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2호...
   2019년 10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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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9398 2014-11-03
658 내 마음의 경전 외1편/허남기 file
편집자
1171 2018-07-01
내 마음의 경전 애당초 출발은 위대했다 오늘을 넘기면 달력 한 장 또 찢는다 지난 해 역시 내 몸속에 제대로 된 경전 하나 마음 비워 모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마다 거룩한 해맞이의 상투적인 인파에 굽이쳐 돌고 돌아 신의 뜻과 인간의 바램이 피라미드를 만들면 비로소 현실로 다가 올 듯 늘 긴장하는 각오는 새로우나 그저 쓸데없이 빈 가슴으로 또 한해를 넘긴다 마냥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이런 젠장 몸 따로 마음 따로 계절의 경계 붉게 물든 계절의 몸부림은 마지막 시월의 밤을 보내는 아름다운 이별일 것이다 겨울로 가는 파리한 길목 하얀 세상 계절의 변신 좁은 문을 관통한 삭풍이 색동 옷 무늬를 깔고 투명한 자국을 새긴다 빛 고운 그들이 가면 자작나무 회초리가 운다 알몸으로 문지방을 넘을 때 마다 나목의 목을 어루만지며 월색을 몰고 간다 계절의 저편에서 유혹의 손길이 뉘우침으로 몰캉한 그들을 달래고 있다 --------------------- 허남기:경북 영천 출생 2014<문장21>등단/<문학광장>신인상 한국문협 경북 지회 회원/영천문협 편집국장 격월간<문학광장>시분과 심사위원.편집위원  
657 종소리 외1편/김수화 file
편집자
1490 2018-07-01
종소리 텅 빈 하늘 가로질려 바람결에 숨어들면 화들짝 그려내는 새들의 푸른 운무 멀리서 그대 숨결이 안부인 듯 들려온다. 온몸을 부딪쳐도 전할 수 없는 사연 하나 벼르고 벼루어서 바람의 힘을 빌려 능소화 애끓는 사랑 하늘빛을 물들인다. 김천의 봄 겨울잠 깨어난 연화지 잔물결에 벚나무 제 몸 열어 꽃물 들인다 꽃 그림자 마주 안은 가멸찬 향기 우리들 가슴에 삶의 무늬로 스민다 직지천 왜가리 하늘을 가르고 김천역 소나무는 손님 반긴다 황악산 바람 길에 흐르는 기운 자두꽃 해맑은 웃음 김천이 환하다 <김수화 프로필> 2003년 자유문학 시 부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북여성문학회 회장역임, 김천문인협회 사무국장, 김천예술총연합회 감사, 백수문학제 운영위원, 논술 토론 교사. 제3회 경북여성문학상 수상, 시집 ‘햇살에 갇히다’  
656 안어울림소리 / 이양섭 file
편집자
1455 2018-06-01
안어울림소리 연기가 사라지며 향내를 퍼뜨리고 있다. 파르스레 피어오른 연기가 시간과 공간을 가르듯 하늘거리다 흩어진다. 염불소리는 천수경에서 회심곡으로 이어져 홀로 처연히 흐른다. 빈소에 셋, 접객실에 다섯, 괜히 사람 수를 세었다. 어머니 영정을 일별한다. 저 엷은 미소는 괜찮다는 걸까? 장례를 치르는 내내 되도록 아내와 부딪히지 않으려 한다. 잠시만 마주봐도 그냥 면상을 갈겨 버리고픈 마음을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재바르게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나마 내가 고마워해야할 어섯이다. 나는 집안일 앞에 늘 그렇듯 멀뚱거리며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 저녁이 되어도 빈소는 발길 끊어진 겨울 산처럼 황량하다. 어머니는 겨울을 기다려 온 눈처럼 때를 만나 깊은 산골의 암자로 들어가려는 것 같다. 막상 이렇게 되고 떠올려보니, 어머니가 가고 싶다던 그 암자는 이 세상에 있는 절이 아닐지도 모른다 싶다. 접수대 뒤에 여동생이 퉁퉁 부은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았고, 그 곁에 딸애가 입구를 쳐다보며 앉아있다. 문이 열리고 찬 기운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들어봐도 이쪽 빈소로 오는 사람은 없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할 때,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울음이 길었던 사람은 여동생과 딸애 둘뿐이었다.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술을 많이 먹었을 때처럼 끅끅거리기만 할뿐 곡소리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건성 눈물을 찍던 아내에 비해 서럽게 울어준 딸애에게 가당찮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딸애는 고3이었던 지난해에 학원은 고사하고 진학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었는데, 기어이 대학에 합격해 놓고 애비가 등록금을 만들지 못할까봐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대학에 들어가 꼬박 아르바이트를 했고, 내 생일에 지폐다발을 편지와 함께 몰래 넣어줘 나를 울렸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놈은 이 와중에도 어느 구석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멀쩡히 가만있을 수도 없고, 딱히 할 짓도 없다. 그렇게 자고 싶었던 잠도 오지 않는다. 코딱지를 후비다가, 손끝에 걸리는 코털을 신경질적으로 뽑았다. 더럽게 아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멍히 어머니 사진을 보다가 불쑥 울음 같은 웃음을 흘린다. 좀 전에 집어넣었던 전화기를 다시 꺼낸다. 지독히 울리지 않는 전화기. 냅다 던져버리고 싶다. 절실히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하고 싶은데, 상대를 떠올려 생각하면 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누군가 전화를 해주면 말 배우는 애처럼 떠듬거리며 울먹일 것 같은데, 아무도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갑작스레 상을 당하고 애써 여기저기 연락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단체나 모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야간업소 딴따라인 직업상 아는 이들에게도 때가 때인지라 연락하기엔 염치가 없다. 건너편 접객실에는 어머니가 다니던 경로당의 회장, 총무 할머니 두 분이 와있고, 아내가 두 여인과 마주앉아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여러 모임에 나가지만 시어머니 장례를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낮에 아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이 몰려와 예배와 찬송을 하려했을 때, 내가 길길이 큰소리로 말리자 동서 내외도 그 일행과 함께 가버렸다. 나는 대뜸 장례식장 측에 염불을 끊이지 않게 틀어달라고 했다. 음악을 좋아한다며 나를 따르던 아내는 이제 음악이 제일 징글징글해졌고, 언제부턴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운구 할 사람, 연락 됐어요?” 아내가 빈소로 건너와 똑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한다. 내가 행사에 불려갔을 때, 제 일만 잘하겠다고 딱딱거리는 진행요원 같다. “아, 새벽에 일 끝나면 애들 올 거라고 했잖아! 왜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퉁명스런 말투에 아내는 구시렁거리며 돌아선다. 사실 아내의 염려처럼 나는 애들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냥 베이스와 오르간을 믿고 있을 뿐이다.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어머니의 주검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사서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다. 유리된 이 공간의 바깥은, 이제 크리스마스이브 열기도 얼마큼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우리들도 일을 끝내고 한잔할 시간이다. 하필 크리스마스라니! 어머니의 시간은 정지되었을까? 어머니는 이제 연기와 냄새와 소리 따위로 이루어진 막의 저편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머니의 온갖 말투와 표정과 행동을 기억하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어느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제단 뒤로든 어디로든 뚫고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제단 왼편에 ‘미인비즈니스클럽 사장 변명구’라는 리본을 단 조화가 서있다. 양복상의를 허리 뒤로 젖히고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폼으로 침을 찍찍 갈기는, 대머리에 땅딸막한 똥개의 얼굴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흔든다. 똥개 변 사장은 내게 빚을 지고 있는데 그는 채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받아낼 재간이 없다. 두 번이나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처분했고, 결국 내 목숨 줄 같았던 사업체마저 팔아 넘겼다. 내 돈이 투자된 영업장을 처분해 다른 영업장을 인수하면서도 내 돈은 투자 실패로 날아갔다고 억지를 부렸다. 돈 벌면 갚겠다면서, 그때까지 밥그릇 걱정은 말라는 그놈과 나는 어정쩡하게 갑을관계가 되고 말았다. 혓바닥을 뽑고 기름 낀 배때기에 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잘라버릴 수도 없거니와 놈이 던져주는 일거리는 나를 따르는 식구들에게 당장의 밥줄이었다. “어머니! 제가 이 친구, 돈 벌게 해줄 겁니다. 저 없는 놈도 아니고, 믿어주세요! 이리 착한 친구가 잘 돼야죠, 제가 어머니를 일찍 잃어 외롭게 컸는데, 이참에 제 어머니가 되어주십시오!” 8년 전, 그의 제안에 어머니가 불안해한다고 하자, 49평이던 우리 아파트에 찾아와 똥개는 어머니 앞에 엎드려 그렇게 말했었다. 어머니는 표정 없이 시선을 피하며 잡힌 손을 빼려했다. 나중에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 지나고 결국 셋방으로 옮겼을 때, 어머니는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방관하던 아내는 원망이 깊어졌다. 가족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은 나의 욕심과 오판으로 어이없게 허물어졌다. 책임도 미안도 없는 똥개는 이미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개새끼라는 욕은 개에게 미안한 인간말짜새끼!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문다. 그 옆 조화에는 ‘성일엔터테인먼트 단장 성도화’라고 리본이 달려있다. 5년 전, ‘정성일 연예기획실’이던 악단사무실을 국악 하던 도화가 인수했는데, 성만 빼고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나를 각별히 따랐던 도화는 그때부터 야멸친 사업가로 변신하여 거꾸로 나를 부리고 있다. 10년을 함께 일군 팀은 흩어지고 우리의 터전은 내 이름과 함께 도화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딸애의 등록금 때문에 아내와 대판 싸우고,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끌다시피 결국 도화를 찾아갔다. 악기를 담보하겠다는 내게 도화의 조건은 엉뚱했다. 자기가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다하면서 생각 없이 하루를 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도화의 군말에 물든 볼모의 몸은 엉뚱하게도 강한 욕정이 일어났다. 양수리 강물이 바라보이는 러브호텔에서 붉은 와인을 마시며 발가벗고 뒹구는 동안,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다가 붉은 울음을 토하다가 캄캄해져 갔다. 낡아가는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도화는 도취되려 했고 나는 이율배반의 야릇한 비애에 젖었다. “오빠, 우리 그냥,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면 안 돼? 가끔 이렇게 만나면서……” “넌, 이게 사랑이니? 풋! 이건 마지못한 달램이거나 갈증해소일 뿐이야.” “아니지, 오빠가 내 사랑도, 내 맘도 몰라주고, 날 사랑 안 해서 그런 거지.” “난, 이미 여자한테 질리기도 했지만, 셋방살이 꼴에 사랑은 무슨……” “그니까, 내가 하잔 대로 하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그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무디고 뻔뻔하게 만들어야 해! 오늘처럼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우리 이벤트 회사 만들자! 오빤 음악하지 말고 영업하고 관리만 해. 내가 오빨 정말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럼 너, 내 속에까지 들어와서 사랑할 자신 있니? 사랑 그거, 결국 이기심을 가리는 탈이야. 남자의 가슴앓이, 그 날선 상처마저 안아줄 여자는 없어! 착각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세상에 오빠 마누라 같은 여자만 있는 줄 알아? 어찌 이리 여자의 진심을 모를까? 오빠가 그리 닫혀 있으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야.” “소통? 어떤 소통? 그래, 우리 일로 말해볼까? 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은 자길 위해서기도 하지만, 아래에 있는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거야. 들으라고 하는 거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열광을 하지. 자기가 못하는 연주를 해주니까. 그런데 봐봐, 청중이 음악이 좋다고 무대에 막 올라오면 되겠어? 설령 올라온들, 그 무대 위의 뮤지션들과 어떻게 어울리겠어? 당장 리듬과 조화가 깨지고, 내려가지 않으면 쫓겨나지. 그러니까 무대와 객석 사이엔 막이 있는 거야. 막이 열렸을 때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로 소통하는 거지. 또한 막은 서로의 세계를 넘보는 경계야. 안 그래? 닫혀있는 나의 막을 네가 진정으로 연다면 소통이 되겠지.” 군말과 생각이 되레 많았던 그런 하루가 있었다. 왜 알토를 두고 18살이나 많은 남자의 재취가 되었냐고 묻자, 서로가 가진 것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알토는 병사한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도화와 새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도화는 애초에 알토를 그럴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도화가 재력가와 결혼을 하자 외려 알토가 사무실에 나오기를 꺼렸다. ‘형, 온갖 구석이 다 불합리하고 불협화음이야……’ 알토는 다시 힘들어 했지만 도화는 종내 알토에 대해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시간이 사연들을 데리고 흘러갔다. 제단 오른쪽에 있는 조화에는 ‘기라성스탠드바 임직원 일동’이라고 붙어있다. 내가 악기를 들여놓고, 금빛 반짝이 무대의상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붙어있는, 변두리 중년층을 겨냥한 복고풍 스탠드바이다. 12개의 코너를 두고 정면에 무대와 춤출 공간을 배치했다. 그런 곳이라도 악단은 서로 들어가려 했다. 똥개의 소개가 있었지만 룸살롱 마담 출신의 사장은 나도 익히 아는 여자였다. 몇 년째 떠돌이 악사였던 나는 무엇보다 후배들과 마음 놓고 연습할 공간이 생겨 흥감했다. 멤버들과 자주 만나 연습하려는 욕심은 그룹사운드 때부터의 습관이지만 이제는 나이 때문에 느끼는 위기감이 컸다. 나날이 진화하는 기계음에 밀려나는 생음악은, 자칫 방심하면 달아날 애인이어서 자주 다독이고 안아줘야 하는 슬픈 사랑이었다. 가게는 순탄하지 않았다. 현수막을 걸고 알려진 연예인을 불러올 때는 썩 괜찮았지만, 고비용의 프로그램을 줄이자 대번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나는 인맥을 동원하여 싼 값의 밤무대 애들을 불러 온갖 이벤트와 쇼를 시도하며 단골손님을 늘이려 애를 썼다. 마담은 내게 고마워하며 희망을 가지자고 했지만 나는 당장 애들에게 약속한 개런티를 채워 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바깥일을 늘려야 했고 도화의 일이든 똥개의 일이든 가릴 수가 없었다. 술이 한잔 당기지만 참기로 한다. 문득, 난 이제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더 처진다. “명아! 가서 업이 찾아 와! 이놈이 상주가 되어가지고 어디서 뭐해?” 부러 대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며 졸고 있는 딸애에게 말한다. 좀 있으니 눈을 끔벅거리며 아들애가 들어와 넌지시 옆에 앉는다. 자정이 지나 한기를 느끼던 터라 애에게 덧입힐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 그냥 슬쩍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는다.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해지더니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오는데 행색들이 가당찮다. 어깨아래까지 장발은 대부분이고 빨간 가죽점퍼를 입은 놈, 찢어진 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놈, 선글라스를 목에 건 놈, 입술에 쇠고리가 달린 놈을 포함해 7명이 우르르 올라와 두 줄로 선다. 거기다 나름 심각한 그들의 표정 또한 가관이다. 어쨌건 적막하기만 하던 빈소에 아연 활기가 살아난다. 동생이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딸애는 아내를 부른다. 뒷줄에서 제각각 엉성한 자세로 절을 따라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이, 일류 선배님들 여기 계신다니까, 꼭 뵙고 싶다고 해서……” 드럼은 강남의 유명업소에서 일하며, 친구가 하는 음악학원 일도 도와주는 실력파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학원생들이 드럼이 일하는 업소에 모여 회식을 했고, 드럼이 가야한다니 졸라서 함께 온 것이었다. 조금 후에 오르간과 보컬이 함께 와서 어제처럼 어머니께 절을 올린다. 딸애가 음식을 차려놓은 접객실로 옮긴 애들은 빈소에서의 표정과는 딴판으로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떠든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 놈이 잔을 들며 얼결에 말했다가 주위 눈살에 고개를 팍 숙인다. 아내는 이쪽을 등지고 앉아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자기 동료에게 내 직업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 없으니 이 이상한 문상객들을 뭐라 설명할까. 그보다 얘들로 아침에 운구를 시킬 작정인지 기가 막혀하는 아내의 걱정이 뒷모습에 어려 있다. 밤을 새워주신다며 누웠던 경로당 할머니들도 일어나 애들을 힐끗거린다. 좁은 공간에 결코 섞일 수 없는 세 무리가 하나의 공통사로 자리하고 있다. 있으되 보이지 않는 막. 오르간의 어깨를 툭 치고 화장실로 간다. “연말행사 주문받은 일들, 애들 잘 맞춰졌냐?” “걱정 허덜 마소! 성님 이름에 금 가겐 안 할 텐게……. 참, 알토 성, 온다 했는디, 안 왔소?” “알토가 연락 됐냐? 강남 바닥, 오늘은 밤샘 영업할 텐데, 와 지겠냐……, 야, 올겐아, 똥개는 뭐라디? 온다는 말 없었냐?” “하따, 성님도 참. 아! 엄니헌티 죄 진 새끼가 여글 오것소? 아이고, 어째 우리 성님은 그 인간 같잖은 똥개한테만 쪽을 못 쓰까이?” “어떻게든 받아내야 될 거 아니냐? 울 엄마 피 같은 돈인데……” “성님, 처음 투자한 돈 받아낼 거라고, 우리 사무실 팔아 또 넣었자녀? 그라고 우찌 되었소?” “……, 세상엔 포기 못할 게 있다! 이걸 포기하면, 내가 그놈 죽일지도 몰라. 그럼 우린 어떻게 되겠냐?” 담배를 한 대씩 꼬나물고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또 눈물이 맺힌다. 화장실을 나오며 키가 작은 오르간이 팔을 높이 올려 키가 큰 퍼스트기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건반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손 위에 줄을 퉁기는 손이 얹어진다. 다시 한 번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베이스가 기라성의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서 헤벌쭉 웃으며 허리를 굽실했다. 이번에는 짧은 치마에 키가 큰 여자들이 많아, 다시 졸다가 눈을 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다 검은 양복을 입었다. 반품할 거라며 싸놓은 음식들을 풀고 아내까지도 분주하다. “좀 일찍 끝내고 오려는데, 글쎄, 손님들이 나가줘야 말이죠.” “아이구, 대목인데, 저 때문에 일찍 끝내셨네요, 사장님 못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와야죠. 어떡해요,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 참. 나중에라도 성 단장님 오실 거예요. 어쩌면 변 사장님 모시고 올지도 몰라요. 아까 통화했어요.” “아, 그랬어요? 고맙습니다. 자, 뭐 좀 드시죠.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어머니, 가시는 길이…… 그래요, 고마워요…….” 어머니 생각도 치밀었지만 도화가 내 마음을 알고 똥개를 끌고 오려 한다니, 고마워 눈물이 나려한다. 이제야 그나마 상갓집다워져서 서로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는다. 나도 덩달아 흔감하여 술을 받아먹고 권하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술 먹는 꼴을 흘겨보겠지만, 아내의 염려보다도 똥개가 오기 전에 내가 술에 취할 수는 없다. 똥개가 온다면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 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어머니 얘기 좀 해주세요. 많이 아프셨어요?” 주춤거리던 베이스가 느닷없이 말하자 좌중의 눈길이 나에게 쏠린다. 어떻게 말로 말할 수 있을까, 그 그림과 소리를. 그래, 똥개가 와서 어머니 앞에 엎드려 사죄를 하고, 이따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오를 때 도화가 살풀이 춤이라도 추어준다면, 나는 그만 어머니의 배를 놓아야 할 것이다. 내 가슴에 비끄러매어진 닻줄을 끊어주고 빈 배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 그날 아침 역시 밤새 일하고 맥없이 퇴근한 내게, 출근하는 아내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업이 깨워 밥 먹게 해요! 학원 늦지 않게. 노인네가 어째 저리 아침잠이 많아질까? 좀 일찍 주무시면 될 텐데, 그놈의 텔레비전, 끝날 때까지 보시니 원…….” 밉살스런 말본새에 가려 말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애를 깨워놓고 잠자리에 들면서 설핏 께름칙했다. 요 며칠 해 뜰 때에 맞춰 매일 하던 아침기도가 들리지 않았고, 아이를 깨우고 밥을 차려주는 모습이 전 같지 않았다. 양로원에 가고 싶다거나 꿈자리가 이상하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자는지 잠깐이라도 확인을 해보지 않았을까?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당신이 좀 챙기세요.’ 이렇게 말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내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본새에는 앙금이 있었다. 거기에 대꾸하자면 결국 내 아침잠만 망칠 테니 일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며칠 남지 않은 12월은 마지막 날까지 바빠야 했다. 나는 쉬어야 했고 잠을 자야했다. 평소대로 어머니는 점심밥을 차려놓고 나를 깨울 것이고, 마주앉아 밥을 먹고, 어머니는 경로당으로 갈 것이고, 나는 가게로 나가 악기를 싣고 호텔 연회장으로 갈 것이었다. 내 또래들의 송년회에서 어린사람 행세를 하며 노래반주를 열심히 할 것이었다. 개런티 위에 얹어주는 팁보다도 행사가 일찍 끝나주어 야간행사 한 건을 더 뛸 수 있길 바랄 터였다. 그러고 가게로 가 취객의 흥을 돋우며 새벽까지 오부리(즉흥반주)로 푼돈벌이라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아래턱이 뒤뜰과 닿아있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뒤뜰보다 낮은 침대에 누워 몸을 옹송그렸다. 나는 곧 잠으로 들어가는 막을 통과해 몸과 마음이 포근한 어둠에 잠겼다. 머리 위로 유리창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소리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아기가 되고 침대는 요람이 되어 일렁이며 현실을 떠나갔다. 너무 눈이 부셨다. 온통 반짝거리는 강물 위로 크고 작은 스팽글에 투사되고 어룽지는 무수한 빛살이 요동치고 있었다. 요람은 하얀 돛단배가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에는 완벽한 하모니로 어우러지는 소리들이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변화무쌍한 빛의 안개 속에서 연주되는 그 소리는 보이는 음악이었다. 그 위 남빛 하늘에 구름이 층층이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 파르스레한 너울을 쓴 여인이 오르고 있었다. 누구일까? 나는 그녀를 불러야 하는데 도무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득하던 여인이 너울을 벗고 나를 보려는 순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고 돛단배가 세차게 흔들리며 나아가지지 않았다. 놀라 흠칫하며 눈을 떴다. 나는 양손으로 침대모서리를 꽉 잡고 있었다. 찬란하지 않은 한낮의 햇살이 빗각으로 들어와 오래된 장롱과 얼룩진 벽지를 더듬고 있었다. 이 무엇일까? 꿈도 현실도 아닌 시공의 틈 거기, 드리운 막이 스르르 나른한 심신을 휘감거나 풀어주는 몽롱한 순간, 결코 머물 수 없는 그곳에서 그때에 보인 4차원의 그림, 보이는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적요에 잠긴 집안. 거실에 놓인 접이식 침대에는 아들이 빠져나간 이불이, 벌레가 벗어놓은 고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식탁은 애가 밥을 먹고 나간 그대로였다. 이어지는 이상한 느낌에 별안간 아침에 아내가 한 말이 겹쳐지자 섬쩍지근한 기운이 몸을 휘감으며 진저리가 쳐졌다. 경로당에 가지 않았으면 정좌를 하고 불경을 읽고 있을 어머니가 평소에 하던 일을 하지 않았다면 화가 많이 났다는 시위였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비어있는 딸애의 침대 아래 좁은 바닥, 언제나 그 자리에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불경, 안약, 혈압약봉지,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운 자세,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짐과 동시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웅웅웅웅…… 정수리로 들어오는 미세한 진동소리. 그리고 가늘고 희미한 낯선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알아 챌 수 없는 소리와 냄새였는데 나는 느꼈고, 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이 등줄기를 타고 뒤통수를 쳤다. 나는 엉거주춤 비틀거리며 엄마-? 불러보았다. 목소리는 천번만번 되울리며 내 귓전에서 맴돌았다. 엄마아아아~ 그 울림을 지우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방이 굉음과 함께 빙빙 돌아가고 머리가 터질 듯 윙윙거렸다. 틀니를 뺀 어머니의 입술은 안으로 말려들어 함몰되어 있었다. 입이 벌어진 동그란 구멍은 무저갱의 입구처럼 보였다. 저 속으로 무엇이 들어갔을까? 엄마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나는 싸울 듯 거세게 달려들었다. “안 돼! 아직 안 돼, 엄마! 일어나 봐, 얼른!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엄마, 엄마아!” 뺨을 비비고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입김을 불어넣고 가슴을 치고 흔들어보다가, 맥없이 쓰러져 어머니 곁에 누웠다. 손은 차가웠고 방바닥이 차진 않는데 이불 속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는 거야, 엄마? 소원 푸셨네, 맨날 자는 길에 가게 해달라고 빌어 쌓더니…… 난, 어쩌라고? 응, 엄마? 이제, 내 소원은 어떡해…….” 몸이 마구 떨려왔다. 눈물과 콧물이 마냥 흘러내려 어머니의 옷과 요를 적셨다. 어딘가로 전화를 해야 할 텐데,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점점 심하게 떨리던 내 몸도 자꾸 오그라들며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어머니의 목과 뺨을 오르내리다 사라졌다. 어머니의 몸은 오래 된 배였다. 세월의 강은 얼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얼음을 깨며 서쪽 강어귀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닻줄을 그러쥐고 있는 나를 외면한 채.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무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빨이 마구 덜덜거렸다. 아득한 시간이 지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학원에서 온 모양이었다. * 기라성 사장이 통화하던 휴대폰을 쭈뼛쭈뼛 내게 내민다. 제기랄! 도화가 아니었다. 똥개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는, 음악소리와 남녀가 뒤섞인 술좌석의 소음 때문일 것이다. - 아, 정 실장! 내가 꼭 가봐야 되는데 말이야. 지금 중요한 약속에 와있어서, 하, 이거 참, 어머님께 정말 미안하지만, 정 실장한테 좋은 일일 수 있으니 좀 이해해 주소. 아! 실은 내 친구가 이번에 카바레를 개업한다고 악단 문제로 만났는데, 내가 정 실장을 적극 밀고 있어요. 능글맞은 똥개의 말에 대번에 부아가 치미는데, 감도 좋은 전화기의 저편에서 ‘나, 여기 있단 말 하지 마, 오빠.’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예에, 변 사장님. 그 마음 압니다, 꽃도 보내주시고, 네네, 근데, 도화가 거기 같이 있어요?” - 누구? 아, 성도화! 성 단장이야 요새 우리 가게 자주 오지. 몰랐나? 성일에서 우리 가게 스페어 대기로 했거든. 아, 성 단장도 같이 얘기 잘하고 있으니, 계약되면 한 턱 낼 준비나 하소.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욕과 울분을 삼키며 잠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요, 잘되면 좋겠네요. 도화에게도 걱정 말고, 우리 애들 일이나 많이 만들라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전화기를 돌려주고, 나에게 쏟아지는 마뜩찮은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흘기던 눈길을 거둔 오르간과 베이스가 혀를 차며 술을 따랐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서서히 무너져 바닥에 꼬꾸라졌다. 발인제를 지내고 영구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술이 채 깨지 않아 넋 나간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늘이 잔뜩 내려와 사위는 온통 잿빛이었다. 오르간의 차를 앞세운 영구차는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도시를 벗어났다. 알토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비와 섞여오던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영구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물방울이 사선으로 흐트러지는 차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었다. - 형, 나 좀 취했어, 추워서 차안에서 혼자 막 마셨어. 미안해…… 어제, 나 혼자서라도 갔어야 했는데, 그 연놈, 데려가려다 일이 꼬여버렸네. 형이 내 몫까지, 어머니 잘 모셔줘요……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도 대답은 않고, 제 말만 잇는 알토는 점점 흐느낀다. - 형, 우리 만난 지 30년이야. 그 세월 다 어디로 갔지? 난 왜 나팔을 불었을까? 고등학교 때 형이 정해준 거였지? 그때부터 형 말이라면 다 들었는데……, 나 섭섭한 적은 있었지만, 형 배신한 적 없어. 알죠? 형, 우리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아니, 뭘, 잘못한거야? 음악다운 음악 하자며? 형이 그랬잖아! 그러면 음악만 했어야지……. 차창에 눈송이가 달려들어 녹아내린다. 흐린 창밖에 알토의 우울한 얼굴이 다가와 있다. 산과 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어디 있는 거니. - 나, 강가에서 눈 내리는 거 보고 있어…… 형, 화음이 계속 안 맞으면, 누가 삑사리를 내서라도 일단 멈춰야 하잖아? 그런데 다 눈치만 보면? 가만히 있는 게 비겁한 건데, 누군들 비겁하고 싶지 않겠어? 응? 아냐, 그냥, 우리 연습할 때 생각나서…… 옛날에 어머니가 팔다 남은 떡 싸주시면 뒷산에 올라가 연습했잖아, 그때가 생각나네! 좀 있으면 어머니…… 눈길 따라 하늘로 오르시겠네. 형,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올겐도 드럼도 베이스도……, 형, 괴로움이 없으면 치열하게 살지 못해, 한도 품고, 그냥 힘들게 잘 살아……, 에이 씨발! 전화가 끊어졌을 때, 차창 밖 저만치 수묵화인양 눈 내리는 언덕 위에 화장터가 보인다. 왠지 낯익은 풍경에 차에서 내린 나는 한동안 주변을 휘둘러본다. 어머니의 관이 화구에 들어갈 때마저 나는 끝내 시원한 울음을 토해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이름이 빨간 빛으로 점멸하고 있는 대기실 의자에 나의 살붙이들이 지친 몸을 서로 기대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지나가면 잊힐 시간의 그림이 애틋하다. 그날 아침의 그림도 소리도 어머니가 보여준 것일까.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하얗게 하늘거리는 동안, 함박눈 송이 송이가 저마다의 진혼으로 살풀이춤을 추는 동안, 나는 地, 水, 火, 風, 네 개째 담배를 태운다. 눈은 허공에서 나부끼다 유유히 산야를 덮어간다. 겨울나무 빈가지에 백화가 피어나고 있다. 바람이 별로 없고 그다지 춥지도 않다. 깊은 산속 암자를 찾아 가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로 오르는 연기에서 향기가 날까 고개를 드니, 눈은 내 얼굴을 씻어주려는 듯 내려앉는다. 이대로 눈 속에 묻히고 싶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고 싶다. 눈을 감자 얼굴에서 녹은 눈이 물이 되어 눈가로 흘러내린다. 알토의 얼굴이 빗물 흐르는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이다. 퍼뜩 똥개와 도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제야 알토의 말이 섬쩍지근해진다. 설마, 사고를 칠까? 막아야 하는데……, 그냥 비겁해지기로 한다. 무심한 표정의 사내는 어머니의 유골을 모아 기계에 부었고 어머니는 삽시간에 눈보다 짙은 색의 가루가 된다. 아직 내 어머니인 상자를 안고 오르간의 차에 탄다. 조수석에는 아들이 할머니의 영정을 안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유골을 오래 납골당에 안치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깊은 산속의 암자를 찾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머니를 완전히 놓아드릴 심산이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여전히 셋방에 있어야 한다. 오르간은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어투로 보아 뭔 일이 터진 것 같지만 나는 짐짓 창밖으로 눈을 둔다. 눈꽃을 피운 나무들과 희끄무레한 들녘이 뒤로 휙휙 지나간다. 오르간이 백미러로 나를 살피며 말을 하려다 무르춤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호들갑스레 입을 연다. “하아, 참, 이럴 땐 뭐라해야 쓰까요, 성님. 똥개하고 도화가 많이 다쳤능갑소. 시방 응급실이라는디…… 아따! 차말로 천벌이 따로 없당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미러로 오르간을 쏘아보며 다음 말을 독촉한다. “참 요상시럽네요이, 도화 고것이 어디 붙어 묵을 넘이 없어서 똥개허고 그딴 델 갔으까이. 아, 쩌거 양수리 뭔 호텔 앞에서 둘이 뺑소니차에 치였다는디요……, 근디, 기라성 사장이, 알토 성님 여그 왔냐고 자꾸 물어쌌네요.” 대번에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돌리니, 안개구름 자욱한 저편 허공에 납골당 건물이 뿌옇게 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오르간에게 실없이 묻는다. “야, 올겐아. 너 혹시, 어디 깊은 산 속에 있는 암자 아는 데 없냐?” 시동을 끈 오르간이 뭔 엉뚱한 소리냐는 듯 뒤돌아본다. 눈은 안개비가 되어 흩날린다.  
655 조용한 펀치/노정희 file
편집자
1388 2018-06-01
조용한 펀치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도 부정적 측면이 아니겠는가. 긍정을 바라보면 부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마는, 나는 왜 요즘 들어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엣가시로 보일까. 남편을 이해하고, 혹여 실수를 하더라도 인정해 주는 것이 참된 배려일 텐데. 나의 좁고, 옹졸하고, 해진 마음이 밉다. 식구들이 다 모였다. 독립해서 나간 큰아이는 가뭄에 콩 나듯 가끔 집에 들른다. 작은아이도 알바 시간을 조정했다고 한다. 남편이 퇴근하자 모처럼 식구들이 둘러앉아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였다. 내 딴에는 신경 써서 상을 차렸건만 덩치 큰 아이들에게는 이내 허기가 밀려왔나보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자 한 판이 배달되어 왔다. 먹는 것으로 정겨운 시간을 더 연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 ₊1 보다는 딱, 1 이 더 맛있습니다. 공짜는 아무래도 성의가 부족하다니까요. 치즈분말도 뿌리고 핫소스도 기호에 따라 조절해서 드십시오.” 큰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장고에서 존재를 잊고 있던 캔맥주가 화려한 복귀를 했다. “건배!” 그러나 우리 가족은 마시는 것에서는 일치를 보지 못한다. 큰아이와 나는 맥주 한 잔 정도는 입에 짝짝 붙도록 마시지만 작은아이는 한 모금 겨우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고정시킨다. 그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다. 잔을 들었다 내렸다, 소위 지게차놀이만 하다가 아까운 술만 버린다. 식구들이 다 알고 있는 사정이니 분위기 못 맞추는 ‘분’도 감싸 안으며 그동안의 경계를 허물어갔다. 베이컨과 새우를 듬뿍 넣은 피자 도우, 쫄깃한 식감에 행복했고 유리잔에 넘치는 하얀 포말의 부드러움에 꽉꽉 조였던 마음의 나사까지 풀었다. 사드 배치도 잊자. 청년 취업문제도 접어두자. 나이 꽉 찬 딸아이들의 결혼 얘기도 묻어두자. 블랙리스트를 굳이 들출 필요는 없으니까. 열세 살의 멍멍이 아지와 네 살의 야옹이 랑구의 재롱에 웃음꽃 만발인데. “뿌우우웅 ~!” 일순간 모두 당황했다. 갑자기 침투한 이 어색한 소음이라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화사한 분위기를 깨트린 주범을 어떡한다? 나의 눈초리는 범인 색출 모드로 바뀌었다. 분명 표정은 경직되고 눈빛은 날카로웠을 것이다. 그 순간, 큰아이가 아주 차분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유미야, 이 상황에서 방귀를 그렇게 크게 뀌면 어떡하니?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제가 동생을 잘 이끌어주지 못한 탓이 큽니다. 앞으로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주의 주겠습니다.” 제 언니의 훈시에 당황한 빛이 역력하던 작은아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공손하게 말을 받는다. “미안합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조심성이 없었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일그러졌던 나의 표정은 두 아이의 대화에 쿡, 웃음이 나왔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딸들아, 엄마가 미안하구나. 내가 너희들에게 밥상머리 예절을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 크니까 너희들은 자책하지 말거라. 생리적인 현상이야 어찌하겠느냐. 다만 음식 앞에서는 예를 지키는 게 문화시민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네 식구 분량의, 각자 두 조각씩 할당된 피자 여덟 조각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한 분’이 마지막째 피자를 작은아이한테 슬며시 넘겨주는 게 아닌가. 나는 배가 아팠다. 이건 헛배가 불러서 아픈 게 아니었다. 혼자 웃음을 삭히느라 배를 움켜쥔 통증이었다. 주방으로 가는 척 일어서서 뒷베란다로 나가 통쾌하게 웃어 제쳤다. 그동안 밥상머리에서 염치도 좋았지, 폭주하는 오토바이 소리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던 ‘대주’때문에 어디 한두 번 입씨름하였던가. 나중에 어려운 자리에 가서 실수를 하면 어쩌려느냐고 다그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분명 ‘대주’의 폭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눈치 챈 딸아이들은 극적인 연기로 저희 아빠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던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동안 우물거렸던 말을 짧지만 간결하게 죄다 게워내었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거울처럼 비쳐주는 타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편은 어떤 방어도 변명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방적인 삼모녀의 대화에 외톨이가 되었다, 아니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남편한테 쪼금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묵은 꽁지가 빠지고 새 꽁지깃이 새로 돋아 비상하는 듯한 이 기분을 누가 알랴. 그동안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언성을 높이고, 하 답답해서 입을 다물기도 했다. 삐치고 외면한 날이 어디 한두 번인가. 집안에서 무소불위 하는 대주에게 정면으로 맞서보았자 득이 없다. 노승발검怒蠅拔劍에 이란격석以卵擊石 일 터.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머리로 하는 거지. 봐라, 총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멋지게 한방 먹였지 않은가. 밤공기가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다니, 모처럼 속이 확 뚫린다. 2016. 9 노정희 계간《문장》2007년 등단 수필집 『빨간수필』『어글이』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계간《문장》편집장, 수필교실 강사, 푸드칼럼리스트  
654 석물 부근(石物 附近) 외1편/박찬선 file
편집자
1372 2018-06-01
석물 부근(石物 附近) 어두워서야 밝은 모두가 움직이는 돌이네. 오랜 세월 동안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닐세. 불덩이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주저앉기도 하고 극지의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었다가 깊이 잠들기도 하네. 무엇이 되고 싶었네. 나무나 물고기나 별이 되고 싶기도 하고 죽어서도 못 잊는 사랑의 얼굴이 되고 싶었네. 뜨거운 여름이 식는 밤에는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네. 망가지고 깨지고 귀가 떨어지고 몸체를 잃은 것들이 자기가 있을 자리를 찾느라 뒤뚱거리며 배회하고 있네. 사라진 어느 절터 적막한 공간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땅 속 깊숙이 묻힌 옛 고을의 금당을 기웃거리기도 하네. 나래를 잃은 새는 밤하늘의 별자리만 헤아리고 머리 없는 좌상은 흥건히 염불에 젖어 번뇌를 삭이고 있네. 떨어져 나온 서러운 파편 어디엔가 있을 짝을 그리워하며 굳어지고 있네. 밤이 깊을수록 새소리는 가깝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하는 그리움 아린 이야기가 별떨기로 쏟아지는 여름밤의 석물부근 다락방 깊은 바다에는 심해어가 산다. 수산시장의 어물좌판이나 수족관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고기. 그는 어둠속에서 더욱 빛이 났다. 세(世)와 대(代)의 헤아림과 촌수를 넘어서 대문중의 어른 마냥 예우를 받았다. 천문의 괘를 보면서 소요하며 때를 기다렸다. 온돌이 달아올라 불붙은 모포를 끌고 뛰는 코 큰 군인의 여름이며, 부상당한 어린 병사의 신음소리며, 불 꺼진 등대로 예측 불허의 여름이 길었다. 바다에는 먹다가 말라붙은 깡통과 입 벌린 군화 짝과 영문자가 새겨진 푸른 군복이 떠다녔다. 돌담구멍으로 본 흑인병사의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름푸시 알 즈음 심해어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요동치고 밝을수록 어두웠다. 석고처럼 굳어져서 수심 깊은 곳에 수장水葬되었다. 그물 없는 구름 속에서 동요가 흘러나왔다. 이제 심해어는 하늘에 산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시학』추천. 시집 『돌담쌓기』 『상주』 『우리도 사람입니다.』외 sunk631@daum.net  
653 둥근 만남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1234 2018-06-01
둥근 만남 -널문리 주막마을에서 굳게 닫힌 빗장문이, 마악 열리는 순간이다 한 발 한 발 내닫는 발자국의 보폭만큼 서로의 마음 속 앙금도 지워져간다 65년간 봉인된 금기의 역사, 날선 이데올로기는 피의 이끌림 앞에 속절없이 녹고 있다 반도를 가르던 무서운 광풍과 살육의 좌표는 DMZ로 기록되어 오늘을 기다렸다 만나야 할 이유와 간절함은 애타는 마음으로 당위처럼 찾아왔다 한때는 스스럼없이 남북으로 오가던 나그네들이 한 잔의 술잔으로 여독을 풀던 이곳, 서로 명명된 다른 주소들 앞에 ‘마침내’는 이제 고유어로 자리잡아야한다 맞잡은 두 손의 손금사이로, 아슬하게 버텨온 유전자의 뜨거움이 북받치고 있다 초대받지 못한 이 땅의 무수한 영혼들이 둥글게 모여앉아 기억해야 할 이곳, 2018년 4월 27일, 이날은 바로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고 담장을 허물어야 할 첫날이다 * 널문리 주막마을은 ‘판문점’의 옛 이름임. 행복을 시도하다 -목욕탕에서 고향에 돌아와 누운 날은 이른 아침이었다 인적이 뜸한 돌난간에 모로 누워 망막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드는 산이 뒷배경으로 추억되었다 자궁 속의 온도와 똑같은 물이 벌거벗은 몸의 원형질을 되살려 놓은 동안, 벌써 강산이 두 번 바뀐 시간들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서린 유리창에 내려앉은 정물들 불혹不惑의 꿈속에서 몇 번의 변형으로 나타났지만, 사라진 골목, 번듯한 양옥집과 넓어진 아스팔트가 꿈보다도 더 낯설게 다가왔지만, 학이 춤추는 봉우리가 털어낸 초로草露는 여전히 개울을 이뤄 낡은 바다로 향하고 첫사랑 계집애를 두고 다퉜던 소나무엔 아직 동무의 그림자가 깊다 훌쩍 커버린 마음에 박힌 옹이를 다시 찾을 단내 나는 여유는, 이미 주차장에 정박한 자가용이 대신하고 있다 다음에 고향을 또 슬쩍 만지작할 날도 이른 아침일 것이다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3년 계간《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문학청춘》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과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가 있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며,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메일 kjhchds@hanmail.net  
652 사람이 되어갔다 외1편/김재순 file
편집자
1308 2018-06-01
사람이 되어갔다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소셜 네트워크 광장마다 노란 리본꽃이 만발했다 다가가지 못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세월호를 그만 우려먹으라는 남자와 그에 대항하여 몸을 떨며 덤벼드는 내 페친이 있었다 남자는 누구의 아비이고 페친은 아비가 된 적이 없는 떠꺼머리다 그날 바짝 마른 안구 때문에 안과 대기실 TV로 봤다 수백 명의 아이를 수장시키고도 물결에 편히 기댄 세월호 아이구 소리를 냈을 뿐 마른 눈물샘은 아이들 인신공양에도 물기 한 방울 내주지 않았고 유명 영화의 한 장면처럼 봤다 다음 날 일터에서 검은 끈으로 검은 리본을 만들다가 다시 노란 끈으로 노란 리본을 접어 일터 사람들에게 선물인 듯 나눠주고 장신구처럼 내 가슴에도 노란리본 하나 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시를 썼는데 무얼 썼던가 세월호는 아득한 이야기처럼 흘려보냈고 눈물샘을 막은 돌덩이도 여전했다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세월호 때문에 악을 쓰며 싸우는 페친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밥을 먹었다, 순간 솟구치는 맑은 물줄기 4년이나 파 내려가던 암반이 트였다 내 친구의 아이 내 조카 내 새끼 으으으 넘어가지 않는 밥을 물고 한참을 이마를 식탁에 처박고 으으으, 나는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갔다 연변에서 오신 할머니 고드름이 주렴을 내린 소한의 아침 자동차 바퀴가 눈 속에 오솔길을 냈다 저 끝 집의 할머니 유모차에 종이박스 몇 장 싣고 꺾인 몸도 반은 싣고 어긋지는 한 발을 끌며 오솔길을 간다 중국에서 왔다는 할머니 우리말이 유창하니 조선족이지 붉은 댕기 휘날리며 아비 등에 업혀서 이 땅을 떠나던 때도 이런 날이었을까 젖과 꿀이 흐르는 데를 찾아서 간 그곳 그곳은 어땠나요.소설처럼* 귀틀집에 우짖으며 달려드는 눈보라를 구멍 난 흙투성이 삼베 바지저고리로 막아내고 땅 주인이 빚을 갚으라고 머리채를 잡던가요 딸을 빼앗기는 사람도 있었나요 그런 날은 겨죽을 먹고 살던 이 땅이 그리웠나요 죽기 전에 꼭 오고 싶었을 조국이라는 이곳 이제는 경제대국이라는데 이 조국의 겨울은 왜 아직 이리 춥고 아득한가 영하 십도가 넘는 빙판길을 폐지 몇 장 실은 유모차에 의지해 미끄러질 듯 미끄러질 듯 혹한의 아침 눈길을 가는 할머니 *최서해의 홍염 김재순 : 경북 상주출생.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전자우편: nok9105@hanmail.net  
651 은둔 외1편/채형복 file
편집자
1276 2018-06-01
은둔 나는 지금 숨을 곳이 필요해 세상에 드러내기에는 두려운 황금빛 나는 내 모습을 가리고 세속에 물들기에는 아까운 태초의 순결한 내 생각을 감추고 뒤꿈치 들고 숨죽인 채 살금살금 현실의 뒤안길로 숨어든다 가진 자의 절망과 가지지 못한 자의 분노가 뒤엉켜 거대한 해일의 무리되어 진군하는 숨 가쁜 함성에서 비켜나 성난 군중의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판잣집이 드리운 그늘로 마른 땅에 잦아드는 목마른 봄비처럼 기척 없이 스며들고 싶어 (궁지에 몰려 겁에 질린 생쥐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는지 생존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체념이 뒤섞인 애절함이라니 고양이의 거만에 찬 앞발에 숨은 발톱의 위용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세상은 너무 훤하고 밝아 숨을 곳이 없어 처마 끝에서부터 은밀한 안방까지 투명한 거울로 둘러싸인 거대한 감옥 같은 주인의 허락 없이 자동으로 열고 닫히는 스크린도어 같은 세상에서 나는 행인들의 발길에 바스라지는 마른 낙엽으로 조각조각 부서진다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니 오래도록 죽음을 생각한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죽음과 살아갈 시간만큼의 죽음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매달린 먼지 낀 무쇠 종 죽음을 생각하는 동안 종은 울린 적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한 술의 고독과 절망을 눈가에 주름진 나이로 버무린 중년에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말자 죽음, 그 순간에도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니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진한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다, 조금은 눈물겨운 쓸쓸한 안식 같은 죽음의 삶이여 ************************** 채형복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  
650 오래된 의자 외1편/이미령 file
편집자
1208 2018-06-01
오래된 의자 상주풍물시장 좁은 골목길에 노인 몇 분 모여 이바구를 하신다 유모차를 앞세운 공검댁, 지팡이에 몸을 기댄 용이 할매, 폐지 줍다 쉬러 온 원골 아지매 모두 팔십 평생 걸어온 길이 휘청하다 왕년엔 나도 한가락 했지 꼭두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부지런 떨어 돈도 벌 만큼 벌어봤고 내가 쫙 빼입고 나서면 이 시장통이 다 환하다 캤다 자네들도 알지? 펑퍼짐히 앉아있던 이안댁 한마디하자 이제는 가야 한다며 바람도 끄덕끄덕 몸 뒤틀어지고 닳고 으스러지도록 안간힘을 다하여 받쳐주고 들어올린 일가(一家)의 안락 종아리 꺾여 빈병에 꽂힌 건어물집 진달래가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큰아버지 청리집 떠나 요양병원에 드신 치매걸린 아흔의 큰아버지 갓 모내기 끝낸 들길 끝 외딴 섬 조가비로 누워 계셨다 작은아버지 내외분 형님 손 애틋이 잡고 건너온 세월 울먹울먹 펴고 계시는데 큰아버지 딴청피우시며 동문서답이시다 그 모자 좋아보이는데 나 도가 동생모자 뺏아 쓰신 큰아버지 얼굴에 고향집 복사꽃 활활 피어난다 소싯적 소설 쓰신다고 논판 돈 안고 서울 가셨다가 삼년만에 빈손으로 되돌아오시고 포대쌀 몇 번씩이나 스리슬쩍 팔아넘기고 동생들에게 뒤집어 씌우셨다는 한량 속은 칠남매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푸석푸석 빈 껍데기로 남아 숨찬 이승 조금씩 발끝으로 밀어내는 중이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2014 시집 <문>으로 등단. -메일 : ryeong1233@hanmail.net  
649 산소발전기 외1편/권숙월 file
편집자
1310 2018-06-01
산소발전기 전국을 괴롭히는 미세먼지 이제 그만, 넓지 않은 거실에 산소발전기를 설치했다 “외출할 땐 마스크 잊지 마셔요” 직장에 다니는 세 아이가 힘 합친 어버이날 선물이다 “공기청정기는 뭐 하러 사”말끝 흐리는 아내 눈이 밖을 향했다 집 주변 소나무 대나무가 진을 치고 있는데 왜 샀느냐는 말이겠지 마당가 감나무 배롱나무도 산소발전을 위해 몸 바치고 있는데 왜 샀느냐는 뜻이겠지 그믐달 새벽하늘에 짧디 짧은 시 한 편 써 놓았다 첫 줄을 쓰고는 더 이상 시어가 떠오르지 않아 단 한 줄로 끝맺은 시, 밤새워 썼다 지웠다 반복한 흔적이 역력하다 좋은 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를 써본 사람은 알지 시상(詩想)이 잡혀도 쉬이 시로 녹아들지 않는다는 것 알지 잠 덜 자고 일찍 일어난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좋은 시, 하늘 원고지에 쓴 한 줄 시가 이리 깊게 읽힌다 자식이 쓴 시도 읽지 않고 떠난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로 읽힌다 권숙월 / 김천시 감문면에서 출생. 1979년 『시문학』통해 문단 등단.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 등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김천문화원과 백수문학관에서 시 창작 강의. 김천신문 편집국장. 시집 『하늘 입』『가둔 말』『민들레 방점』 등 13권 발간. 시문학상, 경상북도문화상, 경북예술상, 김천시문화상 등 수상.  
648 허공에서 외1편/김설희 file
편집자
1272 2018-06-01
허공에서 탯줄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잎 하나가 끊어진 거미줄 한 올을 잡고 달랑거린다 공중이다 사방이 바람이다 어느 틈 기척만으로도 움츠러지는 바싹 오그린 몸이 매달려 있긴 땅이 멀다 하늘도 구름도 아득히 멀다 삶 한 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이 흔들리는 허공 저 허공을 할퀴는 것이 내 놓지 못한 목숨일까 가느다란 숨을 죄는 바람일까 언제 녹아내릴지 모르는 한 생이 바람의 특성 날개를 가진 것들은 바람이 가득 찬 것들이야 팽팽한 것들의 껍데기는 얄팍해 터지기 전 양을 줄이려면 날개를 저어야해 날갯짓은 부풀어 오른 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바람이 날개 등을 타고 훠이훠이 길을 나서는데 길에는 아롱아롱 빛나는 것들이 많아 유흥시설처럼 꽃들이 열려있어 어딜 가도 오락 같은 시간이야 날개를 저을수록 탱글탱글한 바람이 수그러드는 것 같아도 사실은 새 바람이 자꾸자꾸 생성되고 있어 멀리 날아가려는 속성이 더 키를 세웠는지 하늘 높이 허공을 젖더니 느닷없이 풀들이 살아있는 땅 쪽으로 내려오는 거야 바람의 본능은 방향을 바꾸는 일이야 김설희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산이 건너오다』.  
647 지울 수 없는 정 외1편/박규해 file
편집자
1097 2018-06-01
지울 수 없는 정 어린 시절 가위바위보 하며 쌓은 정 오늘도 그리워 그 기억 속을 더듬어 본다 사람들은 추억 속을 먹고 산다고들 하지만 삶속에서 늙어가면서 그래도 그 시절이 참 좋았지 하며 추억을 떠 올려 보기도 한다 세월 따라 강물도 소리 없이 흐르고 사람도 자기 길을 가면서 낙엽은 떨어지면 흙이 되고 그러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오십 여년 만에 만난 친구야 어찌 그리 무정하였단 말인가 이런 대화 속에서도 지난 날의 추억을 찾으며 웃음 웃고 잠시 잠깐 행복 했었지 그러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헤어지면 또 만나리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지만 나이 칠십을 넘어서니 예측 못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며 미래에 한 번 웃어 본다 우리 이제 남은 인생 자주 만나 회포를 풀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세 꽃밭에서 오늘은 무슨 꽃이 피었나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작은 민들레가 웃으며 인사하네요. 나를 반겨주는 민들레가 꽃밭에 없었는데 언제 와서 뿌리박고 있는지 꽃을 피우고 반기니 그냥 둘 수밖에 없네요. 그 옆에는 꽃 잔디가 질투라도 하듯 웃고 겸연쩍게 보이기에 손으로 만져주니 웃고 있지요 우리들은 언제나 꽃을 보면 마음이 기쁘고 웃음이 나지요 마음도 편안 해 지네요. 박 규 해 프로필 ㅇ 아호 : 취송(翠松) ㅇ 고향 : 경북 상주 ㅇ 현 거주지 인천 ㅇ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 ㅇ 함창중고등학교 근무 정년퇴임(2002년) ㅇ 62년도 김용호 시인님의 추천 됨(4.19 3주년 기념 시) ㅇ 사랑․ 소설계사 기자 근무 ㅇ 현대시조 “바램”으로 천료(97) ㅇ 97 ~새 시대시조(계간) 출품 외 9곳 문예지 출품 ㅇ 시조집 : 희망의 횃불. 찔레꽃이 피면. 풋풋한 삶을 살자. 삶의 자락에서 ㅇ 녹조근정 훈장 외 각종 표창장 15 ㅇ 수상 : 시와 수상문학 특별상(2010) ㅇ 현대시조 이달의 작가상(97년도) ㅇ 한울문학 이달의 작가상(2000년 5월호) ㅇ 동인지: 시인파라다이스 외 55권 외 ㅇ 현재 : 한국 문인 협회 경북 지회 회원. 현대시조 인단 회원. 한울문학 회원. 파라문예회원. 시와 수상문학. 국보문학 회원. 한비문학 회원. 시와 늪 문학 회원. 시와 글 사랑 회원. 지필문학 회원. 문학광장 회원. 스토리문학 회원. 한국미소 문학 회원  
646 겨울, 마당 외1편/남효선 file
편집자
1553 2018-04-30
겨울, 마당 열세살 난 백구가 언 새벽 눈을 감은 날 이백년 된 감나무는 말벌집을 매달고 홍시를 마구 내 준다 직박구리떼 새벽부터 성찬이다 백구 뛰놀던 마당에 분주하게 나들던 참새떼 멧비둘기떼 주인 잃은 밥통 얼씬 않는다 눈부라리며 마당을 지키던 백구 마당을 빙빙 돌던 날 한사코 밥통을 넘보던 멧비둘기떼 참새떼 좀체 얼씬 않는다 사흘을 곡기를 마다하고 선한 눈빛으로 집 주인을 이슥토록 마당 한 켠 웅크리고 앉아 그윽하게 눈 맞추던 백구 기어코 이튿날 새벽 언 날 눈을 감던 날 멧비둘기 참새떼 배롱나무 가지에 앉아 좀체 자릴 뜨지 않고 웅성거린다 백구는 제 주인따라 나서던 징게골 뒷밭에 묻혔다 아침나절과 해거름녘 계란노른자만큼 노오란 햇살이 모이는 곳이다 백구 묻힌 지 열흘 숱한 날아다니던 것들이 틈만 나면 성찬을 즐기던 밥통, 백구 눈 감던 날 그대로 제 자리 지키고 있다 주인 없는 밥통 곁 얼씬도 없이 배롱나무 가지에 올라 한사코 웅성거린다. 죽변항 나이롱 목도리로 얼굴을 싸맨 몸빼 아낙이 리어카를 끌고 눈발을 간다 수북수북 쌓이는 포구 물양장에 어지런 리어카 바퀴 자국 뫼비우스띠처럼 뱀처럼 엉킨다 바다에 떨어지는 눈발은 아리다 금세 물방울로 번진다 괭이갈매기 한 마리 잽싸게 눈발을 쫀다 눈만 겨우 내민 몸빼 아낙이 남긴 자욱 바닷바람에 잘 마른 쥐치 냄새가 난다 눈발을 받은 포구는 죽변항 선술집 골목을 흐릿하게 비취는 가로등처럼 발갛게 몸을 뒤챈다 괭이갈매기가 쪼은 눈발이 다시 바다로 떨어진다 쿨럭쿨럭 일흔 해를 몸에 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 해소 어린 홍합처럼 갯바위를 꽉 잡고 있다 포구 뒷골목 웅크린 쪽문 너머 안방은 따습다 몸빼 아낙 끌던 리어카 눈발에 묻힌다 몸빼 아낙 쪽문 너머 안방 캐시미론 빛바랜 담요 속으로 눕는다 구들은 따습다 경북 울진 생. 동국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했다. 1989년『문학사상』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둘게삼』『꽈리를 불다』를 상재하고 사화집 『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인다』등 다수를 펴냈다. 민속지 공저로 『도리께질 끝나면 점심은 없다』『남자는 그물치고 여자는 모을 심고』『온정면 사람들의 삶과 민속』『북면사람들의 삶과 민속』 『울진 민속총서 Ⅰ.Ⅱ.Ⅲ』외 다수가 있다. 경북도.울진군『울진의 문화재』민속문화 편을 공동 집필하고 울진군.울진문화원『울진군지』민속 편을 집필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울진 편을 집필하고 한국해양문화재단, 울진군 『해양문화지도』울진 편을 공동 집필했다. 지역문화네트워크 이사, 한국작가회의와 대구경북작가회의 이사, 울진군축제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시아뉴스통신 기자로 일하고 있다.  
645 슬픔의 표정 외1편/남태식 file
편집자
1366 2018-04-30
슬픔의 표정 늦은 아침에서야 사내는 옆지기 한하늘이 밤새 안녕을 고했음을 알았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사내는 어떤 슬픔의 표정도 그릴 수가 없었다. 희번덕이는 뱀들은 사내를 향해 혀와 손을 널름거렸지만 장례가 끝날 때까지 잊은 표정은 살아오지 않았다. 두고두고 상처는 덧났다. 슬픔의 표정을 앗겼던 사내는 더 긴 밤 자주 고요의 늪에 곤두박였다. 어이가 없구나, 시간이여! 아무에게도 사내는 그 상처를 들키지 않았다. 새하얀 것들 출근길, 터널을 벗어나자 먼 곳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청명인데, 눈이라니 저 눈은 청명 이전에도 내리고 있었지. 바람이 불고, 창문으로 돌진하며 시야를 가리는 것은 먼지다. 눈 같구나. 길이 두꺼워진다. 흐릿하구나. 봄, 가을은 사라졌다. 주기도 없는 남은 계절이 꾸준히 오고 간다. 번갈아서 와도 오는 건 여름이 아니니 당연히 겨울은 없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나는 아직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눈의 고장에 가지 못했다. 이 눈의 고장에 가고 싶다. 겨울이 없어도 눈은 내릴런지, 내려 쌓일런지…… 그런데 그곳은 어디였을까.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였을까. 히로시마, 나가사키, 아님 더 가까운? 먼 곳에서 먼지눈이 내리고 있었다. 흰 가림막을 씌워 하얗던 세계 나는 투명한 짐승이 침입하는 공포에 질려 창문 밖을 못 보고 떨고 있었지. 이 섬을 벗어나고 싶다. 피난길처럼 보이는 출근길 기웃거리며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쉴 새 없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쌓이는 새하얀 것들 이 섬은 내 피부를 숨기기에는 너무 좁다. 피난을 끝낼 수 있는 안식처는 있을까. 먼 곳에서 먼지눈이 점점 더 속도를 올리며 길을 바짝 조여오고 있다. * 시에 시 : 황인찬〈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 소설에 시 :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망상가들의 마을』외,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644 아버지 외 1편 / 권순자 file
편집자
1424 2018-04-30
아버지 저문 아버지의 등에 어둠이 내리네 닳고 닳은 시간들이 눈처럼 쌓이네 그리워라 그 호통소리 무거운 짐도 거뜬히 들어올리던 어깨는 세찬바람에 메말라갔네 양식을 위하여 두려움도 슬픔도 뚫어버리던 당찬 발길 쏟아지는 피로도 밤이면 꿈결에 사그라져 자욱한 새벽을 열어제쳤네 가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생의 거친 바람에 방패로 삼고 소나기에 우산으로 삼았네 한 생을 꿈꾸며 나날을 벼르고 깎아 닦아주신 길 내가 걸어가네 얼얼하게 닮아가네 은사시나무 어머니 그녀는 은사시나무를 닮았어요 비탈에서 스스로 단련시키고 봄빛에 부풀어오르는 꿈을 쟁이며 날마다 바람에 몸 씻는 나무를 닮았어요 지친 새가 쉬어가는 어깨 부서지기 쉬운 구름이 앉았다 가고 방랑자를 팔 벌려 반겨주는 은사시나무 외로워도 꿋꿋하게 운명의 시퍼런 칼바람이 위협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험난한 파도에도 두 팔 벌리고 담담히 견뎌내며 환하게 야위어가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은사시나무를 닮았어요 권순자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등이 있고, 『Mother's Dawn』(『검은 늪』의 영역시집)이 있음.  
643 봄, 수레국화 외1편/김인구 file
편집자
1416 2018-04-30
봄, 수레국화 연두빛 커튼을 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창 너머 잎, 잎들의 환호성이 생명의 경배를 배우는 봄날 너는 화단에 앉을 자리 잘못 찾아 앉아 울고 있는 연분홍빛 수레국화 깨지고 상처 받기 쉬운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톱니바퀴를 가진거야 햇살이 일정한 보폭을 들고 지나가는 네 곁에 나도 앉을 자리 잘못 찾아 앉아 울고 있는 또 다른 한 송이의 보랏빛 수레국화 나를 알 순 있지만 나를 버릴 순 없는 동병상련의 봄밤 쑥쑥 자라나는, 천 개의 사랑학 개론 사랑 밖에서 사랑이 한마디 했네 사랑은 참을성이 부족한 참치 캔 통조림 같은 표정으로 자지러지게 웃거나 비상구가 없는 폭파된 거울처럼 난폭하게 울거나 말이 없고 바람이 없는 연인들이 아는 척, 모르는 척, 기다림과 그리움을 꺼내먹고 물 한 모금 마시며 고양이 생애주기를 흉내 내는 저녁나절 금이 간 담벼락 위에서 사랑은 허리를 꺽고 고장 난 적막을 어깨에 두르며 야옹, 환하게 웃음 짓네 처음처럼 너무 낯선 인사는 입 안 가득 가두고 유일하게 망가진 고독을 끌고 천 개의 사랑 안으로 걸어 들어가네, 나는 사랑은 너무 위험한 우아함과 동침한 고단함 여전히 참을성은 잃어버린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빛없이 비추는 얇은 거울은 깨진 채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변함없이 절친한 반어법으로 맞아주네 사랑 밖에서 만난 숨이 커다란 구멍들은 금세 어두워지거나 깊어지거나 바퀴를 갖지. 전북 남원출생. 1991년 <시와 의식> 여름호에 <비, 여자> 외 2편을 발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신림동 연가> <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2014년 세종 우수도서 선정)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642 노숙자를 연대하다 외1편/임소형 file
편집자
1243 2018-04-30
노숙자를 연대하다 모란역 2번 출구 앞 인도를 점령한 무허가 가옥 어느 생의 행각일까 낡은 매트리스에는 세상과 단절된 유배 자의 고독이 흐른다 금싸라기 땅을 점령 제약 없이 경계 없이 새삼 부러울 것 없는 풍요의 행적에도 화해할 수 없는 빈곤한 희망 허무한 절망이 옆구리 터진 베옷을 입고 누워있다 어느 누군들 절망의 허파를 이식하고 싶었을까 마는 고독한 유배 자의 새우등에서 야윈 기억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가끔은 곰팡이 핀 절망을 씻고 밤하늘의 별을 세며 별빛에 누운 기록 하나쯤은 훔쳐내 보기도 했음 직한 남루한 홈리스니스* 기울어지는 나의 모습이었다가 너의 모습이었다가 무언의 공허를 유발하는 처연한 자화상에 시린 통증의 바람 몰아 친다 이 순간은 노을빛마저 섧다 늦더위가 남았다지만 이불을 끌어다 당기는 잠결의 반사적 행동 양식[行動樣式] 차디 찬 냉소의 시선을 쪼개어 온기를 포갠다 재활의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어 곧추세우고픈 모호한 연민이다 대나무는 세찬 비바람에도 탄성을 유지하려 속통을 비우고 죽순은 퍼붓는 장맛비에도 파란 순을 내민다 는데 곰팡이 핀 운명의 지팡이에 선뜻 길을 내어 주지만 않았던 들 한 뼘 높이도 안 되는 낮은 세상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가치 없는 무형의 존재로 전락하진 않았을 터 그의 이력이 담긴 내용물이 빵빵한 검정 비닐봉지 먹다 남긴 소주 반병 그리고 이미 바닥을 비운 빈 병들이 세상 속에 널브러져 두런두런 아찔할 정도로 소란하다 액자를 바꾸다 허울 좋은 하눌타리 포용과 관용의 유연한 허세는 이미 신앙이 되었는데 사각 틀에 갇힌 묵화 향 잔상은 애닳게도 빛 좋은 개살구 빛 좋은 개살구를 읊조린다 고립된 환각의 늪에 빠져 얼마나 오랜 날 공인된 부정 합격으로 의기양양 춤추었을까 낯 가리지 않은 포옹 편견 없는 연민,오지랖 불치병인 오만이었구나 마르지 않은 안구의 습기 이슬을 먹고 산 세월이 거무튀튀하게 박제되어 거실을 맴돈다 무른 습성으로 한발 두발 뒷걸음질 친 여리디여린 나약함의 잔해 예리한 칼끝으로 도려내야만 옳은 혜안이라 단죄한다면 식별 가능한 나의 통찰력은 이미 집을 비운 지 오래다 초인종을 눌러도 여전히 부재중으로 굳게 닫힌 문 새벽을 달리는 요란한 자명 종소리에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다 문득 낭떠러지 앞에 서 있듯 조바심 나는 순간을 본다 아직은 날개 꺾인 새가 아니길 염원하는 이 지독한 이기는 자위인가 너그러운 방생의 작태인가 자신을 위무하며 헛웃음 짓다가 , 헛웃음 웃다가 검은 고양이 기웃거리다 할퀴고 간 할인 행사로 전락한 액자에서 홰치는 소리 들려온다 재빨리 분주한 손놀림으로 빛바랜 사진을 교정한다 분첩을 두드리지 않아도 뽀잇뽀잇 사각 틀 안의 얼굴이 환하다 이윽고 수북한 깃털이 겨드랑이를 뚫고 홰를 치는 저 뜨거운 날갯짓 분명한 유체이탈이다. ◆임소형 (58년 경북 상주출생 서울 거주) 문학광장 시부문 신인 문학상 / 전북대 사범대 졸업 / 중등교사 역임 2018,2,25 시집 씨앗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공저  
641 내 앉은 자리 외1편/신순말 file
편집자
1303 2018-04-30
내 앉은 자리 여기가 꽃자리라고 자꾸자꾸 되뇌면, 꽃이 되나 꽃은 피나 무논 물결이 종일 배밀이를 하고 바람이 써레질을 마친 저녁 징검징검 거닐던 왜가리 날아가고 산이마에서 해가 제자리걸음 할 때 나무와 하늘이 옮겨오고 앞산이 걸어와 누워보는 참 희한하다, 저 얇은 물낯 이윽한 그 거울 세상 다 들어간다 신순말: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회.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단단한 슬픔]  
640 너를 위한 기도 외1편/이선정 file
편집자
1389 2018-04-30
너를 위한 기도 사랑을 사랑이라 호명하지 못할 때 숨겨둔 그리움이 눈물로 흘러 빗방울이 된다 가슴에 더는 담지 못해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 그제야 비를 뿌린다 사랑이 그리워도 소환하지 못할 때 눌렀던 외로움이 가슴에 불어쳐 뼈마디를 돌아다니는 칼바람이 된다 가슴을 후려치다, 더는 애처로워 상념의 밤을 남긴 채 돌고 돌아 깊은 산 어느 골짜기의 메아리로 윙윙거린다 비로, 바람으로, 나 견디는 저편 어디에서 너는 꽃으로 아름답고 너는 깔깔대는 춘풍(春風)으로 살거라 색깔론 사과는 빨간색, 오직 빨간색 초록 아오리 사과, 노란 딜리셔스는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은 색 허리를 반쯤 깨물린 아삭한 기억은 빨간색을 강요한다 사과를 보다가 시인, 너를 본다 너는 무슨색? 허세 작렬 짧은시 칼질의 달인 날렵 은색, 잔뜩 치장 산문시 주렁주렁 비로드 짙은 보라색, 주릅* 뚝뚝 생활시 나를 팔아 쌀을 사니 하얀 쌀색, 이도저도 아닌 시답잖은 시, 무색, 물색 다 합치니 검은색.. 아, 역시 시인의 길은 어둡구나 어제 구겨서 던져놓은 팔렛트에 오늘은 쓰다 만 보라색을 양껏 풀어 헤친다 흘낏 넘겨다 본 옆집 사과 냄새가 담벼락에 붉게도 향기롭다 *주릅 / 꾀죄죄 하다 강원도 사투리 약력 문학광장 신인상 수상 (현) 황금찬 시맥회 정회원 (현) 격월간 문학광장 강원지부장 황금찬 시맥회 문학광장 하계백일장 대상 2017' 국제깃발전 초대작가 2017'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공모전 당선 2017' 대한민국 공예대전 시화부문 특별상  
639 하얀 욕망/고창근 file
편집자
1273 2018-04-01
하얀 욕망 그가 처음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막 잠을 청할 때였다. 김장을 담근다고 며칠 동안 부산을 떨던 아내는 이미 얕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을 때가 막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할 때였다. 직장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고 가정에서도 초등학생인 두 딸은 무탈하게 잘 크고 있었다. 아내 또한 자신과 아이들의 뒷바라지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에 하루를 바쁘게 보낸 후의 잠자리는 평온 그 자체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잠이 들지 않고 자꾸 뒤척였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머리속은 엉킨 실타래가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는 아마도 퇴근하다 본 성폭행현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좀 일찍 집을 나가 경찰서에 가서 퇴근 무렵 본 성폭행범에 대해 얘기할 작정이었다. 파란색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성폭행범의 뒷모습이 눈에 또렷했다. 그는 그 상황을 잊어버리고 잠을 청하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아내의 얼굴이 정면으로 향했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콧김이 얼굴을 간지렵혔다. 그는 이불속에서 손을 꺼내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아내가 깰까 싶어 도로 집어넣었다. 아내가 무척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니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이해했다. 며칠 동안 김장한다고 본가에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장은 본가에서 누나 집이랑 남동생 집까지 네 집의 김장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도 많았다. 끝나고 나면 아내는 꼭 몸살을 앓았고 그는 매번 아내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와인에 좋아하는 것을 사 주었다. 아내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몸살이 확 달아난다고 환하게 웃곤 했다. 또한 어머니가 고생했다고 준 돈으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그나 딸들의 옷을 샀다. 그러지 말고 당신 옷 사 입으라고 지청구를 넣으면 입고 싶은 옷이 없다며 해맑게 웃곤 했다. 이틀 후에 그는 아내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야겠다고 다시 눈을 감자 또다시 성폭행 상황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가 그 성폭행 현장을 본 것은 부장이 주재한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부서원들을 깊은 이해심으로 잘 이끌어 신뢰를 받는 부장이었다. 그 또한 차장으로서 부장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었다. 한우고기에 소맥을 마셨는데 부서원 모두 좋은 기분으로 양껏 먹었다. 누군가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걸 그는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는 노래방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오기 위해선 공원을 거쳐야 했는데 그는 아파트로 들어오기 전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느긋하게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가격이 올라간 후 언제 끊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 끊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났는데 또다시 강한 흡연 욕구가 끓어올랐고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 점은 회식 자리에서도 있었다. 한창 주위 부서원들과 한우고기에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들어올리는 느낌이랄까. 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들 옆 사람과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그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담배를 반 쯤 피웠을까. 갑자기 공원 구석에 자리한 소나무 숲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 싶으면서 그는 그냥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고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왔다. 순간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번쩍 들어올리는 느낌도 회식자리에서와 같았다. 그는 요즘 무리해서 몸이 허약한 탓이라며 아내에게 말해 보약이라도 한 질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뱃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또다시 소나무 숲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그머니 소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소나무 숲에 가까이 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여자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악다구니를 쓰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에 그는 머리카락이 곧추 서는 것 같았다. 성폭행.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었다. 순간 무서웠다. 그냥 되돌아가려다 다시 소리가 나는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파란색 파카를 입은 사내의 탱탱한 엉덩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릎쯤에 청바지가 걸려 있었다. 사내의 밑에는 치마가 올라가고 허연 허벅지가 드러난 여자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그는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몸이 눈에 보였다. 뒤돌아가서 사내를 후려치고 여자를 구해! 가슴속에서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이 사는 아파트 706동 앞에 있었다. 이런. 그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못난 놈이라니. 그는 스스로 자책하며 지금이라도 달려가 여자를 구하고 사내를 흠뻑 두들겨패고 경찰서로 데리고 가야 하나. 아님 경찰서부터 신고해야 하나. 그는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에 아파트 앞 화단에 주저 앉았다. 그는 평소에도 성매매하거나 바람 피우는 남자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어릴 때부터 장학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유난히 도덕과 윤리의식이 강했다. 초등학교 때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또한 문방구에서 슬쩍 물건을 훔치는 아이들도 용서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고 평생 그렇게 살리라 마음 먹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화단에 앉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거푸 두 대를 피운 후에야 그는 명확한 생각이 들었다. 가서 남자를 두들겨패고 여자를 구하자. 그는 굳게 결심을 하고 담배불을 꺼서 휴지통에 넣고 일어섰다. 한번 마음먹으니 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어? 그는 소나무 숲에 다다라 소리가 났던 곳으로 달려갔을 때 성폭행범 사내와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도망쳤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뭇잎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풀잎이 옆으로 쓰러져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피곤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지금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서까지 가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두세 시간은 걸린다. 12시가 넘었는데. 그는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을 넣고 아파트로 걷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 그는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아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아내 또한 겁에 질릴 것이고 신고하라고 할 것이었다. 내일 아침 좀 일찍 나가서 신고하고 회사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 아내에게 말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밤새 비몽사몽으로 지냈는데 꿈에서 어떤 사내와 싸웠다. 어딘지 왜 싸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모르는 사내였고 무슨 일인지 그는 사내에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엔 주먹질을 하며 서로 엉겨붙여 뒹굴었는데 나중엔 그가 일방적으로 사내를 때렸다. 왼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수없이 강타했다. 사내는 고스란히 맞고만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내였기에 그는 아침에 깨어나서는 어이가 없어했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와 싸운 적이 없었고 하물며 심하게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근데 주먹질까지. 그것도 일방적으로 때리다니. 그는 식은 땀을 흘러 축축한 몸으로 침대위에서 뒤척였다. 몸에서 진이 모두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일어날 힘조차 없어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밤새 누군가 싸우다니. 그것도 일방적으로 때리는 꿈이라니. 하지만 또 하나 게름칙한 게 있었다. 사내는 파란색 파카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에 익은 옷이라 생각했는데 그 옷은 퇴근하다 본 성폭행범의 옷과 비슷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평소에 산에 갈 때나 산책할 때 잘 입는 옷과 비슷했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머. 아직 안 일어나고 뭐해요?” 아내는 몇 번이나 밖에서 불렀다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마, 땀 좀 봐. 당신 몸이 안 좋아요?” 그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아내는 놀라서 그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아냐. 악몽을 꾸어서.” 그는 얼버무렸고 아내는 또다시 어디 몸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오늘 회사 가지 말고 쉬는 게 어떄요?” 아내의 말에 그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결근이나 병가를 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개근상을 놓치지 않았다. “가야지.” 그는 끙,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잠깐 현기증이 일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온 거에요?” 아내는 그가 씻으러 방을 나가자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글쎄. 좀 늦은 거 같은데.” 그는 만사가 귀찮아 대충 얼버무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혹 무슨 소식 못 들었어요? 어젯밤에 아파트 공원 소나무숲에서 누가 성폭행을 당했다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문이 닫히기 전에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그는 또다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런. 그는 바늘로 쿡쿡 쑤셔대는 듯한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옷과 흡사한 파란색 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사내의 엉덩이 깐 뒷모습이 휙, 눈 앞을 지나갔다. 그는 분노와 현기증이 일어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아침을 먹지 못하고 출근을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도 몸이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았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잠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그때 그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회사 정문에는 경찰 둘이 한 사내를 수갑 채워 양쪽에서 팔을 잡고 연행하고 있었는데 수갑 찬 사내를 보고는 주저앉을 뻔했다.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떠도 분명 수갑을 찬 사내는 자기 자신이었다. 감색 양복에 푸른색 와이셔츠. 불그스름한 넥타이. 모든 게 똑같았다. 이럴수가.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경찰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부장을 비롯한 부서원들과 시민들이 둘러싸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뛰어가려는데 수갑 찬 그가 차에 오르기 전 잠깐 그를 돌아보았고 그는 순간 얼른 외면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회사로 가지 못하고 경찰차가 떠난 뒤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겨우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어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혀 스마트폰을 겨우 집어들었다. 하지만 전화를 하려고 스마트폰을 보았을 때 액정화면은 마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가느다란 선들이 뻗어 있었다. 그는 액정화면이 깨진 것에는 개의치 않고 제발 전화를 할 수 있도록 고장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다행히 액정화면에 불은 들어왔으나 홈화면으로 있던 아내와 딸의 사진이 일그러지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개의치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선 통화목록을 누르고 부서원 이름을 찾았다. 한참 밑에 박대리의 이름이 보였다. 그는 얼른 오른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또다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몇 번이나 시도한 후에 겨우 박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차장님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은 박대리는 다짜고자 물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무, 무슨 이, 일이냐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경찰서 아닙니까?” “아, 아니 그, 그게. 그, 그러니까.”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더듬거렸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우차장이야? 바꿔봐, 하는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박대리 주위로 직원들이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우차장,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설마 자네가 그런 건 아니겠지?” 부장은 반신반의하는 말투로 물었다. “도, 도대체 무, 무슨 말인지 모, 모르겠…….” 그는 말하다 또다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뒹군 스마트폰에서 이봐, 우차장, 우차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힘겹게 허리를 굽혀 스마트폰을 들어 귀로 가져갔다. “그, 그러니까. 무,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하냐. 그러니까 자네가 어제 성폭행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확실하지?” 부장은 추궁하는 심문관처럼 물었다. “예? 성, 성폭행……이요?” 그는 어이가 없었다. 성폭행이라니. 내가? 그는 크게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그렇지? 맞지? 자네가 그럴리 있나? 분명 오해일 거야.” 부장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다. “절,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맞아. 자네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자네만큼 법을 잘 지키고 반듯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여튼 빨리 끝내고 회사로 와.” 부장의 말에 그러면 그렇지, 차장님이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직원들의 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아, 알았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다행히 부장과 부서원들이 자신을 믿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며 앞에 있는 상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좁은 골목안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다급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갔다. 연거푸 연기를 내뿜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곤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담배 또한 얼마가지 않아 금방 필터까지 타 들어갔다. 목이 칼칼했다. 솜이 목구멍에 꽉 찬 것 같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담배를 꺼내던 그는 순간 아내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어떤 불기둥이 머리 꼭대기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골목으로 들어서던 행인이 멈칫 하더니 도로 돌아갔다. “당신이야?” 아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연락이 갔구나.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아내가 다급히 말했다. “당신, 맞지? 어찌 된 일이야? 아까처럼 끊지 말고 자세히 말해봐. 당신이…… 설마 아니지? 응? 말 좀 해봐.” 아내는 애원했다. “여보. 내 말 잘 들어. 이거 뭔가 음모에 빠진 거 같아.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그는 아내에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모? 무슨 음모라는 거야? 아침에 당신이 출근하고 곧장 경찰이 닥쳤어. 당신 서재에 있던 컴퓨터랑 서랍에 든 노트 같은 것도 다 가져갔어. 어젯밤에 일어난 성폭행 용의자라나.”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뭐라고? 컴퓨터를?” 그는 기겁을 했다. 컴퓨터엔 여성의 누드 사진이 많았다. 취미로 사진을 찍기에 수시로 누드사진을 수집해 저장해 놓았는데 그걸 경찰이 가져갔다면 이상한 쪽으로 사태가 흘러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당신이 한 거 아니지? 응?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 얼마나 자상하고…… 나한테나 딸한테도. 근데 경찰이 당신이 그랬다고 물증이 나왔다고 그러는데 난 도저히 못 믿겠어. 참, 당신 자주 입던 옷 있지 파란색 점퍼랑 청바지도 가져갔어. 시시티비에 찍힌 거랑 같다면서.” “음.” 그는 할 말을 잊고 신음소리를 냈다. “당신 경찰서지? 내 곧 갈게.” 아내는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아냐. 오지 마. 경찰서 아냐.” “아니라고? 다 봤는데. 텔레비에도 나왔어. 경찰서에 있는 당신…….” “난 아니라고. 회사 앞이야. 왜 나를 못 믿어.”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믿어. 당신 믿지.” “그래. 하여튼 뭔가 잘못 됐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당신 아까 전화해서는 경찰서라고 했잖아. 그러더니 바로 끊었는데.” “내가 전화했었다고? 아냐. 잘못 걸려왔겠지. 난 당신에게 전화한 적 없어.”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누굴까, 아내에게 전화한 놈은. 순간 어젯밤 엉덩이를 까놓고 성폭행을 하던 놈이 떠올랐다. 맞아, 그 놈이야. 그 놈이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고 집으로 전화한 거야, 내 목소리로 변장해서. 그는 연거푸 담배를 빨았다. 또다시 금방 필터만 남아 다시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분명히 전화했었어. 경찰서라고. 놀라지 마라고.” “아니라니까. 참, 그리고 당신에게 미처 말 안 한 게 있는데……. 어젯밤 사실 성폭행하는 거 봤어, 퇴근하다. 그래서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오늘 아침에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봤다고?” 아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응.” “아침에 그런 말 안 했잖아. 내가 어젯밤 성폭행 사건 일어났다고 얘기해도. 당신 설마…… .” “뭐야. 당신 엉뚱한 거 상상하는 거 아냐?”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다 고함을 질러 사래가 걸려 켁켁거렸다. “당신 믿지. 하여튼 지금 경찰서로 갈게. 참, 변호사는 선임했어? 오빠한테 물으니까 변호사부터 선임하라는데.” “뭐라고? 형님한테도 전화했다고?” 그는 어이가 없었다. 아내마저 나를 성폭행범으로 믿다니. “아냐. 먼저 전화왔었어. 텔레비 보고.” 또다시 아내는 울먹였다. “알았어. 하여튼 난 범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경찰서도 오지마. 나 회사 앞인데 좀 알아볼게 있어.” 그는 전화를 끊었다. 자꾸 통화를 할수록 자신이 범인 된 기분이었다. 벌써 텔레비전에 나왔다니. 그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맙소사. 그는 스마트폰을 내팽겨치려다 간신히 참고 다시 뉴스를 보았다. 어젯밤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람의 증언이라며 착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그럴 줄 몰랐다는 기사까지 있었다. 환장할 일이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담벼락에 기대었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회사원들이 모두 출근을 했는지 거리는 한산했다. 길이 낯설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길을 걸었고 출근을 했는데 한산한 거리를 걸으니 다른 장소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회사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갈 수도 없다. 경찰서로 가기엔 두렵다. 그는 가방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무작정 걸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내가 성폭행을 했단 말인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하물며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준법정신이 강했다. 회사에서 회식 후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른다거나 2차로 성매매 알선을 해 주는 술집으로 가는 걸 극도로 경멸했다. 지금껏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추파를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환장할 일이었다. 그는 길을 걷다 원조 해장국이란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안 먹고 나온 터라 우선 뜨끈한 국물이라도 먹으면 정신이 돌아올 것 같았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은 혼자 떠들고 있었고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일단 사람들이 없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해장국을 주문했다. “해장국은 아침에만 팔아요.” 얼굴이 수더분하게 생긴 여자가 말했다. 그는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며 그럼 설렁탕이라도 달라고 했다. 여자는 주방에다 설렁탕 하나요, 외치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보리차를 그 앞에 놓았다. 그는 보리차를 조금씩 마셨다. 뜨거운 것을 마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설렁탕이 나왔다. 그는 공기밥을 전부 국에 넣고 말았다. 연거푸 떠먹으니 속에서 열이 나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드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여자의 말에 그는 아랑곳않고 계속 입에 떠넣었다. 씹는다기보다는 그냥 입에 퍼 넣고 삼키는 형상이었다. 어느새 국그릇의 바닥이 보였다. 이마의 땀방울 하나가 설렁탕 그릇에 툭, 떨어졌다. 그제야 그는 휴지를 꺼내 이마를 닦았다.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죽다가 살아난 느낌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깨끗이 비운 후에야 입 주위를 물수건으로 닦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간절했지만 조금 있다 나가서 피우기로 했다. 우선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타왔다. 휴식 시간에 부서원들과 담배를 피우며 마시던 커피믹스와 같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마치 몇 개월만에 마시는 것 같았다. 이제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처음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저런 놈은 단박에 쥑이야 한다카께.” 여자의 쇠된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는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여자가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다. “저 보소. 저게 인간인가. 인간이 어째 저런 일을.” 여자는 혀를 쯧쯧, 찼다. 그는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고개를 숙인 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 밑에는 성폭행범 태연히 출근하다 회사 앞에서 잡히다, 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프래쉬가 터지고 기자들의 여러 질문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란 말만 연거푸 했다. “시상이 어째 돌아가는지. 저런 놈은 살려주면 안 된다카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쥑이야 된다카이.” 여자는 그 앞에 있는 식탁을 치울 생각은 않고 아예 의자에 앉았다. 전 그럴 사람으로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동료들에게도 잘 대해줬고 여직원들에게도 전혀 집쩍거린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퍼떡 고개를 들었다. 박대리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구두로 바닥에 떨어진 물에 원을 빙글빙글 그렸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어젯밤 늦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지만 그러리라고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번엔 부장이 나와 카메라 프래쉬를 받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그렇소? 잉?” “예?” 여자의 말에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여자 쪽으로 돌리려다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다. “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렇게 착하게 했다면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을 했단 말이요. 다 쇼야 쇼여, 착하다는 건. 안 그렇소?” 여자 또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예. 그럼요.” 그는 혹시 여자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하며 말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께. 늑대여 늑대. 속에는 다 늑대가 들어있다카이.” 여자는 그의 말에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는 일어섰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더 급선무였다. “여기 얼마입니까?” 그가 여러 번 말했을 때에야 여자는 느릿하게 카운터로 왔다. 팔천 원이요. 여자는 그를 보며 갸웃거렸다. 그는 재빨리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카운터에 놓고 몸을 돌렸다. “여기 잔돈…….” 여자의 목소리가 그가 닫은 문에 걸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어디로 가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걸으며 중얼거렸다. 우선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푹 자고나면 모든 게 제대로 돌아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 분노가 일었다. 아니다. 그 놈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도대체 왜 내 행색을 하며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그것부터 밝혀야 한다. 그는 갑자기 뒤로 돌아 허겁지겁 경찰서로 향했다. 가서 내가 아니라고. 저 놈은 내가 아니라고 밝혀야 한다. 그는 숨을 헉헉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아.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쪼그리고 앉아 물을 끼얹는 여자의 모습.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니. 그는 수취감에 몸을 떨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해질 무렵 여느 때와 같이 동네 아이들과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길에 접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 집은 새로 이사온 젊은 부부가 사는데 길에 면한 건물은 대문과 화장실과 수도가 있는 건물이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이냐는 듯 건물과 아이를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득의양양하게 아이들 곁으로 왔다. “시방 저 안으로 여자가 들어갔는데…… 봤대이.” 아이의 목소리 낮춘 은밀한 말에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말뜻을 꿰지 못하고 아이의 표정만 살폈다. 모두들 여자가 화장실에 간 것으로 여겼다. “시방 목간한다니께, 목간.” 목간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숨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 일제히 건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직접봤다니께.” 아이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고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따라와. 아이는 턱짓을 했고 아이들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따라갔다. 흙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벽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고 아이는 눈짓을 했다. 머뭇거리던 아이들 중에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아이가 주삣거리다 벽으로 다가가 눈을 가까이 댔다. 아이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머리통이 큰 아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하, 하, 하며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뗐다. 처음 본 아이의 눈짓에 다른 아이가 눈을 가져갔고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눈을 뗐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고 그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처음 본 아이가 인상을 썼다. 공범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뒤탈이 없으니까. 그는 호기심반 주눅반으로 구멍에 눈을 가까이 댔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숨이 가빠왔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눈을 뗐다. 처음 본 아이가 다시 한 번 더 구멍에 대고 안을 보더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눈짓했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각자 저녁 먹으러 갔다. 가면서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여자들도 거기에 터러기가 있네. 겨드랑이에도 있고. 다른 아이들은 못 들은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심하게 몸살을 앓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죄책감이었다. 무언가 큰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 상황을 떠올리면 괜히 고추가 간지럽고 오줌이 마려웠다. 엄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한동안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서만 지냈다. 사춘기가 되어서도 여학생들에게 무덤덤했던 게 아마도 그때의 죄책감 떄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덕분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에 갔다. 아직도 그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또다시 놀랬다. 잊어버렸다고 여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일어난 것처럼 생생했고 가슴 역시 두근거렸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정문에 서 있던 의경이 막아섰다. 그는 움찔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의경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수사과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의경은 오른쪽으로 쭉 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라고 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휴, 한숨을 내쉬었다.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내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사과 팻말이 쓰인 사무실 앞에 섰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렬로 있는 형사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사과란 곳에 온 그는 긴장하며 성폭행범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잘 눈에 띄지 않아 한 발을 안 쪽으로 집어넣고 살피는데 순간 그는 몸을 움찔했다. 안 쪽, 창문이 있고 그 옆 시계가 달려 있는 벽 쪽에서 그는 수갑을 찬 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형사는 다그치는 모습이었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고개만 주욱거렸다. 도대체 어떤 놈인데……. 그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고함치는 형사들의 목소리에 그는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직원들과 술을 마시고 퇴근하다 그랬다고 했는데…….” 형사의 목소리가 겨우 들리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문 밖을 보는 척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연신 주욱거렸다. “그 아파트 공원에서 3년 전에도 비슷한 성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당신이 그랬죠? 순순히 부는 게 좋습니다. 피해자한테서 나온 디엔에이 받아놓은 게 있어 금방 탄로납니다.” 형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때도 회식 끝나고 집에 오다…….” 그는 말을 멈추었고 형사가 컴퓨터를 치다가 멈추곤 추궁했다. “집에 오다?” “집에 오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여자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그만…… 아이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밤 늦은 시간에 여자를 보니 갑자기 욕정이 생겨 그랬단 말이지요?” 형사는 컴퓨터 자판기에 손을 가져갔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치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조사를 받던 그가 그를 쳐다보았다. 아. 분명 자신이었다. 옷도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는 사람이요?” “아닙니다.” 지나가던 수사관이 묻자 그는 황망히 얼버무렸다. 얼른 사무실을 나왔다. 더 이상 그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욕하는 여자를 훔쳐본 후 심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며칠을 앓았는데 그 뒤로 가끔 꿈을 꾸었다. 꿈에 그가 아무도 몰래 그 건물로 가는 것이었다. 가서 목욕하는 여자를 볼 때도 있고 목욕을 하지 않아 못 볼 때도 있었다. 몇 살 때까지 꾸었는지 모르지만 가끔 어른이 된 그는 그게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수갑 찬 그가 자신의 목덜미라도 잡을까 그는 빠른 걸음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외 2권, 장편소설『갈대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외 3권, 장편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 서양화 개인전 3회