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욕망

                                                              

풀에게 점령당한 텃밭에는 채소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풀 사이로 삐죽하게 솟은 파가 보이고 연두색을 띤 잎이 보여 상추가 있으리라 짐작이 갈 뿐이다. 마당에도 잡풀들이 점령군처럼 으스대며 세력을 뽐내고 있다.

방안에서 엎드린 채 당신은 눈이 부신 듯 반쯤 뜬 눈으로 마당과 텃밭을 한 시간째 보고 있다. 가끔 눈이 깜빡거리지 않는다면 잠을 자거나 죽은 사람으로 오인 받을 수 있는 모습이다. 핏기 없이 하얗고 삐쩍 마른 얼굴이 마치 데스마스크 같다.

당신은 미라가 천 년의 먼지를 틀고 일어서듯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반쯤 뜬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후 또다시 꼼짝하지 않고 텃밭과 마당을 본다. 아니, 어쩌면 텃밭과 마당을 내리쬐고 있는 햇빛을 보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당신은 햇빛을 보는 게 아니라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 어딘가.

당신은 기억을 더듬는다. 처음 보는 텃밭과 마당, 누워 있을 때 둘러본 천장과 낡은 가구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다. 어느 날 잠자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생판 모르는 이곳에 갖다 놓은 느낌이다. 하지만, 두렵거나 원망이 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은 한량없이 편안하다. 텃밭과 마당도 풀이 많을 뿐이지 어딘지 눈에 익은 것 같기도 하다. 풀만 모조리 뽑고 나면 지금껏 생활해온 집같이 느껴질 것 같다.

저 풀을 뽑으면.

당신은 중얼거리지만 입은 열리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다.

죽음.

순간, 당신의 하얀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렇지. 죽으러 갔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근데 여기로 죽으러 왔단 말인가. 남모르는 집에. 죽으려는데 누군가 나를 살려주고 이 집으로 데리고 온 건가.

당신은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본다. 때가 절여 누르스름한 천장과 벽, 낡은 텔레비전이 보인다. 그 옆엔 역시 몇 십 년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선풍기가 고개가 꺾인 채 서 있다.

저 가방.

회색 등산 가방을 보는 당신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가방을 메는데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리던 느낌. 죽으러 가는 길. 가방엔 든 게 별로 없어 가벼웠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이랬구나 싶어 더욱 서글펐던 기억. 인간은 기억으로 사는 동물이라지.

당신은 고개를 돌려 다시 텃밭과 마당을, 아니, 텃밭과 마당을 내리쬐고 있는 하얀 햇빛을 바라본다.

어째서 이곳에 왔을까. 보아하니 저승은 아니고. 집을 떠난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꼭 알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저 풀을 뽑으면.

당신은 몸을 일으키다 휘청, 거리며 벽을 짚는다. 마당이 빙글빙글 돈다. 짚고 있는 벽이 기우뚱거린다. 주저앉을 것만 같다. 다리에 힘을 준다. 풀을 뽑아야지, 풀을.

당신은 비틀거리며 마루로 나와 댓돌을 본다. 고동색 등산화가 한 쪽은 댓돌 위에 한 쪽은 마당에 뒹굴고 있다. 분명 자신이 신던 등산화다. 그제야 당신은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잿빛 상의 등산복과 검은색 등산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 죽으러 갈 때 입었던 옷이지.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풀은 잘 뽑힌다. 풀 사이 일렬로 솟아오른 파를 보며 손으로 풀 밑동을 한 움큼 잡고 뽑으면 흙을 잔뜩 부여잡은 뿌리가 올라온다. 뽑은 풀은 텃밭 너머로 던지고 나서 다시 허리를 숙여 풀을 뽑는데 뽑을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날카로운 햇빛이 당신의 정수리를 쪼고 등을 내리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랑곳 않고 풀을 뽑는다. 당신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상의 등산복은 땀으로 이미 다 젖어 등에 찰싹 들러붙어 있다.

하하.

당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풀을 한 움큼 쥐고 상체를 일으키다 휘청, 거린다. 텃밭 너머 시멘트 담이 좌우로 흔들흔들, 거린다. 그때다.

아.

당신은 어지러워 눈을 감는다.

그래, 밤에 여기로 왔었지. 언제더라…… 길을 잃고 헤매다 외딴집을 발견했고……. 무척 안온한 느낌이 들었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슬레이트 지붕, 비록 불이 켜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마루가 있고 큰방이 있고…… 작은 방이 있고…… 무작정 집으로 들어갔지…… 그 뒤로는?

갑자기 누군가 눈앞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 것 같다. 어지럽다. 당신의 손에 있던 풀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죽음은 이미 두렵지 않다. 오히려 편안하다. 기분이 좋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려 한다. 당신은 한동안 면도날 같은 햇빛을 고스란히 받다가 천천히 텃밭을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에 걸터앉는다. 방금 나왔던 텃밭을 본다. 3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파 세 이랑 중에 겨우 한 이랑의 풀을 뽑았을 뿐이다. 풀에 치인 파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풀을 뽑은 빈자리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다시 텃밭으로 가려고 상체를 일으키다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래…… 멀리……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죽고 싶었지. 무작정 버스를 탔고…… 내리고…… 걸었지. 무슨 절이 있었고…… 절 뒤로…… 산으로 올라갔지. 등산로가 아니라 잡목과 잡풀이 우거져 오르기가…… 싶지 않았고. 배고픈 줄도 몰랐지. 며칠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고…… 단지 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배낭을 벗어 안을 뒤져 보았지만 야속하게도 물병은 나오지 않았지. 하얀 로프가, 목을 맬 로프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산을 넘고…… 밤이 왔고…… 쓰러져 자고…….

당신은 마치 눈앞에 광경이 떠오르는 것을 잡기라도 할 양 미간을 찌푸리지만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깨어나 산을 넘었는데, 외딴집인 이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

당신은 마당을 둘러본다. 댓돌 밑에서 대문도 없는 입구까지 풀이 군데군데 쓰러져 있다. 자신이 걸어온 자국 같은데, 어젯밤인지 그저께 밤인지, 그도 아니면 며칠 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은 다시 일어나 텃밭으로 걸어간다. 날카로운 햇빛이 이제 드문드문 흰머리가 올라오는 당신의 정수리를 닭의 부리처럼 쫀다. 당신은 아랑곳없이 주저앉다시피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다. 힘이 난다. 땀이 날수록, 힘이 들수록, 날카로운 햇빛이 정수리를 쫄수록 마음이 편안하다. 기분이 한결 좋다.

그때 아내의 벌레 보는 듯한 눈매가 떠오른다. 언제였나. 이번엔 한심하다는 듯한 장모의 눈빛, 저주가 담긴 듯한 장인의 눈빛. 눈빛을, 뽑아 멀리, 텃밭 너머로 던진다. 아내의 가소롭다는 눈빛도 밑동을 잡고 뽑아 멀리 던진다. 눈빛, 눈빛들을 뽑아서, 멀리 던질수록 힘이 난다. 마음이 편안하다.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이미 자신은 죽었고 죽은 몸이 풀을 뽑는 기분이다.

파밭의 풀을 다 뽑고 나니 햇빛을 못 보고 풀에 치인 파들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비스듬히 혹은 아예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당신은 손으로 흙을 긁어모아 북을 주어 똑바로 세우려 하지만 흙의 양이 많지 않아 파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 몇 번 더 손으로 흙을 긁어모았지만 손가락만 아플 뿐 흙이 파지지 않는다. 손톱 밑으로 흙이 들어가 까맣게 변했고 손가락 끝이 아려오자 당신은 할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선다. 얼굴에서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땀이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옷으로 얼굴을 닦지만 옷 또한 땀으로 젖은 터라 얼굴은 땀으로 번들번들하다.

자네가 인간인가.

장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장모의 갈라지는 목소리.

우리가 자네에게 어떻게 했는데 우리를 이렇게 곤궁에 빠트리다니. 이제 우리는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우린 망했네, 망했어.

장모와 장인의 목소리가 천둥이 되어 귓속으로 파고든다. 당신은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왜 그랬을까. 왜 참지 못했을까.

혀라도 깨물어 죽고 싶은 심정이다. 당신은 비틀거리며 마루로 건너와 뒤로 쓰러진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여고생. 그 학생만 보지 않았더라도. 봤어도 참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그동안 잘 견뎌냈는데.

당신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번질번질하다.

검사장 승진을 앞둔 시점. 불안했고 긴장되었고 조심했다. 불안하고 긴장되면 화산 분화구의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욕정. 마치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행동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의 일로 곤혹을 치렀지만 마무리를 잘했었기에 약을 먹으며 치료가 잘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검사장 승진 한 달여를 앞두고 부하직원들과 회식을 한 게 잘못 되었던가.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던가. 술을 마셨더라도 곧장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음.

당신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엎드린다.

그 여학생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왜 하필 그 여학생을 아무도 없는 길에서 마주쳤는가.

여학생이 떨면서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급하게 전화하는 걸 보면서도 팬티를 내리고 성기를 잡은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겁먹은 여학생의 얼굴을 볼 수록 전율로 몸이 떨렸다. 사정 후 수치감과 자괴감으로 팬티와 바지를 올리고 걸어가는데 공명처럼 피옹피옹, 하며 경찰차가 따라왔다.

왜 그랬어요? 점잖게 생긴 사람이.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당신은 또다시 수치감과 자괴감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고위직 검찰 직함은 말하지 못하고 무직이라고 했다.

몇 번 그랬듯이 조용히 넘어가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유치장에서 채 밤이 지나가기 전에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경찰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피해 여학생이 SNS에 당신의 얼굴이 나오는 사진을 올리며 피해 사실을 올렸고 순식간에 당신의 이름과 신분 주소가 밝혀졌다. 경찰들이 알고 나서 기자들을 경찰서 밖으로 내쫓으려 했지만 기자들의 수가 많아 역부족이었다.

장인 장모가 달려왔지만 언론의 보도를 막지 못했다. 당신은 다음 날 곧장 사직서를 제출했다. 구속되지는 않았으나 집은 구치소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아내의 벌레 보는 듯한 눈빛, 두 딸의 외면하는 눈길. 참기 힘들었다. 가사도우미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몇몇 선배 동료 검사들이 전화를 해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건 오히려 독을 탄 물과 같았다.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일단 친구의 오피스텔로 옮겼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과 검찰 고위직의 나태와 도덕불감증에 대해 연일 기사가 쏟아졌고 성도착증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담도 이어졌다. 불면의 밤이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사회적 지위 명예는 물론 가족까지도 다 잃었다는 걸 알았다. 장인은 잠잠해질 때까지 어디 외국이라도 가 있으라고 했지만 수사 중이라 사표도 수리되지 않았기에 외국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당신은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멍한 눈으로 마당을 내려다본다. 모든 사물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다. 바람도 한 점 없어 나뭇잎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자신의 생도 정지했으면 하는 심정이 든다. 그때 부엌 앞의 수도가 보인다. 그제야 당신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허우적거리며 수도가로 걸어간다. 수도 주위의 시멘트 바닥이 하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당신은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튼다. 꾸르륵, 하더니 뜨거운 녹물이 왈칵, 쏟아진다. 당신은 엉겁결에 물에서 손을 재빨리 뺀다. 수도관이 햇빛에 노출되어 있던 터라 물이 뜨겁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물이 쏟아진다. 손을 넣는다. 이제야 물이 시원하다. 당신은 두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마시다 아예 입을 수도꼭지 밑에 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한참동안 물을 마시다 당신은 상체를 일으킨다. 물을 많이 마셨는데 갑자기 배가 고프다. 그제야 당신은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 깨닫는다. 또다시 입을 수도꼭지 밑에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물을 마실수록 배가 고프다. 당신은 물 마시는 것을 멈추고 머리를 수도꼭지 밑으로 들이민다. 물이 당신의 흰머리가 올라오는 뒷머리에 쏟아진다. 당신은 시원함에 몸을 움찔거린다. 한동안 물을 받다 머리를 든다.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다. 두 손으로 머리의 물을 훔치며 마루로 올라온다.

누가 살았을까.

텃밭에 각종 채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근데 주인은 어디 갔을까. 텃밭은 물론이고 마당까지 잡풀이 많은 것을 보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다.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편안하다. 이 집이 편안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걸 잃었으니 오히려 편안한지 모르겠다.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긴장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던가. 오히려 사건이 터진 게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된 느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긴장하며 살고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마당으로 내려와 집을 둘러보다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과 많이 닮았다. 왼쪽으로 부엌이 있고 중간엔 안방, 그 옆엔 작은 방. 방 앞으로 마루가 있는 게 고향집과 흡사하다.

이래서 이 집이 편안하게 느껴졌는가.

당신은 집을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텃밭으로 간다. 이번엔 상추가 있는 곳이다. 이곳 역시 풀이 많아 겨우 상추 잎이 보일 뿐이다. 당신은 상체를 숙이고 풀의 밑동을 잡아당긴다. 역시 풀이 잘 뽑힌다.

중학교 때 서울로 갔지.

당신의 머릿속에 영화처럼 중학교 때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 고모집으로 갔다. 물론 그 전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거나 면접 보러 몇 번 갔지만 막상 고향을 떠나 중학교 생활하러 가니 무서웠고 긴장되었다.

네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라.

고모부는 인자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자하셔도 부모와 떨어져서 지내는 서울 생활이 편하지가 않았다.

꼭 성공해야 한대이. 판검사 되란 말이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당신을 불러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치 판검사가 되지 못하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어릴 때부터 집에 일이 많아도 당신에겐 절대로 못하게 했다. 공부해라. 공부해서 출세해야 한다. 어린 동생들도 부모를 돕는데 당신은 방에서 공부만 했다. 당신 또한 야망이 있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살 수는 없다. 출세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 지역의 국회의원이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판검사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당신은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다. 어쩌면 부모가 일을 시켜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쩌다 성적이 전교 1등에서 2등으로 밀리면 가차 없이 아버지의 손바닥이 당신의 등을 강타했다. 다행히 초등학교 6년 내내 두 번을 빼고는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고 처음 치른 시험성적은 꼴찌에서 20번째였다. 정식 시험이 아니고 3월에 치른 시험이기도 했지만 차마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날…….

어찌 그날을 잊겠는가. 당신은 풀을 뽑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멈추고 상체를 든다. 또다시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날은 당신이 처음 몽정한 날이었고 어쩌면 그때부터 성도착증세가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다.

시골의 수재가 서울에 와서 둔재로 바뀐 순간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먼저 아버지의 손바닥이 떠올랐고 꼭 출세하리라 다짐했던 마음이 초조했다.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고 뒤척이다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몽정을 했다. 몽정을 하고 나서 당황했고 수치스러웠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이상했다. 마음이 이렇게 편안한 적이 없었다. 계속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중간고사를 준비할 때 당신은 걱정되었고 긴장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험 전 날이었던가. 밤샘할 작정을 하면서 공부를 하다 머리 좀 식힐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팔짱을 끼고 불안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는데 옆집 세면실의 열려진 창틈으로 불빛이 보였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쪽 방향으로 걸어갔고 중학생쯤 되었을 여학생이 옷을 모두 벗고 샤워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당신은 온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고 자신도 모르게 팬티를 내리고 여학생을 보며 자위를 했다. 자위를 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침내 사정을 했고 팬티를 올리자 수치감과 자괴감이 왈칵, 달라붙었다.

음.

당신은 상추 밭의 풀을 다 뽑자 옆에 있는 고추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풀에 치인 상추의 아랫잎은 농했고 위에 있는 잎 몇 장이 그나마 괜찮았다. 다행히 파처럼 옆으로 쓰러지진 않았다. 고추나무는 풀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고추가 많이 열렸다. 위에서 보면 풀에서 고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때부터였어.

당신은 풀을 한 움큼씩 뽑으며 중얼거린다. 왜 멈추지 못했을까. 그렇게 자위를 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고 공부가 잘 되었다. 시험도 잘 치렀다. 중위권에 진입했고 학원만 다니면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편지를 썼지.

당신은 여전히 풀을 뽑으며 중얼거린다. 동생들 학비며 자신의 학비로 인해 집이 쪼들린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고 곧 편지와 돈이 왔다.

돈 걱정 말고 공부만 해라. 오직 출세해야 한다. 집 걱정은 마라.

아버지의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자신이 출세를 해서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다 기말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당신은 또다시 극심한 불안과 초조함으로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 밤에 옥상에 올라갔고 또다시 그 여학생이 샤워하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팬티를 내리고 여학생 쪽으로 몸을 돌려 자위를 했다. 한껏 쾌감이 올랐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사정을 하고 나면 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에 시달렸다.

왜 멈추지 못했을까.

당신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시험이나 긴장되는 일이 생기면 또다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 여학생이 샤워를 하지 않을 때는 길을 지나가는 여학생을 보며 자위를 했고 점점 더 과감해졌다. 고등학생이 되자 마치 진통제를 맡는 환자가 점점 더 센 진통제를 원하듯이 직접 길에서 했고 여학생이 보는 데서도 했다. 한번은 여학생이 기겁을 하자 더 쾌감을 느낀 당신은 계속 하다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잡혀 파출소로 가게 되었다. 당신은 제발 학교에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경찰관은 학생증을 요구했고 당신은 망설이다 학생증을 주었다. 경찰관은 학생증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고등학교. 경찰관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장이라는 사람과 몇 마디 나누더니 학생증을 돌려주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이런 짓을 하냐며,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하면 자신들을 잊지 마라며 집에 가라고 했다.

그때 만약 처벌을 받았더라면.

당신은 아쉬움이 남는다. 두 손에 힘을 주어 풀을 한 움큼씩 뽑아 멀리 힘껏 던진다.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누, 누구요?”

등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당신은 깜짝 놀란다. 돌아보니 노인 부부가 마당에 서 있다.

“저…….”

당신은 할 말을 잊고 머뭇거린다. 그제야 자신이 남의 집에 와서 풀을 뽑고 있는 사실을 자각한 표정이다.

“이 집하고 친척인가.”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친척이야 다 아는 사람일 텐데.”

할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누구신데 남의 집에 와서…….”

할아버지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저, 그게 아니고. 지나가다, 어쩌다 들렸는데…… 밭에 풀이 많아서.”

당신이 더듬거리자 노인 부부는 마루로 올라앉는다.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 같다.

“이리 좀 올라오시오. 땡볕에 서 있지 말고요. 아이고, 이 더운 날에.”

할머니가 쯧쯧, 혀를 찬다.

당신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에 올라앉는다.

“보아하니 이 근동 사람은 아닌 거 같고. 어디서 오셨소? 얼굴이 하얀 게 서울 사람 같네.”

“예. 먼데서……. 그래서 잠시 쉬다가 그만 풀이 많아서, 밭에.”

“난 멀리서 보고 깜짝 놀랐네. 영감이 살아왔나 싶어서.”

할아버지는 집을 둘러보며 말한다.

“이 집 주인은 어디 계신가요?”

당신은 용기를 내어 묻는다.

“왜요? 사실라고요?”

할아버지는 집을 싸게 내놨으니까 사려면 금방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집 주인은 자신과 또래인데 혼자 살다가 1개월여 전에 쓰러져 병원에 있다가 며칠 전에 죽었다고 말한다. 아들들이 모두 출세해서 서울에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집 살 사람이 있으면 팔라고 자신에게 전화왔었다는 말도 한다. 가격은 알아서 팔아달라고 했다면서 살 생각이 있으면 싸게 주겠다고 한다.

당신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살 수만 있다면 당장 사고 싶다. 그런데 죽으려고 했던 마음이 아직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잠시만 여기 있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입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야 뭐 괜찮지만. 밥솥이나 냉장고도 쓸 수 있고. 근데 어디 아프시오?”

할아버지가 당신을 빤히 쳐다본다.

“밥은 먹었소?”

할머니도 빤히 쳐다본다.

“예, 먹……었습니다.”

“뭘 안 먹었구만.”

할머니는 일어서며 땡볕에 일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 쓰러지면 큰일난다며 집에 가서 먹을 것 챙겨오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함께 일어선다. 당신은 노인 부부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실로 오랜만에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니 코끝이 찡하다. 다들 경멸과 조소가 담긴 눈. 벌레 보는 듯한 눈빛.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 도저히 그런 눈빛들을 견딜 수 없어 피해왔는데 다행히 노인 부부를 만나니 오랜만에 사람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입구를 나가는 노부부를 보다가 당신은 문득 아내를 생각한다. 20여 년을 살아도 저렇게 다정하게 걸을 수 없었던 아내.

당신은 아내와는 애초부터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당신이 대학 2학년 때 사법고시 합격하고 졸업반이 되자 장차 장모가 될 사람이 찾아왔다. 겉보다 알부자로 소문난 집이었는데 수천 억대 부동산 자산가였다. 장모될 사람은 터놓고 얘기했다. 당신이 내 딸과 결혼하면 검사장까지 시켜주겠다. 그러니까 당신을 출세시켜줄 테니 가족회사의 불법 탈법을 막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이미 당신의 가족에 대해 다 알고 온 상태였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구미에 다니는 세 동생은 당장 대기업에 취직시켜줄 테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니 땅을 사주겠다고 했다. 농사짓기 싫으면 가게를 내줄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가 소망하던 것과 일치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를 만나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좋습니다.

당신은 출세하기 위해 튼튼한 동아줄이 필요했기에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아내 될 여자에 대해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건 뭐 조선시대로군.

그 말 뿐이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기본적으로는 당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아내는 명문대 음대를 나왔는데 키가 크고 날씬하고 거기다 얼굴까지 예쁘니 외견상으론 꿩 먹고 알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졸업을 한 달여 앞둔 겨울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 첫날부터 당신은 긴장했다. 무엇보다 아내와 성관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잠자리를 할 수 있을까, 아직 한 번도 여자와 잠자리를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당신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때 당신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경악하는 여자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내를 품었을 때 눈을 감고 길거리를 지나는 여자를 향해 팬티를 내리고 자위하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겨우 성관계를 끝내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아내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피곤하다는 이유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잤다. 하지만 매번 그럴 수 없었다.

사법 연수원을 마치고 검사로 임명되었는데 첫 직장이 서울중앙지검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그때부터 실세가 당신을 후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당신은 승진을 거듭할수록 긴장되고 불안했다. 누구에게 대접을 받아서 가건 혼자서 가건 업소에 한 달에 여러 번 갔는데 갈 때마다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게 아니라 여자에게 옷을 몽땅 벗고 서 있게 하고 앞에서 자위를 했다. 여자는 기겁을 했고 그럴수록 당신은 더 큰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처가에서 업소에 드나드는 것을 아는 눈치였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처가에선 가족회사의 이름으로 수천 억의 재산이 있는데 그 돈을 사적으로 빼내 쓰고 또한 불법으로 부동산 사업을 했기에 당신의 권력이 필요했다. 예전엔 고문 변호사를 두었지만 아예 검사를 가족으로 끌어들이는 게 더 안전하고 돈도 적게 들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이 처가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아내에게 들켰다. 아내가 샤워하는 동안 문틈으로 벗은 몸을 보며 자위를 하다 들켰는데 아내는 이렇게는 못 산다며 짐을 싸들고 친정으로 갔다. 그동안 아내와의 잠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이 1년에 몇 번 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겨우겨우 치렀다. 당연히 아내는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러다 자신의 샤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위하는 걸 보고는 아예 이혼을 선언한 것이었다.

당신은 잘못했다고 아내에게 몇 번이나 가서 빌었지만 소용없었고 장인이 당신을 불렀다. 같이 살되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을 것. 그리고 업소에 드나들되 절대로 누구에게 들키지 않을 것. 당신은 오히려 그 조건이 고마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내하고는 다시 결합했지만 각 방을 썼고 남들이 보기에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했다. 아내는 나름대로 외출이 잦았고 화장도 짙어졌다. 당신은 오히려 그런 아내가 고마웠다. 누굴 만나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관심 없었다.

당신은 여전히 주요 보직을 맡았고 승진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더 길거리로 나왔다. 야구 모자를 쓰고 여차하면 뛰기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서 어둑한 골목이나 인적이 드문 길에서 여자들을 기다렸다. 여자가 나타나면 주위를 보고 사람들이 없으면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자위를 했고 기겁하는 모습을 보고 사정을 했다. 치밀하게 CCTV가 없는 곳에서 했다.

당신은 용케 잡히지 않았다. 아니 잡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에서 신분을 알아보고는 스스로 해결해주었다. 물론 장인의 영향력이 컸고 대가는 충분히 전해줬다. 하지만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조심했어야 했는데 운이 나빴던 걸까. 대부분 여자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그 후에 신고를 했는데 이번의 여고생은 기겁을 하면서도 전화를 했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여학생의 모습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면서 자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여학생이 사진을 SNS에 올렸고 걷잡을 수 없이 사건은 커졌다.

오히려 잘 됐다.

당신은 햇빛이 잦아든 마당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막상 사건이 터지자 오히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이제 해방이다. 다시는 이런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을 떨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는다는 허망함에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지만 검찰수뇌부에서도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 본보기로 삼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당신은 잘 알았다.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조직의 부패를 가리려고 한다는 걸.

당신은 이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제발 죽은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죽으려고 마음먹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 당신은 마당의 풀을 뽑기 위해 일어선다. 그때 입구에 좀 전에 다녀간 노인 부부가 보자기를 들고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또 뭘 할라고? 몸도 안 좋아 비이는데.”

할머니는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할머니가 보자기를 풀고 내놓은 것은 밥이다. 하얀 고봉밥. 당신은 꼴깍, 침을 삼킨다. 갑자기 극심한 배고픔을 느낀다. 좀 전에 물을 마실 때 느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찬이 없어서. 촌에는 다 이렇게 산다오.”

할아버지가 오히려 미안하다는 듯 말한다. 밥과 식은 된장국, 고추찜, 들깨김치, 배추김치가 전부다. 당신은 아, 아닙니다. 말하기가 바쁘게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는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다. 결혼하면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맛. 방학 때 내려오면 해 주던 밥맛이요 반찬이다. 여기 더 있소. 천천히 드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다른 밥그릇을 당겨 밥을 퍼, 먹는다. 먹을수록 배고픔이 더하다. 먹다가, 당신은 당황해 한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죽으려고 하는 놈이 허겁지겁 밥을 먹다니.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밥과 반찬을 놓고. 속으로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입은 맹렬하게 밥을 달라고 요구한다. 손은 충실한 하인처럼 따른다. 할머니가 빈 그릇으로 마당의 수돗물을 떠오며 물 좀 드시오, 체하겠소, 한다. 순식간에 두 그릇의 밥이 사라졌고 그제야 당신은 할머니가 떠 온 물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당신은 차마 노인 부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다. 다 돌아갈 걸. 할아버지는 혼잣말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윙, 하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밥솥을 여닫는 소리도 들린다.

“이건 냉장고에 넣어둘 테니 나중에 드시오. 반찬은 저녁에 좀 더 해드릴 테니.”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가 주방에서 말을 이었다.

“여 쌀도 있소.”

“감사합니다.”

당신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누구에게도 이렇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모두가 의례적이었다. 그렇지. 당신은 자신의 삶이 온통 의례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른 갑시다. 우리 땜에 쉬지도 못하시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재촉한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집 정리하기가 거시기 했는데 안 하길 잘 했구먼, 할아버지는 중얼거리며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참, 밥할 줄 아시오?”

할머니의 말에 순간 당신은 난감하다. 지금까지 밥을 한 적이 없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물을 요만큼 넣고 그 뭣이야, 취사 누르면 돼요. 오늘 저녁밥은 안쳐놓았지만.”

할머니는 손가락을 들어 이 굵기만큼만 높이 물을 부으라고 강조한다. 당신은 또다시 겸연쩍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어째던둥 사시오. 할머니는 나지막이 말하곤 할아버지의 뒤를 쫓는다. 순간 당신은 섬뜩한 느낌이 든다. 죽음의 냄새. 할머니는 자신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마루로 올라와 마당을 내려다본다. 평온하다.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런 평화가. 이제야 내 집을 찾은 느낌이다. 항상 남의 집에 사는 기분, 남의 옷을 입은 기분. 당신은 처음으로 집에서 안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젠가는 성기를 잘라버리려고 했었지.

당신은 씁쓰레 미소를 머금는다. 무슨 일을 앞두고 불안하거나 긴장할 때마다 여자를 찾아 길거리로 나오니 환장할 일이었다. 끝나고 나서도 수치감과 자괴감이란. 차라리 성기를 잘라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와도 남남으로 지내니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스님이 수행에 욕정이 방해가 되자 돌로 성기를 잘랐다지 않는가. 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만약 그때 성기를 잘랐다면.

당신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칙칙칙……. 밥솥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고향집에 오면 듣던 소리. 어머니의 소리. 무척 정답다는 느낌이 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졸업 이전의 인생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동생들과 마당에서 뛰어놀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없다. 없으니 평온하다. 공부하란 소리도 출세하란 소리도 없다. 문득 어머니가 그립다. 지금쯤 어머니는 자신의 소식을 들었을 텐데,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 아버지는 아마도 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 동생들은……. 문득 어머니를 모셔오고 동생들도 데리고 와 이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초등학교 졸업 이전처럼.

당신은 중얼거린다. 아버지도 모셔야겠다. 처가에서 결혼할 때 땅을 많이 사주었지만 노름과 술로 다 팔아먹었다고 했다. 이번엔 전자제품 파는 가게를 내주었는데 아버지의 노름으로 겨우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참에 아버지도 모시고 와 여기서 함께 살고 싶다. 어차피 그 생활도 아버지에겐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야. 동생들도 마찬가지지. 중학교 졸업하고 구미 공장에 들어갔다가 처가의 도움으로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그 또한 생활이 맞지 않을 터였다. 이런 곳으로 와서 사는 게 모두에게 맞을 거야.

당신은 풀을 뽑기 위해 마당으로 내려선다. 풀을 뽑는 아버지도 보이고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어머니의 저녁 준비하는 소리도 들린다. 동생들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다. 당신은 두 팔을 벌리며 마당을 뛴다.


***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외 2권, 장편소설『갈대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외 3권, 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 개인전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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