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9호...
   2020년 05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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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2860 2014-11-03
45 수박 앞에서 외1편/신대원
편집자
4844 2010-08-31
10.09월 4호 시 <수박 앞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말복은 왔다. 때가 다 영글도록 아직 난, 한조각의 수박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 영상에 비친 수박 빨리 먹기 시합에 경기驚氣들린 듯 움츠려드는 미간眉間 그 틈새로 거꾸로 매달려 돌아가는 시계 시계 속엔 진땀보다 더 끈적거리는 시대時代가 허우적거리다 허우적거리다 윤간輪姦으로 실신해 가는 강물처럼 파닥인다. 마침내 수박에선 붉은 피 흐르고 노을 닮은 선홍빛 영혼들이 상념想念의 강江에 나와 바람을 쐰다. 수박이 꼭지부터 말라간다. 2천 십년의 말복은 또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나 보다. <流星처럼 遊星이 되어> 초저녁 서녘 끝자락 붙박이 별 하나 개밥바라기 그대가 아니어도 아니 그대가 아니길 천번만번 빌고 또 빌어 마침내 서럽지 않을 流星으로 遊星처럼 흐르다 떠다니고 떠다니다 또 흐른다. 올 때도 흘러들어 왔으니 실컷 떠다니며 노닐다가 흘러나 가버린들 또 어떨까 바랑이나 지팡이만 있으면 그뿐 무얼 또 바랄까 流星처럼 遊星이 되어 무수한 붙박이들 按酒삼아 安否나 물어나 보며 살면 될 일.  
44 소설 알렉산드리아 / 이병주
주진
6330 2010-08-21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읽고 난 뒤에 여러 모로 얘기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도 크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 5·16 혁명, 게르니카 폭격사건, 아우슈비츠 가 이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작가의 체험과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이 잘 녹아든 중편이다. 작가 이병주는 1965년에 이 소설로 등단했다. 발표 당시 이 소설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굵직한 스케일은 전통소설이나 사소설이 주류이던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며 실험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반면 문학적 개연성이 허술한 면도 없지 않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는 주인공이 외국인들과 자유자재로 감정을 나눌 만큼 언어가 통한다는 점이나 사상범인 형 못지않게 지성적인 면 등등. 그러나 그런 허점을 메울 만큼 서사가 흥미롭고 글 속의 정신이 매력적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인물을 통해 철저한 자유주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이는 일체의 권력이나 사상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유로움이다. 사상이란 무엇이냐? 정과 부정을 가려내는 가치관이 아닌가. 선과 악을 판별하는 판단력이 아닌가. 그러나 자연의 작용에 정·부정이 있고 선과 악이 있는가. 사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면 될 것이 아닌가. 사상이란 자연 속에서 벗어져 나오려는 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상이란 인간을 부자연하게, 그러니까 불행하게 만드는 작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아닌가. 흑백 이념이 뚜렷했던 군부독재 시대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태도는 회색의 사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고 현실을 비판하는 감옥 동료로부터는 비굴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힘있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한국적인 상황을 넘어선 정신의 자유로움 때문이리라. 소설은 필화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형이 동생에게 쓴 편지를 통해 진행된다. 소설 속에서 형은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 때문에 단죄를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작가는 당시 주필로 있던 부산국제신보에 실린 이 글 때문에 실형을 살았다. 동생은 형이 그토록 가고자 했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밴드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형은 옥중에서, 자신은 황제이며 지금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환각으로 고통스러움을 견뎌낸다. 알렉산드리아는 열린 공간의 상징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였으며 수세기 동안 지중해의 교통, 교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정복자 알렉산더가 각 나라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융화정책을 폈기에 여러 문화가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그런 공간에서 형의 분신인 동생과 게르니카 폭격의 피해자 사라, 나치 학살의 피해자 한스를 데려다 놓았다. 그들은 죄없는 피붙이의 죽음에 복수를 꿈꾸며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끈질기게 추적해온 나치 앞잡이를 살해한다. 그러나 원하던 복수가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개인의 복수를 떠나 ‘병든 유럽문명을 단죄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법원의 결정은 ‘어떤 신문은 알렉산드리아 법원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보여준 파인플레이라고 격찬했고 어떤 신문은 법원이 정당한 의무를 회피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과 재판과정을 통해 작가는 세상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잣대는 어디 있으며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낸다. 소설은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막을 내린다. 현실과 허구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마친 뒤의 심정을 토로하는 듯하다.  
43 노끈/모파상
고창근
5367 2010-08-18
내가 좋아하는 소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는 어떻다고 단정을 짓지만 그 당사자는 그 단정 떄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아닌,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않고 오직 자신의 세상에 갇힌 사람들 때문에 죽어간 한 농부의 이야기다. 노끈/모파상 그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고데르빌 주변 길은 모두 이 마을로 가는 농부들과 그 마누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사내들은 어깨에 삽과 쟁기 따위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진 노동으로 뒤틀린 긴 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내디뎠다. 느릿느릿 걸을 때마다 온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짐의 무게 때문에 왼쪽 어깨를 약간 올리고 몸은 뒤로 약간 젖힌 자세였다. 두 다리는 계속되는 고된 농사일로 찌들어 가끔씩 비틀거렸다. 그들은 푸른 색 셔츠에 풀을 빳빳이 먹여 마치 왁스를 칠한 것처럼 번쩍이게 해서 입고 있었다. 깃과 소매부리에는 흰 실로 수를 놓았지만 가슴팍이 워낙 뼈가 앙상할 정도로 말라서 셔츠에 불룩하게 바람이 들어차 마치 공중에 떠도는 풍선처럼 보였다. 그 셔츠 밖으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고, 또 팔다리도 삐져 나와 있다. 몇몇 사람은 암소와 송아지를 끌고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낙네는 그 소의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로 소의 잔등을 때리곤 하는 것이다. 그 아낙네들은 팔에 커다란 바구니를 걸치고 있었다. 바구니 한 쪽에서는 병아리의 대가리가, 다른 쪽에서는 오리 모가지가 불쑥 나오곤 했다. 그들은 남편에 비하여 걸음이 자꾸 뒤로 쳐지면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아낙네들은 깡마르고 꼿꼿한 허리통에 폭이 좁은 옷감을 감고, 밋밋한 젖가슴에는 핀을 꽂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둘러 머리카락 위로 여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모자를 덮어쓰는 것이다. 짐마차가 흔들리며 지나갔다. 마차 앞자리에는 두 사내가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마차 안쪽 깊숙이 들어앉은 여자는 마차가 흔들리는 것을 견디느라고 마차 모서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고데르빌 광장에는 사람과 짐승들이 뒤섞여 엄청나게 혼잡스러웠다. 황소의 뿔이 여기저기 솟아 있고, 사는 것이 넉넉한 농부들은 기다란 깃이 달린 높은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다. 촌 아낙네들의 모자가 여기저기 인파 위로 솟아 있었다. 거칠고 소란스러우며 찢어지는 듯한 말소리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때로는 어떤 시골뜨기가 자기 딴에는 통쾌하게 웃는답시고 억센 가슴 밖으로 뿜어내는 웃음소리나, 어느 집 담벼락에 매어놓은 암소가 길게 뽑아내는 울음소리가 그 혼잡을 가르고 울려퍼지곤 했다. 어디를 가나 외양간 냄새, 우유 냄새, 거름 냄새, 마른 풀 냄새, 땀 냄새 등이 섞여 코를 찔렀다. 땅에 묻혀 살아가는 이 농부들에게서는 사람 냄새와 짐승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악취가 풍겨났다. 익숙치 않은 사람일 경우 그 냄새를 맡기만 해도 영 기분을 잡치게 되는 것이다. 브레오떼에 사는 오슈꼬른 영감은 방금 고데르빌에 도착했다. 그는 광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땅바닥에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감은 진짜 노르망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지독한 노랑이였다. 조금이라도 쓸모 있겠다 싶으면 무엇이건 일단 집어드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는 신경통으로 아픈 허리를 억지로 구부려, 땅바닥에 떨어진 그 보잘것없는 노끈을 집어서 정성스럽게 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말랑땡 영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마구(馬具) 수선업자로 자기 집 문턱에 서서 오슈꼬른 영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전에는 서로 거래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어떤 일로 심하게 다툰 뒤로는 아직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슈꼬른 영감은 자기가 이처럼 쇠똥 말똥이 묻은 노끈 오라기 따위를 줍는 모양을 원수에게 보여 주었다는 생각 때문에 적잖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자기가 주운 물건을 얼른 셔츠 속에 감추었다가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물건을 찾다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 땅바닥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쑥 내밀고 아픈 허리를 장터를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곳곳에서 흥정을 하느라고 시끄럽게 웅성거리며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농부들은 암소 등을 쓰다듬으며 혹시 상대방에게 속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마주선 사람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혹시 무슨 속임수라도 있는 것 아닌가, 자기가 사려는 소에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무슨 흠이라도 찾아서 트집을 잡을 게 없나 살피는 것이다. 아낙네들은 큼지막한 바구니를 발 밑에 놓고, 그 속에 들어있는 닭이며 오리를 끄집어내곤 했다. 그러면 벼슬이 빨간 닭과 오리들은 다리가 묶인 채 땅바닥에 쓰러져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농부들은 손님이 사고 싶은 가격을 말하면, 무표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자기가 받을 값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손님이 포기하고 천천히 자리를 뜨면 결국 상대가 말한 가격에라도 팔려고 마음먹고 손님의 등뒤에 대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렇게 합죠... 그냥 그렇게 드린다굽쇼!" 이윽고 한낮의 종소리가 정오를 알리면, 시장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식사를 하러 주막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르댕의 주막 커다란 홀에는 손님들이 가득 들어찼다. 넓은 앞마당에는 짐수레, 이륜마차, 포장마차, 작은 짐마차 등 갖가지 마차들이 모여들어 북적댔다. 수많은 마차들이 있었다. 진흙이 묻거나 뒤틀린 것, 수레 채가 팔을 벌리듯이 하늘로 솟아오른 것, 코를 땅바닥에 박고 꽁무니가 공중에 치솟듯 땜질한 마차도 있었다. 자리에 둘러앉은 손님들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벽난로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뒤돌아 앉은 손님들의 잔등에는 더운 기운이 확확 느껴졌다. 닭고기, 비둘기 고기, 양의 넓적다리 고기를 꿴 꼬챙이 세 개가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고기와 껍질을 굽느라고 고기에서 국물이 흘러내리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난로 근처에 모여앉은 손님들은 입에 군침이 돌았다. 농부들 가운데서도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주르댕 주막에서 식사를 했다. 주르댕은 이 주막에서 음식점과 마구 장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누런 사이다 잔을 연신 비우면서 음식 접시를 바닥내곤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물건을 사고 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때 별안간 집 앞마당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무관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홀 안에 있던 손님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과 들창가로 달려갔다. 다들 입에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손수건을 손에 쥐고 있었다. 북소리가 그쳤다. 뜰에 서 있던 사내는 허겁지겁 외쳐댔다. "고델르빌 읍에 사시는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특히 이 장터에 계신 분들에게 알립니다. 오늘 아침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어떤 사람이 베즈빌 거리에서 까만 가죽지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지갑 속에는 돈이 5백 프랑, 그리고 서류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주운 사람은 지금 당장 읍사무소나 만느빌에 사는 포르트네 울브레크 씨 댁으로 곧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돌려주시는 분에게는 보상금 20프랑을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은 가버렸다. 멀리서 다시 한번 똑같은 북소리와 그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막집에 있던 사람들은 울브레크 씨가 그 지갑을 찾게 될 것이라느니 아니라느니 하며, 이 일에 대해서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러는 가운데 식사는 거의 다 끝났다. 사람들이 이제 커피 잔을 비우고 있을 때, 헌병대장이 문간에 나타났다. "여기 혹시 브레오떼에 사는 오슈꼬른 씨가 와 있소?" 오슈꼬른은 방 저쪽 끝 식탁에 앉아 있었다. 오슈꼬른이 대답했다. "나, 여기 있소." 헌병대장이 말했다. "오슈꼬른 씨, 미안하지만 나랑 함께 읍사무소까지 좀 가십시다. 읍장님께서 당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농부는 놀라고 당황했다. 그는 작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침보다 허리를 더 아픈 것 같았다. 이렇게 쉬고 나면 발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글세, 내가 오슈꼬른인데..." 그는 헌병대장을 따라갔다. 읍장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공중인이기도 했다. 몸집이 뚱뚱하고 근엄한 표정에 항상 말투가 거창한 그런 사내였다. 읍장은 오슈꼬른 영감에게 물었다. "오슈꼬른 씨, 당신이 혹시 오늘 아침 베즈빌 거리에서 만느빌에 사는 울브레크 씨가 잃어버린 지갑을 줍지 않았습니까?" 이 시골 영감은 깜짝 놀라 읍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튼 자기가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제가요? 제가 그 지갑을 주웠다고요?" "네, 바로 당신이 말입니다..." "정말이지, 전 그 일은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본 사람이 있어요." "저를 봤다구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굽니까?" "마구상을 하는 말랑땡 씨 말입니다." 그러자 영감은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아하, 읍장이 바로 그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구나! 그는 화가 치밀어 핏대를 올리면서 떠들었다. "아, 그 자식이 저를 보았다구요? 그 썩을 놈이! 제가 실은 오늘 아침에 노끈 오라기를 줍는 것을 보고 그 자식이 그러는 거예요. 자, 보세요! 바로 이겁니다, 읍장님!" 그는 주머니 속을 더듬어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나 읍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영감님, 절 속이지 마세요. 그 성실하신 말랑땡 씨가 설마 그래 그따위 노끈을 지갑으로 잘못 보았을 리 있습니까?" 농부는 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침을 뱉은 다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저 시퍼런 하늘이 다 보고 아는 사실입니다. 읍장님, 저의 양심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듭 말하지만, 제가 말한 게 사실입니다." 읍장이 계속 말했다. "당신이 그 지갑을 줍고 나서 혹시 지갑에 들어 있던 돈이 몇 푼 더 진흙 속에 떨어지지 않았나 해서 이리저리 한참 두리번거리며 찾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사실대로 말하세요." 영감은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겁이 나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나님 맙소사! 아이구, 그 사람 잡을 자식이... 그 따위로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그 빌어먹을 자식이 생사람 잡을 소리를! 어쩌면 그 따위로..." 그러나 그가 아무리 자기 결백을 내세워도 사람들은 곧이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말랑땡 씨와 맞대면까지 하게 되었다. 말랑땡 씨는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서로 옥신각신했다. 오슈꼬른 영감은 자진하여 몸수색을 받았다. 그에게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읍장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검사와 의논해서 다시 통지를 보내겠다고 말하곤 오슈꼬른 영감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졌다. 영감이 읍사무소를 나서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고소하다는 마음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영감이 당한 봉변에 대해 전혀 분개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영감은 열심히 노끈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영감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영감 역시 스스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까지 뒤집어 보였다. 자기가 아무 것도 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 여우 같으니... 저리 꺼져버려!" 그는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전혀 믿어 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한편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해 늘어놓곤 했다. 그가 집에 돌아갈 때에는 이미 밤이 어두워진 뒤였다. 그는 이웃에 사는 사람 셋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노끈 오라기를 주웠던 자리를 가리켜 주었다. 그리고 줄곧 자기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는 되풀이했다. 저녁에 그는 브레오떼 마을을 한 바퀴 다 돌았다.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이튿날 오후 한 시쯤이었다. 브르통 씨네 농장에서 일꾼으로 있는 농부 마리우스 포멜이 그 지갑과 그 속에 든 물건을 만느빌 울브레크 씨에게 돌려주었다. 그 농부는 자기가 길에서 그 지갑을 주웠다고 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줄 몰라서 그냥 집에 갖고 가 주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곧 근방에 퍼졌다. 오슈꼬른 영감도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각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이제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을 본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는 승리감으로 인해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떠들었다. "내가 불쾌한 것은 이 사건 때문이 아니야. 알겠나? 그런 게 아니지. 다만 그 멀쩡한 거짓말 때문이야. 거짓말로 남을 비난하는 것처럼 몹쓸 일은 없는 거라구..." 그는 하루 종일 그 얘기를 하며 돌아다녔다. 한길을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도 그 이야기를 했다. 술집에서 술꾼들도 붙들고 그 이야기를 했다. 주일날에는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붙들고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전혀 얼굴을 모르는 사람까지 세워놓고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의 마음도 어지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어쩐지 자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비웃기만 하고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등뒤에 대고 뭐라고 이러쿵저러쿵 소근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월요일에 그는 다시 고데르빌 장터를 향해 길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계속 알려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랑땡이 자기 집 문간에 서 있다가 오슈꼬른 영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웃고 있었다. 저 자식은 왜 웃는단 말인가? 그는 크리크토에 사는 어떤 농부를 만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농부는 영감을 툭 밀치면서 말했다. "이 여우같은 영감탱이야!" 그러더니 그 농부는 등을 돌리고 가버렸다. 오슈꼬른 영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불안해졌다. 왜 사람들은 자기를 보고 교활한 여우라고 할까? 그는 주르댕 주막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자마자 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롱빌리에 사는 어떤 마구 상인이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래! 이 늙은 것아! 나도 알아. 그게 노끈이었다 그 말이지!" 오슈꼬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돈지갑을 다시 찾았단 말이야..." 그러자 상대방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떠들지 말아! 이 친구야! 그 물건을 주운 사람하고 그것을 갖다 준 사람하고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그 일과 무관하다고는 말 못할 거야." 농부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 농부를 시켜서 돈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준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그 농부와 짜고 저지른 일이라고 믿고서 이렇게 자기를 비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기 대해서 뭐라고 항의하고 해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그는 식사도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비웃는 가운데 쫓기듯이 주막을 나오고 말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분하고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눈앞이 캄캄하고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상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다. 그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큰소리를 칠 수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교활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결백을 입증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은 너무나 부당한 것이다. 그는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날마다 조금씩 길어졌다. 번번히 새로운 이유를 덧붙이고, 더욱 열렬히 항의하고, 더욱 엄숙하게 자신의 결백을 하늘에 맹세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몇 시간이고 사람들에게 말할 내용의 줄거리를 미리 생각하곤 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그 노끈 이야기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논리가 복잡해지고, 그 증거가 더욱 확실할수록 그를 더욱 믿지 않았다. '그건 다 거짓말쟁이의 변명일 뿐이야...'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는 그때마다 몸에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그저 자꾸 몸만 쇠약해질 뿐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몸이 야위어 갔다. 이제는 장난꾸러기들이 심심풀이로 늙은이에게 노끈 이야기를 시키곤 했다. 마치 전선에서 방금 돌아온 군인에게 전쟁 이야기를 시키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마음마저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 해가 다 갈 때쯤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더니 정월 초순에 죽어버렸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그 이야기였다. "그건 그저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라구요... 조그마한 노끈 말이에요... 여길 보세요, 이거라구요, 읍장 나으리!" <끝>  
42 온다 리쿠의 <코끼리와 귀울음>
누미
4497 2010-08-03
내가 좋아하는 소설 정신이 약간 이상한 건지, 가끔 나는 그럴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무료한 오후 3시쯤 컴퓨터 앞에 앉아 아련하게 밀려오는 졸음에 젖어들고 있을 때, 유체이탈을 한 내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 혹은 무수히 착각을 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기억, 혹은 착각의 기억을 파고든다면 소설 한 편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시도조차 못했다. 실체가 잡히지 않는 머릿속 회로를 따라가서 만나게 될 지점이 필시 50년 가까운 세월 빚어온 마음속 우물 안일 터. <여섯 번째 사요코>로 데뷔한 작가 온다 리쿠는 이 마음속 우물에서 일어나는 평범하면서도 기이한 일상을 추리형식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제목은 <코끼리와 귀울음>. 전직 판사 출신인 세키네 다카오와 그 가족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건을 만나고 해결해가는 과정을 열두 편의 짧은 이야기로 담고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재밌는 건 아버지인 세키네 다카오는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 남자주인공 슈의 아버지로도 나왔고, 아들인 슈운은 슈의 형이자 <PUZZLE>의 주인공으로, 딸인 나쓰는 슈의 누나이자 <도서실의 바다>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세키네의 산책친구인 미쓰루는 <메이즈>의 도키에다 미쓰루로 나왔다는 것. 말하자면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 속 캐릭터들이 이 책 <코끼리와 귀울음>에 등장해서 추리 경쟁을 벌이는 셈이다. 이 가운데 담배 대신 캐러멜을 우물거리며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관력을 발휘하는 세키네 다카오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마플처럼 탐정캐릭터로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특히 매력적이다. 이들 각자가 따로 또 같이 벌이는 추리를 통해 멀쩡한 사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기저인 인간의 머릿속 회로와 그 회로 끝 마음속 우물을 들여다보기를. # 밑줄긋기 친구 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친구 언니의 대학선배 S코 씨는 회사에 다니며 시내 아파트에 혼자 살았습니다. S코 씨는 옛날부터 공부도 잘하고 착실하고 책임감도 있어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S코 씨는 신상품 개발 때문에 매일 야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S코 씨는 회사에서 혼자 야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S코 씨의 직장은 건물 10층입니다. S코 씨는 컴퓨터 잎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이제 됐나?”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S씨는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잘못 들었으려니 하고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또다시 “이제 됐나?”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S코 씨는 깜짝 놀라 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S코 씨 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습니다. 그 창밖에 글쎄, 커다란 빨간 개가 공중에 떠서 S코 씨를 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S코 씨는 겁이 나서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S코 씨는 열이 나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S코 씨는 아파트 5층에 살았습니다. 앓아누운 지 사흘 만에 열이 내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S코 씨는 커튼을 걷었습니다. 그러자 공중에 그 빨간 개가 떠있었습니다. 개는 또다시 S코 씨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됐나?” S코 씨는 무심코 “이제 됐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빨간 개는 큰소리로 웃으며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습니다. 며칠 뒤 S코 씨가 아직도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것을 걱정한 동료가 S코 씨 집에 찾아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 쭈글쭈글해진 S코 씨 시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빨간 개를 본 사람은 개가 “이제 됐나?”라고 묻는다고 “이제 됐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도고 씨, 도고 씨, 도고 씨”라고 세 번 읊으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코끼리와 귀울음>에 들어있는 ‘마술사’ 중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법이야. 자기와 같은 곳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은 사람은 그 외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서서히 두드러져 보이지 않나. 이만큼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어도 어차피 자기 목적밖에 보이지 않아. 이것도 현재의 격자창이라는 생각, 안 드나? <코끼리와 귀울음>에 들어있는 ‘신 D고개 살인사건’ 중에서  
41 사평역/임철우
고창근
7364 2010-07-31
내가 좋아하는 소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로 쓴 작품이다. 시나 소설이나 매우 좋은 평을 받은 작품이다. 소설은 어느 시골 간이역의 대합실에서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과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산업화 시대의 현실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렸다. 중년 사내 무기수, 술집 여자, 돈을 벌기 위해 음식점을 경영하는 과부, 운동권 학생, 잠자는 미친 여자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곽재구의 시<사평역에서>와 함께 소설을 비교하며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 시와 소설 모두 전문을 소개한다. 임철우 1954년 전남 완도군 평일도에서 태어났으며 1973년 광주 숭일고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제대 후 복학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을 체험했다. 서강대학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남대학 영문학과 시간강사로 근무했다. 1990년 광주 가톨릭센터 부설 문예창작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했고 1995년부터 한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개도둑》이 당선, 등단했다. 그의 작품은 분단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개도둑》《동행》《직선과 독가스》(1989), 《붉은 방》(1988), 《봄날》(1998) 등은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또 1990년대 들어서 발표한 《그 섬에 가고 싶다》(1991), 《등대 아래서 휘파람》(1993), 《붉은 산 흰 새》등은 임철우의 고향인 평일도가 배경이며 이야기의 중심은 6.25전쟁과 분단의 문제에 두었다. 서정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엮는 특징이 있는데 이 때문에 주제가 무거워도 읽기에 부담이 없다. 단편소설 《사평역》(1983)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화한 것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뒤안에 바람소리》는 낙일도의 6.25전쟁을 배경으로 친구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한 청년의 죄의식을 다루었는데 그의 소설의 대부분은 6.25전쟁,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사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죄의식을 다룬다. 그밖의 작품으로 《아버지의 땅》(1984), 《그리운 남쪽》(1985), 《달빛밟기》(1987), 《물그림자》(1991) 등이 있고 동화 《황금동전의 비밀》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영화로 상영되었다 사평역에서 _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퍼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클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낮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 - 임철우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 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 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는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서서 홀로 눈을 맞으며 희뿌연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이눈이다. 갓난아이의 주먹만한 눈송이들은 어둠 저편에 까맣게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수은등의 불빛 속에 뛰어 들어오면서 뚱그렇게 놀란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굉장한 눈이다. 바람도 그리 없는데 눈발이 비스듬히 비껴날리고 있다. 늙은 역장은 조금은 근심스런 기색으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어 본다. 하지만 콧김이 먼저 재빠르게 유리창에 달라붙어 뿌연 물방울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매로 훔쳐내야 했다. 철길은 아직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두 줄기 레일이 두툼한 눈을 뒤집어쓴 채 멀리 뻗어나간 쪽을 바라본다. 낮엔 철길이 저만치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습가지 뚜렷이 보였다. 봄날 몸을 푼 강물이 흐르듯 반원을 그리며 유유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철길의 끝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도 모든 걸 다 마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어느 노년의 모습처럼 그것은 퍽이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철길은 훨씬 앞당겨져서 끝나 있다. 수은등 불빛이 약해지는 부분에서부터 차츰 희미해져 가다가 이윽고 흐물흐물 녹아 버렸는가 싶게 철길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 저편은 칠흙 같은 어둠이다. 어둠에 삼키워져 버린 철길의 끝이 오늘밤은 까닭 없이 늙은 역장의 가슴 한구석을 썰렁하게 만든다. 그는 공연히 어깨를 떨어 보며 오른편 유리창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쪽은 대합실과 접해 있는 이를테면 매표구라고 불리는 곳이다. 역장은 먼지 낀 유리를 통해 대합실 안을 대충 휘둘러본다. 대합실이라고 해야 고작 국민학교 교실 하나 정도의 크기이다. 일제 때 처음 지어졌다는 그 작은 역사 건물은 두 칸으로 나뉘어져서 각각 사무실과 대합실로 쓰이고 있는 터였다. 대개의 간이역이 그렇듯이 대합실 내부엔 눈에 띌 만한 시설물이라곤 거의 없다. 유난히 높은 천정과 하얗게 회칠한 사방 벽 문에 열 평도 채 못 되는 공간이 턱없이 넓어 보여서 더욱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천정까지 올라가 매미마냥 납작하니 붙어 있는 형광등의 불빛이 실내 풍경을 어슴푸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지금 대합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이다. 한가운데에 톱밥 난로가 놓여져 있고 그 주위로 세 사람이 달라붙어 있다. 난로는 양철통 두 개를 맞붙여서 세워 놓은 듯한 꼬락서니로, 그나마 녹이 잔뜩 슬어 있어서 그간 겨울을 몇 차례나 맞고 보냈는지 어림잡기조차 힘들다. 난로의 허리께에 톱날 모양으로 촘촘히 뚫린 구멍 새로는 톱밥이 타들어가면서 내는 빨간 불빛이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형편없이 낡아빠진 그 난로 하나로 겨울밤의 찬 공기를 덥히기에는 어림도 없을 듯싶다. 난로가에 모여 있는 셋 중 한사람만 유일하게 등받이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러고 있는 것도 힘겨운지 등뒤에 서 있는 사람의 팔에 반쯤 기댄 자세로 힘없이 안겨 있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콜록거리고 있는 중늙은이로, 오래 앓아 오던 병이 요즘 들어 부쩍 심해져서 가까운 도회지의 병원을 찾아가려는 길이라는 것을 역장도 알고 있다. 등을 떠받치고 있는 건장한 팔뚝의 임자는 바로 노인의 아들이다. 대합실에 있는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그들 두 부자만이 역장에겐 낯익은 인물들이다. 그 곁에서 난로를 등진 채 불을 쬐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마흔은 넘었을까 싶은 사내는 싸구려 털실 모자에 때묻은 구식 오바를 걸쳐 입었는데 첫눈에도 무척 음울해 뵈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길게 자란 턱수염이며, 가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유난히 번뜩이는 눈빛이 왠지 섬뜩하다. 오랜 세월을 햇볕 한오라기 들지 않는 토굴 속에 갇혀 보낸 사람처럼 사내의 눈은 기묘한 광채마저 띠고 있다. 그 셋 말고도 저만치 벽을 다라 길게 붙어 있는 나무의자엔 점퍼차림의 청년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청년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미친 여자가 의자 위에 벌렁 누워 있다. 닥치는 대로 옷을 껴입은 여자는 속을 가득 채운 걸레 보퉁이 모양 모집이 퉁퉁하다. 청년은 추운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놓은 채 어깻죽지를 잔뜩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난로 곁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 눈치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청년은 들여다볼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다. 톱밥이 부족할 것 같은데...... 창 너머 그들을 하나하나 들러보다가 문득 난로 쪽을 슬쩍 쳐다보며 늙은 역장은 중얼거린다. 불을 지핀 게 두어 시간 전이니 지금쯤은 톱밥이 거의 동이 났을 것이다. 톱밥은 역사 바깥의 임시 창고에 저장해 놓고 있었다. 월동용 톱밥이 필요량의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장은 아까서야 알았다. 미리미리 충분한 톱밥을 확보해 두는 것은 김씨가 맡은 일이었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역장은 생각한다. 역원이라고 해야 역장인 자신까지 합해 기껏 세 명뿐이니 서로 책임을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는 일 따위란 애당초 있을 턱이 없었다. 하필 이날 따라 사무원인 장씨는 자리를 비우고 없는 참이었다. 아내의 해산일이라고 어제 아침 고향인 K시로 달려갔으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역장은 김씨와 둘이서 교대로 야근을 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톱밥은 우선 당분간 창고에 남아 있는 것으로 이럭저럭 견디어낼 수 있으리라. 대합실 난로는 하루 두 차례씩만 피우면 되니까. 역장은 웅크렸던 어깨를 한번 힘차게 펴 보기도 하고 두 팔을 앞뒤로 흔들어 보기도 한다. 역시 춥긴 마찬가지다. 그새 손발이 시려 오기 시작했으므로 역장은 코를 훌쩍이며 엉금엉금 책상 앞을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사무실용으로 쓰고 있는 석유 난로를 마주하고 앉아 손발을 펼쳐 널었다. "아야, 말이다. 이러다가 기차가 영 안 올라는 갑다." "아따, 아부님도 참. 좀 기다려 보십시다. 설마 온다는 기차가 안 오기사 할랍디여." 아들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얼굴도 돌리지 않고 건성 대답한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농부다. 다시 노인이 쿨룩거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빈약하기 그지없는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도록 흔들리고 있다. 아들은 힐끗 노인을 내려다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난로만 들여다본다. 노인에겐 미안한 일이긴 하나 아들은 모든 게 죄다 짜증스럽다. 벌써 몇 달째 끌어 온 노인의 병도 그렇고, 하필이면 이런 날, 그것도 밤중에 눈까지 펑펑 쏟아져 내리는데 기차를 타야 한다는 일도 그렇다. 그 모두가 노인의 괴팍한 성깔 탓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버럭 소리라도 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들이 전에도 여러 번 읍내 병원에 가 보자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며 죽더라도 그냥 집에서 죽겠노라던 노인이 난데없게도 이날 점심나절에는 스스로 먼저 병원엘 가자면서 나선 것이었다. 소피에 혈이 반이 넘게 섞여 나온다는 거였다. 부랴부랴 차비를 꾸리고 나니, 이번엔 하루 두 차례씩 왕래하는 버스는 멀미 때문에 절대로 타지 않겠다며 노인은 한사코 역으로 가지고 우겼다. 이놈아, 병원에 닿기도 전에 내 죽는 꼴을 볼라고 그라냐. 놔라. 싫으면 나 혼자라도 갈란다. 어쩌나 엄살을 떠는 통에 할수없이 노인을 등에 업고 나오긴 했는데, 그나마 일이 안 되려니까 기차마저 감감 무소식이었다. "빌어묵을 눔의 기차가......" 농부는 문득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황황히 깨물며 지레 놀라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 눈곱 낀 노인의 눈은 아까처럼 질끈 닫혀져 있다. 아들은 고통으로 짙게 고랑을 파고 있는 노인의 추한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약간 죄스러운 맘이 된다. 이거, 내가 무슨 짓이다냐. 죄 받는다. 죄 받어...... 노인이 또 쿨룩쿨룩 기침을 토해 낸다. 가슴 밑바닥을 쇠갈퀴로 긁어내는 듯한 고통스런 기침소리. 그들 부자 곁에 서서 등을 돌린 채 난로의 불기를 쬐고 있는 중년 사내는 자지러지는 기침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기침 소리를 들으면 사내에겐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감방장인 늙은 허씨다. 고질인 해소병으로 맨날 골골거리던 허씨는 그것이 감방에 들어와 얻은 병이라고 했다. 난리 후에 사상범으로 잡혀 무기형을 받은 허씨는 스물 일곱 살부터 시작한 교도소 생활이 벌써 이십 오 년에 이르고 있었지만, 언제나 갓 들어온 신차마냥 말도 없고 어리숙해 뵈는 사람이었다. 자네 운이 좋은 걸세. 쿨룩쿨룩. 나가면 혹 우리집에 한번 들러봐 줄라나. 이거 원, 소식 끊긴 지가 하도 오래 돼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사내가 출감하던 날, 허씨는 고참 무기수답지 않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내의 손을 오래오래 잡고 있었다. 사내는 저만치 유리창 밖으로 들이치는 눈발 속에서 희끗희끗한 허씨의 머리카락이며 움푹 패어 들어간 눈자위를 기억해내고 있다. 아마 지금쯤 그곳은 잠자리에 들 시간일 것이다. 젓가락을 꼽아 놓은 듯한 을씨년스런 창살 너머로 이 밤 거기에도 눈이 오고 있을까. 섬뜩한 탐조등의 불빛이 끊임없이 어둠을 면도질해대고 있을 교도소의 밤이 뇌리에 떠오른다. 사내의 눈빛은 불현듯 그윽하게 가라앉고 있다. 그곳엔 사내가 잃어버린 열 두해 동안의 세월이 남아 있었다. 이렇듯 멀리 떨어져서도 그 모든 것들을 눈앞에 훤히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어느덧 사내는 이미 그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출감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사내는 감방 밖에서 보낸 그간의 시간이 오히려 꿈처럼 현실감이 없다. 푸른 옷과 잿빛의 벽, 구린내 같은 밥냄새, 땀냄새, 복도를 걷는 간수의 구둣발소리, 쩔그렁대는 쇳소리..... 그런 모든 익숙한 색깔과 촉감, 냄새, 소리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과 같은 것들이 별안간 그에게서 떨어져나가 버린 대신에 전혀 생소한 또 다른 사물들의 질서가 사내에게 일방적으로 떠맡겨진 거였다. 그 새로운 모든 것들은 다만 사내를 당혹감에 빠뜨리고 거북하게 만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는 출감 후부터 자꾸만 무엇인가 대단히 커다란 것을 빼앗겼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감방 안에서 사내는 손바닥 안에 움켜 쥔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하릴없이 축소되어 가고 있는 자기 몫의 삶의 부피를 안타깝게 저울질해 보곤 했었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다. 낯선 시골 역에 홀로 앉아 있는 이 순간 정작 자기가 빼앗긴 것은 흘려보내는지 모르게 보낸 지난 십이 년의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그 푸른 옷과 잿빛 담벼락과 퀴퀴한 냄새들이 배어 있는 사각형의 좁은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가당찮은 느낌이 문득문득 들곤 하는 거였다. 쿨룩쿨룩. 아, 저 기침소리. 사내는 흠칫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방장 허씨가 아니다. 낯모르는 사람들 뿐. 사내는 낮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만다. 밖엔 간간이 바람이 불고 있다. 전기줄이 윙윙 휘파람을 불었고 무엇인가 바람에 휩쓸려 다니며 연신 딸그락 소리를 낸다. 대합실 안은 조용하다. 산골짜기를 돌아 달려온 바람이 역사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유리창이 덜그럭거리고 이따금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오를 뿐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저만치 혼자 쭈그려 앉은 청년은 줄곧 창 밖의 바람소리를 헤아리고 있던 참이다. 이윽고 청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딱딱한 나무의자로부터 스며오는 한기로 엉덩이가 시리다. 창가로 다가가다 말고 그는 문득 누워 있는 미친 여자 쪽을 근심스레 살핀다. 여자는 새우등을 하고 모로 누웠는데 시체가 아닌가 싶을 만큼 미동조차 없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그들이 문을 열어제치고 플랫폼 쪽으로 바삐 몰려가고 있을 때 저편 어둠을 질러오는 불빛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 기차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로 그들을 지나쳐 가고 말았다. 유난히 밝은 기차 내부의 불빛과 승객들의 거뭇거뭇한 머리통 정도조차도 언뜻 분간하기 어려웠을 만큼 기차는 쏜살같이 반대쪽으로 내달려가 버렸다. 기차가 사라지고 난 뒤 사위는 다시금 고요해졌다. 눈발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을 뿐 모두가 아까 그대로 남아 있다. 달려나왔던 사람들은 한참이나 어안이 벙벙하다. 방금 그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은 꿈속에서 본 휘황한 도깨비불이거나 난데없는 돌풍에 휩쓸려 날아가 버린 무슨 발광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차가 스쳐간 어둠 저편에서 손전등을 든 늙은 역장이 나타나 그것이 특급 열차라고 알려 주었을 때에야 사람들은 풀죽은 모습으로 대합실로 어기적어기적 되돌아왔다. "나 원 참, 좋다가 말았구마이." 누군가 투덜댔다. 난로를 차지하고 둘러서서 한동안은 모두들 입을 봉하고 있다. 저마다 실망한 기색이다. 대학생은 아까처럼 창을 내다보고 있고 미친 여자는 의자에 멀뚱하게 앉아 있다. 조금 있으려니, 문이 열리며 역장이 바께쓰를 들고 나타난다. 바께스 속엔 톱밥이 가득 들어 있다. "추위에 고생하십니다요." 농부가 얼른 인사를 차린다. 그에겐 제복을 입은 사람은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 된다. "뭘요. 그나저나 이거 죄송합니다. 기차가 나꾸 늦어지는군요." 눈이 오니까 그렇겠지라우, 하고 너그러운 소리를 농부가 또 덧붙인다. 역장은 난로 뚜껑을 열고 안을 살펴본다. 생각보다 톱밥이 꽤 남았다. 바께쓰를 기울여 톱밥을 반쯤 쏟아 넣은 다음 바께쓰는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다. 역장은 돌아가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그도 역시 무료했으리라. 눈 얘기, 지난 농사와 물가에 관한 얘기, 얼마 전 새로 갈린 면장과 멀잖아 읍내에 생기게 된다는 종합병원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화제는 이어진다. 처음엔 역장과 농부가 주연이지만 차츰 여자들도 끼어들게 된다. 그들 중 음울한 표정의 젊은 사내만이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로이다. 역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자리가 더욱 좁아졌으므로, 중년 사내는 난로 가까이 놓아둔 자신의 작은 보퉁이를 한켠으로 치워놓는다. 보퉁이엔 한 두름의 굴비, 그리고 낡고 때묻은 내복 따위같은 사내의 옷가지가 들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내가 벽돌담 저쪽의 세상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재산이다. "선생은 향촌리에 사시우?" 늙은 역장이 곁의 중년 사내에게 묻는다. "아, 아닙니다." "그래요. 근데 무슨 일로....." "누굴 찾아왔다가 그만 못 만나고 가는 길입지요." "누굴 찾으시는데요. 어디 말씀해 보구려. 이 근처 삼십 리 안팎에 있는 동네라면 내가 얼추 다 아니까요. 허허." "아, 아닙니다. 제가 주소를 잘못 알았었나 봅니다." 오, 그래요. 역장은 사내가 뭔가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므로 더 캐묻지 않는다. 톱밥 난로의 열기가 점점 강하게 퍼져 오르고 있다. 역장은 난로의 뚜껑을 닫고 나서 한산도를 꺼내 사내와 농부에게 권한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사내는 기차를 타기 전, 서울역 앞에서 그 굴비 한 두름을 샀었다. 언젠가 감방에서 허씨가 흰쌀밥에 잘 구운 굴비를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허씨 자신은 먹을 수 없겠지만, 홀로 산다는 허씨의 칠순 노모에게 빈손으로 찾아 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역 광장의 행상꾼에게서 한 두름을 샀다. 그리고 밤 내내 완행 열차를 타고 이날 새벽 사평역에서 내려 허씨가 일러준 대로 그 조그마한 산골 마을을 찾아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씨의 노모는 이미 만날 수가 없었다. 죽어 묻힌 지가 오 년도 넘었다고 했다. 노모가 죽은 이듬해, 허씨의 형도 식솔들을 데리고 훌훌 마을을 떴고, 그 후 그들의 소식은 영영 끊어졌다는 거였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사내는 사지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았다. 어느덧 초로에 접어든 허씨의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노모의 죽음조차 모르고 비좁은 벽돌담 안에 갖힌 채 다만 다른 사람들의 것일 따름인 그 숱한 계절들을 맞고 보내다가, 어느날인가는 푸른 옷에 싸여 죽음을 맞아야 할 한 늙고 병든 무기수의 얼굴이 사내의 발길을 차마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거였다. 등뒤에 두고 돌아서려니, 사내는 그 마을이 바로 자기의 고향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고향은 본디 이북이었지만 피난통에가족들과 헤어져 집도 부모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커 왔던 것이었다. 하염없이 눈송이만 펑펑 쏟아지는 살길을 걸어 나오며 사내는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문득 되돌아보면 멀리 산골 초가의 굴뚝에선 저녁 짓는 연기가 은은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 내리는 산자락에 고요히 묻혀 가는 저녁 무렵의 산골 풍경은 눈물겹도록 평화스러워 보였다. 이보쇼, 허씨. 당신이나 나는 이젠 매양 마찬가지구료. 피차 어디 찾아갈 곳 하나 없어졌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야 낫소. 그 속에 있으면 애써 고향을 찾아 나설 수도,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말이외다. 허허허. 그나저나 난 도대체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이요. 사내는 휘적휘적 눈길을 헤쳐 내려오며 몇 번이나 그렇게 넋두리를 했다. 역장은 시계를 본다. 아홉 시 반. 이거 너무 늦는걸. 그러다가 역장은 저만치 창가에서 서성이고 있는 청년을 새삼 발견한다. 청년은 벽에 붙은 지명수배자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참이다. 포스터엔 스무 명 남짓,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한국 사람들의 얼굴이 적혀져 있고 그 밑에 성명, 나이, 범행 내용, 인상착의 따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몇은 '검거'라고 쓰인 붉은 도장이 쿵쿵 박혀져 있다. 수배자들의 사진 가운데엔 대학생이 아는 얼굴도 하나 끼여 있다. 그는 청년의 선배이다.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선배는 몇 달 전부터 수배되어 있는 중이다. 청년은 지금 그 선배의 사진과 무슨 얘기라도 나누는 양 골똘히 마주 대하고 있다. 바로 그때 역장이 청년을 불렀으므로 청년은 저으기 놀란 모양이다. "이봐요, 젊은이. 추운데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불 좀 쬐구려." 청년은 우물쭈물하더니 이윽고 난로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역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누구.....더라." 역장은 의외라는 표정이다. 청년의 얼굴이 금방 기억나지 않는다. "저, 역장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고등학교 때 통학하면서 줄곧 뵈었는데..... 재너머 오동삼씨가 제....." "아아, 이제야 알겠네. 자네가 바로 오씨 큰아들이구먼. 지금 대학에 다닌다면서, 그렇지?" "예....." "맞아. 작년 여름에 내려왔을 때도 봤었지. 그래, 방학이라서 집에 왔구먼." "예....." 역장은 청년을 새삼 믿음직스러운 듯 바라본다. 역장은 그를 기억해 낼수 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성실하고 착한 학생 같았었다. 여느 애들과는 다르게 생각이 많아 뵈고 늘 손에 책이 들리워져 있는 것도 대견스러웠다. 그러길래 청년이 인근 마을에선 유일하게 도회지의 국립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믄,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뒷바라지하시느라 촌구석에서 뼈빠지게 고생하시는 부모님 호강도 시켜드리고. 고향에 좋은 일도 많이 해야 하네. 알겠는가." "예....." 역장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격려했고. 청년은 고개를 떨군 채 희미한 대답을 한다. 불현듯 청년의 뇌리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나무 등결처럼 투부룩한 아버지의 손. 그 손으로 아버지는 평생을 논밭만 일구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꿈은 판사 아들을 두는 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죽어도 한이 없노라고, 젊은 시절을 남의 집 머슴으로 전전했던 가난한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아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하던 거였다. 청년에겐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모두가 국민학교만 겨우 마쳤거나 아직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청년은 그의 집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어김없이 찾아올 밝아 오는 새벽이었다. 그런 부모와 형제들 앞에서 끝내 퇴학당했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여름에 자기도 그냥 집에 내려와 농사나 짓는 게 어떻겠느냐고 한마디 건넸다가 그만 노발대발한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느라 혼줄이 난적도 있었다. 결국 아무런 얘기도 꺼내 보지 못하고 이젠 누구 하나 찾아갈 사람도 없는 그 거대한 도시를 향해 집을 나섰을 때 청년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자. 이거 받으라이. 느그 아부지가 준 돈은 책값하고 하숙비 빼면 니 쓸 것도 부족하꺼이다. 괜찮다이. 내, 그동안 몰래 너 오면 줄라고 모아둔 돈이니께. 달걀도 모았다가 팔고 동네 밭일 해주고 품삯 받은 거이다. 아무쪼록 애껴 쓰면서, 공부도 좋재만 항상 몸을 살펴야 쓴다이. 동구 밖가지 따라나온 어머니는 꾸깃꾸깃 때에 절은 돈을 억지로 손에 쥐어 주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마른버짐이 허옇게 핀 얼굴로 그가 고객를 꼬박 넘어설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흥, 대학생? 그까짓 대학생이 무슨 별거라구..... 춘심이는 역장과 청년의 대화를 들으며 입을 삐쭉인다. 춘심이가 벌써 삼 년이나 몸 비비고 사는 민들레집 근방 일대엔 서너 개의 대학이 몰려 있었으므로 허구한 날 보는 게 대학생이었다. 그 녀석들은 덜렁대며 책가방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대체 언제 공부를 하는 줄 모르겠다고 그녀는 늘 의아해했다. 아침이면 교문으로 엄청난 수가 떼를 지어 몰려 들어갔고, 어쩌다 교문 앞을 지나치다 보면 거의 날마다 무슨 운동회다 축제 행사다 해서 교정이 뻑적지근하도록 시끄러웠다. 게다가 삐끗하면 데모다 시위다 하여 죄없는 부근 주민들까지 매운 냄새를 맡게 만들었기 때문에 번번이 장사에 지장도 많았다. 하필 학교 정문으로 통하는 네거리 길목에 자리잡은 민들레 집으로서는 데모가 터졌다 하면 그날 장사는 종을 쳤다. 그런 날은 일찍감치 문 닫고 그녀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한여름에도 신라 시대 장군들처럼 투구에다 갑옷차림으로 학교 문앞을 겹겹이 막고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재미나게 구경하는 거였다. 하교시간이면 술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무슨 뼈빠지는 막노동이라도 종일 하고 온 사람처럼 열나게 술을 퍼마시는 녀석들, 알아듣지도 못할 골치 아픈 얘기 따위나 해대며 괜시리 진지한 척 애쓰는 배부른 녀석들. 그것이 춘심이네가 생각하는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정이 넘어서야 곤드레가 되어 더러는 민들레 집을 찾아 기어 들어오기도 했는데, 가끔 술값이 모자라 이튿날 아침이면 가방을 잡혀두고 허겁지겁 돈 구하러 뛰어나가는 얼빠진 녀석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입을 비쭉여 대긴 해도 대학생은 역시 부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모두 멀잖아 도심지의 고층 빌딩을 넥타이차림으로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고, 유식하고 잘난 상대를 만나 그럴싸한 신혼 살림에 그럴싸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빤한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춘심이는 민들레집 계집애들과 함께 일이 없는 오후에 근처 대학교로 놀러갔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교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수위한테 내쫓김을 당했다. 씨발, 여대생은 얼굴에 무슨 금딱지라도 붙이고 다닌다던. 춘심이는 홧김에 씹고 있던 껌을 교문 돌기둥에 꾹국 눌러 붙여놓고 왔었다. 쿨룩쿨룩. 노인이 기침을 시작한다. 농부는 노인의 가슴을 크고 볼품 없는 손으로 문질러 준다. 난로가 달아오르고 있다. 훈훈한 열기가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몸을 기분좋게 적신다.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여자들은 문득 입안이 허전한가 보다. 아낙네 하나가 보따리에 손을 집어넣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이윽고 아낙의 손끝에 북어 두 마리가 따라나온다. 그녀는 그걸 대뜸 난로 위에 얹어 굽더니 북북 찢어내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 "벤벤찮으요만 잡숴들 보실라요. 입이 궁금할 때는 이것도 맛이 괜찮합디다." "고맙긴 하오만, 이렇게 먹어 버리면 뭐 남기나 하겠소?" 역장이 한 조각 받아들며 말한다. "밑질 때 밑지드라도 먹고 싶을 때는 먹어야지라우. 거시기, 금강산도 식후갱이라 안 합디여. 히히히." 아낙은 제법 유식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해서 익살맞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농부와 대학생과 춘심이도 한 오라기씩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다. 뚱뚱이 서울 여자는 마지못한 시늉으로 그걸 받더니, 행여 더러운 것이라도 묻지 않았나 싶은 듯 손가락 끝으로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입에 넣는다. 그녀는 여전히 마지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게 생긴 것보다는 맛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저녁을 거른 채로였다. "북어를 팔러 다니시는가 부죠." 뚱뚱이 여자는 북어 얻어먹은 걸 반지르르한 서울말로 갚아야겠다는 속셈이다. "북어뿐 아니라 김, 멸치, 미역 같은 해산물도 갖고 다녀라우. 산골이라 해산물이 귀해서 그런지 사평에 오면 그런 대로 사주는 편입디다." "저쪽 아주머니두요? 보따리가 꽤 커 보이는데." "아니라우. 나는 옷장사요. 정초도 가까워 오고 해서 애들 옷가지랑 노인내 솜바지 같은 걸 조까 많이 떼어 와 봤등만, 이번엔 영 재미를 못 봤쏘야. 삼사 일 전에 다른 옷장사가 먼저 들러갔다고 그럽디다. 오가는 차비 빠지기도 힘들게 돼 부렀는 갑소." "아따, 성님도 엄살은. 그만큼 팔았으면 됐지, 손해는 무슨 손해요." 젊은 아낙은 북어 두 마리를 더 꺼내어 난로에 얹으며 호들갑을 떤다. "근데 여기 기차도 다 틀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 어떡하믄 좋지. 이눔의 시골바닥엔 여관 하나도 안 보이던데, 쯧." 서울 여자가 코를 찡그린다. "누구, 아는 사람을 찾아오신 게 아닌갑네요?" 젊은 아낙이 퍽 호의를 보이며 묻는다.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수. 이런 두메산골은 눈 째지고 나서 첨 와봤다구요. 말만 들었지, 종이쪽지 하나 들구 찾아와 보니깐 이거 원. 이게 모두가 다 그....." 모두가 다 그 몸쓸년 때문이지 뭐야, 하려다가 서울 여자는 입을 오무리고 만다. 단부지같이 누렇게 뜬 사평댁의 낯빛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 까닭이다. 뚱뚱이 여자는 이날 아침 버스로 사평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평댁이 사는 마을은 고개를 둘이나 넘어야 하는 산골짜기에 있었다. 커다란 몸집을 절구통 옮기듯 씩씩거리며 두어 시간이나 걸려 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점심나절이 한참 넘어서였다. 그녀는 사평댁을 만나면 머리채부터 휘어잡고 그동안 쌓인 분풀이를 톡톡이 할 참으로 벼르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몇 달 전만 해도 사평댁은 주방에서 일을 했었다. 갓 서른이 넘은 나이에 성깔도 고와 뵈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는 남다른 신뢰와 애정을 베풀어주었노라고 지금도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한데, 믿는 믓에 뭐가 핀다더니 바로 그 사평댁에게 가게를 맡기고 단풍놀이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사평댁은 돈을 챙겨 넣은 채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던 거였다. 이상한 건 금고에 돈이 더 있었는데도 없어진 것은 다만 삼십여 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분해하는 것은 없어진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아무리 막되었기로소니 친언니보다도 더 극진히 믿고 위해 주었던 은혜를 사평댁이 감쪽같이 배신했다는 사실이 더욱 분했다. 처음엔 그저 잊어 버리고 말지, 했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라 급기야는 어설픈 기억을 더듬어 사평댁의 고향으로 이날 쫓아 내려온 거였다. 사평댁이 살고 있는 마을은 지독한 빈촌이었다. 겨우 이십여 호 남짓한 흙벽돌집들은 대부분이 초가였고, 한결같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한 험상맞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산비탈 여기저기 에 밭을 일구어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가는 화전민촌이라는 사실을 첫눈에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눔의 동네는 그 요란한 새마을 운동인가 뭔가도 여태 구경 못했담. 발 디딜 자리 없이 쇠똥이 지천으로 내갈겨진 고샅을 더듬어 올라가며 그녀는 내내 오만상을 구겨야 했다. 엄청나게 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똥통이며 두엄더미, 그리고 어쩌다 마주치는 시골 사람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수세미처럼 거칠고 쭈그러져 있었다. 금방 주저앉을 듯한 초가 사립을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그때까지 등등하던 기세가 사그라져 버리고 없었다. 기척을 들었는지누구요, 하고 방문을 연 것은 바로 사평댁이었다. 순간 그녀를 보자마자 사평댁은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마는 것였다. 처음엔 그녀는 송장같이 핼쓱한 그 여자가 바로 사평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사평댁은 오랜 병석의 기색이 완연했다. 에그머니나. 이게 무슨 꼴이야. 곱던 얼굴이 세상에 이렇게 못쓰게 될 수가 있담. 아니, 정말 네가 사평댁이 틀림없니, 틀림없어? 머리채를 박박 쥐뜯어 놓겠다고 벼르던 일은 까맣게 잊고 뚱뚱이 여자는 사평댁의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부둥켜안고 안타까와 어쩔 줄을 몰랐다. 속사정이야 제쳐두고 우선 두 여자는 한참 동안 울음보를 풀었다. 서울 여자는 일찌기 젊어 과부가 된 제 팔자가 새삼 서러웠을 테고, 송장같이 말라빠진 사평댁 또한 기구한 제 설음에 겨워 눈물을 쭐쭐 쏟아내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차츰 그간의 경위를 들어 보니 사평댁의 소행이 이해가 갈 만도 했다. 본디 사평댁은 결혼 후 그 마을에서 죽 살아왔노라고 했다. 주정뱅이에다가 노름꾼인 건달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으나, 갈수록 심해지는 남편의 손찌검에 못 견뎌 집을 나온 거였다. 물론 그런 사실을 사평댁은 까맣게 숨기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식당에 우연히 들어온 고향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서 지난 겨울 술 취한 남편이 밤길 눈밭에서 얼어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모 없이 거지 신세가 되어 이집 저집에 맡겨져 있다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한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노라고 사평댁은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방 한쪽 구석에는 사평댁의 아이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통은 부스럼딱지로 더갱이가 져있고 영양 실조로 낯빛이 눌눌한 아이들은 유난히 배만 불쑥 튀어나온 기이한 모습들이었다. 다시 한바탕 설움에 겨운 넋두리를 퍼붓다가 뚱뚱이 여자는 몸에 지닌 몇 푼의 돈까지 쓸어모아 한사코 마다하는 사평댁의 손에 쥐어 준 채 황황히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젠장맞을, 하여간 나는 정이 많은 게 탈이라구. 그 꼴을 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애당초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 아냐. 쯔쯔쯔. 서울 여자는 분풀이라도 하듯 북어를 어금니로 쭉 찢어서 씹기 시작한다. 짧은 순간, 사람들은 모두 바깥의 어둠에 귀를 모은다. 분명히 기적소리다. 야아, 오는구나. 저마다 눈빛을 빛내며 그들은 서둘러 짐꾸러미를 찾아 들고 플랫폼을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그러나 맨 앞장선 서울 여자가 유리문에 미처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드르륵 열리며 역장이 나타났다. "그대로들 계십시오. 저건 특급 열찹니다." 그렇게 말하고 역장은 문을 다시 닫더니 플랫폼으로 바삐 사라진다. 참, 그러고 보니 저건 하행선이구나. 대합실 안의 사람들은 일시에 맥이 빠진다. 이번에도 특급이야? 뚱뚱이는 짜증스레 내뱉았고 아낙네들은 욕지거리를 섞어 가며 툴툴대었으며, 노인은 더 심하게 기침을 콜록거렸고, 농부는 이번엔 늙은이의 가슴을 쓸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년 사내와 청년도 말없이 난로가로 되돌아갔고 맨 뒤로 몇 발짝 따라나왔던 미친 여자는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도로 의자 위에 엉덩이를 주저앉힌다. 그 사이, 열차는 쿵쾅거리며 플랫폼을 통과하고 있다. 차 내부의 불빛과 승객들의 미이라 같은 형상들이 꿈속에서 보듯 현란한 흔적으로 반짝이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위는 아까처럼 다시금 고요해졌고, 창 밖으로 칠흑의 어둠이 잽싸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온다. 열차가 사라진 어둠 저편에서 늙은 역장의 손전등 불빛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그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은 방금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열차의 불빛이 아직 자신의 망막에 남아 있는 듯 한 느낌이다. 그것은 어느 찰나에 피어올랐다가 소리 없이 스러져 버린 눈물겨운 아름다움 같은 거였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어디일까. 단풍잎 같은 차창들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마지막 가 닿는 곳은 어디쯤일까. 그런 뜻 없는 질문을 홀로 던지며 청년은 깊숙이 가라앉은 시선을 창 밖 어둠을 향해 던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대합실 벽에 붙은 시계가 도착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넘긴 채 꾸준히 재깍거리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다. 창밖엔 싸륵싸륵 송이송이 쌓여가고 유리창마다 흰보라빛 성에가 톱밥 난로의 불빛을 은은하게 되비추어 내고 있을 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잊었다. 어쩌면 그들은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년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성냥불을 당기려다 말고 멍하니 난로의 불빛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을 안고 있는 농부도, 대학생도, 쭈그려앉은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도, 머플러를 쓴 춘심이도 저마다의 손바닥들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망연한 시선을 난로 위에 모은 채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만치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미친 여자도 지금은 석고상으로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따금 노인의 기침소리가 났고,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올랐다.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믓이간디....."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히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중년 사내에겐 산다는 일이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햇볕도 바람도 흘러들지 않는 폐쇄된 공간. 그곳엔 시간마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 이 작은 산골 간이역을 빠른 속도로 무심히 지나쳐 가 버리는 특급 열차처럼..... 사내는 그 열차를 세울 수도 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앞으로 남겨진 자기 몫의 삶이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해도 흙과 일뿐이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농한기라는 겨울철마저도 융자금 상환과 농약값이며 비료값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에 보낸 큰아들놈의 학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보내고 마는 한숨 철이 되고만 지도 오래였다. 삶이란 필시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드디어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는 듯이 농부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서울 여자에겐 돈이다.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음식점 출입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녀에겐 돈으로 뵌다. 어서 오세요. 입에 붙은 인사도 알고 보면 손님에게가 아니라 돈에게 하는 말일 게다. 그래서 뚱뚱이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결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또 오세요다. 그녀는 가난을 안다. 미친 듯 돈을 벌어서, 가랑이를 찢어내던 어린 시절의 배고픈 기억을 보란듯이 보상받고 싶은 게 그녀의 욕심이다. 물론 남자 없이 혼자 지새워야 하는 밤이 그녀의 부대자루 같은 살덩이를 이따금 서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소중한 두 아들과 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쓰여질 돈, 그 두 가지만 있으면 과부인 그녀의 삶은 그런 대로 만족할 것도 같다. 촌심이는 애당초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산다는 게 뭐 별것일까. 아무리 허덕이며 몸부림을 쳐본들, 까짓 것 혀 꼬부라진 소리로 불러 대는 청승맞은 유행가 가락이나 술 취해 두들기는 젓가락 장단과 매양 한가지일걸 뭐. 그래서 춘심이는 술이 좋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 주는 술님이 고맙다. 그래도 춘심이는 취하면 때로 울기도 하는데 그 까닭이야말로 춘심이를 모를 일이다. 대학생에겐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스물 셋의 나이인 그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모르고, 아니 모른 척하고 산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삶은 잠이다. 마취 상태에 빠져 흘려보내는 시간일 뿐이라고 청년은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부터 그런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있다. 유치장에서 보낸 한 달 남짓한 기억과 퇴학. 끓어오르는 그들의 신념과는 아랑곳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강의실 밖의 질서..... 그런 것들이 자꾸만 청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행상꾼 아낙네들은 산다는 일이 이를테면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장사치들이 때로 엉켜 아우성치는 시장에서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나와, 때로는 시골 장터로 혹은 인적 뜸한 산골 마을로 돌아다니며 역시 자기네 처지보다 나을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골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 참말 다 발라가며 펼쳐놓는 그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들에겐 그 따위 사치스런 문제를 따지고 말고 할 능력도 건덕지도 없다. 지금 아낙네들의 머릿속엔 아이들에게 맡겨 둔 채로 떠나온 집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것들이 밥이나 제때에 해 먹었을까. 연탄불은 꺼지지 않았을까. 며칠째 일거리가 없어 빈둥대고 있는 십 년 노가다 경력의 남편이 또 술에 취해서 집구석에 법석을 피워놓진 않았을까..... 그러는 사이에도, 밖은 간간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마다 창문이 딸그락거렸다. 전신주 끝을 물고 윙윙대는 바람소리, 싸륵싸륵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 난로에서 톡톡 튀어오르는 톱밥. 그런 크고 작은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토해 내는 늙은이의 기침소리와 함께 대합실 안을 채우고 있을 뿐, 사람들은 각기 골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대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말없이 모여 있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여겨본다. 모두의 뺨이 불빛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청년은 처음으로 그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랄까 평화스러움을 찾아내고는 새삼 놀라고 있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란 때로는 저렇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은 무릎을 굽혀 바께쓰 안에서 톱밥 한 줌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의 불빛 속에 가만히 뿌려 넣어 본다. 호르르르. 삐비꽃이 피어나듯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져 들고 만다. 청년은 그 짧은 순간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어머니다. 어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 한줌 집어넣는다. 이번엔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한줌을 조금 천천히 흩뿌려 넣는다. 친구들과 노교수의 얼굴, 그리고 강의실의 빈 의자들과 잔디밭과 교정의 풍경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음울한 표정의 중년 사내는 대학생이 아까부터 톱밥을 뿌려 대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는 참이다. 대학생의 얼굴은 줄곧 상기되어 있다. 이 젊은 친구가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도 사내 역시 톱밥을 한줌 집어낸다. 그리고는 대학생이 하듯 달아오른 난로에 톱밥을 뿌려준다. 호르르르. 역시 삐비꽃 같은 불꽃이 환히 피어오른다. 사내는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얼핏 본 듯하다. 허씨 같기도 하고 전혀 낯모르는 다른 사람인 것도 같은, 확실히 앉은 얼굴이었다. 사내의 음울한 눈동자가 간절한 그리움으로 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사내는 다시 한 줌의 톱밥을 집어 불빛 속에 던져 넣고 있다. 어느새 농부도,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와 춘심이도 이젠 모두 그 두 사람의 치기어린 장난을 지켜보고 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평역을 경유하는 야간 완행 열차는 두 시간을 연착한 후에야 도착했다. 막상 열차가 도착했을 때, 대합실에서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은 반가움보다는 차라리 피곤함과 허탈감에 젖은 모습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늙은 역장은 하얗게 눈을 맞으며 깃발을 흔들어 출발신호를 보냈고, 이어 열차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얼핏, 누군가가 아직 들어가지 않고 열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역장은 그 사람이 재 너머 오씨 큰아들임을 알았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난간 손잡이에 위태로운 자세로 기대어 있는 청년의 모습이 역장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내 열차는 어둠 속으로 길게 기적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열차가 달려가 버린 어둠 저편을 망연히 응시하고 서 있던 늙은 역장은 옷에 금방 수북이 쌓인 눈을 털어내며 대합실로 들어섰다. 난로를 꺼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역장은 뜻밖에도 아직 기차를 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미친 여자였다. 지금껏 난로 곁에 가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난로를 독차지한 채, 아까 병든 늙은이가 앉았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집이 어디며, 또 어디서 왔는지 역장은 전혀 모른다. 다만 이따금 그녀가 이 마을을 찾아왔다가는 열차를 타고 떠나곤 했다는 정도만 기억할 뿐이었다. 오늘은 왜 이 여자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열차를 타지 않았을까 하고 역장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아 그 여자에겐 갈곳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출발이란 것은 이 하룻밤, 아니 단 몇 분 동안이나마 홀로 누릴 수 있는 난로의 따뜻한 불기만큼의 의미조차도 없는 까닭이리라. 역장은 문득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올 겨울 같은 혹독한 추위에 아직 얼어죽지 않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꿈이라도 꾸는 중인지 땟국물에 젖은 여자의 입술 한 귀퉁이엔 보일락말락 웃음이 한조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참 난처한걸. 난로를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고..... 하지만 결국 역장은 김씨를 깨우러 가기 전에 톱밥을 더 가져다가 난로에 부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눈은 밤새 내내 내릴 모양이었다.  
40 8월 외 1편/송은영
편집자
5551 2010-07-30
10.08월 3호 시 8월 8월에는 생기 잃은 풀뿌리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었다 나는 사랑의 노고와 무게를 알지 못해 모두에게 이방인이 되었고 어느 해 보다 뜨거운 정오의 태양은 새로운 유전자를 쏘아 비취색 바다를 금빛으로 수 놓았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도 공손하지 못한 8월은 매일 찻물을 끓이듯 활활 타올라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으며 그 여름 파장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한 나는 인연을 부둥켜 안고 목 조르는 버릇이 생겼다 신의 직장 저들은 우리가 내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우리는 힘겹게 살아도 아무 관계없이 등따숩고 배부른 직장인이라는 것 탄핵되는 대통령 하루 살이 장관 대법관도 징계를 먹지만 저들은 기물을 파손하고 법을 어겨도 어느 누구 처벌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신의 직장이란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것 눈먼 돈을 삥뜯으며 명령만 하면 되는 직장에 사는 저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뒤에는 강력한 신이 있다는 것 혀끝에 녹아 드는 초콜릿처럼 달콤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저들은 어떤 혁명도 없이 한끼 벌어서 한끼 먹는 사람보다 알고 보면 더 빨리 명퇴 된다는 것  
39 아니오 외1편/남태식
편집자
5168 2010-07-30
10.08월 3호 시 아니오 남태식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벗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남 태 식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tsnbd@hanmail.net  
38 병(甁) 속의 새 1 외1편/신순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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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0 2010-07-30
10.08월 3호 시 병(甁) 속의 새 1 신순말 포로로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았다 몇 번 몸을 출렁이다 이내 반듯해지는 가녀린 나뭇가지라도 그 무게쯤 가뜬하다 움직이는 새를 못 움직이는 나무가 저렇듯 품어주고 있음을 생각하니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하다 새가 깃든 고운 병 깨트리지 않아도 입이 좁은 병속 새를 누군가 꺼냈을까 앉은 새 떠난 후에도 가뿐히 선 나무처럼 해우소에서 -근심에 관한 명상- 신순말 어설피 씹은 하루 트릿하게 있노라면 매 순간 순간이 하루가 되는 거라 그 말씀, 생목 오르고 새 한 마리 날았다. 저 새, 순식간에 근심 풀어 나는데 한 길 사람 속 삭히지도 못하여 한나절 열두 고개를 돌고돌아 가는 길. 없는 복에 눈멀어 자꾸만 그윽대며 서리어 앉히는 일 늘 쉽기야 하는가 근심이 근심이도록 길을 내어 주는 일.  
37 창작과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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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4 2010-07-30
주목! 이 문학단체 본지(문예지 ‘창작과 의식’)는 2004년 11월 창간호를 발행하며 한 척의 배를 오늘 우리 문단에 띄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제호의 원칙에 따라 ‘창작’에 몰두하되 ‘의식’있는 작가로 3-40명 정도의 작가들로 결성된 것입니다. 당시의 우리 문단에는 등용문은 열려 있었지만 너무 흔쾌히, 즉 아무나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큰 차이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등단비용이 어느 정도 설정이 되면 작품에 관계없이 마구잡이 형식으로 등단이 가능했다는 게 본지 결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이라 봅니다. 이에 본지 작가회(당시 ‘문학회’) 회원들이 십시일반 협조하는 체제로 글다운 글, 시다운 시를 게재해 보자는데 뜻을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는 많은 담지 못할 입방아도 들었습니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온 길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며, 본지 제호를 벗어나지도 벗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아쉽다면, 초심에서 벗어난 경우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지만 과감히 배제를 시켜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大를 위해 小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몇 번이고 접어야하는가를 고심하기도 했습니다만 본지가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상’ 및 ‘청소년 백일장’에 미련을 버리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청소년 백일장은 전국적 내지 지역적으로 선별하여 즉석이거나 메일로 접수하여 시도하면서 ‘장원’ 1명, ‘우수’ 2명, ‘가작’ 3명을 당선시키면서 상장이나 부수적인 상품권 지급에서 본지의 어려운 재정난에 부닥치기도 하여 6회를 마감으로 일단 보류하고 있습니다만, 본지 작가회에서 월 회비 1만원씩 갹출하여 새로운 발돋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운영이사님 외 몇 몇 지인들로 하여금 본지에서 주관한 ‘문학상’ 제도를 개설하여 상금 50만원 지급과 동시에 상패를 증정하여 2009년 창작문학상 ‘신 영’ 작가님, 의식 문학상 ‘김청수’ 시인님에 이어 올 해 2회는 통합하여 ‘창․의 문학상’으로 설정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1급 뇌병변 장애인 ‘김철이’ 작가님을 선정하기도 했습니다.(참고로, 본지 문학상 선정에 있어서는 작품의 우월성은 물론이지만 문학 활동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 작가를 선정하기도 함.) 본지의 카페는 문학지의 홈페이지와 다름없다고 봅니다. 그저 카페활동이 아닌 작가의 작품을 올리고 이에 선정되는 작품은 문예지의 텍스트화로 출간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지 출간에 있어서 등단식과 함께 통상 3개월에 한 번 정도 모이는 것으로서 어떤 모임이 되었던 문학의 고취성이 담기지 않는다면 모임을 갖지 않습니다. - 참고 1 : 본지는 현재 통권 22호(여름호) 발간 중이며, 출판사를 겸하고 있으므로 개인시집 30호를 출간 했습니다. 창작과 의식(http://cafe.daum.net/feelingpoetry) 발행인 박세문("백강" <tpans1114@hanmail.net)  
36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외1편/차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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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2 2010-07-30
10.08월 3호 시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차 영 호 문경 가은에 가면 연개소문 세트장이 있고 삼족오三足烏 날개 펄럭이는 고구려적 안시성도 있어 성안 옥사獄舍에 걸린 주련柱聯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톡 까놓고 뒹굴면 왕후장상이나 백정고리짝이나 매일반이라는 말씀 저거 요새도 유효한 쿠폰일까 고치를 짓다 어둑발 내리는 대둔산 북사면을 오른다 머나먼 절집, 비단길앞잡이처럼 앞길 걷던 노인이 손사래 치며 주저앉는다 이윽고 일주문 턱인 돌 틈을 삐져 모롱이 도니 보인다 산이 반도가 지축이 기울어질 만큼 육중한 성곽, 저걸 딛고 어디까지 오르라는 것이냐 계단 밑 쪽방마다 틀어박힌 머리 파르란 여치들, 어쩜 그리 고치 속 번데기처럼 말갛게 길들여져 있을까 모두들 한사코 끌어안은 보퉁이 어여 내던지라고 한 무더기 새떼 높이 울며 허공을 난다 갑자기 엉치등뼈가 아프다 내 친구 젊어죽은 오쟁이가 불쑥 발치에서 튕겨 나와 독성각 괘불탱 수염 같은 터럭을 뽑아 고치를 짓는다 친친  
35 타인의 생/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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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4 2010-07-30
10.08월 3호 수필 타인의 생 이 중 기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아까부터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방안의 공기를 꼼꼼하게 읽고 있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벽시계 초침소리가 귓속을 텅텅 차댄다. 나는 방문 쪽으로 머리를 돌려놓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쪽으로 난 방문 앞에 붙박혀 있던 손바닥만한 햇살이 기척도 없이 걷히어 가고 제법 서늘한 기운이 깔린다. 어디 먼데서 낙엽 타는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내 코는 습자지처럼 낙엽 타는 냄새를 빨아들인다. 설핏, 어둠이 내린다. 환경의 변화가 아무런 충격이 될 수 없다면 어둠의 도래가 그러하리라. 나는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정신이 무척 맑아져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냉기에 소스라친다. 나는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갑자기 허기가 아랫배를 왈칵 거머잡는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는다. 몇 끼를 굶었던가, 지난 며칠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러나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해낼 수가 없다. 내장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차갑게 들린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나는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기억되지 않는다. 숙취에서 깨어날 때처럼 단절된 기억의 이쪽과 저쪽을 부지런히 들락거려 본다. 그러나 기억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며칠째, 엄습해 오는 오한과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콧물을 간신히 견디다가 해거름에 집을 나선 게 어젠지 그저껜지도 희미하다. 종규에게도 그는 연락두절이었다. 술에 취해 내게 들렀다가 간 기억이 희미한데 집을 비운지가 열흘이 지났다고 한다. 휴대전화는 전원이 끊어져 있고 노모와 누이가 있는 도시의 집에서도 그는 연락두절이었다. 나는 종규에게 애써 초조함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던성싶다. 종규의 강요로 두 점 접바둑을 두었는데 두 판을 내리 졌던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돌을 팽개치듯 내던지며 고꾸라졌던 기억이 난다. 이마를 찡그리며 아득하게 먼 기억의 끈을 당겨본다.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 신열을 앓는다. 끊임없이 뒤척거렸으리라.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린다.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으며 달려들어 전신을 낭자하게 물어뜯어 놓아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턱없이 발길질을 해대고, 갑자기 대형 화물차가 달려와 깔아뭉갰고, 느닷없이 주먹들이 날아와 명치끝에 박힌다. 으으으으, 씹어뱉듯 뇌까린 신음과 뒤척거림이 끝없이 이어졌으리라. 어쩌다 간신히 잠의 늪에서 빠져나와 게으르게 눈을 떠도 그러나 내 눈빛은 사물을 제대로 붙들어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냅다 등을 떠민다. 몸 곳곳에서 땀이 질척거린다. 나는 소리 없이 방안에 들어차는 어둠의 부피가 두터워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새벽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다. 가슴에 손을 대자 공명함처럼 울린다. 마치 부스럼이 앉은 상처나 물집을 건드렸을 때의 감촉과 흡사하다. 나는 등과 배를 쓰다듬으며 전신이 하나의 상처나 물집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것이 엉망으로 앓은 몸살의 후유증임을 안다. 나는 허리 뒤에 두 손을 대고 힘을 준다. 끊어질 듯 허리가 아프다. 아직 다 철수하지 못한 몸살의 잔류병 탓이다. 나는 허리를 반듯하게 눕힌다. 어느새 방안은 수중처럼 깜깜하다. 어둠의 무게에 숨이 가쁘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고 대문 쪽에다 신경을 매복시킨다.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는 거침없이 마당을 가로질러와 방문 앞에서 멎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연다. 그러나 그는 거기 없고 찬바람이 이마를 치고 간다. 나는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무릎을 당겨 배에 붙이고 새우처럼 척추도 접어 몸을 조그맣게 만든다. 문득 배고프다는 생각 끝에 허기가 사정없이 아랫배를 걷어찬다. 내리 여섯 해나 농사를 망친 그의 부엌 냄비 속에는 가끔씩 거미가 줄을 치기도 했다. 달포 전에 내가 갖다 준 김치는 맛이 변했을 것이고 라면을 끓여 먹고 남은 찌꺼기를 노린 쥐들이 냄비 속을 들락거릴 것이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서른여섯 사내의 부엌과 방을 나는 눈을 감고 찬찬히 살피다가 어금니를 깨문다. 이마가 넓은 갓 서른 사내를 빚더미에 앉혀버린 건 순전히 내 탓이었다. 그는 열심히 살았으나 농사는 어설펐다. 농운은 늘 그를 비켜갔다. 올해 고추농사마저 징그럽게도 쏟아 부은 장맛비가 깡그리 망쳐버렸다. 2천 평을 조금 넘는 부재지주의 땅을 얻어주며 꼬드긴 6년 전의 내 잘못을 술이 취해 탓하던 그의 젖은 목소리가 가슴을 후빈다. 형님…… 이건 내 인생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타인의 생 이었어요. 그 젊디젊은 나이에 6년이나 타인의 생을 살아주다 만 사내의 절규 앞에 나는 안주도 없이 소주만 들이켤 뿐 무어라 한 마디 변명할 자신이 없었다. 젊은 사내의 생을 파탄 내버린 것은 나라의 농업정책이 아니라 내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디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를 만나고 싶다. 6년이나 타인의 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픔을 20년 넘게 타인의 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말 몇 마디로 덮기에는 태부족이겠지만, 나는 그를 만나 이 한 마디는 꼭 들려주고 싶다. 궁색한 변명일지라도, 빨래줄 가득 흰 기저귀가 펄럭이는 나라가 그리웠노라고.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 것들의 깔깔거림을 보고 싶었노라고. 단지 그것뿐이었노라고.  
34 붉은 밭 1외1편/박명희
편집자
4922 2010-07-30
10.08월 3호 시 붉은 밭 1 박명희 집에서 먼 밭 돌 반 흙 반이던 붉은 밭 엄마는 그 밭가 느티나무 아래 밥을 부려놓고 나를 부려놓고 온종일 밭을 일구셨다 사방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 어린 나는 면벽수행법을 배웠고 엄마는 한숨 같은 휘파람을 배웠다 밭 가운데에 맑디맑은 옹달샘을 품은 밭 아홉 식구 밥을 품은 밭 이따금 미풍이 책장을 넘기 듯 나를 넘기면 붉은 밭이 나오고 옹달샘이 나오고 무지개가 나오고 하늘빛 나이아가라치마를 입은 젊은 엄마가 나온다. 붉은 밭 2 박명희 제 어미 자궁을 찢고 목화꽃 탄생하는 목화밭을 온종일 바라보고 있었지요. 몸이 무려울만큼 심심했지요. 그래서 꿩처럼 껄껄 울어보았지요 산도 껄껄하고 울었지요. 엄마, 빨갱이 내려온다며 옹달샘에서 물 한 바가지 떠다 보리밥 한 덩이 말아줬지요 열여섯 살 어린 빨갱이 내려와 밥 빼앗아 간다며 겁 줬지요 그때 나는 빨갱이가 밥 뺏어가는 짐승인 줄 알았지요. 살쾡이 같은 너구리같은  
33 꽃이 피는 이유 /이숲
편집자
3886 2010-07-30
10.08월 3호 소설 꽃이 피는 이유 이숲 해는 지고 사위는 막 어두워지는데 이상하게 눈앞이 환했다. 가로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씻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벚꽃이다. 하천 둑길을 따라 임립한 수십 년생 벚나무들이 팝콘 같은 꽃을 넘치도록 달고 있었다. 꽃이 어둠을 밝히기도 하는구나. 그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꽃은 그래서 피는구나.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피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꽃으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준 조물주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든 해를 넘게 살면서 수없이 봄을 맞고 벚꽃을 비롯한 숱한 꽃을 보았으며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꽃이 피는 이유라든지, 꽃을 피워 준 존재에게 감사함을 느낀다든지.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은 삶을 가늠하기 어려운 오늘에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다니. 심사가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전립선암 치료를 받느라 입퇴원을 반복하고부터 꼭 제시간에 맞춰 약을 먹으려고 식사시간을 엄격하게 지켰다. 식사 전후로는 늘 이렇게 가벼운 산책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입맛도 없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회장님, 사꾸라 꽃이 절정인 것 같습니다.” 벚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자 최성환이 한마디 했다. “저녁 진지 드시려면 이제 슬슬 돌아가야 겠는데요,” 발걸음을 돌이키는데 어찔해지더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최사장이 얼른 노인을 부축했다. 기운이 없어 몸이 허방을 떠다니는 것 같아 가끔 현기증을 느끼는데도 아무도 지팡이를 권하지 않았다. 하기는 아직까지는 혼자 걸을 수 있었다. 곧 기운을 차리면 현기증도 없어지고 다리 힘도 생길 것이다.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면서 식사에도 특별히 신경 쓰고 좋다는 건강식품도 매일 먹고 있으니 곧 좋아질 것이다. 의사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들 말했다. 하천 둑이 끝나는 내리막길에서는 최성환이 숫제 옆에서 부축을 했다. 건강할 때 5분이면 닿을 길을 10여분이나 걸었다. 대문이 저만큼 보이는데 운전하는 박 과장이 랜턴을 들고 대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아직 훤한데 뭐 하러 불을 들고 와.”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래도 길바닥은 어두운 걸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시면 큰일이죠. 지팡이라도 짚으시 면...... .” 최사장이 주의하라고 헛기침을 한 번 하자 박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가끔 쓸데없는 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마음에 안들 때도 있지만 그만큼 순진한 속이 다 들여다보여서 이십 년 째 운전을 맡기고 있었다. 어느 때는 몇 년 전에 먼저 간 아내처럼 잔소리 같은 걸 할 때도 있었다. 모처럼 입맛이 좋아서 입에 맞는 음식을 건강할 때처럼 양껏 먹으려고 하면 꼭,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무시하고 좀 더 먹으면 꼭 소화가 안돼서 고생을 했다. 최사장은 박과장이 너무 허물없이 군다고 노인의 식탁에 앉는 걸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성환이 가끔 며칠씩 내려와 머물 때는 박과장이 알아서 나중에 따로 밥을 먹었다. “머위나물은 뒤뜰에 막 올라 온 걸 뜯어다 무쳐서 땅기운이 그대로 살아있고요, 이 두릅은 뒷산에서 조금 전에 뜯어 데친 거니까 아주 싱싱합니다.” 이곳 시골 집 살림을 맡아서 하는 먼 조카뻘 되는 애 어멈이 냅킨을 앞 접시 옆에 놓으며 말했다. 노인에게 먹는 게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걸 아는지 애 어멈은 식탁 차리는 일에 무척 애를 썼다. 그리고 한 접시 한 접시 마다 특별한 사연과 의미를 만들었다. 하기는 같은 나물이라도 그저 시장에서 사다 무친 것보다 어느 땅에서 나고 어떻게 자란 걸 알고 먹는 게 훨씬 맛이 있었다. 음식 접시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 최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서든 식사를 제대로 하게 하려는 노력 같아서 노인은 한 수저라도 더 먹으려고 노력했다. “금방 뜯어다 무친 이런 머위나물은 서울선 구경하기도 힘듭니다. 섬유질도 많고 순전히 흙냄새만 맡고 자란 무공해 나물이니까 몸에 약이 되지요.” 어린 머위를 데쳐서 된장에 무친 건 아내도 즐기던 것이다. 특히 복 더위가 기승일 때는 다 자란 머윗대를 베어다 손질을 해서 들깻국물에 뭉근히 볶아 먹는 좋아했다. 그걸 한 해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서울 집에 있다가도 그 무렵이면 어김없이 시골집에 전화를 해서 머윗대를 베어서 올려 보내게 했다. 몇 년 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내가 죽은 다음부터 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오늘 따라 더욱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젊은 시절에 옷감 장사를 하며 환기 안 되는 공장에서 먼지를 많이 마셔서 그랬는지 폐가 약했던 아내는 결국 폐암으로 세상을 버렸다. 돈으로 낫게 할 병이 아닌데도 일본으로 미국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마지막 길마저 고생을 시키고 말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 외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던, 도량 넓고 속 깊은 여자였다. 일이 안 풀려 몇 번이나 빚더미에 올라앉아도 매번 다시 시작하고 결국에는 큰돈을 모으게 된 것도 그 사람 덕이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하나 얻은 아들을 애지중지 자기자식으로 길렀지만 마지막 길에는 그 아들 손을 잡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아들은 생모와 기른 어미 사이에서 그 누구의 온전한 아들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유학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고 이국에서 그 나라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아들이 누린 물질의 풍요와 어른들의 일방적인 사랑은 아들을 박정한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았다. 아들은 부모가 병이 들면 의사와 간병인과 식사 수발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어 줄 사람과 병원에 데려다 줄 운전사가 있으면 그 필요가 다 채워지는 줄 아는 것 같다. 더구나 이생에 작별을 고하는 순간에 늙은이가 느낄법한 두려움과 슬픔을 자식이 덜어 줄 수도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인 역시 그랬다.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왜 불효가 되는지 늙어서야 비로소 이해를 했다. 비록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 초년에 마음고생을 했다고는 해도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행복이 부모와 조상 덕분임을 알지 못하는 아들에게 그런 것까지 바란다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듯하다. 언짢은 생각 때문에 영 입맛이 없어 아욱국에 밥을 말아 겨우 반 그릇을 비웠다. 거실로 나와 어멈이 쌀가루와 강낭콩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화과자 반쪽과 최사장이 비싸게 주고 구했다는 푸얼차를 마셨다. 약 먹을 식후 삼십 분까지 거실에 앉아 있으려고 하니 최성환이 뉴스를 보시라며 티비를 켰다. 요즘 뉴스에는 한반도에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알려주는 듯 한 보도가 한두 가지는 꼭 나왔다. 순식간에 지나간 세월이지만 그 동안 두 번이나 전쟁을 겪었다. 소년시절에는 선박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덕에 일본에서 고생 모르고 자랐지만 대동아 전쟁 말기에는 공습과 식량 부족을 겪으며 난생 처음 전쟁의 공포를 알았다. 대학 졸업반이던 해에 육이오 전쟁이 났다. 통역 장교로 미군 부대에서 몇 년을 보냈다. 동년배들보다는 몸고생을 덜한 편이었지만 전쟁의 참혹함까지 덜 겪은 건 아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의 처지가 그대로 나오는 꿈을 꾼다. 학교에서 일본승전기원 웅변 연습을 하고 허기진 채 집에 돌아와 텅 빈 솥 안을 들여다보며 허망하해 하는 소년의 모습, 길가에도 논밭에도 숲에도 빈집에도 어디에 가도 부패해가는 시신들이 넘쳐나던 모습. 그 숱한 죽음에서 살아남아 말년에 이르렀는데 다시 전쟁이라니. 몇 년 만 더 살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지만 전쟁이라면 어서 눈을 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노인들처럼 지금까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살아왔지만 한 번도 전쟁을 해서 공산주의자들을 쳐부숴야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평생 기업가로 손익을 따지는 일만 하며 살아서 그런지 전쟁만큼 손해나는,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고귀한 생명을 셀 수 없이 잃는 일과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면서 애써 이루어놓은 산업을 잿더미로 만드는 일이 그 일인데. 숱한 애국자들은 전쟁을 해서라도 공산주의자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애국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평생 돈벌이만 골몰하며 살았지만 나름대로 수출에 공을 세워 산업훈장도 받고 했으니 그만하면 애국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군부 통치 시절에 정부의 특혜를 받으며 돈을 벌었다는 비난도 받은 적이 있지만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예편한 군인들 몇몇을 고위 관리자로 활용한 일을 두고 그렇게 말하면 억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에게 나쁜 전력이 있다면 그 보응은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안정된 직장을 얻었고 노인은 든든한 바람막이를 활용했을 뿐이었다. 모름지기 애국이란 것은 내나라 내 민족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이지 아무리 선한 동기를 내세워도 사람을 죽이는 일일 수밖에 없는 전쟁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악행이라고 생각했다.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 눈앞에 두고 그 애국이란 걸 생각하니 참 우습고 부질없는 게 그것 같다. 아버님은 일찍이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해서 유능한 선박 엔지니어로 일본에 충성한 셈이고 그 아들인 노인은 통역장교로 연합국과 미국을 위해, 또한 이후에는 외화벌이로 조국에도 충성했다. 노인의 외아들은 미국의 일등시민으로, 기업가로 살면서 그 나라에 기여하고 있다. 손녀는 중국의, 세계적인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그 나라 국적의 남자와 교제한다니 어쩌면 그 나라의 애국 시민으로 살는지도 모른다. 국가주의자들의 시선으로는 가족 모두가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했겠지만 자신이 처한 그때의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동족이든 이민족이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최상의 인생을 산 셈이 아닌가. 그는 꺼릴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은 무엇이라도 빼앗지 않는다면 손가락질 받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말씀을 자주하셨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어쩌면 일본에 기여한 당신의 불편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던 교훈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아버님 말씀이 마음에 박혀서인지 다른 사람이 원망할 일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후사를 얻으려고 조강지처에게 아픔을 준 일이다. 아내가 스스로 권했던 일이라고는 해도 아내로서 여자로서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이었다. 아들과 아들의 생모가 받았을 고통이 있다고 해도 아내에 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내는 전쟁 직후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구제 옷으로 장사를 시작해서 남편의 사업 밑천을 모을 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여장부였지만 아이 문제는 구시대적으로 대처했다. 입양도 양자 들이는 일도 모두 마다 하고 굳이 남편의 핏줄을 원했다. 남편의 피를 이은 아이를 기르는 어미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내는 잠깐 그 행복을 맛보긴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이 얻은 건 어미에게 행복을 주는 아들이 아니라 상속자였다. 상속자. 어떤 이는 애완동물이나 소나무에게도 상속을 했고 또 어떤 이는 자선 단체에 재산을 남기기도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돈이 신의 자리에서 군림하는 세상이라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돈 자랑하는 일, 무익한 일일 뿐이다. 아들에게 갈 것은 이미 해외 투자 형식으로 모두 상속했다. 빌딩 서너 개와 회사 주식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이공계 우수학생지원과 연구 기금 지원을 위해 설립한 재단에 상속될 것이다. 매각되지 않아 세금만 축내는 각지의 부동산도 최성환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 재단에서 맡을 것이다. 노인이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최성환은 NHK를 보시라며 채널을 바꾸었다. 이십대 후반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경영자까지 한 최사장은 지금껏 35년을 곁에 두었다. 그도 이젠 예순을 넘은 사람인데 여전히 젊은 비서 시절처럼 사소한 것까지 챙긴다. 들어가서 쉬라고 해도 10시까지 앉아 있겠다고 한다. 일본어 방송에서도 여전히 뉴스를 한다. 뉴스나 신문을 안 보게 된 게 몇 년은 되었다. 병치레를 하면서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해지고 희비에도 감정 변화가 둔하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도 현재나 미래의 이야기보다는 지나간 시절의 얘기를 하게 된다. 지나간 시절, 공장을 늘려 짓고 수출량을 늘리고 어떤 사람을 데려다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하는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방금도 최성환은 오사카 지방 뉴스가 나오자 지난 시절에 알게 된, 그곳 출신의 일본인 바이어 우에다 얘기를 했다. 지금도 한국에 나올 때마다 연락을 해서 식사를 하곤 하는 사람이다. 그가 두어 번 초청을 해서 오사카에 가서 관광을 하고 골프를 하기도 했다. 유난히 개를 좋아하던 우에다상이 공장 경비견으로 키우던 진돗개를 만지다가 물렸던 적이 있었다. 문병을 가서 백구를 없애야겠다는 최성환의 말에 그는 입원실 침상에 무릎을 꿇고 백구를 용서해달라고 절을 해서 최성환을 당황하게 했다. 이십여 년 전 일이지만 그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우에다상 덕분에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어보았다. 화살처럼 순식간에 날아 가버린 세월이지만 지난 일을 생각하면 어떤 일들은 수백 년 전 얘기처럼 아득하다.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지만 아득하게 기억되는 시간이라니, 참으로 모순이다. 일본의 간토 지방 소도시에도 벚꽃이 만개한 모양이다. 꽃구경 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그림이 나온다. 바쁘게 일만 하던 지난 시절, 꽃놀이 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저런 한가로운 뉴스로 바뀐 계절을 알아차리며 살았다. 열심히 살았고 성공한 삶이었다고 자부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여전히 미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성공한 삶이었는가. 무엇을 두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갑자기 의심스러워 진다. 큰 재산을 모으고 풍요로운 말년을 보내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최성환이 방에 들어가 주무시라고 말을 해서 정신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가시겠느냐고 물었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침실로 들어가기 싫었다. 넓고 천정이 높아 썰렁하기만 하던 거실이 더 편안하다. 최성환은 먼저 들어가겠다며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몸과 정신의 모든 정기가 빠져나간 듯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목소리조차 잠겼다. 앉은 채로 몸을 소파에 기댄다. 이대로 모든 정기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불러야하나. 노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단념한다. 눈앞이 환해졌다. 벚꽃이다. 아까 어스름해질 때 본 꽃인지, 방금 전에 뉴스에서 본 간토지방의 꽃인지, 우에다와 함께 본 오사카의 벚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찬란한 빛이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그래서 꽃은 피는 거였구나. *  
32 ‘우리들의 문학’은 안녕하신가?/한경희 [1]
편집자
3665 2010-07-30
‘우리들의 문학’은 안녕하신가? 한경희 서경식 교수가 미국의 노마필드 교수를 초청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라는 특강을 마련한 내용이 “교양 모든 것의 시작”으로 정리되어 있다. 교양과 우리 삶이 어떻게 관련되어있는지를 아프게 묻고 있는 질문을 통해 우리도 함께 고민해보자.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서경식 저, 이목 역, 노마드 북, 2007.) 서경식 교수의 책 내용을 요약하면서 교양이 지닌 힘에 대해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굳이 ‘교양’이란 단어가 불편하다면 ‘상식’이라도 좋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면 또 어떤가. 갈수록 살아가기 어려우니 문학책 읽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끼지 못한다. 시대의 모서리에 문학이 서성거리는가, 모를 일이다. 지금 어떤 목적을 위해 인문교양이 필요한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전쟁, 기아, 빈곤을 퇴치해야 한다. 교양은 비판적 인식을 키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는 능력이다. 미국사회, 최고의 강대국이지만 돈 없고 가난한 국민은 정규교육과 의료서비스를 받으려면 군대에 입대하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 혹, 전쟁에서 죽더라도 그 생명의 가치는 사회적 손실로 인식되지 않는다. 불평등의 폐해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다. 전쟁을 자주 도발하는 미국에서 전쟁의 실제 부담을 지는 사회적 약자들은 군인과 그 가족이 전부라는 것, 시카고대학 내 반전 토론회에서 시카고 노숙자 75%에서 80%가 베트남전쟁의 재향군인이라는 사실, 요즘 신입 노숙자들은 거의 걸프전 참가 병사라는 것, 전쟁후유증은 오래 지속된다. 일본의 경제적 풍요가 만든 매력적인 현상으로 일본 대학생이 캄보디아로 가서 난민 실태를 체험한다. 이 청년에게 성원을 보내고 싶지만 동시에, 드는 생각은 일본도시의 노숙자들과 일본 젊은이들의 교류가 가능한가. 해외의 난민과 달리 민족(국민인)의 노숙자를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캄보디아는 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지만, 국내 난민은 자신도 이처럼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일으킨다. 국가는 경제난을 전쟁으로 해결한다는 것, 그리고 전시체제를 만들기 위해 맹목적인 애국심(쇼비니즘)과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시민의 교양으로 국가가 부추기는 전쟁강요와 (민족주의, 애국심의 유발) 다른 시민간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서경식 교수는 주장한다. 교양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그 잔인한 실상을 증언한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책에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 양심, 대화능력 등 인간성의 척도로 간주되는 관념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산산조각이 난 관념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막연한 믿음의 근거는?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실제 현실에서 버젓이 일어난다면? 아우슈비츠는 영양 섭취가 절대 부족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3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가혹한 강제노동을 매일 강요받았고, 사소한 규칙이라도 어기면 무시무시한 고문과 처벌이 있던 곳, 이런 공간에 있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발하거나, 어떻게 남을 속여서 그의 물건을 훔칠까, 나보다 더 약한 인간을 짓밟아 살아남을까를 궁리하는 곳이다. 여기서 동료 수용자 ‘피콜로’가 시를 낭송해달라고 해서 떠오른 단테 “신곡” 중 오디세우스 노래가 떠올랐고 불어로 번역해서 틈나는대로 들려주었다. 레비는 이탈리아인이고 피콜로는 프랑스인. “그대들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오디세우스 역시 트로이 전쟁을 경험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난의 항해를 계속했다. 자신의 동료에게 이 시를 전달할 때, 자신의 생명줄인 빵마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교양이 나를 도와주었다.”라고 했다. 이 시가 수용소 생활을 견디게 했다. 그런데 이 저자는 수용소에서 귀환한 뒤 40년을 아우슈비츠 증인으로 활동하고 살았지만 1987년 자택계단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고,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 산다는 그의 신념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이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바로 현대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자신이 사는 곳에 틀어박혀 안만 바라보고 외부를 볼 줄 모른다. 자신 외부의 참혹한 현실을 애써 못 본체 한다. 덕과 지혜를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자진해서 야만화가 되고, 기계로 변해온 존재이다. 이런 현실을 방치해 둬도 좋은가. 역사 속에서 안과 밖을 다 봐야 한다. 타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연하다는 듯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를 막지 못한다. 우리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지난날 인문지식은 소수 특권 엘리트 남성만이 향유, 이때가 그야말로 야만, 냉혹의 시대였다. 이젠 대중과 시민이 인문적 지식을 향유해야 한다. 서경식 교수의 책 내용을 간추린 것이라 해도 좋을 만큼 내용 전달에 멈췄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았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야만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이 교양이라면 고색창연하더라도 교양은 되새김되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교양이 불안하다면 우리들의 문학은 안녕하신가를 묻고 싶다. 한경희(문학평론가)  
31 유행가 다시 부르다 외 1편/정선호
편집자
4763 2010-07-30
10.08월 3호 시  유행가 다시 부르다 리메이크된 유행가, 가사는 그대로인데 음정과 박자 바뀌었군요. 젊은 작곡가들 노래가 처음 만들어지던 세월 리메이크한 것일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한때 무대 위 화려하게 장식했던 노래 세월 흐르자 강물 속에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떠올라 흐르는 것이지요. 다시 떠올라 예전 사람들과 요즘 사람들 섞여 함께 바다를 향하는 것이지요. 예전보다 빠르게, 외국어도 섞여 불리고 있네요. 보세요 세월이 리메이크된 지금, 펑퍼짐한 청바지 입은 늙은 가수들 묵혀 두었던 기타 들고 길 나서고 있네요. 젊은 가수들 그들의 악보 들고 자동차로 거리를 질주하고 있어요. 그 노래 강물위에 꽃밭 이뤄 환하게 흐르고 있네요. 수로왕비릉* 앞에서 물을 긷다 수로왕비릉 앞 약수터에 사람들 가득하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에 도착해 먼 여정에서의 목마름에 약수터 만들었다 살아있는 동안 백성 위해 약수를 주고 죽어서도 후손들 위해 무덤에서 약수 만들어 올려준다 사람들 젖 먹던 시절 떠올리며 물 받고 있다 어느 깊은 밤 무덤 속이 무척 궁금해 무덤에 들어갔다 들어가 약수 만드는 수로왕비와 금관가야의 인부들을 만났다 그들과 인사하고 약수 만드는 공정을 지켜보았다 왕비는 나를 능 앞 공주노래연습장으로 인도했으며 약수로 술 빚어 주었다 그 곳엔 왕비의 딸들 모여 가야금 연주곡에 맞춰 노래하고 있다 왕비 역시 불멸의 가수 꿈꾸며 밤마다 노래를 연습해 왔던 거였다 수로왕비가 백 오십세까지 살았던 비법은 약수와 약수로 빚은 술을 마시고 매일 밤 달을 보며 노래를 불러서였던 거다 *. 수로왕비릉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가야의 수로왕비의 능 **** 정선호. 시집 『내 몸속의 지구』  
30 (독자 투고작)구박데기 밥상 외 1 편/최기종
편집자
4770 2010-07-28
10.08월 3호 시 구박데기 밥상 최기종 어깨 아픈 아내를 대신해 밥상을 내었다. 아내의 웃음 한 줌 받아낸다고 깐에는 큰 맘 먹고 밥상을 차렸다. 밥은 밥통 속에 있었고 국은 가스렌지에다 데우면 되었고 찬거리도 줄줄이 냉장고에서 기다린다. 하나씩 꺼내어 덮개만 벗기고 밥상에 올렸다. 하! 이렇게도 수월한 걸 몰랐네. 1식8찬에다 국물까지 보탰으니 상다리가 휘었다고 자찬하면서 아내를 깨워서 밥상머리 앉혔는데 이제 아내의 칭찬이 눈처럼 내릴 거라고 '룰루랄라'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아내는 눈도 주지 않고 푸념일색이다. 이거 구박데기 밥상이구만. 어제 먹던 걸 그대로 내면 어떠케에? 이거야 칭찬은 고사하고 돌무더기만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밥상을 차리면서 최 기 종 간장 한 종지 내는 데도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간다. 생선 발라 드시던 어머니의 웃음이며 무시밥 팍팍 비벼 먹던 사랑님이며 입 삐척거리며 콩조림 뱉어내던 아들내미며 깨소금내 풀풀 핑기던 딸내미 모습이 어른거린다. 삼색나물 묻혀 내는 데도 빛과 소리와 향이 스며든다. 조물조물 바삐 움직이는 손놀림 따라 데쳐낸 음표들이 소리를 내고 금이 되고 은이 되는 색깔이며 향내가 소복소복 봄산을 이룬다. 뒷모습 그대로 종종거리면서 손을 놀리고 도마를 치고 불을 댕기면서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는 데 기본 찬거리만으로도 세상은 광활했고 호화판 잔치상 상다리가 휘어도 세상은 초근목피, 보리고개처럼 빈약했다. 된장찌개 한 뚝배기 끓이는 데도 행주치마 저고리 다 젖는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리를 만든다고 세상에서 가장 질긴 끈을 잇는다고 손으로 발로 가슴으로 차려 놓은 밥상 위에 복숭아꽃, 살구꽃 활짝 피었다. **** <만경강> 동인, <목포작가회의> 활동. 교문창 회원시집『대통령 얼굴이 또 바뀌면』에 작품 발표<1992년> 시집『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29 숲속의 죽음 / 셔우드 앤더슨
주진
5482 2010-07-21
내가 좋아하는 소설 * 이 소설을 읽은 건 3년 전이었다. 한 노파의 쓸쓸한 삶과 죽음을 어떤 기교도 없이 담백하게 그려낸 소설이었다. 노파는 삶에서 그랬듯 죽음 앞에서 또한 철저하게 혼자였으며 삶이 죽음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그 정도의 인상을 받고 책을 덮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파의 죽음이 가끔 생각났다. 때론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이 노파와 겹쳐지기도 하고 지금 이순간의 나 자신 같기도 했다. 차고 맑은 겨울 달빛 아래 숲속 공터에서 삶에 지친 노파가 잠들었다가 얼어죽었고 그 주위를 일곱 마리의 개들이 무리지어 빙빙 돌고 있다. 노파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개들 역시 개와 늑대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달리고 있었다. 어떤 수식도 의미도 필요없이 그 자체로 처절한 광경이었다. 노파의 소외된 삶이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토록 처절한 어떤 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소설 속 문장이 거슬리기도 했으나 아름다움의 뿌리가 슬픔이었던가, 존재의 슬픈 연원을 엿본 느낌이다. * 셔우드 앤더슨(1876~1941) 미국에서 가난한 마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마흔이 넘어 문학에 투신했으며 <오하이오주 와인즈버그> <검은 웃음소리> <알의 승리> 등 주요 저서가 있다. 플롯 중심의 전통적 단편소설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단편을 개척해간 작가로 현대 미국소설의 원조라고 불린다. 헤밍웨이와 울프, 포크너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숲속의 죽음 1 그녀는 노파였다. 그리고 내가 살던 읍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농가에서 살았다. 시골에서나 조그만 읍에서 사람들은 그런 노파를 흔히 본다. 그러나 그런 노파들에 관해서 사람들은 별로 알지 못한다. 그런 노파는 노쇠한 말을 몰고 읍내로 들어오기도 하고 장바구니를들고 터벅터벅 걸어오기도 한다. 닭 몇 마리와 달걀을 팔려고 바구니에 그것들을 담고 식료품 가게로 향하기도 한다. 거기서 그녀는 물건을 흥정해서 그것들을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나 콩 같은 것들과 맞바꾼다. 그리고 설탕과 밀가루 한두 파운드를 사기도 한다. 그런 후에는 정육점에 가서 개 먹이를 얻는다. 10 내지 15 센트어치쯤 물건을 사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꼭 뭔가를 공짜로 얻는 것이다. 전에는 정육점에서 간(肝)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거저 주었더랬다. 우리 집에서도 늘 간을 먹었다. 언젠가는 형이 읍내 시장 근처 도살장에서 소 한 마리의 간을 몽땅 얻어왔는데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나중엔 진력이 날 정도였다. 돈 한 닢 안 들이고 말이다. 그 후로는 간에 대해서라면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 시골 노파는 간과 수프 뼈를 약간 얻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한담을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필요한 물건을 구하면 즉시 도망치듯 집을 향해 떠나는 것이었다. 노파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녀를 태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마차를 타고 길을 따라 곧장 달리면서 그런 노파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염증성 류머티즘이라는 병으로 앓고 있던 어느 해 여름과 가을, 우리 집을 지나 읍내에 드나들던 그런 한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는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귀로에 올랐다. 크고 삐쩍 마른 개 두세 마리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노파는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는 여자였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이름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생각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지금에야 갑자기 나는 그녀를, 그리고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이름은 그라임즈였고 읍에서 4마일쯤 떨어진 조그만 계곡의 둔덕에 서 있는, 칠도 하지 않은 조그만 집에서 그녀의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살았다. 남편과 아들은 불량배였다. 아들은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형무소 신세를 진 경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남편이 말을 훔쳐서 딴 곳으로 빼돌린다고 수군거렸다. 이따금 말이 없어진 사실이 드러날 때면 그 남편도 역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말을 훔치는 현장을 목격하진 못했다. 언젠가 내가 톰 화이트헤드네 마방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그 사람이 그곳에 와서 앞쪽의 의자에 앉은 적이 있었다. 두세 사람이 거기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잠시 그렇게 앉아 있더니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자리를 뜨면서 그는 몸을 돌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도전의 빛이 담겨 있었다. ‘좋아, 나는 친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어. 너희들이 나에게 말조차 붙이려고 하지 않은 거야. 이 읍내에선 어디를 가나 그런다구. 언젠가는 너희들이 아끼는 말이라도 없어져 보라구. 그땐 어쩔 거야?’ 물론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네놈들 턱이라도 바숴줄까 부다.’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 그 눈의 표정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남자의 집안도 한때는 돈푼깨나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이름은 제이크 그라임즈였다. 이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의 아버지인 존 그라임즈는 그곳이 새로 개간될 당시에 제재소를 하나 가지고 있어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그는 술에 빠지고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해서 그가 죽었을 때는 별로 많은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재산은 제이크가 다 날려 버렸다. 곧 벨 나무도 없어지고 땅도 거의 다 거덜이 나버린 것이다. 제이크는 그가 어느 유월에 밀타작 일을 도와준 한 독일인 농장 주인으로부터 아내를 얻어왔다. 그녀는 그때 어린 처녀였는데 몹시 겁을 먹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 농장 주인이 이 소녀에게 뭔가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계약 고용된 소녀였을 텐데 농장 주인의 아내는 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어디 가고 없을 때면 그 소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장을 보러 읍내에 나가면 농장 주인은 그 소녀를 쫓아다녔다. 그녀는 제이크에게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후에 말했지만 제이크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녀를 처음 꼬여냈을 때 쉽사리 그녀를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만일 독일인 농장 주인이 참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와 결혼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농장에서 타작일을 돕던 어느 날 밤 그는 소녀를 마차에 태우고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요일 밤 다시 그녀를 데리러 왔다. 소녀는 주인 모르게 집 밖으로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녀가 마차에 막 올라타려고 할 때 주인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날이 거의 어두워질 무렵이었는데 말 머리께에서 그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가 말 고삐를 움켜쥐자 제이크는 말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결판을 낼 참이었다. 독일인 주인은 아주 거친 사내였다. 아내가 알건 말건 아마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제이크는 채찍으로 그의 얼굴과 어깨를 마구 후려쳤지만 말이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마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나이는 본격적으로 한판을 붙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싸움을 보지 못했다. 말이 달아나기 시작해서 길을 따라 거의 1마일쯤 내달린 후에야 소녀는 가까스로 말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길가의 나무에 간신히 말을 비끄러맸다(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 나 자신도 의아스럽다. 아마도 어렸을 때 들은 마을 이야기들이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탓이 아닌가 싶다). 제이크는 독일인 주인을 해치운 후에 그곳에서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차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울고 있었다. 그녀는 독일인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해보려고 애쓴 일, 한 번은 헛간 속으로 자기를 뒤쫓아 들어온 일, 또 언젠가 우연히 집 안에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앞이 다 드러나게 자기의 옷을 찢었던 일 등 제이크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만일 안주인이 마차를 몰고 대문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주인은 그녀를 틀림없이 겁탈했을 거라고 소녀는 말했다. 안주인은 물건을 사러 읍내에 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래, 아내가 말을 헛간으로 끌고 들어올 거라구.’ 주인은 아내에게 들키지 않고 밭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만일 이를 일러바치면 죽여 버리고 말겠노라고 소녀에게 말했다. 자, 그러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소녀는 헛간에서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잘못해서 옷이 찢어졌노라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생각이 나는데 소녀는 계약 고용된 몸이었고 부모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그렇게 계약 고용된 아이들은 가혹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어서 노예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는 고아원이라는 것도 별로 없던 때여서 그런 아이들은 법적으로 어떤 가정에 예속이 되었다. 어떤 가정에 가느냐는 완전히 운에 딸린 문제였다. 2 그녀는 제이크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지만 딸은 곧 죽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가축을 먹이는 일에 전념했다. 그것이 그녀의 일이었던 것이다. 독일인 농장에서도 그녀는 주인 내외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을 맡아했다. 안주인은 엉덩이가 펑퍼짐한 건장한 여자여서 대부분의 시간을 남편과 함께 밭에 나가서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집안에서 주인 내외를 먹이고 헛간에서는 소를 먹이고 또 돼지와 말과 닭들도 먹였다. 소녀 시절 그녀의 매일매일의 모든 시간은 뭔가를 먹이는 일로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제이크 그라임즈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제 그를 먹여야 했다. 그녀의 몸은 자그맣고 가냘퍼서 결혼한 지 서너 해가 지나고 두 아이를 낳고 나자 가녀린 어깨가 굽어지기 시작했다. 제이크의 집은 계곡 가까이에 있는 빈 제재소 부근에 있었는데 그는 늘 여러 마리의 큰 개들을 집에서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훔치지 않을 때면 말을 사고파는 장사를 했기 때문에 볼품없이 비쩍 마른 말들을 늘 집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돼지 서너 마리와 암소 한 마리까지 기르고 있었는데 이 가축들은 얼마 남지 않은 그라임즈가의 땅에서 모두 방목을 하고 있어서 제이크는 거의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빚을 내서 탈곡기 일습을 사들여 몇 년 간 운영해 보았지만 수지가 맞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이크가 밤에 그들의 곡식을 훔쳐내지나 않을까 의심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 먼 곳까지 가야 했는데 그건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겨울철에는 사냥도 하고 땔나무도 만들어서 가까운 읍내에 내다 팔기도 했다. 아들 녀석은 자라면서 꼭 아버지를 닮아갔다. 그들은 함께 취했다.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안에 먹을 것이 없으면 제이크는 아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녀는 닭 몇 마리를 따로 기르고 있었는데 그런 때면 얼른 닭 한 마리라도 잡아야 했다. 그 닭들을 다 잡아먹어 버리면 읍내에 내다 팔 달걀도 없게 될 텐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동물들을 어떻게 기를까, 어떻게 하면 돼지들을 살이 통통하게 오르게 해서 가을에 잡을 수 있도록 할까, 일생동안 그런 궁리를 하며 살았다. 돼지를 잡으면 고기의 대부분은 남편이 가져가서 읍내에 내다 팔아버렸다. 만일 남편이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아들이 그 짓을 했다. 그들 부자는 이따금 서로 싸웠고 그들이 싸울 때면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옆에 서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침묵을 지키는 버릇이 생겼고, 그 버릇은 아주 굳어져 버렸다. 그녀가 늙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 아직 마흔이 채 안됐지만 -- 남편과 아들이 말 장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사냥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거나 하여튼 집을 비우고 없을 때면 그녀는 이따금 집 주위와 농장 구내를 돌아다니면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곤 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어떻게 먹일 것인가, 그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개들도 먹여야 했다. 그런데 헛간에는 말이나 소를 먹일 건초도 충분치가 못했다. 만일 닭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면 어떻게 알을 낳을 수 있을 것인가? 팔 달걀이 없으면 농장 일을 유지해 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어떻게 읍내에서 구해올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도 남편을 먹여야 할 필요는 없는 셈이었다.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특히 아이들을 낳은 후 남편을 거둬 먹이는 일에는 손을 뗀 거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오랜 기간 동안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때로는 몇 주일씩 집을 비웠고 아들이 자란 후에는 함께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그들은 모든 집안일을 그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떠맡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돈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읍내에서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 하나 없었다. 겨울철이면 나뭇조각들을 땔감으로 주워 모아야 했고 얼마 안되는 곡식으로 가축들을 연명하게 하려고 애써야 했다. 헛간에 있는 가축들은 그녀를 보고 배고프다고 울어댔고 개들을 그녀를 졸졸 따라 다녔다. 암탉들은 겨울에 알을 별로 많이 낳지 못했다. 암탉들은 헛간 구석에 떼 지어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그녀는 그 닭들을 계속 주시해야 했다. 겨울철에 만일 닭이 헛간에서 알을 낳는데 그 일을 못 보고 지나치면 알은 얼어서 깨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날 그 노파는 달걀 몇 개를 들고 읍내로 갔는데 개들이 그녀 뒤를 따랐다. 거의 세 시가 돼서야 집을 나선데다가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구부정한 어깨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뭐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그녀는 낡은 곡식 부대 속에 달걀을 넣어 그것들을 밑바닥에 감추듯이 들고 갔다. 달걀이 많지는 않았지만 겨울철에는 달걀 값이 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맞바꾸어 약간의 고기,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설탕 조금씩, 그리고 어쩌면 커피도 약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육점 주인이 간 한 조각쯤은 거저 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읍내에 도착해서 달걀을 가지고 흥정을 벌이는 동안 개들은 문밖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흥정을 썩 잘해서 그녀가 바랐던 이상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정육점으로 갔는데 정육점 주인은 약간의 간과 개 먹이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정육점 주인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가 그녀에게 그처럼 친절하게 소상한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가게에 들어올 때 정육점 주인은 혼자 있었는데 그처럼 병들어 보이는 노파가 궂은 날 밖에 나와 돌아다닌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매섭게 추운 날인 데다 오후에 좀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육점 주인은 그녀의 남편과 아들에 대해서 뭐라고 날을 하고는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담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곡식 부대에 넣어준 그 간 조각이나 고깃덩이가 달라붙어있는 그 묵직한 뼈를 그 남편이나 아들이 먹으려 든다면 정말이지 그 따위 인간은 굶어죽어야 마땅하다고 정육점 주인은 말하는 것이었다. 굶어죽다니? 아니지, 다들 먹여야지. 사람도 먹여야 하고, 쓸모는 없지만 팔아치울 수 있을지 모르는 말들도 먹여야 하고, 석 달 동안 젖 한 방울 짜내지 못하는 삐쩍 마른 불쌍한 젖소도 먹여야지. 말, 소, 돼지, 사람들, 모두들 먹여야지. 3 노파는 가능하면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와야 했다. 개들은 그녀가 둥에 둘러맨 묵직한 곡식 부대에 코를 킁킁 대며 바짝 뒤따랐다. 읍내를 벗어나자 그녀는 담장 옆에 멈춰서서 끈으로 그 부대를 등에 꼭 졸라맸다. 바로 그럴 목적으로 호주머니 속에 끈 부스러기들을 가져왔던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는 한결 수월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두 팔이 아파왔다. 담장을 기어서 넘어야 하는데 그건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벌렁 넘어져 눈속에 빠져버렸다. 개들은 깡충대며 뛰어 돌아다녔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간신히 다시 일어나는 데 성공했다. 담장을 넘어가려는 것은 언덕 너머 숲을 통해서 지름길이 나 있는 까닭이었다. 큰길을 따라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1마일쯤 더 걸어야 했다. 어둡기 전에 집에 도착하지 못할까 걱정이 될뿐더러 게다가 가축들을 빨리 먹여야 했던 것이다. 건초나 옥수수도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과 아들이 집에 돌아올 때 뭘 좀 가지고 올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라임즈가의 유일한 마차를 타고, 쓰러질 것 같은 또 다른 말 두 필을 고삐로 묶어 끌고, 함께 떠났다. 그 말들을 팔아서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술에 취해서 돌아올지 모른다. 그들이 돌아올 때 집 안에 뭐라도 먹을 것이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아들은 십오 마일 떨어진 군청 소재지 읍에 사는 어떤 여자와 관계가 있었다. 그 여자 역시 아주 불량하고 거친 여자였다. 한번은 아들이 그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는데 둘 다 술에 취해 있었다. 마침 제이크가 집에 없던 그 날, 아들과 여자는 그녀를 종 부리듯 마구 부려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일에는 아주 익숙해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독일인 농장에서 살던 소녀 시절에도, 그리고 제이크와 결혼한 이후에도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이다. 아들이 그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온 날 그들은 마치 결혼한 부부처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집에서 밤을 보냈는데, 그런 사실에 그녀는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이미 어려서 그녀는 갖은 충격적인 일들을 다 겪은 탓이었다. 등에 짐을 진 채 그녀는 힘들여 들판을 가로질러, 깊이 쌓인 눈을 헤치며, 숲속으로 들어섰다. 오솔길이 있긴 했지만 길을 따라 걷기가 힘들었다. 언덕 꼭대기 바로 너머 삼림이 아주 울창한 곳에 조그만 공터 같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 한때 그곳에 집을 지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 공터는 집채와 정원을 갖출만한, 읍내의 건물 부지만한 정도의 넓이였다. 오솔길은 공터의 한쪽 옆을 따라 뻗어있었는데 노파는 그 공터에 이르자 잠시 쉬어가려고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짐을 나무 밑둥에 기댄 채 자리를 잡고 앉으니 참으로 좋긴 했지만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 그녀는 잠시 그 걱정을 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얼마 동안 잠을 잤을 것이다. 너무나 추우면 그 이상 더 추위를 느끼지 않는 법이다. 오후가 되어 날이 좀 풀리면서 눈발이 더 굵어졌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날이 개고 달까지 나왔다. 읍내까지 노파를 따라온 그라임즈의 개는 네 마리였는데 모두 크고 삐쩍 마른 개들이었다. 제이크 그라임즈나 그의 아들 같은 사내들은 꼭 그런 개를 기르는 것이다. 발길로 차고 함부로 다루지만 그런 개들은 용케 붙어 있다. 그 그라임즈의 개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이리저리 먹이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노파가 공터의 한 옆에서 등을 나무에 기대고 잠이 들어 있는 동안에도 먹이를 찾아 열심히 쏘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개들은 토끼를 쫓아 숲 속과 그 부근의 밭을 마구 헤집고 다녔는데, 그러는 동안에 다른 농장의 개 세 마리가 가세해서 한패를 이루었다. 얼마 후 개들은 모두 공터로 돌아왔다. 개들은 뭔가에 흥분해 있었다. 그처럼 차고 맑고 달빛 가득한 밤은 개들에게 뭔가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그들이 이리의 모습으로 겨울밤에 떼 지어 숲을 헤매고 다니던 그 태고적의 어떤 옛 본능이 그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들은 노파 앞의 공터에서 토끼 두세 마리를 잡아 당장의 허기를 채웠다. 그러고는 공터에서 원을 그리고 달리면서 놀기 시작했다. 개들은 앞 개의 꼬리에 코를 바짝 대고 빙글빙글 계속 돌았다. 겨울 달빛이 내리비치는 눈을 잔뜩 인 나무 아래 공터에서, 부드러운 눈을 단단히 다지며 원을 그리는, 그렇게 잠자코 원을 그리며 달리는 개들의 모습은 한 폭의 기묘한 그림을 이루는 것이었다. 개들은 침묵 속에서 계속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노파는 죽기 전에 어쩌면 개들의 그런 모습을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두 번 깨어나서 흐릿해진 눈으로 그 기묘한 광경을 바라보았을는지도 모른다. 그저 졸릴 뿐, 이제는 별로 추위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숨은 오래오래 지탱이 되는 법이다. 아마도 노파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독일인 농장에서의 소녀 시절을, 그리고 그 전 어머니가 그녀를 남겨두고 훌쩍 떠나버리기 전의 어린 시절을, 노파는 아마도 꿈꾸었을 것이다. 노파의 꿈은 별로 즐거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녀의 삶에서 그다지 즐거운 일이란 없었으니까. 이따금 그라임즈의 개 한 마리가 달리던 원을 벗어나서 노파 앞으로 다가와서 멈춰 섰다. 개는 뻘건 혀를 늘어뜨린 채 노파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개들이 그렇게 달리는 것은 어쩌면 죽음의 의식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달밤에 개들에게 살아났던 이리의 원시적 본능이 어쩌면 그들로 하여금 뭔가 두려움을 느끼게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리가 아니야. 우리는 인간의 종인 개라구. 인간이여, 계속 살아 다오! 인간이 죽으면 우리는 다시 이리가 되고 말 거라구.’ 개들은 한 마리씩 노파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 자리로 와서 노파의 얼굴에 코를 바싹 들이댄 후 만족스런 듯한 표정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다른 개들과 함께 달렸다. 그 날 밤 노파가 죽기 전에 개들은 모두 차례대로 그 동작을 반복했다. 나는 자라서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역시 겨울 밤에 일리노이주의 어느 숲 속에서 한 떼의 개들이 바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린애이던 그 날 밤 그 노파가 죽기를 기다리던 것처럼, 개들은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었다. 노파는 차분히 그리고 조용히 죽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래서 그라임즈의 개 한 마리가 다가와 그녀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 모든 개들은 달리기를 멈췄다. 개들은 노파의 주위로 모였다. 그래, 노파는 이제 죽은 것이다. 노파가 살았을 때, 그녀는 그라임즈의 개들을 먹였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노파가 등에 지고 있는 곡식 부대 안에는 소금에 절인 돼지 고기, 정육점에서 얻은 간, 개 먹이, 수프 뼈 등이 들어 있었다. 읍내 정육점 주인은 갑자기 동정심이 일어 노파의 곡식 부대를 그처럼 묵직하게 채워주었던 것이다. 노파에겐 큰 수확인 셈이었다. 그것은 이제 개들에게 큰 수확이 되고 있었다. 4 그라임즈의 개 한 마리가 다른 개들 사이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노파의 등에 매달린 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개들이 정말로 이리였다면 아마도 그 개가 그 무리의 두목이었을 것이다. 다른 개들은 모두 그 개가 하는 대로 따라서 했다. 개들은 노파가 끈으로 등에 졸라맨 그 곡식 부대에 모두 그들의 이빨을 박았다. 개들은 노파의 몸을 공터 한가운데로 끌고 나왔다. 닳아빠진 옷이 노파의 어깨로부터 곧 찢어져 나갔다. 하루인가 이틀 후에 노파가 발견되었을 때 그 옷은 엉덩이 부분까지 찢긴 상태였다. 그러나 개들은 그녀의 몸을 다치게 하지 않았고, 곡식 부대에서 고기를 끌어냈을 따름이었다. 노파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몸은 얼어서 굳어 있었는데 어깨가 아주 좁고 몸이 자그마해서 그 시신은 마치 아름다운 젊은 처녀의 몸처럼 보였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중서부의 읍에서, 읍 부근의 농가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토끼 사냥을 나섰던 한 사냥꾼이 노파의 시신을 발견했으나 그 사람은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눈 덮인 조그만 공터에 둥그렇게 다져진 자국하며, 곡식 부대를 끌어내어 그것을 찢어 열려고 하면서 시신을 끌어당긴 그 장소에 내려앉은 침묵하며, 하여튼 뭔가가 그를 겁먹게 하여 그는 서둘러 읍내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신문배달을 하는 나의 형과 읍내 중심가에 있었고, 형은 석간신문을 여기저기 점포에 배달하는 중이었다. 거의 밤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사냥꾼은 식료품 가게에 들어와서 그 이야기를 전하고는 철물점으로, 다시 약국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보도 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길을 따라 숲 속의 그 장소로 향했다. 형도 신문배달을 계속해야 했지만 그 일을 그만두었다. 모두들 숲 속으로 몰려갔기 때문이었다. 장의사도 지서 주임도 함께 갔다. 몇몇 사람은 큰길에서 오솔길로 갈라지는 곳까지 마차 썰매를 타고 가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의 편자가 닳아 길 위에서 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걸어간 우리들보다 더 빠를 것도 없었다. 지서 주임은 남북전쟁 때 다리를 다친 몸집이 큰 사람이다. 그는 무거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길을 따라 재빨리 걸어갔다. 나와 형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고, 우리가 걸어가는 동안 다른 어른들과 아이들이 우리 무리에 합세했다. 노파가 큰길을 버리고 오솔길로 접어든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지만 달이 떠 있었다. 지서 주임은 아마도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라 여겨 사냥꾼에게 계속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사냥꾼은 총을 어깨에 둘러 맨 채 걸어갔고 개 한 마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토끼 사냥꾼이 그처럼 돋보이게 되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사냥꾼은 지서 주임과 함께 앞장서서 행렬을 이끌어가며,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상처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젊은 여자였어요. 얼굴이 눈에 묻혀 있더군요.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사냥꾼은 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서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땅 위에는 하얀 눈이 덮인 늦은 오후의 숲 속에서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잠겨 있을 때에는 오싹하는 느낌이 몸과 마음으로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때 어떤 이상하고 괴상한 일이 주위에서 일어나면 오직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일 것이다. 어른들과 아이들은 한 무리를 이루어 노파가 들판을 가로질러 간 지점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다시 지서주임과 사냥꾼을 따라 약간 경사진 비탈길을 올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형과 나는 잠자코 걸었다. 형은 신문 다발을 부대 속에 넣고 어깨에 멨다. 읍내에 다시 돌아오면 저녁을 먹으러 집에 가기 전에 신문 배달을 계속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형은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는데 내가 형의 배달 일을 함께 돕게 되면 둘 다 늦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머니나 누나가 우리의 저녁을 데워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지 않겠는가. 아이들에게 그런 기회란 자주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냥꾼이 식료품 가게에 들어올 때 마침 우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었다. 사냥꾼은 시골 사람이어서 형이나 나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 사람들의 무리는 그 공터에 이르렀다. 그런 겨울밤이면 어둠이 더 빨리 내린다. 그러나 만월의 달이 모든 것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형과 나는 노파가 죽은 그 나무 가까이 서 있었다. 달빛 속에서 조용히 얼어붙어 누워 있는 노파의 모습은 늙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눈 속에서 바로 젖혔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내 몸은 어떤 알 수 없는 신비스런 느낌으로 떨렸고 형도 마찬가지였다. 추위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이나 나나 그때까지 여체를 본 적이 없었다. 노파의 몸을, 마치 대리석처럼 그렇게 희고 아름다워 보이게 만든 것은 언 몸에 달라붙은 눈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읍내에서 몰려온 사람들의 무리에는 여자가 없었다. 그래서 읍내의 대장간 주인이 옷을 벗어 노파의 몸 위에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노파를 팔에 안고 읍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그 당시엔 노파가 누군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5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마치 경기장 트랙을 축소해놓은 것 같은, 개들이 달려서 다져진 눈 속의 그 타원형 자국도 보았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모습도 보았고, 하얗게 드러난 아주 젊어 보이는 그 어깨도 보았으며, 어른들이 뭐라고 속삭이는 소리도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어리둥절해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시신을 장의사로 운반해 갔다. 대장간 주인, 사냥꾼, 지서 주임, 그리고 몇몇 사람이 장의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만일 아버지가 거기 계셨더라면 아버지도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아이들은 허용이 되지 않았다. 형과 함께 나머지 신문을 다 배달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이야기를 전한 건 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도 형이 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나중에 읍내에서 나는 그 노파에 관한 다른 단편적인 이야기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하여튼 다음날 노파의 신원이 확인되고 조사가 진행되었다. 남편과 아들의 소재가 밝혀져 그들은 읍내로 불려왔다. 사람들은 그들과 노파의 죽음을 연관 지어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던 것이다. 하지만 읍내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그 후로 듣질 못했다. 오직 그 숲 속의 광경을 나는 한 폭의 그림처럼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다.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얼굴이 눈 속에 묻힌 소녀처럼 보이던 여인의 나체, 개들이 달려서 다져진 타원형의 자국, 그 위의 맑고 찬 겨울 밤하늘, 그리고 흰 조각구름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열린 조그만 공간을 가로질러 내달리면서. 숲속의 그 광경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지금 들려주려는 진짜 이야기의 토대가 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먼 훗날 천천히 모아져야 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었다. 젊었을 때 나는 독일인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농장에 고용되어 있던 소녀는 주인을 무서워했다. 그리고 농장 주인의 아내는 그 소녀를 미워했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언젠가 훗날, 어느 맑고 달 밝은 겨울밤에 일리노이주의 한 숲속에서 개들과 기묘하고 신비스런 모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어느 여름날, 친구와 함께 읍에서 몇 마일 떨어진 한 계곡을 따라 걷다가 그 노파가 살던 집에 이른 적도 있었다. 노파가 죽은 후로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래서 문들은 돌쩌귀에서 삐져나와 부러져 있었고, 유리창들도 모두 부서져 있었다. 친구와 내가 집 밖의 길에 서 있을 때 개 두 마리가, 틀림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개 두 마리가, 집 모퉁이를 돌아 달려 나왔다. 크고 삐쩍 마른 개들이었는데 녀석들은 담장 쪽으로 내려오더니 길에 서 있는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 노파의 죽음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에게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선율은 한 번에 하나씩 서서히 모아져야 했다. 뭔가가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죽은 그 노파는 동물의 생명을 먹여 살리도록 운명 지어진 여인이었다. 어찌했든 그녀가 한 일이란 오직 그 일뿐이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아이 적에도, 결혼한 후에도, 늙어가면서도, 그리고 죽었을 때에도, 동물의 생명을 계속 먹여 살린 것이었다. 그녀는 소와 닭과 돼지와 말과 개와 사람의 그 동물적 생명을 먹여 살렸다. 그녀의 딸은 어려서 죽었고 하나뿐인 아들과 그녀는 이렇다 할 모자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 죽던 날 밤 그녀는 동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먹이를 몸에 지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숲 속의 공터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도 동물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일을 계속했다. 그 날 밤 우리가 집에 돌아와서 형이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머니와 누나가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나는 형이 뭐랄까, 그 이야기의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형이나 나나 그때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토록 처절한 어떤 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니는 것을. 그 점을 특별히 강조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그 날 밤 형의 이야기에 왜 불만을 느꼈는가, 그리고 그 후에도 왜 줄곧 그래 왔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 단순한 이야기를 내가 왜 다시 한번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여러분이 이해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한 것일 따름이다.  
28 아우를 위하여/황석영
편집자
4825 2010-07-15
내가 좋아하는 소설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는 여러모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비교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을 보면 두 작가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큰 역사의 흐름에서 민중의 힘을 믿는 작가와 그렇지 못 한 작가. 작품 결말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두 작품 모두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같으나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선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아우를 위하여>는 ‘학생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반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유능하고 젊은 선생’이 와서 문제를 해결해준다. 어떤가. 학교 문제가 사회 문제라고 가정한다면,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해야 할 것인가. 사회 구성원(민중)들인가 아니면 사회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지배층인가. ******************************** 아우를 위하여 황 석 영 뭔가 네게 유익하고 힘이 될 말을 써 보내고 싶다. 네가 입대해 떠나간 이제 와서 우울한 고향 실정이나 우리의 지난 잘잘못을 들어 여기에 열거해 놓자는 건 아니야. 아무 얘기도 못해 주고 묵묵히 너를 전송했던 형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우리가 지금쯤은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떤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또한 장래를 굳게 믿기 위하여 내 연애 이야기를 빌리기로 한다. 너는 십구 년 전에 내가 누구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마 놀랄 거다. 따져봐. 내 열한 살 때가 아니냐. 에이, 이건 오히려 형의 달착지근한 구라를 읽게 됐군, 하며 던져 버리지 말구 읽어주렴. 너 영등포의 먼지 나는 공장 뒷길들이 생각나니. 생각날 거야, 너두 그 학교를 다녔으니까. 아침마다 군복이나 물빠진 푸른 작업복 상의를 걸친 아저씨들이 한쪽 손에 반찬 국물의 얼룩이 밴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공장 담 아래를 줄이어 밀려가곤 했지. 우리 아버지두 그 틈에 있었을 거야. 참 그땔 생각하면 제일 먼저 까마중 열매가 떠오른다. 폭격에 부서져 철길 옆에 넘어진 기차 회통의 은밀한 구석에 잡초가 물풀처럼 총총히 얽혀서 자라구 있었잖아. 그 틈에서 우리는 곧잘 까마중을 찾아내곤 했었다. 먼지를 닥지닥지 쓰고 열린 까마중 열매가 제법 달콤한 맛으로 유혹해서는 한 시간씩이나 지각하게 만들었다. 먼지 나는 길, 공자의 담, 까마중 열매 다음에 생각나는 긴 땅에 반쯤 묻혀있던 노깡들이야. 사택 앞의 쓸쓸한 가로를 따라서 가죽나무가 서 있고, 나뭇가지에는 하늘소벌레가 살았고, 벽돌벽의 어지러운 선전문 자국들, 창고의 탄환 흔적, 그리고 인가 끝에 상두도가가 있었고, 실개천을 가로지르며 노깡들이 엇갈려 길게 누워 있었지. 노깡 속엔 우리가 그 무렵에 눈이 시뻘개서 찾아다니던 총알이 많이 나오곤 했었다. 총알을 찾으러 캄캄한 노깡 속에 들어갔다가 내가 기절했던 걸 어머니에게서 아마 들었을 거야. 애들이 그 속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며 전혀 접근을 꺼려하길래 어느날 나 혼자 들어갔지. 안은 아주 비좁구 캄캄했는데 물이 질퍽하게 괴어 있더구나. 손으로 더듬으며 중간까지 가보니까 예상대로 기관포 탄환이 많이 있더랬어. 나는 아이들의 찬탄과 선망을 독차지할 일을 생각하고 온통 가슴이 떨렸어. 탄창 사슬에 끼인 게 한 줄이나 되더라. 나는 정신없이 파구 또 팠지. 한참 동안을 파는데 꺼림찍한 기분이 들구 뭔가 손가락에 걸려 나오는 거야. 나뭇조각인 줄 알았어. 돌보다는 가볍구 나무보단 좀 듬직하단 말이야. 그래 눈앞에 바짝 갖다 대구 들여다보니깐 뼈다귀야. 둥그런 관절두 달려 있는 진짜 뼈다귀 말이지. 이크...... 나는 그게 날 잡구 늘어지는 기분이더라. 양쪽 입구를 보니까 꼭 관솔 빠진 구멍만큼 보이는 거야. 소릴 지르다가 뻐드러졌어. 근처 실개천서 빨래하던 아줌마가 나를 끌어내줬단다. 어머니가 야단쳤어. "너 그런 데 들어가면 귀신이 잡아 먹는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어린애들이 그런 일루 호되게 놀라게 되면 잠잘 때 악몽을 꾸어서 식은땀을 흘리며 경기를 일으키는 거야. 내가 몸이 불편할 때 꿈을 꾸면 말이야, 언제나 그 노깡 속에 들어가 있는 거야. 어느 때는 그게 우리 영단 집의 시멘트 굴뚝 속이 되고, 피뢰침 달린 유리공장의 벽돌도가니 안이 되고, 시궁쥐가 많이 사는 공중목욕탕의 하수도 속이 되는 거야. 끝은 언제나 비슷하지. 양쪽 입구가 무너져, 해골바가지나 뼈다귀 손이 쑥 솟아올라서 내 머리털이나 발목을 말야 꽉 잡구 안 놓는 거야. 상두도가집 아이가 그 자리에 찾아가서 침을 세 번 뱉고 왼발로 세 번 구르면 된다기에 그대루 했는데두 여엉 무서운 기분이 가시질 않았어. 내가 일단 자기의 공포에 굴복하고 승복하게 되자, 노깡 속에서의 기억은 상상을 악화시켜서 나를 형편없는 겁쟁이루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 아름다운 분이 나타나 나를 훨씬 성숙한 아이로 키워줬지. 눈빛처럼 흰 여학생 칼라 뒤로 얌전히 빗어 묶은 머리를 길게 땋아 늘였고, 목소리가 노래하는 듯 고운 분이었어. 우리를 위압하고 공포로써 속박하는 어떤 대상이든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의 본질을 알아챈 뒤, 훨씬 수준 높은 도전 방법을 취하면 반드시 이긴다. 그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배웠는데, 그 무렵엔 꼭 집어내서 지각할 수는 없었지. 이제 와 생각하니 그이는 진보(進步)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내게 가르쳐 주었던 거야. 나는 피난지 부산의 학교에서, 수복되고도 수 년이 지난 서울로 전학을 해왔던 첫날, 기분이 잡쳐버리고 말았다. 우리 학교에 미군부대가 들어와 있어서 학년별로 여러 곳에 뿔뿔이 흩어져 빈 창고나 들판에서 공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았고 책상대신 화판을 받쳐 글씨를 썼다. 어둠침침한 창고 교실에서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우글거렸으니 언제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게 보였다. 교실이 엉망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 애들은 질이 나빴는데 전쟁통에 몇 년씩 학년을 묵은 큰 애들이 열 명쯤 되었다. 백여 명의 아이들을 키 순서대로 세워 놓으면 나 같은 건 겨우 앞줄에서 몇 번째가 될 만큼 작았다. 애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돌리지 않았으나, 첫 번 일제고사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나자 친구가 더러 생기게 됐던 거였다. 나는 담임선생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메뚜기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머리 가운데가 쭉 벗어지고 양쪽 관자놀이 부근에만 곱슬털이 부성부성한 모습이었다. 그는 국민학교 선생님 노릇에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무슨 가게인지를 부업으로 벌여놓고 있었는지라 그는 툭하면 자습시간을 주고선 하루 온종일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각 학년의 교실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교장 선생님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모든 학급을 한 바퀴 돌아보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으니 메뚜기 씨께선 만판이었다. 메뚜기가 요행이 교실에 붙어 있게 되는 날도 오후에는 모두 야외로 끌고 나가서 몇 시간씩이나 풍경 사생을 그리게 해놓고는 공부 끝이라는 거였다. 내가 전학가기 전인 일학기까지도 석환이가 반장 노릇을 했으나, 나처럼 몸집이 작고 약골이었던 그애는 큰 아이들이 득실대는 교실의 기강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첫째 가다 장판석, 둘째 가다 임종하, 셋째 가다 박은수, 그 이하는 그애들에게 붙어서 알랑대던 떨거지 몇 명이 있었다. 모두 중학 이삼학년씩은 되었을 나이배기들이었다. 내가 입학할 무렵에 세력의 판도가 바뀌게 되었는데 이영래라는 새로운 가다가 신입해 왔던 것이다. 영래는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싸젠이 기른다는 아이였다. 술이 주렁주렁 달린 인디언식 가죽 저고리에 청바지를 입고 시계까지 차고 다녔다.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어깨가 바라진 영래는 벌써 다리에 털이 돋은 열다섯 살바기였다. 미군 지프가 신입생과 선물을 싣고 제분 회사 창고 앞마당을 돌며 클랙슨을 뿡빵 울리니까 애들이 모두 환호성이었다. 배불뚝이의 맘 좋게 생긴 싸젠이 초콜릿과 도넛을 애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그날로 영래를 찬양하며 그애의 가방을 들어다 주는 아이가 생겼고, 얼마 안 가서 둘째 셋째 가다인 은수와 종하까지 그애 편으로 붙었다. 영래가 드디어 첫째 가다 장판석이를 빈 발전실로 유인해다가 몽둥이로 습격해서 항복을 받았다. 판석이는 아래 권위로 밀려나고 영래가 하루아침에 첫째가 되었는데도 아이들은 그런 일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큰 애들은 뒷전에서 저희끼리 킬킬대며 우리가 모르는 얘기만 지껄이며 따로 놀았으니까. 어느 토요일 아침, 메뚜기가 셔츠 바람으로 들어와 바께쓰에 물을 떠다 교실에서 세수를 했다. 그는 팔목시계를 연방 들여다 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에 또...... 내가 급한 볼일이 생겨서 나갔다 올 테니까 자습하도록, 어이 급장." 맨 앞줄에 앉았던 석환이가 엉거주춤 일어나려니까, 메뚜기는 그애를 힐끗 바라보고는 곧장 교실 뒷전만 두리번댔다. "장판석이, 판석이 어딨나?" 아이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앗고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도 들렸다. 판석이는 괜히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애 바로 앞에 앉은 임종하가 들릴까말까한 소리로 "얘는 나한테두 져요." 중얼거리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메뚜기가 그 소리를 놓쳤을 리 없었다. "에 또, 학기두 바뀌구 했으니까...... 오늘은 자습 후에 반장 선출을 해보는 것두 학습이 될 거다. 상급생이 됐으니까 그만한 자치 능력도 생겼을 줄 믿는다. 그런데 석환이 말고 누가 의장 노릇을 했으면 좋을까...... 누가 좋겠니?" 메뚜기가 묻자 앞에 꼬마들이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이영래요. 걔가 잘해요." 메뚜기가 영래를 불러내어 "반장과 함께 조용히 자습을 시킨 뒤에, 자치 회의를 해라." 이르고 훌짝 나가 버렸다. 선생님이 나간 뒤에, 머쓱하게 서 있던 영래가 교탁 앞에 비스듬히 걸터 앉았고 애들은 다음 행위에 잔뜩 기대를 가지면서 그애를 올려다 보았다. 영래가 말했다. "전부들 책을 집어넣어. 오늘 오전에는 씨름 대회를 연다." 애들이 손뼉을 치며 와글와글 책보를 쌌고 영래는 교탁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를 흔들며 말타는 시늉을 했다. "헌병 대장 사령부, 짜가닥짜가닥 팡팡, 이 새끼들 조용히 해." 영래가 은수에게 몽둥이를 주워 오라고 명령하니 그놈은 잽싸게 뛰어나가 각목 하나를 주워왔다. "종하 일루 나와." 비실비실 웃으며 앞으로 나온 종하에게 영래가 말했다. "웃지 마 임마, 이걸 갖구 수틀리게 놀면 모두 조기는 거야. 알았지?" 종하는 가마니를 깔지 않은 흙바닥 통로를 각목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오늘부터 너는 기율 부장이다." "뭐야 그게...... 반장하군 다른가?" "임마 중학교 교문 앞에두 못 가봤어? 완장차구 서서 잘못한 애들 벌주는 거 말야." 은수가 항의했다. "그럼 나는 뭐야, 넌 뭐구......." "이새끼 나는 의장이잖아. 종하는 기율부장, 너는 말이지 총무다." "반장보다 높은 거냐?" 아이들이 킥킥. 종하는 내 앞을 지나며 공연히 똑바로 앉으라면서 허리께를 각목으로 꾹 찔렀다. 나는 등에 힘을 주고 빳빳이 긴장해서 앉아있었다. 그때 석환이가 안으로 폭싹 기어들어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말야...... 씨름대회는 반대한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며 석환이 쪽에다 불평을 제각기 터뜨렸다. "혼자 잘난 체하지 마라 짜식." "누가 네 명령이나 듣겠다누." "영래야 때려줘라." 영래가 교탁을 쾅 때리며 말했다. "새끼들 조용하라니까." 임종하가 각목을 땅에다 쿵쿵 찧으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석환이는 가까스로 말할 기운이 났는지 아까보다 더욱 또렷하게, "선생님이 자습을 한 다음에 자치회를 하라구 그랬어. 또 혼자서 마음대로 학급 간부를 지명해서도 안 된다구 생각해." 바보같은 놈들이 설쳐대는 꼴을 보니 나도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영래만한 통솔력도 없는 터에 모두들 나더러 공부 좀 한다구 으스댄다고 할 거였다. 그 전 학교에서처럼 발언권을 얻어 동의와 제청을 받고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하는 재미있던 판국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까짓거 입다물고 구경이나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몇몇 줄반장 애들은 불만이 있어 보였으나 교실 뒤에 버티고 선 종하 쪽을 연방 돌아보기만 하는 거였다. 영래가 씨익 웃었다. "응 좋아, 애들한테 물어보자. 얘들아 씨름대회를 뒤로 미루고 자습할까?" 반 아이들이 웅성대며 항의하거나, 재삼 석환이를 욕하기 시작했다. "대신에 자치회를 먼저 하자. 너희들 석환이가 반장 노릇하는 걸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 한 사람의 손도 올라가지 않았고 뒤늦게 들었던 애들도 대부분 아이들의 드높은 불만의 분위기에 위축되어 슬금슬금 내려버렸다. "다음은 내가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고 두 번 다 손을 안 든 애들도 많았다. "봤지? 자치회는 이걸루 끝났다." "그래, 이영래가 오늘부터 우리 반 급장이다." "반대하는 놈들은 우리 반이 아니야." 영래는 만족에 가득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밖으로 집합. 야 종하야, 집합시켜서 오목내 다리 밑으루 내려가." 나는 환성을 울리며 밀려나가는 애들의 뒤를 따라나갔고, 우리 뒤에서 종하가 "빨리빨리 움직여." 어쩌구 하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석환이와 몇몇 아이들이 꾸물거리는 걸 보고 영래가 뒷짐을 지고 서서 종하에게 말했다. "야 단체행동에서 빠지는 애는 잡아다 조겨." 은수도 말했다. "그래 영래 말이 옳다. 개인적으루 놀면 혼을 내야 해. 우리 반 애들이라면 다 함께 해야 한다." 바깥일에 분주한 메뚜기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영래의 지시에 의하여 자발적인 대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메뚜기는 학급에 기강이 서고 자치 능력이 향상된 데 대하여 만족했고, 아이들이 영래를 급장으로 선출한 것에도 별로 이의가 없어 보였다. 우리 부모는 내 상급학교의 진학문제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동네에서 어느 대학생이 개인교사를 한다며 애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나를 그리로 보냈었다. 거기서 치른 학력 테스트의 결과를 알고 어머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학생의 말에 의하면 이런 실력으로는 중간급인 사립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밤늦게까지 입시공부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습시간이 많았던 학급실정이 오히려 내게는 다행이었다. 따라서 나는 전입생으로서 서먹서먹하던 그 전보다 더욱 학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영래가 반장이 되고 나서 나는 학교에 가는 일이 시큰둥해진 느낌이었다. 무관심했던 내게도 불편한 사태가 자주 벌어지게 되었는데, 영래가 너무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그랬기 때문이었다. 은행지점장의 아들이나 공장장 아들, 극장, 양조장집 아들같은 너댓 명의 부잣집 애들은 특히 괴로움을 많이 받았었다. 그애들은 뭔가 좋은 것들, 이를테면 장난감, 극장표, 돈 같은 것들을 갖다 바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일까지 가져와." 한마디면 통하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애들은 평소부터 그애들에게 반감을 많이 갖고 있어서 영래나 종하나 은수의 명령이 이행되지 않았을 때에 그애들이 교실 뒤에서 엎드려 뻗쳐를 하고 궁둥이를 맞는 걸 통쾌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잣집 애들도 나중에는 그리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청소당번을 제외받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애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애들을 혼내주도록 저 세 아이들 중 아무나에게 선물을 하면 되었던 거다. 있으나마나한 부반장으로 영락한 석환이도, 나도, 하여간에 좀 영리한 애들은 끼리끼리 소곤소곤 어린이 잡지나 돌려보면서 그애들의 노는 꼴에 전혀 상관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느 정도 기가 죽었으나 그래도 아직은 영래를 신뢰했는데 그는 아이들을 재미있게 하고 동시에 무서운 존경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재주가 비상했던 것이다. 영래의 제의로 우리는 두어 차례의 모금을 했었다. 한번은 담임선생 메뚜기네 아기의 돌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고, 다음엔 청소도구를 마련한다는 구실이었다. 판단이 부족했던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금액이 좀 과했던 것 같았다. 제삼 분단장인 동열이의 머리가 터졌던 건 바로 그 일 때문이었다. 그애가 쑤군거린 얘기를 들어보면 거둔 돈의 절반을 그애들이 쓱싹해서는 학교 앞 찐빵가게에 맡겨놓고 까먹고 있다고 했다. 얘기를 들은 다섯 아이들 중 누군가의 --- 아마도 영래와 방향이 같은 기지촌에 사는 아이가 그랬을 --- 고자질에 의해서 폭행이 벌어졌다. 예의 메뚜기가 자리를 비운 자습시간에 영래가 무조건 동열이를 불러내어 "임마,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 하고 따지면서 다짜고짜 발길로 걷어찬 다음 막대기로 그애 머리를 깠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침을 삼키며 그애가 머리를 움켜쥐고 죽는 소리로 우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종하가 옆에서 얼러댔다. "짜식들 누가 돈을 떼먹었냐, 얘 맞은 거 담임한테 찌르면 알지?" 영래는 역시 화를 발칵 내고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새꺄." 종하를 윽박지른 다음에 우리에게 씩 웃어 보였다. "돈이 남은 건 맞다. 그걸 말이지 나는 다음에 쓸라구 남겨뒀던 거야. 축구부를 만들기루 했지. 다른 반과 시합을 갖구 다음번엔 저쪽 오목내 학교 패들하구두 붙는다." 아이들이 와글와글 손뼉치는 소리. "그러구 얘가 맞은 건......." 영래가 공포에 질려 꿇어앉은 동열이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잠깐 사이를 두었다. "우리 반을 배반했기 때문야." 은수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영래 말이 옳다. 짜식이 배반자야." 서부영화에 많이 나오는 씩씩하고 멋진 얘기 같았으므로 교실의 이곳저곳에서 낱말 외우기나 하는 듯 아이들의 "배반자, 배반자" 하는 중얼거림이 퍼져나갔다. 그들은 으쓱해진 느낌이었고 앞에 적발되어 꿇어앉은 이 새로운 적(敵)을 새삼스럽게 관찰했다. 영래가 아이들을 휘둘러보고 나서, "누구든지 고자질을 하거나 쑤군대두 좋다. 치만, 우리 반 애들 중엔 내게 그런 걸 알려주는 좋은 친구들이 많으니까...... 이런 간신 같은 짓을 못할 거야." 토요일 방과 후에 우리는 남아서 오목내 패들과의 축구시합을 구경해야만 되었다. 물론 연습시간이 잦았던 우리 선수가 이겼다. 아이들은 그날 유쾌한 오락시간과 선수들이 보여준 무용(武勇)에 의해서 열이 올라 노래를 부르며 돌아갔다. 나는 제분회사의 뒷문으로 해서 철길을 따라 군대 피복창을 가로질러 공장의 벽돌담 아래로 나서는 지름길을 다녔는데, 그날은 피복창 입구에 가시철망이 쳐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학교 본관건물이 있는 시가지쪽으로 빙 돌아서 가야만 했다. 행길을 건너려고 차가 뜸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학교 교무실이 어느 쪽에 있느냐고 누가 말을 걸어왔다. 여학생 교복을 입은 아주 예쁜 누나였다. 학교 교무실은 부대가 들어선 본관건물 옆의 빈 터에 지어진 기다란 반달형 퀸셋에 있었으므로 거기를 손가락질해 보여주었다. "어린이 고맙습니다." 하며 그이가 공손히 절을 했으며 나는 웃을 때 보여준 그의 희고 고운 치아와 깊숙해 뵈는 속 쌍꺼풀 때문에 가슴이 뻐근하게 아플 지경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까 아이들이 술렁대고 있었다. 여자선생이 오게 되었다며 방금 메뚜기랑 같이 제과점에 얘기하러 갔다는 것이다. 나는 공연히 어제 본 그 누나가 아닐까 하는 기대로써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온다, 와." 언제나 파수를 보는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창고 교실로 뛰어들어왔다. 메뚜기가 훨씬 앞서서 들어오고, 한참이나 지루하게 기다린 느낌 뒤에 여선생이 들어왔으며 그이는 약간 수줍어하듯 보였다. 입구에 어깨를 동그랗게 움츠리고 섰는 분은 역시 어제의 그 누나였다. 나는 나를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매일같이 아무 생각없이 들었던 영래의 "차렷" 구령소리가 그날따라 나를 수치에 떨게 만들 줄은 몰랐다. 나는 "경례"에 따라 머리를 숙이면서 처음으로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메뚜기가 그이에게 좀더 앞으로 나오시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에 또, 이번에 사범학교 졸업반에 계시는 여러 선생님들이 교생실습을 나오셨다. 내가 교장선생님께 간청해서 상급학년에서는 우리 반만이 그 모범학급으로 뽑혀 모셔오게 된 것이다." 메뚜기는 이어서 교생 선생님의 성함과, 일주일의 반쯤을 그분이 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메뚜기가 게으른 자기의 수업 공백을 메워보려는 게 틀림없었다. 누군가 "교생이 뭐야. 선생하군 다른가......" 하자마자 그이는 청아하고 똑똑한 발음으로 "네 다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처럼 나도 선생님되는 공부를 하러 온 것입니다. 닭이 알을 품으면 뭐가 되지요?" 엉뚱한 질문에 아이들이 불규칙하게 "병아리요." "병아리는 커서 뭐가 되나요?" 아이들은 이번에는 일제히 "닭이요." "옳습니다. 저는 말하자면 병아리 선생님인 셈이죠. 호호호." 아이들이 와 하고 웃었으며 메뚜기도 껄껄 웃었다. 나는 병아리 선생님이 나오시는 학교에 가는 일이 한편으로는 즐거웠으나, 학급 분위기가 나를 전보다 더욱더 부끄럽게 만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특히 토요일 방과 후는 지겨웠다. 영래가 아이들을 오목내 다리 밑의 모래펄로 집합시켜서는 축구시합을 응원하도록 하는 거였다. 반을 위한 단체행동이었으므로 혼자 빠져나가게 되면 혼이 날 게 두려웠다. 아마 일주일 동안의 벌청소 당번을 지명받기가 십상이었을 게다. 아이들의 불평 불만이 은연중에 조금씩 무르익어가게 되었던 것은 자칭 기율부장이라는 임종하와 총무 박은수의 횡포 때문이었다. 은수가 선수 유니폼과 병아리 선생님에 대한 '성의의 표시'를 구입한다며 학급비를 거두었고, 종하는 아이들을 매로써 징계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또한 영래와 귀가 방향이 같은 기지촌 애들 몇명까지 덩달아 으쓱거리게 되었다. 그들 중 하나라도 반애와 싸움을 하게 되면 권투시합 십회전을 시켜놓고 죽 둘러서서 구경하다가 불리해질 경우 몰매를 놓는 거였다. 기지촌에 사는 가난한 그애들은 다른 애들의 점심 도시락을 빼앗아 먹는 일도 있었다. 그애들이 영래의 지시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애들을 꼬박꼬박 일어바쳤기 때문에 반 애들 모두가 우선 그애들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다. 나는 영래를 마음속에서도 찬양하는 아이들이 이젠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새로 오신 교생선생님은 무엇이나 열성을 다해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어느 때는 우리가 모르는 어려운 얘기까지 꺼내어 학과의 분명치 않은 곳을 밝혀 주려고 했었다. 우리 실력을 향상시켜주느라고 벼락시험도 자주 치렀다. 나는 그 무렵에 밤 서너시까지 과외공부로 시달렸던 때였으므로 다른 애들과 현격한 차이로 거의 만점을 맞곤 해서 그이의 주의를 끌 수가 있었으나, 그이는 나를 영래나 그쪽 떨거지 놈들과 하나도 구별 없이 대할 뿐이었다. 나는 야속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청소감독을 끝내고 돌아가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가만가만 뒤쫓아 가본 적도 있었다. 멀리서 앞서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아직 어른이 아니었다. 키가 작아 어른들 틈에 끼니까 우리와 동년배의 소녀처럼 보였다. 내가 일부러 다른 델 보면서 선생님을 질러갔다가 뒤돌아보고 인사를 했더니, 그이는 내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었다. "김수남, 왜 이제 집에 가지요?"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친구 집에 들렀다가 늦었어요." "집에서 걱정하실 텐데요.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씀드려야 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차를 타야 할 역전 네거리 앞 종점까지 함께 걸었다. 말없이 걷던 그이가 "김수남 어린이는 이번 시험에도 성적이 아주 뛰어나더군요" 말했으므로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얼떨결에 "반장은 어때요, 선생님?" 하며 내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영래...... 어린이 말인가요?" 그이는 뭔가 곰곰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이다가 "어떻게 생각해요, 김수남 어린이는 혼자서 살 수 있나요?" 물어왔다. 나는 동생 없이 엄마 없이, 누구보다도 선생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고 혼자서는 못 산다고 대답했다. 그이가 말했다. "혼자서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럿이서 고쳐줘야 해요. 그냥 모른 체하면 모두 다 함께 나쁜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공부를 잘 한다거나 집안 형편이 좋은 학생은 그렇지 못한 다른 친구들께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무슨 얘기인지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께서 나를 책망하고 있다는 느낌이어서 풀이 죽어버렸던 것이다. 며칠 후에 선생님은 처음으로 우리에게 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이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책을 펴지도 않고 몹시 슬퍼 뵈는 얼굴로 말했던 거였다. "어른들이 제일 나쁜 점은 자기 잘못을 애써 감추려 하는 그것입니다. 천박한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내세우는 건,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 혼란한 시기에 이런 창고에서 책상도 없이 공부할망정 마음씨와 배우려는 자세가 소박하고 고울 줄로만 여겨왔습니다. 여러분은 못된 어른들의 본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다워야 하며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합니다. 어제 방과 후에 학급대표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참으로 슬펐습니다. 물론 그것이 학급 전체의 뜻이 아니었기를 나는 믿으려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선생님이 영래네 패들의 '성의 표시'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이다. 저 깡패 같은 더러운 자식들이 내 선생님께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외제 나일론 스타킹을 드렸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불같이 성이 치밀어올라 잠들기 전에는 그 녀석들에게 수십 번씩 욕을 되풀이 퍼붓고야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한번은 기지촌 아이들 중의 하나가 양조장 집 아들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고 있는 것을 선생님이 우연히 알아채게 되었다. "어린이는 왜 점심을 안 싸오지, 배고프지 않아요?" 울먹울먹하며 그애는 연방 빼앗아간 쪽을 바라보았고, 그놈은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였다. "자 이리 와 나하구 같이 먹어요." 빼앗긴 아이가 수줍어하며 가까스로 말했다. "선생님...... 싫어요. 진짜는 저, 도시락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왜 안 먹을까, 몸이 아픈가요?" "아니에요......." 선생님이 웃음을 방긋 머금고 말했다. "아 착한 어린이군요. 누구를 위해 주었군요, 그렇죠?" 그애가 더욱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재빨리 말했다. "네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렇게 서로 돕는 정다운 행동에 마음이 한없이 기뻐요." 남의 도시락을 앞에 놓고 있던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마 나보다도 여러분이 학급 친구의 사정을 훨씬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도시락을 못 가져오는 어린이가 몇 사람 더 있을 줄로 압니다. 내일부터 누구든지 그런 친구의 도시락을 함께 싸올 어린이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무리를 하지 말고, 어머님께 여쭤봐서 허락을 얻으면 말이에요." 나는 영래랑 어울려서 으쓱대던 그애들이 미웠지만, 내 아름다운 선생님의 말씀을 언제라도 거역할 수가 없었으므로 어머니에게 여쭈어보았다. 어머니가 처음엔 걱정을 했다. "글쎄 너두 딱하구나. 난리통이라 살기 힘든 세월인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 어떻게 둘씩이나 싸달란 말이냐." 내가 그럼 저녁마다 조금씩 먹으면 되잖느냐 졸라댔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와 얘길 듣고는 유쾌하게 응낙했다. "좋은 일이다. 선생님이나 급우들을 실망시켜선 안 되지. 중요한 건 네가 도움을 받는 친구보다 훙륭하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있어. 조금치도 그 친구께 전과 달리 대하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받도록 노력해라." 나는 일찌감치 학교에 가서 그애의 자리에다 도시락을 갖다 두었고, 노트를 찢어 "변또는 나중에 돌려줘. 김수남."이라고 써두었다. 그런 다음부터 도시락을 빼앗기거나 누가 점심을 굶는 일이 없어졌다. 나는 그쪽에서 쑥스럽게 내미는 도시락을 아무 말없이 슬쩍 받아넣어 갖고 돌아오곤 했었다. 석환이도 동일이도 서로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선생님을 무척 좋아하고 있는 눈치였으며 점심을 둘씩 준비해 오는 게 뻔했다. 기지촌에 사는 세 아이들은 한결 양순해졌고 적의를 갖고 대하던 우리에게도 욕을 넣지 않고 말을 건네오곤 하였다. 아이들이란 참으로 단순한지라 전과 달리 서로를 알게 되어 집을 방문하기도 하며 친해질 수가 있었다. 그애들은 차츰 급우들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동열이를 배반자로 몰아세웠듯이 영래는 자치회 때에 눈에 난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서는 벌을 가했다. 신발주머니를 까먹고 안 가져왔던 애들은 벌 청소를, 청소가 불량했던 분단은 몽땅 손들고 오리걸음으로 걷게 한다거나, 전반원이 참가하여 다른 반 애들과 붙었던 시계불알 땅뺏기에서 빠졌던 애들은 코 잡고 맴돌기 오십 번을 시키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이젠 그런 일에 전처럼 열광하지도 않았고 시들해 있었으며 전보다는 오히려 서로가 화목해진 편이었다. 모두들 축구라거나 땅뺏기에 이겨야 한다는 핑계로 마구 다루는데 휩쓸리고프지 않았다. 애들이 앞에 나가서 코끼리 맴돌기를 하고 있을 때, 자치회를 위하여 자리를 피해주었던 선생님이 눈을 휘둥그래 뜨며 놀랐다. "뭘 하구 있는 거예요?"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고 영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벌을 주고 있습니다." "무슨 벌을?" "얘들이 단체행동에서 빠지려구 합니다." "단체행동이라니......." "얘들 때문에 우리가 졌어요. 우리 반의 명예를 위해서 전부 놀이에 참가할 작정이었습니다." "네, 그런가요. 언제 그 놀이를 해보자구 여럿이서 의논을 했었나요?" 선생님의 한결같이 부드러운 질문에 영래가 대들 듯이 거칠게 대답했다. "아뇨, 하나마나죠. 우리 반을 위해서 나는 모두 참가해야 된다구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럿이 하는 일에 마음이 모두 맞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각자의 의견도 묻지 않고 혼자의 생각만 주장해서는 절대로 무슨 일에서건 이길 수 없을 거예요. 급장은 책임이 중할수록 누구에게 불만이 없는가를 살피고, 있다면 그 불만이 자기가 저지른 어떤 잘못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모으겠다는 핑계로 제 잘못을 감추려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자치회 때의 일로 영래와 종하 은수 그애들은 선생님을 점점 미워하게 되었고, 자기네와 별로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소녀라고 눌러보려 했던 것이다. 그애들은 병아리 선생님에 관한 음탕한 욕지거리를 지껄이거나 그이가 돌아서서 칠판에 글씨를 쓸 때 일어나 쑥떡을 먹이며 이상스런 몸짓을 하는 거였다. 나는 이 공공연한 모독에 의한 아이들의 수치심이 점차로 깊이 만연되어가고 있었던 상태를 전혀 느끼지도 못했었다. 어느 산수시간에 뒷자리 아이로부터 내게까지 작게 접은 종이조각이 건네져 왔으며, 펴보고 나서 나는 드디어 더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종이조각에는 "본 다음에 앞으로 돌릴 것. 임종하."라고 씌어 있고 밑에다 그이에 관한 욕설에 곁들여 변소에서도 간혹 볼 수 있는 추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림을 책갈피에 끼워넣고 시간이 끝나기를 애가 달아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별의별 무서운 공상에 시달렸다. 나는 얻어터진다. 머리가 깨어져 다 죽게 된다. 그이가 나를 업고 간다. 몇 날 몇 달을 끝없이 간다.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뒤에서 종하가 대견한 짓이라도 해냈다는 듯이 "얘들아 그 쪽지 어디까지 갔는지 이쪽으루 다시 돌려라" 하며 떠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겁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내가 가졌다 왜. 정말 너 이 따위 장난만 하기냐?" 종하와 은수가 얼굴을 마주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낄낄 웃어댔다. "그게 니 깔치니?" "구경했으면 고맙다구 그럴 게지, 이 새끼가......." 나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의들 사과 안하면 그냥 안 둔다." 그에게로 가서 종이조각을 내밀어 주었다. "사과해, 너는 선생님을 욕보인 나쁜 놈이다." "그래 병아리 선생님은 좋은 분이야"하고 석환이가 잇달아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걸 네 손으로 찢어버려." "이 새끼가...... 맞아볼래?" 종하가 내 멱살을 잡아 앞뒤로 흔들다가 바닥에 쓰러뜨렸다. 은수와 영래가 "밟아버려, 밟아."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이 뒤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제각기 떠들었다. "너희들이 잘못이다," "우리는 병아리 선생님을 좋아한다." "그분은 훌륭한 사람이야." 기가 죽어 지내던 장판석이도 종하를 내게서 떼어 밀치면서 말했다. "애들 때리면 재미 적다."은수와 종하는 아직도 영래의 행동을 기다리며 씨근거렸다. 아이들이 사방에서 한마디씩 했다. "학급비를 거둬다 우리한텐 알리지두 않고 맘대로 쓴 건 잘못이다." "요전에 동열이를 때린 것두 잘못이라구 생각한다." "한번도 자치회에서 물어보지도 않구 혼자 맘대로 한 건 더욱 잘못이다." 영래는 자기가 반 아이들에게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걸 알았는지 얼굴이 샛노랗게 질려있었다 "너희들 반장에게...... 이러기냐?" "너는 반장 자격이 없어." "그만둬라." 나는 종하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종하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듯이 영래를 바라보자 그애는 의외로 나약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찢어, 임마." 종하가 그걸 찢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내게 사과 안 할테냐?" 아이들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래 사과하란 말야, 짜식들아." "사과 안 하면 몰매를 놓아서 쫓아내라." 종하가 아주 비굴하게 들릴까말까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우리는 모두가 그애들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풀이 죽은 걸 보고서 어리둥절해질 지경이었다. 나의 들끓던 수치감은 그때에 꽉 몰려 있던 오줌이 방광을 비집고 쏟아져 나올 때처럼 외부로 터져나갔고, 가벼운 몸서리를 흠칫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노깡 속의 어둠을 생생히 기억하구 있다. 선생님과 헤어지기 며칠 전에 어머니에게 졸라서 그분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지. 그날 나는 부끄러워하면서 내 악몽의 비밀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말했어. "애써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무서워만 하면 비굴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겁쟁이가 되어 끝내 무서움에서 놓여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그 뒤 몇 번이나 벼른 끝에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고, 노깡 속에 다시 한번 들어갔더랬지. 나는 그 속의 뼈다귀가 개뼈, 소뼈, 사람 뼈다귀인지 몰랐지만 어쨌든 아무렇지 않게 길을 들였던 것이다. 나는 그이가 어린이들끼리의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모르거나 모른 체했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구나. 다만 아이들이 존경하는 그이가 옆에 계시니까 욕스럽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깨달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럿이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너는 저 깊고 수많은 안방들 속의 사생활 뒤에 음울하게 숨어 있는 우리를 상상해보구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생활에서 오는 피로의 일반화 때문인지, 저녁의 이 도시엔 쓸쓸한 찬바람만이 지나간다. 그이가 봄과 함께 오셨으면 좋겠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 그이가 오는 걸 재빨리 알진 못하겠으나, 얼음이 녹아 시냇물이 노래하고 먼 산이 가까워 올 때에 우리가 느끼듯이 그이는 은연중에 올 것이다. 그분에 대한 자각이 왔을 때 아직 가망은 있는 게 아니겠니. 너의 몸 송두리째가 그이에의 자각이 되어라. 형은 이제부터 그이를 그리는 뉘우침이 되리라. 우리는 너를 항상 기억하고 있으며, 너는 우리에게서 소외되어버린 자가 절대로 아니니까 말야. 끝 (고창근)  
27 내용없는 명성황후의 집념은 공허하다 /안지숙
편집자
3772 2010-07-08
내용없는 명성황후의 집념은 공허하다 강동수 소설 <제국익문사1, 2> 실천문학사 | 2010.05.25 "자넨…… 생각을 잘못했어. 자네의 길은 옳은 길이 아니었어. 일찍이 고균의 뜻은 장했으나 갑신년의 거사가 오히려 나라의 화를 자초했던 것처럼 자네의 길은…… 조선의 망국을 앞당기는 길일뿐이었네. 자네는…… 그렇다면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조선의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테지. 그건 나도 모르겠네. 자네가 실패했던 것처럼…… 아마…… 나도 실패하겠지. 하지만…… 자네는 최악의 길을 선택했네. 자네는…… 자네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하네." - '제국익문사'2권, 280~281쪽 죽어가는 우범선에게 총을 겨눈 채 건네는 장동화의 말은 그들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자조어린 고백이다. 강동수의 소설 <제국익문사>는 장동화가 걷는 '근황의 길'과 우범선이 걷는 '개화의 길'을 대치해 놓고, 두 사람을 잇는 이인경을 전면에 내세워 구한말의 역사를 재조명해 낸다. 두 권짜리 두툼한 장편소설이 분량 면에서 얼핏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는데, 일단 첫 장을 열고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고 추리기법을 원용해 전개하는 스토리는 인물의 동선과 사건 전개에 박진감을 불어넣어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한다. 근황의 길과 개화의 길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이인경은 대한제국의 비밀첩보기관인 '제국익문사' 요원으로 조선과 일본과 상해를 배경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활극을 펼쳐보인다. 이 활극을 제대로 따라잡기 위해선 이인경이라는 인물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인경은 명성왕후 시해범인 이주회의 아들로 아버지가 처형당한 뒤 장동화에게 맡겨진다. 이인경은 스승인 장동화를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제국익문사의 핵심요원으로 성장한다. 장동화는 고균 김옥균 밑에서 이주회 우범선과 함께 개혁을 꿈꾸었던 인물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근황의 길을 선택한다. 이때 뜻을 함께했던 우범선은 기록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뒤 조선 자객에게 피살된다. 소설은 이 대목에서 팩션의 묘미를 발휘한다. 작가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한 우범선을 소설 속에서 다시 살려낸다. 즉 제국익문사의 활약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무대에서 우범선은 끝까지 개화의 길을 고집하는 혁명가로 부활하는 것이다. 우범선은 일본세력을 이용해 왕정을 폐하고 독립적인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목표에 일생을 건다. 혁명가로 살아온 그의 생애는 일본 망명생활 틈틈이 써나간 회고록을 통해 전말이 밝혀진다. 그 회고록에는 일본에 빌붙은 국모시해범으로 알려진 우범선의 갈등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왕비가 지키려는 나라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어떤 내용이 결락돼 있었다. 무엇을 위해, 어떤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권력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내용이 없는 왕비의 집념은 내게 공허해 보였다. 왕비가 지키려던 나라의 무내용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왕실의 안녕과 합중공화. 그것은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 두 개의 정치적 목표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었다. - '제국익문사'2권, 12~13쪽 이제 나는 국적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수리에서 등판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찌르르 흘러내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국적이다. 나는 신하로서 군사를 이끌고 지엄한 궁궐을 범했다. 임금이 머무는 지밀이 외적의 발길에 짓밟히도록 방조한, 아니 외적의 칼날에 지존한 왕비의 목숨을 던져준 자다. 나는 이 지상에 말이 남아있는 한 그 어떤 욕으로도 다할 수 없는 극악한 역도로 손가락질당할 것이다. 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만대에 걸쳐 오늘의 내 행적이 전해지고 전해질 것이다.' - '제국익문사'2권, 28쪽 이제 나는 국적이 되었다! 육성이 들려오는 듯한 회고록에는 정치 망명객의 쓰라린 심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쩌면 이 회고록이야말로 작가가 소설 <제국익문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역사 이면의 진실은 아닐지…….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수구당, 과연 올바른 노선 밟았나? 이에 대해 작가 강동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민족적 분노는 당연한 것이지만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수구당이 과연 올바른 노선을 밟았는가를 따져보는 것 역시 이와 별개로 필요한 일"이라면서 "소설 속의 우범선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상상 속에서 당대 개화당의 이념이 뭉뚱그려져 육화된 인물인데, 그를 통해 개화당이 추구한 정치적 이념의 지형도와 그 한계를 짚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우범선은 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세력을 모아 공화제 정부를 세우려는 거사를 도모하는데, 이를 저지할 임무를 띠고 찾아가는 인물이 바로 그의 옛 동지의 아들인 이인경이다. 우범선은 자신을 찾아온 이인경의 정체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며 회고록을 건네준다. 때문에 인경에게 지령을 내리는 장동화의 근황의 길과 우범선이 꿈꾸는 개화의 길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채 대비되어 드러나고, 그들이 선택한 길에 대한 판단의 몫은 독자에게 맡겨진다. 우연인지 기획인지 아무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나온 소설 <제국익문사>는 베일에 가려졌던 구한말의 첩보기관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가 조정래는 <제국익문사>에 대해 "박제된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장쾌한 서사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균형 잡힌 시선에 신뢰가 간다"며 "가히 경술국치 100년 만에 나온 '대한제국 멸망사'로 읽힐 만하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당초 작가는 우장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국모를 시해한 부친에 대한 원죄의식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조센진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자랐던 우장춘 박사의 내면을 투영시킨 인물 이인경이 보여주는 인간적 매력은 심상치 않다. 특히 우범선의 딸 아사코와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그린 장면들은 자칫 거대담론으로 흐를 법한 소설 전편에 애틋한 감성을 얹어놓는다. 또한 장동화 우범선 등이 스스로 선택한 삶에 대해 취하는 치열함, 고독한 결단은 소설에 또 다른 매력을 더하고 있다. 저자 강동수 1961년 1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4년『세계일보』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등단했다. 저서로 소설집『몽유 시인을 위한 변명』, 시사산문집『가납사니의 따따부따』가 있다. 제20회 봉생문화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 현재『국제신문』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안지숙, 소설가  
26 첼로 켜는 고슈 / 미야자와 겐지
편집자
6072 2010-07-08
내가 좋아하는 소설 ‘첼로 켜는 고슈’는 착한 동물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주 실력을 높여 마침내 자신의 음악세계를 갖게 되는 첼로 연주자 이야기다. 살림살이도 궁색하고 가족도 없는 고슈는 연주 실력마저 형편없다. 지휘자에게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온 고슈. 그는 밤늦도록 첼로연습을 하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온다. 그때부터 고슈에게는 마법이 일어난다. 어른이 되어 동화를 읽는 사람들이 남몰래 바라는 바로 그것, 따뜻한 마법이 일어난다. 이 동화를 쓴 작가는 미야자와 겐지(1896~1933)다.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릴 만큼 일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시인이며 동화 작가이다. ‘은하 철도의 밤’ ‘주문이 많은 음식점’ ‘쌍둥이별’ 등 100여 편이 넘는 동화를 썼다. 겐지의 작품은 국내 TV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됐던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와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애니매이션 ‘첼로리트 고슈’로 만들어진 바 있다. (안지숙, 소설가) 첼로 켜는 고슈 고슈는 마을 극단의 첼로 켜는 연주자였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별로라는 평판이 나 있었죠. 솔직히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동료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형편없었기 때문에 지휘자들한테 늘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오후에 다들 연습실에 둘러앉아, 이번 마을 음악회에서 연주할 제6 교향곡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트럼펫이 열심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두 줄기 바람처럼 울고 있고요. 클라리넷도 보-보 하고 거들어 줍니다. 고슈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접시만하게 뜨고는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보며 첼로를 켜고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지휘자가 손뼉을 짝 쳤습니다. 다들 연주를 멈추고 조용해졌습니다. 지휘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첼로가 늦었잖아. 띠리리, 띠리리, 여기서부터 다시, 자!˝ 모두들 조금 앞으로 돌아가 다시 연주했습니다. 고슈는 얼굴이 벌개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방금 지적당한 곳을 간신히 넘어갔습니다. 휴우 하고 안심하면서 다음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데, 지휘자가 다시 손뼉을 짝 쳤습니다. ˝첼로, 줄이 안 맞잖아! 정말 미치겠군. 이봐, 내가 자네한테 도레미파까지 가르쳐 줘야겠나?˝ 사람들은 멋쩍은 듯 괜히 자기 악보를 들여다보거나 악기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고슈는 허둥지둥 첼로 줄을 맞추었습니다. 사실은 고슈도 잘못했지만, 첼로가 워낙 고물이었던 것입니다. ˝앞 소절부터 다시. 자!˝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고슈도 입을 앙다물고 열심히 첼로를 켰습니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마음을 푹 놓고 있는데, 지휘자가 또다시 손뼉을 짝 쳤습니다. ´또야!´하고 고슈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슈는 아까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괜히 악보를 들여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척했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부분부터. 자!˝ ´자!´하고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별안간 지휘자가 발을 쿵쿵 구르며 호통쳤습니다. ˝안 돼! 도대체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이 부분은 곡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렇게 거칠고 매끄럽지 못해서야 되겠나! 이봐, 연주회는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어. 음악을 한다는 우리가 대장장이나 설탕 가게 일꾼들보다 못하다면, 도대체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나? 그리고 고슈, 자넨 정말 문제야! 표정이 아예 없어. 분노고 기쁨이고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잖아! 게다가 다른 악기와 호흡이 전혀 안 맞는단 말일세. 항상 자네 혼자 신발끈을 질질 끌며 뒤꽁무니를 따라오는 것 같다구. 그러면 곤란해. 제발 좀 잘해 줘. 우리 ´샛별 음악단´이 자네 하나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않겠나? 자, 오늘 연습은 여기서 마치고, 이따가 여섯 시 정각에 극장 대기실로 오게.˝ 연주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담뱃불을 붙이거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고슈는 허름한 상자 같은 첼로를 껴안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입을 비죽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방금 전에 연습한 부분을 처음부터 조용히 다시 연주했습니다. 그 날 밤 느지막이, 고슈는 커다란 검은 짐을 둘러메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이라고 해 보았자, 마을 변두리 강가에 있는 무너진 물방앗간일 뿐입니다. 고슈는 이 물방앗간에 혼자 살면서, 아침나절에는 방앗간 주위의 작은 텃밭에서 토마토 가지를 자르거나 양배추 벌레를 잡다가 오후가 되면 극장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고슈는 집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검을 짐을 풀었습니다. 낮에 지휘자에게 함께 야단맞던, 그 거칠고 무딘 첼로였습니다. 고슈는 첼로를 마룻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갑자기 선반에서 컵을 꺼내 양동이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의자에 앉아, 낮에 연습한 곡을 호랑이처럼 힘차게 켜기 시작했습니다. 악보를 넘기면서 켜다가는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다시 켜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잉지잉 열심히 연주했습니다. 밤은 벌써 이슥해졌습니다. 이제 고슈는 자기가 첼로를 켜고 있는지조차 헷갈렸습니다. 얼굴은 새빨개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요. 그 때 누군가가 뒷문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호슈냐?˝ 고슈는 멍하니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대여섯 번쯤 마주친 커다란 얼룩고양이였습니다. 얼룩고양이는 고슈의 밭에서 딴 설익은 토마토를 끙끙대며 들고 와 고슈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이고, 힘들어라. 이거 나르는 것도 제법 힘드네.˝ ˝뭐라고?˝ 고슈가 묻자, 얼룩고양이가 말했습니다. ˝이거 선물이에요. 드세요.˝ 그 순간 고슈는 낮부터 꾹꾹 눌러 왔던 울화통을 한꺼번에 터뜨렸습니다. ˝누가 너한테 토마토 가져 오랬어? 네까짓 녀석이 가져온 걸 내가 먹을 것 같아? 게다가 그 토마토는 우리 밭에서 난 거잖아. 뭐야, 아직 익지도 않은 것을 따다니! 지금까지 토마토 줄기를 갉아먹고 망쳐 놓은 녀석이 바로 너지? 썩 꺼져, 이놈의 고양이야!˝ 그러자 고양이는 어깨를 둥글게 말아 구부리고는 실눈을 뜨고 싱글거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화내시면 몸에 안 좋아요. 그보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해 주시면 어때요. 들어 드릴 테니까.˝ ˝건방진 녀석! 감히 고양이 주제에.˝ 철로 연주자는 화가 나서 이놈의 고양이를 어떻게 혼내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요, 부담 갖지 마시고 어서요! 저는 선생님의 음악을 듣지 않으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답니다.˝ ˝저, 저, 저, 건방진 녀석 같으니!˝ 고슈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지휘자처럼 발을 쿵쿵 구르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좋아, 켜 주마.˝ 고슈는 무슨 속셈인지 문을 잠그고 창문도 몽땅 닫고는 불까지 껐습니다. 그러자 음력 스무 날을 넘긴 달빛이 방안으로 고요히 흘러 들어왔습니다. ˝뭘 들려 달라고?˝ ˝트로이메라이요. 낭만파 음악가 슈만이 작곡한.˝ 고양이는 입가를 핥고는 짐짓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래, 토로이메라이가 이런 거냐?˝ 첼로 연주자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손수건을 쭉 찢어서 자기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그리고는 폭풍 같은 기세로 ´인도의 호랑이 사냥´이라는 곡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한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갑자기 눈을 깜박거리더니 문 쪽으로 홱 물러섰습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쿵! 하고 문으로 몸을 날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아뿔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는 듯이 허둥대며 눈과 이마에서 불꽃을 파박파박 내뿜었습니다. 수염과 코에서도 불꽃이 번쩍 번쩍 튀었습니다.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재채기를 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종종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고슈는 아주 재미가 붙어서 점점 신나게 첼로를 켰습니다. ˝선생님, 이제 됐어요! 됐다구요. 제발 부탁이니, 그만 하세요! 앞으로 다시는 선생님 음악에 참견하지 않을게요.˝ ˝조용히 해! 지금부터 호랑이를 붙잡는 부분이야.˝ 고양이는 고통에 못 이겨 펄쩍펄쩍 뛰어다니다가는 벽에 찰싹 붙기도 했습니다. 벽에서 몸을 떼면 한동안 그 자리가 파랗게 빛이 났습니다. 마침내 고양이는 고슈의 주위를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고슈도 어지러워져서 ˝이제 그만 용서해 주마.˝ 하고 겨우 연주를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도 멀쩡한 얼굴로, ˝선생님, 오늘 밤 연주는 좀 이상했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철로 연주자는 다시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잎담배를 꺼내 물고는, 성냥 하나를 들고 물었습니다. ˝어떠냐? 몸은 괜찮아? 혀를 내밀어 봐.˝ 고양이는 고슈를 놀리듯 길고 뾰족한 혀를 쏘옥 내밀었습니다. ˝하아, 좀 까칠까칠해졌구나.˝ 첼로 연주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고양이 혀에다 성냥을 치익 그어 담뱃불을 붙였습니다. 고양이는 까무러치게 놀라 혀를 풍차처럼 홱홱 돌리며, 문으로 가서 머리를 쿵 박고 비틀비틀 돌아왔다가 또다시 쿵 박고, 비틀비틀 돌아왔다가 또다시 쿵 박고, 비틀비틀 길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고슈는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이제 내보내 주마. 다시는 오지 마, 이 멍청한 녀석아.˝ 첼로 연주자는 문을 열어 주고, 억새풀 사이를 바람처럼 달려가는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겨우 마음이 가벼워진 듯 곤히 잠들었습니다. 이튿날 밤에도 고슈는 검은 첼로 꾸러미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지난밤처럼 부지런히 첼로를 켜기 시작했죠. 어느새 열두 시가 지나고, 한 시도 지나고, 두 시도 지났지만, 고슈는 여전히 첼로를 켜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몇 시인지도 알 수 없고 첼로를 켜고 있는지 어떤지도 가물가물할 즈음, 누군가가 천장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고양이 너구나. 아직도 혼이 덜 났니?˝ 고슈가 소리치자, 갑자기 천장 구멍에서 호도독 소리가 나더니 잿빛 새 한 마리가 내려왔습니다. 마루에 앉은 것을 보니 뻐꾸기였습니다. ˝뭐야, 이젠 새까지 찾아오는군. 무슨 일이지?˝ 고슈가 묻자, 뻐꾸기는 새침하게 대답했습니다. ˝음악을 배우고 싶어요.˝ 고슈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음악이라고? 네 노래는 기껏해야 뻐꾹, 뻐꾹뿐이잖아.˝ 그러자 뻐꾸기는 아주 진지하게 ˝네, 그래요. 하지만 그게 어려운 거라고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렵기는 뭐가 어렵다는 거야. 너희들은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잖아.˝ ˝그런데 그게 어렵다고요. 예를 들어 뻐꾹 하고 우는 것과 빠꾹 하고 우는 건 듣기에도 많이 다르잖아요?˝ ˝다르긴 뭐가 달라.˝ ˝그럼, 당신이 모르는 거예요. 우리 뻐꾸기는 뻐꾹 하고 만 번을 울어도 그 만 번이 저마다 다른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잘 알면 나한테 올 것도 없잖아?˝ ˝하지만 저는 도레미파를 정확하게 노래하고 싶어요.˝ ˝쳇, 도레미파 좋아하네.˝ ˝음, 외국에 나가기 전에 꼭 배워야 해요.˝ ˝외국은 무슨 외국!˝ ˝선생님, 제발 도레미파를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하시는 대로 따라서 노래할게요.˝ ˝에이, 귀찮아. 그럼 딱 세 번만 켜 줄 테니까, 얼른 돌아가야 한다.˝ 고슈는 첼로를 집어 들고 끼잉끼잉 줄을 맞추고 나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켰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허겁지겁 날개를 파닥였습니다. ˝틀렸어요, 틀렸어! 그게 아니에요.˝ ˝까다롭기는. 그럼 네가 해 봐.˝ ˝이거예요.˝ 뻐꾸기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잠시 자세를 잡더니, ˝뻐꾹.˝하고 울었습니다. ˝뭐야, 그게 도레미파야? 그렇다면 너희들한테는 도레미파나 제6교향곡이나 다 똑같겠군.˝ ˝그건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어려운 것은, 이걸 많이많이 계속하는 거예요.˝ ˝바로 이런 거지?˝ 첼로 연주자는 다시 첼로를 쥐고, 뻐꾹뻐꾹뻐꾹뻐꾹 하고 켰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아주 기뻐하며, 뻐꾹뻐꾹뻐꾹 하고 끼어들었습니다. 몸을 잔뜩 수그리고 끝도 없이 소리쳤죠. 고슈는 마침내 손이 아파서, ˝이봐, 이제 그만 하자고.˝ 하면서 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서운한 듯 눈을 치뜨고는 뻐꾹뻐꾹 하고 소리 높여 울다가 가까스로 ˝…… 뻐꾹뻐꾹뻑뻑뻑.˝ 하고 그쳤습니다. 고슈는 화가 치밀어서 ˝이봐, 뻐꾸기. 이제 볼일 끝났으면 냉큼 돌아가!˝하고 쏘아붙였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켜 주세요. 당신 솜씨는 좋긴 하지만, 어딘가 틀린 것 같거든요.˝ ˝뭐야, 네가 날 가르치겠다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제발 딱 한 번만 더 켜 주세요.˝ 뻐꾸기는 고개를 까딱까딱 조아렸습니다.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다.˝ 고슈는 활을 쥐었습니다. 뻐꾸기는 ˝꾹.˝하고 숨을 쉬고는, ˝그럼 되도록 길게 해 주세요.˝ 하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못 말리겠군.˝ 고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다시 진지해져서 몸을 숙이고는 ˝뻐꾹뻐꾹뻐꾹.˝하고 아주 아주 열심히 소리쳤습니다. 고슈는 처음에는 짜증스러웠지만, 한참 켜다 보니 어쩐지 새의 음이 진짜 도레미파 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뻐꾸기가 더 잘하는 것 같았습니다. ˝에이, 이런 멍청한 짓을 계속하다가는 내가 새가 되어 버리겠군.˝ 하면서 고슈는 연주를 뚝 그쳤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더니, 다시 아까처럼 ˝뻐꾹뻐꾹뻑뻑뻑.˝하고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원망스러운 듯 고슈를 쳐다보며 따졌습니다. ˝왜 그만두는 거예요? 아무리 줏대 없는 뻐꾸기라지만, 우리는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소리친다고요.˝ ˝뭐야, 건방지게! 이따위 바보 같은 짓을 언제까지 하란 말이냐? 이제 그만 나가. 봐, 날이 샜잖아.˝ 하고 고슈는 창을 가리켰습니다. 동쪽 하늘이 아련한 은빛으로 물들고, 시꺼먼 구름이 북쪽으로 둥둥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해님이 떠오를 때까지만이라도요. 딱 한 번만. 잠깐이면 돼요.˝ 뻐꾸기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시끄러워. 잘난 척하기는! 이 멍텅구리 새야, 썩 꺼지지 않으면 털을 뽑아서 아침밥으로 먹어 버리겠다.˝ 고슈는 발을 쿵 굴렀습니다. 뻐꾸기는 깜짝 놀라 창으로 푸드득 날아갔지만 유리창에 머리를 꽝 부딪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휴, 유리창에. 이 바보.˝ 고슈는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 창문은 아무 때고 쓱 열리는 창문이 아니었습니다. 고슈가 창틀을 붙잡고 덜컹덜컹 흔들어 대는 사이에, 뻐꾸기는 다시 한 번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리창에 세차게 부딪혀 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보니까 부리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곧 열어 줄 테니까, 좀 기다려.˝ 고슈가 겨우 6센티미터쯤 창문을 열었을 때, 뻐꾸기는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기어이 나가고야 말겠다는 듯이 창 너머 동쪽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심하게 유리창에 부딪쳤습니다. 뻐꾸기는 바닥에 떨어진 채 한동안 꼼짝도 못했습니다. 고슈는 뻐꾸기를 붙잡아 창으로 날려 보내 주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별안간 눈을 번쩍 뜨고 잽싸게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유리창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고슈는 엉겁결에 창문을 걷어찼습니다. 유리 두세 장이 와장창 깨지고, 창틀이 통째로 나가떨어졌습니다. 그 텅 빈 창 너머로 뻐꾸기는 화살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끝없이 날아가 곧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고슈는 잠시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밖을 내다보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방구석에 엎어져 곤히 잠들었습니다. 다음날에도 고슈는 밤늦도록 첼로를 켜다가 지쳐서 물을 한 컵 마셨습니다. 그 때 또다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오늘밤에는 누가 찾아오더라도 어젯밤의 뻐꾸기처럼 겁을 줘서 일찌감치 쫓아 보내야지, 마음먹고 컵을 든 채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빠끔 열리더니 아기 너구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고슈는 문을 좀더 열어 두고 발을 쿵 구르며, ˝요 너구리 녀석! 너는 너구리 된장국이라는 걸 아느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너구리 된장국, 나 몰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고슈는 그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럼 가르쳐 주마. 너구리 된장국이란 너 같은 너구리를 양배추와 소금을 넣어 푹푹 삶아서 내가 먹을 수 있게 만든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다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하지만 우리 아빠가요, 고슈 씨는 하나도 안 무서운 분이니까 가서 배우라고 했는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고슈도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뭘 배우라고 했는데? 나는 바쁘단다. 그리고 졸려.˝ 아기 너구리는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나는 작은북을 맡고 있거든요. 아빠가 첼로 소리에 맞춰 보고 오랬어요.˝ ˝작은북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여기요.˝ 아기 너구리는 등 뒤에서 나무때기 두 개를 고슈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걸로 뭘 어쩌겠다고?˝ ˝아저씨, ´유쾌한 마차꾼´을 연주해 주세요.˝ ˝유쾌한 마차꾼? 그건 재즈냐?˝ ˝예, 이게 악보예요.˝ 아기 너구리는 다시 등 뒤에서 악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고슈는 악보를 받아 쥐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흐음, 이상한 곡인걸. 좋아, 켜 주지. 너는 작은북을 치겠다고?˝ 고슈는 아기 너구리가 어떻게 하나 싶어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면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기 너구리는 나무때기로 첼로의 아래 부분을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첼로를 켜면서도 고슈는 이거 재미있구먼 하고 생각했답니다. 연주가 끝나자, 아기 너구리는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두 번째 줄을 켤 때 이상하게 늦어요. 어쩐지 내가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고슈는 깜짝 놀랐습니다. 확실히 그 줄은 어제부터 아무리 빨리 켜도 한 박자쯤 더디게 소리가 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 그럴지도 몰라. 이 첼로는 고물이거든.˝ 하고 고슈는 우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너구리는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습니다. ˝어디가 안 좋은 걸까. 한 번 더 켜 주실래요?˝ ˝좋아. 켜고말고.˝ 고슈는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아까처럼 첼로의 아래 부분을 통통 두드리며 이따금 첼로에 귀를 바짝 갖다 댔습니다. 그리고 곡이 끝났을 무렵,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왔습니다. ˝아, 날이 밝았네. 정말 고마웠어요.˝ 아기 너구리는 부리나케 악보와 나무때기를 등에 지고 테이프로 단단히 붙이고는, 절을 두어 번 하더니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고슈는 얼이 빠져서 깨어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다가, 마을 극장으로 가기 전에 기운을 차리려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밤에도 고슈는 밤새 첼로를 켜다가 새벽녘에 악기를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고슈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들어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문틈으로 들어온 것은 들쥐였습니다. 들쥐는 아주 조그만 아기 쥐를 데리고 고슈 앞으로 쫄랑쫄랑 걸어왔습니다. 아기 들쥐는 겨우 지우개만했기 때문에 고슈는 무심결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들쥐는 무엇 때문에 웃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고슈 앞에 서더니, 푸른 밤톨 하나를 놓고 꾸벅 절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몹시 아파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 낫게 해 주십시오.˝ ˝내가 무슨 의사인 줄 알아?˝ 고슈는 불끈해서 퉁명스레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엄마 들쥐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건 거짓말이죠. 선생님은 날마다 모두의 병을 말끔히 고쳐 주셨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선생님 덕분에 토끼 어머니의 병도 나았고, 너구리네 아버지 병도 나았고, 짓궂은 수리부엉이까지 나았어요. 그런데 우리 애 병은 고쳐 주시지 않겠다니, 너무 매정하시군요.˝ ˝이봐, 이봐, 그건 오해야. 나는 수리부엉이의 병을 고쳐 준 적이 없어. 물론 아기 너구리는 어젯밤에 악사 시늉을 하긴 했지만. 하하하.˝ 고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기 들쥐를 내려다보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엄마 들쥐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 불쌍한 우리 아기! 병에 걸리려면 좀더 일찍 걸릴 것이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첼로를 지잉지잉 켜더니, 우리 애가 병에 걸리자마자 소리를 딱 멈추고 이렇게 부탁하는데도 안 된다니!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고슈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뭐라고, 내가 첼로를 켜서 수리부엉이하고 토끼 병이 나았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들쥐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네, 이 근처 사는 동물들은 병에 걸리면 다들 선생님네 마루 밑에 들어가 병을 치료한답니다.˝ ˝그럼 낫는단 말이야?˝ ˝네. 온몸의 피가 잘 통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금방 나은 경우도 있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나은 경우도 있죠.˝ ˝오호라, 그래? 내 첼로 소리가 웅웅 울리면 마치 안마를 해주듯이 너희들의 병을 고쳐 준단 말이지? 좋아, 알았어. 해 보지.˝ 고슈는 줄을 끼이끼이 맞추고 나서, 아기 들쥐를 첼로 구멍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저도 함께 들어가겠어요. 병원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엄마 들쥐는 부득부득 첼로에 매달렸습니다. ˝너도 들어가겠다고?˝ 첼로 연주자는 엄마 들쥐를 첼로 구멍 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했지만, 얼굴이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얘야, 괜찮니?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떨어질 때 발을 모아서 잘 떨어졌어?˝ ˝네, 잘 떨어졌어요.˝ 아기 들쥐는 첼로 안에서 모기처럼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괜찮구먼. 그러니까 우는 소리 하지 마.˝ 고슈는 엄마 들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활을 들고 광시곡 같은 것을 지잉지잉 가앙가앙 연주했습니다. 엄마 들쥐가 자못 걱정스럽게 듣고 있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제 됐어요. 아이를 꺼내 주세요.˝ ˝뭐야, 이걸로 끝이야?˝ 고슈는 첼로를 앞으로 기울여 구멍 앞에 손을 대고 기다렸습니다. 곧 아기 들쥐가 나왔습니다. 고슈는 잠자코 들쥐를 내려 주었습니다. ˝어떠니? 기분은 좋아?˝ 아기 들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나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엄마 들쥐도 덩달아 뛰어다니다가, 고슈에게 연거푸 절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열 번쯤 되뇌었습니다. 고슈는 왠지 들쥐가 사랑스러워져서, ˝얘, 너희들 빵은 먹니?˝ 하고 물었습니다. 들쥐는 깜짝 놀라서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습니다. ˝아니오. 저어, 빵이란 건 밀가루를 반죽하거나 얇게 펴서 만든 거죠? 부드럽게 부풀어 있어 맛있기는 하지만, 저희는 이 집 선반에는 얼씬거린 적도 없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고 어떻게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겠어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냐. 그냥 먹느냐고 물어 본 거야. 그럼 먹는 거지? 잠깐 기다려. 배 아픈 아이한테 줄 테니까.˝ 고슈는 첼로를 바닥에 내려놓고, 선반에서 빵을 한 웅큼 뜯어 들쥐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자 들쥐는 꼭 바보처럼 울다가 웃다가 절을 하다가는, 빵 조각을 소중히 물고 아기를 앞장세워 밖으로 나갔습니다. ˝휴우, 들쥐와 이야기하는 것도 꽤 고단하군.˝ 고슈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쿨쿨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엿새째 밤이 되었습니다. 샛별 음악단 사람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마다 악기를 들고 극장 무대 뒤에 있는 대기실로 줄줄이 퇴장했습니다. 제6교향곡 연주를 훌륭히 마친 것입니다. 청중석에서는 아직도 박수소리가 폭풍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지휘자는 박수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연주자들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답니다. 연주자들은 담뱃불을 붙이거나 악기를 상자에 넣고 있었죠. 시간이 지날수록 박수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큼직한 하얀 리본을 가슴에 단 사회자가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앙코르를 해 달라는데, 짧은 곡이라도 좋으니 한 곡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지휘자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습니다. ˝안 됩니다. 이런 대연주 뒤에는 어떤 곡을 연주해도 우린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럼 지휘자님께서 잠깐 나오셔서 인사라도 해 주십시오.˝ ˝안 돼요. 이봐, 고슈. 자네가 나가서 한 곡 연주하게.˝ ˝제가요?˝ 고슈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야. 고슈.˝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불쑥 고개를 쳐들고 말했습니다. ˝자아, 나가 보게.˝ 지휘자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고슈한테 첼로를 떠안기면서 문을 열고 무대로 떠밀렸습니다. 고슈가 낡은 첼로를 안고 쭈뼛쭈뼛 무대로 나오자, 사람들은 ´드디어 나왔다´ 하고 한결 요란스레 박수를 쳤습니다. 와아 하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바보 만들어도 되는 거야? 좋아, 두고 보자. 인도의 호랑이 사냥을 켜 줄 테다.´ 고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무대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예전에 고양이가 찾아왔을 때처럼 성난 코끼리 같은 기세로 호랑이 사냥을 연주했습니다. 청중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고슈는 거침없이 첼로를 켰습니다. 고양이가 괴로워서 불꽃을 팍팍 튀기던 부분도 지났습니다. 문에 몸을 쿵쿵 부딪치던 부분도 지났습니다. 곡이 끝나자, 고슈는 청중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그 때의 고양이처럼 잽싸게 첼로를 안고 대기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대기실에서는 지휘자를 비롯한 모든 동료들이 불이라도 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었습니다. 고슈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지나 맞은편 긴 의자에 앉아 다리를 척 꼬았습니다. 그 순간 모두들 고슈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딱히 비웃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상한 밤이야.´ 하고 고슈는 생각했습니다. 그 때 지휘자가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고슈, 잘했어. 뭐, 그저 그런 곡인데도 모두들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었네. 불과 며칠 사이에 아주 좋아졌어. 열흘 전에 비하면 꼭 젖먹이와 병사 같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안 그런가, 고슈?˝ 동료들도 너나없이 다가와 ˝잘했어.˝ 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응, 이것도 다 몸이 건강한 덕분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을 걸세.˝ 그 날 밤 느지막이, 고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죠. 그러고 나서 창을 활짝 열고 언젠가 뻐꾸기가 날아갔던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 뻐꾸기야. 그 때는 미안했어. 나는 화를 낸 게 아니었단다.˝ 하고 말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