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바우 박치대를 기리며




1. 박치대의 생애



  박치대는『지크미』,『밀도살꾼』,『토종』,『잡종』,『고삐』,『21세기』등 초기엔 토속적인 단편들을 통해 농민들의 피폐해가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천착해왔다. 아울러 도시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우리 이웃의 문제와 사회적 갈등을 차분한 문체로 펼쳐 호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기류』,『아 백두여』,『올가미 상․하』,『부평초 상․하』,『대역 상․하』,『철쭉으로 피어나리』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정의롭지만 역사의 변방에 짓눌려 고통 받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대역 상․하』는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하려다 일경에 체포돼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 운동가이자 사상가,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의 생을 다룬 장편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철쭉으로 피어나리』는 박치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이다.


 박치대는 1946년 예천 금당실에서 2남 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박노문으로 금당실의 함양 박씨 문중의 문장 노릇을 하는 지역의 몇 안 되는 마지막 선비였다. 따라서 박치대는 어렸을 때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배우며 자랐다. 6․3사태 때 현실에 대한 절망감으로 낙향을 시도 대학을 중퇴하게 되었다. 가정을 꾸린 뒤에는 중등학교 영어과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영어 교사가 되었다. 그 뒤 문경여중과 예천여중으로 와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몇 달 앞두고 2009년 2월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2. 박치대의 문필활동


 박치대의 문필활동을 살펴보면 예천의 ‘한내글모임’의 초창기 멤버로서 좌장 역할을 하였고 가까운 문학 단체나 먼 곳의 문학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대구․경북민족문학회’와 그 후신인 ‘경북․민족문학작가회의’의 회원으로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다. 중앙 문단보다는 지역 문학 활성화에 심혈을 쏟았던 것은 박치대가 늘 한내와 고향을 변방이 아닌 자신의 중심에 두고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의 상업성을 거부하였다. ‘민족’, ‘역사’, ‘민중’, ‘의리’ 등이 그의 문학을 대변하는 화두였고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였다. 특히 아나키스트이며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열 의사’와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의 만주와 중앙아시아에서 고난을 겪는 민족의 운명과 독립운동을 천착하기도 했다. 그는 박열의 삶을 작품화하기 위해 문중사람들과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외 자료는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많이 열람한 것이라 이야기한 바가 있다. 소설 『아 백두여』의 마지막에 붙인 ‘쓰고 나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주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만주’라는 이름을 자주 들으며 자라 왔다. 콩밭을 매는 할머니를 따라 들에 나가 있노라면 쉴 참에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리시곤 했다.


 “만주 고모가 있었으면 너를 업고 다닐 텐데.”


 누님이 없었던 나는 고모님들의 등에 업혀 마을을 다니곤 했다. 친고모, 종고모 합쳐서 대여섯씩 모여 앉으면 반드시 만주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해심이 있고 마음이 넓은 만주 고모가 있었더라면 집안의 분위기가 한결 좋았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나는 광주 , 부산, 대구, 서울 등의 이름보다는 만주라는 이름을 훨씬 자주 들었다. 고모님들이 살던 곳을 고향이라 생각했다면, 만주 고모님이 살던 곳을 제2의 고향이라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자라서는 아버지가 만주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들었다.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등을 거쳐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중국 대륙을 무대로 활약하던 군웅 호걸들의 이야기만큼이나 내 어린 가슴에 박혀 들어 왔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역사라는 것을 배우면서 나는 만주에 대한 것이라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고, 그 뒤로도 만주에 관한 자료라면 무턱대고 모아 두곤 하였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을 어떤 형태로든 나타내고 싶은 충동이 나이를 먹으면서 크게 일어났다. 그것이 이렇게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


 그런데 막상 책으로 묶어져 나온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앞선다. 내 서투른 솜씨로 얼마나 내 마음을 그려낼 수 있을까? 광활한 만주 천지에서 나타나거나 숨겨진 무수한 역사의 숨결을 어떻게 감히 내가 접근해 볼 수 있을까.


 이제까지 만주에 관한 자료라 해 봐야 단편적이고 한 쪽 부분밖에 나타난 것이 없다고 하겠다. 다른 한 쪽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금지되거나 특수한 집단에게만 독점되어 왔다. 그러한 가운데 1930년대의 격변기를 무대로 하여 이 글을 썼다. 무력 항일 투쟁의 역사에서 민족 세력과 공산 세력의 알력이 가장 극심했던 그 시기를 무대에 올렸다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어떤 편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입장에서 필을 잡았다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아무쪼록 많은 뜻있는 분들의 꾸중과 채찍질이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을 만주 고모님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올 여름에 세상을 떠나신 만주 고모님! 지금 만주 길림에 살고 있는 고종 형제 이장춘, 광춘의 앞길에 신의 보살핌이 있기를 빈다.


1989년 10월 박치대


3. 작품 속에 나타난 반제국주의자 박열



 “민중은 우리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 할지니라” 이 글은 단재 신채호가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에 남긴 글이다. 당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 인사들을 향하여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망이 있으랴”며 일갈한 신채호는 구체적인 폭거를 다음과 같이 열거 했다.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찰꾼, 매국노

4. 적의 일체 시설물

(위의 4가지를 폭력, 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로 열거)


소설 『대역 상․하』(월드컴미디어;2000년 10월15일) 는 수난의 민족사에 자긍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통쾌하고 매력적인 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시 되살려 놓은 것이다. 박열을 흔히 아나키스트로 규정한다. ‘아나키즘’은 국가의 존립 자체를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무정부주의’로 해석하거나 국가가 없는 혼란 상태를 일컫는 말로 생각하지만 ‘아나키즘’의 본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박열이 소속했던 ‘의열단’ 조직의 경우 무력적인 충돌을 통해 반제 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폭력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반제국주의’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일제 식민 통치 35년은 우리 민족사에 나라를 빼앗긴 고통 못지않게 수많은 지식인들을 친일 변절자로 만든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변절의 역사가 8ㆍ15광복으로도 끝나지 않고 그 후 5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잔재들이 남아 역사의 진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을 돌이켜보면 독립지사도 많았고 애국지사도 적지 않았지만,  박열(朴烈) 열사만큼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까지도 감동시킨 매력적인 독립운동가도 흔치 않았다.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暴殺)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열은 일본제국의 대배심원 법정에 서면서,


“나 박열이 법정에 서는 것은 피고로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해서다. 따라서 재판관이 일본 천황을 대변하여 법의(法衣)를 입고 나오니, 나 박열은 조선의 전통예복을 입겠다”.


는 주장을 관철시켜, 사모관대(紗帽冠帶)에 부채까지 들고 재판을 받은 그 기개와 당당함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박열 열사는 행동하는 독립운동가라 하기에는 정치․경제․철학․문학 등에 두루 통달한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고뇌하는 지식인이라 하기에는 행동하는 혁명가였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기에는 너무나 휴머니스트였으며, 휴머니스트의 우유부단함을 연상하기엔 너무나 단호한 역사의 심판자였다. 박치대는 이러한 박열의 정신을 그려내고자 수십 년간의 자료수집과 각고의 집필로 만든 소설이며 작가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애정과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이다. 박치대는 박열을 통해 여느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 인권이란 사상적 바탕 위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은 물론, 천황제의 허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일본 사회내부의 혁명적 변혁까지 기대했던 사상가를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그의 정치철학과 조국의 미래, 민족이 가야할 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일어판)을 읽어보면, 박열 열사가 단순히 행동만 앞세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준비된 민족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박열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정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나게 된다.


 해가 바뀌고 박열은 무척 바쁘게 움직였다. 일월에 신조선건설동맹이 결성되어 박열이 위원장으로, 이강훈이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삼월에는 옛 동지들과 후원회의 도움으로 간다구에 있는 공회당에서 가네코 후미코 추도회를 개최하였고, 김구의 부탁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발굴 본국으로 송환하여 칠월에 반장 행사를 하였다. 시월에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고, 십이월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도쿄에 들른 이승만과 회담을 하는 등, 여러 가지 큰일들을 치러내느라고 제대로 쉴 날이 없었다. 22년이 넘는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나온 사람으로 믿기 어려운 활동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박열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준 일이 있었으니, 바로 장의숙 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장의숙은 도쿄여자 대학에 다니면서 국제신문에 근무하던 여인인데, 박열 석방 1주년을 맞이하여 박열에 대한 특집을 내려고 그를 면담하러 찾아갔던 것이 인연이 되어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박열과 결혼(1946년 재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박열과는 열여섯 살이나 차이가 났다. 이처럼 남다른 사랑과 투쟁의 길은 길었다.


4.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동지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가 옥중에서 죽은 날이 오면 박열은 하루 종일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방에 들어앉아 묵상에 잠겨드는데, 그럴 때면 장의숙도 그 날 하루를 엄숙한 가운데 추모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가네코의 정신에서 체 게바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체 게바라가 다른 혁명가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되는 것은 그가 언제나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혁명의 최일선에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속에 그 실상을 깨닫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던 것처럼 가네코도 천황제와 제국주의의 실상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을 직접 겪고 이해한 것이 그녀를 혁명의 일선으로 나가게 만든 이유가 됐다. 더군다나 일본 여성과 함께 조선 남성이 범행을 공모했다는 사실은 식민 지배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한 체 게바라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것처럼 가네코도 박열과 함께 천황을 폭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첩경이라고 본 것이다. 체 게바라에게 카스트로라는 동지가 있었다면 박열에게 가네코가 있었다. 가네코의 불우한 환경은 곧 국적이나 성별을 뛰어넘어 인간성 회복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이는 박열의 정신과도 통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과도 일맥상통했다고 볼 수 있다. 가네코는 충분히 만국의 혁명가의 기질을 드러낸 셈이다. 박치대는 앞으로 남은 일은 가네코 후미코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쓰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민족과 국가의 틀을 벗어나 인류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힘겹게 싸웠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치대의 생각이었다.


 당시 식민지하에서 민족성을 통제하는 정치적, 사회적 억압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항일운동의 한 몫을 담당했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뒤 분단체제가 되면서 이승만과 김일성, 두 정권 모두에서 배척받았던 인물들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박열이다. 1949년 9월에 박열은 일본에서의 모든 활동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박열은 북으로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참 자유를 찾자는 이상으로 일생을 바쳐 싸웠던 그의 높은 뜻도 남북 분단의 벽에 가려져 빛을 잃어 갔다. 사반세기의 세월 속에 이름조차 잊혀져가던 박열이 1974년 1월 17일 사망했다.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회장직을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은 박열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히게 되었다. 명동 YMCA 대강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이은상의 추도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들이 의사의 영전에 추도의 제전을 바치는 것은 한갓 의사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실로 의사의 정신과 기백과 이상을 계승, 실천할 것을 다시금 다짐하는데 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의사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민족의 통일 염원과 인류 평화의 큰 목적을 향하여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라고 이은상은 절절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곧바로 복원 되지 못하고 15년의 세월이 더 흘러서 1989년 3. 1절에 가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게 되었다.


 ‘’체 게바라는 인간불행이 불의不義 때문이라고 보았고 간디는 진리(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無知 때문이라고 보았다. ‘체 게바라’는 불의의 대상을 공격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고, 간디는 무지와 탐욕의 병을 치유하여 변화하고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가네코는 목적을 위해 분노, 증오, 음모, 술수가 정당하다고 보았다. 국가나 인종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던 셈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네코는 박열보다 더 진일보한 생각을 가진 여성이었다. 가네코를 독립유공자로 추대하려는 박치대의 생각이 미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급작스러운 사망을 접한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의 명복을 다시 빈다.(위초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