라면 4연에서 6연까지는 풍경의 배면(背面)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풍경의 외면을 통해서 화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정신적 경지인 내면을 ‘하늘’로 나타내고 있다. 즉 ‘깨진 백자가 황소 울음소리에 한 번 아물어 간다’ 것은 외물을 통한 내면화하여 시적 경지를 잘 드러낸 표현이다. 그러므로 김영남의 시 ⌜적요한 풍경⌟은 고적한 산골 풍경만을 그린 시가 아니다. 외려 시적 상상력을 확장해 나가고, 적용하여, 자칫 관념적 풍경을 구체적인 이미지 제시로 정서가 내면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시적 장치로는 1-3연이 시적 드러내기라면, 4-6연은 시적 감추기로 잘 조화된 작품이다.  
87 무관심/이상훈 file
편집자
4111 2011-01-01
11.1월 8호 수필 무관심 이 상 훈 "혜정이 너는 뭐가 제일 무서워?" "귀신이 제일 무서워요." "안나 너는 뭐가 제일 무서워?" "돈이요." "갑승이는?" "사람요." "그래? 세미는?" "아빠요." "현진이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요." "나한테 한번 물어봐 줄래?" "선생님은 뭐가 제일 무서운데요?" 마치 합창하듯이 물었다. "무관심." 아이들이 조용했다.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렴. 얼마나 무서울까? 차라리 나를 미워하거나 때려주기라도 하면 그것은 어떻든 관심이거든. 하지만 오든 말든, 있든 없든 관심이 없을 때 그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내가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그렇게 취급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사실 너무 힘들게 하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속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하지 못했다. 계속 속을 썩이는 아이들에게는 부모도 '두 손 들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겠는가?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오래간만에 청소구역을 바꾸어 본다. 교실 청소를 하는 아이들이 제일 고생이 심하다. 어떻게든 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유리창을 맡거나 복도, 거울 등을 맡아서 거의 청소를 하지 않고 놀았던 아이들에게 이제 청소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존에 하던 곳을 다시 하지 않도록 하고, 화장실 청소도 따로 맡겼다. 화영이와 예슬이가 기꺼이 화장실 청소를 하겠다고 나섰다. 둘이 친하니까 서로 협조하면서 할 것이다. 그 동안 복도 청소를 다혜와 함께 맡으면서 거의 청소를 하지 않다시피 한 예슬이가 화장실 청소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화장실 담당 선생님이신 장선생님이 워낙 깔끔하게 일을 하시는 분이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칠판도 두 명을 배정하여 항상 깨끗한 칠판을 유지하도록 했고, 특별실 청소도 다 바꾸었다. 여기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배정을 하고, 창문은 그 동안 말없이 묵묵히 교실 청소를 해온 아이들에게 내가 임의대로 배정했다. 또 그럭저럭 청소 시간을 때우려고 마음을 먹었던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도 창문을 하나 맡았다. 교실 청소에는 평소에 청소를 잘 하지 않던 아이들을 모두 배치했다. 교실 청소에 배정된 혜정이는 착한 경진이가 그 동안 교실 청소를 혼자 다 했다면서 자기가 평소에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다. 나머지 아이들이 그 만큼 평소에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드디어 청소 시간이 되었다. 나는 내가 맡은 유리창을 환하게 닦았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모두들 "선생님이 유리창을 닦으시네요. 와 깨끗하다."하면서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지나간다. 교실을 얼핏 들여다보았더니 혜정이가 경진이와 함께 땀을 흘리며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빠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세미도 다혜도, 윤희도 열심히 돕고 있었다. 자기에게 일이 주어지면 할 수 있는 아이들이고 하는 아이들이다. 역시 무관심할 수 없는 아이들이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이야기다. 그때 청소를 하던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작년부터 교단에 서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때 청소를 하지 않던 그 아이가 지금은 청소를 시키는 교사로 서서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하고 있을까? 참 궁금하다. 요즘은 담임들이 하나같이 청소구역을 지정해 준다. 교실도 더 세분화하여 복도 쪽 책상은 누가 누가 담당하고, 운동장 쪽 책상은 누가 누가 담당하고, 가운데는 누가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다시 그 아이들 가운데 빗자루질은 누가 할 것이며, 걸레질은 누가하고, 책상 옮기는 일은 누가 하라는 식으로 더욱더 세분화하여 지정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할 줄을 모른다. 자기가 맡은 것만 한다. 혹시 어떤 아이가 화장실이 급하여 책상을 옮기지 못하고 있으면 아무도 책상을 옮기지 않는다. 빗자루를 담당한 아이는 빗자루만 들고 서 있다. “너는 왜 청소를 안 하고 서 있어?” “책상을 안 옮겨 줘요.” “네가 좀 옮기면 안 돼?” “저는 빗자루 담당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이가 없다. 요즘 아이들은 남의 일을 도와 가며 할 줄을 모른다. 자기가 맡은 일도 잘 하지 않지만, 자기가 맡지 않은 일은 막무가내다. 한 동안 내가 함께 청소를 하면 할 수 없다는 듯 옆에서 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있든 없든 도망가는 아이들은 도망을 가고 하는 아이들만 한다. 언제부턴가 그런 아이들에게 차츰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저희들끼리 어떻게든 청소를 하고 난 후에 종례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떻게든 청소를 했다. 물론 열심히 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있지만 자기들끼리 조정을 해가면서 하는 것을 보면서 가끔은 무관심한 것이 아이들에게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가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관심이 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지나칠 정도로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부모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아이들을 양산하고 있다. 청소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 자기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적다. 학교의 주입식 교육으로 아이들은 입만 벌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학원은 더욱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학교에서 예닐곱 시간, 학원에서 서너 시간, 합치면 하루에 평균 열 시간 정도를 그렇게 보낸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시간을 다 빼앗겨버린 아이들은 이제 스스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조금 무관심해져야 한다. 스스로 하는 것을 천천히 지켜볼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하다. 학교는 학교 대로 무관심을 배워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어쩌면 지식을 머리에 넣는 일보다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강한 아이가 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86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이 약속 외1편/임술랑 file
편집자
4259 2011-01-01
11.1월 8호 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이 약속 임술랑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 맘에 딱 맞는 맵시로 웃으면서 다가오는 아름다움은 분명 그 옛날 어디에 약속해 둔 기다림 이었던가 처음 볼 때부터 당신을 알아보게 되는 그 신통력 아름다움으로 약속하여 둔 기다림이여 그대 그 아름다운 모습에 이끌리는 것은 그 옛날 표시해 둔 그 시절의 약속을 지키는 것인가 가슴 속 흙 흙 한 사발 흙 한 바가지 흙 한 바케스 담으며 내 가슴에 아직도 캄캄한 원형질을 퍼 낸다 그대가 사람으로 태어나 아름다울 때 아직도 그 무엇이 되지 못한 흙, 흙 내 가슴 가득한 벌판 바람 앞에서 포크레인 작업 뒤 내가 흙일을 하고 있다 진흙으로 덕덕 신발에 덜어 붙는 地心에서 온 그 무엇 무거운 어둠이여!  
85 無題 외 1편/오형근 file
편집자
4505 2011-01-01
11.1월 8호 시 無題 외 1편 오형근 잘,밀봉되어있어서난살아갈수있네내안의험악한생각들나도놀라고마는끔찍한상념들이겉으로는나타나지않아남들은눈치채지못하네그것들터져나오기만하면나는으 으으, 악! 나는늘감사하고있네 자면서도 태아처럼 꼬부린 채 잠의 꼬리를 잡고 흔들거리면서, 살아야겠다살아야겠다살아야한다살아야겠다나는난살아야한다…… 주문처럼 되뇌면서도 자신의 몸통을 애증의 혀로 닦았다 하늘로 오르는 동아줄 붙들 듯 자신의 이름도 불렀고, ------------------------------------------------------------- 오형근 1988년 『불교문학』, 2004년『불교문예』신인상 수상.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와 『환한 빈자리』가 있다.  
84 나여경- 불온한 식탁
누미
4912 2010-12-26
내가 좋아하는 소설 불법 도박장, 사기 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 사무실, 주방장과 서빙이 툭하면 눈과 배가 맞아 사고를 치는 식당주인, 개 교배 전문가의 세계, 바텐더를 하는 여성... 하나같이 보통이 넘는, 혹은 보통이 못되는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집 '불온한 식탁'을 낸 사람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부산작가회의와 부산소설가협회 모임에서 함께 어울린) 나여경 작가다. 나여경 작가,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게 소처럼 끔벅거리는 크고 예쁜 눈. 누가 봐도 그 미모에 입을 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나여경 작가의 소설적 자장이 어떤 색깔일까, 살짝 궁금했던 건 내가 나작가처럼 예쁜 여자로 살아보지 못한 때문이다. 이거 농담이 아니다. 으~쨌든, 단편 몇 편을 뜨문뜨문 읽으며 간만 봤던 그녀의 소설세계를 지대로, 통째로 맛봐주겠다는 불온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었더랬다. 빈약한 체력으로 격무에 시달려 12시 되기 전에 잠에 빠져드는 게 요즘 내 라이프스타일인데. 책을 펼쳐든 이날 나는 7편의 소설을 다 읽어치웠다. 더미의 변명, 금요일의 썸머타임, 돈크라이, 태풍을 기르는 방법, 정오의 붉은 꽃, 쥐의 성(成), 즐거운 인생까지 읽고나니, 새벽 3시. 놀랐다기보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이 예쁜 여자가! 예뻐도 예쁜척 안하고 일희일비 하지 않는 덤덤한 성격에 주변을 두루 살피는 성정까지 갖춘 이 참한 여성작가가 우째 이리 어두운 시공간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더란 말인가! 하는 경외감과 의구심과 약간의 배신감이 밀려왔다. 부러움 내지 질투심은 물론이고... 아무튼. 내게는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이 낯설다. 새로워서 낯선 게 아니라-뉴스나 영화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게 이런 인물들이니까- 이 인물들이 사는 방식이 낯설고, 이들이 취하는 태도, 이들이 속해있는 공간의 분위기, 리듬, 감성이 낯설다. 불온하다기보다는 불안한 이들의 일상이 낯설다. 불안한 삶, 불안한 시간을 사는 인물들은 원래 그 존재 자체가 낯선 법이다. 낯설어서 멀찌감치 떨어져 무관심한 예의로 외면했던 인물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여경 작가의 손에서 반죽이 되어 내 앞의 '불온한 식탁'에 올라왔고, 덕분에 작가를 아는 독자의 행운으로 나는 불온한 독서를 했다. 솔직히 인정할 밖에 없어 하는 말인데, 나여경 작가, 대단하오! 그리고 축하하오! 식탁을 맛나게 비우고 내놓는 점수는 별 네 개 반. 다섯 개 다 주기에는 내가 좀 예쁜여자한테는 박한 편이라 ㅎㅎ 아참, 게다가 이 특이한 소설속 인물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이 박진감 넘치는 표현이라니! 곰이 뜬 건 그때였다. 멀리서 헤드라이트 빛이 보였다. 곰이다, 외치는 함성과 급히 뛰는 구둣발 소리, 냄새를 맡은 우리 애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나는 집 뒤로 달렸다. 예상대로 비상문이 열리고 범털 형님이 호위를 받으며 뛰어나왔다. 우선 범털 형님을 차에 태워 보낸 후 다른 보살들을 위해 비상문을 열었다. 이미 마당으로 진입한 두 명의 곰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자 순간 멈칫하던 한 명의 곰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급히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발을 올려 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짧은 신음과 함께 중심을 잃은 곰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뛰려는 내 등으로 불구덩이 쏟아진 듯 통증이 느껴졌다. 곰이 내 등을 향해 내려친 각목이 반 토막 나며 멀리 튀어 달아났다. 몸을 낮췄다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곰의 복부를 구둣발로 찍었으나 헛발질이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내게 곰이 다가왔다. 급한 대로 돌을 주워 던졌다. 이마를 움켜진 곰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보였다. -「더미의 변명」에서  
83 나는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을 뿐이에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주진
5805 2010-12-22
내가 좋아하는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한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이다. 단지 전화를 걸려고 했던 작은 행위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진행되고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틀어져 버리는 이야기다. 황당한 이런 경우들은 현실에서도 왕왕 일어나곤 한다. 보상받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이. 나는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을 뿐이에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마리에 데 라 루스 세르반떼스는 홀로 렌터카를 운전하면서 바르셀로나 쪽으로 여행을 하는 도중 모네그로스 사막에서 자동차가 고장나 낭패를 당했다. 그녀는 예쁘고 착한 스물일곱 살의 멕시코 여인이었는데, 몇 해 전만 해도 여러 배역을 맡아 활동하여 여배우로서 제법 이름이 나 있었다. 그녀는 사라고사에 사는 친척들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그 날 만나기로 했던 살롱 마술사와는 결혼을 한 사이였다. 폭풍우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과 화물 트럭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절망적인 신호를 1시간가량 한 끝에, 다 낡은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그녀를 동정하였다. 그는 멀리 가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관계없어요” 마리아가 말했다. “전화가 있는 곳까지만 가면 돼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저녁 7시 전에는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남편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것만이 필요했다. 그녀가 입은 학생용 외투와 4월의 해변에서 신는 구두가 빗물에 젖어 그녀는 물에 빠진 새끼 새처럼 보였는데, 여러 가지 난감한 일로 자동차 열쇠를 그대로 놓아 둔 채 버스를 탔다. 운전사와 함께 여행을 하는, 군인의 모습을 하였지만 다정한 느낌이 드는 한 여자가 그녀에게 수건과 담배를 건네주며 자신의 옆에 자리를 내주었다. 마리아는 스타킹을 말리고 난 후, 자리에 앉아 담요를 뒤집어썼다. 담뱃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성냥이 젖어 있었다. 옆에 앉은 여인이 불을 주며 몇 개비 남지 않은, 젖지 않은, 담배 한 대를 빌려 달라고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마리아는 사정없이 나오는 구역질에 굴복했다. 마리아의 목소리는 빗소리와 버스의 요란한 엔진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그 여인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그녀를 제지했다. “사람들이 잠들어 있어요.” 여인은 중얼거렸다. 마리아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버스에는 자신의 것과 같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잠이 든 나이를 알 수 없는 서로 다른 신분의 여인들로 차 있었다. 마리아는 그녀들의 온화함에 물들어 자리에 타래를 틀어 감고 앉아서 빗소리에 몸을 맡겼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밤이었고, 소나기는 차가운 밤이슬로 녹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잠을 잤는지, 어느 곳에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 경계하는 행동을 취했다. “어디쯤에 있지요?” 마리아가 물었다. “도착했습니다” 여인이 대답했다. 버스는 거대한 나무 숲 속에 둘러싸여 오래 된 사원 같은 생각이 드는 커다랗고 음침한 건물의 돌이 박힌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원에 켜진 가로등으로 겨우 비추어진 여인들은 군인 모습을 한 여인이 유치원에서 하는 것처럼 단순한 명령체로 내리라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여인들은 전부 성인이었고, 그녀들은 꿈속에서 보는 형상같이 생각되게 하는 정원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내린 마리아는 그녀들이 수녀라고 생각했다. 버스 문 앞에서 그녀들을 맞이하는 제복을 입은 여러 여자들을 보았을 때 그러한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제복의 여인은 비에 젖지 않게 모포로 머리를 덮어썼고, 율동적이고 단호하게 박수를 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들을 지휘하면서 대열을 지어 세웠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여인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마리아는 모포를 되돌려 주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정원을 건널 때까지 덮어쓰고 있다가 그것을 경비실에 돌려주라고 말했다. “전화가 있을까요?” 마리아가 물어 보았다. “물론이죠” 여자가 말했다. “그 쪽에서 말해 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했다. 그녀는 몇 개비 남아 있지 않은 젖은 담뱃갑을 주었다. “가는 도중에 마를 것입니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버스 발 디딤판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고, 큰 소리를 질렀다. “행운이 있길.” 버스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마리아는 건물 입구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떤 감시하는 여자가 손뼉을 강하게 치며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다급한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멈춰 서!” 마리아는 담요 밑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길과 대열을 가리키는 항의가 불가능한 집게손가락을 보았다. 그 지시에 따랐다. 그녀는 건물의 현관에 도착하자 대열에서 이탈하여 전화가 어디에 있느냐고 수위에게 물어보았다. 감시하는 여자들 중 하나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대열에 돌아가게 했다. “이 쪽이에요, 아름다운 아가씨, 이 쪽에 전화가 있어요.”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어두운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감시하는 여인들이 모포를 거두어들이고 침대 배정을 시작한,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리아에게는 더 인간적이고 계급이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다른 한 여인이 방금 도착한 여인들의 조끼에 꿰맨 명찰에 쓰여 있는 이름과 리스트를 비교하면서 대열을 돌았다. 마리아 앞에 섰을 때 그녀의 이름이 있지 않은 것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나는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습니다.” 마리아가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의 자동차가 도로에서 고장이 났다고 급하게 덧붙여 설명했다. 파티장의 마술사인 남편은 자정까지 예약된 세 군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므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동행할 수 없을 거라고 그에게 연락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7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10분 쯤 뒤에는 집에서 나갈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지연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될까 봐 두려워했다. 감시원은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물었다. 마리아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름을 댔다. 그러나 여인은 여러 번 리스트를 훑어보았지만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다. 놀라서 다른 감시원에게 물었다. 그녀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나는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습니다.” 마리아가 말했다. “알았소, 아름다운 아가씨.”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상냥스럽게 그녀의 침대 쪽으로 데려가면서 감시원이 말했다. “행동을 잘하면 원하는 사람과 전화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되고 내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왜 버스의 여자들이 수족관 속에 있는 것처럼 움직였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마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들은 진정제를 맞아 가라앉아 있었다. 석조로 된 두꺼운 담장과 차가운 계단의 어둠에 묻힌 그 궁전은 사실 정신 병동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침실에서 뛰쳐 도망갔다. 현관 안쪽 문에 도달하기도 전에 기계공의 폭넓은 바지를 입은 덩치 큰 여자 감시원이 손아귀로 그녀를 잡아 익숙한 동작으로 땅바닥에 눌러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마리아는 공포로 무기력해져서 비스듬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신의 사랑으로” 그녀는 말했다. “죽은 내 어머니를 걸고 맹세하는데, 나는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을 뿐이에요.” 대단한 힘 때문에 여자 헤라클레스라고 불리는 폭넓은 바지를 입은 저 악마에 홀린 여자 앞에서 가능한 탄원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다루기 어려운 환자들은 담당했다. 감금당한 두 여자가 그녀의 부주의로 인해 북극곰 같은 팔에 의해 교살되어 죽었다. 첫 번째 경우는 사고로 확인되어 처리되었다. 두 번째 경우는 불확실했다. 그리고 여자 헤라클레스는 다음 번에는 본격적으로 조사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와 훈계를 받았다. 훌륭한 가문의 가족으로부터 길을 잃은 저 양은 스페인의 여러 정신 병원에서 의심스런 사고를 일으킨 수상쩍은 경력을 가졌다는 풍문이 있었다. 첫날 밤, 마리아를 잠재우기 위해서 그녀들은 수면제 주사를 놓아야만 했다. 동이 트기 전, 담배를 피우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그녀를 잠에서 깨웠을 때 보니 침대 모서리에 자신의 손목과 발목이 묶여 있었다. 그녀의 고함 소리에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남편이 바르셀로나로 들어오는 모든 고속도로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는 동안, 그들은 그녀를 의무실로 데려가야만 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의 늪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혼자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사랑의 천국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 맞은편에는 걸음걸이에 평발기가 있고 진정시키는 듯한 미소가 인상적인 몹시 훌륭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장점으로 그녀에게 산다는 것의 행복을 돌려주었다. 그는 요양소 원장이었다. 어떤 말도 하기 전에, 인사조차 하지 않고 마리아는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했다. 그는 담뱃불을 붙여 주었고, 얼마 빼 피우지 않은 담뱃갑을 주었다. 마리아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원하신다면 실컷 우세요.” 졸린 듯한 목소리로 의사가 말했다. “눈물만큼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마리아는 우연히 만난 애인들과 사랑을 나눈 이후에 시간을 때울 때와는 달리 조심성 없이 감정을 털어놓았다.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는 동안 의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편히 숨을 쉬도록 베개를 고쳐 베어 주었으며 그녀가 한 번도 꿈꾸지 못한 지식과 부드러움으로 그녀를 불확실한 미로로 안내했다. 그것은 그녀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함께 잔다는 보상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모든 정성을 들여 자신의 말을 들어 주는 한 남자의 양해에 의한 기적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완전하게 평온을 되찾은 상태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허가를 해 달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의사는 자신의 지위에 맞는 모든 위엄을 부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안 됩니다, 여왕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부드럽게 손으로 뺨을 때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이 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는 문에 서서 주교의 축복을 내렸고, 영원히 사라졌다. “나를 믿으세요.” 그녀에게 말했다. 그 날 오후 마리아는 자신의 출신 성분의 수수께끼와 신분에 대한 의문점들을 적은 피상적인 기록과 함께 일련번호로 보호소에 등록이 되었다. 맨 가장자리에는 원장이 직접 쓴 소견서가 있었다. 불안정. 마리아가 예견했던 것처럼, 남편은 오르따 거리에 있는 서민 아파트에서 세 군데의 약속을 지키기에는 30분 정도 늦은 시간에 나왔다. 의견이 아주 잘 맞았던 거의 2년 동안의 동거 생활을 하면서 제 시간에 그녀가 도착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지연을 주말에 그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억수같이 내렸던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집을 나서기 전 자신의 저녁 스케줄을 적은 메모를 문에 꽂아 놓았다. 캥거루 가면을 쓴 아이들과 함께 한 첫 번째 파티에서, 그녀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숨은 물고기들을 찾는 카드놀이를 취소했다. 두 번째 약속은 휠체어를 타는 아흔 세 살 먹은 노파 집에서 있었는데, 그녀는 최근 30년 동안 해마다 서로 다른 마술로 생일을 축하했다고 의기양양해 했다. 세 번째 약속은 람블라드 거리에 있는 음악 커피 숍에서 밤새도록 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마술을 믿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 그룹의 프랑스 관광객들을 위하여 숨을 죽이고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그는 번번이 집에 전화를 걸었고, 마리아가 전화를 받을 거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면서 그는 이미 무언인가 잘못된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공연을 하기 위해 개조한 소형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빠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에 있는 빨메라 가로수에서 봄의 광채를 보았고, 마리아가 없는 도시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그를 전율케 했다. 문에 붙어 있는 자신의 메모가 그대로인 것을 발견했을 때 마지막 희망이 무너져 버렸다. 그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주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아주 당황해 했다. 그녀는 바르셀로나에서 통용되는 남편의 직업적인 이름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엎드려서 이름만을 썼다. 마술가 사뚜르노. 그는 괴팍하고 사교성이 전혀 없는 구제할 수 없는 남자였으나, 그녀는 그에게 부족한 사근사근한 유머를 갖고 있었다. 자기 여자에 대해 물어보려고 자정 이후에 아무도 전화를 걸 생각을 하지 않는 이 커다란 비밀 모임에 손을 잡고 그를 데려온 사람은 그녀였다. 사뚜르노는 방금 도착하여 그 곳에 연락을 취해 보았고 그러한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 날 저녁 사라고사에 전화를 했는데, 반쯤 잠에 취한 할머니가 마리아가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며 놀라지도 않은 채 그에게 대답했다. 동틀 무렵까지 그는 1시간도 자지 못했다. 그는 수렁에 빠진 듯한 꿈 속에서 찢어지고 피가 뿌려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없는 이 넓은 세상에 다시 홀로 영원히 내버려졌다는 무서운 확신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최근 5년 동안에, 그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세 남자와 세 번의 동거 생활을 했다. 안수레스 지역에 있는 어느 집 거실에서 미치광이 사랑으로 얻은 행복이 다할 무렵인, 서로 알게 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그녀는 멕시코시티에서 그를 버렸다. 어느 날 아침 마리아는 말할 수 없는 배반의 밤을 지샌 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짐과 지난번의 결혼 반지까지 놓아두었고, 비정상적인 사랑의 격류에서 살아남을 능력이 없다는 편지 한 장을 써놓았다. 사뚜르노는 그녀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그리고 사랑도 없이 2년의 결혼 생활을 함께 했던 첫 번째 남편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뚜르노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를 데려오려고 그 곳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녀에게 간청했다. 실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약속을 했으나 그녀의 꺾을 수 없는 결심과 부딪쳤다. “짧은 사랑도 있고, 긴 사랑도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측은해 하는 마음도 없이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는 짧은 것이에요.” 그녀의 가혹함 앞에 그는 굴복했다. 그러나 사순절날 새벽 그가 거의 한 해 동안이나 내버려두었던 자신의 독신자 방으로 돌아왔을 때, 순결한 신부들이 쓰는 레몬꽃 왕관과 닳아빠진 긴 베일 자락을 늘어뜨린 채 거실의 소파에서 자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자식이 딸리지 않은 홀아비인 새로운 애인은 새로운 인생을 결의하기 위해 성당의 결혼 의식에 따라 그녀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제단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의 부모님은 성대하게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파티에 참석해서 춤을 추고 마리아치를 따라 노래를 불렀고, 술도 마셨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상태에서 자정 무렵에 사뚜르노를 찾아 나섰다. 그는 집에 없었으나 그녀는 복도에 있는 화병에 항상 숨겨 둔 열쇠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굴복한 사람은 그녀였다. “이번은 언제까지야?”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베니시우스 데 모라에스이 시로 답변을 대답했다. “존재하는 동안 사랑은 영원하다.” 2년이 지난 후에도 사랑은 영원했다. 마리아는 원숙해지는 것 같았다. 배우가 되는 자신의 꿈을 포기했고 일뿐만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그에게 헌신했다. 지난 연말에 그들은 뻬르삐그난에서 있었던 마술 경연 대회에 참석했고, 돌아오는 길에 바르셀로나에 들렀다. 이 곳에서 생활한 지난 여덟 달은 아주 행복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 사이도 아주 좋아서, 까딸루냐 사람들이 많이 사는 오르따 지구에 있는 아파트를 한 채 샀다. 그 아파트는 시끄럽고 수위도 없었으나 다섯 명의 아이들을 위한 여분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녀가 렌터카를 빌려 월요일 저녁 7시까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라고사에 살고 있는 친척을 방문하러 갔을 때까지 그들은 누구 못지 않게 행복했다. 목요일 아침까지도 그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 렌터카의 보험 회사에서 마리아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사뚜르노가 말했다. “사라고사에서 찾아보시구려.” 그는 전화를 끊었다. 1주일이 지난 후 마리아가 자동차를 버린 지점에서 900km떨어진 까리스에서 뼈대만 남은 자동차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경찰관이 집으로 찾아왔다. 경찰관은 다른 피해 물품이 있는가 알기를 원했다. 사뚜르노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시간 허비하지 말라고 겨우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기 부인은 가출을 했고 누구와 어디를 갔는지 그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의 확신이었다. 경찰관은 거북함을 느꼈고 자신의 질문에 사과를 했다. 사건은 종결지어졌다. 부활절 때 로사 레가스가 범선으로 항해하도록 그들을 초대한 곳인 까다께스에 있는 빠스꾸아 플로리다 부근에서 사뚜르노는 별안간 마리아가 그를 버릴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프랑코주의가 종말을 시작한 시기에 가우체 디비네 “좌익 계열의 지하 모임”의 손님이 많고 추접스러운 바인 마리띰에 있었다. 간신히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철제 의자와 테이블 중의 한 곳에 우리는 스무 명이 앉아 있었다. 담배 두 갑을 다 태운 후에 마리아는 성냥이 떨어진 것을 알았다. 청동 문신이 새겨지고 남성다운 털이 덮인 꼬챙이처럼 몹시 마른 팔이 테이블에 앉은 군중 사이를 가르고 그녀에게 불을 주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으나, 마술사 사뚜르노는 그를 보았다. 그는 몹시 마르고 수염이 나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같이 창백했고 허리가지 내려오는 아주 검고 긴 머리를 딴 인디오 같은 젊은이였다. 바의 유리창은 봄에 불어오는 북풍의 분노를 겨우 견뎠으나, 그는 가공하지 않은 면으로 된 평범한 파자마 종류의 옷을 입고, 농부의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같은 종류의 무늬 없는 면으로 된 옷을 입고 길게 묶은 머리 대신에 세 가닥으로 딴 머리를 하고 있는 그를 ‘라 바르셀로니따’ 해산물 식당에서 만날 때인 늦가을 무렵까지 다시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오래 된 친구처럼 인사를 했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로 마리아에게 키스를 했고, 그녀도 키스를 해 주었다. 사뚜르노가 자신을 숨어서 보고 있었다고 추측한 그녀는 그를 야단쳤다. 며칠 뒤, 그는 우연히 집 주소록에서 마리아가 쓴 새로운 이름과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타는 질투가 타올랐다. 그 침입자의 사회적 배경만으로도 그는 단정을 지었다. 스물 두 살, 부잣집 외아들, 재주 있는 양성 연애자라는 소문과 결혼한 부인네들의 호스트로서 명성이 자자한 디스플레이어,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그 날 밤까지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이겨냈다. 그 때부터 그는 날마다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 6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두세 시간마다 했고, 나중에는 전화기를 볼 때마다 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 그의 괴로움은 더해갔다. 나흘 때 되는 날 청소만 하러 온 안달루시아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주인 아저씨는 나갔습니다.” 그를 미치게 만들 정도로 아주 어정쩡하게 말했다. 사뚜르노는 마리아라는 아가씨가 혹시 그 곳에 살지 않느냐고 물어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 곳에는 마리아라는 사람이 살지 않아요.” 여자가 말했다. “주인 아저씨는 총각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말했다. “살지는 않지만 가끔씩 그 곳에 오지 않습니까? 아닙니까?” 여자는 화를 불끈 냈다. “그런데 누가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사뚜르노는 전화를 끊었다. 여자의 강한 부정이 그에게는 이미 의구심이 아니라 뜨거운 확신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이성을 잃었다. 며칠 뒤 바르셀로나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 모두에게 알파벳순으로 전화를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으나, 질투에 의해 이성을 잃은 그는 늦게까지 자지 않은 가우체 다비네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해졌고, 그들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쓸데없는 농담으로 대꾸를 해 버려 전화를 걸 때마다 불행은 가중되었다. 그는 그 때에야 아름답고, 괴팍스럽고, 짐작할 수 없는 그 도시에서 자신이 얼마나 고독한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새벽녘에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나서 죽지 않기로 마음을 굳건히 다졌고, 마리아를 잊기로 결심했다. 두 달이 지났지만, 마리아는 아직도 요양소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거친 나무로 만들어진 긴 테이블에 연결된 그릇으로 요양소에서 주는 급식을 겨우 받아먹으면서, 그리고 음산한 중세 식당을 압도하는 듯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석판 인쇄물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연명해 나갔다. 처음에 그녀는 아침 기도, 찬과, 저녁 기도 같은 그들의 어리석이 짝이 없는 판에 박힌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교회의 다른 관습에도 저항했다. 그녀는 오락 시간에 정원에서 하는 공놀이나 감금된 사람들이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을 하는 조화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나 3주일 후부터는 조금씩 요양소 생활에 동화되어 갔다. 결국에 가서는, 모든 여자들이 이렇게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공동체에 적응해 간다고 의사들은 생각했다. 담배는 처음 얼마 동안은 그것을 금값으로 파는 감시원을 통해 부족분을 해결했다. 얼마 없던 수중의 돈이 떨어지자 다시 그녀를 괴롭혔다. 나중에는 몇몇 수용자들이 쓰레기통에서 주운 꽁초를 신문으로 말아 만든 담배로 달랬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강박 관념은 전화에 대한 것만큼이나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화를 만들어 얻은 적은 수입은 그녀에게 허망한 가벼움만을 허용했다. 가장 힘이 든 것은 밤에 느끼는 고독이었다. 많은 수용자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불빛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깨어 있었다. 야간 감시원들이 쇠사슬로 묶어 자물쇠를 채운 문 앞에서 역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로움에 진력이 난 어느 날 밤, 마리아는 옆 침대에 있는 여인이 듣도록 큰 소리로 물어 보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옆의 여자가 무섭고 두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깊은 지옥에 있습니다.” “이 곳은 모로족의 땅이라고 하더군요.” 방안을 울리는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달이 뜬 여름밤에 바닷가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로 보아 아마 확실할 겁니다.” 대형 범선이 닻을 내리는 듯한 쇠사슬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렸다. 순간적인 침묵에서 살아 있는 듯이 보이는 유일한 사람인, 정실에 빠지지 않는 감시원이 방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녀만이 그 이유를 알았다. 요양소에서 첫째 주를 보내면서부터, 한 여자 야간 감시원이 경비실에서 자신과 함께 잠을 자자고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사무적인 강한 억양으로 거래를 시작했다. 사랑을 나누면 담배나 초콜릿,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주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게 될 거야.” 그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너는 여왕이 될 거야.” 마리아의 거부에 감시원은 방법을 바꾸었다. 베개 밑이나 실내복 주머니, 손이 덜 가는 장소에 사랑의 쪽지를 남겼다. 그 메시지들은 죽은 사람들까지도 전율케 할 만한 대단한 압력이었다. 침실에서 우발 사건이 일어난 밤, 즉 야간 감시원이 그녀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에 단념을 할 때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모든 수용자들이 잠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 감시원은 마리아의 침대로 가까이 다가와 얼굴과 공포로 긴장된 목덜미, 굳어진 팔, 가냘픈 다리에 키스를 하면서 모든 종류의 부드러운 외설적인 이야기를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가서는 마리아의 마비가 공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라고 믿은 모양인지 더 노골적으로 나왔다. 그 때 마리아는 감시원이 옆 침대로 떠밀려 나갈 정도로 손등으로 강하게 그녀를 내리쳤다. 감시원은 소란을 떠는 수용자들의 대소동 사이에서 노기를 띠고 일어났다. “개 같은 년.” 감시원은 소리쳤다. “나 때문에 미쳐 버릴 때까지 이 돼지우리에서 함께 썩는 거야.” 6월 첫 번째 일요일의 여름은 소리없이 다가왔다. 말썽을 피우는 수용자들이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볼품 없는 피륙 가운을 벗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상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감시원들이 눈먼 암탉처럼 알몸뚱이 병자들을 작업실로 몰아 내는 광경을 마리아는 즐겁게 구경했다.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충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녀는 비상벨과 함께 쉬지 않고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리는 사무실에까지 들어온 자신을 발견했다. 마리아는 아무 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화국의 시간 서비스를 흉내내는 멀리서 들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45시 92분 107초입니다.” “미친 놈” 마리아가 말했다. 흥겨운 듯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방을 나가려던 순간 이것이 다시는 오지 않을 탈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녀는 극도의 긴장와 서두름으로 여섯 개 숫자의 다이얼을 돌렸다. 그것이 자기 집 전화번호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초조한 상태로 기다렸다. 목 마르고 슬픈 톤의 귀에 익은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세 번 들렸다. 마침내 자기가 없는 집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목을 잠기게 하는 눈물을 닦기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 “여보, 저예요.” 그녀는 한숨을 몰아 쉬었다. 눈물이 쏟아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화기 저 편에서 짧은 놀람의 침묵이 있었고, 질투로 흥분된 목소리가 단말마를 뱉어냈다. “개 같은 년!” 그리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날 저녁, 무자비한 진압에 마리아는 대원수의 석판 인쇄물을 식당에서 끌어 내, 있는 힘을 다하여 그것을 정원의 유리창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피범벅이 되어 굴러 떨어졌다. 여자 헤라클레스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쳐다보면서 문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볼 때까지 그녀는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감시원을 차례차례로 대항할 만한 분노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항복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흥분된 미친 여자들이 있는 숙소까지 그녀를 질질 끌고 갔고, 차가운 물이 나오는 호수로 그녀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다리에 테레빈 주사까지 놓았다. 부어 오른 것 때문에 걷기가 불편한 마리아는 그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침실로 돌아온 그 다음 주, 그녀는 발끝으로 걸어가 야간 감시원의 경비실을 노크했다. 마리아는 대가로 그녀의 남편에게 미리 메모를 전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감시원은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언제라도 발설하면 너는 죽는 거야.” 이렇게 해서 마술사 사뚜르노는 마리아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서커스를 준비한 소형 트럭을 가지고 다음 토요일 정신병자 요양소로 갔다. 원장은 군함처럼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된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접 그를 접견했고, 부인의 상태에 대한 애정에 찬 보고서를 읽어 주었다. 아무도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언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입소에 대한 최초의 자료는 그녀를 접견했을 때 그가 작성한 공식 입소 증명서였기 때문이다. 같은 날 시작한 조사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원장을 가장 마음 쓰이게 만든 것은 어떻게 사뚜르노가 자기 부인이 있는 곳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뚜르노는 연락을 취해 준 감시원 여자를 두둔했다. “자동차 보험 회사에서 나에게 연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원장은 기꺼워하며 그 말에 동의했다. “보험 회사 사람들은 어떻게 하길래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알아내는지 궁금하군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용자의 서류를 힐끗 살펴보고 결론을 내렸다. “부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는 마술사 사뚜르노가 부인의 건강을 위해 지적하는 행위에 신중히 대처하겠다고 약속을 한다면 지켜야 할 주의와 함께 부인과의 면회를 허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의사는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위험스런 분노의 정신 착란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그녀를 대하는 방법에 대해 특히 더 많은 주의를 주었다. “이상하군요.” 사뚜르노가 말했다. “그녀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늘 자제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원장은 전문가적인 태도를 취했다. “수 년 동안 잠복하고 있었던 행위가 어느 날 폭발합니다.” 그는 말했다. “아무튼, 심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들은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부인이 이 곳에 입원하게 된 것은 아주 다행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전화에 대한 마리아의 특이한 강박관념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흐름에 따르십시오.” 원장은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원장님.” 안도하며 사뚜르노가 말했다. “그것은 내 전문입니다.” 교도소와 고해실을 뒤섞어 놓은 것 같은 면회실은 옛 수도원의 면회실이었다. 사뚜르노의 등장은 두 사람이 기다렸던 기쁨의 폭발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면회실 가운데에서 두 의자와 꽃이 꽂혀 있지 않은 화병이 있는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딸기 색깔의 낡은 외투를 걸치고 자선 품으로 준 더러운 구두를 신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퇴원하려고 준비를 한 것이 명백했다. 한쪽 구석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여자 헤라클레스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마리아는 남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직 황폐함이 끼어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감동조차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건강은 어때?” “결국 당신이 와 주어서 행복해요, 여보.” 그녀가 말했다. “이 곳은 지옥이에요.” 그들은 앉을 시간이 없었다. 눈물에 목이 잠기면서 마리아는 수용자들의 비참한, 감시원들의 야만성, 형편없는 식사, 공포로 눈을 감을 수 없는 끝없는 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미 내가 며칠, 아니 몇 달, 혹은 몇 년을 이 곳에서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루 하루가 다른 날보다 더욱 더 악화된다는 것은 알아요.”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똑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젠 이러한 모든 것은 지나갔소.”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내가 토요일마다 면회를 오겠소. 게다가, 의사 선생님이 그것을 허락했소. 이제 모든 것이 잘 풀려 가는 것을 보게 될 거요.” 그녀는 경악에 찬 눈으로 남편의 눈을 쳐다보았다. 사뚜르노는 자신의 공연자로서의 매력을 드러내려 했다. 큰 거짓말을 하는 어린아이의 억양으로 의사의 낙관적인 치료 소견을 이야기해 주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는 결론지었다. “완벽하게 완치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얼마 동안 요양을 해야 하오.” 마리아는 현실을 파악했다. “오! 하느님!” 그녀는 아연 실색하며 말했다. “당신도 그들처럼 나를 미친 여자로 생각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웃으려고 하면서 그가 말했다. “이 곳에서 요양을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이야. 물론 좋은 조건에서.” “그러나 이미 내가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을 뿐이라고 말했잖아요!” 마리아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무서운 강박 관념 앞에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될 지를 몰랐다. 여자 헤라클레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면회 시간이 끝났음을 손목 시계를 쳐다보는 것으로 알려주었다. 마리아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긴장 상태에 있는 여자 헤라클레스를 보았다. 그때 그녀는 정말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남편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그는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그녀를 떼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등 뒤 쪽으로 뛰어온 여자 헤라클레스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그녀는 반격할 시간을 주지 않고 왼손에 열쇠 하나를 쥐고, 억센 힘을 가진 다른 팔로 목을 조였다. 그리고 마술사 사뚜르노에게 소리쳤다. “가 버려!” 사뚜르노는 공포에 질려 도망갔다. 이미 면회에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토요일 그는 자기와 똑같이 차려 입은 고양이를 데리고 요양소로 갔다. 위대한 레오따르도의 빨갛고 노란 그물, 고깔 모자와 날아갈 것 같이 생각되는 한 바퀴 반을 두른 망토. 그는 요양소의 정원까지 울긋불긋 치장을 한 작은 트럭을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거의 3시간 동안 수용자들이 발코니에서 고르지 못하나 외침과 서툰 환호로 열광한 경이적인 공연을 했다. 남편을 마중하는 것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발코니에서 그것을 보는 것조차도 거부하는 마리아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용자들이 관람을 했다. 사뚜르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것은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원장이 그를 위로했다. “곧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뚜르노는 마리아를 다시 만나 보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자 그녀가 편지를 받아 보도록 온갖 노력을 했으나 그것도 헛수고였다. 그녀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은 채 아무런 언급도 없이 네 번이나 되돌려 보냈다. 사뚜르노는 포기했으나 계속해서 병원의 수위실에서 담뱃갑을 보루째 맡겨 놓았는데, 현실이 그를 포기시킬 때까지 그것이 마리아에게 전해졌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다시 결혼을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셀로나를 떠나기 전에 우연히 만난 어린 애인에게 아사 직전에 있는 고양이를 맡겼는데, 계속해서 마리아에게 담배를 전해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 어린 애인은 그 세월들의 나쁜 기억처럼 병원이 폐허가 될 때까지 항상 가능할 때마다 마리아에게 계속 담배를 가져다주었고 예상하지 못한 급한 일들을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보았을 때 그녀는 살도 조금 더 찌고 요양원 생활의 평화로움에 만족하며 매우 정신이 맑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사뚜르노가 놓고 간 돈이 막 떨어졌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고양이를 맡겨버렸다고 했다.  
82 목걸이-모파상
고창근
5024 2010-12-18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이 작품은 허영심과 욕망 때문에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거짓됨을 폭로하고 있다. 교훈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본능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 목걸이-모파상(Guy de Maupassant)/방곤 옮김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가 가난한 사무원의 딸로 태어난 것은 운명의 실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참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남들에게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질 수 있는 길도 없었으며, 돈이 많고 훌륭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리라는 따위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문부성에 근무하는 하급 관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화려하게 몸치장을 할 만한 여유도 없었으므로 소박한 차림을 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있는 여자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결코 그런 환경에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여자란 신분이나 가문이 문제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답고 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혈통과 가문을 대신하게 마련이다. 바탕이 아름답고 천성이 우아하고 마음씨가 부드러우면, 그것으로 능히 특권 계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민의 딸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얼마든지 귀족의 딸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온갖 쾌락과 사치를 즐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마음이 언짢았다. 집이 초라하고, 벽이 남루하며, 의자가 낡고, 가구가 때묻은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이러한 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여자들 같으면 별로 의식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녀만은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다. 그리하여 식모 노릇을 하고 있는 부르따뉴 태생의 계집애를 보고만 있어도 서글픈 생각과 미칠 듯한 몽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동양식 장식이 걸리고, 높은 청동 촛대에 촛불이 휘황하며, 짧은 바지를 걸친 두 하인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의 후끈한 열에 싸여 졸음이 와서 긴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는 비단으로 장식한 넓은 살롱을 상상해 보았다. 값지고 진귀한 보석들이 달려있는 아름다운 가구하며, 뭇 여성들의 선망을 받고 있는 사교계의 인기 있는 남성들과 친한 친구들이 모여 저녁 한때의 이야기를 즐기도록 마련한 향취 높고 아담한 방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때 벌써 사흘째나 빨지 않은 테이블 보를 깔아 놓은 둥근 식탁에 앉자, 마주 앉은 남편이 수프 뚜껑을 열고, “아, 훌륭한 수프로군, 나에겐 난생 처음인걸…….” 하고 기뻐하는 소리를 듣자, 그녀는 다시금 호화로운 만찬의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번쩍이는 은 그릇들, 선경의 숲 속에 나오는 기이한 새들과 고대의 인물들을 그려 놓은 벽화, 눈부신 그릇에 담긴 산해 진미, 불그레한 생선이나 들꿩의 고기를 뜯으면서, 스핑크스와 같은 미소를 띄고 정담을 나누는 남녀들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에게는 이렇다할 옷도 보석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것은 옷과 보석이었다. 자기는 그런 것들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토록 그녀는 인생을 향락하고 싶었다. 모든 남성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부유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수도원 학교 시절의 동창이었다. 그녀는 그 친구를 별로 찾아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로서는 그 친구를 만나는 것이 몹시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녀는 으레 며칠 동안 슬픔과 뉘우침과, 절망과 비관으로 종일 울곤 하였다. 어느날 저녁에 남편이 사뭇 자랑스러운 얼굴로 손에 커다란 봉투를 한 장 들고 들어왔다. “이거 당신에게로 온 거요.” 하고 남편은 말하였다. 그녀는 얼른 봉투를 뜯고 그 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문부성 장관 조르주 랑포노 부처는 1월18일 월요일 저녁에 장관 관저에서 야회를 개최하오니 루아젤 부처께서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조금도 기뻐하지 않을뿐더러, 아내는 그 초청장을 심술궂게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이걸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아니, 여보. 난 당신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별로 외출도 못 하였으니 좋은 기회가 아니오? 이것을 얻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직원들이 저마다 얻으려고 했지만 몇 장 차례가 오지도 않았소. 아무튼 그 날 가면 정부의 고관들을 다 볼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남편을 노려보더니. 이윽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대관절 무엇을 몸에 걸치고 가라는 거에요?” 남편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거 극장에 갈 때 입었던 옷 있지 않소? 내 눈에는 그 옷이 퍽 좋아 보이 던데…….”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두 방울의 커다란 눈물이 눈가에서 입 끝으로 서서히 흘러 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 글쎄, 왜 그러는 거야?” 그녀는 간신히 슬픔을 가라앉히고 나서 잦은 두 볼을 닦으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아녜요, 아무것도 아녜요. 단지 입고 갈 옷이 없어서 그래요. 난 야회에 안 갈 테에요. 그 초대장은 다른 친구에게 주어 버리세요! 나보다 좋은 옷을 가진 아내 가 있는 사람에게 말이에요.” 남편은 실망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 봐 마틸드! 멋있는 옷 한 벌 맞추는 데 얼마나 해? 다른 나들이 때에도 입 을 수 있고 그다지 비싸지 않은 옷 말이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여 보았다.―― '얼마나 요구해야 그 검소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자기 남편이 단박에 기절해 버리지 않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지도 않을까.' 하고 값을 따져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주저주저 하면서 말하였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4백 프랑쯤 있으면 될 거에요.” 남편은 얼굴빛이 약간 해쓱해졌다. 그는 꼭 그만한 돈을 예금해 두었지만, 그 돈으로 총을 사서 이번 여름에 낭테에르 벌판으로 사냥을 가려던 참이었다. 일요일마다 그 곳에 가서 종달새 사냥을 하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래, 내 4백 프랑을 줄 테니 좋은 옷을 맞추도록 해.” 무도회의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루아젤 부인은 근심과 슬픔에 싸여 있었다. 옷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남편은 어느 날 저녁에 이렇게 물었다. “왜 그래? 당신 요새 며칠 동안 아주 얼빠진 사람 같구려.” 그녀는 대답하였다. “나는 보석도 패물도 아무것도 몸에 붙인 것이 없으니, 이런 딱할 데가 어디 있 어요. 내 모양이 얼마나 꼴불견이겠어요. 차라리 그 야회에는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남편은 말하였다. “생화를 달고 가구려. 요즘은 그것이 아주 멋있어 보이더군. 10프랑만 주면 아름다 운 장미꽃 두셋은 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싫어요! 돈 많은 여자들 틈에 끼여서 가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창피한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남편은 큰 소리로 말했다. “참 당신도 딱하구려! 아 당신 친구 포레스티에 부인 있지 않소. 그 여자한테 찾아 가서 보석을 좀 빌려 달라고 하구려. 그만한 것쯤 편리를 못 봐줄 사이가 아닐 테 니까.” “참 그렇군요! 그 생각을 미처 못 했군요.” 이튿날 그녀는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포레스티에 부인은 거울이 달린 의자 앞에 가서 커다란 보석 상자를 들고 와서 열어 보이며 루아젤 부인에게 말하였다. “자, 골라봐.” 그녀는 우선은 몇 개의 팔찌를 골라 보았다. 다음에는 진주 목걸이를, 그 다음에는 베니스제의 십자가를 골랐다. 그 십자가는 금과 진주로 되어 있었는데 솜씨가 놀라웠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보석을 이것저것 몸에 걸어 보면서 망설일 뿐, 어떤 것을 놓고, 어떤 것을 빌려가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번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또 뭐 없어?” “왜 없어. 가서 골라 봐. 어느 것이 네 마음에 들는지 나는 알 수 없으니까.” 그러자 까만 공단 상자 속에 눈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것이 어찌나 탐이 났던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을 쳐들자. 이번에는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그 목걸이를 몽탕트 위로 목에 걸고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떼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걸 좀 빌려 줘.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렇게 해.” 그녀는 친구의 목을 얼싸안고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이어서 목걸이를 들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무도회 저녁이 돌아왔다. 루아젤 부인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하고 맵시가 있었으며,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모든 남자들마다 그녀를 바라보고는 이름을 부르며 소개를 받으려고 하였다. 비서관들은 저마다 그녀와 춤을 추고 싶어하였다. 이윽고 장관도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취된 기분으로 춤을 추었다. 자기의 미모가 가져온 승리와 성공을 이룩한 영광, 온갖 찬사와 감탄, 소생하는 정욕과, 여성들에게도 한없이 달콤하고 완전무결한 최고의 승리로 이루어진 행복의 구름 속에서 기쁨에 도취되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튿날 새벽 네 시쯤 되어서야 야회에서 나왔다. 남편은 자정경부터 조그마한 응접실에서 세 사람의 친구들과 함께 졸고 있었다. 그 동안에 그들의 부인은 저마다 마음껏 쾌락에 도취되어 있었다. 남편은 돌아올 때를 생각하여 가져온 평시의 허름한 웃옷을 아내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 초라한 모습은 아무래도 야회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느끼고, 값진 털옷을 몸을 단장한 다른 여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피하였다. 루아젤은 아내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감기 들 테니까. 내가 나가서 마차를 한 대 불러 올게.”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날쌘 걸음으로 층계를 총총히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낙심하여 달달 떨면서 센강 쪽으로 내려갔다. 그 때 마침 강변에서 밤에나 돌아다니는 낡은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낮에는 빠리에서 차마 그 초라한 꼴을 보이기가 창피하다는 듯이 밤에만 벌이를 하는 그런 마차였다. 두 내외는 그 마차를 집어 타고 마르티르 거리에 있는 집 문 앞에 다다랐다. 그들은 쓸쓸한 마음으로 발을 옮겨 층계를 올라갔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아침 열시까지는 문부성에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기의 화려한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 앞에 가서 어깨위에 걸친 웃옷을 벗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었던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옷을 벗고 있던 남편이 엉거주춤하며 물었다. “왜 그래?” 그녀는 남편을 향해 얼빠진 듯한 어조로 대담하였다. “저…… 저…… 포레스티에 부인의 목걸이가 없어졌어요.” 남편은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뭐라고…… 그럴 리가 있나!" 그들은 옷 갈피와 외투 갈피, 그리고 호주머니 속 등을 온통 뒤져 보았으나, 목걸이는 아무데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남편은 물었다. "무도회에서 나올 때는 분명히 갖고 있었나?" "그럼요. 장관댁 현관에서 만져 보기까지 한걸요." "그러나 만일 한길에서 떨어뜨렸다면 소리가 났을 텐데. 그러고 보니 마차속에서 잃은 것이 분명하군." "그런 것 같아요. 당신 그 마차 번호를 아세요?" “몰라. 당신도 마차 번호를 잘 보아 두지 않았지?” 그들은 낙심하여 서로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루아젤은 옷을 다시 입기 시작하였다. "혹시 찾을지 모르니 돌아온 길을 다시 가 봐야지."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야회복을 벗을 생각도, 잠자리에 들 기력도 없었다. 그리하여 불도 피우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의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7시쯤 되어 남편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경찰국과 신문사로 달려가 현상을 걸고 광고도 내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마차를 부리는 회사를 온통 찾아보고, 조금이라도 가망이 있어 보이는 곳은 모조리 찾아다녔다. 아내는 이 끔찍스러운 재난 앞에서 넋을 잃고 종일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아젤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눈이 푹 꺼진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그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당신 친구에게 편지라도 써야 할까 봐. 목걸이의 고리가 부서져서 수선을 하는 중이라고. 그렇게 하면 다시 사방으로 찾아다닐 시간 여유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까.” 아내는 남편이 부르는 대로 받아 썼다. 한 주일이 지나자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 며칠 동안에 5년이나 더 늙어 보이는 루아젤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보석을 돌려 줘야지.” 다음 날 두 내외는 목걸이가 들어 있던 빈 상자를 들고, 그 안에 적힌 상호의 보석 상점을 찾아갔다. 상점 주인은 여러 권의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부인, 그 목걸이는 저희 집에서 사 간 것이 아니올시다. 저희는 다만 상자만 제 공했나 봅니다.” 두 사람은 잃은 것과 꼭 같은 보석을 구하기 위해, 그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보석상마다 찾아다녔다. 두 내외는 비탄에 젖어 환자처럼 보였다. 이윽고 이 부부는 팔레 루아이얄의 어느 보석상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것과 똑같아 보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찾아 내었다. 값은 4만 프랑이었으나 3만6천 프랑이면 팔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사흘 안으로 살 터이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그리고 만일 3월 말까지 잃어버린 목걸이를 다시 찾으면, 상점에서 3만4천프랑으로 도로 사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였다. 루아젤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1만 8천프랑의 재산이 있었다. 나머지 돈은 빚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사람에게서 천 프랑, 저 사람에게서 5백 프랑, 여기서 5루이 저기서 3 루이 하여 닥치는 대로 돈을 꾸었다. 차용증서를 쓰고, 재산을 몽땅 잡히고 고리 대금은 물론 모든 대금 업자와 거래를 했다. 그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 생애를 담보하다시피 하였으며. 갚을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서약서에 마구 도장을 눌렀다. 그는 앞으로 닥칠 불행에 대한 걱정, 머지않아 찾아올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어두운 그림자, 앞으로 겪어야 할 모든 물질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신을 떨며, 새 목걸이를 사기 위해 보석상에 가서 계산대 위에 3만6천 프랑을 내놓았다. 루아젤 부인은 그 목걸이를 사들고 곧 포레스티에 부인을 찾아 갔다. 부인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좀 일찍 갖다 줘야지. 내게도 쓸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아.” 포레스티에 부인은 상자를 열어 보지는 않았다. 루아젤 부인은 친구가 그 상자를 열어 볼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일 친구가 물건이 바뀐 줄 알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무어라고 했을까? 자기를 도둑년으로 여기기 않았을까? 루아젤 부인은 가난한 생활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우선 저 끔찍한 빚부터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꼭 갚을 심산이었다. 식모를 내보냈다. 집도 바꾸어 지붕밑 다락방으로 세를 얻어들었다. 그녀는 집안 일이 얼마나 힘이 들고, 부엌 치다꺼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몸소 체험하여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기름기가 묻은 그릇과 남비 속을 닦느라고 분홍빛 손톱이 다 닳았다. 더러운 옷이나 내복, 걸레 등속을 빨아서 줄에 널었다. 아침마다 쓰레기를 담아 들고 거리까지 나갔다. 층계참에서 숨을 돌리며 물을 길어 올렸다. 하류 계급의 아낙네들과 다름없는 차림을 하고, 바구니를 팔에 끼고 야채 가게와 식료품 상점과 고깃간을 드나들며 값을 깎다가 욕을 먹기도 하면서, 돈 한 푼을 아꼈다. 두 내외는 달마다 지불할 것은 또박또박 이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차용증서를 고쳐 쓰고 연기하였다. 남편은 저녁마다 어느 상인의 장부를 정리하는 부업을 맡았다. 그리고 때로는 한 페이지에 5수우의 보수를 받고 사본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0년이 지나서야 모든 빚을 정리할 수 있었다.…… 고리 대금의 이자와 묵은 이자의 이자까지 다 갚게 되었다. 루아젤 부인은 무척 늙어 보였다. 그녀는 억세고 완강하고 거칠고 가난한 살림꾼 아낙네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텁수룩하고, 치마는 구겨지고, 빨개진 손으로 마룻바닥을 훔치고,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어 대었다. 그러나 가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창가에 걸터앉아서, 지난날의 야회, 그토록 아름다워 총애를 받던 야회를 회상해 보았다. 그 목걸이만 잃어버리지 않았던들,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 알 수 있으랴. 알 수 없지! 인생이란 무척 기이하고 허망한 거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 파멸을 가져 오기도 하고 구원을 해 주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녀는 한 주일 동안의 피로를 풀려고 샹젤리제 거리로 산책을 갔다가 우연히 어린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포레스티에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루아젤 부인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서 그 동안의 경위를 이야기할까? 그렇지! 이미 빚을 다 갚았겠다. 이야기 못 할 게 뭐람? 그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잔느 아냐? 이게 얼마만이야!” 포레스티에 부인은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런 비천한 여자가 자기를 그토록 정답게 부르는 것이 적이 놀라웠다. “누구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요?” “어머! 나 마틸드 루아젤이야.” 친구는 크게 외쳤다. “뭐, 마틸드…… 아이 가엾어라! 그런데 왜 이렇게 변했어!”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우리가 마지막 헤어진 후로 고생살이가 이만저만이 아 니었어. 그것도 다 너 때문이지 뭐야…….”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생각나지 않아? 저 문부성 장관의 야회에 가려고 내가 빌려 갔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말이야.” “응, 그래서?” “그걸 잃어버렸지 뭐야.” “뭐? 아니 내게 고스란히 돌려 주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건 품질은 같지만 다른 목걸이야. 그 목걸이 값을 갚느라고 10년이 나 걸렸지 뭐야……. 인제 다 해결되었어.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지 몰라.” 포레스티 부인은 발길을 멈추고 서 있었다. “그래, 내 것 대신에 다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왔단 말이야!” “그럼, 여태껏 그걸 몰랐구나. 하긴 똑같은 것이니까.” 그녀는 약간 으스대는 듯한 순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포레스티에 부인은 크게 감동되어 친구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아이 가엾어라, 마틸드! 내것은 가짜였어. 기껏해야 5백 프랑밖에 되지 않는… ….” ▶ 작품 감상 이 작품에서 만약 주인공이 친구로부터 빌린 목걸이가 진짜였다면, 주인공은 자신의 실수를 끝까지 책임지는 성실한 인물로 묘사되었을 것이고, 10년 동안의 그녀의 삶도 비장한 의미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걸이는 가짜였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주인공이 매달려 온 10년 동안의 삶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본다면, 작품의 마지막에서 목걸이가 가짜로 밝혀지는 부분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목걸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허영심 때문에 일생을 허비했을 인물이다. 이는 그녀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의 서두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작가는 목걸이 사건을 통해 허영에 찬 그녀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에 찬 삶의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걸이가 가짜라는 사실은 작품의 의미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단서라기보다는 허황되고 『거짓된 삶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허영심과 욕망 때문에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거짓됨을 폭로하고 있다. 교훈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본능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81 행복일기/김재수 file [1]
편집자
4378 2010-12-01
10.12월 7호 수필 행복일기 김재수 ‘늦잠. 식사할 여유가 없이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토마도 쥬스를 내민다. 냉장고에 마지막 남은 토마도란다.’, ‘하늘이 너무 무겁다. 우산이 없어 난감한데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퍼붓는 소나기’. ‘미쳐 백미러 보지 않고 차선 변경하려는데 휙- 지나는 외제 승용차 한 대. 겁에 질린 내 차도 나만큼 떨고 있다. 휴-’ 며칠 전부터 이상한 일기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여 ‘행복 일기’입니다. 아직은 서툴러 그냥 메모만 하는 정도입니다. ‘Carpe Diem’이란 ‘현재를 즐겨라’,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복권 당첨이나 기적 같은 사건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발견할 수 있는 행복은 하루에도 얼마든지 많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행복은 한 개인의 감정이나 가치관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나면서 존재하므로,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주관에 의해 만족감이 성취된 심리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흔히 행복으로 인해 파생되는 심리 상태 즉 만족, 기쁨, 즐거움, 신남, 보람을 느낌, 평온감 등으로 존재하나, 매슬로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의 욕구는 계속하여 더 높은 단계를 원하기 때문에 '절대적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그 속성상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기에 가끔은 행복을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훈련을 하는 이유는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곧 편하게 되고 편함은 심리적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기대를 해 봅니다. 오늘 하루,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행복의 동행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고. “저게 뭐냐?” 아침에 동료로부터 ‘늙은 아버지의 질문’이라는 글 하나 받았습니다. 내용인즉 82세 된 아버지와 52세의 아들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나무에 앉은 까마귀를 보고 “저게 뭐냐?”란 아버지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아들은 다정하게 “까마귀에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똑같은 질문이 네 번이나 이어지자 참다못한 아들이 큰 소리로 짜증을 내고 맙니다. 아들에게 꾸중을 들은 아버지는 말없이 아주 낡은 일기장을 가지고 나와 아들에게 내밉니다. 아들이 3살 때 쓴 아버지의 일기입니다. 그 일기장엔 오늘과 같은 똑 같은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저게 뭐냐?”란 질문을 23번이나 했고 아버지는 “까마귀란다.”는 대답을 23번이나 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한 결 같았습니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음에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고.... 오늘 나도 아침에 이 글과 똑 같은 행동을 하고 왔습니다. 이제 첫돌이 다가오는 손녀에게 “도리도리”라는 말을 10번도 더했고, 말문을 열려는 아이에게 “어부바”라는 말을 20번도 더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즐거웠습니다. 아이가 따라하는 모습이 귀엽고 뭔가 하나씩 익혀가는 얼굴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며칠 전부터 화장실 출입이 더 불편해지고 환히 켜진 전자식 시계의 시간을 잘 읽지 못하는 엄마. 그 분명하던 발음이 많이 풀어진 듯 어눌해지고, 똑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씩 반복하는 엄마를 향해 나는 오늘 아침에도 심한 짜증과 화를 냈습니다. 손녀의 우유를 타는 일이며 밤중에도 일어나 냄새나는 귀저기를 갈아주면서도 짜증을 내지 않은 내가 밤새 불편한 몸으로 기저귀를 적셔낸 엄마에게 아내가 보는 앞에서 심한 말을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래도 당신 어머니가 아니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엄마의 낡은 운동화가 먼지를 덮어쓰고 현관 구석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엄마는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참을 수 없는데 막상 엄마를 보면 왜 그러는지 정말 내가 미워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어머니를 창조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어디 한적한 곳에라도 가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아침입니다. 기저귀 갈기 아빠 발 씻겨 드리기가 숙제다/ 부끄럽기도 해서 망설였지만/나를 바라보시는 선생님 모습/의자에 아빠를 앉히고/발을 씻겨드렸다/시멘트 바닥처럼 굳어버린/아빠 발/발을 씻기는 손이 떨리고/왈칵 눈물이 나왔다. 아주 오래 전 ‘상주어린이백일장’에서 장원 한 옥산초등학교 학생의 작품입니다. 지은이의 이름은 잊었지만 너무 그 장면이 생생해 외우고 있습니다. 요즘 내가 엄마의 기저귀를 갑니다. 가끔 아내와 손녀의 기저귀를 갈면서 포동포동 젓 살이 오른 다리를 보며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행복해 했는데 엄마의 기저귀를 갈면서 뼈만 앙상한 다리가 가슴이 아팠습니다. 엄마도 내가 어린 시절 내 기저귀를 갈면서 포동포동 살이 오른 날 보며 행복해 하셨겠지요. 내가 초등학교 시절 늑막염으로 한 달 간 학교를 가지 못했을 때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치지 않고 솟는 샘처럼 엄마의 사랑과 헌신으로 나는 이렇게 오늘까지 왔는데 자신의 모두를 남김없이 내게 넘겨주신 엄마는 이렇게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있습니다. 미안함과 죄송함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젠 자식이 누구인지, 며느리가 누구인지 목소리를 들어야 분간이 가능하고 그것마저 5분이 지나면 또 딴 소리를 하는 엄마. 그런 엄마의 정신과 육체를 고려하지 않고 정상인인 내 수준으로 맞추려 하니 서로 어긋난 생각과 행동의 간격으로 겪는 문제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나도 몰래 불쑥불쑥 나오는 짜증으로 스스로 감당 못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끝이 없고 세상 이치는 내리사랑은 하늘의 법이라지만 조금만 이런 이치가 반반으로 조정이 되었다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향하는 애증(愛憎)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창밖 석류나무엔 잘 익은 석류가 입을 열고 빨갛게 웃는데 푸르던 석류 이파리는 추분이 지나자 누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열매 속에 석류알맹이들은 누렇게 변해 이내 떨어질 이파리의 아픔을 알기나 할까요? 머지않아 가을 낙엽처럼 우리 곁을 떠날 엄마. 자식들의 원망과 짜증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저 잠든 모습에서 발견하는 마음을 주소서.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80 오상고절(傲霜孤節)외 1편 /김종인 file
편집자
4986 2010-12-01
10. 12월 7호 시 오상고절(傲霜孤節) 천지에 아름다운 단풍이 드는 시월 어느 날, 시베리아 한냉전선으로 전국에는 한파주위보, 강원도 어디에는 대설주위보가 내리더니 미처 단풍도 들기 전에 고춧잎은 삶아 놓은 듯 말라 비틀어지고, 알이 덜 찬 배추, 채 굵지 않은 청무, 익지 않은 감, 싱싱하게 소리치던 대파도 얼고, 참나무 오리나무 아까시 은행잎 파랗게 얼었다가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붙어 바람 앞에 소리 지르네 강에서 저수지에서 대지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천지 사방을 덮어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바다 속에서 차는 차대로 엉금엉금 기고 항구의 배는 항로를 잃고 하늘의 비행기도 뜨기를 중단하고 사람들은 일제히 집안에 틀어박히네 대명천지에 삼라만상이 고개 숙이고 스스로 침잠하고 천지에 소리는 사라지네 스스로 아가리를 틀어막고 뻗쳐오르던 두 손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한껏 움츠리니 세상 참 조용하네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아걸고 집구석에 처박혀 연속극이나 보는지 세상 참 조용하네 시퍼렇게 살아서 소리치는 것들 푸르른 것들 된서리, 기습 추위 한방에 모두 사라지네 스스로 죽어라 하고 동굴을 파고 안방 문을 닫아걸고 이불 속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광장엔 그림자도 보이지 않네 이참에 사대강 모두 파헤치겠네 집집마다 숨죽인 것들 비웃으며 이참에 모두 문을 잠가라 봉쇄하고 압수하고 재갈을 물리고 올 겨울 참 한파주위보 자주 내리겠네 올 겨울 참 조용하겠네. 오, 그리운 오상고절! 구절초, 쑥부쟁이, 감국은 기를 쓰고 피는데, 이 황량한 들녘. 겨울비 겨울비가 내린다. 이 비 그치면, 만산의 홍엽도 사라지고 앙상한 나무들 바람 앞에 맨살로 서리라. 겨울은 한 걸음 더 빠르게 목덜미 사이로 스며들고, 온누리 꽁꽁 얼어 붙겠지 이 비 그치면, 김장김치라도 푸짐히 담고 소담스레 내리는 눈을 바라볼 수 있을까 봄이 오기 전에,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들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추운 것이 하 많은 세월 겨울비 내리는 창밖을 보다 문득 고개 들어 맨몸으로 찬비 맞는 목련을 보네, 가지마다 어느새 꽃눈송이 맺혀 있는 것을 보네 보송보송 솜털마다 다시 오는 봄을 예비하고 있거늘 왜 나는 가슴으로 겨울비만 맞는가 아무 것도 안 하고 한탄이나 하면서 겨울비 오는 풍경만 멍청하게 바라보는가. *** 약력 : 김종인 1954년 경북 금릉 초실 출생 시집으로『별』,『나무들의 사랑』,『내 마음의 수평선』등 분단시대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현재 김천농공고 교사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