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우거(有無寓居)> 

 

 신대원


  뒷산자락에 솔바람 일고 아랫마을 누구네 집에서 저녁 태우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면, 가끔씩 난 ‘그리움’이라는 말마디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전기도, 전화도 없었던 고향집엔 이렇듯이 오늘처럼 마른나무로 저녁을 태우고 호롱에 석유를 부어 온 밤을 밝혔었다. 그럴 즈음 마을에는 온통 모깃불 타는 향내가 동구 밖 어귀 당산나무 가지를 흔들어대고, 놀란 소쩍새의 구슬픈 하소연은 하염없이 이승의 하늘을 날기도 했었지. 그러면 소쩍새 울음소리에 잠이 깬 별들은 우수수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유무우거(有無寓居)>- 얼마 전 파르스름한 문종이에 작은 붓으로 먹물을 묻혀 적어 두었다가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설주 위에 떡하니 붙여놓은 글귀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깃들어 산다는 뜻이다. 이미 사라져버려 없는 것들이 기억으로 되살아나 비로소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언제까지나 있어야만 해야 할 것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없는 것이 되고 마는 현실이다. 우리들의 현실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뒤엉켜 사는 시간이고 공간이지. 어쩌면 ‘유무우거’라는 말은 인간살이의 이상(理想)이고 꿈인지도 모르겠다. 이상이고 꿈이라면 그것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고 풀지 못할 신비(神秘)일 것이다. 수수께끼이고 신비라면 그것은 그저 동경(憧憬)할 수밖에 없는 ‘그리움’이 아닐까? 사람들은 있기를 바라면서 있는 것들은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없는 것을 다시 초대 하려고 애를 쓴다. 하늘의 계획하심에 따라 흐르고 있는 낙동강의 물길을 가로막고, 가로막은 물길을 한줌도 안 되는 인간이 다시 흐르게 한단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용쓰지 않아도 좋을 것을 굳이 용쓰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모두 참으로 똑똑한 멍청인지도 모를 일이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서로 기대어 사는 시간이며 공간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다. 어린 시절의 고향마을과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이 함께 있는 건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리움’이라는 ‘신비’가 내 곁에서, 내 속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문학과 과학이 만나고, 겉과 속이 함께 살며, 무늬(文)와 바탕(質)이 공존하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어울려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지 않더냐? 공자는 이를 두고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했다. 대동(大同)의 세상,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상이 곧 있는 놈과 없는 놈이 거기에 함께 깃들어 사는 거지. 그건 신비이고, 동경이고, 수수께끼이며, 그리움이며, 이 그리움이 끝에 가서는 희망으로 되는 게지.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저마다의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움이 없다면 눈물 흘릴 일도 없고, 견디어내는 인내도 없어지고, 빙그레 미소 짓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사람은 그리움이 있어야 사람이다. 거기에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깃들어 살고, 기억과 현실이 공존하게 되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할 수 있고, 사랑을 나누고, 정의와 평화를 일구고, 마침내 참 행복을 꿈꾸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솔숲에 바람 인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질수록 바람은 더욱 나의 오감(五感)을 두드려댄다. 아랫마을에 피어오르던 연기도 멈추고, 떨어지던 별자리마다엔 오색(五色)의 그리움이 찬란하다. 그 찬란한 그리움들이 살아서 이승의 하늘을 흐른다. 흘러서 딱딱하게 굳고 바삭 마른 사내의 가슴에 강물로 스며들어 상념(想念)의 시간이 되고 공간이 된다. 이럴 땐 누구라도 그리워지는 법이지. 없는 이라도 찾아오면 가난한 술잔이라도 기울이고 싶다. 돌아오는 길, 문설주 상단에 어설프게 적어 놓은 <유무우거>라는 글귀가 유난히도 반짝인다. 반짝이는 건 아마도 그리워하는 이의 그리움일 것이다.

 

신대원  (천주교신부, 들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