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크리스마스 

                         

고만고만한 단층집 사이로 성당 첨탑이 보였다.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성당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어 읍내 어디서든 보였다. 열시가 되어 성당 첨탑 속에 걸린 종이 뎅그렁 뎅그렁 울리자 성탄미사에 가는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쳤다. 은석은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속에서 요안나를 찾았다. 요안나는 보이지 않았다. 성탄미사 시간인 열시가 맞선 시간이라 은석은 더는 요안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읍내 아래쪽으로 차를 몰았다. 막걸리 양조장, 장시계점, 진안 인삼점, 태극당, 동아서점, 농협, 레스토랑…… 눈을 감고도 어디에 무슨 가게가 있고 어디에 무슨 건물이 있는지 훤했던 읍내 풍경이 요안나와 헤어진 후 낯설게 보였다. 현금을 인출하려고 농협을 찾다 반대편에 있는 군청으로 갔고 군청을 찾다가는 농협으로 간 적도 있었다.

길을 한 번 잘못 든 다음에야 은석은 쌍다리 다방을 찾았다. 쌍다리 다방은 농협이 아니라 군청 앞에 있었다. 차 키를 뽑아 주머니에 넣고 은석은 다방 창가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셈치고 나왔지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침에 일회용 면도기를 사러 집 앞 슈퍼에 갔다 요안나를 보지 않았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까. 은석은 면도하다 베인 턱을 쓸어 만지며 약속시간을 십 분 넘겨 다방에 들어갔다. 여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커피를 시켰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머니한테.

여자의 말에 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있는 이야기는 물론 없는 이야기까지 꺼내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간밤 어머니가 슬그머니 사진을 내밀었을 때 은석은 당황했다. 놀랄 것 없다. 그만하면 얼굴도 반반하고 직업도 괜찮더구나. 이젠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너도 마흔이야. 맞선 이야기에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제수씨가 화제를 돌렸으나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요안나 때문에 시뻘건 청춘을 다 보낼 거냐. 어머니는 기어이 요안나 이야기를 꺼내고는 얼굴은 구겼다. 그만 할 때도 됐건만. 그만 잊을 때도 됐건만. 하지만 요안나를 잊지 못하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은석이었다.

은석은 본다, 안 본다, 대꾸를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한 번 만나 봐.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하는 셈 치면 되잖아. 묵묵히 밥을 먹던 동생이 한 마디 거들자 의기양양해진 어머니는 형하고 동생이 바뀌었다며 푸념했다. 은석이 못마땅할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은석도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동생이 형으로 태어났더라면. 동생은 키가 크고 여자에게 인기도 많았다. 내성적인 은석과 달리 외향적인데다 붙임성까지 좋아 먼저 결혼을 했다. 은석은 동생의 말을 들은 뒤에야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지 않을 걸 알고 식탁에 놓인 사진을 챙겨 일어났다. 내일 아침 열시 쌍다리 다방이다. 성탄미사는 안 가도 되니 늦지 말거라. 신부님도 이해하실 게다. 어머니는 또 신부님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켰다.

-읍내가 조용하네요.

-크, 크리스마스라 그런가 봅니다.

-하긴요. 크리스마스 아침에 맞선을 보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을 거예요.

다방은 조용했다. 은석과 여자를 제외하면 다방에는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끓이는 여주인 밖에 없었다. 은석은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방 건너편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일요일 아침에 흔히 볼 수 있는 읍내 풍경이었다. 어릴 적 은석은 일요일마다 어머니가 챙겨준 목욕바구니를 들고 동생과 목욕탕에 갔다. 성당 뒤편에 있는 목조 가옥에 살 때였다. 남자 목욕탕은 이층에 있었는데 욕탕 안에 들어가면 창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만고만한 단층집과 집집마다 심어놓은 감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한 성당의 첨탑. 욕탕에서 바라보는 성당 첨탑이 아름다워 동생 몰래 목욕탕에 간 적도 많았다. 욕탕 안에서 성당 첨탑을 보며 은석은 크면 어떤 여자와 결혼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은석은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성당 첨탑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에 맞선을 볼 줄 알았다면 집에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크리스마스에는 온 가족이 성탄미사에 갔다. 어머니는 추석이나 설날보다 크리스마스를 더 큰 명절로 여겼다.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약속은 잡지 말라는 일종의 압력이었다. 때문에 크리스마스면 은석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매번 집에 내려왔다. 이번에는 새로 부임한 신부님과 맞는 크리스마스니 온 가족이 참석해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한 터였다. 그런 어머니가 성탄미사 시간에 맞춰 맞선을 잡아놓은 건 요안나 때문이었다. 결혼 후 명절날에도 내려오지 않는 요안나가 크리스마스에는 온다는 걸 안 것이다. 말하자면 성탄미사에 갔다 요안나를 만날까봐 미리 차단을 시킨 것이었다. 어머니는 동생과 제수씨에게 요안나가 왔다는 말은 절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게 뻔했다. 하루 먼저 내려온 동생이 요안나를 못 보았을 리 없었다. 은석이 아침에 일회용 면도기를 사러 간 슈퍼가 요안나의 집이었다.

은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말을 해야 했지만 말재주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숫기가 있지도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꾼 것은 여자였다. 대화가 끊겨 분위기가 서먹서먹하자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무주에서 태어난 여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학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십사 년째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주를 떠난 때는 대학교 때였다고 했다. 여자가 말을 할 때마다 은석은 추임새를 넣듯 네, 그렇군요, 하며 되도록 짧게 맞장구를 쳤다.

-오늘의 운세도 봤어요.

-오, 오늘의 운세를요? 운세가 어떻게 나왔는데요?

은석은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천천히 물었다.

-귀한님을 만나면 눈이 온대요.

말을 하고 무안했던지 여자는 얼굴을 붉혔다.

-오늘은 눈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마, 마이산 꼭대기에 구름이 끼어 있어야 눈이 올 징조인데 구름 한 점 없거든요. 읍내 사람들은 마이산을 보고 눈이 오는지 안 오는지 알죠.

여자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여자는 마이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아침에 은석도 오늘의 운세를 봤다.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운세를 보는 게 은석의 습관이었다. 물론 오늘 아침에는 여자의 운세도 봤다. 특별할 것 없는 운세였는데 여자는 그것을 특별한 운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은석은 괜히 눈이 안 올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싶어 자신도 아침에 오늘의 운세를 봤다고 말했다.

-77년 뱀띠.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라.

여자가 은석의 운세를 말했다. 아침에 보던 김에 여자는 은석의 것도 봤다고 했다. 은석의 것 역시 특별한 것 없는 운세로 한 달에 두 세 번씩 나오는 것이었다. 은석은 오늘의 운세가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전 오늘의 운세를 믿어요. 귀한님을 만나면 눈이 온다니.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앉아서 시간 보내지 말고 마이산에 갈까요?

-마, 마이산엘요?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거든요.

은석이 커피 잔을 만지며 뭉그적대자 여자는 어서요, 하고는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별 수 없이 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방에서 여자와 어색하게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느니 마이산에 다녀와 점심을 하면 시간이 갈 것 같았다. 점심까지 하면 상대에 대한 예의도 갖춘 셈이었다. 은석은 쌍다리 다방을 나와 세워둔 차에 여자를 태웠다.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들뜬 얼굴로 마이산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바위가 땅에서 봉긋 솟아오른 듯 서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마이산이었다. 왼쪽이 숫마이산이고 오른쪽이 암마이산이었다. 숫마이산이 암마이산보다 높고 뾰족했다. 은석은 쌍다리를 지나 마령 쪽으로 차를 몰았다.

마이산 가는 길은 입구가 두 개라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지만 겨울철에는 읍내 쪽에서 가는 것보다 돌아가더라도 마령 쪽으로 가는 편이 나았다. 읍내 쪽에서 가면 오르막인데다 눈이 쌓여 있으면 탑사로 넘어갈 수 없었다. 탑사를 보지 않으면 마이산의 반은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머지 반은 화엄굴에서 내려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은석이 마령 쪽으로 간 것도 탑사를 구경시켜주고 바로 화엄굴까지 올라갈 생각에서였다.

은석은 룸미러로 멀어지는 성당 첨탑을 바라보고는 속도를 높였다. 지금쯤 미사는 말씀의 전례가 끝나고 성찬의 전례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성찬의 전례면 이제 미사의 반은 지난 것이었다. 은석은 미사 도중에도 주위를 둘러보며 요안나를 찾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회전을 했다.

우측으로 지붕이 무너진 창고가 보였다. 요안나와 처음 사랑을 나눴을 때 반쯤 무너져 있던 지붕은 그 사이 나머지 반쪽도 무너져 있었다. 지붕이 무너진 창고를 지나자 매표소가 나왔다. 은석은 매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 입구를 따라 들어선 음식점은 크리스마스라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은석은 매표소에서 표 두 장을 끊고 저수지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여자와 탑사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여자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집엔 자주 내려오느냐, 성당엔 언제부터 다녔느냐, 세레명이 뭐냐, 탑사엔 얼마나 와 봤느냐며 시시콜콜 질문을 했다. 말을 더듬을까봐 오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은석과 달리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맞선을 보러 나왔을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몇 번씩 옷을 바꿔 입고는 오늘의 운세를 봤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의 운세를 보는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은석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맨 위에 있는 게 천, 천지탑이죠. 천지탑은 탑사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뿐더러 가장 크죠. 돌탑의 우두머리래요. 저건 약사탑이고 저건 중앙탑이죠.

은석은 손가락으로 탑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이름을 알려주고 친구가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를 바라보았다. 기념품 가게는 문이 열려 있었다. 요안나와 이곳에 올 때마다 탑사 이름을 알려준 것도 기념품 가게를 하는 친구였다. 은석이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3년 전 크리스마스 밤모임이었다. 그날 밤모임에 나가지 않았다면 아침부터 맞선을 본다고 수선을 떨 필요도 없었다. 요안나와 어긋난 것도 그날 밤이었다. 은석은 요안나를 만나면 그날 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침에 면도기를 산다는 핑계로 슈퍼에 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들어오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슈퍼를 나왔다.

-탑이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서 있죠?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 음양의 조화 때문이래요. 돌에도 암수가 있는데 돌을 쌓을 때 암수를 구분해 아귀를 맞췄대요. 음의 돌덩이 하나 쌓고 양의 돌덩이 하나 쌓고, 양의 돌덩이 하나 쌓고 음의 돌덩이 하나 쌓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고 백년을 버틴 건 이런 음양의 조화 때문이래요. 하지만 개중 흔들리는 탑이 있어요. 저, 저거 보이죠? 저 중앙탑이 바람이 불면 흔들렸다가 멎는데요. 일명 흔들탑이죠.

탑의 이름을 알려주고 나서 은석은 친구와 마주칠까봐 탑사로 올라갔다. 계단에 잔설이 있어 천지탑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흔들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번은 요안나가 탑이 흔들리는 것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서 흔들탑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탑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십 분이 지나 내려가려고 하는데 계곡에서 불어온 바람에 탑이 기울었다. 저것 봐. 탑이 흔들려. 요안나가 소리쳤다. 탑은 왼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반동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중심을 잡고 멎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은석도 탑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후 탑이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은석은 여자와 탑사를 내려와 숫마이산 기슭에 있는 화엄굴로 가려고 왼쪽으로 갔다. 화엄굴 입구에는 호위병처럼 돌탑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돌탑은 고만고만했지만 어른 키만큼 높이 올라간 것도 있었다. 돌탑은 위쪽까지 빽빽이 세워져 더 이상 쌓을 자리가 없었다.

-이건 사, 사람들이 쌓은 겁니다. 여기에 다시 온다는 의미로 하나 둘 쌓은 게 이렇게 많아진 거죠.

여자는 돌을 주워 누군가가 쌓아놓은 돌탑 위에 올려놓았다. 은석도 이 자리에 돌탑을 쌓은 적이 있었다. 요안나가 돌을 주워오면 크기대로 분류한 다음 가장 넓적한 돌을 주춧돌 삼아 탑을 쌓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사랑한 햇수만큼 돌을 쌓고 일곱 번째 돌을 올려놓는 순간 돌탑이 무너졌다.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균형을 맞춰 쌓아도 일곱 번째 돌을 올려놓으면 무너졌다. 그때부터 육년 동안 쌓아 올린 사랑이 금가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커피를 시키면 요안나는 다시 콜라를 시켰고,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콜라를 시키면 요안나는 다시 커피를 시켰다. 비빔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비빔밥을 시키면 갑자기 볶음밥을 하나 더 주문했다. 마치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언제나 테이블에는 콜라나 커피가 한 잔씩 더 놓여 있거나 손도 안댄 비빔밥이나 볶음밥이 놓여 있었다. 삼계탕집에서는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은석이 삼계탕을 못 먹는 줄 알면서 요안나는 두 그릇을 시켰다.

-먹어 봐.

젓가락을 대지 않자 요안나가 닭다리를 뜯어 주었다.

-먹어보라니깐.

닭다리를 받았지만 은석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못 먹겠어.

닭다리를 밥뚜껑에 내려놓자 요안나가 다시 집어 들이밀었다.

-언제까지 삼계탕은 안 먹을 건데? 사랑한다면서 이걸 못 먹어?

사랑이라는 말에 은석은 닭다리를 뜯었다. 이물질을 씹는 것처럼 닭고기는 입안에서 맴돌 뿐 넘어가질 않아 꿀꺽 삼켰다. 닭고기는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 걸렸다. 은석은 손을 입속으로 집어넣어 목구멍에 걸린 닭고기를 끄집어내 밥뚜껑에 놓았다. 요안나는 밥뚜껑에 놓은 닭고기를 집어 다시 주었다. 속이 니글거렸지만 은석은 요안나의 요구에 침으로 범벅인 닭고기를 입에 넣고 콜라를 마셨다. 콜라에 섞여 닭고기는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닭다리 하나를 먹고 났을 때 콜라 두 병이 비워져 있었다. 은석은 남은 닭다리를 마저 먹고 삼계탕집을 나왔다. 얼마 못가 은석은 전봇대를 붙잡고 먹은 것을 토했다. 전봇대에 쏟아낸 구토물을 보며 못 먹는 삼계탕을 먹고 토하는 것도 사랑이라 생각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속은 니글거렸지만 뿌듯했다. 다음에는 먹고 토할망정 닭다리 하나는 뜯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은석은 여자와 화엄굴 계단을 올라갔다. 여자는 계단을 잘 오르지 못했다. 탑사로 올라가는 길보다 가파른 데다 잔설이 많아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난간을 붙잡았다.

-그, 그만 내려갈까요? 하, 하이힐을 신고 오르기엔 무리에요.

최대한 티를 안내고 차분히 말하려 했지만 은석은 또 말을 더듬었다. 여자는 은석이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은석은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난간을 붙잡은 채 구름 한 점 없는 마이산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하이힐을 톡톡 찼다.

-마이산에 올 줄 알았으면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오는 건데요. 근데 정말 눈이 안 올까요? 오늘의 운세는 분명 눈이 온다고 했는데……

은석은 앞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힘들었다. 옆에서 나란히 걸어내려 가며 손을 잡아줘야 했지만 은석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대신 여자가 미끄러질까봐 어깨에 힘을 주고 최대한 간격을 좁히며 내려갔다. 은석은 요안나와의 거리도 어쩌면 이 만큼이라고 생각했다. 한 계단의 거리. 은석이 한 계단 올라가면 이미 요안나는 한 계단을 올라가 있었고 은석이 한 계단 내려가면 이미 요안나는 한 계단을 내려간 후였다. 한 계단의 거리는 점차 벌어져 두 계단이 되었고 어느 순간 보이지 않을 만큼 간격이 벌어졌다.

-성탄미사에 가지 않고 여긴 웬일이야?

계단을 내려갔을 때 기념품 가게 친구가 앞에 서 있었다. 갑작스레 친구와 부딪쳐 당황한 은석은 이쪽은, 이쪽은……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때 여자가 은석씨 친구에요, 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친구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은석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먼저 매표소 쪽으로 내려갔다. 괜히 미안해진 은석은 친구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말하고 뒤쫓아 갔다.

읍내로 가면서 은석은 3년 전 크리스마스 밤모임을 떠올렸다. 그날 은석은 요안나와 밤모임에 나갔다. 그 밤모임은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만들었는데 은석이 모임장소에 도착했을 때 스무 명이 넘는 친구들이 마주앉아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불판에서 피어오른 연기로 실내는 자욱했고 다들 몇 잔씩 걸쳤는지 얼굴이 볼그족족했다.

은석은 삼겹살이 타는 냄새에 코를 찡그리고는 빈자리를 찾았다. 우영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기념품 가게 친구한테 가서 앉았다. 성격이 거친 우영과 있으면 은석은 어머니 앞에서처럼 주눅이 들었다. 고교시절 내내 같은 반을 했지만 친해질 수 없었던 것도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울리려고 해도 성격이 맞지 않았다. 은석이 자리에 앉자 우영이 건배를 외쳤다. 친구들은 서로 건배를 하려고 우영 앞으로 몰려갔다. 술잔과 술병이 엎어지고 깨졌지만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혀 버렸다. 은석은 요안나와 기념품 가게 친구와 셋이 조용히 술을 마셨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불판에 올려놓은 삼겹살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때 우영이 어깨를 쳤다. 우영은 이게 얼마만이냐며 자신의 잔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섞어 폭탄주를 건넸다. 은석은 폭탄주를 받아 마셨다. 소주를 많이 타 독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은석도 마신 잔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섞어 주었다. 우영은 단번에 폭탄주를 마시고는 그 잔에 폭탄주를 만들어 요안나에게 주었다. 요안나가 폭탄주를 마시는 걸 보고 나서야 우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삼겹살집을 나와 이차로 맥줏집에 갔다. 전에 없이 살갑게 구는 우영이 불편해 은석은 맥줏집에서도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우영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요안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기, 저기……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은석은 혀가 꼬인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폭탄주 탓인가 하고 다시 말했지만 또 저기, 저기, 였다.

삼차는 소줏집에 갔고 사차는 노래방에 갔다. 스무 명이 넘는 친구들은 술집을 옮길 때마다 하나 둘씩 빠져 노래방에는 네 사람밖에 없었다. 기념품 가게 친구가 술에 취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자 우영이 요안나의 손을 잡고 무대로 끌고 가 블루스를 췄다. 노래에 맞춰 블루스를 추며 우영은 요안나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이번에도 은석은 저기, 저기, 였다. 그때 요안나가 우영의 뺨을 치고 나갔다. 우영은 멍하니 서서 뺨을 어우만지더니 은석을 밀치고 나갔다. 그 바람에 은석은 뒤로 넘어져 바닥에 떨어진 맥주병에 허리를 눌리고 말았다. 허리를 싸고도는 통증을 참고 밖으로 나갔다. 요안나는 보이지 않고 휘날리는 눈 속으로 천변 여관이 보였다.

은석은 그 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는 차창으로 마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마이산 꼭대기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여자의 오늘 운세는 맞지 않을 게 뻔했다. 물론 은석의 오늘 운세도 맞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라니. 오늘의 운세와 달리 은석은 아침부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성당 앞에서 요안나를 만나지 못하고 맞선을 보러 가면서 뒤를 돌아보았고 쌍다리 다방을 찾다가는 길을 잘못 들어 뒤를 돌아보았고 마이산에 갈 때는 룸미러로 성당 첨탑을 돌아보았다. 여자와 있으면서는 요안나와의 일을 돌아보았다. 은석은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정면의 성당 첨탑을 바라보았다. 성탄미사가 끝나 성당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정오였다. 은석은 읍내로 진입하자마자 점심은 반드시 하고 오라는 동생의 말이 떠올라 여자에게 뭘 좋아하냐고 물었다.

-삼계탕요.

삼계탕이란 말에 은석은 목구멍에 닭뼈가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삼, 삼계탕을 좋아해요?

-원래 이 읍내가 삼계탕으로 유명하잖아요. 하지만 맞선자리에서 삼계탕을 먹는 여자는 없겠죠. 실은 어머님한테 은석씨가 삼계탕을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본 소리예요. 삼계탕은 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맞선자리인 만큼 우아하게 칼질을 해야죠.

은석은 요안나와 자주 간 레스토랑으로 가려고 읍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순간 아침부터 여자와 간 곳이 죄다 요안나와 간 곳이라는 생각에 다른 곳으로 가려고 우회전을 했다. 그때 요안나를 보았다. 손에 미사책을 든 걸 보니 성탄미사에 갔다 오는 모양이었다. 성탄미사 삼십 분 전부터 성당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건만 언제 간 것일까, 하고 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석은 요안나의 발걸음에 맞춰 속도를 줄였다. 여자는 그것도 모르고 성탄미사가 끝나니까 읍내가 활기차다고 말했다. 은석은 점심은 반드시 하고 오라는 동생의 말을 저버리고 쌍다리 다방 앞에 차를 세웠다.

-올, 올,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쳐다보았다. 말을 더듬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올라가봐야 한다는 말에 놀란 모양이었다. 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적당히 솟은 콧날, 야무진 입술. 뒤로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여자의 얼굴은 단아해 보였다. 은석은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천천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요안나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재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성당에 갔지만 어머니 때문에 요안나를 만나지 못했다. 이 시간에도 어머니는 요안나를 만나지 못하게 슈퍼 앞을 지키고 있을 게 뻔했다. 사실 은석이 집에 내려온 것도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요안나 때문이었다.

-그럼 식사는 다음에 해요.

여자의 말에 은석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여자는 다방 앞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올랐다. 여자는 시동을 켠 뒤 운전석 창을 열고 무주에 도착하면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은석은 여자의 차가 쌍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보고 천변으로 갔다.

성당이 맨 위쪽에 있다면 천변은 맨 아래쪽이었다. 성당 첨탑에서 보면 읍내는 물고기가 마이산을 향해 헤엄쳐가는 형상이었는데 천변이 조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고기의 아랫배 부분을 따라 조성된 천변에는 팔십 년대 지어진 상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천변을 따라 들어선 상가들은 더욱 낡아 있었다. 읍내에서 가장 낡은 건물이 많은 곳이 천변이었다. 은석은 3년 전 갔던 고깃집과 노래방을 지나 천변 여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다시 뛰어갔다. 요안나는 천변 끝에 있었다. 은석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다. 이게 몇 년 만이냐고, 그동안 잘 살았냐고, 우영은 잘 있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명절에는 왜 안내려왔냐고 물어야 하나.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은석은 말을 더듬을까봐 최대한 짧게 말했다.

-요, 요안나.

요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은석아.

요안나가 은석이 일하는 성당 사무실로 찾아온 건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우영씨하고 잤어. 은석은 눈앞이 하얬지만 봉헌금 바구니에서 세려고 한 주먹 꺼낸 동전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부딪친 동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쨍그렁. 하나가 떨어지자 손힘이 빠지면서 스르르 동전이 쏟아졌다. 은석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백 원, 이백 원, 삼백 원, 사백 원, 하고 셌다. 이 순간에도 동전을 줍고 싶어? 하긴 이게 은석씨지. 매사에 참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람은 둘인데 콜라를 하나 더 시켜도 말 못하고 비빔밥을 하나 더 시켜도 말 못하고 못 먹는 삼계탕을 먹여도 꾸역꾸역 먹고 토하니까.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우영씨와 블루스를 춰도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은석씨지. 우영씨가 내 엉덩이를 만져도 모른 척 술만 마시고 있는 게 은석씨라고. 저기, 저기, 하면서 참고 견디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어디 그게 사랑이야? 사랑은 참는 게 아니라 사랑은 참지 않는 거야. 달려들고 악을 쓰는 게 사랑이라고. 다른 남자와 자고 온 나를, 내 뺨을 후려치리는 게 사랑이라고. 구둣발로 내 몸을 짓밟는 게 사랑이란 말야. 은석은 달려들고 악을 쓰는 대신 요안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하이힐로 은석의 손등을 짓밟고 나갔다.

은석은 하이힐 자국이 찍힌 손등을 바라보다 다시 동전을 주웠다. 달려들고 악을 쓰는 게 사랑이라니. 커피를 시켜놓고 마시지 않겠다며 다시 콜라를 시킬 때도, 콜라를 시켜놓고 마시지 않겠다며 커피를 시킬 때도, 한 잔씩 남은 커피와 콜라를 마신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 못 먹는 삼계탕을 꾸역꾸역 먹은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에도 사순절처럼 고통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참고 견디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니. 참고 견뎠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니.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알았던 은석이었다.

-마이산에 갈까.

천변을 걸어 나왔을 때 요안나가 말했다.

-마, 마이산에?

은석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여자와 다녀온 곳을 같이 가고 싶진 않았다. 또 친구와 부딪치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은석은 요안나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차를 세워둔 쌍다리 다방으로 갔다. 여자를 태운 자리에 요안나를 태우고 차를 돌렸다. 순간 차창으로 여자 얼굴이 스쳐지나 갔다. 여자의 얼굴을 지워내며 은석은 마이산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에서 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은석은 구름을 밀어내듯 속도를 높였다. 요안나는 차창 밖만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이자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가 반짝거렸다. 은석은 우영의 목을 비틀듯 운전대를 움켜잡았다.

-우, 우, 우영인 왜 안 왔어?

은석은 우영이 옆에 앉아있는 것처럼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어디 아픈 거야?

-마음이.

-마음이?

은석은 성탄절 밤부터 말을 더듬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요안나에게 그 마음이란 것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란 것은 가슴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어 꺼낼 수 없었다. 행여 꺼낸다 해도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보여준단 말인가. 은석은 차안에 흐르는 정적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다시 우영이 소식을 물었다.

-외양선 탔어.

-외양선을 탔다구?

읍내 소문이면 다 아는 어머니한테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은석은 말없이 운전대를 움켜잡은 손을 붙였다 뗐다 하면서 전방만 주시했다. 요안나가 피운 담배연기가 차안에 고였다. 은석은 요안나가 피우는 담배를 집어 한 모금 빨고 싶었다. 한 모금 빨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담배 대신 은석은 한숨을 내쉬고는 지붕이 무너진 창고를 지나갔다.

그날도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은석은 요안나와 천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마이산을 향해 걸어갔다. 마이산 매표소에 거의 다 갔을 때 눈이 쏟아져 지붕 한쪽이 무너진 창고에 들어갔다. 한 때 작업실로 쓴 창고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상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한쪽에는 남자 조각상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여자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 주변에는 타다 만 초가 널려 있었다. 타다 만 초에 죄다 불을 붙이자 한쪽이 찌그러진 하트 모양이 생겨났다. 누군가 하트 모양으로 초를 밝힌 모양이었다. 은석은 남자와 여자 조각상을 끌어다 위아래로 포개놓고 종이에 불을 붙였다. 종이에서 타오른 불이 여자 조각상의 다리에 옮겨 붙었다. 순식간에 여자 조각상의 다리 하나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불은 활활 타올라 여자 조각상 위에 포개져 있는 남자 조각상으로 옮겨 붙었다. 기묘하게 두 조각상은 서로의 몸을 얼싸안은 모양으로 타올랐다. 은석은 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는 그 위에 요안나를 눕히고 남자 조각상처럼 그 위로 올라갔다. 서로를 껴안고 불에 타는 조각상처럼 사랑을 나누는 동안 반쯤 무너진 지붕 사이로 눈이 들이쳤다. 사랑이 끝나고 났을 때 은석의 엉덩이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결, 결혼까지 했으면 보란 듯이 잘 살 일이지 왜 외양선을 탄 거야?

은석은 매표소 쪽으로 우회전을 하며 물었다. 요안나는 조수석 창문을 열고 꽁초를 내던졌다.

-죄책감이었겠지. 친구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죄책감 말야. 우영씨는 여길 떠난 후 외판원으로 일했어. 한 달도 못해 그만뒀지만. 그리곤 밤마다 술에 취해 바다를 바라봤어. 한 일 년 간 바다만 보고 살다 달랑 메모 한 장 남기고 외양선을 탄 거야. 그러니 어떻게 명절날에 올 수 있겠어. 오늘도 우영씨는 남태평양을 떠돌아다닐 거야.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면서.

요안나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날, 은석은 사무장실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참지 않고 악을 쓰는 게 사랑이라면 달려가 결혼식을 막아야 했지만 은석은 성당 안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요안나를 만나면서 시작한 성당 사무장 일을 그만두려고 사표를 쓰고 창가로 갔다. 그때 성당 정문이 열리면서 턱시도를 입은 우영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요안나가 나왔다. 요안나가 볼까봐 은석은 창가 옆으로 몸을 숨겨 두 사람이 웨딩카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요안나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읍내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신혼살림을 차린 후 은석은 읍내를 떠났다.

-맞선은 잘 봤어?

-어? 그거……

-어머니한테 들었어. 맞선본다고.

-그, 그랬구나. 근데 성탄미사는 안 간 거야?

-갔어.

-어, 언제?

-네 차가 읍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걸 보고 난 후. 참, 맞선 본 여자는 맘에 들어?

은석은 좋다, 싫다 말하지 않았다. 여자는 호감이 있는 눈치였다. 오늘의 운세를 말할 때는 그윽한 눈으로 은석을 바라보았고 탑사 이름을 알려줄 때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고 돌탑에 돌을 올려놓을 때는 표정이 진지했다. 은석이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서도 여자는 불편해하지 않았다. 은석도 여자가 불편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생각으로 나왔다가 마이산까지 다녀온 것이다.

은석은 매표소 앞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내렸다. 요안나는 손에 쥔 미사책을 놓고 내렸다. 은석은 앞서서 매표소로 갔다. 표를 끊으려고 매표소 안으로 돈을 밀어 넣자 안에 있던 직원이 아까 왔으니 그냥 들어가라며 되돌려주었다. 은석이 주춤거리자 직원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니까요, 하고 웃었다. 은석은 돈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요안나와 탑사로 걸어갔다. 오전과 달리 음식점 몇 군데는 문이 열려 있었다. 한 음식점에서 나온 남녀가 저수지를 따라 탑사로 올라갔다. 뭐가 재미있는지 남녀는 탑사에 도착할 때까지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남녀는 탑사로 올라가지 않고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유리창으로 친구가 보였다. 친구가 볼까봐 은석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방금 돌을 올려놓고 갔나 봐.

요안나가 화엄굴 입구에 있는 돌탑을 가리켰다. 여자가 쌓은 돌이었다. 은석은 돌을 하나 주워 여자가 쌓은 돌 위에 올려놓았다. 돌은 미끄러지지 않았다. 은석은 두 개의 돌을 바라보다 까르르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념품 가게에서 두 남녀가 나오고 있었다. 뒤따라 친구가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기념품 가게를 하면서 친구는 탑사를 배경으로 손님들 사진을 찍어주는 모양이었다. 가게 앞에는 즉석 사진 바로 현상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두 남녀가 탑사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는 순간 은석은 카메라에 잡힐까봐 요안나와 흔들탑으로 올라갔다. 흔들탑까지 갔을 때 눈발이 날렸다.

-어, 눈이네.

은석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팔을 빙그르르 돌리며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었다. 눈 오는 거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왠 호들갑이냐며 요안나가 말했다. 그런데도 은석은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었다.

-미안해.

은석은 뒤로 젖힌 고개를 세우고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내려온 건 널 만나기 위해서였어. 널 만나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우영씨가 돌아올 것 같아서.

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은석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받았다. 여자는 들뜬 목소리로 무주에는 눈이 온다고 말한 후 진안에도 눈이 오냐고 물었다. 은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휴대폰만 잡고 있자 요안나가 자리를 피해 계단을 내려갔다. 은석은 오늘의 운세를 떠올리며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요한나는 무쏘의 뿔처럼 혼자 눈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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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요한

전북 진안 출생/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등단: 201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수상

2016년 <작가세계> 신인문학상 수상

메일주소: newspeople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