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다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녹색평론사, 2008)



  1.반대편에서 우리와, 나와 주변을 다시 보게 하는 귀한 글


  개정증보판을 구해서 읽고 생각하는 동안 끝끝내 마음이 편치 않는 이상한 경험은 몇 가지 원고가 증편되기 전에 읽었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흉내조차 내기도 힘들 기준으로 부단히 재촉하는 나무람이 산문 속에 절절이 날을 세우며 나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차라리 솔직하게 표현하면 불편하다.

  우리 한국사회는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부모의 직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잠정적으로 거부되어왔기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프라이드나 정체성이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묘하게 작가 권정생은 철저한 계급의식과 전복성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혁명가의 정신이 섬뜩한 것은 왜일까.

  재단사, 재봉사로서, 꼴망태와 멍석짜기를 하는 농부로서, 기도하는자로서, 아미쉬(amish)적인 삶을 굳건한 토대로 한 분명한 계급성을 실천한 이야기꾼이다.

  이토록 스스로의 비판을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고백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느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서인가? 라는 자문 속에서도 ‘직업은 달라도 품삯은 같아야 한다.’와 같이,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직설하듯이, ‘가난한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라는 주문 속에 독자의 운신 폭은 더더욱 조여든다.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를 예수의 사상에서 그대로 제시하는 데 무소유, 무계급, 그리고 무정부(독자로서 세계정부를 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였다)이며, ‘세상왕의 말을 듣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 세상감사는 죄다 이기적 감사라.’ 따끔하게 제언한다. 화해하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제사가 되지 못함까지 남과 북의 냉탕, 온탕식 대적 상황에 직접 묻고 답한다.  ‘천국이어야 할 땅을 업수이 여기지 말라’


  권정생 선생이 쓴 백여 편의 동화를 제대로 보고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이 산문집을 통해 권정생 선생께서는 하느님의 경전이 어린이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맨 앞에서 실천하셨다. 어쩌면 그 나라의 복음을 동화 속에 꼭꼭 숨기셨다. 어른들만 모르게.


  기독교인과 성자(聖者)로서의 권정생 선생의 표상들이 같은 기표로 가슴에 겹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를 닮는 삶과 (현재의) 기독교인이 비춰지는 모습에 균열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라리 무신론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무척 당황스럽고 단호한 당신의 신관(神觀)은 차라리 괴로울 지경이다. 현재 우리의 기독교인들에게 금기시되는 우상에 절하지 말라 라는 근본주의, 원리주의적 견지와 일견 배척되는 고목나무에 절하는 어머니의 지순한 마음은 참다운 평화와 순수의 종교임에 우회하지 않으며, 동시에 원래의 하느님을 이야기 하며, 더 나아가, ‘마음의 소’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고목나무’ 나, ‘큰 바위’에 매어 놓는 의식, 어머니 당신이 주체가 되어 요구한 약속이며, 어머니의 능력에 맞춘 약속으로 설명한다.

   하느님의 임재가 특정지역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에스키모 부족, 아마존 부족, 일본의 작은 섬마을, 한국의 산속 바위덩어리와 집안에서도 아주 먼먼 옛날부터 하느님이 있었다는 글을 읽으며, 젊은 시절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들이 풀어졌다.


   산문집을 읽어나갈 수록, 당신의 글 쓰는 작업과정과 내면의 목소리를 동화와는 사뭇 다르게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생성된다.  일관되게 흐르는 서정은 ‘삶의 방식’ 자체가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것으로 인생에 맞서는 자세이다. 지구에 현현한 성자들의 예를 들면서까지 당신 고통의 동반을 무기로 삼듯이 굳건한 주체로 서있다.

  당신께서는 교육계를 포함한 아동문학계에 대한 지난날의 부당한 체제 순응적 ‘외로운’ 반성을 포함하여, 권력에 대항하는 문화정치를 동화와 산문 속에 담고 있다.

  종국에 당신이 그리도 갈망하는 ‘평화’ 조차, 고요한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괴로움을 내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끈기로서 논지를 따라가면 드디어 당신이 추구하는 평화가 구체적이 된다.  최후의 만찬( Last Supper )에서, 피와 살(포도주와 빵)을 나누어 먹이는 의식의 해설에 그 평화의 함의를 끄집어낸다. 빵과 목숨은 하나의 개념이며, 빵이 곧 내 살이고, 내 목숨이며, 내 이웃의 목숨임을 깨닫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피가 내 피가 되고, 내 피가 이웃의 피가 된다는, 나아가 온 인류가 한 핏줄로 이어진 것을 알아차릴 때, 평화가 가능한 때로 풀이한다. 이것을 독자인 내가 자문해 볼 때, 괴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설명이고 두려운 설명인가. 

  평화가 고요가 아님을, 풍요가 아님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다시 <최후의 만찬>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옮긴다. 게르니카에서 광주까지, 당신께서 가정을 만들지 못한 채, 수많은 가정과 동물들의 고통까지도 가정파괴범을 보는 인정의 시각에서, 현재까지 유전되는 아픔을 지적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두 벌 옷 갖기조차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선물 받은 노란셔츠를 15년 넘게 입는 모습으로, 스스로 남의 몫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경계하며 ‘검박’하게 실천하신 그것만으로도 독자로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산문을 통독하는 과정 내내, 예수의 삶을 계급적으로 독해하는 독자로서, 전복을 꿈꾸는 주체로서 당신을 상정해 볼 때, 대응하는 틈새의 전략이 때때로 혁명적 이어야함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종국은 비폭력 저항주의이며,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자의 모습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면 하루속히 무기를 없애야 한다.” 며, 강대국과 종속국가의 지도자에게 직접 책임을 추궁한다. 서해 천안함 침몰에 따른 불편한 상황을 보는 각계각층의 인식과 반응들을 대비해 볼 때, 이 평화주의자의 농민과 농촌, 어민과 수병들, 노동자에 대한 슬픈 인정을 읽게 된다.



2. 태기네 암소 눈물


  독자인 나는 시를 쓰기도 하고 53살인 현재 다시 인문학공부를 하는 대학원생이기도 하지만, 주업은 수의사 노릇을 하며 산다. 그리하여 요즘 농촌의 삶이 도시의 삶 못지않게 팍팍함을 읽으며 살고 있다.

  권선생의 시선들은 훨씬 깊고 넓은 생명을 조관한다.  조탑리 마을의 태기네 할머니의 안쓰러움을 뒤로한 채, 암소의 생식기에 연분 없는 정액을 주입하는 모습 뒤로 권선생의 안쓰러움의 눈길을 느끼고도 남는다. 당신이 거두어 기르는 강아지 뺑덕이에게 조차 자연적인 교미를 시켜주지 못하는 자괴감과 미안함을 토로한다.  농촌후계자들에 대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는다. “농사야 말로 성직중의 성직이다”를 대명제로 노정하여, 건강한 농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여야 나라와 전 인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다급함을 강조한다.  지금, 농촌의 상대적 빈곤이 뚜렷함을 걱정하며, 집집이 빚더미에 억눌리고, 일할 만한 일꾼의 부재도 걱정한다.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삶의 복원, 또는 회복을 꿈꾸는 「제 오줌이 대중합니다」라는 산문에서 시계보다 더 자연친화적인 생체시계의 암시는 현재 우리가 자연과 생명들, 제 몸뚱이조차 들여다보는 교감능력이 떨어지거나 퇴화하는 모습에 대한 탄식을 읽는다. 「슬픈 양파농사」에서는 마을 승현이네 아버지의 제초제 음독자살로 잠 못 이루는 밤의 슬픔을 농촌문제로 제기한다. 농사는 사람 살리는 일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대부분 글 쓰는 직업의 사람들은 여행이 많거나 많이 움직이며 글 소재를 체험한다. 권선생은 먼 여행을 건강상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동차에 대한 혐오 때문 등과 겹쳐서 자발적 여행은 없었다. 심지어 아동문학상 수상식에도 참석을 마다하셨을 정도이며, 그 좁고 어두운 책들로 둘리고, 세계전도가 붙어 있는 공간에서 주로 책으로 세상을 조관하신 것을 읽을 때 다시 부끄럼이 밀려온다. 「유기농 실천대회에 다녀와서」처럼, 봉화, 춘양, 불영사, 울진 및 후포로 도는 여행의 기록조차 숙연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강아지를 위해 저녁밥을 해서 먹인 뒤에 피곤한 여독을 추스르는 모습에서 그 미안함은 절정으로 달린다.

  

  대구의 김종철 선생께서 주간으로 있는 녹색평론사의 책을 통해서도 당신께서 원고를 작성하기도 하였지만, 수준 높은 자연주의, 생태주의의 글들을 열독하셨음이 틀림없다. 그 중에 큰 관심은 전술한 아미쉬적 영성의 삶을 이상적 공동체로 보았고, 이에 대한 열망들이 이 산문집 곳곳에 어김없이 담기고 있다. 특히 이 산문에서는 일리인의 『인간의 역사』를 인용하며 노동의 신성성과 더불어 하늘의 뜻을 살아온 위대한 인간의 역사를 강조하며, 대지의 주인으로 당당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계급성을 강조한다. 다시금 인간이 위대해 지기위해서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머리로 사는 것 보다 부처처럼, 예수처럼 바보같이 몸으로 살아야하고 성직자들도 흙으로 돌아가 몸으로 일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 주장한다.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신의 생태주의적, 도시혐오적 자세는 아이누족의 동요와 이사야 11장 성구를 인용함으로 압축시킨 「녹색을 찾는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쨔쨔는 이렇게 들려주었다


  아이누 옛날

  눈 속을 맨발로 다닐 때 용감했단다.

  나이도 셀 줄 모르고

  끓이거나 굽지도 않고 그냥 날것을 먹던 때

  아무한테도 지지 않고 진짜 용감했단다.


  샤모가 와서

  아이누 샤모 흉내내게 되었고

  샤모 나으리들처럼 으스대었지

  그때부터 배가 아파지고 다리가 아파지고

  우린 보통 배가 아프면 맨발로 산 다녔단다.

  눈이 내려도 맨발로 산 다녔단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이가 좋았지

  샤모처럼 째째하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안했고 허풍도 안치고

  나쁜 짓은 모두 샤모가 가르쳐주었단다.


  아이누 나라는 진짜 사람의 나라야

  우리 모두 죽은 뒤에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이 되지 못하면

  샤모도 다른 나라도 망하고 말거야.


  끓이거나 구워서는 안 된다.

  그냥 날것이 좋단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았으니 모두 망한다 해도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실거야

  거짓말하면 하느님 혼내실 거야.


  알았지

  너희들 내가 말하는 것 비웃으면

  진짜 혼날 줄 알아라, 거짓말 아니야

  우린 거짓말 하지 않는다.


  권선생께서 가장 좋아하신 성구에 그의 삶이 담겨 있다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 없다

   (이사야 11장 부분 인용)



3. 그리운 자연, 그리고 어린이


  가난한 어린이 동포소녀 스에꼬와 윤복이의 일기는 1955년과 1965년에 쓴 일기를 산문 「편지」에 소개하며, 아이들의 일기야말로 ‘율법의 완성’ 즉, 예수님의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성구를 강조한다.  당신이 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많은 열망들이 아프고, 가난하고, 처절한 환경 속에서 동화세계 안으로 꽃피우며, 미래 속, 희망의 연대를 꿈꾼 혁명가를 읽는다. 낙동강 개발 사업을 생전에 보시지는 못하였지만, 한 해에 5만종이나 되는 생명의 목숨을 절단 내며 살아가는 우리가 위대하고 축복받은 인간인가를 벌써 제시하며 미리 슬퍼하셨다.

  동화 속에 등장하고도 남을 자연의 이름들을 본다.

  버들강아지, 찔레순, 보리깜부기, 밀이삭, 보리밭 속의 종달새, 시냇가의 박하풀, 미나리아재비, 여뀌풀, 도깨비바늘, 꺽지, 퉁가리, 꾸꾸리, 은빛 피라미, 얼룩 피라미, 모래무지, 냉이, 까실쑥부쟁이, 진달래꽃……. 그리고 깊은 물에는 가물치, 잉어, 민물자라, 메기, 뱀장어, 얕은 물에는 쟁게미, 미꾸라지, 납꾸래기, 등미리, 금빛 붕어, 쟁피리,수수미꾸라지, 쌀미꾸라지 등 산골 개울의 가재와 버들치들이 벗고 뛰어든 시냇물에 배꼽과 발등을 스치고 지나는 모습을 담는다.

  「용구 삼촌」에 등장하는 멍청한 회갈색의 산토끼 「오두막 할머니」에 등장하는 검둥이와 옥토끼, 그리고 배고플 때 먹는 풀도 있다. 참꽃, 빼기뿌리, 무논의 올미싹과 올미뿌리, 쌀버들강아지, 송기, 찔레꽃, 삐삐, 띠뿌리, 풀무꽃줄기, 고수대풀, 수수풀떼기, 달래나물, 달래뿌리 등, 또 머리감을 때 쓰는 두꺼비찰밥풀, 창포, 약으로 쓰는 겨울보리뿌리, 싸리나무 기름, 겨릅대 태운 것, 치자물, 강냉이뿌리, 쑥, 아궁이 흙들도 기술한다.

  산문 「새야 새야」에서는 추운 겨울 굶주린 새들을 거두는 장면을 보자.

  오롱오롱 떠는 참새를 위해 묵은 쌀 한 바가지를 마당에 뿌리고, 그 후 참새는 물론 까치, 굴뚝새, 산비둘기, 양진이, 오목눈이의 등장을 보며 새들의 말을 동화적으로 상상한다. 오히려 동식물의 언어를 배우면 사람이 지혜로워질 것이라 주장한다. 옛사람과 자연에서 배운 농부들은 자연의 소리를 잘 알아듣고 소통할 것 같기도 하다.

  당신께서는 사람만 빼고 자연을 훼손하는 동물이 또 없다며 새를 부러워한다.


  산문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적인 마무리의 발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사에게만 돌아가는 휴식이다” -(이대근)

 

강태규   itiscool@hanmail.net 시집<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