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종종거리면서도 묵직한 걸 보니 그녀인가 봅니다. 기분 좋게 한 발 내딛던 나는 멈칫합니다. 저기 하얀 우산을 쓰고 그녀가 서 있네요. 토닥토닥 소리가 들립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비가 제법 내리는 새벽인데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나봅니다.

그녀는 나에게 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어쩌면 나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걸 느낍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나는 그녀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립니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봅니다. ‘오늘은 어떤 빛깔일까. 폭우가 내린 직후처럼 탁하지는 않겠지. 비가 내리고 있지만 흐리지는 않겠지. 그가 품는 모래알과 풀잎은 어떤 표정일까. 방긋 웃어줄까. 아님 몸을 살살 흔들며 싱그럽게 일렁일까.’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입니다.

그녀의 생각에 장단을 맞추듯 나는 말갛게 씻은 얼굴을 내보입니다. 아직은 약간의 큼큼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도 신이 납니다.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흥얼거리며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요.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다행스럽다는 표정입니다. 오늘은 그녀의 얼굴이 밝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매번 다릅니다. 어떤 날은 걱정스러웠고, 또 어떤 날은 신기했습니다. 흐뭇한 표정이 되기도 했고, 암울한 표정이 될 적도 있지요. 그런가하면 귀여워 못살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저 혼자 웃곤 하지요. 더러는 울상을 지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밝은 표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는 기분에 따라 표정이 변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주로 나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얼굴로 나에게 와서도 내가 칙칙하거나 어두운 빛깔을 띠면 그녀도 덩달아 칙칙하고 어두워지거든요.

그녀에게는 나를 바라보는 나름의 기준이 있나봅니다. 단순히 나의 빛깔만 바라보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올 때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세세히 훑어봅니다. 내가 품지만 나를 받쳐주는 모래와 자갈을 보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풀잎을 보고, 간간이 날아와 먹이를 쪼는 백로와 오리 떼도 바라봅니다. 그녀는 그들을 통해 나의 몸 상태를 짐작합니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의 표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나는 그녀를 십 수년째 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새벽이나 초저녁에 주로 나를 찾아왔지요. 날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틈틈이 나에게로 왔으니까요. 꼭 한가할 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바쁘게 보일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나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종종걸음으로 와서는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 볼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우산을 접어 손에 든 것을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나봅니다.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내 갈 길을 갑니다.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낭떠러지 같은 계단을 만나네요. 솟구치는 몸을 다잡자마자 나를 가로막는 돌을 만났어요. 급히 휘돌아 나오며 숨을 몰아쉽니다. 잠시 평온한가했는데 쓰레기장 같은 곳이 불쑥 나타나네요. 공기 중에 떠돌던 온갖 불순물이 부유물로 둥둥 떠 있습니다. 아찔합니다.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만나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발 내딛는 순간 요동을 칩니다. 흰 거품을 요란하게 일으키며 평정을 찾으려 애를 써 봅니다. 발을 딛자마자 거대한 바위를 만나 한차례 튀어 오르기도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물보라 한번 일으키고 말지만 그 충격은 대단하네요. 현기증이 일지만 눈을 질끈 감습니다. 새롭게 태어나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첫발은 나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듯 나와 끊임없이 만나고 합쳐지는 수많은 물줄기가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물줄기를 만나 손을 잡고 점점 넓게 퍼져나갑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넓은 바다에 가 닿게 되지요.

사실 내가 이렇게 새롭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무수히 흔들리고 깎였습니다. 부딪고, 깨어지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아요. 모질게 재활훈련을 하고 건강을 되찾기까지, 다시 세상을 품어 안기까지 갈등은 또 얼마나 많았게요.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큰 기쁨입니다.

 

나는 작은 먼지를, 모래를, 돌멩이를 쓰다듬었지요. 물고기와 헤엄을 치고, 물가의 풀숲을 어루만졌지요. 그렇게 점점 퍼져나가 들판을 아우르고 거대한 산을 품었습니다. 살짝 말하지만 나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그녀도 끌어안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어느 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꼈지요.

나의 몸은 짙으면서도 엷은 빛깔입니다. 이제 막 떠오른 태양도 그런 내 안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나는 태양을 안고서야 맑은 물로 거듭날 것처럼 그를 품어 봅니다. 태양도 나와 한 몸을 이루었다는 듯 깊숙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네요. 그런 다음 물빛을 받아 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나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생명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흐를 수밖에 없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앉았던 자신을 되찾고 싶어서 굳이, 빗물정수장을 막 통과하는 나를 찾는 것인지도.

 

 

약력)  수필가 美山정경해

*경기 안성 출생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

        『까치발 딛고』2011

        『내 마음의 덧신』2016

*이메일 주소 : jeang1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