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고 안 된 왕궁의 비밀

 


 

뭉치뭉치 쌓여서 떠날 수 없는 두꺼운 바람

청록색 이끼 키우는 흩어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옛 전사들의 발과 손 여전히 자라고 있다

 

거짓된 희망과 무늬뿐인 혁명을 앞세우고

비탈길을 넘고 넘어 비밀로 채워진 긴 밤을

끌고 온 그 날, 짧은 아우성만 남긴 채

성벽은 쉽사리 무너졌다

 

그때부터 하늘이 지붕이 된 돌로 지은 목욕탕

밤마다 별이 된 공주들의 노랫소리 들려온다

달빛 없는 그믐밤에는 왼쪽 돌 목욕탕에서

왕자들의 웃음소리도 크게 들린다

가끔은 돌 목욕탕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마른 꽃씨처럼 퍼지기도 한다

함께 하는 이의 친절한 설명에

살짝, 꽃무늬 우산이 흔들렸던가

 

신들의 기도조차 멈추어버린 궁터의 나날

정적만이 황금 촛대 위에서 자주 서성인다

 

담장 아래 흙더미에서 뒹구는 어린 병사

가죽신발 안으로 충성을 잊어버린 벌레들

 

흔들리는 시간을 천천히 낳는다

 

성벽을 쌓던 노예들의 손톱에서 흘러나온 무거운

용서는 봉분 없는 무덤에 하양 꽃을 피웠다

생과 사를 풀어내는 방식이 종교에 따라 다른 나라

힌두교식 삶의 환희와 이슬람교식 죽음

하양 깜보자꽃을 해석하는 인니 방식이다

이국 사람들 지나간 발자국마다 하양 꽃잎들

함박눈처럼 무덤을 덮는다

 

꽃무늬 우산 속 이국 남자와 여자

비 내리는 돌담에 나란히 걸터앉아

오랫동안 염소들의 풀밭 식사를 지켜본다

쪽배를 타고 산책하던 돌계단 아래 연못

주인 잃은 황금신과 꽃신 몇 켤레

둥 둥 둥 따뜻한 비에 젖고 있다

 

염소들이 떠난 우기의 저녁이 빠르게 풀밭 위에 닿는다

문없는 돌기둥에 기대어서서

깊은 잠에 빠진 태양은 아침을 잊은 지

오래라는 빗방울 전언을 듣는다

 

그 시절 공주와 왕자의 이름으로 잠시

환생한 이국 남자와 여자

이천십삼 년 십이월 포근한 겨울 안에서

다시, 전생을 호명한다



오후의 사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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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하지 않아서 더 슬픈 누군가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한낮은

게으른 한 생이 더 느리게 흐른다

 

눈꼽재기창에 긴 목 내민 사과꽃

가지마다 못 다 부친 이국 안부

분홍꽃잎에 몽글몽글 써내려가는 중이다

 

저물녘 정원 연못 안으로 스며든

노을보다 애잔했던 그들의 사랑

높은 천장 서까래에 깊이 스미어

나무의 긴 생애를 탁본하느라 손끝이 아리다


*약력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13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이메일

namoo020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