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엊저녁의 충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지 희붐한 새벽인데 눈이 떠졌다. 나의 상념은 곧바로 그녀의 내실로 옮겨가고 있었다. 남편도 지금 자신의 심장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잠에 곤한 아내를 보며 배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슴에는 지아비의 명줄을 실타래처럼 길게 잇기를 소망하는 흔적이 새벽 강처럼 아래로 흐르고 있으리라. 베란다에 놓여 있을 바이올렛, 베고니아의 향기가 촘촘하게 꿰맨 상흔에 살포시 내려앉아 졸고 있을 것만 같다. 여명에도 또렷할 거친 수술 자국을 바라보며 남편은 무슨 생각에 들었을까?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여직껏 너무 적조했던 터라 얘기가 온통 수다로 변했다. 나물 비빔밥으로 저녁 약속을 정하자는 것을 남자의 허세가 가로채어 고깃집을 우겼지만 꺾이질 않았다. 밥상과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담백한 나물을 담은 대접처럼 맑고 참했다. 거섶들을 꼭꼭 씹으면서 할끔할끔 나를 쳐다보다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복부에 대수술을 해서 고기는 아직 흡수가 안 된다고 했다. 귀를 의심하는 나에게 여물게 새로 반복해 주었다.

 

  라일락 잎이 유난히 푸른빛을 날리며 수술실 창틈으로 날아든 날이었단다. 아낌없이 주고 싶은 사랑을 실은 라일락 향기가 피 냄새를 껴안아야 했던 시간들, 열네 시간의 이식 수술은 그녀의 간을 황천길만큼이나 멀리 있던 남편한테로 옮겨 놓는데 성공했다. 온몸이 축 처졌지만 정신만은 초롱같았던 그녀. 노력해선 안 될 게 없다는 그녀의 눈빛엔 천정에서 내리쏘던 새하얀 형광등 불빛도 무색해졌지 않았을까? 호흡을 짓눌렀던 물탱크만한 복수를 자신의 간으로 걷어낸 이 순간까지는 그녀의 인생 이력표이다.

 

 

  초등학교만 서너 해를 같이 다니다가 일찍이 전학을 간 뒤로는 간간이 방학 때 만나는 게 다였다. 어느 겨울방학 땐가 우리는 고입을 앞두고 아랫마을에 토정비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노력해도 마음만 허비하고 얻는 것이 없다는 토정 할아버지의 말에 그녀는 금방 토라져 버렸다. 그녀의 화두는 늘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뽀로통해져 돌아서는 마음엔 최선을 다하면 토정비결도 바꿀 수 있음을 스스로 다짐받고 있었다.

 

  돌담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그녀와는 동갑내기였지만 누나 같은 버거운 동무였다. 소꿉장난 할 때도 남편을 극진히 여기는 그 어른스러움이 왠지 거슬렸다. 기침 콜록거리면 이 빠진 공기에다 먼지 띄운 물을 찰랑하게 담아 숭늉이라며 감기 맞지? 하고는 의심스레 눈동자를 굴려댔다. 고개를 젓고 일어서려면 아래로 처진 바짓가랑이를 꼭 잡아당기며 빨리 마시라고 앙살을 부린다. 찬바람에 까칠해진 양 볼에는 욕심이 끼었고 눈망울엔 열정이 찼다. 조무래기시절부터 싹수가 달랐다.

 

  그녀의 간 이식 집념에는 충무공 정신과 닮은 데가 있었다. 틈틈이 산을 오르내리며 몸에 지방분을 빼내고 맑은 공기를 마셔가며 오장을 신선하게 돋우었다는 얘기, 기름진 음식을 삼가고 텃밭에 손수 가꾼 무농약, 무공해 야채를 섭취하면서 깨끗하게 간을 가꿔온 이력들은 준비된 그녀의 간이식 역사였다. 여자의 간으로 모자랄 양에 대비해 큰아들을 수술대에 대기시켰다는 고백은 유비무환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절박한 심정을 털어낼 때는 끝내 눈가에 이슬이 굴러 떨어졌다.

 

  그녀 앞에 앉은 내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아니, 몸에 칼은 고사하고 주사 바늘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찔려 본 적이 없는 나는 자꾸만 고개가 밑으로 처졌다. 나는 그 흔한 헌혈에도 솔직히 인색했다. 남아도는 피도 피 같은 피라고 하며 움켜쥘 줄만 알았다. 대중탕에서 흉한 수술 자국을 보면 ‘전생의 업보구나.’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기에 급급했다. 한술 더 떠 불행 중 다행이라며 가르치려 든 적이 있었다. 그녀의 숭고한 자비의 상흔은 교만한 내 생각에 일침을 가하였다.

 

 

 

  그녀의 삶은 의지를 싣고 철로 위를 달리는 케이티엑스이다. 그녀의 행로엔 장애물이 감히 얼찐거리지 못했다. 사랑과 열정으로 배합된 동력은 제트엔진같이 힘이 있었다. 서산으로 완연히 기운 남편의 사선을 밀어내고 자신의 배 위에 푸른 칼날로 사선을 판 그녀, 나는 비너스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의 가슴 위에다 라일락 꽃 한 송이를 올려놓는다.

 

 

 

손달호

 

교원문학상(2011), 한국예인문학상(2017), 수필집 <<소쇄원>>(북랜드, 2016)

전 중등학교 교사

 

 

snfgj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