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票의 생각 



연일 계속된 황사를 씻어주려는 듯 단비가 내리는 5월 9일 오후, 청담동 제 3 투표소로 간다. 강대국의 외압이 황사처럼 밀려오고, 열망에 찬 국민들의 바람이 양 갈래로 몰아치고, 종내 대통령이 탄핵되고 보궐선거를 하는 이 봄도 지나가고 있다. 이 안타까운 시국을 도움닫기 발판으로 삼아 애국의 마음들 모아 기어이 되살려야 할 우리나라, 주권자의 한 표를 행사하러 가며 상념에 잠긴다. 200년 전에 태어나 30세에 「시민의 불복종」을 실천하고 저술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생각났고, '지고의 정치는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정치'를 말한 노자(老子)의 말도 생각났다. 아, 생각을 하자니 한 편의 시가 아련히 떠올랐다. 북한산 시인 임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발표한 시 ‘우리들의 대통령’을 읽은 기억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양처럼 부드럽고 불의의 정상배들에겐 범처럼 무서운…, 야당의 무리들마저 당수보다 당신을 더 흠모하고, 모든 종파의 신앙인들도 그들의 교주보다 당신을 더 받드는…, 다스리지 않음으로 다스리는/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아, 동강난 이 땅의 비원을 사랑으로 성취할/ 그러한 우리들의 대통령/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작금의 현실에서 정치란 무엇이고 국가와 국민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일제강점기의 두 배가 넘어가는 70년 세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면서, 그 남쪽에서마저 국론이, 지역이, 세대가, 노사가 분열되고 다투는 이 나라 대한민국! 민족상잔의 비극 후 짧은 기간에 기적처럼 이룬 경제발전과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반목과 대립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중도(中道) 혹은 중용(中庸)이 사라져버린, 아니 드러나지 않는, 아니 스스로 중도라 표현한들 우(右)에서 보면 ‘좌’라 하고 좌(左)에서 보면 ‘우’라고 하는 판국이니 중도의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다. 좌우는 극명하게 자기만 옳다하며 상대를 물어뜯고 자기편이 아니면 배신자나 매국노로 몰아세운다. 맑고 선했던 국민들은 허구한 날 매스컴을 통해 그 모습을 보아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점점 거기에 적셔지고, 괜히 날이 서고, 분개하면서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하튼 그 속 어디에 있어야할 듯하니 자신을 어느 편에 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선한 백성들의 마음마저 멍들게 한 원류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같이 애국자연하는 정치모리배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아니겠는가!


국민들의 똑똑함이나 성실성은 어느 민족 보다 우월하고, 여러 분야에서 세계 제일을 차지하는 자랑스러운 나라이고 민족인데, 왜 국내에서 체감하는 대다수 국민의 행복감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고 불평불만이 산적해 갈까? 이는 정치(제도) 또는 위정자의 덕은 보지 못하고 외려 해악을 입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 헌신하고 봉사하는 공복(公僕)이 아니라 군림하고 챙기려는 야욕에 찬 정치인들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행태와, 국가 백년대계나 국민 안위와 복리 보다 자신의 출세욕과 이권에 급급한 파렴치한들 때문이고, 그들에게 겹겹이 실망하는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가 팽배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 생활수준은 나날이 향상되고 있는데, 정치만이 선진화되어가는 국민들보다 뒤처지는 꼴이니 누가 누구를 어찌 믿겠는가? 객관의 가치와 공익의 기준을 세울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과연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만이 옳을까? 그 믿음은 변하지 않을 것인가? 또 어떤 변수가 일어날까…?


선거벽보에 이름 올린 15명의 후보들은 참 대단한 열정과 소명의식을 가진 애국자들이다. 이들은 어느 편의 세를 불려 등에 업고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비익조(比翼鳥)는 결코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이 이 나라도 좌우의 날개가 마땅히 있어야 하고, 그 몸통은 대다수가 소통을 통해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화합의 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의 유세와 구호를 보면 당장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말의 성찬과 편 가르고 헐뜯기에 급급한 모양이다. 하여도 우리는 이들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면은 적극 동조하지만 어느 면은 마뜩찮은 후보들, 이들의 장점만 뽑아 섞은 완전한 사람을 ‘우리들의 대통령’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으니, 이제 이들 중에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처럼 최고 권력의 파행을 목격한 뼈아픈 경험은 이 선거에 한층 더 신중을 기하게 한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정당이나 이념이나, 필요에 의해 줄을 섰던 편을 넘어서서 보다 객관적인 생각을 갖고 선거에 임했으면 좋겠다. 설령 미워했을지라도 최다 득표를 한 사람이 가장 적임자임을 다 같이 인정하고 환영하면 좋겠다. 또한 다수의 선택을 받았다 해도 대통령은 결코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니며, 단박 세상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질서를 지켜야 하고, 다수의 선택과 그에 따른 행보에 긍정과 믿음의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새 지도자로 인한 변화와 함께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이 시기는 아직은 우리가 다 같이 조금 더 고통을 분담하여 참고 이겨나가야 할 때이다. 바람직한 변화를 기대하며 말을 하다 보니 대다수 국민들은 이미 그런 정도의 소양과 기다림이 될 것 같은데, 다시 또 문제가 되고 염려가 되는 부류는 아무래도 정치인들이다. 그들에게만 이런 소시민의 소박한 바람마저 마이동풍(馬耳東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 본디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닐 텐데 왜 그 판에만 들어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달라질까? 그들을 따로 교육하는 장치나 기구를 만들 수는 없을까….


아울러 당선자에게 한 표(票)의 생각으로 바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국민들에게 간절한 당부의 말로 국정을 열면 좋겠다. 이제 제발 서로의 입장차이, 생각차이를 접고, 조금씩 양보하고, 이견을 무릅쓰고, 우리 배달민족, 한민족이 하나로 어우러지자고! 난제가 산적한 지금 그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백성 앞에 큰절하며 읍소라도 하면 좋겠다. 대번에 그리 되지는 않을지라도, 제일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이 정치인들일지라도 대통령은 부단히 진심으로 너와 내가 하나 되는 민족의 대통합을 위해 제도와 장치를 강구하며 앞장서서 노력하길 바란다. 부디 논공행상으로 직책을 나눠주지 말고 적재적소에 맞는 사람을 여야 가리지 말고 중용하여 국민 대다수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인사를 하면 참 좋겠다. 바쁜 일정에서도 잠시 짬을 내어 우리 아이들의 학교에 가서 환하게 웃으며 꿈과 희망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아이들이 다양한 꿈을 꾸고 실현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해주면 좋겠다. 우체부 아저씨나 대통령이나 자기 직분을 다하는 같은 공무원이라고 하면 아이들이 뭐라고 할까…, 그리하여 오래 묵은 배타적 국민정서와 토양이 서서히 본래의 맑고 선한 모습으로 바뀌어준다면 우리 국민의 능력과 성취는 이 난관을 뚫고 한층 배가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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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는 소회와 바람을 휴대폰으로 간단히 적어두려다 바람이 엉긴 말들이 늘어져 채 완성을 못하고, 투표 후의 저녁 약속과 다음날의 일정에 쫓겨 글 완성이 늦어져버렸다. 그저 혼자 구시렁거리듯 끼적인 바람일 뿐이었지만, 그 사이 문재인 후보는 41.1% 득표율로 2위 홍준표 24%와 17.1%의 큰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미 임기가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들끓던 정국이 가라앉았고 그는 전임자들과 사뭇 다른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의 당선과 취임을 축하하며, 대다수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고, 우리나라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정치가 펼쳐지고 이어져 역사에 길이 남을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많은 문제들을 슬기롭게 타개하고, 국론의 바른 방향을 선도하고, 국민 모두를 아우르며 지역과 세대와 노사가 소통하고 화합하여 어깨춤을 출 수 있도록 이끌어주면 참 좋겠다.


이태 전 어느 봄날, 북한산 등산로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일국의 야당 총수가 수행원도 없이 홀로 산행을 한다는 자체가 좀 놀라웠다. 또한 봉하 마을과 정토원(나의 조부(李晋馹)가 봉화산에 창건한 절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시 공부를 한 곳이고, 생을 마친 부엉이바위 인근이다)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느낌으로는 얄궂은 정치판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맑고 선량한 선비 같았다. 헤어질 때 큰 짐을 진 듯한 뒷모습을 보며 필부가 짐작도 못할 중차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려 혼자 북한산에 올랐으려니 했는데, 그의 고심이 익고 익었을까! 오늘날, 많은 민초들의 기대와 성원 속에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다. 초록이 무성해지는 이 봄바람을 타고 나의 작은 바람도 그에게 선한 기운으로 전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