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통하는 사이

김인기

 

 

 

 

  순대는 나도 가끔 먹는 음식인데, 근래에야 겨우 거뭇한 색의 비밀을 알았다. 그간 여기에 돼지의 피가 들어간 줄 몰랐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몰라도 그만이었으니까. 하아, 이건 좀 심했다! 이렇게 한탄하던 중 문득 엉뚱한 질문이 떠올랐다.

  작년 12월 초순이었다. 누가 거리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 걸 들었던가 보다. 이 친구가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박근혜와 태진아가 무슨 관계에요? 아까 광화문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박근혜는 태진아랑…….’ 그러던데.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기 전이었다. 도대체 이분이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태진아 씨랑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냐? 나도 궁금했는데, 바로 아래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아마도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잘못 들으신 듯…….

  시위대들이 손에 든 팻말이나 전단만 해도 그 얼마냐. ‘박근혜 퇴진’이라 적힌 깃발도 수두룩했다. 그런데도 현장에서 ‘퇴진하라’를 ‘태진아랑’으로 듣는 그 말귀도 놀랍지만, 이렇게 엉뚱한 질문에도 ‘태진아랑’이 ‘퇴진하라’인 줄 아는 그 감각도 놀랍다.

  질문자의 정체야 뭐 그리 중요할까? 저마다 나름대로 추측은 할 수 있다. 혹시 중학생이 아닐까? 이것도 확실치 않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물정 모르는 어른들도 많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이런 개탄에 근거가 있다.

  ‘이 시대의 한 시민으로서 소양이나 관심이 부족했던가 보다.

  이런 의심도 드니까. 그러나 이것도 얼마쯤은 꼰대들의 횡포이다. 각자가 누군가에게 ‘시민’이라느니 ‘국민’이라는 둥으로 불리다가 금방 버려지기도 하니까. 이런 처지에서 누가 ‘시민의 소양과 관심’을 들먹이나.

  나는 거리에서 행인이고, 서점에서 손님이다. 날마다 밥을 먹고, 밤마다 잠을 잔다. 농담도 한다. 글도 쓴다. 하품도 한다. 이런 일거일동이 곳곳에 미미하나마 영향을 미친다. 만물이 나와 상응한다. 나 때문에 파리나 모기마저도 몇몇은 행로를 바꾸지 않는가. 우리들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상사를 이루어낸다.

 

  그런데 이런 걸 하찮다며 무시하고 난데없는 이념이나 사명을 법률로 강제하면 어떻게 되나? 그게 아무리 고귀하고 절실하더라도 상대방의 동의가 없이는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외부에서 누가 기어이 나서려나. 이게 또 민심을 어지럽힌다.

  민의 없는 법치의 폐단은 심대하다. 법의 존엄도 난망하다. 독재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자기들 멋대로 법률을 압제의 도구로 악용하면 준법은 명예가 아니라 바로 굴욕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법원에 가서 해결하자.’는 게 악담이다. 도리어 현행법을 무시하고 권력자에 저항하는 게 자랑이 되고.

  과거 내력과 현재 상황을 보면 주권재민의 원칙도 의미심장하다.

  “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부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것들이 작당해서 내 재산을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이치가 그렇잖아. 그러나 이건 공연한 걱정이다. 누가 너그러워서가 아니다. 빈민들 역시 차후에 부자가 될 수 있는데, 자기 재산이 남들한테 넘어가기를 바라랴. 부자들이 이걸 납득하고서야 비로소 안도했다.

  이 논리에는 전제가 있다. 빈자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 극빈자도 기꺼이 대부호의 재산권을 옹호한다. 이게 어디 재물에만 이럴까? 특히나 개천에서 난 용은 너도나도 환대한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으니까. 악전고투에도 꿋꿋이 견딘다. 더러는 비리에도 너그럽다.

  ‘그렇더라도 웬만하면 야박하게 굴지 말자.

  여론이 이러니까, 그 죄를 두둔할 구실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마저도 종종 망각한다. 이게 이런 만큼이나 그 역도 진실이다. 정의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사회에서는 무장괴한이 관공서를 습격해도 시민들이 통쾌하게 여긴다. 부자가 거리에서 맞아죽어도 그러려니 한다.

  “과연 하늘이 무심치가 않았구나.

  혹자는 하늘을 들먹인다.

  “쯧쯧쯧……. 어쩌면 저렇게나 끝까지 흉하나!

  더러는 혀를 찬다.

  “사필귀정이지, 사필귀정이야.

 

  아무도 망자를 편들지 않는다.

  오늘도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총성이 울린다. 말이 좋아 공권력이다. 군인이나 경찰도 나빠. 공익의 수호자여야 할 것들이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이들 사이에도 갖가지 불화가 생기더니 더러는 외세와 결탁한다. 급기야 내전이 벌어진다.

  재화도 불안하니까 바라는 것이다. 온통 미쳤다, 아주 미쳤어. 이게 어느 정도 있어야 충분한가? 불안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불안에는 끝이 없다. 어렵다, 어려워. 하물며 제 손으로 이력서 한 장 써본 적 없으면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이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급기야 상속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찬다.

  사람은 감정이 있어서 수시로 흔들린다. 그러니 피차 남의 인격을 모독하지 말자. 너나없이 실수할 권리도 있고 분통을 터뜨릴 권리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그 자리가 별나서 ‘유명세’야 치르더라도 생트집을 잡을 것까지야 있나. 누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모두 나서서 침을 뱉을 거야 있나.

  저마다 감수성이나 상상력도 제각각이다. 착각마저도 환경과 체험에 뿌리가 닿아있다. 그런 만큼 유유한 태도가 화근일 수 있다. 인간들이라고 다 그렇게 순박하지가 않아. 더러는 남들의 침묵이나 관용을 무죄의 근거로 삼는다. 이들이 바로 잠시 납작 엎드린 자들이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이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후인들이 어쩌면 무관심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런 몰상식의 극치가 잠시나마 통했다는 이 시대가 이들한테는 흥미롭지 않을까? 여러모로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날이 언제쯤일까?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오로지 그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경험은 함정이 있는 자산이다. 너무 참혹한 기억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이게 오로지 한쪽에만 집착하는 외눈박이로 만든다. 이들한테는 아무도 말리지 못할 고집이 있다. 더러는 여기에 제 존재의 의의를 두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발언만이 아니라 기억마저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당사자가 용감해야 한다.

  휴전 이후 60여년이 지났으나 공포는 여전하다.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주위가 온통 불바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는 통일이 되지도 않는다. 결국은 주변국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어정쩡하게 봉합이 되겠지. 상황이 이런데도 망언을 떠벌리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무지몽매하거나 흉악무도하다. 이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따위 소리가 이리도 쉬이 나오나. 더러는 이런 짓거리가 통하나 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인식도 좀 명징해야지. 아직까지도 자기들의 행태에 비난여론이 쏟아지자 난데없이 ‘인민재판이냐?’ 떠드는 자들이 있다.

 

  말하자면 인민군들이 엉터리 재판을 열어 민간인들을 마구 죽였다는 것이다. 이게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국군들이 늘 선량했더냐? 여기는 그런 형식마저 없었다. 누구는 저쪽의 손에 죽어서 부당하고, 누구는 이쪽의 손에 죽어서 합당한가? 이럴 수는 없다.

  민간인들이 양측 군인들의 오인사격에 죽기도 했다. 더러는 유탄에 맞았고, 더러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작전지역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도 숱하게 저질러졌다. 희생자들은 지천으로 널렸어도 가해자들은 몽땅 사라졌다. 이게 이상하지도 않나. 비열한 자들! 아무도 말하려 들지는 않지만, 자기들끼리도 총질을 했다.

  진실은 왕왕 사람들을 참담하게 한다.

  ‘눈을 감자. 살자면 이럴 수밖에 없어!

  이게 체질이 되었다. 이러고도 어떻게 화해와 치유의 길로 나아가랴. 어림도 없다. 철부지들의 무지야 그렇다 하자. 그러나 글깨나 읽었다는 어른들이 고비마다 나타나 추태를 부리는 꼬락서니는 봐주기 어렵다.

  ‘싫다. 정말 싫다!

  진절머리가 난다.

  ‘저들을 제발 안 볼 수는 없나?

  여기에도 주의해야 할 구석이 있다. 무엇에 질려 영영 관심조차 놓아버리는 게 나쁜 선택일 수 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러나…….

  때때로 회의도 든다. 혹자는 후닥닥 물러났다.

  누가 누굴 탓할 건 없다. 우리들은 어차피 한계를 지닌 채로 산다. 사람은 각자의 역량과 성품대로 살아야지. 누가 영웅호걸이 되라고 했나. 이른바 팔자라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술꾼의 이런 소망마저도 존중해야 한다.

  ‘세상 모든 종류의 술을 다 마셔봤으면…….

  누구는 돌덩이를 만지작거리고, 누구는 애완견을 데리고 외출한다. 누구는 산에 간다. 누구는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춤을 춘다. 누구는 립스틱 수집광이다. 날이면 날마다 저기 저 양반은 저렇게 바닥에 앉아 뜨개질을 하네. 그러나 누가 알랴. 내게는 다만 무의미할 뿐인 저런 일들로 해서 저들이 미치지 않았을지.

  어떤 질문에는 정답이 아예 없거나 너무나 많다. 어떤 질문에는 끝끝내 답하지 말아야 한다. 약간의 훈수가 필요할 때도 있고, 그저 바람잡이 노릇에 그쳐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대체로 정답보다 질문이 더 소중하다고 여긴다. 영원히 정답을 내지 못해도 좋다. 질문은 가능성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런 눈길을 던진다.

  ‘봐라, 모모인이 이십여 년 또는 삼십여 년 동안을 알고 지냈다. 직장동료로서 어울려 즐겁게 지낸 날들도 많았다. 이랬으면 이들이 설령 퇴직을 하거나 이직을 하더라도 모두 귀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비록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한결같아야지.

  이게 거의 기적에 가깝다. 마치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선배들의 현재가 곧 후배들의 미래이다. 그래도 당장은 자신이 이런 직장이나마 다녀서 다행이다. 자리에서 떠나자 연락도 끊긴다.

  “그래, 마침 잘 됐네. 짜장면이라도 같이 먹자.

  누가 반갑게 이러지도 않는다니까. 어제까지도 너나들이했던 녀석들이 전화조차 받지 않아. 속이 쓰리다.

  ‘저런 잡것들을 친구로 알았다니…….

  이런다고 풀릴 속도 아니다.

  ‘여태 그걸 몰랐어요?

  도리어 이런 눈총이나 면하면 다행이다.

  이런 곤경이 자업자득이다. 팔자소관이기도 해. 그러나 이런 체념으로 활로를 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너무 몰두했구나.

  때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이 체제의 포로였구나.

  그래도 이렇게 자위한다.

  ‘나는 잘못이 없었어. 나는 나름대로 성실했다!

  가정사도 불안하다. 너무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외면하다 끝내 파경에 이른다. 누가 누굴 덜 사랑해서가 아니다. 누가 딱히 멍청해서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불화가 있다.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라. 이들 가운데 자기가 바보라 하는 이들이 몇 명이나 있나. 나날의 삶이 이러면서 도대체 누가 누굴 비웃나.

  이러니 ‘퇴진하라’를 ‘태진아랑’으로 듣는 거야 별것도 아니지. 누가 내내 이래도 무방하다.

  그래도 본인이 딴에는 똑똑하다며 기세가 등등했다. 그래, 그렇다니까!

  ‘나도 한때는 억장이 막혔고, 더러는 잘못도 저질렀다. 그러므로 자신이 늘 위대했다고는 주장하지 않겠다.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어. 이건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들이 평소에는 한심하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존재들에도 주목한다.

  언제나 버려진 것들은 싸구려로 보인다. 모두 알몸으로 있는데 나 홀로 성장이라거나, 모두가 성장인데 나 홀로 알몸이라거나. 이러나저러나 어색하다. 그러나 이런 외양의 차이도 때로는 거리낌이 없다. 바로 이들이 서로 통하는 사이일 때이다.

  ‘아아, 나는 통하고 싶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횡설수설하는 중일 것이다. 열망은 있으나 길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는 중언부언하는 중일 것이다. 상대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나, 여기에 자신이 없다. 그런가 하면 더러는 거짓말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분투하는 중이다.

  “어휴, 저 머저리!

  그러므로 이런 막말도 더러는 칭송이다. 사람들은 자기 몸의 췌장이나 맹장마저도 탈나기 전에는 어디에 붙은 장기들인지 모른다. 가뭄이 들어야 하늘도 원망을 하지. 뒷담화도 복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걸 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바로 열흘 전이었다. 모임에 나갔다. 서로 인연을 맺은 지도 20년이 넘은 분들도 여러 명이다. 이러면 누구누구를 두고 회원이나 문우라 하기는 뭔가 아쉽고 도반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린다. 나는 별반 아는 게 없었으므로 조용히 남들의 의견을 들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본디 작가들은 글을 읽고 쓰는 걸로도 행복한 자들인데, 더러는 이런저런 잡사들을 마지못해 떠맡았다. 그 자리에서 나온 의견이라는 것들의 내력이 대개 이랬다. 그러니 난들 어찌 무심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잠시나마 풍경이 되고자 했다.

  ‘딱히 별난 것도 없어 보이고, 그저 곁에 앉아 밥이나 먹는데도, 그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재수가 좋다.

  어쩌면 문학도 이렇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런 선순환이 좋다. 실지로 주위에는 이런 분들도 있다. 나는 이것이 오로지 행운이라고만 여기지도 않는다. 이것도 이럴 만하니까 이런 것이다.

  여기서 잠깐 순대 이야기를 더 해 보자. 만약에 내가 갈색의 정체를 예전부터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내 감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이건 으레 이런 거니까. 그러나 뒤늦게 이런 줄 아니까 어째 마음이 편치가 않다.

  ‘지독하다. 이렇게 피까지 먹을 게 뭐 있나?

 

  나는 족발도 신나게 뜯어먹는다. 언젠가는 돼지껍데기도 맛있다며 먹은 적 있다. 이런 처지에 무슨 보살이라고! 그렇잖아. 순대에 피가 들었다며 까탈을 부려? 이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문득 궁금하다. 마침내 ‘태진아랑’이 ‘퇴진하라’인 줄 알게 된 미지의 그 사람은 그새 변했을까? 그가 잠시 손바닥으로 이마를 몇 번 탁탁 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우니까. 그러나 몇 달 사이에 이 사회 분위기는 참 많이도 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딴은 그렇긴 해. 어떻게 ‘퇴진하라’를 ‘태진아랑’으로 듣나. 심하다, 심해! 내가 오지랖을 더 펼치자 익명의 그 인간이 아주 별종으로 보인다. 내 주위에 이런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보다 더 행복하다거나 훌륭하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발표작 [2017.6.16.]

 

 

 

  김인기

  1962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1991년《월간에세이》로 등단한 이후 수필집으로 『함께 가는 우리들』과『참 좋은 날』을 내었다. 현재 대구경북작가회의와 대구수필가협회 회원으로 있다.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