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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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2768 2014-11-03
706 매미 외1편 / 채 형 복 file
편집자
587 2018-12-01
매미 아부지, 아부지, 아이고 아부지이~ 왜 나를 낳으셨나요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이~ 배고파요, 밥 주세요 맴 매에~ㅁ 맴맴맴 울고 싶어 울게, 실컷 울게 내버려 둬 삶이 서러워 그냥 서러워서 그래 녹음 짙은 그늘에 숨은 지옥 같은 여름이여, 이제 안녕 옆구리 후리는 초가을 바람이 서늘하네요 마른기침 쿨럭이며 나는 떠나갑니다 우리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모르겠다 매일 나를 찾으려 집을 나서지만 금세 길 잃어버리니 길치는 지독한 난독증을 닮았다 평생 책을 읽어도 한 줄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니 두 눈 뜨고 길을 걷지만 갈 곳을 잃는 거나 글은 알지만 뜻을 모르는 거나 피차일반이다 오십 년을 헤매도 나를 찾지 못하고 손수레 가득 책을 읽어도 나를 알 수 없으니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늘을 만나야 빛은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고 하던데 한낮의 태양처럼 빛나던 젊음, 서늘한 죽음의 그늘을 만나야 마음 편히 쉴 수 있으려나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이대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봄이 오면 물 흐르고 꽃 피어나듯이 ---------------- 채형복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 <칼을 갈아도 날이 서질 않고>(2018.8)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  
705 내가 그리워 한 사람아 외1편/박규해 file
편집자
520 2018-12-01
내가 그리워 한 사람아 가슴을 저미는 듯 파란 그리움 보고픔은 늘 가슴에 남아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 늘 보고파지네. 가끔 나를 즐겁게 하고 그 웃는 모습에 따스한 말 건네주며 항상 용기를 부어 주는 그리운 얼굴 아마도 지금쯤은 백발이 성성하여 아니 노년이 되었을 가 눈에 떠오르는 얼굴은 아직도 환한 그 모습은 청춘인데 만나고픈 마음뿐이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앞장서서 남의 일을 내일처럼 처리하며 따뜻한 말만 건네주든 그때 그 모습 다시 그리워지네. 떠나는 하루를 보니 우리는 백년도 못살면서 사노라면 언쟁을 벌리고 아옹다옹하며 살고 있지요 편안하고 안이한 생각을 하면 좋은 것 같지만 사람은 움직여야 살맛이 나지요 이렇게 살아가며 때로는 즐겁게 행복하게 지내는 시간은 짧지만 삶의 버거움은 늘 긴 시간으로 그리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마음으로 백발이 되도록 살았지만 이제는 언제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갈지는 모르지만 사는 동안 행복감 맛보며 사는 것이 요즘 시대라 하겠지요. 노년이 되면 친구와 즐거운 시간으로 보내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한 줌의 흙이 되니 말입니다  
704 서울스런 것들 외1편/최기종 file
편집자
602 2018-11-01
서울스런 것들 서울에 가면 호흡이 빨라진다. 나도 모르게 끌려서 나도 모르게 떠밀려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디든 가야한다. 무엇이든 사야한다. 서울에 가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문이란 문 닫혀서 길이란 길 늘어져서 입술들이 붉어진다. 바퀴들만 공회전한다. 마천루만 올라간다. 서울에 가면 나 홀로 우뚝해진다. 공원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어쩌다 술자리에서도 덩그러니 지지 않는 섬 하나 내가 단단해진다. 내가 바퀴가 되어야 한다. 횟배 배가 아파서 뒤척였다 과식해서 그런지 바로 누워도 불편하고 모로 누워도 불편하다 소화제를 먹었다 이젠 괜찮겠지 밤바다 잔잔해지겠지 길게 잠을 청했다 그런데 갈수록 뒤틀어댄다 배가 풍랑을 만났는지 이리저리 흔들린다 회충이 고고를 추는지 호랑가시 용코로 백혔는지 배가 뒤집어지고 난리다 배가 표류한다 침몰한다 선장은 죽었는지 내뺐는지 해경은 어디서 무얼하는지 아이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뒹글고 유리창에 붙어서 애원통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던 배 하나도 아프지 않다 와이퍼 지나간 차창처럼 깨끗해졌다 최기종 1956년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슬픔아 놀자』외,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전남민예총 이사장  
703 발 이야기 외1편/남태식 file
편집자
616 2018-11-01
발 이야기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랫집 중1 사내아이 손에 들린 신발 밑창의 숫자를 보다가 와! 260! 속으로 되뇐다. 내 발 크기는 240에서 250 구둣가게에서 탐나는 이미지를 만나도 발이 작아서인가 자주 재고가 없었다. 240에서 50까지 있는 대로 주세요. 무슨 발이 그래요. 중1 때 펄벅의 『대지』에서 전족을 읽었다. 댓돌의 신발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는 할머니의 큰 발 험담을 했다. 아담한 발을 가져야지 큰 발이 싫었던 나는 운동화 끈을 꽉 조이고 다녔다. 올 겨울에 구두를 맞추러 갔다가 내 발이 짝짝이라는 것 제대로 알았다. 여러 번 맞춤한 이미지를 맞춰 신는 동안에도 늘 한 발이 헐렁하거나 빡빡했지만 두 발을 한꺼번에 잴 생각은 안했다. 이번에는 번갈아 쟀다. 왼발은 245 오른발은 250 거의 대부분이 짝발이지만 사장님은 차이가 꽤 크네요. 이번에는 어느 발에 맞출까요. 각각 만들어 주세요. 처음으로 두 발이 딱 맞는 신을 신었다. 헐렁하지도 빡빡하지도 않으니 좌우 발가락들의 호흡이 편안해졌다. 좌우 걸음이 반듯해졌다. 가정의 완성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남편과 아내를 떠나서 맞벌이와 홑벌이를 떠나서 거시와 미시를 떠나서 크고 작음도 없고 많고 적음도 없고 분별과 구별 없이 차별은 더더구나 없이 가정은 여럿, 결혼은 그 중 하나의 시작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 함께 하면서 각자 각자 하면서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에서 온전한 가정은 완성된다. * 약력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망상가들의 마을』외,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외  
702 당신의 붉은 금빛가루 날리네요 외 1편 /권순자 file
편집자
612 2018-11-01
당신의 붉은 금빛가루 날리네요 당신의 세계에 붉은 쇳가루 반짝이는 구월 구절초 피는 길을 나는 걸어가요 고단한 꽃을 쇳가루로 당신이 빚어내는 동안 나는 노래를 부른답니다 제철소 당신 귓가로 흘러들어 졸음에 겨운 밤 시간을 당신의 귀를 밝힐 노래를 불러요 길고 지루한 터널을 천천히 쇳가루 붉게 반짝이는 당신 가슴을 씻을 노래를 불러요 이 길에는 코스모스 한들거리며 어둔 저녁 길을 훑고 있네요 해오라기 홀로 눈부신 하얀 날게 퍼득이며 바다 위를 날고 있어요 도대체 어디서 날아왔을까요 헤매다가 하늘 길을 잃어버린 걸까요 방랑하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놓친 걸꺼요 작은 바위에 내려앉아 물끄러미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네요 어찌하여 이 바다로 흘러왔는지 왔던 길을 추적하는 중일까요 갈매기 한 마리 낯선 하얀 새 곁에 조심스레 고개 주억거리며 날개 접고 앉아 있네요 검게 물들어가는 밤바다 해오라기 날개 쫘악 펴고 비상하는 군요 달빛 타고 흰 날개 더 부시게 빛내며 다시 방랑길 떠나가네요 고되고 외로운 길 나아가네요 햇살이 당신 얼굴에 나리네요 금빛가루 흩날리는 당신은 이제 낮에 잠드는군요 환한 낮이 당신을 위해 깜깜한 밤이 되어줘야 하는군요 두꺼운 검정커튼을 파도처럼 드리우고 숙면의 안대를 하고서 깜깜한 밤을 대낮에 호출하는군요 해오라기 날개처럼 자유롭고 편안한 꿈을 호출하는군요 가을, 그냥 있으라 저기 흩날리는 잎들 허공에 온몸으로 문장을 써대고 기억을 앞질러 흘러가는 시간의 바퀴 허물어져 구름을 닮아간다 물결을 동경하던 발과 손이 멈추지 않고 바람의 깃을 따라 풀렁거려온 동안 바람을 거부하지 않고 바람에 닳아 파도에 저항하지 않고 짜디짜게 젖어 잠시 머무는 머뭇거리는 가을 놓쳐버리는 물결 희미해져가는 파도의 하얀 포말 부스러기들 점점이 바람을 삼킨다 권순자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등이 있고, 『Mother's Dawn』(『검은 늪』의 영역시집)이 있음.  
701 송광사 외1편/김인구 file
편집자
572 2018-11-01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길을 걷는다. 후박나무 그늘 아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법정의 뒤안길 푸르른 하늘은 푸르른 하늘을 쏟아내고 뭉게구름은 뭉게구름을 따라 돌아가지. 순연의 초록은 흐드러지는 초록으로 남아 느릿, 느릿 바람도 뒤짐 지고 걷는 불일암. 첫사랑 지나간 것들은 모두 추억이라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앉아 가을볕 드나드는 담벼락에 기대 앉아 발장난을 했다 어젯밤 우리 집 옥상에 잘못 착지한 UFO도 한동안 담벼락에 서서 그랬다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했던 그도 그랬다 외로움에 갇힌 나도 그랬다 제 안으로 길을 내고 지나간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워했다 경계를 만든 신의 오해처럼 외로운 우리 모두는 그랬다. 전북 남원출생. 1991년 <시와 의식> 여름호에 <비, 여자> 외 2편을 발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신림동 연가> <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2014년 세종 우수도서 선정)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700 입추 외1편 / 신순말 file
편집자
630 2018-11-01
입추 한 보시기 그늘을 손 모아 드립니다 한 접시 매미소리 소매에 넣으시고 소낙비 한 사발 뜨니 마른 목을 축이십시오 폭염의 여름 지나 가을 문에 섭니다 주어도 받아도 주고 받음 잊어버리니 합장한 두 손 가득히 바람소리 지나갑니다 고장 난 길 무릎뼈가 고장나 수술했다던 친구 병상에 누워서도 추석 걱정을 한다 한 번쯤 성묘만 가도 되지 않으냐 해도 환자일 땐 다 잊어버려라 해도 삼십 년 넘게 차려온 제상이며 차례상 외며느리라서 오로지 제 몫의 책임이란다 산 조상이 죽을 판인데 죽은 조상 대수더냐고 막나가는 이야기를 해보아도 들리지 않는 눈치 아들 조상만 있고 딸의 조상은 없는 이 땅은 딸 같다 해도 며느리는 여벌일 뿐인데 딸이 되려 애쓰지 마라, 스스로를 가두지 마라 외어도 보았지만 헛염불이다 병원에 누워서도 제사상 걱정을 하는 그렇게 길을 들이고 길이 든 길 신순말: 상주들문학 회원.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 [단단한 슬픔]  
699 별리의 애가 (낙화암에서)외1편/청향 임소형 file
편집자
691 2018-11-01
별리의 애가 (낙화암에서) 무엇을 망각한다는 것은 참 아픈 일이다 잊힌 세월이 그렇고 스러져간 곧은 절개가 그렇다 초저녁 푸른 강을 붉게 물들였던 저녁놀 목청 높여 울어 젖히던 소쩍새의 눈물 밤 뻐꾸기의 구슬픈 울음이 시퍼런 강을 따라 점멸하듯 망각의 피리를 불면 문득 저 잊혀져 간 슬프디슬픈 심연 속 핏빛 고독 끌어안고 뒹굴던 자맥질로 퍼 올린 슬픔의 넋 그 날의 한 맺힌 어느 한 생의 통곡이 무작정 상경하여 하루의 끝에 머무는 찬란한 노을 빛 되어 애련의 전설 바위에 무릅꿇고 절멸한 세월의 기억을 거슬러 하염없이 흐느끼고 흐느껴 운다 세월을 덮고 누운 여물지 않고 떠도는 잿빛 영혼의 숨결 바람이 처처로 이 부는 어느 가을 한 날 지워지지 않는 세월 속을 걸어와 축축하게 젖어오는 응축된 감정선을 되새김질하면 다시 또 슬프도록 명명한 망각의 피리를 불어 젖히는 푸른강물 출렁일 별리의 애가였을 그 기억 속으로 역리 계절을 망각한 겨울비가 추적추적 가을비 소리를 내는 날 윙윙 우는 바람 소리 젖히고 먼지낀 망막을 씻듯 딩동 날아온 잘 지내냐는 멍한 여운의 메시지 순간 쿵 내려앉는 심장 무한 반복의 작동으로 심장의 펌프질은 압력을 가하고 주체할 수 없는 박동수에 밤잠을 강탈당하는 가여운 심로였다 검게 색칠한 부재중의 푯말에도 고조되고 격양된 목소리로 연신 깍깍 반갑다를 외치는 까치 붉은 정맥주사를 주입한 펄펄 살아 뛰는 맥박 제치고 사계절 요람에 들지 않는 파릇히 곧추세운 상록수 이파리 보쌈 강한 생명력 과시하며 존재의 위력 주입하느라 버거웠던 하룻길의 고단함 놓지 못한 미련이었을까 차곡차곡 절인 애증 깍깍 소리치는 까치소리에 우듬지 떠나지 못한 새 마냥 접어둔 기억 펼치며 답신하는 이 기막힌 숨가쁜 웃음소리 어쩌면 퍽퍽한 세월 무뎌진 가슴 간지럽히는 딸랑이 소리일지도 현기증 나는 어지러운 세상 잠시나마 신선한 산소 흡입하는 청량제 일지도 모르는 일 차라리 이쯤에서 가출한 세월의 기억 불러들여 서리태 넣어 정성껏 지은 따끈한 밥 하얀 생선 살 발라 배 불리 먹이고픈 포근한 인정 하나 뽑아 들자 거역할 수 없는 인연의 고리 반가운 까치의 울음처럼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갈 수 있다면  
698 노모(老母)의 가을 외1편/공현혜 file
편집자
657 2018-11-01
노모(老母)의 가을 누런 호박 올라앉은 돌담 너머 닫힌 적 없는 대문가엔 줄기 꺾인 국화 향 넘치는데 평상에 걸터앉아 콩알 고르던 노모(老母)의 발치 어디서 왔나 도도한 낙엽 한 장 바쁜 손을 놓고 바라보다 ‘너는 갈 때도 곱구나!’ 한 숨 이다. 달 달의 애무는 낮 동안 지친 세상을 쉬게 한다 마음의 여유 없이 잠든 지붕부터 삶에 삐걱대는 주름진 골목까지 길어 올린 한숨은 등 뒤에 숨기고 가시나무에 걸려도 늪에 빠져도 젖은 사람 껴안고 신음하기에 달은 밤마다 바쁘다 제 몸 깎여 기울어도 멈추지 않는 그 품에서 누군가 또 하루를 살아서 건넌다. 공현혜/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 2009현대시문학. 서정문학 시등단, 작가시선 동시등단 한국문인협회서정문학연구위원. 국제PEN경남회원. 통영문협. 경북문협. 경주문협 한국불교아동문학회. 경남아동문학회 회원. 2015년 한국서정문학 대상수상. 시집『 세상읽어주기 』외 공저 다수.  
697 창씨개명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530 2018-11-01
창씨개명 다문화체험 행사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 어색해서 고향이 어디세요? 물었다. 가시가 되었다면 미안하다. 미국 살았죠. 유포르비아 마르기나타였어요. 설악초라고 이름을 바꾸었죠. 남편 따라 왔어요. 결혼하고,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간이 귀화절차를 밟았어요. 근데 자꾸 외국 사람이라고 해서 이름도 바꾸었어요. 푸른 잎에 보이는 하얀 꽃잎은 실은 꽃잎이 아니란다. 산수국을 닮은 그녀는 내가 모르는 웃음을 짓는다. 창씨개명 안하면 국물도 없던 때에 내가 안켄고준 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해서 일인들이 자기네 편으로 받아 들였을리없는 편 가르기를 지금껏 하고 있는 나는, 혹은 우리랍시고 선을 그어놓고 우리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선 밖에 선 유포르비아 마르기나타씨. 은행 민원 구린내 난다고 오십 년 넘은 나무라도 베어달라고 떼를 쓴다.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 나오는 방귀를 참느라 식겁 먹었다. 나도 이제 정년이 다 되었으니 배 속에 똥 들었다고 베어지겠네.  
696 겸손에 대하여 외1편/이선정 file
편집자
522 2018-11-01
겸손에 대하여 내게는 무척 겸손한 언니가 있지 저를 낮추다 못해 땅으로 기어드는 시선, 허리는 늘어진 ㄱ 자로 큰 키를 줄여 납작 엎드린 자세, 그것은 바람의 각도를 영리하게 계산한 그녀만의 자생법 그 언니, 소주 한 잔에 벌게진 얼굴로 세상의 부비트랩에 걸리지 않는 법을 특강한다네 ' 상대가 뻗은 촉수에 걸리면 안 돼 욕심을 숨겨 무릎을 접고 자세를 낮춰 밖이 시끄러울 땐 귀를 막아 낮은 포복으로 절대 고개 들지 마 ' 겸손한 그 언니 하늘 찌를 듯 높아가는 칭송에 승승장구 고고행진, 갈수록 부푸는 겸손은 두둥실 애드벌룬을 타고 모가지 뻣뻣한 족속들은 그새 하나 둘 부비트랩 속으로 사라지지 나? 무릎은 접었어 특강을 들어도 낮은 포복은 어려워 거품을 들키지 않고 경계를 달린다는 건, 늘 어려워 미래의 시인에게 어느 삼류 시인이 단골 커피점 주인집 딸 다섯 살짜리 계집아이 은서는 고 사슴 같은 눈을 반짝이며 시인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삼류 시인을 보면서도 꿈을 꾼다니 넙죽 절이라도 해야지 않은가 사과통 만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 꽃과 별만 보면서 시를 쓰거라..' 중얼거리다 방금 쓰다 만 죽음, 이별, 상처 따위를 얼른 주머니에 구겨 넣고 커피점을 나섰다 지랄맞게 바람은 불어 대고 아름다운 시인 하나가 유리창 안에 말갛게 앉아, 서걱대는 모래사막의 어둠 속으로 밀려가는 썩어빠진 시인 하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잠시 버티고 서서 겨우 찾아낸 별 하나를 보란 듯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선정/황금찬시맥회 문학광장 신인상 황금찬시맥회 문학광장 정회원 대한민국 공예대전 특별상 한양예술대전 시화분과 심사위원  
695 균형 외1편/박종희 file
편집자
636 2018-10-01
균형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맥없이 걸어 다니던 참에 정신이 확 들었다.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고 손이 아팠지만 누가 볼 새라 흐트러진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에 몸을 의지하는 바람에 양손이 모두 욱신거렸다. 잠깐 사이에 왼쪽 손목이 달걀만 하게 부어올랐다. 병원에 갔더니 왼쪽 손목은 뼈가 깨지고 오른쪽 손은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왼쪽 손목에 깁스하고 오른손은 손목보호대를 찼다. 왼손잡이인 나한테 깁스를 해주던 의사 선생님은 왼손에 깁스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양손이 묶인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손을 다치고 난 뒤 내 일상은 엉망이 되었다. 사소한 일에도 삐거덕거리며 잡음을 일으키는 내 손을 볼 때마다 온몸에 균형을 잃고 어린아이가 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언제인가부터 아버지의 숟가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막, 숟가락질을 배우는 아이처럼 조마조마했다.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퍼 올린 밥은 중간쯤에서 흩어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흘려버려 반도 못 드시는 아버지한테 밥을 떠먹여 드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당신이 드시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일요일이면 친정 부모님은 나란히 교회에 가셨다. 시골교회라 예배를 마치면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아버지는 예배가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가 점심을 안 드시고 나오니 자연스레 어머니도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음식인데 교회에서 먹지 않고 귀찮게 밥상을 차리게 한다고 잔소리했다. 점심을 드시며 교인들 앞에서 손 떨면서 밥 먹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목구멍에 가시가 박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하셨다. 사람의 몸에서 손만큼 장하고 기특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을까. 인간의 삶은 대부분 손이 이루어낸다. 오른손을 많이 쓰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나는 왼손잡이다. 나한테 왼손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또 다른 나다. 숟가락질과 글씨 쓰는 것을 빼고 웬만한 일은 왼손을 거친다. 직장에서 왼손으로 돈 세는 나를 직원들이 신기한 듯 바라본 적도 있다. 습관이 무섭다고 50년이 넘도록 고정된 동작은 깁스한 왼손을 자주 들썩이게 했다. 옷을 입으며 단추를 잠글 때면 왼손이 선수를 쳤다. 머리를 감을 때나 세수할 때도 왼손의 동작이 빨랐다. 리모컨을 잡을 때도 누웠다가 등이 가려워도 왼손이 먼저 올라갔다. 운전대를 잡아도 왼손에 힘을 주어 통증이 심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꾸 왼손을 쓰는 바람에 깁스가 헐렁거렸다. 한 달이 지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의사 선생님이 “절대로 깁스한 손 쓰시면 안 됩니다. 이러다가는 석 달이 되어도 깁스 풀지 못하겠어요.”라고 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손이 떨리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첫 신호였나 보다. 손 떨림이 심해지면서 아버지의 삶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혈관에 피떡이 생겨 다리가 붓더니 걷는 것도 불편해졌다. 혈액순환이 안 되면서 심장도 나빠지고 신장도 투석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 몸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기관들이 수시로 통증을 호소하고 질병으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보다 병원에 계시는 날이 더 많아졌다. 친정 부모님은 금실이 좋았다. 어머니는 딱딱한 병원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며 아버지 걱정에 나날이 야위어갔다. 눈만 뜨면 늘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기막히고 어이없었다. 팔순인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당신 몸에 병균이 자라는 줄도 몰랐다. 어머니를 많이 의지했던 아버지는 한쪽 날갯죽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맥을 놓았다. 자식이 여럿이라도 어머니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까래처럼 든든하게 받들고 있던 어머니를 보낸 아버지는 중심을 잃고 허물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꼿꼿하고 단단하던 아버지의 눈 주위가 자주 붉어졌다. 거동이 어려워 누워있으니 등도 유연성을 잃었다. 잠깐 앉아있을 때도 베개를 괴지 않으면 옆으로 쓰러졌다. 뇌의 크기가 아기같이 작아진 아버지는 감기 같은 작은 질병에 걸려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자존심 강하고 강건하시던 아버지가 이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을까. 시든 꽃잎처럼 이울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힘겨웠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참, 쓸쓸하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인디언 부족의 족장처럼 육 남매에 손자들까지 스물다섯 명을 거느린 한 일가의 족장이었다. 남한테 피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셨던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울 것 없이 자식들한테 다 쏟아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허허로워진 아버지한테 내가 크게 일조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석 달 만에 깁스 풀고 나서도 손쓰는 일이 자유롭지 못했다. 왼손을 다친 뒤 내 오른손이 바빠졌다. 덕분에 왼손은 지난하게 살아온 세월의 보상이라도 받듯 호강했다. 구정물에 손도 안 대고 화장실에 가도 할 일이 없었다. 손이 묶여 얼굴만 뵈고 오던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렸다. 저무는 저녁처럼 욕심 없이 삶의 목록을 내려놓은 아버지를 옆으로 눕히고 베드에 목욕용 비닐을 깔았다. 환자복을 벗기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머리를 감기고 말끔하게 면도까지 해드렸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깔끔한 성품이라 누구한테도 몸을 맡기지 않는 아버지가 시원하다고 한마디 하신다. 아직도 육 남매의 지문이 어지럽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등을 닦아드리는데 손끝에 닿는 느낌이 마른 나무껍질처럼 꺼칠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일부러 여러 번 문질렀다. 내 속을 알아채기라도 하신 걸까. 아버지는 “이제, 됐다. 고맙다. 고마워, 덕분에 아주 개운하다.”라고 하신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균형이 깨지면 몸 전체가 기운다. 무엇이든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탈이 없다. 균형이 깨지면 삶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일에 목맬 때가 잦았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순조로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늘 붙어있어 하찮게 여기던 손의 소중함을 깨달은 요즘 나는 양손을 적당히 부린다. 어느 한 손도 서운해하지 않도록 손의 마음을 읽으려 애쓴다. 원래부터 나는 왼손잡이였다는 쓸데없는 고집도 버렸다. 그러고 보면 왼손을 깁스하게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형평에 어긋날 정도로 왼손을 쓰는 내 몸이 균형을 맞추라고 내게 시련을 주었던 것 같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흔들리던 아버지는 마침내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셨다. 아버지한테 가는 길에 얼굴에 와 닿는 칼바람이 매섭다.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는데 내게 마스크를 씌워주던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 생각나 코끝이 시큰거린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그리워할 것 같다. 생전에 턱없이 아버지 쪽으로 기울던 양팔 저울이 조금이라도 수평을 이루도록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기억해야겠다. 저무는 해를 안고 이별의식을 치르는 노을처럼 균형 잃고 휘청거리던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추억해야겠다. 이달의 수필 읽기 구성미학과 주제 전언의 떨림 1. 《한국산문》- 2018년 5월호 유 한 근 yhkpoet@hanmail.net 동어반복 하건데, 수필(essay)의 어원 속에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는 실험수필적인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수필은 영어로 ‘에세이(essay)’, 불어로는 ‘에세(essai)’로 시도(試圖)·시험(試驗)이라는 뜻이 있다. 이는 라틴어의 ‘엑시게레(exigere)'에 그 어원을 둔다. ‘엑시게레(exigere)'는 계량하다 혹은 음미하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원으로 보면 에세이는 비평적 기능과 유사한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불어에서 어원의 의미를 되새기며 시론(試論)적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수필은 자유롭다. 테마나 재제도 자유롭고 형식도 자유롭다. 상상력도 자유롭고 언어 표현도, 문장 스타일로 활달하고 자유롭다. 그래서 실험수필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이런 시각으로 이달의 수필을 보았다. 그 시각 망에 걸린 수필이 박종희의 <균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수필이 이른 바 실험수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비평을 “심미적 태도의 시정”이라고 말한 엘리옷의 반해 그 개성적 국면을 탐색해 보기 위해서이다. 박종희의 <균형>은 이렇게 시작된다.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맥없이 걸어 다니던 참에 정신이 확 들었다.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고 손이 아팠지만 누가 볼 새라 흐트러진 매무시를 가다듬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넘어져 왼쪽 손목이 다친 작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그리워할 것 같다. 생전에 턱없이 아버지 쪽으로 기울던 양팔 저울이 조금이라도 수평을 이루도록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기억해야겠다. 저무는 해를 안고 이별의식을 치르는 노을처럼 균형 잃고 휘청거리던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추억해야겠다”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을 마무리한다. 이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구조하여 아버지에 그리움과 이 수필의 테마인 ‘균형’을 미학적으로 전언한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균형이 깨지면 몸 전체가 기운다. 무엇이든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탈이 없다. 균형이 깨지면 삶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일에 목맬 때가 잦았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순조로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가 그것이다. 넘어져 다친 작가의 손목과 “아버지의 숟가락이 흔들리기 시작”된 아버지의 건강과 죽음을 일반 서사수필처럼 에피소드 위주로 전언하지 않고 구성미학을 고려하여 전언하고 있는 작가의 수필 미학은 문학 전 장르 특히 소설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는 미학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의 표현구조와 유머와 해학의 수필적 특성, 그 핵을 이해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는 미학이다. 그래서 수필 <균형>은 읽는 맛이 있고 주제 전언의 힘을 느낄 수 있으며, 은근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문학은 궁극적 목표는 지적이든 정서적이든 떨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력: 충북수필문학회, 한국산문작가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 저서: 수필집 가리개 수상: 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경북문학대전, 등대문학상 수상 등, 다수 수상 충청매일에 수필 연재, 현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강사, 세종시 주민센터 수필 창작 강사  
694 중원에서의 해후 외1편/김학천 file
편집자
821 2018-10-01
중원에서의 해후 초나라와 한나라가 천하를 다투던 기반(棋盤) 중원(中原)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거창한 초하(楚河)와 한계(漢界)를 사이두고 우리는 기약없이 만난다 당신은 대안(對岸)에 서있는데 바람에 나붓기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형양(滎陽)의 수많은 이야기가 나름대로 넘나들면서 력사의 어느 한 단락의 사랑을 려과해낸다 리상은(李商隱)의 너무나 많은 재간을 이어받았고 류우석(劉禹錫)의 천고에 전해지는 시구를 터득하였거늘 담담한 눈길에는 당송(唐宋)의 완약한 운치가 비껴있어 전통과 현대가 융합된 경전적인 예쁨이 반짝인다 나는 오로지 묵묵히 그대를 지켜보면서 오랜 옛적의 순진함이 9월의 하늘로 탈바꿈하여 제멋대로 진주같이 령롱한 비방울을 뿌려준다고 생각해본다 맑은 렌즈는 서서히 초점을 맞추면서 경치의 깊은 배경에 따라 머나먼 창상(滄桑)을 그려보고 생긋이 웃는 한 찰나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정경을 마음속깊이 새겨넣는다 혼 해빛아래 아득하게 보이는 먼산은 흰색으로 찬연하다 푸르른 하늘아래 성스러운 광환속에 천년의 적설은 흰빛으로 눈부시다 반만년의 고로한 전설이 반만년 한개 민족의 정신이 고스란이 하아얀 빛으로 번뜩인다 원시림속의 봇나무숲 수많은 인간속의 백의민족 티없이 깨끗한 흰색에 자아를 알게된다 봄날의 아지랑이와 여름날의 안개속에서 그리고 가을의 찬비와 겨울의 칼바람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느껴본다 金學泉간력 중국 연변작가협회 주석 역임. 한글과 중문 시집 <봇나무숲 情結> 등 다수 출판. 제4기, 제7기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수상. 제 4기 한국 한민족글마당문학상 수상. 현임 중국작가협회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시가학회 이사. 중국길림성연길시 거주. 메일:hakchenkim@hanmail.net  
693 백이라는 숫자 외 1편/권이영 file
편집자
786 2018-10-01
백이라는 숫자 백이라는 숫자는 얼마나 좋은 숫자이냐 그만큼 이루었고 넉넉한 여정 아흔 아홉 번의 고개를 넘으며 때로는 막막한 일 있었다 해도 때로는 뒷걸음질 쳤었다 해도 이제는 모두 지난 일로 떨쳐 버리고 백 하나, 백 둘, 백 셋, 백 넷...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숫자이다 백이라는 숫자는 돌아서 돌아서 다시 돌아온 새해 첫날같은 숫자이다 새해 첫날에 펼쳐진 순백의 눈밭이다 모든 것 다 지워버리고 얼마든지 큰 꿈 새로 펼쳐도 되는 광대무변의 눈밭이다 백이라는 숫자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숫자이냐 얼마나 가슴 벅찬 숫자이냐. 껌처럼 향내 난다 우리들의 꿈 감미롭다 그러나 아무리 씹어도 먹을 수 없는 꿈 도저히 밥이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자꾸만 씹게 되는 꿈 늘이면 늘일수록 늘어나서 실낱같이 자꾸만 가늘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꿈 바람을 불어넣으면 자꾸만 픙선같이 부푸는 꿈 겁없이 커지는 꿈 터지는 꿈 볼품없이 찌부러져도 다시 살아나 계속 달라붙는 우리들의 질긴 꿈 함부로 버리자 말자. ------------------------------------------------------------ 권이영 1991년 월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천천히 걷는 자유>(나남)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교류위원장 역임)  
692 역사의 종소리 외1편/강상률
편집자
794 2018-10-01
역사의 종소리 깨우침의 역사 속에 통일을 외치는 저 종소리 자유와 평화를 목 놓아 외친다 분단의 그늘에 가려 어둡게 살아 온 아픔이 화해와 신뢰를 위해 종을 울린다 동포여! 겨레여! 피로 물든 조국의 슬픈 장벽을 허물고 저 조상의 넋이 깃든 광활한 요동벌을 향해 이 땅에 한빛으로 거듭 나시라 꽃도 새도 날지 못하던 전설 같은 기억을 감추고 하얀 밤 어둠을 털고 일어나 평화의 기슭을 찾아가는 아리랑 민족의 노래마다 울려라! 역사의 종소리를...... 가슴 열었노라 온몸이 싸늘해지는 순간 평화의 가슴을 열었노라 통일의 청사진을 펴들고 칠천만 우리의 염원 담긴 그 따뜻한 가슴을 열었노라 반세기가 넘도록 굳어버린 심장 녹이는 산이 일어서는 소리 하늘이 외치는 소리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막힌 혈관을 뚫고 길을 찾아 암벽을 허무는 물꼬 터진 판문점 길목에서 캄캄한 청자빛 하늘을 이고 화해와 대화의 가슴을 열었노라 길은 멀어도 혼돈의 밤을 지나 평화와 통일로 가는 한민족의 간절한 기원이 뜨거운 가슴을 열었노라. - 1984년 시집 『북소리 들리는 아침』발간 - 전 공군보라매 수련원 강사 - 경상북도 문학상 수상 - 주소 : 문경시 중앙로 50-9(모전동)  
691 봄날은 간다 외1편/최영 file
편집자
722 2018-10-01
봄날은 간다. 장사익이 자제요양 병원에서 무료 공연을 합니다 무대에 오르기전 와상 환자들이 있는 병실에 왔습니다. 환자마다 악수를 하더니 의식이 혼미한 환자의 귀에다 대고 <봄날은 간다>를 부릅니다. 노래를 들은 환자가 눈을 떳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짓습니다 장사익이 웃습니다. 모두가 행복합니다 장사익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노래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기쁘게 하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 다같이 불러요. 가래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빛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마음으로만 부르는 환자도 있습니다. 봄날이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202 호실의 죽비 스물 다섯에 혼자 되어 70년 동안 수절했지만 마지막까지 여자이고 싶어 안개꽃 무늬 부라우스 입고, 스카프 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 죽비가 되어 내 가슴을 탁 친다. 이십년 동안 아들의 아들들을 키우다 뇌출혈로 쓰러져 말문이 닫힌 모습도 죽비다. 살아온 날들을 더듬더듬 털어놓을 때 네, 네 그러셨어요, 로 답해주면 잇몸을 환히 드러내며 합죽하게 웃는 죽비 돌이켜보니 죽비 아닌 게 없다. 최영/ 1958년 전라북도 무주 출생 97년 신라문학 대상 대구 경북작가회 회원 현불문 회원  
690 일상의 행복 외1편/고경하 file
편집자
742 2018-10-01
일상의 행복 아침에 눈을 뜨면 부시시한 나를 보며 미소짓는 당신 모습에 행복을 느낍니다 구수한 된장국에 반찬 몇 가지 놓고 밥을 먹으며 오가는 말 속에 잔잔한 행복을 느낍니다 출근하는 당신 구두를 닦으며 잘 갔다 올게 가벼운 입 맛춤을 하고 현관문을 나서는 당신을 보며 행복을 느낍니다 아이는 학교에 가고 가족의 남아있는 흔적을 정리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저녁에는 무슨 반찬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하는 나를 보며 일상의 행복을 느낍니다 가을향기 잠자리 날개 짓 하며 날아오를 때 코스모스 한들한들 정답게 이야기할 때 당신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넘어질까 갈대처럼 여리고 약하다며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부족한 나를 사랑으로 채워주는 당신은 나에겐 가을의 향기입니다 고경하/ 1965년 11월4일 광주출생 2017년 상주동학문학제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문집 [우리는 하나] 특별상 [해풍에 피어나는 동백꽃이여]. 시월문학제. 웹진 문학마실. 민족작가연합 평화통일공동시집 [도보다리에서 울다 웃다] 창작詩 출품, 민족작가연합 회원.  
689 전사의 보고 외1편/김대용 file
편집자
800 2018-10-01
전사의 보고 -추모시- 조국분단 18년째 되던 1963년 5월 어느 따스한 봄날,동구밖 새색시 배웅을 뒤로하며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고 잘리워진 조국의 허리를 기여히 잇겠다고 갈구리 같은 두손 불도저 같은 두발로 전선을 넘었다가 결국 철조망에 찣기고만 붉은심장 펄덕이던 젊디 젊은 이준원 전사 날개꺽인 감옥, 뒤이어 사선을 넘어온 옆방 동지에게 아기 출산 소식을 듣고 다시 두주먹 불끈쥐며 황무지땅 남녁에서 전사는 밭을 일구고 집을짓고 동지들을 묶어 내었습니다. 허리를 다쳐 지팡이에 의지한 노구를 이끌고도 2차 송환 기자 회견에 미선,효순 추모 촛불에 광우병 촛불에 탄핵에 디뚱 디뚱 가장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장기수 선생들 모을려면 이준원선생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동네 아파트 하수구가 막혔으면 이씨에게 부탁하면됩니다" 처녀 총각 중매도, 홀로 사는 동지들 살림살이도, 한반도 정세분석도, 젊은 일꾼 교육도, 먼저간 동지들 추도사도 이준원선생에게 부탁하면 다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조선인민군 이준원 전사의 땡크같은 두발 두손이 지나가면 "괜찮아 괜찮아" 하며 "허허" 한번 웃으면 다 됩니다. 통일의 그날 전사 이준원 보고합니다. 종놈들의 세상 친북을 종북으로 부르고 싶으면 친일도 종일로 불러야 하고 친미도 종미로 불러야 마땅하다 멀정한 국회의원도 "종북보다 종미가 문제다"라고 했다가 9년이나 감옥살이를 하는 나라 친박은 종박으로 친이는 종이로 친노는 종노로 친문은 종문으로 친척은 종척이 되고 친구는 종구가 되고야 마는 식민지 분단조국 이놈의 나라는 종놈들의 세상이다. 김대용 민주노총 대구본부 전통일위원장 wlqrnjs21@hanmail.net  
688 가시 /김철순 file
편집자
1922 2018-08-31
가시 가을의 끝자락에 다시 나선 길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 강물이 흐르는 기슭을 따라 걷다가 한여름 녹음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가시가 무성한 나무를 만났습니다. 나무의 팔뚝에 매달려 깃발처럼 나부끼는 노란 단풍잎 사이로 흉물스러운 가시가 드러났습니다. 나무의 두루뭉술한 허리에서 가슴까지 사방으로 뻗어 나온 무성한 가시를 보는 순간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가슴을 적시고야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치매로 고생한 어머니를 병시중하면서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몹쓸 병 때문에 점점 더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몸이 안방 구들을 지키기 시작할 때는 자식에게조차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식의 생각을 먼저 읽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병구완하는 것은 평생 당신을 위해 고생한 아내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요. 아버지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칠 년 반을 살다가 어머니는 이승을 떠났습니다. 고향 뒷산 양지바른 언덕 중턱에 어머니를 묻고 내려올 때도 당신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픈 아내와 함께 하는 동안 눈물은 이미 가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당신은 아내를 찾았습니다.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 국도와 지방도가 보이는 그곳에 당신의 아내를 묻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자식이 달리는 차 안에서도 어머니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깊은 배려였습니다. 아내를 묻고 돌아와 여생을 혼자 살겠다며 자식의 근심을 덜어주던 아버지에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외로움과 서러움 속에서 살다가 기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느 날 새벽, 산책길에 나서다가 집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수술 후, 조금씩 거동이 불편해지자 어느 자식도 선뜻 당신을 떠안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허구한 날 빈집을 지키기 일쑤였고, 공원을 찾아다니며 만난 노인들과 친구가 되어 온종일 밖에 있어야 했습니다. 팔십 중반의 노구를 이끌고 해거름 무렵에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자식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자식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쓴 열매 앞에서 가슴이 아팠을 당신은 오히려 따뜻하고 자상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우선인 당신의 가슴엔 얼마나 많은 상처를 품고 있었을까요. 아들과 딸 사이의 미묘한 차별에서 오는 서운함만 늘어놓던 내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집에 들어섰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게 환한 적이 있었을까요. 당신 앞에 나란히 앉은 딸과 사위를 지긋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말없이 사위의 손을 잡더니, 셋째 딸인 ‘나’를 데려가 줘서 고맙다며 사위의 손등을 토닥였습니다. 골칫덩어리였던 과년한 딸을 혼사 시킨 안도감과 시집을 보내고도 불안한 당신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댁에 가려고 막차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습니다. 어느새 부쩍 야윈 당신의 등은 그날따라 더 측은했습니다. 역 대기실을 빠져나왔습니다. 플랫폼엔 기차가 막 들어섰습니다. 기차에 올라타기 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개찰구에 돌기둥처럼 서 있던 아버지가 옷소매로 눈물을 연신 찍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당신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저 역시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두 언니와 두 오빠를 혼사 시키면서도 활짝 웃던 당신이었으니까요. 말썽꾸러기인 셋째 딸을 떠나보내는 후련함과 미덥지 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버지라는 엄청난 생의 무게로 허망한 세월 앞에서 잠시 흔들렸을까요. 세월이 흘러 이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훌쩍 넘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나 또한 가슴에 박히는 가시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속수무책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은 행복이며 아픔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식과의 추억을 반추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고픈 애틋함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한바탕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밤새워 비가 왔습니다. 아직도 단풍 몇 잎 붙잡고 저리도 아파하는, 가시가 무성한 나무를 뒤에 두고 떠나올 때야 알았습니다. 셋째 딸인 나는 당신이 눈을 감는 그 날까지, 평생 당신의 가슴에 품어야 하는 가시라는 것을. 아직도 사는 게 힘들면 한국에 나와 같이 살자, 하는 구순의 아버지 생각에 돌아오는 내내 목이 메었습니다. ******************* 약력 2004년 캐나다 한국일보 신춘 문예 당선 2018년 미주 한국일보 신춘 문예 당선 현재 토론토 한인 문인협회 회원 <추천의 말>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김철순씨와 이현숙씨를 한국의 '문학마실'에 추천, 소개합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두 사람 다 글쓰기에 대한 진지함과 잠재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았기에 토론토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함입니다. 김철순씨의 수필쓰기의 능력은 이미 공인된 바도 있지만, 작품의 진지성과 육화된 체험의 글쓰기로 읽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한 노력으로 정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이제 한국에 이름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현숙씨의 역시 이곳에서 이미 인증된 바 있습니다. 그동안 무게 있는 수필을 써 왔으나 근래에 시를 창작하는데 열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매우 조심성 있는 태도와 사려 깊은 감성으로 글쓰기에 접근하고 있음이 돋보이며, 앞으로 나올 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 31일 권 천 학 (시인 ․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687 나의 그림은 아직도 / 이 현 숙 file
편집자
1213 2018-08-31
나의 그림은 아직도 적당하게 낀 안개가 편안한 아침이다. 가시거리가 길지 않아 제한속도보다 천천히 가야 한다. 운전대를 잡고 가는 길이 여유롭다.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부분적으로 정전되었는지 몇 군데 신호등이 점멸되어 있다. 사거리에 길게 줄을 지어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하면서 교대로 지나간다. 약속 시각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뿌연 안개 속에 온몸이 젖어 들 것 같다. 기계적이고 허둥대는 일상적인 삶에서 오늘만큼은 풀어지고 싶다. 저 안개처럼... . 약속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설렘이 일어나고 있다. 그 ‘언제 한 번’이 바로 지금이다. 토론토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 하나, 그리고 그 반대편인 서쪽에 사는 나와 가운데 사는 다른 친구, 비슷한 시기에 이민 와서 만난 셋이다. 사는 거리도 거리이지만 각자 생업에 매달리다 보니 서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하는 전화기 속의 마지막 말은 늘 ‘언제 한번 보자’는 막연한 기약이었다. 몇 번의 번복 끝에 드디어 날을 잡았다. 이른 아침에 만나 그림도 보며 지난 이야기도 하자고 했다. 는개가 내리고 있다. 미술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준비해 온 두 종류 겉옷 중에 두터운 것을 걸친다. 봄을 느끼고 싶었는데 바람이 아직 차다. 몸이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표 파는 곳 앞에 두 여인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인다. 창을 바라보며 도란거리는 둘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두어 발자국 뒤에서 머물 듯 서 있다. ‘늦어서 미안하다.’ ‘괜찮다.., . ’이런 인사는 우리에게 필요 없다. 가슴 저 밑에 있던 반가움이 얼굴로 올라와 있으니까. 카페에서 차 한 잔부터 하자며 자리를 옮겨 숲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는다. 숲은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그 기슭에 비스듬히 서 있는 비쩍 마른 나무들이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한가 보다. 모두 몸을 꼬아 창 쪽으로 가지를 바짝 기대고 있다. 그 가지에 눈웃음을 보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기 삶의 한 토막을 연다. 다른 친구도 보여 준다. 나의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이민의 강 가운데는 망각의 늪이 있었는가 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아득하게 잊고 있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삶만을 유지하고 있다. 늘 눈앞에 보이고 밀려오는 것들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지난날들의 마디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였던 ‘내’가 살아가면서 주위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작아지고 희석되고 어우러져 가고 있다. 그런 얼기설기한 나의 모습이 가끔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한다. 저 멀리 있던 어린 날의 한 자락도 꺼내 본다. 한여름, 만삭의 몸으로 가정방문을 왔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이름을 기억해 낸다. 가파른 북선동 산허리 길을 올라오시느라 힘이 들었는지, 뒷목에서 성글 성글 맺히던 땀방울에 무안하고 어색했던 일. 개량 한복이 잘 어울리던 그분의 연세를 헤아려 본다. 중학교 가정 과목의 숙제였던 뜨개질을 늘 내 것까지 해 주었던 단짝 ‘희야’도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웃으면 양쪽으로 덧니가 보이던 친구, 학년이 올라가 다른 반이 되었을 때도 방과 후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 주던 친구, 보고 싶다! 주위에 가득한 안개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셋 중 누구도 그 흔한 스마트 폰조차 보는 이가 없다. 숲은 우리가 처음 앉았던 그 시간이나 지금이나 옅은 안개로 싸여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희미한 기억들을 이야기하면서, 뭉클하게 가슴 적시는 삶의 토막토막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아 - , 살고 있었지. 그렇게 소중하게 나도 살아왔었지... .’ 과거는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연결하고 지탱하게 해 주는 길고 긴 다리였다. 산다는 것, 추억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은 잔잔한 감동이다. 창밖에 휘청거리며 얽혀 있던 나무들이 조금씩 허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안개가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미술관 직원이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란다. 그림 구경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작품 감상을 못 한 것을 아쉬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의 그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직 그려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언젠가 그리워 할 이 순간을 충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려나가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림을 보러 언제 한 번 다시 와야겠다고 셋이 입을 모았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내려오다가 남겨 놓은 우리의 이야기가 못 잊혀서 뒤를 돌아다 본다. 조금 전 미술관에서 같이했던 안개가 산봉우리 중턱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다. 우리의 마치지 못한 그림들을 잘 보관해 줄 모양이다. '언제 한 번'이 다음에 다시 올 때까지. 이현숙/토론토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2014년) <추천의 말>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김철순씨와 이현숙씨를 한국의 '문학마실'에 추천, 소개합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두 사람 다 글쓰기에 대한 진지함과 잠재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았기에 토론토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함입니다. 김철순씨의 수필쓰기의 능력은 이미 공인된 바도 있지만, 작품의 진지성과 육화된 체험의 글쓰기로 읽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한 노력으로 정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이제 한국에 이름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현숙씨의 역시 이곳에서 이미 인증된 바 있습니다. 그동안 무게 있는 수필을 써 왔으나 근래에 시를 창작하는데 열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매우 조심성 있는 태도와 사려 깊은 감성으로 글쓰기에 접근하고 있음이 돋보이며, 앞으로 나올 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 31일 권 천 학 (시인 ․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