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나는 지금 숨을 곳이 필요해

 

세상에 드러내기에는 두려운 황금빛 나는 내 모습을 가리고

세속에 물들기에는 아까운 태초의 순결한 내 생각을 감추고

뒤꿈치 들고 숨죽인 채 살금살금 현실의 뒤안길로 숨어든다

 

가진 자의 절망과 가지지 못한 자의 분노가 뒤엉켜

거대한 해일의 무리되어 진군하는 숨 가쁜 함성에서 비켜나

성난 군중의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판잣집이 드리운 그늘로

마른 땅에 잦아드는 목마른 봄비처럼 기척 없이 스며들고 싶어

 

(궁지에 몰려 겁에 질린 생쥐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는지

생존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체념이 뒤섞인 애절함이라니

고양이의 거만에 찬 앞발에 숨은 발톱의 위용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세상은 너무 훤하고 밝아 숨을 곳이 없어

 

처마 끝에서부터 은밀한 안방까지 투명한 거울로 둘러싸인 거대한 감옥 같은

주인의 허락 없이 자동으로 열고 닫히는 스크린도어 같은 세상에서

나는 행인들의 발길에 바스라지는 마른 낙엽으로 조각조각 부서진다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니

 

오래도록 죽음을 생각한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죽음과

살아갈 시간만큼의 죽음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매달린

먼지 낀 무쇠 종

 

죽음을 생각하는 동안

종은 울린 적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한 술의 고독과 절망을

눈가에 주름진 나이로 버무린 중년에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말자

 

죽음, 그 순간에도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니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진한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다, 조금은 눈물겨운

 

쓸쓸한 안식 같은 죽음의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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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형복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