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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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1761 2014-11-03
79 그릇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4576 2010-12-01
10. 12월 7호 시 그릇 하재영 킬힐을 신고 있다 당신 혓바닥에 고인 침을 무릎 꿇고 듬뿍 받으며 직립을 꿈꾼다 세상의 고요 한 묶음 봉분처럼 조근조근 끌어안고 식탁 위 낮은 말씀으로 당신과 나의 목을 칭칭 동여맨다 우주다 둥근 우리다 여우가 사는 내 고향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 내가 살아온 6시 방향은 당신 그림자로 꽃향기가 머물렀다 어디까지 가야 할까 자동차가 달리는 넓은 길옆으로 제비꽃, 닭의장풀, 쑥부쟁이 그리고 강을 만드는 지류들이 참나무처럼 소나무처럼 머리를 빗었다 정겨운 이름 하나 둘 퇴색하여 노을 속으로 흩어지는 저녁 종종 1시 방향으로 머문 기억은 이빨 빠진 유년의 황톳길을 돋게 했다 산 너머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 꽃을 피우려 뿌리를 내렸던 속도로 굵은 사전을 뒤적거리며 펜을 잡고 써내려간 문장 속 명사들이 터널로 들어간 고속열차처럼 보이지 않는다 똥수칸 문짝 뚫린 구멍으로 드러난 푸른 하늘 종이비행기 날다 내려앉는 6시 방향으로 팔딱팔딱 재주를 넘고 있는 내 고향 길고 긴 꼬리 달고 있는 ------------------------------------------------------------------ 하재영 1957년 충북 청원 출생. 1988년 《충청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2년 계몽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당선, 동화집 『안경낀 향나무』,『할아버지의 비밀』,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7feeling@hanmail.net  
78 살구꽃을 기다리며 /이승진 imagefile
편집자
4925 2010-12-01
10. 12월 7호 시 살구꽃을 기다리며 이승진 부처님도 주지 스님도 깜깜한 밤, 공평한 밤, 일곱 장 북두칠성 잡고 계신 밤. 초저녁부터 두들기던 목어랑 법고 철종 셋은 사흘 밤 사흘 낮 허공에 매달린 돈 따먹기 그 짓도 지겹더란다. 주지 스님 팔공산 달머리 내밀며 천천히 걸어오는 밤 대웅전엔 뭐 하려고 세 분이 계시는지…. 빈털터리 목어는 대웅전에 달려가 화투 한 몫을 관세음보살님께 드리며 방석을 폈다. 그리고 ‘禪 잡아.’ 했다. 어라. 들어갈 때 흑싸리 껍데기던 겨울나무가 칠싸리 붉은 점 쿡쿡 찍어대며 연등 다는 봄이 온 것은 불 꺼진 법당에 밤새 무언가가 토닥대기 때문이라는데…. 光팔아 주지가 된 大羅 떼어 밥을 먹는 주지는 텅 빈 속 쓰리고 쓰린 목어가 온 몸 두드리며 토해내는 쓰리고에 피박 같은 함박 점수 살구꽃 자꾸자꾸 피어나길 기다릴 수밖에…. 이승진: 경북상주, 상주문협 회원 시집『사랑 박물관』  
77 사각의 육인용 책상에는 /고은주 file
편집자
4124 2010-12-01
10.12월 7호 소설 사각의 육인용 책상에는 고은주 간막이가 없는 사각의 육인용 책상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창가 자리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누가 이런 공공도서관에 자기 집 안방에서나 씀직한 방석을 놓고 갔담? 나는 누구든 나타나서 냉큼 치워주길 바라며 창가 선반에 방석을 올려두었다. 나는 오늘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아니, 새로운 사람이 될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수능열기’ ‘수능만만’ 따위의 제목이 박힌 책들을, 누가 볼까 봐 조마조마하지만, 누가 보면 어쩌랴, 하며 당당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착, 착, 착, 괜스레 책장도 소리 나게 걷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인지 도서관에는 아직 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쯤 열공했다. 인생이란 거,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정말이지 세상일이 너무도 단순해 보였다. 한 일 년 도서관 신세 좀 지고 대학에 들어간다. 졸업해서 취직이 안 되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몇 권의 책을 달달달 욉기만 하면 되는 사지선다 시험쯤이야 반 년만 준비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나도 세상의 쳇바퀴에 적당히 얽혀들어가 있겠지. 조금씩 타협하며 예의상의 썩소 정도는 날릴 줄 아는,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이 되어 있겠지. 사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루해지지만, 누가 알랴, 그런 삶의 어느 복판에서 놀랄 만한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누군가 내 맞은편 의자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사뭇 조심스러운 그 몸짓이 오히려 내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다른 데 시선을 돌리는 척하며 슬쩍 앞사람을 곁눈질했다. 여자였다. 가느다란 왼손에 방석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좀더 고개를 들어보았다. ‘내 고정석을 빼앗은 나쁜 넘!’이라며 그녀는 분명히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려면 어쩌랴, ‘여기는 아가씨네 집 안방이 아니걸랑요!’라고 나도 쏘아주고는 목하 열공 중이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콕 박았다. 그런데 그녀가 창가로 바짝 다가서는 듯했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발 블라인드만큼은 그대로 내버려주길,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그녀의 손이 휘휘휙 블라인드를 올리고 말았다. 나는 아가씨의 고정석을 내드릴 테니 블라인드를 내리면 안 되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묵묵히 참고 있었다. 혹시라도 왜 내려야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한 것이다. ‘실은 제가 봄볕에 되게 민감하거든요’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작심 첫날인 만큼 종일토록 열공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일등으로 열람실 문을 열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책장을 착착착 걷었다. 맞은편 자리에는 그녀의 방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내심 불안했지만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앉았던 자리에 벌써 정이 들어버렸는지 다른 자리로 옮기면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두 시간쯤 후 예의 그 여자가 나타났다. 오자마자 휘휘휙 블라인드를 올려 밉상이었지만, 의자를 잡아당기고 책장을 펴고 펜을 꺼내 드는 동작이 사뭇 조심스러워 곱게 봐주기로 했다. 한 이레 흘렀는가, 어느 한낮 그녀의 시선이 내 뺨에 닿는 듯했다. 그녀가 이윽히 내 왼쪽 어깨를 지나 창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고 싶었지만 왠지 조금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아가씨한테 조금도 관심 없거든요’라는 뜻으로 고개를 콕 박고 말았다. 그때였다. “소리, 못 들으셨어요?” 소리? 못 들었냐고? 지금 이 여자가 나한테 말을 거는 건가? 내가 환청을 들은 건가? “아까부터 목련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나 이것 참, 이 여자, 이제 보니 나보다 한 수 더 뜨는 인간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오히려 태연히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무어라고 대꾸할 말은 떠오르지 않아 이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자목련이 서 있었다. 망울이 터진 지 벌써 일주일은 더 됐겠다. 내가 애써 저것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이 여자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그래서 책을 덮고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마디 쏘아주었다. “저는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요.” *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어요. 유난히 키가 컸던 저는 양심상 뒷자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저처럼 뒷자리에만 앉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얼굴이 호박처럼 부풀어오른 친구였지요. 병을 앓고 있어서 그렇다는군요. 우리는 하루 종일 몇 마디 나누진 않았지만 자주 짝꿍이 되었어요. 수군대는 친구들의 말로는 그 친구는 불치병을 앓고 있대요. 몇 차례나 서울로 올라가 수술을 받았지만 점점 더 허약해지고 있대요. 정말이지 그 친구가 웃는 얼굴은 한 번도 보질 못했어요.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의 저는 그런 친구를 눈앞에 두고도 왠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어요. 그 나이에 불치병을 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시골에서 요양을 하는 영화 속 소녀의 영상만 떠오를 뿐이었지요. 그런 터에 수염이 부숭부숭 난 사내애가 불치병을 앓으면서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니, 그런 친구가 바로 내 옆에 있다니,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니, 다른 친구들과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다니! 그런 현실의 한복판에 내가 이렇게 멀쩡히 서 있다니! 입학한 지 한 달 남짓 됐을 때 그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수술을 받으러 서울에 갔대요. 담임이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라 해서 저희는 다함께 두 손을 모았어요. 그런데 며칠 뒤 그 친구가 죽었대요. 어리둥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사내애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느 날처럼 점심을 먹고 축구공을 찼더랬지요. 저도 그런 줄만 알았어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어요. 다른 날보다 더 힘차게 뻥뻥 공을 차댔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청소시간이었어요. 한 친구가 창가 화병에서 시든 꽃을 빼내 휴지통에 구겨넣고 있더군요. 자목련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죽은 그 친구가 꽂아놓았던 것이었어요. 서울로 가기 전날엔가, 집에서 꽃을 꺾어왔다며 모처럼 웃음을 지어 보이던 친구의 얼굴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저는 부리나케 앞으로 달려나갔어요. 꽃을 왜 버리냐고, 다짜고짜 성을 냈어요. 너 왜 그래? 뭐 잘못 먹었냐? 시들면 버려야지, 썩을 때까지 그냥 두냐?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이 친구의 얼굴로 날아갔어요. 친구도 주먹을 날렸어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꽃 때문이라면 휴지통의 꽃을 얼른 꺼내는 게 우선일 텐데 저는 주먹을 멈추지 못했어요. 결국 담임이 달려왔어요. 왜 그런 거냐고 물었지만 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어요. 추궁하던 담임이 지쳤는지 제 뺨을 때리더군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더 때려달라고 담임을 노려보았더니 고맙게도 담임은 마구마구 저를 짓밟아주더군요. 그날 이후 왼쪽 귀가 아팠지만 병원 따위는 가지 않았어요. 병원에 가서 제 몸을 달래는 건 죽은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지요. 좀더 나 자신을 나쁘게, 못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것이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던가 봐요. 그때부터였어요. 저에 대한 자학이 시작된 건,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적의를 품게 된 건. 내 속에서 왜 그리도 끊임없이 독기가 솟아오르는 건지 저도 어찌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저는 학교도 그만두고 세상을 떠돌고 다녔답니다. 불량배들과 어울려도 보고, 노숙자들과 잠도 자보고, 절에서 마당도 몇 달 쓸어도 보고 하였더랬지요. 세상의 끝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들, 끄끝네 감추어놓았다가 우리의 뒤통수를 칠 생의 비밀들,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이런 저를 늘 절망케 하는 건 다름아닌 저 햇살이었어요. 금방이라도 나를 토막 내버릴 듯 위협하면서도 언제까지고 이 세상의 베일 속에 살려둘 것만 같은 저 햇살! 이 끔찍한 아이러니에 저는 무릎을 꺾고 말았지요. 삼 년을 떠돌다 끝내 낙오자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야말로 삶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해야 할 기로였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하고야 맙니다. 스물다섯 난 사촌오빠가 스스로 생을 저버리고 말았지요. 허! 그것 참, 헛웃음이 나와버리더군요. 정작 죽으려는 사람은 나인데 선수를 치다니!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제가 하고 있었던 생각은 한 집안에 잇따른 죽음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당분간 살아 있기로 했지요. 살다 보니 이만큼 살아졌네요. 내년이면 제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요 몇 년간 저의 도피처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었어요. 다른 일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어요. 글을 읽으며 쓰며 저는 조금씩 살고 싶어졌던 것 같아요. 여전히 삶의 비의는 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지만 친구의 죽음에서, 사촌오빠의 죽음에서 조금씩 놓여나게 된 것 같아요. 스물다섯 이후까지 시인이 되려고 하는 자에게는 역사의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T. S. 엘리엇의 말이 있지요. 그 말 때문인가요, 혹은 사촌오빠의 죽음 때문인가요, 저는 언젠가부터 스물다섯 나이를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함부로 스물다섯에 들어서서는 아니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 스물다섯에도 내 안의 독기를 어쩌지 못해 스스로 앓아댄다면 나는 온전히 스물다섯을 살아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지요.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된 것은 스물다섯이 되기 위한 어떤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은밀하고 절실한 어떤 의식…….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편지로써 그 의식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목련이 떨어지고 있었어요”라는 당신의 말을 들은 뒤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불현듯 당신께 편지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저는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저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친구의 죽음 이후 아무에게도 열어 보이지 못했던 저의 마음을 낱낱이 고백해야만 한다는 절박감에 휩싸여 있었던가 봐요. 고백이라도 해야만 비로소 저의 애끓는 젊음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절박감, 그래야만 친구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절박감! 그동안의 저의 방황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전에, 한낱 추억 나부랭이가 되어버리기 전에 말이에요. 먼 훗날에 가서야 추억이니 무어니 감상에 젖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궤를 찬 복부인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일 거예요. 추억이라니요! 열일곱 살 친구의 죽음이 어찌 한낱 추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의 이야기가 흐물흐물한 추억이 되기 전에 한 켜 한 켜 쌓아올려 성스러운 다비식을 치러주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레테의 강으로 흘려 보낸 뒤에는 영영 다시 돌아보지 않으렵니다. 돌아보는 것으로, 추억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죄닦음을 대신하는 구역질 나는 행동은 어설픈 피에로에게나 하라지요. 당신이 바로 이러한 저의 의식에 대한 증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그리 부담 느끼실 건 없습니다. 그저 이 해가 가기 전에, 그러니까 제가 스물다섯이 되기까지 앞으로 몇 번 더 이어질 저의 편지를 받아주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답장 같은 건 필요없어요. 다만 읽고 나서는 불에 태워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이 해를 보내고 나면 저는 한결 가뿐하게 스물다섯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고 나면 저도 저 봄볕 아래서 자목련 떨어지는 소리에 온전히 귀를 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 이 편지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한 달이 가도록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아마 한 달쯤 더 기다려보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굳이 기다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두어 달 봉투 속에 갇혀 있다 나온 나의 고백은 이미 빛을 잃어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한 달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던 편지를 꺼내어 불에 태워버렸다. 어서 빨리 사그라져 레테의 강으로 흘러가는 게 이 편지가 제 몫을 다하는 일이리라. 나는 맹렬히 수능시험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편지라니, 흥, 유치하게시리, 가끔씩 속으로 흥흥거렸더니 공부가 더 잘되는 듯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수능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모의고사 점수는 더욱 만족스럽게 나왔다. 나는 더 자주 흥흥거렸다. 다시는 편지 따위, 글 따위 쓰지 않고도 살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련다. 흥흥거릴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부쳐지지 못한 편지를 떠올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제대로운 스물다섯이 되기는 그른 것 같다는 조바심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제대로운 스물다섯’이라, 어쩌면 이것은 어리석은 독단일지도, 어쩌면 이 전체의 글 자체가 굉장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두려운 일이다. 이러한 독단과 오류가 스물다섯 이후로도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것은.  
76 소통疏通의 시/박찬선 file
편집자
3411 2010-12-01
   소통疏通의 시             -느티나무 동인들의 시를 읽고    박 찬 선 느티나무문학회는 상주의 유일한 시동인이자 여성들로만 구성된 모임이다. 1998년 9월,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시의 각도를 가져보자는 취지에서 모임을 결성하고 동인 이름을 느티나무로 정했다.느티나무와 여성,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지만 그들의 주장은 당당하다.  첫째,경계 없는 정신과 스스로의 긴장을 의미한다.느티나무는 동수나무로서 마을 앞 들고나는 곳에 서 있다.따라서 마을 안 사람과 바깥 세상,곧 세상과 사람의 만남 그 접점으로 한곳에 안주치 않고 시적 긴장과 경계를 넘나드는 정신이다.  둘째,수령을 자랑하는 나무다.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느티나무처럼 한 편의 작품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세월 속에 숙성시키고 공을 들여야 한다.자기 갱신의 동력으로 시의 길은 현재이며 미래라는 것이다. 셋째,우주적 모태성을 지녔다.느티나무의 남성적 이미지 저편에는 여성성이 담겨 있다.아기자기하게 뻗은 가지,뭇 새들이며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들의 방이 되어주고 까치집 서너 채 앉혀주는 마음이 어머니의 본성임에랴.대지의 기운을 품고 하늘을 우러르는 건실한 본성을 지녔다.이러한 느티나무가 지닌 덕성을 본 삼아 동인의 이름을 느티나무로 하고 느티나무의 문학을 펼치고 있다.  『양은 주전자』2010 느티나무시 제7집이 나왔다.동인으로는 김이숙,김주애,김춘자,박순덕,이미령,황구하 여섯 사람.‘04년 첫 시집을 낸 이후 매년 한 권씩 거르지 않고 펴냈다.시에 대한 열정과 결집의 소산이다.   동인들은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개성이 뚜렷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상주의 안에서 바깥세상과 소통의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이숙:일상에서 늘 접하는 현실 소재를 바탕으로 한 시의 천착으로 존재의 근원을 생각케 한다.말하자면 시의 집을 짓고 있는 셈이다.그의 예리한 촉수에는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세상 모든 움직임이 떨림으로 오는 끝없는 메시지,그 떨림에서 시는 태어나는 것이다.여인으로 의인화된 「목련」부터 새에게 먹히고 바람에 흔들리는「겨우살이」,서른 아홉의 죽음을 노래한 「작별」,세상에 피지 않는 꽃은 없노라는 「무화과」에서,특히 「스토킹-거미」에서 집의 실체를 떠올리게 한다.  저기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  매일 아침 걷어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집을 짓고 안전한 은신처에 숨어 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마다 늘 따라오는 여섯 개의 눈  거센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꽉 붙들고 놓지 않는다  왼쪽 백미러를 접으면 그의 집도 함께 접힌다                               「스토킹-거미」 전문 김주애:깊은 사유의 빛은 시의 골격을 튼튼하게 하고 현실감을 솟구치게 한다.어머니가 가꾸시는 텃밭에는 한 알 한 알 목 메이지 않는 것이 없는 「텃밭」,철창 속에 갇혀서 마지막 가는 길의 닭을 노래한 「부리」,길 잃은 것들을 기다리는 「거미」,국졸,마흔 다섯 노총각의 「모과나무」의 실재성이 「나는 발바닥에 가시를 품고 산다」에서 그 깊이를 더해줌을 본다.그의 상황인식은 가시를 품고 사는 근원적인 아픔에서 온다.  어디서 찔렸는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프다 바늘로 조심스럽게 후벼보지만 도무지 보이지가 않는다 후벼팔수록 상처는 커져갈 뿐이다 더 깊숙이 숨어서 걸을 때마다 온몸 가시 돋게 한다 핏물이 고여 더는 손 쓸 수 없다                     「나는 발바닥에 가시를 품고 산다」 첫연 김춘자: 어려운 농촌생활의 풍정을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여과 없이 담아낸 시들이 매우 사실적이다.구제역으로 끌고 간다는 왕눈이「식구」,구름 한장이라도 덮어주고 싶은 양계장의「무거운 하루」를 통해 고통 받는 짐승들과 내장 들어낸 「돌산」,신음소리 들려오는 환경파괴의 현장과,하루 일당 육만원에 매인 병든「최씨」,관절이 쑤셔 뼈주사를 맞아야 하는 등 굽은 할매들을 노래한「비오기전에」를 통해 어려운 농촌의 현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서른에 과부 된 어머니/ 앞날 캄캄해 피었습니다// 사남매 키우고/ 뒤돌아보니 서러워 피었습니다// 칠십 고개 건너/ 아직도 못다 핀 꽃 있어 피었습니다// 가시처럼 품은 세월/ 이제는 시절도 없이 피었습니다//                               「사계절 장미」 전문 박순덕:사물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이 듬뿍 담긴 시가 정갈하다.테마공원기공식날 꽃 같은 하얀 장갑 주워온 어머니와 삽 한 자루 주워온 아버지의「땅」,농협 빚 눈덩이처럼 늘자 밥 삼아 술만 마신 「영철이」를 만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솟고 우리 아들 학교갔다 돌아올 때 다 되어서 밥을 안쳐야 겠다는「뽕나무」,사남매 배 안 곯리려 허드렛일 마다 않는 어머니의「고추」,「피자 한 판」에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녹아든다.그 속에는 순하게 웃는 순박한 사랑도 있다. 낙동면 구잠리/매화가 꽃이불을/펴고 있다//(중략) 좋지요 꽃이//뒤돌아보니/수더분한 한옥에서/허리 굽은 아버지와/늙은 아들이/모내기 흙을 치며 말한다/나그네에게/공으로 꽃구경 시켜준 부자가/순하게 웃는다//담으려고만 애쓰는 내게//                         「매화가 부른다」 일부   이미령: 사물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눈이 깊다.따라서 시의 앉을 자리와 시의 모습을 그려내는 힘을 지닌 시인이다.유년의 애틋한 정감이 담긴 「양은주전자」와 감꽃 닮으신 엄마,늦가을 남장사 감잎 지는 소리 들으러 함께 가자는 「감잎 편지」가 있고 군에 입대한 아들 사랑의 「우두커니」가 있는가 하면 박스 줍는 노파의 무덤덤한 눈빛 속에서 엿물처럼 녹아든 절망을 본다는「유월,어느 날 오후」가 있다.그런가 하면 압축된 시의 꽃이 있다.  바위 같은 어둠을 뚫고 올라 그토록 눈부시게 부서지기 위하여 천 년의 기다림을 간직한 별 흩어진 별 조각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꽃이 되었다.                                      「폭죽2」전문 황구하: 시적 사유의 심원성과 명징성이 조화를 이루어 정제된 시의 묘미를 보여준다.태초의 여름 분화구인 「맨드라미」,한 계절을 굶주리고도 여자는 배가 부른 「박태기나무」,노란 전조등 일제히 켠 「개나리」,밥 먹자 불쑥 숟가락을 내미는「민들레」-이런 꽃과 꽃나무에 대한 경이로운 유추와 상상력으로 시의 즐거움을 보탠다.그런가 하면 세심洗心의 자세로 수심결修心訣의 정갈한 경지를 보여주는 돌도 오래 살면 법문이 되는「돌거북」과 마음을 끌고 가는「물에 뜬 달」이 있다.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게시가 있다.  남장사 상수리나무 큰 그늘  넘치고 넘쳐나 물소리에 닿는다   (중략)  저토록 두껍고 딱딱한 외피를 두르고  태초의 물너울을 키우고 있다니  천 년 목숨 지켜낸 남장사  상수리나무숲 바다로 가는 물결을 본다                      「바다로 가는 나무」 일부    이상으로 느티나무 시인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았다.「양은 주전자」에는 오늘의 상주가 있다.느티나무처럼 식물성의 향기가 있다.더구나 주로 남자들만 문회文會를 열어온 역대 상주문학에서 열림의 평등과 자유를 확인한 것은 아주 큰 높임이다.  이 글은 극히 단편적이요 피상적일 수 있다.왜냐하면 어느 한 시인에 대한 집중이 아니요 모두에 대한 나열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동인들의 면면을 읽음으로써 그들이 지향코자 하는 시의 길과 시 세계가 감지되지 않겠는가.  소와 포도와 곶감과 오이가 귀하고 값지고 아름다운 상주에서 시는 과연 무엇인가? 시는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시(문학)가 있어야 할 당위성과 나아갈 길을 느티나무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는 안과 밖의 소통이다.느티나무시가 거기 있다.                    
75 불지피기 / 잭 런던 [1]
주진
9161 2010-11-21
내가 좋아하는 소설  혹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눈에 선연할 정도로 잘 그려진 소설이다. 영하 80도의 날씨, 자신도 모르게 몸이 점점 얼어붙어 간다. 형체도 없는 추위와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으나 결국 그는 자연 앞에 오만했던 자신을 깨닫고 무릎 꿇는다. 작가 잭 런던(1876~1916)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 가난하게 자라며 막노동과 광부, 선원 등 여러 가지로 생계를 꾸렸다.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그 경험이 극대화되어 나온 산물들로 독특한 그의 소설 세계를 이루고 있다. 불 지피기 잭 런던 동이 텄을 때, 날은 추웠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사나이가 유콘 강 가의 주도로를 벗어나 흙으로 된 높은 기슭에 올랐을 때는 지독하게 춥고 잿빛도 더했다. 그가 오른 곳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자국이 뚜렷하지 않은 길이 울창한 전나무 숲을 뚫고 동쪽으로 나 있었다. 가파른 기슭을 올라왔기 때문에 사나이는 꼭대기에서 숨을 돌리려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행동을 변명이라도 하듯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홉시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나 해는 보이지 않았고 나올 기색도 없었다. 맑은 날씨였지만 사물의 위에는 아침을 어둡게 하는 미묘한 우울함 같은 것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관보자기처럼 덮여 있었다. 그렇다고 사나이가 걱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해가 없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해를 본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는 며칠이 더 지나야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둥근 해가 그나마 정남쪽 하늘 끝에 잠깐 보일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해는 그렇게 잠깐 보이다가 곧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나이는 자기가 온 길을 힐끗 돌아다보았다. 폭이 1마일이나 되는 유콘 강이 3피트 정도의 얼음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얼음 위에는 얼음 두께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은 순백색이었고, 빙결기의 얼음이 엉겨 있는 곳에서는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북쪽이건 남쪽이건 눈에 보이는 것은 흰색뿐이었으며, 예외라면 머리카락같이 가느다랗고 검은 선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 선은 전나무로 뒤덮인 섬 부근에서 시작하여 남쪽까지 이어지고, 저 너머 북쪽으로도 이어지는데 북쪽 끝에 있는 전나무로 뒤덮인 또 하나의 섬 뒤편에서 끝이 났다. 이 머리카락 같은 검은 선은 길이었다. 이 길은 바로 주도로로, 남쪽으로 500마일 가면 칠쿠트 고개를 지나 다이어를 거쳐 바다로 이어지고, 북쪽으로 70마일 가면 도손에, 거기서 1000마일 정도 더 가면 눌래토에 도달하게 되며, 1500마일 정도 더 가면 종국에는 베링 해의 세인트 마이클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신비롭게 멀리 뻗어 있어 머리카락같이 가늘어 보이는 길, 해가 없는 하늘, 엄청난 추위, 그 어느 것도 사나이에게는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가 이러한 것들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이번 겨울도 그가 맞는 첫 번째 겨울이었다.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상상력의 결핍이었다. 그는 세상일에 재빠르고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저 세상일의 겉에 대해서만 그렇지 그것의 깊은 뜻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화씨로 마이너스 50도의 온도이니, 물이 어는 온도인 32도에서부터 따지면 영하 80도 정도가 되는 셈이다. 이런 기온을 불편할 정도의 추위를 나타내는 것으로만 받아들였을 뿐, 어떤 한계 내의 열과 추위에서만 살 수 있는 온혈동물로서의 자신의 나약함과 인간 전체의 나약함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영생불멸이라는 추측의 차원이라든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 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마이너스 50도라는 기온은 그저 고통스러운 동상을 뜻했다. 또 마이너스 50도란 그것에 대비하여 장갑을 끼고, 귀마개를 하고, 모카 신이라는 따뜻한 신을 신고, 두꺼운 양말을 신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이 마이너스 50도였다. 이런 것말고 그 이상의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에게 도무지 들지 않았다. 몸을 돌려 길을 계속 가다가 그는 얼마나 추운지 알아보기 위해 침을 뱉었다. 침이 날카롭게 파열음을 내며 얼어붙어 그를 놀라게 했다. 다시 침을 뱉었다. 그러자 채 눈에 떨어지기도 전에 침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마이너스 50도에서는 침이 눈 위에서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공중에서 얼어붙는 것이었다. 마이너스 50도 이하는 분명했지만 정확히 얼마나 추운지는 몰랐다. 그러나 기온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헨더슨 수로의 왼쪽 갈래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곳에는 동료들이 이미 와 있을 것이다. 그가 우회로를 따라가는 동안 동료들은 인디언 수로 지방으로부터 산을 넘어 그곳에 이미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가 우회로를 따라가는 이유는 봄에 유콘 강 기슭에 있는 섬들에서 통나무배를 내어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여섯시까지는 도착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약간 어두워진 다음이겠지만, 먼저 온 동료들이 불을 지피고 따뜻한 저녁밥을 준비해 놓을 것이다. 점심 얘기를 하자면, 그는 재킷 밑으로 불룩 나온 꾸러미를 손으로 눌러 보았다. 점심꾸러미는 손수건으로 싸서 셔츠 안에 넣어 직접 살에 닿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비스켓빵을 얼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스켓빵으로 점심을 할 생각을 하고는 기분이 좋아져서 혼자 웃음을 지었다. 비스켓빵을 잘라 가른 후 베이컨 기름에 푹 적시고 그 안에 큼직한 베이컨 한 조각을 튀겨 놓은 것이 그가 먹을 점심이었다. 그는 큼직한 전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눈 썰매가 지나간 후로 1피트의 눈이 왔던 것이다. 썰매 없이 홀가분하게 다니니까 기분이 좋았다. 사실 그가 갖고 있는 것이라곤 손수건에 싼 점심뿐이었다. 하지만 추위에 놀랐다. 장갑 낀 손으로 감각 없는 코와 광대뼈를 문지르면서, 정말 추운 날씨라고 생각했다. 구레나룻이 무성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튀어나온 광대뼈와 차가운 대기에 돌출해 있는 얼얼한 코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사나이의 뒤에는 그 지방 고유의 에스키모 개인 늑대개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잿빛 털로 뒤덮여 있고, 사촌격인 야생 늑대와 겉으로나 기질로나 거의 다르지 않았다. 개도 이 혹한에 기가 꺾여 있었다. 개는 지금이 길을 나설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판단보다는 개의 본능이 더 정확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기온은 그저 50도를 밑돌 정도가 아니었다. 60도를 밑돌 때보다도 더 추웠고 70도를 밑돌 때보다도 더 추웠다. 실제로는 기온이 마이너스 75도였다. 물이 어는 온도가 32도니, 마이너스 75도란 영하 107도인 셈이다. 개가 온도 따위에 대해서 알 리 없고, 아마 인간만큼 분명하게 머릿속으로 혹한을 의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짐승에게는 본능이란 게 있었다. 그래서 개는 뚜렷하지는 않지만 위협적인 공포를 느꼈고, 이 공포 때문에 개는 사나이가 조금이라도 여느 때와 다른 몸짓을 하게 되면 사나이에게 무언가를 묻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다. 마치 사나이가 야영하거나 어딘가에 피할 곳을 찾아 불을 피우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개는 불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니면 눈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바깥공기를 피해 웅크리고 있기를 바랐다. 개의 입김이 얼어붙어 털 위에 고운 서리처럼 달려 있었는데, 얼어붙은 입김 때문에 개의 뺨이며 주둥이, 눈썹 부분이 특히 하얗게 보였다. 사나이의 붉은 턱수염과 콧수염에도 마찬가지로 서리가 내렸는데 개의 것보다 더 단단했다. 이렇듯 쌓이는 모든 것은 고드름처럼 얼어붙었고, 고드름은 사나이가 따뜻한 입김을 내뿜을 때마다 점점 길어졌다. 사나이는 담배를 씹고 있었는데, 고드름 끝이 입을 막고 있어서 담배즙을 뱉어도 턱에 달라붙었다. 그 결과 턱 수염은 호박처럼 누렇고 단다하게 굳었고, 점점 길어만 갔다. 그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수염은 유리같이 작은 조각으로 부서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나이는 달라붙어 있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이 지방에서라면 흡연자가 물어야 할 벌금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번 정도 이 같은 갑작스런 추위에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때도 이렇게까지 춥지는 않았다. 당시 식스티 마일이란 곳에 있던 알콜 온도계로 기온이 각각 마이너스 50도와 마이너스 55도였다. 그는 굴곡 없이 펼쳐져 있는 숲을 따라 몇 마일을 더 가다가 넓고 평평한 지역을 지난 후, 가파른 기슭을 따라 작은 수로의 언 바닥으로 내려갔다. 헨더슨 수로였다. 사나이는 이 수로가 물길이 갈라진 곳으로부터 10마일 떨어진 곳임을 알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열 시였다. 한 시간에 4마일을 걷고 있으니 열두시 반이면 물길이 갈라지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그곳에 가서 점심을 먹으며 도착을 축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나이가 수로바닥을 따라 힘차게 나아갈 때, 개가 사나이의 발 뒤꿈치에 다시 바짝 달라붙었는데, 기가 죽어 꼬리를 내린 상태였다. 앞서 지나간 썰매가 낸 길이 분명히 보였지만, 썰매를 끄는 개들이 낸 자국 위로 눈이 12인치나 덮여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아무도 이 적막한 수로로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나이는 차분하게 계속 걸었다. 그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물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여섯시에는 동료들과 함께 야영할 수 있을리라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을 건넬 사람도 없었고, 누가 있었다고 해도 입에 붙은 길쭉한 얼음조각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조로이 담배만 계속 씹었고, 호박색 턱수염은 계속 길어만 갔다. 날이 이렇게 지독하게 추운 것은 난생 처음이라는 생각이 이따금 반복해서 들었다. 걸어가면서도 그는 장갑 낀 손등으로 광대뼈와 코를 문질렀다. 이따금씩 손을 바꾸어가며 이 행동을 기계적으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질러도 그가 동작을 멈추면 광대뼈는 얼어 감각이 없었고, 그 다음에는 코끝이 무감각해졌다. 뺨이 이미 동상에 걸린 것은 분명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매서운 날씨면 버드가 끼고 다니던 가죽 코마개를 준비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하지만 결국 별 문제는 아니었다. 뺨의 동상 정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약간 아프긴 했지만 그 정도뿐이지 결코 심각하지는 않았다. 사나이는 마음속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눈만은 날카로웠다. 그 눈으로 그는 강의 변화를 세심히 봐 두었다. 강이 어느 쪽으로 굽고 휘어 있는지, 벌채한 나무가 어디에 쌓여 있는지 등등을 봐두었던 것이다. 또한 발을 어디다 디뎌야 할지 항상 주의하며 걸었다. 한번은 강이 굽은 곳을 돌아오다가 갑자기 놀란 말처럼 겁을 집어먹고 자기가 걸어온 곳을 피하여 길을 따라 몇 걸음 뒷걸음질한 적도 있었다. 그가 알기로는 수로 바닥까지 완전히 얼어붙기 때문에 극지방의 겨울 강에는 물 한 방울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또 그가 아는 바로는 여기저기 강 언덕에서 솟아나오는 샘이 있어 거기서 나온 물이 눈 밑으로나 강바닥 얼음 위로 흐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 해도 이 샘들마저 얼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런 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샘들은 함정과 같아서 3인치에서 3피트 정도의 눈 아래 물웅덩이를 숨기고 있었다. 때로는 반 인치 정도의 얼음이 샘에 살짝 덮여 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덮여 있기도 했다. 때로는 물과 살얼음이 교대로 덮여 있어서, 누군가가 이 얼음에 빠지면 계속해서 얼음이 깨져 어떨 때는 허리까지 물에 젖기도 한다. 그가 그처럼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눈으로 덮여 있는 살얼음이 발 아래 쪽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 정도 추운 날씨에 발이 젖는다는 것은 난처하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적어도 시간을 지체하게 될 터인데 그 이유는 발길을 멈추고 불을 지핀 후 그 불을 쬐며 양말을 벗어 신과 함께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똑바로 서서 수로의 바닥과 기슭을 잘 살펴보고는 물이 수로 오른쪽에서부터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다. 코와 뺨을 비벼 대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또 옮길 때마다 바닥이 괜찮은지 확인하며 강 왼쪽으로 피해갔다. 일단 위험을 벗어나자, 담배를 새로 꺼내 씹으며 시간당 4마일의 속도로 걸음을 계속했다. 다음 두 시간 동안 걸으며 비슷한 함정을 몇 번 만났다. 대개는 보이지 않는 물웅덩이 위에 덮인 눈이 타원형으로 푹 꺼져 있어서 위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겨우 위기를 모면한 적도 한번 더 있었다. 그리고 위험할 것 같아 개를 먼저 보내본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개는 계속 버티다가 사나이가 밀어내자 재빨리 눈 덭인 멀쩡한 바닥을 계속 건너갔다. 갑자기 얼음이 깨지고 한쪽 다리가 물에 빠지자 다른 쪽 다리로 빠져나왔다. 개의 앞발과 뒷발 모두가 물에 젖자 이내 몸에 묻은 물이 얼어버렸다. 개는 다리에 붙은 얼음을 연신 혀로 핥아내더니 눈위에 주저앉아서는 발가락 사이에 생긴 얼음을 물어뜯어내기 시작했다. 개에게는 본능적인 일이었다. 발가락에 얼음이 남게 되면 발이 아프게 될 것이다. 개가 이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개는 그저 생명의 저 깊은 곳에서 내리는 신비한 급명에 따르고 있었다. 개와는 달리 사람은 이같은 문제를 보고 판단을 내린 연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윽고 사나이는 오른손 장갑을 벗고 얼음조각 떼는 일을 도와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손가락이 노출된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손가락에 갑자기 감각이 없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사나이는 장갑을 서둘러 끼고는 손으로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 열두시가 되자 날은 하루중 가장 밝았다. 그럼에도 겨울 해는 저 멀리 남쪽을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평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평선과 헨더슨 수로 사이에 땅이 불거져 나와 있는데, 지금 사나이는 정오의 맑은 하늘 아래 그림자도 없이 수로 바닥을 걷고 있는 것이다. 1분도 틀리지 않고 열두시가 되자 그는 강이 갈라지는 곳에 도착했다. 제때에 도착하여 기뻤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여섯시까지는 동료들과 틀림없이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재킷과 셔츠의 단추를 풀고 점심을 꺼냈다. 점심을 꺼내는 데 15초 정도 걸렸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노출된 손가락들이 얼어 무감각해졌다. 장갑을 끼지 않고 손가락을 다리에다 대고 열두어 번 내리쳤다. 그러고는 점심을 먹으려고 눈 덮인 나무토막에 앉았다. 손가락을 발에 내리쳤을 때 따라오는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알고는 놀랐다. 여태 점심용 비스켓빵을 한입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손가락을 계속 친 후 장갑을 끼우는 동안, 점심을 먹기 위해 다른 한 손의 장갑을 벗었다. 한 입 먹으려 했으나 입 주변에 언 얼음 때문에 힘들었다. 불을 지펴 몸을 녹일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웃음지었다. 그런데 웃는 동안에도 밖에 노출된 손가락이 얼얼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무토막에 앉았을 때 처음 발가락에 온 통증도 이미 사라지고 있음도 알았다. 발가락에 피가 도는지, 아니면 마비되었는지 궁금했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움직여 보고서야 마비되었다고 판단했다. 서둘러 장갑을 끼고 일어섰다. 조금 겁이 났다. 그는 쑤시는 듯한 고통이 발에 느껴질 때까지 쿵쿵 발을 굴렸다. 확실히 추운 날씨라고 그는 생각했다. 설퍼 수로 쪽에서 온 노인이 이 지방엔 때때로 무시무시한 추위가 온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그는 노인을 비웃지 않았던가! 이는 아무도 세상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분명한 사실이다. 추웠다. 정말로 추웠기 때문에 그는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팔을 두드리고 발을 쿵쿵 구르면서 큰 걸음으로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러고 나서 성냥을 꺼내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지난 봄 홍수로 퇴적된 숱한 마른 가지가 있는 덤불 속에서 그는 불을 지필 만한 나뭇가지를 찾아냈다. 작은 불씨를 살려서 곧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소리를 내자 그는 자신의 얼굴을 불 가에 가까이하여 얼음을 녹이고 비스켓빵을 먹었다. 이때만은 주변의 추위도 물러선 듯했다. 개는 불에 데지 않을 만큼 떨어졌지만 몸이 따뜻할 정도로 불 가로 와서 몸을 쭉 뻗으며 만족해했다. 요기를 때우자 사나이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서 편안하게 담배를 피웠다. 그러고 나서 장갑을 끼고 모자에 달린 귀덮개를 귀밑까지 꼭 눌러 쓴 다음, 물길이 갈라지는 곳으로 오르는 수로 길을 따라갔다. 개는 아쉬웠는지 불을 되돌아보았다. 이 사나이는 추위에 대해 몰랐다. 그의 조상들 모두 분명히 영하 107도 정도의 굉장한 추위를 알 리 없었다. 그러나 개는 알았고 그 개의 모든 조상들도 알아서 이 개도 물려받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무섭게 추운 날 돌아다닌다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때는 그저 눈 속에 굴을 파고 편안하게 누워서, 이같은 추위를 내려보낸 저 바깥쪽 세계인 하늘의 표면으로부터 드리워진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개와 사나이 사이에는 어떠한 깊은 교류도 없었다. 개는 사나이의 노예였으며, 그동안 개가 사나이로부터 받은 유일한 애무는 채찍과 그 채찍을 때리기 전의 사나이의 음성뿐이었다. 그는 담배를 씹으며 계속 새로 생겨난 호박색 수염을 움찔거렸다. 또다시 내쉰 입김이 어느새 입수염, 눈썹, 그리고 속눈썹을 흰 성에로 덮어버렸다. 헨더슨 수로 왼편 길에는 별로 샘이 없는 모양인지 반 시간동안 그는 그 어떤 샘이 있을 만한 징후를 보지 못했다. 그는 화가 나서 “빌어 먹을.”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여섯시에는 캠프에 도착하여 동료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불을 지펴서 신을 불에 말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한 시간쯤은 늦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이란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둑으로 올라갔다. 둑 위에는 몇 그루의 작은 전나무 둘레에 홍수 때 쌓인 마루나무가 덤불로 엉켜 있었다. 대부분 작고 마른 나뭇가지들이었는데, 제법 두꺼운 나무토막과 잔가지들도 있었고, 가늘고 마른 지난해의 풀도 많았다. 그는 눈 위에 나온 큰 가지를 몇 개 꺾었다. 그래야만 막 타기 시작한 불꽃이 녹은 눈 때문에 꺼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조금 꺼내서 성냥불을 붙여 불을 피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종이보다는 더 잘 탔다. 받침돌을 놓고 그는 몇 단의 마른 풀과 자잘한 마른 나뭇가지들을 지펴서 약한 불을 돋우었다. 위험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불을 피웠다. 점점 불꽃이 커지자 그는 좀더 큰 나뭇가지들을 불 속에 넣었다. 눈 속에 몸을 웅크리고 덤불숲 속에서 엉켜있는 작은 가지들을 빼내서는 불 속에 넣었다. 실수해서는 안된다. 마이너스 75도 이하에서 발이 젖었을 때는 단 한 번에 불을 피워야 한다. 만약 발이 젖지 않았고 불 피우는 데 실패했다면 반 마일 정도를 달리며 혈액순환은 할 수 있지만, 마이너스 75도에서는 젖고 얼어붙은 발로는 아무리 뛴들 피를 다시 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빨리 달려본들 젖은 발은 점점 더 꽁꽁 얼어붙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설퍼 수로 쪽에서 온 경험 많은 노인이 작년에 그것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는데, 그는 지금 그 교훈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두 발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불을 피우기 위해 그는 장갑을 빼야 했기 때문에 손가락도 빠르게 마비되어 갔다. 한 시간에 4마일 정도의 속도로 걸을 때 그의 심장은 피를 몸과 손발 구석구석까지 뿜어보냈다. 그러나 멈추자마자 심장의 고동도 약해졌다. 말하자면, 우주 공간의 한기가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 지구라는 위성의 끄트머리 부분을 내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사나이는 마침 그 위성의 끄트머리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한기가 내리칠 때 따라오는 엄청난 충격에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몸속의 피는 옆에 있는 개처럼 살아있지만, 또한 그 개처럼 이 무시무시한 추위 앞에서 자신을 숨기고 보호하려 했다. 그가 1시간에 4마일의 속도로 걸을 때는 그는 피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표면 쪽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뒤쪽으로 물러나 몸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손발이 제일 먼저 이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손발은 아직 얼어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젖은 발은 점점 빠른 속도로 얼어가고 있었고, 노출된 손가락도 역시 점점 빠른 속도로 무감각해져 갔다. 코와 뺨은 벌써 얼고 있었다. 온몸의 피부는 혈색을 잃은 채 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안전했다. 그저 발가락과 코와 뺨 정도가 혹한에 노출되었던 것일 뿐, 이제 불이 활활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잔 나뭇가지를 불에 던져 넣었다. 1분 정도 지난 다음에는 손목 굵기 정도의 나뭇가지를 불길 위에 얹을 수 있게 되었고, 그는 젖은 신발을 벗어서 그것이 마르는 동안 맨발을 불에 쬘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눈으로 발을 비빈 후에 불을 쬐었다. 불은 잘 탔다. 이제 안전하다. 설퍼 수로 쪽에서 온 노인의 충고를 기억하고는 미소지었다. 이 노인은 아무도 마이너스 50도 이하의 기온에서는 클론다이크 지방을 혼자 여행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매우 진지하게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래, 그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여기 살아있다. 혼자이지만 목숨을 건진 것이다. 저 노인네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은 여자 같은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라면 겁을 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멀쩡했다. 정말 사나이 대장부라면 혼자서 여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뺨과 코가 금방 얼어가고 있는 걸 알고는 놀랐다. 그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마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손가락이 마비되었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잔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었다. 손가락은 마치 그의 몸뚱어리와 떨어져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잔가지를 잡았을 때 자기가 정말 그것을 집었는지 알 수 없어서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했다. 그와 그의 손가락 사이를 이어주는 줄들이 상당히 느슨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불은 딱딱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고, 춤추는 듯한 불꽃은 생명을 약속하는 듯했다. 그는 가죽 신발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신발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고 무릎 절반까지 올라오는 두툼한 독일제 양말은 철판 같았다. 가죽 신발의 끈은 대화재에 뒤틀리고 마디진 철근 같았다. 잡시 동안 그는 마비된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보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칼집에서 칼을 뺐다. 그러나 그가 신발끈을 자르기 전에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잘못 아니면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전나무 밑에서 불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나무가 없는 빈터에 불을 피웠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숲에서 잔가지를 끌어다가 불에 직접 던지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가 나무 아래서 불을 피웠는데, 그 나무는 그 큰 가지 위에 눈을 이고 있었다. 몇 주일 동안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잔가지를 끌어 모을 때마다 진동이 생겨 약간씩 나무가 흔들렸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문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진동이었다. 저 높이 있는 나뭇가지에서 눈이 쏟아져 내렸다. 이 눈이 그 아래쪽의 나뭇가지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거기에 있던 눈도 또 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나무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이윽고 눈사태처럼 커지면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사나이와 불을 덮쳐 버렸다. 그리하여 불은 꺼지고 말았다. 불이 타던 자리는 갓 떨어진 무질서한 눈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는 아찔했다. 마치 자신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 같았다. 잠깐 동안 앉아서 불이 타던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설퍼 수로 쪽에서 온 노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길동무가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길동무가 불을 피워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불을 다시 지피는 것은 그 자신의 일이었다. 두 번째도 실패해서는 안 된다. 성공한다 해도 발가락 몇 개는 거의 틀림없이 잃게 될 것이다. 지금쯤은 그의 두 발이 몹쓸 정도로 얼었을 터이고, 두 번째 불이 준비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거릴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했지만, 앉아서 생각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는 내내 바쁘게 움직였다. 불을 피울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번에는 믿을 수 없는 나무들이 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빈터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홍수 때 떠 내려와 쌓인 마른풀과 잔가지들은 긁어모았다. 그는 손가락을 모아 풀과 가지를 끌어올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한 움큼은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양의 썩은 가지와 새파란 이끼 조각을 구했다. 이런 것들은 쓸모없는 것이긴 했지만, 그 정도 모으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심지어 불길이 세어지면 나중에 쓰기 위해 꽤 큰 나뭇가지들까지 한아름 모으는 등 그는 체계적으로 일을 했다.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동안 개는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개의 두 눈에는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기색이 보였다. 개가 보기에 이 사나이는 불을 제공하는 사람이었지만, 불은 좀처럼 제공되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사나이는 주머니를 뒤져 두 번째로 자작나무 껍질을 찾았다. 나무 껍질이 주머니 속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비록 손가락으로 느낄 수는 없었으나, 손으로 더듬자 껍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꼭 쥘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자기의 두 발이 순간순간 얼고 있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이 생각 때문에 놀라 주저앉을 듯했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 결과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이빨을 사용하여 장갑을 끼고 두 팔을 앞뒤로 휘두르고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양 옆구리를 때렸다. 앉아서도 이런 행동을 했고 서서도 했다. 개는 줄곧 눈 위에 앉아 있었다. 늑대의 털 같은 꼬리로 앞발을 따뜻하게 감싸서 덮고 있었고, 늑대 같은 뾰족한 귀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볼 때 앞쪽으로 쫑긋 내밀었다. 자신은 팔과 손으로 때리고 흔들고 있는데, 자연의 옷을 입어 따뜻하고 안전한 개를 쳐다보니 한없는 부러움이 솟아났다. 얼마 후 그는 두드린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왔음을 아득하게 알려주는 최초의 신호를 의식했다. 처음에는 약간 따끔거리다가 점점 더해져 마침내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쑤시는 통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사나이는 이 통증을 만족스럽게 반겼다. 그는 오른 손의 장갑을 벗고 자작나무 껍질을 앞으로 가져왔다. 노출된 손가락은 이내 다시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황을 입힌 성냥더미를 꺼냈다. 그러나 엄청난 추위 때문에 손가락은 이내 무감각해졌다. 성냥 하나를 끄집어내려다가 오히려 성냥 모두가 떨어졌다. 성냥을 집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감각을 잃은 손가락으로는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나이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얼어 오는 발, 코, 뺨 따위 생각은 집어치우고 온 정신을 성냥에만 기울였다. 촉각 대신 시각을 사용하여 주시하였다. 성냥 더미 양쪽에 자기 손가락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주먹을 쥐었다. 말하자면 주먹을 쥐려고 애썼다. 하지만 손가락 신경이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장갑을 끼고 성냥 더미를 무릎 안쪽으로 움켜넣었다. 상당한 양의 눈이 따라왔다. 그러나 더 어떻게 잘할 수는 없었다. 좀더 애를 쓴 후에야 사나이는 겨우 성냥 더미를 장갑 낀 손바닥의 끄트머리 쪽에 놓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성냥을 입에까지 옮겼다. 입을 억지로 열려고 하자 얼음이 딱딱거리며 깨졌다. 아래턱을 안으로 당기고, 윗입술을 틀어 비키게 하고, 윗이빨로 성냥 더미를 비벼서 성냥 하나를 집는 데 성공했으나 그 성냥을 무릎 위쪽에 떨어뜨렸다. 이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집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하나 생겼다. 성냥을 이빨로 집어서 다리에 대고 그었다. 스무 번을 시도한 후에야 겨우 성냥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불이 붙은 성냥을 이빨로 물어 자작나무 껍질에 대었다. 하지만 유황이 타면서 나는 연기가 콧구멍을 통해 폐로 들어가자 그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게 되었고, 불 붙은 성냥은 눈 속으로 떨어져 꺼지고 말았다. 성냥이 꺼진 후 찾아온 낙심을 애써 참으며 사나이는 설퍼 수로 쪽에서 살던 노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노인 말로는 마이너스 50도 이하에서는 적어도 둘이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서로 쳤다. 하지만 별 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갑자기 이빨을 써서 장갑을 벗고 두 손을 노출시켰다. 그러곤 양 손바닥 아랫부분을 써서 성냥 더미를 잡았다. 두 팔의 근육이 얼지 않았기 때문에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성냥을 꼭 누를 수 있었다. 성냥 더미를 발에 대고 그었다. 일흔 개의 성냥에 동시에 불이 붙어올랐다. 바람이 없어 성냥이 꺼지지 않았다. 숨막히게 하는 성냥 냄새를 피하려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불붙은 성냥 더미를 자작나무 껍질에 갖다 대었다. 이 과정에서 손에 감각이 되살아옴을 느꼈다. 그런데 실은 살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살갗 저 아래에서 살이 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감각은 고통이 되었고, 고통은 점점 심해갔다. 그래도 그는 성냥불을 나무 껍질에 엉성하게 갖다대면서 살이 타는 고통을 참았다. 나무껍질에는 불이 쉽게 붙지 않았다. 왜냐하면 타들어가는 자신의 두 손이 중간을 가로막고 대부분의 성냥불을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양손을 홱 떼어버렸다. 불타는 성냥은 피시식 하며 눈속으로 떨어졌지만, 자작나무 껍질에는 불이 붙었다. 마른 풀과 아주 작은 나뭇가지를 불 위에 놓기 시작했다. 두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들어올려야 했기 때문에 땔감을 집어서 고를 수가 없었다. 작고 썩은 나뭇조각들이나 새파란 이끼가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을 때는 이발을 사용하여 되도록 잘 뜯어내었다. 사나이는 조심스럽지만 둔한 동작으로 불을 간수했다. 불은 생명을 뜻하기 때문에 꺼지지 않게 해야 했다. 몸 표면에 피가 없어 그는 오한이 났고, 그래서 동작이 더욱 둔해졌다. 꽤 큰 새파란 이끼 덩어리가 작은 불 바로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이끼를 꺼내려고 했으나, 몸이 떨렸기 때문에 이끼에서 벗어났고, 그 결과 그나마 작은 불 한가운데를 헤집어놓고 말았다. 타던 풀과 작은 가지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다시 이것들을 집어 모으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나뭇가지들은 다시 모을 가망이 없을 정도로 산산이 흩어졌다. 하나씩 연기를 피식 내고는 나뭇가지의 불이 꺼졌다. 불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주변을 느낌 없이 둘러보다가 그는 꺼진 불의 잔해 맞은편 눈 위에 앉아있는 개를 보았다. 개는 안절부절못하고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앞발을 교대로 살짝 들어올리고 그때마다 무언가를 바라는 듯, 몸의 무게 중심을 열심히 앞뒤로 움직였다. 개를 보자 야만적인 생각이 들었다. 눈보라를 만났을 때 소를 죽여서는 그 사체 안에 기어들어가 목숨을 구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개를 죽여서 따뜻한 몸 안에 손을 묻으면 손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새로 불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쪽으로 오라고 개에게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음성에는 개를 겁먹게 하는 이상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개는 한 번도 주인의 그런 말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개가 보기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의심 많은 개의 본성이 위험을 감지하게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인지는 몰라도, 개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주인에 대한 공포심이 어떤 식으로든 일어났다. 사나이의 말소리에 개는 두 귀를 내리고는 웅크린 동작과 앞발을 번갈아 드는 동작을 더욱 눈에 띄게 했다. 그러나 개는 사람 쪽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두 손과 두 무릎을 딛고 개 쪽으로 기어갔다. 이상스러운 자세 때문에 개는 다시 의심이 들었고, 그래서 슬그머니 옆걸음질로 피했다. 사나이는 잠시 동안 눈 위에 앉아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자신의 이빨을 사용하여 장갑을 끼고는 일어섰다. 자기가 정말로 서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우선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왜냐하면 두 발에 감각이 없어서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곧바로 서자 개는 의심을 덜었다. 사나이가 채찍 소리 비슷하게 명령조로 말하자 개는 예전처럼 복종하여 그에게 다가왔다. 개가 손이 닿는 거리 안으로 오자, 사나이는 자제력을 잃었다. 그는 두 팔을 개에게 재빨리 뻗쳤다. 그러나 두 손으로 물건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과, 손가락을 굽힐 수도 없고, 손가락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로 놀랐다. 손과 손가락이 얼었고 점점 더 얼어들어 간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고, 그는 개가 도망가기 전에 두 팔로 개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가 눈 위에 앉아 개를 두 팔로 잡고 있는 동안 개는 으르렁대고 낑낑대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개의 몸통을 두 손으로 잡고 앉아 있는 것 이외에 사나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개를 죽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무력한 두 손으로는 칼집에서 칼을 빼서 손에 쥘 수도 없었고 개의 목을 조를 수도 없었다. 그가 개를 놓아주자 개는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계속 짖어대면서 미친 듯이 튀어 달아났다. 마흔 걸음쯤 물러나서는 멈춘 다음 두 귀를 쫑긋 앞으로 세우고 호기심을 갖고 사나이를 관찰하였다. 사나이는 손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이 팔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손의 소재를 알기 위해 눈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이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팔을 앞뒤로 휘두르기 시작했고 장갑 낀 두 손으로 허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작을 5분간 격렬하게 했고, 그러자 그의 심장은 몸의 표면까지 피를 공급했기 때문에 몸이 떨리는 것은 그쳤다. 하지만 손의 감각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느낌으로는 두 손이 두 팔의 끝에 묵직하게 달려 있는 것이었으나 그 느낌을 실제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희미하긴 했으나 죽음에 대한 중압적인 공포가 사나이에게 다가왔다. 이번 일이 단순히 손가락과 발가락이 언다든지 혹은 손발을 잃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을 가능성이 높은 생사의 문제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포감을 더욱 커져 갔다. 그러자 그는 힘이 빠졌다. 방향을 틀어 수로 바닥을 넘어 오래된 희미한 길을 따라 뛰었다. 개가 합세하여 그를 따랐다. 평생 몰랐던 공포를 느끼며, 아무런 의도도 없이 맹목적으로 뛰었다. 눈길을 가르며 허우적거리며 달리다가, 천천히 주위의 사물들에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수로의 기슭들, 오랜 목재더미, 잎사귀 없는 백양나무들과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달린 덕분에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 오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계속 달리면 두 발도 녹으리라. 오랫동안 달리다 보면 야영지에 있는 동료들도 보이리라. 틀림없이 손가락과 발가락 몇 개, 얼굴 중 일부는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면 동료들이 그를 돌보아주고 몸의 나머지 부분은 구해 주리라. 그런데 이와 동시에 자기는 결코 동료들이 있는 야영지에 가지 못하리라는 생각 - 그의 몸이 너무 얼어서 곧 뻣뻣하게 굳어 죽을 것이라는 생각 - 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뒷전으로 밀쳐보냄으로써 마음 속에 두지 않으려 했다. 때때로 이런 생각이 스스로 밀치고 나와서 자신을 바깥 세상에 알리려 했지만 그는 그 생각을 다시 밀쳐넣고 다른 생각을 하였다. 두 발이 너무 얼어서 달리다가 땅을 쳐서 몸의 무게를 받을 때에도 느낄 수 없는 정도인데도 그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 신기하였다. 땅 표면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것 같았고 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날개 달린 머큐리신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신이 땅을 스치며 다닐 때 지금의 자기가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야영장과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는 그의 생각은 한 가지가 잘못되었다. 그는 인내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몇 번을 넘어지고 결국에는 뒤뚱거리다 맥없이 넘어졌다. 일어나려 했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앉아서 쉬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걸어서 계속 가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가 앉아서 숨을 되찾았을 때 자신이 꽤 따뜻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다. 떨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따뜻한 불이 그의 가슴과 몸통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도 코와 뺨을 만졌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뛰었다고 해서 코와 뺨이 녹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손과 발도 풀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에게는 얼어붙은 몸의 부위가 점점 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억눌러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생각을 하면 고통스런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고통스런 느낌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없어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마침내는 완전히 언 자기 몸을 생각하게끔 했다. 견딜 수 없어서 그는 길을 따라 다시금 미친 듯이 뛰었다. 일단 속력을 낮추어 걸었다. 그러나 몸이 점점 얼어온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 또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줄곧 개가 바짝 뒤에서 함께 뛰었다. 그가 두 번째 넘어졌을 때 개는 그의 앞에 앉아서 이상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그를 쳐다보았다. 따뜻하고 안전한 개를 보자 그는 화가 났다. 개에게 욕을 퍼붓자 마침내는 개가 두 귀를 내리고 사나이를 달래는 듯하였다. 이번에는 그에게 오한이 좀더 빨리 닥쳤다. 동상과의 싸움에 지고 있는 중이었다. 동상은 사방에서 그의 몸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몸을 달렸지만, 100피트 정도 달리고는 멈추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최후의 고통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자제력을 회복했을 때, 그는 앉아서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다른 식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떠오른 것은 다름아니라 목이 날아간 채 뛰어 돌아다니는 닭처럼,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글쎄, 어쨌든 얼어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 사실을 점잖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리라. 이렇듯 새로 찾은 마음의 평화와 함께 처음으로 희미한 졸음이 다가왔다. 그의 생각으로는, 자다가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취당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얼어 죽는 것이 사람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더 험하게 죽는 방법도 많지 않은가. 그는 다음 날 동료들이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를 찾아 길을 따라온 동료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여전히 그들과 함께 굽은 길을 따라가다가 눈속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더 이상 동료들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제 몸에서 빠져나와 동료들과 함께 눈속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춥다고 생각했다. 알래스카를 떠나 본토로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정말 추운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다가 이윽고 설퍼 수로 쪽에서 온 노인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노인의 모습이 꽤 선명하게 보였다. 노인은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인장 말씀이 옳았소. 당신 말씀이 옳았던 것이오.” 사나이는 노인에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사나이는 평생 맛본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개는 그를 쳐다보면서 앉아 기다렸다. 짧은 낮이 거의 끝나면서, 긴 황혼이 서서히 다가왔다. 개가 보기에는 불을 피울 기미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개의 경험으로도 눈속에 이렇듯 앉아서 불을 지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황혼이 짙어지자 불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억제할 수 없어, 개는 앞발을 높이 쳐들기도 하고 흔들어대기도 하면서 작은 소리로 낑낑댔다. 그러고는 주인한테 꾸지람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는지 두 귀를 내렸다. 하지만 주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잠시 후 개는 큰 소리로 낑낑댔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 곁으로 바짝 기어들어가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 때문에 개는 털을 꼿꼿이 세우고는 물러났다. 개는 얼마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차가운 하늘에 높이 솟아 반짝이며 밝게 빛나는 별들 아래서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자기가 아는 야영장 방향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음식과 불을 마련해줄 다른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끝>   
74 동행/임철우
고창근
4647 2010-11-17
내가 좋아하는 소설 5.18에 대해 빚지고 있는가... 지금 현 상황에 대해서는 빚지고 있지 않은가... 5.18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동행 임철우 네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나 백여 미터쯤 들어가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바로 거기 길이 나눠지는 지점에 서 있는 전화박스 곁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걸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 오 분 전. 나는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와 그 자리에 서게 될 때까지 초조함은 줄곧 집요하게 목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건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도 더 먼저, 그러니까 네가 일 년 반만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일주일 전의 그 충격적인 밤으로부터 나의 초조함은 이미 시작되었으리라. 너는 마치도 주술적인 힘을 지닌 북소리처럼 어둠 저편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은밀하게 나를 덮쳐 왔다. 그 북소리 속에서 본능적으로 나는 어떤 불길한 파괴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조심스럽게 지켜 오고 있던 휴식과 평온하고 느슨한 일상의 생활감각을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휘저어 놓고 말리라는 걸, 그리고 어쩌면 머잖아 그것들과 가차없이 결별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태까지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험스러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북소리가 점점 가까와질수록 나의 불안과 초조함은 배가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의식의 어느 한 구석에선가 위험신호를 알리는 빨간 비상등이 급박하게 작동을 시작했을 때, 적어도 나는 적절하게 방어자세를 취하든가 아니면 다가오고 있는 그 위험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했어야 옳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경계신호를 울리고 있는 의식의 저편 한구석으로부터 보다더 강력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그 북소리를 기다려 받아들이기를 명령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더욱 확실하게 가슴을 채워 오는 너에 대한 애정으로 전율하며 나는 끝내 너와 또 네가 안겨 줄 불길한 것들마저도 함께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기척이 들렸다. 짐짓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던 나는 이내 긴장을 풀었다. 네가 아니었다. 젊은 여자가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집어넣는 동작을 나는 유리창 너머로 모두 지켜보았다. 집에서 걸레질이라도 하다가 나온 참이었는지 그녀는 허름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저예요. 네네. 어떻게 되었다구 하던가요……어머. 낳았어요? 그래, 뭣이죠. 아들?……네엣? 아니, 낳았는데……에그머니나. 저를 어째…… 여자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또 사산이라니……세상에……두 번씩이나……세상에. 수화기를 걸고 여자가 나오기 전에 나는 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힘없는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발뒤꿈치에서 슬리퍼가 혓바닥을 날름대며 끌려가고 있었다.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래도 너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전화박스 곁에 우체통이 서 있었다. 전신을 빨간 색으로 칠한 그것의 빛깔이 까닭 모를 위기감을 주었다. 접선, 문득 그런 불쾌한 단어가 떠올랐으므로 나는 무심결에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무슨 스파이극 혹은 범죄극에서나 쓰여지는 그 고약한 어휘에 대해 왠지 강렬한 적개심이 치밀어 올랐다. 대신에 <만남>이라는 지극히 정감 어린 말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전화박스를 표시점으로 하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군가는 서슴없이 그런 불쾌한 어휘로 서술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또한 시인해야만 했다. 자꾸만 솜털처럼 일어나는 기분 나쁜 예감을 털어내려고 애쓰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파트 단지 내를 연결하는 길로 이따금 택시가 나가고 들어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눈에 띄지 않았다. 출근시간이 지났기도 했으려니와 어제부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늦가을 날씨 탓도 있으리라. 사과궤짝을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시멘트 건물들이 끝간데가 보이지 않도록 사방으로 이어져 나가 있었고 그 너머로 잿빛 하늘이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한결같이 분홍색 페인트를 덕지덕지 개어 바른 채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는 그 균일한 구도 속에서, 그리고 건물 측면마다에 씌어져 있는 숫자들과, 저마다 똑같이 유지하고 있는 건물 모서리의 칼로 자른 듯한 대담한 각도에 대해서 나는 까닭 모를 심한 혐오감과 반발을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너는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의외에도 정문 쪽에서 나타난 너는 참으로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꾹꾹 눌러 쓰고 있는 차양의 넓은 모자는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를 연상케 했고, 짙은 검정색의 잠바는 H건설회사라는 글자가 노랑 색으로 가슴팍에 뚜렷이 박혀 있었다. 세상의 의심스런 눈초리부터 벗어나기 위해 너는 어디선가 그 모자와 유니폼을 구해 걸치고 이렇게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차림새는 오히려 어색함을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몇 가지의 소도구들이 너를 너답지 않게 위장시키기에는 좀 빈약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나와 주었구나. 많이 기다렸니. 아니. 너는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그건 너의 오랜 버릇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내 어깨에 와 닿는 충격도 훨씬 미미했다. 무엇보다 너는 불안한 시선을 연신 좌우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인 듯했지만 사실은 어느 것이나 모조리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그 분명한 변화가 나는 서글펐다. 대관절 어디서 오는 거냐. 이 근처 어디인가보지 그 집이? 나는 네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함으로 나는 조바심을 하고 있었다. 벌써 잊었니. 그런 얘긴 묻지 않는 게 너나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야. 모르는 게 속 편하니까……. 짜아식. 내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애매하게 네가 따라 웃었다. 웃자란 보리밭처럼 무성한 구레나룻 사이에서 내비치는 치아가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넌 거의 수염을 깎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 네가 나타났던 날, 내가 물었을 때 너는 조금이라도 얼굴이 달라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수염을 그냥 두기로 했노라고 대답했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나는 우리가 이용할 몇차시간표에 대해 설명했다. M시로 가는 열차는 시내에선 매일 세 차례뿐이었지만, 가까운 S읍에서는 비교적 자주 있었다. 서울에서 M시로 다니는 열차들이 S읍을 경유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내에서 M시를 왕복하는 버스는 거의 매 십 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었으나 암만해도 그보다는 안전한 열차를 택하기로 했다고 너는 어제 전화로 내게 말했었다. 좋아. S읍으로 가는 거야. 마침내 네가 결정을 했다. 거기서라면 마침 한 시간 후에 완행열차가 있어. 하지만 정작 S읍까지 가는 게 문젠데…… 괜찮아. 택시로 가면 돼. 돈은 내게 있으니까 염려 말고. 넌 선선히 대답했다. 우리는 정문에 다다랐다. 경비실 안에서 경비원인 듯한 두 사내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너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있었으나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네 말마따나 모르는 것이 피차 좋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넌 비밀투성이였다. 아직도 나는 네가 기거하고 있는 집조차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전화를 걸어오는 건 언제나 네쪽이었고 어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밤 열 시가 막 지날 즈음이었다. M시로 가는 열차편 좀 알아봐 줘. 너랑 같이 동행하고 싶은데 그래 주겠니?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그렇게 말했다. 이 날은 강의가 있었다. 몇 과목은 이 날 종강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대학에서의 마지막 강의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까짓 강의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나는 M시에로의 위험한 나들이의 이유에 대해서, 또 왜 하필 나와의 동행을 네가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퍽 궁금했다. 그러나 그 문제 역시 입을 다물어 두기로 하자. 어차피 동행할 거라면 차차 알게 되겠지. 정문 앞에서 택시를 탔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운전수는 S읍까지는 시외요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오백 원을 깎은 액수로 합의를 보았다. 차는 종합운동장을 끼고 난 고가도로의 오르막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우리는 침묵했다. 멀리 산이 보였다. 산의 거대한 몸체가 언제나처럼 도시를 품에 안은 채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우직한 선머슴 같은 산의 무릎에서 이 도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들어 살고 있었고, 우리 둘 역시 거기서 나고 자라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산은 이젠 어느덧 짙은 남빛 슬픔의 빛깔로 음울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차장 너머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문득 너와 나를 떼어놓았던 지난 일 년 반의 시간과 그 마디 끊긴 시간의 한쪽 끝을 저마다 손가락에 감아쥐고 다시 되돌아온 지금의 우리 둘을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어쨌든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님을 서로가 깨닫고 있었다. 전장으로부터 돌아온 귀환병들처럼 우리는 여전히 우리였으나, 또한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실로 까마득하게 오랜 세월같이 여겨지는 일종의 진공상태와도 같았다. 너와 나 사이에는 거대한 협곡이 밑도 끝도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아가리를 벌린 채 존재하고 있었고, 그 양쪽 벼랑 끝에 마주서서 우리는 이 순간 아찔한 절망감과 당혹감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곁에서 어깨를 바싹 붙이고 앉아 있는 네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좀체로 지워지지 않고 있는 그 서먹한 느낌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따져 보려 했다. 그러나 이내 너의 짙은 구레나룻과 부어 오른 듯 생기 잃은 뺨, 그리고 무심한 척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는 너의 눈빛 속에서 나는 쉽사리 서글픔을 읽어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네가 깊숙이 눌러 쓰고 있는 그 우스꽝스런 모자와 검정잠바와 잠바에 쓰인 H건설회사라는 생소한 글자에게서 나는 우리들의 단절된 시간을 절박하게 확인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전엔 그처럼 당당하고 활기에 넘치던 너에게서 내가 읽어야 할 것은 결코 그따위 애잔한 아픔이나 서글픔이어서는 안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우린 어쩔 수 없이 시인해야만 했다. 그런 모든 변화들을 배태하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기에는 그 여름 이후 아직 우리들의 망가져 버린 의식은 회복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요즘은 손님이 많은 편인가요? 문득 네가 운전수에게 묻고 있었다. 어이구. 말도 마슈, 기름값은 내릴 줄 모르고, 또 얼마 전에 택시가 이 백 대나 새로 더 나왔답니다. 사람 수효에 비해 차가 많은 편이라서 신통치가 않다고 그는 대답했다. 너는 이런저런 얘기를 끄집어내어 그와 주고받았다. 그런 네 음성이 어딘가 조금은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아마 너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운전수는 이따금 앞거울을 곁눈질하며 우리들을 살펴보곤 했다. 어쩌면 그것이 운전수들의 단순한 버릇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너는 퍽 조바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벌써 일 년 반이 지난 일이다. 하루하루를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이처럼 어설픈 소도구로 변장하고 나선 네 얼굴을 쉽사리 포스터 속의 사진과 일치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기야 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며칠 전에 너를 돌고개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마침 문학부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가슴이 철렁해서 돌아다보았는데, 그 말을 하고 있는 녀석은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너도 그 녀석을 모를 것이다. 그렇듯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언제든지 확인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두려운 일일 것이었다. 차는 광천동 공단 앞을 지나 S읍으로 가는 길을 마악 접어들고 있었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가 한층 칙칙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이내 국군병원이 좌측으로 스쳐 지나갔고 차는 언덕을 넘어섰다. 거기서부터는 시외였다. 길 양쪽의 집들이 차츰 뜸해져 갔고 저만치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 속력을 내고 있었다. 네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일 주일 전이었다. 그날 저녁 식구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 있다가 나는 그 전화를 받았었다. 뜻밖에도 K였다. 그는 나보다 먼저 졸업해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웬일이냐. 전화를 다 걸구. 그냥…… 뭐 좀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지금 우리집으로 와. 느이 집으로? 잠시 의아해하던 나는 문득 긴장하고 말았다. 어딘가 들떠 있는 듯한 K의 음성에서 언뜻 짚이는 게 있었다. 택시를 타고 K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외등도 없는 컴컴한 골목을 걸어들어가며 난 줄곧 흥분해 있었다. 일 년 반 동안의 길지 않은 시간이 너를 만나러 가는 내 가슴을 그처럼 어지럽게 휘저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생각해 보면 그간 우리는 너무 오래 살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던 일 년 반 동안에 겨우 스물 일곱 살 동갑나기인 우리는 터무니없이 늙어 버린 것이었다. 내 직감은 맞았다. K가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네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반갑다. 네가 맨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우리는 손을 꽈악 움켜쥐고 한순간 게걸스레 서로를 응시했었다. 너와 내가 맨 먼저 나눈 인사는 그것뿐이었다. 신파극에서처럼 와락 얼싸안고 포옹을 할 수도 있었다. 혹은 눈에 물기가 핑그르르 돌만큼 오래 굶주려 왔던 우정의 재회를 감격적인 장면으로 그럴 듯하게 그려내는 것도 그런 대로 좋았으리라.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와의 극적인 해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이할만치 우리는 말을 절약하고 있었고, 나는 자꾸만 끊어지는 호흡을 정돈하려 애를 써야 했다. 몸이 부쩍 늘었구나. 글쎄 말이다. 맨날 먹고 자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하마같이 살만 쪄버렸어. 허허. 정말 너는 네 말마따나 하마가 되어 있었다. 원래 몸집이 크긴 했지만 전에는 그처럼 비대하다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두부같이 물렁하게 느껴지는 군살과 얇은 셔츠를 들추고 나온 불룩한 배를 보고 있으려니 너무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상상하고 있던 네 모습은 초웨한 얼굴과 비쩍 말라 버린 몸뚱이 쪽에 보다 가까왔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한여름에조차 창문을 마음놓고 열기 힘든 불안 속에서 날마다 방구석에 갇혀만 지냈을 터이므로 운동부족일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러고 보니 그건 살이 아니라 부어 오른 것이라고 해야 옳을 대단히 불균형적인 건강상태라는 사실을 나는 곧 깨달았다. 덕분에 방구석에서 책만 봤겠구나. 짜식. 무식한 티를 많이 벗었겠는데. 응. 그럭저럭. 하지만 그까짓 책…… 봐서 뭘하겠니. 나는 예전에 하듯, 우리들 사이의 농지거리를 해묵은 약속처럼 꺼내어 억지로 맞추어 보려 했으나, 그것마저 잘 되지 않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끼어들었다. 무언가가 자꾸만 우리를 서먹하게 만들고 있었다. 죄스러움과 쑥스러움, 꺼림칙함과 불편함…… 그런 대단히 혼탁하게 엉크러진 감정들이 너와 나, 그리고 K를 에워싼 채 견디기 어려운 끈끈한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하고픈 말은 산더미 같았는데 정작 나는 겉배운 외국어처럼 서툴게 더듬고만 있었으니……. 하기야 네가 떠난 뒤, 남은 우리가 보내야 했던 몇 개의 계절을 지금 와서 얘기한들 뭘하랴. 강의실의 빈 의자들을 자꾸만 외면하려고 애쓰며 우리가 비운 그 숱한 술잔과 천지 같은 넋두리와 악취 풍기는 갖가지 절망의 몸짓들을 어떻게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냐.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고생이 많았겠구나. 뭐 그럭저럭…… 죽지 않으니까 살게 되더라. 허허.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과 똑같은 상대방의 어설픈 웃음을 확인하는 고통스러움을 참아내야 했다. 역시 끊어진 실 마디는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해져 오는 서먹함을 나누어 지니며 우리는 침묵했고 또한 소리 없이 저마다 우리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 서먹함은 마치도 내가 상상하고 있던 말라깽이인 너의 모습과 하마같이 부어 오른 지금의 네 모습과의 사이에서 드러나는 차이만큼이나 나를 당혹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한순간, 나는 네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짙은 피로의 흔적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몸을 떨고 말았다. 그토록 절망적인 피곤함을 네게서 확인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어떤 유랑자의 눈빛도 그처럼 짙게 드리워진 피곤을 지니지는 못할 것 같았다. 쉬고 싶어.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듯한 얼굴로 너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래. 이렇듯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너는 다시 고향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이미 너를 따뜻하게 맞아줄 수 없는 이방인의 동네로 변해 있었다. 이 도시의 골목길과 구멍가게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훤하게 외우고 있을 만큼 너는 여전히 고향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제 이 도시는 더이상 예전의 너를 기억해 주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까닭에 너는 이렇듯 고향에 돌아와서까지도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밤에만 박쥐처럼 기어나와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시켜 친구를 불러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택시는 긴 콘크리트 다리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 빈약한 강줄기가 저만치 늦가을의 퇴색한 들녘을 구불구불 기어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연기를 내보내지 위해 유리문을 반쯤 열었다. 바람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왔다. 비행장을 옆에 낀 곧고 넓은 도로에서 운전수는 꽤 속력을 내고 있었다. 역전 광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여기저기 현수막과 안내판 따위가 세워져 있는 광장을 우리는 가로질러 가야 했다. 역사 왼쪽에 파출소가 보였고 여행장병 안내소라고 씌어진 간판을 지나 대합실로 들어섰다. 나는 천정 바로 밑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시간표를 확인했다. 역시 삼십 분 후에 M시행 완행이 있었다. 문제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였다. 돌아다보니 너는 저만치 구석진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나는 네가 내심 안절부절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대합실 안에서 유난히 우리들만 이물질처럼 다른 사람들 속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만 같은 어리석은 조바심이 일었다. 교실 하나 크기 정도의 대합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거기엔 의자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것들은 모두 옥외 광장에 놓여 있었다. 아마 건물이 비좁은 탓인 듯했는데, 쌀쌀한 날씨에 쫓겨 사람들은 대부분 대합실로 들어와 무료히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어떻게 할까.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근처에 다방이 있긴 했으나 네가 반대했고, 그렇다고 무모하게시리 번잡한 대합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우리는 밖으로 나가 광장의 벤치에 앉기로 했다. 긴 나무의자가 열 두어 개쯤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귀퉁이를 차지했다. 한동안 우리는 담배만 피웠다. 가까운 공중변소로부터 지린내가 흐물흐물 풍겨 나왔다. 대부분이 시골사람들인 남녀들은 눅진한 암모니아 내음을 옷에 묻히며 번갈아 드나들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엔 젊은 패거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계집애들이 둘 끼여 있었고 나머지 셋은 입영영장을 기다리고 있을 또래의 사내들이었다. 하나같이 건달기가 몸에 밴 사내녀석들의 얼굴은 불쾌하니 달아올라 있었고 계집애들은 멋대로 히히덕거렸다. 어쩌면 같은 패거리 가운데 하나였을 어떤 사내의 결혼식에나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땅콩이며 오징어 따위를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낄낄대며 먹고 있는 그들의 주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나는 차라리 부러웠다. 대합실 건물의 외벽에 갖가지 벽보가 어지러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불조심. 자연보호. <속은 인생 어제까지, 밝은 인생 오늘부터>라고 적힌 방첩포스터, 그리고 그 옆으로 하사관 모집광고와 지명수배자들의 사진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십 칠 세. 신장 백 칠십 오 센티미터. 미남형에 호리호리한 체격. 그 아래에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네 사진도 틀림없이 끼여 있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바로 내 곁에 앉아 있는 우스꽝스런 차림의, 얼핏 보면 사십대쯤으로나 뵈는 더부룩한 구레나룻의 뚱뚱한 사내를 나는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사진 속에 앳된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쿡쿡 웃고 말았다. 너는 무심한 표정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냐, 그냥. 흐흐흐. 네 사진 본 적이 있니? 어디……? 내가 턱끝으로 벽보를 가리키며 웃었고, 잠시 그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던 너는 고개를 저었다. 임마, 너 그 치들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더구나. 몸이 후리후리한 미남형이란다. 너더러. 으흐흐흐. 그래? 비로소 너는 조금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낮게 한숨을 깔아 내쉬며 허공에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후회를 씹으며 발끝에다가 시선을 박았다. 온몸이 모래 속에 묻힌 듯 꺼끌꺼끌한 느낌에 커다랗게 고함이라도 내질렀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우리는 어디에서고 네 얼굴과 마주쳐야만 했었다. 극장이나 다방, 식당, 대합실, 술집, 당구장…… 그 어디를 가나 너는 줄곧 우리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지난 봄, 졸업여행을 갔던 제주도 어느 여관의 방안에까지 쫓아들어온 교복차림의 너 때문에 그날 밤 우리는 녹초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고 엉망으로 추태를 떨어야 했다. 하지만 차라리 그때가 더 우리에겐 마음 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사진 속에 너를 가두어 놓고 나서 이따금 낡은 앨범을 펼치듯 적당한 양의 감상과 자기합리화를 취향껏 덧칠해 가면서 너를 들여다볼 수 있었을 동안만은 그래도 너는 우리들에겐 여전히 기억 속의 이름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네가 다만 과거의 기억 속에서 머물러 있어 주는 한, 그래도 우리는 술에 취하면 잠들 수가 있었고, 가끔은 아픈 상채기를 손톱으로 할퀴어대면 저주 섞인 넋두리를 퍼부어 대다가도 그것이 끝나면 사실은 더 많은 일상의 권태와 망각 속으로 쉽사리 몸을 던져 넣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피곤했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힘겨웠으므로 우리는 차라리 잠들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비된 의식과 교살 당한 영혼의 희뿌연 혼돈의 나락을 향해 까마득히 침몰해 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 모두들 가라앉고 있었다. 저마다 탈색된 눈빛으로 심연의 저편으로 어느덧 차츰차츰 가라앉아 가고 있는 참이었다. 잠들어라. 깊이깊이 잠들어라. 영영 깨어나지 않을 잠 속으로 투신하라. 깊이깊이. 오래오래……. 어디선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귓전에 불어오는 소리. 소리. 소리. 그 불경한 주문을 들으며 우리는 침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마다 그 감미로운 속삭임을 이렇게 은밀히 서로서로 따라서 되뇌인다. 잊어라. 잊어버려라. 옛날은 옛날일 뿐. 기억은 기억일 뿐. 보다 새롭고 싱싱한 내일을 위해 악몽은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지워 버려라. 깨끗이. 완벽하게……. 아아. 그런데 하필 이 순간에 네가 나타난 것이다. 그 불쾌하고 섬뜩한 악몽의 흔적을 우리의 졸리운 뇌리로부터 감히 곡괭이질해내기 위한 하나의 음모로서, 그리고 그 악몽의 명백한 증거물로서 네가 나타난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어거지를 쓰듯, 우리의 이 몽롱한 최면의 당밀분을 함부로 휘저어 희석시키려는 당돌하고 무모한 음모와 함께 너는 어쩌면 우리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하여 억지로 너를 가두어 놓기를 원했을지도 모르는 저 네모난 사진 속으로부터 돌연히 뛰쳐나와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분명한 실체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는 이제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통증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빵봉지며 낡은 휴지조각들이 발밑을 굴러 지나갔다. 너는 그새 몇 개의 담배를 연거푸 피워 물었고 나는 자꾸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저쪽에서 히허덕대며 장난질을 하고 있던 술 취한 젊은 녀석 중의 하나가 토하려는 시늉으로 왝왝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라에서 일어났다. 개찰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앞서서 개찰구를 나섰다. 우리는 각자 표를 따로 지니고 있었다. 그러기를 네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만일의 경우에는…… 하고 넌 말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기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화단 귀퉁이의 벽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화단엔 말라붙은 사루비아가 드문드문 꽂혀 있었다. 반대편 플랫폼에 멈추어 있는 열차 안에서 승객들이 무심한 눈길로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하늘은 한층 짙은 잿빛으로 무겁게 걸려 있었다. 미안하다. 자꾸 심부름 시켜서……. 문득 네가 말했다. 미안하긴. 짜식. 새삼스럽잖아. 나는 건성으로 웃음을 흘리다가 갑자기 내가 했던 말을 다시 입안에 집어넣고서 우둑우둑 씹어 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관절 왜 이럴까. 어째서 오늘은 너와 나누는 말들이 이렇듯 모조리 이상스런 꼴로 변해 버리기만 하는 것일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애매하게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 지금껏 거처를 옴길 때마다 늘 그랬어. 손가락으로 성냥개비를 분지르며 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녹슨 쇠붙이 내음과 비릿한 석탄 냄새가 스며 있었다. 커다란 등을 구부린 채 앉아 있는 네 모습은 마치도 야단을 맞고 난 어린애 같았다. 피해라고…… 대관절 누가 피해를 주는 쪽이고 누가 당하는 쪽이란 말인가. 고향에 돌아와서까지 이렇듯 숨어다녀야 하는 너는 누구며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나는 또 누구이냐. 결코 장난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그런 식의 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불현듯 지독한 거부감을 느꼈다. 정말이지 너와 나는 한 번도 그런 식의 거북한 대화를 나눈 적이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들을 예전의 우리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나는 아까와 똑같은 의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맨 뒷칸으로 올랐다. 생각보다 빈 자리가 많았다. 구석진 창 쪽을 택해 우리는 마주보고 있었다. 퍽 낡고 지저분한 인상을 주는 객차였다. 푸른색 천으로 씌워진 의자는 쿠션이 거의 없이 팍팍했고 군데군데 엉겨붙은 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예정된 시각보다 오 분 늦게 완행열차는 출발했다. 시커멓게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역 건물과 주변의 낮은 함석 지붕들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역 근처의 모든 집들은 한결같이 지저분하고 우중층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나는 멀리 시가지 너머로 어둡게 내려앉아 가고 있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열차는 점점 빠르게 진동을 시작했고 이내 탁 트인 벌판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이따금 늦은벼를 배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운기에 가득히 볏단이 실려 논길을 지나가기도 했고, 지붕에 빨간 고추가 널린 외딴 농가의 마당에서는 갓난애를 업은 계집아이들이 고무줄을 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약간 마음이 느긋해지는 느낌이었다. 너는 비스듬히 모자를 위로 올려 쓴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난 문득 네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음울한 그늘을 보았다. 그것은 예의 그 피곤함이었다. 넌 여전히 그 짙고 어두운 피곤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무너져내릴 것만 같이 지쳐 있는 네 눈빛이 새삼스레 가슴을 후벼냈다. 그 동안 내가 서울에서 이집저집으로 거쳐를 옮겨 다닌 것만도 자그만치 열 네 차례였어. 때로는 하룻밤만에 쫓겨나다시피 한 적도 있었으니깐…… 정말이지 너무 지쳤어. 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해. 어떤 날은 에라,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벌떡 뛰쳐나가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도 들어. 그렇게 너는 며칠 전 내게 말했었다. 제복 차림의 승무원이 유리문을 밀고 나타났다. 그는 우리 쪽을 힐끔 쳐다보았을 뿐 곧 지나쳐 버렸다. 어깨에 두른 붉은 헝겊에는 <공안>이라고 씌여져 있었다. 우리는 무심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황황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가 여기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순임이는 알고 있니? 내 물음에 너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이윽고 너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고개만 한 번 흔들었다. 어째서…… 누구보다도 가장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리고 싶었는데…… 서로를 위해서 아예 참기로 했다. 역시 모르는 것이 약이니까 말야. 너는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아마 네 추측대로 순임이 역시 방문을 받았을 것이리라. 알고 있을 거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읍니까. 순임은 그때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몰라요. 아무것도. 아마 그녀도 나처럼 그렇게 대답했으리라. 모릅니다. 내가 그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몰라요. 정말 모른다니까요. 아벨을 흙 속에 묻어 놓고 돌아와 피묻은 두 손바닥을 뒤로 감추며 부인하는 카인처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리 우리에겐 훨씬 편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말마따나 모르는 것이 약이라니까. 어쨌든 그들 앞에 섰을 때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리에 힘을 주려 애쓰면서도 왠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몰라요. 모릅니다. 너의 행방을 모른다는 사실이 마치 결단코 침해받아서는 아니 될 무슨 엄청난 진리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 사실이 부당하게 의심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억울해하고 통분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나는 제법 완강하게 부인했었다. 명백한 무지는 때로 인간을 용감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과연 그랬다. 그때 난 나답지 않게 용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나를 돌려보내야 했다. 믿어 보겠소. 하지만,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돌아서는 등뒤에서 사내가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도 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겠지? 누구 말야. 순임이. 아마 그럴 거야. 지난봄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후로는 나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만……. 네가 다시 차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그녀와 마주쳤다. 몰라보게 얼굴이 안되어 보여 안타까왔다. 바다가 보이는 시골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순임은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그저 그렇죠 뭐, 라고만 대답하며 쓸쓸히 웃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재미있다고 했다. 자취방에서 혼자 무료할 때면 시집을 읽곤 해요. 그러다가 가끔은 눈물을 쏟곤 하는 부끄러운 버릇이 생겨 버렸다며 그녀는 시집 하나를 골라들고 총총히 돌아섰다. 유난히 가날퍼 뵈는 그녀의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묻혀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제서야 나는 정작 너에 대한 얘기를 한마디도 주고받지 못하고 헤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머니께는 연락드렸니. 아니. 하지만 얼마 전에 이모님댁으로 대신에 전화를 했었으니까 알고 계실 거야. 물론 고향에 와 있다는 얘긴 안 했어. 이모는 그냥 울기만 하시더구나…… 너는 담배연기를 차창 밖으로 불어날리며 말했다. 들판을 질러 나 있는 황톳길을 시골아이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찾아갔을 때 네 어머니는 마침 꽃밭에 물을 뿌려 주고 계셨다. 얼마 전부터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노라시며 내게도 그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네가 지내던 방은 아직 치우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과 벽에 걸린 옷, 책상 위에 놓인 네 영어사전까지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 녀석은 쉽사리 죽지 않는다. 어디엔가 꼭 살아 있으리라고 난 믿구 있어. 오랜 가뭄으로 희뜩희뜩 말라 가는 화초에 물을 뿌려 주시며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던 것이었다. 조그만 시골역을 지나 기차는 M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때로는 역사(驛舍)조차 없는 간이역에서 한참씩 정차하곤 했으므로 과연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역에 닿을 때마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느라 왁자지껄했다. 이윽고 창밖으로 뿌연 흙빛 강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산강이었다. 헐벗은 들녘을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강기슭엔 어디에나 반쯤 진흙을 뒤집어쓴 갈대가 껑충하니 늘어서 있었고 탁한 강물은 흐르기를 멈추어 버린 듯 맥이 빠져 있어 보였다. 우리는 꽤 오래 침묵하고 있었다. 그 침묵의 틈바구니에서 가끔씩 입을 열어 보곤 했지만 어느 것도 우리를 한데 묶어 놓지 못하고 이내 끊어져 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렇게 토막난 언어의 파편들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를 몰라 쩔쩔매었다. 나는 너와 함께 마지막으로 연습했던 그 연극에 대해서 얘기했다. 석 달 동안이나 라면으로 허기를 채워 가며 빈 강당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냈던 우리들은 끝내 막을 올릴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을 때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었다. 공연을 이틀 앞둔 그날, 세트 설치까지 모두 끝난 무대 위에서 우리는 막걸리를 받아다 놓고 목이 터져라 뽕짝을 불렀다.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난 너는 무대 위로 뿌르르 쫓아나가더니 무대장치를 난폭하게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벌겋게 술이 올라 우리는 말없이 네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또 하나의 처절한 연극만 같았다. 그 외에도 나는 학교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우리들의 은사와 친구들에 대해서, 분필가루와 먼지 냄새가 배어 있는 강의실과 잔디밭과 등나무 벤치에 대해서, 그리고 유난히도 비가 오지 않았던 지난해 여름 어느 날, 말라붙은 도서관 앞 연못 속에서 흙반죽 위로 길게 자국을 남기며 뜨거운 여름 한낮을 배로 북북 기어다니던 금부어들과 그놈들의 지겨운 헐떡거림에 대해서 나는 이야기했다. 이제 난 고향이…… 싫어졌어. 마침내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두려워지고 있었다. 거리에 나서면 누구의 이마에나 음습하게 드리워져 있는 악몽 같은 기억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한결같이 낯익게만 느껴지는 얼굴들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짙은 피곤함을 보았다. 어쩌다 마주치면 사람들은 문둥이처럼 오그라진 가슴을 숨기고 저마다 실실 눈길을 피해 갈 뿐 어느덧 모두들 이제는 차라리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잠이었다. 나는 고향의 그 혼곤한 잠이 싫다고, 무덤처럼 무겁게 내리누르는 한낮의 수면이 두려워졌다고 네게 얘기했다. 너, 은유를 쓰는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내 얼굴을 찬찬히 건너다보고 있다가 네가 소리없이 웃었다. 예전에도 너는 늘 내가 은유법을 너무 자주 쓰는 버릇이 문제라며 비꼬듯 말하곤 했었다. 현명해. 너는 분명히…… 하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현명하다는 것이 결점이 되는 경우도 있거든. 예를 들면, 눈은 크지만 입이 너무 작은 사람처럼 말이야. 임마. 입을 크게 키워라. 그러지 않을 바엔 차라리 눈을 작게 뜨든지. 그것이 아마도 앞으로 네가 세상을 무난하게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르잖아. 언젠가 그렇듯 네가 해준 말을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별안간 시야가 캄캄해져 버렸다. 천정의 전구가 눈을 부릅떴고 한동안 쿨쿨거리는 쇠바퀴의 진동만 객실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터널로 들어선 것이었다. 물밑으로 까마득히 가라앉고 있는 듯한 어지러움증으로 문득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나는 무엇엔가 쫓기는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며 맞은편에서 흐릿하니 지워져 가고 있는 네 모습을 눈으로 더듬었다. 왜 돌아왔느냐. 무엇 때문에 그 잊어버리고 싶은 어둠속으로부터 너는 이렇게 뛰쳐나온 것이냐. 제발 이대로 내버려 두어 다오. 우린 자고 싶다. 이 평온한 잠에서 더는 깨어나지 않고 오래오래 누워 있고 싶다. 물론 우리는 너를 사랑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너는 우리의 사랑을 나눠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도 역시 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항문 위쪽 뭉툭하게 잘린 꼬리뼈의 흔적처럼 우리들의 아이들에게까지도 오래도록 남겨지게 되리라. 하지만 제사(祭祀)는 이미 끝났다고 믿고 싶은 걸 어찌하랴. 이제 새삼스럽게 제단으로부터 치워져 버린 순결한 짐승의 가죽, 아니 그놈의 핏자욱 하나 털 한 오라기조차도 감히 보여주려 하지 말아 다오. 제식은 끝났으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되돌려주신 그 전능하고 자애롭기 그지없으신 신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안식과 평온과 권태의 밤을 그 제사에 대한 당연한 보답으로 받아 누려야 할 차례이므로, 제발 이제는 그냥 내버려 다오. 우리는 피곤하다. 너무도 피곤하여 다만 자고 싶다. 자고 싶다. 눈앞이 다시 환해졌다. 천정의 전등이 이내 꺼졌다. 터널을 벗어나기까지의 짧은 순간에 나는 그렇듯 어둠 속에서 너에 대한 은밀한 배신을 혼자 재빨리 해치워 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나는 너를 쳐다보기가 두려웠다.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분간키 어려운 온갖 감정들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엉켜져서 마치 커다란 갱엿 한 덩이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무엇인가에 대한 죄스러움과 분노, 그리고 혹시는 내 자신에게 느끼는 혐오감과 연민 혹은 서글픔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둠이 터널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버리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나는 그런 혼돈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차창 너머로 멀리 구불구불 휘어져 흐르는 사행천의 모습이 다시 보이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내 앞에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열차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오밀조밀한 기와지붕들이 나타났다. 그 위로 곤충의 더듬이 같은 무수한 TV 안테나들이 삐죽삐죽 돋아나 있었다. Y시였다. 거기서 종착역인 M시까지는 삼십여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승객들이 선반에서 짐을 끌어내릴 차비를 하고 있었다. Y역에서는 팔 분 가량 정차하겠노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우리는 그 동안 잠시 풀어 두었던 긴장감을 일깨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기차가 플랫폼을 떠났다. 하나 둘 수은등이 커지고 있는 역사를 뒤로 밀어내며 나는 자꾸만 가슴 한 귀퉁이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내리는 듯한 느낌에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쓸쓸했다. 참으로 견딜 수 없도록 쓸쓸한 저녁이었다. 기차는 마악 시의 외곽을 벗어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하늘은 어두웠고 차창 밖 거리마다 사람들은 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참이었다. 철로 옆 작은 길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무심히 지나갔고 조무라기 아이들이 뭐라 소리를 지르며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언덕에 굴 껍질처럼 다닥다닥 맞붙어 있는 지붕들이 어둠 속에서 차츰 제각기의 윤곽을 허물고 한 덩어리가 되어 갈 무렵이면 사람들은 저마다 집을 찾아 골목을 돌아오고, 부엌에선 식구들을 맞기 위해 밥상을 차리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분주할 것이었다. 집집의 창문마다 하나 둘 나팔꽃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불빛의 송이송이를 헤아리다 말고 나는 몇 번이나 마주앉은 네 얼굴을 우울하게 훔쳐보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까닭 모를 서글픔으로 황급히 너를 외면하며 나는 차창 밖으로 눈길을 던지고 말았다. 열 네 번. 그 일 년 반 동안 끊임없이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었을 너의 피곤한 여정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결국 넌 이렇게 돌아왔다. 스무 일곱 해가 되도록 너를 키워 준 고향으로 다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너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 까닭에 지금 너는 추방당한 이교도처럼 고향의 변두리를 숨어 헤매고 있는 것이리라. 기어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긴 빗발이 유리창에 부딪치며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유리창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 보았다. 빗물의 차가운 감촉이 부드럽게 손에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기차가 급정거를 했고 우리는 모두 의자로부터 몸이 퉁겨나올 듯한 세찬 충격을 받았다. 기차는 얼마쯤을 더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정지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고다. 사람이 치었어! 어디야, 어디. 승객들은 드륵드륵 창문을 밀어올리며 밖으로 머리통을 뽑아내고 있었다. 더러는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아이구머. 웬 아주머니가 차에 치었능가 본디. 아니여. 남자 같구마이. 살아 있읍니까, 아직? 보나마나 죽颋겠지라우. 원 저런. 피 좀 보랑께라우, 피.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대는 통에 차안은 온통 법석이었다. 나도 고개를 내밀고 차 안쪽을 살펴보았다. 사고가 난 지점은 건널목 부근인 듯하였다. 승무원인 듯한 제복차람의 사내들 몇이 한데 모여 당황한 손짓을 해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주위엔 수많은 구경꾼들이 반원을 이루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차에 치였다는 사람의 형체는 이쪽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 부근은 시의 변두리쯤으로 여겨졌다. 낮고 초라한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퍽 가난한 동네 같았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사고가 났나 봐. 내가 뻔한 설명을 해주었을 때 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져내렸다. 그 속에서 기차는 한참을 멈추어 있었다. 이윽고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저마다 옷자락에 빗물을 묻힌 채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덜컹>하고 기차가 시동을 걸었다. 자살했다는 것이 참말이랍디여? 웬걸요. 자살이 아니라 사고라던데요. 차단기조차 없는 건널목으로 여자가 빗속에서 급히 뛰어오느라고 미처 기차를 못 본 모양이예요. 집이 바로 근처래여. 돼지를 키움서 살아가는 아주 곤란한 여자라둥만. 어참, 징한 꼴도 다 봤그마이. 그 자리서 즉사를 했드라고이. 쯧쯧. 돼지밥을 받아서 이고 오는 참이었나 봐요. 바께스에서 쏟아진 밥알 같은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어요. 안되었지 뭡니까, 참. 기차에 치여 죽으면 보상도 한푼 못 받는다든디. 개죽음했구만, 개죽음. 기차가 쿵쾅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어느덧 시가지를 완전히 벗어나 어둠이 짙게 깔린 들녘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먹빛 차창의 어둠을 응시한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두두두두두…… 더욱 굵어진 빗방울이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릴 때마다 발사음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조금 전 사고지점을 기차가 느린 속도로 지나쳤을 때 우리는 우연하게도 언뜻 가마니에 덮여 있는 그 시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 식어 버린 살덩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하얗게 질린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짧은 순간에 상대방의 얼굴로 떠오르는 자신의 것과 똑같은 그 악몽의 흔적을 확인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황급히 서로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은 채 나는 환상처럼 얼핏 스쳐 지나가 버린 그 음울한 영상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애를 썼다. 몸을 반쯤 가린 가마니와 그 밑으로 흘러 고였을 진한 먹물과 벗겨져 나간 신발 한 짝, 그리고 건널목의 가로등 불빛에 훤히 드러나 보이던 하얀 밥찌꺼기며 이그러져 나뒹굴고 있던 바께스. 그리고 숱한 구경꾼들. 구경꾼들……. 그것들은 순간, 너와 내가 그토록 안간힘을 써 가며 간신히 덮어두고 있었던 그 악몽의 이부자리 한 자락을 잡아채어 매몰차게 벗겨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부자리 속에서 기어코 우리의 수치스런 알몸은 드러나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섬짓한 윤간의 기억이었다. 안 돼. 안 돼.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두두…… 두두두두. 빗방울이 미친 듯 유리차을 두드리고 있었다.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왔다. 나는 얼른 네 얼굴을 훔쳐보았다. 모자를 눌러쓴 채 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황황히 손등으로 눈물을 지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렇듯 실없이 눈물을 흘리는 부끄러운 버릇을 얻어 버린 것이었다. 술에 취해서도 찔끔대고 깊은 밤 악몽을 꾸고 나서도 찔끔거렸다. 무심히 오가는 행인들 틈에 끼여 낯익은 거리를 지날 때나 눈부신 봄날의 햇살을 밟으며 후미진 골목을 허청허청 걷다가도 핑 까닭없는 눈물이 고여 오곤 했다. 하지만 넌 울지 않는다. 네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아직 본 적이 없다. 바로 그것이 너와 내가 다른 점일지도 모른다. 쉽사리 올 줄을 아는 나는 또한 등을 돌려야 할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현명함도 쉽사리 터득하여 그것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닐 줄도 알았다. 하지만 너는 좀처럼 울지 않는 바보스런 녀서이므로 모두들 햇볕 속을 활보하고 있는 이 땅에서 아직도 네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빗발은 그치지 않고 쏟아져내렸다. 차안의 환한 불빛이 유리창에 달라붙었다가 미끄러지곤 하는 물방울들을 샅샅이 비추어내고 있었다. 끊임없이 덜컹거리는 바퀴소리만 규칙적인 진동을 전해 올 뿐 객실은 마치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야, 한잔하지 않을래? 청승맞게 이러구 있지 말구. 문득 너는 지나가는 판매원을 불러 소주와 오징어 한 마리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싶어 내가 쳐다보았다. 염려 마라. 이 정도로는 취하지 않을 테니까. 오랜만에 대하는 너의 밝은 웃음을 내심 놀라와하며 나는 순순히 잔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술을 나누는 셈이었다. 일 년 반 우리는 그 잃어버린 시간을 위해서, 그리고 이 기묘하고 쓸쓸하기만 한 우리들의 재회를 위하여 함께 건배했다. 너, 아까 그랬었지. 고향이 이젠 두려워졌다고……. 내 잔을 채워 주며 네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네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 역시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어. 이 집 저 집 문등이처럼 옮겨다니면서 객지에서 해매던 시절이 차라리 덜 괴로웠던 것도 같았고…… 하지만, 결코 그 때문에 떠나려는 것은 아니야. 난 다시 돌아온다.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난 그걸 믿어. 떠난다고……? 응. 그러고 보니 이번이 꼭 열 다섯번째가 되는 셈이던가. 허허. 별안간 머리가 텅 비어 오는 듯한 느낌에 나는 멍청하게 네 얼굴을 바라보았다. 뜻모를 웃음이 너의 입가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내게는 어떤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글쎄, 이건 더럽게 감상적인 얘기 같다만 왠지 이번만은 혼자 떠나기가 싫었어. 고향에서까지 내쫓기는 것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래서 너더러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던 거야. 미안하다. 허허. 하지만 M시에 닿기만 하면 너의 임무는 다 마친 셈이니까 안심해라. 자, 한 잔씩만 더 하자. 네가 부어 주는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좀처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가닥의 레일을 따라 쿵쾅거리며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잔 속의 술이 위태롭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M시에 도착한 것은 여덟 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우리는 승객들이 어느 정도 내려간 다음에야 차에서 내렸다. 수문을 향해 물살이 쓸리듯 사람들이 바삐 플랫폼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너는 또 아까처럼 내게 먼저 나가라고 말했다. 나는 순순히 응했다. 개찰구를 향해 걸으며 슬쩍 뒤돌아보니 낯선 사람들 틈에 묻힌 채 네 커다란 몸집이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너와 나를 떼어놓고 있는 그 멀지 않은 거리의 의미를 나는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확인했다. 우리는 역 광장에 섰다. 빗발이 아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저만치 거리를 질주해 가는 차량의 불빛이 어지러웠다. 비닐우산 한 개를 사서 함께 썼다. 이젠 여기서 그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고맙다. 공연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 그러나저러나 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면 막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그건 염려 마라. 시간은 충분해. 네가 내민 손을 나는 잡았다. 불현듯 어쩌면 너를 앞으로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안타깝게 힘을 주고 있었다. 뭔가…… 뭔가 말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난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그런 나를 너는 한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글쎄. 그렇지만 누구도 그걸 가르쳐 줄 수는 없겠지. 자기 몫의 삶을 결정하는 건 오직 자기 스르로일 뿐일 테니까 말야. 어쨌든 모든 게 잘 될 거야. 무엇보다도 넌 현명하잖니. 나는 말없이 네 손을 놓아주었다. 한동안 손바닥에 너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우산을 쓰고 가라고 했지만 너는 억지로 그것을 내 손에 쥐어 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난 괜찮아. 갈 길은 나보다도 네가 더 멀잖아. 너는 등을 돌려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이내 네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네가 서 있던 자리는 어느새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너는 또 어디로 스며들어가 버린 것일까. 나는 네가 억지로 떠맡겨 놓고 간 그 허약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싸구려 비닐우산으로 간신히 몸을 가리운 채, 네가 비워 두고 사라져 버린 그 막막한 어둠의 공간을 지켜보며 혼자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제 그 빈자리는 남아 있는 내가 채워야 할 몫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돌아서서 역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네 말대로 이제부터 내가 혼자 돌아가야 할 길은 멀었다.  
73 아내의 상자/은희경
고창근
10403 2010-11-07
내가 좋아하는 소설 한 여자가 있다. 현대 사회의 현실과 적응 못 하는 여자. 다 읽고 나면 어디선가 본 듯한 한 여자가 내 앞에 서있다. 소설을 공부하는 정신과 의사한테서 이 소설이 정신분석 연구에 많이 이용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 아내의 상자-199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은희경 마지막으로 아내의 방에 들어가 본다. 푸른 빛이 감도는 벽지, 벽을 향해 놓여진 독일식 책상과 창가의 안락의자.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희미한 향기가 떠다닌다. 그리고 상자들. 아내는 상자를 많이 갖고 있다. 어떤 상자에는 그녀가 한 계절 내내 손가락을 찔려 가며 십자수를 놓은 탁자보가 들어 있고 어떤 상자에는 편지 뭉치가 들어 있다. 편지는 모두 종이색이 누렇게 바래고 잉크가 번진 오래된 것들이다. 최근에 그녀에게 편지가 오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호들갑스러운 친구가 사주었다는 하얀 배냇저고리가 든 상자도 있다. 그 아이가 삼 개월만에 자연 유산된 후 아내는 또 다른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런 물건을 간직했다. 아내의 상자에는 지나 시간동안 그녀를 스쳐 지나간 상처들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상처가 회복된 다음에도 몸에 남아 있는 흉터로써 그 상처를 기억한다. 그녀는 흉터를 지니듯이 방 귀퉁이에 상자를 쌓아갔다. 맨 위의 상자 하나를 열어 본다. 조잡한 조개껍데기 목걸이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생각난다. 신혼 여행지였던 해변의 기념품 상점에서 이 목걸이를 샀었다. 생각나나다. 그때 아내의 눈 속에 어리던 바다, 그 바다를 향해서 바구니에 주워담고 싶을 만큼 맑게 방울방울 굴러 떨어지던 그녀의 웃음소리. 하지만 아내는 이제 여기 없다. 아내의 독일식 책상의 뚜껑이 완강하게 닫혀 버린 것처럼, 그리고 언제나 그 책상 위에 놓여있던 고무지우개가 달린 아내의 노란색 연필, 그것이 어둠 속에 영원히 매몰되었듯이, 아내라는 존재는 폐기되었다. 내일이면 포장 이사 회사의 일꾼들이 와서 이 방을 통째로 커란 상자에 담아 내갈 것이다. 그러면 아내의 방은 없어진다. 아직 전세 기간이 몇 달이나 남았는데 왜 이사를 가세요? 요즘같이 전셋값이 치솟는 때에 복비까지 물어 가면서 이사를 가시려는거 보니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죠? 주인이 물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아무 대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이유를 깨닫게 된다. 나는 아내가 이 방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았으므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아내의 방이 없어진다면 그녀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그녀를 기다릴 수는 없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녀를 저주하는 일일 것이다. 최소한 용서만이라도 하지 않도록 분노를 숫돌에 갈아 벼려야 한다. 아내를 위해 쓰여지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던 녹슨 칼. 거기에서 음험한 검은 물이 천천히 배어 나와 회색 숫돌을 적시고 이윽고 땅으로 스며들어 흙을 물들이는 것을, 깨끗한 물을 끼얹은 숫돌 위에서 은색 칼날이 서서히 섬광을 드러내는 것을, 똑바로 지켜보아야 한다. 어떻게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천천히 창 쪽으로 다가간다. 걸음을 옮기자 방 안을 떠돌던 이상한 향기가 코 가까이로 따라와 스친다. 오래 전 닫힌 채로 망가져 버린 서랍 속의 방충제, 혹은 조화 위에 뿌려진 이국의 향수 냄새 같은. 아내의 냄새는 분명 아니다. 창가에는 아내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다. 책상을 뺀다면 이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이다. 아내는 이 의자에 웅크리고 낮잠을 자곤 했다. 의자 속이 깊숙해서 무덤처럼 편안하다고 했다. 다리를 가슴께로 끌어당긴 채 웅크리고 앉은 아내는 나뭇잎 뒷면에 몸을 둥글게 말고 숨어 있는 공벌레 같았다. 단단히 웅크린 그녀의 입구를 찾지 못해 진땀을 흘리던 밤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부부야. 이건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라구, 하고 내가 말하면 그녀는 내 뺨에 입술을 갖다 대며 정말이야, 당신한테 잘해주고 싶어, 라고 속삭이면서도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의 마른 몸에 물기가 돌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녀의 몸 한가운데 박혀 있는 입술산처럼 조금만 버튼을 참을성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만져 줘야 했다. 그런 다음 가까스로 열린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아내는 내 어깨를 꼭 당겨 안으며 당신을 사랑해, 라고 기운없이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그런 아내가 내게 무슨 짓을 했던가! 나는 좁은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한다. 온 방바닥을 내 발자국으로 덮어 버리려는 듯이 리놀륨 바닥을 꾹꾹 눌러 밟는다. 지난주에 나는 아내를 그곳에 버리고 왔다. 차마 죽여 버릴 수는 없다고 마음먹었으면서 그렇다고 죽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아내의 방을 나온다. 문고리로 손을 뻗다가 비로소 기분 나쁜 향기의 정체를 알게된다. 방문 안쪽에 걸려 있는 검붉은 화환장식, 그 속에 들어 있는 포푸리에서 나는 냄새였다. 영혼이 휘발돼 버린 뒤까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붙들고 있는 시간의 검은 그림자. 꽃의 박제. 방부제 향이 희미하게 떠 다니는 무덤, 나는 아내의 방을 나온다. 아내는 없다. 아내의 박제조차 이제는 여기 없다. 우리가 신도시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삼월이다. 그 전에 우리는 유명한 불임 클리닉이 있는 강남의 아파트에 살았다. 신도시는 전셋값이 훨씬 쌌기 때문에 같은 돈으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자기의 방이 생겼다는 사실에 아내는 기뻐했다. 집도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무엇보다 기차가 지나다니는 걸 볼 수 있으니 좋다고 했다. 사실은 더 이상 불임 클리닉에 다니지 않게 된 것을 가장 기뻐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신도시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즉 '변화'와 '삭막하지 않은 생활'이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 아내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가졌다. 새로운 커튼, 새로운 관엽식물, 새로운 선반 등. "커튼을 달아야 할 텐데 무슨 색이 좋을까요?" 아내가 불어 보았을 때 나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바꾸는 중이었다. 화면에 한 무리의 댄스그룹이 사라지고 나처럼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등뒤로는 그가 앉은 패브릭 소파와 똑같은 장미꽃 무늬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화면에 그대로 눈을 둔 채 턱만 아내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글세. 장미꽃 무늬 어떨까?" 다시 리모컨을 누르니 어떤 사무실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의견을 바꿨다. "블라인드로 하면 어때? 깨끗해 보이는데." "싫어요." 말꼬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으므로 나는 아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깎고 있는 아내의 가느다란 뒷목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무심한 눈길을 다시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한참 후에야 불현듯 깨달았다. 아내는 병원을 연상시키는 것은 뭐든지 싫어했다. 그러나 사과를 포크에 찍어 내게 건네주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우리는 다른 날처럼 과일을 먹으며 마감 뉴스로 눈을 주었다. 앵커의 입가가 금방이라도 너털웃음이 새어나올 듯이 올라갔다 싶었다. 거으 동시에 오른쪽 상단에 '반가운 단비'라는 글자가 올라왔다. 앵커는 계속 그 표정을 유지하며 그날 밤 열리는 국제 축구 대회에서 소나기골을 기대한다고 '비'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방송 원고를 읽기 위해 얼굴을 한 번 숙였다가 드는 짧은 순간 순발력 있는 앵커답게 심각한 낯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른쪽에 올라온 글씨는 '미, 3김 제거 작전'이었다. '정부는 최근, 80년 미국의 지시로 신현확씨가 주도한 '으로 시작되는 유창한 음성. 억양으로 보아서는 '작전' 내용보다는 '본사 독점으로 말씀드렸음'을 더 강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일 초 뒤에는 그 3김 중 하나인 대통령이 화면에 나왔다. 그는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는 듯이 등장했지만 환경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만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언'하고 그냥 들어갔다. 아내가 말했다. 내가 아는 대통령들은 셋 다 저런 억양으로 말했어요. 저 억양을 들으면 어쩐지 다 훌륭한 사람 같아. 나는 대꾸 대신 접시에 남은 마지막 사과살에 포크를 찍어 눌렀다. 다음 뉴스는 너구리와 소쩍새의 소식이었다. 그것들은 겨우내 사람의 보살핌을 받다가 봄이 되어 비무장지대로 돌려 보내지고 있었다. '야생 동물 보호'라는 글씨가 너구리의 주둥이 쪽 화면을 덮었다. 아내가 또 혼자말처럼 말했다. 기억이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야생 동물은 겨울에 산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어요. 먹이가 없는 겨울에 버려져야만 자기가 야생 동물이란 사실에 빨리 적응한대요. 쥐를 죽였다가 기소될 뻔한 미국 남자 얘기는 어디서 봤더라? 며칠 전 해외 토픽에 났던가? 뒤뜰에서 토마토를 먹은 쥐를 죽였는데 동물보호협회에서 들고 일어났다나 봐요. 해를 끼친 동물은 보호 대상 동물에서 제외시킨다는 법안이 통과되어서 겨우 풀려났다던데. 쥐 죽인 일이야 쥐죽은듯하면 될 걸 갖고 그 호들갑을 떨다니, 참 하릴없이 배부른 나라야.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증권 시황에 대한 뉴스가 시작되었으므로 거기에 시선을 고정시켰을 뿐이었다. 텔레비전을 끈 뒤 나는 시사 주간지를 들고 침대로 들어갔다. 아내는 과일 접시를 씻느라 조금 늦게 침대로 왔다. 아내의 손이 차가웠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끌어다 내 잠옷 사타구니에 넣었다. 그녀가 조금 웃었다. 나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녀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문대 비서학과를 나왔지만 아내는 대학에서 뭘 배웠는지 거의 기억에 없다고 했다. 그녀는 원래 미술 대학을 지망했었다. 고3 겨울 그녀가 다니던 조그만 화실은 낡은 목조 건물 삼층에 있었는데 몹시 추웠다. 하지만 연탄 난로의 냄새 때문에 늘 창문을 조금 열어 두어야 했다. 그녀의 자리는 바로 그 창문 옆이었다. 오른쪽 뺨으로는 난로 위에서 끓어대는 커다란 주전자의 뜨거운 김을 쐬고, 왼쪽 뺨으로는 귓불을 얼리는 매서운 찬바람을 맞아 가며 그녀는 열심히 데생을 했다. 점점 연탄 가스의 냄새에도 익숙해져 갔다. 이따금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 바람이 들이치는 창턱에 올려놓았다. 물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알맞게 식었다. 그녀는 그 물로 두통약을 삼키곤 했다. 그해에도 대학 입시 날은 몹시 추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추위를 잘 타는 그녀를 위해 목이 올라오는 털스웨터를 떠서 입혔다. 뜨개질 솜씨가 신통치 않았던 어머니는 목 부분의 고무뜨기를 너무 촘촘하게 했다. 그날 처음 그 스웨터를 입으며 그녀는 목을 집어넣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스웨터를 입긴 했지만 누군가의 손이 억세게 목을 조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한 방향만 쳐다보도록 고안된 스웨터처럼 목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으며 피가 얼굴로 몰렸다. 그녀는 숨이 막혔어도 어머니는 흐뭇해했다. 수채화를 그릴 때쯤부터 그녀의 두통이 참을 수 없게 심해졌다. 귀에서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 소리가 들려 왔다. 시험장 문 밖을 나서면 바로 복도 끝에 수돗가가 있었다. 수험생들은 그곳에서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 옆에 놓고 붓을 씻어 가며 경직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물 소리는 복도에서 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시험 감독관에게 그녀는 말했다. 제가 가서 잠그고 오면 안 될까요. 감독관은 이상한 아이라는 표정을 구태여 감추지도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서 수돗가를 향해 뛰었다. 수도꼭지는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그녀는 돌아와 붓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물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 왔다. 다시 허락을 받고 잠그러 가봤으나 또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 발 앞서 와서 수도꼭지를 잠근 뒤였다. 세 번째부터는 감독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복도로 나갔다. 허둥지둥 돌아와서 붓을 잡았지만 여전히 물 소리가 그녀의 뒤꼭지를 잡아당겼다. 목이 꽉 죈 스웨터 안에서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감독관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문가로 가더니 손잡이를 잡고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독관의 표정에는 이제 약간의 연민이 떠올라 있었다. 왜 그러지, 학생? 문이 열려 있어요. 문이 열렸다고? 감독관은 단단히 단속된 문을 쳐다보며 몇 번 눈을 껌벅이더니 다음 순간 깊은 이해심이 깃들인 표정을 짓고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자, 자, 긴장을 풀어요. 그녀는 감독관이 끄는 대로 순순히 자기의 이젤 앞으로 돌아가 붓을 쥐는가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을 내던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스웨터의 목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물이 새잖아요! 제발 누가 저 수도꼭지 좀 잠가 주세요! 저 문 좀, 문 좀 닫아 주세요, 문! 문! 그녀는 그녀가 응시했던 대학의 부속 병원에서 깨어났다. 입시 강박증이라는 상식적이고 트집잡을 데 없는 진단이 내려졌으며 며칠 동안은 병원에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자을 잤다. 신기하게도 약 먹을 시간이 되면 잠이 깼다. 깨어있는 시간에 하는 일이라고는 약을 먹는 일뿐이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또 잠이 왔다. 그녀는 지은이의 이름은 잊었다며《벨 자(Bell Jar)》라는 소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인간이 벨 소리에 의해 규칙적으로 약을 삼키기 위한 침을 분비하며 사육되는 폐쇄된 바구니. 아내는 그 일로 인해 자기 삶이 일그러진 점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시시하다고 할 만큼 평범한 사람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조그만 오퍼상에 취직해서 전화 받는 일을 했고 그에 걸맞은 적은 월급을 받아 적금을 붓다가 나를 만나 결혼했다. 나는 모든 면에서 무난한 남편이었지만 음식에 관한 한 약간은 까탈스러웠다. 다양하고 새로운 반찬을 만들지는 못했어도 다행히 아내의 음식 솜씨는 얌전한 편이었다. 된장찌개는 불을 잘 조절했기 때문에 멸치의 비린 맛이나 된장 떫은 맛이 안 났다. 갈치를 구워도 그릴에 달라붙지 않고 바삭바삭하게 속가지 익혔으며 아내가 부친 달걀말이는 약한 불에 익혀서 부드럽고 단단하게 잘 말려 있었다. 아내는 정돈도 잘했다. 손톱깎이나 여분의 건전지, 옷솔과 드릴 따위를 늘 같은 자리에서 찾아 쓸 수 있었고 욕실에는 늘 고슬고슬한 수건이, 냉장고의 냉동실에는 반찬 냄새가 배지 않은 깨끗한 얼음이 있었다. 아내는 외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집에 오는 것도 썩 반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던 해에 형이 있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아내로서는 살림살이를 참견할 시댁 식구가 없는 것이 다행인 셈이었다. 배냇저고리를 사주었던 주책스러운 친구와 보험 외판을 한다는 또 한명의 고향친구가 이따금 들르는 것을 빼면 아내에게는 찾아오는 친구도 없었다. 지나치게 선량하고 적극적이어서 어떤 관계에서든 과장된 우정을 표현하는 사람, 혹은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만이 아내를 방문했던 것이다. 새 집에 이사를 온 뒤에는 그 친구들에게도 바뀐 전화번호를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아내는 집안일을 하거나 신문과 잡지 따위를 뒤적였다. 자기 방의 독일식 책상에서 책을 읽는 일도 좋아했다. 아내는 꽤 많은 종류의 잡다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남들처럼 책을 통해 교양을 쌓고 정서를 함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가 읽은 책의 내용을 극히 단편적으로만 기억했으며 자기 식대로 엉뚱하게 왜곡시켜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내는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벨 자》에 대해 얘기했을 때도 늘 그렇듯이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라며 자신없어했다. 그녀는 다 읽은 책을 상자에 담아 두었다. 그녀는 기억들을 머릿속에 쌓아 두는 대신 상자에 담아서 뚜껑을 덮어 버리곤 했다. 그러고는 나머지 모든 시간에 잠을 잤다. 회사에서 낮에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때가 많았다. 웬 잠이 그렇게 깊어?라고 물으면, 베란다에서 아파트 단지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잠이 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언제 봐도 단정한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 언제 봐도 그린 듯이 정확히 배치된 놀이터와 벤치와 나무와 주차 라인과 보도블록. 상가앞에 오가는 사람들도 언제 봐도 그렇게 정한 듯이 몇 명. 비슷한 비닐봉지, 비슷한 옷차림. 하늘도 언제 봐도 대충 그런 색의 지루한 안정의 빛이고 공기의 냄새 마저도 도식적이라고 아내는 말했다. 신도시에는 길이 없어요. 덩치가 큰 건물에 다 가로막혀 있어요. 신발을 신고 산책이나 하려고 나갔다가도 길이 다 끊어져 있어서 그냥 돌아와 버려요. 찻길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층 건물사이의 찻길을 몇 번 건너갔다 오면 지치기 때문에 잠이 오는 거라는 주장도 했다. 아내의 잠은 이상할 만큼 깊었다. 그녀는 몸이 아플 때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심지어 화가 났을 때조차 잠을 잤다. 새 집에 이사오기 전 어느 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좀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신문을 펼치는데 경제면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아내가 뒷면에 있는 기사를 보기 위해서 오렸다는 거였다. 내가 보지도 않은 신문을 오려 냈단 말야?라고 말하자 아내는 변명하려 했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다지 미안한 기색도 아니었다. 나는 그즈음 새로운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았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아내의 언제나처럼 엉뚱하고 앞 뒤 안맞는 말을 들어주기 위해 참을성을 사용할 너그러움이 전혀 없었다. 듣기 싫어!라고 소리치자 아내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 일어나더니 말없이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점퍼를 들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집 앞 상가에 새로 생긴 미장원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마침 이발할 때가 되었으므로 거기 들어가 머리를 잘랐다. 기분이 풀린 나는 미장원 옆의 빵집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슈크림을 산 뒤 현관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아내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 봤지만 열쇠는 양복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상가로 다시 나와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아내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는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옆집 벨을 눌렀다. 그 집 베란다를 넘어타고 우리 집으로 들어가 봐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가 보니 두 베란다 사이가 너무 넓어서 몹시 위험했다. 옆집의 전화를 빌려 다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벨이 울리는 소리보다 내 심장 두근대는 소리가 더 컸다. 숨소리를 따라 점퍼가 오르내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옆집 주인이 가져다 준 상가 정보지를 넘기며 열쇠집을 찾는 내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열쇠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전화통을 붙들고 집 전화번호를 계속 눌러댔다. 조금 후 오토바이 뒤에 연장통을 싣고 도착한 열쇠공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안에서 잠금 고리를 걸었기 때문에 열쇠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옆집 주인이 점퍼 소매를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아내를 향한 위험하지만 유일한 비상구인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그때 열쇠공이 현관문의 경첩을 부숴도 괜찮겠냐고 물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내를 구하려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발을 헛디뎠을 것이고 그대로 팔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난리를 치른 뒤 폭파하듯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아내는 소파에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우리가 부순 문에서 불과 몇 발작 떨어지지 않은 자리였다. 아내가 그녀의 안락의자에 파묻혀 잠든 것을 보면 이따금 그때 생각이 났다. 뚜껑이 닫힌 상자들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 그것은 자신을 상처 입힌 세상을 향해 빗장을 지르고 잠들어 버린 그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비명을 질렀다. "우리 집에서는 모든 게 말라 버려요!" 그녀의 손에 든 그릇 속에는 모래처럼 뻣뻣하게 마른 밥이 들어있었다. 간장 접시 좀 보세요. 과연 간장은 죄다 증발해 버리고 검게 물든 소금 알갱이뿐이었다. 사과도 하룻밤만 지나면 쪼글쪼글해져요. 시멘트 벽이 수분을 다 빨아들이나 봐요. 이러다가 나도 말라비틀어질 거예요. 자고 나면 내 몸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 몸이 삐그덕거리는 것 같다구요. 나는 실내 환기를 안 해서 습도가 낮아진 거라고 가볍게 아내를 나무라며 안심시켰다. 얼핏 생각이 떠오른 대로 수족관에 열대어를 키워 보면 어떻겠냐고 말해 보았다. 아내는 깜짝 놀랐다. 맞아요, 아파트 안이 건조해서 수족관의 물이 한 뼘씩 줄어든다는 뉴스를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시멘트 벽이 집 안의 온갖 물을 다 빨아들여요. 나중에는 수도관 속에 있는 물까지 빨아들일 거예요. 이건 벽이 아니라 흡반이에요. 토요일에 나는 가습기를 사서 들고 들어갔다. 아내는 포장조차 풀지 않았다. 병원에서만 쓰는 물건인 줄 아는 모양이군, 나는 못마땅했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맞춰 가며 살려고 하다보면 가정이란 피곤해지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아내는 늘 나로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소식을 진지한 말투로 전해 주기도 했다. 슈퍼 옆에 있는 유치원 말예요. 거기 자연 학습장에서 키우는 닭은 새벽에 울지 않고 매일 한 낮에 울어요. 슈퍼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꼬끼오, 소리가 나서 처음에는 깜짝 놀랐어요. 거기에다 제 나름의 논평까지 붙이곤 했다. 이제는 생태 환경이 달라져서 닭이 새벽에 울 필요가 없는 거죠. 요즘은 개하고 고양이도 사이좋게 지낸다잖아요. 그때마다 나는 시사 주간지나 마감 뉴스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주었다. 우리의 삶은 그럭저럭 평온했다. 아내의 일상은 이사 오기 전과 똑같아졌다. 봄이 다 가도록 커튼 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나는 아내에게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그 무렵 비어 있던 옆집으로 그 여자가 이사를 왔다. 그날 퇴근해 들어오던 나는 난데없는 개 짖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옆집이 이사 들어왔어요." 아내가 설명해 주었다. "남편은 외국 지사에 나가 있대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하고 세 식구래요." 개 짖는 소리는 그때가지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꽤나 시끄럽겠는데." 아내는 내 양복을 받아 옷장 속에 걸었다. 그리고 서랍장 속에서 다림질된 면바지와 폴로 셔츠를 꺼내 주었다. "당신이 들어올 때부터 저래요. 엘리베이터 소리가 날 때마다 짖는 것 같아요." 아내는 개 짖는 소리가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웃에 누가 이사 왔든, 그러니까 그것이 개이든 사람이든 시큰둥했다. 그러나 옆집에 한 번 다녀온 뒤부터 그 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반상회를 하거든요. 끝나고 나오는데 옆집 여자가 자기 집에 가서 차 한잔 하고 가라고 하더라구요. 그 집,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 "현관에서부터 그래요. 우산꽂이에다 편지꽂이, 열쇠 거는 고리 거실에도 소파는 소파대로 스툴과 흔들의자까지 있고, 코너장, 홈 바, 뭐가 뭔지 모르게 가구로 꽉 차 있어요. 보온밥통에가지 온갖 덮개를 씌워 놓았고 벽에도 빈 곳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등공예품, 빵꽃, 지점토 인형, 온갖 취미 강좌에 다 다녔나 봐요." "집 꾸미기를 좋아하나 보지?" 나는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켰다. "성격이래요. 빈 곳이 있으면 허전해서 못 참는다나요." "그래" "벌써 수영이랑 마사지를 하러 다녀요. 자기가 집에 잘 안 있기 때문에 애들을 위해서 개를 키우는 거래요." 거기에서 아내는 말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동안 손톱으로 소파 모서리를 꾹꾹 누르고만 있었다. 그런 다음 두 팔을 엇갈려 마치 방어하듯 자기의 가슴을 싸안더니 말했다. "두 마리 다 아직 조그만 새끼예요." "두 마리?" "네." 자기 팔을 꽉 움켜잡았으므로 아내의 손마디가 불끈 튀어올랐다. "난 지 사흘 만에 얻어 왔대요. 그것들을 긴 쇠줄에 묶어서 거실 문고리에 달아매 놨어요. 우유을 엎질렀다고 아이들이 벌을 주는 거래요. 그런데 둘이 꽁꽁 묶여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더라구요." 강아지들은 문고리에 함께 묶인 채로 어찌나 엉키며 장난을 쳤는지 서로의 줄이 새끼줄처럼 꼬여서 바로 목 위까지 당겨져 있더라고 했다. 쇠줄이 고여 제 목을 죄어 올 때까지 천진하게 장난을 쳤을 강아지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내의 눈가는 글썽해졌다. "너무 좋아하다 보니 서로의 목을 죄게 된 거예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두 마리가 아주 다르다고 했다. 한 마리는 털에 윤기가 나고 토실토실한데 한 마리는 비쩍 마른 게 털도 듬성듬성 빠져 있고 볼품이 없었다. 아내가 다가가자 토실토실한 강아지는 꼬리를 살살 흔들었지만 비쩍 마른 강아지는 비칠 한 걸음 물러나며 크앙, 하고 조그만 이빨을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그때 초등학교 오학년이라는 그 집 아들이 과자를 손에 들고 나왔다. 토실한 강아지가 고리를 흔들며 아들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토실한 강아지와 목이 같이 묶인 비쩍 마른 강아지도 억지로 조금 딸려 갔다. 비쩍 마른 강아지는 아들이 싫은 듯 했다. 크왕, 하면서 다리를 버티고 가지 않으려고 해보았지만 쇠줄이 목을 파고들 뿐이었다. 과자는 토실한 강아지의 발치에만 떨어졌다. 토실한 강아지에 끌려 억지로 앞으로 들렸던 마른 강아지의 두 발이 앞으로 쏠리며 비틀거렸다. 마르고 더러운 강아지는 깨갱 소리를 내며 겨우 앞발을 버텼다. 그걸 본 옆집 아들은 아무것도 준 것 없이 마른 강아지를 발로 찼다. 그러고는 야, 먹고 살려면 성격부터 고쳐라, 앙? 하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얘기를 다 한 다음 아내는 윗몸을 푹 꺾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따금 아내는 그렇게 나를 당황하게 그리고 짜증나게 했다. 나는 아내를 달랬다. "사내 녀석들은 다 그렇게 짓궂다구. 뭐 그런 일로 애들처럼 울어?" "그게 아녜요." "그럼 왜 그래? 강아지가 불쌍해서?" 아내는 도리질만 했다. 조금 후에는 마음이 진정된 듯 저녁상을 차리러 일어났다. 그날 밤 침대에서 아내는 내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아내의 손은 배를 스쳐 올라오더니 젖꼭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내 몸이 뜨거워졌다. 젖꼭지가 꼿꼿해지는 동시에 다리 사이가 묵직하게 일어났다. 나는 보고 있던 시사 주간지를 가볍게 침대 아래로 던졌다. 늘 그렇듯이 아내의 몸은 차가웠다. 내 목을 감고 있는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아랫도리는 마치 자기의 것이 아닌 듯 부자연스러웠다. 내 손이 아랫도리에 닿자마자 그녀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여보.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젖은 속눈썹은 몇 올씩 엉긴 채로 움찔거렸다. 그녀는 계속 눈을 감고는 들어와요, 어서, 라고 말했다. 아내의 피부는 부드러웠지만 갑옷을 입은 것처럼 열기가 힘들었다. 그날은 입술산 같은 작은 버튼조차도 그녀의 깊은 샘물을 길어 올리지 못했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그녀의 몸은 아주 따뜻했다. 내가 만족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욕실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갑자기 물었다. "당신, 사실은 아이 포기 안 했죠?" 우리는 아이에 관한 화제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 더구나 아내가 제 입으로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불임 클리닉에 시간을 잘 맞춰 다녔고 거기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아내가 아이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을 나 자신에게조차 심각하게 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인생은 필요한 것을 갖춰 나가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왜 애가 안 생기는지 생각해 봤어요." 아내는 천장을 노려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요." 전문 클리닉에서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그녀가 알았다는 말인가. 나는 말없이 침대로 돌아가 그녀 곁에 누웠다. 그녀는 십 년도 넘은 옛날에 보았다는 미국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으레 그렇듯이 '내 기억이 확실한지는 모르지만'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떠돌이었다. 그러므로 억척스런 어머니가 세 개구쟁이들을 갖은 욕을 퍼부으며 혼자 키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죽는다. 아이들은 복지 시설에 맡겨진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찾으러 온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는 무직자에다가 짐작하다시피 주정뱅이이다. 건전하고 깨끗한 복지 시설의 직원은 아버지를 예의바르게 멸시한다.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서는 그들을 고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그 유쾌한 자유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싸운다. 그러나 원래 규격에 맞지 않는 사람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싸움에 진 뒤 자기를 개조하려는 아버지의 노력이 시작된다. 번번이 쫓겨나지만 그래도 다시 직장을 구하러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구김 없는 넥타이를 매고 복지 시설을 찾아온 아버지. 그러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소식을 알 수 없다는 통고만이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미칠 것만 같다. 온갖 서류를 뒤지고 온갖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온갖 복지 시설과 온갖 입양 가정을 돌아다니다. 그 모든 천신만고를 헤치고 드디어 아이들을 찾은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아이들 역시 아버지에게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규격 밖으로 도망치려 했었다. 그 결과 한 아이는 양부모에게 맞아 죽었고 한 아이는 자폐증에 걸렸다. "그리고 한 아이는 소년원에서 거세당했어요." "끔찍한 얘기군." 나는 건성으로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끔찍한 것은 끔찍한 것이고, 그 얘기가 아내의 불임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나는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눈으로는 조금 전 집어 던졌던 시사 주간지를 찾으면서. 그런 나를 향해 갑자기 아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거세당한 거예요." 담배 연기 때문에 아내는 눈을 깜박거렸다. "소년원에서 거세를 시키는 건 범법자의 대를 끊어 버리려는 거잖아요. 나도 피가 나쁘기 때문에 애를 낳지 못하도록 거세당한 거예요." "소년원에서 말야?" 내 입에서는 기어코 이죽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내는 말을 조리 있게 혹은 길게 할 만큼 논리적이지 못했다. 그렇지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게 아니구요. 나 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은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나는 그녀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손을 뻗어 그녀의 젖가슴을 만졌다. 그러나 그녀는 내 손을 밀쳐 내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성싶지 않은 과격한 말을 내뱉었다. "옆집 개 말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 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한참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욕실로 갔다. 마치 몽유병자가 창턱을 밟는 듯한 정확하고도 허전한 걸음걸이였다. 조금 후에 돌아왔을 때는 눈자위가 빨개져 있었다. 상자 속에 담아 덮어 버리는데도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으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아내의 삶에 무언가 다른 것이 더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경박해 보이는 옆집 여자가 아내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옆집 여자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아내는 말처럼 걸을 만한 흙길은 없고 찻길만 있는 신도시에서 그것은, 한 번 더 아내의 잡학 용어를 빌리자면, '우성'임을 뜻했다. 그 여자의 차에 실려 아내는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 따라다녔다. 기찻길 옆에 있는 칼국수집이나 지하의 쌈밥집에서 점심을 먹기도 하면서. 날씨가 좋아지자 주말농장인지에 다닌다고 부쩍 교외로 돌아다니는 눈치였다. 어떤 토요일인가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나보다 더 늦게 집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일요일을 격주로 쉬었다. 아내는 내가 집에 있는 일요일까지도 새 백화점이 오픈이라며 옆집 여자를 따라 나가더니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갖고 들어왔다. 나는 포푸리 화환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 그것은 필요하지 않기도 하려니와 한시적인 유행, 조악한 모조품, 특히 노골적인 향기를 내뿜는다는 점에서 아내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내는 그 포푸리가 옆집 여자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가 왜 당신한테 선물을 준다는 거지?" 내 눈앞에는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유난히 화장이 짙던 옆집 여자의 모습이 스쳐 갔다. 내 차보다 한 등급 위인 그 여자의 중형차도 떠올랐다. "그냥요." 나의 이죽거리는 물음에 반해 아내의 대답은 순진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 아무 기대를 함축하지 않은 선물이란 없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차를 얻어타고 신세를 지는 건 당신이잖아. 선물을 한다면 당신이 해야지 왜 그 여자가 해?" 포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아내는 그것을 들고 일어났다. "나를 좋아해서 그냥 선물한 거라니까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좋아한다구?" "그래요." "왜?" 아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대답 없이 포푸리를 손에 든 채 자기의 방을 향해 몇 걸음 옮기더니 갑자기 돌아섰다. 그리고 쏘아붙였다. "외로우니까요." 너무 필사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내는 대답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대로 서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도 그래? 외롭다고 생각해?" "아뇨." 아내의 시큰둥한 대답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런 다음 자기의 방에 포푸리를 걸고 나와서는 무언가를 시위하는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감자를 꺼내 깎기 시작했다.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내의 기분을 다는 몰랐지만 어쨌든 아내에게 아직도 어떤 것이 더 필요한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은 월요일인데다 비가 왔다. 막히는 차 안에서 나는 아내에게 무엇을 더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불임 클리닉으로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했다. 집으로도 전화를 했다. 아내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조그맣게, 알았어요,라고만 했을 뿐 화를 내거나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처방을 찾아낸 데 대해 스스로 만족했다. 클리닉에 가는 날 회사에 월차를 냈다. 평소보다 두 시간쯤 늦게 집을 나섰다. 나들이 기분이 나는 싱그러운 오월 날씨였다. 연초록으로 덮인 작은 산에는 희고 붉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햇살이 투명했다. 그 길은 나의 출근길이었지만 출근 시간대에는 느끼지 못했던 유혹이 깃들여 있었다. 갑자기 옆 차선으로 달려온 흰색의 신형 스포츠카가 내 차 앞으로 끼어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데 그 순간 역시 같은 자리에 빨간색 스포츠카가 한 대가 더 튀어 나왔다. 두 차 모두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발랄한 차림의 젊은이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각각의 조수석에는 역시 젊고 발랄하기로 내기를 한 듯한 젊은 여자들이 앉았다. 그들은 마치 숨박꼭질을 하듯이 차선을 질러 가며 지그재그로 운전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차선을 점령한 채 나란히 속도를 낮추는 것이었다. 먼저 빨간 차의 창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연보라색 블라우스 소매가 불쑥 나왔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 한 줌이 차창 밖으로 빠져나와 바람에 나폴댔다. 여자는 하얀 차를 향해 뭔가를 던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하얀 차의 창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뻗어 나온것도 반팔 스웨터를 입은 여자의 팔이었다. 팔이 드러났으므로 그 여자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이 조금 보였다. 그 여자 역시 그것을 빨간 차에 대고 쏘았다. 물총이었다. 남자들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차를 갖고 장난을 쳤고 여자들은 차창 밖으로 한 팔을 내놓았다가 다음 순간 얼굴을 돌리고 움츠렸다가 하면서 물총 장난을 하고 있었다. 네 사람 다 죽을 만큼 깔깔댔다. 차 지붕 위에는 아직도 스키 캐리어가 그대로 붙어 있었지만 보나마나 트렁크 안에는 캔맥주와 과일이 든 아이스박스, 그리고 접는 피크닉 테이블 따위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 길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깜찍한 소용에 대해 솔직히 나는 약간 놀랐다. 그들의 차는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을 받아 갈라져 나갔다. 지리한 회색 포장 도로로 직진하는 나와 달리 그들은 풀이 북슬북슬한 방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고는 연녹색 산 속의 오솔길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하얀 길은 알맞게 구부러졌고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옆자리를 보니 아내도 그 스포츠카들이 사라진 오솔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길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내내 고개를 뒤로 잔뜩 돌리고 쳐다보았다. "저 길로 한번 가보고 싶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꽉 잠겨 나왔다. 마치 선택된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가 그 계절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환상의 길 같다는 말도 했다. 나는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언제 일요일에 한번 나오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내는 바로 대답했다. "봄이 가기 전에요." "알았어." 한참 후에 아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길을 볼 때마다 가보고 싶었어요." "여기로 나와 본 적이 있단 말야?" "가끔요. 저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중남미문화원이란 곳도 있어요." 그러나 아내는 문화원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옆집 여자는 그런 곳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문화원을 지나면 보광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 앞의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고 광탄이라는 곳으로 넘어가서 인공 연못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옆집 여자와 둘이서만 갔냐고 물어 볼까 망설이는 사이에 아내는 불쑥 다른 말을 했다. "교외 카페에는 나이 든 여자들이 많아요." 내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휴대 전화로 집에 전화를 해서 숙제 안 한다고 아이들을 야단치고, 읽은 책 이야기도 하고, 헬스클럽이나 귀고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요. 누구는 제사가 많다. 어떤 달은 세 번이라서 모임에도 잘 못나온다, 누구는 상가 시세가 올라서 돈을 벌었다, 아무개 교수의 교양 강좌가 좋더라, 듣고 울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나는 아내를 탐탁잖은 눈으로 힐끗 보았다. 뜻밖에도 아내의 표정은 쓸쓸했다. "얼마 전에 옆집 여자가 백화점 주차장에서 어떤 남자 차를 받은 적이 있어요. 차가 꽤 긁혔는데 자꾸만 괜찮다고 그냥 가라는 거예요. 옆집 여자가 미안하다고 그 남자한테 점심을 사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라구요. 옆집 여자는 그 남자를 몇 번 더 만났어요. 자기 인생 문제를 관심 있게 들어준대요." 아내는 아까보다 훨씬 더 쓸쓸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속된 호기심을 차단하기 위해 꽤 많은 의지가 필요했다. 서울에 다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많은 의지가 필요했던 것은 차단해야 할 것이 호기심이 아니라 의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말이 없었다. 이름이 불려지자 초등학교 학생처럼 얌전히 대답을 한 다음 일어나서 진료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내는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아주 짧은 순간 나를 돌아보았다. 무력하고도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담배를 끄고 일어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아내의 배란기에 나는 되도록 일찍 퇴근했다. 그녀는 힘든 눈치였지만 클리닉의 지시와 내가 주는 정자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느 날 나는 침대에서 그녀의 눈시울이 더 이상 젖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내 목을 꼭 껴안지도 않았다. 대신 샤워를 안 했다든지 감기에 걸렸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며 피하는 일은 없어졌다. 내 허리의 움직임에 아찔한 가속도가 붙는 순간 갑자기 가슴을 밀치며 "잠깐만요" 하면서 입덧을 하는 임부처럼 욕실로 뛰어 가는 일도 이제는 물론 없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내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해석했다. 가을 인사 때 부서가 바뀐 뒤로 나는 회사일이 더욱 바빠졌다. 아내의 배란기를 빼고는 일찍 들어와 아내와 시간을 보낼 기회도 적어졌다. 그러다 보니 아내를 안고 싶은 욕망도 그때에 맞춰 규칙적으로 생겨났다. 나는 무엇에든 잘 적응하는 편이었으며 그러니까,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아내도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었다. 이제는 옆집 여자의 차를 자주 타지도 않은 듯했다. 더욱이 가을로 접어들 무렵 남편이 다시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아 돌아온 뒤로는 옆집 여자도 그 전처럼 외출이 잦지도 않다고 했다. 그 집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사라진 대신 이따금 한밤중에 고함소리나 뭔가 둔중한 것이 집 안을 흔드는 소리 따위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곱 시 십 분이면 어김없이 옆집 여자가 남편을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는 광경을 먼발치로 볼 수 있었다. 아내는 말수가 적어졌다. 말 자체를 거의 안 했기 때문에 엉뚱한 말을 하는 일도 없어졌다. 집 안은 더욱 깨끗해지고 언제나 조용했다. 아내는 다시 독일식 책상에서 잡다한 책들을 읽고 안락의자에 웅크리고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책을 담아 두는 상자가 거의 늘어나지 않길래 물었더니 이제는 책을 사지 않고 상가의 대여점에서 빌려 본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 앞으로 배달돼 오던 《지오》나 《리더스 다이제스트》같은 잡지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아내는 잠이 늘어난 것 같았다.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바쁜 만큼 나에 대한 회사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다. 조직 사회라는 곳에서 힘든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소한 일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내까지도. 한동안 밤마다 걸려 오는 장난 전화에 시달리다 못해 아내가 전화선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린 일, 배냇저고리를 사주었던 아내의 친구가 모처럼 찾아오며 사왔다는 장식 양초에서 불이 옮겨붙어 벽에 걸었던 우리의 결혼 사진이 타버린 일, 누군가 내 차와 옆집 차를 포함한 다섯 대의 타이어에 드릴 구멍을 내고 도망친 사건이 일어나 그때 광대뼈가 튀어나온 옆집 남자와 처음 인사를 나눈일 등 몇 가지 일이 일어났지만 큰 사건은 아니었다. 옆집 남자는 신도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유럽 같은 오래된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인공 호수도 그렇고, 아무튼 대단해요. 남자가, 신도시에 살기 어떠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조용해서 좋더군요,라고만 대답했다. 그런 일들말고 그래도 좀 큰일이라면 아내가 화상을 입은 사건일 것이다. 아내는 레인지 위에 있는 뜨거운 주전자를 옮기다가 주전자 주둥이에서 끓는 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옆구리를 데었다. 위험한 화상은 아니었지만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며칠 동안 진물이 흘렀기 때문에 배란기인데도 나는 아내의 곁에 가지 못했다. 아내의 화상은 곧 아물었다. 아내가 꺼내 준 바바리 코트를 입고 출근하던 날 나는 신호 대기에 걸려 차를 세우고 기다리다가 불현 듯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봄이 지나가 버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다시 봄이다. 봄이 다 가기 전에 함께 가보자고 약속했던 그 길. 지난주에 나와 아내는 그 길 옆을 지나쳤다. 작년과 똑같이 연녹색 잎과 희고 붉은 꽃들로 덮여 있었다. 나는 시계를 자주 그때마다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나와 달리 아내는 한 시간뒤면 우리가 헤어진다는 것을 잊기 위해 그다지 애쓰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에게 지난 겨울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날 밤, 무섭게 조용하던 십일월의 밤 이후 아내는 몹시 수척해졌다. 안락의자 속에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공의 지름이 점점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십일월 마지막 밤은 바람이 몹시 불고 간간이 비가 뿌리는 음산한 날씨였다. 아홉 시쯤 퇴근한 나는 벨을 여러 번 눌러도 기척이 없자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아내의 방문부터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안락의자는 비어 있었다. 전등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아 집 안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내는 어두워지기 전에 외출한 모양이었다. 부엌에 가보니 저녁을 지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흔치 않은 일이긴 했지만 나는 곧 이해했다. 아내에게라고 해서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나는 다른 날처럼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손을 씻은 다음 텔레비전을 켰다. 아내는 금방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보다 좀 늦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열한 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열 시가 넘으면서부터 나는 몇 번인가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열한 시가 되자 베란다에 서서 십 분을 기다렸다. 베란다 철책에 비벼 끈 담배만도 세 대나 되었다. 그제서야 어딘가로 연락을 해서 아내를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로? 나는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내가 어딘가로 가버렸다는 사실 못지않게, 그런데도 아내를 찾을 전화번호 하나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더 큰 당혹감이 느껴졌다. 아내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너무 잘 정리되어 그것들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독일식 책상 위에는 메모지 하나 없이 꽁무니에 지우개가 달린 노란 연필뿐이었다. 아내는 책을 펴기 전에 언제나 저 연필을 찾았다. 연필을 손에 쥐어야만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온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가 그 연필로 무엇을 쓰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필은 키가 아주 작아져 있었다. 아내의 상자들도 단정했다. 큰 것은 큰 것끼리 작은 것은 작은 것끼리 네 귀퉁이를 맞추고 쌓여 있었다. 다른 날과 다른 거라고는 아내답지 않게 상자 위에 먼지가 조금 있다는 점 정도였다. 부엌이나 욕실, 안방, 내 책상이 있는 방, 그 어디에도 눈에 거슬리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집 안에 아내라는 여자의 내면을 알 만한 것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이 집 안은 그녀가 아닌 어떤 여자가 들어와 당장 살기 시작해도 이상한 점이 조금도 없을 만큼 표준적이었다. 안주인의 냄새가 없었다. 아내와 나는 살을 맞대고 오 년을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 아내가 사라졌는데도 그녀가 간 방향을 찾아 한발도 내디딜 수 없다면 우리가 함께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나는 무엇을 근거로 아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던 걸까.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나갔다. 아내의 귀가 경로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파트 앞 주차장까지 뿐이었다. 시간이 늦어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나는 화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는 비가 뿌려서 어깨가 차가웠지만 들어가서 우산ㄴ을 들고 나올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쳐서 빗줄기의 가는 빗금이 드러났다. 차에서 내린 것은 옆집 남자였다. 빗속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왜 여기 서 계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 예"라고 얼버무리고는 한 걸음 비껴 서려 했다. 그러나 마침 운전석에서 내리는 옆집 여자를 보자 내 얼굴은 스트로보가 터지듯 갑자기 밝아졌다. 나의 반가움과 달리 여자는 내가 가까이 가자 경계하며 시선을 피했다. "저, 집사람이 아직 안 들어왔는데 혹시 "라고 말을 붙이는데도 주춤거리며 남편 쪽을 힐끗 쳐다본 다음 등을 돌리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례하고 부자연스러운 몸짓 속에서 여자가 틀림없이 뭔가 할 말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그들 뒤로 몇 발짝 떨어져 집으로 돌아와서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는 오 분쯤 후에 왔다. 여자가 자기 집의 현관문을 조금 열어놓고 받침쇠로 고정시키는걸 보고 나도 우리 집 문을 똑같이 했다. 여자는 조금 전과 달리 아내를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남자 혼자 있는 옆집에 가야만 하는 긴급 상황임을 남편에게 설명하기 위헤서라도 그런 표정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 집 소파에 앉아 여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잘 아는 번호인 듯 숫자판을 누르는 손가락이 빨랐다. 휴대 전화인 것 같았다. 여러 번 같은 번호를 눌렀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십 분이 지나갔다. 여자는 일어났다. 이제 남은 일은 경찰서와 병원 응급실에 연락을 해보는 일뿐인 듯했다. 공공 기관의 기록철에 들어갈 만큼 공식적인 사건으로 커지지 않고 사소한 개인적인 일로 그칠 기회는 여기에서 끝인가. 친구 집에 갔다가 차가 끊겼다든지 책을 사러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 나갔다가 내친김에 영화까지 보고 들어온다든지, 하다못해 집에 오는 버스 속에서 잠이 들어 버려 지금 종점에서 돌아오고 있다든지 그렇게 끝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 절망 때문에 나는 여자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여자는 현관에서 신발을 꿰다 말고 갑자기 버팀쇠를 발로 올려 반쯤 열려 있던 현관문을 닫아 버린 뒤 내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제 남편 귀에는 안 들어가게 해주세요. 네? 뭐라구요? 내가 되묻자 여자는 말했다. 아파트 정문으로 나가서 좌회전하면 순환로가 나오잖아요. 그 길로 쭉 따라서 서너 블록 가다 보면 다리가 있어요. 다리 너머 우회전해서 계속 가세요. 오른쪽으로 크게 '그린 파크'라는 간판이 보일 거예요. 삼층 끝방이에요. 근처에 카페도 많고 다른 모텔도 많으니까 찾기는 쉬워요. 나는 구조대를 만난 조난자처럼 그녀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남편에게는 지금 자기가 한 말을 비밀로 해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마치 거래를 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내를 찾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된 나는 여부가 있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한 번 더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여자의 눈빛은 몹시 흔들렸다. 깊은 두려움과 번민이 어려 있었는데 남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비장했다. 순간 나는 '파크'라는 말이 가진 수상한 어감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억세게 움켜잡았다. 내 손톱이 옷을 파고들어 빗장뼈에 닿았는데도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순환로는 무섭도록 어둡고 조용했다. 이따금 건너편에서 질주해 오는 자동차의 불빛으로 젖은 도로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여자의 말대로 찾기 쉬운 장소였다. 검은 허공에 높이 걸린 붉은 온천 마크가 마치 소의 엉덩이를 가지기 위해 벌겋게 달군 인두 도장 같았다.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것을 떼어 내서 그대로 아내의 흰 젖가슴에 지져 주홍 글씨를 새겨 버리고 싶었다. 내 손 안에서 사이드 브레이크가 빠지직 소리를 내며 당겨졌다. 여자의 설명으로는 삼층 끝방은 그 모텔의 특실이라고 했다. 자기도 아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요일에 빌리곤 했던 방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가 사용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새댁은 차도 없고 워낙 외진 곳인데 이 시간까지 안 들어왔다니 저도 걱정이 돼서 알려 드리는 거예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 얼굴을 봐서 한번 나갔던 건데 하도 전화질을 해대니까 오죽하면 새댁이 전화선까지 잘라 버렸겠어요 그리고 저 혹시 모르니까 지하 레스토랑으로 먼저 가보세요. 아직 거기 있을지도 몰라요. 새댁은 그럴 사람이 아녜요,라는 따위의 말만 했다. 물론 나는 지하 레스토랑에 들러 보지 않고 곧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정규 방송이 끝나 지글거리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이 달빛처럼 부옇게 침대로 비쳐들었다. 그 침대에 아내는 혼자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베개에 긴 머리를 탐스럽게 흩뜨리고 혼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으 하얀 옆 얼굴. 시트를 젖혀 보니 그녀는 알몸이었다. 유리로 된 천장 너머에서 어둠이 납작 엎드린 채 그녀의 벗은 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무섭게 몸을 떨더니 아내는 그대로 앓아누웠다. 지독한 감기였다. 며칠 동안 운신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물 한 방울 넘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버려두었다. 얼마쯤 나은 뒤부터 그녀는 다시 청소와 빨래를 시작했다. 너무나 여위어서 미라 같았다. 나는 새벽 헬스클럽과 외국어 학원의 야간 강좌에 등록을 했다. 늦은 밤에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집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부엌이나 자기의 방 쪽에서 마치 혼백이 떠돌 듯이 소리 없이 나타나면 그때마다 나는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데 분노했다. 뻔뻔스럽게도!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하고 그녀 자신이 개에게 뱉었던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는 거의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 동안 내가 저 여자의 무엇을 안다고 생각해 왔을까. 나는 그녀를 중오했다. 그날 밤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를 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나 자신까지도 증오했다. 아내의 잠은 더 깊어졌다. 이젠 약을 먹고 자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이따금 나는 유배지 같은 아내의 방 문틈에 귀를 대고 어둠 속에서 혼자 깊이 잠든 그녀의 숨소리를 듣곤 했다. 숨소리는 끊어질 듯하다가도 이어졌다. 나는 그곳으로 빛과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틈을 다 종이로 발라 버리고 싶었다. 그 위에 파라핀을 덧칠해서 봉인해 버리고 싶었다. 딱 한 번 그녀의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본 일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밤늦게 들어왔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락의자에서 자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다른 날처럼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다음 마감 뉴스를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을 바꿔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거칠게 아내를 흔들었다. 손끝이 허전할 만큼 아내의 몸에는 거의 부피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내 손길은 난폭해 졌다. 아내가 눈을 떴다. 거실의 불빛이 새어들어와 그녀는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빙긋 웃었다. 몸을 일으키더니 유령처럼 바닥을 가볍게 스쳐 자 부엌으로 갔다. 그녀는 먼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문지르고는 쌀통에서 쌀을 꺼내 씻어 밥을 안쳤다. 멸치를 꺼내고 다용도실의 된장통에서 된장을 퍼와 뚝배기에 넣고 물을 부었다. 감자, 양파, 당근을 차례로 껍질을 벗기고 마늘을 깠다. 그것들을 도마 위에 깨끗이 썰어 놓을 때쯤에는 된장국물이 끓고 있었다. 야채를 차례로 넣은 다음 파를 꺼내 씻었고 두부도 귀를 맞춰 네모 반듯하게 썰어 대접 위에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볼에 달걀 세 개를 깨드려 소금을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잘 휘저은 다음 파를 다져 넣었다. 생선 그릴에 물을 붓고 가스불을 켰다. 냉장고에서 갈치를 꺼내 씻어서 달구어진 생선 그릴에 집어 넣었고 그 옆의 가스 레인지에 프라이팬을 얹어 놓고 불을 붙였다. 적당이 달궈진 프라이팬에 달걀물을 한쪽에서부터 가만히 쏟아 천천히 말아 가기 시작했다. 조금 후에 갈치를 뒤집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그녀는 내가 꼼짝 않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물론 식탁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조차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식탁을 차렸다. 내 앞에 밥을 퍼서 놓더니 자기 밥을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든 동작 속에 내 눈에 익숙한 평온이 깃들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평온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 때 뿐이었다. 평온하다는 것은 수면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생각이다. 그 순간 물 속에서는 가물치가 꼬리를 바둥거리는 물새우를 반쯤 삼키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열심히 밥을 먹었다. 다 먹은 다음 물을 가지러 냉장고로 갔다. 물쟁반을 들고 식탁으로 돌아온 그녀는 식탁 위를 보더니 갑자기 멈칫했다. 쟁반 위에 있던 물병과 유리컵을 내려놓고 거기에 자기의 빈 밥공기를 옮겨 담으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언제 밥을 먹었죠?" 그 겨울은 우리 둘 다에게 몹시 힘들었다. 떠나는 날 아침 아내는 머리를 감았다.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다. 그 시각에 내게 걸려 올 전화는 없었으므로 나는 받지 않았다. 벨이 계속해서 울려대자 아내가 머리에 타월을 감싸고 욕실에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 다음부터 선 채로 한마디 말없이 듣기만 하고 있었다. 타월이 풀어져 그녀의 목 뒤로 점점 흘러내리더니 어깨 위로 떨어졌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아내는 송화기를 잡지 않은 왼손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머리채를 모아 잡고는 전화기 옆의 작은 화분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검게 적셔지는 것을 묵묵히 쳐다보다가 가만히 송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왔어? 내가 묻자, 장난 전화예요, 아내의 음성은 조용했다. 아내는 조수석에 탔다. 불임 클리닉에 가던 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으며 내가 안전벨트 매는 것을 도와 주자 빙긋 웃음을 지었다. 차가 신도시를 벗어나 교외 풍경이 나타났을 때부터는 계속 창 밖을 쳐다보았다. 봄빛으로 물든 조그만 둔덕들, 줄지어 늘어선 비닐 하우스도 보고 지나가는 차에 타고 있는 아이들의 장난치는 모습도 보았다. 두 대가 앞뒤로 붙어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닭장차는 꽤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가로 세로로 창살이 질러진 닭장 속에서 닭은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을 쌓아 놓듯이 빽빽이 집어 넣었기 때문이다. 몇 마리만이 겨우 창살 밖으로 목을 내밀고 공기를 마셨다. 봄바람이 불었으므로 그들의 지저분한 깃털이 가볍게 푸들거렸다. 닭장차가 지나가 버린 뒤로는 깃털 몇 개가 허공에 떠다녔다. 그녀는 나들이 가는 어린애처럼 흥미롭게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야위고 하얀 두 손. 그것은 누군가 극장 의자 위에 잃어버리고 두고 간 장갑처럼 그녀의 무릎 위에 기운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짐짓 앞만 보고 있자 눈을 스르르 내리깔더니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황급히 오른손을 운전대에서 떼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왜 그래, 여보? 왜 그래?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음 순간 아내는 돌연 진정되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한참이나 앞을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닭이 다 없어졌어요. 그러고 보니 바로 앞에서 달리고 있는 닭장차에는 닭이 한 마리도 없었다. 아내는 텅 빈 닭장을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보며 또 중얼거렸다. 닭이 다 없어졌어요.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닭장차는 두 대였고 앞에 가던 차에는 처음부터 빈 닭장만 실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아내는 닭이 가득 실려 있는 뒤차만을 본 모양이었다. 내가 사정을 설명해 주었지만 아내는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닭장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고 계속 두 손으로 자기의 목을 만지며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잠이 들었다. 그 곳에 도착한 뒤에야 그녀는 눈을 떴다. 자기가 잠든 사이에 낯선 곳에 도착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막 클로로포름에서 깨어나 눈에서 검은 안대를 벗은 납치된 소녀처럼 불안해했다. 그러나 아내는 대체로 침착했다. 수속은 순조로웠다. 숲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그곳은 그녀가 갇혀 있는 신도시의 집이나 불임 클리닉처럼 회색 건물이었지만 훨씬 더 평온해 보였다. 희망 따위를 볼모로 잡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헛된 희망을 갖는 일도없을 것이다. 나는 들어갈 때 내가 냈던 바퀴 자국을 따라 그곳을 나왔다. 붉은 꽃이 사방에 돋아 있었다. 차창을 내렸다. 숲 냄새가 났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아내는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치 않았다. 가까운 데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라고 말했을 뿐이다. 아내를 데려다 주고 혼자 돌아오면서 나느 또 그 길 옆을 지나왔다. 구부러진 그 길을 보며, 지난 봄으로 되돌아간다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나는 앞차가 서면 서고 출발하면 따라서 출발했다. 그날 밤 나는 아직 마감 뉴스를 보지 못해서 침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채널을 이리저리돌려 보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천천히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모컨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텔레비전 화면에 '세계는 지금'이라는 제목이 나타나더니 얼마 후에 내레이터의 음성이 들려 왔다. - 지난 발렌타인 데이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연구실에서는 수컷 초파리와 암컷 초파리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짝짓기를 하려고 날갯짓을 하며 암컷에게 달려드는 수컷을 암컷이 계속해서 머리로 들이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다리로 수컷의 머리를 걷어차 버리리까지 했습니다. 이 암컷은 수컷이 정액을 뿌려도 알을 낳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나 좋아했을 얘기였다. 나는 물끄러미 화면을 쳐다보았다. - 그 이유는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연구팀은 이 실험으로 돌연변이 유전자가 신경 계통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유전자에는 '불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나는 불타 버린 결혼 사진과 아내의 화상을 떠올렸다. 결국 마감 뉴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설쳤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나는 당장 들어갈 수 있는 빈집을 구해 줄 부동산과 포장 이사 회사에 전화를 했다. 그들은 정확히 아침 아홉 시에 도착했다. 한 사람은 휘파람 소리에 맞춰 장갑을 끼고 한 사람은 내게 이사 갈 집의 약도와 회사 전화번호를 넘겨받는다. 집을 나선 뒤 나는 아내의 방을 한 번 더 둘러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차에 시동을 걸고 문득 건너편을 보니 옆집 여자가 차를 닦고 있다. 신도시를 벗어나면서도 나는 아무 감회가 느껴지지 않는다. 푸른 둔덕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곳을 떠났다는 사실이 조금 실감났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와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차가 많지 않은 시각이라 그냥 직진을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초록색 화살표에 불이 켜지자 차를 왼쪽으로 꺾는다. 언젠가 스포츠카가 달려갔던 것처럼 풀이 북슬북슬한 방둑길로 해서 아내가 가고 싶어하던 숲길로 접어든 것이다. 길은 몹시 구부러져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험하고 좁은 숲길이다. 먼지가 날리고 차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탈길을 돌아서는데 갑자기 산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무덤으로 가득 뒤덮인 거대한 산. 그리고는 낮은 하늘과 귀기 어린 정적뿐이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길을 따라간다. 겨드랑이가 땀으로 젖기 시작한다. 화장터와 마을이 갈라지는 길에서 팻말이 나온다. 급하게 마을 쪽을 향해 운전대를 꺾었지만 숲은 점점 깊어지는 것 같다. 무덤만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져 있다. 등뒤에서 와이셔츠가 땀으로 달라붙는다. 얼굴로도 땀이 흘러내린다. 차창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먼지들이 수북이 몰려와 엉겨 붙는다. 차는 비틀거리듯이 산길을 달리고 달린다. 그렇다. 나는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했다. 그것을 아내는 어떻게 갚아 주었던가. 아마 지금쯤 그녀는 자고 있을 것이다. 약을 먹을 시간이 되면 깨어난다. 그리고 다시 잠들기 전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나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녀는 내 동의 없이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그녀는 아주 잘 있다. 내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일로 내 사랑에 보답하고 있다. 오늘 그녀의 방은 없어졌다. 이윽고 시야가 뚫린다. 반갑게도 저 멀리에 늘씬한 포장 도로가 나타나 있다.  
72 안광옥 선생님/남수현
편집자
6280 2010-10-30
10.11월 6호 수필 <안광옥 선생님> -남수현 11월 중순경 한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 추석연휴 끝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광옥 선생님 댁 앞을 속도를 늦추어 가다 보니 집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데 선생님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시내에 들러 두유를 하나 사 들고 방문했더니 조금 전 그 노인이 바로 초등학교 5,6학년 때 담임이셨던 안광옥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29년 전의 기억나는 제자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물으시며 특히 나를 많이 기억하고 계셔서 나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란다. 그러잖아도 친정집을 오갈 때 지나치는 길목인지라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게 마음에 항상 걸렸었는데 혼자 찾아뵈려니 용기도 없고 또 혼자만 선생님을 찾아뵈었느냐는 친구들도 있을 것 같아 일단 "I love school"에 <더 늦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샘이 그나마 제자들에 대한 기억이 일부분이라도 남아 있을 때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글을 올렸는데 조회 수가 졸업생숫자(당시 졸업생이 한 학급 57명)를 넘도록 걸려온 전화는 달랑 두 통화. 하는 수 없이 그 두 친구랑 12월 마지막 날로 일정을 잡고 동창회주소록의 전화에 하나씩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꼭 뵙고 싶다고 온다고 해 놓고 그날 아침 중요한 회사의 일이 있어 미안하다는 신봉이와 다음에 꼭 들리겠다는 본국이의 전화, 결국은 언양의 고속철도현장에서 없는 시간을 내어 올라온 영철이와 행정실에 근무하는 재의와 셋이서 가기로 했다. 지난 12월 마지막 날 오후 3시, 낮은 감나무 몇 그루로 둘러싸인 집안을 들어서니 집의 오른쪽 새로 지은 건물 안에서 선생님께서 창문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자녀가 조금씩 추렴해서 지었다는, 자녀가 다녀갈 때나 손님들이 오면 잠시 사용한다는 새집은 살림살이가 별로 없어 몹시 정갈해 보였다. 4년 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동네 앞 화단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그 앞에 서 있던 흰색의 승용차가 눈 깜작할 사이에 선생님을 덮치는 바람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생활을 4개월 정도 하셨고 그 바람에 척추뼈가 두 개 정도 망가져 허리가 매우 굽으셨다고 한다. 연세가 있으셔서 통증이 없으면 수술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낫다는 전문의의 권유가 있어 그대로 지내신다고 하신다. 선생님의 자녀분들이 요즘은 젊은이들이 휴대전화나 디카로 사진을 수월하게 찍는다고 하셨다는데도 다니시는 교회에 부탁해서 카메라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한다. 내 디카에 담아서 동창회사이트에도 올리고 사진을 현상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리겠다고 하니 그게 좋겠다고 하신다. 이야기 도중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시더니 서랍에서 메모지 셋과 볼펜 셋을 꺼내어 '숙제'라고 하시며 적으라고 하신다. A4용지 절반 크기에 이름, 배우자 이름, 아이들 이름,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겨두라는 거였다. 킬킬거리며 오랜만에 숙제하는 기분으로 셋이 나란히 방바닥에 엎드려 잘 읽으실 수 있도록 큼지막하게 적었다. 잠시 후 사모님이 비스킷과 과일, 유자차를 내어오셨다. 건강해 보이신다고 했더니 아흔여덟의 시어머님과 지팡이에 의지하고서야 밖이라도 산책할 수 있다는 선생님, 그리고 아홉 살에 뇌염을 앓아 장애를 가진 마흔아홉의 딸을 데리고 산다고 하신다. 한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집안이 엉망이어서 가까운 시내에 볼일이 있으면 택시를 타고 빨리 갔다 와야 한다고 하시는 사모님의 위로 삼아 잡아본 손은 투박한 삶에도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29년간의 함께 못한 이야기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동창들과의 전화통화로 두 시간을 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길가까지 배웅나오신 선생님, 저만큼 멀어진 영철이까지 큰 소리로 부르시더니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에게 전해주라며 한 사람에 만원씩을 주시는데 사양하는 게 도리는 아닌 것 같아 초등학교 다닐 때 손님들이 주시는 작은 용돈에도 마냥 즐거웠던 기분으로 감사하게 받았다. 차를 돌려나오는데 집 앞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우리 차가 멀어지도록 내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오누이같이 다정해 보였다  
71 오래된 집 < 이승희>권형하 file
편집자
4134 2010-10-30
오래된 집 / 이승희 1. 이 집은 낡고 오래된 악기와 같아서 같아서 소리를 냈다 냈다. 낮잠처럼 햇살이 흘러들고 나가는 마당은 깊어서, 아 너무 깊어서 깊어서 어머니 등 뒤의 세월처럼 눈물 나, 눈물 나. 배냇저고리 같은 옷을 입은 풀들, 아기들, 녹색으로 몸 물들이며 마당 가득, 지붕 가득 피어올라, 동굴 같은 눈으로 노래 부르네, 노래 부르네. 다시 고욤나무로 돌아간 감나무 한 그루가 보낸 엽서가 마당에 가득하다 2. 우물가에 앉아 햇감자를 숟가락으로 긁을 때마다 공중에도 둥글게 우물이 파였다. 3. 이젠 덜 아픈 거니? 지금 난 네 안에 있어 네 안에서 자고 싶어 달이고 달인 세월 아직 따뜻하구나, 종일 햇살에 발 담근 세월아. 난 마루에 앉아 자꾸만 네게 말걸지, 세월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저승의 세월이 이승의 세월로 꽃피는 늙음이, 낡음이, 이젠 떠나고 없음이 이리도 편안할 수 있는지 ----------------- 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7년 《시와 사람》신인상 당선. 1999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과거로의 회귀와 미래로의 위안 소설이 현실 지향적 문학이라면 수필은 지나온 체험을 수렴하여 삶의 풍향계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는 무엇일까. 아마도 과거나 현재 속에서 미래지향적 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승희 시인의 시 <오래된 집>은 과거로의 회귀와 미래로의 위안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어쩜 삶의 원형(原型)을 찾아 동심이 회복되는 시로 읽혀집니다. 더구나 물질을 중시하는 시대에 젖어 살다보면 자칫 정신적 내면적 가치를 되돌아보지 못한 채 부유(浮遊)하는 삶이되기도 할 때 되새겨 읽어볼 만합니다. 오늘날은 이웃한 옆집 아파트의 노모가 보름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된다든지, 도박과 유흥에 빠졌던 젊은 부부가 아이를 아사시켰다고 하는 패륜적 보도나 기사들을 종종 대합니다. 이때 우리 사회가 소담스러운 현재나 미래를 위한 과거에의 아름다운 꿈을 회상하거나, 소박한 삶을 살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승희의 시 <오래된 집>에서는 1연에서는 현재의 감나무인 화자가 과거의 고욤나무로 돌아가 엽서를 띄우면서 회상하는 온전한 자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쩜 많이 앓고 난 뒤에 불쑥 커버린 내면적 자아를 보는 듯합니다. 2연에서도 과거의 단란했던 추억 때문에 햇감자를 긁어내어 감자전을 부치듯 감자 속으로 우물이 보인다고 합니다. 심리적학으로 본다면 우물은 내면적 자아를 상징할 것입니다. 이때 둥글게 파인 우물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내포할 것입니다. 3연에서는 과거의 순수함이나 완강한 천진함으로 우물 속에 비친 또 다른 자아와의 화해를 하거나 화합하는 정신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화자가 많이 앓고 난 뒤에 정신적으로 성적(性的)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행 중, ‘따뜻하구나’와 ‘난 마루에 앉아 자꾸만 네게 말 걸지’ 라는 시행에서, 화자의 화합과 소통의 장면을 나타냈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의 화자가 도달한 심리적 상태를 나타낸 시행은, “저승의 세월이 이승의 세월로 꽃피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간 과거나 부족함이나 결핍 속에서는 다소 미온적 태도를 보이지만, ’편안할 수 있다‘라고 언술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승희 시인의 <오래된 집>에서도 유년의 아린 추억의 실타래를 우물 속에 드리워 놓고, 날마다 한 뼘씩 건져내면서 현재의 자아를 부추기고 북돋우며 살아가듯, 우리들도 아린 추억의 실타래를 감아내면서 푸른 하늘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래된 집>을 처음 읽고는 ‘여성 시인이겠구나’ 하고 느꼈는데, 막상 알고 보니 남자였습니다. 어찌하였던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부피가 깊었겠지만, 이제는 ‘결핍’보다는 ‘연민’의 시의 길로 들어서는 시를 기대해 봅니다.  
70 색깔을 읽는 여자/이홍사 file (2)
편집자
5305 2010-10-30
10.11월 6호 소설 색깔을 읽는 여자 이 홍사 말에도 색깔이 있다. 말에도 색깔이 있다니까 얼른 얼룩말이 연상되지만 말馬이 아니라 언어에도 색깔이 있다는 얘기다. 자야는 언어에서 색깔을 읽는 특이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말뿐이 아니라 심지어 모든 사물이 저마다 지닌 빛깔을 볼 수가 있다. 자야가 보기에는 진한 색깔을 띤 말과 연한 빛깔을 띤 부드러운 언어가 있다. 자야는 늘 연한 빛깔을 띤 흰색 계통의 말을 우아하게 하곤 한다. 자야는 수필가다. 자신이 쓴 수필에도 흰색 빛깔을 지닌 글이 있고 푸른 빛깔을 띤 수필이 있다. 자야는 지역 여류들만 모인 수필동인 모임에도 나가고 자비출간이지만 ‘하얀 연못’이라는 수필집도 낸 바가 있다. 자야는 수필가답게 교양과 지성을 지닌 말을 한다. 그게 그녀의 입에 밴 버릇이다. 교양과 지성을 지닌 말은 말하자면 흰색 언어이고 품위와 미모를 지닌 말은 카키색이거나 보랏빛 계통의 말이고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은 검정색으로 읽힌다. 수필이나 시집을 읽으면 그 말, 언어의 색깔을 선명히 느껴진다. 색깔로 읽는 것이 자야만이 지닌 독특한 글 읽기의 방식이다. 그 색깔만으로도 그 글이 지닌 이미지와 형상을 읽을 수가 있다. 글을 읽고 난 뒤에 그 색깔의 이미지가 오래토록 자야의 머리에 남는다. 지난밤에도 자야는 흰색 계통의 말을 지닌 시집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시는 흰 빛깔을 띤 시이다. 흰 빛깔을 띤 시는 진한 서정이 묻어 있고 물가에서 노니는, 여유로운 한 마리의 고귀한 학을 보는 것과 같다고 수필에 쓴 적이 있다. 시뿐이 아니라 신문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도 그 빛깔을 자야는 느낀다. 신문은 온통 총천연색이다. 그 내용에 따라 갖가지 색깔이 있다. 자야는 가급적이면 흰색을 지닌 사설이나 미담 같은 미색계통의 내용을 찾아 읽는다. 자야가 수필의 글감을 찾는 곳은 거의가 신문이다. 정치면을 읽을 적에는 그게 검정색이라는 걸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흰색이나 미색 계통의 언어가 싫을 때도 있다. 수필을 구상하고 읽고 쓰는 행위조차 싫을 때가 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오늘은 자야도 흰색 언어에 식상함을 느끼고 붉은 색 언어를 토하고 싶었다. 생리가 끝나고 사나흘 후면 늘 그렇다. 오늘은 생리가 끝난 지 사흘째다. 정신보다 몸이 붉은 색 언어를 원한다.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아침부터 몸은 붉은 색 언어를 찾고 있었다. 그런 신체변화는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지난밤에 잘 적에 미색계통의 실크 나이트가운을 입고 침대에 들어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팬티마저 벗어던진 알몸이었다. 잠결에 자신도 모르게 다 벗어 던진 모양이었다. 몸이 홧홧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런 날은 붉은 색의 언어를 듣거나 붉은 빛깔의 말을 토하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날씨마저 우중충해서 몸은 더 괴롭다. 부나비! 그 곤충의 이름이 불쑥 떠오른다. 제 몸이 타는 줄을 모르고 불로 달려드는 부나비. 자신이 지금 한 마리의 부나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제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몸이 원하는 색깔로 변색시켜주거나 풀어줄 대상이 없다. 남편은 해외로 파견 근무나간 지 이년이 넘었다. 지난밤에 필요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몸을 붉게 달구어줄 대상이었다. 외교부에 근무하는 남편은 해외 파견근무 중이지만 중간에 서너 번 다녀갔다. 물론 그녀의 몸을 불같이 달구어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생리는 매달 있는 일이고 외국에 있는 남편은 그녀의 색에 대한 갈증을 달마다 채워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없는 침실은 온통 쓸쓸한 회색이었다. 남편과의 격렬한 섹스 뒤에 나른해지는 기분으로 혼곤하게 자고나면 몸이 착 가라앉으면서 색깔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런 날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자야는 생리 후에는 자신이 변색동물이라 생각한다. 남편이 없는 동안은 몸의 색깔을 변색 시켜줄 상대가 없다. 그저 흰 빛깔의 내용이 담긴 수필이나 교양서적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몸을 달랠 수밖에 없다. 자야는 아침에 샤워를 끝내고 지난밤에 읽던 시집을 다시 펼쳐 들었지만 흰색 언어로 점철된 시집은 그냥 눈을 훑고 지나갔다. 은유로 가려진 시적 이미지나 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더 읽을 자신이 없어 시집을 접어 침대머리에 던져두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옷장에 걸어둔 옷마저도 붉은 톤이 눈에 들어왔다. 자야는 붉은 빛깔을 지닌 옷으로 골라 입고 외출준비를 했다. 정신이 자야를 화장대 앞에 앉힌 것이 아니다. 단지 몸의 지시에 따랐다. 정신이 몸을 지배해야 이상적이지만 가끔 몸은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는 혼몽한 상태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화장을 하면서 골똘히 생각해도 특별히 갈 만한 곳이 없다. 목마르게 그리운 붉은 빛깔, 그 욕정의 빛깔, 그 붉은 빛깔의 말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정신을 혼몽하게 만들어 갈 곳도 정하지 않고 외출준비를 한 것이다. 아늑하게 힘이 쭉 빠지도록 혼몽한 붉은 색 쾌락의 나락으로 아득히 빨려들고 싶다. 남편이 해외근무를 시작하면서 들어올 때마다 보기에도 민망하게 생긴 자위기구를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건전지가 들어가는, 진동이 있는 자위기구, 신음소리를 내는 자위기구, 실리콘으로 만든 남근 등 대여섯 가지의 자위기구를 사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를 생각하며 자주 쓰라고 건네주었지만 인간들은 참 희한한 것도 만든다고 생각했을 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 물건들은 장롱 맨 밑 서랍에 들어있다. 그 물건들은 빛깔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격히 꼬집어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의 빛깔은 지니지 못했다. 아무리 발전해도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냄새마저 꼭 같은 색깔로 만들 수는 없는 모양이다. 밖은 쌀쌀하고 구름은 낮게 드리워진 회색계통의 날씨다. 자야는 외출 준비를 끝내고도 현관에서 한동안 서성이며 바깥에서 부는 바람처럼 갈등하고 있었다. 막상 외출 준비는 하고 나섰지만, 어디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 다시 흰색 계통을 찾아가며 몸을 달랠 것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야의 마음만큼이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초겨울바람이 마당에 뒹굴고 있는 낙엽을 현관 앞으로 몰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면 대문 앞으로 우르르 몰고 간다. 바깥바람은 마치 망령부리는 노인의 마음같이 이리 불었다가 금세 저리 불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방도로 건너 상가에 있는 횟집에서 뒷문으로 내어놓은 쓰레기봉지 더미에서 날아온 스티로폼 박스가 부서진 채 낙엽과 함께 현관문 앞에서 뒹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람과 함께 그 쓰레기들이 현관으로 날아들 것 같아 자야는 조바심치며 현관문을 밀고 나왔다. 어제도 쓸고 주웠지만 소용없다. 금세 이 모양이다. 옆집, 중앙동에서 한의원을 한다는 늙은 한의사가 사는 집에서 날아오는 낙엽을 감당할 길이 없다. 자야는 바람결에 몰려다니는 낙엽더미에서 스티로폼만 몇 조각 주워서 대문 밖 전봇대 옆에 있는 쓰레기봉투로 눌러놓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에 살 때에는 예상도 못한 것들이 성가시게 한다. 그렇다고 옆집이나 앞 상가에 가서 항의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자야의 집 화단에 있는 목련 잎이 바람에 따라 그쪽으로 날아가기도 하는데 경우 없이 굴다가는 골목 안에서 싸가지 운운하며 교양과 품위에 있어서 거무튀튀한 여자로 낙인 되기 십상이다. 자야는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이 이제는 싫다. 일거리도 많거니와 골목을 나서도 익명성이 옅어 이웃사람을 만나면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이지 질색할 정도다. 문만 잠그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아파트가 성가시지 않고 편안했다. 그러나 남편은 아파트를 싫어했다. 아니, 체질과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형편이 되면 땅을 사서 단독주택을 짓고 정원을 꾸미고 시원한 여름날이나 선선한 초가을에는 친구들을 불러다 그 정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겠다는 것이 아파트에 살 때의 입버릇이었다. 자야는 그 희망의 초록색 입버릇을 시도 때도 없이 듣고 살았다. 남편은 그 소망에다 한 가지 덧붙였다. 단독주택을 지으면 아담한 자야만의 서재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자야는 그 말에 구미가 당겼다. 남편은 아파트에 살적에 위층의 아이들이 뛰어 다니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아래층의 눈치를 보며 운동은 고사하고 청소기도 마저도 제대로 돌릴 수가 없는 아파트가 집이냐고 자야에게 시커먼 소리를 질렀다. 특히나 오밤중에 위층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 자다가 그 오물을 뒤집어 쓴 양 못 견뎌 했다. 아파트는 마치 자야가 혼자서 설계하고 만든 집인 양 분풀이를 자야에게 해댔다. 시골에서 자란 그에게 행동반경이 한정되고 옆집과도 소통이 없을 정도로 익명성이 짙은 아파트는 영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파트에 팔 년을 살고 시내 외곽 구획정리 구간에 백팔십 평의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설계사인 남편 친구의 구상대로 집을 지었다. 그때는 구획정리 구역에 우후죽순처럼 상가와 단독주택이 들어섰다. 자야의 집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공사판이었다. 남편은 매일 퇴근 후에 자야를 태우고 자신의 꿈인 그 공사현장으로 가서 공사의 진척도를 확인하고 흐뭇해했다. 그런 남편의 얼굴은 희망이 싹트는 연두색이었다. 남편은 집보다 삼겹살을 구워먹을 정원에 더 신경을 썼고 자야는 자신이 쓸 서재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막상 정원과 서재를 지닌 단독주택을 차지하고 나니 남편의 말마따나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여름밤에는 정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헤아리고 가을밤이면 달빛이 서재에 들어와 놀다 가곤했다. 그러나 얼마간 살아보니 단독주택은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손가락에 물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잡일이 끝도 없다. 남편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자야의 일이었다. 몇 평 안 되는 잔디밭이지만 잔디를 깎고 돌아서면 한 뼘이나 웃자라 있고 잡풀은 아무리 뽑아도 마침표가 보이질 않았다. 웃자라는 잡풀은 푸른색이 아니라 자야의 눈에는 검정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적어도 단독주택을 가지려면 가정부와 정원사를 둘 형편이 되어야 한다고 자야는 늘 남편에게 분홍빛으로 투덜거렸다. 남편은 그때마다 아파트에 어떻게 살았는지 악몽 같았다고 청소기 마음대로 돌리고 아래 위층 간섭받지 않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사람은 흙을 밟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푸른색 언어로 빈정거렸다. 남편이 파견근무 나가기 전에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고기를 몇 번 구워먹었다. 그것도 자야로서는 보통일이 아니었다. 불을 남편이 피웠지만 음식준비부터 손님접대가 아파트에 살 때 꿈꾸던 간단한 잔치만은 아니었다.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가 끝나면 남편은 취해서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서 누워버리고 그 뒷설거지가 자야의 몫으로 고스란히 굳어진다. 격의 없이 지내는 남편의 친구들과 진한 농담을 하며 고기를 구워서 먹을 때야 붉은 빛깔의 분위기였지만 파장이 되어 술 취한 친구들이 돌아가고 설거지거리만 남았을 때 자야의 기분은 모든 물감을 한군데 풀어 마구 휘저어 놓은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색깔이었다. 자야는 차고에 있는 남편의 승용차를 끌고 나갈까하고 키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가 아무래도 쇼핑가는 것도 아닌데 차가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걸어서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골목 끝, 대로에 있는 농협에서 설치한 24시 편의점의 365코너에 가서 현금지급기에 카드를 넣고 얼마의 현금을 빼냈다. 카드만 쓰던 자야에겐 현금이 없었다. 현금을 농협마크가 찍힌 봉투에 담아 핸드백에 넣고 편의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마땅히 살 것이 없었다. 아니 필요한 것이 없었다. 편의점에서 나온 자야는 헤어코너로 갈까하다가 자신이 모자를 쓰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남편이 외국에서 사다준 회계계통의 양털로 짠 모자였다. 십년도 넘은 것이지만 오늘같이 추운 날 뒤를 살짝 접어서 쓰니 잘 어울린다. 편의점 앞은 바로 버스 정류장이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수필동인 모임의 후배인 숙경이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숙경에게 가서 수다나 떨까 생각하다가 숙경이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동안 어디를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하루에 너덧 번 들어오는 마을버스가 때를 맞추어 승강장으로 들어와 섰다. 자야는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마을버스에는 운전사를 빼고 겨우 두 명이 타고 있었다. 마을버스는 예술회관을 거쳐 역으로 간다. 자야는 예술회관으로 가서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볼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몸이 그럴 때는 어떤 예술작품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작품이 지닌 색깔마저도 읽을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자야는 예술회관을 그냥 지나쳤다. 버스에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중앙시장이 있는 역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역 앞이 버스 종점이 되는 셈이다. 자야는 역 앞에 내려 대합실로 들어갔다. 대합실 안은 훈훈했다. 어디를 다녀올까 궁리하며 하릴없이 기차 시간표를 훑어보았다. 상행선 KTX가 올 시간이 다 되어 간다. KTX를 타고 대전에 있는 여동생에게나 가서 집안 살림이 서툰 동생에게 이것저것 간섭하다가 올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평일인데 동생은 아무래도 강의를 나갔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동생은 대전에 살면서 결혼하고 나서 뒤늦게 지방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전문대학에 시간 강사로 나가고 있다. 자야는 고개를 저으며 시간표를 외면했다. 동생의 부재보다 붉게 달아있는 몸이 대전행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신사임당이지만 생리가 끝나고 사나흘 후면 어우동이 되어버리는 자야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대합실에서 나와 광장을 잠시 거닐었다. 광장에도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 자야의 치맛자락을 몇 번이나 들추었다. 이러다가 정신이 살짝 나간 이상한 여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보도를 따라 시장 쪽으로 걸어내려 왔다. 택시들이 역에서부터 승강장까지 도열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자야의 머리에 번개처럼 후려치고 가는 무엇이 있었다. 택시기사를 하나 낚아 얘기상대로 드라이브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좀 멀리, 시 외곽으로 한 바퀴 돌면서 택시기사와 진한 농담이라도 하며 붉은 색 언어를 토하면 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 사귀기에 소극적인 그녀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스러웠지만 택시기사가 먼저 수작을 걸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을 걸어내려 온 자야는 잠시 승강장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승강장 앞에 있는 시민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 안은 훈훈했고 약사는 키가 후리후리한 여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이 약국은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 약사에게 아무 말이나 해도 먹혀들 것 같았다. 일단 자야는 피로회복제인 비타민제와 드링크를 달라고 했다. 약사는 웃음 띤 얼굴로 비타민제와 드링크 한 병을 꺼내다가 데스크 위에 놓았다. 약국안을 둘러보니 약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야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고 속삭이듯 약사에게 말했다. -저어....... 그 약과 한 알과 드링크를 한 병 더 주세요. 남편이 밤마다 좀....... 실험 한 번 해보려고요. -혹시 비아그라 말씀이세요? 자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약은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하는데....... 사모님 부탁이니까 거절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발기부전이나 전립선비대증이면 병원에서 상담하고 약을 따로 처방해야 합니다. 약사는 자야가 주문한 약을 봉투에 담아 건네주며 친절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붉은 톤을 지닌 따뜻한 말이었다. 자야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알겠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약봉투를 받아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고 약국을 나섰다. 승강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몇몇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눈이 오려는지 구름이 낮게 깔리어 도시 하늘을 덮고 있었다. 날씨는 회색이었다. 자야는 바로 승강장 앞에 있는 택시를 보았다. 도열해 있는 맨 뒤에 있는 택시였다. 차 유리에 선팅이 진하게 되어있어서 기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자야는 조금 망설이다가 택시의 앞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사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행히 늙은이가 아니고 말을 받아줄 상대는 될 법한 사십대 초반의 기사였다. 얼굴이 갸름하고 수염을 깔끔하게 깎은 모범기사처럼 보였다. 핸들을 잡고 택시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중학교 도덕선생처럼 보일 정도로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이럴 때는 사람을 잘 보고 골라야한다는 것을 자야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일단은 안심이다. -저어 타도되나요? 보라색 목소리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예! 택시입니다. 손님이면 당연히 모셔야죠? 목소리도 정중하고 예절이 있어보였다. 자야는 택시 앞좌석에 올라앉았다. 택시는 출발하면서 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하면서 깍듯하게 물었다. 자야는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홍콩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 저속한 표현을 자야는 익혀두지 못했다. 택시는 직진으로 공단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자야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그냥 택시 기사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 나쁜 인상이 아니었다. 이럴 때 골치 아픈 작자를 만나면 패가망신한다는 걸 자야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사람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택시기사의 얼굴을 다시 훔쳐보았다. 기사는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조급하지 않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역시 자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뼈저린 경험, 스스로 생각해도 망신살이 뻗친 날이었다. 지난봄이었다. 생리가 끝난 후에 몸이 달아서 붉은 색 언어를 찾아서 몸을 다스린다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홀로 늦도록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같이 수필을 쓰는 숙경이가 만만했다. 숙경을 불러서, 수준에 맞지도 않고 조금 저속하지만 나이트에 가서 몸을 흔들어 스트레스를 쫙 풀겠다고 나선 길인데 숙경이가 집안에 제사라고 했다. 제사와 나이트클럽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숙경을 포기하고 같이 갈 만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같이 수필을 쓰는 길옥언니를 떠올렸지만 그 나이에 너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고 분위기가 괜찮다는 카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 카페에서 젊은 여자가 홀로 맥주를 마신다는 것이 늑대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맥주를 마시며 몸이 왜 생리 후에는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자신을 만든 신의 실수가 아닐까? 신의 실수라고 하더라도 그걸 자신의 마인드로 컨트롤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에 잠겨있으면서 힐끔힐끔 맞은편에서 앉아있던 사내와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쳤다. 아니나 다를까 맥주를 홀로 마시던 사내가 다가왔다. 자야 또래쯤 되는 남자였는데 깔끔하게 뒤로 빗어 넘긴 머리며 차림새로 보아 감각 있는 멋쟁이였다. 남자는 정장이 아니라 골프웨어를 입고 있었다. 자야는 남자의 얼굴보다 골프웨어의 바지주머니에 노란색으로 수놓은 상표부터 보았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 잔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고 그 때의 상황으로는 마다할 구실을 찾기 힘든 말이었다. 아니, 누군가가 그렇게 수작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야는 대답 없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살짝 웃어보였다. 보랏빛 웃음이었다. -상당히 외로워 보이십니다. 웃어주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했던지 맞은 편 의자를 당겨서 앉은 남자가 한 말이었다. -제가 외로워 보인다구요. 틀렸습니다. 고민이 좀 있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야는 아마도 그렇게 둘러댔던 것 같다. 눈치로 먹고 사는 웨이터가 맥주잔을 가져다 사내 앞에 놓아 주었고 사내가 주는 팁을 받아갔다. 실내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 자야의 달아오른 붉은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 순간 황홀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제가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자야의 잔은 비어있었다. 자야는 거절하지 않고 잔을 들어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그 남자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채워주었고 자야도 그 남자의 잔에 거품이 넘치지 않게 맥주를 채워주었다. 남자가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자야도 잔을 들었다. -미모의 숙녀께서 지닌 이름 모를 고민의 해결을 위하여! 남자는 하얀 꽃잎이 풀풀 날리는 말을 하며 잔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위하여! 둘은 살짝 잔을 들이대고 마셨다. 그렇게 마신 맥주가 열병에 가까웠다. 카페에 들어갈 적에는 혼자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둘이 나왔다. 거기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아마도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면서도 붉은 색 언어는 소통되지 않았다. 무슨 출판기획사를 한다는 그의 명함을 받았고 누구의 흰색 수필에 대해서 얘기하며 그 수필 속에 소재로 등장한 그 산골마을에 가보고 싶고 그런 시골마을에 전원주택을 짓고 글을 쓰고 싶다는 매혹적인 말을 했던 것 같다. 카페에서 나온 남자는 입가심을 하자며 근처의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자야는 당연한 수순처럼 그저 말없이 따라갔다. 단 둘이 들어갔던 노래방은 붉은 색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컴컴한 조명과 천정에서 돌아가는 조명등이 붉게 달아있고, 적당히 취한 자야의 몸에 딱 맞았다. 둘은 한 시간 정도 노래를 불렀다. 남자는 쓸쓸한 가사를 지닌 배호의 노래와 흘러간 노래들을 가수 뺨칠 정도로 기가 막히게 불렀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자야는 춤을 추었고 거리낌 없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으며 더 나아가 서로 끌어안고 브루스를 추었다. 브루스를 추는 동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누구의 입이 큰지 살짝 입술을 대어보기도 했다. 거기서 자야는 남자만이 지닌 특유의 붉은 색 냄새를 맡았다. 남자의 냄새를 맡으니 변색동물인 자야의 몸은 붉은 빛의 어우동으로 변하는 건 당연한 이치, 자야는 그날 그 냄새를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노래방에서 나올 적에 자야는 적당히 취해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취해 가누기 힘든 척 몸을 남자에게 맡겼다. 다음 코스는 상상 가능한 분분이지만 남자가 자야를 부축하고 근처의 빨강색 네온이 켜있는 모텔로 향했다. 모텔 방에 들어가자 자야의 몸은 붉다 못해 터지기 직전의 시뻘건 자두처럼 팽팽히 달아올랐다. 모텔 방은 아늑하고 은은한 조명이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서자 자야는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 다음은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말할 수 없지만 굳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한 부분이니 에둘러감이 마땅할 것이고 두어 번의 거사를 치루고 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밖이 희뿌연 새벽이었고 탁자위에 시커먼 색깔의 글이 적힌 쪽지가 하나 남아있었다. 물론 남자는 언제 갔는지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자주 연락하죠.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 그냥 갑니다.] 자주 연락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잠과 술에서 깨어 신사임당으로 돌아온 자야는 그 쪽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지난밤 취기에 그 남자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시커먼 예감이 스쳤다. 그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었다. 몸과 정신이 흰색으로 돌아온 자야는 뼈저리게 후회를 했지만 송아지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어떻게 모텔을 나와 집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 피부가 벗겨지도록 문질러 샤워를 했고 질에 피가 나도록 때밀이 수건으로 후벼냈다. 그래도 그 욕정으로 더럽혀진 몸의 기억과 남자의 몸에서 맡은 색깔의 기억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기억이야 세월이 가면 점차 옅어지겠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자야가 시달린 것은 후회뿐이 아니라 그 남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였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안부를 가장한 전화, 만나자는 전화에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잊을만하면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남자의 전화는 집요했다. 하루가 멀다고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고 그 남자의 목소리에 마치 뱀을 밟은 것 같이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뼈저린 통증이었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이 자기반성과 내면 성찰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만약 집이라도 가르쳐 주었다면 당장 찾아와 기웃거릴 작자처럼 여겨졌다. 남자의 전화만 받아도 몸이 더럽혀진 것 같아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곤 했다. 전화벨 소리가 검정색으로 들렸고 전화기마저 검정색으로 보였다. 하룻밤 꿈을 붉게 피어난 한 송이 꽃으로 깔끔하게 개화시키지 못한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급기야 죽고 싶을 정도의 자괴감을 맛보았다. 얼굴도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그에게 받은 명함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의 전화를 받다가 견디다 못한 자야는 검다 못해 거무튀튀한 냄새까지 풍기는 그 휴대폰을 벽에 던져 박살을 내버렸다. 무엇을 부숴본 적이 없는 자야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전화번호와 전화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남편에게 국제전화를 했다. 전화기를 물에 빠트리고 휴대폰을 바꾸었다고 말하며 바뀐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늑대의 근성을 지닌 남자라는 짐승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며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다시 훑어보았다. 성실하고 착해 보였고 자야가 싫다고 하면 치근거릴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믿을 짐승이 못 된다. 늑대가 고기 맛을 보면 언제 이빨을 드러내는 하이에나로 돌변할지 모르는 동물이다. 자야는 절대로 자신이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되는 썩은 고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택시 기사는 자꾸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계면쩍은 듯이 운전을 하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자야에게 물었다. -어디로 모시는 게 적당할까요? -저어~ 아저씨 가고 싶은 데로 가세요. 저 오늘 시간이 많거든요. -아! 그래요. 가끔은 이렇게 바람도 쐬며 살아야죠. 집에만 계시면 우울증이 걸리기 십상입니다. -맞아요. 자야는 맞장구를 치면서 이때가 기회다 싶어 핸드백에서 약 봉지를 꺼냈다. 피로회복제 한 알을 보라는 듯이 입안에 털어 넣고 드링크를 마시면서 물었다. -택시를 하시면 피곤하시죠? -피곤하지 않은 일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택시기사는 그냥 대수롭잖게 말하며 힐끔 자야를 보며 웃어보였다. 자야는 준비한 약 한 알과 드링크의 뚜껑을 따서 기사에게 내밀었다. -피로회복제예요. 마시면서 천천히 가시죠. -아이쿠! 고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에 택시기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치의 의심이 없이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드링크를 마셨다. 그리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이브 삼아 강변도로나 한 바퀴 돌아서 올까요? 아무래도 초보인 모양이다. 아직도 눈치를 긁지 못했다. 숙녀가 이렇게 다정하게 굴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거늘 그 이유를 읽지 못하고 있다. 자야는 되물었다. -아저씨! 택시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택시 말입니까? 왜 제가 운전이 서툴러 보여서요? -아니. 운전이 서툴다는 게 아니라........ -택시로는 완전초보입니다. 오늘이 꼭 나흘째 되는 날입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형광등이군요. -형광등이라뇨? -눈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저 오늘 시간이 많아요. Y시로 내려가는 게 어때요? 그곳에 가서 절 가져도 좋구요. -뭐라구요? -절 가져도 좋다고 했어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자야는 그런 붉은 말을 뱉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그 붉은 색 언어에 충격을 받았는지 차가 잠시 주춤 거렸다. Y시에는 모텔이 지천으로 늘렸다. 특히 시 외곽에는 하늘이 열리는 모텔, 무인일실 모텔, 이 시대의 수요자가 요구하는 형태의 모텔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들판에도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에는 모텔이 집단으로 형성된 곳도 있다. 택시를 시작한 지 나흘 밖에 안 되는 택시기사가 그곳을 아는지 모르겠다. 택시기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더 말이 없었고 차는 이미 강변도로를 들어서고 있었다. 하늘에는 간간히 진눈개비가 날리고 있었고 차창 밖은 온통 회색 풍경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아저씨 참 잘 생겼어요. -그렇게 보이십니까? -젊을 때는 좀 날렸겠어요. 할 말이 궁했던 자야는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운전을 하고 있는 택시 기사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슬쩍 그곳을 건드렸다. 약간 발기된 상태였다. 택시 기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착하고 순진한 남자처럼 보였다. 이젠 택시기사가 아니라 남자로 보였다.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성가실 일이 없는 노란색 꽃가루가 날리는 남자. 자야는 꽃가루를 찾는 한 마리 나비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꽃에서 꿀을 찾는 벌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야의 귀에는 벌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음악이라도 틀어드릴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노란 꽃가루가 날리는 남자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던지 몸 둘 바를 모르고 더듬거리고 있었다. 음악을 틀면 배호의 노래나 흘러간 노래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노래를 들으면 지난봄에 만났던 그 성가신 사내가 떠오를 것이고 그 검은 기억이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 것 같았다. -음악보다 재미있는 얘기나 해주세요.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그건 그렇고 아까 주신 약이 피로회복제가 맞나요? 남자는 이제 감을 잡았는지, 아니면 신체 어느 부분에 진하게 나타나는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는지 약을 물고 늘어졌다. 역시 형광등이다. 오, 순진한 노란색 남자. 자야는 오늘 남자를 잘 골랐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보라색으로 점철된 농담을 했다. -왜요? 신체 어느 부분에 이상이 오나요? 약효가 한 이틀은 갈 거예요. 오늘 쓰시고 나머지는 사모님께 오늘밤 시주하세요. 호호호. 말문이 터진 자야의 입에서는 그런 보랏빛 말들이 거침없이 나왔다. -같이 드라이브하는 거니까, 택시비를 반만 내면 되죠? 이걸로 오늘 택시비는 충분할 거예요. 자야는 핸드백을 열고 농협마크가 찍힌 봉투를 노란색 남자의 허벅지에 올려놓으며 손등으로 그곳을 툭 쳤다. 아까보다는 훨씬 꼿꼿이 발기된 상태였다.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봉투를 집어 운전석 문에 달린 서랍에 넣었다. 자야는 고개를 쭉 빼고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순진하게 생겼고 성가시게 하지는 않을 인상이다. 그렇더라도 남자는 믿을 짐승이 못된다. 혀를 깨물고 며칠만 참으면 되는데....... 강변도로 끝나는 곳에서 차를 돌리자고 할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를 돌려 집으로 갈까? 정말로 그럴까? 자야는 생각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수필가로서 내면 성찰에 걸림돌이 될 이런 돌발 행위에 자기반성을 하며 갈등하고 있을 때 핸드백 속에 들어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폴더를 열자 숙경이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잠깐 성가시다는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받았다. -응 숙경이네. -언니! 눈이 오네! 첫눈이야. -여기는 눈이 안 오는데....... 진눈개비만 날리고 있어. -언니 어디야? -나 지금 대전에 가고 있다. 숙경이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자기반성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자신도 모르게 대전을 둘러댔다. 자야는 자신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오는 그 거짓말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거짓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에서 술술 나왔다. 옆의 남자는 자신의 숨소리라도 난데없이 나타난 훼방꾼에게 들릴까봐 그러는지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차는 이미 강변도로 끝에 매달린 Y시 외곽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구나. 동생한테 가는 거야? -응. -눈이 오니까 마음이 펄럭여서 언니네 집에 가서 수다나 떨까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오늘은 안 되겠네 -아쉽당, 오늘 늦겠네?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야. -알았어! 잘 갔다 와. 돌아오면 전화해. 알았지? 언니! -그래. 그러자.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야의 이마에는 진땀이 나고 있었다. 검정색으로 점철된 거짓말을 둘러대느라 난 진땀인지 아니면 자기 검열에 걸려서 오는 자괴감에 의한 땀인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차는 Y시 외곽도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차가 Y시 외곽도로를 벗어나자 진눈개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눈이었다. 와이퍼를 켰지만 소용없었다. 차의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고 길이 미끄러운지 남자는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아저씨! 눈도 많이 오는데 차 돌려서 그냥 돌아갈까요? 자야는 남자를 떠보려고 그런 제안을 했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만약 그냥 돌아간다면 이 붉은 색으로 달구어진 몸, 자두빛깔로 익을 대로 익어 터질 것 같은 이 욕정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 -지금 농담이시죠? 약까지 먹여놓고서....... 역시 남자의 대답은 어림없다는 식으로 붉은 색으로 달아 있었다. -돌아갈 때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서 그래요. -이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금방 그칠 것 같은데....... 이 노란색 남자도 남자인 모양이다. 들은 척도 않고 그대로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차는 Y시 외곽도로를 벗어나 농로로 접어들었다. 자야는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농로는 말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농로로 들어서자 차는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멀리 모텔 촌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텔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이자 자야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 들판에 퍼붓고 있었다. 그 눈을 휘날리며 택시는 달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 있던 모텔들이 자야 쪽으로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 모텔 간판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보일 때, 눈은 흰색이 아리라 붉은 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붉은 눈이 차창 밖에서 퍼붓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빨강색이었다. 붉은 색 눈을 보는 자야의 속에서 무언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아우성치는 무엇의 이름을 모르겠다. 이홍사 lhongsa@hanmail.net 소설집<아버지는 맞아도 싸요>외  
69 과메기 외1편/권선희 file [2]
편집자
7511 2010-10-30
10.11월 6호 시 과메기 권선희 푸른 바다 물빛 털며 돌아가는 생이다 지느러미 흔들고 흔들리며 삶을 부린 저 바다 노대바람 뚫고 명주바람 건너 온 아비처럼 어미처럼 돌아가는 길이다 서글픈 속내일랑 뒷산에 묻고 그리운 사랑일랑 가슴에 묻고 시누대에 눈을 꿴 몸뚱이들 덕장마다 환원(還元)의 문장을 쓰고 있다 화르르 비늘 돋는 구룡포 다시 바다로 향하는 차디찬 겨울 빛나는 율동(律動) 샛바람이 읽고 있다 원기소에 대한 기억 배 타던 아버지 풍랑 만나 흘러 흘러 일본엘 갔다지 오만 조사 다 받고 겨우 풀려나와 썩은 속 어무이 품에 원기소 한 통 안겼다지 고 맛이 고소하기 이를 데 없어 예닐곱 살 까까머리 나는 원기소 통 훔쳐내어 동네를 장악했지 아, 원기소의 힘 한 알씩 때낀 손바닥위로 배분하며 부풀던 우두머리 꿈은 텅텅 빈 원기소 통으로 들어가 갇히고 원기소가 사라지자 아이들도 사라졌지 이 노무 소상 그기 어떤 기라고 어무이 몽당 빗자루 들고 쫒고 나는 냅다 세골 둔덕을 달렸지 달개비 무성히 피고 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을 원기소 힘으로 달렸었지 권선희/ 춘천출생,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집<구룡포로 간다(도서출판 애지)>, 공동르포집 <예술밥 먹는 사람들(도서출판 눈빛)>, 도보여행기(공저) <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도서출판 생각의나무)>등을 발간하였으며 제1회 해양영토대장정 기록작가로 참가, 2100km 바닷길을 항해하였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68 물고기 사랑법 외 1편/김길녀 file
편집자
5865 2010-10-30
10.11월 6호 시 물고기 사랑법 김길녀 안개가 술렁거리는 날이다 길고 흰 구름의 나라 지나갈 때 백 만년 동안 불어오던 고래의 구애소리 선회창 틈으로 파고든다 내 사랑은 먼 육지에 나는 먼 바다에 떠 있다 사방으로 포진한 난파의 거친손길 피하며 강철의 용골 가시처럼 세우고 파도밭을 뚫는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 무적의 눈물이 독 인줄 모른다 등대 울음소리 삼키며 마설가자미 감싸는 파도의 흰 뿌리들 야생의 꼬리 펄럭이다 지쳐가는 한 낮 누군가 슬며시 다가와 초록 비늘을 당긴다 그 손길이 따뜻하다 물고기 울음소리 깊다 기억의 꽃밭 여름 햇살 따가운 앞집 돌담 밑 붉은 샐비어 꽃그늘 아래, 꽃뱀 새끼들 꼬물꼬물 소꿉놀이 밥상위로 부지런히 더위를 실어 날랐다 검붉은 초록 몸은 단지, 사람에 대한 경계의 무늬일 뿐 혀 속에 독을 키우진 않았다 고, 어린것들 데려다가 푸른 사금파리 접시위에 몸 눕히면, 툇마루 끝에 처녀 할머니, 마당가에 가득 핀 보라색 수국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약력 -1964년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등단 -시집 『키 작은 나무의 변명』,『바다에게 의탁하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67 내 마음은 외 1편/박승민 file
편집자
5357 2010-10-30
10.11월 6호 시 내 마음은 박승민 내 마음은 어느 날 비 개인 밤하늘 하얗게 목 씻은 첫사랑 사금파리 별 속에 잠겼다가 내 마음은 또 어느 날 枯死木 꼭대기, 심심한 잠자리 능라날개로 한 수 접고 내려앉아 꾸덕꾸덕 졸다가 또 어느 날은 어두운 산길 슬금슬금 내려와 넘칠 듯, 모래알 튕기며 몸부림치는 산물에 실려 먼 도시 밖으로 몇 날 며칠 야유회 떠났다가 또 어느 날은 水流花開, 꽃은 피고 물은 흐르는 카페 통유리에 배접된 노을애인에게 오래오래 입술을 대보다가 또 어느 날은 불현듯 망루 위에 소복 입은 국화꽃 몇 송이 손톱 끝으로 가만가만 그 이름 쓰다듬어보다가 끝내는 폭염 속 한 줄금 퍼붓는 소낙비 대롱을 타고 치솟는 분노로 아스팔트에 꽂히는 수많은 도깨비바늘이 되었다가 마침내 또 어느 날은 기어코 빈주머니가 되어서야 탈탈탈 울리지도 않는 불알 털며 집에 온다. 乃城川 초록 피 90년대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야만이 다시 수면위에 떠오른다. 텅거리는 수염을 삭탈관직 당한 채 먼 유배길 떠나는 모습 붉은 저녁 강이다 미림마을 망초 쑥부쟁이 구절초 부추 상추,,,,,,,, 의 草屋들은 민원 한번 변변히 넣어보지 못하고 푸른 몸 자체가 水葬 중이다 끝난 것이 아니라 모래 밑에 잠시 유폐된 삽날 씨멘트 굴삭기 공업용폐유 각종공문서위조 관제데모 부실시공,,,,,, 다시 떠오른 목록이 20년 전 그대로다 저 댐 다 지어지면 초록 피, 초록 피비린내 두고두고 滿水位다 두고두고 붉은 피 살리는 건 초록 피다.  
66 건(乾) / 김승옥
주진
11153 2010-10-21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이 작가의 소설 <무진기행>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는 소설이다. 전쟁이 지나간 어느 날 아침, 아이는 간밤에 습격했다가 죽은 빨치산의 시체를 본다. 죽음을 둘러싼 풍경과 시체에 대한 아이의 환상, 시체를 대하는 태도 등 묘사가 생생하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은 아이를 변화시킨다. 수채화처럼 시작된 아이의 아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름을 덕지덕지 칠한 무거운 유화로 변해간다. 건(乾) 전날 저녁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의 습격 때문에 아침에 살펴보니 시(市)는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밖에 다녀온 아버지는 시방위대(市防衛隊)가 다행히 일선의 전투부대나 다를 바 없는 장비와 인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해가 뜰 무렵엔 빨치산들이 다시 산으로 도망쳐 버렸지만 그러나 시가 입은 파괴는 엄청난 것이라고 퍽 흥분된 말투로 형과 내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얼마 크지 않은 이 시를 대강 다 내려다볼 수가 있는데.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건물들이 보이고 더러는 완전히 타버린 빈터에서 푸른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곧장 마당가에 나서서 보면 저 아래 시가지의 중심부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유리창들을 거느린, 그래서 그것이 찬란한 왕궁처럼 생각키우는 시립병원의 멋있는 모습도 그날 아침에는 사라져버리고 잘못 탄 숯덩이 모양이 되어 있었다. 시립병원보다 좀더 북쪽에 자리잡은 방위대 본부에서는 아직도 불길이 오르고 있는데 소방차 두 대가 소화작업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시에 소방차는 두 대밖에 없으니 모든 소방시설이 이 방위대 본부에 집결한 셈이었다. 방위대 본부는 옛날 어느 굉장한 부호가 살던 저택인데 넓기도 넓지만 우선 나무가 많아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숲이 울창한 공원 같은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재작년, 6․25가 터져서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 인민군들이 군사 본부로 사용하며 여러 가지 시설을 해놓았는데 인민군이 쫓겨가고 그 뒤에 시방위대가 생겨서 그 본부로 사용하게 된 것이지만 그러나 6․25도 나기 전엔 그 집은 아무도 살고 있는 사람이 없어 썩어가는 빈집으로서 우리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온 시내에 있는 애들이 모두 들어와서 놀아도 좁지 않을 정도로 단순히 넓다기보다는 여러 가지로 재미있게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물이 말라버린 못에는 괴석(怪石)을 이리저리 얽어 붙여서 내 작은 몸뚱이가 들어가 숨을 수 있을 만큼의 동굴 따위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기도 하고, 문을 열면 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있고 이렇게 다섯 개의 문이 가지각색의 장식으로 꾸며져서 달려 있는 연회색의 커다란 창고가 있고 또 바람이 불어도 그 안에 세운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석등이 서양사람처럼 큰 키로 서 있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때는 이미 거의 썩어버린 다다미가 깔린 넓은 안방인 것이었다. 아니 안방이 아니라 안방의 동쪽 벽 아래에 깔린 다다미 한 장을 들어내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드러나고 그 바닥엔 위로 들어올리도록 된 문이 있는데 그것을 열면 그 밑에 나타나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인 것이다. 아아, 하루종일 그 지하실에 틀어박혀 우리들은 얼마나 가슴 뛰는 놀이들을 하였던가. 애들 중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던 내가 그 지하실의 백회벽(白灰壁)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면 한 아이는 초 동강이에 불을 켜서 들고 나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불빛을 보내주었고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은 부러움과 감탄의 눈초리로 내가 그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그 그림 속에서 많은 얘기를 끄집어내서 지껄이며 떠들고 그 그림을 자기들이 그린 것처럼 아껴주고 다른 마을의 애들을 끌고 와서 자랑도 해주곤 했다. 그 중에서도 미영이라는 계집애를 잊을 수가 없다. 내게 크레용을 갖다주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연필이나 연필꽂이를 나누어주던 미영이. 1학년 때 어느 날이었던가, 이상스럽게도 둘만 그 지하실에 남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쑥 미영이를 꽉 껴안아버렸었다. 그러자 미영이는 깜짝 놀라서 울음을 왁 터트리더니 그만 무안해진 내가 손을 풀자 느닷없이 자기가 쥐고 있던 하얀색 크레용을 ─ 분명히 하얀색이었다 ─내게 내밀며, 이쁜 꽃 그려봐, 하는 것이어서, 하얀색의 벽에 하얀색의 크레용으로 무슨 그림을 그리라는 말인지, 이번에는 내가 어리둥절해버린 적이 있었다. 두 볼이 유난히 빨갛던 미영이도 지금은 없다. 재작년 6․25 때 피난을 아주 멀찌감치 일본으로 가버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미영이네 집은 우리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지금은 그 집 대문에 ‘매가(賣家)’라는 글이 쓰인 더러운 종이조각이 붙어 있는 빈집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엔가 방위대도 물러가면 그때는 기어코 다시 그 지하실의 벽화들 앞에 마주 서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 나는 절망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내게는 온 시내가 푸른색의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위를 엷은 햇살이 어루만지고 있어서, 전날 저녁의 그렇게도 소란스럽던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야포 소리들이 그리고 그날 아침의 살풍경한 시가지까지도 희미한 옛날의 기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 동안 못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을이 이 분지도시(盆地都市)에 찾아와서 모든 것을 퇴색시켜놓았다는 느낌뿐이었다. 확실히 깊은 가을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아버지는 공비들이 산에서 겨울을 날 물자를 약탈하러 대담하게도 이 시까지 습격해온 것이었다고 설명해주었다. 형은 하필 엊저녁에 습격 올 게 뭐냐고 불평이 대단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형은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자기 친구들과 함께 남해안으로 무전여행 떠날 계획을 세워왔는데 그날이 바로 출발 예정일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형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었다. 형의 어둑어둑한 방에 우글우글 모여 앉아서 그들이, 오오 빛나는 남해여. 어쩌고 낮간지러운 몸짓들을 하면서 대단히 열성적인 태도로 계획을 짜온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형 정말 돈 한푼 없이 여행하는 거야?” 하고 내가 물으면 “그럼, 청년의 꿈은 어드든지 여행할 수 있는 거다. 그렇지만 너 같은 빼빼는 아무리 자라도 이런 일을 못한다. 저 방에 가서 염소그림이나 그리고 엎드려 있어. 어서 가.” 하며 나를 몰아내버리고 자기들끼리만 쑤군쑤군하곤 했었다. 형은 빨치산들의 습격이 있었으니 경비가 더 심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장거리 여행은 불가능해진다는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망할 자식, 그러기에 내가 그런 짓은 아예 할 생각도 말라니까 자꾸 하더니 빨갱이들이 내려왔지, 하며 엉뚱한 핑계로 형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해주었다. 학교에 가면 엊저녁의 일로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학급 애들이 쉬임없이 종알대는 입들을 보는 듯싶어서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책보를 얼른 챙겨가지고 내리막길을 바쁘게 달려 내려갔다. 달려가다가 길이 굽어지는 곳에서 나는 윤희누나를 만났다. “너희 집은 아무 일 당하지 않았니?” 하고 윤희누나가 먼저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고 교복을 입지 않고 한복 차림인 윤희누나를 길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이웃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누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딴 남인 것이었다. 언젠가 기막히게 심이 굵은 4B 도화연필을 내게 준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그걸 그만 도둑맞았었기 때문에 그 누나를 대할 때마다 나는 뭔가 죄를 지은 기분으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내가 그 누나 앞에서 쭈뼛쭈뼛했던 것은 그런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쓸쓸하도록 갑자기 찾아온 가을 속에서 윤희누나가 그 한복 차림 때문에 물이 증발하듯이 어디론가 스르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였다. “우리 친척들도 다행히 아무 일 없었단다.” 윤희누나는 싱긋 웃으며 활발한 말투로 얘기했다. 친척들 집에 안부를 물으러 다녀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윤희누나는 어직 완전한 어른이 아니지만 자기 식구라곤 어머니와 나보다 나이 어린 계집애 동생 하나뿐이기 때문에 자기 집에선 제법 어른 행세를 하였다. 나도 윤희누나를 따라서 웃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누나는 엄청난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너 빨갱이 한 사람 죽은 거 아니?” 그것도 그때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벽돌 공장에 총에 맞아 죽은 빨치산의 시체가 엎드려 있다는 것이었다. “봤어?” 하고 나는 잠시 후, 내가 생각해도 가련할 정도로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잔뜩 힐난하는 듯이 윤희누나에게 물었다. “응.” 누나의 대답은 짤막했기 때문에 나는 누나의 얘기가 사실이라고 믿었다. 엎드려 죽어있는 빨치산의 시체다. 나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 눈앞에 그걸 또렷이 보는 듯싶었다. 그러자 전날 밤 총격전의 그 모든 것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들과 오늘 아침 흥분을 뒤덮으면서 찾아온 이상하도록 조용함이 쉽게 넘겨버려도 좋은 악몽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감히 생생하게 상상되는 빨치산의 시체를 남겨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현실감이 꿈틀거렸다. “너 가볼래?” 윤희누나는 근심스런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잠깐 고개를 들어서 누나를 보고 있었다. 예쁘게 생긴 코끝에 이슬 같은 땀이 송글송글 모여 있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비키며 “그거…… 재미있어?” 하고 일부러 야비한 맛을 담뿍 섞은 말투로 되물었다. “응, 재미있어.” 윤희누나는 분명히 얼결에 그렇게 대답을 해버렸다.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누나도 멋쩍은 듯이 웃었다. “가볼 테야.” 하고 나는 누나에게 말하고 좀더 빠른 속도로 곧장 학교로 달려갔다. 누나가 가르쳐주었다고 해서 금방 시체가 있는 벽돌공장으로 달려간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때 나의 가슴을 후비고 드는 현실감을 조금씩조금씩 시간을 끌며 맛보리라는 계산에서 나는 바로 학교로 향해버렸던 것이다. 내 책보 속에서 필갑(筆匣)이 찰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힘껏 달려갔다. 학교 교문에 닿았을 때는 숨이 차서 목구멍이 쌔애 쓰렸다. 예상했던 대로 애들은 교실 밖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햇볕을 쬐며 전날 저녁에 일어난 여러 가지의 사건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어떤 애들은 신주머니에 하나 가득히 탄피를 주워가지고 자랑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몇 개씩의 탄피는 주워들고 있었다. 시립병원 근처에 살고 있는 애 하나는 시립병원이 불더미에 휩싸였을 때, 아무래도 자기들 집에까지 불이 옮겨 붙을 것 같아서 살림살이를 밖으로 옮겨내는데 저도 한몫 끼어서 혼자 힘으로 쌀 한가마를 운반해내었다고, 아무래도 거짓말이 섞였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사정이 다급해지니까 자기도 알지 못할 힘이 솟아나더라도, 아주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그 얘기를 듣다가 나는 불현듯이 불타버린 시립병원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방위대 본부인 그 저택,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내 왕궁이던 그 저택의 타버린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선 차마 처참한 모습으로 바뀌어졌을 그곳에 갈 용기가 없어서 나는 시립병원 쪽을 택한 것이었다. 나는 그애에게 시립병원의 폐허를 함께 구경가자고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오후에 내가 그애 집으로 찾아가기로 하고 나서 나는 여러 애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숨기고 싶은 생각이 보다 간절한 나의 중대한 뉴스를 꺼내었다. 내 솔직한 심정으로서는, 그 뉴스를 오직 나 혼자만이 간직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뉴스가 몇 시간 후엔 전시내에 파다하니 퍼져버릴 것은 뻔한 일이니 그럴 바에야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얘기해버리는 게 영리한 일이었다. “늬들, 빨갱이 죽은 거 아니?” 애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나를 돌아보았다. 다행이다.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야 나는 깨달았다. 그걸 알고 있는 애들이라면 여기서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거짓말이나 꾸며대고 있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을. 지금 그 시체를 삥 둘러싸고 있는 다른 애들을 생각하자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빨갱이 죽은 거 보고 싶으면 날 따라와라.” 나는 아까 올 때보다 더 힘껏 달렸다. 내 뒤를 애들은 우 따라왔다. 애들은 기묘한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나는 이빨을 악물고, 애들의 맨 앞에 서서 달리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껏 달렸다. 땀이 흘러서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학교에 오던 길을 거슬러가서, 나는 우리 집이 멀지 않은 벽돌공장의 마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벽돌공장의 넓은 마당을 지나서 벽돌을 굽는 언덕 같은 가마를 삐잉 돌아서 우리는 구워진 벽돌을 쌓아놓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느린 걸음이 되어 개처럼 숨을 할딱거리며 그곳에 다가갔다. 나의 몸뚱이는 몹시 허청거렸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어른들의 틈 사이를 비집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땅바닥에 손발을 쭉 뻗고 엎드려 있었다. 얼굴은 이쪽으로 향하고 있고 땅바닥에 한쪽 볼이 처박혀 있는데 마치 정다운 사람과 얼굴을 비비는 형상이었다. 눈은 감겨져 있었다. 머리맡에 총이 떨어져 있고 허리에 찬 보따리가 풀어져서 그 속에 쌌던 밥이 흘러나와 땅에 흩어져 있었다. 가죽끈으로 구두를 다리에 칭칭 얽어매어서 신을 신고 있다기보다는 신을 다리에 붙들어 매어놓은 듯했다. 길게 자란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칼, 그리고 다 해진 옷, 가슴에서 삐죽이 수첩이 내밀어져 있고 그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와서 땅 속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피에서인지 짜릿한 냄새가 가볍게 공중으로 퍼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게 그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시체의 머리카락이 살살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땅에 뿌려진 피와 머리맡의 총만 없었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만취되어 길가에 쓰러진 한 거지의 꼬락서니였다. 그것은 간밤의 소란스럽던 총소리와 그날 아침의 황폐한 시가가 내게 상상을 떠맡기던 그런 거대한, 마치 탱크를 닮은 괴물도 아니고 그리고 그때 시체 주위에 둘러선 어른들이 어쩌면 자조(自嘲)까지 섞어서 속삭이던 돌덩이처럼 꽁꽁 뭉친 그런 신념덩어리도 아니었다. 땅에 얼굴을 비비고 약간 괴로운 표정으로 죽은 한 남자가 내 앞에 그의 조그만 시체를 던져주고 있을 뿐이었다. “빨갱이 시체 구경도 한 이태 만에 하는군.” 어느 영감이 그렇게 말하며 침을 탁 뱉더니 돌아서서 갔다. 몇 사람이 그 뒤를 이어 역시 땅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나도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땅바닥에 침을 뱉고 살그머니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두어 발자국 저편에 벽돌이 쌓여 있는 더미의 강렬한 색깔이 나의 눈을 찔렀다. 엉뚱하게도 나는 거기에서야 비로소 무시무시한 의지를 보는 듯싶었다. 적갈색과 자주색이 엉켜서 꺼끌꺼끌한 촉감의 피부를 가진 괴물이, 밤중에 한 남자가 몸을 비틀며 또는 고통을 목구멍으로 토하며 죽어가는 것을 바로 곁에서 묵묵히 팔짱을 끼고 보고 있다가 그 남자가 드디어 추잡한 시체가 되고 그리고 아침이 와서 시체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나는 모든 걸 다 보았지, 하며 구경꾼들 뒤에서 만족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얼른 돌려버렸다. 다시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가 누운 거기에서 풀밭이 시작되었고 풀밭이 끝나는 곳에는 벽돌 만드는 흙을 파내오는 주황빛 언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에서부터 까만색 레일이 잡초를 헤치고 뱀처럼 흐늘거리며 이쪽으로 뻗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던져주는 구도였다. 방금 잠깐 쑤시고 간 그 강렬한 색채들 때문에 나의 눈은 눈물이 나도록 쓰렸다.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두드려 어지러움이 가시게 하며 휘청휘청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오전 수업만 했다. 그나마 우리 6학년은 간밤 전투로 몇 군데 허물어진 학교의 흙담을 고쳐 쌓느라고 수업을 한시간도 하지 않았다. 냇가에서 굵은 돌을 날라다가 잘게 썰은 짚을 버무린 묽은 흙덩이와 섞어서 담을 쌓기 때문에 우리의 옷과 손발은 흙투성이였다. 묽은 흙이 발라진 나의 손은 햇빛을 받고 마치 기름칠을 한 듯이 윤을 내면서 쉬임없이 꼼지락거렸다. 담 고치는 일을 하는 동안 내처 애들의 화제는 주로 아침에 본 빨치산의 시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내가 보았던 그 어설프고도 허망한 주황색 구도를 얘기할 것인가? 하지만 애들은 그걸 이해해줄 것인가? 그 빨치산의 옷차림이 마치 거지 같았다고? 그러나 빨치산이란 다 그런 거라고 애들은 툭 쏘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시체가 갖고 싶었다는 얘기를 할 것인가? 그러나 그건 안 된다. 내가 그런 얘기를 입 밖에 내면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보지 않은 애들까지 덩달아서, 나도 같고 싶었다, 나도 나도, 할 터이니까. 그러면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그렇다. 할 얘기란 없었다. 나는 그저 어지러움만을 느끼고 있었다. 학교가 파하자 애들은 불탄 곳들을 구경하러 가자고 나를 끌었다. 나는 시립병원 근처에 살고 있는 애에게만, 점심을 먹고 내가 그애 집으로 찾아갈 것을 다시 한번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과 형의 친구들 몇 사람이 형의 방에 모여있었다. 결국 무전여행은 연기되었나보았다. 누군지가 “아침에 출발했으면 지금쯤은 벌써……” 하고 말을 꺼내자 “얘, 얘, 관둬. 시끄럽다.” 하고 딴 사람이 말을 막아버렸다. 그들은 비스듬히 누워있기도 하고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고 앉아 있기도 하고 엎드려 있기도 하고, 자세가 가지각색이었다. 지난 얼마 동안 내가 보아왔던 그런 진지한 ─무릎을 서로서로 대고 삥 둘러앉아서 얼굴에 미소를 띄던 그런 자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크나큰 음모라도 꾸미듯이, 얘 넌 나가 있어, 하고 으스대던 형도 그날은 모로 누운 채 내겐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고 종이를 질겅질겅 씹다가 그것을 맞은편 벽에 탁 내뱉곤 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쩐지 그들의 우울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내게는 그들의 우울을 방해할 만한 무슨 기쁜 감정이라거나 하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그것은 보다 쉽게 내게 전해올 수 있었다. 나는 꾸중을 듣고 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형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내 눈 아래로 시가지가 전개되고 있었다. 시가지 위에는 잔잔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러나 시가지를 싸고 있는 대기는 아침에 보던 것보다 더 흐릿하기만 했다. 너무나너무나 조용했다. 아버지와 형과 형의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반장이 찾아왔다. 반장은 아버지의 술친구였다. “허어, 밥먹고 있는 중이군.” 반장은 무엇을 부탁하러 왔다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 생겼어? 뭔가? 얘기해보게.” 아버지가 물었다. “어서 먹게, 식사 끝나면 얘기하지.” 반장이 대답했다. “괜찮아. 어서 얘기해.” 아버지. “좀 구역질나는 얘기가 되어서…….” 반장. “괜찮으니 어서 얘기해봐.” “그렇지만 이건…… 저 시체 말이야.” “시체?” “응 벽돌공장에 뻗어 있는 놈 말일세.” “그런데?” 나는 벌써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반장의 얘기에 의하면, 시 당국에서는 그 시체의 처치를 시체가 있는 장소를 관할하는 동회로 의탁했고 동회에서는 마찬가지 태도로서 반에 의탁해왔는데, 반장의 의견으로서는 시체를 처치하는 데 약간의 보수가 딸렸으니 이왕이면 아버지가 그 돈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비록 식육조합원이지만 하필 아버지에게 와서 그런 부탁을 하는 반장이 몹시 밉살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의외로 선선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그런데 묘자리는 어디로 한다?” “어디 이 근처 산에 갖다가 파묻기만 하면 돼.” 하고 반장은 대답했다. “점심 먹고 나서 나갈게.” 아버지가 완전히 승낙을 하자 반장은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되어, 그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이 모든 대화를 심장의 고동이 멈춘 듯이 창백하게 되어 듣고 있었다. 형과 형의 친구들은 불평 같은 것을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말소리가 내겐 마치 꿈속에서 듣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그 시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문득 애착이 가는 환상. 시체가 손발을 쭉 뻗고 엎드린 그 자세대로 공중에 둥둥 떠서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아버지에게로 날아오고 있다. 공중을 느릿느릿 비행해오는 시체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흔들린다. 우선 시체의 머리카락이 쉬임없이 흩날리고 그럼으로써 시체는 그가 지니고 있던 모든 잡된 요소를 바람에 실어 보내버리고 이제야 태어나기 전의 사람 , 아니 모든 것을 살았기 때문에 가장 가벼워져서, 마치 병아리의 노오란 한 개의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공중을 나는 것이다. 그건, 부모나 친척이 아무도 없는 한 고아가 자기를 맡아주겠다고 나선 사람에게 약간 두려워하는 눈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는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오는 그런 환상이었다. 시체는 이제 괴로운 표정을 씻고 입가에 웃음을 싣고 있었다. 시체다. 시체가 우리의 차지가 된다. 우리의 손이 닿으면 시체는 웃음을 띤 채 살아날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묵묵한 자세로 입에 밥을 퍼넣고 있었다. 형들도 이제는 조용히 숟가락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내 숟가락을 고쳐 쥐고 밥먹기를 계속했다. 얼마 후 식사가 끝났을 때도 아버지는 시체 일 같은 건 다 잊어버렸다는 듯이 방바닥에 비스듬히 몸을 눕히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처럼 태평스러운 몸가짐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끽연(喫煙) 때문에 누렇게 물든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한번 후비고 나더니 이젠 자기 방에 가 있는 형을 우렁찬 목소리로 불렀다. 형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건너오자 아버지는 대뜸 “너 이놈, 나하고 돈 벌러 가자.” 하고 말하더니 두말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는 것이었다. 형의 얼떨떨한 표정, 그리고 안질 때문에 새빨간 아버지의 눈에 그림자처럼 살짝 스치고 가던 미소, 아아, 나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한숨이 나오도록 유쾌했다. 아버지가 시체를 다루러 가는 모습이 몹시 우울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약간 하고 있던 나는 무거운 책임을 벗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지게에 괭이와 삽 등속을 지고 앞서 가고 내가 그 뒤를 그리고 형과 형의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주절대며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황토가 햇빛에 반짝이는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형들의 높은 목소리들이 대기 속으로 멀리 메아리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벽돌공장 안에 있는 시체 곁에 서게 되자, 우리의 입은 모두 굳게 다물어져버렸다. 나로 말하자면 아침에 보았던 그 어설프고도 허망한 주황색 구도라고나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똑같은 형태로 다시 나를 압박해옴을 느꼈다. 시체 곁에는 반장과 입회순경과 그리고 그 시체의 고모가 된다는 노파 하나가 구경꾼들이 돌아가주었으면 하는 표정들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가 구경꾼들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 반장이 순경과 노파에게 “이분이 파묻어주시기로 됐습니다.” 하고 아버지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시체를 내려다보고만 서 있었다. 노파가 “잘 부탁합니다……” 하고 말끝을 맺지 못하며 어버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저놈이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글쎄 하필……빨갱이가 되어서……저 꼴로 돌아와서……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노파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나무로 짠 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새끼로 대충 시체의 염을 하고 그것이 끝나자 시체를 관 속으로 집어넣었다. 형 친구 중의 하나가 아버지를 도왔다. 관 뚜껑을 닫기 전에 노파는 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체의 누런 얼굴을 손바닥으로 하염없이 쓸어주고 있었다. 노파의 가죽만 빼빼 남은 손이 느리나마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러고 있는 노파의 눈은 무겁게 감겨져 있었다. 반듯이 누운 시체 위에 관 모서리의 그림자와 바람이 하느적거리고 있었다. 산으로 가는 도중에는, 아버지가 지게에 짊어진 관이 규칙적인 사이를 두고 내는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나는 듣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관이 퍽 무거운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아버지의 호흡을 흉내내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우리는 순경이 지시하는 곳에 관을 내려놓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형의 친구들이 주로 나섰다. 관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깊은 구덩이가 파지자 아버지와 형들은 관을 그 구덩이 속에 내려놓았다. 관이 내려지는 동안 노파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마 그 시체의 이름인 듯한 것을 몇 번이고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구덩이 속으로 근방에서 긁어모은 돌을 던져넣었다. 돌들은 거칠게 모가 나고 한결같이 바싹 말라 있었다. 우리가 던지는 돌들이 관에 가서 맞는 소리가 딱딱하게 울려왔다. 나는 처음의 돌 몇 개는 남들처럼 천천히 던져넣었지만 그러나 나중엔 힘껏 마치 돌팔매질하듯이 던졌다. 내가 던지는 돌이 관에 맞는 소리는 딴 소리와 뚜렷이 구별되어 울렸다 관속에 누운 사람이 내가 던진 돌을 맞고 드디어 내지르는 비명이라는 환각을 나는 무진 애를 쓰며 찾고 있었다. 나는 힘껏 던졌다. 나는 돌을 던지면서 힐끗 노파를 훔쳐보았는데 노파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주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내 오른팔에 더욱 세찬 힘을 느끼며 던지기를 계속했다. 그러자 나를 꽉 붙잡는 손이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를 홱 밀어젖혀버렸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목구멍을 욱하고 치받고 올라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산갈대 몇 개가 부러져 있었다. 나는 부러진 갈대를 한 개 집어들고 일어섰다. 나는 그것을 똑똑 부러트리며 이제는 삽으로 구덩이에 흙을 퍼넣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시체도 그리고 그것을 묻고 있는 사람들도 나는 밉기만 했다. 관은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아버지는 삽을 내던지고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자 아버지와 순경과 반장은 노파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버리고 나는 형들과 함께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였다. 시가지는 아주 조용했다. 지난 사변 때 생긴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이 마치 뱀이 기어간 자리처럼 길게 남은 아스팔트길에는 가을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삽과 괭이를 질질 끌며 우리는 느릿느릿 걸었다. 형 친구들 중의 하나가. “제기럴, 지금쯤은 남해의 파도 소리를 듣고 있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형도 “재수 더럽다. 시체나 치워야할 날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 하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몇 명이 더 투덜댔다. 그들은 검정색 고등학생 제복의 윗도리를 벗어서 어깨에 매고 있었다. 그들의 볼에는 땀이 마른 자국이 있었다. 나는 그런 차림새로 망망한 바닷가에 서 있는 그들을 상상해보았다. 파도가 밀려오고 그러면 그들은 마치 늑대들처럼 우 하고 고함을 지르겠지.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실컷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집으로 오는 중에 우리는 오르막길 골목의 입구에서 학교로부터 돌아오고 있는 윤희누나를 만났다. 윤희누나는 떼를 진 학생들을 만난 것에 당황했던지 얼굴이 빨개져서 그러자 마침 내가 무슨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누나, 하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나는 눌렀다. 웬일인지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런다면 부끄럽고 어색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행동이 되지 못한 채로 그 충동은 나의 온몸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나의 피로를 윤희누나만은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 빨치산의 시체를 치우고 오는 길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주 간단했어, 라고도. 나는 누나가 나를 불러서 데려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날 데리고 가서 나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어주었으면. 누나가 준 그 굉장히 심이 굵은 도화 연필을 사실은 별로 써보지도 못하고 도둑맞아버렸노라고 오늘은 용감히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어리광을 부리며, 나 그런 거 하나 더 받았으면, 하고 말하리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누나는 총총걸음으로 우리들의 훨씬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술이 삐죽이 비틀어지며 그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쟤가 이윤희란 애지?” 하고 형의 친구 하나가 말했다.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즈이 학교에서 일등이라지?” 그 친구가 또 말했다. 형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다른 친구 하나가 “몸 괜찮은데.”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을 뒤덮고 오는 소리 없는 웃음을 나는 보았다. 나는 가늘게 몸이 떨렸다. 그만큼 그들의 웃음은 어둠과 음란의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응, 정말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응수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막연하나마 대단히 필연적인 어떤 분위기를 느끼며 그 뒤에 올 것은 무엇인가 하고 거의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뜻밖에도 형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저거……우리……먹을래?” 왁 하고 환호가 터졌다. 골목이 쩡 울렸다. 그러자 사태는 급속도로 발전해나갔다. 그들의 눈은 이미 생기를 되찾았고 삽들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더욱 요란스러워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들은 형의 방에 들어박혀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와 내가 거처하는 방에 드러누워서 이따금씩 웃음소리와 낮은 외침이 터져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잠이 퍼붓는 걸 막아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잠이 깜박 들었나보다. 형이 나를 흔들어 깨워놓았다. 방문에 엷은 저녁 햇살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내가 쓰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 형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너 윤희한테 심부름 좀 갔다 와, 응?”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얼결에 “응.” 하고 대답해버렸다. 얼결에가 아니라 나는 벌써부터 그런 부탁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형은 예상 외로 내 대답이 수월함에 놀래었던지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고 나서 “너 윤희한테 가서 이렇게 좀 전해줘, 응?” 하며, 형은 오늘 저녁 아홉시에 윤희누나가 미영이네가 살던 그 빈집으로 나와주기를 기다리겠다는 부탁을 얘기했다. 바야흐로 나는 무서운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간단한 말을 전해주는 그런 책임이 희박한 행위로써 가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 미영아, 너의 집을 제공하라고 한다. 매가(賣家)라는 글이 적힌 너털터털한 종이조각이 붙은 너의 집 대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이 빈집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고집하고 싶다. 미영아, 하고 부르면 곧 네가 뛰어나올 것 같았었다. 아니라면 어느날엔가는 아름다운 일본의 크레용을 내게 대한 선물로 가지고 돌아와서 네가 다시 그 집에 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간직하고 있었다. 너의 빈집이 내게는 용궁처럼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나는 온갖 화려한 공상을 그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자, 미영아, 나는 이제 몇 분 안으로 이러한 모든 것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아아, 모든 것이 항상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 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훨씬 앞서 맛보는 섭섭함. 하기야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영아, 내게 응원을 보내라. 형들의 음모에 가담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미영아, 내게 응원을 보내라. 그건 뭐 간단한 일이다. 마치 시체를 파묻듯이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뭐 난 잘 해낼 것이다. “형 혼자서 기다리는 것처럼 얘기할까?” 내가 물었다. “물론 그래야지” 형은 나의 그런 질문이 아주 대견스럽다는 듯이 히쭉 웃었다. 나는 방바닥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장판이 해진 곳을 손가락으로 비집고 그 속에 있는 흙을 긁어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만나자 하느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나는 손가락 끝에 묻어나오는 흙을 바라보며 형에게 물었다. “그건 말이지……” 물론 형들은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듣기가 무서웠다. 나는 얼른 형의 대답을 가로채서 “학교 일로 만나자고 하면 될 거야. 뭐 윤희누나는 형을 믿고 있으니까…… 틀림없이 나올 거야.” 라고 말했다. 나는 ‘윤희누나는 형을 믿고 있으니까’ 라는 말에 힘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도 너무나 무심히 지나쳐버린 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될까?” 형은 미심쩍다는 듯이 그러나 나의 완전한 협조에 아주 만족한 태도로 내게 되물었다. “그럼 되고 말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섬돌 위에 놓인 신발을 신고 있을 때 형의 목소리가 내 등뒤에서 들려왔다. 불안이 형의 목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너 정말 잘할 수 있겠니?” 그럼, 잘할 수 있고 말고,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싸리문을 밀고 나서다가 문득 고개를 들려보니 형의 친구들이 방문을 열어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어떤 형 친구는 격려한다는 뜻으로 주먹 쥔 팔을 올렸다내렸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웃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하낫 둘, 하낫 둘. 나는 입속에서 구호를 붙여가며 골목길을 뛰어갔다. 골목에는 갈색의 그림자들이 누워있었다. 하늘은 물빛이군. 나무는? 갈색. 지붕은? 보나마나 보라색이겠지. 나의 머릿속에 준비된 도화지는 중유(重油)처럼 진한 색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윤희누나 앞에 서자, 나는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이 어지러워서 몸을 잘 가눌 수가 없었다. 억울한 일로 선생님한테서 꾸중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누나는 아침에 보았던 그런 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의 전언(傳言)을 듣고 나서 누나는 아주 명료한 음성으로 간단히 승낙했다. 바보 바보 바보. 그러나 또 어느새 나는 형에게 유리한 구실을 덧붙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굉장히 중대한 학교 일인가봐. 아무도 모르게 누나 혼자만 와야 한대.” 나는 눈을 감았다. 내 귀에 윤희누나의 고맙다는 그리고 틀림없이 그 빈집으로 가겠다고 전해달라는 말소리가 먼 하늘의 우레소리처럼 웅웅거렸다. 끝났다. 아주 쉽게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미영이네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회색의 대문에 누렇게 빛이 바랜 종이조각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거미가 한 마리 그 종이 곁을 지나서 빠르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대문을 한 손으로 밀어보았다. 안으로 잠겨 있는지 열리지 않았다. 대문이 열리지 않자 집 안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끓어올랐다. 별로 높지 않은 흙담 위로 나는 올라갔다. 내가 기어올라가는 서슬에 담 위의 기와가 몇 장 땅에서 떨어져서 깨어졌다. 나는 담 위에 마치 말 타듯 걸터앉아서 집 안을 내려다보았다. 황폐한 빈집을 초록색의 공기가 휩싸고 있었다. 마당가에 딸린 조그만 밭에는 누가 심었던지 가지나무가 있고 시들은 가지나무 잎 밑에 누런 색으로 찌그러든 가지가 몇 개씩 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은 정말 볼품 없이 말라 있었다. 누가 빼어갔는지 창에는 유리가 한 장도 없었다. 나의 가슴은 한없이 조용하게 뛰고 있었다. 문득 내 동무와 시립병원의 폐허를 구경가기로 한 약속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방위대 본부인 그 저택으로 가봐야겠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새까맣게 되어 있겠지, 아침까지도 그렇게 불길이 오르고 있었으니. 나는 담 위에서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65 타인(他人)의 방(房) /최인호
고창근
4245 2010-10-15
내가 좋아하는 소설 갑자기 사물이 된 사내... 아내는 그 사물을 며칠 동안 어루만지다 창고에 처박아버린다... 우리는 이미 이 사회의, 기족의 사물이 된 지 오래지 않은가... 섬뜩하다... ************************ 타인(他人)의 방(房) 최인호 그는 방금 거리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로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 자기 방까지 왔다. 그는 운수 좋게도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었고 아파트 복도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시금치 끓이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더듬어 문 앞에 프레스라고 쓰인 신문 투입구 안쪽의 초인종을 가볍게 두어 번 눌렀다. 그리고 이미 갈라진 혓바닥에 아린 감각만을 주어 오던 담배꽁초를 잘 닦아 반들거리는 복도에 던져 버렸다. 그는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어 주기를. 문을 열고 다소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맞아주기를.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당기었는데도 방 안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는 다시 그 작은 철제 아가리 속에 손을 넣어 탄력감 있는 초인종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손끝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또 기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초인종이 고장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아득한 저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반영되어 오는 것을 꿈결처럼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필시 그의 아내가 지금쯤 혼자서 술이나 먹고, 그리고는 발가벗은 채 곯아떨어졌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잠이 들어 버리면 귀신이 잡아가도 몰라요. 아내는 그것이 자기의 장점인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분노를 느끼며 숫제 오 분 동안이나 초인종에 손을 밀착시키고 방 저 편에서 둔하게 벨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는 것을 초조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의 방 열쇠는 두 개로, 하나는 아내가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그가 그의 열쇠 꾸러미 속에 포함시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열쇠로 방문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이냐 하면 그런 면엔 엄격해서 소위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아내 된 도리이며, 적어도 아내가 문을 열어 준 후에 들어가는 것이 남편의 권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드렸지만 나중에는 거의 부숴 버릴 듯이 문을 쾅쾅 두들겨대고 있었다. 온 낭하가 쩡쩡 울리고 어디선가 잠을 깬 듯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아파트 복도 저쪽 편의 문이 열리고, 파자마를 입은 사내가 이쪽을 기웃거리며 내다보았는데 그것은 그 사람 한 사람 뿐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방의 사람들도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사뭇 경계하는 듯한 숫돌 같은 얼굴을 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마침내 그를 유심히 보고 있던 여인이 나무라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집에 무슨 볼일이 있으세요" "아닙니다" 그는 피로했으나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것을 계속 하면서 말을 했다. "그 집엔 아무도 안 계신 모양인데 혹 무슨 수금 관계로 오셨나요?" "아닙니다" 그는 그를 수금 사원으로 착각케 한 여행용 가방을 추켜들며 적당히 웃었다. "그런 일로 온 게 아닙니다" "여보시오" 이번엔 파자마를 입은 사내가 손 매듭을 꺾으면서 슬리퍼를 치륵치륵 끌며 다가왔다. "벌써부터 두드린 모양인데 아무도 없는 것 같소. 그러니 그냥 가시오. 덕분에 우리 집 애가 깨었소" "미안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더러워서 정말 더러워서, 침이라도 뱉을 심산이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는 방귀를 뀌다 들킨 사람처럼 무안해 하면서 주머니를 뒤져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익숙하게 짤랑이는 대여섯 개의 열쇠 중에서 아파트 열쇠를 손의 감촉만으로 잡아들었다. "전 이 집주인입니다" "뭐라구요?" 여인이 의심스럽게 그를 노려보면서 높은 음을 발했다. "당신이 이 집주인이라구요?" "그런데요" 그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뭐 의심나는 것이라두 있읍니까?" "여보시오" 아무래도 사내가 확인을 해야 마음놓겠다는 듯 다가왔다. 사내는 키가 굉장히 큰 거인이었으므로 그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이 아파트에 거의 삼 년 동안 살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아니 뭐라구요?" 그는 튀어 오를 듯한 분노 속에서 신음 소리를 발했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래 이 집주인을 당신 스스로 도독놈이나 강도로 취급한다는 말입니까. 나두 이 방에서 삼 년을 살아왔소. 그런데두 당신 얼굴은 오늘 처음 보오. 그렇다면 당신도 마땅히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소." 그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사내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안됐지만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니깐" 그는 화가 나서 투덜거리면서 방문 열쇠 구멍에 열쇠를 들이밀었다. 방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정 못 믿겠으면 따라 들어오시오. 증거를 뵈 주겠소" 그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컴컴하였다. "여보!" 그는 구두를 벗고, 스위치를 찾으려고 벽을 더듬거리면서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허지만 방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대답하질 않았다. 제길헐. 그는 너무 피로해서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며 간신히 벽면의 스위치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힘껏 올려붙였다. 접촉이 나쁜 형광등이 서너 번 채집병 속의 곤충처럼 껌벅거리다가는 켜졌다. 불은 너무 갑자기 들어온 기분이어서, 그는 잠시 동안 낯선 곳에 들어선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그때 그는 아직도 문밖에서 사내가 의심스럽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는 조금 어처구니없어서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때 그는 화장대 거울 아래 무슨 종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그는 힘들여 경대 앞까지 가서 그 종이를 주워 들었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가신 것을 잘 말씀드리겠어요. 편히 쉬세요. 밥상은 부엌에 차리 놨어요. 당신의 아내가 그는 울분에 차서 한숨을 쉬면서, 발소리를 쿵쿵 내면서, 한없이 잠겨 들어가는 피로를 느끼면서, 코우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어츠를 벗는 일관 작업을 매우 천천히 계속하였으며 그리고는 거의 경직이 되어 뻣뻣한 다리를, 접는 나이프처럼 굽혀 바지를 벗고 그것을 아주 화를 내면서 옷장 속에 걸었다. 그때 그는 거울 속에 주름살을 잔뜩 그린 늙수그레한 남자를 발견했고, 그는 공연히 거울 속의 자기를 향해 맹렬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길헐. 겨우 돌아왔어. 제길헐. 그런데두 아무도 없다니. 그는 심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벌거벗은 채, 스팀 기운이 새어 나갈 틈이 없었으므로 후덥지근한 거실을, 잠시 철책에 갇힌 짐승처럼 신음을 해 가면서 거닐었다. 가구들은 며칠 전하고 같았으며 조금도 바뀌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트랜지스터는 끄지 않고 나간 탓으로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껐다. 아내의 옷이 침실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고, 구멍 난 스토킹이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다리 안쪽을 조이는 고무줄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루우즈 뚜껑이 열린 채 딩굴고 있었다. 그는 우선 배가 고팠으므로 부엌 쪽으로 갔는데, 상위에는 밥 대신 빵 몇 조각이 굳어서 종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그는 무슨 고무 질을 씹는 기분으로 차고 축축한 음식물을 삼켰다. 이건 좀 너무한 편인 걸. 그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마땅히 더운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그뿐인가. 정리된 실내에서 파이프를 피워 물고, 음악을 들어야 했을 것이었다. 허지만 그는 운수 나쁘게도 오늘밤 혼자인 것이다. 그는 신문을 보려고 사방을 훑어보았지만 신문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문 볼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는데, 시계는 일주일 전의 날짜로 죽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사 온 시계인데 탁상시계 치곤 고급 시계이긴 하나 거추장스러운 날짜와 요일이 명시되어 있는 시계로 가끔 망령을 부려 터무니없이 빨리 가서 덜거덕하고 날짜를 알리는 숫자판이 지나가기도 하고 요일을 알리는 문자판이 하루씩 엇갈리기도 했는데, 더구나 시간이 서로 엇갈리면 뾰족한 수 없이 그저 몇천 번이라도 바늘을 돌려야만 겨우 교정되는 시계였으므로, 그는 화를 내면서 시계의 바늘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환장할 것은 손톱을 갓 깎은 후였으므로 그는 이빨 없는 사람이 잇몸으로만 호두 알을 깨려는 듯한 무력감을 손톱 끝에 날카롭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망할 놈의 시계를 숫제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나가면서 참으로 무의미한 시간의 회복을 반복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작업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지쳐 버렸다. 그는 천천히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욕실로 갔다. 욕실 안의 불을 켜자, 욕실은 아주 밝아서 마치 위생적인 정육점 같아 보였다. 욕조 안엔 아내가 목욕을 했는지 더러운 구정물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아내의 머리칼이 욕조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고,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손을 뻗쳐 더러운 물 사이에 숨은 가재 등과 같은 고무 마개를 빼었다. 그러자 작은 욕조는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고, 매우 빠른 속도로 물이 빠져나가 좀 후에는 입맛 다시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더러운 때의 앙금을 군데군데 남기고는 비어 있었다. 그는 우선 세면대에 고무 마개를 틀어막은 후 더운물과 찬물을 동시에 틀었다. 더운물은 너무 찼다. 그는 얼굴에 잔뜩 비누 거품을 문질렀고, 그래서 그는 마치 분장한 도화역자의 얼치기 바보 같아 보였다. 그는 자동 면도기가 일주일 전 그가 출장 가기 전에 사용했던 것처럼 그대로 날을 세우고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면도기의 칼날 부분엔 아직도 비눗기가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자른 수염의 잔해가 녹아 있었다. 그는 화를 내면서 아내의 게으름을 거리의 창녀에게보다도 더 심한 욕으로 힐책하면서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수염은 거세었고, 뿌리가 깊었으므로 이미 녹슬고 무디어진 칼날로 잘라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얼굴 두어 군데를 베었고 그 중의 하나는 너무 크게 베어져 피가 배어 나왔으므로 얼핏 눈에 띄는 대로 휴지 조각을 상처에 밀착시켰다. 휴지는 침 바른 우표처럼 얼굴 위에 붙여졌다. 우표는 매끈거리는 녹말기로써 접착된다. 하지만 그의 얼굴 위에선 피로써 붙여졌다. 그는 화를 내었다. 그는 우울하게 서서 엄청난 무력감이 발끝에서부터 자기를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으며 욕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우송되는 소포처럼 우표가 붙여진 채 부옇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거울에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쳐 그것이 무엇인가 확인을 했다. 그것은 껌이었다. 아내는 늘 껌을 씹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내의 버릇 중의 하나였다. 밥을 먹을 때나 목욕을 할 때면 밥상 위 혹은 거울 위에 껌을, 후에 송두리째 뜯어내려는 치밀한 계산 하에 진득한 타액으로 충분히 적신 후에 붙여 놓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낄낄거렸다. 그는 그 껌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껌은 응고하고 수축이 되어 마치 건포도알 같았다. 향기가 빠져 야릇하고 비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좀 후엔 말랑말랑해졌다. 아내의 껌이 그를 유일하게 위안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한결 유쾌해졌고 때문에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 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의 목소리는 목욕탕 속에서 웅장하였다. 온 방안이 쩡쩡거리고,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므로 종소리처럼 욕실을 맴돌았다. 그는 휘파람도 후이후이 불기 시작했다. 역시 집이란 즐겁고 아늑한 곳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무심코 중얼거렸지만 그는 순간 그 소리를 타인의 소리처럼 느꼈으며 그래서 놀란 나머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그는 욕실 거울 앞에 확대경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는 그것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겨드랑이의 털이나 코밑의 솜털을 제거할 때, 족집게와 더불어 사용하는 것으로 그는 그것을 쥐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뚜렷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내가 이상하게 부풀어서 확대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움직여 욕실의 형광 불빛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햇빛 밑에서 확대경을 움직거리면 날개 잘린 곤충을 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는 끈끈하고 축축한 욕실에서 한기를 선뜻선뜻 느껴 가면서 형광 불빛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빛을 모아 뜨거운 열기를 집중시키려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긴 지난 여름날의 하지(夏至)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여름은 행복하였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말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소리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좀 무안해졌고 부끄러워졌으므로 과장해서 웃어 제쳤다. 그는 키 큰 맨드라미처럼 우울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샤우어쪽으로 다가갔다. 샤우어 쪽으로 갈 때마다 그는 키를 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샤우어의 모가지는 사형 당한 사형수의 목처럼 꺾이어져 매우 진지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샤우어의 줄기 양옆에 불쑥 튀어나온 더운물과 찬물을 공급하는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더운물 쪽을 조심스럽게 매우 조심스럽게 틀었다. 그러자 뜨거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욕실바닥의 타일을 때리고 금시 수증기가 되어 올랐다. 그는 신기하다, 이것은 어제의 더운물이 아니다라고 그는 의식한다. 그는 갑자기 오랜 암흑 속에서 눈을 뜬 사내처럼 신기해한다. 그는 이번엔 찬물을 더운 물만큼 튼다. 그 차가운 물은 이제 예사의 찬 물이 아니라고 그는 의식한다. 물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너무 뜨겁기도 했고 차갑기도 해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사나운 비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더운 물이 피로한 얼굴을 핥고 춤의 신발을 신어 버린 소녀처럼 매끈거리면서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을 즐기고 있다. 그는 비누를 풀어 온몸을 매만진다. 거품이 일어 온몸이 애완용 강아지의 흰털처럼 무장하였을 때, 그는 그의 성기가 막대기처럼 발기해서 힘차고 꼿꼿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욕망이 끓어오르고, 그는 뜨꺼운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면서, 신음을 발하면서, 세찬 물줄기가 가슴을, 성기를 아프도록 때리는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빗물은 싱싱한 정육 냄새 나는 발그스레 상기한 근육을 적신다. 이윽고 온몸에 비눗기가 다 빠져도 그는 한참이나 물 속에 자신을 맡긴 채, 껌을 씹으면서 함부로 몸을 굴리고 있었다.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자 그는 물을 잠그고 몸을 정성 들여 닦는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그는 욕실을 나와 한결 서늘한 거실 찬장 속에서 분말 쥬스와 설탕을 끄집어낸다. 그는 바닥에 가루를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면서 쥬스를 거의 열 숟갈도 더 넣어 버린다. 그것에 그는 차가운 냉수를 섞는다. 그리고 손잡이가 긴 스푼으로 참을성 있게 젓는다. 그는 컵을 들고 한 손으로는 스푼을 저으면서 전축 쪽으로 간다. 그는 많은 전축판 속에서 아무 판이나 뽑아 든다. 그는 그 음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축에 전기를 접속시키자, 전축은 돌연히 윙---거리면서 내부의 불을 밝혀든다. 레코오드판 받침대가 원을 그리면서 돌기 시작한다. 그는 투원반을 가볍게 날리는 육상 선수처럼 얇은 레코오드를 그 받침대 위에 떠올린다. 바늘이 나쁜 전축은 쉭쉭 잡음을 내다가는 이윽고 노래를 토하기 시작한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소파에 길게 눕는다. 갓스탠드의 은밀한 불빛이 온 방안을 우울하게 충전시킨다. 그는 마치 천장 위에서 보면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부동의 자세로 누워 있다. 때문에 그는 가구 같은 정물(靜物)로 보인다. 그러다가 그의 눈엔 화장대 위에 놓인 아내의 편지가 들어온다. 그러자 그는 아내의 메모 내용을 생각해 내고 쓰게 웃는다. 아내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는다. 그런데도 아내는 오늘 전보를 받았다고 잠시 다녀오겠노라고 장인이 위독해서 가보겠다고 쓰고 있다. 그는 웃는다. 아주 유쾌해지고 그는 근질근질한 염기를 느낀다. 나는 안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내는 내가 출장 간 날 그날부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내는 내일 저녁 내가 돌아올 것을 예측하고 잘해야 내일 모래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다소 민망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아내는 내게 나지막하게 사과를 할 것이다. 나는 아내가 다른 여인과 다른 성기를 가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성기엔 작구가 달려 있다. 견고하고 질이 좋은 작구이다. 아내는 내가 보는 데서 발가벗고 그 작구를 오르내리는 작업을 해 보이기 좋아한다. 아내의 하체에 작구가 달린 모습은 질 좋은 방한용 피륙을 느끼게 하고 굉장한 포옹력을 암시한다. 그는 웃으면서 스푼을 젓는다. 그때였다. 그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공기를 휘젓고 가볍게 이동하는 발자국 소리였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욕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난폭하게 일어나서 욕실 쪽으로 걸었다. 그는 분명히 잠근 샤우어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제길헐. 그는 투덜거리면서 물을 잠근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되돌아온다. 그러자 이번엔 부엌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부엌 쪽으로 간다. 부엌 석유곤로가 불붙고 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끈다. 그리고 천천히 소파 쪽으로 왔을 때, 그는 재떨이에 생담배가 불이 붙여진 채 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엄청난 고독을 느낀다. "누구요" 그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지른다. 그의 목소리는 진폭이 짧게 차단된다. 그는 갇혀 있음을 의식한다. 벽 사이의 눈을 의식한다. 그는 사납게 소파에 누워, 시선에 닿는 가구들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모든 가구들이 비온 후 한결 밝아 오는 나뭇잎처럼 밝은 색조를 띠고 빛나기 시작한다. 그는 스푼을 집요하게 젓는다. 설탕물은 이미 당분을 포함하고 뜨겁게 달아 있으나 설탕은 포화 상태를 넘어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스푼을 젓는다. 갑자기 그는 그의 손에 쥐여진 손잡이가 긴 스푼이 여늬 스푼이 아님을 느낀다. 그러자 스푼이 그이 의식의 녹을 벗기고, 눈에 보이는 상태 밖에서 수면을 향해 비상하는, 비늘 번뜩이는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힘을 다해 스푼을 쥔다. 그러자 스푼은 산 생선을 만질 때 느껴지는 뿌듯한 생명감과 안간힘의 요동으로 충만 된다. 그리고 손아귀에 쥐여진 스푼은 손가락 사이를 민첩하게 빠져나간다. 그는 잠시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스푼이 허공을 날으면서 중력 없이 둥둥 떠서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온 방안의 물건을 자세히 보리라고 다짐하고는 눈을 부릅뜬다. 그러자 그의 의식이 닿는 물건들마다 일제히 흔들거리면서 흥을 돋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거실에 스위치를 넣으려고 걷는다. 그는 스위치를 넣는다. 형광등의 꼬마 전구가 번쩍번쩍거리며 몇 번씩 빛을 반추한다. 그러다가 불쑥 방안이 밝아 온다. 그는 스푼이 담수어처럼 얌전하게 손아귀 속에 쥐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온 방안의 물건들을, 조금 전까지 흔들리고 튀어 오르고 덜컹이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한다. 물건들은 놀라웁게도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제자리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비애를 느낀다. 무사무사(無事無事)의 안이 속에서 그러나 비웃으며 물건들은 정좌해 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스위치를 내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단 설탕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방안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과 어둠이 결탁하고 역적 모의를 논의한다. 친구여, 우리 같이 얘기합시다. 방 모퉁이 직각의 앵글 속에서 한 놈이 용감하게 말을 걸어온다. 벽면을 기는 다족류 벌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벽이 출렁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방 벽면 전기다리미 꽂는 소켓의 두 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여. 귀를 좀 대 봐요. 내 비밀을 들려줄께. 그는 그의 오른쪽 귀를 소켓에 밀착한다. 그의 귀가 전기 금속 부분품처럼 소켓의 좁은 구멍에 접촉된다. 그러자 그의 온몸이 고급 전기곤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 스파아크가 일고, 그는 온몸에 충만한 빛을 느낀다. 잘 들어요. 소켓이 속삭인다. 마치 트랜지스터의 이어폰을 꽂은 목소리처럼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만 사근거린다. 오늘 밤 중대한 쿠데타가 있을 거예요. 겁나지 않으세요. 그는 소켓에서 귀를 뗀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다시 스위치에 불을 넣는다. 불이 들어오면 이 모든 술렁임이 도료처럼 벽면에 밀착하고 모든 것은 치사하게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는 불을 켠 채 화장대로 다가간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키가 크고 낮은 모든 화장품을 열어 감시한다. 그리고 찬장을 열어 그 안에 가지런히 빈 그릇들, 성냥통, 촛대, 옷장을 열어 말리우는 바다 생선처럼 걸린 옷들, 그리고 그들의 주머니도 검사한다. 옷들은 좀 괘씸했지만 얌전하게 주머니를 털어 보인다. 그는 하나하나 보리라고 다짐한다. 서랍을 뒤져 남은 물건도 조사한다. 그러다가 이미 건조하여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한 낙엽 몇 송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에게 지난 가을을 생각키우게 했고 그는 잠시 우울해졌다. 그는 사진틀 속의 퇴색한 사진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책상에 꽂힌 뚜껑 씌운 책들도 관찰하였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석유곤로의 심지도 관찰하였다. 덮개가 있는 것은 그 내용물을 검사하였으며 침대도 들어서 털어도 보았다. 심지어 변기도 들여다보았고, 창 틈 사이도 들여다보았다. 물건들은 잘 참고 세금 잘 무는 국민처럼 얌전하게 그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들여다보는 물건은 본래 예사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어제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한층 더 깊은 피로를 느끼면서 거실로 돌아와 술병의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는 아주 쓸쓸하고 허무맹랑한 고독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잔을 그득히 부어 연거푸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맛은 짜고 싱겁고, 달고도 썼다. 그는 어디쯤엔가 피다 남은 꽁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랍을 뒤지다가 말라빠진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에 불을 붙였다. 술기운이 그를 달아오르게 하고 그를 격려했기 대문에 그는 아동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 아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는 벌거벗은 채 온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일상사(日常事)인 것처럼 걷고, 그리고 뛰었다. 그는 부엌을 답사하였고 그럴 때엔 욕실 쪽이 의심스러웠다. 욕실 쪽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거실 쪽이 의심스러웠다. 그는 활차(滑車)처럼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아무런 낌새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무생물에 놀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거만스럽게 걸어가서 스위치를 내렸다. 그는 소파에 앉아 남은 설탕물을 찔금찔금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가 스위치를 내리자, 벽에 도료처럼 붙었던 어둠이 차곡차곡 잠겨서 덤벼들고 그들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수군거리더니 마침내 배짱 좋게 깔깔거리고 있었다. 말리운 휴지 조각이 베포처럼 늘리워 허공을 난다. 닫힌 서랍 속에서 내의(內衣)가 펄펄 뛰고 있다. 책상을 받친 네 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래도 처음엔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허지만 그들의 대상이 무방비인 것을 알자, 일제히 한꺼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크레용들이 허공을 난다. 옷장 속의 옷들이 펄럭이면서 춤을 춘다. 혁대가 물뱀처럼 꿈틀거린다. 용감한 녀석들은 감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슬쩍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였다. 조심해 조심해. 성냥곽 속에서 성냥개비가 중얼거린다. 꽃병에 꽂힌 마른 꽃송이가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면서 춤을 춘다. 내의가 들여다보인다. 벽이 서서히 다가와서 눈을 두어 번 꿈쩍거리다가는 천천히 물러서곤 하였다. 트랜지스터가 안테나를 세우고 도립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재떨이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소켓 부분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낙수물이 신기해서 신을 받쳐들던 어릴 때의 기억처럼 그는 자그마한 우산을 펴고 화환처럼 황홀한 그의 우주 속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그는 공범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때였다. 그는 서서히 다리 부분이 경직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연히 느낀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이 방에서 도망가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움직이리라고 마음먹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다리를 만져 보았는데 다리는 이미 굳어 석고처럼 딱딱하고 감촉이 없었으므로 별수없이 손에 힘을 주어 기어서라도 스위치 있는 쪽으로 가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손을 뻗쳐 무거워진 다리, 그리고 더욱더 굳어져 오는 다리를 끌고 스위치 있는 곳까지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채 못 미쳐 이미 온몸이 굳어 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숫제 체념해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조용히 다리를 모으고 직립 하였다. 그는 마치 부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다음날 오후쯤 한 여인이 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매우 놀라서 경찰을 부를까고도 생각했었지만,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온 방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는데 틀림없이 그녀가 없는 새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사실이긴 했지만 자세히 구석구석 살펴본 후에 잊어버린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안심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잊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고 좀 뭣하긴 하지만 키스도 하긴 했었다. 허지만 나중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임을 알아차렸고 싫증이 났으므로 그 물건을 다락 잡동사니 속에 처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그 방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메모지를 찢어 달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화장대 위에 놓았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갔다고 할 테니까 오시지 않으셔두 돼요. 밥은 부엌에 차려 놨어요.  
64 황구의 비명/천승세
고창근
4772 2010-10-08
내가 좋아하는 소설 황구는 누렁이다. 순 우리나라 토종개다. 수천년을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살아온 똥개다. 근데 왜 비명을 지를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미순이 효순이가 생각나고... 미국의 지배에 억압당하는 기층민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 황구의 비명 천승세 다이아몬드형의 오밀조밀한 쇠창살을 달고 퐁 뚫린 작은 창문으로부터 눈이 시린 햇살이 뻗치고 있었다. 햇살에 드러난 나의 깡마른 허벅지는 허연 살비듬을 먼지처럼 일구고 있었다. 복부의 팽만감은 벌써 가셔, 쥐어짜 봐야 나올 것도 없었지만, 나는 노곤한 하품만 기가 차게 뱉어대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그만 창문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것들은 평범한 일상(日常)의 전부들이었다. 여인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자식들을 불렀고, 배드민턴 치는 개구쟁이들의 함성이 펄펄 끓고 있었고, 고물장수와 젊은 아낙이 나직이 서로 다투고 있었으며, 그리고 발바리 강아지들의 울부짖음들이 골목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슬플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의 청승맞은 하품은 급기야 한숨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변소문을 다급히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나는 내가 한숨을 내뱉고 있는 이유와 또 좌변기에 붙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엉덩이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방정맞게 다가오는 발짝 소리며, 신경질적인 노크를 퍼붓고는 내처 돌아가는 심사로 보아, 노크를 해대고 있는 사람이 아내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또 한 차례 요란스러운 노크를 해대고 난 아내가 짜증스럽게 악을 써대고 있었다. "빨랑빨랑 나오지 뭘 하는 거예요? 애기를 낳았대두 네 쌍둥이는 낳았겠수, 차암" 나는 손가락 끝에 들려 궁상스럽게 동작하던 휴지를 내던지고 일어났다. 좌변기는 요란하게 울며 나의 대변을 쓸고 내려갔다. ---쐐에쐐에, 호그르호글, 터텁텁, 꼬골--- 아내는 기가 차다는 듯 팔장을 끼고 서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뭉기적거리다가 그년을 아예 놓칠 셈이에요? 일주일 안으로 이사해야 될 것을 뻔히 알면서두 언제 갈려고 그래요?" 나는 아내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옷을 꿰입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한번만 더 가줘 제발, 난 그런 곳엔 딱 질색이거든. 그 다음엔 내가 꼭 갈께" 아내는 펄쩍 뛰었다. "글쎄 그런 년은 남자가 본때를 뵈줘야 한다니깐 그러네. 고년이 아주 천년 묵은 구렁이라니깐 그래..... 오늘은 두 말 말고 머리채라도 끌어서 기어코 받아내요. 알았죠?" 나는 아내가 그려준 약도를 받아들고 대문을 나섰다. 약도 위에 <그년의 양색시 이름, 담비 킴>이라 쓴 아내의 달필이 유독 힘줘 눌려 있었다. "오시는 길에 웬만한 방 있으면 그냥 계약해 버리세요. 시간도 없구 또 내 집도 아닌 걸 뭐. 알았죠?"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망연한 심정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는 <담비 킴>이 된, 그 은주를 나는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 여자는 내가 의정부에서 살 때 우리처럼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우리와는 방벽 하나 사이인 문간방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바아에 나가는 호스테스라 했다. 잘 생긴 편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호스테스 같은 인기 직업에서는 되게 별 볼일 없는 전형적인 시골 처녀 타이프였다. 키도 작았다. 은주는 가끔 밤중에 청승맞게 울다가 주인으로부터 호되게 당하기도 했었는데 그녀의 슬픔은 고향에 두고 온 두 살짜리 딸애 때문이라 들었다. 돈놀이(소위 달러변)을 했던 아내와는 무척 친한 사이여서 한때는 언니 동생하는 처지였는데, 어느 날 밤, 은주는 원금과 밀린 이자를 합쳐 십오만 원이라는 큰 돈을 떼먹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었다. 아내는 끈질기게 뒤를 밟아 기어코 은주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 몇 차례 대판 싸움질을 치르고 난 아내가 돈 받는 일을 나에게 떠맡긴 것이었다. 나는 용산행 시내 버스에 올라 아내의 간청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우선 <돈놀이>라는 아내의 사업이 나의 생리와는 등을 돌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얼굴도 제대로 못 기억하고 있는 양색시에게 돈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에 대해 나의 자존심은 치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며칠 후의 얄팍한 타산을 계산해 보고 있었다. 아내의 돈놀음은 그야말로 <튼판>의 <망통>지경으로 불운했으며 우리는 그나마 전세금을 줄여 이사를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용주골행 버스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커튼도 없는 창켠의 자리에 앉았다. 유월의 땡볕이 비닐로 만든 좌석을 물렁하게 삶고 있었다. 앞좌석에 앉은 흑인병사가 다소 유치한 무늬의 남방샤쓰를 벗어들고 그 옷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흑인병사의 훼훼 내두르는 혓바닥이 유독 빨갛게 더위를 타고 있었다. 내 옆에는 치고의 윤곽이 다 드러나도록 꼬옥 째인 청바지를 입은 여이이 요란스럽게 껌을 씹어대며 앉아 있었는데, 그 여인의 남빛 도는 얼굴색과 그 색깔 속으로 펴져 돋은 왕여드름으로 하여, 나는 그녀가 소위 양색시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모든 남자들의 소변 보고 있는 뒷모습이 한결같이 처량하듯, 양색시들 역시 그들의 얼굴빛으로, 허탈한 눈빛으로, 가쁜 숨소리로 그녀들의 처량함을 그리고 있었다. 버스는 구성진 유행가 가락을 내뽑으며 불광동 고개를 넘어 달리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여인은 버스 속의 낡은 스피커가 내뽑는 남진의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을 나직이 따라 부르고 있었으며 버스 운전사는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기계처럼 무심하게 손을 내젓고 있었다. 용주골행 버스 안에서 제일 좋다고 느낀 것은 이 처량한 유행가와 그리고 무심히 내젓는 운전사의 손, 이것 두 가지뿐이었다. 용주골의 한낮은 무척 더웁게 끓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10원짜리 하드로 마른 입을 적시며 서 있었다. 기세 좋은 더위 탓인지 용주골의 시가는 서부영화의 흔한 피날레처럼 한산했다. 흉한을 쓰러뜨린 정의한처럼 백인병사 한 사람이 샛노란 머리털을 휘날리며 멍청하게 서 있었고, 그 병사는 잠시 후 허리에 얹었던 양팔을 서서히 내리고는 길 모퉁이로 사라져 갔다. 이따금씩 사복한 두서너 명의 미군들이 지루한 표정들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으며 온통 영문으로 간판을 채운 무료한 상가들의 쇼윈도우가 지나치는 그들을 잠시 담았다가 다시 흘려보내고 있었다. 용주골의 거리는 마술의 거리철머 금새 꽉 찼다가 곧장 텅 비워져 버리기 일쑤였다. 양색시들이 목적도 없이 도로의 횡단을 반복하다가 거리 모퉁이로 사라지면 예의 하릴없는 미군 떼거리들이 갑자기 거리를 부산하게 하다가, 그녀들의 뒤를 좇아 금새 사라지곤 했다. 한동안 거리는 텅비는 것이었다. 내 옆좌석에 앉아서 왔던 그녀가 웃옷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는 망연히 서 있었다. 그녀는 짧은 거리를 몇 차례 오락가락해 대다가 내 앞을 지나쳐 무겁게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가 쇼윈도우 앞에 멈춰 서선 얼굴 속의 왕여드름 한 개를 쥐어짜고 있을 때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벼란간 물었다. "은주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여인은 바보스러운 나의 물음에 신경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 냥반 골 속이 휑한 모양이셔? 은준지 감준지 내가 어떻게 알아?" 여인은 새하얗게 눈을 홀겼다. 그녀는 다시 여드름을 쥐어짜고 있었다. ".........양색시인 모양인데........" "양색시오?...... 양색시가 용주골 천지에 한둘이래야 말이지.....그런 애 모르겠는데요? 운 좋으면 (3자 삭제)나 불리고 있을께구....." 나는 돌아서면서 새삼스럽게 아내를 원망하고 있었다. 이 여인의 어마어마한 실례의 말투는 선명한 동요 하나 없이 텅 비어 버린 한심스러운 거리를 한 차례 기세 좋게 울렸던 것이었다. 내가 아내가 그려준 약도 쪽지를 들고 막 도로를 횡단할 때였다. "이봐요! 푹푹 찌는데 낮거리라도 한 탕 뛰고 나서 찾아보시지 그래" 여인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한번 꿈틀 하고 하복부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건성으로 오른팔을 들어 흔들어 보이고는 곧장 도로를 횡단해 버렸다. "육갑 떠네에----" 여인은 허탈하게 내뱉고는 기진한 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년의 양색시 이름, 담비 킴>으로 시작한 아내의 약도는 퍽 자상스러운 편이었다. 나는 골목을 접어들면서 한번 뒤를 돌아다봤다. 그 여인은 쇼윈도우 앞에 멈춰 서선 어린애처럼 핸드백을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야릇하게 찡 아려오는 콧날을 쓰윽 훔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한심스러운 판에, 저 여인과 낮거리라도 신나게 한 탕 뛰고 나서 은주를 찾아 나선다면, 일은 훨씬 더 수월할 것이었다. 여인은 한눈에도 퍽은 고참 양색시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여인은 무슨 이유로 하여 저렇게 숨통 막히는 무료를 스스로 자청하고 나섰던 것이며, 가능하면 저 여인의 무료함이 한시바삐 숨가쁜 동작으로 변하기를--- 그래서, 어떻든 분망하다 보면 슬픔의 자질구레한 응어리들은 풀자루가 된 콘돔처럼 쉽게 버려지는 것이라고. 버리고 나면 그만이라고. 나는 걷다 말고 초라한 구멍가게 앞에 놓여 있는 긴 나무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산전수전 신산각고를 다 겪은 듯한 오십대의 주인은 나를 거들떠보지 않고 무성한 야산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뭐 시원한 것 없나요?" "시원한 게 무스거 이서......사이다나 콜라 그런 거디 뭘." "한 병 주세요." 그러시구레. 야아--- 이 손님 콜라 한 병 따드레라아" 나는 콜라 한 병을 단숨에 벌컥 들여마셔 버렸다. 그제서야 주인은 나의 얼굴을 힐끔 훑어내렸다. "용주골엔 뭬하러 와서?" "놀러 왔습니다... 그런데 내 얼굴에 서울 사람이라고 그려져 있습니까?" "그냥 알디 뭘. 용주골에 뭬 볼 게 있다고 놀러 와?" 주인은 칼자국이 서너 개쯤 뻗친 우람한 팔뚝을 들어 성성한 백발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누굴 찾아 왔는데요. 은주라구." "양색씬가?" "그렇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알긴 뭘 알아? 거렁거 이름 외우고 살게 돼서? 이 용주골에서 살래믄 말야, 첫때루 안면몰수하구 둘때루 예의사절하구, 세때루 악발교육해야 사능게야. 이 흉터 좀 보라우! 손주 볼 나이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좀 보라우. 미치가서.... 하옇튼지 이놈의 용주골, 이거 머이 못되두 단단히 못된 건데 말이디...." 주인은 땡볕만큼 더운 한숨을 후우---내뱉고는 다시 야산의 무성한 수풀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인의 얼굴은 나이보다도 훨씬 겉늙어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앉아 이 겉늙어 버린 주인이 내뱉은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안면몰수> <예의사절> <악발교육>....이렇게 삭막한 땅속에서 용케도 숨줄을 잇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주인의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살맛 없는 말세의 끝이었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은주는 풀섶에 이울지는 모진 빗방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숨이 가빠갔다. "그리구 말야, 은주의 이런 발은 나훈아의 고향의 돌담길이나 몰레방아 도는 시골 같은 땅을 밟고 살 발이야. 이런 발로 라스팔마스는 너무했잖어? 은주의 외씨 고무신 곁에는 황토로 범벅된 검정 고무신이나 코째진 짚신 같은 것이 놓여 있으면 되는 거구...." 나는 정신없이 지껄여대면서도 뚜렷한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반성하고 있었다. 나는 왜 가엾고 측은한 은주를 깊게 안아줄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은주는 백 마디의 그럴싸한 설교보다도 한번의 포옹, 한번의 입맞춤에서 훨씬 더 진하게 나의 뜻을 공감할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것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얍싸한 위신이나 아내에 대한 정결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문둥이 자식을 둔 어머니의 아픔과 같은 것이었다. 나와 은주의 적요한 사이에 끼여 용주골의 하늘은 비를 채우고, 미친 듯 천둥을 울고 있었다. 광막한 들판을 질러 한 쌍의 개들이 뛰어 오고 있었다. 나와 은주는 점점 다가오는 한 쌍의 개들에게 시선을 던져 놓은 채 참으로 조용하게 앉았고, 또 서 있었다. ".....난 어차피 가야 할 시간이야. 그래 끝내 용주골에 남겠나?" 은주는 별안간 긴 한숨을 내뱉더니 무척 답답한 듯 가슴을 쓸어내고 있었다. "나에게 다소의 돈이 있어요. 오만원쯤은 은주에게 보태주고 싶군. 은주가 용주골의 한 모서리를 떠난다면 말야...." 은주는 오랜만에 샐쭉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주인한테 꼭 오만원의 빛이 있는데...." 나와 은주가 멋적게 웃고 있는 동안 우리 시선 앞에서는 엄청난 노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수캐는 어마어마한 체구를 자랑하며 암캐의 엉덩이 위로 댕겅 몸을 실었고, 수캐에 비해 너무나 볼품없는 조그만 암캐는 그때마다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풀썩 뒷다리를 꺾고 주저앉는 것이었다. 혀를 빼물은 수캐는 뾰족하게 선 귀와 늘씬한 체구를 자랑하며 몹시 함부로 암캐를 다루고 있어싿. 암캐는 복날이 서러운 조그만 재래종 황구였다. 황구는 기구한 여인처럼 사력을 다해 순종하고 있었으나 수캐의 폭력은 절정의 극이었다. 수캐는 숫제 기진해서 무릎을 꺾어버린 황구의 등 위로 길게 체구를 얹어 뻗고 우람한 불알통을 딸랑대며 느슨느슨 동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였다. <황구여! 꼬리를 내려라! 제발!> 황구는 알량한 꼬리를 받쳐들고 감질거리는 쾌락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캐는 여의치 않는 동작에 대해 무척 신경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큰 입을 벌려 황구의 목덜미를 덥썩 물었다 놓았다 하며 장군처럼 질겼고, 황구는 그때마다 닳아빠진 빗자루 같은 꼬리를 하늘 높이 쳐들고 뒷다리를 불끈 세워 보는 것이었다. 은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한 쌍의 개들이 벌이고 있는 적절한 기회 속에서 화급하게 나의 목적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흠뻑 물에 젖은 돈뭉치를 꺼내 들고 오만원을 헤이고 있었다. "은주! 눈 딱 감고 떠나 버려. 한두 사람 이렇게 떠나가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러면...." ".......떠나 버리면 어떡행. 아주머니 돈은 떼어먹고 마는 건데." 그때였다. 고막이 따가울 정도로 앙칼진 황구의 비명이 터졌다. 한쌍의 개는 서로 돌아서고 있었으나 황구의 뒷다리는 한 뼘은 실히 공중에 떠 있었다. 수캐는 황구의 불끈 들린 뒷다리를 끌고 있었다. 황구는 진창 바닥에다 턱을 끌며 그 요란스럽고 처절한 비명을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황구는 죽어가는 듯싶었다.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은주가 몹시도 서럽게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은주의 흐느낌 속으로 끼여드는 황구의 비명을 모진 빗발이 물컹하게 적시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는 은주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별안간 들먹거리는 어깨쭉지를 감싸 안았다. 나는 바보처럼 바쁘게 내뱉었다. "은주! 황구는 황구끼리....황구는 황구끼리 말야..." "가겠어요! 당장이라도 떠나겠어요." 은주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은주의 젖은 등어리로부터 보리멸 익은 듯한 비린 체취가 풍겨왔다. 나는 은주의 등어리에다 깊게 얼굴을 묻었다. 훈훈한 은주의 체온이 내 볼을 타고 온몸에 퍼져들고 있었다. "봐요......그것 봐요......향수가 빗물에 씻겨 버리고 나니깐 고향 냄새가 나잖아. 보리밭 냄새가 말야." 나는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결한 한 여인의 긴 치맛자락이 끌려가는 아이들의 함성이 꽉 찬, 배드민턴의 어지러운 포물선들이 메운, 그리고 내 자식들이 왕사탕 가게 앞에서 군침을 삼킬 수 있느  런 예사스러운 골목 안이라면 판잣집인들 어떻겠는가 하고--- 나는 그 방안에서 고향에 있는 은주의 꿈을 꾸며 아내의 시들은 젖무덤에다 입을 맞출 것이었다. 서럽지 않은 황구와 황구로--- <끝>  
63 한나 요한센-파란 토끼가 있다고
누미
5354 2010-10-02
내가 좋아하는 소설 세상에 이런 동화책이 다 있다니! 지금껏 동화깨나 읽은 나를 완전 사로잡은 이 동화 ‘파란 토끼가 있다’ 설정부터가 기발하고 깜찍하고 매력적이다. 전편 '공룡이 있다고'에서 멸종된 공룡이 삶은 달걀에서 부화되어 나온 데 이어 속편인 '파란토끼가 있다고'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파란' 토끼가 알을 깨고 나온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순진하고 여리고 어벙한 주인 자비놀이 두 동물, 공룡과 파란토끼와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일상이 주를 이룬다. 그야말로 동화속에나 있을 법한 장면들로만 내리 이어지는데 책을 읽는 내내 자비놀과 그의 두 동물이 주고받는 말이며 치러내는 일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마 그건 작가 한나 요한센이 공룡과 토끼에게 부여한 캐릭터 덕분일 거다. 눈에 띄는 거마다 북북 찢어서 잡아먹어치우고 싶어하는 이 책에 나오는 공룡, 한마디로 귀엽고 앙증맞기 짝이 없다. 투정부리며 생떼를 쓰거나 눈에 보이는 것마다 ‘이게 뭐야 저게 뭐야’ 꼬치꼬치 물어대는 말투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대여섯 살짜리 꼬마랑 똑같다. 말하자면 공룡 고유의 성격을 귀여운 캐릭터 속에 깔고있다는 건데, 그래서인지 공룡이 주인 자비놀을 떠나서 중생대로 떠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와닿는다. 토끼 또한 마찬가지다. 겁 많고 소심하고 게으르고 도망치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듯한 토끼의 모습을 기본으로 갖고있으면서 매사 야무지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공룡을 약 올리는 모습은 절대내숭의 포스를 즐감케 한다. 프리랜서 기자인 자비놀 역시 겉보기만큼 평범한 건 아니다. 친구 '자비놀'에게서 '자비놀'이라는 이름을 건네받으면서 자비놀은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특별한 경험이 가능한 세상을 살게되는 사람이다. 그 특별한 세상이란 다름 아니라 사사건건 다투고 옥신각신 바람 잘날 없는 공룡과 토끼의 칭얼거림과 불평불만과 어리광을 받아주면서 책을 읽거나 기사를 쓴다. 남는 시간에는 수영하러 가자 공원에 가자 보채는 공룡과 눈치보다 따라나서는 토끼를 데리고 외출을 한다. 물론 바깥에만 나가면 주의부족으로 상처를 입는 공룡을 가축병원에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하고... 소란스럽고 자잘한 일상사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공룡이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장면에 이르면 자비놀처럼 묵직한 아픔과 외로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내가 그새 공룡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동화를 전혀 읽지 않는 분이라도 이 책만큼은 읽어보시기 바란다. 실로 공룡과 토끼가 티격태격 다투면서 보여주는 실랑이와 갈고리박기로 대표되는 소란스런 싸움을 지켜보는 재미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한나 요한센 1939년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나 독문학과 교육학을 공부하고 취리히에서 살고 있다. 어른과 아이들을 위해서 책을 썼고, 수많은 책을 번역했으며, 스위스 청소년 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난 황금 알을 낳을 거야> <침낭을 졸라맨 마녀> <공룡이 없다고?> 등이 있다. 클라우스 줌뷜 (그림) 1966년 스위스 슈탄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금박 기술과 옛날 그림 복원 기술을 갖고 있으며,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지금은 바젤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62 주식투자하지 말자/고창근
편집자
4339 2010-09-30
10.10월 5호 수필  주식투자하지 말자 5여 년 전 아는 사람에 의해 보험회사에 적금을 들게 되었다. 5년짜리 적금이라 하여 보험회사에서도 은행처럼 적금을 하는구나 하고 적금을 들었다. 5년 동안 꾸준히 한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넣었다. 어느새 5년이 지나고 적금을 찾으려 했다. 근데, 맙소사. 적금이 아니고 보험이었다. 꼼꼼히 처음부터 챙기지 않은 나를 자책하며 해약을 하려고 했다. 근데 이런, 해약환급금이 원금에도 한참이나 미치지 못 했다. 거의 몇 백 만원이 손해였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을까지 계속 넣어 보세요. 아마 가을에는 주식이 오를 겁니다.” 보험사 남자 직원은 친절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주식투자형 보험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평소에 주식투자는 도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주식투자는 일체 하지 않고 있었다. 몇 년 전 주식 열풍이 불었을 때도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비웃기도 했다. 근데 나도 모르게 주식투자를 하게 되다니. 그때부터 나는 거의 매일 ARS를 통해 내가 넣은 보험의 해약 환급금을 채크했다. 8월을 고비로 조금씩 주식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떨 땐 며칠 만에 150만원이 오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런 경향으로 주식을 하는구나 싶었다. 아무 노력도 없이 며칠 만에 몇 백을 벌다니. 나는 매일 뉴스를 보며 경제 동향을 살폈다. 전에는 보지도 않던 주식 관련 뉴스를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경제가 빨리 회복 되어 내가 투자한 보험이 오르기를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사회 정의나 복지 문제, 소외자 문제에 등한시하고 오직 경제가 살아나고 발전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런 내가 어이가 없었다. 오직 경제에 목매는 나를 바라보니 소름이 확 끼쳤다. 다행히 지금은 거의 원금을 회복했다. 곧 해약할 계획이다. 이제 나는 경제성장에 올인하지 않고 사회 복지나 소외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런 경험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주식투자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주식투자를 하는 순간 자본의 노예가 된다고 간곡히 말한다. 가만히 있어도 주식이 오르면 돈을 버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는 오직 경제만이 최고의 선이니까. 당장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서 초연하기는 힘들 것이다. 당장 가만히 앉아서 수백만 수천만원을 버는데 그것을 사양하고 주식이 내려도 좋으니 복지국가 되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아예 주식을 멀리해 경제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오직 경제성장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지, 교육, 정의, 남북문제 등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 되지 못 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지금도 국민의 복지나 교육문제보다 오직 4대강 사업에 매달리고 있다. 다 우리 탓이다. 아니다. 그렇게 자본가가 우리를 돈으로 지배하는 구조에서 그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그러니 제발 주식투자하지 말자.  
61 바퀴벌레/김서련
편집자
4363 2010-09-30
10.10월 5호 소설 바퀴벌레 김서련 바퀴벌레였다. 변기에 앉아 아랫배에 힘을 주다가 말고 문득 고개를 들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벽 모서리 타일에 일정한 간격으로 딱 들러붙어 있는 검은 점 같은 게 눈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곰팡이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곰팡이라고 여기기엔 모양새가 너무 단정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그게 뭔지 생각을 했다. 아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팠는데도 변은 나오지 않았다.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변기에서 일어나서 목을 길게 뺐다. 곰팡이 같기도 하고 개미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정확하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바지를 무릎에 걸친 채 목욕용 플라스틱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바퀴벌레였다. 몸길이 약 1센티미터 남짓한 반질반질 광택이 나는, 납작한 다갈색의 바퀴벌레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벽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기도 뭔가가 겁이 나서 움츠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마디로 별종이었다. 불만 켜도 잽싸게 어둠 속으로 도망가는 게 바퀴벌레의 생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 놈은 사람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도망갈 기세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공격이라도 하면 굳세게 저항하려는 듯 더 단단히 몸을 움츠리는 듯했다. 의아했다.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마루에 대자로 엎드려 자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 접어들어 생긴 버릇이었다.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서 자는 모습이 어쩐지 바퀴벌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어쩐지 바퀴벌레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곤충이든 뭐든 살아 있는 존재가 이 집안에 있다는 게 은근히 위로도 되었다. 아무튼 간에 간이 큰 바퀴벌레였다. 밝은 불빛에서 분명 사람의 기척을 감지했을 텐데도 도망가지 않고 딱 버티고 있다니. 이렇게 당당하게 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집의 음습한 공간에 있는 수천 마리의 바퀴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언뜻 지나갔다. 아니면 나를 자신의 종족으로 간주하고 있든지.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바퀴벌레가 그다지 혐오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불결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람과 마주치면 도망쳐 숨어서는 자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는다는 말도 있다시피 실제로 생각보다 불결한 곤충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 바퀴벌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곤충인 것은 사실이다. 바퀴벌레가 출몰하면 사람들은 질겁을 하며 세스코를 부르거나 삶은 달걀을 으깬 뒤 붕산과 섞어 집안 구석구석에 두거나 컴배트를 사용해서 바퀴벌레 소탕 작전을 벌인다. 집안에 바퀴벌레가 있다는 자체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그런 혐오감에 대해 언젠가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다룬 적이 있었다. 그런 혐오감은 진화신화적인 이유에서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감정이라고 했다. 즉 인간의 유전자 안에 바퀴벌레에 대한 혐오감을 내재시킴으로써 비위생적인 바퀴벌레와의 접촉을 피하도록 시스템화되었다는 거였다. 소나 토끼들이 배우지 않아도 독풀을 피하는 것처럼.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에 비친 바퀴벌레들을 보면서 더럽다기보다 오히려 측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축축한 곳에서 오글오글 모여 있는 바퀴벌레들이 힘들고 지쳐 보이고 그러다가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시 변기에 앉아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배는 살살 아프고 가스가 찬 듯 아랫배가 탱탱한데도 변은 나올 듯 말 듯 했다. 저녁에 먹은 음식을 떠올렸다. 김치전과 밥을 먹었다. 묵은 김치를 총총 잘게 썰어 부친 전은 평소에 자주 해 먹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조금 붓는다는 게 팍 부은 거였다. 티슈로 닦아내는 게 귀찮아서 튀김을 해도 될 정도로 흥건한 기름에 전을 부쳐 먹었다. 속이 느글거렸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배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것은 저녁을 먹고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마침내 변이 나올 기미를 보였다. 한 번 더 아랫배에 힘을 꽉 주었다. 두두두, 소리가 나더니 팍, 물똥이 변기 안에 튀었다. 설사였다. 한차례 변을 본 뒤 물을 내렸다. 여전히 배가 더부룩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나는 변기에 붙인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다시 배가 아프기를 기다리면서 천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바퀴벌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딱 들러붙어 있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나는 눈의 초점을 그러모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가 수챗구멍을 통해 올라왔다. 무거운 정적으로 짓눌려 있는 욕실 속에서 웅장하게 울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래층 남자였다. 집에 들어온 남자가 또 애매한 여자를 후려잡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면 남자는 늘 이런저런 빌미를 잡아 여자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술 마시고 와서 밤새도록 고함을 지르며 여자를 닦달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남자와 부딪칠 때마다 나는 주의 깊게 남자를 살폈다. 각진 얼굴에 안경을 낀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딱딱해 보이고 눈빛이 희번덕거렸지만 그렇게 악의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공무원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꼼꼼하고 성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자는 밝고 차분한 성격인 듯했다. 얼굴이 마주치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도 곧잘 했다. 남자에게 매일 구박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다시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아픔이 심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단전에 힘을 세게 주었다. 물똥이 팍팍, 총알처럼 튀어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변기 안에 들러붙은 황백색 똥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물을 내렸다. 잘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변기 안에 세제를 푼 뒤 솔로 박박 문질렀다. 나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엎드렸다. 바퀴벌레처럼 마루판에 배를 딱 갖다 붙인 채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린 눈 속으로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사물들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그들은 지금까지 집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난 네가 한 행동을 알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이가 집 나간 것이 내 책임이라고?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아이가 집을 나갔다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에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데, 뭐 어쩌라고.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자장가처럼 고함 소리를 듣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검회색 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은 우중충한 날씨였고 나는 뭔가에 쫓겨 끝없이 도망을 다녔다. 몇 번이나 잠을 깼다. 눈을 뜨고 그런 꿈을 꾼 이유가 뭔지 그 꿈이 뭘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한쪽으로만 오래 엎드려 있은 탓인지 목도 뻐근하고 어깨도 욱신거렸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통증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 통증이 더 심해지기를 바랐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저절로 생겨나서 온전한 형태를 이루기도 전에 일그러지는 생각들 사이로 남자의 고함 소리가 파고들었다. 너무 오래 고함을 지른 탓인지 남자의 목소리에는 쉰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남자는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다. 희번덕거리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도대체 남자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마루판을 뚫고 귓속으로 들어온 쉰소리가 내 몸의 혈관을 타고 피부와 내장, 근육과 뇌 속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신경들을 자극했다. 쉰소리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신경 돌기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살아가는 게 두려웠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두려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입안이 바싹 말랐다. 혈관과 근육, 지방, 뼈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텅 빈 몸에 수천 개의 자갈이 꽉 들어차 있는 듯 온몸이 무거웠다. 몸은 마루를 뚫고 땅을 뚫고 땅 속의 바위를 뚫고 끝없는 어둠뿐인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밑으로 추락했다. 힘내! 나는 자꾸만 가라앉는 몸을 추슬렀다. 무거운 손으로 머리맡에 휴대폰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금방 찾을 수 있게 바로 머리맡에 뒀는데, 어디로 갔는지 손에 잡혀지지 않았다. 나는 손발을 옴지락거렸다. 다음에 팔다리를 들었다가 놓았다. 축 처진 몸에 조금씩 힘이 생겼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와 이불을 털었다. 휴대폰은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아이 이름을 찾아 한참 들여다보다가 메시지전송을 클릭했다. 아무 것도 씌여지지 않은, 커서가 깜박거리는 창에다 ‘잘 지내고 있지?’ 라고 글자를 쳤다.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지?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몸은 아프지 않니? 밥은 잘 먹고 있니? 그런 말을 하면 아이는 뭐라고 답문을 보낼까. 걱정 마.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 아니면 침묵을 지킬까. 나는 아이가 답문을 보내고 싶은 말들이 뭘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해야 아이가 답을 보내줄 마음이 생길까. 생각나지 않았다. 십중팔구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적어 보내도 답문을 보내지 않을 게 뻔했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아이에게 매일 문자를 보냈고 아이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집에도 오지 않았다. 아이가 사는 곳에 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가 날 찾을 때까지 만나지 않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의 맘이 풀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메시지창에 뜬 글자를 들여다보다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포르르, 날아가는 편지에다 내 마음을 담았다. 널 사랑해! 정말 널 사랑해! 내 맘 알지! 어느새 아래층은 잠잠해져 있었다.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점검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은행에 들러 아이에게 한 달 생활비와 용돈을 보내고 오후에는 상담 치료사를 만날 예정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집안을 반들반들하게 해 놓고 나가려면 서둘러 일해야 했다. 매일 청소를 하는데도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다. 이 먼지들이 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이리저리 둘러봐도 공중에는 먼지 비슷한 것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분이 이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날아다니다가 사물에 들러붙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내 몸에도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안으로 먼지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목이 퍼석거렸다.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단숨에 마시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배추김치와 물김치가 담긴 플라스틱 통과 유통기간이 지난 식빵과 보름 전에 사 놓은 계란이 서너 개, 햇반이 세 개 있었다. 햇반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김치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김치전을 해 먹을까하다가 그만 두었다. 또 장이 탈 날까봐 겁이 났다. 큰 대접에 밥을 넣고 물을 가득 부었다. 입맛이 없을 때 나는 주로 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셨다. 아이가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집을 나간 뒤 나는 물밥만 먹었다. 밥맛도 없었지만 집에 붙어 있을 새가 없었다. 임시 강사를 구해 학원을 맡겨 놓고 아이를 찾으러 밤낮으로 쫓아다녔다. 아이 친구의 친구까지 찾아가서 아이의 행방을 묻고 주점을 뒤지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내고 전단지를 붙이고 신문에 난 사건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독립하게 방을 얻어달라는 것이었다. 도저히 나랑은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얼굴을 보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와 상담한 담임선생님은 내게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 난 담임선생님은 굳은 결의가 담긴 눈으로 내게 약속을 했다. 나는 아이에게 학교 근처에 있는 방을 얻어 주고 학원을 정리했다. 내 몸의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된 된 듯 기력이 다 빠진 나는 당분간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후루룩 밥을 마시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20층에 서자 아래층 여자가 올라탔다.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곧장 한쪽 구석으로 가서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여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훑어보았다.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숫자판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여자와 내가 내뿜는 숨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떠다녔다. 19. 18. 17. 엘리베이터는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출근 시간대인데도 도중에 타는 사람이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상상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대로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추락하면 나와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겠지. 어쨌든 한 운명의 배를 탄 여자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쓸데없는 상상을 털어내고 맨 안쪽 구석 코너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힐끔거렸다. CCTV는 다소곳하게 서 있는 여자와 내 모습을 흑백으로 찍고 있을 것이다. 나는 CCTV에 찍힌 둘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때 여자가 고개를 들어 눈길을 엘리베이터 숫자판으로 던졌다. 그러다가 나와 눈길이 서로 얽혔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여자의 눈을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아이의 눈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건 절망에 가득 찬 눈이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제발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절망이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현재 여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간절한 도움을 바라는 듯한 눈빛. 아이도 저랬을까. 저렇게 간절하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서 절망했을까.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외로웠을까.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삶의 전부가 된 남자 때문에 아이에게 마음을 줄 여유가 없었다. 아이는 내 손이 가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일을 곧잘 했고 순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이혼하고 몇 군데의 대학에서 고고학을 강의하는 그와 함께 살기로 결정을 했고 아이의 마음을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다. 아이는 순순히 그와의 생활을 받아들였다. 마음을 활짝 열고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잘 지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아이와 사는 것을 조금 불편해 했던 것 같다. 실제로 내게 아이와 잘 지낼 자신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천성적으로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가 착하니 신경 쓰게 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걱정한 것과 달리 그도 아이와의 생활에 쉽게 적응하는 것 같았다. 개가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아니 아이에게 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순하고 순한 아이가 변한 것을 개가 죽은 뒤부터였다. 개를 산책시키던 아이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개가 차도에 뛰어들었고 그때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트럭이 개를 그대로 통과했던 거였다. 그가 오랫동안 키워 온 개였다. 그는 몹시 화를 내며 사고의 책임을 아이에게 돌렸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아이가 말하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나쁜 아이라고 그런 아이가 나중에 사회에서 암적인 존재가 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존재가 된다고 차갑게 말했다. 나는 개 때문에 아이를 윽박지르는 그가 못마땅했으나 속으로 삼키고 그의 편을 들었다. 어쨌거나 아이의 부주의 때문에 개가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나와 그를 노려보았다. 그 일이 있은 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가능한 우리와 얼굴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밥도 자기 방으로 가지고 가서 먹었다. 어쩌다가 서로 마주치면 고개를 싹 돌리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그는 그런 아이를 견딜 수 없어 했다. 나는 아이의 방 앞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하자는 거니? 난 너 같이 못된 딸 키우고 싶지 않아. 그러다가 문득 태도를 바꾸어 회유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제발, 이러지 말자. 난 널 사랑해. 내 맘 알잖아. 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어느 것도 아이한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은 냉정했고 눈빛에서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적의가 느껴졌다. 내 손에 걸리기만 해 봐, 작살을 내버릴 거야, 라는 아이의 얼굴빛을 보고 아이를 고문하는 것은 아이 자신이 아니라 혹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돌변한 아이의 태도에 나는 쩔쩔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아이를 바퀴벌레를 보듯 싫어했다. 술에 취할 때마다 그는 아이가 음습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싫어했다. 아이의 말이나 행동, 태도, 모든 것을 싫어했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은 아마도 그때 너무 심하게 말한 것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의 죽음을 아이 책임이라고 몰아부친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아이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화를 냈다. 아이가 하는 짓을 잘 보라고. 아이가 아니라 이건 숫제 괴물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보면 숨이 탁 막힌다고도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를 잘못 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다. 무슨 말을 하던 그를 사랑했다. 그와 헤어질 마음이 티끌만치도 없었다. 아이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한테 예전처럼 잘 지내자고 구구절절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살았다. 내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나아지겠니? 한 번은 문을 사이에 두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둘만 살고 싶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를 사랑해. 네가 마음을 바꾸면 안 되겠니? 아이는 싫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누구를 택할 것인지 나는 생각했고 아이보다 그가 더 좋다고, 그 없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확실히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와 헤어져서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아이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오히려 날 도와주지 않는 아이를 원망했다. 한 번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방에서 나온 아이에게 말했다. 날 너무 힘들게 한다고. 나를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정했다.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가 돼서 어떻게 엄마 생각만 해? 엄마는 엄마만 중요하고 나는 안 중요해? 정말 그래? 날 바퀴벌레 취급하는 남자가 그렇게 좋아? 나보다 더 좋아?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날 바라보는 아이의 눈은 절망에 가득차 있었다. 여자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갔다. 뒤에서 걸어오는 여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여자에게 뭔가 말을 걸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경비실을 지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차 한 대가 올라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내 뒤를 따라오던 여자도 내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많이 덥죠? 네. 여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굴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딜 가요? 시내에요. 아, 네. … 요즘도 춤을 가르치고 있어요? 나는 언젠가 여자에게 들은 말을 기억해내고 물었다. 그때 여자는 댄스교습소에서 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네. 차가 지나가고 우리는 걸음을 말없이 옮겼다. 예식장과 뷔페,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7층짜리 건물과 은행, 편의점을 지나가면 횡단보도가 나오고 길은 갈라졌다. 도로를 건너가면 시내로 가는 지하철이 나오고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나는 여자에게 말을 계속 말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여자는 별로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혹시, 케이크 좋아해요? 생각지도 않은 말이 불쑥 입에서 나왔다. 네. 여자가 대답했다. 그럼, 나중에 케이크 먹으러 올래요? 여자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케이크를 무지무지하게 좋아해요. 잘 만들고요. 혼자서 먹으려고 하니 좀 그러네요. 오후 4시쯤 집에 오세요. 한 조각 먹고 저녁 준비하면 되잖아요. 나는 애정을 담아 말했다. 여자에게 케이크를 꼭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아, 네. 그때쯤 돌아오게 되면 집으로 갈게요. 고마워요. 그제야 여자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초록 신호불이 들어오고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나 여자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무거운 기분이었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무거운 기분은 더 심해졌다. 나는 왜 여자에게 케이크를 먹으러 오라고 했을까. 케이크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리고 나는 케이크를 딱 한 번 만들어봤을 뿐이었다. 그때 모양도 형편없었고 맛도 없었다. 차라리 제과점에서 살 걸 하면서 후회를 했었다. 그런데 여자에게 케이크를 잘 만드니 어쩌니 하면서 먹으러 오라고 하다니. 더구나 나는 오후에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정말이지 대체 왜 그 말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자에게 뭔가 다른 말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다음 정류장은 초등학교 앞에 있었다. 널찍한 주차장을 가진 마트 건물을 지나 산등성이에 위치한 초등학교는 아이가 6년 동안 다닌 곳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지도위원 선거에 나간 아이가 떠올랐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다. 전날 밤 새벽 2시까지 시험 준비 중인 학생들을 지도하고 온 나는 아이에게 빵과 우유를 먹였다.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학교에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아이는 비를 쫄딱 맞고 학교에서 가서 지도위원 선거에 나갔다. 나중에 반 아이 엄마들한테 그 얘기를 들은 나는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아이들 앞에서 선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를 챙기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 쫓겨 잊어버렸다. 초등학교에서 걸음을 멈췄다. 98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학교 쪽으로 흘끔거렸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로 올라가는 길에는 햇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가방을 맨 아이들이 띄엄띄엄 올라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빛 속에서 걷고 있는 듯했다. 만약에 빛에게 뿌리가 있다면 그 뿌리까지 들여다보려는 듯 나는 햇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맑고 강한 햇살이었다. 오래 햇빛을 받고 있으면 몸이 스르르 녹아내릴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우리 생이 저렇게 투명한 빛으로 가득 찬다면 빛의 반대편에 있는 그늘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아이가 떠올랐다. 지금 아이는 어둠뿐인 길을 외롭게 걸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온통 어둠뿐인 길을 걷다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다. 아이는 지금 온몸으로 살아갈 길을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자신을 존재를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날따라 집으로 전화를 거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보통 사정이 생겨 퇴근이 늦어지면 그에게 아무 일도 없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날따라 학생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성적이 뚝 떨어진 남학생 엄마가 한 시간 넘게 하소연을 했다. 머리가 띵했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떨어진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더 이상 그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난장판이 된 거실이었다. 거실에 놓여 있던 탁자가 베란다 쪽으로 밀려 있고 한쪽 구석에 세워 둔 이젤과 유화그림, 스탠드가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고 라면 가닥과 국물, 소주병과 술잔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TV는 혼자 떠들고 있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아이의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거였다. 아니,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예측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마음이 늘 불안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말 그랬다면 그건 아이를 방임한 것이었다. 진실을 외면한 것이었다. 나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틀 정도 입원해서 치료를 하면 되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나는 심한 허기를 느꼈다. 아이는 주사를 맞고 잠이 들었다. 나는 병원 매점으로 갔다. 뭐라도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빵과 우유를 먹는데, 눈물이 주르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술에 취해 광기를 부리는 남자와 겁에 질려 발발 떨고 있는 아이를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심장에 박혀 있는 검은 돌멩이처럼 단단해진 원망이, 깊은 어둠의 뿌리에 휘감겨 있는 아이의 분노가 내게로 전해져 왔다. 그동안 아이가 살고 있었던 곳은 사람들이 살 수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고 삭막한 바람이 부는 낯선 곳이었다. 잊어버려. 살다보면 말이야. 내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쁜 일을 당하는 경우도 있어. 나는 잠을 자고 있는 아이한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분명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내 귓속에서 웅웅거렸다. 그날 이후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미안해.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나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말들이 혓바닥에서 춤을 추었다. 왜 그랬어? 아이가 그렇게 싫었어? 아이가 말대꾸 했다고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손찌검을 해? 나쁜 놈, 넌 정말 나쁜 놈이야. 날 생각했다면, 날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내 딸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을 거야.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너무 화가 나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 물건은 그냥 버려. 그가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그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그의 말을 들었다. 당신한테 정말 미안해.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어. 나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어. 내 머릿속에서 미친개들이 날뛰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 강의 시간이 줄어들고 전처가 재혼하는 것 때문에 술을 마셨지만 아이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었어. 그냥 내 자신에게 화가 났어.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고 끝장내고 싶었어. 아무래도 그날 귀신에게 덮어 씌인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나는 한참동안 휴대폰을 들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이 땅 속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 의식이 혼미했다.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던 내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이가 그 지경이 됐는데도 그를 보내 줄 마음이 없는 내 자신이 바보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와 나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싸늘한 시체. 아무도 울지 않는 삭막한 장례식장. 비정한 엄마에 대한 신문기사. 깊은 배신감에 상처 입은 아이.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상상을 하고 또 했다. 도서관 휴게실에 비치된 열 종류가 넘는 신문을 읽고 디지털 정보실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5층 열람실로 갔다. 심리학에 관한 책을 꺼내 창가에 앉았다. 얼마 전에 새로 지은 이 도서관은 벽 한 면이 전면 유리창이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와 모래사장, 저 너머 산이 그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책의 내용은 외상의 종류와 그것의 치료법에 관한 것이었다. 책을 읽다가 바다를 보다가 했다. 그리고 바다를 침대 삼아 자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도서관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를 떠올렸다. 불과 십 분 정도의 거리지만 그 공간에 있는 사물들은 무수했다. 나는 그 사물들을 거쳐 바다까지 가야했다. 문득 아이의 집까지의 거리를 떠올렸다. 버스로 삼십 분이면 가는 거리인데도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물들을 어루만지며 아이에게로 가고 있는 내 자신을 떠올렸다. 아이와 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병원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이는 너무나 여리고 힘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가냘픈 손목이 안쓰럽고 야윈 어깨가 불쌍했다. 열다섯 살이지만 아직 아이는 어린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기분 좀 어때? 나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내내 궁리했지만 딱히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 저녁 무렵이었고 서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진하게 퍼져 있었다. 옅은 어둠이 병실에 깔렸다. 작고 볼품없는 고요 속에서 사람들의 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안해. 나는 아이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말했다. 아이의 손을 기도하는 것처럼 잡고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이는 내버려두면 저절로 커는 줄 알았다. 아니, 바쁜 엄마를 이해하고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결하고 있는 줄 알았다. 있잖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지. 아이가 있음으로써 내가 존재하고 아이와 내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말하려고 애썼다. 다음날 나는 아이에게 초콜릿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생전 처음 만들어 본 것이었다. 제과점에서 아이가 먹을 만한 빵을 고르다가 문득 내 눈길이 케이크에 가서 닿았다. 아이가 자신의 생일 때 초콜릿 케이크를 한꺼번에 먹어치우던 생각이 났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것을 맛있게 먹는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좋았어. 나는 인터넷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만드는 법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재료를 샀다. 생크림, 버터, 스위트 초콜릿, 박력분, 코코아 가루. 케이크 만드는 순서를 몇 번이나 읽었다. 케이크를 만들면서 나는 삶을 생각했다. 이스트와 밀가루의 비율을 지나 반죽덩어리가 케이크가 되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밀가루가 케이크가 되는 과정이 아이가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했다. 맛있지? 케이크를 한 조각 먹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가 고팠는지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푹푹 퍼서 한 입에 넣고 우물우물 먹었다. 이거 봐. 케이크는 말이야. 이렇게 먹어야 해. 나는 포크로 맨 위부터 맨 바닥까지 한 번에 찍어내려 모든 층을 한꺼번에 입안에 넣었다.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 나. 아이는 얌전하게 나를 따라 먹었다. 뜻밖이었다. 순간 눈물이 났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마트에서 사온 식료품을 선반과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케이크 재료는 식탁 위에 꺼내 놓은 뒤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알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아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아이의 옷장과 침대, 책상, 화장대는 예전과 똑같은 위치에서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잠근 채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아이에게 문 열어! 나는 소리를 지르곤 했다. 왜 문을 잠그고 있어? 빨랑 문 안 열어! 문손잡이를 드라이브로 도려낸 적도 있었다. 그때 아이는 방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아이가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있을 것 같았다. 옷장과 화장대 거울, 책상,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침대 밑은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옅은 어둠이 고여 있는 침대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침대 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지난 몇 개월 사이 줄어든 체중 탓인지 몸이 쉽게 들어갔다. 스멀스멀, 뭔가가 몸에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옆 눈으로 살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곤충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건 바퀴벌레와 비슷했다. 아니, 바퀴벌레였다. 내 몸으로 모여든 바퀴벌레들이 이상하게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쫙 벌렸다. 내 안의 음습한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내 입에서 내 귀에서 내 눈에서 내 음부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그리고 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바퀴벌레였다.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바퀴벌레들이 우글우글 내 몸을 기어 다니면서 몸집을 불렸다. 한 마리의 거대한 바퀴벌레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화다닥 바퀴벌레들이 일시에 도망을 갔다. 서너 마리가 손등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용기가 대단한 놈이었다. 손을 휘저었다. 바퀴벌레가 떨어지지 않았다. 탁, 때려서 죽이고 싶었지만 손으로 떼어냈다. 순간적으로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바퀴벌레는 혐오스런 존재가 아니다. 바퀴벌레는 혐오스런 존재가 아니다. 바퀴벌레는 혐오스런 존재가 아니다. 나는 케이크 재료들을 난감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막상 여자를 오라고 했지만 케이크 만들 일이 걱정이었다. 잘 될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뭐 그래도 한 번 해보는 거다. 용기를 냈다. 볼에 생크림을 붓고 중불에 올려 데우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아랫집 여자였다. 잘 왔다면서 호들갑을 떨며 여자를 집안으로 끌었다. 일단 여자에게 커피를 주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서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요. 버터와 잘게 다진 스위트 초콜릿을 볼에 넣은 뒤 불을 끄고 골고루 저어주면서 말했다. 그런데, 남편이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물었다. 여자는 의외로 순순하게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러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늘 화를 내고….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내가 싫을 수도 있고 어릴 때 받은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나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 때문일 수도 있고…. 한참 뜸을 들인 여자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서 먹어요? 아, 네. 딸이 케이크를 좋아해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나는 능숙한 프로처럼 여자에게 케이크 만드는 법을 말해 주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온 여자는 자신이 도울 일이 없냐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거라고 말했다. 케이크 만드는 동안 기분이 좋아졌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초콜릿의 냄새도 좋았다. 밀가루를 반죽할 때의 느낌도 좋았다. 어느새 온몸에 적당히 배여 있는 달콤한 냄새도 좋았다. 나는 여자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했다. 여자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투명한 빛방울 같은 둘의 웃음소리가 공간에 촘촘하게 박혔다. 나는 손으로 웃음소리를 잡았다. 케이크가 실패할 조짐이 보였다. 나는 여자에게 따뜻한 웃음을 보내면서 말했다. 음식의 맛은 정성이 맞죠? 순간 여자의 얼굴빛이 쓸쓸하게 변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나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난 지금까지 누군가 정성껏 해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엄만 먹고살기에 바빠서 내가 집안일이랑 밥을 해야 했거든요. 여자가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완성된 케이크는 엉망이었다. 납작하게 찌그러져 케이크인지 주물럭거린 초콜릿 덩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창의성이 맘껏 발휘된 작품이네요. 여자는 도리어 날 위로하는 듯 말했다. 그렇죠? 역시 내 솜씨는 알아준다니까요. 우리는 킬킬거리며 초콜릿케이크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마트에서 사온 와인을 유리잔에 절반쯤 따른 뒤 쨍, 하고 잔을 부딪쳤다. 쨍, 맑은 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쨍, 경쾌한 웃음소리가 온 집안을 채웠다. 생각보다 케이크는 맛있었다. 포크로 깊이 찍어 한 입에 넣자 달콤한 맛이 혀끝에 번졌다. 나는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에게도 케이크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지금 이 순간, 아이가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케이크를 먹기 위해 아이가 집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초콜릿 케이크를 찍었다. 액정 화면 속에 찍힌 케이크의 모양이 이상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사진을 바라봤다. 커다란 접시에 납작하게 엎드린 모습과 진한 갈색빛이 꼭 거대한 한 마리의 바퀴벌레처럼 보였다. 한참 신기한 눈으로 보다가 사진을 아이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오늘 초콜릿 케이크 만들었어. 먹으러 오지 않을래?  
60 미원집 외1편/윤임수
편집자
4879 2010-09-30
10.10월 5호 시 미원집 그 역 앞에 있는 미원집을 나는 사랑했네 울컥, 막된 소리를 높이다가 바닥에 막걸릿잔을 털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진정 아름다움을 원했고 아름다운 것들은 왜 그리도 멀리 있는지 새벽 찬바람을 붙들고 가슴 아파했네 그 역 앞 미원집 이제 사라지고 뚝딱, 근사한 건물 하나 들어섰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미원집 잊지 못하고 마음에 근사한 건물도 짓지 못하네 나는 진정 아름다움을 원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직도 멀리 있기 때문이네 대롱대롱 그때 함석지붕에서 미끄러진 늙은 호박이 마른 꼭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그때 우마차 끌고 장에 가신 아버지가 초승달에 기대어 터벅터벅 돌아오던 그때 저녁 밥상에서 날아오른 푸성귀들이 마당 빨랫줄에 천연덕스럽게 걸리던 그때 삼십 촉 전등 아래 구판장 외상장부가 축 늘어진 고무줄에 매달려 있던 그때 대롱대롱 그때 감나무 거미줄 아침이슬에 자꾸만 눈이 가던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