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2


백제 여인네의 하얀 치마가 바람이 날린다

정복자 당나라 놈들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짜릿한 죽음을 택한

백제 여인들의 하얀 영혼이 가을을 수놓는다

시간이 갈수록 되살아나는 치욕

패망한 나라의 역사는 어차피 쉰 밥그릇

곰팡이가 슬도록 내버려둔다지만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아비 잃고……

남자의 씨를 말려버린 전쟁에서

정복자의 먼 말발굽소리보다 먼저

백마강에 몸을 던진 하얀 영혼들이

삼천궁녀, 의자왕의 눈요깃감으로

날조된다 해도 억울할 것도 없지만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침묵의 역사가 서러워

진실을 말한다 해도 곧이듣지 않을 현실이 무서워

드넓은 가을 하늘을 향해

하얀 웃음 흘리며

소복(素服)의 춤을 춘다


죽은 역사를 추모하기 위해

패망한 백제가 바람 속에서 일어선다


 

 

안경을 닦으며


세상은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변덕스런 다초점 안경의 농간에

흔들리기 시작한 세상은 멀어져갔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만큼이나

눈 감을 줄 모르는 안경알은

먼지며 빗물이며 손때까지 묻어

개기름 번들거리는 얼굴만큼이나 탄력을 잃고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멀리한 세상은

흐린 기억만큼이나 아득하기만 하여

폐허의 잡초들 속에 파묻혀버렸다

이제 뼈마저 찾을 수 없는

무덤 속 주인 없는 영혼처럼

하얗게 늙어가는 안경닦이를 찾아내어

아직은 마르지 않은 찌든 입김으로나마

세상을 향해 소리 없는 대화를 시작한다

안경을 닦으며


세상을 향한 마지막 나의 창

안경이라도 깨끗이 닦을밖에

안경알이 맑아질수록 흐려 보이는 세상일지라도


억새 3


하얀 평복으로

뒤주 속에 갇힌 사도세자의 영혼

아버지 영조와 장인 홍봉한의 눈을 피해

수원성 마른 들판에 섰다


아내에게마저 배반당하고

물 한 모금 없이

한여름 여드레를 견딘 강인함으로

인왕산을 바라보며 하얗게 웃는다

14년 동안 눈물에 잠긴 관 속에서

빌고 빌었던 아들이 드디어 용상에 오르고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 한마디에 하얗게 얼었던 노론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작당을 하며 웃고 있으리니


아들마저 재위 24년만에 독살당한

250년의 눈 먼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는가

죽은 사람에게 인자하고 넉넉하듯

역사도 후하게 장사지내 버릴 것인가


자신의 흰 옷 위에

새 역사를 쓰라고

사도세자의 하얀 영혼이

수원성 남문 위에

억새로 깃발로 소리친다

 

 


이성준

1962년 제주 조천 출생


시인, 문학박사


2006년에 시와창작 신인상(시부분)을 수상했고


시집 <억새의 노래>, <못난 아비의 노래>를 출간했고


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