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여행



아내는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하루 전 아내가 3박 4일로 여행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더구나 허락을 받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하지만 내심 아내가 여행이라도 떠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도 했기에 속마음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내에겐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큰아들에 이어 작은아들까지 원불교로 출가하게 되자 아내는 도무지 사는 의욕이 없었다. 저러다 큰 병이라도 나지, 싶었다.

아내는 그렇게 여행을 떠났고 그 후 나는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꼭 집어 이거다 싶은 것은 없었고, 막연히 다가오는 불안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간혹 아무 이유 없이 머릿결이 쭈뼛 솟아오르고 그러면 나는 이내 아내를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요일인 오늘 점심 무렵에도 그랬다.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느지막이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밥을 푸는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릿결이 쭈뼛 서는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그리움이었고 불안감이었다. 단순한 아내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야 아내가 여행을 떠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리움이라니. 아내는 어제 떠났기도 했거니와  아내가 자릴 비운다고 해서 그리움을 느낄 나이도 아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웬.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마치 몸에 묻은 먼지를 털듯 가볍게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나에게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불시에 나를 습격하곤 했다.

이상한 점은 있었다. 예전에는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 집을 비운다거나 하면 꼭 곰국을 끓여놓던지 아님 밑반찬을 넉넉히 해 놓고 갔었는데 이번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홀연히 떠난 점이었다. 두 아들의 출가 후 정신이 없어 그러려니 했지만 기분이 영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나는 잠옷 차림 그대로 거실을 뒹굴었다. 평소 같으면 아내와 씨름하며 잠을 청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아내가 없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애들이 거처하던 방에 들어가 본 적도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고 밤 11시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고 휴일엔 그동안 밀린 잠에 곯아떨어지니 집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큰아들이 쓰던 다용도실 옆방 문을 열었다. 평소에 내가 하숙생 같다는 아내의 말은 차지하고서라도 두 아들이 출가한 후에도 두 방을 아들들이 쓰던 그대로 놔두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역시 큰아들의 방은 예전에 쓰던 그대로였다. 순간, 나는 예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불안감을 느꼈고 잠시 문손잡이를 잡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방을 찬찬히 들러보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붙어 있는 책상과 책상 오른쪽의 책장은 예전 그대로 있었고 책장속의 책이 빠져 나간 자리가 좀 비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책상위의 스탠드등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책장 옆의 일인용 소파 또한 그대로였다. 소파 옆의 스탠드 옷걸이와 벽걸이 옷걸이만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출가하기 전 간사 근무나 대학 다닐 때 가끔 집에 들르면 자기도 했지만 방은 사용하고 있던 것처럼 깨끗했다. 아마도 아내는 며칠마다 방을 청소했던 게 틀림없었다.

가끔 아내와 난 그런 소소한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나는 방을 깨끗하게 치우기를 원했고 아들에 집착이 강한 아내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아내는 아들의 출가가 자신의 몸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방을 나와 작은아들 방으로 갔다. 작은아들 방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고등학교 때 쓰던 과목별 수능 문제집이 그대로 책장에 꽂혀 있었다. 책상이랑 책장도 예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일인용 침대 옆에 있는 옷걸이에 아들의 옷이 걸린 게 아니라 아내의 옷이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침대에는 작은아들이 덮던 이불이 깔려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작은아들이 누워 있었던 듯 했다. 물론 지금은 아내가 쓰고 있었다. 아내는 큰아들이 출가한 후에는 큰아들 방에서 가끔 자더니 작은아들이 출가 후에는 작은아들 방에서 몇 번 잠을 자다 아예 그대로 눌러앉았다. 나의 불만스런 기미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쓸쓸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내가 여행을 떠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전에도 내가 몇 번이나 권하던 것이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침대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집어 들었다. 짙은 검은색 직모였다.

염색 좀 하고 파마도 좀 해봐.

내 목소리가 귀에서 웅웅거렸다. 아들들이 출가 전에는 항상 밝던 얼굴이 출가 후에는 짙은 어둠의 그늘이 가실 날이 없을 때 어느 날 아침 한 말이었다. 60살 가까운 나이에 아직도 생머리를 하고 있다는 게 왠지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때였다. 또다시 예의 그리움과 불안감이 덮쳐왔다. 머리카락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이게 마지막이지 싶었다. 다시는 아내를 못 볼 것 같다는 방정맞을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여행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거실로 나와서도 여전히 가슴은 쿵닥쿵닥 뛰었다. 실체가 없는 불안감에 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두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화를 해 볼까.

나는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들고 망설였다. 잘 여행하고 있는지, 어디 몸 아픈 데는 없는지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느냐고 내 스스로 타일렀다. 아내가 여행을 떠난 후 여태껏 전화 한 통 없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나는 더욱 더 초조해졌다. 예전 같으면 아내는 몇 번이나 전화를 했을 터였다. 밥은 안 굶고 잘 먹고 있느냐는 둥 미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안부를 물었을 터인데 어제 새벽에 집을 떠난 후 지금껏 전화 한 통 없었다. 나는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가 닫았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내가 어디를 여행하고 있는 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단지 여행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어디 먼데라도 가면 꼬치꼬치 캐물었고 나 또한 상세하게 일러 주었듯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아내의 여행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혼자 갔는지. 누구랑 동행했는지. 여행사를 통해 갔는지. 바다로 갔는지 산으로 갔는지. 기가 막혔다.

나는 부리나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지거나 화를 낼 작정은 아니었다. 그냥 여행 잘 하고 있는지, 어딘지만 물어 보려고 했다.

반야바라밀다심경관자제보살행심바라밀다……

어이없게도 아내의 휴대폰 벨소리인 반야심경이 작은아들의 방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반야심경 벨소리는 책상서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하얀색의 휴대폰은 나 여기 있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나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뱉으며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거실로 나와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제 누구한테 물어보지?

좀 더 시간을 갖고 냉정하게 생각하자 싶었다. 눈을 감았다. 휴대폰을 일부러 가져가지 않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실수로 가져가지 않았다면 먼저 연락이라도 했을 것이 아닌가. 갑자기 아들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출가를 한 후 아내와 달리 나는 예상보다 크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인들이 너무 좋아서 선택한 일이고 속세에 있는 것보다는 몸과 마음이 더 편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칠 듯이 보고 싶다니. 아들들에게 전화를 할까 싶어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출가한 아들들은 조심스러웠다. 큰아들은 교무로서 부산 동래 교당에 보좌교무로 있고 작은아들은 부교무로서 전주교당 보좌교무로 있었다. 출가를 했다고 해서 본가와 인연을 끊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가 왔다. 결혼을 한 큰아들은 일 년에 한두 번은 집에 다녀갔고 결혼을 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는 둘째아들은 전화는 자주 왔지만 집에는 잘 다녀가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쪽에서 전화를 하지 않는 게 도리이다 싶어 전화를 먼저 하지는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작은아들에게 문자를 넣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큰아들보다는 작은아들이 만만했다. 단축번호 3번을 누르고 문자를 넣었다.

시간 나면 전화해. 아버지 합장.

아무래도 일요일 오후라 오전 법회가 끝나면 오후엔 시간이 있을 것 같았지만 전화 걸기가 껄끄러웠다. 전화는 금방 왔다. 대뜸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빠의 문자는 처음 받아봤다고 웃으며 내 무안한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어느 교도와 사십구재 문제로 상담하고 있는데 바쁘긴 하지만 통화할 시간은 있다고 했다. 나는 빨리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혹 네 엄마한테 연락 있었니?”

“어머니요?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어요?”

작은아들은 대뜸 제 어머니 걱정을 했다. 큰아들이 출가할 때보다 작은아들이 출가할 때 더 유난을 떨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은 무슨. 그냥 엄마가 너한테 전화했었냐 싶어서 그렇지.”

“전화 안 왔어요. 어머니 집에 안 계셔요?”

작은아들은 무슨 눈치를 챘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아무 일 없다고 했다.  나는 그쯤에서 아쉬움을 접고 전화를 끊었다. 큰아들한테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작은아들한테 전화하지 않았다면 그 쪽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고 괜히 분란만 일으킬 것 같았다. 이제는 아내한테서 전화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어요.

아내는 큰아들이 교무가 되겠다고 했다면서 천정을 막연히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큰아들이 고1 겨울 방학 때였다.

교무?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라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큰아들은 미대를 가기 위해 학교에서 전 학년이 다하는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따로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글쎄 애가 말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니까.

아내는 팔을 베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미대는 안 가고? 왜?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비록 난 바쁘다는 핑계로 원불교를 다니지 않지만 교무의 생활은 대충 알고 있었다.

글쎄 모르겠어요.

아내는 돌아누운 채 나지막이 말했다. 마음이 심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때 나는 치기어린 호기심에서 그랬으리라 생각하곤 깊이 마음에 두지 않았고 하루를 끝낸 피로로 곧장 잠이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내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상태였던 것 같았다. 원불교 교무란 결혼은 하지만 스님에 가까운 성직자였다. 결혼을 하더라도 사가(私家)라는, 아내가 있는 집에는 일주일에 한번밖에 가지 못했다. 또한 가족이 있다 하여 가정생활을 꾸릴만한 봉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용금이라 하여 60여만 원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결혼을 하지 않는 교무는 30여만 원을 받는 것에 비하면 많이 받는 셈이었다. 그러니 교무 부인인 정토가 전적으로 경제생활을 해야 했고 교무는 그냥 교당에서 설법하며 혼자 생활하는 것이었다. 또한 6년마다 교당을 옮기니 평생을 가정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신앙과 함께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라 교무는 선을 통한 수행을 많이 했다. 교무 자체로 봐서는 수행만 정진할 수 있어 가정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좋을지 몰랐다.

그 주인가 아님 그 다음 주인가 아들을 방으로 불렀다.

미술학원은 다니니?

곧장 교무 얘기를 꺼내기 무엇해서 미술학원부터 애길 꺼냈다. 미술학원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다니고 있던 거였다.

지금은 안 다녀요.

아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중차대한 인생의 진로를 아비와 상의 한마디 없이 결정하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마음 굳힌 거냐?”

“예.”

“쉬운 길은 아닐 텐데.”

“보람 있는 길이잖아요.”

아들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교무 되려고 마음먹은 거니?”

아들은 원불교를 다닌 지도 2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내의 친구 소개로 아내와 두 아이들은 원불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토요일 오후 학생 법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했고 일요일 오전의 일반 법회에도 참석하였다. 아무래도 전생에 부처님하고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교당 교도들이 말한다고 아내가 말했다. 교무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합격하고도 2년 동안 간사 근무를 마쳐야 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간사 근무는 원불교 교당이나 복지기관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먹고 자며 교무들로부터 공부를 배우는 생활인데 한마디로 신앙심을 키우는 과정이었다.

“우선 교무님들의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고요. 얼굴을 한번 보세요. 교무님들의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요. 티끌하나 없잖아요. 얼굴은 살아온 세월을 보여준다는데 교무님들의 삶이 좋다는 뜻 아니겠어요? 일반 사람들의 얼굴과는 많이 비교되잖아요.”

신앙적으로 아직 미진한 아들은 단지 교무의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저렇게 살아야지 싶다고 했다. 또한 큰아들은 이미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나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 과정도 자유분방한 일반 대학과 달리 철저하게 계획되고 통제되는 생활로 신앙심을 키우고 수행을 하는 과정으로 짜여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들은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나 또한 아들의 진로에 반대하거나 하는 결코 그런 입장은 아니었다. 요즘처럼 취직도 잘 안 되는 세상에 평생 먹고 사는 걱정도 없겠다는 안일한 생각도 들었고, 물질욕이나 승진 그런 것에 목을 매느니 세속의 일을 초월하여 평생 수행하며 일반인들에게 설법하며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이 결코 평범한,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좀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고2의 큰아들은 학과 공부보다는 원불교 교전을 읽고 토요일엔 어린이 법회에 보조 교사로 참여하며 더 열심히 다녔다.

“아들 뜻에 따라야겠어요.”

아내는 그해 겨울이 다가올 무렵 결심을 굳힌 듯 했다. 교당에 열심히 다니기도 했지만 주임교무와 상의한 결과 아들은 성직자의 길로 가기에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아들을 원불교에 빼앗긴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굳이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는 아내는 웃으며 아들의 진로 선택을 축하해 주었다.

교당에서 아들의 서원(誓願) 행사가 있었다. 교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정식으로 서원을 세우고 법신불사은님께 봉고한다고 했다. 서원 행사라 해서 큰 행사는 아니고 일원상 앞으로 다가가 교무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주위에 밝히고 절을 네 번하는 것이었다. 교무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날은 나도 교당에 갔었다. 주임교무는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고 했고 설법을 통해 집안의 영광이라고 했지만 크게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무척 기뻐했고 떡과 과일을 준비했다. 아들이 기뻐하고 우선 아내가 흡족해 하니 마음이 안심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큰아들은 고3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부산 교구청으로 간사 근무를 위해 떠났다.

간사근무를 한다고 해서 출가한 것은 아니었다. 간사 근무 2년을 마치고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교무고시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면 정식으로 출가식을 하고 부교무가 되어 교당이나 원불교 소속 복지기관 등에 발령 받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론 출가했을 때보다 간사 근무 때가 오히려 제약이 많이 따랐다. 준 성직자나 다름없었기에 출가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큰아들이 서원을 세운 날 중학교 1학년인 작은아들이 제 형을 따라 덩달아 교무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냥 웃으며 그래 그래라, 했다. 제 나이에 알면서 말하겠냐 싶었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고3이 되도록 큰 갈등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꿈같은 시절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작은아들까지 교무가 되면 서운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정말이지 그때는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두 아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이제 부모 걱정 끼치지 않고 저희끼리 잘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부모의 몫을 다 했다는 안도감까지 들 정도였다.


이틀째가 되었지만 아내한테는 전화가 없었다. 모레면 이제 집으로 온다는 점 때문에 나는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아내를 기다렸다. 퇴근을 정시에 하고 집으로 왔다. 아내가 없는 집은 썰렁했다. 생소한 느낌이었다.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직장에 다니지 않아 퇴근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었던 아내의 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라면으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을 켰지만 평소에 보지 않던 터라 관심을 끌 만한 프로는 없었다. 텔레비전을 껐다. 갑자기 삶의 의욕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들들이 모두 떠나고 아내조차 자릴 비우니 이렇게 외롭다니, 생각해보니 코웃음 칠 일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집은 내가 태어난 집이었다. 이제껏 이 집에서 이런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 집은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아버지가 지었으니 나와 함께 살아온 셈이었다. 대학 다닐 때와 군대 갔을 때 몇 년 집을 떠났을 뿐 내 생과 함께 해온 집이었다. 또한 아이 둘이 태어난 집이기도 했다. 그동안 몇 번의 수리는 했지만 골격은 그대로였다. 이런 집에서 생경한 느낌을 받다니.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출가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커서 이 집에 살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되길 바랐다. 내가 태어나서 쭉 이 집에서 자랐듯 아이들이 그렇게 살 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나는 냉장고로 가 캔맥주를 가지고 와 뚜껑을 땄다. 두 번 벌컥 마시니 동이 났다. 명치께가 싸하니 신호가 왔다. 또다시 냉장고로 가서 캔맥주를 가지고 왔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아내도 이런 생경한 느낌을 받았을까. 손꼽아 보니 아내도 이 집에서 30여 년을 살아온 셈이었다. 아내는 큰 욕심도 야망도 없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없는 듯 있는 사람이었다. 없으면 불편하고 있으면 있구나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당신도 뭔가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애들이 다 나가면 당신 혼자 어떻게 살려고. 뭔가 취미 생활을 하든지 특기를 살리든지 해야지 원.

내게 퉁바리맞아도 아내는 손사래를 쳤다. 이대로가 좋다고 했다. 이만하면 좋은데 일부러 무슨 취미네 특기를 살리네 하느냐고 했다. 아내는 천생 청소하고 요리하는 전형적인 주부였다.     


추억거리를 만들어야 해.

아내는 작은아들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과도한 애정 표현을 하였다. 큰아들이 대학을 합격하고 간사근무를 떠났을 때만 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아내였다. 밑으로 작은아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큰아들이 원불교학과에 합격했을 때에는 레스토랑에 가서 큰아들이 좋아하는 돈가스를 먹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작은아들이 합격했을 때는 달랐다. 우선 교당 대각전의 일원상 앞에 있는 경상을 새 것으로 교체했다. 가죽나무로 만든 경상은 헌공함이 딸려 있는 고급이었다. 주임교무에겐 따로 법복을 사 입으라고 돈봉투를 드리기도 했고 교도들에겐 법회 후 식당으로 초대해 점심을 대접하기도 했다. 아이가 학생회 출신이라 학생회 학생들에게도 따로 점심을 사 주었다.

너무 돈 많이 쓰는 거 아냐

나는 아내의 행동에 염려를 드러냈다.

대학 다닐 때 돈도 하나도 안 들잖아. 용돈은 교무님이 주시고. 또.

또?

큰애땐 후회되더라고. 아무것도 안 해서. 교무님께 점심밖에 안 샀잖아. 이젠 아들 둘을 원불교에 희사(喜捨)했는데 좀 더 교무님이랑 교당에 잘 해야지.

아내는 들떠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내는 필요이상으로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 같았다. 뭔가 어디에 정신이 빼앗겼던 것 같았다. 그때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내는 작은아들에게도 한우전문식당에 데려가서 배불리 고기를 사주었고 틈틈이 질릴 정도로 집에서도 고기 요리를 해 주었다.

간사가면 어디 고기라도 제대로 먹겠어? 교무님들 식사야 풀밖에 안 나올 텐데. 

그때 이미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헤아려야 했을까. 간사 가는 날은 달력에 빨간 표시를 해 놓았다. 뭔가 아내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하지만 아내는 교당에 더 열심히 다녔다. 사람들이 교무 엄마라고 할 텐데 열심히 안 다니면 뭐라 하겠어, 라며 일요일의 정기 법회 뿐 아니라 좌선과 독경을 위주로 하던 화요일의 선방, 목요일의 교리 반에도 열심히 다녔다. 교당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집에서도 틈틈이 500배를 하고 좌선과 독경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무릎과 허리가 평소 좋지 않았는데 하루에 500배씩 하고부터는 무릎 관절이 많이 나아졌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에게도 일요일 아침에 잠만 자지 말고 교당에 다니라고 강권하곤 했다. 남들 눈에 보기 안 좋다는 거였다.

아들 둘이나 교무가 됐는데.

아내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교당일이나 집안일이나 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려고 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고. 사람을 비롯한 모든 사물을 부처라고 여겨야 하고 일을 할 때에는 불공드리듯이 해야 한다고.

아내는 실제로 살아가는 일을 불공드리듯 살아가는 듯 했다. 원불교에 열심히 다닐수록 아내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항상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내는 작은아들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합격을 하고 나자 조금씩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고2겨울 방학 때 서원을 세웠을 때만 해도 기쁜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모습과 다른 점이 많았다. 그러다가 작은아들이 막상 간사근무를 떠나고 나니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주임교무는 자식을 놓아주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선 사사로운 감정을 버려야 한다고. 아내는 선선히 동의했다. 큰아들 때 이미 겪은 일이었고 각오한 일이었다.

이제 더욱 열심히 살아야지. 건강도 챙기고.  이제 자식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야지.

아내는 그동안 못 챙긴 건강도 챙기고 여행도 자주 다니자고 했다. 당장 워킹화와 트레이닝복을 나와 커플로 샀다. 자식 둘이 그냥 떠난 게 아니라 출가나 다름없는 길로 갔고 나중에 출가를 할 것이니 교무 말처럼 미리미리 아들들에게 미련을 버리고 우리 부부의 생활을 더 충만하게 해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왜 서운한 감정이 없었겠는가. 아내는 저녁을 먹다가도 밥은 잘 먹고 있으려나, 하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고 나 또한 갑작스런 아들들의 그리움에 묵묵히 밥을 떠먹었다. 그렇지만 참기 힘들다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활기찬 생활을 하자고 했지만 큰아들이 떠난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큰아들이 떠났을 때는 집에 작은아들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아들이 떠났을 때는 그야말로 집이 휑하니 빈 것 같았다. 나는 되도록 퇴근을 일찍 했다. 밤에는 커플트레이닝복을 입고 공원으로 산책을 가기도 했고 일요일엔 교당에 나갔다. 모두 아내를 위한 것이었다. 일요일 오후엔 주로 가까운 산에라도 갔는데 산에서 만나는 아는 사람들은 신혼으로 돌아왔다고 놀렸다.

밤에 신랑이 잘 해주가봐. 진수 엄마 얼굴이 확 피었어.

어떤 이의 농담에 아내는 얼굴이 붉히기도 했다.

아내는 작은아들이 집을 떠난 초기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 덕택에 아들들의 빈자리를 이겨가고 있었다. 아내는 매사에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잠자리에서도 적극적이었다. 나보다도 아내 쪽에서 먼저 요구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은아들이 간사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원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아내와 나는 생활을 잘 보냈다. 하지만 정식으로 출가를 하고 2년째 되던 해에 결혼까지 하자 눈물짓는 일이 잦아졌다. 결혼을 하자 큰아들이 그랬듯 작은아들도 집으로 오지 않고 아내인 정토가 있는 사가(私家)로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갔다. 어쩌면 큰아들 때 이미 겪은 일이라 좀 더 나아질 듯도 하건만 아내는 공허감을 못 이겨했다. 어쩌다 아들에게 전화라도 오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전화기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오히려 무안해 전화를 그만 끊으라고 독촉하기도 했다. 전화를 한 날은 그나마 생기를 찾은 날이었다. 일요일 오후에 전주나 부산까지 아들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며느리의 눈치가 보여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아들은 일요일 오후와 월요일에 잠깐 사가에 있을 뿐 멀리 떨어진 교당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나마 둘이 있는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아내는 점점 좌선에도 500배에도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하물며 절을 하면서도 정신을 놓는데…….

아내는 좌선에도 정신집중이 안 된다고 했다. 어떨 땐 하루에 1000배를 하기도 했는데 마치 자기 자신의 몸을 혹사시킴으로서 고통을 잊으려 하는 것 같아 곁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아내는 점점 작은아들이 거처하던 방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쩌다 큰아들 방에서도 잠을 잤지만 점점 작은아들 방에서 잠을 자는 횟수가 늘어났다. 안방으로 잘 건너오지 않았다. 나는 안방에서 혼자 자는 날이 많아졌다. 그것이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괜찮다고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 아내는 여행을 떠났다. 점점 작은아들 방에서 자는 횟수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아예 그 방에서 둥지를 틀 때였다. 아내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으려 했다.


아내는 집에 돌아오기로 한 예정일이 하루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틀 전 KT에 집전화에 착신번호 서비스를 신청하여 집으로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내 휴대폰으로 오도록 해 놓았지만 낯선 전화번호는 뜨지 않았다.

또 하루가 흘렀다. 나는 무기력했다. 아내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예정일에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종신고나 가출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하려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아내의 의도적인 행위에 자꾸 의심이 갔다. 그러니까 아내는 무슨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말이다. 애초에 여행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가출한 것이다. 그러니까 고의로 가출한 것이 아닐까.

나는 작은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무슨 물증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하루 종일 처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던 방이기에, 그냥 아내가 그리워서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팔짱을 꼈다.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외로워서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아내는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500배를 하고 1000배를 해도, 몇 시간씩 좌선을 하고 독경을 해도 결국은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 했구나. 교전을 들고 웃으며 열심히 교당을 다니던 아내의 모습이 무슨 고행을 하는 것처럼 애처롭게 느껴졌다. 생각해 볼수록 가슴을 칠 일이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소름이 돋으면서 피가 정수리로 몰려들었다. 숨이 가빠 왔다. 땀이 삐질 났다.

여보.

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내도 아들이 출가한 후 이런 느낌이었을까.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라더니.

바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혹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 할까봐 집에 와서도 항상 바지에 넣고 다녔고 진동으로 하지 않고 벨소리로 해 놓았다. 나는 얼른 꺼내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054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휴대폰을 귀에 댔을 때 멀리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혹 이혜영씨 댁인가요?”

굵직한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그렇다고, 내 아내라고 했다.

“그러니까 주민등록번호가 오이공구이칠에……”

“예, 맞습니다. 맞다니까요. 근데 어딥니까. 거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아, 찾았구만. 여기요. 김천경찰서인데요.”

“김천이요?” 

나는 낯선 지명에 잠시 멍해졌다. 어디 지구 끝 먼 나라의 지명처럼 느껴졌다.

“거기가 어디죠?”

“경북입니다. 경북 김천. 이혜영씨 집에 안계시죠? 지금.”

“여행을 떠났는데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근데 왜 그러시죠? 무슨 일이 있나요?”

“실종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직지사에서 실종 됐다고 여행사가 실종 신고를 했는데 연고자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실종이요? 혼자요? 거긴 왜 갔는데요? 아직도 못 찾았단 말입니까?”

“못 찾았으니까 전화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위에 좀 찾아보시고 혹 연락되면 이 번호로 전화주세요. 저희들도 찾는 데까지 찾아볼게요. 저는 여인구입니다.”

“혹 무슨 여행사인지 알 수 있습니까?”

나는 끊으려는 경찰관의 말을 낚아챘다. 세한여행사요. 담당자가…… 적으세요. 임천수. 공일공에 이칠칠팔에 ……

전화번호를 적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여행사 직원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여행사 직원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여행은 아내의 말처럼 3박4일이 맞았다. 밀양 표충사에서 1박, 대구 동화사에서 1박, 김천 직지사에서 1박하는 주로 불교 신자들이 가는 여행이었다고 했다. 실종된 날은 김천 직지사에 1박한 아침이었다고 했다. 직지사에 도착해 대웅전에서 108배를 하고 저녁을 먹고 주지 스님께 설법 들을 때까지는 여행객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날 배정된 방에 함께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식사를 하는 데 아내가 보이질 않더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상하다고 여행사 직원은 말했다. 여행 신청서에 적힌 모든 게 이름만 빼고 다르게 적었다는 것이었다. 주소랑 주민등록번호, 심지어 집 전화까지 다르게 적어 할 수 없이 집으로 연락 못 하고 가까운 경찰서로 신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실종 되고 나서 여행보험에 든 서류를 보고서야 정확한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알 수 있었노라고, 찾느라 다른 여행객들조차 제대로 마지막 여행을 못 했다고 했다. 거듭 미안하다는 여행사 직원의 말을 자르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품었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아내의 향긋한 냄새가 났다.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나던 냄새였다. 

애초부터 아내는 자신이 완벽하게 실종되기를 바랐고 또한 아무도 찾지 못 할 곳으로 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일 김천에 가더라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애벌레처럼 등을 한껏 꾸부렸다.

 

 고창근  sgamm@hanmail.net  소설집 <소도(蘇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