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읽고 난 뒤에 여러 모로 얘기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도 크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 5·16 혁명, 게르니카 폭격사건, 아우슈비츠 가 이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작가의 체험과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이 잘 녹아든 중편이다.

작가 이병주는 1965년에 이 소설로 등단했다. 발표 당시 이 소설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굵직한 스케일은 전통소설이나 사소설이 주류이던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며 실험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반면 문학적 개연성이 허술한 면도 없지 않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는 주인공이 외국인들과 자유자재로 감정을 나눌 만큼 언어가 통한다는 점이나 사상범인 형 못지않게 지성적인 면 등등. 그러나 그런 허점을 메울 만큼 서사가 흥미롭고 글 속의 정신이 매력적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인물을 통해 철저한 자유주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이는 일체의 권력이나 사상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유로움이다.

 

사상이란 무엇이냐? 정과 부정을 가려내는 가치관이 아닌가. 선과 악을 판별하는 판단력이 아닌가. 그러나 자연의 작용에 정·부정이 있고 선과 악이 있는가. 사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면 될 것이 아닌가. 사상이란 자연 속에서 벗어져 나오려는 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상이란 인간을 부자연하게, 그러니까 불행하게 만드는 작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아닌가.

 

흑백 이념이 뚜렷했던 군부독재 시대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태도는 회색의 사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고 현실을 비판하는 감옥 동료로부터는 비굴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힘있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한국적인 상황을 넘어선 정신의 자유로움 때문이리라.

소설은 필화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형이 동생에게 쓴 편지를 통해 진행된다. 소설 속에서 형은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 때문에 단죄를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작가는 당시 주필로 있던 부산국제신보에 실린 이 글 때문에 실형을 살았다. 동생은 형이 그토록 가고자 했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밴드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형은 옥중에서, 자신은 황제이며 지금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환각으로 고통스러움을 견뎌낸다.

알렉산드리아는 열린 공간의 상징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였으며 수세기 동안 지중해의 교통, 교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정복자 알렉산더가 각 나라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융화정책을 폈기에 여러 문화가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그런 공간에서 형의 분신인 동생과 게르니카 폭격의 피해자 사라, 나치 학살의 피해자 한스를 데려다 놓았다. 그들은 죄없는 피붙이의 죽음에 복수를 꿈꾸며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끈질기게 추적해온 나치 앞잡이를 살해한다. 그러나 원하던 복수가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개인의 복수를 떠나 ‘병든 유럽문명을 단죄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법원의 결정은 ‘어떤 신문은 알렉산드리아 법원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보여준 파인플레이라고 격찬했고 어떤 신문은 법원이 정당한 의무를 회피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과 재판과정을 통해 작가는 세상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잣대는 어디 있으며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낸다.

소설은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막을 내린다. 현실과 허구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마친 뒤의 심정을 토로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